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에 대한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노인 차별을 넘어 혐오로 표현된다. 왜 노인은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존재로 치부되기 시작한 걸까? 김주현 충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만나 우리 사회의 노인 혐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최근 ‘혐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여성 혐오, 장애인 혐오, 동성애 혐오를 넘어 노인 혐오까지. 이들에게 혐오 표현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들은 ‘쓸모’에 대해 말한다. 이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다. 김주현 교수는 ‘역할을 못 하면 짐’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차별이라고 말했다.
“사회학 박사 논문의 주제가 ‘생산적 노년’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었어요. 저는 정말 한국 노인들이 생산적인 노년을 보내고 있을까 궁금했어요. 많은 사람이 노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생산성이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더라고요. 사회가 그런 분위기를 만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령주의가 받아들여지면 ‘65세가 된 노인은 노동 시장에서 물러나야 해’, ‘노인은 사회에서 역할을 못 해’라는 생각이 더욱 당연해지는 사회가 된다. 노인 혐오를 이야기하는데 사회적 구조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에이지즘(Ageism)을 우리말로 ‘연령주의’라고 해요. 연령차별주의라고도 하고요. 특정 집단에 자원이 불평등하게 배분되거나 구조적으로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차별이라고 하는데요. 그 기준이 특정 연령 집단을 향하는 걸 연령차별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 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상을 연령주의라고 합니다.”
‘쓸모’를 이야기하는 사회
김 교수는 ‘연령주의 관점에서의 노인 인권과 노인 혐오의 실태와 문제’라는 연구를 했다. 연구 결과 우리나라의 노인 집단에 대한 사회 구조적 차별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5개 국가 중 2위였다. 전통 사회가 산업 사회로 가면서 ‘뒤처지는 사람은 가치가 없다’는 인식이 생겼고, 연령주의가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압축적 근대화’를 겪었고, 경로효친이라는 유교적 사상이 강했던 터라 노인의 사회적 지위 하락이 더욱 크게 나타났다.
“사람의 가치를 경제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서구에서 100년에 걸쳐 진행됐다면 우리나라는 30년 만에 압축적으로 일어난 거예요. 사회 구성원 중 능력이 떨어지는 집단, 그중에서도 노인은 ‘쓸모없다’고 치부되기 시작했죠. 그 집단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배제하고 기회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가게 된 거예요.”
노인 집단에 대한 차별은 노동 시장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승진 기회가 사라지고, 은퇴 시기가 앞당겨졌다. 퇴직 이후에는 일할 기회도 없다. 비정규직으로만 일할 수 있는 것. 가족 내에서도 점점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됐다. 가정에서 갈등이 생기고, 심하면 노인학대로 이어졌다. 복지 제도에서도 그들은 소외된다.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율이 OECD 1위예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노인의 경제적 영역의 연령주의는 OECD 15개국 중 2위일 정도로 높은데, 고용 영역의 연령주의는 비교 국가 중 가장 낮았어요. 우리나라 노인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경제적 차별을 받고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나라는 연금제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늦게 도입되어 노년기까지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연령별 복지 혜택을 보면 청년이나 중장년에 비하면 실제 노인 혜택은 굉장히 적어요. 의료보험 혜택을 제외하면 사실상 많지 않아요. 문화적 소외도 있죠. 노인을 위한 TV 프로그램이나 문화 콘텐츠 자체가 없잖아요. 그런데 마치 노인들이 복지 혜택을 다른 연령층에 비해 많이 받는 것처럼 부풀려지면서 짐처럼 묘사되기 시작했죠. 노인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이 부분이 정말 안타까웠어요.”
왜 혐오를 표현하는가
노인이 다른 연령층에 비해 더 많은 혜택을 받거나 더 잘살고 있는 게 아님에도 이들을 향한 혐오를 표현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노인 혐오에서의 혐오는 그저 싫어하는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구조적 차별, 사회적 인식 등이 내포되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온라인 혐오 표현 인식조사’에 따르면, 혐오 표현이 발생하고 심화하는 원인으로 ‘우리 사회의 구조적 차별이 혐오 표현으로 드러났다’는 응답이 86.1%로 가장 높았다. 또한 온라인에서 혐오 표현을 경험한 사람들은 ‘뉴스 기사와 댓글’(71%)을 통해 혐오 표현을 접했다. 다음으로 ‘개인운영방송’(53.5%), ‘온라인 게시판’(47.3%) 순이었다. 오프라인에서는 ‘방송 매체’로 혐오 표현을 접했다는 응답이 56.4%로 가장 많았다. 특히 혐오 차별에 대응하려면 ‘정치인, 언론이 혐오를 부추길 수 있는 표현이나 보도를 자제해야 한다’는 응답이 90.3%로 가장 높았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누구나 노인에 대해 어떤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감정을 직접 표현한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예요.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미디어의 가장 중요한 일은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혐오 표현이 나타나는 이유와 문제점을 깊게 다뤄야 하는데, 가볍게 언급하는 데 그친다는 지적이 많아요. 선정적인 보도에 사람들이 노출되고, 그것이 확대 재생산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는 혐오 표현의 이유를 ‘우리 사회가 경제적 가치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사회적 이익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경제적 평가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노인이 되지만, 현재의 능력만을 보고 가치를 평가한다.
“아동도 부양 집단이지만, 미래에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해 거부감이 덜한 거예요. 그렇다면 노인은 과거에 이미 그 역할을 한 사람들인데, 이들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건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인 거죠.”
김 교수의 ‘중고생과 대학생의 노인 인식’ 연구에 따르면, 대학생이 중고생보다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청년 실업과 고령자 일자리를 연관 짓는 프레임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청년 일자리와 고령자 일자리는 다른 영역임에도, 마치 청년 실업이 고령자 때문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서로의 갈등을 키웠다는 지적이다.
“갈등은 하나를 두고 싸울 때 발생하는데요.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시대가 됐어요. 과거에도 노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있었어요. 하지만 사회적으로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죠. 연령주의에서 보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껴요. 노인은 죽음과 가까운 집단이기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더 느끼는 거죠.”
다양한 노인 인정해야
이런 연령주의는 노인 자신도 ‘쓸모없다’ 여기게 했다.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력적인 노인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다. 사회에서 차별을 경험한 노인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더 크게 느낀다. 2025년 우리나라는 초고령사회가 된다. 노인의 나라를 향해 가고 있지만,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나 딱딱하다.
“사회에서 내가 구성원으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면, 자신도 이런 연령주의를 당연하게 여기게 돼요. ‘자기 연령주의’(Self-Ageism)인데요. 나이로 인한 차별에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거죠. 이렇게 되면 현재의 노인뿐 아니라 향후 노인이 될 세대도 ‘나이가 들면 이런 걸 못 하는 거구나’ 하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돼요. 우리는 언젠가 모두 노인이 됩니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만족하며 사는 사회가 되려면 지금부터 이런 연령주의를 점검해야 해요.”
김 교수는 노인 혐오와 연령주의를 해결하기 위해 ‘노인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를 강조했다.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더 많이 대면해야 한다는 것. 집안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경험이 줄어들다 보니 노인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 기회가 적어지고 있다. 노인들과 자주 접촉하다 보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된다. 한편으로 노인들의 인식 변화도 필요하다. 결국 그들도 사회에서 공존해야 하기 때문. 서로가 마주하고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나 장을 사회에서 지속해서 만들어줘야 한다. 모든 노인이 지하철의 무례한 노인이나 태극기 부대의 고집스러운 노인인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이미지뿐 아니라, 노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도 굉장히 전형적이에요. 정이 많고 따뜻한 노인을 생각하죠. 그런데 그 전형에 맞지 않는 노인도 많아요. 요즘 배우 윤여정 씨가 젊은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은데, 전형적인 노인과 다른 모습이거든요. 노인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인정하려면 지속해서 오랜 시간 다양한 영역의 노인들과 접촉해야 해요.”
노인 혐오는 많은 나라에서 겪고 있는 문제다. “우리가 선도적으로 노인 혐오를 잘 해결한다면, 국제사회에 중요한 선례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노인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한 단계 진보하기를 기대합니다.”
노인이 겪는 혐오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노인의 삶과 인식에 대한 자료 및 통계를 기반으로 67세 김영수 씨의 하루 일과와 그가 마주할 혐오의 장면을 가상으로 구성해봤다. 우리가 만나볼 영수 씨는 홀로 거주하고 있으며, 시내 빌딩의 오후 교대 경비원으로 근무 중이다. 그의 하루를 따라가 보자.
참조 ‘2021 노인실태조사’(보건복지부), ‘우리나라 연령주의 실태에 관한 조사연구’(노인인력개발원), ‘온라인 혐오 표현 인식조사’(국가인권위원회), OECD ‘한눈에 보는 연금’ 보고서(Pensions at a glace 2021) 이슈브리프(국민연금연구원), ‘2021 성인지 통계: 통계로 보는 서울 여성’(서울시), ‘2019년 드라마 속엔 재벌과 전문직 남성이 많았다’(민주언론시민연합 방송모니터위원회)
오전 5시
새벽에 눈을 뜬 영수 씨. 시계를 보니 오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기 위해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냈다. 매일 아침 밥친구는 뉴스 아나운서다. 모 정치인이 사석에서 연금을 수급하는 노인을 두고 폐를 끼친다는 식의 발언을 해 정치권에서 논란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전에도 정치인들이 주목받고자 일부러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점점 발언의 수위가 심해지는 것 같다. 아, 그보다 언론이나 정치인이 오히려 혐오 표현을 널리 알리는 주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석에서 나온 이야기까지 굳이 보도할 필요가 있을까. 씁쓸한 기분으로 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았다.
지난해 5월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의 ‘온라인 혐오 표현 인식조사’에 따르면 온·오프라인 통틀어 2019년보다 2021년 조사에서 혐오 표현 경험 비율이 전반적으로 증가한 경향이 드러났다. 또한 정치인들의 혐오 표현이 과거에 비해 ‘늘었다’고 생각하는 응답이 46.8%를 기록했다. ‘감소했다’고 답한 응답자는 9.6%에 불과했다. 또한 혐오 표현에 대한 정치인의 역할에 대해 ‘확대 조장하는 역할’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46.6%에 달했다. 정치인이 혐오 표현을 줄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12.1%에 불과했다. 10대를 제외한 모든 연령대에서 정치인이 ‘확대·조장’ 역할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오전 7시 30분
식사 후 나갈 채비를 마친 영수 씨. 생각이 많아져 조금 늦게 나온 탓에, 늦을까 허겁지겁 버스에 올라탔다. 지난달부터 시작한 빌딩 경비직 출근을 위해서다. 8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을 것 같아 한시름 던다. 다행히 일찍 자리가 나서 앉았다. 아까 들은 기사가 생각나 스마트폰으로 포털 사이트를 켜 뉴스난을 들어가 본다. 가장 위에 떠 있는 기사를 확인하니 국민연금 재정 고갈을 우려하며, 연금 지급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기사를 훑으며 시선을 밑으로 내리다 ‘노인들은 정치 참여 말고 물러나라, 아예 노인들만 한데 모여서 살라’며 욕하는 댓글을 발견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댓글 창을 눌러 다른 댓글들을 확인해보니 노인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잔뜩이다. 도를 넘는 심한 표현도 있어 손이 떨린다. 신고를 할까 생각했지만,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지 모르겠고 신고해봤자 속 시원한 처리가 이뤄지지도 않을 것 같아 그만뒀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서는 전국의 20~69세 근로자 3500명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연령주의 실태에 관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노인 인권(권리)보장을 위해 노인들 스스로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라는 항목에는 응답자의 65%만이 동의했다. ‘노인이 되면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끼리 같은 지역에 사는 것이 낫다’에는 63.7%가 동의하며 노인을 회피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온라인 혐오 표현 인식조사’에 따르면 온라인 혐오 표현을 가장 많이 겪은 장소는 뉴스기사와 댓글(71.0%)이었다. 또한 혐오 표현이 발생하고, 심화하는 원인으로 ‘언론의 보도 태도’라고 답하는 이는 79.2%에 달했다. 그러나 ‘신고를 해도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무대응하는 이들이 43.5%에 달했다. 특히 4050대 응답자는 청년층에 비해 ‘신고나 절차가 번거로워’ 온라인에서 혐오 표현을 발견해도 대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낮 12시
빌딩 미화원으로 일하는 미숙 씨와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어찌 보면 직장 동료인 셈이지만 출근 시간이 훨씬 이른 탓에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다. 통성명 후 형식적인 안부를 주고받던 그녀는 대뜸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돈 받으려고 몸도 성치 않은데
짜증스런 ‘아줌마’ 소리 들어가며 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이 뒤를 잇는다. 작은 실수를 했는데 필요 이상으로 신경질을 부리기에 미안하기도 전에 기분이 상했다나. “연금 받는 것만 조금 넉넉해도 아끼면서 살 텐데….” 한숨 섞인 목소리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준다.
OECD ‘한눈에 보는 연금’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노인빈곤율 단독 1위 국가다. 그중에서도 여성 48.3%, 남성이 37.1%로 여성 노인의 빈곤율이 더 높다. 그러나 기초생활보장 및 국민연금 수급자는 남성이 더 많다. 서울시 ‘2021 성인지 통계’를 보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2020년 기준 남성이 여성보다 2만 3000명, 국민연금 수급자는 12만 6000명이 더 많았다. 복지 급여가 넉넉지 않으니 일을 해야 하지만, 근로 현장에선 더 많이, 자주 혐오에 노출된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여성 근로자가 남성 근로자보다 성차별에 더 많이 노출되고, 남성 노인보다 여성 노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오후 3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주차와 관련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직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영수 씨가 도울 수 있는 수준의 일이었지만 굳이 나서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전 도와주러 나섰다가 고맙다는 인사 대신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잔소리를 한다’라는 볼멘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을 찾거나, 여지껏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까 고민했지만 그런 생각도 금방 접었다. ‘글쓰기 공부를 제대로 해서 책을 쓰고 싶다’고 했을 때 취업 알선 기관 담당 상담사가 난처해하며 말렸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그때 포기했으니 지금 이 일이나마 하고 있는 거겠지. 매일 마시던 믹스 커피가 오늘따라 쓰다.
‘우리나라 연령주의 실태에 관한 조사연구’에 따르면 고령자에 대한 부정적 연령주의는 노동 시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30~50대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노인은 다른 사람에게 잔소리를 많이 한다’, ‘노인은 실력보다 나이, 경력, 직위 등으로 권위를 세우려 한다’는 문항에 대해 각각 71.7%, 63.7%가 ‘그렇다’고 응답해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또한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 중 ‘노인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47.9%), ‘노인은 창의성이 낮다’(42.9%), ‘노인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어렵다’(46.3%), ‘노인은 경제적 생산성이 낮다’(43.7%) 등에 응답자 열 명 중 네 명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오후 10시
퇴근 후 돌아와 씻고 누운 영수 씨. 습관처럼 켜둔 TV에서는 드라마가 방영 중이다. 평소라면 보는 둥 마는 둥 하다 잠들었을 텐데, 오늘따라 잠이 오질 않아 평소보다 집중해서 스토리를 좇고 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웬만큼 비중 있는 인물은 전부 20~30대다. 또래로 보이는 인물이라곤 주조연급까지 범위를 넓혀야 한두 명 있을 뿐이다. 그나마 대사가 많은 인물은 눈치 없이 굴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눈총받는 존재로 등장했다. 나이 들었다고 해서 저런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닌데. 애꿎은 화면만 노려보다 뉴스 채널을 틀어놓고서 눈을 감았다.
민주언론시민연합 방송모니터위원회는 지상파(KBS1, KBS2, MBC, SBS), 종합편성채널(JTBC, TV조선, 채널A, MBN), CJ계열 PP(tvN, OCN) 등 총 10개 방송사의 2018년 10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12부작 이상 종·방영 드라마 123편을 대상으로 분석 보고서를 냈다. 이에 따르면 모니터 대상 드라마에 등장한 447명 중 60대 이상(추정 포함) 연령대의 등장인물은 10명으로, 약 2.2%에 불과했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와 방송통신위원회의 ‘미디어 다양성 조사연구’에 따르면 2017년 지상파·종편·tvN·OCN 드라마 주연 등장인물 중 10~20대 38.3%, 30~40대는 55.5%로 총합만 93.8%에 이르렀다. 게다가 드라마 속 노인의 이미지는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대기업 회장,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 등의 단편적인 이미지나 갈등 조장에 필요한 주변 장치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MZ세대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는 데 당당하다. 그들은 훈수를 두는 어른을 ‘꼰대’라고 지칭하면서 자신의 세대와 분리했다. 나이 든 어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노인에 대한 반감으로 커졌다. 그러면서 고령자의 출입을 막는 장소들이 생겨났고, 온라인에서는 노인 혐오 표현이 거리낌 없이 쓰이고 있다. 노인 혐오를 감추지 않는 세태를 좀 더 들여다봤다.
“나이 먹고 늙은 것도 서러운데, 얼마나 대단한 곳이라고 못 들어가게 하는 거야?”
‘노중년존’ 식당 인근의 고령자 주민은 울분을 토했다. 이른바 ‘노OO존’은 출입할 수 있는 연령에 제한을 두는 것이다. 영유아와 어린이의 출입을 제한하는 ‘노키즈존’이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중년 이상의 출입을 제한하는 ‘노중년존’ 또한 등장했다.
‘속사정 vs 차별’, 노중년존
‘49세 이상 정중히 거절합니다.’ 2019년 문 앞에 이 같은 안내문을 내건 서울 신림의 한 실내포차는 ‘노중년존’으로 화제를 모았다. 현재는 폐점된 상태다. 실제로 49세 이상 손님은 그 식당에 들어가지 못했고, 욕을 하는 고령자가 많았다고 한다. 출입을 거절당한 적이 있는 60대 주민은 “손님을 차별하는 식당이 문을 닫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꼬집었다.
해당 식당의 노중년존 결정에는 속사정이 있었다. 60대 여성 혼자 식당을 운영했는데, 중장년층 남성들이 술주정을 부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서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40대 박 씨는 “나는 남편과 같이 운영하는데도 술 마신 어르신들이 많이 치근덕거린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이해된다”라면서 공감했다.
서울 신림에는 49세 이상 출입을 제한하는 호프집이 또 하나 있다. 현재도 운영 중인 곳으로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 밝고 활기차지만, 소음 공해 등의 단점이 따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런가 하면 부산의 한 대학교 인근 술집은 ‘노교수존’을 선언했다. 진상 손님이 모두 중년의 교수였기 때문에 사장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노중년존’ 표현이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은 숙박업소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는 40대 이상 이용객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연령의 상한선은 35~39세다. 서울의 한 캠핑장은 ‘40대 이상 커플의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공지했는데, ‘중년 차별’로 논란이 일자 이를 취소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노중년존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50대 남성 이 씨는 “사장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벌이를 일정 부분 포기하더라도 자신의 마음대로 장사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반대로 60대 남성 한 씨는 “나이 든 사람들이 매장 안에 있으면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싫어한다더라. 요즘 어디를 가면 눈치를 주는 경우가 많다. 연령 제한 출입은 벌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얘기했다. 결국 노중년존의 사장들은 ‘선택과 집중’을 한 셈이다.
온라인 노인 혐오 표현 심각
사실 노인 혐오의 근원지는 온라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틀딱’, ‘할매미’, ‘연금충’ 등 온라인상의 노인 혐오 표현은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하다. 2021년 한국노년학회는 ‘온라인상에서 공유되는 노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태도’ 학술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10·20대의 젊은 층을 비롯해 전 연령은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각종 노인과 관련된 사건·사고 보도를 접하면서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물론, 미디어를 통해 노인 혐오 표현을 알게 된 경우도 많았다. 특히 젊은 층은 정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재밌어서’, ‘사람들이 쓰니까’ 등의 단순한 이유로 노인 혐오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온라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인 노인 혐오 표현은 무엇일까? 학회는 총 2만 747건의 댓글을 수집해 분석했는데, 가장 많이 언급된 노인 혐오 표현은 ‘노인네’(6894건)로 집계됐다. 이어 ‘틀딱’, ‘꼰대’, ‘늙은이’, ‘할배’, ‘개돼지’ 순으로 나타났다.
이 중 ‘틀딱’, ‘꼰대’ 등은 주로 노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비난하는 댓글에서 확인됐다. 그러나 노인 혐오 표현이 활발히 사용되는 편은 아니었다. ‘틀딱’이라는 혐오 표현이 상위에 위치하긴 하지만, ‘노인네’ 빈도수의 7.57%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더불어 노인의 이미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형용사 위주로 살펴본 결과, ‘힘든’이 481건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무식한’, ‘나쁜’, ‘무서운’, ‘힘없는’, ‘아픈’ 순으로 사용이 두드러졌다. 대체로 분노와 연민에 해당하는 감정으로, 온라인상에서 공유되는 노인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노인 혐오 표현 알아보기
꼰대 :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을 비하하는 말로, 꼰대질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도 ‘젊은이들의 복종을 기대하며, 비판은 빠르고 실수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보복하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틀딱 : ‘틀니를 딱딱거린다’는 일부 노인들의 특징에서 유래했다. ‘틀딱’에 벌레를 의미하는 한자 ‘충’을 붙인 ‘틀딱충’도 많이 사용된다. 자신의 나이를 빌미 삼아 젊은 사람들을 훈계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예절을 어기는 노년층을 비하하는 말이다. ‘꼰대’와 비슷한 말로 통한다.
할매미 :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일부 할머니를 매미에 비유한 말이다.
연금충 : 나라에서 주는 노령연금 등으로 생활하는 노인들을 비하하는 말이다.
노슬아치 : 노인+벼슬아치를 합친 말이다. 예전에는 많이 사용했지만,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노인 혐오, 낙인 야기
지난해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노인 차별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5개 국가 중 2위로 매우 높았다. 특히 청년층 80%는 노인에 대해 부정적 편견을 갖고 있다. 이는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의 보고서에 나와 있다.
청년층의 노인 혐오 증가 이유는 고령사회와 연관이 깊다. 우리나라는 2017년 8월 고령사회에 진입하면서 고령자의 비중이 빠르게 증가했고, 젊은 세대의 경제적 부양 부담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노인 혐오 표현을 숨기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회적 낙인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노인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조성하고 차별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노인 혐오 표현을 사용한다는 데 있다.
노인 혐오 표현에 잠재된 큰 문제는 노인을 ‘우리’라는 집단에 유입되지 못하게 제한함으로써, 그들을 더욱 외롭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 노인들의 문제를 사회 전체의 문제로 일반화해서는 안 되며, 노인 혐오 표현 사용과 차별적 태도를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혐오차별 국민인식 조사'(2019)의 '대상별 혐오 표현 과거 대비 변화' 조사를 살펴 보면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에 비해 ‘노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과거보다 심화됐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아울러 같은 조사에서 60세 이상 응답자 중 자신을 향한 혐오 표현이 ‘맞는 말’이라고 대답한 이는 17.6%로, 대다수 노인이 이러한 현상에 반감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노인들은 혐오에 떠밀려 그들만의 퇴적 공간에 모이기 시작했다.
노인들의 핫플 ‘무료 급식소’
탑골공원의 피크타임은 무료 급식소 개방 전후다. 관계자 말에 의하면 요즘은 거의 무료 급식을 목적으로 방문하고 식사 후엔 공원이 한산하다고. 서울의 또 다른 무료 급식소 ‘밥퍼’(밥퍼나눔운동본부), 하루 500여 명의 어르신이 다녀간다. 청량리역에서 거리가 꽤 있음에도 이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내비게이션처럼 노인들을 이정표 삼아 따라가면 된다. 식사를 마친 노인들은 인근 경동시장이나 동묘공원 등으로 향한다. 이날 메뉴로 나온 ‘카레’가 만족스러웠다는 80대 노인은 이제 모란역에 가야 한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가 있는데 늦지 않게 가야 도시락을 받는다고. 40년 전 남편과 사별 후 그녀는 점심은 청량리 무료 급식소에서, 저녁은 모란역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운다고 했다. 고독하지만 자식들의 식사 대접을 스스로 거절한단다. “효도랍시고 못 이겨서 밥 사주는 거지. 다들 억지로 그럴 필요 없다 이거야. 애들이 싫다는데 나도 싫어.”
노노(老老) 혐오도 적지 않아
“남편 밥도 안 해주고 할망구들이 뭐 한다고 와?” 급식소에서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남성 노인이 여성 노인을 향해 거친 말을 내뱉은 것. 이를 맞받아치는 할머니의 입에서도 육두문자가 쏟아진다. 다른 이들이 말을 더하고 편을 갈랐다면 싸움이 커졌겠지만, 주변의 냉랭한 분위기에 두 사람도 주섬주섬 말을 삼켰다. 일종의 즉석만남처럼 동년배가 함께 식사하며 넉살 좋게 대화하는 풍경을 상상했건만, 노인들은 서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친구를 사귈 목적으로 온다는 이는 드물었다. 말을 걸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지저분하다’, ‘냄새난다’, ‘무섭다’ 등 부정적 이유가 많았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는 이들은 말한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그렇게 노인들은 서로를 타자화하며 거리를 두고 있었다.
혐오는 덤? ‘공짜 지하철’
급식소에서 만난 노인 중 해당 지역 주민은 드물었다. 강 건너 동네에서 오기도 하고, 외곽에서 찾아오기도 했다. 시간적 여유도 있지만, 그것이 가능한 기저에는 ‘공짜 지하철’이 한몫했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유랑하듯 지하철을 타고 시간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문제는 노인 우대 차원의 복지 혜택이 오히려 청년 세대의 반감을 사는 구실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경로 승객을 위해 투입되는 예산만 2000억 원 이상이다. 최근 경주 불국사에서 관람료 경로우대 기준을 65세에서 70세로 올리며 논란이 일기도 했는데, 이처럼 지하철 요금 역시 기준 나이를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청년 응답자의 77.1%가 ‘노인복지 확대로 청년층 부담 증가가 우려된다’고 답했다. 이러한 우려 속에 지하철에서 고함을 지르거나 임신부 배려석에 앉는 노인 등 일종의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노인의 모습에 청년들의 시선이 달가울 리 없는 것이다.
거침 없이 쏟아내는 온라인 속 혐오
지난해 말 부산 동해선 열차 개통 후 한 온라인 게시판에서 이를 둘러싼 논쟁이 일었다. 문제의 중심에는 노인이 있었다. 게시물을 올린 이는 두 가지 주장을 펼쳤다. 하나는 ‘경로우대로 인해 동해선이 실버 관광열차가 되어 다른 이용객의 불편을 초래한다’, 다른 하나는 ‘고령화 시대에 노인들의 활발한 외부 활동에 도움이 되어 좋다. 노인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면 좋은 것 아닌가’라는 것이다. “서로 앉으려 뛰고 소리 지르는 노인들… 최악의 경험이었다.” “나도 늙어가지만 전자바우처로 지급해야 한다.” “노인 탑승 시간이나 횟수를 조절해야 한다.” 이에 달린 댓글은 거의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후자의 입장은 거의 없었다.
노인 혐오, 그저 눈감는 수밖에
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의 생애사를 통해서 본 인권상황 실태조사’(2022)에는 ‘노인 혐오와 차별’에 대해 이렇게 풀이한다. “무상교통 등 노인들에게 제공되는 사회 서비스에 대해 지나치게 시혜적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음. 이러한 인식은 대중 공간에서 노인 혐오와 차별이 발생할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함. 경제활동 인구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노인들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쳐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로 비하해 젊은 세대의 노인의 향한 혐오와 차별도 스스로 감내하고 심지어 동조하기도 함.” 알면서도 눈감을 수밖에 없는 노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한 단락이다.
부머 리무버(Boomer Remover). 베이비붐 세대를 없애겠다는 조롱과 혐오가 담긴 표현으로, 최근 미국 젊은이 사이에 유행어로 번지고 있다. 노년층 부양에 대한 부담과 정치 성향에 대한 반감 등이 표출된 단어다. 우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틀딱, 연금충, 앵그리실버 등 노인을 향한 혐오 표현은 날로 생겨난다. 혐오 어린 말과 눈초리를 피해 노인들은 저마다의 퇴적 공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곁에서 노인은 사라졌고, 혐오만이 남았다.
“노인을 떠올렸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편견과 선입견은?” 나문희 주연의 영화 ‘수상한 그녀’의 도입부, 노인복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묻는다. 주름, 검버섯, 쾨쾨한 냄새, 두꺼운 얼굴…. 다소 부정적인 단어가 쏟아지던 중 한 학생은 “탑골공원”이라 답한다. 그곳에 가면 노인이 많다는 게 이유다. ‘퇴적 공간’의 저자 故 오근재 전 홍익대 교수는 ‘탑골공원’을 일컬어 “사회에서 쓸모를 인정받지 못해 잉여적 존재가 되어가는 인간군이 하구의 삼각주처럼 퇴적된 공간”이라 했다. 언제부턴가 노인을 상징하는 마중물이 돼버린 그곳, 탑골공원을 찾았다.
파라다이스 or 디스토피아 ‘탑골공원’
비가 내린 탓인지 탑골공원 안팎은 조용했다. 평소라면 벤치에 누워 오수를 즐기거나 담벼락 주위에 모여 장기를 뒀을 테다. 몇몇 노인만이 팔각정에 앉아 시름을 달래고 있었다. 파고다공원 시절 노인들은 이곳에 모여 술을 마시며 시국 토론을 하고 만담을 펼쳤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쌓이며 그들의 행위는 규제 대상이 됐고, 그렇게 노인들은 표정을 잃어갔다.
공원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코로나19 영향도 있고, 이젠 노인끼리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근재 교수는 “얼핏 탑골공원은 노인들의 파라다이스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곳이 현실의 냉혹함에 밀려 퇴적된 노인들의 공간이라면 디스토피아일 것”이라 말한 바 있다. 공원을 찾은 한 70대 노인은 토로한다. “누가 우릴 환영하나. 깨끗이 입어도 냄새난다고 싫어하지. 여기도 재미없다. 말은 안 섞지만, 그냥 저 노인네도 그래서 왔겠구나, 동병상련을 느끼는 거다.”
세대 간 혐오의 순간
“여긴 키오스크가 없네? 할아버지들이 많아서인가?”, “비 때문인지, 저분들(노인) 때문인지 꿉꿉한 냄새나.”, “주문도 안 하고 자리만 죽치네.” 탑골공원 근처의 한 패스트푸드점. 점심시간이라 인근 학원 학생들이 주문을 위해 줄을 서 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소나기 탓에 유독 노인들이 많았던 터다. 몇몇 학생은 노인들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을 내비쳤다. 매장 직원은 “비 오는 날 그나마 여기 안 오시면 또 어디를 가실까. 한편으론 다행스럽다. 딱히 그분들이 해를 끼치는 건 아닌데, 젊은 사람들은 피하고 불편해한다. 이해는 간다”라면서도 그 이유를 묻자 말을 아꼈다.
혐오의 은신처
지하철 종로3가역 1번 출구. 탑골공원으로 향하는 길, 건너편 출구 계단에 노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짝! 짝!” 수신호처럼 이따금 박수도 친다. 기이한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물었다. “다들 뭘 기다리시나요?” 노인 왈. “그냥 노는 거야! 소꿉장난.(웃음)” IMF 당시 실직 후 줄곧 이곳을 찾았다는 그는 비가 오거나 너무 덥거나 추우면 이렇게 지하철역에 앉아 논다고 했다. 기왕 놀 거면 마주 보고 모여 앉지 그러느냐 물으니, 서로 알지도 못하고 그냥 그것이 편하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 “다들 (노인) 싫어하잖아. 생쥐처럼 알아서들 숨은 거야.”
60대 이상 고령자에게 혐오 표현을 들은 후 반응을 물은 조사에서 ‘사람이나 장소를 피한다’라고 응답한 이는 80.7%로 나타났다. 혐오의 시선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 노인들은 사람을 피하고, 자신들만의 공간을 찾아 나선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미국은퇴자협회(AARP)에 따르면 노인 10명 중 9명은 매일 연령차별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AARP가 후원하는 미시간대학은 50~80세 미국 성인 2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건강한 노화에 관한 전국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약 80%의 노인이 내면화된 형태의 연령차별을 느꼈으며, 거의 모든 노인이(93%) 매일 어떤 형태로든 연령차별을 받고 있다고 대답했다.
3분의 2 가량이(65.2%) 정기적으로 노인에 대한 농담을 듣거나 ‘나이 든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다’, ‘노인은 바람직하지 않다’ 등 언어적 차별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또, 절반에 가까운(45%) 응답자가 개인적 상호 작용에서 정기적으로 연령차별을 경험한다고 토로했다. 이는 노인이라는 이유로 특정 사항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선입견에서 오는 차별 행동 등을 일컫는다.
아울러 여성, 소득이 적고 학력이 낮은 사람들은 또래보다 연령차별을 더 많이 경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신체적 또는 정신적 건강이 더 나쁘다고 보고한 사람들 중 50~64세 집단에 비해 65~80세 집단의 사람들이 더 심한 연령차별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차별은 ‘에이지즘’(Agesim)이라고도 하는데, 특정 연령대의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과 차별을 일컫는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연령차별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표현 국민인식조사’(2019)에 따르면 대상별 차별 동의 정도를 살핀 항목에서 ‘노인’에 대한 동의가 가장 높았다.
해당 조사에서 아동, 청소년, 청년, 중장년 등 타 세대에 대한 차별에 대해 동의하는 국민이 적었던 반면, 노인 대상에서만 절반 이상(56.7%)이 차별에 대해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전 세대적으로 노인에 대한 차별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분위기로 읽을 수 있다. 아울러 과거 대비 혐오표현이 가장 심화된 대상으로도 ‘노인’이 꼽히며(39.9%) 노인에 대한 연령차별 및 혐오가 심각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전장연이 요구하는 이동권 확보를 위한 엘리베이터 등 이동편의시설은 노인, 유모차 이용자 등 교통약자를 위한 필수 시설이며, 노동자의 안전과도 직결됩니다.”
지난 4일 장애인, 노인, 양육자, 노동자 단체가 한 자리에 모였다. 한 목소리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이동권 지하철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우리 모두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빚졌다”고 발언했다.
실제로도 그럴까. 국토교통부와 한국교통안전공단이 2020년 발표한 교통약자 이동편의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교통약자는 총 인구 5138만 명 중 약 30%에 달하는 1540만 명이다. 이 가운데 65세 이상 고령자 비율이 845만 명으로, 절반이 넘는 55.2%에 달한다. 그 다음으로 어린이가 324만 명, 장애인이 263만 명 순이다.
공동회견에 참여한 허영구 노년알바노조(준) 대표는 “노인들도 이동하지 않으면 인권이나 보람된 삶을 보장받을 수 없다”며 “이번 전장연의 지하철 투쟁을 통해 노인들이 타는 엘리베이터가 장애인들의 희생과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전장연 동지들의 투장에 연대하겠다”고 말했다.
일부 정치인들이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관련, 소수자를 혐오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 갈등을 키운다는 비판이 일고 있으나, 지자체에서는 이동권 보장을 위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서울교통공사는 2024년까지 지하철 모든 역사에 ‘1역사 1동선’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지난 3일 밝혔다. 1역사 1동선이란 지상에서 승강장까지, 교통 약자가 타인의 도움 없이 엘리베이터로 이동 가능한 동선을 뜻한다.
현재 공사에서 운영 중인 서울지하철 1~8호선 275개 역 중에는 254개 역에 1역사 1동선이 확보돼있다. 엘리베이터가 전혀 설치되지 않은 용답역과 남구로역은 각각 올해 5월과 2024년까지 설치를 완료할 예정이다.
대통력직 인수위원들 역시 전장연 측을 만나 입장을 들었다. 지난달 29일 사회복지문화분과 간사인 국민의힘 임이자 의원과 김도식 인수위원 등은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등과 30분간 면담을 진행했다. 인수위 측에 전달한 ‘장애인 권리 민생 4법 재개정 요구’에는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중증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장애인 콜택시 같은 특별 교통수단 지원 등이 담겼다. 김도식 인수위원은 “더 기다리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며 “20년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부분들은 단기·중기·장기적인 면에서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교통약자를 위한 이동권 보장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버스의 경우 교통약자들이 지역 간 이동할 때에 이용하는 교통수단 중 가장 높은 이용률(55.1%)을 보인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각 도시 별 시내버스 중 저상버스 비율은 서울시 57.8%, 부산시 27.3%, 대구 34.9%, 인천 22.7% 등 여전히 저조하다. 저상버스는 차체가 낮고 출입구에 경사판이 설치돼 접근성이 비교적 좋은 버스다.
그나마 저상버스는 형편이 나은 축에 속한다. 교통약자 이동편의증진 예산의 90%가 저상버스 도입에 편중됐기 때문이다. 나라살림연구소가 5일 공개한 ‘교통약자 이동권 예산 현황 분석 및 개선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국토교통부가 배정한 특별교통수단(장애인콜택시 등) 도입보조사업 예산은 93억6100만 원으로, 비율로는 8.6%에 불과했다. 교통약자 장거리 이동 지원사업 예산은 2019년 이후 매년 감소해 올해는 5억 원이 책정됐다.
보고서는 “고령 인구 비율이 17.3%에 달하는 등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되는 우리나라 현황을 고려할 때, 교통약자 지원사업의 확대는 타당성이 충분하다”며 “국가는 생활 편의에 필수인 기반 시설과 최소한의 서비스를 모든 국민에게 공평하게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은 많은 노인을 비롯한 많은 비장애인들, 교통 약자들의 이동권과 도시 서비스 접근성을 함께 끌어올린다.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이 약한 몸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훨씬 안정적이고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면 기력이 없어지고 건강을 잃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순리다. 지하철을 메운 외침을 출근길 가로막는 걸림돌로만 치부하면 안 되는 이유다.
■ 2020년 9월의 책
- 도서명: 진화한 마음
- 지은이: 전중환
- 출판사: 휴머니스트
왜 연인과 헤어진 후 남자는 ‘같이 못 잔 것’을 더 후회하고, 여자는 ‘같이 잔 것’을 더 후회할까? 가을이 되면 마음이 허전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많은 인연 중에서 ‘친구’를 더 챙기는 이유는?
이 책은 위와 같이 인간이 행동할 때 선택의 기준이 되는 ‘마음’에 대해 분석한 심리학 이야기다. 저절로 생기는 것이라고 여겼던 ‘마음’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게끔 설계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기 위해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진화’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했다.
그렇다고 진화심리학에 대한 입문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진화심리학의 이론적 토대와 최신 연구 동향에 대해 주로 우리 주변의 상황을 사례로 들어 소개하고 있다. 생존, 짝짓기, 혈연, 집단생활, 폭력, 문화, 학습, 성격, 도덕, 정치, 정신장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진화의 관점에서 쉬우면서도 색다르게 설명한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진화심리학이 학문으로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이어서 윌슨의 ‘사회생물학’과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한다. 이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 근원을 찾아간다. 모든 동물의 행동을 ‘유전자의 눈’ 관점에서 연구하는 사회생물학, 행동생태학 중에서 인간에 적용한 학문이 ‘진화 사회과학’이고, 이 ‘진화 사회과학’ 중 인간의 진화된 심리 기제를 강조하는 접근법이 ‘진화 심리학’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진화심리학의 핵심을 “마음은 인류가 진화한 먼 과거의 환경에서 조상들이 직면했던 적응적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된’ 심리 지제들의 묶음이다”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선택이 바로 유전자다. 마음의 복잡한 구조를 진화의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다.
얼마 안 된 짧은 시간이지만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과학으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과정에서 많은 오해가 있었다고 한다. 진화심리학에 대한 오해와 부정을 불식하려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큰 노력을 기울인다.
이 책은 인간의 보편적 심리에 대한 이해와 통제를 위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학문과의 접촉이라는 의미 외에 자신과 외부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길을 알게 해준다.
▶ 책 읽은 소감: 심리학은 왜 어려울까? 가장 큰 이유는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 옳고 그름의 최종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도 새로운 관점에 대한 당위성과 주장을 반복적으로 한다.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에서 사례 언급은 많았으나 명쾌한 결론이 없어 아쉬웠다. 그런데도 융이나 프로이트가 중심인 기존 심리학의 범주를 깨트리는 새로운 발상이 흥미로웠다. 최근의 학문 트렌드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 평점: 3.8 (5점 만점)
▶ 생각해보기
- 작가는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며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반박했습니다. 유전학, 진화생물학, 행동생태학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론이 문학비평, 문화이론, 정신분석학 등에서는 핵심적인 이론으로 대접받고 있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했는데요. 이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p.177)
- 진화심리학자들은 마음을 공학처럼 연구해 마음이 어떻게 진화된 설계인지 가설을 세운 후, 마음이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한 설계상 특질에 대해 추론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새롭고 검증 가능한 예측을 끌어낸 후 그 예측을 실제로 검증하면서 새로운 발견에 이른다고 진화심리학은 이야기하는데요. 이런 진화심리학의 과학적 접근법이 과연 학문의 진보인지, 사이비 과학의 그럴듯한 주장인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p.48)
- 저자는 ‘혐오와 편견’에 대해 말하면서 전혀 전염병을 옮길 가능성이 없는 이들에 대해서도 편견이 쏟아지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화재경보기 원리’(smoke-detector principle)가 적용되는 경우라고 이야기합니다. 저자가 편견의 예로 든 노인, 장애인, 비만 외에 ‘화재경보기 원리’가 적용되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편견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p.89)
- 샐러 팀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외부 자극을 주어 무의식적인 믿음을 심어주면 잠재적 혐오 유발 요인에 대한 혐오 반응이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 경우 과잉 반응뿐만 아니라 외부 자극도 왜곡된 사실이었는데요. 현대사회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는 ‘가짜뉴스’ 와 편향적인 매스미디어의 콘텐츠라 할 수 있습니다. 혼돈의 시대에 가능한 한 객관적인 가치관과 의견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개인과 사회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p.92)
- 저자는 책에서 다양한 측면에서 보이는 인간행동들의 이유(진화한 마음)는 어쩌다 우연히 행동한 대응으로 번식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p.380). 진화심리학은 원래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는 주장으로 어떤 현상을 합리화하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진화한 이유를 찾아 더 나은 삶과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학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지구에서 오직 인간만이 이기적인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해석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진화적 시각은 인간 본성을 한 발 떨어져서 차분히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더 나은 삶과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든지 본성을 거역할 수 있다.” 이런 저자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시나요? (pp.382~383)
그의 집은 바다에 있다. 바다 위에 집을 짓고 산다는 얘기가 아니다. 꿈과 정신의 집, 그걸 바다에 두고 산다. 다시 말해 바다에 홀린 사람이다. 요트를 타고 대양을 누비는 모험에 심취해 달리 남은 욕망이 없다. 이렇게 몰입이 깊어지자 즐거움이 커졌다. 즐거움이 커 몰입이 깊어졌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단 한 번 주어진 생을 으으 즐거운 쪽으로 몰아가는 사람의 정경엔 노련한 인생 항해술이 비친다. 뚝심과 낭만으로 반죽된 고유의 기풍이 서려 있다.
김승진 선장(58). 해양모험가 또는 요트탐험가로 불린다. 요트란 일종의 일엽편주. 버들잎 하나처럼 미미한 동체로 물살을 가르는 미니 선박. 주로 유람이나 경주 목적으로 연안이나 강, 호수에 띄워진다. 그러나 김승진은 요트를 타고 저 창망한 대양을 활개 친다. 이미 지구를 세 바퀴 일주했다. 지난 2014년엔 단독 무기항(無寄港), 무원조(無援助) 요트 항해로 세계 일주에 도전해 성공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첫 기록이라서 당시 언론이 들썩거렸고, 이후 요트 애호가들이 늘어났다.
그의 쾌거에 가장 열렬히 환호한 건 김승진 자신이었겠지. 가슴 깊이 키워온 꿈을 드디어 성취한 만족감으로 말이다. 흔히 내가 나를 지극히 사랑하며 살더라도 나의 겉과 속은 달라 자주 분열되기 십상이다. 품은 지향과 실제의 삶을 일치시키기가 어디 쉽던가. 알고 보면 갈지자 행보를 일삼는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김승진은 바다로 겨냥된 꿈, 모험이 있는 삶으로 뻗은 꿈 하나를 실천으로 이룬 게 아닌가. 자신에게 장미꽃을 바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아직 고프단다. 이왕지사 내친 김에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싶다는 거다.
“무기항 단독 요트 항해로 지구를 일주한 사람은 전 세계에 100여 명이 있다. 이제 나는 더 격렬한 항해에 나서고자 한다. 올 연말 ‘이모카(IMOCA) 오션 마스터스 월드 챔피언십’에 출전할 예정이다. 세계 최정상급 요트맨들이 모여 실력을 겨루는 레이스로, 속도 경쟁이 벌어진다. 누가 더 빨리 지구를 한 바퀴 도느냐, 그게 핵심이다.”
대양의 거친 파랑과 맞붙기에 이골 난 사람이라 아마도 근육이 울룩불룩한 터프가이이겠거니 했으나 전혀 아니다. 날씬한 체구에 눈매는 온순해 정신의 강골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얼른 짐작되지 않는 인상이다. 가지런히 다듬은 콧수염은 다소 코믹해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게다가 그윽이 상대를 응시하는 버릇으로 자리를 차분하게 만들어 대화에 리듬이 붙는다.
이 세련된 요트 선장의 원래 전공은 미술. 그러나 미대를 다니면서도 그림보다는 스킨스쿠버에 푹 빠져 살았다. 사회에 나와서는 프리랜서 다큐멘터리 피디로 줄곧 뛰었다. 고베 대지진의 현장을, 북한 꽃제비들의 참상을, 여전히 석기시대 풍색으로 살아가는 파푸아뉴기니 오지 부족의 태평한 삶 따위를 다큐로 제작해 세상에 알렸다. 지구촌 곳곳의 참경과 진경을 찾아다녔으니 일찍부터 탐험으로 종횡무진했던 셈이다.
해양모험가로서 높아진 인지도
김승진 선장이 막연하게나마 바다를 꿈꾸기 시작한 건 어릴 적에 읽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가슴에 들어와 앉으면서였다고 한다. 요트에 혼이 쏠린 것도 독서의 영향이 컸다. 일본의 유명한 요트모험가 시라이시 코지로가 쓴 ‘일곱 개의 바다를 건너서’라는 책을 읽고 무릎을 쳤던 모양이다. 바다를 누비고 싶다는 묵은 소망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방법을 알려준 책이었기에. 요트로 대양을 질주하는 행위에 노른자처럼 박힌 모험적 요소와 풍부한 가치 역시 그를 사로잡았다. 이후 그는 요트 조종 기량을 숙달했고, 마침내 크로아티아에서 중고 요트 한 척을 사왔다. 가격은 3억 원. 당시 그는 물심양면의 불황에 시달리던 중이었다. 그럼에도 고가의 요트를 사들였다. 이거 발칙한 도발? 인생의 흥미는 도발적일수록 진진해진다.
“다큐 제작자로서 능력도 인정받았고 사업에도 꽤 재주가 있어 풍족하게 살았다. 뉴질랜드에서 처자와 함께 수영장이 딸린 집에 살기도 했지.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한순간에 다 날아가더라고. 빚을 청산하고 남은 돈을 털어 요트를 샀다. 인생을 새롭게 바꿀 상황이 도래한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오래 익혀온 꿈을 실현할 절호의 찬스라 보고 바다로 떠났다.”
“2014년, 마침내 단독 요트 항해를 통한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그게 인생의 변곡점으로 작용한 셈인가?”
“그렇지. 다큐멘터리 피디에서 해양모험가로 변신했으니. 지난날, 내게도 곡절이 많았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 사람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은 건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는 뜻일 게다. 지금 당장 나를 흥분하게 하고 설레게 하는 일에 몰입하기. 늘 그걸 생각하며 살았다. 좀 위험한 상황에서 오히려 생동감을 갖기도 한다.”
“요트 항해도 모험이지만 인생 자체도 어쩌면 모험의 연속이다.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지루한 모험. 이건 달아날 길을 좀체 허용하지 않는다. 당신의 요트 구입에 가족들이 원성을 터뜨리진 않았나?”
“가족은 나를 좀 특별한 사람으로 간주해 그냥 인정해줬다. 게다가 난 허영에 찬 모험가가 아니다. 마지막 남은 자금으로 왜 집을 사지 않고 요트를 샀느냐며 이상해들 하지만 그건 투자이기도 했다. 집 대신 요트 모험에 투자했거든. 난 현재 강연 활동 등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해양모험가로서 인지도가 높아진 덕분이다. 투자 효과가 발생한 것이지. 국내 해양레저 산업은 아직 불모지이지만 머잖아 블루칩으로 떠오를 거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란 얘기다.”
“실용적 의도가 다 있었구나.”
“맞다. 다 계산이 있었다. 그런 게 없다면 무모한 짓이지. 그러나 이건 본질이 아니다. 난 평생 모험으로 살아왔으며 가급적 모험의 절정에 도달하기를 바랐다. 이 점에서 요트를 이용한 항해는 더할 나위 없는 적격이었다. 모험적 항해로 무한한 즐거움을 누리자는 것. 이게 내가 추구하는 본질이다.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딱 하나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시 빨리 찾아 행복을 즐겨라! 이거저거 재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즐기는 데에서만 행복이 나오랴. 아침에 눈을 떠 하루가 더 남아 있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에서도 행복이 나온다. 급할 때 화장실을 못 찾으면 불행이지만 찾으면 행복이다. 그러나 그런 걸 행복으로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타성에 안주해 그저 ‘귀차니즘’이 증가하는 걸 바라볼 뿐이다. 어항에 갇혀 주둥이를 뻐금거리는 붕어처럼 굴레에 갇힌 삶. 거기에서 벗어나라고 김승진은 재촉하고 싶은 것이다. 타성을 들어내고 모험심으로 심장을 채우라는 권장이다.
“항해 중엔 그리움이 들솟더라”
김승진의 요트에는 ‘아라파니호’(길이 13m, 폭 4m, 무게 9t)라는 선호(船號)가 붙어 있다. ‘바다’의 순우리말인 ‘아라’와 달팽이의 옛말인 ‘파니’를 조합했다. 바다를 달리는 달팽이! ‘느림의 미학’이 담긴 이름이다. 조급해할 것 없이 유유낙낙 항해를 즐기되 끈질긴 달팽이처럼 좌우간 끝까지 가보자는 의지를 담았을 게다. 바람을 돛에 매달고 해면을 미끄러지는 요트. 힘과 속도와 우아함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동체다. 그는 이 돌고래처럼 아름다운 요트에 꿈과 모험과 낭만을 싣고서 ‘나 홀로’ 세계 일주 항해에 도전해 성공했던 것이다. 출발점은 충남 당진의 왜목항. 태평양을 넘어 남극해를 건너고, 대서양과 인도양을 거쳐 왜목항으로 귀항하는 코스였다. 총 항해거리는 4만여 km. 209일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209일간 혼자 망망대해를 항해하다니, 황홀한 고행 아니었을까?”
“시련이 많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위험한 순간을 모면하면 선물처럼 환상적인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규정된 룰을 깨지 않고 기어이 완주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많았지. 성공을 해야만 모험가로서의 위상과 진로가 주어질 거라서.”
“대양이라는 원초적 대자연과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가 정면으로 마주친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연상된다. 노자가 말했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비롭지 않다고. 심지어 노리개처럼 가지고 논다고.”
“내가 지금 어마어마한 대자연 속에 들어와 있다는 전율이 잦았다. 물론 태풍이나 파도는 때로 위협적이었지. 남빙양에서는 9m 높이의 파도를 만났다. 야, 그 거대한 파도에 휩싸여 요트가 미끄러지는데 살벌한 굉음이 귀청을 찢더라고. 내가 간덩이가 큰 사람이지만 무시무시한 공포감이 몰려왔다. 선실이 천국이라면 그 한 치 밖은 지옥이었으니까.”
‘지옥’이라는 표현에서 공포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성벽처럼 견고하게 일어서 울부짖는 초대형 파도의 습격 앞에서 떨리지 않을 장사가 있겠는가. 자연의 가공할 위력에 인간의 잘난 콧대는 흔히 납작해진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게 인간이다. 벼락을 일곱 번이나 맞고도 살아난 사람이 있다지 않은가. 우리는 자주 인간 역시 하나의 자연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위대한 자연에서 나온 강인한 종이라는 걸. 김승진은 인간의 질긴 근성을 입증하듯 위기가 오는 족족 능숙히 처리했다. 물론 그럴 만한 항해의 지식과 경륜에도 힘입었겠지만.
“궁금하다. 망망대해에서 요트를 즐기기 위해선 어떤 능력이 필요하지?”
“우선은 항해술에 능해야 한다. 기기 작동은 물론, 바람을 다루는 기술이 있어야 무동력 항해가 가능하다. 잠시 뒤에 닥쳐올 위험을 미리 예감하는 센스도 중요하다. 멘탈도 빼놓을 수 없다. 두려움과 외로움을 타지 않고 혼자 즐길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이 필요한 거다.”
“아무나 할 수 일이 아니구나.”
“겁먹을 거 없다. 누구나 탈 수 있다. 열여섯 나이의 호주 여자애가 지구를 한 바퀴 돌기도 했거든. 인간이 만든 모든 탈것들 중 요트가 가장 안전하다는 말도 있다. 배가 뒤집힐까 걱정하지만 요즘 요트들엔 ‘발라스트 킬’이라는 장치가 있어 자체 복원된다. 넘어졌다가도 오뚝이처럼 저절로 일어선다고.”
“바다에서 본 가장 특별한 광경은 어떤 것이었나?”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이었다. 별들은 잔잔한 수면에도 무수히 어려 환상적으로 반짝였다. 숨이 멎는 것 같은 황홀감을 맛봤다. 내가 아예 우주에 떠 있는 기분이었지. 삶이 숭고해지더라. 가슴에 고이 담아 돌아온 밤별 풍경이었다.”
“해적도 만났다지?”
“인도네시아 순다 해협에서 해적의 추격을 받았으나 간신히 떼어냈다. 물속에 들어가 돌고래를 구경하며 놀다 상어가 덤벼들어 혼쭐이 난 적도 있다. 거대한 유빙(流氷)이 요트 곁으로 떠밀려올 때엔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말 난처했던 건 무풍(無風)지대를 만났을 때였지. 요트를 움직일 방법이 없으니.”
바람이 잘 때 바람개비를 돌리려면 앞으로 달려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무동력 요트는 바람이 잠들면 같이 잔다. 그럼 그도 덩달아 자거나, 상하이 상하이 트위스트라도 추면 좋을 테지만 그러기엔 아깝다. 잠이나 자자고 세상의 변경을 찾아간 게 아니니까. 결국 그는 흘러가는 생각들을 잡아채는 데에다 시간을 쓰곤 했다. 망망대해 한복판에서의 사색. 사색의 끝은 주로 사람에 닿았다지.
“나는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항해 중에 거듭 사람이 그리웠다. 아는 사람들의 좋았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그리움이 들솟더라. 별수 없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함께 어울려 살아야 인간이다. 그럴 때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외로움이 뭐야? 난 그런 거 몰라! 그는 그런 투로 살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러나 항해 중엔 무인도마냥 고독했던가보다. 그걸 피할 길이 있겠나. 해서 가슴으로 사람이 사랑처럼 피어올랐겠지. 나는 그에게 많은 얘기를 들었다. 개중에 저릿하게 남는 한마디. 사람이 그리웠다.
77세 현역 극작가 윤대성의 신작 (이윤택 연출·연희단거리패)가 부산 초연에 이어 서울 공연도 성황리에 마쳤다. 이 연극은 치매요양병원에서 벌어지는 치매 노인들의 사랑이야기로, 독자들이 공감할 만한 연극이다. 이에 독자들을 대신해 동년기자단 11명이 서울 공연 첫날이던 지난달 7일 공연장을 찾았다. 연극 관람 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치매 환자, 가족, 현실과 연극에서 느꼈던 치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녹취정리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동년기자단 김종억, 김진옥, 박혜경, 백외섭, 성경애, 양복희, 육미승, 이인숙, 장영희, 장원일, 조왕래
-연출가 이윤택이 말하는 연극
는 100% 하고 싶었던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이 극을 쓰신 윤대성 선생님은 지금 요양원에 계십니다. 공연 팸플릿에 쓴 ‘작가의 글’을 보면 ‘내가 지금 요양원에 있고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나이든 노부부가 스스로 요양원에 들어가 생활하면서 쓰신 글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이 치매로 돌아가신 연극계 여성의 구술 증언과 윤대성 선생님이 보내주신 ‘제3병동’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연극입니다.
-고령화 사회, 시니어 세대에 접어들었지만 치매 소재 연극은 처음
저도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지만 부끄러운 게 이 소재를 가지고 공연해본 적이 없습니다. 막상 해보니까 이게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정말 심각한 비극이 될 것 같더라고요. 사실적으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나이 든 분들의 진실과 관련된 문제인데 또 가볍게 갈 수도 없었습니다. 굉장히 힘든 작품이었죠. 조심스럽게 사례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본 검증을 치매관련 기관에서 받았습니다.
“치매에 대한 예방책이 있을 거 아닙니까?”라고 했을 때 원래 대사는 “없다, 끝이다”였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예방책을 얘기하지만 인간의 의지로서는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치매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투쟁이다. 투쟁!”으로 바꿨습니다. “없다”는 말을 “투쟁”으로요. 연극을 만드는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치매에 걸린 당사자들이 이 작품을 봤을 때 불쾌하거나 나쁜 기억을 가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것도 연극인데 너무 한 쪽만을 보여서 연극을 재미없게 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현실과 연극, 양쪽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만든다는 게 힘든 작업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을 공연하자마자 전국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한 백화점에서는 작품도 보지 않고 전국 순회공연을 제안했습니다. 내용이 고령화 사회이고, 백화점에 오시는 분들이 연세가 있는 분들이 많고 또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죠. 많은 지원은 하지 못하겠지만 전국 순회공연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동년기자단도 오늘 단체 관람을 오셨지만 시니어들의 단체 관람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 이런 연극을 해야겠구나. 정말 시니어를 위한 연극이 없었구나! 문화가 없었구나! 시니어들에게 어떤 공연 문화가 필요할까’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해피앤딩 대신 따뜻한 이별
이 공연을 하면서 극단과 저의 전략은 ‘없는 희망을 가질 수는 없다. 해피앤드로 끝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극 중에서 어르신이 치매로 죽습니다. 죽더라도 아름답게 죽자.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할 말 없지요? 그냥 가세요.”라고 말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삶의 의욕에 ‘사랑’이라고 하는 묘약을 던져서 기분 좋게 돌아가시도록 하는 정도가 목적이었습니다. 공연을 하면서 제일 두려웠던 것이 실제 시니어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은 나이 드신 분이 보아야 할 게 아니라 치매 노인을 모시는 며느리나 아들, 손자가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 연극은 창작극입니다. 그것도 77세 현역 극작가가 진짜 자신의 기억을 갉아 먹어가면서 쓰신 작품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우리는 막을 올려야 했습니다. 좀 거칠지만 우리 창작극의 역사가 100년밖에 안 되지만 창작극이 가지고 있는 감정적인 동기, 실제로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이 창작극의 매력이 아닌가 하는 심정으로 작품을 올렸습니다. 오늘 저는 보통 서성거리지 않는데 자신이 없어서 문 뒤에 서서 연극을 본 게 아니고 관객을 봤습니다. 관객을 봤는데 모르겠어요. 고등학생에서부터 시니어까지 다양하게 오셨는데 어떻게 재미있게 볼 만 했습니까?
김진옥 치매라는 주제를 가지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다뤄주신 것 같아서 아주 좋았습니다.
이윤택 그렇게 보셨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장영희 이라는 단편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가 최고상을 받았다고 해서 본 적이 있는데 이 작품과 비슷하게 사랑이 찾아오는 내용이었어요. 저는 연극이 전달하는 의미가 훨씬 가슴이 와 닿았고요, 굉장히 좋았습니다.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극중 여주인공이 전혀 기억이 전혀 안 나다가 기억이 돌아온 것인가요?
이윤택 마지막에 긴 독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건 본인의 기억이에요. 그런데 그게 여주인공의 기억이기는 하지만 재창조한 거죠. 기억의 재구성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사실 이 작품이 쉬운 작품이 아닙니다. 구조적으로요. 이게 의식과 무의식을 왔다 갔다 하죠.특히 이 할머니 역할이 굉장히 어려운 역할입니다. 쓰러졌다 울다, 웃다를 반복하죠.할머니의 고향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기본이 되고 그 기억을 밑천으로 남자 주인공이 원하는 기억 속으로 재창조해서 들어간 것입니다. 상상력, 그러니까 창조죠. 그 장면이 이 연극의 압권입니다.
양복희 스토리가 사실은 아니잖아요. 치매 환자는 과거의 기억들을 영롱하게 기억할 수 없잖아요.
이윤택 보통 치매 환자들은 확인해 본 결과 현재 기억이나 현실적인 기억은 잊어버리는 대 신 기억 하는 패턴은 있어요. 그런데 너무나 명확하게 기억한다는 것이죠. 치매라는 것이 제 일 안타까운 것은 치매 환자들의 정신이 이중적으로 갈린다고 해요.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을 자신이 안답니다. 기억이 안 나는구나 하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표정이 너무 힘들어서 연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라고 하죠. 이성이 살아있지만 한편으로는 모르는 거죠. 이 이중적 거리 때문에 힘들다더라고요.
육미승 그 흥미를 위해서 현실적으로 기억을 되살린 것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치매 환자가 잠깐 알아볼 수는 있지만 그렇게 길게 알아보지는 못한다고 들었는데 극적인 흥미를 위해서 그렇게 표현하신 건가요?
이윤택 아까 잠깐 잠깐이라고 하셨는데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가 지금 치매입니다. 어머님이 이 연극을 보셨어요. 쉽게 말해서 어머님이 이 연극을 이해를 못하세요. 그런데 또 어떤 부분은 이해하세요. 인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연극이 아닙니다. 있어야 하는 현실, 우리가 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적인 모델을 만든 것이 연극입니다. 대부분의 치매 환자들이 기억을 망각하고 뭘 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이런 꿈이 있다, 상상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다는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이 연극이라는 거죠.
장영희 호스피스 병동 이야기를 다룬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 들어가면 평균 21일 안에 사람이 죽기 마련인데 어떤 사람이 살아서 나왔다더라고요. 그래서 영화 초반에 나오다 왜 그 사람 이야기를 후반에 쓰지 않았냐고 영화감독에게 물었더니 “쓸데없는 희망을 갖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분을 배제했다”고 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치매 환자를 몇 번씩 살리고 기억도 살리셨잖아요?
이윤택 두 가지 개입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는 것도 하나의 판단 선택일 수 있죠. 우리 연극에서 기적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우리는 기 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의 기능이라는 게 어느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아주 현실적인 사고겠죠? 나는 그래도 기적을 만들어내겠다는 상당히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접근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고가 다른 것 같습니다.
정원일 질문 하나하고 소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까 뒤에서 보셨다고 했잖아요. 관객들의 반응에서 일치된 면과 가장 안 맞아 떨어진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윤택 안 맞아 떨어진 것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관객들에게 원했던 것은 딴 것은 없고 집중력이었습니다. 관객들이 하품하거나 졸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중이란 면에서 확실했습니다. 그리고 더 알맞았던 점은 조금 웃어줘야 할 때 다 웃어주셨고 조 금 긴장해야할 때 다 긴장했고요. 저는 오늘 관객에 대해서 상당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원일 소감을 말씀드리자면 남녀 주인공이 대화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갈 때 가장 재밌었습니다. 다른 배우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장치를 안 해 놓으셔도 두 분이 치고받는 대사들이 집중력 있고 재밌었다.
조왕래 치매관련 연극이라기에 전철로 2시간 거리인 파주 월롱에서 왔습니다. 치매 전문 봉사자 활동을 5년째 하고 있는데 수많은 치매 환자들을 만나고 있어요. 주로 치매 환 자들 중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연극을 통해 일반인들이 치매라는 병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 늘어나게 되면 치 매 환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텐데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 어(老老Care)가 될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도 바뀌어야 합니다. 다음에 그런 내용을 연극에 넣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윤택 치매의 원인은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은 가족에서 온다는 게 있습니다. 연극에서 가족 이 재구성되잖아요. “이 사람이 네 아버지다”라고 하는데 실제 아버지는 아니지만 실질적인 가족보다도 진짜 진실이 통할 수 있는 가족인 것이죠. ‘외로움이 치매의 원인이다, 치매를 사랑으로 극복해야 한다’가 애초의 주제였습니다.
성경애 많이 울었어요. 엄마가 생각나서요. 엄마가 그렇게 돌아가셨거든요. 너무 생각이 많이 나고 웃다가 울다가 배우 여러분 너무 감사하고요. 오늘 여기 오기를 너무 잘한 거 같아요. 그냥 저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나이거든요. 너무 애쓰셨습니다. 다 하 나하나 소중하게 다 잘해주셨습니다.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이윤택 오늘 주연 배우 두 명이 다 울었어요. 아까 김철영씨도 울었고 김미숙씨도 통곡을 하는데 연습할 때 평소 보지 못했는데 막 울더라고요. 오히려 울어야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진옥 그런데 실제 치매 환자는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이중인격처럼 극과 극을 치달아요. 편안하게 살았던 사람도 치매가 되면 폭발을 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 이 되는 것을 많이 봤어요. 정말 인품 좋던 분이 정말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바뀌는 것도 봤습니다. 너무 잔잔한 것 같은 느낌?
이윤택 그 부분에 대해서 예술적인 동기를 말씀드리면 치매에 대해 불편하게 갈 것인가 하 는 개념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개념에서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1915~1980)의 결핍에 대한 결핍을 채우는 쪽으로 갈 것이냐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오스트리아)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프로이트적인 것은 ‘치매의 원인’을 밝혀야 한다. 파헤쳐서 환자가 그 원인을 알아야 낫는다’는 게 프로이트적인 심리치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원래 넌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알아버리면 안 된다는 거죠. 오히려 프로이트적인 심리치료가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 났어요. 롤랑 바르트의 방법은 환자들에게 아름다운 것, 환자들에게 결핍된 부분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죠.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나쁜 점, 추악한 점은 모르게 해라, 계속 좋은 것만 이야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결핍되고 나쁜 것들이 순화된다고 하는 게 롤랑 바르트의 이론이에요. 많은 분들이 치매 환자가 연극에서처럼 곱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정말 리얼하게 보여준다면 치매 환자들은 더 나빠진다는 것이죠. 저 희가 치매병원에 가서 이 공연을 해야 하는데 가서 우리가 이런 공연을 할 때 치매 환자들이 실제로는 막 이러는 사람들도 본인들도 얌전하게 볼 겁니다. 아까 말한 대 로 연극은 현실 그대로가 아닙니다. 연극을 어떻게 만드는가 하는 것은 연극 만드는 사람들의 장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뭐 저나 우리극단이의 입장은 너무 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약간 조금은 버전 업 시키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박혜경 저는요 사실 크게 잘 모르고 왔어요. 굉장히 무거우면서도 슬프면서도 자신을 성찰 하는 시간이었어요. 저도 시니어 초년생인데 앞길에 대한 생각 자식 생각도 했어요. 어린아이들이 와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도 느꼈습니다. 의사선생님도 치매에 걸린 건가요?
이윤택 치매 사례 중에 ’오동추 목사’라는 것을 봤습니다. 의사가 치매 많이 걸립니다. 의사 가 치매 환자라는 설정, 정신과 의사들이 많이 정신병에 걸립니다. 현실을 정신병자 시각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 아버님부터 치매로 죽었고, 실제로 ’오 주여’하다가 오동추가 튀어나고는 것이고. 실제 사례였습니다. 결국 치매는 하나님도 도울 수 없는 문 제라는 뜻이었습니다. 극 중에서 의사는 치매요양병원을 자가 운영하던 사람이고 60 대였고 또 딸은 50대였잖아요. 유전이 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관 객 마지막 장면에 의사나 딸 또한 치매에 걸리면서 끝나는데 젊은 사람들도 안전할 수 없다, 남의 일이 아니란 뜻을 보여준 건가요?
이윤택 작가 선생님이 마지막 장면을 중요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치매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주고 싶었다 하더군요. 서로를 이해하는 세대 간 소통 연극이 돼야 하지 않나. 고령화 사회와 아들 세대, 손자 세대 3세대가 봐야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치매협회 전문가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고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과 불쾌감 혐오를 가지시는 분들에게 이 연극을 통해서 ‘너무 그러지 마라. 불쾌하게 꺼리지 마라. 인간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 효과를 노리는 것이죠.
장영희 저는 웰 다잉 차원에서 아름다운 마무리, 마침표에 접근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아 무 걱정 말고 가세요”하는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좋은 말로 보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이윤택 이왕 죽는 데 “편하게 갑시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외 동년 기단 의견
김종억 동년기자
대개의 사람들은 치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다. 연극 는 무거운 주제를 약간은 극적으로 구성해 무겁지 않게 했다. 실상 치매 환자가 극처럼 전개되지는 않는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있을 수가 없다. 실생활에서 한두 번쯤은 치매환자를 겪어보았거나, 현재진행형일 수 있기에 더욱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연출자의 말대로 너무 무겁게 전개한다면, 현실적일 수 있으나 보는 이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보다는 너무 가혹한 현실을 인지시키는 일’ 일 수 있다. 는 조금은 밝게 터치해 나가면서 잔잔한 마음의 울림을 가져오기에 괜찮았다. 치매와 관련된 당사자나 가족들이 드러내 놓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기에 그 상황을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그저 안으로 삭이면서 자신의 현상을 괴로워하고 속상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누구든지 나이가 들면, 올 수 있는 현상으로 자각하고 사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예방하고 관리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백외섭 동년기자
좋은 주제로 열정적인 연기를 한 출연진과 공연준비를 한 제작진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남달리 관심이 많은 것은 치매 10년차 노모가 노인요양원에 계시기 때문이다. 한 달에 2번 이상 문안드리면서 어머님을 비롯한 다른 환자의 발병 원인과 병증세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발병 원인은 연극에서처럼 유전도 있지만, 사고가 의외로 많다. 필자의 모친께서는 낙상에 따른 고관절 수술 후 치매가 천천히 진행되었다. 고령자는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조그만 사고가 치매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주위에서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고령이나 유전으로 치부하고 있다. 다양한 발병 원인을 연극에 가미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증상도 기억력 상실만이 아니다. 이상발작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때는 정상인보다 더 힘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치매를 불치병으로 여기는 현재의 의료 환경에 가슴이 미어진다. 시니어는 부지불식간에 닥치는 낙상이나 상처를 특히 조심하는 등 치매예방 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