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크 서브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한국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를 선보인 장윤창(張允昌·59). 마치 돌고래가 수면 위를 튀어 오르듯 날아올라 상대 코트에 날카로운 서브를 꽂아 넣는 그의 ‘돌고래 스파이크 서브’는 수많은 배구 팬들을 매료시켰다. 15년간 국내 배구 코트를 지킨 장윤창 현 경기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를 만났다.
“옛날에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말이 있었잖아요, 거의 수만 마리는 받은 것 같아요. 또 팬레터의 80~90%는 ‘오빠랑 결혼할 거다’라는 내용이었죠. 그래서 제가 답장을 못했어요.(웃음)”
1980~90년대의 한국 남자 배구는 지금까지 통틀어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다. 그 중심에는 ‘왼손 거포’ 장윤창이 있었다. 수많은 배구 팬들이 그의 시원시원한 공격과 스파이크 서브를 보기 위해 경기장에 몰려와 전 좌석을 꽉꽉 채우곤 했다. 그는 아니라며 수줍게 부인했지만, 그가 받았다는 팬레터와 무수한 종이학이 그의 인기를 증명해줬다.
사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남자 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거머쥔 여자 배구팀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8년 세계배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4강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대표팀에는 강만수, 김호철, 강두태를 비롯해 고등학교 2학년의 장윤창도 있었다.
“배구를 처음 시작할 때 장충체육관에서 공이 찌그러질 정도로 때리던 대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꼭 국가대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렇게 꿈에 그리던 선배들과 함께 태릉선수촌에서 운동할 수 있었다는 건 그 나이에 저로서는 큰 행운이었죠.”
한국 남자 배구팀은 세계선수권 4강 진출의 기세를 몰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1979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승을 거뒀다. 국제대회에서의 선전으로 당시 베스트 멤버였던 강만수, 김호철, 이인 등 국가대표 주전들이 잇달아 해외로 진출했다. 웬일인지 ‘철벽 블로커’로 이름을 알린 장윤창은 국내에만 머물렀단 사실이 의아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3개월 동안 뛰면 20만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그 당시에 20만 달러면 강남에 있는 아파트 8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협회에서 저도 모르게 거절했더라고요. 국가대표 주축 선수들이 다 외국으로 나가 있으니깐 저까지 빠지면 전력 손실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거죠. 사실 이때 분노의 스파이크 서브가 탄생했어요.(웃음)”
당시 실망감으로 가득 찬 그는 중동으로 전지훈련을 떠난 대표팀을 뒤로 한 채 한국에서 홀로 방황하는 시절을 보냈다.
“원로 선배들이 ‘아직 앞길이 창창한데 이래서 되겠냐’ 하면서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라고 설득하셨죠. 결국 그분들의 말을 듣고 전지훈련에 합류했어요. 솔직히 연습도 하기 싫은데 스파이크 서브나 한번 해보자 해서 시도한 거죠. 근데 아무도 못 받더라고요. ‘아, 이거 조금만 다듬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스파이크 서브’라는 무기까지 장착한 그는 1984년 처음 열린 대통령배 배구대회에서 고려증권을 우승으로 이끌고 MVP, 베스트6, 인기상까지 휩쓸었다.
15년간의 선수 생활
비교적 선수 생활이 짧은 배구 종목에서 그가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코트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워낙 어린 나이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서 그런지 5년이 지나도 제가 대학생이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팀에서 최고참 선수가 됐고 리더 역할을 해야 했어요. 놀고 싶어도 못 놀고, 딴짓할 생각조차도 못했죠. 어릴 땐 죽어라 뛰었고 나이가 들어선 후배한테 지지 않으려고 죽어라 연습했죠. 속에선 불이 나는데 안 나는 척, 숨이 차서 심장이 터질 것 같지만 괜찮은 척.(웃음) 항상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집착을 했을까, 좀 멍청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는 지금도 그렇지만 선수 생활 내내 몸에 나쁘다는 술과 담배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덕분에(?) 술에 관한 에피소드는 없다고. 그럼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따로 있었냐는 물음에 “개인 연습을 더 하고 등산을 했다”는… 정말 배구만 바라봤던 ‘장윤창’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수많은 경기를 치러왔지만, 그중에서도 그는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예선전에서 일본과 겨룬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배구를 일본한테 배우다 보니 일본팀에게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어요. 일본과 붙으면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을 정도로요. 그래서 패배를 맛본 선배들은 일본과 맞붙는 걸 좀 두려워했어요. 반면 저나 김호철, 강두태 이렇게 세 명은 그런 상황을 몰랐으니까 두려움이 없었던 거죠. 그렇게 신구(新舊)의 조화가 잘 이뤄지다 보니 2대 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3대 2로 역전승을 거뒀어요. 일본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죠.”
네트를 사이에 두고 팀 간 신경전은 없었을까.
“대표적으로 득점에 성공하면 포효하는 방법이 있어요. 기를 확 눌러버리는 거죠.(웃음) 사실 신경전은 바깥이 아닌 코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아요. 공이 공중에 떴을 때 공격하는 사람과 블로킹을 하는 수비수 사이의 눈치싸움처럼요.”
배구선수로서 나름 명성과 내공을 쌓은 그가 왜 배구 지도자의 길이 아닌 교수의 길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제가 은퇴하고 갑자기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어릴 때부터 주목을 많이 받다 보니까 중압감이 컸어요. 팀이 이기면 ‘장윤창 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지면 ‘장윤창이 못해서’라고 하니 그 부담감 때문에 한 번도 마음 편히 운동을 쉬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은퇴 후에는 현장이 아니라 내가 못 해본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경기대학교에서 교직에 몸담은 지도 어언 10여 년째. 그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학생이 교수와 면담한다고 하면 어색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데 제 연구실을 찾아오는 학생들은 편하게 와주는 것 같아 고마워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요?(웃음) 제가 학교에 발 담그고 있는 동안에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알려줄 수 있는 그런 교수가 되고 싶어요.”
받은 사랑 베풀며 살고파
‘함께하는 사람들’은 1999년 장윤창이 창단한 봉사단체로 황영조, 전이경, 유남규, 현정화, 장재근 등 국민의 사랑을 받은 스포츠 스타들이 한마음 한뜻을 모아 매월 양로원, 보육원 등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간다.
“한 번은 비닐하우스 한 동에 70~80명이 사는 곳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어요. 그때가 한창 겨울이었는데 통풍이 안 돼서 그런지 옴진드기가 있는 거예요. 한쪽에서는 옷을 빨고 한쪽에서는 샤워를 시켜주고. 근데 옴이 옮는다고 하잖아요, 저도 모르게 끝나고 샤워하러 가서 소금물로 씻고 또 씻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좀 죄스러워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그동안 잠시 쉬어왔던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답했다.
“일하면서 봉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한 3년간 황영조 선수에게 운영을 부탁했는데 이제 다시 돌아가려고요. 아내가 그 노력을 가정에도 좀 쏟으라고 잔소리하는데…(웃음) 그래도 이해해줘서 항상 고맙죠. 때론 힘들어서 그만해야지, 그만해야지 했는데 이전에 봤던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그만두는 건 쉽지 않을 거 같아요. 국민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돌려드려야죠.”
‘파크(park)’와 ‘골프(golf)’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두 단어를 합친 ‘파크골프’는 생소하기만 하다. 골프와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매력을 가진 파크골프를 배우기 위해 강신영(67), 윤종국(72) 동년기자가 춘천파크골프장을 찾았다.
촬영 협조 춘천파크골프장(강원도 춘천시 서면 현암리 889)
소규모 녹지공간에서 즐기는 골프게임
‘파크골프’는 말 그대로 공원에서 즐기는 골프를 뜻한다. 1983년 일본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1998년부터 보급되어 여의도 수변공원 파크골프장을 시작으로 현재 70여 개의 파크골프장과 2만여 명의 동호인들이 즐기는 생활스포츠로 발전했다. 파크골프장의 크기는 일반 골프장의 10분의 1 정도이며 벙커, 워터 해저드 등 일반 골프장과 다름없는 지형을 갖추고 있다. 대부분의 파크골프장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5000원 안팎의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 가능하다. 또 여러 개의 클럽을 사용하는 골프와는 달리 나무 재질의 클럽 하나로 티샷부터 퍼팅까지 하므로 장비에 대한 부담 또한 적다. 파크골프 지도자 권대현 교수는 “초보자도 금세 감을 익힐 수 있기 때문에 별도의 훈련을 받지 않더라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스포츠”라고 말한다.
강신영 동년기자
‘파크골프’에 대해 들어는 봤으나 거의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골프와 매우 흡사한데 골프의 단점은 없애고 장점을 잘 뽑아놓은 것 같다. 코스가 짧고 홀컵이 커서 기술적으로 골프보다 쉽고 무엇보다 비용이 적게 들어간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윤종국 동년기자
그동안 TV에서 보던 골프장을 축소해놓은 듯했다. 규모가 크지 않아 걷기에도 부담이 없었고 주 이용객이 50~70대의 시니어이다 보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골프가 비싸고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파크골프를 시도해봐도 좋겠다.
파크골프는 매너의 스포츠
파크골프장은 여러 사람과 함께 쓰는 공간이기 때문에 서로 피해를 주지 않는 매너가 중요하다. 공을 치고 난 후에는 그다음 팀을 위해 신속하게 이동해야 하며, 특히 앞 홀이 비어 있고 뒤의 팀이 기다리고 있을 땐 먼저 홀을 지나가도록 양보(패스)해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또 같은 팀원이 샷을 준비할 땐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다. 공이 비슷한 위치에 떨어졌을 경우엔 상호 간 순서를 정한 뒤 차례대로 친다. 순서를 정하지 않고 동시에 샷을 하는 행동은 절대 금한다. 복장으로는 운동화, 운동복이 있어야 하며 필요할 경우 모자를 써도 좋다. 이때 얼굴 전체를 가리는 햇빛 가리개는 제한된다. 운동화, 골프화가 아닌 잔디를 훼손할 수 있는 등산화도 피한다.
강신영 동년기자
에티켓은 그 종목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특히 처음 접하는 종목일수록 사전에 어느 정도 정보를 숙지하고 갈 것을 권한다. 파크골프도 신사 스포츠답게 많은 룰이 있지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쉽게 말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된다.
윤종국 동년기자
파크골프를 처음 배우다 보니 다른 팀보다 진도가 느렸다. 다행히 ‘패스’라는 에티켓이 있어서 뒤 팀은 앞 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앞 팀은 뒤 팀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지 않아도 된다. 서로를 배려하는 문화 덕분에 좁은 공간에서도 많은 사람이 밀리지 않고 파크골프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산책과 운동을 동시에
장비가 없다면 파크골프장에서 1000원 안팎의 비용으로 클럽과 공을 대여할 수 있다. 장비와 복장을 다 갖췄다면 필드에 나갈 준비는 끝. 최대 4명의 팀원이 구성된다면 1번 홀에서 번호뽑기 또는 가위바위보 등으로 티샷 순서를 정한 뒤 홀을 향해 공을 치면 된다. 2번 홀부턴 전 홀에서 최저타한 조원이 첫 번째로 티샷을 한다. 공을 너무 세게 칠 경우 쉽게 OB(코스의 경계를 넘어선 경우)가 날 수 있다. 따라서 힘 조절을 잘하는 게 중요하다. 골프와 똑같이 18홀을 가장 적은 타수로 들어오는 사람이 승리하며 18홀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시간 30분 정도. 파크골프장 3바퀴를 돌 경우 약 1만 보를 걷는 운동 효과를 볼 수 있다. 파크골프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면 파크골프 카페에 가입하거나 각 지부 협회나 연맹을 통해 수업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다.
강신영 동년기자
골프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앨버트로스(규정 타수보다 3타 적게 치는 것)와 이글(규정 타수보다 2타 적게 치는 것)을 여러 번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골프보다 쉽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웃음) 버디를 앞두고 공이 깃대를 맞고 튕겨 나왔을 땐 그 깃대가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윤종국 동년기자
보기엔 분명 쉬워보였는데 막상 클럽을 휘두르고 보니 공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굴러갔다. ‘아이쿠!’ 하면서 동시에 민망함이 몰려왔지만 한 홀 한 홀 발전해가는 모습에 나름 성취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함께한 동료들이 “굿 샷” 하고 엄지를 치켜줄 땐 나도 모르게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들어갈 듯 말 듯, 마치 나와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매력을 지닌 파크골프. 시니어에게 적극 추천한다.
원 투 차차차 쓰리 포 차차차.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 익숙한 박자. 혹시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흔들고 있다면 당신은 잠재적 댄서? 문화에서 이제는 하나의 스포츠로 자리 잡은 댄스스포츠를 김종범(63), 박혜경(67) 동년기자가 배워봤다.
촬영 협조 뷰티풀댄스아카데미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27-8 4층)
생활스포츠로 자리 잡은 댄스스포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댄스스포츠는 15~16세기에 사교를 위한 목적으로 처음 시작됐다. 이후 18~19세기에 오락 요소를 더한 볼룸댄스(ballroom dance), 즉 사교댄스로 발전했고 1991년 올림픽 종목 승인을 얻기 위해 ‘댄스스포츠’라는 용어로 재탄생했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점은 우리나라의 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 한때 사교댄스 교습이 중단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댄스스튜디오, 문화센터, 대학의 교양강좌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생활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댄스스포츠는 빠른 리듬과 열정적인 퍼포먼스가 특징인 ‘라틴댄스(룸바, 삼바, 차차차, 파소도블레, 자이브)’와 우아함과 섬세함이 특징인 ‘모던댄스(왈츠, 퀵스텝, 탱고, 슬로우 폭스트롯, 비엔나 왈츠 포인트)’로 나뉜다. 댄스스포츠를 처음 시작한다면 자신의 취향을 고려해 종목을 선택할 것을 권한다.
김종범 동년기자
옛날엔 춤이라는 게 그냥 고고나 디스코, 블루스 정도가 다였다. 그러다 체계적으로 춤을 배우고 싶어 댄스스포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또 요즘에는 문화센터, 복지관 등에서 저렴하게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기 때문에 새로운 취미생활로도 좋겠다.
박혜경 동년기자
MBC ‘댄싱 위드 더 스타’를 보면서 댄스스포츠의 매력에 푹 빠졌다. 젊을 때만 해도 춤추다 춤바람 난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멋있어 보이기만 했다. 화려한 조명 아래 파트너와 함께 추는 춤이라니.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가.
댄스스포츠, 이것만은 꼭 지키자
향기가 나는 사람과 악취가 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누구와 함께 춤을 추겠는가? 백이면 백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과 춤추길 바랄 것이다. 이처럼 댄스스포츠는 한 쌍의 남녀가 함께 춤을 춰야 하기 때문에 파트너를 위해 예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만 편한 자세를 취한다거나 파트너의 기량에 맞추지 않은 행동은 실례가 될 수 있다. 또 춤을 시작하기 전과 후엔 상대방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댄스스포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화려한 의상이다. 파티에 초대되었다면 장소와 분위기에 맞는 복장을 준비해야 한다. 특별한 드레스코드가 없다면 남자는 단정한 정장, 여자는 원피스를 기본으로 한다. 물론 강습을 받는 상황이라면 간편한 트레이닝복으로 대체할 수 있다.
김종범 동년기자
혼자 추는 춤이라면 막 출 수 있지만, 댄스스포츠는 파트너와 추다 보니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은근히 많았다. 혹시 상대방의 발을 밟진 않을까 배우는 동안 조마조마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고 여성분의 보폭에 맞춰 움직였다. 파트너와의 호흡이 왜 중요한 건지 알 수 있었다.
박혜경 동년기자
‘댄스스포츠’ 하면 가장 먼저 멋있는 의상이 떠오른다. 그래서 체험에 앞서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어떤 신발을 신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라틴댄스, 모던댄스에 따라 신발 모양이 달라지는데 라틴화는 모던화보다 굽이 높았다. 이런 구두를 신고도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반복적인 연습이 중요
처음 댄스스포츠를 시작하면 가슴을 쭉 펴고 허리를 곧게 세우는 과정부터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이때 거울을 보면서 자세를 다듬으면 큰 도움이 된다. 스텝을 배워도 몸 따로 마음 따로 움직이다 보니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황안나 뷰티풀댄스아카데미 강사는 “한 가지 종목을 익히려면 보통 주 1~2회를 기준으로 세 달 정도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댄스스포츠를 배우고 싶지만, 같이 배울 파트너가 없다는 이유로 시도를 못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룹레슨을 찾는 대부분의 강습생이 혼자 오기 때문에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또 개인레슨의 경우 강사가 파트너가 되어 수업을 진행합니다.”
김종범 동년기자
처음엔 자신 있었는데 막상 시작하려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왼발이 나가야 할 때 오른발이 나가고, 오른발이 나가야 할 때 왼발이 나가는 등 실수 연발이었다. 스텝이 계속 꼬이는 와중에 박자까지 맞춰야 하니 마음처럼 쉽게 될 턱이 있나.(웃음) 그래도 몇 번만 더 연습하면 금방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 옆, 제자리에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파트너를 리드하면서 춤출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부부가 함께 배우면 더 좋겠다.
박혜경 동년기자
역시 난 몸치구나 하는 걸 느꼈다. 원래 처음부터 몸치는 아니었다. 한때는 춤 잘 춘다고 칭찬도 들었다. 이럴 때는 세월이 야속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웃음) 다른 사람이 할 땐 정말 멋있어 보였는데 거울 속 내 모습은 왜 이렇게 엉성한 건지. 잘하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줘서 아쉬웠다. 그리고 생각보다 운동량이 많다. 몇 번 움직이니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올림픽 폐막식을 앞두고 치러지는 마지막 경기인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라고도 불린다. 42.195km를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질주도 끝이 난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2시간 13분 23초의 기록으로 결승 테이프를 끊은 마라톤 금메달의 주인공, 황영조(黃永祚·49)를 만났다.
가난해서 달려야 했던 소년
42.195km를 2시간 15분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가정하면 이는 100m 달리기를 422번, 그것도 한 번도 쉬지 않고 매번 18초의 기록으로 들어와야 가능한 일이다. 상상만 해도 숨이 차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런 힘든 종목인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뛰고 싶어서 뛴 게 아니라 뛸 수밖에 없었다고 운을 뗐다.
“돈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 달리기예요.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나가서 뛰면 그만이죠. 저에게 마라톤은 가난했던 시절 유일하게 돈을 받으면서 할 수 있었던 운동이었어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 월사금도 제때 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집안에서 자랐다.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해 항상 야단을 맞았던 미술시간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돈이 없어 못 사온 건데 그게 무슨 죄가 된다고 벌을 서야 하는가.
“교통비도 없었기 때문에 제 두 다리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어요. 학교에 가려면 초등학생 땐 왕복 6km를 걸어야 했고, 중학생 땐 어머니가 어렵게 사주신 중고 자전거를 타고 24km를 달려야 했죠. 운동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생활 자체가 운동이었던 거죠.”
매일 가파른 언덕과 비탈길을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력이 좋아졌고 중학생 때 이를 눈여겨본 운동부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처음 그가 선택한 종목은 육상이 아닌 사이클이었다. 하지만 장비가 워낙 비쌌고 돈이 많이 드는 종목이라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기엔 무리였다.
“옛날엔 돈 없으면 고등학교도 못 갔어요. 근데 강릉에 위치한 명륜고등학교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졸업도 시켜줄 테니 육상부에 들어오라고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거죠. 돈 안 들이고 졸업하면 효도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바로 종목을 바꿨죠. 처음엔 1500m, 5000m 중장거리 선수로 데뷔했는데 늦은 나이에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을 가볍게 제쳤어요. 제가 뛰고 있는 구간엔 같이 안 있으려고 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죠.(웃음)”
1991년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한 동아마라톤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다. 얼떨결에 그의 마라톤 데뷔전이 된 셈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같은 해에 열린 셰필드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마라톤 금메달, 1992년 벳푸-오이타 마라톤대회에선 한국 선수 최초로 마의
2시간 10분 벽을 깨고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 기세를 몰아 1992년엔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최연소 선수로 참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올림픽의 피날레를 장식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금메달은 신이 정해주는 메달”이라고 말한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잖아요. 마라톤도 아무리 열심히 뛴다 해도 경기가 끝날 때까진 결과를 알 수 없는 종목이죠. 그래서 저는 대회에 나갈 때마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단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죽을힘을 다해 뛰자고 마음먹었어요.”
혜성같이 나타난 마라톤 영웅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코스는 현재까지 올림픽 사상 가장 어려웠던 난코스로 꼽힌다. 코스를 살펴보면 우선 항구도시 마타로에서 출발해 25km 지점부터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지나 그라시아 거리, 카탈루냐 광장을 통과한다. 그러다 38km 부근에 도착하면 그 유명한 ‘몬주익 언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213m의 몬주익 언덕에 오르면 바르셀로나 시내는 물론 넓게 펼쳐진 지중해를 볼 수 있다. 26년 전 이 아름다운 무대에서 치열한 레이스가 펼쳐졌다.
“마라톤 최악의 조건이 덥고, 습하고, 경사가 많은 코스인데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코스가 기가 막히게 모든 악조건을 다 갖추고 있더라고요. 기온은 30℃를 웃돌았고 바다를 낀 도시답게 엄청나게 습했어요. 이런 날씨에 몬주익 언덕을 뛰어 올라가야 했으니 사전 답사 때 보고 아이고야! 했죠.”
바르셀로나 시내는 선수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오후 6시,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에 맞춰 선수들이 뛰기 시작했다.
“출발선을 떠나는 순간 주사위는 던져진 거예요. 죽이 될 수도 밥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솔직히 속으론 ‘어느 세월에 다 가냐’ 하는데 한편으론 더 이상 힘든 훈련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후련해지기도 해요. 이때부턴 정말 미친 척 뛰기만 하는 거예요. 머릿속도 다 비워야 해요. 이런저런 생각하면 뛸 수가 없거든요.”
30km를 지나자 선두권 그룹에서 뒤처지는 선수들이 생겨났다. 황영조와 속도를 잘 맞춰오던 김완기 선수도 페이스를 잃으면서 본격적으로 황영조,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황영조가 앞으로 치고 나간다 싶으면 모리시타가 뒤를 바짝 쫓았고, 모리시타가 앞서나간다 싶으면 황영조가 냉큼 따라잡았다. 그렇게 서로를 떨어뜨리고 잡기를 반복했다.
“마라톤이라는 게 그냥 뛰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전략싸움이거든요. 속도 조절을 잘하면서 체력을 비축하고 상대가 방심할 때 그 힘을 폭발시켜서 나가야지 거리를 벌릴 수 있어요. 결승지점을 2km 남겨뒀을 때 모리시타가 속도를 줄이더라고요. 아마 스타디움에서 승부를 볼 생각이었나봐요. 이때다 싶었죠. 이때 간격을 더 벌려두지 않으면 금방 따라올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어요. 모리시타가 아차 싶었을 거예요.”
메인 스타디움에 황영조가 모습을 보이자 스타디움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의 옆에 모리시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영조가 마지막 코너를 돌더니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결승선을 향해 뛰어 들어왔다. 그러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원래 옆에 사람이 있으면 숨소리가 다 들리거든요. 마지막 코너를 도는데 뭔가 나만 뛰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본 거죠. 아, 내가 금메달이구나 싶었죠. 결승선을 밟는 순간 이제 안 뛰어도 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웃음)”
우연의 일치인지 황영조가 금메달을 딴 8월 9일은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날짜와 같았다. 56년 만이었다. 황영조는 스타디움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기정 선수를 찾아가 금메달을 그의 목에 걸어줬다. 당시 외신도 이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손기정 선생님이 식민지 시절 일장기를 달고 시상식에 올라선 역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큰 아픔이잖아요. 근데 외국인들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죠. 선생님의 한을 풀어드린 것 같아 행복했어요.”
선수에서 감독의 길로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딴 마라톤 금메달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이후 2000년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선수단 감독을 맡으며 그의 뒤를 이을 선수를 양성하고 있다.
“요즘 친구들을 보면 간절함이 없어 보여요.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금방 포기해버리니깐 제자리걸음이 될 수밖에 없죠. 훈련할 때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해요. 그 힘든 순간만 견디고 넘기면 정말로 더 큰 무대를 바라볼 수 있거든요.”
유독 뜨거웠던 8월의 태양을 피해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선수단은 강원도 대관령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나마 더위가 식은 오후 6시에 훈련을 시작했지만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선수들의 유니폼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들을 따라가며 “포기하지 마! 바짝 붙어야 해!” 힘껏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간혹가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둥 심장이 요동칠 때 희열을 느낀다는 둥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정말 죽어라 뛰어보지 않아서 하는 소리예요. 마라톤이 재미있는 운동은 아니에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이 늘 요구되는 외롭고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죠. 이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톤에서 앞으로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말고도 언급할 수 있는 선수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게 제가 ‘마라토너’로서 가지는 바람입니다.”
양반 시대가 부활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는 양반과 상민 시대가 있었다. 양반은 하인을 두고 노동력이 들어가는 일은 직접 하지 않고 하인에게 시켰다. 주로 학문을 하거나 벼슬에 올라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했다. 또한, 벼슬에서 물러나면 야인 생활을 하기도 했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쏟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풍류를 즐기는 데 사용했다. 서예, 그림 등의 문화와 예술이 발전하게 된 배경일 수도 있다. 골프가 국내에 들어왔을 때 양반 측의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을 직접 하느냐 반문했다는 우스개도 있다. 골프 자체는 하인이 하고 구경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몸으로 하는 일은 양반의 몫이 아니었다. 양반 시대의 전형적인 생활 모습이다.
형태는 조금 다를 수 있으나 새로운 양반 시대가 오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한 곳에는 인공지능에 의한 로봇이 대신 자리해가고 있다. 특히 힘들고 위험한 일을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로봇이 그 일을 대신하고 있고 생산성 측면에서도 효율성이 높다. 스포츠 용품업체인 아디다스가 동남아 지역 공장에서 본국인 독일로 회귀하였다. 인건비 절감을 위해 동남아 지역으로 공장을 옮겼던 요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로봇으로 인력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어 해외에 공장을 둘 필요성이 사라졌다. 300명의 종업원이 일하던 같은 규모의 생산량을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하여 상주 인력 10명 정도로 해결하고 있다. 사람의 노동력을 대신해가고 있다. 드론도 한몫한다. 앞으로 자동주행 자동차도 그럴 예정이며 일반화할 시기도 가까이 왔다. 그뿐만 아니라 3D프린터도 그렇다. 최근 미국에서 총을 3D프린터로 만드는 기법이 공개되었다. 스탠퍼드대학교 제리 카플란 교수는 그의 저서 '인간은 필요 없다'에서 인공지능 로봇을 인조노동자라 쓰고 있다. 사람은 그 인조노동자를 예전의 하인을 부리듯 하고 그 시간을 학문, 문학, 음악, 춤, 여행 등에 사용하게 된다. 노동하는 시간은 크게 줄어든다. 가히 여가 혁명 시대라 할 만하다. 이러한 모습은 예전의 양반과 상민의 시대를 방불하게 한다. 다만, 하인 대신에 인공지능 로봇이 그 자리를 메꾸고 있다. 새로운 양반 시대의 부활이 아닐까? 신(新) 양반 시대다. 많은 사람이 기계, 로봇에 종속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편리와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인간이 만들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도구로 사용되리라 여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오케스트라와 스포츠의 단체경기는 여러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야만 완성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는 하모니가 중요하다. 좋은 하모니를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개인기도 중요하지만 각자 실력의 힘 조절이 필요하다. 단원들이 함께 모여 계속 연습하고 맞춰보는 것은 이 연습을 하기 위함이다.
단체경기는 한 위치에 배치된 선수가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다른 선수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 감독과 코치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팀 동료 간의 조화가 중요하다.
남들과 어울릴 수 있는 능력은 확대해 보면 오케스트라와 단체경기뿐만 아니라 인생이나 사회생활 전면에서도 필요하다.
미국 동부의 8개의 사립대학으로 구성된 스포츠 연맹을 ‘아이비리그’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이 벌이는 미식축구게임을 일컫는 명칭이기도 하다. 1600년경부터 존재했던 전통 사립대학들은 이 경기를 통해서 우열을 가리기도 했고 즐기기도 했지만, 전통과 경기 실력을 뽐내면서 팀 경기의 중요성을 확인해 갔다.
신입생 선발기준에는 팀 경기 활동 여부가 포함된다. 이를 기준으로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보기 때문이다. ‘책상 공부 실력의 점수가 아무리 높다 해도 협업하는 기능이 모자란 사람이 사회에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는가?’를 채점하는 것은 협업과 소통이 사회공헌의 중요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지구촌 뜨겁게 했던 2018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축구 강팀 독일을 이겼다고 많은 국민이 환호했다.
시합에서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지만, 경기장을 누빈 선수들이 팀워크를 위해 흘렸던 땀이나 노력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1970년대, 육상 투척 종목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깜짝 스타가 등장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투포환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쓴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68)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쩌다 그에게 마녀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현재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있는 그를 만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 몰래 시작한 투포환
남들보다 큰 키와 순발력,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운동신경과 체격을 갖춘 백옥자는 중학생 때부터 농구와 배구를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구기 종목도 꾸준히 했으면 좋은 성적을 거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농구와 배구에서 손을 떼고 투포환을 시작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투포환이 뭔지도 몰랐어요. 어린 마음에 올림픽에는 나가고 싶은데 팀 운동보단 개인 운동을 해서 나가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도전한 거죠. 때마침 인천 지역 신인발굴대회가 있었는데 체육 선생님이 투포환을 해보라며 권유하더라고요.”
그렇게 중학생 소녀의 손에 4kg의 둥근 쇳덩이가 쥐어졌다. 첫 만남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필 해도 괴팍해 보이는 종목이라니… 집에서도 ‘이상한 운동’ 하지 말라며 반대했다.
“처음엔 도시락도 안 싸줬어요. 그래서 용돈으로 자장면, 우동을 사 먹으며 끼니를 해결했죠. 또 훈련하느라 늦는 날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전력 질주했어요. 1분이라도 일찍 들어가서 운동 안 했다고 거짓말하려고요.”
몰래 운동을 이어가던 그는 중학교 3학년, 신인발굴대회에서 신인선수로 발탁됐다. 한국신기록이었다. 언론은 그를 육상 유망주로 소개하며 보도하기 바빴다. 다행히도 이 사건은 부모님의 마음을 돌려놓는 계기가 됐다. 부모의 인정을 받은 그는 곧바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출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별다른 성과 없이 귀국했지만, 육상연맹은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선수촌행이었다.
“집이 인천이었기 때문에 태릉선수촌이 곧 제 집이었죠. 그 당시만 해도 교통이 안 좋아서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경기가 잡히면 전화로 ‘엄마 나 지금 중국 가’, ‘지금 싱가포르 가’ 하면서 당일 통보했죠.”
아시안게임 2연패, 전성기를 맞이하다
1970년대는 그야말로 백옥자의 전성기였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땐 14m 57cm를 던져 금메달을 땄다. 이뿐만 아니라 재미 삼아 출전했던 투원반 종목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인천역 광장에서 인천시장의 영접을 받았어요. 검은 지프를 타고 시청(현 중구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죠.” 매번 경신되는 기록과 메달 행진에 세계도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을 땐 ‘연애 중이라 성적이 안 좋다’, ‘백옥자의 시대는 지났다’ 등 그에게 쏠린 기대만큼 억측성 보도도 함께 쏟아졌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백옥자는 그동안의 설움을 떨쳐내듯 또 한 번 신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당시 그는 신우염을 앓고 있었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이 출전을 알리면서 체격이 좋은 선수들을 대거 내보냈다. 자연스럽게 언론도 백옥자의 2연패냐, 처음 출전한 중국의 메달이냐를 놓고 저울질을 했다.
“다들 180cm가 넘었어요. 거기에 체격까지 엄청나니까 거인 같았죠. 안 그래도 긴장해 있는데 더 무서운 소문까지 돌았어요. 북한도 그 당시 처음 출전했는데 잘하는 남한 선수들을 납치해가니 조심하라고요.(웃음)”
‘삐빅’ 하는 호각소리에 백옥자가 있는 힘껏 포환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지점은 16m 28cm.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도 특별하지만, 자신의 별명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한 대회이기 때문에 더욱 각별하다고 그는 말한다.
“싱가포르 기자가 처음 쓰기 시작한 단어예요. 경기 끝나고 저한테 오더니 ‘마녀’라고 써도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마녀는 좀 그렇지 않나… 했더니 자기 나라에선 마녀가 무서운 이미지가 아니라 마법을 부리는, 멋있는 존재라고 괜찮다는 거예요.(웃음) 에라 모르겠다, 그래라 한 거죠. 그렇게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했어요.”
그에게 ‘아시아의 마녀’라는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봤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차라리 여신이니 미녀니 하는 것보단 마녀가 나은 것 같아요.(웃음) 그 기자 덕분에 지금까지 불리는 멋있는 호칭이 생겼으니 오히려 고맙죠.”
2연패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만찬회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결혼은 한국 남자와 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지 말고 꼭 한국에 살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잘나가던 스포츠 스타는 거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추세였기 때문에 한국 투척 종목의 일인자이던 백옥자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꿈의 광장이자 지옥이었던 선수촌
아시안게임 2연패는 그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태릉선수촌에서도 그는 이미 유명한 연습벌레였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쌓인 날에도 쉬지 않았다. 그가 연습했던 자리엔 포탄을 맞은 것처럼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백옥자 자리’라고 불렀다 한다.
“겨울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투포환이라는 게 포환을 턱 아래에 대고 던져야 하거든요. 꽁꽁 언 모래들이 포환에 묻어서 던질 때마다 턱을 쓸고 갔죠. 그럼 턱이 다 찢어져서 피가 나고 그랬어요.”
인터뷰 도중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엄청 크기도 했지만, 오른손과 왼손이 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손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전 누가 손 보여 달라 그러면 왼쪽 손을 보여줘요. 오른손은 못생겼으니깐.(웃음)”
그의 오른손엔 당시 노력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검지, 중지, 약지는 4kg 포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듯 옆으로 휘어져 있었다. 말 못할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체벌을 받아 엉덩이엔 피멍이 들었고 뺨도 맞아가며 연습했다.
“지금은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누구한테 말해야겠다’, ‘신고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냥 더 좋은 성적을 거두라고 그러나보다 이렇게 생각했죠.”
힘들 땐 몰래 선수촌을 탈출하기도 했다. 들어오는 길엔 후배를 위해 쭈쭈바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외출하려면 도장으로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근데 못 받았을 땐 경비 아저씨한테 살짝 윙크 한번 날리는 거죠. 그럼 아저씨가 이해해주시고 슬쩍 내보내주셨어요.(웃음) 지금은 선수촌 안에서도 아이스크림이니 우유니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럴 수 없었거든요. 우유 하나 더 먹으려면 아주머니께 인사를 100번은 해야 얻을 수 있었어요.”
선수촌의 규율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점심시간이 달랐고 휴게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볼 때도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같이 있는 장면이 목격되는 날에는 풍기문란이라는 명목하에 퇴촌이라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감시가 빡빡한 일상생활에서도 그의 유일한 해방구가 있었으니, 바로 국제대회를 나가는 날이었다.
“국제대회를 나가면 경기장 주변에 항상 클럽이 있었어요. 경기가 끝나면 할 것도 없고 혼자 심심하니까 클럽에 가서 노래도 듣고 했죠. 같이 대회 나간 선배들이 ‘백옥자 어디 있냐’ 하면서 찾으면 후배들이 ‘시끄러운 곳 가면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곤 했대요.”
인생 3막은 지금부터
20대 중반 건국대학교 체육과 동기인 김진도 씨와 결혼한 그는 은퇴 이후 남편을 따라 교직생활을 했다. 더불어 여자 농구선수인 딸 김계령 씨를 돌보느라 여러모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근데 이제는 더 바빠졌단다. 얼마 전 부천대학교에서 은퇴한 그는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선출돼 새로운 출발을 했다.
“옛날 아시안게임 때 만났던 선수들도 이제는 임원이 돼서 한국을 방문하는데 감회가 색다르더라고요. 저도 더 늙기 전에 연맹에 보탬이 되는 부분은 돕고 그래야지요. 또 새로운 육상 인재를 발굴하는 게 목표예요. 우리나라 육상도 어서 부흥기를 맞이했으면 좋겠어요.”
신나는 올드팝과 함께 즐거운 춤사위가 봄바람을 타고 흐른다. 나도 모르게 흔들어댈 수밖에 없는 마력(魔力)에 빠지는 순간! 길가를 지나는 사람도, 서서 구경하는 사람도 손끝, 발끝, 엉덩이, 어깨, 허리를 도무지 주체하지 못한다. 힘찬 함성과 웃음소리의 발원? 바로 라인댄스! 라인댄스!
날씨가 흐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서울지하철 3호선 매봉역에서 내려 양재천까지 걷는데 하늘색이 신경 쓰였다. 꽃눈이 소복하게 쌓였던 4월 어느 날, 양재천 벚꽃길에서 시니어를 주축으로 한 댄스 연합팀이 라인댄스 공연을 한다기에 찾아갔다. 한국댄스스포츠협회 라인댄스분과 이미경 이사를 중심으로 모인 연합팀으로 강남시니어플라자, 의왕국민체육센터와 라인댄스 지도자 동아리 등이 한데 어울렸다. 이미경 이사는 라인댄스를 알리는 것과 함께 춤을 추고 배우는 제자들과 시니어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다양한 무대를 찾아 공연 기회를 잡는다고.
라인댄스란 말 그대로 사람들이 줄을 맞춰 같은 방향을 향해 추는 춤이다. 지나간 시간을 더듬어보시라.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배우 김수로의 꼭짓점 댄스가 기억나는가? 여러 명이 줄을 서서 사방을 돌아가며 추는 군무가 라인댄스라고 생각하면 쉽다. 춤 종류에 구애받지 않고 같은 동작을 함께하는 춤이기에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이날은 20여 명의 라인댄서들이 모여 올드팝은 물론 트로트 가락에 몸을 맡기면서 멋진 무대를 선사했다. 젊음이 넘치는 춤사위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잡아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박수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특히 웨스턴부츠에 카우보이 조끼를 입고 등장한 강남시니어플라자의 시니어 댄서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50대 70대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세련된 율동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함께 만드는 기분 좋은 에너지
라인댄스는 오래전부터 미국의 카우보이들이 즐기던 춤의 한 방식이다. 율동만 같으면 되기 때문에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게 큰 장점이라고 이미경 이사는 말한다.
“카우보이들이 술집에서 한잔 먹고 다 같이 포크댄스처럼 췄던 게 라인댄스의 시작이에요. 지금은 모든 장르의 음악을 다 라인댄스로 엮을 수 있어요. 스포츠댄스, 모던댄스, 삼바, 맘보, 힙합, 펑키, 재즈 모든 음악이 라인댄스로 가능해요.”
시니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몸이 소화해낼 수 있을 만큼만 안무를 짜서 보급하기 때문이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제대로 만든 춤을 추니 성취감에 협동심은 배가된다. 좋은 에너지가 그대로 전해지는 이유가 따로 있겠는가. 춤을 추는 댄서들의 얼굴이 웃음꽃으로 만발했다.
우리 모두 건강한 춤을 춥시다!
이미경 이사는 라인댄스를 한국에 들여온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수로의 꼭짓점 댄스가 인기가 있었지만 월드컵 특수에 맞물려 이벤트로 끝났다. 우연이었을까. 2002년 이후 미국에서 라인댄스를 추는 이들이 늘더니 몇 년 지나지 않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야 말았다. 미국 전역으로 라인댄스가 퍼져나가던 시절, 마침 이미경 이사도 라인댄스를 접할 기회가 생겼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사람이 춤이라니. 하지만 라인댄스는 달랐다. 지금의 삶이 춤과 함께하는 인생으로 바뀐 걸 보면 말이다.
“집안 분위기도 그랬고 저는 정서적으로 춤과 무관한 삶을 살았어요.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정말 우연한 기회에 라인댄스를 알게 됐어요. 그때가 2005년 무렵이었는데 미국에서 라인댄스 붐이 일었어요. 그때 제가 눈이 번쩍 뜨이더라고요. 열심히 배우고 알아가다 보니 미국 YMCA에서 강의도 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2008년도에 한국에 왔는데 라인댄스를 아는 사람들이 정말 없더라고요. 남녀노소에게 이 좋은 춤을 알리려고 노력 많이 했습니다. 요즘 시니어 사이에서는 라인댄스가 제대로 인기예요. 문화센터 대기자도 많고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라인댄스를 배우고 건강해지셨으면 좋겠어요.”
화려한 의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남녀 구분은 더더군다나 없다. 함께 춤을 추는 사람들의 정서와 공감대를 맞춰 춤을 춘다면 라인댄스 아래에서 우리 모두 나이를 잊은 그대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mini interview
힘든 일을 잊게 해줘요! 방인순(69)
학교 졸업한 뒤 가정생활밖에 안 했어요. 어려서는 한국무용을 했어요. 나이가 들면서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도 내 나이에 맞는 운동이 뭐 없을까 고민이 많았어요. 과격한 건 할 수가 없잖아요. 문화센터에 기웃거리다 라인댄스가 저랑 굉장히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건 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들 할 수 있는 그런 춤이더라고요. 한 시간, 두 시간을 해도 관절에 무리가 없어요. 우리 나이에 가장 적합한 운동인 거 같아요. 음악 한 곡 분량이 보통 3분 내지 4분이잖아요. 간결한 동작을 계속 반복하는데 전혀 힘들지 않아요. 아직 라인댄스를 모르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당연히 친구들에게도 많이 전파를 했어요. 줄을 만들어서 같이 신나게 추면 돼요. 최근에 집에 힘든 일이 좀 있어서 쉬다 나왔는데 진짜 활력소더라고요. 춤을 추다 보면 힘든 일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라인댄스 매력에 푸욱~ 박난규(67)
은퇴하고 나서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 올드팝을 배우고 있었는데 같은 반 회원이 라인댄스가 좋다고 해서 하게 됐어요. 운동도 되고 아주 좋은 거 같아요. 배운 지 2년 반 정도 됐는데 아직 병아리 수준입니다. 8~9년 되신 분들도 있거든요. 사실 저는 학교 다닐 때 탁구선수였어요. 춤은 춰본 적이 없어 걱정했는데 선생님도 친절하시고 올드팝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3개월 배우고 난 뒤에 두 번째 등록을 했는데 선생님이 강남시니어플라자 개관공연을 한다고 공연팀을 만들자 해서 참여했어요. 라인댄스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 좋은 춤 같아요. 삶의 활력이 된다고나 할까요? 저는 라인댄스가 여자와 남자가 붙잡고 추는 춤이 아니어서 좋은 거 같아요. 제가 사실 땀이 많이 납니다. 그래서 같이 맞대고 추는 춤은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제게는 라인댄스가 딱 취향에 맞고 좋은 거 같습니다. 아주 깨끗해요.
당구 같기도 하고, 골프 같기도 하다. 망치같이 생긴 도구로 볼을 쳐 편자 모양(U)의 작은 문으로 통과시키면 득점하는 이 스포츠의 명칭은 게이트볼(Gateball). 박미령(65), 전용욱(61) 동년기자가 게이트볼의 매력을 파헤치기 위해 나섰다.
게이트볼, 나도 할 수 있을까?
“경기 시작 5초 전!” 오목교 아래에 위치한 영등포구게이트볼협회 게이트볼장에서 곧 경기가 시작됨을 알리는 힘찬 소리가 들렸다. “5! 4! 3! 2! 1! 경기 시작!” 다시 한 번 소리가 들리자 10명의 선수가 일제히 손목에 찬 시계(득점기)를 누른다. ‘삐빅’ 소리와 동시에 첫 번째 주자로 보이는 선수가 나와 공 앞에 서더니 스틱을 이용해 공을 저 멀리 쳐냈다. ‘통!’ 하는 맑은소리가 경기장에 울린다. “우리 보고만 있지 말고 한번 배워봐요!” 전용욱 동년기자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체험에 앞서 박미령, 전용욱 두 동년기자는 게이트볼이 뭔지 알고 있었을까? “게이트볼 보신 적 있으세요?”라는 물음에 두 사람의 공통된 답변이 돌아왔다. “집 앞 공터나 한강공원에 가면 볼 수 있었어요. 주로 시니어들이 하더라고요.” 그렇다. 본 적은 많지만,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이 스포츠! 바로 게이트볼이다. 영등포구게이트볼협회 김제영 회장은 “게이트볼은 시니어만 하는 운동으로 알려진 것 같아 아쉽다”면서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나 다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게이트볼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80년. 현재 100만 명 정도의 회원들이 즐기는 생활체육이 됐다.
게이트볼 기초 배우기
게이트볼 용구는 스틱, 볼, 득점을 체크하는 득점기가 있다. 망치처럼 생긴 T자 형태의 막대를 ‘스틱’이라 부르고 이 스틱을 이용해 볼을 치면 된다. 경기시간(30분) 안에 볼을 게이트에 통과시켜 가장 많이 득점한 팀이 승리한다.
볼 무게는 230g 정도로 가볍지만 스틱은 보다 묵직한 느낌이다. 스틱은 헤드, 샤프트, 그립 3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헤드와 샤프트가 분리된다. 또 키에 맞춰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가격은 약 10만 원에서 30만 원 선.
스틱을 잡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초보자에게 가장 많이 추천하는 것은 오른손잡이일 경우 오른손을 아래에, 왼손은 위에 두고 공을 보내고자 하는 방향을 바라보고 서서 타격하는 방법이다. 이때 무릎은 너무 굽히지 않는 게 좋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두 동년기자가 자세를 잡아봤다. 말로 설명할 땐 분명 쉬워 보였는데…. “아휴, 생각보다 자세 잡는 것부터 쉽지가 않네요. 저 좀 이상해 보이지 않나요?” 박미령 동년기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색한 듯 웃어 보였다. 이어 스틱을 이용해 타격에 도전했다. 볼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엉뚱한 곳으로 굴러가더니 이내 힘없이 멈춰 섰다. “어머, 저게 왜 저리로 가지!”
게이트볼의 매력
자유롭게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약 1시간 정도 주어졌다. 1분도 쉬지 않고 타격 연습을 하는 걸 보니 벌써 게이트볼에 중독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두 동년기자가 꼽은 게이트볼의 매력은 무엇일까? 전용욱 동년기자는 볼을 칠 때 나는 소리를 꼽았다. “볼을 칠 때 나는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계속 치고 싶더라고요. 잘못 쳤을 땐 ‘괜찮아요~’ 위로하는 소리로 들리고 잘 쳤을 땐 ‘좋아요!’ 하는 응원으로 들립니다.(웃음)” 박미령 동년기자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자연에서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서 좋다”고 말했다. “나이가 드니깐 야외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 별로 없더라고요. 근데 게이트볼은 한강공원과 같은 휴식공간에서 할 수 있어 좋아요. 또 몸에도 큰 무리가 되지 않아 부담이 없고요.” 지금까지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었다면 이젠 도전해보자.
동년기자 체험 후기
박미령 동년기자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건 쉬워 보였는데 왜 제가 할 땐 어려운 거죠? 마음 같지가 않네요.(웃음) 나이는 자꾸 먹고 운동은 점점 더 안 하게 되고… 새로운 운동 뭐 없을까 하다가 이번 게이트볼 체험에 신청하게 됐어요. 운동신경은 발달하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특히 게이트볼은 지나갈 때 슬쩍 보기만 했던 거라 더 궁금했어요.
처음 해본 소감은 음… 조금 어렵다?(웃음) 잘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근데 몸치인 저에겐 연습기간이 좀 많이 필요할 것 같네요.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면 친구나 배우자와 함께 오면 더 재미있게 배울 수 있을 거예요. 벚꽃 흩날리는 날에 야외에 나와 운동도 하고 수다도 떨고, 공이 잘 안 맞아도 기분만큼은 최고네요!
전용욱 동년기자
‘게이트볼은 노인만 하는 스포츠’라는 선입견을 깨준 하루였어요. 사실 ‘저게 얼마나 운동이 되겠어?’ 했는데 충분한 운동이 되네요.(웃음) 공을 치려면 팔을 써야 하고, 또 공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려면 다리도 써야 하죠. 여기서 끝이 아니더라고요. 동시에 볼을 어디로 어떻게 보낼지 생각도 해야 하니까 두뇌 운동이랑 전신 운동을 같이 하게 되는 스포츠더군요. 스틱 무게가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서 좋았어요. 누구나 경기운영 감각만 익히면 재미있게 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게이트볼의 가장 큰 매력은 공을 칠 때 나는 ‘통!’ 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둔탁하지 않고 상당히 맑은 소리? 그 소리에 중독돼서 자꾸만 공을 치고 싶더라고요.(웃음) 거기에 또 공을 잘 맞혀서 게이트를 한 번에 통과하면 스트레스도 쫙 풀리는 게… 너무 좋았어요. 룰이 생각보다 까다롭더라고요. 그냥 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더 즐겁게 게이트볼을 즐기고 싶다면 룰을 제대로 알고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