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농촌에는 쥐가 엄청 많았다. 먹이를 구하려고 집 마당의 볏단과 부엌을 뒤졌다. 논밭에는 분탕질 잔해가 널려있었다. 심지어 방안으로 뛰어들어 주인장의 밥상을 덮치는 녀석도 있었다. 지금의 멧돼지 출몰지역 주민처럼 농사를 다 망치지 말기를 바랄 뿐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농산물 적당량을 쥐가 차지하는 것으로 양해할 지경이었다.
“못 살겠다. 쥐를 잡자.”
주민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한 해에 몇 차례씩 같은 날을 잡아서 모든 주민과 학생을 동원하여 쥐잡기 운동을 벌였다. 그동안 집집마다 따로 쥐약을 놓았던 일은 풍선효과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을 전체에 쥐약을 놓고 쥐덫을 설치하는 일제소탕 작전을 하였다. 쥐꼬리를 모아서 실적을 보고하던 옛이야기다.
시간이 지나자 이 방법을 계속할 수 없었다. 개ㆍ돼지ㆍ닭 가축이 먼저 쥐약을 먹고 나자빠졌다. 영리한 쥐는 사람 냄새가 묻은 음식물이나 쥐덫에는 아예 접근하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쥐덫에 걸리기도 하였다.
“이건 아니지! 다른 방법을 찾자.”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쥐에게 시련이 커졌다.
쥐약과 덫을 없애고 집집마다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고양이는 항상 쥐를 잡는 구조다. 쥐가 고양이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고양이는 쥐가 파고들어간 땅굴까지 쫓아갔다. 쫓기는 쥐가 편안하게 살았던 논밭을 버리고 잘 보이지 않는 돌담장 틈으로 숨어들었다. 쥐가 잘 보이지 않자 농민들은 행복의 시작인 줄 알았다.
“역시 고양이가 최고야!” 하면서 애지중지하였다. 고양이가 주인어른 밥상머리에 앉아서 음식을 받아먹기에 이르렀다. 강아지와 동급대우를 받는 반려동물이 되었다. 고양이의 전성시대였다. 그렇다고 고양이 때문에 쥐가 다 잡혔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자 배가 부른 고양이는 양지 바른 곳에서 낮잠 자기 바빴다. 쥐보다 덩치가 훨씬 큰 녀석들은 밤이 되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온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어려운 쥐잡기 대신 닭과 계란의 포식자로 탈바꿈하였다. 고양이 수가 점점 많아졌다. 무대 위에 더 골치 아픈 주인공이 등장한 꼴이 되었다.
“고양이 때문에 못 살겠다!”
하루아침에 반려동물에서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돌담장 속에서 쥐가 아무리 떠들어도 몸집이 큰 고양이는 작은 틈을 뚫을 수 없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긁어댔지만 뾰쪽한 방법이 되지 못하였다. 쥐들은 고양이를 무서워하거나 도망갈 이유가 사라졌다. 농산물이 풍부해지면서 추수하고 남은 ‘이삭’이 넓은 들판에 넘쳐났다. 쥐는 고양이에게 시달리던 때 먹이를 돌담장 속에 저장하는 요령을 터득하였다. 그전처럼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고양이는 말짱 허깨비야!”
고양이의 무용론에 힘이 실렸다. 고양이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가 식사 때에 나타나는 습성이 있다. 주인이 음식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으면 집에 들어오지 않고 길고양이가 되고 만다. 주인과의 사랑 다툼에서도 애완견에게 밀려났다. 얼마 후 고양이가 마을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은 쥐들의 세상이 되었다.
항상 먹히기만 하였던 쥐들이 변화하는 환경을 이용하여 천적 고양이를 확실히 잡았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한 살이 채 되기 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읍내와 가까운 집성촌 친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첩첩산중 외가로 피난을 갔다.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살았던 외가는 차를 본 일도 타본 일도 없는, 해방소식도 종전 다음 해에야 알았다는 곳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입학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신원이나 부동산공부 정리가 매우 미진하였던 시절, 제대로 된 ‘호적’이 필요하게 되었다. 면사무소가 상당히 먼 거리에 있어서 한 차례 일처리하려면 며칠이 필요했던 옛이야기다. 민원서류가 당일 처리되지 않고 며칠 후 찾으러 다시가야 했다. 이장이 면사무소로 출장 갈 때가 되면 동네 사람들의 민원대행을 자청하였다. 농사에 바쁜 주민들은 그에게 민원심부름을 부탁하면서 고마워하였다.
아버님은 아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자세히 기록하여 이장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막걸리를 좋아한 그는 제때 심부름을 이행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급한 일 없는 주민들도 재촉할 이유도 없었다. 시간이 지난 다음 꼭 서류가 필요할 때에 챙기곤 하였다. 몇 해 넘겨서도 처리되지 않아 시비가 붙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다른 사람과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형의 출생신고가 누락되어 동생 것이 먼저 되는 일도 생겼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이장이 내미는 호적등본을 보고 아버지는 기겁을 하였다. 집에서 부르고 족보에 기록된 내 이름 ‘백형섭’은 온데간데없이 ‘백외섭’으로 바뀌었고, 나이는 두 살이나 늦게 기록되어 있었다. 전쟁 중 태어난 세 살 터울 동생 이름에도 ‘외’가 붙었고 나이는 한 살 줄여서 두 살 차이로 만들었다. “이름과 생년월일이 이렇게 틀려서 되겠느냐?”고 아버지가 추궁하였다. 이장은 술이 취하여 작사ㆍ작곡한 잘못을 부인하면서 “외가에서 자라면 외자를 붙여야 되지 않느냐”고 오히려 반문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초등학교 다니면서 발생하였다. 동네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이름표에 새겨진 ‘외’자를 보고 놀려대기 시작하였다. “외가 뭐야, 참외야 물외(오이의 사투리)야?” 참외는 맛이 있지만, 물외는 반찬이나 만드는 맛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별다른 관심이 없던 때였다. 부끄러워서 학교에 다니기 싫었다. 아버지에게 이름을 원래대로 바꾸어 달라고 떼를 쓰곤 하였으나 별 대책이 없었다. ‘외섭’은 수십 년 동안 족보에 오르지도 못했다.
성인이 된 다음에는 상대방이 내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원봉사 때나 사회교육 현장에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인사를 나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저는 ‘백-외-섭’입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입니다.” 다른 사람이 기억하기 쉽도록 또박또박 끊어서 큰 소리로 말한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면 대부분 내 이름을 기억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 덕분에 편리한 점이 많다. 우편물이 착오로 배달되거나 엉뚱한 고지서가 날아오는 경우는 없다. 동명이인으로 헷갈리는 일도 없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하나뿐인 내 이름에 감격한다. 다른 사람과 혼용되지 않는 오롯이 나의 글과 이야기다. 이런 호사를 누린 경우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막걸리 한잔에 취하여 남의 이름을 확 틀리게 만들었던 옛 이장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는 대목이다.
이름은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아야 한다. 그렇다고 작명소를 찾거나 점집을 기웃거릴 필요는 없다. 항렬을 따지다가 집안끼리 중복되거나 비슷하여 웃음거리가 되어서도 아니 된다. 한자식을 고집하여 남자 이름이 여자 같고, 여자 이름은 남자 같은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본다.
대한민국에 하나뿐인 내 이름이다. ‘참외든 물외’든 외자 붙은 내 이름을 사랑한다.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아대면 ‘엄정대응’ 하겠다는 말 한 마디로 아까운 세월 다 보냈다. 강 건너 불 보듯 하다가 급기야 표적사격 하겠다는 엄포가 터지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핵을 쥐고 흔들면 고양이요, 핵이 없으면 그 앞의 쥐 신세가 지금의 세계다. 쥐에게는 생존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쥐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면 그 소리를 듣고 미리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를 놓고 여러 날 동안 의논했지만, 목숨이 달린 그 위험한 일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처럼 실행에 옮기지 못할 일을 두고 공연히 의논만 하는 것을 ‘탁상공론’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속담 풀이는 여기까지다.
과연 고양이는 영원한 강자이고 쥐는 항상 약자인가. 고양이가 쥐에게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고양이 때문에 쥐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들의 생존법칙은 따로 있다.
필자가 어릴 적 살았던 농촌에는 쥐가 엄청 많았다. 집 마당은 이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심지어 방안으로 뛰어드는 녀석들도 있었다. 지금의 멧돼지 출몰지역 주민처럼 농사를 다 망치지 말기를 바라고, 농산물 적당량을 쥐가 차지하는 것으로 양해할 지경이었다. 정부주도로 한 해에 몇 차례씩 모든 주민과 학생이 동원되어 ‘쥐퇴치’운동을 펼쳤다. 마을 전체에 쥐약을 놓고 쥐덫을 설치하였다. 쥐꼬리를 모아서 실적을 보고하던 옛이야기다.
몇 해가 지나자 이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사람 냄새가 묻은 음식물이나 쥐덫에는 아예 접근하지 않았다. 쥐약과 덫을 없애고 집집마다 고양이를 보급하였다. 고양이는 쥐가 파고들어간 땅굴까지 끝까지 추적하였다. 쥐가 도망갈 곳이 없어 보였다. 농민들은 행복의 시작인 줄 알고 고양이를 애지중지하였다. 그 수는 쥐보다 훨씬 많아졌다. 거기까지가 고양이의 한계였다.
쥐보다 덩치가 큰 녀석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농토를 운동장으로 만들었다. 몇 년 사이에 쥐들은 돌담장 사이로 도망가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그 안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몸집이 큰 고양이는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발톱만 긁어댈 뿐이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이 달린 모양새가 되었다.
쥐들은 옛날처럼 늘고, 고양이의 무용론이 힘을 얻었다. 애완견에게 주인과의 사랑 다툼에서도 밀려났다. 몇 년 사이에 들고양이가 되더니 아예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쥐들은 고양이에게 쫓기면서 마련한 돌담장 속에서 옛날보다 더 안전하게 살았다.
눈을 돌리면 숨이 막힌다. 우리의 머리 위로 핵폭탄이 날고 미사일로 우리 강토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고 야단법석이다. 생존을 위한 핵무장론이 힘을 얻고 있다. ‘핵전쟁 위협을 피할 수 없는가?’ 북한과 미국은 상황을 더 악화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나라는 한길밖에 없다. 북핵 위기 해결의 독자적 개입점을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중요한 과제이다. ‘탁상공론’으로 치부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항상 먹혔던 쥐들이 환경을 잘 이용하여 천적 고양이를 몰아낸 이야기를 하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그 선택은 누가 봐도 모험이었다. 준공무원급으로 평가받는 안정된 직장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위험한 가장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그는 “조금 더 빨리 들어왔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한다. 경상북도 청송에서 만난 신왕준(申旺俊·53)씨의 이야기다.
신왕준씨가 고향인 청송 ‘부곡마을’로 돌아온 것은 2015년 3월. 선산이 있는 고향이라고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상경한 후 청송은 그에게 명절 때 가끔 찾아오는 곳일 뿐이었다. 여생을 이곳에서 보낼 결심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연고가 없는 곳에 내려온 것과 다름없었죠. 이웃들의 얼굴을 익히는 것부터 자연에서 사는 법, 작물을 키워내는 방법 등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느닷없는 귀촌을 결심하게 된 것은 그가 다니던 산림조합중앙회의 직원 대상 명예퇴직 신청이 계기가 됐다. 막연히 인생 후반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선산을 활용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명색이 산림경영팀장이었으니까.
“가족과 상의 없이 명퇴신청서를 제출했어요. 당시 아내는 펄쩍 뛰었지만, 지금은 제 선택을 존중해주고 있어요. 아내도 자신의 삶이 있고, 저도 여기에서 완전히 자리가 안 잡힌 상태라서 주말부부처럼 지내고 있지만 함께 살 시기를 앞당기려고 노력 중이에요.”
자연 속의 삶, 현장에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마을 주민’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웃들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 그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서울에선 중년에 속했지만, 주민들의 평균 나이가 60대 후반인 마을에서 그는 젊디젊은 청년이자 막내였다.
“동네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에 한두 분 뵙기도 힘들어요. 아침에 눈뜨면 마을회관에 들러 일찍부터 나와 계신 할머니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어요. 그리고 밭일을 돕기도 하고. 그렇게 얼굴을 익혀나가자 동네 주민 자녀들이 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부모님에게 연락이 안 되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절 찾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이곳 구성원이 됐어요.”
서울에선 산림경영 분야의 전문가 대접을 받던 그였지만 산은 ‘초짜’를 알아봤다. 명예퇴직 후 1년간 다시 전문 분야 수업을 들으며 귀촌을 준비했지만, 결국 현장에서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이론과 현실은 많이 다르더군요. 새로 배우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또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었죠. 올 초 가뭄이 심했을 때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그래도 서두르지 않고 체계적으로 준비한 것은 조금씩 성과를 냈다. 그가 제안한 산림복합경영단지 조성사업은 산림소득 사업공모에 뽑혀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밭이 아닌 산속에 자리 잡은 최초의 상업용 산나물 주말농장 청송 뫼살이 농장을 시작했다. 5평짜리 텃밭 90개를 분양해 일반인들도 쉽게 곰취나 잔대, 미역취 같은 산나물을 심고 수확할 수 있도록 한 농장이다. 수확된 산나물은 대신 팔아주기도 한다.
자연에서는 농사도 사업도 천천히 흐른다
서울에서 살던 그가 자연으로 들어온 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스트레스 없는 삶’을 가장 큰 변화로 꼽았다.
“제가 이 산의 대표이자 의사결정권자니까요. 계획한 대로 차근차근 실천해나가면 스트레스받을 일은 많지 않아요. 신선한 새벽 숲의 공기를 마시고,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산길을 산책하는 일은 정말 즐겁죠. 딱히 일이 없어도 정해진 시간에 숲으로 출근하는 것은 그 때문이에요.”
아직은 작은 농장에 불과하지만 이제 그의 꿈은 기지개를 펴고 있다. 먼 미래를 보고 계획을 세운 뒤 하나하나 진행 중이다. 산속에 전기를 들이는 일도 3년에 걸쳐 진행했다. 산농사는 초기 투자가 많고 수확을 하려면 2~3년 걸리기 때문이다.
“7만4000평 규모의 산에서 활용하는 땅은 5000평이 안 돼요.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단순히 농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자연과 숲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체험공간을 제공하고 싶어요. 요즘 주목받는 야외활동인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 지도와 나침반만을 이용해 목적지를 찾아가는 야외 스포츠)이나 라디엔티어링(radienteering, 지도와 나침반 대신 라디오를 지참하고 정해진 주파수에서 방송되는 안내에 따라 정해진 지점으로 이동하는 게임) 같은 서비스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자연으로 오셔서 맘껏 즐겨주세요(웃음).”
‘닭님에게 손수 밥을 만들어서 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 흔히 우둔함의 대명사로 꼽는 닭을 ‘닭님’이라고 부른다는 것 자체가 비범하다. 경기도 여주군 도리마을 외딴집에서 700여 마리의 닭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홍일선(洪一善·67) 시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1980년 여름호를 통해 등단해 , 등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인 홍 시인은 숲과 강, 그리고 생명들을 벗 삼아 자연이 전해주는 울림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가 농촌으로 내려간 후 12년 동안 겪은 자연 속의 ‘거룩한’ 사연을 들어봤다.
1950년생, 올해로 67세. 농사일로 단련된 시인의 손가락은 거칠어 보였다. 어언 백발, 말간 피부, 서늘한 눈빛이 어우러진 순박한 농부이자 시인인 홍일선은 누구나 막연하게라도 상상해보는 귀농을 실천한 지 벌써 12년째다. 그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연의 삶 속에서 대지로부터 은밀하게 울리는 북소리를 들으며 ‘공격’이 아닌 ‘공경’의 문학을 발견하고 있었다. ‘닭님’과 함께.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홍일선 시인의 ‘닭님들’
홍일선 시인은 지금 여주군 점동면 도리마을 중근이봉 자락 3000평 대지에 있는 외딴 집에서 700여 마리의 닭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가 ‘닭님’이라고 부르는 이 닭들은 보통 닭이 아니다. 닭님들은 그와 그의 아내가 막걸리 효소, 돌가루, 미강, 발효제. 옥수수 가루, 된장, 간장, 콩비지, 고추씨, 깻묵, 풀씨 등 14가지를 합쳐 정성 들여 만든 ‘맛있는 밥’을 매일 5시에 먹는다. 그리고 집 앞마당과 2만 평의 숲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산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저녁때가 되면 비닐하우스 집으로 알아서 들어온다.
비닐하우스에는 따로 난방 장치가 되어 있지 않다. 700마리의 닭 중 10퍼센트는 오소리, 솔개, 너구리, 삵 같은 야생 짐승들이 가져간다고 한다. 한마디로 완전히 자연 그대로 닭을 키우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0마리 정도는 계속 유지된다.
“왜 700마리냐 하면 닭님들이 저와 아내가 손수 만든 발효사료를 먹고 자라는데, 그걸 만들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거든요, 정말 바빠요, 700마리가 딱 이상적이에요. 우리 할아버지들이 다 했던 방식이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정도죠. 최시형 선생의 ‘경물(敬物)’의 가치관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에요.”
경물이란 모든 사물을 아끼고 공경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홍 시인은 경물을 통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 진정한 생명농업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닭님이 내 마음을 알아준다”
홍일선 시인은 처음 닭을 키우게 된 때를 2007년 5월 어느 날인가로 기억한다. 그의 지인인 동화를 쓰는 이상권 작가가 전국 여러 곳에서 토종닭을 사와 용인에서 키우던 시절이었다.
“이상권 작가가 그러면서 굉장히 즐겁게 사는 걸 봤어요. 그러다 그가 직접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온 다섯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죠. 조류독감이 터졌을 때였는데, 숨겨서 들어와야 했어요. 하지만 그랬는데도 기어코 이웃에서 신고를 하더군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섯 마리로 시작된 닭은 어느새 150여 마리로 불어났다. ‘사실 알을 안 낳아줘도 되는데 내 마음을 알아서 낳아주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러운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닭이 불어나며 함께했던 행복한 시절이 있었어요. 가난했지만 이게 온전한 삶이다 싶었죠. 그런데 갑자기 이명박이라는 괴물을 만나게 된 거예요.”
어느 날 그 많던 닭들이 사라지다
홍일선 시인의 집 앞에는 ‘여강’이라고 불리는 남한강이 흐른다. 그는 강을 생각하면 우울하다. 그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괴물’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의 삶의 터전을 깡그리 부숴버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4대강 사업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울분의 원인이었다.
“여기에는 나보다 먼저 살고 있었던 고라니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밤에는 고라니가, 낮에는 청둥오리와 같은 새들이 시를 썼어요. 그들이 내는 소리가 바로 시였죠. 달빛에 책을 읽고 강변에 앉아 묵상하는 일만으로도 황홀합디다.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었어요.”
그러나 4대강 사업은 자연이 내는 시를 죽이면서 인간의 소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자연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2년 여 동안 새벽 다섯 시 반에 점호하듯이 어마어마하게 큰 포클레인과 덤프트럭 수십 대가 와서 밤 아홉 시 반, 열 시 반까지 계속 작업을 했죠. 집이 흔들릴 정도로 요란했습니다. 그때 고라니 시인이 사라졌죠. 청둥오리, 왜가리, 백로도 땅에 앉지 못하고 십 분을 넘게 하늘에서 선회하다가 저 끝에 겨우 앉더니 이내 떠나버렸어요. 여러 날 그러는 걸 봤어요.”
무엇보다 그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그가 기르던 닭들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일이었다.
“어느 날 그 많던 닭들이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은 겁니다. 좌절했죠.”
생명의 경이로움에 머리 숙여지다
혼비백산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어딘가에서 삐약삐약 소리가 나는 겁니다. 아내는 환청이라고 했죠. 그러나 환청이 아니었습니다. 저 숲 쪽에서 어미 닭이 병아리 열다섯 마리를 데리고 온 겁니다.”
알에서 병아리가 나오려면 37.5℃를 유지하며 20일을 품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 어미 닭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숲속에서 20일 동안 정성을 들여 알을 품고 부화시켜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닭이 열다섯 개의 알을 품으면 한날 한시에 부화되는 게 아니다. 사흘에서 닷새에 걸쳐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시간 동안 어미 닭은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새끼들을 품었을까.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자 다른 어미 닭이 또 열세 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숲에서 나왔고, 나흘째 되는 날에는 어미 닭 두 마리가 여러 병아리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인은 닭에게 고마움을 절절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고마움은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인간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자각하게 해줬다.
“그때 저는 4대강을 피해 정선으로 갈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저 닭들은 그걸 견디며 살아냈던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라는 인간이 뭔가 싶었어요. 민중시를 쓰고 민족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닭을 ‘닭님’이라 부르겠다고 했어요. 박근혜씨를 닭이라고 부르는 건 말도 안 돼요. 닭이 어떤 동물인데.”
표절하려면 대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표절하라
새로운 마음으로 홍일선 시인은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그가 업으로 삼고 있는 문학에 대한 생각은 보다 광활해졌다. 문학을 대하는 지점이 과거와는 달라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는 시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 기술자는 있어도 시인은 없습니다. 문학은 대지로부터 나오는 울림에 대한 교감이에요.”
그는 얼마 전에 있었던 신경숙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의 글을 표절한 사건과 그에 대처하는 창작과비평사의 태도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표절을 하려면 대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표절하세요. 어머니 같은 강이 들려주는 언어를 표절하라고요. 감자는 땅을 가르고 나옵니다. 이건희와 이재용이, 스티브 잡스가 그런 걸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감자가 땅을 가르고 나오는 그 울림을 누가 듣겠습니까? 이명박이 듣겠습니까, 박근혜가 듣겠습니까. 예술인들이 들어야죠.”
신이 부여한 질서, 농업
이제 홍일선 시인에게서 문학은 생명의 근원을 생각하는 예술로 환원된다. 그는 ‘신이 부여한 질서를 회복하자’고 말했다. 그 질서란 바로 농업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농사를 다 지을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정신만큼은 농업 근본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농업은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농업의 재발견이 필요합니다. 퀭한 눈으로 아들을 기다리는, 그 어머니를 발견하는 일 말입니다.”
‘대지라는 거대한 생명을 제대로 섬기는 일이 내가 하는 문학’이라고 밝히는 그는 문학이라는 틀을 정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닭을 닭님이라고 부르고 5덕(흙님, 숲님, 강님, 햇빛님, 곡식님)을 섬기며 더불어 사는 삶에서 시적 울림을 찾는 그에게 문학을 어떤 틀로 정의하는 것은 편협한 일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문학이란 살면서 실천되고 구현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문학에 무슨 고급이 있고 저급이 있을까요?”
공경은 거룩한 행복이다
아내, 아들과 함께 사는 홍일선 시인은 ‘여기에 온 게 참 좋다’고 거듭 피력했다. 그 말의 진실성을 의심할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와서 정말 행복해요. 제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경하자는 겁니다. 그것은 농업과 대지에 대한 공경입니다.”
그가 말하는 공경이란 자연을 앎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공경이라는 말에는 쌀 한 톨이 어떤 경로로 입에 들어오는지 성찰하며 살자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쉽사리 놓쳐버리는 모든 작은 것들에 대한 배려 그 자체이기도 하다.
“공경은 거룩한 행복이죠. 서울에 있었으면 저도 황폐한 사람이 됐을 겁니다. 그래서 공경을 알게 됐다는 게 저에게는 행운이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달빛에서, 별빛에서, 들꽃에서, 장독대에서, 여울에서, 숲에서 솟구치는 울림들을 필요할 때마다 마중물로 사용한다. 그에게 이런 호사가 없다. 기우는 햇살을 받은 ‘닭님’의 벼슬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늙음 뒤엔 결국 병과 죽음이 대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하나의 애환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살아갈 길은 있다는 뉴스는 비 오듯 쏟아진다. 비곗살처럼 둔하게 누적되는 나이테에 서린, 쓸모 있는 경험과 요령을 살려 잘 부릴 경우, 회춘과 안락을 구가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문제는 삶의 후반전, 그 인생 2막을 열어 내딛는 발걸음의 방향에 달려 있다.
이 풍진 세상의 사이즈는 간장종지 같은 게 아니고 바다처럼 크넓다. 타성과 습성에 안주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전혀 새로운 삶의 파노라마 속으로 족히 여행하거나 방랑할 수 있으며, 그럴 때라야 세월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부질없이 낭비하는 결례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대전에서 학원을 경영하며 분주하게 살았던 진연순(57)씨 부부는 귀촌으로 인생 2막의 첫발을 내딛었다. 충북 옥천군 군북면의 시골마을이다.
진씨네 집을 들어서며 받은 첫인상은 매우 준수하고 청결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너른 살림채와 푸르른 농장 그 어느 구석 한 곳에서도 먼지나 잡풀을 찾아보기 힘들다. 난장판에 가깝도록 사물들을 널브러뜨린 채 살아가는 나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풍경이다. 비지땀을 흘려 밤낮없이 근로를 하고, 청소를 하고, 미화작업을 하고서야 직성이 풀리게 되어 있는 성향의 부부가 사는 집임을 단박에 알게 한다. 사실 이 부부는 바지런하기가 헤집어놓은 개미굴 속의 병정개미와도 같다. 근면과 성실로 지상에 태어난 자의 사명을 다하길 습관처럼 거듭해 도시에서의 학원사업을 번듯하게 꾸려왔다. 그러다가 6년 전에 다 정리하고 후다닥 시골에 입장했다. 시골의 무엇이 이 부부를 호명했을까? 진연순씨에게 묻자 돌아오는 답이 이렇다.
“남편이나 저나, 나이 들면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도시와는 달리 시골에선 스트레스나 피로를 덜 느끼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죠. 그래서 10여 년 전에 남편의 고향인 이곳에 농토를 구입해 주말농장으로 활용했어요. 서둘러 귀촌하는 대신 미리미리 준비를 했던 거예요. 저희 슬하엔 남매가 있는데요, 이 녀석들이 커 독립을 한 시점에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비로소 이곳으로 완전한 이주를 했어요. 시골 정착이 비교적 순조로웠던 건 그렇게 나름의 준비기간이 있었기 때문이죠.”
“수강생이 수백 명에 달했다죠? 멀쩡하게 잘 운영되던 학원을 정리하기 아깝진 않았어요?”
“사실 결혼하면서부터 부부가 함께 공들여 키워온 입시학원이라 애착도 있었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여러모로 힘에 부치더라고요. 제가 전공인 수학을 강의하며 운영했는데요, 아이들은 나이 든 아줌마 강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입시철이면 피를 말리는 긴장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두통으로 늘 시달렸죠. 귀촌을 하고 나서는 그런 게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어요.”
“저는 말이죠, 수학여행은 좋아했지만 수학은 참 싫었어요(웃음). 인생을 과목에 비유한다면, 수학 선생님이었던 당신의 인생은 어떤 과목을 닮았다고 보시죠?”
“흠. 도덕? 제가 원래 어떤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도덕적인 성격이에요. 모범생이라고 할까? 덕분에 큰 굴곡 없이 순탄하게 살아왔어요. 자유분방이라는 걸 용납하기 힘들었고요. 그런데 시골에 와서는 제가 천연염색에 푹 빠져 삽니다. 염색이라는 게 공예의 한 분야이고, 이른바 ‘끼’라는 게 요구된다는 걸 자주 실감하는데요, 그러고 보면 저에게도 뭔가 숨은 끼가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해요(웃음).”
“남편은 아로니아 농장을 운영하고, 아내는 천연염색을 하고, 매우 이상적인 배합으로 보여요. 처음부터 그러자는 발상을 했을까?”
“아녜요. 제가 일찍부터 천연염색에 취미가 있긴 했지만, 그게 직업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남편의 농사 역시 처음엔 깨끗한 먹거리를 길러 식구들 건강이나 챙기는 정도의 소소한 수준에 불과했죠. 그런데 일이 커졌습니다.”
천연염색은 색채의 향연을 즐기는 일
취미는 삶에 재미와 흥미를 보태준다. 권태롭거나 지겨운 일상에 생기를 부여한다. 지나친 탐닉으로 허영과 낭비의 골짜기로 빠질 수도 있는 게 취미생활이다. 진연순씨의 취미는 썩 근사한 방향으로 비약했다. 대전에 살 때부터 틈틈이 천연염색 공부를 해왔던 그녀는 시골에 살며 한결 더 진도를 냈다. 재미가 있어서였다. 그게 하나의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효과를 자아낼 줄은 자신조차 미처 몰랐다지. 취미로 사귀었던 천연염색이 어느덧 직업으로 진화한 거다.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이 기꺼운 변동! 이제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인생을 만족스러운 쪽으로 끌고 가는 행운아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귀촌 초기에 저는 골방 하나를 놀이터 삼아 혼자 천연염색이나 즐기며 지냈어요. 당시엔 사실 시골생활이 외롭고 힘들었거든요. 그걸 견디게 해준 게 염색이었어요. 남편은 이 마을이 고향입니다. 낙향한 셈이죠. 마을의 많은 주민들이 남편의 친척이나 친지, 선후배들이에요. 그들을 만나 술도 마시고, 농사일도 거들고, 수많은 단체에도 가입하고. 아무튼 남편은 밖으로만 나돌았어요. 저는 외톨이처럼 그저 집에 틀어박혀 염색작업에 간신히 마음을 붙이고 지냈어요. 그러면서 서서히 실력이랄까, 솜씨랄까, 그런 게 늘었던 것 같아요. 자신감이 붙으면서 염색작업 내용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 블로그를 본 한 학교에서 학생들의 염색 체험학습 의뢰를 해왔습니다. 그게 직업화의 신호탄이었죠.”
“단기간에 널리 알려지고, 순조롭게 자리 잡힌 건가요? 천연염색을 직업으로 삼아 체험장을 운영하는 귀농인들이 가끔 있지만 시원치 않다고들 해요.”
“제가 운이 좋은 걸까요? 빠르게 자리가 잡혔어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학교와 청소년 단체, 가족, 성인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수강을 해요. 시설도 점차적으로 늘렸어요. 실내외 교육장은 물론, 전래놀이 체험장, 잔디구장, 염료식물 재배장 같은 걸 구비했죠.”
“천연염색의 매력은 뭐죠?”
“순수하게 자연에서 얻어온 식물 재료들로 색채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는 거죠. 자연물에서 갖가지 신비한 색들이 나온다는 게 마음을 사로잡아요. 나뭇잎에서는 그냥 연둣빛만 나올 것 같지만 노란색이나 빨간색도 나옵니다. 쪽풀에서는 가슴 시린 파란색이 나와요. 마치 마법처럼 신기해요. 매염제를 사용하면 더 다양한 색상을 만들어낼 수 있고요. 염색으로 수입까지 발생한다는 점도 매력!”
“금상첨화?”
“일거양득!(웃음)”
‘라온뜰 농촌문화체험농장’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진씨 부부의 거처에 말이다. 진씨가 천연염색으로 자신의 취향과 희망을 일구듯이, 남편 박용규(59)씨는 아로니아 농장에 심혈을 기울인다. 귀촌 즉시 사업이라는 걸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단다. 이왕 시골에 살 거라면 유유자적까지는 아니라도 골치 아픈 속세의 일에서 해방돼 취미나 삼삼하게 즐기며 휘적휘적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흥청흥청 주야로 신바람 나게 노니는 일에도 대찬 내공이 필요하거니와, 부부의 적성 자체가 ‘놀자’ 과(科)가 아니라서 무위(無爲)란 그들의 소관사항이 아니었으렷다.
귀촌생활을 발랄하게 영위하는 비결
부부는 도시에서처럼 자연스럽게 다시 일로 뛰어들었다. 아내는 천연염색을 또 하나의 배필처럼 감미롭게 맞이했고, 남편은 몸에도 좋고 벌이에도 유망하다는 아로니아 재배에 열애하듯 뜨겁게 뛰어들었다. 말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라는 남편 백씨는, 근로를 숭상하고 농사를 애호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하는데, 그는 전쟁을 연상시키는 농업 사업 특유의 경쟁에서 낙오될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타고난 근면으로 안착에 이르렀다.
“남편의 농사엔 실패가 많았어요. 시행착오를 거듭했어요. 천마를 심었다가 실패했고, 왕벚나무를 심었다가 타산을 맞추기는커녕 포클레인으로 다 뽑아냈고요, 검정콩도 심어봤지만 본전도 건지지 못했어요. 이후 옥천군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은 아로니아 재배로 비로소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한때 블루베리의 채산성이 좋았지만 너도나도 덤벼드는 통에 과잉 생산이 돼 이젠 폐업하는 농가가 속출한다고 해요. 아로니아의 수익성은 아직 안정적일까?”
“아로니아도 이미 과잉 생산에다 수입산까지 마구 들어오면서 위기에 직면했어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고품질 상품을 생산해 단골 소비자를 확보해야만 해요. 남편이 생산하는 아로니아는 친환경 무농약 인증과 ‘GAP(우수농산물관리제도) 인증’을 받았어요. 덕분에 순항하고 있어요.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통해 전량을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고요.”
“시골살이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농사를 권장할 생각은 있나요?”
“농사란 참 힘들어요. 아아, 너무 힘들었어요. 처음엔 풀인지 모종인지 구분조차 못해 다 뽑아냈어요. 지금은 남편이 농사를 전담하지만, 남편 역시 고생이 많아요. 초심자라면 시행착오를 각오해야 해요. 남들 말만 듣고 작물을 선택하는 건 필패의 비결이고요. 처음 몇 해의 부진을 감당하려면 자금력이 있어야 해요.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염색의 경우에도 노동과 시간과 수고가 필요해요.”
“귀촌을 후회하진 않았어요? 도시도 매력적인 삶터인데 공연한 일탈을 했다는 의기소침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는….”
“후회할 정도로 바보스런 선택을 하진 않아야죠. 가장 힘든 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었어요. 남편은 빨리 적응했지만, 저는 너무도 더뎠어요. 혼자 집에 박혀 염색만 했으니까. 이웃들이 불편해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자칫 왕따 당할 상황이었죠. 그래서 태도를 바꿨어요. 마을 아줌마와 할머니들에게 염색을 가르쳐드렸고, 염색한 손수건을 선물했어요. 때론 식사 대접도 했고요. 이후 서로 흐뭇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어요.”
어린애는 볼수록 예쁜 짓을 하지만, 나이를 푸지게 먹어가면서는 미운 짓만 골라 하기 십상이다. 황혼의 광야에 서서, 마음 문고리를 안으로 닫아걸고 나 잘난 멋에만 안주하고서도 귀촌생활을 발랄하게 영위할 비결은 거의 없다. 자리이타(自利利他)라,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아마도 그게 길이겠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과거에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사회생활을 하다가 7년 만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가려고 하자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대학 교수가 얼마나 너를 가르칠 수 있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네가 크게 배울 것이 없을 것 같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지나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했다. 할머니는 당시 필자가 5남매의 장남으로서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면서 생활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할머니의 말씀은 학문보다는 인격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필자가 뒤늦게라도 대학의 문으로 들어선 것은 참된 지식을 깨우쳐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학문이란 무엇이며 왜 대학이라는 과정을 이수해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필자의 선택은 훌륭했다. 학문의 세계는 깊고 넓었다. 필자는 곧 국내외 경제의 흐름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어려서는 법대에 진학해 법관이 되고 싶었지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공직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상대를 나와 사업자의 삶을 살겠다는 생각으로 전공을 바꿨다.
할머니는 만석꾼의 딸로 태어나 세 살이나 연하인 할아버지와 결혼하셔서 일가를 이루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었다. 호남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딸을 아내로 맞은 할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훗날 독일 백림대학을 나온 친구 김준연씨와 함께 학교에 갔다가 증조부님에게 매를 맞고 집에서 쫓겨나 한동안 처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필자는 아름다운 미모에 고매한 인격의 할머니를 두게 된 것이 어릴 때도 여간 자랑스럽지 않았다. 어릴 때 방학이 되어 시골에 가면 일꾼들을 두고 농사를 짓고 생활하시던 생각이 난다. 시골에 왔다고 특별히 달걀 하나를 뜨거운 밥 속에 넣어주시던 기억도 난다.
할머니는 누구를 크게 호통치는 법이 없었다.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대하니 할머니가 싫다는 친․인척들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말씀이 별로 없는 과묵하신 분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손자가 방학이라고 시골집에 인사를 가면 혹시 집안 내력도 모르는 상놈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염려되어서인지 족보를 내어놓고 집안 내력을 이야기해주셨다. 그래서 필자가 족보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거창 신가 집안의 32대 손이고, 고려시대 대장군으로 몽고군과 끝까지 항쟁하신 집자 평자 조부님은 물론 조선시대까지 문무 고관대작의 집안이 되었던 내력을 소상하게 이야기해주셨다. 필자는 당시 할아버지에게서 배울 학(學)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확실하게 배웠다. 만일 필자가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다면 한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나의 한자만 가르쳐주셨을까? 살면서 항상 배우면서 살라는 깊은 뜻이 있었을 것 같다.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필자는 지금도 학문이 좋고 즐겁다. 어쩌면 학자를 많이 배출해낸 집안 내력 때문일 수도 있다.
작고하신 부산의 숙모님은 결혼 전에 선도 보지 않고 할머니만 보고 결혼했다고 이야기하실 정도로 할머니는 기품이 있고 위엄이 있는, 그러면서도 친절함이 넘치는 그런 분이었다. 이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조부모라는 사실은 항상 필자를 기쁘게 했고 긍지를 갖게 해주었다.
95세까지 장수하신 조부모님의 영정을 필자의 집에 모시고 싶다. 그리하여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해 양반 가문의 전통을 이어온 집안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우리 손자들에게도 들려주고 더욱 빛나는 가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 또 후손들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봉사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도시란 인간이 고안한 썩 성공적인 발명물이다. 매력도 편의도 많은 장소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도시를 미련 없이 떠나거나,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시골에서, 자연 속에서 한결 만족스러운 삶을 구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기대에서다.
귀촌자의 성향은 다양하다. 도법자연(道法自然), 자연이 곧 길이라는 고매한 소식에 이끌린 귀촌자. 도연명처럼 귀거래사를 노래하며 낙향, 어버이 품과도 같은 자연 안에 은둔한 산림처사. 도시라는 전쟁터에서 코피를 한 말쯤 쏟고 퇴각한 부상병. 텃밭 농사와 산야초 채집으로 육체 건강을 돋우려는 요양객. 전원생활의 목가적 안락을 기대하며 무작정 산골로 뛰어든 은퇴자. ‘졸혼’이라는 요상한 명분으로 배우자를 따돌리고 시골에 단독 입장한 나그네. 저마다의 이상과 형편에 따른 귀촌이지만, 삶의 증상을 개선하고 자연과 친선을 도모해 도시에서 맛보지 못한 안심과 만족을 누리겠다는 의도가 공통분모로 깔려 있다. 인간 역시 자연이니 자연으로의 귀환은 자못 자연스럽다.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귀촌을 통해 자연스러운 삶, 자연에 동화하는 일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엔 오류가 없다. 그러나 인생사가 다 그렇듯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나 뇌물은 없다. 바보가 아니라면,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니라면, 시골살이 역시 한바탕 고진감래(苦盡甘來)의 드라마로 점철되리라는 걸 미리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행복한 삶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불운과 불안이 끼어들지 않는 인생에 무슨 흥미가 있겠는가. 시골살이의 애환과 고독이란, 도시에서의 그것과 사실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자연과의 교제를 원만하게 수행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진다. 나의 삶에 자연이 단단하게 붙어 있을 경우엔 생활의 품질이 달라진다.
인간의 문제는 결국 욕망의 문제다. 망둥이처럼 내면에서 날뛰는 욕망이라는 놈을 어떻게 해치우느냐에 삶의 진실이 달려 있다. 우리가 법정 스님이 아닌 바에야 감히 무소유나 무욕을 꿈꿀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도 늘 물욕과 탐욕에 휘둘린다면, 그건 스타일 구기는 일. 시골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소탈하게 살아가는 실험은 어쩌면 절호의 찬스일 수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욕망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다 떠날 존재들
소박한 생활! 시골에서 구현할 가치가 있는 건 아마도 그것이다. 허영과 허세를 털어내는 소박한 시골 살림을 추구할 경우, 뜻밖에도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뉴스를 나는 곧잘 귀로 들었다. 산골에 사는 원로작가 P씨는, 시골살이의 무엇이 당신을 즐겁게 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가난한 밥상이지. 물 말은 밥에, 텃밭에서 거둔 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는 간소한 식사가 나를 즐겁게 해. 잡다한 미식과 탐식에서 해방돼, 비로소 정갈한 식사를 한다는 만족감 말이야.”
손수 길러 거둔 간소한 푸성귀로 식욕을 만족스럽게 채우는 경험이란 그에게 초유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과도한 식욕과 성욕 사이에서 갈피없이 흔들리다 떠나는 게 인간이다. 가급적 포식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 비싸고 화려한 메뉴로 과시적인 식사를 하고서야 시원한 트림을 토하는 게 도시적 식생활이다. P씨의 ‘만족감’은 이와 같은 식욕 노예에서 해방됐다는 자성(自省)의 표명으로 들렸다.
내 손으로 직접 작물을 거둬 청정한 찬을 밥상에 올릴 수 있는 텃밭 농사는 가히 매력적이다. 식량을 자급한다는 성취감과, 농약 따위에 오염되지 않은 안전 식품을 섭취한다는 안심 때문이다. 텃밭 농사는 단순히 입을 즐겁게 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자연으로 이행하는 징검돌이니 말이다.
자그마한 텃밭에 몇몇 채소류를 심어 가꾸는 행위에는 소소하다 할 수 없는 풍미가 있다. 밥상에 청치마상추를 올리기 위해서는 봄철에 씨앗을 뿌려야 한다.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겨우내 얼어 굳어버린 텃밭 흙부터 골라줘야 한다. 초봄의 흙을 만지작거리는 일은 대지라는 자연에 슬쩍 키스를 하는 행위와 다를 게 없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온기에, 향긋한 흙냄새에, 댄스를 하는 지렁이들의 징그러운 생기에 와락, 모종의 감명과 애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경줄이 뻣뻣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흙이 지닌 원초적 생명감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상추씨를 뿌리고 나면 거의 순식간에 싹이 돋는다. 대체로 열흘쯤이 지나서야 연둣빛 싹이 올라오지만, 우우우 지상으로 들고 일어서는 싹들의 놀라운 기운생동을 보자면, 이미 파종 순간부터 지하에선 맹렬한 발아활동이 전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쯤에서, 씨앗을 기르는 흙의 힘에 경이를 표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흙 위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이치를 사색할 기회이기도 하다. 흙 속에서 출발, 햇빛과 비를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쑥쑥 자라는 싹들의 기적에 비하면,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는 신기한 축에도 들지 못할 지경이다.
자연과의 교제로 야성(野性)을 회복하자
자연의 사업이라는 게 이와 같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인식하면, 저마다 잘났다고 설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실은 청치마상추씨 하나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렇지 아니한가? 상추 몸에 들어 있는 하얀 진액과, 초원에 핀 들꽃의 수액이, 인간의 혈관을 흐르는 피와 무엇이 다른가. 사람 역시 지수화풍(地水火風), 그 자연의 산물이거나 미물이거나 명물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신통한 효과를 불러들인다. 교만에서 겸양으로, 이기(利己)에서 이타(利他)로, 불화에서 조화로, 말하자면 고루하거나 비루한 기존의 타성에서 어느 정도 참하게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
누구나 아는 소식이지만, 물신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세상이다. 원로 종교인이 후배 성직자들을 모아놓고 써늘하게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다오, 돈과 신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가? 답은 돈이었다. 나 자신을 포함해 돈을 싫어한다는 별종을 나는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가상한 존재들은 있기 마련. 나는 귀촌한 사람들의 입에서 굴러 나오는 복음을 간혹 얻어 들었다. 일테면, 월 생활비 단돈 50만원으로 시골생활을 무탈하게 영위한다는 어느 충청도 부부의 얘기는 이렇다.
“끄떡없슈. 먹거리는 자급자족하지, 시골생활이 재미있으니 굳이 외출할 일 없어 돈이 굳지, 산이나 숲이 입장료 달라고 손 내밀지 않지, 돈 들 일이 벨로 없슈!”
숲에 사는 새들은 나뭇가지 하나를 집으로 알아 사계를 산다. 태어날 때 두르고 나온 터럭 외에 춥다고 옷을 겹쳐 입는 산토끼는 어디에도 없다. 사람이 이들의 삶을 시늉할 수는 없다. 고등동물이라 자부하는 인간의 문명은 그 자체로 위업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돈, 돈 하며 사는 건 아닐까. 반쯤은 이미 돈 게 아닐까.
자연에 동참하는 시골살이로는 돈의 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만족 요소들이 늘비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연주하는 사계의 변화무쌍한 풍경과 선율에 오감을 열면 된다. 돈을 써가며 극장엘 가지 않아도 숲에선 연일 개봉작이 상영된다. 개구리 우는 무논에도, 개미굴에도, 가뭄을 견디는 들판에도 저마다의 삶이 있고, 고통을 견디는 간절한 몸짓이 있다. 사위에 넘실거리는 이 다양한 자연상에 감정이입할 실력만 있다면 곳곳이 흥미진진한 영화관이며, 정서와 정신을 일깨울 마음 수련장이다.
복되도다! 자연과 교제해 내 안의 야성(野性)을 회복하는 사람 말이다. 그는 욕망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태의 난리블루스와 두려움 없이 결별할 수 있다. 내 삶의 자존감과 주체성을 이미 회복했을 테니까. 집이 작고 허름하면 어떤가. 마당이 좁으면 무슨 상관인가. 시골집 주변의 모든 산야를 나의 집으로 여기길 뜯어말리는 사람은 없다. 밤하늘에 모인 투명한 초록별들을 바라보며 감수성을 배양하는 일 같은 건 도시에선 가능치 않다.
정신에 힘과 만족을 부여하는 자연 속의 소박한 삶. 이는 가짜 욕망에 속지 않을 수 있는 내공을 얻을 기회로서 결함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인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방식이다. 환상이나 계산 중심으로 귀촌을 가늠하는 사람에겐 통하지 않을 생각이겠지만.
1963년 필자가 서둔야학에 정식으로 입학하기 전 호기심으로 동네 언니들을 따라 며칠째 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화기애애함으로 수업을 하던 분위기가 그날따라 이상했다. 통곡을 하며 우는 선배 언니들도 있었다. 내막을 알고 보니 야학 선배들의 선생님인 김진삼 선생님이 돌아가셨단다. 농사단 자취방에서 잠자다가 문틈으로 새어 든 연탄가스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때는 야학생들이 농촌진흥청 강당을 빌려 공부를 했는데, 진흥청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이 살고 있는 관사 한쪽 귀퉁이에 있던 건물이었다.
지난여름 아버지가 가시던 언덕
갈바람에 물들은 그리운 언덕
오늘도 그 언덕은 변함없건만
가신 아버지는 왜 안 오시나.
마룻바닥 안쪽 깊숙이 각목을 비스듬히 세워 고정시켜놓은 칠판에는 한동안 위의 노래가 적혀 있었다. 이 노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신 생전의 김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곡이었는데 누군가 선생님을 추모하려고 적어놓았던 것 같다. 사진으로 뵈었을 때 무척 선한 인상의 김 선생님께 필자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각별하셨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의 죽음을 안 언니들이 어찌나 슬프게 울던지 야학교가 떠나갈 듯했다. 울음이 그친 후 언니들의 눈은 하나같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비통함은 가히 피붙이를 잃은 것 이상이어서 김 선생님을 잘 모르는 필자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그 뒤 선생님들은 수업을 진행시키느라 애를 먹었는데 언니들의 슬픔이 며칠 동안이나 이어졌기 때문이다.
김진삼 스승 영전에
한 번 태어나 흙 속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운명에 쫓겨 님은 가셨나요.
책 속에 얼굴 묻고 목놓아 울부짖는
당신의 제자들은 생각지도 않으시고
꽃잎들을 저버리셨나요.
자연의 울부짖음도 제자들의 눈물도
가버린 님께선 들을 수도 없을진대
그 슬픔 또한 덜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님이 묻힌 무덤가를 무심히
지나쳐버릴 이도 많을 테지만
주위에 소나무들만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듯
우러러보고 있어요.
한낮이 지나고 밤이 돌아오면
공민의 얼들 속엔 님의 가르침이
가득 아로새겨 있답니다.
님이여
영원히 고이 잠드소서
그리고
언제까지나
작은 얼들과 함께 하시옵소서.
1964년 10월 10일
위의 시는 선배 형정순 언니가 김진삼 선생님을 추모하여 지은 것인데 그 당시 동아일보에 투고해 실렸다. 김 선생님이 늘 강조하시던 말은 ‘참’을 사랑하라는 것이었고 실제 생활에서도 참을 실천하며 사셨단다.
김 선생님의 강하면서도 선한 인품이 단적으로 드러난 일화가 있다. 그분이 살고 있었던 곳은 농사단이었는데 농사단은 농대의 수많은 서클 중 하나로 탑동에 회원들의 합숙소가 있었다. 어느 날 세 명의 회원이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남아 있는 밥이라곤 오직 한 그릇뿐이더란다. 그때 “나는 괜찮아요” 하며 선뜻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신 분이 김 선생님이었는데 상당히 늦은 시간이라 보통 허기진 것이 아닐텐 데도 끝끝내 당신 뜻을 굽히지 않으셨단다.
당시 같이 살았던 황건식 선생님 말에 의하면, 참으로 보기 드물게 선하신 분으로서 늘 남을 먼저 생각하셨고 주위에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곤 했단다. 이분의 생활신조인 ‘참을 사랑하라’는 그 후 후배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야학생들은 선생님들께 늘 이 말을 들으며 살았다.
야학을 졸업하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장사를 하는 야학의 한 남자 후배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돈을 못 벌고 있다면서 푸념을 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가 아무래도 ‘참’을 강조한 서둔야학에서 공부를 해서 그런 거 아닐까 하며 농담하듯 말했다. 장사를 하려면 적당히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하며 살고 있다는 밀이었다. 그만큼 ‘참을 사랑하라’는 말은 서둔야학 출신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 무엇을 하든 ‘참을 사랑하라’는 생활철학은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고향 떠나 긴 세월에 내 청춘 어디로 가고 삶에 매달려 걸어온 발자취 그 누가 알아주랴 두 주먹 불끈 쥐고 살아온 날들 소설 같은 내 드라마…’ -케니 김 1집 ‘내 청춘 드라마’ 케니 김(70). 그는 LA의 트로트 가수다. 한국에서 온 연예인도, 주체할 수 없는 끼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한 성격에 낯가림도 심하던 그가 무대 위에서 그것도 뽕짝을 부르는 가수가 됐다. 연매출 200만 달러의 식품회사 경영권도 아내에게 넘기고 말이다. 올해로 데뷔 7년 차. 1집 ‘노신사의 노래’에서 따끈따끈한 신곡 ‘무명가수’까지. 그의 노래 속에는 43년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5개의 직업, 불도저 케니 김
1946년 경북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의 집안은 지독히 가난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20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까지 짧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군대에 지원해 월남에 갔어요. 월남전 막바지라 참 위험했는데 나에게는 막막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구 같았습니다.” 베트남에서 처음 만난 미국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꿈을 꾸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나라,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 없어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때마침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에도 미국 이민 문호가 활짝 열렸다. 머나먼 그곳에 친척 고모 한 분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기술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고압용접 자격증을 땄다. 1973년, 스물다섯의 청년 김종길은 그렇게 고국 대한민국을 떠나왔다. 그리고 미국 땅에서 케니 김이 되어 살아온 지 어느덧 43년이다. “먼 친척 고모뻘 되는 분이 살고 있는 오하이오 주 데이톤으로 무조건 갔죠. 물론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고요. 300달러 손에 쥐고 공항에 내렸는데… 이상하게 겁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오히려 정말 원했던 것을 이뤘다는 희열을 느꼈어요. 걸리는 것은 딱 하나, 한국에 두고 온 약혼자 순이였죠(웃음).” 용접기술을 배워간 덕분에 취업도 쉬웠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작업에만 열중하는 그를 사장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인데도 말이다. 6개월 만에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약혼자에게 보냈고 꿈에 그리던 순이는 미국으로 와서 케니 김과 결혼했다. 지금의 아내, 우순이(68)씨다. 이듬해 두 사람은 뉴올리언스로 이주한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석유 시추의 선봉에 서 있었다. 시추선에서 작업하는 고압용접 기술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석유 시추선에 한 번 오르면 2주일은 그곳에 머물러야 했어요. 물론 동양인은 나 하나였죠. 그래도 일만 하면 되니까 괜찮았는데 문제는 아내였죠. 당시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거든요. 나 없을 때 아기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설마설마하던 일이 진짜 생기더라고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병원에서 아내는 홀로 아기를 낳았다. 첫딸 제인이었다. 어쩔 줄 몰라 울기만 하던 아내와 시추선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남편.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참 고단하던 시절이었다. “둘째 지나가 태어난 이후로는 정말 손이 무르도록 일만 했어요. 아내가 일했던 세탁소와 가발가게가 두 딸의 놀이터였죠. 겨우 돈을 좀 모아 자동차 바디숍을 인수했는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어요. 후에 미시시피 강에서 모래를 파 올리면 돈이 된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그해 여름 허리케인으로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갔고요. 주저앉아 울 틈이 어디 있어요? 새끼들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지요.” 시푸드 레스토랑의 성공으로 기반을 다진 부부는 1994년 지금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주한다. 이곳에서는 농사꾼이 되어 오이, 참외 등을 기르기 시작했다. 농사의 ‘농’ 자도 모르던 케니 김씨는 한국농촌진흥청까지 날아가 오이농사 비법을 배워왔고 결국은 농장 사업도 크게 성공시킨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지인으로부터 멕시코 농장 투자 사기를 당한 것. 김씨는 수십만 달러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돈도 돈이었지만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오랫동안 김씨를 괴롭혔다. “화재로 잿더미에도 앉아보고 홍수로 다 떠내려가기도 했고 사업도 수차례 망해봤지만 한 번도 좌절한 적은 없었어요. 다시 시작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믿었던 사람한테 속은 것은 정말이지… 힘들더라고요. 홀로 멕시코 시골에 틀어박혀서 1년을 지냈는데 그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가수 선언! “나도 가수다”
가발가게, 세탁소, 피자가게, 시푸드 전문점, 패스트푸드점, 야채농장, 광산개발, 부동산, 콩나물 공장… 어느 날은 부부가 작정하고 미국에서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봤다고 한다. 종사했던 비즈니스가 25가지나 되었다. 이들 부부가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는 데에는 케니 김씨의 역할이 크다. 우순이씨는 남편에게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기필코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했다.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양반이에요!” 김씨는 1998년 해조류 가공업체 ‘켈프누들’을 설립, 재기에 성공한다. 다시마를 가공해 만든 국수 ‘씨탱글’이 주력 상품이었다. 그는 에스콘디도 산자락 불모지에 공장을 지었다. 버려진 컨테이너로 공장 건물을 올리고 국수를 뽑아내는 기계는 직접 설계해 만들어냈다. 대부분 고물상에서 구입한 고철들을 용접으로 붙여가며 이루어낸 작업이었다. 이어 영어에 능통한 딸들을 불러들여 시장을 공략했는데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웰빙바람으로 ‘씨탱글’은 무섭게 팔려나갔다. 현재 켈프누들 제품은 홀푸드, 마더스 마켓 같은 미국 최대의 유기농 마켓에 납품되며 유럽 등 10개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연매출 200만 달러에 이르는 알짜배기 기업이다. 전쟁 같던 이민생활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오고 어느덧 두 딸도 짝을 만나 슬하를 떠났다.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려고 보니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젊은 시절 함께 고생하던 친구가 병을 얻어 덧없이 가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헛헛했다. 장례식을 다녀온 날 김씨는 큰 결심을 하고 가슴에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래, 나 하고 싶은 것 한번 해보자 했죠! 중학교 때 학원비 떼어먹으며 배운 기타가 내 음악 인생의 전부이지만 한 번도 가수에 대한 꿈을 저버린 적은 없었어요.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겠지만 진심으로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가장 놀란 사람은 아내 우순이씨였다. 남편의 트로트 사랑이 유별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수라니. 그것도 자기 노래를 만들어 앨범을 내는 진짜 가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고 한 번 결심하면 무슨 일이든 해내는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아내는 기분 좋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자기를 위해서는 평생 1달러도 안 쓰던 사람이에요. 야채 농사를 지어 LA로 배달을 나갈 때 왕복 4시간 운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었구나…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그래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선물을 하자.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죠. 그런데 앨범 하나로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4집까지 나왔네요. 하하하.”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과연 불도저답게 밀어붙였다. 한국에 나가 고시텔에 묵으며 직접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곡을 붙여줄 작곡가를 수소문했다. 작곡가 김준규씨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김준규씨는 1980년대 가수 주현미를 스타로 만들었던 트로트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의 제작자다. 2010년 케니 김 1집 ‘노신사의 노래’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매일 4시간씩 노래 지도를 받았고 모든 노래 가사를 직접 썼다. 케니는 따근따끈한 자신의 앨범을 훈장처럼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렇게 케니 김은 63세에 늦깎이 가수가 되었다.
당신께 바치는 노래
이때부터 아내 우순이씨는 가수 케니 김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이 됐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에 남편의 앨범을 보냈고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곧 방송을 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수 케니 김의 사연과 노래가 미 전역의 이민 1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그들 모두가 척박한 미국 땅에서 눈물과 땀을 쏟아냈던 또 다른 케니 김이고 우순이였다. 방송이 나간 후 팬이 되고 싶다는 전화와 편지들이 쏟아졌고 부부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앨범을 선물했다. 밑지는 장사였지만 케니 김은 행복했다. “애당초 음반을 팔아 돈 벌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저 힘들게 위로가 되었던 노래가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부른 노래가 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데뷔 7년. 어느덧 케니 김은 4집 앨범까지 낸 어엿한 중견가수가 됐다. 크고 작은 한인 행사에 초대가수로 불려가고 종종 한국에서 오는 가수의 공연에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돈벌이는 여전히 안 된다. 초대받은 행사에 가서 출연료는커녕 기부금까지 내고 오기 일쑤다. 몇 해 전부터는 5월 어버이 날이 되면 100여 명의 노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효도잔치를 하고 있다. 그 역시 효도를 받을 나이이지만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을 큰 기쁨이자 보람으로 생각한다. “어느 해 집 주위에 매실이며 살구가 너무 실하게 열렸더라고요. 우리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아 주위의 노인분들에게 오셔서 따가시라 했죠. 너무들 좋아하시더라고요. 미국에 살면서 나들이도 제대로 못하며 살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어요. 잔치 한번 열어드리려 한 것이 연중 행사가 되어버렸어요. 맛있는 것 실컷 먹고 노래 실컷 부르면서 즐기시는 거 보면 덩달아 기분 좋습니다. 친구 생각,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나고요. 뭐 이게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아메리칸 드림이 별거 있더냐
케니 김씨는 자신만을 위해 시작한 노래를 이제 다른 이를 위해 부르고 있다. ‘수많은 날들 비바람에도 쉬지 않고 걸어온 우리, 여보 정말 고생 많았소~’ 덤덤한 노랫말이 인상적인 ‘무지개’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노래이고, 귀에 착 감기는 미디움 템포의 ‘아메리칸 드림’은 먼 이국땅에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모든 이민자들에게 바치는 노래다. 성공을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해본 이민자 케니 김은 아메리칸 드림은 별게 아니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아메리칸 드림이요? 이루었죠!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에요. 돈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죠. 많은데도 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없어도 많은 것처럼 살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나에게 꿈과 희망이 있냐는 것입니다. 한국을 떠나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실패해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또다시 꿈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집념은 삶의 원동력이다. 열심히 바쁘게 살면 늙을 시간도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불도저 케니 김이 요즘 푹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뮤직비디오 제작이다. 아마추어 친구들이 힘을 모아 ‘아메리칸 드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훨씬 쉽게 노래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래를 부르고 듣기에도 참 좋아진 세상이에요. 저는 좋아하는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겨우 구해서 늘어질까봐 아끼고 아껴서 듣던 시절에 살았어요. 캘리포니아에 이사 오면 한국어로 라디오가 나오고 트로트를 실컷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당시엔 샌디에이고까지는 잘 안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아무튼 노래듣기에도 가수하기에도 참 편하고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지난 4월, 따끈따끈한 새 음반이 두 장이나 나왔다. 하나는 ‘쌍쌍파티’의 리메이크 앨범 ‘케니 김 주연하의 쌍쌍파티’, 또 하나는 케니 김의 4집 앨범이다. ‘쌍쌍파티’는 현재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절찬 판매중이다. 지난달 음반 판매 수익금 88만원도 받았다. 데뷔 7년 만에 처음으로 번 돈이다. 4집 앨범의 타이틀 곡은 ‘무명가수’, 흥겨운 댄스곡이다. 물론 이번에도 직접 가사를 썼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 불러요
스트레스 날리고 장단에 맞춰
박수치며 노래 불러요
행복의 바이러스 드리겠어요
나는나는 무명가수야
우리들에게 행복의 바이러스를 주겠다는 LA의 무명가수 케니 김.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꿈이 자리 잡고 있다. 장인의 노래가 18번이라는 든든한 첫째 사위와 CCM가수인 둘째 딸 지나와 함께 가족 콘서트를 여는 것이다. 딸과 함께 부르는 트로트 메들리도 멋지지 않겠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에서 이제는 의상 코디며 메이크업까지 담당하고 있는 아내는 가만히 미소짓는다. 아내의 미소는 늘 케니 김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곤 했다. 머지않아, 그의 새로운 도전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