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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야에 은둔했으나 창작욕의 화톳불은 활활!
- 예술이 인간을 구원하고 영혼을 인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좀 과한 예찬일지도.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굶주려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예술은 현실의 벽을 으라차차 걷어차는 행위라는 점에서 위력적이다. 종교, 사상, 철학을 부수거나 뛰어넘는 곳에 예술이 있지 않던가. 그런데, 창작이란 지병에 시달리는 것처럼 끔찍한 싸움이다. 거역할 수 없는 유령에게 덜미를 잡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진짜 예술가’의 경우에 말이다. 도예가 신상호(72). 웅장한 창의적 행보로 ‘거장’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다. 그는 어떻게 사나. 예술과 맞붙어 무엇을 얻나. 도예란 흙과 불을 다뤄 도자(陶磁)를 만드는 장르다. 그러나 신상호의 작업엔 이미 형식이 없으며, 경계가 없다. 일찍이 전통 도예의 권위자로 부상했던 그는 무적함대, 또는 해적선과도 같은 거침없는 도발과 활보로 혁신적 현대 도예를 구현했다. 그의 작업은 진즉에 조각으로, 회화로, 심지어 건축 영역으로까지 대차게 확장됐다. 실험적 현대 도예의 전위이자 전사다. 신상호의 작업실 ‘부곡도방’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야산 자락에 있다. 45년째 이곳에 산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직을 박차고 나온 2008년 이후엔 일체의 외부 일을 작파, 붙박이 장롱처럼 이곳에만 틀어박혀 창작에 진력해왔다. 부곡도방은 살림채, 작업실, 전시장, 휴게실 등속으로 이루어졌다. 놀랍게도 건물과 공간과 사물의 거의 모든 게 작품이다. 학교 운동장처럼 널찍한 마당에 늘비한 대형 조각과 소조들. 건물의 내부는 물론 외벽 도처에 조직적으로 부착한 세라믹 작품들. 창작에 혼을 빼앗긴 한 남자의 일상적 관습이 어떤 식의 지독한 양상인가를 한눈에 알게 하는 풍경이다. 가슴 깊이 제 할일을 품은 자는 제 할일 외엔 관심이 없는 법. 그는 무위(無爲)로 구하는 정신세계에는 더더구나 관심이 없으니 앉으나 서나 작업에 분망하다. 산야에 은둔했으나 심중엔 창작욕의 화톳불이 활활! 45년 전,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어릴 적에 경험한 어머니의 된장찌개 맛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에겐 자연을 찾는 본능이 있지 않던가. 그게 간절하면 회귀할 수밖에 없다. 흙과 불을 다루는 직업적 특성상 산야에 사는 게 적합하기도 하고.” 과거 청년기엔 경기도 이천에 작업장을 두었다. 당시의 작업 내용은 어땠나? “현대 도예와 전통 도예 작업을 병행했다. 한국인으로서 전통에도 애정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뭘 하든 도예로 먹고살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 이천에선 판매 위주의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자 회의가 몰려들더라고.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자! 그런 생각으로 이천과 작별했다.” 국내외로 신상호는 도예의 첨단을 활주하는 작가로 알려졌다. 많은 작가가 시대의 첨단 트렌드에 천착한다. 그들과 당신은 어떻게 다른가? “미술은 새로워야 예술이다. 나는 끊임없이 나만의 새로운 아이디어로 나만의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데에 주력했다. 단순히 신사조를 뒤따라가는 식의 첨단성과는 다르다. 남이 이미 시도한 걸 비슷하게 흉내 내는 방식, 난 그런 걸 극단적으로 두려워한다.” 예술에 있어서 새로움이란 날마다 눈뜨면 자동으로 다시 맞이하는 새아침과 다르다. 시대의 증상을 읽는 안목과, 고도로 발달한 직관과 센스가 합세하지 않고서는 구하기 힘든 질료다. 신상호는 실험정신이라는 갈고리로, 범속한 세상 징후들의 안과 밖에 감춰진 새로운 테마와 소재를 찍어내는 것 같다. 실험정신이라는 에너지의 배양을 위해 그는 많은 여행을 했다. 여행 견문이 안목과 관점을 갱신해주기 때문에. 충실한 독서생활 역시 그의 수칙이다. 지적 단련이 선행되지 않으면 창의도 돋지 않아서겠지. 예술이 사기라는 말은 진리다 나는 신상호의 작품에 쓰러질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 토템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아 그가 제작한 동물 두상(頭像) 시리즈물에서였다. 이는 기묘한 추상 도조로 형상의 압도적인 이색, 그리고 관람자에게 즉각 원초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감염력으로 탁월했다. 전대미문의 도예로 평가된 이 작품들은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금도 장작 가마로 작품을 굽는가? “미술도 과학을 피해갈 수 없다. 특히 가마 작업이 중요한 도예엔 과학이 붙어야 한다. 장작 가마를 고집할 일이 아닌 거다. 난 나무 가마를 가스 가마로 전환한 최초의 작가였다. 비난이 쏟아지더군. 매국노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 반면, 국내에선 오히려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한다. 정말 그런가? “나는 아웃사이더다. 그게 나의 강점이지. 뭐 국내건 국외건, 평판엔 관심 없고. 나름의 정직한 작업을 계속해왔다는 걸 자족할 뿐이다. 게다가 작가로서 충분히 다양한 경험도 쌓았다. 미국과 영국의 대학에서 교환교수를 하면서는 세계의 흐름을 보고 듣고 배웠다.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야 할 필요성도 깨달았지. 그러나 이미 배운 지식과 경험에 안주하는 건 우습다. 다 놔야 하지 않겠나. 고정관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쥐었던 걸 거듭 놔야만 새로 채울 수 있다는 얘기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은 “예술은 사기”라 했다. 혹세무민이나 착취가 없는데, 예술이 어떻게 사기가 되지? “예술이 사기라는 말, 그거 진리다. 일테면 미술시장을 보라. 장삿속에 이골 난 화상들이 한마디로 사기를 치고 있지 않은가? 이건 세계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안목 없는 소비자들이 대부분이라 사기가 더 쉽지. 이렇게 예술작품이 사기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 풍토. 그걸 꼬집는 데에 백남준 선생의 뜻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뉴욕 소호의 길거리에서 난 자주 선생을 만났다. 그는 늘 말했다. ‘나, 사기치러 가!’ 하하핫. 여하튼, 선생은 한국에서 나온 유일한 세계적 작가였다.” 어떤 기자가 왜 뉴욕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범죄가 많아서 좋다”는 백남준의 답이 돌아왔다. “사회가 썩고 인생이 썩어야 예술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화통한 백남준은 때로 돈에 시달렸다. 지구 전체에 이름이 났지만 현실이 그랬다. 무소유가 좋다지만 그건 이미 가진 사람의 허세일 가능성이 크다. 세사에 둔하게 마련인 예술가에겐 흔히 궁핍이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백남준 선생이 값싼 고물 TV로 작업을 한 것도 주머니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폭넓고 깊이 있는 예술작업을 일관해 성공했다. 특유의 천재적인 쇼맨십과 타협적 기질 역시 그의 강점이었지. 돈 문제에서도 그런 강점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런데, 난 그게 안 된다.” 작품이 팔리지 않는가?” “안 팔려. 죽겠어.” 왜지? “비싸서.” 화상들이 드나들 것 아닌가? “내가 있어 보여서일까? 아예 접근하지 않는다. 약해 보이는 구석이 있어야 파고들 텐데 그렇질 않아서일 거다. 저놈은 빈틈이 없다! 그렇게 보는 거겠지. 물론 나는 강인하고 직정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내 인생은 허점투성이다.” 작가란 고난을 자양으로 해 성장한다. 불편과 불안을 절호의 찬스로 여기는 게 진정 자유로운 삶일 테고. “불편은 맛이 있다. 어떻게든 해결하게 되는 맛도 괜찮고. 그런데 왜 모두들 이악스럽게 돈 하나만 좇나? 돈에서만 행복이 나오던가? 나이 든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들 공부를 하지 않아서 생긴 폐단이라 본다. 거듭 자신을 씹어 고통스럽게 반추해야 한다. 정체되면 썩을 수밖에 없다. 어떤 화가가 그러더군. ‘내겐 돈 버는 게 예술이다’라고. 야, 별게 다 예술이구나.” 불편과 고독과 고난, 이 모든 고통을 예찬할 일은 아니지만, 고통을 일부러 추구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고통을 경유하지 않고는 좀체 길이 열리지 않는다. 진흙을 딛지 않고 피는 연꽃이 있으랴.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지만, 불편에 쫓긴 작가는 퍼뜩 빛나는 작품을 건져 올리기도 한다. 일상의 불편과 치열하게 맞서는 힘. 그게 신상호의 타고난 근성이자 예술혼의 토대일지도. 후회? 그런 건 하지 않는다 도예 창작이란 왜가리가 유유히 강을 건너는 일과 달라 최후의 기력 한 방울까지 쥐어짜야 가능한 행위다. 정신을 쏟아야 하며, 흙을 움켜쥔 손으로 고강도의 노동을 치러야 한다. 그러자면 강건한 체력이 필수. 의외로 많은 작가가, 체력에 기반을 둔 집요한 깡이 결과를 가른다고 말한다. 신상호 나이 어언 70대. 그러나 그에겐 체력 여부를 초월하는 갈증과 열망이라는 게 있다. “나이 먹어서도 해낼 수 있는 작업을 찾으면 된다. 작업이 나를 늘 들뜨게 하는 것이지. 작업 외에 다른 것엔 관심도 미련도 없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작업실로 들어가 오후 4시까지 일을 한다. 단순한 나날들이 이렇게 흘러간다. 요즘은 친구도 없다. 그게 난 좋다. 사람을 만나면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니까.” 예술가는 창조의 충동에 사는 사람이라는 점으로 다른 사람과 구분된다. 그들은 상식이나 모럴을 넘나든다. 자의식도 강해 누가 뭐라 하건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내린 명령에 따를 뿐이다. 그들은 권력에 꼬리치지는 않지만, 세상이 그에게 부여한 명예에 취해 스스로 권력이 되기도 한다. 조지 오웰이 말하길, 예술가의 열정은 순전한 이기심, 즉 명예욕에서 추동된다고 했다. 당신을 추동해온 동기는 무엇이라 보는지. “내게도 그런 게 왜 없겠는가. 평생 자신과의 싸움으로 작품을 해왔지만 강한 명예욕, 그걸 떨치긴 어려웠다. 허욕이고 허영이겠지. 그런 군더더기를 죽기 전엔 다 깎아내고 싶다. 내가 다 옳은 건 아니다.” 별안간 보고 싶어지곤 하는 얼굴이 있다면? “없다. 예전엔 다양한 인간관계가 있었지만 일부러 다 끊었거든. 그런 내게 작가들에게 흔한 무슨 일탈 같은 건 없었다. 염문을 뿌린 적도 없고, 아내와 불편한 관계에 빠진 일도 없다. 연애감정과는 다른 돈독한 정, 아내와의 사이엔 그게 있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알고 보면 당신은 참 품성이 선해! 아내가 그렇게 치켜세우면 나는 설렌다.” 이제 와 생각하자니 크게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후회? 그런 걸 왜 하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온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지 않겠는가. 참혹한 실패의 경험으로 오래 괴로운 적은 있었다. 또 하나 자인할 것은, 나와 주변과의 관계를 객관화해서 느긋이 관조할 만한 거리를 가질 수 있는 교양을 결여한 흠, 그것이다. 난 지금도 싫은 사람과 마주앉기를 질색한다. 당장에 쫓아낼 지경으로.” 추방령을 다반사로 내린다는 일. 그건 아마도 내부에 서린 파시즘이라기보다 홀로 생태계를 이룬 사람의 특유의 수비 방식이겠지. 미술작업이라는 믿을 만한 벙커에 들어앉은 자존감의 표명일 테고. 신상호가 살기등등한 송골매는 아니지만, 창작에 취한 그의 냉정한 열정엔 으스스한 뭔가가 들어 있다.
- 2019-11-1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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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호 관장 '오롯이 편안함이 깃든 정원을 만들다'
- '미술관 자작나무숲' 원종호 관장 인터뷰 “요즘 정원들을 보면 다 똑같아요. 그리고 너무 철저히 관리되어 빈틈이 없어요. 그게 너무 소름 돋아요. 그런 정원들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곧 지루함을 느끼죠.” 자연은 스스로 ‘자(自)’와 그럴 ‘연(然)’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그 단어에 맞게끔 자연은 스스로 그리 되는 것이다. 사람은 그저 보조 역할만 해야 하는 법. 그러나 사람이 주가 되고 자연이 억지로 끼어들면 식상해진다. 원종호 관장은 작년에 독일에 있는 인젤 홈브로이히(Insel Hombr oich) 미술관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곳은 완전한 자연이었다. 간판도, 안내사항도 보이지 않았고 한참을 가서야 전시장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몇 점의 작품을 전시한 건물에는 전기 시설도 관리인도 없었다. 게다가 어떤 길로 들어서든 미술관을 가려면 멀리 돌아서 가야 했다. “하지만 그런 공간은 들어가는 순간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게 하죠. 내가 볼 때는 그게 완벽한 정원이에요. 딱히 길이 아닌데도 마음대로 걸어가 보고. 미술관 자작나무숲에는 안내 지도도 없고 표시판도 없는데, 왜 없냐며 항의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일상에서 맨날 지시받으며 살다가 여기까지 와서 지시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그러한 콘셉트를 못 읽는 거죠.” 원 관장은 숲을 가꾼 사람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신념이 있었다. 물론 지난 수십 년의 시간 속에서 그도 경영자로서 부침(?)을 겪어야 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입장료를 2000원을 받았다. 그랬더니 별의별 사람들이 다 오더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7000원으로 올렸고, 1만 원을 거쳐 지금은 2만 원이다. 낮지 않은 가격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비싼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그만큼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고 말한다. 입장료가 어떻게 보면 미술관 자작나무숲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한 바로미터라는 것이다. “세상이 점점 이상해져가고 있어요. 공기도 나빠지고 사람들 생각도 혼란스럽고. 가끔씩 아이들이 오는데 길이 아닌 이상한 곳으로 가곤 하는 거예요. 핸드폰 내비게이션을 따라 길을 가는 거죠. 그러니 자연의 길은 없는 거고 길이 뭔지 모르는 거예요.” 원 관장은 이러한 세태를 ‘섭리를 모르게 된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어떤 부모님께서는 일부러 아이들을 여기로 보낸다고 해요. 저와 여기 정원을 보며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고집스럽게 만든 정원이 때로는 작은 쉼과 여유를 주는구나’ 혹은 ‘저렇게 사는 분도 있구나’ 하면서 하나의 메시지라도 얻고 가면 좋겠어요.” 이 여름이 지나면 핸드폰, TV 없이 쉬고 싶을 때 묵상에 잠긴 가을의 자작나무를 보러 다시 발길을 돌려야겠다.
- 2019-06-10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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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밭의 회수권
- 삼수의 고통 끝에 도도한 대학 문이 열렸다. 3월의 꽃샘추위도 매섭게 따라붙었지만 나에게는 달짝지근한 딸기바람일 뿐이었다. 개강 후 일주일이 지난 하굣길에도 추위는 여전했다. 발을 동동거리며 버스를 기다리는 내 옆에 순한 인상의 남학생이 언뜻 보였다. 기다리던 버스가 와서 타는데 그 남학생도 같이 차에 오르는 게 아닌가. 붐비는 차 안에서 이내 자리가 나자 옆에 있던 남학생이 나에게 앉으라며 눈짓을 했다. 그러고는 가방을 받아주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신입생이냐, 전공이 뭐냐 등으로 이어졌는데 알고 보니 신기하게도 우리 과 4학년 선배였다. 그날 이후 선배는 하굣길 파트너가 되었을 뿐 아니라 수시로 내 강의실에 일 없이 찾아오는 유명인이 되었다. 현수 선배였다. 그 즈음 나는 적성과 맞지 않는 전공이 힘에 부쳤지만, 삼수까지 한 마당에 또다시 시작할 기력은 없었다. 선배는 그런 고민으로 꽃청춘이 꺾여서야 되겠냐는 말로 한번 웃겨주고 마침 본인이 우리과 장학생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었다. 그로부터 장학생 선배의 개인 과외가 시작되었다. 찬기 도는 빈 강의실에서 자신의 점퍼를 내 어깨에 덮어주고는 안 춥다 말하는 입술을 덜덜 떨었다. 오히려 내 손이 차다며 폭신폭신한 앙고라 장갑을 끼워줬다. 혼자만의 비밀 문건이라며 기출문제를 뽑아오고, 교수님별 족집게 예상문제도 추렸다. 내가 시험 보는 날 속이 탄다고 복도를 서성대더니 차라리 자신이 대신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고생을 드러냈다. 선배의 활약 덕분으로 훈훈한 성적이 올라왔다. 그런데 2학기를 시작할 때쯤 딱 부러지게 말하기 힘든 옅은 허전감이 스멀스멀 내 마음속으로 밀려들었다. 생각해보니, 재수강의 험난한 길을 면하려고 하늘같은 선배의 비호 속에서 성적은 얻었는데 다른 게 없는 거였다. 캠퍼스는 모름지기, 미팅으로 부산하고, 지성인의 논쟁을 빙자한 야단스런 동동주 잔치에, 열정을 쏟는 동아리, 이런저런 상큼한 로맨스가 필수 예약된 풍경일 터였다. 그런데 바람과는 달리 어느 것 하나 담은 것 없이 덩그러니 빈 바구니만 흔들거렸다. 친구들과의 교류를 원천차단하는 하교 동행, 공부를 이유로 도서관으로 가는 셔틀버스에 실려 윤기 없는 청춘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시도 때도 없이 강의실로 찾아오는 바람에 내가 원래부터 선배와 아는 사이였고 그래서 이 학교에 입학했다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소문까지 무성했다. 그러니 그 흔한 미팅 제의 한 번 받지 못하고, 언저리에서 기웃거려보지도 못하는 이상하고 괴상한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적이 보장되는 꿀팁이 필요했을 뿐, 다 따주겠다는 별과 달은 필요치 않았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좋겠다는 공감 안 돼는 말에는 침묵했다. 맞닿는 곳이 다른, 정확히 뭐라 명명할 수 없는 어정쩡한 관계 속에 걸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가 흥미로운 말을 꺼냈다. 4학년 중에 나이 꽉 찬 과대표 형이 있는데 솔로라는 것이다. 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즉 소개팅을 주선하라는 것이었다. 경험도 없고 내 코가 석자인 형편이라 시큰둥해했지만 웃기기도 하면서, 마침 생각나는 언니가 있어 일을 벌여보기로 했다. 야무지기가 빈틈없고 콧소리가 매력적인 친구 언니다. 얼마 전 혼자라는 말도 들었다. 주말에 학교 앞 조명 어둑한 경양식집에서 만나기로 벼락같이 약속을 잡았다. 나와 선배가 먼저 가서 기다렸고 언니가 검은 롱코트로 점잖게 꾸미고 들어섰다. 조금 늦게 마른 몸매의 과대표 형이 수수한 청바지 차림으로 들어왔다. 인사를 하고 앉는데 약간 닳아 있는 코트 소매 끝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좋은 시간 가지라 인사하고 나오는네 알 수 없는 짠한 설렘이 엉겨붙었다. 다음 날 언니는 무슨 남자가 소개팅하는데 지각을 하느냐, 첫 만남인데 옷차림에 성의가 없다는 등 불만을 늘어놓았고 결국 소개팅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야릇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과대표 형이 내 밤잠을 빼앗아간 것이다. 야윈 체격에 우수에 찬 눈빛을 하고 담담히 걸어오던 모습이 자꾸 마음을 건드렸다. 시간 따라 옅어지기는커녕 누를수록 생채기만 덧났다. 급기야 과대표 형을 보려고 4학년 강의실을 넘겨다보는 어처구니없는 짓까지 하고 말았다. 우연을 가장해 서성거리다 마주치면 인사 한번 나누는 게 뭐가 그리 좋던지. 그런데 그런 만남에도 위기가 닥쳤다. 겨울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학이 되면 그 딱한 만남조차도 끊길 테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는 궁리 끝에 좋은 수를 생각해냈다. 당시 학생들은 버스를 탈 때 회수권을 사용했다. 그 회수권은 정해진 요일에 학교에서 구입해야 했다. 생각이 회수권에 이르자 더 이상 방학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12월의 어느 날 과대표 형이 매일 도서관에 간다는 정보를 접수했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망설임 없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단번에 과대표 형을 찾았고 조신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야?” “네… 부탁이 좀 있어서요. 회수권이 필요한데 내일 시간이 없어서요. 학교 매일 오시니까 10매만 사주시면 안 될까요? 내일 사놓으시면 제가 모레 찾으러 올게요.” “그래, 알았어. 근데 왜 현수한테 말하지 않고?” 현수 선배 얘기는 예상 못한 질문이어서 순간 멈칫했다. 다행히 과대표 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내가 주는 돈을 받아 넣었다. “고맙습니다. 모레 올게요.” 한파를 뚫고 온 보상은 넉넉했다. 오늘도 보고 필연적으로 모레도 만날 수밖에 없는 일을 꾸미고 나니 내가 너무 장해 보였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 과대표 형 만날 때 입을 원피스를 정성스레 다렸다. 그리고 저녁에 영어학원을 가려는데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래, 내일도 눈이 하염없이 내려주기를. 그래주기만 한다면 과대표 형의 마음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겹겹이 설렘밖에 없었다. 현수 선배가 사준 앙고라 장갑을 살포시 꼈다. 함박눈을 맞으며 학원 가는 눈길이 반짝였다.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데 학원 앞에 선배가 있었다. 점퍼에 딸린 모자를 올려 썼는데 녹지 않은 눈이 모자에도 어깨에도 소복했다. 얼른 달려가 어깨의 눈을 털어내려 할 때 선배가 먼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쑥 내밀었다. 앙고라 장갑 위에 올려놓은 것은 기다란 종이 다발. 회수권이었다. 순간 떨군 손에서 밀려난 회수권은 눈밭으로 파묻혔다. 회수권을 집어 묻은 눈을 조심스럽게 털어 다시 내 손에 쥐어주며 선배가 말했다. “낮에 학교 갔더니, 과대표 형이 주더라. 네가 부탁한 거라면서….”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떻게 회수권이 선배에게서 내게로 오게 됐는지, 마음 따라 손도 같이 바들거렸다. 왜 자신에게 부탁하지 않았는지, 어떤 말도 선배는 덧붙이지 않았다. 양심이 희미해졌을까. 고단한 선배 얼굴이 측은해 아린데, 더 큰 원망이 마음 한구석에 떡하니 버텼다. 왜 마다하지 않고 그걸 가져왔냐고. 한 번쯤 그냥 두면 안 되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리던 함박눈은 폭설로 변해 얽히고설킨 감정을 덮어주었다. 현수 선배를 통해 답을 준 과대표 형도, 앙고라 장갑에 회수권을 올려놓던 안쓰러운 현수 선배도 눈난리가 난 그날 모두 내려놓았다. 설익은 청춘은 야위어가도 잇속을 챙기지 않았다. 다만 그득한 마음을 주는 데 서툴렀을 뿐. 아직 간직하고 있는 현수 선배의 편지를 꺼내들었다. 아무 말 없이 회수권을 전해주고 간 며칠 뒤, 현수 선배가 보내온 손편지에는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쓰라렸다”고.
- 2018-12-1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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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구례 산동면 지리산 자락에 사는 정부흥 씨
- 어디로 귀촌할까, 오랜 궁리 없이 지리산을 대번에 꾹 점찍었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단다. 젊은 시절에 수시로 오르내렸던 산이다. 귀촌 행보는 수학처럼 치밀하고 탑을 쌓듯 공들여 더뎠으나, 마음은 설레어 일찌감치 지리산으로 흘러갔던가보다. 지금, 정부흥(67) 씨의 산중 살림은 순조로워 잡티나 잡념이 없다. 인생의 절정에 도달했다는 게 아닌가. 처음엔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흔히 들었다지. 정부흥 씨는 임야 1만8000평을 사들여 일을 개시했다. 이 거창한 행세에 쓴소리들이 난무했던 모양이다. 외지고 으슥하고 가파른 산 덩어리여서다. 긴 고행이 빤히 보여서다. 그러나 기꺼이 자청한 고행은 고행이 아니라 순행(順行)이다. 절박한 눈으로 뒤를 돌아본 정 씨는 도시에서의 지난 생이 오히려 고행에 가까웠음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어라? 나를 목줄 채워 끌고 다닌 도시를 벗어나겠다는 데 왜들 난리람! 아마도 그쯤의 생각과 각오가 머릿속을 굴렀을 게다. 정 씨는 전남대학교 자원공학과를 나온 공학 박사다.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2012년에 퇴직했다. 임야는 은퇴 이전에 이미 사뒀다. 수시로 터를 드나들며 정을 붙였다. 귀촌 마스터플랜을 근사하게 준비하고서 임야에 길을 닦고, 기반공사를 하고, 임시 거처를 지었다. 퇴직 후에는 완전한 이주를 하고 본집을 거하게 지었다. 크고 너른, 반듯하고 웅장한 그의 거처는 이제 숲속 대궐에 가깝다. 부부 단둘이 살기엔 너무 방대한 규모로 보이지만 정 씨의 꿈과 이상이 실린 공간이다. 그의 수완과 통과 너름새가 비치는 구색이다. 터에 들어선 품목들이 크고 많으니 해온 일, 헤쳐나온 시련이 산더미였을 것이다. 신역도 신산(辛酸)도 자심했을 테지. 그러나 그는 일에 신명을 냈더란다. 오지게 터진 일복에 심취할 절호의 찬스를 만났다는 투로. 그렇다면 그는 근력 짱짱한 장한(壯漢)? 실은 정반대다. 지병을 달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50대 후반쯤 당뇨병 여파로 들이친 풍을 맞아 반신마비에 빠졌고, 강철 같은 의지로 마비에서 탈출했으나 여전한 당뇨는 신중히 관리하며 지내왔다. 지리산으로 가자, 그게 살길이다! 그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산중으로 귀촌했다. 몸이 망가졌으니 흐느껴 나온 생각들이 많았을 게다. 마음의 비장한 물결에 젖어 한탄을 거두고 속으로 다진 것도 많았을 테지. 그럴 즈음 지리산이 그를 호명했고, 그는 득달같이 응했던 모양이다. 이 불운하고도 야무진 사람의 눈은 단춧구멍처럼 간신히 째졌을 뿐이지만, 얼굴엔 자주 홍소(哄笑)가 출렁거린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스트레스 많은 정신노동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두주불사가 잦았어요. 결국 몸을 망쳐 당뇨와 뇌졸중이 겹치는 지경까지 갔던 겁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극심한 시련이었죠. 5년여에 걸친 재활치료로 다행히 반신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도시에서 살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귀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요.” “귀촌이, 산골생활이 건강을 호전시킨 셈인가요? 귀촌을 통해 중병을 고쳤다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두 가지 요인에 힘입어 건강을 도모할 수 있었어요. 하나는 아내의 헌신적인 조력입니다. 까다로운 식이요법을 아내 덕분에 철저하게 행해왔으니까. 생명의 은인이랄까, 그런 아내에게 제가 꼼짝을 못합니다.(웃음) 또 하나의 요인은 귀촌을 해서 만난 좋은 자연환경이에요. 숲길을 날마다 걸었어요. 배수진을 치고, 즉 목숨을 걸고, 운동 아니면 죽음이다, 라는 각오로 줄기차게 걸었죠. 요즘도 마찬가지예요. 아직 당뇨병이 있지만 내 몸 안에 들어온 평생 친구라 생각하며 관리하는 중이에요.” “이 너른 터전과 다수의 건조물, 숲과 텃밭, 이런 것들을 어떻게 능히 짓고 가꾸고 관리해왔죠? 온전치 않은 건강으로 말이죠.” “젊음과 자금력, 이 둘의 추진력이었어요.” “인생의 하오에 젊음이라니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이 산골에 들어온 초기엔 엄청 젊었던 것 같아요. 하늘을 잡고 도리뱅뱅이질을 쳤죠. 무모하긴 했어요. 그거 아세요? 저희 같은 연구원들의 특질이 뭐냐면, 항상 도전한다는 거.” 끊이지 않았던 사건 사고 그가 도전한 종목은 여럿이다. 귀촌의 성공 모델을 본때 있게 실현하겠다는 것, 몸을 아끼기보다 닳도록 써 건강을 살리겠다는 것, 자연과 호형호제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 오누이처럼 부부가 다정하게 잘 늙어 여생을 동행하겠다는 것. 가련하고 허무한 게 인생사이지만 선한 지향이 뚜렷한 사람의 발길엔 정채(精彩)가 서린다. 안간힘을 다하면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그는 열렬한 활보로 귀촌의 나날들에 생기를 부여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정 씨는 거의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해왔다. 울울한 숲을 파헤치는 토목공사를 주도했다. 귀촌을 위해 미리 배워둔 목공기술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목공실을 만들어 수많은 목재를 손수 자르고 깎고 다듬었다. 3차원 건축설계 소프트웨어를 활용, 60평과 40평짜리 두 채의 집 설계도 직접 해치웠다. 건축 공사도 업자에게 도급을 주지 않고 직영했다. 이 많은 일들을 해내는 중에 사고도 많았다지. 요상하게 줄줄이 이어진 사건기록을 들어보시라. “귀촌 초기,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한번은 석축을 쌓다가 바윗돌에 깔렸는데, 발목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집디다. 덕분에 반년 동안 깁스를 했고, 1년 반 정도 재활치료를 받았죠. 포클레인 작업 중 전복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어요. 예초기로 풀을 베다 벌집을 건드려 벌떼의 집중 공격을 당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응급실에 실려가 누울 수밖에 없었고요. 하하핫! 아내에게도 역시 사고가 많았어요. 집사람이 소형 덤프트럭을 몰아요. 어느 날 언덕에서 트럭이 뒤집혀 굴렀어요. 해충과 독충에게 시달리는 건 소소한 일상이었죠. 아내는 독사에게도 물렸어요. 응급실에 달려가 해독주사를 맞고 위험을 면했죠.” “아이쿠, 괜히 산골에 왔어, 돌아가야겠어, 그런 회의는 없었나요?” “모든 사고들이 알고 보면 다 인재(人災)였어요. 숙달 과정으로, 필수적인 시행착오로 여겼어요. 요령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요. 회의나 후회는 조금치도 없었고요. 산골살이는 오래 묵은 꿈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에 흥미를 못 느껴요. 고생길이 훤히 보여서죠. 잘난 당신이나 혼자 내려가소서! 그런 소리 나오기 십상이죠.” “산골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정서가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죠. 조용한 자연 속에서 과연 즐겁게 살아갈 소양이 있는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 저나 아내는 그런 면에서 시골과 적성이 맞았어요. 그러나 아내가 귀촌을 선뜻 동의하진 않았어요. 지역 선정에 반영할 네 가지 조건을 겁디다.” “어떤?” “대학병원 수준의 병원이 15분 안짝 거리에 있는 곳, 평소 늘 해왔던 요가를 계속할 수 있는 요가원이 있는 곳, 수필가로서 독서를 좋아하는 아내가 쉽게 찾아갈 도서관이 있는 곳, 항상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곳. 이렇게 네 가지였어요. 이곳 구례군은 갖가지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아내의 요구조건을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지역이죠. 저절로 생긴 수입 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경관이 후련하고 수려하다. 노고단을 중심으로 어깨를 겯고 일렁이는 능선 마루로 파란 하늘 자락이 겹쳐진다. 빼어난 뷰! 동향으로 앉은 집이니 새벽이면 침실 창으로 햇살이 두근대며 들이칠 게다. 집 뒤 숲엔 편백나무 수림이 조성돼 있고, 숲 사이로는 구불구불 휘어지는 산책로와 정자를 꾸며뒀다. 뭐 하나 빈틈도 결함도 없어 보이는 입지이자 장원(莊園)이자 저택이다. 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정 씨는 서울에 있었던 아파트 두 채를 처분했다. 이제는 수고롭게 돈 버는 일은 작별이야. 부부는 그렇게 합의하고 내려왔다. 그러나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뜻밖의 수익이란다. “저희 임야 안에 고로쇠나무들이 다수 있어요. 봄철이면 수액을 받는데, 이걸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 약간의 노동이 필요한 채취 작업을 해 연간 1000만 원쯤 수익을 올립니다. 비워두었던 아래채 2층집에서도 수입이 발생할 걸 미처 몰랐어요. 1층은 월세를 주고, 2층은 민박 손님을 받았더니 해마다 1000만 원 정도의 돈이 들어오더라고요. 가끔 귀촌인 상대의 목공 강의를 통해서도 약간의 강사료가 들어옵니다. 이렇게 모아지는 자금은 해외여행 경비로 씁니다.” 이래저래 이젠 순풍에 미끄러지는 돛배처럼 순항이다. 지루하진 않을까? 그렇잖아도 함께 오래 살아온 부부가 새삼 24시간을 늘 같이 지내야만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귀차니즘’이 풍선처럼 부푸는 건 아닐까? “제가 집사람에게 독불장군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요. 간간이 마찰이 없을 리 없죠. 대판 다투고 난 뒤 아내가 잠시 가출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름의 독립적인 생활방식을 찾게 됐어요. 오전엔 같이 텃밭이나 마당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함께 산책을 하지만 저녁식사 후엔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가 각자의 일을 합니다. 아내는 1층에서, 저는 2층에서.” “귀촌인들은 흔히 조언해요. 가급적 집을 작게 지어라! 작은 집이라야 유지 관리가 쉽다는 얘기죠. 선생께서 집을 크게 지은 이유는 뭐죠?” “내 손으로 한 번은 집다운 집을 제대로 짓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어요. 자손들이 찾아오면 맘껏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도 싶었고. 하지만 바람직한 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곤 해요. 우리 둘 가운데 하나만 남을 날이 머잖아 찾아올 텐데, 그땐 혼자서 이 너른 집과 터를 어떻게 간수할꼬, 그런 염려도 생기고.” “산골살이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죠?” “계절마다 달마다 날마다 다변하는 자연을 느끼며 배우며 사는 즐거움이 으뜸입니다. 몸이 녹아나는 혹독한 노동의 날들도 즐거웠어요. 건강을 유지할 에너지를 얻었으니까. 뭔가 떳떳하다는, 죄짓지 않고 산다는 기분 역시 노동을 통해 실감했어요. 노동에 휴식을 가미한 생활방식을 취하면서는 만족감이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다는 행복감이 커요. 그러나 모자란 사람일 뿐이죠. 자연은 저토록 온전한데 나는 틀려먹었구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불가(佛家)에서 가르치는 ‘공(空)’을 마음속으로 늘 되뇌이고…. 한 마리 배추벌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또한 기억하려 하고….” 세상의 탐욕과 광기가 침범 못할 이 고요한 산중. 몸 낮춰 마음을 평온으로 채운다면 고요마저 열락(悅樂)이겠지. 정부흥 씨가 주는 귀촌 Tip •사전에 시골생활을 체험하자. 한두 달로는 부족하다. 최소한 1년 정도는 월세 집이라도 얻어 살며 물정을 파악하는 게 좋다. •집을 지을 경우 사전에 집짓기 교육을 받아두는 게 좋다. 건축은 업자에게 맡기지 말고 직영을 하자. 건축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대신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귀촌생활에 텃밭은 필수다. 그래야 적당한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고, 깨끗한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8-12-0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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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간 딸의 임신
- 외출하고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당신 어제 혹 좋은 꿈을 꾸지 않았느냐”고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말한다.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얼굴이다. “아니 아무 꿈도 꾸지 않았는데 무슨 좋은 일 있어?” 하고 물어보았다. 자꾸 말을 빙빙 돌리기만 하고 통 말할 생각을 안 한다. 표정으로 봐서는 좋은 일이 분명한데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말하라 독촉하면 재미있어서 더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럴 때는 관심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이 특효약이다.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하면서 별 흥미 없어 했더니 그제야 아내가 정색을 하고 말한다. 시집간 딸이 전화가 왔는데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첫 외손자가 지금 4세인데 둘째 소식이 없었다. 요즘 시대는 아이를 낳지 않는 분위기라 자신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딸의 임신이 신기한 일도 아니고 깜작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냥 무덤덤했다. 오히려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할 딸이 걱정되었다. 요즘은 결혼이 늦어지다 보니 여지도 30세 넘어 결혼하는 추세다. 임신한 딸의 나이가 35세인 점도 마음이 쓰인다. 또 입덧을 심하게 하는 편이어서 첫아이를 낳을 때 고생을 심하게 했는데 잘 견뎌낼지도 걱정되었다. 더구나 큰애도 돌봐야 하는 부담도 있다. 천금 같은 내 딸이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딸이 말하기를, 입덧이 시작되면 엄마가 자기네 집에서 기거하면서 큰애도 봐주고 몇 달 고생을 해달라고 했단다. 친정엄마로서 입덧하는 딸을 돌봐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친정집에 와서 몸조리하면 좋을 텐데, 어린이집에 다니는 큰놈 때문에 아내가 딸네 집으로 출장을 가야 한다. 그래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며느리가 내년에 복직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친손녀랑 그 밑에 두 살 터울의 동생들 둘을 우리가 또 돌봐줘야 한다. 아들네와 딸네 집은 수원과 일산이어서 먼 거리다. 이런 점을 감안해 양쪽 집을 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우선은 며느리의 복직 전에 딸애의 입덧이 끝나야 한다. 그 후에는 아내가 일산 아들네로 가서 아이들을 돌봐주면 된다. 머리를 굴려가며 방법을 찾아보니 그럭저럭 굴러갈 수 있을 것 같다. 빈틈없는 계획이다 보니 누가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난리가 난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어야 한다. 할아버지는 아이들 돌보는 일에 있어서는 예비군이다. 필자가 직접 아이 돌보는 일의 일선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할머니는 찾아도 할아버지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아무리 인기가 없다 해도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 생기면 5분대기조처럼 뛰어나가야 한다. 전에도 필자가 자주 아이들 돌보는 일에 나섰다. 운전하는 며느리가 교통사고를 내서 운전을 못하게 됐을 때도 대리운전을 해줬고 아이들 돌봐달라고 SOS를 보내오는데 아내가 마침 다른 일로 바쁠 때도 필자가 뛰어갔다.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직은 신체건강하게 버티고 있어 친손자 외손자 양육에 개입하고 자식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것이 다행이고 사는 보람이다. 큰손녀가 유아원에 다닐 때는 아기 같더니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부쩍 어른처럼 행동했다. 막내 놈들도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봐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럭무럭 빨리 잘 자라라. 한 다리 건넌 내 새끼들아!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든든하게 보살펴줄게! 큰손녀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집에 왜 안 오세요? 오셔서 우리를 돌봐주셔야죠.” 그 말이 보약처럼 힘이 된다. “암 돌봐줘야지!” 이 맛에 산다.
- 2018-07-0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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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순창군 동계면에 사는 흙집 건축가 김석균 씨
- 귀촌 5년째. 김석균(55) 씨는 흙집에 푹 빠져 살고 있다. 그간 수십 채의 집을 지었다. 흙집 일색이다. 흙의 내부는 거대하다. 식물을 기르고 벌레를 양육한다. 생명의 출처다. 흙의 이런 본성과 모성이야말로 자연의 표상이다. 사람의 몸처럼, 흙집 역시 수명을 다하면 흙으로 돌아간다. 김 씨는 자연의 생태와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흙집의 미덕에 심취했다. 시골로 이주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흙집의 본거지인 시골에 눌러 살며 맘껏 흙집을 짓고, 널리 알리고, 두루두루 건축공법을 보급하고 싶었던 것. 한낮의 나른한 정적이 감도는 시골마을 찻길 가. ‘흙건축 연구소 살림’이라는 간판을 단 건물 한 채가 있다. ‘마을건축학교’라는 현수막도 걸려 있다. 교장은 김석균 씨. 건물의 외양도 내부도 말쑥하다. 원래 낡고 빈 농협 창고였다. 그걸 사들여 본때 있게 고쳤다. 이 공간에서 흙 건축 사업과 교육과 작업이 이루어진다. 전북 순창군 동계면에 있다. 귀촌 이전, 김 씨는 도시를 전전하며 다채로운 경험을 쌓았다. 전북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청춘기를 예인(藝人)으로 신바람 나게 노닐었다. 연극배우로 무대에 섰고, 근 10여 년 풍물패에 섞여 장구를 쳤다. 이후 서울의 병원 원무과 직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행선지를 바꿨다. 강원도 원주의 ‘자연학교’에서 고명한 생태철학자 무위당(無爲堂) 장일순 선생(작고)의 강연을 듣고서였다지. 무위당이 설파하는 생명사상과 ‘모심’의 뉴스에 귀가 번쩍 뜨여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쪽으로 진로를 돌렸던 것. 그는 이후 한동안 천연염색이나 전통차 제조로 자연이 실린 생활을 꾸려나갔다. 생태건축에 강렬한 감흥을 느낀 것도 그즈음이었다. 해서, 부지런히 전통 한옥의 이론과 기술을 책에서 현장에서 대학원에서 배우고 익히고 다듬었다. 10여 년을 그렇게 내닫아 흙 건축 전문가로 도약했다. ‘끼’와 ‘깡’이 발동하는 방향으로 운신한 덕이다. 성향과 취향이 흐르는 쪽으로 길을 닦은 셈이다. 이는 시중에 흔한 재능이 아니렷다. 그러나 김 씨는 손사래를 친다. “저를 지도해주셨던 선생님 왈, 어이, 석균이! 자네는 왜 그렇게 재주가 없는가? 하핫. 재주는 없는 대신 제가 뭐든 열성은 다합니다. 좌우명이 하나 있는데요, 매사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보자! 그겁니다. 어떤 상황이건 적극 부닥쳐 확인해보자는 거죠. 문제는 ‘깊이’에 있다는 생각이에요. 이왕지사 건축업계에 들어섰다면 깊이 있게 들어가야 한다는 신념, 그거 하나는 놓지 않고 살았어요.” 김 씨는 흙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찌감치 쓰윽 존재감을 드러냈다. ‘담틀집’을 많이 지어서였다. ‘담틀집’이란 거푸집 안에 흙을 다져넣어 지은 집이다. 지금의 그는 ‘생태 단열’의 복음전도사다. 그게 뭔가? 흔히 건축 단열재로 스티로폼을 쓰지만 그는 극구 배척한다. 볏짚과 왕겨, 이 자연 재료들이야말로 탁월하고 안전한 최상의 생태 단열재라는 거다. “사람에게 옷은 제2의 피부, 집은 제3의 피부입니다. 그런데 현대 건축의 자재 대부분은 석유화학 제품이라 인체에 해로울 수밖에 없어요. 반면 흙이나 나무는 공기정화 능력을 발휘합니다. 볏짚이나 왕겨로 단열처리를 할 경우, 스티로폼으로는 기대할 수 없는 습도 조절 효과까지 거둘 수 있어요. 왕겨는 물에 잘 썩지도 않아 볏짚보다 더 뛰어나고요.” “흙과 나무와 돌로 지은 시골의 오래된 집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어 아깝더라고요. 비록 현대 주택에 비해 불편하고 열악한 구조이지만, 우리 부모 세대의 숨결이 서린 주거 문화이자 정서적 유적이지 않겠어요?” “좋은 집이란 뭔가? 바람 잘 통하고, 해 잘 들고,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집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시골집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단열 미비에 있어요. 여름엔 온실처럼 덥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춥죠. 시골집 흙벽 자체가 워낙 얇기도 하거니와, 흙이나 돌이 단열기능을 가진 재료는 아니거든요.” “보수하고 보강해서 잘 살려 쓸 방법은 없을까?” “제가 ‘마을건축학교’를 운영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분들이 굳이 신축을 하기보다는 기존 시골집을 고쳐 쓰는 방법을 택하기를 바라서입니다.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면 시골집 단열 작업을 어느 정도 손수 해낼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단열 보강만으로는 한계가 자명해요. 주거와 삶의 패턴도 이미 과거와 달라졌어요. 이래저래 퇴락한 시골집들의 여건은 불리합니다. 화학물질과 공해물질의 폐해가 여실한 현대 주택도 불안전하긴 마찬가지이지만 말이죠. 생태 단열재를 도입한 흙집이 대안이라 봅니다.” “흙 건축엔 비용이 많이 든다죠? 입주 후 관리가 번거롭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저비용 고효율 주택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집의 완성도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게 건축비이고요. 관리 문제? 제대로 잘 지은 흙집이라면 신경 쓸 일이 전혀 없습니다.” 흙집이든 모던한 주택이든 허영과 허세의 덩어리가 아니라면, 취향과 실용에 부합한다면, 작고 소박하더라도 박새 둥지처럼 안락하다면 그게 바로 좋은 집이지 싶지만, 김 씨의 흙집 옹호엔 빈틈이 없다. 근성과 뚝심, 그리고 낙관의 힘 그는 손에 별로 쥔 것 없이 귀촌을 했다. 안빈낙도란 흔히 허풍선이의 과욕이라 바랄 일이 아니거니와, 가족 부양의 의무를 면제받을 순 없었으니 수말처럼 들입다 뛸 수밖에 없었을 테지. 앉으나 서나, 오나가나, 하품할 겨를 없이 분주하게 살아온 것 같다. 지난 5년 사이, 그는 많은 일을 벌였다. 마을 안통의 빈 건물을 개축, 청년 귀농인들과 함께 거주하는 공유주택으로 만들었다. 이 일곱 명의 청년들은 ‘흙건축 연구소 살림’의 주주이자 직원들이다. 지자체의 예산 지원을 받아 관내 시골집들을 보수해주는 일도 하고 있다. 근래엔 꽤 너른 임야를 사들여 아동들을 위한 숲속 생태놀이공간을 꾸미고 있다. 근성과 뚝심, 기민한 머리, 노련한 처신, 집요한 실천력이 아니라면 일구기 어려운 일들이다. 부채도 있고, 흙집 사업이 잘 돌아가는 것만도 아니라 하지만, 그는 낙관의 힘으로 어디까지나 기세등등하다. 김 씨는 한때 연매출 30억 원을 목표치로 잡았다. 이런 그에게 아내 이민선(42·‘흙건축 연구소 살림’ 대표) 씨가 어퍼컷을 날렸다. “당신, 그렇게 살면 행복할 거 같아?” 아내의 일격에 그는 코피를 쏟았던 모양이다. “퍼뜩 정신이 들더라고요. 내가 과욕을 부리고 있구나, 일벌레로 추락하고 있구나, 그런 반성을 했던 겁니다. 가급적 일을 적게 하고, 가급적 많이 놀자! ‘광대 정신’을 다시 끌어내 쓰자!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광대 정신?” “제가 과거 한때 풍물에 미치다시피 빠져 살았습니다. 장구 하나 짊어지고 전국을 6개월씩 떠돌곤 했어요. 어느 도시를 가건 그곳의 풍물패 광대들을 찾으면 대번에 통했어요. 어이, 나 전주의 김석균이여! 그렇게 기별하면 우르르 달려들 나와 반겨줬어요. 날밤을 새며 마시고 춤추고 놀았고 말이죠. 그 광대의 마음과 기질과 습성을 봉인해두고 일 하나에 몰두하며 50대 중반에 접어들었어요. 자유로운 정신을 스스로 가둔 채 말이죠. 이젠 봉인을 좀 풀자, 나를 풀어놓자, 욕심을 줄이자, 그런 다짐을 했던 겁니다.” “현실의 규율과 틀에 사로잡히지 않는 방랑자. 사회의 보편적 속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아웃사이더. 광대란 과거부터 그런 존재들이었죠. 방탕의 이미지가 따라붙기는 하지만, 본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나그네들….” “악기 하나 달랑 들고 세상을 떠도는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일 수도 있죠. 내가 나의 진정한 주인으로 사는 길의 하나일 테니까.” “일찍이 풍물과 더불어 한평생 살다 가겠다는 작심을 한 적은 없으셨고?”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질 않았습니다. 재주에 빠지는 프로보다는 재미를 즐기는 아마추어로 만족했으니까. 그랬던 광대의 나날을 청산한 건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생태적·실천적 삶에 감화를 받으면서였죠. 풍물을 한답시고 줄창 술이나 퍼마셨던 시간들을 정색을 하고 되돌아봤던 겁니다. 스스로 부끄러워지더라고요. 그 무엇에 앞서 의식주부터 내 힘으로 떳떳하게 해결해야 할 필요를 절감했어요. 그 방편으로 흙집 건축에 착안했고요.” 떠들썩한 축제와 그 뒤에 고이는 허망한 정적. 그 양자의 괴리와 배치(背馳)에 삶의 하중이 얹힌다. 만족은 잠정적인 선물에 그치고, 모색의 시간이 다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빈 잔처럼 여지없이 찾아든다. 고인 물처럼 썩지 않으려면, 정직하게 돌아보고 서둘러 변해야 하겠지. ‘배워서 남 주자!’ 김 씨의 귀촌은 변화 욕구의 산물이자, 거듭 새로워져야 할 기회와의 만남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새로운 기회를 잘 활용해왔다. ‘전투적인 노동’으로 일에 전념했으며, 아내에 대한 존중심을 견지, 크고 작은 역경들을 힘 모아 함께 넘어설 수 있는 부부애를 구축했다. 풍물패와 유유상종하던 시절에 배양한 사교적이거나 낙천적인 에너지를 발휘해 주변과 친화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는 차갑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귀촌을 바라본다. “점점 확산되는 귀촌·귀농 현상은 기본적으로 매우 바람직합니다. 노인들만 남은 시골에 생기를 부여하고 인구 유지에 기여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골살이란 만만한 게 아녜요. 흔히들 기존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귀촌의 목적을 둡니다. 이건 현명하고 정당하죠. 도시라는 수레바퀴에 어쩔 수 없이 휩쓸려 돈을 좇는 삶, 자신과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삶이 좋은 것일 리 없으니까. 그러나 전원생활에 관한 낭만이나 동경을 앞세운 귀촌은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신중한 고려를 통한 귀촌이라 하더라도 원했던 걸 얻기까진 상당한 수고와 시간을 쏟아야 하고 말이죠.” “충동구매처럼 무모한 귀촌을 할 경우, 시련의 시간은 한결 길어지겠죠. 끈질기게 버티다가 10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평온한 정착에 이르기도 해요.” “처음 2~3년은 어어 하는 사이에 정신없이 지나더라고요. 5년은 지나야 서서히 자리가 잡히는 것 같아요. 저처럼 시골에서 경제활동을 할 경우엔 어려움이 더 커지죠. 실패 가능성도 많고요. 젊은 귀촌자들의 실패는 오히려 미래의 자산이 되겠지만, 시니어는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어요. 특히나 농사를 통한 돈벌이를 시도하다 보면 궁지에 몰립니다. 평생 농사만을 전공한 시골 사람들도 쩔쩔매며 산다는 걸 기억해야 해요.” “원주민과의 관계에 감정의 골이 깊어져 외딴집처럼 고독해질 가능성도 많은 게 귀촌생활이죠.” “세상엔 파락호도 있고, 괜찮은 사람도 있어요. 도시나 시골이나 마찬가지로요. 시골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존중과 배려에 무신경한 채, 그저 원주민의 텃세를 타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원주민 입장에선 수상한 외지인이 내 동네에 이주해올 수도 있다는 긴장감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배워서 남 주자!’ 이건 우리 회사의 구호예요. 남에게, 이웃에게 기탄없이 나눠주고 배려하는 일은 언뜻 손해 보는 짓 같지만, 사실은 돌아오는 게 더 많아요.”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는 어디에고 있다. 그런 인물은 미구에 걷어차인다. 골치 아픈 원주민 때문에 앙앙불락하기보다, 내가 먼저 골치 아픈 인간이 되지 않는 것. 그게 지름길이라는 것. 김 씨의 얘기인즉, 그런 귀띔이겠지.
- 2018-06-2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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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여행의 동반자 ‘배낭’ 어떻게 꾸려야 할까?
- 초보 도보여행자들이 겪는 시행착오 중 하나. 바로 배낭 짐 싸기다. 장거리 코스 생각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마구 넣게 되는데, 이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독이 되고 만다. 오랜 기간 몸에서 떼지 않고 걸어야 하기 때문에 배낭은 소중한 동반자와 마찬가지다. 어떤 동반자, 즉 어떻게 배낭을 꾸리느냐에 따라 도보여행의 질이 달라진다. 배낭을 고르는 방법부터 짐 꾸리기에 유용한 정보까지 담아봤다. 사진 제공 및 도움말 트래블메이트 ◇ 초보 여행자를 위한 배낭 고르는 방법 1 가벼운 것이 좋다 배낭이 가벼울수록 여행은 즐거워진다. 배낭의 절대무게를 고려해 쓸데없는 짐은 덜고, 좌우 무게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이 길수록 배낭의 무게는 체력을 갉아먹는 ‘짐’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작은 무게라도 가능한 한 줄여야 한다. Tip 짐 꾸릴 때 가벼운 것은 아래로, 무거운 것은 위로! 2 안전은 필수 초보 여행자를 노리는 ‘보이지 않는 손’을 조심하자. 이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배낭을 공격하고, 때로는 대담하게 배낭 지퍼에 손을 댄다. 반드시 배낭의 모든 출입구를 봉인해야 한다. Tip 배낭을 살 때 자물쇠를 걸 수 있는 고리가 있는지, 또 튼튼한지 살필 것. 3 짐 꾸리기가 쉬워야 한다 초보 여행자의 아침은 늘 부산스럽다. 배낭에 쑤셔 넣은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찾고, 이동을 위해 짐을 꾸리느라 정신이 없다. Tip 배낭의 주 출입구가 넓게 벌어지면서, 하단 지퍼와 위아래 분리막이 있어 분리수납이 가능해야 짐을 싸고 푸는 시간이 줄어든다. 내용물을 넣어도 변형이 없도록 등판에 지지프레임이 있는 것으로 고르자. 4 내 몸에 딱 맞는 걸 골라라 배낭을 착용했을 때 불편하거나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깨, 등판, 허리벨트가 몸과 밀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배낭은 내 몸에 딱 맞는 배낭이다. Tip 배낭을 사고 나서 한번 짐을 꾸려 직접 메어보는 게 좋다. 빈 배낭을 멜 때와 내용물이 들어갔을 때의 착용감은 천지 차이다. 5 지퍼가 튼튼해야 한다 예쁜 디자인, 유명 브랜드 다 좋지만 여행 중 배낭이 망가지면 낭패다! Tip 배낭 고를 때 꼭 살펴야 할 것은 지퍼, 특히 맞물리는 이빨 부분이 튼튼한지, 봉제는 꼼꼼한지, 어깨끈과 몸체 연결은 견고한지 등을 챙겨야 한다. 눈으로 보고, 직접 당겨도 보자. 6 여행 기간보다는 짐의 양을 고려하라 기간이 길다고 꼭 짐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계절에 따른 옷의 부피나 세탁 편의성 등이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Tip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데도 굳이 가져가는 물건은 없는지 살필 것. ◇ 장기 도보여행, 배낭 짐 꾸리기 비법 돌돌 말아 구김 없이 가벼운 수납 팩을 활용해 옷은 최대한 부피를 줄여서 넣자. 티셔츠나 팬츠는 여러 장을 겹쳐 말아 넣으면 구김이 덜 가고 부피도 줄어든다. 구겨지기 쉬운 셔츠나 재킷 등은 가방 맨 위에 넣자. 가벼운 짐은 아래에, 무거운 짐은 위에 여행 짐은 무게에 따라 수납하는 것이 좋은데, 가벼운 짐은 아래에, 무거운 짐은 위에 넣으면 가방을 들었을 때 안정감이 있고 좋다. 구석구석 빈틈엔 작은 소품 수납하기 옷을 넣고 남는 공간에 속옷 같은 작은 옷을 채우고, 선글라스나 카메라 등 충격에 약한 물건은 그 사이사이 남는 공간에 넣는다. 모자나 신발 안쪽에 양말, 화장품, 상비약 등을 비닐 팩에 싸서 넣으면 공간도 절약하고 모양 변형도 막을 수 있다. 용도별 지퍼백으로 냄새 없이 깔끔하게 파우치나 지퍼백은 넉넉히 챙기자. 화장품, 세면도구, 액세서리 등 작은 물품들을 용도별로 지퍼백에 담으면 뒤섞이지 않고, 찾을 때도 편리하다. 또 빨랫감이나 젖은 옷들은 오염될 수 있으므로 지퍼백에 담아서 넣는다. 냄새 걱정도 없고, 다른 짐들이 젖지 않아 좋다. 배낭여행 전용 제품 활용하기 장거리 도보여행을 하려면 옷뿐만 아니라 수건, 세면도구, 화장품, 비상식량 등도 챙겨야 한다. 이때 가정에서 쓰는 제품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보다는 부피가 작고 가벼우면서 실용적인 배낭여행 전용 제품들로 채우는 것이 더 유용하다. # 도보여행 # 배낭싸기 #도보배낭
- 2018-06-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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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곶감 빼 먹 듯하다
- 참 다행이다. 60살부터 국민연금을 매달 꼬박꼬박 받을 수 있어서 말이다. 연금수령액은 실생활에 충분하지 않아도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직장이나 일거리가 있어 일정한 소득이 발생하면 그 범위 안에서 쓰고 확실한 장래 수익이 예정되어 있으면 앞당겨 써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 새로운 수익이 없거나 적을 때, 저축하여 둔 돈에서 쓴다면 그 쓰임새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생각 없이 쓰다 보면 후회를 할 수밖에 없다. 살아오면서 종종 경험한 일이다. 근래에 ‘Downsizing’이란 말이 많이 회자한다. 기업체를 비롯한 조직에서나 인생 2막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소득이 줄어든 상황에 맞게 쓰임새를 줄여야 함을 이른다. 돈을 벌지 못하거나 수입이 줄어든다면 맞춰 생활해야 한다. 모아둔 돈을 쓰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이 나기에 십상이다. 금리가 바닥인 요즘엔 더더욱 그렇다. 우리 속담에 “곶감 빼 먹듯 하다”란 말이 있다. 달콤하여 한둘 먹다 보면 앙상한 꼬지만 남게 된다. 소득이 없거나 적은 경우엔 수입 범위 안에서 쓰는 지혜가 필요하다. 너무 옹색할 필요는 없어도 분수에 맞지 않은 지출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방법의 하나가 절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방법을 실천하는 일이다. 필자는 그런 일의 하나로 이발을 아주 저렴하게 할 수 있는 곳을 이용한다. 고향 청학동 마을 어르신들이 상투를 틀고 지내는 것처럼 이발하지 않고 길게 기르는 방법도 있겠다. 그렇게 사는 분들을 주변에서 보기도 하여 그런 방법으로 머리를 관리해볼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해보았지만,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필자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처럼 손질하기로 했다. 일반 이발소를 다니다 안사람의 권유로 미장원을 이용해왔다. 지난해 봄부터 머리 깎는 장소를 바꿨다.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이발관이다. 이 근처엔 이발관이 눈에 띄게 많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지역임을 참작해선지 3,500원을 받다 지난 연말에 4,000원으로 올렸다. 머리를 감으면 500원이 추가된다. 그래도 싼 편이다. 이발 솜씨도 양호하다. 이발사는 중.장년층으로 가위질에 빈틈이 없고 손님들이 대부분 만족해한다. 머리를 깎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필자는 이 근처에서 모임을 하는 기회가 많아 이곳에 들릴 때 시간을 내어 머리를 깎게 되기에 시간과 이발료를 절약한다. 한가로운 시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지하철 우대로 교통비를 들이지 않고 찾을 수 있는 지역이다. 시니어들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실버극장을 비롯한 볼거리, 값싸면서 질도 괜찮은 먹거리도 있어 나이 든 분들이 많이 모여든다. 소득에 맞게 지출하려는 시니어 경제생활의 일면을 본다. 은퇴하고 난 직후는 과거의 생활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현실에 맞는 자세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질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절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찾는 것도 은퇴 후 지혜로운 경제생활이다.
- 2018-03-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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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이 시가 되는 기적 ‘패터슨’
- 이런 영화도 있나 싶다. 뚜렷한 줄거리도 없이 하루하루 일상을 마치 일기를 쓰듯 영상으로 그려 낸다. 무료하게 반복되는 날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주인공이 틈틈이 노트에 꾹꾹 눌러 담는 시(詩)뿐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나라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같은 과로 볼 수 있다. 다만 홍상수가 평범하고 지루한 나날들 속에서 인간의 추잡함을 드러낸다면 짐 자무쉬는 일상 속에서 비범한 아름다움을 본다. 이 영화에 대한 소문은 일찍부터 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칸의 경쟁부문에 출품되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게다가 짐 자무쉬가 아닌가. 독립영화의 대부라 평가받는 그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지만, 꾸준히 예술영화를 만들어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기대감 속에 모처럼 시간을 내어 영화관을 찾았지만 아뿔싸! 영화 시작과 함께 간간이 조는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별다른 사건 없이 비슷비슷한 날들이 반복된다. 게다가 화면 전개마저 나른하니 졸기를 권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는 월요일에 시작하여 다음 월요일에 끝난다. 배경은 미국 뉴저지주의 패터슨이라는 소도시다. 시에서 운영하는 노선버스의 운전기사인 주인공의 이름도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이다. 그를 연기한 배우 이름도 드라이버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는 매일 6시에서 6시 반 사이에 기상하며 시리얼을 먹고 출근한다. 버스를 몰기 전에 생각을 정리해 시작노트에 적고 점심은 지역 명물인 폭포공원의 벤치에서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또 시를 쓴다. 퇴근하면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와 저녁을 먹고 난 후 애완견 마빈과 산책을 하다가 동네 허름한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마치 인생이란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하는 듯하다. 사실이 그렇다. 우리의 삶도 특별한 변화 없이 하루하루가 비슷하게 흘러간다. 큰 틀에서 보면 인생이란 이렇게 지루하게 늙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감독은 그렇지 않다고 귀띔한다. 비슷한 듯해도 조금씩 다르다. 아침에 잠에서 깰 때 아내와 누운 자세가 다르고 길에서 만나는 이가 다르고 버스에 탄 승객이 다르고 폭포 위를 나는 새가 다르고 바에 술 마시는 손님들이 다르다. 시인의 눈은 이 다름을 포착한다. 이 세상의 작은 틈을 열고 그 다름이 주는 가치와 아름다움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러니까 결국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인 셈이다. 패터슨은 무표정하면서도 간혹 미묘한 미소를 흘리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시를 길어 올리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것이 시인 줄을 모른다. 이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인 개가 시작노트를 찢을 때까지는.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그리고 유일한 극적인 장면이라면 애완견 마빈이 그의 노트를 물어뜯어 갈기갈기 파쇄해 놓은 장면일 것이다. 패터슨은 비로소 상실감을 느끼고 폭포공원을 찾는다. 그때 감독은 자신의 시론을 마무리 짓기 위해 느닷없이 일본인 관광객을 등장시킨다. 그 뜬금없는 일본인은 어쩌면 이 작은 시 패터슨을 사랑했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즈의 환생일지 모른다. 그는 패터슨에게 시란 별것 아니고 ‘아하!’ 하는 작은 깨달음임을 깨우친다. 그러면서 빈 노트를 선물하며 이렇게 말한다. “텅 빈 페이지는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이 대사는 바로 감독의 메시지일 것이다. 극장을 나서며 행복이란 큰 거 한방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이어가는 것이란 말이 떠올랐다. 갑자기 우리 삶의 빈틈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2018-01-1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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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기 펀치’의 대명사 유명우
- 1980년대 복싱은 한국의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인기 스포츠였다. 복싱 경기가 있는 날이면 팬들은 TV가 있는 다방이나 만화방에 삼삼오오 모여 응원했고 한국 선수가 우승하는 날이면 다방 주인이 무료로 커피를 돌리는 소소한 이벤트(?)도 열렸다. 1980년대를 풍미한 복싱 영웅 유명우(柳明佑·54)를 그의 체육관에서 만났다. 상대가 빈틈을 보이면 유명우는 어김없이 ‘소나기 펀치’를 퍼부었다. 정신을 쏙 빼놓는 공격에 상대가 무릎을 꿇고 링 위에 쓰러지면 경기장은 함성과 열광으로 가득 찼다. 14명의 상대를 KO시켰지만 정작 그는 한 번도 링 위에 쓰러진 적이 없다. “링은 눕는 침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유명우. 163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본인만의 복싱 스타일을 정립하며 세계 타이틀 17차 방어의 신화를 썼다. 한국 프로권투 사상 최다 연승(36연승), 가장 오랜 기간 타이틀 보유(6년 9일), 최단 시간 KO승(1R 2분 46초), 최다 방어 기록(17차). 이 모든 게 유명우가 세운 기록이다. ‘작은 들소’, 세계 정상에 오르다 -1985년 12월 8일 WBA 주니어플라이급 타이틀 매치 (vs 조이 올리보) ‘작은 들소’, 작지만 링 위에 올라가면 들소처럼 매섭게 변한다고 해서 유명우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복싱은 멋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무턱대고 권투장갑을 꼈던 그는 1984년 동양 주니어 플라이급 왕좌에 오르고 이듬해 미국 출신의 WBA(세계권투협회)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 조이 올리보를 대구로 불러들여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았다. “이때 제가 군대에 있었거든요. 군대 복싱부 표어가 ‘지면 죽는다’였어요.(웃음) 전쟁에서 지면 죽는 거잖아요. 물론 복싱이 전쟁은 아니지만 그렇게 비유한 거죠. 챔피언 벨트를 가져오기 위해선 지지 않고 이겨야 하니까 정말 군인 정신으로 싸웠죠.” 조이 올리보는 다양한 공격은 물론 탄탄한 수비 능력을 갖추고 있어 여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초반 유명우는 올리보를 좌우 연타로 몰아붙이며 쉽게 경기를 풀어나가는 듯했지만 후반에는 올리보의 잽과 스트레이트 연타를 허용하며 고전했다. 15라운드까지 이어진 난타전 끝에 유명우는 판정승을 거뒀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그는 바로 응급실 신세를 졌다. 급하게 마신 물이 복통을 일으킨 것이다. “경기 중에 엄청 갈증이 나더라고요. 그때가 아주 추운 겨울이었는데 입만 헹구고 뱉어야 하는 찬물을 목마르다고 벌컥벌컥 마셨으니 탈이 난 거죠. 경기할 땐 몰랐는데 끝나고 나니 도저히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기뻐할 겨를도 없이 병원에 갔죠.(웃음) 그래도 처음 챔피언 벨트를 차던 그 순간의 기분은 아직 잊지 못해요. 복싱을 시작할 때부터 꿈꿔온 세계 챔피언 자리에 앉았으니 마치 세상에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었죠.” 39전 38승, 그리고 1패 -1991년 12월 17일 18차 방어전 (vs 이오카 히로키) 유명우는 챔피언 자리에 올라 약 6년간 17명의 도전자를 물리치며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그런 그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있었으니 바로 ‘안방 챔피언’이다. 17차 방어전까지 홈 링에서만 방어전을 치렀다는 이유에서였다. 18차 방어전. 마침내 그의 첫 원정 경기가 일본에서 열렸다. “졌죠.” 그야말로 뼈아픈 패배였다. 첫 원정에서 마치 ‘안방 챔피언’임을 증명하듯(?) 타이틀도 뺏기고 연승가도 또한 36연승에서 끊겼다. 20차 방어전 후 은퇴하겠다는 목표도 무너졌다. 그런 그의 패배에 “석연치 않은 판정이었다. 일본에 돈을 받고 져준 게 아니냐”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오랜 기간 방어전을 잘 치러왔고 상대도 한 체급 아래의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안일하게 준비했죠. 저 스스로 나태해진 거예요. 특히 원정 시합 땐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하지 못하면 이기기 어려운데 제가 완벽하지 못했어요. ‘타이틀을 돈 주고 팔아먹은 거 아니냐’라는 억측들이 있었는데 자신의 명예가 걸린 타이틀을 어느 누가 돈을 받고 넘기겠어요.(웃음) 당시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속상했는데 그만큼 절 아꼈기 때문에 큰 아쉬움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생각해요.” 첫 패배 후엔 속상해서 복싱을 그만둘까 했지만 오기가 생겨 재시합 신청을 했다. 단 협회는 이오카 히로키의 2차 방어전 이후에 다시 붙을 수 있다는 조건을 걸었다. 중간에 이오카 히로키가 질 경우 타이틀을 빼앗기기 때문에 유명우 입장에서는 다시 붙는 의미가 없었다. 내심 이오카 히로키를 응원했다고. “다행스럽게도 히로키가 2차 방어전까지 성공하더군요. 고마웠죠.(웃음) 만약 중간에 빼앗겼으면 복싱을 그만뒀을 거예요. 다음번 만날 땐 정말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관악산 정상을 뛰어올라갔어요. 체력을 기르면서 만발의 준비를 했죠.” 1년 뒤 챔피언 재탈환을 위해 똑같은 장소, 똑같은 상대와 다시 만났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경기 도중에 상대방 팔꿈치에 맞아 눈썹이 찢어진 것이다. “피가 많이 나면 경기가 중단돼요. 그때 꽤 많이 찢어졌는데 시합 도중에도 계속 걱정이 되더라고요. ‘이렇게 경기가 허무하게 끝나면 안 되는데…’ 하면서요. 다행히도 피가 많이 나지 않아 무사히 경기를 끝낼 수 있었어요.” 경기 결과는 12라운드 판정승. 1년 만에 타이틀 재탈환에 성공했다. 이후 1차 방어전을 치르고 WBA에 벨트를 반납, ‘영원한 챔피언’이라는 명예를 선택하고 은퇴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체중 감량 시합을 하고 나면 얼굴에 멍이 들어 퉁퉁 붓는 건 당연한 일이다. 1차 방어전 땐 귀를 맞아 고막이 파열됐다. 복부에 정타를 맞으면 숨이 턱턱 막힌다. “3차 방어전 때 마리오 데 마르코 선수랑 시합하고 나선 정말 챔피언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어요. 1라운드부터 15라운드까지 서로 주먹만 주고받았는데 시합 끝나고 소변을 보니깐 혈뇨가 나올 정도로 굉장히 힘든 시합이었죠. 그만큼 치열했고 복싱 팬들이 가장 열광한 경기였어요.” 사실 맞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있었으니 바로 체중 감량이었다. 유명우는 은퇴 후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한다. 지금 그 당시처럼 체중을 감량하라고 하면 돈을 줘도 안 하겠단다. “제가 선수 시절 평소 몸무게가 60kg 정도였어요. 시합을 하려면 49kg까지 빼야 하는데 감량의 고통이 제일 힘들었죠. 식이조절에, 운동을 해도 안 빠지면 사우나 가서 남아 있는 수분까지 다 빼야 했어요. 어떤 선수는 이뇨작용을 도와주는 약도 먹고 그야말로 마지막엔 살과의 전쟁이 아니라 수분과의 전쟁이었죠. 그때 정말 먹고 싶은 것은 고기도 밥도 아닌 물이에요.” 돌까지 씹어먹는다는 20대 중반, 눈앞에 펼쳐진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24시간 코치가 붙어 있진 못하잖아요. 그럴 때 페트병에 우유나 콜라를 넣어서 향만 느끼자 하고 입에 가져다 대요. 그러면 그게 자제가 되겠어요? 막 먹어버리는 거죠.(웃음) 신기한 게 먹은 만큼 체중계 바늘도 움직이는데 그럼 코치한테 바로 들켜서 혼났죠.” 1차와 2차 계체량 측정에서 모두 통과하지 못하면 챔피언은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논타이들전 같은 경우엔 핸디캡이 주어지기 때문에 계체량은 매우 중요하다. “체중 감량이 힘들어서 중간에 도망친 적이 있어요. 한국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잠적한 사건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그래선 안 될 짓이었죠. 한편으론 제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복싱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요. 그 사건으로 제가 유일하게 못해본 게 한국 챔피언이에요.” ‘작은 들소’ 유명우 vs ‘짱구’ 장정구 인터넷 포털에 유명우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장정구 선수가 뜬다. ‘마징가 Z vs 로봇 태권V, 사자 vs 호랑이’처럼 복싱 팬이라면 1980년대 쌍두마차를 이룬 유명우와 장정구 둘의 대결을 꽤나 손꼽아 기다린 듯하다. 아쉽게도 장정구가 은퇴할 때까지 경기가 성사되지 않아 둘의 대결은 머릿속으로만 상상할 수 있다. “제 경기는 MBC, 장정구 선배는 KBS에서 중계했어요. 이때 누가 중계권을 가져갈 것이냐의 문제도 있었죠. 협회 입장에서도 두 챔피언이 붙으면 한 명의 챔피언을 잃게 되니까 하지 말자는 말도 있었고요. 붙었다면 아마 제가 졌을 것 같아요.(웃음)” 2017년 3월 1일, 3·1절을 기념해 독도 사랑을 일깨우고 비인기 종목으로 전락한 권투를 되살려보자는 취지로 유명우, 장정구의 대결이 독도에서 열리는 듯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일본 복싱 관계자들에게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분쟁 지역에서 그러면 안 되지 않냐, 진행하면 교류는 끝이다. 이런 식으로요. 사실 저야 상관 안 하지만 후배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포기했죠. 참 안타까워요.” 복싱 사랑은 여전했다. 다시 태어나도 복싱을 하겠다는 그는 현재 자신의 별명을 딴 ‘버팔로 체육관’과 ‘버팔로 프로모션’을 운영 중이다. 새로운 한국 챔피언을 육성하는 게 목표라 한다. “요즘엔 체육관에 올인하고 있어요. 저보다 훌륭한 챔피언을 꼭 배출해내야죠!”
- 2018-01-17 0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