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싱’, ‘황혼이혼’, ‘졸혼’ 등 이혼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생겨났다. 이혼은 당사자에게 여전히 고통스러운 사건이지만, 예전과 다르게 이혼을 숨겨야 할 치부로 생각하지 않는 인식이 퍼지면서 자신의 삶을 위해 졸혼 혹은 이혼을 선택하는 시니어도 늘고 있다.
도움 장샛별(법무법인 ‘명전’ 대표 변호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최근 황혼이혼이 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12월 인구 동향’에 따르면 20년 이상 같이 산 부부의 이혼 건수는 약 4만1000건으로 전년과 비교해 3000건 이상 증가했다. 실제로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다. 2000년 기준 2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은 약 1만6000건으로 당시 0~4년 차 부부와 비교해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지금은 4년 이하 부부의 이혼 건수보다 2배나 많다. 통계청 관계자는 “코로나19와 상관없이 기대수명이 늘면서 노후에 자신만의 삶을 위해 이혼을 선택하는 중장년이 매년 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옅어지고 있다. ‘2020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혼을 반대하는 비율은 2012년 기준 48.7%였는데, 지난해에는 30.2%까지 줄었다. 반면에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와 같은 유보적인 의견은 매해 늘고 있다. 2012년 37.8%를 기록한 이후 계속 증가해 지난해에는 48.4%까지 늘었다.
황혼이혼의 이유와 사연은 저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은퇴 이후 경제적 갈등이나 성격 차이, 배우자의 외도나 폭력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재판 시 양육권보다는 재산 분할이나 위자료에 초점을 맞춘다. 대부분 성년이 된 자녀를 둔 부모이기에 그렇다. 법조계 관계자는 “황혼이혼의 경우 자녀분들이 오히려 이혼을 권하기도 하고, 함께 와서 재산 분할이나 위자료 문제를 논의한다”라고 말했다.
위자료는 책임…재산 분할은 기여도
A씨와 B씨는 40년 전 결혼해 3남 1녀를 둔 부부다. 결혼 생활 20년이 지나자 A씨는 다른 여자와 동거를 하면서 처자식을 내버리고 따로 살았다. A씨는 최근 자신의 딸이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밀려오는 배신감 때문에 B씨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내면서 위자료 2억 원을 청구했다. 이에 맞서 B씨도 위자료 1억 원을 요구하는 맞소송으로 대응했다.
재판부는 이혼이 타당하다고 판결하며 B씨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했다. 결혼 생활을 파탄 낸 A씨의 잘못을 지적하며 위자료 2000만 원을 B씨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은 혼인 관계가 파탄 난 이후에 알게 됐으므로 책임을 묻지 않았다. 대신 A씨가 고령자이고 투병 중인 상황을 고려해 위자료를 낮게 측정했다.
위자료는 혼인 파탄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위로하는 성격을 띤다. 따라서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자가 상대방에게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가정폭력, 협박, 외도 등으로 입은 고통이 완벽히 치유되지 않겠지만 돈으로나마 배상을 받으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정신적 고통’이란 것이 추상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서 생각보다 많은 금액을 인정받기 어렵다. 장샛별 법무법인 ‘명전’ 대표 변호사는 “위자료는 통상 2000만 원 내외로 지급되며, 혼인 지속 기간이 길어 축적된 재산이 많은 경우 위자료보다 재산 분할로 다투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재산 분할은 유책 배우자도 가능하다. 재산 분할은 결혼 생활 중 모은 재산을 일정한 비율에 따라 나눈다. 법원은 재산의 취득 경위와 이용 상황, 소득, 직업, 혼인 기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한다. 재산 분할 시 가장 관건은 기여도다. 자녀 양육과 가사를 맡았거나 저축을 꾸준히 했다면 기여도를 인정받을 수도 있다. 장 변호사는 “가사나 양육과 같은 간접적 기여, 혼인 기간, 재산 규모, 이혼 후 경제적 상황 등을 고려해 재산 분할의 비율을 정하며, 보통 50%로 나누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황혼이혼의 대안으로 ‘졸혼’도 주목받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50~60대의 40.3%가 졸혼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관계자는 “이혼으로 인한 사회적 시선이 여전히 두렵거나 재산 분할 시점을 늦추기 위해서 졸혼을 선택하는 분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성공적인 졸혼을 위한 준비 사항
방식과 기간
같은 집에 기거하면서 진행하는 동거 졸혼과 같이 살지 않는 별거 졸혼 중 상의해서 결정한다. 기간도 정할 필요가 있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정도가 좋다. 너무 긴 시간 동안의 졸혼은 부부의 이질감을 누적시킬 수 있다.
정기적 만남
부부나 가족의 정기적 만남을 정하자. 매달 함께할 수 있는 가족 미팅이나 티타임을 가지면 좋다. 가족이 함께 참석할 수 있는 행사에도 가급적 초대하자. 가족 간의 지속적인 유대감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적 독립
전업주부의 경우 졸혼을 선택했지만, 불가피하게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생활비 지급 날짜 혹은 재산 분할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 명확하게 논의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책임
가족 구성원에 대한 돌봄이 필요한 경우 서로 최대한 협조한다. 특히 부양해야 할 부모에 대한 책임은 함께한다. 졸혼은 이혼이 아니므로 각자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본인의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김환기의 영원한 동행 김향안
김향안(1916~2004)은 재주도 많고 배움도 많았던 신여성. 그에게 김환기는 두 번째 남자였다. 이상한 천재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이 첫 번째 남편이었으니까. “우리 함께 죽을까? 아니면 먼 데로 달아나 같이 살까?” 이상의 이처럼 돌연하고도 뜨거운 구애에 이끌려 맺은 부부 인연은 그러나 넉 달 만에 끝났다. 이상이 폐결핵으로 타계했던 것. 김향안은 이 요절한 천재의 죽음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이상은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인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고 소멸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김향안의 원래 이름은 변동림. 김향안이라는 이름은 1944년 김환기와의 결혼과 동시에 결행한 개명으로 얻었다. 김환기의 성을 좇아 변 씨를 김 씨로 바꾸고, 김환기의 아호였던 ‘향안’(鄕岸)을 가져다 이름으로 썼다. 이 전격적인 개명엔 다 뜻이 있었다. ‘이제 당신을 위해 살리라!’라는 언약의 징표였으니까. 한편으론 아이가 셋이나 딸린 ‘돌싱’이자 가난한 무명화가에 불과했던 김환기와의 결혼을 결사반대한 친정을 향한 절연의 통고이기도 했다. 결혼 전 연애시절에 몸 달아 달떴던 건 김환기 쪽이었다.
결혼이란, 상대가 팥으로 메주를 쑤었다고 뻥을 쳐도 덜컥 믿어주는 관용과 인내로 무장하지 않고서는 ‘창살 없는 감옥’으로 자청해서 들어가는 일에 불과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김향안은 매우 현명한 아내였다. 사소한 아웅다웅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예술적 인생 항로를 회의 없이 지지해 좌초가 없도록 적극적으로 나서 돕기를 작정하고 살았던 것만 같다. 내조의 여왕? 벌어들이는 게 많지 않았던 젊은 시절의 김환기가 고민했던 경제적 불황을 타개해준 건 늘 김향안이었다. 김환기가 미술세계의 센터인 프랑스 파리를 선망하는 눈치를 보이자 즉각 나서 파리 행을 일사천리로 추진해 실현하기도 했다. 김환기의 ‘뉴욕시대’도 김향안이 열어줬다. 뉴욕의 백화점에서 알바를 뛰어 밥을 벌어온 것도 김향안이었다. 남편과의 대범한 유대감으로 세상의 파랑을 건넜던 거다. 김환기의 사후엔 환기미술관의 완성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드디어 개관을 한 뒤엔 이런 얘기를 했다. “내 영혼은 김환기의 영혼과 함께 미술관을 지킬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는가? 김환기의 영혼이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향안은 워낙에 딱 부러지는 기질의 소유자. 오직 내조에 아까운 인생을 다 소모할 미련퉁이 캐릭터가 아니었다. 문필가로, 화가로, 평론가로 자신의 이상적 자아를 확장해나간 인물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내조에 공들였다. 김환기의 어떤 매력에 심취했기에? 노년의 그녀는 흔히 김환기를 말하길, “키만 껑충하고 촌스러운 남자였다”고 했다지. ‘촌스럽다’는 건 우직한 순수, 깨끗한 순정, 위선이 없는 예술정신에 관한 언표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뉴욕에서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뉴욕 주 발할라 묘역에 잠들었다. 먼저 길 떠난 김환기의 묘 옆에 나란히 누워.
귀촌을 위해 집을 샀으나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다. 남의 토지 위에 들어앉은 건물만 샀으니까. 건물 값은 900만 원. 토지 사용료는 연세(年貰)로 치른다. 폐가에 가까운 건물이었다지. ‘까짓것, 고쳐 쓰면 그만이지!’ 그런 작심으로 덤벼들었다. 뭐든 뚝딱뚝딱 고치고 바꾸고 꾸미는 재주가 있는 그는, 단지 두 달여 만에 쓸 만한 집을 만들어냈다. 민병덕(64) 씨의 귀촌살이는 그렇게 시작됐다. 조촐하고도 옹골차게.
집 밖으로 물처럼 찰랑찰랑 흐르는 게 있다. 음악이다. 처마 밑에 매단 스피커에서 출발한 선율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아리아 ‘사랑의 산들바람은’이다. 환영사인가? 방문객을 위해 미리 준비한? 알고 보니 그것만은 아니다. 늘 음악을 튼다는 게 아닌가. 음악이 없는 인생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그게 민병덕 씨의 생각이다. 잠자는 시간 외엔 항상 음악을 듣는단다. 그 좋은 음악을 혼자 즐기기엔 아까워 옥외 스피커까지 장착했다. 담장 밖 길을 오가는 마을 사람들도 귀를 씻을 수 있도록.
마음껏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이건 민 씨의 귀촌 이유이기도 하다. 대문 바깥으로까지 종일 음악이 흘러나가도 무사할 수 있는 게 시골이니 말이다. 도시에선 다르다. 남의 피곤한 귀를 괴롭히는 소음 유발자로, 악취미의 소유자로 탕탕 규탄받을 가능성이 많다.
음악은 그의 밥줄이기도 하다. 음악을 짓거나 노래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빈티지 오디오를 수리하는 기술자다. 진공관식 오디오 수리에 관한 한 마지막으로 남은 전문가를 자처한다. 최상의 선율을 듣기 원하는 이들이, 진공관식 전축으로 고품격 음질을 갈구하는 마니아들이, 고장 난 장비 때문에 실의에 젖어 끙끙대던 이들이 그의 시골집을 찾아온다.
어려서부터 팝송에 폭 빠졌다지. 1970년대 중반, 수원에 있었던 ‘역마차 다방’을 기억하는 독자가 계시려나? 당시 이 음악다방 디제이의 인기는 하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방의 천장 정도는 무난히 찌를 지경이었다. 다방이 미어터지게 처녀들이 몰려와 디제이가 선곡해 들려주는 팝송에 넋을 놓은 채 청춘의 참을 수 없는 우수와 뜨거운 갈증을 다독였다. 이 디제이는 입대 뒤 100통이 넘는 감미로운 팬레터를 받았다. 그건 재수 없는 고참병들에게 괜스레 쥐어터지고 으깨어지는 게 다반사인 군대에서의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 돼주었다. 민병덕 씨가 바로 그 ‘역마차 다방’ 디제이였다.
음악에 관한 취향과 애호, 경험이 결국은 인생의 길이 되고 방향이 됐다. 죽 한 길을 살아온 건 아니다. 이런 사업, 저런 영업, 전전한 바가 많으며 굴곡도 심했다지. 세상은 아름다워 뒤에 두고 떠나기엔 섭섭하다. 아울러, 아름답기는커녕 세상은 때로 정나미 떨어지는 난장판이다. 민 씨의 삶에도 곡절이 많았단다. 믿었던 이들에게 당하거나 뜯기거나 찢겨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이게 또한 그의 귀촌 동기다. 하이고, 지겨워라, 나 이제 조용한 시골에서 살래! 그는 그리 속으로 외치며 난생처음인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뭐든 쓱싹 잘 고쳐주는 남자
“시골에서라고 이상적인 생활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각박한 도시를 벗어나 마음 편하게 살고 싶었어요. 낯선 농촌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은 거의 없었고요. 제가 원래 매우 낙천적인 사람이거든요. 이웃들에게 잘하면, 마을 어른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나, 그런 자신감으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거나 딱히 준비한 것 없이 귀촌했지요.”
“완전한 내 집이라 할 수 없는, 이른바 ‘지상권 주택’을 사서 오셨어요? 굳이 그래야 했을 이유라도?”
“그야 뭐, 돈이 없었으니까. 하하하!”
“그간 뭘 하셨기에? 모으기보다 쓰기에 주력하셨나?”
“제가 잘나갈 땐 상가 건물도 소유했어요. 근데 어쩌다 보니 다 날아가더라고. 제 능력 부족 탓에 사업을 망친 경우엔 그러려니 했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금전적 손실을 당했을 땐 괴롭더라고요. 아무튼 지상권 건물은 제 처지에 적격이었어요. 3000만 원 정도 들여 집을 싹 고쳤지요. 아 참, 제가 이 집에 매력을 느낀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목련나무가 맘에 들었다는 거. 야, 이 집에 살면 봄철에 백목련을 실컷 즐길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에 들떴으니까.”
“꽃을 좋아하는 남자?”
“꽃이 세상을 환하게 하니까. 꽃나무 안에 사계의 순환이 있고요. 식물들이 주는 소소한 행복을 포기하기란 어렵죠. 좁은 마당이지만 갖가지 화초와 나무들을 가꾸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라일락, 쥐똥나무, 배나무, 능소화, 장미, 머루, 다래, 패랭이, 달맞이꽃, 튤립….”
꽃에서 꽃피기까지의 상처와 고통을 보는 사람이 있다. 꽃에서 기어이 피어날 삶의 축복과 환희를 보는 사람이 있다. 민 씨의 성향은 후자 쪽이다. 낙관과 순응을 속에 담고 사노라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런 그의 귀촌은 긍정적인 예견과 함께 단행되었다. 남들 보기엔 허술한 귀촌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실은 적극적인 청사진을 내장한 상태로 시골에 등장했다. 그가 집을 보수한 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한 일은 꽃 가꾸기였다. 마을 안길에 꽃길 만들기!
“이사하기 전, 마을을 몇 번 드나들며 퍼떡 꽃길 조성을 생각했어요. 보시다시피 나지막한 산들이 에워싼 이 마을 풍광은 썩 아늑합니다. 그러나 입구에 공장도 있고 꽤나 어수선한 분위기더라고. 아하, 꽃길을 가꾸면 마을 인상이 훤해지겠구나, 누군들 꽃을 싫어하랴! 그런 생각으로 집 앞 도로변부터 꽃을 심기 시작했어요. 버려진 보도블록을 잔뜩 실어다 화단을 만들어 꽃씨를 뿌렸어요. 뿌리면 피어나는 법. 크게 힘들이지 않고 모두가 좋아하는 꽃길을 얻은 셈이죠. 덤으로 원주민들에게 호감을 샀어요.”
원주민에게 호감 사기. 이는 귀농귀촌의 튼실한 뿌리를 내리는 데 가장 필요한 영양성분이다. 도시나 시골이나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명암과 요철은 하등 다를 게 없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주로 점잖은 사람들이 모여 오순도순 사는 곳이 시골일 거라 여기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골 사람들이 요상하게도 더 사납고 더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는 도시 사람들이 더 사납고 더 이기적이라고 도매금으로 싸잡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관념이다. 이런 인간, 저런 인간이 골고루 분포해 먹이를 사냥하는 게 인간사회라는 수렵장이지 않던가. ‘이기적 유전자’를 씨앗처럼 몸에 달고 태어난 인간들의 공동체 어디건 가혹한 생존 조건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한결 공정한 관점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 이 안엔 우렁찬 진실이 서려 있다. ‘닥치고, 너부터 잘하세요!’라는 말과 동의어일 이 시쳇말엔 존중과 자존과 이타(利他)를 설하는 경책이 들어 있으니 말이다. 민병덕 씨는 세상에서 배운 지혜의 모든 걸 귀촌생활에 쏟아 부은 것 같다. ‘내가 먼저 진심을 다해 베풀면 무슨 사단이 나랴, 알것제? 나여! 나부터 잘해보더라고!’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이며 귀촌생활에 발동을 걸었던 모양이다. 이사 직전 그는 동네 이장을 찾아갔더란다. 자못 쓸모 있는 사람 하나가 마을에 새로 출현하게 됐음을 예고하기 위해서였다지.
“마을발전기금이라는 거. 요즘은 귀촌귀농인들에게 그런 희한한 것까지 요구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저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주눅들 게 뭐란 말인가. 이장에게 말했어요. ‘난 내가 가진 재주를 유익하게 나누겠다, 내가 전자 기술자다, 뭐든 다 고칠 수 있다. 이제부터 마을 분들의 고장 난 가전제품은 내가 다 무료로 고쳐드리겠다!’ 돌아온 응답은 훈훈한 환영사였어요.”
“당신이 가진 재능을 아낌없이 이웃들에게 베풀라! 이건 귀촌귀농의 성공 필살기죠.”
“혼자 돌아앉아 고독과 고립을 벗 삼아 살 게 아니라면 어울려야죠. 그게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만은 아녜요. 주민들에게만 좋은 일도 아니고요.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하는 현명한 처신이니까.”
“뭐든 쓱싹 잘 고쳐주는 남자. 결국 그렇게 소문난 거예요?”
“고장 난 경운기를 고칠 수 있는 용접기까지 미리 장만하고 주민들을 기다렸어요. 주로 할머님들이 가전제품 수리를 부탁해오더라고요. 전기밥통, 믹서, 선풍기, TV 등 뭐든 다 수리해드렸죠.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저 건너 이웃마을에서도 저를 불렀어요. 그러면 재까닥 달려갑니다. ‘아유 고마워라, 수리비는 얼마요?’ 처음엔 그리 묻는 분들이 많았고.”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갚는 게 시골 사람들이죠.”
“그게 시골 특유의 정서죠. 외지인에게 배타적이고, 어떤 특정한 상황에선 돌변하기도 하지만, 선의라는 건 통하는 법이라서 준 만큼 받게 되는 게 농촌이에요.”
“주로 무엇을 받으시지? 우호적인 마음, 친밀감, 신뢰, 그런 거?”
“한마디로 따뜻한 인정이죠. 뭐든 농작물이나 음식을 수시로들 가져와요. 제가 집에 없을 땐 대문 앞에 놓고 가는데, 자주 고양이들이 음식을 먼저 먹어치웁니다. 그래 대문간에 아예 전용 보관함을 설치했어요.(웃음)”
해마다 마당에서 펼치는 꽃 축제
민 씨는 아마도 잘나가던 시절의 잉여물일 외제차와 외제 바이크를 타고 다닌다. 물개처럼 늘씬한 사냥개 두 마리도 기른다. 인근의 강변 활터에 나가 활쏘기도 즐긴다. 이런 그의 동향에 마을 사람들은 이물감이나 위화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 사생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게 이 나라이지만, 편견과 간섭이 가랑비처럼 쏟아지기도 하는 게 세사이지 않던가. 어라, 수상한 한량 하나가 우리 마을에 들어왔네! 눈총이 쏟아지고 괜히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었을 거다. 일테면, 귀촌자가 개를 끌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일은 거북이를 끌고 돌아다니는 일만큼이나 오해를 살 수도 있는 게 농촌이니 말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민 씨는 응분의 노력을 다해 융화와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손수건에서 비둘기를 뽑아 날리는 재주만이 마술은 아니다. 인간관계의 지반을 촉촉이 적시어 생활의 여건을 증진하는 일, 없었던 우정을 돋우어 삶의 재미를 촉진하는 일도 마술처럼 유쾌하다. 마을 속으로, 이웃 속으로 빗물처럼 스며들어 귀촌의 재미와 안락을 누리는 민 씨의 행장엔 한 번뿐인 아까운 생을 스스로 부양할 줄 아는 자의 현명과 전략이 서려 있다.
10년. 그가 귀촌 이후 흘려보낸 세월이 그렇다. 그 10년간 흘린 진땀이 숱할 테지.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놀이’에 있다 하니 솔깃해진다. 사람은 일벌레가 아니니 나이 든 자라면 놀이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어떻게 하면 더 잘 놀 수 있을까? 자주 그런 생각합니다. 답은 간단해요. 내 처지에 맞는 즐거운 놀이, 민폐가 없는 취미, 내가 진정 좋아하는 특기를 찾아 몰입하면 된다는 것.”
“일은 뒷전이어도 좋은 거예요?”
“아하, 일단 일은 최선을 다해야죠. 이곳이 시골이지만, 문제가 생긴 오디오를 들고 저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꽤 많습니다. 기술이 녹슬지 않는 한 외진 산골짝에 살더라도 밥 굶을 일은 절대 없지요. 아아, 가고 싶다, 깊고 고요한 산골로.”
“외롭지 않을까? 산중생활이라는 거.”
“점점 자연으로 마음이 쏠립니다. 외로움이란 도시의 군중 속에서 더 커지는 게 아닌가? 제게는 많은 지인이 있어요. 어딜 가든 찾아오는 정든 벗들 말이죠. 저는 그들을 초대해 축제를 해요. 귀촌 1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두 차례 잔치를 벌여왔어요. 백목련 축제와 장미 축제죠. 저의 집 마당에 목련이 필 때, 장미가 만개할 때, 그 좋은 꽃철에 맞춰서.”
그는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을 자처한다. 대접할 요리 구상까지 해놓은 뒤 정성껏 만든 축제 초대장을 보낸다지. 꽃 속에서 신나게 놀아보자고. 초대받을 자격에 미달하는 인사들은 사절이다. 일테면, 부부 동반이 아닌 경우가 그렇다. 정작 민 씨는 ‘돌싱’이지만.
어떻게 하면 더 잘 놀 수 있을까? 자주 그런 생각합니다. 답은 간단해요. 내 처지에 맞는 즐거운 놀이, 민폐가 없는 취미, 내가 진정 좋아하는 특기를 찾아 몰입하면 된다는 것
◇민병덕 씨가 말하는 귀촌 Tip◇
•굳이 집 마련에 큰돈 쓸 일 아니다. 자금이 부족하다고 낙심할 것도 없다. ‘지상권 건물’을 매입하면 된다. 공들여 수소문할 경우, 의외로 쉽게 찾을 수도 있는 게 지상권 건물이다.
•귀촌 장소를 신중히 물색해야 한다. 과연 내가 정붙이고 살 수 있는 마을인지 사전에 자주 드나들어 판단하자. 이장을 미리 만나 마을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도 필수.
•원주민들과 인간적 신의를 쌓아야 한다. 불신을 사 외톨이 신세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같은 직장에서 만난 30년 지기 친구 K에 대한 이야기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결혼 전 동거해 아이까지 낳고 그렇게 불같은 연예와 출산의 과정을 거친 후 결혼을 했다.
K의 남편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데다가 잘난 여성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좀 고리타분한 성격의 남자였다.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그럭저럭 사는가 싶었는데 이 남자, 연애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성격이 결혼 후 나타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들의 결혼생활을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다. 다만 가끔씩 K를 만나면 쏟아내는 이야기가 거의 드라마 수준이었다.
필자야 돌싱도 아니고 오리지널 솔로이다 보니 K의 남편과 같은 남자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부부싸움 이야길 실감나게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K를 보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K의 남편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난감했다. 부인 알기를 부하 직원이나 하수인 다루듯 하고 툭 하면 욕설과 폭행까지 일삼는다고 하니 분명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필자는 K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헤어져라, 헤어져. 그런 남자랑 더 살아봤자 뭐하겠니?”라고 했다. 그러면 K는 “아이들 때문에 이혼은 못하겠어. 아이들 결혼시킨 후라면 몰라도…” 하면서 눈물 콧물 닦아낸 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과연 사랑도 정도 없는 남자와의 결혼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허구한 날 부부싸움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또 어떻고…. 다행히 엄마 마음을 조금은 헤아리는 것인지 아들과 딸은 K에게 자기들 걱정은 하지 말고 이혼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단다.
그러나 시어머니 입장은 달랐다. 사소한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던 하루는 마침 시어머니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K의 남편은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 감정이 격해지면 욕을 해대면서 주변의 물건을 던지기도 하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더란다. 그러면서 나중에 K에게 “난 옛날에 너희 시아버지한테 맞으면서 살았어” 하더란다. K가 폭력을 당하는 것이 부부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필자는 참기 힘들었고 더 고통스러웠을 K는 흐느꼈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다투던 그들의 부부 이야기는 이제 더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K를 만날 때마다 했던 “헤어져라, 헤어져!”라는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 K의 남편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요즘 K는 죽은 남편 이야길 하면서 또 훌쩍인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남편이 이제는 그립기까지 하단다. 부부란 원래 그런 것일까. 필자는 K의 속내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상대방 입장이 되어봐야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데, K와 필자는 무엇 때문에 흐느끼고 무엇 때문에 분노했던 것일까. 인간의 감정이란 참으로 미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전투복을 입은 것 같다. 여기서 전투란 미(美)를 향한 전투다. 여용기(64)씨를 처음 보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옷을 잘 입는 사람이 있나’ 하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여씨는 단순히 옷만 잘 입는 사람이 아니다. 1953년생인 그는 부산의 남성 패션숍 ‘에르디토’의 마스터 테일러로 근무하는 패션 전문가이기도 하다. 화려한 남자다. 들여다보니 그 화려함을 지탱시켜주는 인생의 궤적도 있다. 그를 멋있는 남자로 만들어주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여용기씨의 삶과 철학이 궁금했다.
17세에 부산으로 상경한 거제도 소년은 우연히 양복 기술을 배우게 된다. 훗날 ‘부산의 닉 우스터’라 불리며 시니어 패션의 바로미터로 불리게 되는 여용기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형의 옷을 물려받아 입던 가난한 섬 출신 소년이었다. 그러나 일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그는 22세에 최연소 재단사가 되고 29세에 부산 광복동에 자리한 모모양복점을 인수해 자신의 가게를 연다. 인생에서 일찌감치 성공의 과실을 맛본 셈이다.
화려한 성공과 깊은 실패의 나락
“당시에는 옷을 맞춰서 입었지, 사 입는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벌이가 상당했어요. 아무나 광복동 재단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서울 명동보다도 부산 광복동이 옷을 잘 만든다는 얘기를 듣던 시절이었으니까.”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른 나이에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아 사장까지 했던 과거는 분명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진 것이다. 대기업에서 만드는 기성복이 양복 시장을 장악하는 바람에 여용기씨의 양복점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던 맞춤 양복점들까지 모두 극심한 불황에 직면하게 됐다.
“기성복 시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해야 했는데 미숙했던 겁니다.”
다른 양복점들도 차례로 사라지는 상황에서 그 또한 버티기가 어려웠다. 30대 후반에 접어들 즈음 양복점 문을 닫았다. 이후 오랜 시간 건설업, 주차요원 등을 하며 혼자 두 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한 노력과 연구
“다른 걸 해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기술이든 10년은 해봐야 자기만의 노하우가 생기는 것 같아요.”
결국 그는 재단사였다. 지인이자 마스터 테일러인 양창선씨로부터 재단 일을 다시 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여씨와 친하게 지냈고, 여씨의 모모양복점 옆에 코코양복점을 나란히 개업했던 양씨의 제안에 그는 잃어버린 고향과도 같았던 재단사로 복귀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실과 바늘을 놓고 지낸 세월. 감각을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작심하고 한 달 동안 시간을 내서 재단사로서의 옛 감각을 되찾는 동시에 새롭게 도래한 시대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연구했다. 어떤 마음으로 옷을 만들어야 하냐는 질문에 “시대적 흐름을 잘 봐야 한다”고 거듭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러한 노력으로 환골탈태했다. 그 결과 작년 6월 부산 중구 남포동에 오픈한 남성 패션숍 ‘에르디토(EREDITO)’의 마스터 테일러를 맡게 됐다.
멋을 내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여용기씨는 요즘 가장 인기 있는 SNS 스타이기도 하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이미 4만 명을 넘어섰다. 그가 올리는 그의 사진들을 보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눈에 봐도 ‘옷을 잘 입는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사진들이다. 센스와 위트를 겸비한 스타일링이 좋은 편인 그는 패션 잡지에 나오는 옷을 그대로 만들어 직접 입어봤다. 모자, 안경, 양말, 벨트, 신발, 넥타이를 맞춰 입고 액세서리로 꾸몄다. 그런 뒤 SNS에 올리니 20~30대 팔로어가 댓글을 단다.
그에게 자신을 코디할 때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는지 물어보자 “체형”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특히 머리와 얼굴 쪽에 주안점을 두고 옷을 입는 편입니다. 그런데 난 어떻게 입어도 자신 있어요. 나는 옷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옷을 더 잘 입어야 해요(웃음).”
하루에 두 시간은 두덕산을 등산하고 그중 30분은 근력운동을 한다는 그는 시니어들에게 필요한 패션 전략을 “줄여 입어라”라는 말로 요약했다.
“‘아저씨와 오빠는 한 끗 차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입니다. 줄여 입으면 젊은 사람들이 입는 핏이 나와요. 그런데 막상 그렇게 입으려고 하면 겁부터 납니다. 불편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멋을 내려면 불편한 게 있을 수밖에 없어요. 멋을 내려면 감수해야 해요. 우리가 젊었을 때도 그랬어요. 당시에는 공중화장실이 대부분 재래식 화장실이라 일을 보려면 앉아야 해서 옷이 구겨졌잖아요? 그 구김을 만들지 않으려고 바지를 벗어서 걸어놓고 일을 본 적도 있어요.”
비스포크 맞춤은 한 벌의 슈트를 만들기 위해 1만2000땀의 손바느질이 필요하다. 비접착 방식으로 천연 광목을 대고 하나하나 손바느질 작업을 하면서 옷의 형태를 잡는다. 비스포크 슈트는 한 달 이상 걸리는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정성이 깃든 슈트를 입으면 마음가짐도 반듯해지고 말도 신중하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옷을 잘 입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진심을 다해 만든 양복은 사람의 겉모습만 바꾸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바꿀 수 있어요. 좋은 사람이 입는 옷이 멋진 옷이죠. 멋진 옷으로 완성하는 건 결국 예절이거든요. 예절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죠.”
슈트는 내 인생의 최고 선물
흰 수염에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신사가 양손에 줄자를 들고 정장을 맞추러 온 손님의 치수를 잰다. 곧이어 그는 커다란 테이블에 양복감을 깔고 바늘과 실을 무기 삼아 작업에 나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이 흐르는 노신사가 두꺼운 돋보기를 코에 걸고 열정적으로 손마름질하는 모습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여씨는 나이 들어서도 멋있게 보이고 싶다면 펑퍼짐한 옷은 벗어 버리고 젊은 사람들이 입는 옷을 연구하라고 조언한다. 나이 들어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최고의 재단사로 불리면서 자신의 사업체를 가졌던 사람이 그 일을 그만두고 완전히 다른 일을 수십 년간 해야 했다. 그 좌절은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오랜 고통 끝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보람을 느꼈던 과거를 다시 찾고 재도전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변화를 꾀하고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다시금 맞이한 인생의 봄은 그러한 마음가짐과 시도를 통해 도착할 수 있었다. 그의 외견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년의 아우라가 단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멋진 옷을 만들어 입고 제일 먼저 누구한테 보이고 싶냐 물었더니 아직 싱글(돌싱)인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모 방송사 만남 주선 프로그램에서 저를 출연시켜준다고 합니다. 상대 파트너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스트라이프 슈트로 폼 좀 내볼까 해요. 슈트는 내 인생의 최고 선물이니까 또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모르죠.”
2015인구주택 총조사에서 유독 눈에 띄는 수치가 있다. ‘1인가구 비율 27.2%’ 이 수치는 2010년 조사 때보다 3.3% 늘어난 수치이며 2000년도의 15.5%와 비교하면 1인가구가 엄청나게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혼자 사는 데 큰 불편이 없고 구속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 수 있으니 굳이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돌싱이 많아졌다. 이혼은 더 이상 흠이 아니다. 돌싱이 된 것을 당당하게 밝히는 사람들이 많다. 셋째, 황혼이혼도 많지만 사별하고 홀로 사는 노인들도 많다.
언제부턴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먹는 이른바 ‘혼밥 혼술’족이 많아졌다고 한다. 심지어 혼자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음식점도 생겼다고 하니 1인가구 문화가 대세로 자리 잡아 가는 모양이다. 필자는 아직도 혼자 밥을 먹으러 들어가면 괜히 어색하고 눈치도 보인다. 그래서 주문하면 빨리 나올 수 있는 메뉴를 시켜서 후딱 먹고 일어선다. 손님 몰리는 시간에는 혼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더러는 사회성이 결여된 외톨이들이 ‘혼밥 혼술’족에 포함될 것이다. 어쨌든 최근에는 혼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이 활성화되고 있다. 심지어 혼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인기도 높다. 이제 혼자 먹고 혼자 놀고 혼자 살아가는 개인 중심 사회로 급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는 주거 양식의 변화까지 요구하고 있다. 과거 대가족 시절의 단독주택 주거 형태는 핵가족으로 변화하면서 급격하게 아파트 문화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1인가구가 증가하면서 중대형 아파트보다 소형 아파트의 인기가 높다. 원룸이나 소형 오피스텔의 수요도 많다. 이렇게 소형화되고 개별화되는 주거 형태는 개인주의와 맞물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사람은 건축을 만들고 건축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 일반화되어가고 있는 주거 형태로는 이웃과 소통하기 어렵다. 고독사는 작금의 아파트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홀로 사는 시니어들에겐 서로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새로운 주거 형태가 필요하다. 개인의 취향이 존중되는 독립적인 생활이 보장되면서도 공동생활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는 주거 형태의 심층적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공유주택, 쉐어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공동생활이 가능한 건물도 등장했지만 이러한 건물은 주로 대학생들이나 젊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지어지고 있다. 다수가 한 집에서 살면서 침실은 각자 따로 사용하지만, 거실ㆍ화장실ㆍ욕실 등은 공유하도록 되어 있는 쉐어하우스는 불편한 점이 많지만 학교 기숙사보다 자유롭고 저렴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러나 이 시대에 꼭 요구되는 시니어를 위한 쉐어하우스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시니어들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싶다. 아직 모여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시니어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모여서 사는 것은 혼자 살 때보다 장점이 훨씬 많을 때 가능하다. 모여서 사는 사람들끼리 갈등으로 인해 삶이 불편해진다면 오히려 혼자 사는 게 낫다. 바로 이런 문제가 시니어를 위한 공유주택의 고민이 되는 것이다.
잠시 만났다가 헤어질 때도 갈등이 존재하는데 한 공간에 모여 사는 사람들 간에 갈등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여서 살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갈등을 이겨낼 각오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로부터 유발되는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이것이 1인가구 시대에 필요한 행복한 공동체의 본질이라고 할 것이다.
‘꽃보다 할배’ 탤런트 백일섭 씨가 갑자기 검색어 상단을 차지했다. 무슨 사연인가 찾아보니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이 ‘졸혼’ 상태에 있음을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졸혼’의 뜻을 몰라 부인이 죽었나 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니 ‘졸혼’이란 결혼을 졸업했다는 뜻이란다. 이혼은 아니고 결혼을 졸업하다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이혼하자니 주변의 여러 관계나 자식들 문제 등 생각보다 복잡해서 호적은 놓아둔 채 서로 떨어져 살아가는 것이 말하자면 ‘졸혼’의 심오한(?) 개념이었다. 백씨는 현재 부인과 떨어져 남해 여수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를 즐기며 신나게 혼자 살고 있단다. 남의 집안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하여튼 떨어져 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건 노인네건 이혼이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어찌 보면 ‘졸혼’이 현명한 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황혼이혼’이라고 문학적 수사를 곁들여 근사하게 표현하지만, 이혼이 그리 쉬운 일인가. 이혼의 사유부터 이혼하는 과정 속에 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쌓이겠는가. 배우자의 죽음보다는 덜 하지만, 이혼도 말년에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임에 틀림없다.
옛날에는 유명인의 이혼이 신문에 대서특필되곤 했지만, 요즘은 이혼이 개들도 물고 다닐 정도로 흔해빠지다보니 소리 소문 없이 이혼하고 어느 날 불쑥 ‘화려한 돌싱’이니 뭐니 하며 나타나는 일이 흔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다양한 개념의 ‘신상품’도 등장하는구나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상처 없는 이혼’이라는 브랜드로 새로운 유행이 될 조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젊은이들이 결혼을 못 해 혼자 사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마당에 이혼하는 이들까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대는 바람에 혼자 사는 것이 대세가 되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TV에서는 이미 그런 낌새를 눈치채고 혼자 사는 프로그램을 마구 쏟아내고 있고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용어도 난무하고 있지 않은가.
우치다 타츠루라는 일본인 저술가가 쓴 를 보면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난 결과 “점점 사람들이 아이들이 되어간다.”고 진단한다. 그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 유무로 어른과 아이를 구분한다. 예컨대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이 ‘모두의 일’이기에 하지 않는다면 아이, ‘모두의 일’이므로 줍는다면 어른이다. ‘아이’가 늘어날수록 사회는 퇴화한다는 뜻이다.
경쟁 시스템의 교육 제도가 이런 ‘아이’들을 양산하고, 자본주의는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어른 없는 사회’를 부추긴다. ‘미운 우리 새끼’라는 TV 프로에서 나이가 50이 다 된 아들들이 아이처럼 노는 모습을 보며 우치다의 진단이 그럴듯하게 들린다. 장가가야 어른이 된다는 옛날 어른의 말씀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 한 인간으로의 책임감이 싹튼다는 말이겠다.
아무쪼록 백일섭 씨의 ‘졸혼’ 실험이 성공하길 빈다. 아무래도 이혼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삶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므로 그들의 선택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삶이 자칫 사회적 동물인 인간을 사회에 적응 못 하는 ‘아이’로 퇴화시킬 수 있다는 경고가 마음에 걸린다. 주변의 솔로들에게 빨리 중매라도 서야겠다.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옥임씨(鄭玉任·56)는 6년 전에 이혼하고 황홀한 돌싱(돌아온 싱글) 생활에 푹 빠져 있다. 데이트를 질리도록 하고 난 후 밤에 떨어지기 싫을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도 앞으로 다시는 결혼 안 한다고 잘라 말한다. 지금처럼 뭇 남성들의 사랑고백을 받으면서 연애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속내를 들춰보자.
이봉규 시사평론가
정옥임은 미녀 정치인의 대명사이자 베스트드레서로도 꼽힌 바 있는 매력적인 여인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날씬했다. 레스토랑에서 저녁 6시에 만났는데 나 혼자만 밥을 먹었고 그녀는 생맥주 한 잔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평소 저녁을 거를 정도로 필사적이다. 외모에 자신감이 충만해서일까 반지나 목걸이 같은 보석은 착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외모 가꾸기는 “자기 자신의 관상용”이라고 항변하지만 아직도 뭇 남성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기에 자신의 외모는 가장 자랑스러운 자산일 것이다.
6년 전에 이혼하고 황홀한 돌싱(돌아온 싱글) 생활에 푹 빠져 있다. 그렇다고 방탕할 만큼 어리석은 여자는 절대 아니다. 자기관리에 충실하면서도 적당히 즐길 줄 아는 앙큼한 여인이다.
“마음에 드는 남성이 나타나면 먼저 대시할 용기 있다”고 말하면서도 상당히 재고 또 잰다. 알다가도 모를 그런 여자다. “여자들은 비밀스러운 스토리가 많아서 양파와 같다”면서 “알려고 파고들면 곤란하다”고 나에게 엄포를 놓는다. 그렇다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내가 적당히 물러날 리 만무하다. 한량 이봉규가 느물느물하게 파고들어가니 그녀는 서서히 무장해제된다. 앙큼한 것 같으면서도 순진하고 순수한 여인이다.
10세 이상 연하의 남성에 매력이 끌린다고 고백한다. 최근 띠동갑 정도 어린 남자와 야릇한 감정을 교환한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육체적 관계로까지 발전하기에는 겁이 덜컥 나서 적당히 밀고 당기는 정신적인 감정만으로 짜릿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볼은 어느새 붉어진다. 몇 년 있으면 환갑인 나이에도 소녀 같은 표정이 묻어 나온다. 띠동갑 연하의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자칫 자신이 무너질까봐 겁이 나서 밀고 당기는 심리일까? 영화 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중년 남자(제레미 아이언스)처럼 주체할 수 없는 격정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은 짧은데 후회하지 말고 저질러보라!”는 나의 도발에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일정 틀 속에 가둔다. 그런데 그 틀이 조만간 깨질 수도 있겠다는 조심스런 예감도 들었다.
정치토론할 때 터프하게 도발하는 그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본인의 입으로 여자는 양파와 같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정당하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는 완전한 자유인이다”라고 외치면서도 이리저리 까다로울 정도로 재고 또 잰다. 정치인이자 세 명의 딸을 둔 엄마로서 띠동갑 연하의 남자와 대놓고 육체적 사랑을 하기에는 잃어버릴 것이 너무 많아서일까? 아니면 10년 후까지도 가지 못할 사랑이라서 미리 ‘손절매’(주식용어)라도 하는 걸까? 10년 후면 정옥임은 60대 후반인 데 반해, 그는 50대 중반의 팔팔하게 젊고 매력적인 남성이기에 자신이 추해 보일까봐 미리 겁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우려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곧바로 “어느 도사님이 그러는데 나는 늙어서도 남자들이 줄줄 따르는 타고난 남복(男福)이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본인 입으로는 말을 안 했지만 내 추측으로 띠동갑 연하의 남자와의 정신적인 밀고 당김은 현재도 진행형인 듯싶다. 틀려도 할 수 없고….
눈이 작고 쌍꺼풀이 없는 남자이면서 건강미가 있고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을 좋아한다고 하니 그의 모습이 대충 그려진다. 어린 남자를 좋아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누구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누군가를 보호해주고 싶고 포용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린 남자의 신선한 육체와 순수한 영혼이 늙은이들과 비교되어서 그럴까?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남자들 심리와 같은 것이겠지!
전 남편과 1983년 결혼해서 4년 만에 갑자기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렸는데 그제야 남편과 안 맞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불행을 타파하기 위해 내놓은 고육지책이 애들 데리고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단단히 마음먹고 1995년 비행기에 올랐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면서 아이 세 명을 키우는 일이 보통 어렵지 않았기에 스파르타식으로 살았다고 회상한다. 어릴 적 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 어려운 시기에 큰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아이들도 엄격한 생활을 잘 이겨내고 나름 멋지게 성장해주었다.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남편과 떨어져 살면서 바쁘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오히려 행복감을 느꼈기에 6년 전 이혼하고 말았다.
“전 남편이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하니 돌싱으로 사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뒤돌아보지 않는 그녀의 화끈한 성격 탓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옛사랑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데이트를 질리도록 하고 난 후 밤에 떨어지기 싫을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도 앞으로 다시는 결혼 안 한다고 잘라 말한다. 지금처럼 뭇 남성들의 사랑고백을 받으면서 연애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본심은 인생의 여백을 즐기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까지 처절하게 살아온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일 수도 있겠다.
그녀의 인생은 최고를 향한 처절함의 연속이었다. 서울 성신여대부속여자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고려대학교 정경대학에 특차 수석 입학해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4년 내내 장학생이었고 정경대학을 수석 졸업했다. 결혼 후 딸 셋을 두고도 뒤늦게 고려대학교에서 1995년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후 과정(Post-doc)으로 스탠포드대학에서의 강의를 시작으로 미국 후버연구소, 세종연구소,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CNAPS(동북아정책센터) 등 국내외 최정상의 연구기관에서 활동했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캠프에 참여했고 이후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18대 국회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이렇게 최고 전문가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늘 남는다고 한다. 국내 박사라는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 차별도 많이 받았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최고 전문가를 지향했고 남다른 자존감이 있었기에 그녀 나름의 견디기 어려운 박탈감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국제정치 분야에서는 국내 박사보다는 미국 박사를 더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상대적으로 차별을 당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도 자신이 제일 잘하는 일이 외교 분야이고 가장 하고 싶은 일도 외교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외교 전문가가 되겠다고 하니 그녀는 천직을 가진 행복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국내 정치 얘기로 화제를 옮겼더니 금방 표정이 달라지면서 흥분한다. “지금 새누리당이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날선 비판이다. “문재인이 집권하면 위험하다는 위기의식이라도 보여줄 수 있는 대권 후보조차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탄식한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그동안 스펙만 보여줬을 뿐 대통령으로서 역량과 결기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깎아내린다. 김무성 전 대표도 지난 총선 때 자신이 주장했던 ‘오픈프라이머리’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졌어야 하는데 대권 주자로서 기회를 놓쳤다고 애석해했다. 김무성 스스로의 대권 욕심 때문에 망쳤다는 진단이다. 당 대표까지만 생각하고 조율자로서 큰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자기 욕심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 본인 지지율도 떨어뜨리고 당도 망쳤다고 강한 비판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지금의 난국과 새누리당을 이 꼴로 만든 것은 결국 대통령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자기반추 없이 정권 재창출을 노린다면 양심 없는 행위”라고 힘주어 말한다. 심지어 “지금의 정치를 보고 있노라면 조선시대 내시와 상궁들이 정치하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비판한다.
불과 30분 전에 연애 얘기 할 때와는 사뭇 다른 톤으로 거침이 없다. 정치 얘기에는 이리저리 재질 않는다. 이래서 정옥임은 정치를 하는구나!
“자기 자신의 일생에 대해 몇 점을 줄 수 있나?”는 질문에 주저 없이 “A플러스”라고 대답하면서 “자기 자신은 못 속인다”고 덧붙인다. 그만큼 자신의 인생에 당당할 수 있다는 자기 진단이다. 당찬 모습 뒤에는 여리고 순수한 모습도 어른거린다. 알 수 없는 앙큼한 양파 같은 여인과의 짜릿한 시간이었다.
도종환은 ‘가구’라는 시에서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썼다. 가구는 없으면 찾고, 있으면 그저 거기 있나보다 할 뿐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황혼에 이르러 서로 말이 없는 부부가 오래된 가구와 비슷하다.
2012년 통계에 의하면 전체 이혼건수 중 결혼생활 25년 이상된 부부의 이혼건수가 19%이고, 결혼생활 21~25년 사이의 건수가 11.4%라고 한다. 3분의 1에 가까운 수치이다. 지금의 중년세대는 젊은 세대보다는 결혼을 일찍 하였다고 하더라도 결혼생활 21년이 넘었다면 나이로 보면 대략 50세를 넘어 60을 바라보거나 넘긴 나이이다. 나도 결혼생활이 21년을 넘어섰으니 이혼을 한다면 황혼에 이혼을 하였다는 말을 들을 때가 되었다.
황혼! 저녁노을이 지는 때에 왜 이혼을 생각할까? 해가 뉘엿거리며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며 날이 저물어 가면, 밖으로 나돌아 다니다가도 집이 그리워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서 돌아가고 싶어지고, 돌아가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 따스한 아랫목에 발을 집어넣고 밥 한술 뜨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가 잠이 들 일이다. 그런데 집이 그립지 않다면, 집이 지겹거나 따분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집이 두렵거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면 더욱 큰일이다.
집이 그리워지지 않는 일은 여자나 남자나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집 밖에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일이 있어서 일수도 있고, 집에서 만나게 되는 아내나 남편을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남편이 20년 넘게 권위적이고 가끔은 손찌검까지 하였는데 남은 여생을 계속 그렇게 살라니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내가 20년 넘게 한결같이 하는 잔소리가 듣기 싫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품안에 없을 때는 더욱 커진다.
결혼식 주례사에서 가장 많이 듣는 고전적인 덕담은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 함께 늙어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집이 그리워지지 않고 들어가기 싫은데 그 집에서 죽을 때까지 살라는 것은 어쩌면 폭력이고 고문일 것이다. 평균수명 백세가 되어가는 시대여서 나이 60이 넘었어도 앞으로 살날은 이제껏 함께 살아온 햇수보다 더 많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배우자가 더 이상 행복을 주는 상대가 못 된다면, 더구나 행복은커녕 괴로움을 주는 존재라면 이혼이 나을 수 있다.
결혼한 지 20년이 넘어 나는 가구가 바꾸고 싶어졌다. 새로 가구를 들여놓고 반짝 반짝 윤이 나게 닦고 말을 걸고 싶어졌다. 그런다고 가구가 나에게 말을 걸리는 만무하지만, 일상의 새로움을 가져오고파 그러고 싶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새 가구도 다시 시들해지고 먼지가 쌓이고, 습관처럼 거기 있나보다 할 것이다.
배우자와 이혼하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해도, 돌싱이 되어 혼자 살아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식상해진다. 그래도 가구를 바꾸어 보고 싶다. 배우자를 바꾸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그래서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최일숙 법무법인 한결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