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말하는 이상용(李尚龍·48) 작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이기도 한 ‘운명’을 새삼 되새겼다. 평택에 있는 작업실에서 은둔하듯 기거하며 1만 점이 넘는 작품을 만들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그는 드로잉, 판화, 벼루, 조약돌, 바큇살, 의자, 상여 등 독특한 오브제들을 사용하며 남들과 다른 고유의 영역을 개척해가는 중이다. 한국 미술, 서양 미술을 아우르기도 하고 무심히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듯한 그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맑게 정제되어 누구도 더럽힐 수 없는 자신의 기준들이었다. 이상용 작가가 만나고 만든 운명들에 대해 들어봤다.
충남 공주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이상용 작가의 작업실은 평택에 위치해 있다. 누나가 사는 곳을 지나다니다가 발견한 곳이다. 서울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공간, 한적한 이곳에서 그는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순박한 농부 같은 모습이 그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작품 생산에 있어서만큼은 금욕적이지 않다. 그의 작품은 온갖 장르를 넘나든다. 1만2000여 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작품들은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근면한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의 숫자는 그가 평택의 외진 곳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기도 하다.
운명적으로 만난 작품 소재들
“예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덮치는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예술인은 등대지기와 같죠. 바쁘게 새로운 상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발맞춰가는 시대에 느림 속 자연과 사람의 만남에서 소중하고 깊은 운명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작품을 시작했어요.”
이상용 작가의 작업실에서 평면회화 드로잉 작품 이외에 특별히 시선을 끈 것은 폐철제로 만든 페달 작품이었다. 왜 폐철제를 소재로 삼은 걸까?
“사용하다 버려진 물건들, 천천히 녹이 슬어가는 쇠. 쓰다 버린 물건이든 새로운 물건이든 저와 찰나의 운명적 만남에서 순간순간 만들어진 작품들이지요.”
쇠는 좀 무겁고 아파 보인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 작가의 대답은 간단했다.
“철제의 묵직한 무게와 차가운 성질이 현대를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을 상징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버려진 물건들을 보며 날마다 달라지는 운명과 기억, 그 내밀함이 어떠한 운명으로 다가갈지 상상하며 만들고 싶었죠.”
이상용 작가는 소위 ‘예술가다운’ 이미지와는 다르다. 뭔가 흐트러지고 난삽하며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일할 것 같은 도취된 작가의 이미지가 없다. 작품이 보관된 창고는 그가 직접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작품에 먼지가 앉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외면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을 더 추구한다. 작업실이 곧 집인 이곳에 보관된 작품을 들여다보니 그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예술은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지 작가의 모습이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와 인터뷰하며 그에게서 맑은 영혼을 느꼈다. 오롯이 꾸밈없는 것을 지향하는 면모 때문일지도 모른다.
‘벼루 작가’로 유명한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에 대한 집착이 느껴진다. 사람을 주제로 집중적으로 파고든 작가는 흔치 않다. 그가 그토록 사람을 자신의 작품 속에 자주 드러내는 것은 세상이 너무 빠르다는 한탄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빨리빨리’가 입에 배고 생활에 밴 한국인은 세상의 속도를 더욱 몰아붙인다. 그리고 그렇게 속도에 매여 살다 보니 정작 인간의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가 사람에 주목하게 된 것은 잊혀져가는 인간성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물질적인 것은 빨라도, 마음은 천천히
이상용 작가는 소재를 억지로 끌어다 쓰지 않고 순리적으로 발견한다. 그가 벼루(inkstone)를 소재로 쓰고자 한 것도 그러한 마음의 일환이었다. 벼루는 단단한 물건이다. 백 년 전, 사백 년 전에 벼루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서 쓰이고 시간 속에서 계속 연결되어 결국 한 작가의 손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중간에서 혹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으면 버려졌을 수도 있는 벼루는 그의 손에서 다시 생명이 되살아났다. 그는 그저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쓰다 만 것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운명으로서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벼루뿐만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마치 버려진 골동품 같은 한국 전통의 얼이 담긴 것들이지만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소재들이 운명과도 같다. 그렇게 만난 작품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참 곤란해했다. 그에게는 조그마한 부속품들조차도 운명이고 만남이므로 어떤 게 의미가 크다 작다 논할 수가 없단다. 이러한 일관된 그의 작품세계조차도, 실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작업을 하다 보니 통일감이 생겨 그만의 독자적인 생태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운명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작업일지도 모른다. 제도권 내에서 학습된 예술적 역량보다는 타고난 자질을 발판 삼아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는 실험작가답다.
39세 나이에 떠난 뉴욕
이상용 작가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뉴욕에서 6년을 지냈다.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관통할 ‘운명’을 발견하게 된 뉴욕. 그곳에 갔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의 늦은 나이였다.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쉽지 않은 나이였을 터. 그런데도 그가 뉴욕이라는 새로운 출발지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삶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
사람을 천편일률적으로 만드는 한국의 입시 교육을 매우 싫어했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입시학원 원장으로 열심히 일했다.
미술학원 일은 제법 잘돼서 대전에서 큰 학원들 중 하나로 성장했다. 먹고사는 문제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맡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팽개치고 자기 멋대로 가는 것이 죄처럼 느껴져서 계속해야 했던 학원이었다. 그러나 입시에 대한 혐오가 강했던 만큼, 아이들을 그 틀에 맞춰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물론 틀을 깨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최대한 독특하게, 똑같이 하지 않고 개성 있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게끔 가르쳤다. 그러나 “아무래도 한계가 있더라”라는 그의 자조 섞인 한마디에서 많은 좌절과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술가로서, 작가로서의 삶을 추구하고 싶었다. 열두 시에 학원에 출근해서 여섯 시까지 작업하고 잠깐 자는 생활을 10년 넘도록 했다. 그의 방대한 작업량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결국 자신의 목표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뉴욕으로 향한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가르칠 나이에 대학 3학년 학생으로 편입하게 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틀어박혀 작업에만 몰두하다
이상용 작가는 뉴욕에 처음 갔을 때 3년 내내 매일매일 갤러리를 돌아다녔다. 보고 또 보는 일의 연속이었다. 뉴욕현대미술관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갔다. 그림을 보고 느끼려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본 그림들과 자신의 작품을 접목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다. 그는 그저 흐름에 맡기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말한다. 그렇게 3년이 지나니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후 3년 동안 외부 출입 안 하고 작업만 계속했다.
옆에서 보면 무언가 홀린 듯한 삶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 데에는 그의 지론이 있다. 바로 어릴 때부터 남의 것을 보고 하는 것은 안 좋아했고, 남이 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려 하는 그의 작업관이다. 그는 작업을 할 때 매번 자신이 ‘원시시대에 태어난 원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한다고 말한다. 그림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뭔가를 찾아보자는 마음가짐과 노력이야말로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의 동력이었다. 하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서 뭔가를 만들어낸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운명’과 같은 끌어당김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할 때 그토록 운명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억지로 작품의 소재를 찾으러 다니지 않는다. 있는 소재에 맞춰 작품을 만들 뿐이다. 그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이야말로 운명의 다른 이름 아니던가.
회화, 조각, 설치, 그림, 시까지 아우르다
젊을 때는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배우가 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상용 작가의 운명이 아니었나보다. 이제 그는 조용히,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들은 뉴욕의 미술관들과 단원미술관, 관훈갤러리, 간송미술관 등에 걸렸고 코오롱그룹과 한국문화원, 펜실베이니아 대학병원 등지에서도 볼 수 있다. 그에게서 은둔 고수의 아우라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그의 작품은 양도 많지만 분야 또한 방대하다. 회화, 조각, 설치, 그림과 같은 미술 작품 외에 시와 사진까지 아우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장르를 굳이 구분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모두가 얽혀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들이라고 말한다. 소위 ‘권위’를 위해 한쪽으로 장르를 정하라는 지인들의 충고도 있었지만 ‘사람이 맨날 한 가지만 먹으며 살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특히 시는 그의 미술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6000편 정도 썼고, 2000편 정도를 공개한 상태다.
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들 밑에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아홉 살부터 땅바닥에 그린 그림으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소나무로는 목상을 만들고 빨래비누로는 조각상을 만들었다. 또 잡동사니로 척척 만들어낸 작품들이 쌓여 그의 집은 마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그러다 처음 시를 접하게 된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하반신 마비로 쓰러졌고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던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간병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있다 보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생각은 시적 감수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어린 시절의 고독하고 상처 입은 감성들과 연결된다.
“시라는 것은 누군가 말했듯 말라가는 잎을 파랗게 유지시켜주는 것 같아요.”
예술 작품은 내면이 익어가는 과정에서 뭔가 많은 것들을 보게 되고, 그러면서 위로 올라가다 보면 흐트러지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나무처럼 시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들어가는 과정에서 시가 중심을 잡아준다. 흐려지거나 어렸을 때와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시를 통해 다시 본질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시를 계속 쓸 것이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영원할 작품들
그가 최근 열중하고 있는 작품 소재는 상여다. 그가 볼 때 우리나라의 상여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다. 상여를 통해, 죽음에 이르면 왕과 못지않은 마지막 길을 서민들에게도 제공해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우리 조상이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 아니겠냐며 반문했다. 샤머니즘 관점에서 상여를 소재로 한 작품을 꼭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현대적으로 해석된 이상용 작가식의 상여를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어렸을 때 상엿집을 들락날락했는데 무섭잖아요. 어른들은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이게 아름다운 상여 문화와 매치가 안 되는 부분인데,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거죠. 그렇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더 잊히기 전에 저보다 어린 세대에게 상여라는 게 이렇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로 편하게 봤음 싶었어요.”
여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스튜디오를 가진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그러한 꿈들은 이제 어느 정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는 누군가와 연결되는 작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을 본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 싶어 할 때 그 길을 연결해주는 그런 작가.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작품도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사람들이 보고 베끼며 영향을 받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가 바라는 작가의 모습이란 인연과 이어지는 것이고, 그 인연은 다소 희미한 것처럼 보여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어떤 운명의 길과도 같은 무언가다.
그의 마음을 읽는 사람은 그의 인연이 되면서, 비로소 그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내내 작가의 맑게 정제된 사상과 순박한 마음이 간결하게 와 닿는 기분이었다. 어제까지 살게 해준 사람에게 감사하며 내일을 산다는 이상용 작가. 뭐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자의 심정을 그의 작품에 공감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기자로서는 이상용 작가의 운명 같은 작품이 세상 밖에서 대중과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짐짓 이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너무 예쁘셔요."
"그렇다고 빠지지는 마세요. 책임 못 져요."
며칠 전 남자 파트너와 홀딩을 하고 왈츠를 추는 중에 나눈 대화다. 물색 모르는 사람들은 필자가 춤을 꽤 잘 추는 것으로 오해할 것이다.
왈츠나 탱고는 가까운 거리에서 몸을 밀착시키고 춤을 춰야 하니 뭔가 ‘썸’을 타지 않을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춤을 한번 배워보라 하고 싶다. 모든 일에 있어서 기본이 중요하다. 춤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자세를 갖추는 것이 쉽지 않다. 인터내셔널 왈츠는 루틴이 복잡해서 루틴 외우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춤추다 보면 자칫 자세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루틴대로 추려면 긴장해야 한다. 춤을 제대로 추는 사람은 춤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잡생각이 아예 불가능하다.
"인아야, 엄마 왈츠 열심히 배워서 왈츠 선생 할 거다."
"엄마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 되거든. 엄마 몸치거든."
몇 년 전 딸에게 희망사항을 말했더니 단칼에 필자의 꿈을 날려버린다.
왈츠를 배운 지는 10년도 넘은 것 같다. 재직 시에는 송탄에 있는 국제대학교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배웠다. 퇴직 후 집을 서울로 옮긴 뒤에는 서초문화원에서 3개월 수강한 뒤 신사동에 있는 샤리권 댄스 학원에서 3개월을 수강했다. 2년 전에는 선릉에 있는 더 댄스 스튜디오에서 몇 개월을 수강했고 양재에 있는 리세움에서도 3개월을 수강했다. 지금은 선릉에 있는 휴먼 서비스센터에서 6개월째 왈츠를 배우고 있다. 정리해보니 엄청 여러 곳에서 많은 세월 왈츠에 빠져 살아왔다. 그런데도 폼은 아직도 엉성하고 실력도 하품 수준이다. 필자는 왜 이렇게도 몸치일까?
"저는 학교 다닐 때 체육시간이 지옥 같았어요."
그러자 왈츠 선생님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저는 너무 신났는데요."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못하면서 운동만 잘하는 애들을 무시했다. 그런데 정말 우수한 학생들이 체육도 잘한다는 것은 교사가 되어 알게 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본다든가 음악이나 영화감상을 즐기던 필자는 체육시간이 지옥 같았다. 특히 달리기는 딱 질색이었다. 그런 필자가 왈츠를 배우려고 한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니 스트레스도 있었다. 인터내셔널 왈츠는 A코스, B코스, C코스, 바리에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는 지금도 A코스만 무한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왈츠를 꼭 배워야 하나?‘
몇 년 전이었다. 루틴을 외우지 못해 힘들어하던 피랒는 왈츠 수업을 가는 중에 문득 회의가 들었다. 지난 화요일 왈츠 수업 중에는 눈물까지 났다. 너무 못하는 자신에게 속이 상해서였다.
'발레를 할 때는 행복해서 눈물이 났었는데….'
'음지가 양지 된다고, 내가 춤 잘 추는 사람을 부러워하게 될 줄이야.'
영화 '전쟁과 평화',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 '라스페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에서는 주인공들이 우아하게 왈츠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 필자의 목표는 영화에서처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나비처럼 우아하게 왈츠를 추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공주처럼 기품 있고 우아한 삶을 동경해왔던 필자가 가장 가슴 설레던 장면이 바로 멋진 왕자와 왈츠를 추는 장면이었다.
안 되는걸 기어코 하겠다고 왈츠에 집착하는 필자에게 얼마 전 딸애가 말했다.
"엄마 참 대단해. 나 같으면 두세 번 해보다가 안 되면 그만둘 텐데."
필자는 의지의 한국인이다. 그 꿈을 꼭 실현해보고 싶다. 언제 그런 날이 오려나? 아니 그런 날이 오기는 오는 건가?
서울 일부 지역의 집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정부의 부동산대책은 백약이 무효다. 젊었을 때 입주하여 산천이 세 번 넘게 바뀌도록 이사 한번 안하고 관악구 같은 집에서 산다. 이때쯤 관악에서 사는 아유를 밝힐 때가 되었다. 몇 년 전 사회은퇴를 앞두고 오랜 도시생활을 벗어나 전원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을 하였다. 전원이주 지인들을 살피면서 취향은 맞는지 환경변화는 어떠한지 검토하였다. 취향과 성격에 어울리는지가 제일 큰 문제였다. 전원은 어릴 적 추억일 뿐, 이미 도시민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젊었을 때 휴가철이나 휴일에 짬짬이 시간을 쪼개서 여행을 즐겼다. ‘아! 아름답다. 또 와야지’ 감격을 먹고 다시 올 것처럼 다짐을 하였으나 같은 곳으로 또 갔던 기억은 거의 없다. 추억은 얼마 지나면 잊어버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여행이 더 즐거웠다. 한 곳에서만 꼼작 못하고 살아야 할 아무 이유가 없었다. 전원으로 이주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편리한 도시에서 살면서 쾌적한 전원으로 여행’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전원이 그리울 때는 주말농장을 찾으면 되었다.
서울 어디서든지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관악·북한·청계산은 우리의 전원이다. 수도권 전철 경춘·중앙·경강선을 타면 가는 곳마다 명승지다. 매주 친구들과 서울근교·원거리 산행을 즐기고 있다. 봄꽃·여름녹음·가을단풍·겨울함박눈 따라 학교동창·자원봉사동료·사회평생교육동기들과 산행을 즐긴다. 각자의 신체조건에 맞춰서 산을 찾으면 바로 그곳이 전원이다. 관악전원마을에서 즐겁게 사는 이유다.
첫째, 관악산이 포근히 감싸는 천혜의 자연을 자랑한다.
관악산은 관악구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연주대 정상에 오르면 암자가 추녀 밑 제비집처럼 앙증맞게 매달려 있다. 서울둘레길·관악산둘레길이 잘 정비되어서 등산을 하거나 산책하기에 편리하다. 관악산 계곡과 도림천은 여름철 물놀이 천국이다. 잣나무 삼림욕장은 천혜의 치유광장이다. 어디서나 몇 십 분이면 관악산에 연결된다. 아침마다 뒷동산 체육공원에서 건강을 다질 수 있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다.
둘째, 관악은 교육특별구다.
집주위에는 초·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있고, 가까운 곳에 대학교가 있다. 한곳에서 오래 사는 덕분에 아들과 딸은 전학 한번 없이 교육을 마쳤다. 결혼 후에는 가까운데서 살고 있다. 쌍둥이 손녀와 손자가 아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 다닌다. 아들과 손주는 도시에서 보기 드문 ‘초등학교 부자동문’이 되었다. 앞으로 오래도록 관악에서 더 재미있게 살아야할 이유다. 손주를 정성껏 돌보자. 올바른 시민으로 기르는 인성교육 첫걸음이다.
셋째, 오순도순 분위 좋은 전원마을이다.
관악구청·평생학습관·문화원에서 열리는 사회교육이 활발하고, 도서관 운영은 최고수준을 자랑한다. 청운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가 많아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늦었던 사회개발도 경전철 등 지역발전에 불을 댕기고 있다. 골목길·고갯길·사이길 등 도시화가 덜 된 ‘시골길’이 많다. 정이 넘쳐 활기 찬 골목길이 있는가 하면 인적이 뜸해 정을 그리워하는 고갯길도 있다. 도심 같지 않는 포근한 사이길이 있다. 다른 곳에서는 주민 간 통행 문제로 다투는 일이 종종 있으나 이곳은 오히려 이웃과 상생하는 정이 넘치는 곳이다.
매혹적이다. 그러나 불편하다. 이 찰나의 간극 속에 그의 ‘붉은 산수’가 있다. 하고많은 색깔 다 놔두고 하필 붉은 풍경이라니… 어디서도 마주친 적 없는 역설이다. 사람들은 그의 ‘산수’에서 유토피아를 찾고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가 장치한 은유와 비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탐을 내는 작가 이세현(李世賢·51).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러브콜을 보내고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가 그를 만나러 영국까지 날아갔다. 붉은색을 화두로 삼은 뒤의 이야기다.
그는 파주 출판단지에 자리한 로우 갤러리(Raw Gallery)에서 보자 했다.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작업실 한쪽에 마련한 비영리 문화공간.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냥 놀이터다. 오후의 햇살을 잔뜩 빨아들이고 있는 ‘RAW’라는 글자가 문패처럼 달려 있었으므로 헤맬 일은 없었다. 저 ‘날것(raw)’의 의미는 그의 ‘붉은색(red)’과 또 어떤 방식으로 한바탕 내통하는 걸까. 느닷없는 상상을 하며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산수’와 맞닥트렸을 때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지 꼼짝없이 포위당한 느낌이었다. 매혹적이었지만 속수무책의 버거움도 몰려왔다. 그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잠시라도 놓여나기를 바라는 사이 이세현 작가가 나타났다. 그를 따라 작업실로 들어갔다. 화가들이 붓질하는 공간이 대개 그러하듯 캔버스와 수백 장의 밑그림, 물감, 붓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가 데려온 자연이 ‘붉은 산수’로 다시 태어나는 방이었다.
‘비트윈 레드(Between Red)’라는 제목으로 ‘붉은 산수’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영국 유학 시절이다. 2004년, 서른아홉에 유학을 떠났다. 꽤 늦은 나이였다. 무엇이 그를 충동질했을까.
“20대에는 학원 강사로 지냈고, 30대에는 계원예술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작업도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회화, 설치미술, 조각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실험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작품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무명작가였죠.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건 그림인데, 그래서 하기 싫은 일도 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가혹하게 물었습니다. 예술가 흉내나 내면서 적당히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결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타성에 젖은 나날이었다고 표현했지만 그는 자신과 끊임없이 불화한 듯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청산하듯 전세금 뺀 돈 6000만 원을 쥐고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친 듯 그림만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
영국에 도착해 런던 첼시디자인아트컬리지에 입학했다.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했을 유학생활. 하지만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영국 학생들 앞에서 내 작품을 슬라이드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눌한 영어로 들뢰즈의 철학을 들먹이고 라캉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내 모습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부끄러웠어요. 반대로 생각해봐요. 서양 학생이 동양 학생들 앞에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면 제대로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릴 하는 건지 우습지 않겠어요? 순간 식은땀이 났고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겠더라고요. 그날을 계기로 제 그림들을 다시 들여다봤어요. 서양의 저 거대하고 찬란한 현대미술은 그동안 내 것이 아니었구나, 뼈저리게 느꼈죠.”
낯선 땅에서 사고방식이 다른 서양인들을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들의 아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쭙잖게 흉내나 내지 말고 내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이후 작업 방식도 바뀌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그때만큼 고민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매일 묻고 또 물었죠. 결국 동서양의 차이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문화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내 뿌리가 되어준 것들을 새로운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작업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우리의 전통음식, 제사상, 돼지머리 등을 소재로 삼아 변화를 모색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으로 바라본 비무장 지대의 풍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웠지만 온통 붉어 두려움과 공포감마저 들게 했던 우리의 산하. 야간 투시경 속 산하는 그렇게 ‘비트윈 레드’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붉은 산수’를 본 사람들은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런던에서 졸업을 앞두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대던 날. 하루는 스위스에서 온 여자가 우연히 그가 그리고 있던 붉은 산수를 보고 마음에 든다며 작품이 완성되면 자기가 꼭 구입하고 싶다 했다. ‘붉은 산수’ 첫 번째 작품을 손에 넣은 사람은 버거 컬렉션 대표 모니카 버거였다.
그 뒤 그의 이름은 유럽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졸업전시회 때 내놓은 작품도 평론가와 수집가들에게 모두 팔려나갔고 여기저기서 전시 제의도 들어왔다. 이후 미국 페이스 갤러리, 프랑스 페로탱 갤러리 등에서 손을 내밀었고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유명 기업들도 그의 작품을 사갔다.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는 런던으로 직접 찾아와 그림을 사갔다. 외국에서 인기가 더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붉은색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이데올로기적 트라우마도 있고요. 또 집에 걸어두고 감상하기 편한 그림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외국 사람들은 취향이 다양해요. 작품에서 드러나는 철학과 시대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객도 많아요. 울리 지그가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 그림은 분단과 같은 한국 문제를 다루고 있어 참 좋다, 메시지가 분명하다, 묵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름답다, 물론 다른 훌륭한 한국 작가들도 많지만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당신 작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이다’라고요. 그의 말에서 큰 답을 얻었습니다.”
어머니, 다비화실, 12색 모나미물감
전통 산수화의 다시점과 서양화의 묘사 방식을 통해 그가 재해석해낸 자연의 풍경은 겸재 정선과 같은 진경산수화 대가들의 정신을 더듬으며 다양한 변주의 과정을 거친 듯 보인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체험과 만나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세현 작가에게 자연은 삼라만상이다. 인간사, 세계사와 분리될 수 없는 풍경이다.
자연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군 복무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짧은 생이었다.
“어머니를 화장하는 동안 벌판에 앉아 있는데 들꽃 향기가 났어요. 그만 슬퍼하라고 어머니가 주시는 마지막 선물 같았어요. 순간, 지나온 시간들이 아득해지면서 자연이 다르게 보였어요. 아름다운 풍경 뒤로 삶과 죽음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더군요. 어머니의 유해는 원하신 대로 처녀 적 살았던 통영의 작은 마을 해안에 뿌려드렸어요. 그런데 유학을 떠나기 전 그곳을 다시 찾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제2거제대교가 생기면서 마을이 통째로 없어졌더라고요. 어머니를 한 번 더 잃은 것처럼 슬펐습니다.”
온 나라가 개발의 신열에 들떠 있던 시대였다. 통영에도 관광지 개발 바람이 불면서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은 끊겨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이 몽땅 추방당한 듯했다.
거제도에서 태어난 이세현 작가는 부모를 따라 부산, 통영, 울산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아버지의 나전칠기 사업이 망해 도시빈민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허약한 몸이었지만 닥치는 대로 일했다. 결국 건강이 더 나빠진 어머니는 통영 이모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됐고 어린 그는 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자신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문제집을 사서 공부했어요. 대학을 가야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나봐요. 미대를 가고 싶어 고등학교는 전통공예학교로 들어갔어요. 회화반이 있었거든요. 학교에 가보니 미술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태반이었어요. 나는 그런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때까지 12색 모나미물감이 최고인 줄 알았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가져가 자랑스럽게 펼쳐놓았는데 다른 애들은 전문가용 물감을 내놓더라고요. 기가 팍 죽었죠.(웃음)”
그래도 그림 그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고1 때부터 운 좋게 미술반 청소를 담당하게 되어 선배들 그림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면서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려댄 그림은 100장이 되고 수백 장이 되었다. 그만큼 실력도 늘었다.
고3이 되면서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했다. 집안 형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무턱대고 학력고사를 봤다. 성적이 괜찮게 나왔지만 철없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해 몰래 홍대 미대에 입학원서를 내고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다른 학생들은 학원에서 특강을 받는 등 분주해 보였다. 학원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그들과 경쟁할 생각을 하니 초조했다. 가난한 아버지가 밉기도 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문득 후배가 다니던 다비화실이 생각났다.
“어머니 몰래 쌀을 훔쳐 학원으로 들고 갔어요. 돈이 없으니 쌀이라도 받고 그림을 좀 봐달라고 했더니 학원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어 하더라고요. 기특하면서도 맹랑한 놈이라 생각했겠죠.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그래, 한번 해보자!’ 하더군요. 옛날이니까 그게 가능했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죠. 당장 그날부터 차가운 평상에 스티로폼을 깔고 함께 먹고 자면서 실기시험 준비를 했어요.”
결과는 합격. 게다가 장학생으로 붙었다고 하니 집에서도 서울 유학(?)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계속 이어질 캔버스 속 이야기
이스라엘의 유명 아트딜러인 세르주 티로시는 이세현 작가의 작품에 대해 “매우 독특하면서도 세계 미술시장에서 주목받을 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국내외에서 핫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 스위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중국 등지의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 등 빡빡한 일정을 보냈고, 2015년에는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협업을 요청해와 스카프, 머플러, 블랭킷 등을 제작해 선보이기도 했다. 1월에는 홍콩문화원 개관전 기획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란 듯 보인다. 지금까지 그린 대부분의 ‘붉은 산수’를 해외 컬렉터들이 구입해갔다니 놀랍다. 캔버스 속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나이 듦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술가는 뭔가 다르게 대답할 줄 알았다.
“나이 드는 게 좋아요. 이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어요. 오해받는 것도 불편하지 않고요. 아, 또 하나 있네요. 포기할 줄 아는 것.”
얼마나 명료한가. 아무런 기교도 필요치 않은 저 투명한 각성은.
지난해 12월 26일 '서리풀 문학회' 문우 최선옥 님의 수필집 출판기념회와 송년회가 있었다. 남부터미널역 팜스 앤 팜스에서였다.
서리풀 문학회 지도 선생님은 상지대 학장님으로 퇴직하신 신길우 교수님이다. 문학박사이자 국어학자이신 신 교수님은 수필가, 시인이다. 평생을 국어 연구와 문학 사랑에 헌신하신 신 교수님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아무도 못 말린다. 그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자제분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셨단다.
"퇴직금 중 1억 원은 문학에 쾌척하겠다. 아무도 말리지 마라."
이 말씀을 들은 필자는 감동의 도가니 속에 빠져버렸다. 이후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문학의 강'이라는 계간지를 발간하고 있다. 교대역 부근 오피스텔에 문학 동지들의 아지트도 만들어놓으셨다. 신 교수님도 필자 못지않게 책 욕심이 많으셔서 아담한 오피스텔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신 교수님은 길이도 짧고 문장도 간결한 걸 추구하신다. 만연체나 화려체를 멀리 하고 간결하고 함축된 문장을 쓰도록 지도하신다.
필자는 퇴직하던 해인 2012년 가을부터 서초문화원 수필 창작반에 발을 담갔다. 햇수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10여 명의 문우들이 수필가로 등단했다. 처음에는 어설프고 엉성한 문장들이 시간이 갈수록 짜임새 있고 의미 있는 문장으로 바뀌었다.
문우들이 하나하나 수필가로 등단할 때 필자는 뭘 했나? 문제는 욕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수필에 매달릴 때 필자는 패션디자인 공부에 왈츠 배우기, 발레 수강, 패션모델, 서초문화 해설사, 시 낭송, 영어 회화에 때때로 오페라 감상, 발레 감상, KBS ‘명견만리’ 서포터스 활동까지 하고 싶은 걸 몽땅 다 하려고 취미활동 영역을 마음껏 펼쳐놓았다. 마치 내일 죽을 사람처럼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2017년에는 세 곳에서 기자활동까지 했다.
최 수필가는 막내로 태어나 장남하고 결혼했다. 시누이들과 시동생의 어머니 노릇에 홀시아버지를 23년간이나 모셨다. 상황이 이쯤 되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 해도 힘들어서 도망갔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녀의 낭군님은 그녀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밝아지고 긍정적으로 변했다면서 엄청 좋아한단다. 너무 좋아서 그녀의 수필집 출판 비용도 기꺼이 내줬고 서리풀 문학회 송년회 비용도 마음껏 쓰라며 카드를 통채로 맡겼다고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종이에 수다를 떠는 것이다. 사람과 만나 수다를 떨 때는 공간적, 시간적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글은 그런 굴레에서 자유롭기에 좋다. 그녀의 글에는 그녀의 따스한 마음이 배어 있고 하루하루 잘 살아내는 삶의 향기가 묻어 있다. 수필집 제목을 '날아올 행복'이라고 붙였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녀 곁에는 행복이 이미 껌딱지처럼 요지부동 붙어 있다. “나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하듯 말이다.
모델!
시니어들에게 차별화된 자부심을 심어주는 명칭이 아닐까?
'나 이렇게 멋지다!'
패션쇼를 할 때 그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으로 빛난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열정으로 가득하다.
모델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대다수 여성들의 로망이다. 요즘은 남성들도 많은 관심이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8년에는 65세 이상 노령인구가 14%를 넘는 고령사회, 2026년에는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은퇴 후 재정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를 강력하게 끌어들일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은 없을까? 깊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합리적인 비용으로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노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2012년 퇴직하면서 무엇을 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놀까 고민했다. 필자가 하고 싶은 것은 패션모델과 패션디자이너, 왈츠와 탱고 배우기, 오페라와 발레 감상이었다.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곳은 서울이었다. 필자가 사는 평택은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있다. 그렇다면 서울로 가자! 그래서 집을 서울로 옮겼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시니어 대상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운용되고 있는 곳은 강남시니어플라자와 서초문화원이었다. 서초문화원에서는 영어회화, 수필 쓰기, 시 낭송하기, 문화해설사, 왈츠 과목을 수강했다. 모델 워킹 수업은 서초문화원에 없어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 받기로 했다.
강남시니어플라자 프로그램 중에서 상한가를 친 것은 단연 '모델 워킹'이다. 이 과목은 늘 대기자들로 넘친다. 나는 초창기부터 수강해 벌써 3년이 지났다. 모델 워킹은 경쾌한 음악에 맞춰서 바른 자세로 1시간 동안 워킹을 한다. 몸도 좋아지고 마음이 즐거워져 힐링도 된다. 이른바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지는 훌륭한 프로그램인 것이다.
2018년부터는 강남구민만 강남시니어플라자 프로그램을 수강할 수 있게 됐다. 소비자의 강력한 니즈가 있는 곳에서 수익이 창출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 탄생하는 것이다. 수요가 있는데 공급자가 없다. 누가 과연 이 블루오션을 선점할 것인가? 결실은 재빨리 트렌드를 읽어내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상암에서 영등포 비콤 벗들과 송년 행사가 있던 날 언주역에 있는 삼정호텔로 갔다. 코리아시니어 모델 학원 김소영 원장님 초대로 패션쇼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모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기 때문에 세련됨이나 기품이 떨어지는 옷들이 간혹 눈에 띄어 아쉬웠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모두 통과! 사진에 담지 않았다. 4기 수료식과 패션쇼를 마친 후에는 '시니어 롤 모델'에 관련한 짧은 강의도 있었다.
뷔페로 마련된 식사시간에는 현역으로 활동하는 성악가들의 공연이 있었다. 먼저 바리톤의 우렁찬 목소리로 비제의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를 불렀다. 다음은 소프라노 차례.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 중에 나오는 너무도 아름다운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곱게 흘러나왔다. 이어진 순서인 테너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렀다. 이어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화한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중 아름다운 이중창 '투나잇 투나잇'을 테너와 소프라노 둘이서 불렀다.
"이번에 부를 곡은 뭘까요?"
테너가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축배의 노래요."
필자가 대답했다.
그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아셨지요?"
당연한 것 아닌가? 즐거운 식사 자리에서 대미를 장식해야 하는 노래로 그 곡을 뛰어넘는 곡은 없으니까 말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는 젊음의 환희가 가득한 아름답고 카리스마 넘치는 노래다.
바로 이거다!
품격 높은 현역 성악가들을 초빙한 것은 감각 있는 원장님의 '신의 한 수'였다. 참석자들의 즐거운 저녁 만찬 시간이 단번에 럭셔리한 분위기가 되었다. 레퍼토리가 너무도 잘 알려진 곡들이라서 신선함은 떨어졌지만 익숙함과 편안함이 있었다. 클래식 음악 마니아인 필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행사였다. 새삼 김소영 원장님의 기획력에 깊은 신뢰가 간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머지않아 멋지고 아름다운 그녀의 꿈이 큰 결실을 맺을 것이다.
은퇴하면 고생은 끝나고 안락한 행복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인생 100세 시대를 어떻게 하면 더 보람 있게 살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섰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 한구석에 두고 실현하지 못한 글쓰기에 대한 꿈이 되살아났다. ‘문학소년의 꿈’이었다.
은퇴하자마자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이 관악 기자학교였다. 기사작성의 실전교육을 마친 후 몇 군데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하고 기자가 되었다. 밤새워 글을 쓰면서 블로그 활동도 했다. 세상과 대화하는 또 다른 길이 열렸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수년 동안 몇몇 신문과 블로그에 썼던 글을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도 오프라인 기사가 몇 차례 실렸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아내와 아들이 ‘애독자’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가족은 평소 상대방의 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시인으로 활동하는 아내의 말처럼 실력도 문제이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다. 문학도 아들에게도 독후감을 요구했으나 대답하지 않고 눈길을 피했다. 척하면 삼천리. 배워야 한다.
관악문화원 문학반을 찾았다. ‘맛보기 강의 들어보고 수강 신청하라’는 안내가 재미있었다. 아담한 강의실에서 몇십 명이 모여 오순도순 토론도 하며 문학수업이 진행되었다. 10년 넘도록 계속 이어져온 문학창작교실이란다. 매주 화요일 오후 저명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설과 강의가 진행되었다. 여기에 수강생의 창작 시와 수필 낭독, 토론이 끝나면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겼다. ‘바로 여기야!’ 무릎을 탁 쳤다. 이후 글쓰기에 코를 박았다.
박수진 지도교수는 저명 시인이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주옥같은 시와 동요가 여러 편 실렸다. 강의 전반에는 지도교수가 품격 높은 작품들에 대한 해설을 진행한다. 지도교수는 왕성한 창작활동과 재능기부를 하면서 매주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 열정적인 강의를 했다. 주입식이 아닌 토론이 곁들인 강의였다. 매번 예정시간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누구 하나 지루해하지 않았다.
강의 때마다 수강생들은 시나 수필을 써와서 강의에 참가한다. 강의 후반부에서는 습작품 첨삭지도가 토론식으로 이루어진다. 작성자가 먼저 낭독하고 참가자들이 자유토론으로 의견을 말한다. 수강생들이 진땀 흘리는 시간이다. 남의 작품을 눈을 지그시 감고 감상하다가 자기 작품을 발표할 때는 어린아이가 된다.
한 줌의 작품은 이리 찢기고 저리 벗겨진다. 앞과 뒤를 바꾸고 넘어진 가지를 자르고 나면 모양새가 갖춰진 한 편의 작품이 재탄생한다. 작품이 새로 태어나는 눈부신 과정에 참여한 수강생들은 감동하며 박수를 친다. 살아 있는 문학 공부다.
단기가 아니고 연중 계속 이어지는 수업이 이곳의 특징이다. 마치 학교에 다니는 기분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 문우들을 사귀었다. 화려한 전직의 은퇴자와 문학에 관심 있는 가정주부가 많다. 이분들은 오랜 기간 문학반에서 수강하면서 현재 시인,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판도 몇 번씩 한 프로들의 ‘심화 과정’이다. 수업이 끝나면 가끔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환담을 나눈다. 걸쭉한 인생 이야기는 훌륭한 글쓰기 소재가 된다.
관악문화원 문학아카데미 회원의 동인지 출판 준비가 한창이다. 모두가 두툼한 동인지에 작품과 이름을 올릴 것이다. 연말에는 합동으로 시를 낭송하고 수필을 발표한다. 젊은 시절 줄줄이 외었던 시 구절 하나 온전히 기억나지 않지만 글을 쓰면서 그 기억을 되살린다.
우리 에 ‘기사’를 올리고 블로그에는 ‘작품’을 올린다. 신문기사가 감정을 섞지 않는 주지적인 글이라면, 문학은 주정적이다. 두 가지를 동시에 배우면서 쓰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두 분야의 글쓰기는 동전의 양면 같다. 보는 관점만 다를 뿐이다. 양쪽을 어우를 수 있어 즐겁다.
앞만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살아온 삶 ‘70년 체험’ 이야기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손주를 돌보면서 옛 조상들의 삶을 생각한다. 이제 ‘30년‘ 삶에 대해 고민한다.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관악문화원 문학아카데미 동호회 안내
위치 관악문화원 관악산 입구 주차장 바로 위
전화번호 02-885-5975, 878-1931
강의와 토론 매주 화요일 오후 3시 반부터 2시간
개설 과정 문학반 외 서예반, 무용반 등 40여 개
수강료 3개월분 6만원, 연중 강의 계속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내 인생을 위하여!”로 바꾸어도 되지 싶다. 입에 떠올리기만 해도 희망과 기대감이 부풀어지는 말이다. 전 반생에서 우리는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여서 더 그렇다.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는 기쁨과 역할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것과 같다.
사람이 사는 동네는 생활 양상이 엇비슷하다. 여행 중에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1983년에 3개월 정도 스위스 취리히에 머물면서 유럽을 여행했다. 다니던 직장에서 해외 연수를 갔다. 해외여행이 자유화하지 않은 시절이어서 큰 행운이었다. 연수 기간 중 휴일을 활용해 유럽의 많은 나라를 다녔다. 기차나 비행기로 어느 도시나 관광지에 도착하면 시내 여행은 주로 도보로 했다. 현지인들의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생활 모습이 큰 차이가 없음을 느꼈다.
서양인이 생각하는 노후 삶의 방향도 그런 예의 하나지 싶다. 그들이 생각하는 노후 삶의 방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노년은 그 동안 모은 돈을 즐겨 쓰는 시간이다.”라는 말이 그중에 하나다. 돈을 축적하거나 신규 투자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즐겁게 쓰느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즐겁게 쓴다 함은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는 일에 쓰는 것을 말함이요, 자기를 위해 씀을 이른다. 노후 자금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우리와 달리 은퇴 자금이 준비되었음이 그런 생활을 가능하게 할지 모른다. 그들 역시 다 그렇지 않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사람이 사는 동네는 엇비슷하기 때문에 같은 생각을 해본다.
필자의 한 친구가 아내와 함께 2015년 5월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 1년 동안 독일 어학연수를 다녀와 주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국내에 있는 독일문화원에서도 독일어를 배울 수 있음에도 현지로 굳이 떠났다. 어학연수 당사자는 친구였지만, 아내도 여행 겸 함께 떠났다. 그것도 잘되던 사업까지 접고서 말이다. 과연 무엇이 환갑이 지난 그를 독일 현지로 어학연수를 떠나게 하였을까?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자신의 블로그 “황 첨지의 독일 유랑기”에 올린 글을 보면 이유가 명확해진다. “내게 있어서 정말 후회 없는 시간이었고 순수하게 나를 위해서 시간과 내가 벌었던 돈을 쓴 보람 있는 과정이었다.”
수명이 길어져 인생이 긴 것 같으나 지나온 세월을 되돌려 생각해 보면 그리 길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반평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기 때문이고 엊그제가 정월 초하루 같았는데 벌써 가을이 왔다. 필자도 예순여덟이니 70세를 바라보고 있는 나이다. 순식간에 60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120세를 산다고 해도 지나온 세월의 흐름을 생각하면 그리 길지 않다. 근래에 “YOLO”라는 신조어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You live only once.”의 머리글자를 딴 용어로 “한 번뿐인 인생, 즐겁게 살자.”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다. 주어진 시간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다. 그 동안 벌었던 돈을 다 쓰고 가야 할 시간이다. 자신을 위해서,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의미 있게 쓰고 가면 어떨까? 더불어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혜도 함께 다 쓰고 간다면 금상첨화일 터이다.
‘글을 잘 쓰는 패션 디자이너’
필자의 후반생 꿈이다.
2012년 퇴직한 후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봤다. 패션 디자인, 패션 모델, 발레와 왈츠 그리고 탱고 배우기, 영어회화, 서유럽 여행하기, 좋은 수필 쓰기, 오페라와 발레 감상하기, 인문학 공부하기 등 많기도 했다. 사람이 살아갈 때 무엇이 중요할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필자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선생님이 되어 30여 년을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일했다. 퇴직을 했어도 공무원 연금이 나와 최소한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우리나라 노인들의 빈곤은 정말 심각하단다. 절반이 빈곤층이라고 한다. 그래도 필자는 평생 원하던 일을 하고 퇴직 후에는 최소한의 생활까지 보장이 되니 이처럼 다행스런 일이 없다. 지금부터는 필자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 공부는 주로 집에서 한국방송 통신대 강의를 통해 충족한다. 요일별로 국문학과 철학, 역사와 서유럽 문화기행,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강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창 자랄 때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의지만 있다면 TV와 인터넷 그리고 서울 각 구의 문화원에서 무료로 혹은 가성비 높은 비용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TV를 바보상자라면서 멀리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필자는 제자들에게 ‘정보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인터넷에서 전복을 구하느냐 미역을 건져 올리느냐는 매체를 이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요즘엔 방송대 강의도 그렇고 교양 프로그램과 양질의 다큐멘터리 등 좋은 콘텐츠가 넘쳐난다. 방송대 강의가 너무 재밌어서 외출을 못할 때도 있을 정도다.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의욕에는 세월도 못 당한다. 필자는 퇴직 후 제일 먼저 강남 라사라 학원에 등록했다. 패션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 선생님 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 패션디자인이었다. 이곳에서 패션디자인 과정 초급 3개월, 중급 3개월을 마치고 서울시 창업스쿨에서 2개월간의 패션디자인 과정을 수료했다. 패션에 대한 열정은 아마 평생 가지고 가게 될 것 같다. 발레는 어려서부터 필자의 로망이었기에 패션디자인 과정을 마친 후 바로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발레를 할 때마다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는지 모른다. 발레가 어린 시절의 로망을 실현시켜주는 취미 정도라면 왈츠와 탱고는 능숙하게 아주 멋들어지게 추고 싶다. 운동할 때는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왈츠와 탱고를 출 때는 어느새 끝나는 시간이 되곤 한다. 건강을 위해, 바른 자세를 위해, 힐링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춤이라고 생각한다. 스웨덴에서는 팔십이 넘은 노인들도 발레를 한다. 노인분들의 표정이 참 행복해 보인다.
서초문화원에서는 수필을 잘 쓰기 위한 수업을 받고 있으며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기자단으로 활동하며 쓴 글이 96편이 될 정도로 글쓰기가 생활화되어 있다. 틈틈이 압구정역에 있는 무지크 바움에 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몇 해 전에는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워킹반에도 등록했다. 주 1회 모델워킹을 연습하고 있다. 2년 동안 패션쇼도 다섯 번 했다. 개성 강한 동료들의 기상천외한 옷차림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옷차림은 전략이고, 옷 입는 것도 일종의 예술 행위’다. 기왕이면 예쁘게 입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훌륭한 액세서리는 젊음이다. 젊은이들을 값싼 옷을 입어도 예쁘지만 나이 들면 옷차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물기 빠진 피부에 옷차림까지 추레하면 볼품이 없기 때문이다.
녹화가 있는 토요일은 될 수 있으면 여의도로 간다. 서포터즈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5포세대, 혼밥, 실업문제, 4차 산업혁명 등 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다루며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메인 브로드캐스터가 강연한 후 미래참여단 서포터즈들이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장에서 녹화에 참여하면 더 생생한 공부가 된다. 20대 젊은이에서 70대 시니어까지 다양한 세대와의 만남도 즐거움 중 하나다. 주 2회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주관하는 서울 둘레길 걷기에 참여한다. 둘레길 걷기는 주 3회 30분 이상 운동을 해야 하는 시니어들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배움이 이어지면 기회가 이어진다’고들 한다. 지금 같아서는 지구촌에서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배움에 대한 열정이 식을 것 같지 않다.
이래도 되는 거야?
삶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거냐고요!
어제는 너무 좋아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올해 4월부터 활동하게 된 온․오프라인 잡지 에 필자 글이 실렸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온라인에만 꾸준히 실렸는데 잡지사에서 정해준 주제 ‘으이구! 주책이야!’에 맞춰 쓴 글 ‘교재를 망가트려 죄송합니다’가 7월호에 실린 것이다. 제시한 주제에 맞춰 처음 써낸 글이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한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필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다. 에서 주관한 시니어 헬스 콘서트에 필자와 함께 온 사람들은 대부분 필자 스타일을 좋아하는 여성과 남성들이다. 모두들 성격이 활발하고 적극적인 분들이다. 하는 일도 인터넷 기자, 사회복지사, 공예가, 모델, 시인, 수필가, 교수 등 다양하다. 서초문화원 문화기행 프로그램에서 만난 분도 있고 동대문 제일평화시장 구두매장에서 필자 스타일에 필이 꽂혀 인연을 맺게 된 분도 있다.
평택여고에 재직할 때 필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정성껏 대하라. 그 사람이 나와 어떤 인연으로 맺어질지 모른다.” 서둔야학 단톡방, 서민동 단톡방, 서울시 낭송회 시음 단톡방, 왈츠 단톡방, 명견만리 서포터즈 단톡방, 꿈방송 단톡방, 뉴시니어 리더스포럼21 단톡방, 강남시니어프라자 해피미디어단 단톡방, 모델워킹 단톡방, 서리풀 문학회 단톡방, 오페라 동호회 모임,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친구들 등 단체회원 단톡방만 해도 만만치 않은 인적 네트워크다. 살아보니 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다. 2년 전 메르스 사태로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에서 녹화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느라 고심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필자가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 모델워킹하는 동료들과 해피미디어단 회원들을 왕창 모시고 갔다. 담당 PD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필자는 바람잡이 역할을 즐긴다.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행사를 할 때는 담당 PD를 초대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필자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각자의 재능을 활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시니어 헬스 콘서트에 참석한 분들도 너무 재밌었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필자에게 말했다. 다음 행사에도 초대해주기를 바란다면서. 아자아자! 이런 것이 바로 윈윈이다.
날개를 달아준 에 감사해하며 오늘도 필자는 저 푸른 하늘을 향해서 힘차게 날갯짓을 한다. 지금 필자의 삶은 글자 그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다. 이런 삶이 수어지교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기쁨!
따봉, 원더풀!
어떠세요?
어여쁜 여성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죠?
바로 그거예요.
"아름다운 헤어스타일은 샤넬의 재킷보다 디올의 구두보다 당신을 빛나게 합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헤어스타일이 환상적으로 아름답죠? 옷 입는 것도 일종의 예술행위이거든요.
이왕에 입는 거 예쁘게.
여성이 아름다우면 남성이 행복하고 남성이 행복해지면 세상이 평화로워집니다.
"나는 애란씨를 첫눈에 보고 어떻게 저런 미인이 내 주변에 계시나 황홀했는데 장미의 가시에 찔릴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서초문화원에서 같이 수필공부를 하고 있는 남자 회원의 카톡문자다. 필자가 황홀할 정도의 미인? 천만의 말씀이다. 필자는 결코 선천적 미인은 아니다(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들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의 절세미인으로 태어나고 싶다). 자신에게 잘 맞게 연출을 할 뿐이다.
부모에게서 듣는 칭찬은 자녀들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애란이는 코가 잘생겼어.” 10대 중반의 필자를 바라보며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세 살 위인 언니는 필자보다 예쁘고 머리도 좋고 키도 크고 성격도 좋았다. 여러모로 우월한 언니를 유독 사랑하던 아버지였다. 열여섯 살 무렵 어느 날 우리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필자 뒤통수에 대고 동네 총각이 휘파람을 불었다. 영 껄렁껄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감히 나를 넘봐? 필자는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마침 마당에 계신 아버지께 "아버지, 저 사람이 글쎄 나한테 휘파람을 부는 거예요. 뭐 저딴 사람이 다 있어! 아유! 자존심 상해!" 하며 신경질을 냈다. 그러자 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대전시장이 대전 제일의 미인이라고 한 네 작은고모도 너처럼 그러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인물이 시원찮은 둘째 딸이 잘난 척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었던 것이다. 편을 들어주실 줄 알았는데… 아버지 말이 서운했던 필자는 속상해하며 속으로 말했다. ‘아버지, 예쁘다고 다는 아니에요.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거예요."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탤런트 뺨치는 미남미녀였다. 아버지는 외탁을 한 필자를 늘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코만'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필자는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했다. 오늘의 필자는 그 결과다. 옷을 입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예쁘고 멋지게 보일까 궁리하며 입었다. 그러므로 수필반 남자 회원은 말하자면 필자 옷발에 넘어간 것이다. 필자는 옷을 입을 때 잘 어울리는 색과 디자인을 고민하며 입는다. 또 체형의 단점을 감추고 장점은 더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체중과 체지방량부터 체크한다. 거울에 전신을 비춰보고 뱃살도 확인한다. 사이즈가 66이 넘지 않도록 긴장한다. 필자가 좋아하는 백화점의 영 캐릭터 브랜드 옷들이 66까지만 나오기 때문이다. 학교에 재직할 때는 환상의 55사이즈였다. 그러다가 체중이 57kg까지 늘어나면서 옷맵시가 나지 않았을 때는 외출하기도 싫었고 기분까지 우울해졌다. 이러면 안 돼지. 그때부터 다이어트가 일상이 되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끼, 채식과 현미밥 위주로 먹었다. 설거지할 때는 까치발로 서서 하고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한다. 일주일에 세 번은 왈츠, 모델워킹, 탁구 등 운동도 한다.
"얘들아 너희들 좋은 남자 만나고 싶지? 그러면 내가 좋은 여자가 돼야 해. 이제 거울은 그만 보고 독서로 내면을 채워야 해. 몇 번 만나다 보면 얄팍한 지식이 드러나거든. 그럼 그 남자가 나를 계속 만나고 싶어 할까?"
학교에서 열여덟 살 제자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공짜인 삶은 없다. 지속적으로 탐구해 내면을 꽉 채우고 겉모습도 멋진 여성이 되고자 필자는 오늘도 노력한다. 사람은 몇 살이 되든 자신의 마음밭과 겉모습 가꾸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몸 여기저기에 공작 털을 듬성듬성 꽂은 까마귀는 아닐까?’ 한껏 치장을 하고 나간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공작새로 위장한 까마귀면 어떠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