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청년의 취업과 실업은 사회적 문제로 늘 언급된다. 하지만 출생 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이 가속화된다면 고령자 취업과 실업 문제를 마냥 두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은퇴가 노동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노동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령화가 우리보다 빨리 진행된 해외에서는 어떠한 정책을 펼치고 있을까? 해외의 중장년 취업 지원 제도를 살펴보자.
참고 한국산업인력공단,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지난해 일본은 법 개정을 통해서 정년을 70세로 연장했다. 종업원들이 70세까지 일할 수 있도록 ‘기업의 노력 의무’를 규정한 고령자고용안정법 개정안을 의결했으며, 올해 4월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실제로 일본의 가전제품 판매점 ‘노지마’(Nojima)는 근로자의 고용계약 상한 시기를 65세에서 80세로 연장했다. 65세가 된 근로자의 건강 상태와 근무 태도 등을 고려해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할 예정이다. 산업연구원 관계자는 “일본에서는 정년 연장을 통해 연금 수급 시기를 늦추고, 임금피크제를 통해 숙련된 노동자를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정년의 의미가 퇴색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밝혔다.
이렇게 정년이 연장되는 원인은 고령화 때문이다.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문제다. 실제로 OECD 통계 자료에 따르면 OECD 국가 대부분의 중위연령은 40세 이상이며, 이탈리아와 독일, 일본 등은 50세에 육박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고령화가 진행된 상태다. 2050년이 되면 한국은 중위연령이 56.4세로 급격히 상승하여 OECD 국가 중 가장 심각한 고령화를 겪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됐다. 출산율 하락을 겪고 있는 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국가도 인구 고령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어느 국가도 고령화의 늪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고용 시장에도 영향을 준다. 지난 10년간 OECD 평균적으로 55~64세 고령자의 노동 시장 참여율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 국가별로 편차는 존재하지만 대체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탈리아, 리투아니아, 헝가리, 네덜란드의 경우 18%P 이상 증가했다. 반면에 아이슬란드의 경우 소폭 감소했으나 평균 80% 이상을 유지하며 가장 높은 참여율을 보이고 있다. 종합하면 은퇴 이후에도 중장년의 취업은 세계적으로 활발한 상태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관계자는 “해외에서는 은퇴자의 역량을 활용한 취업 프로그램이 민간 부문에서 활성화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과 같은 공공기관에서 주도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 중이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각 나라에서는 중장년을 위해 어떤 직업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을까? 고령화 정책의 선두주자인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다양한 일과 학습의 연계, 미국
미국은 중장년을 대상으로 다양한 일과 학습의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지역사회 고용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일로써 자아실현을 하고자 하는 이를 위해서는 이제껏 쌓은 역량을 발휘하여 일할 기회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에도 삶의 재미와 의미를 추구하는 다양한 학습 기회를 준다.
중장년의 관심사에 맞는 프로그램도 지원한다. 창업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해 미국은퇴자협회(AARP)는 ‘앙코르 이니셔티브’(Encore Initiative)을 운영한다. 50세 이상 예비 창업자를 위해 온라인 수업, 워크숍, 업무 관련 네트워킹 등 다양한 지원을 한다. 특히 중장년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개설한다. 예를 들어 50세 이상 여성 10~15명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경제 및 마케팅 지식, 자영업 상식과 관련된 교육을 한다. 김숙응 숙명여대 실버비즈니스학과 교수는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는 교육 수준이 높은 베이비부머를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그 성과로 발생한 새로운 일자리는 삶의 의욕을 고취하고, 저출산으로 인한 경제 활동 인구의 빈자리를 채워준다”고 말했다.
앞서 본 예와 같이 취업이나 창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역량을 발달시키거나 삶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교육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백투워크 50플러스(Back to Work 50+)와 로드 스칼라(Road Scholar)다. 전자는 새로운 역량 개발에 해당하고, 후자는 새로운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백투워크 50플러스는 미국의 5곳의 전문대학에서 진행되며, 중장년이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술을 교육하고 있다. 워크숍, 개별 코칭 세션, 컴퓨터 교육, 노후 재정 관리 등을 가르친다. 로드 스칼라는 중장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여행 프로그램이다. 야외 모험 활동, 테마 여행, 세대 간 프로그램, 여성 특화 프로그램 등 40여 가지 유형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매년 10만여 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시니어의 학습 욕구를 교실이 아닌 여행을 통해 구현하는 사업 모델이다. 김 교수는 “로드 스칼라는 일반 여행에 학문적 깊이가 더해진 프로그램이다”라고 설명했다.
경험과 기술을 활용한, 일본
‘노인들의 나라’로 불리는 일본은 세계적으로 고령자 비율이 가장 높다. 지난해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유엔인구기금(UNFPA)과 함께 발간한 ‘2020 세계 인구 현황 보고서’ 한국어판을 보면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일본이 28.4%로 가장 높았다. 다음으로는 이탈리아(23.3%), 포르투갈(22.8%), 핀란드(22.6%)가 차지했다. 우리나라는 15.8%로 44위를 기록했다. 고령자의 비율만큼 고령자의 노동 시장 참여율도 높았다. OECD 통계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65세 이상 노동 시장 참여율은 약 25%다. OECD 평균이 약 15%인 것과 비교하면 높은 수치다.
이렇게 참여율이 높은 이유는 경제적·사회적 참여 욕구가 높기 때문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조사에 따르면 63.6%의 고령 노동자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노동 시장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중장년은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욕구가 컸다. 70세 이상도 건강 문제가 없다면 계속 일하고 싶다고 응답한 비율이 70% 이상이었다.
일본은 앞으로도 고령화가 가속될 것으로 전망하며, 이들을 경제 활동의 주축으로 보고 있다. 고령자의 재취업을 돕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바탕으로 민간과 지역 복지기관들이 연계해 다양한 취업과 고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이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고령 노동자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고, 노동 시장에서 이탈하지 않게끔 보조하는 정책을 계속 확대할 전망이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것이 바로 ‘시니어 중소기업 서포터 인재 프로그램’과 ‘생애 프로페셔널 프로그램’이다. ‘시니어 중소기업 서포트 인재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쌓아온 조정 능력, 협상 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 종합관리 능력을 살려 중소기업 재취업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도쿄일자리센터에서 주관하며, 대기업 및 중견기업 등에서 풍부한 경험과 능력을 쌓은 55세 이상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다.
해당 프로그램의 직무 유형은 7가지 직종(경영, 인사노무, 재무경리, 해외영업, IT시스템 관련, 기술관리)으로 구분된다. 취직에 성공한 시니어 중 시니어의 전문성이 직종에 합치된 경우는 약 70%이며, 비전문 영역으로 취직된 경우는 30%다. 시니어 중소기업 서포트 인재의 보수는 근무 시간, 주간 근무 일수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주 5일 기준으로 25만 엔(약 264만 원)에서 30만 엔(약 317만 원) 사이다.
한편 민간 영역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생애 프로페셔널 프로그램’이다. 도쿄에 소재한 민간 주식회사 ‘퀼리티오브라이프’(Quality of Life)가 2006년 11월부터 진행하고 있으며, 대기업 전문 분야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중소기업에 경영 자문을 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기업의 조언자로서 경영지원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50세 이상을 ‘생애 프로페셔널’로 임명한다. 이들은 고문 또는 어드바이저로서 기업의 여러 경영 문제에 대해 자문하는 역할을 맡는다.
생애 프로페셔널은 2가지 효과가 있다. 일단 시니어 전문가의 경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고,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근무 형태로 고문 소개 서비스를 활용하면 주 1회 등 은퇴 후 유연한 방식의 근무가 가능하다. 시니어 비즈니스 관계자는 “은퇴 후 역량을 보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시니어는 기업이 탐내는 인재가 될 수 있다. 국가와 더불어 기업이 상호 보완적으로 일자리 지원에 참여하면 시니어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밖에 해외의 민간에서 적용하고 있는 중장년 일자리 지원 제도와 기관을 살펴보자.
해외의 중장년 일자리 지원 제도 및 기관
시니어 네트워크
50세 이상 실직한 고령자로 구성된 비영리 사회혁신 조직이자, 덴마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네트워크 단체다. 실직한 고령 근로자가 네트워킹을 통해 노동 시장에 재진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주로 지역 내 잡센터(Job Center)와 협력하여 구직을 원하는 실직 고령자와 구인처를 연계하는 네트워크를 제공한다.
리스타트 프로그램
50세 이상의 구직자 중 6개월 이상 실업수당을 수령한 사람들을 고용하는 고용주에게 급여를 지원하는 고용 보조금 정책이다. 일주일에 최소 30시간 이상 일하는 중장년 근로자 1인 고용에 2년 동안 최대 1만 달러의 급여를 보조하는데, 최초 6개월과 12개월에 각 3000달러, 그리고 18개월과 24개월에 각 2000달러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제3기 인생대학
전일제 고용에 속하지 않는 고령층의 학습 고취를 위해 만들어진 전국 단위 학습 조직이다. 고령층 인구가 자신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관심사를 나누기 위한 연결망이다. 시험이나 과제 등은 없다. 대신 정규 수업과 스터디 그룹을 통해 흥미가 있거나 자신이 보유한 기술 및 지식을 공유한다.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금융기관에서 줄줄이 대규모 희망퇴직이 발생했다. 비대면 금융이 늘어나면서 필요한 영업점의 인원이 줄어든 탓이다. 은퇴한 전문직 종사자들은 근로 의욕이 상당히 높아서, 퇴직 이후에도 쉬지 않고 재취업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이러한 전문직 출신 은퇴자는 창업이나 창직에 관심이 많다.
참고 한국고용정보원, 신사업창업사관학교
적성을 고려한, 창업
박 씨는 대기업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선박 전문가였다. 선박 기술 서비스 분야에서 임원까지 올랐다. 오랫동안 일한 회사를 떠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예전부터 사업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실제로 적성검사를 하면 사업가 체질로 나왔다. 그래서 잘할 수 있고 자신 있는 분야인 선박 기술 서비스와 선박 엔지니어링 전문기업을 설립했다. 다른 일도 생각했지만, 이제껏 축적한 경험과 전문성은 포기할 수 없는 큰 자산이었다.
실제로 시니어 창업이 늘고 있다.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3분기 창업 기업은 34만여 개로 2019년과 비교해 13.3% 늘어났다. 특히 연령별로 규모를 파악했을 때 60세 이상의 전체 창업은 2019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15.8% 올랐고, 기술창업은 28% 상승했다.
이들이 창업을 선호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은퇴 후 재취업이 쉽지 않고, 창업의 진입 장벽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전경련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가 중장년 구직자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6명 이상은 6개월 이상의 장기 실업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100년행복연구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퇴직자 3명 중 1명은 자영업을 선택했다. 선호하는 이유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업의 장기화와 손쉬운 접근성이 창업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하지만 창업의 길도 어렵다. 국민의힘 소속 양금희 의원이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제출받은 ‘창업 기업 생존률 현황’ 자료에 따르면, 국내 창업 기업의 5년 차 생존율은 29.2%로 집계됐다. OECD 주요국 창업 기업 5년 생존율 41.7%와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한편 코로나19도 창업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중장년 취업 컨설팅 관계자는 “창업 문의는 많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창업을 미루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 만약 창업을 준비한다면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창업을 위해서는 4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창업자, 아이템, 상권, 창업자금이다. 어느 하나도 부족함 없이 유기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창업자의 역량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 아이템을 찾았다면 적합한 상권을 알아보고, 그 상권에 입점하기 위한 창업자금을 비축해야 한다. 다음은 한국고용정보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예비 창업자를 위한 4계명을 살펴보고, 최근 부상 중인 유망 창업 아이템을 소개한다.
예비 창업자를 위한 4계명
#1 적성이 최우선
창업은 만만치 않다. 남들이 한다고 덩달아 휩쓸려 창업을 시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선은 ‘자신이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정하는 것이 좋다. 퇴직한 중장년 세대는 성격이나 장단점 같은 본인의 정확한 특성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중장년 취업 컨설팅 관계자는 “평소에 즐기는 취미나 흥미, 그리고 자신이 쌓아온 역량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 유망 아이템은 적합성을 고려
유망 아이템을 정하라고 하면 모두 장사가 잘되는 일을 선택한다. 물론 수익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창업자와의 적합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직접 자료 조사도 하고, 발품을 팔면서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황윤정 한국열린사이버대학 디지털비즈니스학과 교수는 “시니어인 만큼 동년배의 니즈와 트렌드를 파악하고,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아이템을 정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3 상권의 분위기와 유동 인구
점포 창업에서 상권은 중요하다. A급 상권에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무조건 A급 상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A급 상권의 점포는 임대비용도 비싸고 권리금도 장난이 아니다. 상권이 좋다고 해서 모든 상품이 잘 팔린다는 보장은 없다. 상권 내에서도 입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입지에 맞는 업종이 다 다르다. 황 교수는 “상권의 분위기가 업종과 어울리고, 유동 인구가 많은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4 비용과 매출
이제까지 조금 이상적이었다면 지금은 현실적인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 창업에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창업자금은 총투자비용의 70%를 자기 자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본이란 그 돈이 없어도 당장 사는 데 문제없는 자산을 말한다. 만약 자금이 부족하면 선택한 업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창업 규모를 줄이는 것이 낫다. 중장년 창업 컨설팅 관계자는 “예상 비용이나 예상 매출액을 꼼꼼히 따져보고, 관련 분야의 비용 지원 제도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2021 뜨는 창업 아이템
맞춤형 향기 서비스 ▶ 최근 향초와 디퓨저 같은 향기 산업이 급성장 중이다. 영국 시장 분석 업체 ‘IAL컨설턴트’에 따르면 글로벌 향기 산업 규모는 2022년까지 약 40조 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쾌적한 실내 환경 유지 및 스트레스 해소로 향기 제품이 많이 애용된다.
공유 주방 ▶ 공유 경제를 활용한 공유 주방 사업이 뜨고 있다. 점포 창업을 하는 대신 공유형 주방을 이용해 배달음식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점포 창업보다 초기 비용이 저렴하다. 공유 주방은 4평 정도의 공간에 1000만 원 내외의 보증금과 월 160만 원 정도의 이용료만 지불하면 된다. 배달을 이용하는 1인 가구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 더욱 주목받고 있다.
창문농장 ▶ 반려식물이 하나의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창문농장(Windowfarm)이 뜨고 있다. 창문농장은 아파트 거실이나 베란다 창문에 수직으로 설치하는 수경 재배 시스템이다. 계절과 상관없이 친환경 채소를 직접 재배해서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홈가드닝과 플랜테리어에 대한 수요가 많아 앞으로 새로운 먹거리가 될 것이다.
새로운 대안, 창직
A씨는 호텔리어로 20년 동안 일하다 은퇴했다. 은퇴 후 여가를 즐기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아내의 잔소리와 더불어 계속해서 비는 통장 잔고를 메워야만 했다. 얼떨결에 대리운전을 시작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취객의 난동과 폭언 및 욕설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아들의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 이동 서비스에 영감을 받아 결혼식 당일 웨딩카로 신랑 신부를 이동시켜주는 웨딩쇼퍼 사업을 시작했다. 호텔리어와 대리운전 경험을 발휘해서 창직을 시도한 것이다.
위는 대표적인 창직 사례다. 저성장이 계속되면서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탓에 중장년의 재취업도 쉽지 않다. 음식점, 숙박업, 카페 등 이미 포화 상태인 시장에서는 창업으로 살아남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과 맞물려 고학력 베이비붐 세대가 재취업 시장에 뛰어들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창직’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 관계자는 “생계유지와 함께 일로써 보람을 얻기를 원하는 중장년층이 많아지면서 창직을 원하는 수요가 생기고 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원하는 진로 유형을 파악했는데, 창직 추구형이 64.27%로 가장 높았다. 이 유형은 자신의 경력을 활용해 지속해서 경제적 소득을 얻기를 희망했다. 주로 장기 근속한 도시의 화이트칼라 남성 노동자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다양한 사회관계망을 통해 구직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창업과 자영업 지원 정책을 선호했다.
창직은 쉽게 말해서 새로운 직무를 만드는 일이다. 그 직무를 하기 위한 내용과 지식, 기술 등이 포함된다. 창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주로 제품이나 기술이다. 반면에 창직은 직무를 분석하고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해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다.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창업과 창직을 자주 혼동하는데, 이는 창직을 통해 구현되는 방법이 대부분 창업이기 때문이다.
창직을 위해서는 참신성, 수익성, 실현 가능성, 전문성이 필요하다. 이 일은 새로운 직업을 만드는 것인 만큼 참신해야 하고, 새 직업의 직무 수행은 기존의 일과는 확실히 다른 특성을 가져야 한다. ‘직업’이기에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법적 및 제도적 여건을 살펴야 한다. 창직 관련 전문가는 “창직은 새로운 업을 만드는 일이기에 업으로서 지속할 수 있고, 경제적 소득이 있어야 한다.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도 이상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창직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미래에 전망이 밝은 창직 업종을 소개한다.
예비 창직자가 알아두면 좋은 Tip
#1 다방면으로 탐색하자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전반적인 현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웰빙에 대한 관심과 주 5일 근무 확산으로 여가 생활이 늘어나면서 다이어트 프로그래머나 파티 플래너가 생겨났다. 또한 빅데이터의 발달로 빅데이터 분석가도 유망한 직업으로 부상했다. 이처럼 새로운 직업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 변화, 수요자의 욕구, 과학기술의 발전 등 다방면으로 탐색할 필요가 있다.
#2 해외로 눈을 돌려보자
해외 직업 중에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해 적용 가능한 직업을 찾을 수 있다면 새로운 직업을 만들 수 있다. 맥주 주조사나 VJ 같은 직업도 해외에 있던 직업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경우다. 다만 각 나라의 문화, 제도, 시장에 따라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직업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적용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한 뒤 조정해야 한다.
#3 융합을 고려하자
기존 학문, 직업 간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직업을 만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음악치료사나 미술치료사가 있다. 기존 노동 시장에 전혀 없던 직무보다 기존 직업 간의 결합 또는 융합으로 발생한 직업이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따라서 직업 간의 결합과 융합 가능성을 찾아보자. 특히 반려동물과 관련된 시장을 주의 깊게 보면 좋다.
#4 분화를 검토하자
새로운 수요에 따라 기존 직업에서 분화되거나 전문화하여 직업이 나타나기도 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애견 옷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애견 옷 디자이너가 나타났다. 이 직업은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핵가족 및 독신 인구 증가로 애완동물 시장이 성장하면서 패션 디자이너에서 분화된 것이다. 기존의 직업과 사회 전반적인 현상을 살피면서 분화할 수 있는 직업을 눈여겨보자.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창직
로봇 컨설턴트 ▶ 일반 기업의 로봇 사업 도입 및 전환에 대한 컨설팅을 제공하기 위해 콘셉트 디자인, 타당성 연구, 품질 관리 등 다양한 테스트를 실시한다. 고령화와 자동화 추세에 따라 생활 전반에 로봇 사용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도심 RPG개발자 ▶ 도시를 게임판 삼아 참여자가 직접 역할을 수행하면서 도시의 문화나 역사를 체험하는 일종의 놀이마당을 기획하고 운영한다. 게임을 문화 체험, 도시 체험 등 다양한 영역에 접목하여 사업을 진행할 수도 있다. VR이나 AR 체험이 늘어나면서 유망한 직종으로 뜨고 있다.
스마트팜 전문가 ▶ 시설 원예 및 축산 농가를 대상으로 사물인터넷 등 ICT를 활용해 농가 시설을 현대화하고, 이를 통한 지속적인 성장 및 수익 창출을 지원하기 위해 스마트팜 설계, 구축, 운영 등에 관해 조언한다. 스마트팜은 한국고용정보원이 정한 8대 혁신성장 산업 중 하나다.
서류전형이라는 큰 산을 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면접이다. 면접은 시간이 정해져 있는 만큼 단 몇 마디로 자신의 강점을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돌발 질문에 능숙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트렌드에 발맞춰 ‘줌’(ZOOM) 등을 활용한 비대면 면접 방식도 알아둬야 한다. 재취업의 길로 향하는 최종 관문, 면접관의 시선을 끄는 면접 노하우를 소개한다.
도움 중장년 재취업 전문기업 상상우리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나이와 관계없이 두근거리고 긴장되는 일이다. 말 몇 마디로 합격·불합격 여부가 결정되는 면접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어느 대중가요의 노래 가사처럼 면접관 앞에서는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변하고, 동공이 흔들리며, 잘만 나오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하지만 고생 끝에 면접장에 들어선 이상 허무하게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중장년 일자리 시장은 모집 경력이 10년 이상만 넘어가도 30대 후반~40대 초반 지원자들까지 몰리기 때문에 면접보다 서류전형이 더욱 치열하다. 그 말은 서류만 통과해도 합격률이 크게 높아진다는 뜻이다. 특히 중장년은 면접관과의 직접적인 소통으로 나이에 따른 편견을 해소하고, 지혜가 돋보이는 발언으로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업의 입장에서 지원자에게 궁금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질문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기만 하면 횡설수설하지 않고 면접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재취업 전문가가 알려준 면접 팁을 알아두었다가 실전에서 멋지게 활용해보자.
[1] 1분 자기소개는 두괄식으로 명료하게
모든 지원자가 피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단연 1분 자기소개다. 1분 자기소개는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의 강점을 압축해서 보여줘야 하는 초고난도 미션이다. 첫 질문이라는 점에서 부담감도 크다. 하지만 다른 질문과 달리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다. 또한 흥미를 유발할 경우 추가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꼼꼼하게 연습하면 꽤 유리한 무기가 된다.
일부 중장년은 ‘자기소개’라는 단어 때문에 말 그대로 인생관이나 취미, 생활 방식 등을 소개하는 질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1분 자기소개는 지원자가 회사에 적합한 인재인지 여부를 빠르게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므로 직무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지양해야 한다. 대신 자신이 지원한 직무에 적합한 이유를 한 줄로 정리하고, 두괄식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이 좋다.
▶ 기출 질문 자신을 1분 동안 소개해보세요.
▶ 합격 노트 실제 재취업 성공 사례 (공공시장 영업 관리직)
저는 누군가를 제 편으로 만드는 남다른 재주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공공시장 영업에 특화된 사람입니다. 최근 2년간 공공시장 영업 관리와 마케팅으로 연 ○○억의 매출을 올린 경험이 있습니다. 저도 중장년이기 때문에 매년 늘고 있는 노령 인구와 장애인 이동권 확보에 관심이 많은데요. 보장구 충전기 분야는 아직 지자체와 공공기관에서 법제화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자체 및 관련 공공기관 등을 대상으로 영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년간의 공공시장 영업 경험을 보장구 분야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 한 줄 정리 강점, 지원 동기, 직무 경험(1~2가지), 입사 후 포부를 매끄럽게 연관 짓는 것이 핵심!
[2] 개방적인 태도로 유연성 어필하기
직무 역량이나 경험 못지않게 중장년에게는 ‘소통 능력’에 대한 질문이 단골로 등장한다. 업무 도중 나이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의견 차를 우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질문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관계 개선에 관한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이는 실제 조직 생활에 적응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컨대 혼자 결론짓지 않고 다 같이 문제를 살펴보며 장단점을 분석하는 수평적인 의사결정에 익숙해져야 하고, ‘내가 옛날에 해봐서 안다’는 뉘앙스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보다 다양한 시각을 포용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적절한 답변으로 유연성을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위 말해 ‘꼰대’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면접 태도 또한 신경 써야 한다. 자세와 표정 등 비언어적 표현은 언어적 표현만큼 인상에 영향을 미친다. 질문을 끝까지 듣지 않고 면접관의 말을 가로채며 답변을 하거나 팔짱을 끼고 상체를 뒤로 젖혀 앉는 등 ‘언행불일치’의 태도를 보인다면 답변에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면접도 기업과 개인 간 소통의 일부라는 점을 기억하며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 기출 질문 젊은 동료와의 갈등을 해소하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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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말만 한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저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청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맞장구를 치며 대화에 활기를 더하려 노력합니다. 다만 친밀감을 표현할 목적으로 사적인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지양하는 편입니다. 또 상대방이 했던 말을 요약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내는 것도 저만의 노하우입니다.
[3] 회사의 지향점을 개인의 목표와 연관 짓기
면접이 끝날 무렵에는 입사 후 목표나 계획, 포부 등을 묻는 경우가 많다. 이는 회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지원자의 목표와 일치하는지, 혹은 구체적인 업무 추진 계획이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다. 즉 ‘조직에서’ 이루고 싶은 포부를 의미한다. 따라서 장대한 노후 계획이 있더라도 개인적인 목표보다는 지원 직무와 연관 지어 대답하는 것이 좋다. 특히 직무 관련 최신 동향이나 트렌드를 언급하며 향후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해낼 역할을 구체적으로 짚는다면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직무 관련 자기계발 계획을 언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속적인 발전을 원하는 기업은 주어진 일만 하려는 사람보다 성장을 도모하는 사람과 일하길 희망한다.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아 회사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 기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용을 고려하게 된다. 관리직을 지원하는 경우 기업의 비전을 역으로 질문해도 좋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는 시간에 기업의 5년 후 비전을 물어보는 것이다. 중장년의 관록과 경험으로 회사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기업은 지원자의 진취적인 태도를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다.
▶ 기출 질문 입사 후 (조직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계획이 있습니까?
▶ 합격 노트
· 모아둔 돈으로 전원주택을 지어 아내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X)
· 최근 ‘라이브 커머스’ 등 비대면 유통 채널이 코로나19 시대에 새로운 돌파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30년 경력을 보유한 유통 전문가로서 해당 채널의 판로를 뚫고 실질적인 매출 상승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O)
· 그동안 마케팅을 진행했던 사례를 책으로 만들어 젊은 마케터들에게 지식을 전파하고 싶습니다. (O)
◇ 코로나19 시대, 비대면 면접 TIP
장비 점검 후 접속 환경 확인하기 ▶ 화상회의 시스템에 참여하려면 노트북, 태블릿PC, 스마트폰, 데스크톱 중 하나가 필요하다. 이 중 노트북이 제일 이상적이다. 노트북은 대부분 화상캠과 마이크가 기본적으로 탑재돼 있는 반면, 데스크톱은 별도의 설치가 필요하다. 스마트폰으로도 접속이 가능하지만, 연결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어 가급적 지양하는 것이 좋다. 준비가 끝났다면 끊김을 방지하기 위해 와이파이가 안정적인 환경에서 접속한다.
배경은 깔끔하게, 조명은 밝게 ▶ 비대면 면접은 주변 배경도 인상에 큰 영향을 준다. 단정하게 차려 입어도 주변이 산만하면 효과가 없다. 가급적 흰 벽 등 깔끔한 배경 앞에서 면접을 보는 것이 좋다. 스터디룸이나 세미나룸을 빌려도 된다. 주변을 미처 정리하지 못했어도 가상 배경은 넣지 않는다. 진지해 보이지 못할뿐더러 인물이 왜곡되어 나타날 수 있다. 집 안이 어두울 경우 LED 스탠드나 화상회의용 조명을 활용해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것도 좋다.
카메라 렌즈 보고 말하기 ▶ 간혹 화면 속 면접관의 얼굴을 보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노트북은 화면 위에 카메라가 달려 있어 화면을 보고 말할 경우 시선이 아래로 향하고, 내려다보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노트북에 받침을 대서 높이를 올리고 렌즈를 응시하며 말해야 한다. 또 노트북과 50cm 내외의 거리를 유지해 화면에 상반신 3분의 2 정도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안정적이다.
이어폰으로 음질 보완하기 ▶ 음질은 비대면 면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실제로 면접 중에는 목소리가 울리거나 끊기는 등 음질로 인한 다양한 애로 사항이 생긴다. 청력이 좋지 않아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듣고 대답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음이 없는 공간을 찾고, 노트북 내장 마이크 대신 무·유선 이어폰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어폰 착용 후 사전 테스트는 필수!
음소거 기능 활용하기 ▶ 1:1 면접이 아닌 그룹 면접의 경우 대면 면접과 마찬가지로 다른 지원자의 답변에 경청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비대면 면접은 그 특성상 주변의 잡음이 섞일 수 있어 면접관이나 다른 지원자가 말할 때 ‘음소거’ 기능을 눌러놓는 것이 좋다. 단, 자신의 차례가 오면 해제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성공적인 재취업을 위한 마음가짐
모든 도전이 언제나 달콤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도 탈락의 고배를 마실 수 있고,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장년 일자리 공급 과잉 현상은 베이비붐 세대의 고령화와 맞물린 사회적 과제이므로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전에 일자리 시장에 뛰어들려는 이유와 목적을 진단하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분석해야 한다. 가령 생계를 위한 소득이 필요한지, 사회 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자 하는지, 혹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길 원하는지 분명히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 판단하기 어렵다면 공공기관에서 시행하는 진로 적성검사 등을 받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다음 이에 걸맞은 자기계발을 꾸준히 하다 보면 기회는 자연스레 다가오고, 인생 후반전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PLUS+] 다시 출발점에 서 있는 중장년을 위한 TO-DO LIST
· 희망 기업 목록 작성 후 관련 정보 업데이트하기
·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경력 상담 및 자가진단 하기
· 국민내일배움카드 등 정부 지원 서비스로 취업 연계 자격증 준비하기
· 서울시50플러스재단 등 또래 집단 커뮤니티 활동으로 인맥 넓히기
· 희망 직무 및 관심 분야 관련 자원봉사 프로그램 참여하기
요즘 시니어는 은퇴 이후에도 일을 놓지 않고 있다. 실제로 하나금융그룹의 100년 행복연구센터가 중장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만60세~64세의 60%는 70세가 넘어서도 일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대부분 은퇴 이후에도 상당한 근로 의욕을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학력 수준이 높고, 각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축적한 시니어들이 은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먼저 고민하는 문제가 바로 ‘일자리’다. 최근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2019년 50+상담센터를 통해 진행한 5383건의 생애설계영역 1:1 상담 자료를 분석하고 보고서를 발표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생애 설계 7대 영역(일·재무·사회공헌·사회적 관계·가족·여가·건강)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상담 영역은 ‘일(53.2%)’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사회공헌(20.8%)’ ‘여가(12.0%)’ ‘사회적 관계(5.1%)’ 순으로 나타났다. 일자리 관련 상담 시 희망일자리 형태에 대한 응답은 사회 공헌형이 54.3%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그 다음으로 생계형 23.8%. 혼합형 17.7% 순으로 나타났다.
중장년은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공헌활동이나 사회적 관계도 고민하고 있었다. 분석 자료를 보면 일자리에 대한 상담과 더불어 사회공헌과 사회적 관계, 여가에 대한 상담도 전년도 보다 큰 폭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가 영역의 상담은 2018년 대비 상담 건수가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사회적 관계(94.37%)와 사회공헌(87%) 영역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평균적으로 50대 중후반이 상담을 많이 요청했으며. 상담센터를 방문하는 것도 이전보다 빨라졌다. 50+상담센터를 방문하는 상담자의 성별과 연령 분포를 살펴보면 남성 42%, 여성 58%로 나타났으며, 여성의 평균 연령은 56.83세, 남성의 평균 연령은 59.36세로 나타났다. 퇴직 후 상담센터 방문까지의 평균 소요 기간은 27개월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도 방문 평균 소요시간(35.32개월)과 비교했을 때 8개월 이상 단축된 것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 김영대 대표이사는 “재단에서 운영하는 50+상담은 단순히 정보 전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50+세대가 할 수 있는 것 또는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함께 탐색, 진단해 보고 이후 활동 연계까지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다”라며 “이번 연구 결과를 토대로 상담의 효율성을 높일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앞으로 추가 개관할 50플러스캠퍼스 및 센터에도 50+상담센터를 마련해 시민들의 접근성을 더욱 강화하겠다”라고 말했다.
지난 15일 정부는 향후 5년간 인구 정책의 근간이 될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다가오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모든 세대가 함께 행복한 지속 가능 사회’라는 비전하에 시행한다. 특히 은퇴를 앞둔 베이비붐 세대의 능동적 주체로서의 역할 지원 및 역량 강화 정책이 중요하게 다뤄졌다. 이에 계획안 속 중장년의 활기찬 사회 참여를 위한 일자리 관련 주요 전략들을 살펴보자.
이번 계획은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적응과 대응’이라는 두 측면을 균형 있게 접근하기 위해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보는 사회 조성 △건강하고 능동적인 고령사회 구축 △모두의 역량이 고루 발휘되는 사회 △인구 구조 변화에 대한 적응 등의 추진 전략으로 진행한다. 시니어 일자리와 관련한 세부안과 함께 눈여겨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보는 사회 조성
일을 전제로 생애를 기획하는 청년세대들에게 결혼·출산이 장애나 부담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지원에 집중한 전략이다. 특히 발달 단계에 맞춰 아동 돌봄의 공공성 및 책임성을 강화한다는 목표로 관련 서비스가 확대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시간제 돌봄 일자리의 확충으로 경력단절여성이나 주부 등 중년여성의 참여도 활기를 띨 전망이다. 관심 있는 시니어라면 ‘아이돌보미’ 자격증 취득이나 양성 교육 이수 등을 해두는 것이 좋겠다.
[건강한 꽃중년이라면 아이돌보미 어떠세요?]
‘아이돌보미’는 활동에 연령 제한이 없고, 시간제와 종일제 등 시간 선택이 가능해 중년여성 일자리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경력단절이 됐거나, 전업주부로 지내온 이들도 그동안의 육아 경험을 살려 도전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활동수당은 시간당 기본 시급 8600원으로, 야간, 휴일, 연장근로 시 기본 시급의 50%가 할증된다. 또, 동일한 장소에서 복수의 아동을 함께 돌볼 시에도 추가 수당이 지급된다(아동 2명 돌봄 시 4300원 추가, 3명 돌봄 시 8600원 추가, 2020년 기준). 그밖에 명절상여금, 교통비, 주휴수당, 연차휴가수당 등 각종 수당을 제공받을 수 있다.
△아이돌보미 지원 자격: 연령에 상관없이 신체 건강한 활동 희망자
△지원 방법: 아이돌봄 서비스 홈페이지에서 모집공고 확인 후 활동 지원 신청서 작성(기관 별 모집 시기 및 방법 상이)
△양성교육 수강 및 이수: 합격자는 서비스 제공 기관의 안내에 따라 양성교육 수강. 관련 자격증 소지자 등 수시 면접 통과자는 면제(당해 연도 보수교육 이수해야 함). 양성교육은 80시간의 이론 교육과 20시간의 현장실습으로 이뤄짐. 양성교육 이수 후 6개월 이내 최소 120시간의 의무 활동을 이행한 경우 교육비 15만 원 환급. 20시간의 현장실습을 마쳐야 최종적으로 아이돌보미 활동 자격 부여.
둘째, ‘건강하고 능동적인 고령사회 구축’
소득·돌봄·주거 등 기본적 삶의 영역에서 국가 책임은 지속 강화하고 능동적 고령자로서의 역할 기반을 마련하는 전략이다. 내년도 전체 일자리 예산은 올해보다 5조 원 늘어난 30조5000억 원이다. 이중 3조2000억 원으로 정부의 직접일자리 104만2000개를 만드는데, 80만 개가 노인 일자리로 채워진다. 지난해 대비 노인 일자리 규모는 6만 개 늘었고, 예산은 1137억 원이 추가됐다. 이에 앞서 보건복지부는 11월 23일부터 이달 18일까지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2021년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 사업 참여자 모집을 시행하기도 했다.
[우리 동네 신중년 영웅, 5060 퇴직전문인력의 능력 펼치기]
고용노동부도 이달 10일 ‘2021년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사업 시행계획’을 발표했다. 자치단체가 최대 50%의 예산을 부담해 공동 시행하는 사업으로, 5060 퇴직 전문인력이 지역 내 사회활동을 통해 더 오래 일하도록 지원한다. 내년도 경력형 일자리사업 규모는 올해 2500명보다 2배 늘어난 5000명으로, 예산은 277억 원이다. 권기섭 고용노동부 고용정책실장은 “향후 고령화에 따라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퇴직 전문인력이 경력형 일자리 사업을 통해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지역사회는 이들의 경력을 활용하여 질 높은 사회서비스를 받도록 이 사업을 확대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50~69세 미취업자 중 전문자격이나 소정의 경력을 갖춘 중장년이라면 참여 가능하다. 활동 기간은 최대 11개월이며, 최저임금 이상의 보수가 지급된다(2020년 월 평균 124만 원). 참여를 원하는 5060 퇴직자는 자신의 경력이나 자격증에 해당하는 분야에 대해 거주지 자치단체에 신청하면 된다. 경영전략, 교육연구 등 13개 분야로 나뉘며, 최근엔 드론을 활용한 지역 환경·안전관리, 취약계층 건강관리, 중소기업 재무·노무 컨설팅 등이 인기다.
셋째, ‘모두의 역량이 고루 발휘되는 사회’
의욕과 능력이 있는 중장년의 인적 제고를 위한 미래형 교육, 평생교육, 직업교육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한다. 이에 퇴직 후 경력을 살려 일할 기회 확대 및 사회공헌 활동을 장려하고, 신중년의 계속고용 지원과 다양한 근로 형태를 창출할 계획이다. ‘계속고용장려금’, ‘워라밸일자리장려금’ 지원 등 주된 일자리에서 계속 일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도 힘쓴다. 또, ‘신중년 적합직무 고용장려금’(월 40만~80만 원), 전문인력 재취업 지원(기술 및 연구 인력) 등 퇴직 후 전문성 활용 기회도 확대한다. 이를 위해 생애경력설계(정부지원 경력설계-훈련-취업지원 패키지), 재취업지원서비스(기업), 생애전환기 노후준비(국민연금공단) 등 신중년 경력설계 및 역량 개발도 강화할 방침이다.
올해 9월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1년 중점 프로젝트 40선 예산’에 따르면 ‘중장년의 재기를 돕는 일자리 지원 패키지’에 대한 내년도 예산은 총 3602억 원이다. 올해 2594억 원 대비 1008억 원이 추가 책정됐다(+38.8%). △조기재취업수당(3474억 원) △40대 훈련생계비 한시 지원(75억 원) △재취업서비스 지원(52.9억 원) 등 총 세 항목으로 나눠 집행한다. 이를 통해 중장년 이·실직자의 재취업 소요 기간을 단축하고, 양질의 일자리 이동을 지원할 예정이다.
[한국판 뉴딜과 중장년 일자리]
내년에 눈여겨봐야 할 점은 ‘한국판 뉴딜’ 정책 시행에 따른 디지털·그린 뉴딜 직무 확대다. ‘신중년 적합직무 고용장려금’ 지원 대상에서도 디지털·그린 뉴딜 직무와 인원이 확대되는 등 관련 분야에서 50+세대 일자리가 활성화할 전망이다. 이에 지난 1일 열린 '50+일자리 특별포럼'에서 박가열 한국고용정보원 미래직업연구팀 부연구위원은 "저탄소 친환경 사회로의 요구가 커지고 있으므로 50+세대 역시 도시재생 사업, 스마트팜 구축, 신재생 관련 제품 서비스 개발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고령층 등 디지털 취약계층을 위한 교육 및 서비스도 활발히 이뤄질 계획이니, 역량 강화가 필요한 시니어라면 관련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황윤주 서울시50플러스재단 정책연구센터장은 "디지털, 그린 뉴딜은 한국판 뉴딜의 핵심으로 이 분야의 일자리 창출 전망은 긍정적이라 볼 수 있다"며 "컴퓨터 활용 능력,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시장성 등을 배우고 폴리텍대학, 중장년 창업기술센터 등 50+세대를 위한 다양한 기관에 관심을 둬야 한다"고 내다봤다.
‘2019 시니어 아지트’ 설문조사 결과를 종합해보면 50+세대가 찾는 아지트는 ‘사는 곳 인근에 위치하며, 배움과 휴식을 위해 찾는, 동년배끼리 어울리기 쉬운 공간’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의 학교나 놀이터처럼 시니어도 친구들과 공부하고 뛰어놀 곳은 어디 없을까? ‘50플러스캠퍼스’가 그 답이 되어줄 것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운영하는 50플러스캠퍼스는 중장년 세대를 위한 교육을 비롯해 일자리 및 창업, 사회참여, 여가와 일상 등의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대학을 의미하는 ‘캠퍼스(campus)’라는 말이 붙었듯 50세 이후 다니는 학교처럼 여길 수 있다. 현재 중부(마포), 서부(은평), 남부(구로) 등 3곳이 활발히 운영 중이다. 향후 동남(강남) 캠퍼스를 비롯해 북부(도봉), 동부(광진) 캠퍼스도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도 수업 들으러 갑니다
학교와 다름없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학생들의 나이와 커리큘럼이다. 물론 중장년 위주의 공간이기 때문에 일단 캠퍼스에 들어서고 보면 ‘나이’에 대한 부담이나 위화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커리큘럼 역시 교과서 위주의 정규 교육과정이 아닌, 50플러스 세대만을 위한 실용적이고 유익한 강의로 구성된다. ‘50+인생학교’, ‘앙코르커리어’ 등 기본 과정을 비롯해 지역 캠퍼스마다 상시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학습 주제가 다양한 만큼 책상이 놓인 일반 강의실부터 요리, 춤, 공예 등을 실습할 수 있는 공간까지 캠퍼스 곳곳에 배움터가 마련돼 있다.
캠퍼스의 꽃 ‘커뮤니티 공간’
50플러스캠퍼스에 등록된 커뮤니티라면 간담회, 포럼, 토론 등을 진행하는 공간을 빌릴 수 있다. ‘커뮤니티’란 캠퍼스 프로그램 참여 후 동년배들과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결성한 일종의 동호회 또는 모임을 뜻한다. 일, 학습, 문화생활, 사회공헌 관련 활동을 하는 5명 이상의 단체(대표자는 만 50~64세)를 대상으로 지원금과 활용 공간 등을 제공한다. 이밖에 방음 시설을 갖춰 음악 감상이나 합창, 악기 연주가 가능한 ‘스튜디오 흥얼’(3만 원), 연극·뮤지컬·요가 등 몸과 소리를 이용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몸짓교실’(5만 원) 등 널찍한 모임 공간도 부담 없는 가격으로 대관해준다(2시간 기준). 각 캠퍼스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 가능.
공유 사무실 ‘힘나’
공유 사무실 ‘힘나’는 업무 공간 겸 협업 공간으로 쓰인다. 창업, 창직을 위해 사람과 아이디어를 연결하고 자원을 연계하는 도전과 실험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중부캠퍼스의 경우 개별 사무실 4개 공간과 개방형 공유 공간 11석이 마련돼 있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하며(일요일 및 공휴일 휴무), 프린트기, 팩스, 책장, 사물함 등 사무용 가구와 기기도 제공한다. 은퇴 후 사무 공간이 필요해도 임대료 때문에 망설이는 경우가 많은데, ‘힘나’의 사용료는 개별 사무실 월 10만 원(보증금 100만 원), 개방형 공유 공간 월 3만 원(보증금 없음)으로 부담 없이 이용 가능하다.
두루두루 모두 영화 보러 가자
서부캠퍼스에서는 국내외 유수 영화제와 관객들에게 호평받은 한국 독립영화를 무료로 상영한다. 매주 월요일 2시 ‘두루두루강당’에서 열리며 때때로 감독과의 대화 자리도 마련된다. 남부캠퍼스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후 3시에 인기영화 및 독립영화를 ‘스튜디오 흥얼’에서 볼 수 있다. 중부캠퍼스 역시 특정일을 정해 ‘모두의강당’에서 무료 영화관람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 상영 일정은 각 캠퍼스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끼리 통하는 ‘50+상담센터’
50플러스캠퍼스를 처음 방문하거나 궁금한 점이 있을 때, 50세 이후의 삶을 의미 있게 설계하고 싶거나 고민이 있을 때 등등 ‘50+상담센터’의 문을 두드리면 된다. 공감대 형성이 수월한 동년배 컨설턴트가 일, 재무, 사회공헌, 사회적 관계, 가족, 여가, 건강 등 중장년층에게 유용한 맞춤 정보들을 1대 1로 친절하게 이야기해준다. 상담 비용은 무료다.
50플러스캠퍼스 아지트 요모조모
중부캠퍼스 ‘50+의 서재’ 약 500여 권의 책을 편안하게 열람할 수 있는 곳이다. 스크린, 음향 시설, 무대도 갖추고 있어 강연회나 소규모 공연도 가능하다.
남부캠퍼스 ‘열린정원’ 혼자 사색을 즐기거나 동년배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에 좋은 공간이다. 지하 1층으로 이어진 ‘품은정원’까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서부·중부캠퍼스 ‘모두의 부엌’ 각종 조리 시설과 식탁이 잘 마련돼 있어, 쿠킹 클래스는 물론 맛있는 음식과 함께 유쾌한 파티를 열기에도 좋다.
[interview] "캠퍼스 어디든 맘 편히" 인생학교 3기 커뮤니티 ‘종횡무진 밴드’
‘종횡무진’(縱橫無盡)이라는 밴드 이름답게 50플러스캠퍼스만 오면 이곳저곳 부담 없이 다닌다는 이들은 중부캠퍼스 프로그램인 ‘인생학교’ 3기로 인연을 맺었다. 본래 배움을 위해 찾은 곳이지만 동년배들과 우정을 돈독히 할 공간이 마련된 덕분에 그 이상의 즐거움을 찾아 발걸음이 잦아졌다.
밴드 대표인 정환식(60) 씨는 “학창 시절 이루지 못한 배움에 대한 열망과 음악을 향한 로망을 실현하는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매니저를 맡고 있는 김석재(58) 씨 역시 “악기를 연주하는 모임은 방음 시설이 된 연습실을 빌리는 게 고충이다”라며 “밴드를 위한 안성맞춤 아지트가 바로 이곳(중부캠퍼스 ‘스튜디오 흥얼’)”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확실히 캠퍼스 내에는 젊은 사람이 드물다. 어디를 가도 또래가 보이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고 덧붙였다. 밴드에서 꽃중년 드러머로 활약하고 있는 이수영(54) 씨는 “어디 가서 눈치 보지 않고, 우리끼리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마당이 생겨 좋다”며 일주일에 한 번 커뮤니티 모임을 다녀가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이야기했다.
밴드 외에도 라인댄스, 어반스케치 등 다양한 활동을 위해 캠퍼스 곳곳을 이용한다는 서동재(61) 씨는 쾌적한 공간에 대한 만족과 동시에 남다른 책임감을 드러냈다. 그는 “50플러스캠퍼스가 생긴 지 오래되지 않아 깨끗하고 시설도 편리하다”며 “시간이 흐를수록 사용자가 많아질 텐데 자칫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리만의 아지트를 넘어 다음 50플러스 세대를 위한 아지트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겠다”고 말했다.
김석재 씨는 “50플러스캠퍼스를 아지트 삼아 많은 중장년이 찾아왔으면 한다”고 말하며 “베이비붐 세대 인구 대비 우리를 위한 아지트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유익한 공간이 있어도 접근성이 떨어지면 잘 가지 않게 된다. 지역마다 시니어를 위한 시설이 곳곳에 늘어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나이가 들어도 여배우는 여배우다. 자신감 가득한 눈빛과 표정은 기본,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대사 연습은 또 얼마나 많이 했을까. 대본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메모를 보니 지금까지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였을지 짐작이 간다.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70대인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만났다. 설렘과 벅찬 감동. 무대는 그들에게 언제나 꿈이다.
구로구를 대표하는 시니어 극단
구로문화재단 아트벨리 지하 소강당, 매주 화요일은 정기적으로 구로 시니어 연극 동아리 ‘느티나무 은빛극단’이 모이는 날이다. 지금까지 함께 작품을 해온 세월도 11년째. 2007년 구로문화재단이 설립되고 1년 뒤 시니어 연극 동아리가 생겨난 것이 느티나무 은빛극단의 시초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프로그램도 있으면 좋겠다는 재단의 뜻이 컸다. 마침 설립 당시 구로구민회관에서는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시니어 교육 프로그램 ‘꿈꾸는 청춘예술대학’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그곳에서 교육받던 시니어를 대상으로 단원을 모집해 창단 당시 20여 명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작년 입단한 신입 배우 우성연(66) 씨를 포함해 현재 13명이 정식 단원으로 활동한다.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70대라지만 시민극단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 2018년 제1회 영동생활시민연극제 초청 공연과 함께 성미산동네연극축제, 서울시민연극제에서 2016년과 2017년 각각 무대에 올린 ‘어미’와 ‘우당탕탕, 이사 왔어요!’로 2회 연속 시상대에 오른 바 있다. 느티나무 은빛극단이 아마추어 연극계에서 나름의 성과를 내는 데에는 구로문화재단의 뒷받침이 있다. 단원의 능력 향상을 위해 연극에 필요한 전문 강사를 초빙해주고, 연극 연습이 있는 날이면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소강당도 빌려준다.
육십 넘어 찾은 재능
느티나무 은빛극단 단원들이 자랑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출석률. 정기적인 만남은 당연하고 연극 공연을 앞두고 거의 매일 일정이 잡혀도 밤이고 낮이고 제시간에 맞춰 연습 장소에 전원이 모인다. 이유는 단 하나, 무대에 서는 것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란다. 초등학교 학예회 때 연극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신정례(73) 씨는 느티나무 은빛극단에서 연극을 하면서 우울증이 싹 나았다며 밝게 웃었다. 구로구 토박이이자 극단 최고 연장자인 안영분(81) 씨는 어릴 적 못다 이룬 꿈을 이뤘다고 했다.
“구로구청 뒤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세 자매 중 막낸데 언니들이 마차 4개를 붙여놓고 학예회를 하는 것처럼 공터에서 뭔가를 하는 거예요. 언니들이 노래를 부르면 저는 그 옆에서 엉덩이를 막 흔들고 춤을 췄습니다. 공부는 잘 못해도 남들 앞에 서서 하는 건 잘했어요. 동네 아이들한테 무용도 가르치고 나름 공연도 했고요. 중학교 때는 청춘극단 단원이었던 동네 오빠를 따라다녔어요. 당시 유명했던 영화 ‘별들의 고향’을 연극으로 만들어 지금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자리에 있었던 제5보충대에서 공연도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15세였는데 아버지가 그만두라고 해서 배우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얌전하게 지내다가 스무 살에 결혼해서 살던 그녀가 바깥 활동을 시작한 건 환갑이 넘어서였다.
“처음에는 구로구민회관에서 노래를 배웠고요. 그 인연으로 연극까지 하게 됐어요. 1년에 한 작품씩은 꼭 하니까 너무 좋아요. 그래서 늙지 않나봐요.(웃음)”
창단 멤버인 이필연 씨는 구내 복지관에서 연극을 하다가 창단 소식을 듣고 입단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며 배우로서의 재능을 새롭게 발견한 이도 있다. 2012년에 입단한 강정자(75) 씨는 지금까지 연극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생각도 못했는데 우연히 알게 되었고 용기를 냈습니다. 와서 보니까 이렇게 좋은 인연들도 만나고 행복하더라고요. 제가 참 내성적인데 몰랐던 재능을 발견했어요. 대사 외우는 게 치매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가족들도 좋아합니다.”
양양례(72) 씨도 이렇게 뒤늦은 나이에 연극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다고 말한다.
“안영분 씨가 어느 날 같이 가자고 했어요. 한 번도 연극을 해본 경험이 없다 했더니 공부하면 다 할 수 있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인연이 된 지가 벌써 10년입니다. 살면서 슬프고 힘든 시간도 있었는데 연극 때문에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오면 마냥 즐거워요.”
서막동(78) 씨는 식당 운영을 잠시 쉬고 있을 때 느티나무 은빛극단 공연을 보러 왔다가 배우가 됐다. 벌써 11년 차 베테랑이다.
“경남 하동 화개장터 쪽이 제 고향인데 연극을 한 번이라도 봤겠어요? 처음에는 떨렸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다른 복지관에서도 연극을 합니다. 가끔 연기 잘한다는 소리도 들어요.”
다양한 사연이 연극으로 모여들다
이곳에서 배운 실력을 봉사활동에 연계하는 단원도 있다. 성모병원 과 마포요양원 등에서 봉사를 해온 임절자(77) 씨다.
“봉사활동한 지는 21년 됐어요. 처음 배울 때는 인형극을 했는데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떤 날은 연극하듯 어르신들과 얘기해요. 우리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엄마는 정말 열정적으로 산다고요. 연극은 인생 같아요. 굴곡지고 희로애락도 있잖아요.”
젊은 시절 교편을 잡았다는 안옥희(73) 씨는 직장에 다니는 막내딸의 육아를 책임져줄 생각에 한국방송통신대학 교육학과에 편입한 것이 계기가 돼 연극을 하게 됐다.
“손주 육아와 함께 공부하며 사람들을 만나다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그동안 극단 작품 ‘산불’과 ‘어미’에도 출연했습니다. 제가 원래 남자 전문 배우인데 요즘은 연출도 겸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느티나무 은빛극단에는 남자 배우가 없다. 주로 안옥희, 안영분 씨가 남자 역을 맡는다. 한봉애(66) 씨와 임절자 씨도 남자 역으로 무대에 선 적이 있다고. 처음에는 남자 배우도 있었지만 남자 단원의 출석률이 점점 떨어져 여배우 극단이 됐다.
극훈도 있다. “우아하고, 멋있고, 겸손하자”이다. 죽을 때까지 멋진 모습으로 무대에 설 것이라는 느티나무 은빛극단. 2월까지는 휴식시간을 갖고 3~4월 중으로 올해 무대에 올릴 작품을 고를 예정이다.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기억하시라. 한 명, 한 명 연륜에서 우러나온 귀한 열정을 조명 불빛 아래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mini interview◆
‘여성 리더십’으로 우아하게 극단을 이끌다, 느티나무 은빛극단 대표 이정란
목소리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는 느티나무 은빛극단의 이정란(78) 대표는 소녀 시절부터 품어왔던 꿈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려서부터 무용을 했죠. 굉장히 잘했어요. 배우도 해볼까 생각해본 적 있는데 집안 반대로 못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 결혼을 했다. 남편은 살림하면서 아이 잘 키우는 아내를 원했다. 아이들 다 키우고 맞이한 여유로운 시니어의 삶. 부부가 함께 노후를 잘 보내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10여 년 전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우리 집 양반 돌아가시고 나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지역 신문을 들춰보다가 인형극 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첫 번째 등록자였어요. 그때부터 연극하고 인연이 됐습니다.”
구로문화재단이 시니어 연극 동아리를 만들어보자며 이정란 대표에게 제안을 했다.
“재단에서 시니어 극단을 만들자고 했을 때 너무 좋았어요. 제가 하고 싶어 했던 거였거든요. 여기저기 다니며 새로 생길 극단을 홍보했어요.”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알릴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다녔고 관심 있는 이들과 얼굴을 맞대면서 열정을 불태웠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나이 들면 다들 한 고집하잖아요. 지금까지 모르던 사람들이 연극을 통해 만났으니 무조건 감싸고 서로를 보듬자고 생각했어요. 공연 연습을 할 때 혹시 따라오지 못하는 분에게는 따로 시간을 내서 함께 공부도 하고요.”
극단을 이끌던 지난 11년 동안 지각, 결석, 조퇴를 한 번도 안 해봤다는 이정란 대표. 독하고 무섭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우리 극단 단원은 한 번 나가면 다시 못 들어와요. 나간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고 싶다고 해도 냉정하게 잘랐어요. 너무한가요?(웃음)”
대본 외울 때가 제일 즐겁다는 이정란 대표. 대사를 다 외우고 난 다음에는 단원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은 다들 너무 잘하셔서 보람을 느껴요. 강사들도 다 딸 같은 사람들이지만 깍듯하게 대우합니다. 단원들 출석률은 칭찬받을 만큼 좋고요. 참 2011년도에 극단 이름을 공모했는데 제가 응모한 아이디어가 채택됐어요. 느티나무는 구로를 상징하고 은빛은 시니어를 의미합니다.”
이 대표는 최근 또 새로운 도전을 했다. 바로 복화술이다.
“연극과 구연동화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배우는 겁니다. 나는 나이 먹어서 못한다는 소리를 안 해요. 자존심 상해서요. 우리 며느리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롤 모델이라고. 나처럼 늙고 싶대요. 항상 도전하는 정신으로요. 연기는 ‘80세까지만 하자!’ 했는데 벌써 팔십이 다 되어가네요. 대본 외울 수 있을 때까지는 무대에 설 겁니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때로 선거나 시험은 도전 그 자체만으로 큰 의미를 부여받기도 한다. 얼마 전 제7회 지방선거에서 아홉 번의 출마 만에 당선된 송철호 울산시장이 그랬다. 범인들은 함부로 흉내 내기 힘든, 지치지 않는 도전은 과정만으로도 가치를 갖는다. 숫자의 크고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제 5년 차 변호사가 된 한 사내가 있다. 경력만 보면 막 커리어를 쌓아가는 푸릇한 젊음이 연상되지만, 이미 초로의 몸이 됐다. 대신 그의 가슴에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얻은 흉터와 사법고시 14전 15기라는 숫자가 훈장처럼 달려 있다. 오세범(吳世範·63) 변호사의 이야기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눈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선 맹수처럼 그를 둘러싼 카메라와 마이크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4년을 꼬박 도운 세월호 가족의 가슴을 후벼판 사건의 조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인을 제공한 방송사의 요청에 의한 조사였다. 결과도 대중을 쉽게 납득시키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방송인의 사회적 책임감 부족이 낳은 참사입니다.”
오세범 변호사는 얼마 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MBC의 ‘전지적 참견 시점’ 세월호 보도영상 사용 논란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MBC로부터 긴급 진상조사위원회 참여를 부탁받았고, 조사에 참여후 위원회와 함께 언론에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이해하는 만큼 누구보다 철저하게 조사하려고 애썼죠. 제작 과정을 모두 확인했는데 사회적 공감대와 상식 부족이 만들어낸 사건이에요. 편집 과정에서 다른 문제에 제작진의 관심이 쏠려 제대로 점검이 안 된 문제도 있었죠. 외부에선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은 사건으로 너무 힘들어하면서도 조사 결과를 이해해주셨죠.”
변호사 오세범 그리고 세월호
변호사 오세범을 이야기할 때 세월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운명처럼 인연을 맺었다”고 표현했다. 그에게 세월호와 관련한 경험은 변호사가 되고 나서도 계속 가슴앓이를 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몸속에 박혀 있는 그것이 사회에서 진주 같은 존재로 변화되길 바랄 뿐이다.
“제가 변호사 일을 시작한 것이 2014년 2월이에요. 2011년 11월 사법고시 합격 후에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정식 변호사로서 일을 시작했죠. 그런데 두 달도 안 돼 일이 일어났어요. 아이들이 죽어가는 과정이 온 국민이 보는 TV로 생중계됐잖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이건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바로 자원봉사를 신청했어요.”
오 변호사는 그 길로 변호사를 대변하는 두 단체, 대한변호사협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모두에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유가족의 요청으로 법률지원 창구가 일원화되면서 만들어진 대한변협의 세월호 참사 피해자 지원 및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법률상담지원단 중앙지원팀장까지 맡았다.
“아시는 것처럼 부당한 여러 원인 때문에 유가족은 스스로 조직을 갖춰야 했어요. 그래서 상주 역할부터 당직까지 반별로 움직였는데, 이에 맞춰 변호사들도 반별로 담당이 정해졌죠. 전 2학년 1반을 맡아 특히 1반 가족들과 친분이 두터워졌어요. 반별 스케줄에 맞춰 저도 정기적으로 안산으로 달려갔죠. 뿐만 아니라 세월호 유족들과도 두루 친해졌어요. 4년을 함께 지냈으니까요.”
2학년 1반에서는 세월호 인양과 함께 뒤늦게 가족에게 돌아온 조은화 양을 비롯해 학생 18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오 변호사는 의지하는 기둥 중 하나였다. 그는 부당한 압력을 막는 법적 우산이 되고자 집회 참석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부가 세월호 특조위의 활동을 강제로 종료시키려 했던 2016년엔 다른 민변의 변호사들과 함께 릴레이 단식에도 나섰다.
옥사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
애초에 그는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청년은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시절, 그는 학자를 꿈꾸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많은 학우들이 외치던 독재정권 타도는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4학년이 됐을 때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들이 사라졌더라고요. 상당수가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거죠. 독재 말 상황에서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은 도피임을 깨달았어요. 그제야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 마음먹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유신타도와 헌법 개정을 외친 대가는 적지 않았다. 징역 2년.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적잖은 형량과 옥살이는 그를 기죽게 하진 못했던 모양이다.
“4월 19일이었어요. 구치소 안에서 누군가가 외치기 시작했어요. 누구인지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 건지 알 수는 없어도 고함이 전해지는 걸 막을 순 없었죠. 목소리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저도 외치기 시작했어요. 유신헌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 민주주의 회복을 말이죠. 결국 긴급조치 9호 위반의 혐의로 형량을 2년 더 받았어요.”
다행히 형량 4년을 모두 채울 필요는 없었다. 2년 4개월 만인 1979년, 그는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다. 하지만 자유의 몸으로 보내는 시간은 짧았다. 이번엔 ‘YMCA 위장결혼식’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집회 자체가 불법이었던 시절, 사전신고 없이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결혼식으로 위장해 시위를 벌인 사건이었다.
“10·26 사태가 일어나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될 거라 믿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민주화 인사들 사이에서 저는 갓 출소한 막내여서 유인물을 만들고 나르는 잡일만 맡았을 뿐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에요. 결국 1년 6개월 형을 받고 1년 만에 다시 형 집행정지를 받았어요. 중간에 잠깐 쉬고 총 3년하고 넉 달을 옥살이한 셈이죠.”
평범하게 끝나지 않은 평범한 삶
그 과정에서 그가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다. 평범한 소시민적 삶을 사는 것. 학생운동과 연행, 조사 과정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세상물정 몰라 그런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진짜 세상물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갓 출소한 27세 청년은 학교에서도 제적당해 먹고살 길도 막막했다. 남들처럼 자격증도 따고 취직도 하기로 맘먹었다. 다행히 공부는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렇게 고압가스와 열관리 자격증을 따고 제약회사 보일러실 담당으로 취업했다. 하지만 그 시기 사회는 또 다른 거대한 흐름과 마주하고 있었다. 바로 노동운동이었다. 큰 파도는 그렇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노동운동이 태동하던 시기였죠. 하루에도 수십 개씩 노조가 만들어졌어요. 자연스럽게 제가 근무하던 회사에도 노조가 만들어졌고, 거기서 노조 총무부장을 맡게 됐죠. 노조활동을 반대하던 사 측에서는 제가 이력서에 서울대학교 중퇴 사실을 기재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고, 결국 해고됐어요. 복직소송에선 졌지만, 그 과정에서 인권운동을 하던 김칠준 변호사를 만나게 됐어요. 법조인으로 도전하게 된 계기가 된 셈이죠.”
김칠준 변호사와의 인연은 의뢰인과 인권변호사의 관계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수원에 자리 잡은 김칠준 변호사 사무소에 상담실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다산인권센터와 법무법인 다산이 시작된 곳이다.
“노조와 관련한 5~6건의 소송 당사자이다 보니 자연스레 송사와 관련한 경험이 생기더라고요. 그 경험이 상담실장으로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죠. 당시엔 노동 상담에 관심 있는 변호사가 그리 많지는 않아 관련 사건을 독점하다시피 했어요. 인근에 있던 삼성전자나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같은 큰 기업의 노동자들이 대상이었죠.”
1993년, 그는 장명국 발행인과의 인연으로 내일신문 창간에도 참여한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자주관리경영을 원칙으로 창간한 언론사다. 그는 이사 겸 업무 기획실장으로 신문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4년간 일했다.
“말이 기획실장이지 잡다한 사무를 도맡아 하는 총무 같은 역할이었죠. 다들 잘 아는 것처럼 신문사라는 곳이 내 생활이 없는 곳이잖아요. 밤낮없이 마감에 시달리는 기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꽤 고생이었나봐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앞에 앉아 있던 여고생이 자리를 양보해줬어요. 지금 그랬으면 그런가보다 했을 텐데, 당시 마흔한 살이었던 제겐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진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지,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닌지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보람 있는 직업 중에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도울 수 있는 변호사가 제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법고시 도전을 결심했어요.”
안정된 삶 뒤로 하고 책상 앞으로
변호사가 되는 일은 평범한 결심과는 결이 다르다. 요즘 몸이 좀 불었으니 아침마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 같은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가장인 남편이 고시생이 되겠다고 했을 때 쉽게 허락할 아내가 있을까.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응원해줬다. 서울대학교 시절 농활에서 만난 1년 후배인 아내는 당분간 생계는 자기가 책임지겠노라고 했다. 오랫동안 그를 봐온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는 “사법고시를 통과하는 데 평균 5년 정도 걸리니, 나도 그 정도면 될 것”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들 대학 입시가 시작되기 전까지 끝내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997년에 도전한 지 3년만인 2000년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번번이 2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는 일이 반복됐다.
“차라리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면 쉽게 포기했을 거예요. 2차 시험 결과가 매년 12월에 발표되는데 바로 석 달 후에 다시 1차 시험이 진행되거든요. 2차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공부한 것이 아까워 다시 1차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다시 2차 시험에 도전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더라고요.”
그렇게 7년이 지나자 고비가 다가왔다. 경제적으로도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법무법인 다산에 들어가서 민사 사무장을 하면서 3년간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시간을 보냈다.
“신기하더라고요. 처음엔 붙어야 한다는 강박만 있었는데, 붙을 때가 되어서 그런 건지 나중엔 법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어요. 아이들도 취업이 보장되는 의대와 육사에 합격해서 부담을 덜게 되면서 다시 일을 그만두고 정식으로 도전했죠.”
그리고 2011년 겨울, 드디어 사법고시 53회 시험에서 그는 최고령으로 합격증을 받는다. 첫 도전을 한 지 15년 만이었다. 2차 시험만 8번을 봤다. 매스컴도 주목했고,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제가 제일 좋아했어요.(웃음) 합격자 발표가 났을 때 이미 아이들은 취업한 상태여서 그랬는지 저만큼 좋아하지는 않더라고요. 이틀을 잠을 못 잤어요. 하루는 믿어지지 않아서, 하루는 너무 좋아서요.”
‘안전한 삶’ 위한 법조인 되고파
변호사가 된 뒤 그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가 많은 인터뷰를 통해 말했던 ‘국민과 더불어 함께 웃을 수 있는 봉사하는 법조인’이 되었을까.
“제가 꿈꿨던 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생명안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죠. 사고에 무관심하고 사람이 죽어도 위자료 주고 끝내는 사회를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대한변협 생명존중재난안전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집단재난 현장지원 변호사 매뉴얼도 만들었어요. 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변호사도 우왕좌왕하기 쉬우니까요. 세월호 참사 이후 고양터미널 화재나 오룡호 침몰같은 재난 사건에서 얻은 경험을 결과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민변의 민생경제위원회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거주공간 이상으로 생활 단위,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운영을 투명화하고 마을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주민, 특히 시니어 세대의 참여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서울시에서 50플러스재단을 통해 공동주택 입주자 대표가 되기 위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서 관련 민·형사 사례에 대한 강의를 맡고 있어요. 남들에게 잘하라고 말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저도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입주자 대표자회의 감사를 맡았어요. 입주자 커뮤니티의 활약에 따라 입주자들의 삶과 안전까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중년의 도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 많고, 실패했을 때 지고 견뎌야 할 짐도 무겁다. 자칫 영원히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그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주위 평가를 의식하며 사는 경우가 많잖아요.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말이죠.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첫 번째 요건이라고 생각해요. 도전하기 전에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해요. 그런 주관적 열망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음에는 그에 대한 객관적 판단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말이죠.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저의 경우는 아내였죠. 그리고 도전 가능한 경제적 상황을 만드는 것까지 점검하면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게 돼요. 막연히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이렇게 점검후 실천해나가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믿어요. 마음속에 어떤 열망이 뜨겁게 자리 잡고 있는지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꿈에 대한 열망 하나로 89세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원을 또 입학하는 우제봉(禹濟鳳·89) 씨는 내친김에 박사까지 도전한다.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를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서 삶의 관록이 묻어난다. 1남 2녀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어머니로서의 삶을 완성한 그녀가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격동기를 지나온 여자의 삶과 그녀가 이루려 하는 꿈에 대해 들어봤다.
“배움에는 때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또박또박 말한다. 89세. 적지 않은 나이라고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장수한 나이다. 우제봉 씨의 나이가 놀라운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배움을 향한 뜨거운 열의가 있고 그것을 하나하나 이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2월 숙명여자대학교 원격대학원 실버비즈니스학과를 졸업하는 그녀는 우수논문상까지 탈 정도로, 젊은 사람들과의 공부 대결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 열정과 결과를 보여줬다.
겸손하고 순종적인 여자
5년 전 우 씨는 남편을 먼저 보냈다. 그녀는 지금도 죄의식이 느껴진다고 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해서 남편이 떠난 것 같아 부끄럽다 말한다. 부끄러움이라고? 젊은 세대라면 이 상황에서 왜 그런 죄의식을 느끼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온 시대는 지금과는 다르다. 누구 하나 떠나보내면 다 그런 마음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날카로운 자로 잰 듯 나누고 재단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섞이고 묶이던 예(禮)의 시대가 거기에 있었다.
“시집살이할 적에도 잉꼬부부니 애처가니 공처가니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서로 참 사랑했죠. 남편은 절 존중해주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어요.”
우제봉 씨의 기억은 남편을 처음 만났던 시절로 돌아갔다. 그녀의 집안은 소위 있는 집안이었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취직을 원했지만 부모님은 가문의 망신이라고 만류하며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와세다대학교 출신의 아버지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스로 시청 문화과에 이력서를 냈고 취직이 됐다.
그녀가 시청에서 근무하다 상사의 심부름으로 다방을 들렀을 때의 일이다. 친구 누나가 운영하는 그 다방에는 미래에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다 그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 남편이 가장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대시를 했다.
어느 날 퇴근 후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더니 남편이 그녀를 막아서더란다. 그리고 자신과 교제하자고 했다. 요즘 같으면 스토킹으로 신고할 일이었다. 그 시절엔 여자에게 구애할 때 무데뽀로 밀어붙이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무시하고 문을 닫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복학하기 전까지 만날 그 다방에 죽치고 있었다. 우제봉 씨는 심부름을 갈 때마다 그를 만났다. 솔직히 그렇게 다짜고짜 행동하는 남편이 무서웠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이 승낙하면 만나보겠다고 쪽지를 써서 그에게 전달했다. 설마 부모님까지 동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다짜고짜 시작된 연애, 그리고 결혼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상식을 넘어서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남편의 고모와 가족들이 우르르 와서 그녀를 만났다. 남편만큼이나 기질이 화끈한 집안이었다. 다음 날에는 아예 시아버지가 만나자며 찾아왔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사주를 봐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주부터 보고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갑작스러운 연애, 더구나 처음 하는 연애였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의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은 것은 그의 인상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이순재를 닮았다는 남편은 이번에는 다짜고짜 그녀의 집까지 따라와서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데 의외로 남편의 그런 행동을 친정에서는 좋게 봤다. 패기 있고 자신 있는 모습이라는 평가였다. 이 또한 요즘 같으면 무단 침입으로 걸릴 일이었다. 과연 그 시절의 낭만이란 드라마틱한 사연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힘이었던 듯싶다.
“제가 살던 시집이 정릉 기와집이었어요. 지금은 성북 구립 유치원이 됐어요. 거기서 남편과 70년을 살았죠.”
남편 이야기를 꺼내니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소녀 같은 미소가 번졌다.
성실하고 강인한 여자
“결혼하니 주위에서 쟤 뭣도 모르고 결혼했네, 사흘도 못 살고 달아날 거라고들 얘기했죠.”
그러나 작고 단아한 이미지이지만 그녀의 심지는 굳고 두터웠다. 스스로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아니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견뎠던 것 같다.
집안일뿐만 아니라 시부모가 낳은 늦둥이인 시동생도 키워야 했다.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힘들 때마다 그녀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그녀를 많이 챙겨줬다. 사실 우 씨는 쌀도 씻을 줄 몰랐다. 요리하는 법도 시집에 와서 배워야 했다. 여느 시부모라면 그런 모습에 혀를 차며 한심해했을지도 모른다. 시아버지도 그녀가 마냥 예뻤던 듯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덕분에 새벽에 일어나면 밤 열두 시까지 방에 앉지 못하는 고달픈 생활이었어도 웃으면서 시집살이를 할 수 있었다.
우 씨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인성과 지성이 함께 어우러진 데서 나온 게 아닐까. 그녀는 자주 ‘내가 여기서 행동 잘못하면 타인에게 누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명문학교 출신에 덕망 있는 집안의 가풍이 그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강인한 태도야말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이제야 자신만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꿈, 패션디자이너
“내가 공부하기엔 진짜 고령이지.(웃음) 입학할 때도 시선들이 만만치 않았어. 방송국에서도 오고 신문에도 나오고.”
남편을 여의고 평창동 예능교회 봉사활동을 할 때만 가끔씩 밖에 나오던 우 씨를 부추긴 것은 자식들이었다. 자식들은 “엄마 좋아하는 일은 공부잖아”, “엄마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가장 보기 좋다”며 어머니가 늦게라도 공부하기를 종용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가 하고 싶은 공부였을까?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꿈, 그것은 바로 패션디자이너였다. 남편과 결혼하기 전부터 패션디자이너 꿈을 갖고 있었고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갈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가서 공부하는 것을 남편도 반대했고 시댁 식구들도 반대했다.
“그때 시댁에선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어요. 우리 딸들은 학원도 못 다니고 대학교를 갔죠.”
너무나도 이루고 싶었던 꿈을 갖고 있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여자. 경력 단절의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었다. 벽은 높았고 그녀는 오를 힘이 없었다. TV에서 앙드레 김을 볼 때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하는 미련이 몰려오곤 했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은 필요
자신이 놓친 꿈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숙명여대에 전화를 했을 때 그날이 마침 신청 마감날이었다. 그것조차 어떤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은 졸업을 위해 논문까지 쓰는 단계로까지 흘러갔다.
“학기 중에 교통사고도 나고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이 나이에 논문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시험을 봐야겠다 싶어서 김숙응 교수님에게 말했더니 ‘아깝게 왜 시험을 보느냐, 논문을 써야지’ 해서 논문을 쓰기 시작했어요.”
논문을 쓰면서 그녀는 계속 자신을 재촉했고 교수에게도 재촉했다. 빨리 졸업한 후 다른 것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랜 후회들을 던져버리고 다시 출발선에 선 그녀에게 공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힘을 마땅히 써야 하는 당위성 같았다. 평창동 예능교회에 가서도 열심히 기도했다. 그녀는 패션을 본격적으로 배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노리는 분야는 실버를 위한 패션 사업.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이론이 필요했고 체계적인 공부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고, 집에서 버리는 옷들을 리폼해 선물로 주던 사람이다. 이미 실전을 충분히 익히고 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학문적 지식이었다. 그녀는 최근 이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으며 운좋게 합격을 했다.
90대 패션디자이너의 꿈
패션디자이너가 되면 그녀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옷을 만들어서 팔아야죠. 돈을 벌어서 도와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요.”
돈을 버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촉’을 믿고 패션디자인 길을 걸어갈 의지로 불타고 있다. 자신이 번 돈으로 남을 돕는 일의 즐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이 필요해요. 젊은 사람들 것은 이미 많으니까요. 시니어가 젊은 사람 옷 입으면 안 어울리거든요. 나는 그런 옷을 사면 다 고쳐서 입어요. 입으면 제 몸에 안 맞으니까요.”
젊은 취향의 옷만 있지 시니어 몸의 특색을 살린 옷은 없다는 그녀의 진단은 정확하다. 90대 패션디자이너. 듣기만 해도 경이롭다. 어쩌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의상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게 아직 홍보가 덜 됐어요. 그래서 내가 마음이 급할 수밖에요.(웃음) 그래도 늦으면 늦는 대로, 내 스타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실제로 입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말이죠. 나이에 맞는 패션은 없잖아요. 젊은 디자이너가 만든 시니어 옷이 아니라 몸매나 취향에 맞게 시니어가 좋아할 만한 옷을 만들고 싶어요.”
그녀의 야무진 꿈은 어떤 결실을 가져오게 될까?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현실로 만든 그녀이기에, 그 어떤 꿈보다도 젊게 빛나는 그녀의 꿈이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