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의 삶에 대한 막연한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2019 신중년 인생 3모작 박람회'가 열렸다. 기업에서 내건 채용공고 게시판 앞에는 연봉이나 취업조건 등을 꼼꼼히 살피려는 구직자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각 기업체 부스에서는 상담과 현장 면접 등이 이뤄졌다.
한 부스에서 면접을 마치고 나온 이모(56) 씨는 “이력서를 제출하고 낮아진 연봉도 수용했는데, 연락이 올지 모르겠다”며 또 다른 업체로 발길을 돌렸다. 생애설계 상담관에서 일대일 상담을 마치고 나온 최모(55) 씨는 “아직 현직에 있지만 내년 은퇴를 앞두고 미리 정보를 얻기 위해 나왔다”며 “지금 하는 일과 관련한 일이면 좋겠지만, 무관한 일이어도 도전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폴리텍대학교 부스에서 진지하게 상담을 마치고 나온 또 다른 구직자는 “국비지원으로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직업까지 연결해준다는 소식이 오늘 얻은 정보 중 가장 알찼다”며 박람회장을 나오는 길에도 안내 책자를 구석구석 살폈다.
외모 단장에 어색한 구직자들에게 맞춤 퍼스널컬러를 진단해주고 메이크업을 곁들여 증명사진까지 출력해주는 ‘꽃중년 재도약 스타일링’ 프로그램은 인기리에 일찌감치 마감됐다. 이날 직접 발로 뛰며 구직활동에 나선 신중년들은 “생애 주된 일자리와 관련한 일에 종사하며 그동안의 경험을 녹이고 싶다”는 바람을 들려줬다.
“고2 때 친구들과 남산에 올라갔어요. 서울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여고 동창생들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학생, 사진 좀 찍어줄래?’ 하며 카메라를 내밀더라고요.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라서 언감생심 만져보지도 못한 카메라였어요. 친구들끼리 서로 미루다가 그분들이 일러준 대로 셔터를 눌렀죠. ‘찰칵’ 하는 소리가 기막히더라고요.”
까까머리 소년은 그날 손끝으로 느꼈던 셔터 음의 짜릿함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칠순을 넘긴 지금까지도 카메라와 함께 살고 있다. 사진을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까지 가르치느라 하루도 쉴 틈이 없다는 한국사진작가협회 교육이사 문제민(文濟珉·76) 씨. 현역 시절보다 더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나기로 한 날, 그가 들고 온 가방에는 노트북과 각종 자료들이 가득했다.
“법무부 산하 기관에서 공무원 생활을 끝낼 무렵 퇴직 후의 시간을 생각해봤어요. 평생 카메라를 끼고 다녔으니 디피점이나 열어볼까 했죠. 그런데 그 무렵 디지털카메라가 막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는 사진 관련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잠깐씩 사진 강의도 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사진 교육 강의를 하게 됐어요.”
은퇴 후의 시간을 고민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 사진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공무원 시절 국비유학으로 일본 연수를 떠났을 때도 시간만 나면 도쿄의 책방을 드나들며 사진 책을 봤다.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귀국할 땐 사진 관련 서적을 한아름 안고 돌아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 공부는 그에게 일상이다.
“은퇴 후에는 누구든 한동안 공허함 속에 있게 돼요. 그러나 이 무렵의 위기는 성장을 견인하는 시간이기도 하죠. 매일이 소중하고 가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려면 미리미리 조금씩 준비하는 게 중요해요.”
집념의 한 우물이 열어준 인생 2막
요즘도 그는 사진 수업 준비를 하느라 컴퓨터 작업에 여념이 없다. 나날이 도약하는 제자들의 실력에 용기를 주는 것도 큰 일과다. 그의 인터넷 카페엔 제자들 사진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래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두 시간 정도 올라온 사진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감상평을 남긴다.
그는 늘 긍정적이다. 학생들 사진을 보며 절대 부정적 평가를 하지 않는다. 다양한 삶을 살아온 이들의 특성을 존중한다. 이런 태도는 오랜 직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법무부에서 청소년 보호 관찰 업무를 담당할 때도 비행청소년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문책을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단점은 감싸주고 장점은 열심히 칭찬해주는 것이 오히려 재발 방지에 효과적이더라고요. 그렇게 지낸 40년의 사회생활이 퇴직 후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준 셈이죠.”
물론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도 있다.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 대부분은 연륜이 있는 시니어. 자기 삶의 방식으로 오랜 세월 지내온 이들이라 자아가 강한 사람도 더러 있다. 그렇지만 그런 딜레마조차 약으로 삼고 보람으로 채운다. 그는 특히 제자들의 개인전 초대장을 받았을 때, 함께 단체전을 기획하는 모습을 볼 때 행복하다. 사진 작업을 통해 멋진 인생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받는 위로가 참 좋아요. 사진을 통한 교류는 예술 감각도 키워주고, 자연 속으로 돌아다니며 풍경을 찍으니 건강에도 도움이 돼요. 사진 활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멋지게 살아가는 제자들을 보면 뿌듯합니다.”
별명은 제비콩, 콩샘
‘제비콩’은 그의 별명이다. 문제민이라는 이름의 ‘제’ 자를 따 어린 시절 친구들이 지어줬다. 그때는 그 별명이 왜 그렇게 싫던지 친구들에게 화를 내며 못 부르게 했다. 그런데 한참 세월이 지나 사진 관련 사이트를 만들게 됐을 때, 닉네임을 무엇으로 만들까 고민하다가 어릴 적 친구들이 만들어준 별명이 문득 생각났다. 그 호칭이 이제는 제자들에게까지 사랑스럽게 불리게 됐다. ‘콩샘’이라는 귀여운 애칭까지 생겼다.
그에게서 강의를 들은 한 제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해 겨울, 교외로 출사를 나간 적이 있어요. 쨍! 하고 얼음이 갈라질 만큼 추웠던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장갑을 안 가지고 나갔어요. 셔터만 누르면 되는데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어’ 하는 배짱으로 나갔다가 손가락이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어요. 손이 너무 시려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때 지도교수로 오셨던 콩샘이 차를 세워둔 주차장까지 한참을 걸어가셔서 장갑을 가져다주셨어요. 제 손에는 커서 헐렁거렸지만 그렇게 따뜻한 장갑은 처음이었어요. 그날의 기억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누구나 은퇴 후의 삶을 걱정합니다. 더구나 콩샘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제2의 업으로 삼기는 쉽지 않죠. 그런 면에서 콩샘이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문제민 씨는 제2의 인생을 쉽게 맞이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운명처럼 카메라를 만났을 때 미친 듯이 빠져들었고, 거짓말을 하고 사진을 찍으러 가느라 돌아가신 어르신을 또 한 번 돌아가시게 했다고 말하며 웃는다. 박봉의 공무원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내 적금을 들고 그 돈으로 아내 몰래 카메라와 렌즈를 구입하면서 그때마다 들키지 않으려 숨겼던 일도 있었단다.
“그 비싼 필름을 사서 정신없이 찍었어요. 그야말로 카메라에 미쳤던 거지요.(웃음)”
칠순이 되었을 때 지인들이 잔치를 해라, 개인전을 해라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의 사진과 십수 년간 가르친 제자들의 사진 500점을 정리해 함께 실은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동안 나눈 대화와 댓글 내용도 실었다. 그리고 300여 명의 제자들과 출판기념 자리도 마련했다.
“이 책은 나의 역사입니다. 은퇴 후 건강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수강자 몰리는 인기 강사
지금도 그가 강의하는 수업을 들으려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문화원 수강 신청은 금방 마감된다. 주부, 퇴직자, 젊은이, 심지어 아픈 환자도 그의 강의를 듣고 싶어 한다. 한때는 신청자가 너무 많아 큰 강당을 빌려야 했다. 입소문을 타며 인기 강사가 된 그는 백화점 문화센터와 다양한 지역에서 강의를 한다. 17년 동안 가르친 제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요즘은 사진 출사만을 위해 오는 수강생들도 있다고 한다. 전국의 풍광 좋은 자연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으니 소문이 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관심사로만 사진을 대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라도 사진을 찍으면 좋아요. 그런데 컴퓨터도 배우고 사진 폴더 관리도 할 줄 알면 더 좋아요. 포토샵도 배우고 인터넷 카페를 통해 서로 정보를 나누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시니어는 디지털 퍼스트 시대의 순기능을 적극 이용해야 해요. 컴퓨터는 여러 가지로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놀이기구이거든요. 더불어 테마를 정해 자신만의 사진 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해요. 그래야 실력이 향상되고 오랫동안 사진을 즐길 수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어느 신문에서 “예술가 중 가장 오래 사는 사람들은 사진가”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연 속에서 잡념을 버리고 즐길 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안개 속 몽환적 풍경, 계절의 변화를 담아내는 셔터 소리는 짜릿함의 끝판왕이다.
그는 지금도 1960년대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나라 각 지방은 물론이고 중국의 오지 차마고도, 티베트 등지로 출사를 다녀오곤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는지 물었다.
“잘 찍은 사진요? 그런 거 없어요. 앞으로 찍어야죠. 건강하게 계속, 강의도 하고요.”
그가 추구하는 삶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사진을 통한 건강한 삶은 그의 모토다. 그리고 언제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이웃집 새댁이 취업했다며 싱글벙글했다. 그런데 직종이 좀 특이하다. 우리 동네 통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통장은 동네의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어려운 주민을 돌보는 일이 매우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여태까지 통장은 아저씨만 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나이가 갓 사십인 이렇게 젊은 여자가 통장을 맡은 건 처음 보는 일이라 대견하기도 하고 대단해 보였다. 이제 남자, 여자의 일하는 영역이 구분 지어지지는 않는 세상인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결혼하기 전 새댁의 직업은 컴퓨터 디자이너였다고 한다. 결혼 후 10여 년간 아이 낳고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할 수 없었는데 이제 두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어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했더니 전문직으로 했던 일은 다시 할 수가 없더라고 했다.
컴퓨터 디자이너로 10여 년 일했던 경력이나 실력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니 그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다. 물론 아무 일이나 보람을 갖고 하면 되지만 10여 년 쌓았던 경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다.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팸투어로 대학로에 있는 여성인력개발원의 새로 일하기 센터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다른 팸투어와 달리 10명의 정책 기자들이 모여 단출했지만, 어느 곳보다도 뜨거운 취재 열기가 느껴졌는데 모인 기자님들 중 여러 사람이 경력단절로 인한 피해를 받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담당자의 설명을 듣는 동안 우리 이웃집 새댁이 생각났고 새댁이 이곳을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일하기 센터는 경력 단절로 재취업을 원하지만 어려움을 겪는 여성을 위한 곳이다.
여성으로서 취업에 의지가 있는 분이라면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원하는 직장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데 면접할 때 필요한 정보와 복장체크까지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리고 면접하러 갈 때 업체까지 동행해 편안한 마음으로 면접에 임하고 합격할 수 있도록 힘을 써 준다는 것이다.
추천서 발행 전까지 일반 구직자는 한두 번 방문해 취업상담을 하고 집단상담 프로그램 참가자는 20시간을, 전직 분야를 원하는 여성은 국비 교육생으로 3개월 교육 프로 참가 후 상담을 진행한다고 한다.
고용노동부와 함께하는 사업으로 고용노동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지만 새로 일하기 센터에서는 경력단절 여성 대상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지역의 여성친화 기업을 발굴하고 여성 일자리 확산을 위해 구인업체 확보하는 일도 중요한 사업이다.
센터에서는 수강생들이 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교육에서 취업과 그 이후의 적응 기간까지 같이 해 준다는데 작은 가능성이 분명한 꿈으로, 분명한 꿈이 확실한 능력으로 될 수 있도록 힘써주고 있다.
대학로의 종로 여성 인력개발센터는 능력 중심사회와 미래 여성인재의 가치를 발굴하는 여성 인적자원 개발 선도 기관으로 서울시가 지정하고 여성중앙회가 운영하는 공공성을 기반으로 한 여성전문 직업교육 훈련기관이다.
이곳에서는 ONE-STOP 종합 지원 서비스를 하고 있다.
구직희망 여성에게 적성검사와 진로설계를 통한 직업 상담을 하고, 직업 능력 개발교육과 새 일 역량교육으로 직업교육훈련을 하며, 취업 지원연계로 새일 여성 인턴 제도를 시행하고 동행면접과 취업연계를 한다. 또한, 여성친화 기업 문화조성과 직장적응 지원, 갈등 상담으로 취업 후의 사후 관리까지 지원하는 것이 ONE-STOP 서비스이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부 및 민간기업 연계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어 시너지효과를 보고 있으며 직업교육을 통해 취업률 평균 80%를 이루고 있어 우수한 평가와 인증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해 고민하는 경력단절 여성들은 이곳을 찾아 자신의 능력도 키우고 원하는 직장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첫번째 오남매가족사진, 1번 임산부필자 3번 40대의필자 4번 빛바랜 가족사진들 6번 두딸과 필자모습
카네이션 꽃들이 만발하는 5월이 되면 유년 시절의 필자는 그리움 반 미움 반으로 시들어진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엄마를 그리다 잠이 들곤 했다. 어린 마음속에서 흘린 눈물은 차곡차곡 쌓여 강하고 모진 모성애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눈물 속의 회상
어린 시절 필자 5남매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를 면회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필자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일종의 주말 이벤트였다.
그날도 우리는 큰오빠의 지시 아래 엄마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묵묵히 오빠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버스에 타 자리에 앉자마자 이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떨군 뒤 멍하니 바깥만 응시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였다.
버스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지나 중곡동 가까이에 닫자 필자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마치 멀고 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변해 있을 어머니를 만나려면 미리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철창문이 열리고 퉁퉁 부어오른 모습으로 뒤뚱뒤뚱하며 걸어 나오는 어머니. 어머니 얼굴은 오랫동안 빛을 못 봐 하얗게 변해 버렸다. 또 오랜 병원 생활로 비정상적으로 부어 마치 ‘큰 바위 얼굴’ 같았다. 그리고 약에 취해버려 연신 흐느적댔다. 자식들은 그 만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 어머니를 맞이했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구타까지 당했던 어머니. 그 옛날 귀한 집 외동딸로 태어나 심성 바르고 순수하며 착하던 어머니가 한평생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병원 생활로 약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머니 그만 해요. 도대체 왜 그래? 그까짓 아버지 뭐하러 생각해! 우리가 있잖아.” 필자가 보탤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이따금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책임감만으로 마지못해 병문안 왔다 가는 날에는 어머니의 병세는 더 나빠지고 어머니의 정서뿐 아니라 자식들 기분도 엉망이 되곤 했었다. 필자는 그런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돈 잘 벌어 양쪽 집 9남매 대학 보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뜻한 가정 속 아버지를 더 몸서리치도록 그리워했다. 그래서 5남매는 서로 만나면 침묵한다. 그게 더 아프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도망치듯 떠나온 어머니의 품
대학을 마치고 도망치듯 같은 캠퍼스 선배와 결혼했다. 그토록 그립던 사랑을 갈구하며 현실을 도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전쟁 터 같은 생활들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결혼생활 또한 살아온 각자의 삶이 다르듯 많이 부딪쳤다. 대학 졸업 후 시작한 교사직과 함께 나름대로 결혼생활에도 충실했으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결혼 2년 후 큰아이를 임신하며 또 고통이 다가왔다. 건축 장교로 제대한 남편이 중동으로 파견 나간 후 필자가 임신 중독증으로 교단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혼자 남은 임산부 새댁은 유난히도 겁이 많았고 신혼생활의 달콤함을 접고 시댁으로 들어가 배부름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부자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늘 여행을 일삼아 집을 비우셨고, 아침에 왔다 오후 5시면 돌아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면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친정으로 달려갔다.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마음으로 느끼며 손을 꼭 잡고 함께 잠드는 밤이면 비록 병든 어머니였으나 그 품이 왜 그리 따뜻했을까. 시댁에서 밤마다 방에 드리운 길다란 옷걸이 그림자가 무서워 잠 설쳤던 한 달 동안의 밀린 잠을 푹 잔듯했다.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은 건설 회사를 차렸고 4년 후 작은아이를 가졌다. 남편은 큰아이 때 못 해준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 아이를 여왕마마처럼 모시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더니 반대로 필자도, 두 아이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쳤다. 남편은 무릎 꿇고 벌벌 떨면서 사죄했지만 용서되지 않았다. 결국 죽을 힘 다해 쌓아 올렸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모든 것들은 다 포기 할 수 있었으나 아이들만큼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혼란과 방황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은 실로 ‘의지의 한국인’ 수준이었다. 그 방황을 감수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다시 대학을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대학 때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해 20세 차이 나는 아이들과 캠퍼스를 누볐다. 배움은 채워지지 않는 상처투성이 사랑의 빈 공간을 그나마 채워주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생소한 학문을 하며 젊은이들과 함께한 캠퍼스 생활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을 오래 누리고 싶어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강사, 전임강사가 되어 전국을 누렸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지 확인하면서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백 번 말보다는 보여주는 교육이라고 했던가. 다행히도 두 아이들은 필자를 자랑스러워△하며 열심히 그 뒤를 따라와 주었다. 큰아이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필자를 추천하여 아이가 다니는 과학고등학교에서 장한어머니상도 받게 해주었다. 이보다 어떤 값진 보석이 또 있을까?
1997년 온 나라에 IMF라는 경제 위기가 몰아 닥쳤다. 하루아침에 남편 회사는 문을 내리고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심 끝에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한 가정의 기둥이 되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어떻게든 어 다시 지붕을 쌓아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남편을 설득해 먼저 보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작은딸을 그 이듬해에 보냈다. 그리고 큰딸을 한국에 둔 채 필자는 2001년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 허물어져가는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어렵게 오랜 시간 투자해 얻은 교수의 길, 필자의 것들을 다 포기해야만 했다.
무궁화 꽃 속으로 흐르는 눈물
한국과학기술대학교(KAIST)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과외하며 생활하던 큰아이는 방학만 되면 가족이 보고 싶고, 엄마 품이 그립다며 열일 제치고 미국으로 날라왔다. 비록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 남의 나라였지만 그리웠던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삶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힘겨웠던 바닥생활 2년 후, 해변의 도시 싼타모니카에 세탁소를 시작했다. 필자는 바느질을 하고 남편은 빨래하며 자리잡기 시작했고 백인동네에 멋진 이층 집도 장만했다. 주말이면 1박 2일 파티도 열며 나름대로 훌륭한 이민생활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필자 가족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러나 작은 아이가 우등생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UCLA)’를 졸업하고 언니가 있는 한국으로 나와 버렸다. 왔다갔다 하던 큰아이는 어느덧 멋진 의사가 되었고 작은 아이도 남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꿈을 펼 수가 없다며 훌쩍 떠나와 버렸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2층 아이의 방에는 덩그러니 아이의 그림자만 남아 있었고, 텅 비어버린 커다란 집은 더 이상의 따뜻한 가정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세탁소 2층에 머무르며 일만하며 살았다. 세탁소 재봉틀 앞에 큰 거울을 붙여놓고 필자 얼굴과 마주보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필자는 또다시 미국 한 의대에 입학했고, 그 길만이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세탁소 일이 끝나는 저녁 6시에 가서 밤 11시면 돌아왔다. 장장 8년에 걸쳐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아이도 1년 후 의대에 합격했다.
어느덧 나이 60세를 향하면서 이민생활도 고갯길에 접어들어 수시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남편이 있어도 파고드는 고독함은 중병이 되어 대학병원 응급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을 머리 속에서 교차했다. 어느 날인가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과 떨어져 소리 없이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 TV 속에 한국 뉴스가 끝나고 애국가만 흘러도 눈물이 주룩주룩 얼굴을 타고 내렸다.
삶의 질을 찾아 떠나온 18년 세월에 늙고 병만 들어 마음은 마냥 연약해져만 갔다. 아이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몸을 황폐하게 만들어갔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고 했던가? 미국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일만 하는 노예의 삶이니 받아들이라며 세탁소에서 일만하던 남편도 필자 뒷바라지에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 병들은 부부는 낯설은 이국 땅에 내려앉은 눈커플만 껌뻑 거리며 나란히 누워버렸다.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산다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며, 아무리 좋은 선진국, 부와 사치스러운 명예, 그따위 것들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님을 철저히 느끼던 날에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설득하고 뿌리를 내렸던 세월을 미련 없이 정리했다. 고생하며 정들어온 곳, 아픈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땅을 뒤로한 채 고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차창 너머로 피땀 흘려 견뎌온 시간들이 추억과 함께 너풀대며 날아다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꿈으로 온몸이 날아 갈 것만 같았다. 행복은 별 것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공간, 부푼 가슴이 천국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모든 것들을 얻었으나 또 다 버리고 선택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다시 만나 만들어가는 소중한 가정의 행복을 무엇에 비유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 꽃이 만발하는 날, 한국 행 비행기 날개 가슴에는 무궁화 꽃이 활짝 피어났다.
고령화 해결을 위해 노화질환에 한의학적 치료기술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된다.
4일 경남 양산시에 있는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은 오는 19일 ‘건강노화 한의과학 연구센터(센터장 하기태 교수)’ 개소식을 연다고 밝혔다.
건강노화 한의과학 연구센터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주관하는 올해 선도연구센터 지원사업 기초의과학분야(MRC)에 최근 지정돼 길게는 7년 동안 국비를 포함해 양산시 등으로부터 연구비 80억원을 지원 받는다.
이 연구센터는 기존 노화질환에 사용된 한의학적 치료기술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을 설립 목적으로 하며, 암·당뇨·중풍과 같은 노인성 질환에 대한 새 치료법을 제시하는 데도 중점을 둔다.
또 국내 최초의 국립 한의학 교육기관인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의 연구자 양성 프로그램과 협력, 연구역량을 갖춘 한의학자를 양성하다는 계획을 잡고 있다.
연구센터 관계자는 “부산대 한방병원, 국립한의약임상연구센터 등과 협력해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연구결과의 임상 적용 가능성을 높이고 효과적인 항노화 기술을 개발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미추홀카페는 정부와 민간이 협력을 통해 60세 이상 노인들에게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고령자 친화기업’이다. 보건복지부와 인천시 그리고 인천노인인력개발원 등 3개 기관의 컨소시엄으로 국비 2억 5000만원, 시비 2억원 등 4억 5000만원을 들여 설립됐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12년 11월 영업을 시작해, 이듬해인 2013년에만 4억 4613만원의 수익을 냈고, 2014년에는 4억 9118만원을 목표로 성장하고 있다. 수익 발생 시 분배보다는 1명의 시니어라도 더 채용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방침이다.
미추홀카페는 바리스타를 꿈꾸는 시니어를 위한 미추홀카페 아카데미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고령자친화기업 바리스타 교육학원으로는 전국 최초이기도 하다. 아카데미를 함께 운영하면서 보다 쉽게 시니어들이 자격증 취득과 커피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실제 바리스타 이론 및 실습교육에 참가한 시니어들은 4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하면 미추홀카페에서 운영하는 직영카페와 협력 점포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미추홀카페 직원은 모두 60세 이상이며 그들의 정년은 75세다. 지난 2년간 미추홀카페를 거쳐 간 시니어 직원만 200여 명에 달한다. 그들 중 80% 이상이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며, 바리스타 자격증이 없더라도 그 분야에 소질이 있거나 관심이 있다면 관련 교육을 받고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는 시니어라고 해서 모두 취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약 4주간의 교육기간을 통해 서비스정신과 책임감 등 나름의 기준을 통해 평가를 받게 되고, 실제 취업을 원하는 시니어 중 10%만이 미추홀카페 직원으로 채용된다. 미추홀 카페 관계자는 “젊은이들이 일반 기업에 도전하는 것만큼이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시니어 바리스타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며 “빠른 유행을 따라가기는 조금 더딜 수 있지만, 근면성, 성실성, 책임감 면에서는 일반 매장의 바리스타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설명했다.
실제 미추홀카페에서 근무하고 있는 시니어 바리스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날 여름맞이 신메뉴와 서비스 매뉴얼에 대한 교육을 마친 그들은 이야기 중간중간 ‘우리는 전문가입니다’, ‘우리는 전문가이니까’, ‘전문가로서...’ 등 전문가라고 언급하며 남다른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들에게 미추홀카페는 단순히 돈을 버는 직장이 아닌 무한한 젊음과 활력을 주는 천연 보약과도 같은 존재였다.
올해 나이 60세의 김윤해씨는 이날 모인 시니어 바리스타 중에서는 막내였다. 그녀는 “첫 근무를 하던 날엔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니…’하며 감격과 설렘에 젖어있었어요. 이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이지만, 난 내가 이렇게까지 이 일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니까요. 젊은이들이 보면 욕심이라고 할지 몰라도 내 열정은 젊은이들 못지않다고 생각해요”라며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힘이 되고 용기가 된다고 말했다.
“시니어 카페에 꼭 시니어 고용할 겁니다”
과거 일본에서 거주하던 시절 처음 바리스타라는 직업을 알게 된 후로 그들에 대한 동경심이 생겼다는 이인숙(70)씨. 그녀는 그토록 선망의 대상이었던 바리스타 일을 자신이 하게 된 것이 너무도 꿈만 같다고 했다.
“바리스타라는 직업은 세대를 불문하고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과 동등하게 경쟁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죠. 어느 카페의 커피가 맛있다더라, 디저트가 맛있다더라는 말을 들으면 곧장 가서 그곳의 매력은 무엇인지 단점은 무엇인지 보고 연구해요. 젊은 친구들인데도 이런 점은 우리보다 낫다 하는 것은 배우고, 우리가 더 잘한다 싶은 점들이 있을 땐 자신감이 생겨나 도전정신과 열정을 불태우죠.”
다른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을 가게 되면 음료 뚜껑을 꼭 열어본다는 이씨는 음료 한잔을 만들더라도 정성을 다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일반 손님들의 경우 음료 뚜껑을 열어보고 살펴보는 일이 거의 없지만, 저는 항상 뚜껑을 열고 음료상태를 점검해요. 보면 음료상태가 엉망인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전문가니까 다 알아볼 수 있잖아요. 저는 언제든지 손님이 뚜껑을 열어봐도 부끄럽지 않은 음료를 만들죠”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장차 최고의 시니어 바리스타가 되어, 개인 시니어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꿈이라는 이씨는 카페를 운영하게 된다면 꼭 시니어들을 고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젊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일하는 카페를 가서 살펴보면, 그들은 전문성도 떨어지고 자기 일이라는 애정도 없어 보여요. 우리 시니어 바리스타들을 보면 정말 내 것이라는 마음으로 책임감 있고 꼼꼼하게 일을 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젊은이들보다 우리 시니어들이 더 쓸만하다고 생각해요. 그들과 견주어도 절대 빠지지 않는 실력과 모범심을 겸비했죠”라며 시니어 바리스타들의 강점에 대해 설명했다.
손님에게 음료를 건네면서 (나이가 들어) 손이 떨리기 전까진 이 일을 계속 해나갈 생각이라는 조옥순(71)씨도 이씨와 한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옛날 사람들은 절약 정신이 배어 있기 때문에, 일하고 물건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해요. 재활용 하나를 버려도 엄격하게 분리해서 깨끗하게 버리려 하고, 식자재 사용도 알뜰하게 하려고 하죠”라며 “솔직히 우리 나이 사람들이 갈 곳이 어딨느냐 하는데, 사실 우리는 고급인력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조씨는 “70년 넘게 살아왔지만, 다시 태어났다는 기분으로 살고 있어요. 지난 인생은 그냥 살다 보니 이만큼 살아온 것 같다고 할까? 지금부터 보내는 하루하루는 마음에 새기고 더 즐겁고 뜻깊게 살아가려 해요”라며 “많은 시니어가 봤을 때 우리의 모습이 ‘나도 유니폼을 입고 저런 일을 하고 싶다’ 또는 ‘나도 저들처럼 할 수 있겠구나”라는 동기부여와 의욕을 불러일으켰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시니어 바리스타들은 카페 일을 시작하며 느낀 소통의 기쁨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이 일을 하기 전까지는 집에서나 밖에서나 대화 소재가 거기서 거기였어요. 근데 일을 시작하고 카페에 와서 동료들과 만나 ‘오늘 손님 많아?’, ‘오늘 음료는 뭐가 많이 나갔어?’같은 일 얘기를 하다 보니 활력도 생기고 재밌어요. 또 손자뻘부터 아들, 며느리 같은 사람들, 때로는 우리네 같은 노인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고객으로 맞이하다 보니 새롭고 폭넓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아요. 특히 젊은 손님이 찾아와 ‘그 연세에도 너무 젊어 보이고 멋져요’, ‘유니폼이 정말 잘 어울려요. 파이팅’이라면서 힘을 줄 때는 그 날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고 정말 한 10년은 젊어지는 기분이죠."
이들처럼 자기 일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시니어들을 볼 때면 더 큰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는 신원철(74) 대표는 장차 미추홀 카페를 ‘문화 아이콘’으로 성장시키겠다는 포부를 다졌다. 그는 “미추홀카페는 현재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문화 아이콘’을 목표로 시니어 바리스타와 고객이 문화생활을 즐기는 활력 넘치는 문화공간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라며 “지금의 미추홀카페는 커피만 팔고 있지만, 시니어들의 작품 전시회를 열거나 고전영화를 상영하고, 각종 문화 아이템을 교류하는 등 시니어의 삶의 의욕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서고 싶다”고 설명했다.
“절대 노인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신 대표는 우리사회 고령자 취업문제에 대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의 문제가 아닌 국민 모두가 고민해야 할 사회적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노인 일자리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고 있지만 그 누구도 뾰족한 수를 내놓지는 못한다. 정말 어려운 문제고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나가야 할 문제다. 아마 내가 노인 일자리 문제를 해결한다면 영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노인 일자리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하려면 두 가지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 시니어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먼저 자기진단이 선행돼야 하고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내가 과거에 장관을 했다, 교장을 했다, 대표를 했다 등 과거 자신의 직업 전성기를 내려놔야 한다. 그러고 나서 자기의 전문성, 소질, 취향, 능력에 맞춰 일자리를 찾으려고 애써야 한다. 나 역시 과거에 지방자치단체장을 했던 사람인데, 혹자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커피장사나 하는 줄 알죠. 하지만 이런 걸 개의치 않아야 한다. 내가 눈만 높아 이런 일조차 마다하고 집에 있었다면 무얼 하고 있었겠는가. 아파트 벤치에 앉아 사람들이나 훑어보고, TV 프로그램이나 돌려보고 그랬을 거다. 하지만 지금 이런 일을 하면서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가. 어떤 일을 하게 되도 기쁘게 일하고, 만족하면 된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둘째, 젊은이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 근데 많은 사람이 마치 자신은 노인이 되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 노인을 무시하고 그들을 소외시키고. 하지만 노인을 차별하는 사회는 결코 선진화될 수 없다. 노인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하고, 노인은 사회의 등불이자 나침반 역할을 하는 존재다. 특히 우리시대 노인들은 한국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넘고, 4•19와 5•18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자식들을 키우고 나라를 지킨 세대들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혹자는 그들을 경제 논리로 접근해 생산성 저하 요인으로 평가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민심순화적 기능으로 접근해야 한다. 절대 노인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2012년 1개의 직영매장으로 시작해 2014년 현재 시니어 바리스타 28명으로 5개의 직영점과 8개의 가맹점을 운영하고 있는 미추홀카페. 대부분 고령자친화기업이 지원이 끊기면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그들의 경우 꾸준한 매출 상승으로 우수 고령자 친화기업에 속한다. 미추홀카페는 올해 인천상수도본부점을 추가 확충하고, 보다 질 높은 전문화 교육을 통해 더 많은 시니어 바리스타를 배출해 낼 계획이다.
“당장 일을 그만둔다고 생각해 보세요. 설상가상으로 10년 이상 주부로만 살아온 저를 어디서 받아 줄까요.”
지난해 2월 시간제 근로자가 된 신미선(42)씨는 결혼 15년차에 접어든 두 아이의 엄마다. 결혼 전 그녀는 무역 오퍼레이션 회사에서 3년 동안 근무한 ‘커리어우먼’이었다. 결혼 후 출산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뒀지만 식구가 점차 늘어나자 다시 일터를 찾아 나섰다.
우옥자(49)씨 역시 신씨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시간제 일자리를 조금 더 일찍 찾은 주부 사원이다. 그녀는 2004년 고용노동부가 단시간 근로자 제도를 도입하자 곧바로 시간제 근무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매일 4.5시간을 일하고 남은 시간을 활용해 국비지원을 받으며 컴퓨터 자격증은 물론 바리스타, 직업상담사 자격증까지 땄다.
지난 6일 기자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에 위치한 고용노동부 콜센터를 방문해 두 사람을 만났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시간제 근로자를 채용하기 시작한 효성ITX를 통해 고용부 콜센터 업무를 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여성고용 정책인 ‘시간선택제 일자리’ 마련이 본격화된 지금, 현장에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들을 통해 시간제 일자리의 현황을 살펴본다.
△현재 어떤 일을 맡고 있나. 또 근무 시스템도 궁금하다.
(우옥자)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효성ITX에 속한 시간제 근로자로 고용부의 콜센터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주 상담 내용은 고용보험 피보험자, 실업급여 등이다. 효성ITX는 지난해부터 이곳 콜센터의 업무 위탁 계약을 맺고 경력과 신입을 구분해 채용하고 있다. 기본급은 최저임금보다 높은 편이며 근무 기간에 따라 시급금액을 차등화시켰다. 승진은 없다.”
(신미선) “모든 직원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4시간을 일하고 30분 쉬는 ‘4.5시간제’로 근무하고 있다. 근무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오전팀과 오후팀으로 나뉜다. 팀 변경은 6개월마다 이뤄지며 수시로 변경도 가능하다. 다른 팀 동료와 개별적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한 합의점을 찾으면 팀장에게 변경사항을 최종 보고한다.”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신) “이곳에 입사하기 전에도 구직활동을 했다. 대부분 8시간 근무였는데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들을 돌보기에는 시간과 체력 모두 부족했다.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크고 나만의 시간은 가질 수 있는 반면 교육비 지출은 늘어나게 돼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하게 됐다. ‘직장맘’에게 4.5시간 근무는 적당한 것 같다.”
(우) “요즘 고용시장은 30세 미만 여성뿐 아니라 경력직을 원하는 편이다. 다시 말해 직장을 구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가정과 육아에 신경 쓰느라 경력단절이 오래된 주부들이 쉽게 도전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시간제 일자리라고 본다. 나중에 노후 대비 차원에서도 좋을 것 같다.”
△풀타임과 비교할 때 시간제 일자리의 득과 실이 있을 것 같다.
(신) “풀타임보다 급여가 적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다. 그러나 작게나마 학원비라도 보탤 수 있으면서 아이들 교육에도 더 신경 쓸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모든 것을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 학교 행사나 일정에 맞춰 시간 변동도 가능하고 애가 아플 때도 챙겨줄 수 있어 좋다. 앞으로 국비지원으로 자격증도 더 따고 싶다.”
△급여가 풀타임 근로자의 절반 수준인데 가계경제에 도움이 되는가.
(우) “시간제 일자리는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생계를 책임질 정도로 돈을 벌어야 한다면 8시간 근무제를 알아보는 것이 맞다.”
(신) “용돈벌이 수준이지만 잠시 거쳐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자격증을 따거나 오랜 학업 이후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 일시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주변에서 많이 봤다.”
△시간제 일자리의 경우 복지가 취약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는 어떤가.
(신) “경조사 때 화환, 용품, 휴가 등의 지원이 있다. 시간제이지만 정규직에 해당되는 4대보험, 정년 등의 복지 혜택도 제공된다. 연차는 1년에 15일이며 신입은 2년간 15일이다. 또 업무상 질병이 발생했을 경우 휴직(병가)도 가능하다.”
△사실상 시간제 일자리는 시행 초기다. 현재 일하는 환경에서 개선점을 꼽는다면.
(우) “시설 지원이 된다면 업무 환경이 개선되면서 일의 능률이 오를 것 같다. 지속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10년 된 컴퓨터가 운영되는 등 시스템이 노후된 것이 많다. 이 같은 경우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개선 사항을 요구해야 하는지도 다소 불분명하다. 이에 대한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본다.”
직장에서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중장년층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정보다. 하지만 대부분 막연하게 재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좌절하기 십상이다. 이들의 문제는 은퇴를 앞두고 그 이후의 삶을 위한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3월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가 수도권의 55세 이상 은퇴자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75%는 은퇴 전까지 노후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은퇴 준비를 했더라도 40대 이전에 준비한 경우는 5%에 불과했고, 그나마 50대에 은퇴준비를 시작한 경우도 16%에 그쳤다. 응답자의 61%는 은퇴 준비를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갑작스러운 은퇴에 대처하지 못한 이들의 경우 인근에 위치한 지방자치단체의 관련 부서 및 센터를 찾으면 가장 손쉽게 재취업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베이비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에 대비해 재취업 프로그램 등을 준비·시행해 왔다.
서울시는 지난해 2월 은평구 녹번동에 베이비붐 세대의 제2의 인생 설계를 위한 ‘서울인생이모작지원센터’를 개관했다. 지원센터는 경제활동을 희망하는 은퇴 세대들에게 재취업·창업 등을 지원하고 사회공헌을 원할 경우 재능기부를 할 수 있도록 연령별, 소득·지식 수준별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 센터는 △인생설계 △사회공헌·재능나눔 △창업 △재취업 등 4개 분야의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한다.
또 서울시는 ‘종로고령자취업알선센터’에서 55세 이상 서울시 거주자 및 이들을 원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구직·구인 알선 활동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구인처에서도 근무조건과 함께 인력을 요청하면 이와 매칭을 하고 있다.
아울러 각각 구청에서 다양한 취업 프로그램을 구성해 추진하고 있다. 서초구청은 지난 2일 베이비부머를 위한 은퇴 후 전직교육 특강을 진행했다. ‘서초구 베이비부머는 RESTART↗ 한다’ 주제의 특강은 취업비법, 자기소개서 작성법, 취업 지원기관 사업설명 및 상담 등 3부로 구성됐다.
서초구청 사회복지과 관계자는 “이 밖에 금융전문가 양성과정이라는 취업프로그램이 지난 4월부터 국비지원사업으로 진행 중”이라며 “또 ‘중장년층 전직스쿨’ 프로그램을 오는 9월 3일부터 11일까지 시행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중장년층 전직스쿨은 노사발전재단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만 40세 이상을 대상으로 취업교육을 하고 컨설팅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이 밖에 반포도서관에서 ‘현장속취업정보은행’을 통해 취업상담를 하고 있다”며 “둘째·넷째 목요일 2시부터 5시까지 진행된다. 둘째 주는 노사발전재단에서 와서 상담, 컨설팅 등 중장년 취업지원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금천구청도 지난달 26일 지역맞춤형 일자리 창출 지원사업인 ‘Digital Contents Making’(웹개발자 및 웹디자인) 전문가 과정 수료식을 가졌다. 해당 교육 프로그램은 포토샵, 일러스트, 홈페이지 제작 등 쇼핑몰 창업에 필요한 내용으로 구성됐으며, 교육인원의 절반은 베이비붐 세대로 알려졌다.
금천구청 관계자는 “사업은 베이비붐 세대를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며 “오는 8월 5일부터 2기 교육을 시작할 예정이며, 7월부터 접수한다. 교육생 중 반절이 베이비붐 세대”라고 설명했다.
동대문구청은 지역 맞춤형 일자리 창출 사업으로 직업훈련을 제공하고 있다. 구청은 베이비부머 및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자전거 정비 기술’ 교육을 사회적기업인 ‘신명나는 한반도 자전거에 사랑을 싣고’에 위탁해 시행 중이다. 상반기 교육은 24명을 대상으로 상·하반기로 나눠서 총 410시간 동안 시행했으며, 19일 완료 예정으로 현재 하반기 교육생을 모집 중이다.
아울러 50여명의 베이비부머를 대상으로 ‘인생설계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프로그램은 6회에 걸쳐 시행되며 은퇴 후 사회공헌 활동이나 제2의 직업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의 교육을 계획하고 있다. 현재 전문적 시행기관을 찾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는 지난달 24일부터 28일까지 직업전환과 은퇴 후 재취업 희망자를 대상으로 ‘베이비부머를 위한 재취업 프로그램’ 2기를 운영했다. 오는 29일부터 다음달 9일까지 같은 프로그램 3기 지원자를 15명 모집할 예정이다. 해당 프로그램은 베이비붐 세대의 재취업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맞춤형 구직 스킬을 교육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교육기간은 다음달 19일부터 23일까지다.
파주시는 지난 2기 교육 종료 후 수료자를 대상으로 파주시청 일자리센터 전문상담사가 취업지원 개인상담을 통해 원하는 기업과의 알선을 비롯한 동행면접 등 적극적인 취업지원 서비스를 제공했다. 교육 신청자격은 접수일 기준 주소지가 파주시이며 1954년 1월 1일생부터 1962년 12월 31일 사이에 출생한 시민이다.
경상남도 역시 베이비부머들의 은퇴 후 노후 설계를 돕기 위해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경남 베이비부머 은퇴설계 아카데미’를 개최했다. 아카데미는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후 행복한 삶을 위한 노후설계, 재취업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창원권, 진주권, 김해·양산권 등 3개 권역에서 개최되는 아카데미는 은퇴 후 생애설계 전략, 재취업 전략, 자산·변화 관리 등을 주제로 한 강연과 전문 컨설턴트의 개인상담으로 구성됐다. 부대행사로는 무료 건강검진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브라보마이라이프' 시니어기자단 1기로 선발된 이희영님이 보내온 글을 싣습니다.
이희영님(만 60세)은 인천 만수전화국장, 서울 관악전화국장 등 36년 동안 KT에 몸 담아왔으며 지난 2009년까지 최근 3년동안 KT계열그룹 ㈜KTIS 임원으로 재직한뒤 은퇴하신 분입니다. 재직기간중 KT-IDC 센터 장 등을 역임하는 등 기술기획 , 마케팅 및 영업전략, 특수사업, 조달 정책수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무를 담당해왔습니다. 급히 사진을 찍다보니, 화질이 좋지 않은 점 양해해달라는 이희영님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
은퇴시기를 접하게 된 시니어세대들은 누구도 앞날의 불투명한 삶의 방향에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가 쉽지 않다.
보편적인 삶을 살아온 산업화시대의 직장인들. 이들은 은퇴시기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고 오래전부터 걱정을 해왔지만 막상 직장의 문을 나서야만 그 사실을 뼈져리게 깨닫는다. 특별한 묘안을 갖지 못한 시니어 세대들에겐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여러 가지 여건상, 제2의 삶을 준비 못하고 사회생활에 적응하기란 그 무엇보다 두려움이 앞설 수밖에 없다. 은퇴를 하고 직장 문을 나서면 먼저 잘 갖추어진 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제도 등은 물론 고용안정기반의 인프라 시스템구축 덕을 많이 본다.
여기에 정부부처와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유관부처, 산하 유관기관 단체들이 은퇴자의 전직 후 일정기간 동안 지급되는 실업급여, 창업 준비와 전직을 위한 일자리 알선, 창업 컨설팅, 귀농-귀촌 생활지원, 여가활동 지원,사회봉사활동, 건강관리, 힐링 생활 등 다양한 복지 프로그램이 앞다투어 추진하고 있는 것도 반가워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복지정책 또한 잘되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인 면을 본다면 관련 정부부처인 고용노동부의 국비무료교육, 실업자 무료교육, 구인구직과 중소기업청의 창업지원 활동 및 유관 단체인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 희망센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와 서울시를 비롯한 각 지방자치단체의 은퇴자 지원프로그램 등이 있으나 실질적인 효과측면에서는 배려 모다 미명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지난해 가을 일산 킨텍스와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된 취업박람회의 성과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일산 킨텍스의 경우를 본다면 막대한 예산을 들여 취업알선을 하기위한 노력은 극히 칭찬하고 싶지만 그 효과가 어떠했는가. 수십 개의 부스와 인력을 투입하여 거대한 행사를 한다고 했지만,
기업체별로 한 자리 숫자의 공모인원으로 홍보물을 앞세워 이벤트행사에 치우치는 일면이 방문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 마저도 방문하고 면접을 보면 중장년 시니어들에겐 현실과 먼 문턱이었음 체감 할 수 있었다.
성과를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앞서 소개한 유관단체 역시도 정부의 정책에 성과에 치우치기라도 하듯 생색내기에 치중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중장년의 일자리 마련을 위해 노력해 보이는 모습은 엿볼 수 있으나 전직자들의 심리를 면밀히 분석하지 못한 정책 실행이 답답할 따름이다. 실질적인 지원활동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 진정한 바렘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살펴봐야할 것이다.
물론 관계자들의 노력과 정책당국에 누를 끼칠 생각은 없지만 현실적으론 배려의 미명이란 말로 표현되어도 과언이 아닐가 싶다.
아울러 앞서 언급한 관계기관의 노력을 지적하자면 한마디로 자기네들이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씩의 성과위주의 정책 프로그램으로 생각이 되기도 한다.
그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필요한 예산을 지원받고 우리부처와 우리기관, 우리단체가 앞 다투어 홍보와 실적을 내세우고 있지만 도움이 필요한 시니어세대들 에겐 현실과 먼 정책이란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차제에 정부 관련부처에서는 이러한 실태를 점검하여 보완해야할 문제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문제점은 개선되어야 것으로 생각된다.
수 십년 동안 직장생활을 벗어난 시니어세대들의 삶의 가치를 추구할수 있는 정책마련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배려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