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중 가장 아름답고 활동하기 좋은 시기는 이맘때 봄이다. 4년 전 파주시와 고양시의 경계에 오픈한 66,115㎡(2만 평) 규모의 퍼스트 가든은 경기도에서 가볼 만한 곳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장소다. 사계절 다양한 꽃이 피고 지는 이곳에서 낮에는 여러 가지 체험을 할 수 있고, 밤에는 환상적인 야경을 볼 수 있다.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하루를 보내기에 좋다.
서울에서 인접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한적하다. 드라마와 뮤직비디오 등 수많은 영상물을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가구제조업체 ㈜대주의 김창희 회장이 40여 년간의 제조와 유통 경험을 바탕으로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지금처럼 빼어난 공간으로 만들었다. 최근 봄꽃들과 초록 식물들이 그야말로 물이 올랐다.
유럽식으로 단장한 야외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하다 보면 화려한 꽃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야트막한 언덕 위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구조는 아기자기하다. 초입에서 생태 정원을 거쳐 자작나무 숲까지 한 바퀴를 둘러보려면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한다. 곳곳에 평상과 나무 그늘 쉼터가 있어 자연의 바람을 맞으며 잠깐씩 쉬어갈 수 있다.
복합 문화시설을 표방하는 이곳은 16㎡(5평)에서 99㎡(30평) 크기의 정원을 30여 가지 테마로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식당, 카페, 웨딩홀 등 편의시설도 갖췄다. 입구에는 그리스 신전을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눈에 띈다. 유럽 고대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코린트 양식의 구조물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만나는 토스카나 광장. 꽃과 풍요의 여신 플로라로 장식한 분수대에서 물이 시원스레 흘러내린다.
정원 한쪽에는 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의 조형물이 있다. 아프로디테가 사랑했던 미소년 아도니스는 사냥을 하다 멧돼지에 물려 목숨을 잃는다. 아도니스가 죽으면서 흘린 피에서는 아네모네가 피어났고, 아프로디테의 눈물에서는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지하세계와 지상세계를 오가면서, 겨울에는 땅속에서 지내다가 봄이 오면 새싹을 틔우는 식물의 신이 됐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농사의 풍요와 사랑의 결실을 축복하는 아도니스 축제가 펼쳐진다.
이 신화에는 사랑과 이별, 사계절의 변화, 축제의 기쁨 등 수많은 이미지와 상징이 녹아 있다. 퍼스트 가든은 이 스토리에 맞춰 4가지 테마의 정원을 만들어 시즌별로 다양한 축제를 연다. 봄에는 ‘꽃의 정원’, 여름에는 ‘물의 정원’, 가을에는 ‘축제의 정원’, 겨울에는 ‘빛의 정원’이라는 콘셉트 아래 새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달 초에는 튤립이 압권이었고, 이즈음엔 장미꽃이 만발했다. 매일 밤 ‘별빛축제’도 열리는데, 특히 요즘은 화려한 조명과 함께 운치 있는 봄밤 산책을 하기에 좋다.
왼쪽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대형 화단이 발길을 사로잡는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분수를 중심으로 곳곳에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석상과 푸른 상록수가 조화를 이뤘다. 경사지에 이탈리아식 건물을 짓고 계곡 형태의 공간에 단을 쌓아 만든 구조도 독특하다. 거대한 벽화를 뒤에 두고 시원스레 쏟아지는 분수는 청량감을 준다.
신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장밋빛 향연으로 펼쳐지는 로즈 가든도 멋스럽다. 중앙을 따라 길게 펼쳐지는 길은 측백나무가 줄지어 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작은 식물원과 동물원에서는 새와 동물 먹이 주기와 승마 체험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다.
작년 12월에 오픈한 자동차극장에는 젊은층뿐만 아니라, 옛날 향수를 그리워하는 40~50대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 8시와 10시에 최신작 영화 2편을 바꿔 상영한다. 규모는 차량 70대 정도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다.
퍼스트 가든의 로고에는 ‘Happiness, Together’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나무, 사람, 지구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이곳에서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곳을 찾은 어르신들은 자연 속 힐링을 체험하며 “여기가 천국”이라며 행복해한다.
“이곳에 있으면 무엇이 화려하고 과장되고 오만한 것인지, 무엇이 즐거우면서 신선하며, 창조적인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 헤르만 헤세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중에서
경기도 파주시 탑삭골길 260(상지석동 1021-3)
아파트 경비원이 주민과 갈등을 겪다가 억울하다며 스스로 자살을 택했다. 경찰이 수사를 해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겠지만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구타도 있었고 주민이 경비원을 향해 ‘너는 내 머슴이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또 ‘머슴한테 맞아 무슨 망신인지 모르겠다.’ 라는 말까지 했다는 것으로 봐서 주민은 경비원을 머슴처럼 생각하고 무시한 것이라고 여론이 들끓고 있다.
우리는 머슴이라는 말에 상당한 거부감이 있다. 과거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이 국회청문회장에서 답변하길 ‘오너인 자기가 알지 머슴인 전문경영인이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했다. 전문경영인까지 머슴취급을 하는 이런 오너의 기업이 부도를 당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며 국민의 지탄을 받을 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어사전에서 머슴이라는 단어를 정의하길 ‘머슴이란 부농이나 지주에게 고용되어 그 집의 농사일이나 잡일을 해 주고 품삯을 받는 사내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강제 징용되거나 노예처럼 팔려간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돈 받고 남의 집일을 해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돈 받고 일 해주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봉급쟁이ㆍ 일당쟁이 같은 저속한 말은 그래도 참는다. 머슴이란 말이 사전적 의미로 보면 그다지 나쁜 말은 아닌 직업의 한 종류지만 우리 머리 속에 들어있는 머슴이라는 호칭은 아주 부정적이어서 그런 말을 듣고는 누구도 못 참는다,
지금도 돈 받고 남의 집 일 해주는 사람이 엄청 많지만 아무도 ‘머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전에도 직접 면전에서 고용한 사람이 머슴을 향해 머슴이라고 부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김 서방, 이 서방’이라고 호칭하고 그 집 자녀들은 ‘아저씨’라고 불렀다.
사전에서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머슴이란 말속에는 못 배우고 배고픈 가난한 사람이라는 멸시 어감이 있다. ‘머슴밥’이라고 하면 큰 밥그릇 위에 밥 한 그릇이 또 올라갈 정도로 수북이 담는 고봉(高捧)밥을 이른다. 고봉밥을 처음부터 머슴이 먹는 것이 아니라 위에 부분을 양반이 먹고 밑에 남은 밥을 머슴이 먹어서 머슴 밥이라고 한다는 유래다. 이렇게 주인이 먹다 남은 밥을 먹었다는 것은 사실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고기를 제대로 못 먹던 시절에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은 밥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었다. 머슴은 항시 고봉밥을 먹었다.
시골 출신인 나는 실제 머슴을 많이 보고 자랐다. 머슴의 일하는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 년 봉급에 해당하는 사경(私耕)으로는 옷 한 벌 받고 명절날과 눈이나 비 오는 날은 쉬고 쌀로서 10가마니를 받았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노동 착취에 해당하겠지만, 워낙 가난하던 시절에 숙식 제공되는 직업이니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땡전 한 푼 없던 총각이 성실히 몇 년 머슴을 살면 받은 사경으로 농토도 사고 결혼도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머슴은 먼동이 트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져야 일이 끝나니 노름판에 기웃거리거나 술판에도 얼씬하지 않았다. 돈을 쓸 틈이 없으니 돈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난해서 남의 농토를 대리 경작해주고 일정 비율을 나누어 갖는 소작농은 해도 머슴살이는 피했다. 그만큼 괄시받는 직업이었다. 자신의 의사는 전연 반영되지 않고 오직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 머슴살이는 요즘 말로 자유가 없는 로봇 같은 노동 기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에 주위의 신분적 멸시를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머슴의 자식’이라거나 아버지가 머슴살이 한 사실이 알려지는 걸 수치로 알고 꺼렸다.
‘경비를 머슴 취급하는 모습을 보면 매우 화가 난다.’든가 ‘머슴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인격 문제다.’는 말에는 듣기 싫다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굳이 듣기 싫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듣기 좋은 말도 많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게 목발 두드리며 노래 부르고 다니던 1960년대 공주 시골의 청년들 중에 석싱이라는 이가 있었다. 이름이 김석성인데, 어른들은 대충 석싱이라고 불렀다. 기남이도 기냄이라고 부르는 게 충청도 사람들인데 뭐. 내 또래인 석싱이의 동생은 석윤이었지만 서균이가 아니라 성뉸이라고 불렀다.
나보다 8~9세 많은 석싱 씨는 동네 새마을지도자였다. 아니, 그때는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4H운동이었지. 4H는 1902년 미국에서 처음 조직된, 두뇌(Head)·마음(Heart)·손(Hand)·건강(Health)의 이념을 지향하는 청소년 단체다. 국내에서는 4H가 지덕노체(知德勞體)로 번역돼 농업구조와 농촌생활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협동조합 형태로 전개됐다.
조합원들이 행사 때마다 부르던 노래는 “씩씩한 흙의 용사 송정4H”로 끝난다. 동네마다 지명만 바꿔 부르던 4H 주제가다. 우리 동네 이름은 되찬이인데, 목숨을 되찾고 장수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한자로는 전혀 뜻이 다른 송정(松亭)이 돼버렸다.
석싱 씨는 농사든 무슨 일이든 다 잘했다. 지도력도 있고 조직력도 있는 우두머리 청년인 데다 얼굴도 잘생겨 동네 처녀들이 애를 태웠다. 어느 집에선가 열리던 4H회의엔 나 같은 초등학생 조무래기들도 갔는데, 밤마실 나오듯 거기 참석하는 처녀들한테서는 석싱 씨를 의식한 분 냄새와 교태를 쉽게 맡을 수 있었다.
우스운 것은 석싱 씨의 할머니였다. 평소 며느리와 사이가 좋다가도 수틀리면 “연애 걸어 시집온 년”이라고 흉보며 욕했다. 그 당시 남녀 간에 연애를 거는 건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들과 연애를 해서 며느리가 됐는데도 그걸 흉을 잡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하여간 동네 처녀들은 석싱 씨와 연애를 걸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어린 내 눈에도 다 보였다.
그런 석싱 씨가 스타일 구긴 일이 한 번 있다. 어느 가을밤에 석싱 씨네 집에서 송정4H 주최 연극 공연이 열렸다. 무대는 마루, 객석은 마당. 동네 사람 다 모인 가운데 화톳불을 피우고 한바탕 판이 잘 벌어졌다. 일제 순사인지 북한 괴뢰군인지가 양민들을 괴롭히는 내용인 건 생각나는데, 연극 제목은 잊어버렸다. 웬일인지 석싱 씨는 주연이 아니라 일제 순사인지 북한 괴뢰군인지 악역을 맡았다. 일제 순사라고 해두자.
한 순사가 숨은 독립군을 찾아내라며 주인공 처녀를 마구 닦달했다. 처녀가 울부짖으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반항할 때 그 순사의 상급자인 우리의 석싱 씨가 등장했다. 등장이랬자 방 안에서 마루로 나오는 건데, 목총을 든 석싱 씨는 방문을 거세게 열고 대차게 마루로 내려서면서 “에누리 없어 이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소리를 지를 때 몸의 균형을 잃고 엎어져 사람들이 와 웃어버렸다. 울던 처녀까지 웃었다. 석싱 씨는 바로 멋쩍게 일어났지만 그다음 대사를 까먹어 연극이 영 거시기해졌다.
나는 그때 에누리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만 각본에도 없는 말을 석싱 씨가 즉석에서 애드립(물론 이 말은 나중에 안 것)으로 외쳤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확 왔다. 에누리라는 말을 정확하게 안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다. 주로 물건을 깎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었다. 그러나 석싱 씨가 쓴 에누리는 ‘용서하거나 사정을 봐주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에누리는 1)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물건 값을 부르는 일, 또는 그 물건 값, 2) 값을 깎는 일, 3) 실제보다 더 보태거나 깎아서 말하는 일, 이렇게 세 가지 뜻이 있고 네 번째로 석싱 씨의 에누리가 있었다. “일 년 열두 달도 다 사람이 만든 거고 노래도 다 사람이 만든 건데 에누리 없이 사는 사람 있던가?”(박경리 ‘토지’),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은 상해와는 딴판으로 순후하여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물건을 잊고 가면 잘 두었다가 주었다.”(김구 ‘백범일지’) 이런 문장이 예로 제시돼 있다. 그런데 요즘은 에누리가 물건 값을 깎는 의미로만 쓰이는 것 같다.
에누리가 유명해진 건 코미디언 살살이 서영춘(1928~1986)의 ‘시골영감 서울 가는 기차놀이’라는 노래 덕분이다.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 차표 파는 아가씨와 실갱이하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깎아달라고 졸라대니 원 이런 질색. 기차는 삑 하고 떠나갑니다. 영감님이 깜짝 놀라 돈을 다 내며 깎지 않고 돈 다 낼 테니 나 좀 태워주. 저 열차 좀 붙들어요. 돈 다 낼 테니. 삼등차는 만 원이라 자리가 없어 옆의 칸을 슬쩍 보니 자리가 비었네. 옳다구나 땡이로구나 집어탔더니 삼등차에 이등칸이라 돈을 더 물어….” 이런 내용이다. 가사도 재미있지만 중간 중간의 웃음이 걸판지다.
에누리는 얼핏 일본 말 같지만 우리말이다. 세일이나 할인 이런 말보다 ‘에누리 몇 %’ 식으로 쓰면 참 좋을 것 같다. 값을 부풀리든 깎든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는 없겠지만 값을 더 부르는 에누리를 대놓고 광고하는 상인들은 없겠지.
석싱 씨는 그 뒤 어떻게 됐을까? 농사를 버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 대전인가 어디에선가 노동을 하며 산다는 말까지는 들었지만 그다음은 모르겠다. 하지만 에누리라는 말을 알려준 것 하나만으로도 석싱 씨는 내 삶에 의미가 있는 분이다. 선한 사람이니 어디에서든 부디 건강 평안하고 에누리 없는 복을 받으시기를.
번잡한 도시생활을 하다 보면 문득 흙냄새가 그리울 때가 있다. 무전여행하듯 어디론가 훌쩍 떠나 머리를 식히고 오고도 싶다. 푸성귀 심어 먹는 걸 좋아해 주말농장을 빌려 농사 흉내를 내어보기도 하지만 바쁜 일정이 생기면 나 몰라라 내팽개치곤 한다.
마음도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자주 부린다. 내가 원하는 날에 휴식 같은 특별한 일상을 계획할 수는 없는 걸까. 이런 사람들에게 농사체험활동 프로그램 ‘우프’를 소개한다. 하루 4~6시간 농사일을 도운 뒤 숙식을 제공받고 덤으로 주변 지역 여행까지 즐길 수 있다.
우프(WWOOF)는 World-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의 약자다. 1971년 영국에서 시작돼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미국, 일본 등 전 세계 150여 개 국가에서 1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든 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농사일을 돕는 사람은 ‘우퍼’(WWOOFer), 노동한 대가로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농가(농장) 주인은 ‘호스트’(host)라 불린다.
각 나라에 대표부가 있고 우리나라는 ‘우프코리아’가 농장을 선발해 관리, 교육한다. 현재 국내 우프 농가는 70여 곳. 반드시 친환경 농사를 지어야 하고 서류→전화→방문심사를 거쳐 선정되므로 안심하고 방문해도 된다.
해외 우퍼도 가능하다. 활동하려면 희망하는 나라의 우프 사이트에 가서 1년짜리 멤버십에 가입하면 된다. 대략 드는 비용은 5만~8만 원 정도. 우프코리아는 1년 회비가 5만 원이다. 회원이 되면 각 농가 정보를 볼 수 있고 원하는 농가에 자기소개와 함께 방문 희망 날짜를 신청한 후 호스트의 승인을 기다리면 된다. 대부분 1주일에서 한 달간 체류하며 농사일을 돕는다.
우퍼로 활동하기 위한 특별한 자격은 없다. 나이 제한도 없고 신체와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국내 우퍼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특별 지역 농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삶의 경험과 철학을 나누어줄 수 있는 매력적인 호스트를 선택하기도 한다. 숙식비가 따로 들지 않아 우프 활동을 통해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도 있다. 전 세계 우프 여행도 가능하다.
아직은 20~30대의 활동이 두드러지지만 최근 들어 시니어 비율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우프코리아 관계자는 “호스트의 연령대가 은퇴자들 나이와 엇비슷해 우퍼로 왔다가 깊은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면서 “특히 귀농·귀촌을 꿈꾸는 시니어에게는 농촌의 삶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기에 안성맞춤이고, 농촌에 정착하면 인연을 맺은 호스트가 여러 가지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정국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지금 세계는 각자 빗장을 걸어 잠그고 외부 배제와 통금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코로나 초창기 시절, 남의 집 불구경하던 유럽국가들과 미국이 막상 본인들 발에 불이 떨어지자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무작정 도시를 셧 다운시켜버렸다.
위기에 닥칠수록 전 세계가 연대하고 공동체로 바이러스에 맞서는 대신 각 국가마다 대문을 걸어잠그고 그 빗장 안 세계에서도 또 다시 섹터를 나눈다. 이럴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정보에 뒤처진 노년층과 충분한 재화가 없는 저소득층들이다.
미국에서 살아왔던 나는 천사들의 도시라는 로스앤젤레스 시내 한복판 도로들을 점령한 채 텐트를 치거나 골판지 박스로 집을 짓고 도로 한복판을 술과 마약에 찌들어 어슬렁거리던 홈리스들을 봐왔다. 이들 홈리스들이 집단으로 모여있는 도시 한복판을 지날 때마다 멧 데이몬과 조디 포스터가 출연했던 할리우드 영화, '엘리시움(Elysium)'에서 그려낸 황폐해진 2154년의 지구를 미리 보는 듯하여 공포에 가까운 충격을 느끼곤 했다.
만약 이들 홈리스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럽다. 무질서와 공포스러운 게토의 생활을 영화 '엘리시움(Elysium)'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화면으로 접해본 탓인지 지구의 황폐화를 그려낸 영화들은 이후 내 영화 플레이리스트의 단골 장르가 됐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공동체다. 꿋꿋한 척, 멋있는 척, 은근 외톨이로 살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와 본래 내가 꿈꿨던, 하고 싶었던 여러 가지들을 찾아 다니다 보니 내가 무척이나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사람이란 걸 알았다.
한국 사회에서 실패한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머나먼 미국까지 아이를 끌고 이주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딸아이와 단 둘이 꾸렸던 가정은 전쟁의 상흔으로 뒤덮인 폐허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으르렁거리며 날카로운 발톱을 할퀴어대던 정글 같았다.
그래서일까?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경외의 대상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새로이 만난 친구 중에 양수리 인근에서 농사도 짓고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삶을 개척해나가는 이가 있다. 아직 그와의 관계가 깊지 않아 속속들이 속내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부럽다. 옥수수와 감자, 당근 등등 전혀 농사 한번 지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손으로 남편과 함께 씨앗을 뿌리고 추수를 한다. 기꺼이 이 친구의 친환경 농산물을 구매하면서 기쁘다. 주위에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오랜 대학 동기는 대학을 자퇴하고 전북 진안으로 내려가서 20년 넘게 농사를 짓고 있다. 오랜만에 진안에 내려가서 친구를 만났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농사지은 호박이며 가지며 풍성하게 받아왔다. 친구가 수확한 가지로 볶음을 만들어 먹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20년 넘게 고생하며 이제 농부로 제법 자리 잡은 친구의 고생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공동체란 것이 거주와 깊은 연관이 있다 보니 건축가들의 실험적인 공동체는 일반인에게는 생소하면서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대상이 되곤 한다. 2018년 봄에 방문했었던 애리조나의 아르코산티란 공동체가 바로 그런 곳이다.
애리조나 사막 한가운데에 세워진 생태환경도시를 건축하기 위해 모여 사는 공동체.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인 파울로 솔레리가 1970년부터 시작한 생태환경도시로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고 일터와 거주, 문화를 한 권역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목표로 현재까지 건설 중이다.
이들의 공동체를 체험하고 배우기 위해 전 세계에서 연수자와 투어 참가자들이 모여든다.
마치 고대 그리스 아크로 폴리스 같은 공동체로서 구성원들은 함께 작업하며 거주하고 문화를 즐긴다. 아르코산티 중앙에 위치한 아르고에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공연될 듯한 원형 무대가 있다. 투어 시간에 맞춰 이곳 아르코산티의 기념품인 주물 풍경을 만드는 과정을 무대에서 보여준다.
아르코산티에는 공동체 곳곳에 풍경이 걸려 있는데 이 풍경은 이곳 아르코산티의 주 수입원이기도하다. 사막의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풍경이 천천히 흔들리며 청아한 소리를 들려준다. 마치 한국의 사찰 처마에 달려 있는 풍경소리와 똑같아 함께 했던 일행들이 모두 놀랐다.
아르코산티가 풍경을 만들게 된 배경에는 건축가 솔레리가 뉴 멕시코주에서 만났던 지인의 권유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 지인이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는데 당시 한국 사찰의 풍경을 보고 크게 감동받아 솔레리에게 풍경 제작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솔레리도 이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니 아마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며 영롱한 소리를 들려주는 풍경이 곳곳에 걸려 있어 아르코산티를 거닐다 보면 마치 고향인 한국에 돌아와 어느 산사를 방문한 듯 몸과 마음이 차분히 안정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세상은 너무나 어지럽고 사분오열된 인간들은 목청을 돋우며 서로에게 삿대질을 한다. 상처를 보듬고 토닥여줄 공동체가 그리운 요즘, 애리조나 사막에서 만났던 아르코산티에서 땀 흘리며 주물을 붓던 젊은이가 생각난다.
구글 포토에 앨범으로 만들어두었던 사진을 꺼내보며 이 글을 쓰기까지 이어지는 잠깐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결합된 힐링 공간, 우리가 글쓰기를 하는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다. 아르코산티를 찬찬히 걸으며 눈길을 잡아 끈 보드 위의 그림을 하나 소개해본다. 아르코산티에서 운영하는 워크숍에 참가했던 어떤 이가 그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We want to discourage the vision. Of a pleasant 5 week vacation.
문장만 보아도 숨 가쁘게 일만 하며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혹은 그녀는 이곳에서 5주의 휴가 동안 어떤 깨달음을 얻었던 것일까?
삶의 목적이 모두 성공을 강요하는 경쟁사회다. 세속적인 성공만을 향해 달려 나가는 무리들 속에 조금이라도 뒤쳐진 듯하면 코어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코어에 들어와야 한다며... 그래야 뒤처지지 않는다며….
책임을 지고 의무를 수행하기 급급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에서 벗어나 비로소 벤치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다. 간혹 나만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의지를 격려하며 경쟁의 한가운데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 문득문득 고민한다. 지금 내겐 꼭 그렇게 중심에 살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여주는 손길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처음 도전하는 일은 경이로운 일인가 보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농사일을 도왔지만 벌써 50년 전 일이다. 그땐 시키는 일만 따라 했기에 신비로움도 없었다. 생계를 위한 노동의 일이니 고되고 힘들 뿐이었다. 도시에 살면서 모든 것을 시장에서 사 먹어야 했다. 얼마 전 은퇴하면서 주말농장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도보로 30분 거리에 주말농장을 분양하는 곳이 있었다. 성내천 산책로 바로 근처였다. 송파구청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경쟁 속에 분양이 끝났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그 옆 일반분양하는 곳을 계약했다.
분양계약을 마치니 주인이 웃으면서 농담을 건넨다. ‘이제 선생님 땅입니다. 가져가세요.’ 서울 한복판에 내가 농사지을 땅이 생겼다니 기분이 묘했다. 비록 1년 계약의 작은 땅이지만 분명 내 소유다. 1년 먹을 채소와 야채를 해결한다니 기대가 부푼다. 주위 환경도 좋았다. 근처에 벚꽃이 줄지어 핀 성내천이 흐른다. 물속에는 잉어가 큰 입을 벌리고 먹이를 조른다. 서울 도심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이야.
아내와 함께 무엇을 심을까 상의하는 일도 즐거웠다. 경험자의 조언과 인터넷을 찾아보며 심을 작물을 선정하였다. 농작물도 심는 시기가 있어 아무 때나 심거나 씨뿌리는 게 아니었다. 우선 감자와 채소 씨를 뿌리기로 했다. 감자는 집 베란다에 있는 감자를 쓰기로 했다. 봄이 되니 싹이 터 있었다. 씨눈을 중심으로 두세 조각씩 잘라내니 씨감자가 되었다.
농장 옆 화원에는 수 십 가지 씨앗을 팔고 있었다. 상추도 식감과 맛이 다르다는 흑삼치마, 모듬 상추, 상추 적치마, 뚝섬 적치마 등 종류도 다양했다.
20년 농사를 지은 농사꾼의 조언에 따라 상추는 씨앗을 뿌리기로 했다. 모종보다 씨뿌리는 상추가 훨씬 풍성하고 맛있다고 한다. 다른 야채로는 부추, 케일, 쑥갓, 당귀, 청경 근대, 아욱 등을 골랐다. 토마토는 큼직한 일반 토마토와 방울토마토 등 3포기씩 심기로 했다. 고추도 풋고추와 매운 청양고추 그리고 가지, 열무를 순차적으로 심고 밭 입구에 옥수수 몇 포기를 수위병처럼 심기로 했다.
거름을 주고 흙을 골라 만든 둔덕에 골을 내고 씨앗을 뿌렸다. 파란 새싹이 자랄 생각에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하루가 멀다고 주말농장을 찾게 되었다. 손수 씨 뿌려 가꾸는 농장이라 애착이 가고 궁금해진다. 첫 아이를 기다리는 심정이다. 평소 야채를 많이 먹기에 직접 키우는 주말농장은 참 잘했다 싶다. 주말농장이 왜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다음과 같은 혜택이 있었다.
1. 신선한 야채를 직접 생산해 먹을 수 있다
2. 씨 뿌려 가꾸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3. 식물의 생명력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4. 자연과 소통할 수 있다.
5. 이웃과 나눠 먹으며 우의를 나눌 수 있다.
6. 오가며 건강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7. 나만의 놀이터가 생긴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새싹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설렘이요. 커가는 식물들과 소통하는 일이다. 심은 대로 거두어들이는 자연의 겸손함. 잡초를 제거하고 가꾸며 수확하는 기쁨에 흠뻑 빠질 것이다. 수북이 올라온 야채를 뜯어, 밭 자락 원두막에 올라 삼겹살 구워 먹는 들 밥맛은 어떨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창간 5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나이 먹음에 저항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추레해진 노년으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노년다운 노년을 스스로 짓고 좇고 이루려 애쓰게 됩니다.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노년은 노년 나름의 아름다움과 무게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이러한 노년의 삶을 도와주려 우리 사회에 탄생한 드문 잡지입니다.
그동안 다섯 해를 지내면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노인들에게, 노인이 되어간다고 느낀 분들에게, 많은 것을 되살피게 해주었습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꿈을 안겨주었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꿈의 공간으로 우리 옆에 늘 있어주었습니다.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노년에 새 로운 꿈을 지니게 해주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노년들에게 참 드문 놀이터를 제공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 놀이터에서는 꿈의 실현이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실증하는 온갖 놀잇감을 펼쳐놓고 누구나 마음껏 즐기도록 해주었습니다. 익숙한 이제까지의 삶을 다듬을 수 있는 놀이도 할 수 있고, 그야말로 꿈도 꾸지 못했던 모험을 할 수 있는 놀이도 감행할 수 있고, 보고 듣고 만지고, 그리고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놀이도 지천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 꿈의 공간이, 그 즐거운 놀이터가, 까맣게 높거나 멀어 내가 가 닿을 길이 없다는 생각을 한 노년도 있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가끔 스며들기도 했습니다. 꿈의 자리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느낌보다 자신의 초라함과 누추함을 새김질해야 하는 계기를 만나야 하는 것은 노년에게는 무척 견디기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한 자리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만, 그런 노년에게 드리고 싶은 설명만큼의 자성을 스스로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성숙한 놀이터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다시 다섯 해, 어떤 모습으로 우리 노년들의 삶 안에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자리를 잡을지 궁금합니다. 제가 그때까지 있어야 할 이유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는데, 어쩌면 그것의 가능성 여부는 매달 나오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결정해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듭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창간 5주년을 축하드립니다.
- 정진홍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인생 이모작의 나침판 ‘브라보 마이라이프’ 창간 5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베이비부머들의 본격적인 은퇴가 시작될 무렵 창간되었지요. 마침 귀농.귀촌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때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창간기념 메시지에서 농업과 농촌이 은퇴자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후 저는 3년 6개월의 장관직을 끝으로 고향집으로 돌아와 노모를 모시며 텃밭을 가꾸는, 꿈에도 그리던 은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느 농부와 다름없이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땀 흘려 가꾸어 수확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늙고 지친 농업과 농촌, 무너지는 지역공동체를 보며 과연 무엇을 하였는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지방 소멸과 농촌 붕괴를 막는 일이 급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농사 짬짬이 경상북도의 농촌살리기 자문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고위공직에 있던 사람이 낙향해 노모와 사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직접 농사를 짓고 하위직 공무원으로 일한다는 게 없던 일이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요. 선하심후하심(先何心後何心)이란 말처럼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처처히 걷는 나그네에게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당산나무처럼 위안과 격려를 주는 소중한 친구가 됩니다. 더 크고 푸른 거목으로 자라나 판에 박힌 삶에 지친 방랑자들이 기대어 가치 있는 인생을 꿈꾸며 쉬어갈 수 있도록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탄생한 지 5년이 됐다니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충실히 담아내고 애로점을 함께 고민하며 다양한 정보와 공감의 메시지를 담은, 어른을 위한 잡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큰 언덕이 됩니다. 사실 나이 들어가면 몸이 힘들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마음도 시들어갑니다. 거기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로 너무 지치고, 불안으로 피로가 쌓여가고 있습니다. 다들 잠을 많이 자고 푹 쉬어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고 호소합니다. 몸이 쉬어도 뇌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로토닌에는 감정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 습관’을 잘 들여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상을 하면 행복과 사랑의 뇌 신경물질이 많이 분비됩니다.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이 그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한 말과 행동으로, 봉사와 배려로, 옥시토신과 세로토닌을 분비시켜 젊고 건강하게 희망 바이러스가 퍼지기를 바랍니다.
UN이 평생연령 기준을 다시 정립해 발표했습니다. 0~17세는 미성년자, 18~65세는 청년, 66~ 79세는 중년, 80~99세는 노년, 100세 이후를 장수노인으로 구분했습니다. 이 기준대로라면, 시니어 대다수는 아직 청년입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 여러분, 청년이 되어 올 한 해도 행복하고 활기차게 살아갑시다~
- 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
산중의 봄은 더뎌 아직 볼 꽃이 없다. 골을 타고 내달리는 바람에 억새가 휜다. 그렇잖아도 겨울 칼바람에 이미 꺾인 억새의 허리, 다시 꺾인다. 길섶엔 간혹 올라온 애쑥. 저 어린 것, 작달막하나 딱 바라진 기세가 보통 당찬 게 아니다. 겨울을 견디어 불쑥 솟았으니 잎잎이 열락(悅樂)으로 설렐 게다.
상주시가 ‘호국의 길’이라 이름 붙인 둘레길이다. 때 묻지 않은 산과 강의 흥겨운 어우러짐을 볼 수 있다. 황희 정승의 위패를 모신 옥동서원(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을 기점으로 삼는다. 강을 따르는 평평한 오솔길이라 걷기에 좋다.
여덟 개의 여울목이 있어 구수천 팔탄(龜水川 八灘)이라 부른다. 크거나 깊은 물줄기는 아니다. 그러나 유장한 맛을 풍긴다. 가파른 벼랑을 끼고 굽이쳐서다. 강을 따라 오솔길이 솔솔 풀려나간다. 묵은 정으로 찾아든 길도 아니건만 구면처럼 정겹다. 눈이 시릴 듯 시원한 건, 보이느니 절반은 산이요 절반은 강, 수려한 풍치에 안구가 씻겨서일 게다. 이런 데가 드물다. 둘레길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많은 요즘과 달라 예전엔 거의 무인지경 오지였다. 산과 강이 농밀하게 어울려 허전한 구석이 없다.
좋구나! 탄성이 절로 나온다. 햇살을 튕기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 잎을 아직 매달지 못한 채로도 생기를 머금어 완벽한 나무들. 저만이 간직한 비밀에 겨워 스멀거리는 숲. 바위벼랑 모서리를 거머쥔 소나무들의 곡예. 누가 각본을 썼을까, 풍경의 공연엔 흠결이 없다. 도시에는 없는 무대다. 연중무휴로 돌아가는 이 극장에는 입장료가 없다. 자연이 인간을 상대로 뭔가 챙기는 일이 있던가. 은근히 바라는 게 있던가. 사람만 과욕을 부린다. 그러고도 채워지지 않아 시달린다. 시달리는 사람은 그러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자연이 슬며시 보듬어주기에. 슬며시 보듬어주는 자연의 손길. 자연 속에서 흐뭇해 고마움을 느끼는 건, 그 무상의 자비가 우리를 방문할 때이기도 하다.
오솔길은 융단처럼 폭신하다, 아니 따뜻하다. 따뜻해서 혼자 걸어도 둘이라 느끼게 한다. 오솔길이 일어서서 동행하는 기분을 야기하니 말이다. 귀찮지 않은 둘. 순수한 어깨동무. 열광이나 환호가 아니라 말 없는 신뢰를 보내오는. 그래서겠지,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것처럼 삶이 얼얼할 때면 오솔길을 찾아가는 건. 찾아가는 오솔길보다 좋은 건 내 마음 안에 오솔길 하나 들여놓는 일일 테다. 오솔길이 있는 마음이라면 문지방이 없어 무정한 처신도 없을 것이다. 느려도 멀리 가는 오솔길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안달복달이 없어 세상의 과속에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후미진 산중에도 사람이 산다. 저만치에 인가가 보인다. 농가 두어 가구가 밤농사와 표고버섯 재배로 살아가는 것 같다. 고립무원까지는 아니라도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 왜 없으랴. 불편은 또 얼마나 많으랴. 그러나 지옥 구덩이에 던져놔도 적응하는 게 사람이다. 살면서 얻어지는 야생의 기질로 거뜬히 자립하고 소박한 대로 자족하는 게 산사람이다. 꽃 중에도 야생화의 향기가 더 진하지 않던가.
강을 따라 더 내려간다. 구수천 풍경이 여기에서 절정에 오르는가. 산은 높아 이제 봉우리를 볼 수 없다. 산그늘이 강을 뒤덮었다. 비죽비죽 날 선 바위벼랑들은 감히 범접 못할 위용으로 장쾌하다. 좁혀진 산곡의 폭으로 물살도 거칠어졌다. 아름다워 빼어나다기보다 등등한 기세로 뛰어나다. 이곳에서 강을 버리고 산길을 따라 모롱이를 돌면 저승골이다. 저승골? 이름이 왜 이런가.
저승골에 기억할 만한 역사가 서려 있다. 고려를 유린한 몽고군이 상주산성을 공격했다가 이 골짜기에서 패퇴했던 것. 상주의 민간인 유격대에게. 이는 ‘고려사’에 기록된 또렷한 승전 역사로, 상주의 향토사가들은 저승골에서 몽고군들이 숱하게 죽었다고 논증하고 있다. 육군본부가 간행한 ‘고려 전쟁사’도 상주산성 항쟁을 ‘대승첩’으로 기록했다. 옛사람들의 의열과 기개에 숙연해진다.
전쟁이 터지면 산하도 전장으로 화한다. 시대의 울분이 극에 달하면 산하도 죽음을 목도한다. 멀리 갈 거 없다. 구수천변 아찔한 벼랑에서 몸을 던진 옛사람이 있다. ‘정조실록’이 기린 이름,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 그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고려가 무너지자 거문고를 타 호곡(號哭)한 뒤 세상을 버렸다. 이를 애사(哀史)라고만 할 수 있겠나. 열사(烈士)의 죽음엔 비애가 없다. 절의(節義)란 실로 호방한 정조(情操)이지 않겠는가.
1982년, 우리나라에서 프로야구 리그가 출범했다. 그 후 38년, 야구와 함께 살며 모든 행적이 한국 야구의 역사 그 자체가 된 선수가 있다. 바로 유승안 전 경찰 야구단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포수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얼마 전 경찰 야구단 해체와 함께 감독직을 마지막으로 야구 최전선에서의 50년 인생을 마무리 짓게 된 그는 이제 제2의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1956년생, 베이비붐 세대로서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배트와 공으로 돌파한 그가 새롭게 도전하는 미래가 무엇인지 듣기 위해 그가 계룡산 자락에 마련한 휴양공간 유쓰카페로 찾아갔다.
프로야구 리그 출범 전 한일은행 야구단에서 포수로서의 생활까지 포함하면 197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승안 전 경찰 야구단 감독의 가장 최근 직업은 사업가다. 계룡산 자락 입암저수지 앞에 자리한 유쓰카페의 사장이 된 것이다.
“작년 연말에 오픈했어요. 이 땅을 매입한 지는 오래됐죠.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지낼 때였어요. 경기에서 이기면 머리가 맑았지만 지면 아주 피곤했어요. 옆에서 술 마시자는 사람도 많았고…. 그래서 술도 끊고 어디 힐링할 데 없나 찾아다니다가 이곳을 알게 됐죠.”
오래전부터 마음에 들어 지인들과 자주 와서 놀다 보니 땅 주인이 살살 꼬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사게 됐다. 그러나 매입한 후 임대만 하고 땅을 놀렸다.
“이곳은 제 희로애락이 다 깃든 곳이에요. 시합에서 지면 찾아와 무상무념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그러다 땅을 팔 건지 재건축을 할 건지 고민하다 저도 이제 은퇴할 시기가 됐고 직업을 또 가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어 무리해서 짓게 된 거죠.(웃음)”
이제 아내에게 의지할 나이
유쓰카페는 그 이름처럼 1~2층은 카페, 3~4층은 펜션으로 운영된다. 펜션은 룸이 4개밖에 없는 소규모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공간이 아닌, 가족들이 와서 힐링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쓴 유쓰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 자리에 아내 장은진 씨도 함께했다. 우리가 아는 선수이자 감독인 유승안은 카리스마 넘치는 강직한 원칙주의자다. 그렇다면 아내에게는 어떤 사람일까?
“아이들에겐 너무 좋은 아빠예요. 집에서는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내본 적 없고 스트레스를 표시한 적도 없어요. 아이들에게는 늘 져주는 아빠죠. 그런데 제 입장에선(웃음), 한 15년 정도는 가부장적인 사람으로 느껴졌어요.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기 결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일은 남편이 아닌 기사를 통해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죠. 그러나 60세에 가까워지면서 순화가 되더라고요. 요즘은 저와 상의도 많이 하고 말투도 엄청 부드러워졌어요.”
그렇다면 그가 변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앞에서 타박 아닌 타박을 당한 그가 슬쩍 끼어들며 한마디했다.
“우선 2~3년 전부터 여성호르몬이 증가했고(웃음) 이제 살길을 찾는 거죠. 앞으로 제가 의지해야 할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마누라니까, 안 까불려고.(웃음)”
프러포즈도 제대로 안 한 남편과 미국에 같이 간 이유
두 사람의 주거니 받거니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내와의 만남을 “홈런을 쳤다”라고 표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두 아들을 안겨준 첫 아내를 백혈병으로 떠나보내고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만난 귀한 인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혼한 후 18년을 함께 살았다. 이제 와 다소 늦은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아내에게 남편이 이상형이었는지 짓궂게 물어봤다.
“하나도 아녔죠.(웃음) 저는 구단 직원이어서 친분은 없지만 어쩌다 가끔 보는, 알던 분이었어요. 그런데 몹시 남자다웠어요. 그래서 결혼할 때 프러포즈도 없었어요. 비슷하게 한 말이, ‘네가 있어야 내가 미국으로 연수를 갈 수 있고, 네가 없으면 일본을 가야 하는데 난 미국에 가고 싶다’였어요.(웃음) 미사여구로 꾸민 말도 아니고 그저 담백했죠. 그런데 그때는 남편도 믿음직스러웠지만 두 아이들도 좋았어요. 애들과 코드가 잘 맞았거든요. 사실 지금도 남편보다는 애들과 친해요.(웃음) 그래서 결혼을 선택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죠.”
두 사람은 결혼 후 두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아내는 거의 두 아들하고만 지냈다. 남편은 연수를 해야 해서 늘 바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랬기 때문에 아이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남편이 일과를 끝내고 들어오면 밤 열두 시였어요. 그러니 저희는 저희끼리 살아남아야 했죠. 애들은 저를 의지했고 저도 애들만 바라보며 지냈어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였지만 타인의 시선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서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야구 집안의 두 아들과 막내딸
그가 한화 이글스 감독이 되어 귀국했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원래 살던 서울을 떠나 대전에서 지내야 했기에 가족끼리 똘똘 뭉쳤다. 여러모로 이러한 환경이 그들 가족을 의기투합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된 셈이다. 그렇게 새롭게 연을 맺은 부부 사이에서 남편이 그토록 원하던 딸이 한 명 태어났다. 너무 감격스러워 이름을 은혜라고 지었을 정도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딸은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런 딸에 대해 얘기하는 엄마의 모습에는 믿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걸 하면 좋겠는데 아직 못 찾았어요. 이상과 현실이 워낙 뚜렷한 아이라.(웃음) 어렸을 때도 스스로 잘 자랐으니, 진로도 알아서 곧 찾아낼 거라고 믿어요.”
“저희 딸이 천재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웃음)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 좋겠어요. 우리가 할 도리는 다할 테니까.”
두 아들은 이미 자신의 길을 찾았다. 다름 아닌 야구다. 일찌감치 야구선수로 활동해온 첫째 아들 유민상은 KT 위즈, 둘째 아들 유원상은 기아 타이거스 소속 선수로 뛰고 있다. 유승안 집안은 야구 패밀리로 유명하다.
자식농사 끝내 홀가분
지금까지 젊은이들과 함께 부딪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젊게 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지만, 사실 유승안은 다섯 살짜리 손주를 둔 할아버지다. 두 아들이 벌써 결혼해 손주까지 안겨줬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자식농사 끝난 거죠. 홀가분해요.”
아내는 남편과 살면서 의견이 심하게 부딪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소리 내어 싸워본 적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라고. 아이들과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조화가 잘되는 화목한 가족이라는 게 아내의 설명이다.
“우리 가족을 겉으로만 보고 ‘힘들었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우린 정말 잘 맞아요. 애들도 잘 커서 나름의 자부심도 있고요.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안 그랬으면 일 년 정도 살다 말았겠죠.(웃음)”
그런 아내를 유승안은 고마움 가득한 시선으로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악조건인 상황에서 여태까지 잘해왔고… 그래서 너무 고맙죠. 앞으로는 이쪽에 예속돼 살아볼까 생각 중이에요.”
“내가 동의를 해야지!(웃음)”
평생 야구만 한 유승안의 새로운 도전들
유승안은 타고난 스포츠인이다. 스포츠는 일단 도전정신이 있어야 한다. 특히 야구를 ‘토털 인생’이라고 칭하는 그는 미션이 주어지면 강하게 밀어붙이는 타입이다. “노력 안 하고 무리 안 하면 좋은 걸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제2인생에 야구가 여전히 놓여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매니지먼트, 에이전트 회사에서 고문으로 일하는 걸 검토 중이에요. 스포츠 아카데미, 재활 프로그램 등을 아우르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생긴 지 30년이 넘었는데 아직 육성, 재활 쪽으로는 체계가 안 잡혀 있어요. 현재는 영리 목적으로 야구인이 아닌 사람들이 맡고 있는데 이제 우리 1세대가 해볼 만하다 싶어요. 미국이나 일본은 그런 시스템이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거든요.”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분야는 교육 리그(시즌이 끝난 뒤 훈련이나 신인선수 발굴을 목적으로 펼치는 단기(短期) 리그)다. 경찰 야구단 2대 감독을 10년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육성 전문가로 거듭난 그는 교육 리그 창설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작년에는 우리나라 야구가 대만, 중국에 다 졌어요. 올림픽 예선도 멕시코를 이겨 겨우 올라갔죠. 동양권에서 꼴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원인은 육성에 있다고 봐요. 미국, 일본, 대만에는 교육 리그가 있어요. 한국만 없어요. 그래서 제주도에 교육 리그를 만들어볼까 해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시기가 왔다는 거죠. 그러려면 앞으로 나서는 사람과 기업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진행이 되니까요.”
둘이서만 함께 살고 싶은 마음
유승안이 일단 저질러놓고 결과를 보는 스타일이라면 아내는 한 번 더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남편이 막 나가려 하면 그녀가 제어를 한다. 부부가 그처럼 잘 어울리는 이유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남편은 꿈이 커요. 반면 저는 작지만 계획을 세우면 완벽히 하는 쪽이고. 제 꿈은 뭔가 큰 게 아니라… 우리 둘만 지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잖아요. 그래서 둘이 살면서 뭔가를 해보고 싶어요. 제주도에 가는 것도 좋고, 펜션 사업도 좋아요.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목적에서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소소하게 남편과 함께하고 싶은 거예요.”
인터뷰 내내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즐거운 농담 속에서 피어나는 시간 속에서 이들 가족이 행복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느껴졌다. 눈이 온 창 밖 겨울 호수에 비치는 빛이 새롭게 시작된 미래를 향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될 부부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풍금으로 전해지는 선율은 환상적이었다. 화음의 오묘함에 매료된 소년은 깊고 깊은 예술의 체계 속으로 빠져들었다. 음악을 한 차원 높은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는 숨은 예술가, 이종열(李鍾烈·82)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를 만났다.
예술의전당 음악당 무대 뒤로 들어갔다. 크고 작은 무대 장비들 사이에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 문패가 달린 방 하나, 이종열 조율사가 10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개인 공간이다.
“1995년 1월부터 예술의전당으로 출근했습니다. 원래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오페라단, 발레단 등 예술 단체들이 상주해 있었어요. 조율사 공간은 없었지요. 우면산 중턱에 건물 새로 짓고 다들 그쪽으로 이전하고 나니 방이 생겨 하나 얻었습니다.”
올해로 피아노 조율만 64년. 수천 명의 연주자를 만났다. 2003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내한했을 때, 연주가 끝나고 이종열에게 경의를 표하며 청중의 박수를 이끌었던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헝가리의 안드라스 시프, 이탈리아의 미켈레 캄파넬라 등 까다롭기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에게 인정받은 조율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종열의 손을 거치면 음에서 빛이 난다”며 그의 실력에 찬사를 보냈다.
“별거 아닌 거 같겠지만 저는 국위선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도 이런 조율사가 있구나 하고 말이죠.”
세종문화회관에서 15년. 그리고 예술의전당에서 25년.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장 1호 조율사다. 2007년 피아노 조율사로서는 처음으로 명장 1호가 된 이종열 조율사는 오랜 시간 음악 안에서 살아왔다. “평생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하니 행복할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요. 어떤 직업이든 다 스트레스가 있어요. 집에서 레코드판을 들을 때가 가장 편안합니다. 음악을 들을 때 뭔가 잘못될까봐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잖아요.(웃음) 제 직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유명한 연주자와 악수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 좋겠다’고 해요. 그런데 연주자마다 추구하는 소리와 음색이 다르죠. 어떤 연주자는 ‘피아노 소리를 브라이트(밝게)하게 해주세요’ 또 누구는 ‘이쪽 소리가 너무 쨍쨍거려요. 줄이면 안 될까요?’ 합니다. ‘건반을 눌렀을 때 건반이 저항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해주세요’라고 주문하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어제는 조율이 너무 좋았다는 얘기를 듣고 다음 날에는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게 제 일입니다.”
우리 가락을 통해 음을 알다
이종열 조율사는 전주 출신으로 전주 이 씨 종가에서 태어났다. 행동거지와 언어, 옷매무새에 제약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공구를 다루고 피아노와 가까이 사는 자신이 신기하다고 했다.
“양반은 뛰면 안 된다고 해서 조용조용 걸어 다녔습니다. 제사도 크게 지내는 집안이었고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시조창을 참 잘 부르셨어요. 할아버지가 선창하면 동네 분들도 따라서 노래 부르곤 했죠.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른들이 기분 좋으니까 풍악을 한 거예요. 왔다 갔다 하면서 들었는데 다 외워지더라고요.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거죠.”
학예회 때 친구들은 독창을 하거나 무용을 했는데 이종열 조율사는 무대에 올라 양반다리를 하고 시조창을 했다. 돈 벌어 제일 먼저 산 것도 클래식 음악이 아닌 시조창 레코드라고 말했다. 우리 가락에 귀가 열리더니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피아노 독주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교복을 입고 찾아다니기도 했다.
“풍금소리는 너무 좋은데 학교 비품이라 만질 수 없었어요. 여유 있는 집 자식들이 기타를 사서 배울 때 저는 달밤에 반딧불이가 돌아다니는 곳에서 하모니카를 불었어요. 할아버지가 단소를 자주 부셨는데 ‘궁상각치우’ 5음계였어요. 저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서양 음계가 필요해서 대나무를 뚫고 구멍 크기를 조절해가면서 직접 만들어 썼습니다.”
먼 훗날 생각해보니까 그 자체가 관악기 조율이었다. 불어보고 소리가 잘 나면 악기 하나를 완성해갔다.
조율을 만나다
풍금을 원 없이 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사촌이 끊임없이 전도를 하자 그는 못 이기는 척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 가야 했던 명분은 바로 풍금. 페달을 밟으면서 풍금을 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교회 집사라는 분이 풍금으로 반주를 하는데 멜로디에 옥타브를 첨가하는 정도였어요. ‘아, 저걸 내가 배워?’, ‘그럼 열심히 교회에 다니자’ 했어요. 오르간 교본을 사서 혼자 공부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음악 통론’을 펼쳤죠.”
오르간 교본을 떼고 난 뒤에는 580개가 넘는 찬송가 전곡을 쳤다. 그런데 풍금을 치는 게 너무 좋아지자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단소와 하모니카를 불 때는 몰랐는데 똑같은 장조의 3음계라도 건반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났다. 집에 있는 공구를 교회로 가지고 가 풍금을 뜯어보고야 말았다. 풍금은 놋쇠 철판을 깎아서 조율하는데 점점 어려워지고 소리는 제 소리에서 점점 멀어졌다. 스스로 해보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풍금이 일본 제품이니까 어딘가 문원이 있을 것 같았어요. 서점에서 책을 찾아보니 ‘피아노 구조, 조율, 수리’라는 책이 일본에 있었어요. 장남으로서 농사 일구고 동생들 보살피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제가 이런 책을 보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렵게 사정해서 용돈을 받아 책을 주문했어요.”
해방 후 일본과의 국교가 닫혀 있던 시절. 책이 한국으로 오는 데 두세 달이 걸렸다. 문제는 일본어였다. 해방이 되던 해 소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일본 학교들이 문을 닫으면서 한국식 교육을 받게 된 것. 해방 후 처음 발간된 ‘일본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사서 교본이 오기 전 열심히 독학하며 글자를 익혔다.
“기다리던 책이 왔을 때는 어느 정도 일본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빨리 보고 싶어서 샛길로 접어들어 논두렁에 앉아 책을 폈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피아노 구조 도면을 살펴봤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율을 시작한 거죠.”
풍금 조율을 시작하면서 피아노와 쳄발로와 파이프오르간 등의 악기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피아노를 조율해도 쳄발로 등 다른 건반악기까지 다루는 사람은 드물다.
조율의 인생을 정리하다
작년 말 이종열 조율사는 60여 년 조율사로 살아온 삶을 정리하면서 ‘조율의 시간’(민음사)을 펴냈다. 백전노장의 이야기는 담백했고 진솔했다. 베스트셀러가 됐고, 사람들은 조율사 인생에 주목했다. 재미있는 것 하나. 책을 읽다 보니 마치 판소리의 아니리가 연상되는 박자감이 느껴졌다. 그와 인터뷰를 해보니 확실히 알았다. 어려서부터 시조창을 하는 할아버지의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으니 자연스레 리듬이 말하는 습관으로 밴 것. 박자처럼 글 속에도 묻어 있었다.
이종열 조율사는 말초신경을 보호하기 위해 술과 담배를 멀리한다고 했다. 술은 모임에서 맥주 반 잔 정도, 담배는 피운 적 없다. 귀가 나빠지면 높고 낮은 음을 구별할 수 없다.
“조율 자체는 기계를 보고 해도 되지만 조율의 최고 생명은 ‘보이싱’입니다. 음색을 고르게 음량 크기를 같게, 밸런스를 제대로 맞춰야 하거든요.”
아무리 조율이 잘되어 있어도 보이싱이 안 좋으면 피아노를 못 치겠다며 일어나는 연주자도 있다고. 그는 앞서 직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토로하기도 했지만 인생 끝까지 조율에 매진할 생각이다.
“지금도 할 게 많아 보입니다. 학문은 끝이 없잖아요. 죽기 전날에도 궁금한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늘 새로운 것들이 들리고 보입니다.(웃음)”
그는 한 차원 높은 피아노 조율을 위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도 열심이다.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에서 발간한 기술 서적 중 보이싱 파트는 이종열 조율사가 집필했다. 제자들과 함께하는 ‘튜닝아트가’라는 모임도 꾸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튜닝아트, ‘조율은 예술이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면서 조율에 관해 토론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서로 조언도 해줍니다. 지금 예술의전당에 새 공연장을 짓고 있는데 훌륭한 후배가 대기 중입니다. 이제 서서히 제자들에게 자리를 내줘야죠. 100년, 200년 할 수 없잖아요.”
그는 피아니스트 뒤에 선 조율사로서의 자부심을 조심스럽게 말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관객은 조율하는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요.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에게만 박수치고 소리 지르잖아요? 그런데 연주자들은 공연장에 오면 저한테 매달립니다. 조율사의 손에 멋진 공연이, 연주가 달려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