3년 전에 대기업에서 퇴직하고 서울에 거주 중인 손병수(58세)씨가 재무상담을 의뢰해왔다. 손병수씨가 재무상담을 통해 도움 받고자 하는 내용은 매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현금흐름 확보 방안이다.
1. 현재 상황
손병수씨의 가족으로는 전업주부인 배우자(56세)와 출가한 딸(33세)과 작년에 취업을 하고 회사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는 아들(29세)이 있다. 퇴직 후 2년 동안 손병수씨는 재직 당시 거래처였던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며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하지만 1년 전 두 번째 퇴직을 한 이후 지금까지는 별다른 수입이 없다. 첫 번째 퇴직으로 인해 발생했던 퇴직금은 일시금으로 수령해 딸 결혼자금과 아들 대학등록금으로 대부분 썼기 때문에 퇴직연금은 없는 상태다. 매월 200만원 전후로 소요되는 생활비는 1년 전부터는 실업급여와 가지고 있던 현금으로 충당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향후 아들 결혼자금으로 1억원 정도의 지원을 예상하고 있다.
2. 재무진단
3. 제안
손병수씨가 의뢰한 매월 200만원 전후의 생활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5층 연금체계를 활용해야 한다. 5층 연금체계는 다음과 같다.
국민연금 1958년생인 손병수씨의 완전노령연금 수급가능연령은 4년 뒤인 62세부터다. 연금액은 현재 가치로 매월 110만원 정도 예상된다. 손병수씨는 조기노령연금수급이 가능한 상태이지만 여유자금이 있기 때문에 완전노령연금에 비해 12%까지 연금수령액이 삭감되는 조기노령연금을 미리 받은 받을 필요는 없다.
퇴직연금 손병수씨는 퇴직연금이 없다.
개인연금 현재 가입 중인 개인연금도 없다. 정기예금 중 1억원을 배우자 명의로 하여 일시납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손병수씨의 부인은 본인 명의의 국민연금이 없다. 남편인 손병수씨가 사망한 후에는 유족연금 명목으로 손병수씨 명의로 받던 노령연금액의 60%를 수령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의료비가 생활비가 될 정도로 의료비 지출이 많아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약 12년 정도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손범수씨가 부인을 피보험자로 한 연금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일시납연금보험을 가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입 즉시 연금을 실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금지급 시기를 충분히 여유 있게 설정해두고 그 이전에 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갈 수 있다. 현재 56세 여성이 1억원의 연금보험에 가입해 10년 뒤인 66세부터 연금을 개시한다면 매월 60만원 정도의 연금수령을 기대할 수 있다. 단 연금이 개시된 후 피보험자가 사망하게 되면 최초 가입금액에서 사망할 때까지 지급한 연금총액을 차감한 금액만 상속인에게 지급하는 조건이다.
주택연금 주택연금은 주택 소유자나 그 배우자가 만 60세 이상일 때 신청할 수 있다. 현재 손병수씨는 만 58세이기 때문에 주택연금에 가입하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2017년 기준으로 7억원의 주택을 종신연금 수령조건으로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60세 기준으로 매월 146만원 정도의 금액이 지급된다.
손병수씨 부부는 주택연금 가입이 가능한 2년 후까지 현재 거주 주택을 보증금 1억원에 매월 120만원의 월세를 받는 조건으로 임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세 보증금 1억원과 현금 1억원을 합해 집의 규모를 줄여 서울 외곽 지역에 2년간 전세를 임차해서 살기로 했다.
직업 중장년층이 퇴직 후에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일자리에 대한 눈높이다. 눈높이를 낮춰야 할 수 있는 일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명함이 나를 설명하던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손병수씨는 우선 자신의 경력을 살려 고용노동부에서 추진하는 사회공헌 일자리 사업에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서 매월 30만원 정도의 소득을 기대한다. 동시에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요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남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4. 실행
퇴직한 지 3년이 지난 손병수씨는 최근에 와서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손병수씨는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는 정부지원사업 중심의 일자리와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매월 100만원의 근로소득을 목표로 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민연금이 나오는 시기에서 부인 명의의 개인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는 근로시간을 줄여 매월 50만원 정도의 수입을 목표로 일을 하기로 계획을 짰다.
은퇴 이후 인생 2막을 삶의 황금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와 황금기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충분히 쓸 만큼 모아놓고 쟁여놓은’ 돈일까? 그보다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은 인생을 재설계할 수 있는 은퇴 멘탈 갑, 즉 새로운 은퇴 마인드다. 과거 경력, 직장, 직책의 아우라를 들어내고, 자기의 진짜 정체성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칠 수 있다.
100세 시대를 앞둔 요즘, 은퇴 이후의 시기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인생의 3분의 1을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그래서 우리는 은퇴를 충격이 아닌 감격으로 맞고 싶다. 끌끌 혀를 차며 밸이 배배 꼬인 채 훈수나 푼수를 떠는 뒷방 노인이 아닌 적극 참여하는 현장의 선수로 사는 롤모델 인생 선배를 만나고 싶다.
퇴직 5년 차가 아니라 진짜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취업 5년 차’라는 박시호(63)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을 만났다. 인디언 핑크색 니트 상의에 옅은 브라운색 패딩 점퍼, 흰 바지 그리고 빨간색 운동화에 무스로 바짝 세운 밤톨머리 헤어스타일을 하고 나타난 그는 과거 CEO의 물이 쏙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선 인터뷰 약속 장소인 ‘신촌’의 청춘물결에서 한 치도 뒤처지지 않는 것을 넘어 자유인의 바람마저 느껴졌다. 2003년부터 행복과 관련한 앤솔러지를 사진에 담아 매일 아침 이메일로 배달하던 일은 이제 취미와 봉사에서 ‘주업’으로 승격됐다. 그 외 강연과 원고 쓰기, 사진 찍기 등등 요즘엔 여행기획가로서 행복을 오프(0ff)에서 실현하는 일에까지 관심사를 확장하고 있다. 그의 하루 24시간은 풍요롭다.
은퇴 괴담은 현실적으로 ‘밥’ 이야기로 시작하곤 합니다.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퇴직 가장의 현실을 표현한 단어 중에 ‘삼식이(집에서 삼시세끼를 먹는 가장)’란 호칭이 있는데요. 많은 퇴직 가장들이 “이러려고 지금까지 뼛골 빠지게 일했나”라며 피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감정계좌를 깡통계좌로 만들어놓고 만기일 됐다고 복리로 쳐서 가장 높게 대우해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집밥만 우기지 말고 칼국수집이든 냉면집이든 같이 맛집 순례라도 해보세요. 찜질방 같이 가서 놀자고 해보세요. 절로 삼식님이 될 겁니다(웃음). 가장이 건강해야 집안을 끌고 간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부인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집안이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편 혼자 행복하고 즐거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퇴직 이후 집에서 대우받는 것은 남편 하기 나름이지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부부입니다.”
그는 “체력관리한다며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매일 등산 가던 친구가 있었다”며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운 후 그 친구가 “부인이 건강할 때 산에 같이 갈걸, 왜 나 혼자 갔을까” 하며 땅을 치고 후회하더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행복은 거창하고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데, 평범한 일상에, 함께 나누는 데 있다”고 말하는 그는 여러 일정 중에서 부인과 맛집 순례 후 하는 공원산책이 그날의 하이라이트라고 덧붙였다. 신혼 때처럼 전기가 찌르르 통하지는 않지만 40년 이상 살아온 인생 동지와 함께하는 ‘침묵의 공유’야말로 가장 든든한 의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현직에 계실 때보다 더 활기차고 멋져 보이십니다. 부부 금실에서 비롯된 에너지 말고 비결이 있습니까.
“현직에 있을 때보다 몸무게를 10kg 정도 뺐어요. 회식이나 약속을 줄이고 운동을 하니 절로 빠지더군요. 제가 BMW족입니다. 버스(Bus)-지하철(Metro)-워킹(Walking),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많이 걷습니다. AMP 동기 부부동반 모임에 갔는데 집사람이 아무 정보 없이도 동기들 중 현직, 퇴직파를 족집게처럼 맞히더군요. 은퇴하면 현직 때의 아우라가 사라져 갈기털 빠진 사자처럼 되기 쉽습니다. 퇴직할수록 용모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퇴직하니 공식적 일 없다고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거나 등산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산뜻하게,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어야 해요. 뚝배기보다 장맛이 아니라 겉볼안이 더 맞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이미지 판단이 6초 만에 끝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전엔 아우라가 우러났다면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고나 할까요. 퇴직할수록 의관이 생명이란 게 제 지론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먼저 남이 알아주도록 갖춰 입을 필요가 있습니다.”
은퇴 준비에도 선행학습이 필요할까요?
“일관된 인생 계획을 세워서 현직 시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은퇴의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즐기기 위해서라도. 은퇴 이후의 공부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쫓기는 공부가 아닙니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 뭐든 좋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뛰어오던 트랙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등산도 높은 산을 오르려면 동네 산부터 오르며 준비하지 않습니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은퇴 후 뭘 하면 좋을까 늘 염두에 두고 그 일을 조금씩 준비해둬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준을 향해 공부하십시오. ‘지금 이 나이에…’ 또는 ‘시간이 없다’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싫어해서 하는 핑계일 뿐입니다. 취미든 기술이든 뭐든 배움은 운명까지도 바꿉니다. 공부를 하고 도전하다 보면 전문가 반열에 오르고, 그것이 새로운 세상의 지평을 열게 해줍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퇴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대답한 은퇴자가 41%나 되고, 대부분 단조롭고 지겨운 일상과 목적 상실 및 지적 자극의 결여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은퇴에서 재정 설계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시간 설계, 즉 은퇴 후 동기 설계임을 보여주는 통계다.
행복이란 것이 요즘에야 흔한 담론입니다만. 행복편지를 시작한 2003년에는 요즘처럼 유행하는 화두가 아니었을 듯한데요.
“저도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치도 해보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어보고 싶었지요. 그런데 특별조사부장을 하며 정치인, 재벌 총수들의 영고성쇠한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고충 건물에서 피고인으로 수사를 받아야 하는 기업 총수를 보며 권력, 금력의 무상함을 보았습니다. 또 부도가 나 자살을 한 금융인,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표변하는 인심의 허망함을 한꺼번에 압축해봤어요. 권력도 금력도 아닌 세상에서 진정으로 변치 않고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지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저의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그림그리기를 시작했지요. 그러다 점차 재능의 한계를 느껴 사진으로 바꾸게 된 것이고요.”
그는 사진을 공부하면서 행복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쳇바퀴 같은 삶을 바쁘게 살던 그가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을 애써 찾으며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번 주엔 이 꽃을 이런저런 각도에서 찍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단다. 또 사진을 찍으면서부터는 ‘집에 꿀단지를 묻어놓은 것처럼’ 퇴근을 기다렸고, 주말 새벽마다 강남고속터미널에 가서 꽃을 사는 행복한 마음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단다. 지인들에게 꽃 사진 선물을 하고, 그들이 감사인사를 전해오고, 급기야 행복편지까지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인 700명 정도를 엄선해 보내는 행복편지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작지만 강한’ 행복 공유의 플랫폼이 됐다.
직장 후배들에겐 멘토로 여전히 환영받는 ‘퇴직 상사’라는 말씀 들었습니다. 그 비결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퇴직하니 알던 사람들 중 절반은 모른 척하며 떨어져 나간다고 ‘동선하로(冬扇夏爐, 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라는 뜻으로 철에 맞지 않는 물건을 이르는 말)’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시던데요.
“하하. 저는 연락 안 해도, 거절당해도 고까워하지 않습니다. 또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고요. 그러니 오히려 환영받네요. 잘해주면 고맙지만, 못 해주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고까운 마음이 전혀 안 생깁니다. 상대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찾더라고요. 부하직원들이 초대하면 병권을 맡깁니다. 예컨대 동석할 사람을 상대에게 정하라고 선택권을 주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정해 만나자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또 그 밥에 그 나물인 예전 사람들만 만나면 재미없는데 후배들이 새로운 사람 소개해주니 저도 좋지요. 폐쇄성을 나부터 없애야 합니다. 자기를 열고 세상에 맞추면 세상살이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낮추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또 상대가 누구든 불편하지 않도록 마음을 더 내어 배려해주는 것이 존중받는 비결입니다.”
박 이사장께서는 퇴직 후 제일 먼저 할 일로 명함 만들기부터 권하신다면서요.
“은퇴한 사람들이 모임에 나가면 제일 먼저 당황하는 게 명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함이 없으면 몸을 꼬며 온갖 군말을 갖다 붙여요. ‘제가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서요’ 등등. 스스로도 초라하고 서로 당황하기 쉬워요. 명함을 만들려고 구차한 자리 부탁하기도 하거든요. 당당한 명함은 당당한 자기정체성과 통합니다. 이제 과거의 후광은 벗어던지고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명함을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하다못해 ○○를 연구하는 사람 ○○○라는 명함이면 어떻습니까. 말로 구구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자기정체성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한 줄짜리 문장을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초라해질 필요 없습니다. 명함 주고받는 게 부담스럽고 부끄러워지면 대외활동은 끝나는 겁니다. 그만큼 중요해요. 아날로그 구세대에겐 직책과 직장이 필수이지만 젊은 디지털 세대는 그보다는 업, 좋아하는 일,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진이면 사진, 서예이면 서예, ‘이것에 대해선 나한테 물어봐. 내가 설명해줄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전문 분야가 있다면 더 좋고요.”
박시호 이사장의 명함엔 사진가,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연락처(전화번호와 이메일)가 간결하게 들어가 있다.
퇴직 후 부딪히게 되는 어려운 점 중엔 경조비 부담도 빠지지 않더군요. 국민연금 100만원 이상을 받는 사람들의 가계부에서 경조비 비중이 16%나 됩니다. 의료비보다 높은 비중입니다.
“퇴직 상태에서 대소사가 한꺼번에 밀려들면 아무래도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은퇴한 사람들의 고민이 ‘경조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이지요. 체면과 얽히고설킨 과거의 인연 때문이지요. 저는 기분, 체면보다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과거의 주고받은 인연보다 1년간의 교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아이들 결혼 때의 방명록도 그 자리에서 없애버렸습니다. 1년 동안 만나지 않은 사람은 교류가 없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연락이 와도 경조사에 가지 않습니다. 정말 필요한 사람만 부르고, 성의만큼 성의를 표하자. 허례허식은 없애자는 게 제 주의랍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돈을 벌었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습니까? 동창회 단체 공지에 올랐다고, 안 하면 욕먹는다고 찜찜해하면서 자주 보지도 않는 사람의 경조사까지 챙겨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욕을 먹기도 해요. 그러나 욕을 먹더라도 자신의 기준을 지켜나가는 맷집과 용기도 은퇴 멘탈 갑의 마인드 중 하나입니다.”
박시호 이사장은 은퇴지능개발의 핵심 키워드로 배움을 꼽았다. 기술이든 지식이든 뭐든 배우고, 남의 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 그는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을 나눠 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며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여행이라고 했다. 앞으로 여행 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할 계획이라고. 지난 경험보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할 때 그는 더 설레면서 반짝였다.
은퇴 이후 새로운 삶의 설계와 도전도 마찬가지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신세계에 도전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두려움의 용을 처단하고…. 박시호 이사장이 말한 ‘배움’은 구태의연함을 처단하고,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용을 무찌르는 날카로운 무기가 될 것이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은퇴가 다가오는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제2의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새로운 나로 살 수 있다는 등 제2의 인생에 대한 말도 많다. 하지만 그 달콤쌉싸름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막상 도전하려고 하면 어렵다. 무슨 일이든 첫 시작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베테랑 보험설계사가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자신감 하나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황보환(黃寶煥·52) 메트라이프 보험설계사. 그는 얼마 전 트로트 가수 하진필이라는 이름으로 ‘난 당신 편이야’를 녹음했다. 보험설계사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경력을 가진 그가 트로트 가수라는 외도를 과감히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명 황보환. 메트라이프의 베테랑 보험설계사로서 자신만의 탄탄한 영역을 갖고 있는 그는 최근 하진필이라는 이름을 달고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스스로 멋을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과감한 선택을 위한 준비를 나름 충실히 하고 있다. ‘행사’를 뛸 준비를 신경 써서 갖출 정도로 말이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한 기념으로 교회에서 바자회를 한다고 해서 가죽 재킷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옷이 요새 패션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어요(웃음). 아는 사람들이 보더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걸 입냐고 타박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패션이 트로트 행사용으로는 어필할 수 있겠다 싶었죠.”
인연을 통해 이어진 트로트 가수로의 길
보험설계사가 갑자기 가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왜 하게 된 걸까?
“10여 년 전부터는 CEO 위주로 보험설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워낙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CEO 과정에서 일 년 정도 성악을 배우게 됐어요. 거기서 작곡가 최왕국 교수님을 알게 됐는데 그분이 제게 가곡을 하나 선물해주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면’이라는 노래였어요. 그 후 최 교수님이 이번에는 트로트 곡을 작곡했다고, 저에게 맞을 것 같다며 주시더군요. 그러니까 트로트 가수를 해야겠다고 특별히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니고 급작스럽게 이뤄진 거죠(웃음). 그런데 저도 이게 제2의 인생이 될 수 있겠구나 싶어 조금씩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하진필씨는 아직 트로트를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데뷔를 위해 트로트 보컬 트레이닝도 받았지만 아직 성악 톤을 완전히 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음악과 함께했던 인생
하씨의 도전이 마냥 뜬금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인생을 보면 음악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는 청소년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학력고사 세대인 그는 옥상에 올라가 자주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학업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싹 풀렸다고 한다.
“제가 84학번인데 대학가요제를 나가서 1차 예선은 붙었지만 2차 예선에서 떨어졌어요. 갑작스럽게 출전 일주일 전에 후배 여대생을 소개받고 듀엣을 하게 됐죠. 300여 팀에서 50팀 뽑는데 통과가 되더라구요. 사실 너무 쉽게 통과한 거예요. 연습도 많이 안 했고. 그때 선배님이 작사 작곡을 해주셨는데, 사회운동을 많이 하던 때라서 가사가 사회 풍자적이었죠. 결국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제게는 큰 추억이 됐습니다. 그때 대상을 유열씨가 탔어요. 이정석씨는 제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제가 299번, 이정석씨가 298번이었죠.”
그는 또 모교인 연세대학교 100주년을 기념해 연세글리클럽이 조직됐을 때 창단 멤버로도 활동했다. 봉사로 노래를 하고 합창단원으로 행사를 뛰는 등 노래와 함께한 그의 삶은 지금까지 쭉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보험설계사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계속 억대 연봉이었죠. 보험 업계에서 19년 일하면 굉장히 오래한 겁니다. 저는 외국계 보험사에서 일한 1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 외국계 보험사는 90년대 초반에 들어왔거든요.”
그는 한국타이어에서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큰 거래처인 현대자동차를 6년 담당하며 9년동안 다니고 그후 푸르덴셜에 입사하여 영업을 하다 부지점장 업무를 맡으면서 8년을 다녔다. 당연히 사람 관리가 쉬울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럴 바에는 다시 영업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메트라이프로 옮긴지 12년 째다. 메트라이프에서는 중소기업 CEO 위주로 보험설계 업무를 맡고 있다.
한 달 만에 첫 트로트를 녹음하다
“최왕국 교수님과 통화하다 보니까 저를 위한 트로트 곡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보자 해서 다음 날 만났어요. 제목이 뭐냐고 물으니 ‘난 당신 편이야’래요. 그 제목이 마음에 확 와 닿았어요. 누구라도 끝까지 자기편이 돼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길 바라잖아요. 악보를 받아 가사를 보니 가사 내용도 너무 좋은 거예요. 멜로디도 너무 쉽고.”
확신이 들었다. 확신이 들자 트로트 가수를 해보자는 마음도 먹게 됐다. 그는 곧장 보컬 트레이너를 소개받아 트레이닝을 받고 불과 한 달 만에 노래 녹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런데 제가 기획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후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열악하죠(웃음). 그래서인지 믹싱 작업이 약간 잘못돼서 제 목소리가 작게 나왔어요. 조만간 수정할 예정입니다.”
트로트 가수로의 삶을 선언한 그에 대한 주변 반응은 다양하다. 의외라는 사람도 있고 ‘너에게 딱 맞는다’ 하는 사람도 있다. 두려움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어쨌든 시작된 일이다.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수로 데뷔했으니 앞으로 노래 부르는 게 경제적인 부분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우면 좋겠습니다. 가수 데뷔 전에는 동기들하고 노래 봉사도 다녔어요. 생각해보니 봉사 때는 묘하게 트로트를 많이 불렀네요. 그리고 저 자신도 나이가 들면서 트로트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친구들도 네가 하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그는 트로트를 배우게 되면서 트로트의 넓은 세계를 새삼 깨닫게 됐다.
“진성씨의 ‘안동역에서’라는 노래는 모르는 노래였는데, 어느 날 친구가 노래방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작년부터 뜨는 노래라고 하더군요. 안동역에는 그 노래의 비석도 있다고 해요. 노래라는 게 그 정도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노래를 통해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가 베푸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신념과 경험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인생에서 ‘큰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2014년 9월에 큰 수술을 받았어요. 종합검진을 하다가 우연히 췌장에서 종양을 발견한 거예요. 암일 확률이 굉장히 컸어요. 특히 췌장암은 생존율도 적고 암으로 진단받으면 일 년을 살기가 쉽지 않아요. 검사해보고 암이든 아니든 수술해야 한다 해서 9시간에 걸쳐 수술을 했죠. 그때 CEO 과정에서 성악했던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고, 최왕국 교수님이 제 소식을 듣고 끝이 안 풀리던 가곡 ‘바람이 불어오면’을 마무리했다고 해요.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저는 그 노래를 부를 기회를 갖게 된 거죠.”
악보를 보자마자 확신이 든 노래, ‘난 당신 편이야’
하씨가 트로트 가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전문가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김영진 한국연예제작자협회 회장이 제 선배예요. 그래서 그분께 ‘이런 곡이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문의했죠. 당연히 말리셨죠(웃음). 그분이 워낙 연예계를 잘 아시니까 ‘네가 돈이 있냐, 젊길 하냐, 특출나게 잘생겼냐, 과연 시장에서 먹힐 거냐’ 하는 것들이 의문이었죠. 그런데 지인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면 반응은 굉장히 좋아요. 가사도 좋고 중독성도 있고. 사실 이건 좋은 쪽 얘기고, 나쁜 쪽으로는 확 부각되는 게 없다는 얘기가 있긴 했어요. 트로트라면 어떤 부분이 확 튀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부분은 제가 잘 모르겠어요. 저는 확 느꼈거든요.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도 와 닿았고.”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하나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가곡이든 발라드든 다 좋아했어요. 트로트는 관심이 없다가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트로트는 이렇다’라는 정형화된 스타일을 좇고 싶지는 않아요. 특히 너무 튀고 화려한 정형화된 이미지로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노래도 좋고 가사도 좋은 트로트 가수로 평가받고 싶어요.”
전형적인 트로트 가수 이미지에 국한되고 싶지 않아
하씨는 올해 중에 ‘난 당신 편이야’의 녹음을 새로 할 예정이다. 그리고 현재 유튜브에 노래를 올려놓은 상태다. 물론 이제 막 데뷔한 그가 앞으로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
요즘은 늦은 나이에 트로트 가수로 입문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업계에서 30여 년을 있다가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마땅히 박수 받아도 될 일이다. 그는 현실을 냉정히 보면서도 자신의 도전이 앞으로의 삶에 즐거움과 희망과 꿈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디너쇼까지 할 수 있는 경지가 된다면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해보고 싶어요. 트로트, 가곡, 발라드… 다만 댄스는 좀(웃음).”
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브라보’는 ‘잘한다’, ‘좋다’, ‘신난다’ 등의 갈채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다. ‘성공적으로 2막을 살고 있는’ 우리 사회 시니어들로부터 ‘인생 2막 설계의 지혜와 조언’을 들어보고자 한다. 리타이어(retire)는 타이어를 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타이어를 새로 바꿔 끼운다는 의미다. 단지 1막의 재현에 불과한 리플레이(replay)도 아니고, 1막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 맨땅에서 헤딩하는 리셋(reset)도 아닌, 새로운 재생의 르네상스(renaissance)를 설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은퇴라는 용어를 은퇴시키고’ 멋진 2막의 르네상스를 설계하기 위해 ‘이어야 할 것과 끊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본지를 통해 살아온 길의 여정에 담긴 ‘온기’뿐 아니라 살아갈 길의 이정표를 세우는 데 필요한 ‘용기’를 얻길 기대한다.
윤만호 언스트앤영 어드바이저리 부회장(62)은 한국산업은행 부행장, 산은금융지주 사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 ‘경제·금융 전문가’로 살아왔다. 이런 전문가로서의 이력을 넘어 주목되는 점은 열성적 은퇴교육 전도사라는 점. 그는 2011년 금융권 퇴직자들을 재교육, 창업자들에게 금융·입지권 조사 등 컨설팅을 해주는 사회공헌자 프로그램인 ‘시니어 브리지 센터’를 만드는 등 일찍이 퇴직자 재교육에 앞장서왔다. 최근까지도 서울시 50+재단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은퇴자들을 위한 제도적 교육과 일자리를 지원해왔다. 그가 설파하는 신(新)퇴직 또는 은퇴혁명 패러다임의 핵심은 ‘당하는 퇴직을 준비하는 퇴직으로 바꾸라’이다.
과거와 오늘날의 은퇴 의미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수명이 짧았던 과거에는 50이 넘도록 사회생활을 하면 웬만큼 살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즘은, 생애주기가 바뀌면서 앞으로는 살아온 만큼 더 살아야 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고령화 사회에서의 퇴직은 마지막 골라인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지요. 이제 일은 평생 하는 것입니다. 은퇴란 말을 은퇴시켜야 합니다. 평생 현역이 될 각오를 다져야지요.”
평생 현역은 오늘날 은퇴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인생의 반환점으로 보람찬 2막을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고령화가 진행된 우리 사회에서는 80세부터를 본격적 노후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50~60대에 은퇴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적어도 80세까지 평생 현역으로 일하기 위한 키워드는 3가지입니다. 일, 배움, 나눔이지요. 책을 통해 더 많이 배우고, 사람도 더 만나고, 일을 통해 경험과 경륜을 더 나누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급변할수록 ‘과거의 경험, 인연, 경력’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하면서 배우고 나누는 삶이 인생 2막의 패러다임입니다.”
영화 을 보면 대기업 부사장이 벤처기업의 인턴이 되어 젊은 여사장의 시중을 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갑에서 을로의 갑작스런 전락’이 2막 부적응의 이유가 될 것 같은데요.
“대부분의 시니어들이 퇴직 후 피부로 느끼는 것이 갑(甲)에서 을(乙)로의 입장 변화이지요. 이 변화를 약자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도와준다, 기여한다는 적극적 의미로 재해석하는 시각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퇴직 후 자신을 대하는 세태 변화에 위축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잘나갈 때는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고 일정이 빡빡했는데, 퇴직하거나 작은 데로 옮기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일정도 텅텅 빈다면서 우울해합니다. 이럴 때는 인심을 탓하기보다 ‘그동안은’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느라 선택당했는데 이제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해 만날 수 있으니 좋다’라고 시각 전환을 해야 합니다. 을(乙)적 사고야말로 창의적이고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것이라고 전향적으로 해석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인생 2막은 성공 마인드보다는 성숙-섬김마인드로 임해야 합니다.”
윤 부회장의 말을 들으니 시니어가 멀리 해야 할 한자로 단단할 ‘고(固)’ 자가 떠올랐다. 고(古)의 울타리[口]에 갇혀 고착돼 있으면 고루해진다는 의미가 떠올라서다. 인생 2막이 힘든 것은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성장이 멈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꼰대적 사고를 그쳐야 퇴직을 종착역이 아닌 간이역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보통 사람들이 퇴직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재정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먼저 현역에서의 퇴직 준비부터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현역, 퇴직 통틀어 지켜야 할 것은 ‘버는 범위 내에서 써야 한다’는 재정 원칙입니다. 현역 활동 때 현재의 수입을 모두 가처분소득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평생 내가 쓸 돈이 얼마나 되는지, 60세 이후 100세까지는 무슨 돈으로 살 것인지 꼼꼼히 계산해보십시오. 버는 것의 30%는 무조건 개인연금을 부어야 합니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외에 개인연금을 들어 노후에 ‘3층 연금’의 단단한 방어벽을 준비해놔야 합니다. 특히 요즘은 저금리시대 아닙니까. 10억원을 버는 것도 힘들지만, 이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매달 100만원씩 나오게 하는 현금흐름을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비도 과잉투자해선 곤란합니다. 노후를 잘 대비해놔야 자식 앞에 부모가 바로 서고 자식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이미 퇴직한 분들은 지금이라도 대비해야 할 것들이 있는지요?
“있는 범위 내에서 써야 한다는 원칙은 퇴직자도 같습니다. 막연히 불안해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나의 어셋’은 어떻게 되는지 점검하고 이에 따라 할 일을 리디자인하는 게 필요합니다. 퇴직 후 가능한 일자리 형태는 사회공헌형, 봉사형, 생계형, 전문가형 등이 있습니다. 어느 형태가 되든 평생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이때 연금을 들어놨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집니다. 퇴직 후부터는 버는 것보다 나눔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해요. 저는 flowing-흘려보내기란 말을 좋아합니다. 퇴직 후에는 아등바등 살기보다는 ‘지금까지 나에게 위탁된 것을 잘 이용하고 남에게도 흘려보낸다’는 나눔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인생 1막과 2막, 그 분수령을 전후해 삶의 정비사항, 중점사항도 달라져야 할 것 같은데요?
“삶이 변하면 사람도 바뀌어야지요. 1막에선 급한 것에 휘둘려 살았다면 2막에선 정말 중요한 것에 따라 여러 가지를 성찰하고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사는 대로 생각’했다면 2막부터는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지’ 성찰해보고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인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에 따라 증진시킬 것은 증진시키고, 회복시킬 것은 회복시키는 등 삶의 우선순위를 재편, 재조정해야지요. 다시 말해 돈, 시간, 몸을 우선순위에 따라 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윤 부회장은 구체적 성찰 및 재정비의 대상을 관계, 시간, 재무, 건강(정신-육체), 웰다잉의 순서로 꼽았다. 그리고 이 5가지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의 리디자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하버드대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하버드대학 학생 268명의 인생을 72년간 종단연구하면서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큰 조건이 무엇인지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성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인간관계였으며, 65세에 잘살고 있는 사람의 93%는 형제·자매와 원만하게 지낸 사람들이었다.
많은 가장들이 ‘처자식 먹여살리느라’ 바쁘게 일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막상 퇴직하고 나자 ‘찬밥 신세’라며 서러움을 호소하기도 하는데요. 윤 부회장께선 가족관계 경영을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월화수목금금 일해야 하는 산업화 시대에 공직자로 살았으니 집사람,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갖진 못했습니다.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나가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지요. 하지만 ‘온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갖고 대화를 나누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명절 때면 온 가족이 모여 ‘가위바위보게임’을 하는 등 소소한 재미 디자인을 했지요. 매년 가족사진도 찍습니다. 아이들이 자라고 가족들이 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가슴에 따뜻한 가족 램프를 걸어두며 사는 것, 그것 이상 삶의 성공,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선친은 고(故) 윤재건 전 제주체신청장이다. 윤 부회장은 “우편제도가 열악했던 시절, 지방이든 해외든 출장을 가면 ‘부인에 대한 사랑, 자녀에 대한 자상한 관심’을 담은 엽서부터 보내는 아버지를 보며 알게 모르게 가족사랑은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해야 함을 배운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일, 재물도 그렇지만 가족관계 역시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며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8월 부친상을 당하셨는데요.
“(눈시울이 붉어지며) 아버님은 건강하게 사시다가 간암 선고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답니다. 소천 전 일주일간 오 남매를 불러 각각 독대 면담을 하며 당부의 말씀을 일일이 남기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다 지키고 계획한 대로 산 삶이었다는 점에서 웰리빙, 웰다잉의 표본이셨다고나 할까요. 선친께서는 늘 ‘요행을 기대하지 마라, 노력으로 거둔 보람만이 참된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말고 끝없이 사랑을 주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는데 제 삶의 피가 되고 살이 된 말씀이랍니다.”
선친이 그에게 남겨준 가보 제1호는 17세 때부터 61세 노년기까지 44년간 고이 모아온 우표책 한 질이다. 체신부(지금의 정보통신부)에서 한길을 걸어온 소신과 자부심의 표상을 아들에게 담아 물려준 것이다. 그 역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우표 수집을 이어가고 있다. 윤 부회장은 지난 1997년 부친의 고희 때 만든 가족 문집 를 가져와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문집에는 부부-부모자녀-손주 간 사랑이 듬뿍 담긴 편지글, 사진 등 3대 가족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이 팔순이 될 때 이 같은 가족 문집이 더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환하게 웃었다.
인터뷰를 진행한 회의실 8층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여의도공원의 늦가을 경치가 아름다웠다. 같은 낙엽이지만 ‘추풍낙엽’의 조락의 의미로도, ‘만산홍엽’의 서정적 의미로도 묘사된다. 이는 퇴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당신은 지금 미래의 계획 아래 ‘추일서정’의 퇴직을 준비하는가, 계획 없는 미래에 손 놓고 ‘추풍낙엽’의 조락을 당하고 있는가.
>>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이웃집 새댁이 취업했다며 싱글벙글했다. 그런데 직종이 좀 특이하다. 우리 동네 통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통장은 동네의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어려운 주민을 돌보는 일이 매우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여태까지 통장은 아저씨만 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나이가 갓 사십인 이렇게 젊은 여자가 통장을 맡은 건 처음 보는 일이라 대견하기도 하고 대단해 보였다. 이제 남자, 여자의 일하는 영역이 구분 지어지지는 않는 세상인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결혼하기 전 새댁의 직업은 컴퓨터 디자이너였다고 한다. 결혼 후 10여 년간 아이 낳고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할 수 없었는데 이제 두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어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했더니 전문직으로 했던 일은 다시 할 수가 없더라고 했다.
컴퓨터 디자이너로 10여 년 일했던 경력이나 실력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니 그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다. 물론 아무 일이나 보람을 갖고 하면 되지만 10여 년 쌓았던 경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다.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팸투어로 대학로에 있는 여성인력개발원의 새로 일하기 센터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다른 팸투어와 달리 10명의 정책 기자들이 모여 단출했지만, 어느 곳보다도 뜨거운 취재 열기가 느껴졌는데 모인 기자님들 중 여러 사람이 경력단절로 인한 피해를 받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담당자의 설명을 듣는 동안 우리 이웃집 새댁이 생각났고 새댁이 이곳을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일하기 센터는 경력 단절로 재취업을 원하지만 어려움을 겪는 여성을 위한 곳이다.
여성으로서 취업에 의지가 있는 분이라면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원하는 직장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데 면접할 때 필요한 정보와 복장체크까지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리고 면접하러 갈 때 업체까지 동행해 편안한 마음으로 면접에 임하고 합격할 수 있도록 힘을 써 준다는 것이다.
추천서 발행 전까지 일반 구직자는 한두 번 방문해 취업상담을 하고 집단상담 프로그램 참가자는 20시간을, 전직 분야를 원하는 여성은 국비 교육생으로 3개월 교육 프로 참가 후 상담을 진행한다고 한다.
고용노동부와 함께하는 사업으로 고용노동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지만 새로 일하기 센터에서는 경력단절 여성 대상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지역의 여성친화 기업을 발굴하고 여성 일자리 확산을 위해 구인업체 확보하는 일도 중요한 사업이다.
센터에서는 수강생들이 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교육에서 취업과 그 이후의 적응 기간까지 같이 해 준다는데 작은 가능성이 분명한 꿈으로, 분명한 꿈이 확실한 능력으로 될 수 있도록 힘써주고 있다.
대학로의 종로 여성 인력개발센터는 능력 중심사회와 미래 여성인재의 가치를 발굴하는 여성 인적자원 개발 선도 기관으로 서울시가 지정하고 여성중앙회가 운영하는 공공성을 기반으로 한 여성전문 직업교육 훈련기관이다.
이곳에서는 ONE-STOP 종합 지원 서비스를 하고 있다.
구직희망 여성에게 적성검사와 진로설계를 통한 직업 상담을 하고, 직업 능력 개발교육과 새 일 역량교육으로 직업교육훈련을 하며, 취업 지원연계로 새일 여성 인턴 제도를 시행하고 동행면접과 취업연계를 한다. 또한, 여성친화 기업 문화조성과 직장적응 지원, 갈등 상담으로 취업 후의 사후 관리까지 지원하는 것이 ONE-STOP 서비스이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부 및 민간기업 연계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어 시너지효과를 보고 있으며 직업교육을 통해 취업률 평균 80%를 이루고 있어 우수한 평가와 인증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해 고민하는 경력단절 여성들은 이곳을 찾아 자신의 능력도 키우고 원하는 직장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 맛난 음식부터 먹고 나서 다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맛난 음식을 제일 나중에 먹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후자에 속한다. 각자 음식에 대한 자기 철학이 있으니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요즘 ‘휴가’라는 단어는 ‘여름 휴가’를 줄인 말처럼 사용된다. 7월 말에서 8월 초에 사람들은 메뚜기 떼가 이동하듯 도시를 떠난다. 집 떠나면 고생인 것은 다 알고 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불쾌지수를 높이는 요인들이 많지만 그래도 무리를 하며 떠난다. 물론 이때 휴가를 떠나지 않으면 갈 시간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필자는 사람들이 우르르 떠나는 여름 휴가를 가지 않는다. 오히려 다들 탈출해버린 도시에서 한적한 여유를 즐긴다. 이때는 마치 차량 홀짝제를 시행하는 것처럼 출퇴근길도 한산하다. 맛난 음식을 맨 나중에 먹듯 휴가도 미루고 미룬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질 때쯤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를 떠난다. 이미 휴가를 다녀온 사람들은 가을 휴가를 떠나는 내게 부러운 눈길을 보낸다.
필자의 가을 휴가에는 특별함이 하나 더 있다. 아내를 집에 두고 혼자 떠나는 것이다. 물론 아내는 궁합이 잘 맞는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늘 여름 휴가를 다녀오곤 한다. 경제권을 다 쥐고 있는 아내는 필자가 여행갈 때 당부의 글과 함께 용돈을 넣은 봉투를 손에 쥐어준다. 평소에 자주 즐거운 마음으로 설거지를 해주고 아내가 쇼핑을 갈 때 운전기사 노릇도 해줘서 착한 남편 마일리지를 쌓아둔 덕분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가을 휴가를 혼자 떠날 수 있는 티켓을 손에 쥔다. 주위의 남자들은 필자의 휴가를 몹시 부러워한다.
필자는 오랜 세월 건축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휴가를 재대로 가본 적이 없다. 여러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것이 불안하다. 현장이 늘 위험 요소를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몇 년간 휴가를 못 간 사실을 대단한 경력이라도 되는 양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에 묻혀서 살다 보니 어느덧 환갑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몸도 점점 예전 같지 않다. 그동안 나를 너무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비로소 휴식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소란스러웠던 여름이 말끔히 치워진다. 투명한 햇살을 받아 눈부신 백색으로 빛나는 억새밭에 서서 바람소리를 듣는다. 추수가 다 끝난 텅 빈 들녘도 걸어본다. 잔잔한 바람에도 미련 없이 가지를 떠나버리는 낙엽 비도 맞아본다. 갈색으로 변해가는 잔디 위에 풍성했던 잎들을 다 내려놓고 빈 몸으로 서 있는 나무 곁에도 서본다. 깊은 계곡 작은 웅덩이 옆에 앉아 작은 물고기들이 바위틈을 들락거리는 모습도 들여다본다. 바람 부는 해변을 걸으며 아주 멀리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본다. 아주 느리게 걷고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는다. 가을은 버리고 비우는 계절이다. 그렇게 텅 비어가는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얻는다. 필자가 매년 혼자만의 가을 휴가를 즐기는 이유다.
생물학적 수명은 늘어나고 사회적 수명인 정년은 점점 짧아지면서, 제2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두 번째 인생을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 즉 은퇴자금 준비가 중요한 문제이지만 제2 직업은 더 중요하다. 시니어들의 이러한 요구에 발맞춰 여러 민·관 기관에서 제2 직업에 관한 다양한 안내와 새로운 직업 소개를 하고 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기보다 교육과 준비과정을 통해 새 인생에 어울리는 새로운 직업을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최근 제2 직업을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시니어들과 이들을 대상으로 구인 활동을 펼치는 업체나 기업을 살펴보면 현실과 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장년들의 일자리를 위해 노사발전재단이나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은퇴자협회 등 여러 기관에서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를 전국 단위로 운영하고 있다. 이 일자리 희망센터를 이용하면 구인구직 정보에서부터, 교육 프로그램, 관련 컨설팅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
시니어 구인구직 단순직종에 집중
문제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는 직업이나 일자리가 시니어들이 원하는 수준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자리가 경비직이나 청소, 택배와 같은 단순 노무직이고 그나마 이런 일자리의 대부분은 40대를 우선적으로 선호한다. 연령이 높은 시니어들에겐 순서조차 돌아오기 힘들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센터가 최근 사회공헌형 일자리로 사업 방향을 옮긴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제적으로 자유롭거나 노후 자금이 해결된 시니어들은 단순직 일자리를 원치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그간의 경력을 살릴 수 있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통해 경제적 소득보다는 보람을 찾으려는 분들이 많아요. 수고를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죠. 저희 센터에서는 이런 시니어들의 요구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센터에서 준비하는 직업들은 경제적 소득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이나 참여 시니어들의 자부심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 중에는 건강코디네이터 양성 과정이 있다. 지역 치매센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도 인지장애(초기 치매) 노인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인지학습 역할을 할 사회공헌 활동가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밖에 바른먹거리전문가 양성과정은 유치원 등 각 교육기관의 학생과 학부모에게 먹거리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가를, 다문화가족 서포터스 양성과정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요청을 받아 한국생활 정착의 멘토 역할을 할 지원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수익보다 보람과 자부심 얻을 수 있어야
지난해 도심권 50플러스센터를 통해 SNS전문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종로지역자활센터 등에서 강사로 활동 중인 김희순씨(64)는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니어들에 대한 직업 교육은 지식 전달뿐만 아니라 삶의 활력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어요. 재능기부를 통해 교육생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도 있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됐습니다. 예전엔 손주들이 와이파이 터진다고 하면 뭐가 터졌냐며 놀랄 정도였지만, 이제는 대화도 통하고 생활이 달라졌어요.”
물론 일자리나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현장에선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실업난을 겪고 있는 청년들의 일자리와 겹치게 되면 사업 자체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현장에서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활동 무대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성공적인 직업에 정리수납전문가가 있다. 정리수납전문가는 여성발전센터, 여성인력 개발센터 등을 통해 민간에 알려졌다가 현재는 협회까지 설립됐다. 한국정리수납협회의 정경자 협회장은 이렇게 조언한다.
“정리수납은 보통 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혼자 활동하기 어려운 시니어, 특히 여성들에게 적합한 직업입니다. 평생 살림을 해온 분들은 원칙과 이론을 알려주면 금방 익숙해지거든요. 이렇게 새로운 직업을 만들거나 창업하려면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니까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의 전문성, 문제를 해결할 창의성, 구성원과 소비자를 대할 인성을 갖추고 있는지 늘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찾을 수 없다면 창직(創職)도 방법
새로운 직업에 대한 단서가 필요하다면 한국고용정보원(www.keis.or.kr)을 노크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곳에선 제2 직업을 필요로 하는 중년들을 위한 자료를 연구하고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올해 3월에 발간된 자료집 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인생 2막을 설계하는 베이비 부머들이 도전하기에 적합한 직업 30개를 선정해 하는 일을 소개하고 해당 직업을 가지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주고 있다. 또 지난 5월부터는 중장년층의 창직 활동을 돕기 위한 라는 지침서를 배포 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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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회사생활 후 찾아온 은퇴는 원호남(元鎬男·54) 팀장에게 ‘추락’의 기억이었다. “삶에서 튕겨져 나온 심정이었다”고 했다. 보험설계사에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할 곳’이 필요했다. 현재 원 팀장은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50대 남성 보험설계사 조직) 간판 컨설턴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설계사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에 감사하게 된 점이 가장 보람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교보생명의 시니어클래스 사무실을 찾았다. 빌딩이며 책상이며 회의실과 커피머신까지, 도시의 흔한 사무실 풍경이었다. 다른 점은 업무를 보는 남성들이 모두 여느 회사의 임원급도 넘어 보이는 50~60대라는 점이다. 이곳에서 원 팀장을 만났다. 머리모양과 옷차림이 단정했다. 말투와 몸가짐에서 오랜 기간 회사생활의 내공이 느껴졌다.
“30년간, 뭐, 나쁘지 않은 직장생활 했죠.” 다소 조심스럽게 질문을 시작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라마 의 무대였던 ㈜대우(현재의 대우인터내셔널)가 그의 첫 직장이었다. 1985년부터 10년간 일했다. 이후 내셔널호주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에서 20년간 근무했고 통합 SC제일은행에서 본부장을 지냈다. 누군가를 만나 명함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번듯한 직장이었다.
30년 회사원에게 은퇴란…“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
은행을 나온 것은 2013년 3월, 교보생명에서 설계사를 시작한 것은 같은 해 12월이었다. 7개월간 ‘자연인 원호남’으로 지냈다. 당시 심경을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문제를 하나 냈다. “가장의 실직을 가족 외에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정답은 세탁소 아저씨입니다. 양복을 맡기지 않으니까요.” 은퇴 남성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의 시선이 먼저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자유로웠다. 대낮에 밖에 나가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다녀오는 동년배 남성들을 관찰자로서 바라봤다. 그러던 중 그는 문득 ‘아! 이제 보니 내가 저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그룹에 속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명함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낯설었다”거나 “휴대폰이 울리지 않더라” 등으로 돌려 말했다.
어둡지 않은 말투였지만 대화 중간에 “은퇴는 추락이잖아요”라든지 “반복적인 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인 거죠” 등의 표현을 섞었다. 30년 동안 잘 나가던 회사원으로 갖고 있던 정체성이 흔들렸던 당시의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가장으로서, 남성으로서 그가 느꼈던 상실감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내와 딸이 보내준 ‘노란 화살표’…새 길 앞에서 짐을 비우다
교보생명에서 직장경력 20년 이상인 50대 은퇴자를 보험설계사로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했다. 은퇴 전의 그였다면 눈길이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보험세일즈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고정관념때문에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의 은퇴시점과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출범시기가 맞아 떨어진 것이 우연처럼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현업에서의 지식과 경험을 살리면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마음을 담금질하게 된 계기는 오래전부터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에 담아뒀던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도보여행이었다. 원 팀장은 짐을 줄이기 위해 생필품인 비누조차도 반으로 자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 필요한 생필품만 추린다고 추렸는데도 그걸 또 줄이고 있더군요. 인생도 새로운 길을 떠나기 전에 비우는 게 중요하고도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잘나가던 현업시절’의 기억이 무거운 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려놓을 용기를 갖게 됐다.
여행의 백미는 유명한 ‘노란 화살표’였다. 갈림길마다 순례객들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산티아고의 명물이다. 그는 “화살표를 보면서 우리 인생에도 이런 화살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도보순례가 힘든 여정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인생에 비하면 힘든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라고 말했다.
결심을 굳히지 못했던 보험설계사 위촉식 전 날 딸 다은(26)씨가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 나 (회사에) 합격했어’. 원씨는 ‘이게 산티아고의 노란 화살표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아내의 문자도 그의 결심에 큰 응원이 됐다. ‘다은이 아빠가 생각하는 대로 하세요. 뜻대로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우리 두 사람은 충분히 살 수 있어요.’
“지난 삶 건방졌다는 반성…인간관계에 감사하는 법 배워”
종합상사와 은행에서의 경험이 상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됐다. 하지만 판이한 업무방식은 바로 적응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힘든 점은 ‘목적을 갖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인을 만나서 보험의 ‘ㅂ’자도 꺼내지 못하고 헤어진 적이 많았죠. 실제로 교보생명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하면 얼굴표정이 확 달라지는 지인도 있었고요.”
그 후 2년간 원 팀장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니어클래스 내 가장 높은 실적을 올리는 설계사 중 한 명이다. 올해의 경우 여러 실적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설계사로서 안정적인 실적을 쌓아가고 있다. 이 추세라면 내년에는 보험설계사들의 명예의 전당 격인 MDRT(백만달러 원탁회의) 자격을 얻게 된다.
초창기 느꼈던 두려움은 극복한 걸까. 원 팀장은 “목적을 가진 마음이야 변함없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대답했다. “지난 삶이 굉장히 건방졌던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과 제한된 만남에만 머물렀던 거죠.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고 그의 걱정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보험계약이 이뤄진다면 감사한 일인 거죠.”
덧붙여 원 팀장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어려움을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고 했다. 금전적인 문제, 가정문제, 건강문제 등 지인의 어려움을 적은 메모는 그날 그날의 기도문이 된다. 그에게 지금의 일을 시작한 뒤 가장 보람있는 부분을 물었다. 원 팀장은 “인간관계에 감사할 줄 알게 된 점이 보람있습니다. 저 스스로 많이 겸손해졌고, 그런 변화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 원호남 시니어클래스 팀장
1961년생, 광성고, 고려대 경제학과, 서강대 경영대학 MBA, 1985~1995 ㈜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 1990~1994 대우 홍콩법인, 1995~2002 내쇼날 호주은행(NAB) , 2000~2002 NAB 뉴욕지점 근무, 2002~3013 스탠다드차타드(SG) 은행, 2013~현재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팀장
시계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시계는 자연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생기는 자연의 순행에서 인간은 시간이라는 개념과 함께 이를 물리적으로 표시하는 시계라는 도구를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글 장세훈(張世訓)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학계에서는 기원전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해시계를 시계의 기원으로 보고 있으며, 영국의 전설적인 거석기념물인 스톤헨지 또한 실제 용도는 해시계였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한편 고대 그리스인들은 날씨가 흐리거나 야간에도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클렙시드라라는 물시계를 발명했고, 1434년 장영실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완성한 자격루 또한 물시계의 작동 원리를 응용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밖에도 모래로 시간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모래시계와 기름의 연소량을 시간 계측에 활용한 램프시계도 중세시대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시계의 역사는 이토록 오래되었지만, 근대적인 개념의 기계식 시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7세기 중반부터다. 물리학 및 관측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기계식 시계의 이론적 토대인 진자의 등시성 원리를 16세기 말에 발견한 것을 기점으로, 네덜란드 태생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는 이를 최초로 시계에 적용해 시계 제작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그가 1675년 개발한 진자시계는 후대의 과학자들과 시계 제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들의 손을 거치며 점차 다양한 종류의 시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탁상시계와 휴대가 간편한 회중시계가 유럽의 귀족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는 시계가 인류의 생활 깊숙이 뿌리내렸음을 의미했다. 물론 그 시절만 하더라도 휴대용 시계는 일반 서민들은 쉽게 볼 수조차 없는 사치품이었다. 유명 시계 제작자들은 주로 왕가나 귀족들을 위해서만 소량씩 주문제작방식으로 시계를 제작했고, 긴 체인을 연결해 양복 포켓 안에서 수시로 꺼내 볼 수 있는 회중시계는 특권층의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면서 귀금속 케이스로 제작한 시계들이 각광을 받았다.
한편 회중시계는 기술적으로도 당대 시계제작자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크기가 큰 추시계류와 달리 회중시계는 부품들의 사이즈부터 매우 작고 더욱 정밀한 가공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마이크론 단위까지 정확하게 측정, 절삭할 수 있는 기계들이 앙트완 르쿨트르 등 몇몇 선구적인 인물들에 의해 19세기 초반에 개발되었다.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스위스 태생의 시계 제작자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는 18세기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시계 제작자이자 시계 역사상 어쩌면 가장 영향력 있는 발명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최초의 셀프와인딩(로터의 회전에 의해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형태의) 시계였던 퍼페추엘(1780년)을 비롯해, 훗날 브레게의 상징이 된 정교한 패턴의 기요셰 다이얼(1786년)과 파랗게 열처리를 한 브레게 핸즈(1783년), 충격 흡수장치인 파라슈트(1790년), 브레게 헤어스프링으로 불리는 탄성과 내부식성이 탁월한 밸런스 스프링(1795년), 그리고 지지대 역할을 하는 케이지 안에 끊임없이 밸런스 휠을 회전시켜 중력을 상쇄하는 혁신적인 설계의 투르비용(1801년)에 이르기까지 현대 기계식 시계 제조의 기틀이 되는 여러 중요한 발명들이 브레게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브레게는 회중시계 시대를 앞당긴 인물이면서 훗날 손목시계의 등장까지 예견한 진정한 의미의 천재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시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가시화된다. 바로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의 세대교체가 그것이다. 최초의 손목시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1904년 루이 까르띠에가 친구인 조종사 산토스 뒤몽을 위해 제작한 까르띠에의 ‘산토스’를 최초의 현대적인 손목시계로 꼽는다. 케이스 모서리를 둥글린 사각에 가까운 케이스, 두툼한 러그, 착용감을 고려한 아담한 사이즈는 산토스를 당시의 어떠한 시계와도 차별화시켰다. 까르띠에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프랑스의 전투 장갑차에서 착안한 아이코닉한 사각시계 ‘탱크’를 1917년 탄생시켜 일찍이 손목시계 제조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IWC, 론진, 호이어(태그호이어의 전신) 등 여러 제조사들이 손목시계 제조에 발 빠르게 합류했다. 특히 롤렉스는 세계 최초의 방수 케이스인 오이스터(1926년)를 비롯해, 오토매틱 무브먼트인 퍼페추얼(1931년), 자정 무렵 날짜창이 자동으로 변경되는 시계 데이트저스트(1945년), 최초의 다이버 시계 서브마리너(1953년) 등 몇몇 선구적인 발명으로 손목시계 시대를 앞당긴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손목시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시계로 인기를 모으면서 대중적으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됐다. 종전 직후인 1950년대에는 이미 스위스 시계업계가 주류로 군림했다. 1960년대 말까지 스위스 시계 산업은 전례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고 시계는 더 이상 사회 고위층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도 향유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세이코를 필두로 한 쿼츠시계의 광풍에 밀려 스위스 시계 산업은 1990년대 초까지 기나긴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기계식 시계와 달리 수정자와 배터리로 작동하는 쿼츠시계는 적은 제조비용으로 훨씬 더 많은 시계를 생산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특유의 정확함으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쿼츠시계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기계식 시계를 찾기 시작했고 2000년대 접어들면서 기계식은 쿼츠와 사이좋게 시장을 양분할 만큼 다시 예전의 선호도를 되찾는다. 각종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상의 주축이 된 요즘 수백 년 방식 그대로 제작되는 기계식 시계가 다시 높은 인기를 누리는 현상은 어찌 보면 난센스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계식 시계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쿼츠시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계식 시계만의 예스러운 감성과 장인정신, 그리고 예술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좋은 시계란 무엇인가? 명품 시계에도 트렌드가 존재하는가?
좋은 시계의 기준이란 어찌 보면 상대적이고 자의적인 개념이다. 기술적으로나 미적으로 그리 훌륭하지 않은 시계일지라도 한 개인의 관점에선 충분히 최고의 시계로 비칠 수 있다. 또한 소중한 추억이 담긴 시계라면 가격대를 떠나서 그 자체로 특별한 가치를 갖게 마련이다. 특정 시계에 ‘명품’이라는 수식을 붙이는 것 또한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주저 없이 명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시계들이 분명 존재한다. 단지 고가라서,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을 해서,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브랜드라서 꼭 명품이 아니라, 정제된 디자인과 오래 봐도 질리지 않을 클래식한 다이얼, 우수한 설계의 무브먼트와 같은 요소들이 명품 시계를 규정하게 한다.
세상 돌아가는 순리가 그렇듯 명품 시계 시장에도 소위 말하는 트렌드라는 게 있다. 가령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사이즈가 크고 대담한 디자인의 시계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만 해도 신생 브랜드였던 위블로, 벨앤로스 등이 이러한 트렌드에 힘입어 시계 업계에 완전히 자리를 잡는가 하면, 전통적으로 빅사이즈 시계를 브랜드의 개성처럼 강조해온 IWC, 파네라이 같은 제조사들도 엄청난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명품 시계 업계의 트렌드는 과거로의 회귀로 규정지을 수 있다. 빅사이즈 트렌드에 대한 반발로 시계 사이즈를 다시 줄이기 시작한 제조사들이 늘어났으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스포티한 디자인 대신 단순하면서 고전적인 디자인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수십 년 전의 헤리티지 모델을 현대적으로 복각하는 것도 업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블랙, 화이트 다이얼 일색인 고급 시계 업계에 최근 들어서는 블루, 그레이, 브라운, 옐로 등 다양한 컬러가 도입되고 있으며, 단순히 색만 입히는 차원이 아니라 기요셰, 그랑푸 에나멜링, 핸드 페인팅 등 다양한 전통 다이얼 제작 기법까지 적용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바쉐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예거 르쿨트르, 율리스 나르당, 샤넬 같은 제조사들은 자체적으로 양성한 전문 에나멜러와 인그레이빙 장인, 주얼리 세팅 장인들을 활용해 다이얼에 예술성을 가미하는 ‘메티에 다르(Metiers d'Art)’ 시계들로 고급 시계 제조의 또 다른 예술적인 경향을 선도하고 있다.
시계와 사회성
시계를 순수하게 취미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소위 명품으로 분류되는 고급 시계 소비자들 중에는 해당 시계에 담긴 진정한 가치나 스토리텔링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해당 브랜드가 사회적으로 환기하는 아우라와 이름값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고급 시계가 사회 통념상 일반 소비재가 아닌 사치재로 통하기 때문에, 종종 신문의 사회면이나 방송에서는 부정부패한 방식으로 돈을 축적한 이들이 가진 재산을 은닉하기 위해 혹은 불법 로비를 위해 고급 시계를 구입하고 선물했다는 식의 가십성 기사도 종종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시계가 어찌 수천, 수억 원에 달할 정도로 고가일 수 있는지에 관해 묻기에 앞서 우리는 해당 시계가 지닌 본연의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계 칼럼니스트로서 스위스 주요 시계 브랜드들의 시계가 제작되는 매뉴팩처(공장)를 방문할 기회가 있는데, 매뉴팩처 투어를 거치는 동안 가장 먼저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시계가 비싸지 않을 이유를 발견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고급 시계에 지불하는 금액 속에는 해당 브랜드의 오랜 역사와 전통, 제조 노하우가 담겨 있는 데다, 기계식 시계의 경우 수백 개의 작은 부품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되어 조립되고 나아가 각각의 부품들을 사람 손으로 일일이 다듬고 장식을 하기 때문에 주변의 흔한 대량생산형 저가 시계들과는 확연히 다른 프로세스로 완성됨을 알 수 있다. 오랜 경력과 출중한 실력을 가진 시계제작자를 가리켜 ‘마스터(장인)’라고 칭하는 것도 고급 시계 제조의 배경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계는 분명 재화만 있다면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지만, 때로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시계들도 있다. 하이엔드 시계 제조사들 중에는 시계를 단지 판매 목적이 아닌 브랜드가 지닌 기술력과 추구하는 가치를 최대치로 구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실험적인 시계를 제작하는 곳도 있다. 까르띠에가 2009년에 선보인 유니크 피스 ‘아이디 원(ID One)’과 2012년에 발표한 ‘아이디 투(ID Two)’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시계 제조 방식에 새로운 혁신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더욱 완벽에 가까운 시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까르띠에처럼 시계 제조 기술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예가 있는가 하면, 바쉐론 콘스탄틴이나 반클리프 아펠처럼 최상의 예술적인 시계를 완성하기 위해 전통 공예 장인이 최소 2주에서 길게는 몇 달간에 걸친 수작업으로 완성한 유니크 피스들도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시계애호가 및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열렬한 지지를 받는 MB&F, 그뤼벨 포시, 로랑 페리에 등의 독립 시계브랜드들과 필립 듀포, 카리 보틸라이넨과 같은 존경받는 독립 시계 제작자들의 시계도 매우 한정된 수량만 제작되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시계로 손꼽힌다. 이러한 귀한 시계들은 차후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세계 시계 경매에 출품돼 애초의 금액대를 훨씬 상회하는 경매가에 낙찰돼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겠지만, 흔히 볼 수 없어 희소하고 기술력과 예술적 표현의 한계에 도전한 마스터피스급 작품들은 반드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마련이다. 고급 기계식 시계가 세계 주요 경매에 단골손님이 된 것도 하나의 완성도 높은 시계는 예술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귀한 시계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부류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부(富)도 따라야겠지만, 단지 부유해서만은 가질 수 없는 탁월한 감식안과 시계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열정, 그리고 좋은 시계를 가치에 맞게 즐길 수 있는 애티튜드(자세)를 지닌 자야말로 진정한 주인이 아닐까 싶다.
>> 장세훈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타임포럼 주 필진으로서 시계 각 분야의 뉴스 및 심층 리뷰와 칼럼을 담당하고 있으며, 매년 바젤월드, SIHH, 워치스 앤 원더스 등 주요 시계 박람회를 취재해 기사화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시계 전문지 스페셜을 번역 보완 출간한 를 감수 및 추가 저술했으며, 주요 시계 제조사와 대표작을 선별한 e-북 를 저술했다.
>> 타임포럼 소개
2006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시계에 관한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10만 명에 달하는 회원들이 직접 시계 구입 후기와 착용 소감, 다양한 질문과 답변 등을 주고받음으로써 시계에 관한 국내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방대한 정보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www.timeforum.co.kr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큰 화두는 복지 문제였다. 당시 대선 후보들이 나왔던 TV토론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다고 반박했었다.
그때만 해도 이후 3년여의 세월이 흘러 ‘증세 없는 복지’가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난무했던 ‘증세 없는 복지’라는 말이 가진 허점을 일찌감치 꿰뚫은 이가 이미 있었다.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며 건전재정포럼을 만들어 이끌어 가고 있는 최종찬(崔鍾璨·65) 대표가 바로 그 사람이다. 건전재정포럼 주간회의를 하고 있는 그의 아침을 들여다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최종찬 대표가 건전재정포럼 설립에 참여한 것은 대선을 코앞에 둔 2012년 가을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가 양쪽이 서로 복지 공약 많이 하면서 경쟁하는 모양새였어요. 그래서 그 양상을 본 재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아니 대체 나라를 어디로 가게 만들려고 복지 얘기만 하는가’ 해서 경종을 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건전재정포럼이 만들어질 수 있었어요. 그때 발기인을 보면 아무래도 재정 쪽에 몸담았던 공무원 출신들이나 장,차관들, 그리고 언론계 출신들이 많았죠.”
최 대표를 인터뷰한 건전재정포럼 회의 장소에서는 안병우 전 국무조정실장,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장준봉 전 경향신문 사장, 고광철 전 한국경제 편집국장, 허승호 신문협회 사무총장, 이계민 전 한국경제신문 사장, KDI 박진 교수, 김원식 한국재정학회장 등등 쟁쟁한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실무 경제에 있어 LG경제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에서조차도 정보를 참고한다는 건전재정포럼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박근혜 정부 지난 2년간 재정정책 평가 및 향후 대응방향에 대한 주제 회의 안건이었다.
“나라 걱정하는 열정이 남들 못지 않잖아요. 새벽에 나와서 이러는데, 이게 무슨 대통령 앞에서 국무회의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국무회의 못지않게 진지하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이 무슨 내가 재정정책 만든다고 누가 물어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자진해서 걱정하는 이런 분들이 많거든요. 누가 귀담아 듣지도 않는데, 이걸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까, 말귀를 알아듣게 할까, 어떻게 보면 이런 분들이 많고, 어떻게 보면 이게 국가의 자원이고 힘이죠. 이런 분들이 있어서 이 사회가 지탱이 되는 거지요.”
한국 사회를 향한 거침없는 쓴소리를 모으니 ‘부족한 복지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라는 발제였다. 토론을 통해 박 대통령 공약 검증과 복지 어떤 모양으로 갈 것 인지, 법인세 ·부가가치세 ·소득세 등 증세를 어떻게 해야 하나를 짚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나라 걱정에 쓴소리 쏟아내는 건전재정포럼의 현장
이처럼 운영위원들의 의견을 아울러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고심하는 최 대표는 서울대를 나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1971년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에 발을 들인 그는 이후 경제기획원, 제1대 기획예산처 차관 등을 거치며 경제통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국민의 정부에서 건설교통부 차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맡은 후 참여정부에서 초대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지내면서 참여정부의 각종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이후 2008년에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한 그는 같은 해 저서 을 펴냈다.
“평생 공직생활을 하다 보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사회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느냐’는 생각이 계속 있습니다. 그래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시스템 개혁을 하는 데 일조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허한 것보다 구체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날 하는 총론이나 ‘막연히 열심히 일해라’라는 말이 아니라 열심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가들은 말로만 대의를 찾는가?
최 대표는 우리 사회를 보면 시스템이나 현실과 안 맞는 것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사회를 향한 최 대표의 시선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고, 수많은 문제점들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정치가들은 지역 균형도 말만 할 게 아니라, 중대선거구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지금보다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만날 지역균형 하자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구체적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호남에서도 새누리당이 당선될 수 있고 대구에서도 민주당 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고….”
‘국회의원들이 왜 자기 지역에 다리 놓는 문제에만 신경 쓰고 있을까’에 대해, 최 대표는 현재의 소선거구제도가 문제라고 설명했다. 만약에 전국 비례 대표로 한다면 우리 동네 다리 놓는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안 할 거 아니냐는 반문이다. 정치가들이 말로는 대의를 생각한다고 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늘 어물쩍 비켜가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논리가 없는 현재의 교육감 제도, 고쳐야 한다
국민들이 골고루 인간답게 사는 길을 찾는 데 작은 힘이 되고 싶다는 그의 인생 후반부에서 불합리한 것들이 눈에 들어와 사회시스템 전반적인 공부를 하고 있다. 그중에 최 대표의 직설은 교육 부분도 건드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교육자치와 지방자치를 엄격하게 분리해놨단 말이죠. 여기에도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어요. 지자체장은 무상급식에 대해 ‘내가 공약한 것도 아니고 내가 왜 돈을 대느냐’라며 관심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들여다보니까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같은 교육자치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최 대표는 교육감이 정치적으로 무소속이라는 것이 논리가 없는 제도라고 질타했다.
“교육감은 당적을 갖는 것이 안 좋다, 이거잖아요. 그런데 어느 나라고 교육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대통령 아니에요? 대통령은 정치인이죠. 그리고 교육부 장관은 현직 국회의원이잖아요. 교육감은 교육부에서 정한 것의 일부를 집행하는 입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있는 두 사람이 다 정치인이에요.
서울시 교육은 서울시 교육감이 다 하는 게 아니라 예산은 서울시 교육위원회, 조례는 서울시 의회 교육 분과에서 정해요. 다 정치인들로 구성됩니다. 아, 그럼 정책을 결정하는 이들이 온통 정치인인데, 정작 교육감은 당적이 있으면 안 된다니 이게 무슨 논리예요.”
예를 들어 현재 강원도는 교육감은 전교조 출신 야당 성향이고 도의회 교육위원들은 다 새누리당 계열이다. 교육감은 혼자 야권 출신인데, 대통령, 교육부 장관, 강원도의회, 전부 다 여권인 상황에서 어떻게 당해내느냐는 반문이다. 교육 시스템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받는 학부모들조차도 자식들 교육은 중요하다면서 이러한 모순적인 교육감 시스템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상황에 분노한 최 대표는 그에 관한 칼럼을 쓰고 난생 처음으로 지난해 1월에 가두시위도 했었다.
시니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사회를 바꾼다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의미있는 일을 찾아 거침없이 피력하던 최 대표는 그래도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부분을 높이 평가했다.
“뭐 요란스럽게 신문, 언론에 안 나서 그렇지 요즘 제가 볼 때는 우리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고 봉사하는 게 과거에 비해 많아졌어요. 제가 여러 군데 참여도 해봤는데, 우리 건전재정포험, 또 시니어 어치브먼트(Senior Achievement : SA)라든지 제가 공동대표로 있는 선진사회만들기연대, 돌아가신 남덕우 총리, 지금은 이승윤 총리가 하시는 선진화포럼 등, 그런 곳들을 보면 오시는 분들이 다 옛날에 상당한 사회적 역할을 하던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이 뭘 바라고 아침부터 토론하고 그러겠어요. 우리 사회에 나름대로 기여하려는 의지가 참 많아요.”
최 대표는 건강한 시니어들이 과거에 비해서 많아졌고, 경제적으로도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뤄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파악했다. 요즘은 60대 전후로 은퇴해도 향후 20~30년은 더 사회적으로 활동하게 된 세상이다. 시니어의 힘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공익을 위해 애쓰는 대한민국 멘토가 많아지는 현상에 긍정적 의견이다.
의미 찾는 일에 미래를 만들며 살고 싶다
성공적인 포럼 운영과 인생 후반전을 드라이빙하고 있는 최 대표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최 대표는 생애설계를 하면서, 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 있었을까?
“딱히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요. 옛날처럼 밤새워 일할 순 없지만 만날 놀 수도 없으니까. 그 의미 있는 일이라면, 역시 우리 국민들이 골고루 잘 살 수 있게 만드는 쪽에 내 경험이나 능력을 살려서 재능기부 비슷한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