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시가 되는 기적 ‘패터슨’

기사입력 2018-01-17 09:48 기사수정 2018-01-17 09:48

▲영화 ‘패터슨’(박미령 동년기자)
▲영화 ‘패터슨’(박미령 동년기자)
이런 영화도 있나 싶다. 뚜렷한 줄거리도 없이 하루하루 일상을 마치 일기를 쓰듯 영상으로 그려 낸다. 무료하게 반복되는 날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주인공이 틈틈이 노트에 꾹꾹 눌러 담는 시(詩)뿐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나라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같은 과로 볼 수 있다. 다만 홍상수가 평범하고 지루한 나날들 속에서 인간의 추잡함을 드러낸다면 짐 자무쉬는 일상 속에서 비범한 아름다움을 본다.

이 영화에 대한 소문은 일찍부터 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칸의 경쟁부문에 출품되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게다가 짐 자무쉬가 아닌가. 독립영화의 대부라 평가받는 그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지만, 꾸준히 예술영화를 만들어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기대감 속에 모처럼 시간을 내어 영화관을 찾았지만 아뿔싸! 영화 시작과 함께 간간이 조는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별다른 사건 없이 비슷비슷한 날들이 반복된다. 게다가 화면 전개마저 나른하니 졸기를 권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는 월요일에 시작하여 다음 월요일에 끝난다. 배경은 미국 뉴저지주의 패터슨이라는 소도시다. 시에서 운영하는 노선버스의 운전기사인 주인공의 이름도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이다. 그를 연기한 배우 이름도 드라이버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는 매일 6시에서 6시 반 사이에 기상하며 시리얼을 먹고 출근한다. 버스를 몰기 전에 생각을 정리해 시작노트에 적고 점심은 지역 명물인 폭포공원의 벤치에서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또 시를 쓴다. 퇴근하면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와 저녁을 먹고 난 후 애완견 마빈과 산책을 하다가 동네 허름한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마치 인생이란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하는 듯하다.

사실이 그렇다. 우리의 삶도 특별한 변화 없이 하루하루가 비슷하게 흘러간다. 큰 틀에서 보면 인생이란 이렇게 지루하게 늙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감독은 그렇지 않다고 귀띔한다. 비슷한 듯해도 조금씩 다르다. 아침에 잠에서 깰 때 아내와 누운 자세가 다르고 길에서 만나는 이가 다르고 버스에 탄 승객이 다르고 폭포 위를 나는 새가 다르고 바에 술 마시는 손님들이 다르다.

시인의 눈은 이 다름을 포착한다. 이 세상의 작은 틈을 열고 그 다름이 주는 가치와 아름다움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러니까 결국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인 셈이다. 패터슨은 무표정하면서도 간혹 미묘한 미소를 흘리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시를 길어 올리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것이 시인 줄을 모른다. 이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인 개가 시작노트를 찢을 때까지는.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그리고 유일한 극적인 장면이라면 애완견 마빈이 그의 노트를 물어뜯어 갈기갈기 파쇄해 놓은 장면일 것이다. 패터슨은 비로소 상실감을 느끼고 폭포공원을 찾는다. 그때 감독은 자신의 시론을 마무리 짓기 위해 느닷없이 일본인 관광객을 등장시킨다. 그 뜬금없는 일본인은 어쩌면 이 작은 시 패터슨을 사랑했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즈의 환생일지 모른다.

그는 패터슨에게 시란 별것 아니고 ‘아하!’ 하는 작은 깨달음임을 깨우친다. 그러면서 빈 노트를 선물하며 이렇게 말한다. “텅 빈 페이지는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이 대사는 바로 감독의 메시지일 것이다. 극장을 나서며 행복이란 큰 거 한방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이어가는 것이란 말이 떠올랐다. 갑자기 우리 삶의 빈틈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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