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수명과 생물학적 수명의 간극은 시니어들을 가장 고민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직업은 단지 경제적 자원을 얻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인생의 보람, 즐거움 심지어는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자격증을 선택하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 결국 취업이든 창업이든 기술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니어들을 위한 자격증, 무엇이 좋고 어떻게 딸 수 있을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시니어들의 자격증에 대한 관심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은퇴 후 삶을 대비하기 위해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하는 50~60대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이 발간한 를 살펴보면 2015년 50대 자격증 취득자는 2011년 2만6307명에서 2015년 3만8260명으로 45.4% 늘었다. 65세 이상 고령자도 2011년 571명에 불과했던 것이 2015년에는 1017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은 78.1% 증가했다.
자격증 수요와 효용가치 잘 따져봐야
자격증은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뉜다. 특정 기술에 대한 기능자격을 국가가 관리하는 국가기술자격이 있고, 기술 외 전문 분야에 대한 자격인 국가전문자격 그리고 민간자격증이다. 국가기술자격과 국가전문자격은 크게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시행하는 자격과 한국콘텐츠진흥원이나 한국인터넷진흥원과 같은 관련 정부산하 기관에서 시행하는 자격으로 나뉜다. 이런 자격증에 관한 일반적인 정보는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관리하는 포털사이트Q-net(www.q-net.or.kr)에서 자세히 검색할 수 있다.
자격증은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모든 자격증이 취업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일부 민간자격증의 경우 자격증 취득을 위한 교육과 응시비용 자체를 ‘수익 모델’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잘 따져봐야 한다. 물론 민간자격증도 업계에서 공정성과 권위를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자격증 획득 전에 발급기관 연혁이나 회원수, 자격 보유자수 등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또 취업사이트에서 검색을 통해 해당 자격증 보유자를 구인하는 기업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는 것도 방법이다.
전액 공짜! 기술교육원을 아시나요
보통 자격증 취득을 생각하면 가까운 지역 학원에 가서 수강료를 내고 수업을 통해 응시 준비를 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니면 온라인 학원을 통해 교재를 산 뒤 최근 유행하는 인터넷 강의에 참여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운전면허증에서 공인중개사까지 마찬가지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만약 모든 교육을 무료로 들을 수 있는 교육기관이 있다면 어떨까. 자격증 취득과 취업 알선까지 지원해주는 공립기관 중 대표적인 기관은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기술교육원이다. 서울시 기술교육원은 동부, 중부, 북부, 남부 4개 기관이 운영되고 있으며, 4개 기관에서 1년짜리 정규 과정 53개 학과 1842명, 단기과정 25개 학과 915명을 교육시키고 있다. 교육 과정은 취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격증 취득을 우선시한다. 또 예산으로 진행되는 만큼 수료 후 취업자들에 대한 모니터링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일단 합격만 되면 수료 때까지 교재와 실습 재료비를 포함해 전액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취업 알선과 취업 후의 생활 상담까지 가능하다. 일부 과목의 경우는 협력기관, 프로그램에 따라 교육 지원금까지 제공받을 수 있고, 수업시간이 긴 과목은 점심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렇게 제공되는 혜택이 많다 보니 경쟁률이 만만치 않다. 과목에 따라 경쟁률이 2대 1에서 4대 1을 넘기도 한다. 전형은 면접이 50%, 서울 거주기간(5년 이상 만점)에 따른 배점이 50%다. 면접에서는 기술을 익히려는 뚜렷한 목적이나 계획을 중점적으로 심사한다.
전통기술에서 첨단기술 분야까지 다양
교육 현장의 실무자들은 시니어들의 자격증 취득에 대한 관심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높다고 말한다. 남부기술교육원의 남혜성 팀장은 현장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시니어 교육생들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20%대까지 늘었고, 시니어들의 관심이 큰 학과의 경우는 40~50% 정도까지 비율이 늘었습니다. 창업 등을 고려해 바리스타나 외식조리학과를 지원하는 중·장년층도 많아졌고, 옻칠나전, 조경관리와 같은 분야도 시니어들이 많이 관심을 갖는 분야입니다.”
취업에 유리한 자격증 취득을 위한 학과도 인기가 높다. 예를 들어 전기학과의 경우 전기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건물 관리인 등으로 취업하기 쉬워 남성 중·장년층이 많이 찾는다. 여성 중·장년층은 피부미용 관련 자격증을 통해 피부과, 성형외과, 피부관리실 등에 취업한다.
최근 구인 수요가 가장 많이 늘어난 자격증 중 하나는 요양보호사다. 치매·중풍 등 노인성 질환으로 독립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노인을 위한 노인요양보호시설이 늘어나면서 인력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 그러나 궂은일을 꺼리는 추세와 저임금의 처우까지 겹쳐 여전히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분야와 같은 첨단 분야의 교육도 진행된다. 관계자들은 매년 새로 생겨나는 자격증이나 취업시장의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중부기술교육원의 박훈균 팀장은 “신재생에너지PM(프로젝트 매니저)학과가 대표적이죠. 전력 직거래를 통해 태양열과 같은 신재생 에너지의 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의 교육입니다. 협동조합에 취업하는 경우도 많지만, 토지나 자본이 있으신 분들이 직접 사업화하기 위해 교육을 받으시는 경우도 많습니다”라고 귀띔한다.
무엇을 할지 몰라도 방법은 있어
은퇴를 앞둔 시니어들 중 상당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실제로 상담을 신청하는 시니어 중 대다수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실무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자아실현, 취업을 통한 생계유지나 창업, 자기계발 등 어떤 목적을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전문가와 함께 찾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목표가 설정되면 그다음부터는 교육 과정 속에서 함께 고민을 하므로 쉬워진다.
중부기술교육원 한국의상학과의 김경미 교수는 기술 전달뿐만 아니라 취업이나 창업 이후까지도 고민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최근 개량 한복이 인기를 끌면서 한복 분야도 다양해졌어요. 중·장년 학생들은 창업에 관심이 많고요. 학생들과 옷 만드는 방법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주소비자로 떠오르고 있는 젊은 층이나 외국인들에게 한복을 어떻게 홍보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남부기술교육원에서 옻칠나전공예를 가르치는 임충휴 명장은 교육의 효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전칠기를 활용해 창업을 준비하시는 시니어들도 적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중·장년층이 섞여 수업을 하다 보니, 오랜 경험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시너지 효과를 내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양한 제품으로 응용이 시도되기도 하고요. 저 역시도 전통적인 디자인과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학생들의 아이디어에서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각 지역 기술교육원은 이달 중순까지 수강생을 모집 중이다.
11월 22일은 대한민국김치협회에서 지정한 ‘김치의 날’이다. 김치 재료 하나하나가 모여 발효 과정을 거치면 22가지 효능을 낸다는 의미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김치의 날에 태어나 김치와 한평생을 동고동락한 이가 있다. 바로 포기김치명인 2호 유정임(兪貞任·61) 풍미식품 대표다. 소금에 절인 배추가 양념과 함께 숙성되듯, 인생의 우여곡절을 버무려 명인의 삶으로 승화시킨 그녀에게 김치는 우연이 아닌, 운명과도 같았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누가 김치를 사 먹어? 미쳤군!”
30년 전, 김치를 사 먹는다는 것은 생소하고 의아한 일이었다. 당시 김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던 유 대표 역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명함을 건네면 뒤에서 박박 찢어버리는 이도 있었고, 험한 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다행히 솜씨 좋은 유정임표 김치는 금세 입소문을 탔고 김치를 사서 먹겠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고난도 끊이지 않았지만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그녀에게 결코 포기란 없었다.
“치욕스러울 때도 많았어요. 그럴수록 더 잘하자고 마음먹었죠. 김치는 기계로 찍어내는 게 아니잖아요. 그해의 배추 농사나 재료의 질,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좌우되니 김치 맛이 늘 똑같을 순 없죠. 그래서 힘든 점이 많았어요. 한번은 배추밭을 사놨는데 수확시기에 가보니 노랗게 배추꽃이 펴 있더라고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죠.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어요.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를 파악하고 점검하며 해결 방법을 찾으려 했죠. 매해 환경이 달라지니 여전히 공부하고 있는 셈이에요.”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만을 사용하는 게 원칙
15평 다락방에서 김치를 팔던 평범한 주부가 2000평 규모의 연 매출 100억원에 달하는 식품회사 대표가 되기까지, 그녀는 지난 30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환희의 순간도 많았겠지만, 그동안의 우여곡절을 떠올리는 듯한 말투였다. 달콤했던 순간에 현혹되기보다는 쓰디쓴 나날들을 기억하며 경각심을 잃지 않는다는 유 대표다.
“승승장구하다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게 사업이잖아요. 오너는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해요.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외부에 있다가도 회사에서 전화가 오면 불안해지곤 하죠. 그런 긴장감이 나를 채찍질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것 같아요. 김치명인이 되고 인증패를 받던 날에도 기쁨보다는 잘 지켜야겠다는 부담이 컸어요. 그때부터는 옷차림도 화려하지 않게, 수수하지만 격식을 갖춰 입고 행동도 겸손하게 하려고 노력했죠.”
그녀는 사무실 한편에 드레스룸을 마련했다. 특별한 상황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알맞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다. 인터뷰 당일에도 캐주얼한 차림으로 다른 일정을 마치고 온 그녀는 “5분만!”이라고 외치더니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하루에 5~6번 옷을 갈아입을 때도 있다는 유 대표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다. 회사를 경영하며 한국농식품여성CEO연합회 회장, 대한민국김치협회 이사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수원시 제12대 혜경궁 홍씨로도 선발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김치를 만드는 일’에는 소홀함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아침에 출근하면 바로 현장부터 내려가요. 배추가 잘 절여졌는지, 깍두기를 얼마나 담그고 열무를 몇 단이나 다듬어야 하는지 등을 직접 점검하죠. 만드는 김치를 매일 맛보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당연하죠. 그게 내 일이니까요.”
본업에 충실해야 다른 일도 떳떳하게 마음놓고 할 수 있다는 유 대표는 김치를 만들 땐 좋은 재료가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만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단다. 그해 상황에 따라 배추 등 채소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도 있지만 그녀에게 가격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조금 손해를 보면 봤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재료의 품질을 낮추는 일은 절대 없다.
“싼 김치를 만들어 팔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우리 김치를 지켜낸 건 정말 잘한 일 같아요. 사업이라는 게 잘될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는 건데 얕은수를 써가며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이윤만 따졌다면 맛과 신뢰를 잃었을지도 모르죠. 나와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김치를 담갔고, 앞으로도 그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김치는 재료의 품질도 좋아야 하지만,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드는 식품인 만큼 만드는 이의 ‘손맛’ 또한 중요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김치를 담가야 그 맛도 좋아진다는 게 유 대표의 생각이다. 그래서 간혹 부부싸움을 하고 왔거나, 안 좋은 일이 있는 직원은 김치 담그는 작업에서 제외시키고 다른 업무를 보도록 한다. 만드는 사람의 감정이 김치 맛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그래왔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직원들의 속사정까지 살피는 유 대표의 살뜰한 모습이다. 이러한 면모는 ‘사원은 가족처럼’이라는 풍미식품의 사훈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 회사는 정년도 없고, 나이에 대한 기준도 없어요. 누구든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함께할 수 있죠. 80세가 넘었는데도 김치를 담그는 분이 계시고, 70대 직원도 많아요. 모든 김치의 속을 내가 다 채울 수는 없잖아요. 나를 대신할 직원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필요하죠. 서로 가족처럼 여기고 믿고 의지하며 일하는 게 바탕이 돼야 해요. 그런 분위기가 원활히 회사를 경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다
풍미식품의 경영 목표 중 하나는 ‘수입의 사회 환원’이다. 김치를 만드는 곳이므로 김치 기증이나 김장 봉사 활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 목표를 이뤄가고 있다. 올해 9월, 유 대표는 아너소사이어티(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클럽)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회사 자금이 아닌, 그동안 강의 활동 등을 하며 모은 개인 재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뜻 내놓은 것이다. 밤낮으로 김치만 생각하며 어렵게 번 돈이지만, 그렇게 거액을 기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유년시절의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 대신 동생들 끼니를 챙겨주곤 했어요. 당시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못 갔고 졸업도 미뤄졌었죠. 아마도 그런 아픔 때문에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예전의 나처럼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학용품을 사주거나 학비를 지원해줄 때 가장 행복하고 가슴이 벅차요. 내 작은 도움으로 한 아이가 꿈을 키우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자다가도 즐거워진다니까요. 방에 분홍색 돼지저금통이 하나 있거든요. 번외 수입이 생기면 거기에다 돈을 모아 일 년에 한 번씩 직원 중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노인복지회관 등에 기부하고 있어요.”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진도 팽목항에 김치를 보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든 김치가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길 바랐다. 대개 김치를 기증한다고 하면 상품가치가 떨어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도 있지만, 그럴수록 따뜻한 마음을 담아 더 좋은 김치를 내놓는다는 유 대표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본다는 그녀는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김치’, ‘직원들을 가족처럼’ 등 인터뷰 내내 가족이라는 말을 내려놓지 않았다. 여성 직장인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살림도 하고 엄마 역할도 해내야 하기 때문에 1인 2역의 고충이 있다고 토로한다. 유 대표 역시 예외는 아닐 터.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그리고 여사장은 더 강하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행여나 사업에 실패해서 가세가 기울면 우리 가족이 나를 원망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남편과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내, 엄마이고 싶어 더 악착같이 일했어요. 그런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더라고요. 사업을 하기 전에는 음식 솜씨가 좋아서 가족들에게 맛있는 반찬도 자주 만들어줬는데, 그런 게 소홀해져서 미안하죠. 이제는 아이들도 바빠져서 일주일에 한 번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한 건 꼭 우리 가족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요. 여느 가족들처럼 우리 가족도 같이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려 노력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사업이 30년 동안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외조 덕분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은 남편의 이해와 신뢰가 없으면 사업하기 힘들어요. 저녁에 업무 약속이 잡히거나 거래처에 가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남편이 간섭하거나 불편한 소리를 했다면 지금처럼 왕성하게 일하지 못했을 거예요. 늘 감사한 마음이죠. 가끔 식당에 가면 ‘고객을 가족처럼’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은 편하니까 허물없이 대하고 잔소리도 하지만 고객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가족을 고객처럼’이라고 반대로 말해요. 그렇게 하고 나니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지더라고요.”
글로벌 김치 홍보대사가 되는 게 꿈
김치에 대한 열정과 가족의 지원으로 회사를 잘 키워가고 있는 그녀에게 ‘성공’이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나 정작 유 대표는 ‘성공’이 아니고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성공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면 자칫 안일해질 수 있기에 거리를 두기로 한 것. 늘 그렇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이끌어왔지만, 요즘은 그 끝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그때까지 지금처럼 일할 수는 없잖아요.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칠십 정도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 적임자에게 회사를 물려줘야겠죠. 사업을 이어받아 잘 키워나갈 수 있는 자식이 있으면 승계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꺼이 사회에 환원하려고 합니다.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나면, 그때부턴 교육사업이나 강의 등을 하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남들처럼 여행도 가보고요. 그런데 일 중독인지는 몰라도 아직은 놓지 못한 것들이 많아요. 천천히 하나씩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겠죠.”
노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나 봉사를 하며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유 대표는 일찌감치 레크리에이션과 성교육 자격증 등도 따놓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노후생활을 설명하다가 어느새 김치 이야기를 하며 눈을 반짝였다. 아직은 내려놓을 때가 아님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만큼 살아보니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더라고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매일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을 열정적으로 사는 게 지혜로운 것 같아요. 하지만 나름의 꿈과 목표는 있어야겠죠. 그것이 매 순간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해주니까요. 요즘 내 목표는 김치 홍보대사가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계시는 세계 대사들을 모셔와 김치 담그기 퍼포먼스를 하고 싶어요. 대사들이 담근 김치는 각 나라로 보내고요. 그러면 우리 김치가 전 세계인의 식탁에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제 꿈입니다.”
지난 23일, 서울시 중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단행본 출간 기념회가 있었다.
20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된 에어비앤비는 자기 집, 혹은 집의 일부분을 숙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또 찾는 일종의 ‘인터넷 장터’다. 특히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일상생활도 하면서 자신의 집 남는 공간을 빌려주는 형식이기 때문에 은퇴 뒤 제2의 인생을 사는 시니어 세대에게 매력적이다. 반면, 지금까지 우리의 정서상 사촌이나 혈육이 아닌 사람에게 집을 내어주는 것이 납득 가지 않는 부분도 있을 듯. 은 에어비앤비에 관한 이해를 돕고 시니어 호스트의 참여를 바라는 마음에 나온 책으로 에어비앤비의 ‘시니어 호스트(50세 이상의 호스트)’ 12명의 이야기를 실었다.
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들
는 지난 2월부터 7월까지 [여행 속으로]라는 섹션으로 에어비앤비 시니어 호스트의 이야기를 담아왔다. 본지를 통해 소개했던 4명의 시니어 호스트가 마침 12명으로도 소개돼 출간기념회에서 다시 한 번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2월 ‘여유가 흐르는 집’으로 소개했던 파주 헤이리 모티프원의 이안수씨. 파주 헤이리예술마을 촌장이자 에어비앤비에서 강력 추천하는 시니어 호스트 중 한 명이다. 흰 수염 곱게 내리고 너털너털 웃으면 함께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나이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여자에게 ‘누나’라 부르지만 본인은 정작 특별한 호칭으로 불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젊은 날 잡지사 국장까지 지냈다는 이안수씨는 자유롭게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자신의 집 또한 세계가 통하는 플랫폼으로 만들어 놓아 소통하는 중이다. 최근 (남해의 봄날)이라는 제목으로 ‘모티프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냈다.
4월 ‘도심 속에서 어머니의 품을 느끼다’에서 소개된 ‘북촌유정’의 박소자씨와 남편 이형술씨도 만날 수 있었다. 남편 이형술씨는 ‘북촌마을’의 촌장으로 ‘북촌’이라는 지명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북촌유정은 종로구 계동의 작은 한옥으로 에어비앤비 호스트뿐만 아니라 미술작가들의 갤러리로도 활용하고 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하기 전 오랫동안 하던 자원봉사를 못하게 돼 우울증세를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삶의 의욕과 활력을 되찾았다는 박소자씨. 시니어 호스트로서 건강하게 손님들을 맞이하며 여전히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5월 옥상정원에서 만났던 김향금씨는 아름다운 외모 덕에 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이날 오전에 있었던 기자 간담회와 함께 출간 기념회에 다니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는 김향금씨. 곱게 생활한복을 입고 나와 책과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대표하는 표지모델로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김향금 씨는 지난 3월,서울 리빙 페어에서 처음 만났다. 에어비앤비를 홍보하는 시니어 호스트로 방문객 맞이하며 활동적인 액티브 시니어의 모습을 보였다. 김향금씨의 옥상정원에서는 맛있는 커피도 내려주고 또, 타로카드도 직접 봐주기도. 취재 때 꽃이 없어 서운했는데 꽃이 지기 전 꼭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마지막으로 7월에 1박 2일로 방문했던 영월 앞뜰농장의 주인 장미자씨. 장미자씨의 앞뜰농장은 소프트웨어가 강한(?) 에어비앤비다. 활동할 것뿐만 아니라 먹을 것도 많은 곳. 1박 2일 동안 장미자씨를 따라가 술을 만들고, 밭에 나가 풀을 뽑고, 동네 언니들과 장미자씨 뽕밭에서 오디도 따며 완벽한 시골 생활을 즐겼다. 아쉬운 점 하나! 영월 맑은 다슬기를 좀 채취를 했어야 했는데 못하고 왔다. 좀 더 추워지기 전 꼭 한 번 방문해야겠다.
는 활기차게 살아가는 시니어 세대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에어비앤비의 시니어 호스트처럼 멋진 제2 인생을 살아가는 시니어들을 를 통해 발굴하고 또 소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모티프원, 북촌유정, 옥상정원, 앞뜰농장은 소개된 시니어 호스트들이 살고 있는 집의 이름이다.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젊음의 거리 홍대. 개성 넘치는 오색 길을 따라가다 보면
유유자적 걷기 좋은 길을 만나게 된다. 최근 ‘핫’한 장소로 떠오른
서울 마포구 연남동이다. 그런데 겉만 보면 그냥 사람 사는 평범한 동네다.
왜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고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면
용기 내어 뒷골목에 발 디디라. 바로 그곳에 동진시장이 숨어 있다.
연남동 동진시장(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198)은 매주 토요일, 일요일에만 서는 7일장이다. 이곳에서는 각종 액세서리를 비롯해 생활한복, 디퓨저(방향제), 가죽 제품, 잼 등이 판매된다. 평일 내내 조용하던 공간은 주말이 되면 사람들이 와서 정을 나누는 다정한 장소로 변한다.
동진시장은 원래 연남동 주민들이 애용하던 작은 재래시장이었다. 채소를 비롯해 소소한 생활필수품을 팔던 곳. 대형 마트의 등장으로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췄다.
시간이 흘러 이웃하던 홍대 상권은 포화 상태가 됐고, 옆 동네로 상권이 번지다 연남동까지 카페와 술집들이 밀고 들어왔다. 그 사이에도 동진시장은 여전히 사람의 발길이 끊긴 채로 먼지만 쌓여갔다.
이곳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4년 전. 사회적 기업이 모여 만든 ‘모자란 협동조합’이 동진시장을 찾아냈다. 싸늘한 감은 있었지만,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따뜻한 시장 모습 그대로였다.
공정무역이나 농산물 유통, 재활용 사업을 하는 사회적 기업 협동체 ‘모자란 협동조합’은 애초에 자신들의 물건들을 팔기 위해 이 장소를 임차했다. 또한, 지역 예술가나 홍대에서 밀려난 작가들과 협업해 재미난 장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각종 채소 재활용 물건을 판매하고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젊음의 거리 한편에서 농산물을 팔아 이익 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을 좀 달리했다. 시장에서 일할 판매자 이른바 ‘셀러’들을 모집했고 플리마켓(벼룩시장) 형태를 갖춘 지금의 동진시장으로 모습을 바꿨다. 대신 재래시장 원형을 그대로 두고 그 안에 젊은 취향의 제품을 채워 넣었다. 처음 취지처럼 예술가들의 전시도 꾸준히 하고 있다.
한동안 열지 않았던 농산물 판매는 4월 말 재개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엔 ‘팜 페스트’라는 이름의 농산물 판매장이 선다. 문화와 사람이 어울려 매일이 즐겁고 재미있는 곳이 바로 이곳 아닐까.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5월, 에코팩 하나 들고 동진시장으로 향해보라.
서울 종로구 원서동, 창경궁 돌담길을 지나 걷다 보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아한 한옥들과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옹기종기 장독들이 따스한 햇볕을 머금는 곳이 있으니, 바로 ‘궁중음식연구원’이다. 1971년 궁중음식의 대가이자 인간문화재인 황혜성(黃慧性·1920~2006) 선생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을 전수하기 위해 마련한 곳으로, 현재는 맏딸인 한복려(韓福麗·69) 궁중음식연구원장과 둘째 딸인 한복선(韓福善·67) 한복선식문화연구원장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그들에게 궁중음식이란 어머니의 삶이자, 한국 식문화의 큰 줄기, 그리고 곧 자신들의 삶과도 같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복려 원장과 한복선 원장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 보유자다. 자매의 어머니이자 큰 스승인 황혜성 선생에게 전수 받았는데, 셋째 딸인 한복진(64) 전주대학교 전통음식문화과 교수도 같은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현재 한복진 교수는 일본에서 연구 중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대개 ‘세 자매가 어머니를 닮아 같은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한국 식문화라는 큰 줄기를 이어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저마다의 특성을 살린 곁가지를 뻗어가고 있다.
“(한복선)각자의 성품이나 재능을 살려 저마다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언니는 맏딸로서 엄마의 연구원을 맡아 기능 전수와 교육을 위한 책임을 다하고, 저는 해외 생활과 TV 프로그램 경험 등을 살려 실생활 궁중음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죠. 셋째는 대학 교수니까 전문적인 연구와 학생 지도를 하며 인재 발굴에 힘쓰고요. 어머니가 활동하실 적에는 ‘요리 연구가’라는 말도 잘 안 쓰이던 시절인데, 요즘은 요리 분야도 아주 다양해졌잖아요. 어머니가 일궈놓으신 것들을 바탕으로 더 넓고 깊게 우리 식문화를 알려야죠.”
우리가 물려받은 것은 재산 아닌 정신
가업을 이어가는 형제들 사이에는 다툼이나 경쟁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들 자매는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처럼 정답고 사랑이 넘친다.
“(한복려)우리는 물질적인 재산을 물려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당신의 정신과 배움을 우리 자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어요. 그것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요. 저도 아들이 있는데, 그 아이는 요리를 전공하지 않아요. 그래서 기능적인 부분을 전수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물려받은 정신만큼은 이어주기 위해 집안일에 어느 정도는 참여시키고 있어요.”
그렇다고 황혜성 선생이 유형의 재산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순히 기능적인 전수나 손재주에 그칠 수 있는 궁중요리라는 분야를 글과 책을 통해 역사적 산물로 탄생시킨 것은 가보인 동시에 우리 식문화의 보물과도 같다.
“(한복려) 내 어머니의 것이라 해서 지키고 물려주는 것 그 이상의 책임감을 갖고 있어요. 책만이 아니라, 물건들도 있고 해서 이런 것들을 모아 황혜성 자료관 등의 이름으로 내려고 해요. 어머니는 한국 궁중음식 역사의 큰 표적과도 같으신데 우리가 무언가를 정립해서 다독거려 놓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잊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커요. 어머니 제자들도 많기야 하지만, 자식이자 제자인 제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니 얼마가 걸리더라도 해내려고 해요.”
자매가 뜻을 모아 하는 일에 한복선 원장의 딸인 정라나 경희대 호텔관광대학 교수도 합세했다. 강 교수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현재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복선)할머니가 손주 진로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주셨죠. 딸이 미대를 다닐 때 담당 교수가 미술 쪽은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뉴욕에 있는 요리 학교를 보내려던 참이었어요. 어머니께서 일본에서 조리 공부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죠. 그때 손주의 입학식에도 같이 가시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어요.”
역시 피는 못 속여~
가장 좋은 스승이었던 어머니에게 배운 덕일까? 자매가 일을 대하는 방법이나 모습에는 황혜성 선생의 면모가 배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음식을 하는 어머니의 손길만 닮는 것은 아니었다.
“(한복선)어머니는 꼭 친구들을 모아 여행도 다니고 먹을 거며 뭐며 다 대접해주셨어요. 연로하셔서 몸도 힘들고 하실 텐데 왜 저렇게까지 하실까 했는데, 요즘 제가 딱 그래요. 내가 자리를 만들고 베푸는 게 훨씬 즐겁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전에는 어머니의 그런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했는데, 이젠 그런 마음이 이해돼요.”
황혜성 선생의 따스함을 닮은 이가 한복선 원장이라면, 어머니의 단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이가 한복려 원장이다. 이는 맏이로서 느낀 책임과 부담감을 숙명으로 여긴 데서 나온 성품이기도 하다.
“(한복려) 동생들이 나 같으면 그렇게 못 산다고 얘기해요. 대를 이어가는 자식으로서 사람들이 ‘어머니는 훌륭한데 딸들은 그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 점에서 동생들보다 어깨가 더 무거운 것 같아요. 제가 잘 이끌고 우리가 노력해야만 ‘역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한복은 참 아름답다. 가지런히 역삼각형으로 내려오는 새하얀 동정 깃에 고운 빛의 저고리와 치마가 이루는 조화는 세계의 어느 나라 드레스에 비할 바 없이 멋지다. 예쁜 색상과 날렵한 선도 멋지지만 음식을 많이 먹어도 배가 감춰지는 치마의 풍성함도 좋다. 그러나 제대로 갖춰 입으면 행동하기에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어 상용하는 옷이 되기에는 힘들다는 생각으로 명절 때나 찾아 입게 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거리에서 한복 입은 아가씨가 눈에 띄인다. 특히 서울 삼청동부터 광화문까지 거리엔 한복을 차려입은 아가씨가 많이 보인다. 삼청동, 광화문뿐 아니라 인사동 근처에서도 한복 차림의 젊은 여성을 자주 볼 수 있다.
일본 지자체가 관광지에서 일부러 기모노(着物)를 입고 다니게 해 그곳의 명성을 높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한국의 한복 아가씨도 특별히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아름다운 한복을 선보이려고 서울시가 진행하는 행사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특정 지자체가 입혔다고 생각한다면 이들의 한복 차림엔 큰 문제점이 있다. 대부분 한복 아가씨가 단정하게 머리도 땋고 댕기도 들였으나 그중 일부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머리는 산발한 듯 풀어헤치고 치마의 뒷부분은 여미지 않은 채 벌어져 속에 입은 청바지가 훤히 나타났다. 이렇게 입을 거면 입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기자는 당연히 이 일을 벌인 곳이 서울시라고 여기고 다산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보았던 보기 싫은 모습에 대해 주의해 달라고 건의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산콜센터에서는 들은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화부 소속 어느 전화번호를 알려주기도 했지만, 그곳에 문의해 봐도 거리의 한복 아가씨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한다.
그러면 거리에서 보이는 수많은 한복 아가씨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러던 중 인사동에 갈 일이 생겨 창덕궁 앞 정류장에 내렸는데 마침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많이 눈에 보였다. 앞쪽에 즐겁게 깔깔대는 예쁜 한복 아가씨 세 명에 다가가 “궁금한 점이 있어요.” 하며 말을 걸었다.
이렇게 한복 입고 다니는 이유에 관해 물었더니 자기들은 강원도에 사는 대학생인데 서울에 놀러 와 한복 체험을 하는 중이라 한다. 안국역 근처에 한복 대여해 주는 집이 있어 돈을 내고 한복을 빌려 입었다고 했다. 한복을 입으면 고궁에 무료로 들어갈 수 있고 멋진 사진도 찍을 수 있어 재미있다고 웃는다. 아르바이트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한복을 빌려 입고 하루를 즐기는 당당하고 멋진 젊은 여성들이었다.
기왕 빌려 입고 즐길 것이면 단정하게 입고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복을 입은 것도 고맙고, 이상하게 입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지적질 대신 칭찬만 해줬다. 아울러 기자의 궁금증을 풀어 준 세 명의 예쁜 대학생이 즐거운 한복 체험을 했기를 바란다. 흔쾌히 포즈도 취해 준 학생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기를 기원하며 오늘의 나들이를 마쳤다.
[경봉궁 부근서 한복대여점 삼삼오오 운영하는 정병훈 대표 일문일답]
-젊은이들이 한복 입기에 열광하기 시작한 시기는.
“3~4년 전부터다. 한복을 입고 에펠탑을 비롯한 유명한 여행지 앞에서 사진을 찍은 뒤 인스타그램 등 SNS에 올리는 것이 인기를 끈 것이다.”
-대여 비용만 30만원은 넘는데 한복을 왜 굳이 가지고 가는 걸까.
“일종의 놀이다. 재미있으니까 돈을 기꺼이 낸다.”
-외국인 여행객과 한국 학생 중 어느 쪽이 더 큰 고객인가.
“못 믿겠지만 한국 학생이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北風吹雪打簾波 북풍이 눈보라를 몰아 발을 치는데
永夜無眠正若何 긴 밤에 잠 못 드는 그 마음 어떠할까.
塚上他年人不到 내 죽으면 무덤을 찾는 사람 없으리니
可憐今世一枝花 가여워라 이 세상의 한 가지 꽃이여.
조선조 평양기생 소홍(小紅)이 지은 것으로 전해 오는 한시(漢詩)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새긴 김상유(1926~2002)의 판화 한 장이 가슴을 울린다.
한겨울 밤, 눈보라가 닥쳐와 사립문은 절로 벌어지고, 뜰 앞 버드나무, 단풍나무 위에도 눈이 얼어붙었다. 초당 뒤편 소나무 잎은 어느새 얼음 별송이로 반짝이고, 아득한 산자락은 눈이 내려 마치 이승의 피안(彼岸) 넘어 고적(孤寂)한 저승의 정경이다. 방 안으로 단아한 기녀(妓女) 소홍의 모습이 안쓰럽다. 이 긴 긴 밤을 어이하리.
판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김상유는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고보 재학 중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월남하여 연세대에 입학, 철학을 전공하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도에 하차, 인천의 중학교에서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무렵 미국과 일본의 미술책을 탐독하며 미술가의 꿈을 키웠다.
특히 판화에 매료되어 동판화(銅版畵) 연구에 매진했는데, 동판에 밑그림을 새기고 그걸 찍어낼 프레스기가 없어 국수틀을 개조해 사용했다고 한다. 1963년 그의 ‘동판화전’이 우리나라 동판화의 시금석이 되었다.
1970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국제 판화비엔날레’에 출품한 동판화 작품 ‘NO EXIT’가 대상을 차지하며 판화가의 길로 정진하였다. 세 장의 판화 연작 형태로, 사방이 깜깜한 먹빛 가운데 사각의 좁은 공간에 사람이 혼자 누워있다. 두 번째 사람의 형체는 조금 부스러지더니 세 번째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사라진다. 1970년대 혼돈사회의 암울함을 형상화한 작가의 절규였다고 생각한다.
판화의 기법에는 목판화, 석판화, 동판화, 실크스크린 등이 있는데 나무에 새기거나 스크린에 밀어내는 것과 달리 동판화는 동판 위 밑그림을 따라 흔적을 내고 염산으로 부식시켜야 하는 위험하고 까다로운 공정이 있다.
김상유도 시력이 낮아져서 1970년대 중반부터 목판화로 화업을 바꾸게 되는데 이 작품 ‘소홍절구(小紅絶句)’는 그즈음 동판에 새긴 것 중 걸작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동판에 그라운드(산에 안 녹는 용제)를 입히고 송곳 같은 도구로 밑그림을 그린 후 염산 등으로 판을 부식, 선을 살려 잉크를 발라 찍어내는 에칭(etching) 기법이지만, 목판에 새긴 듯 칼 맛이 엿보여서 더욱 매력적이다.
판화는 여러 장을 찍어낸다는 복제성 때문에 수집가들에게 외면당했고 작품 값도 대개는 한 점에 비싸봐야 50만원을 넘지 못해 판화가들은 겸업을 하지 않고는 곤궁함을 벗어날 수 없었다. 김상유도 1980년대 이후로 목판화와 함께 유화를 그리게 되는데 그 세계가 가히 탈속(脫俗)의 경지에 이르니 수집가들에게는 호재가 되었다.
그의 회화 속에는 어쩌면 자화상 같은 한복차림의 선비(혹은 도인)가 가부좌 자세로 정자에 홀로 앉아 물을 바라보거나 바람을 쐬며 한아(閒雅)의 정취에 젖어 있다. 티끌세상을 벗어나려는 작가의 고독한 몸부림일 것이다. 2002년 이 작가가 운명하기 직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김상유 1960~1999 전작전’은 한 고독한 예술가에 대한 존경의 헌정이었다.
동판화 작가하면 바로 떠오르는 또 한 분이 황규백(1932~ )이다. 이 작가는 동판화 중에도 아주 정치(精緻)한 메조틴트(Mezzotint) 기법으로 판화를 찍어낸다. 이탈리아어 mezza tinta(중간 색조)에서 유래되었다는 이 기법은 동판 표면에 수많은 구멍을 뚫고 판화를 찍으면 구멍 속에 있던 잉크가 나와 번지면서 색면을 이루어 부드러운 명암을 잘 나타낸다.
에칭처럼 판을 부식시키지 않으나, 일일이 구멍을 뚫고 메우고 하는 작업이 길 뿐 아니라 다색일 경우 밑그림의 구도나 색상에 맞추려면 작은 동판일지라도 온종일 세심한 사전 작업을 해야 한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1954~1967년 ‘신조형’, ‘신상회’ 그룹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1968년 프랑스로 건너가 ‘SW 헤이터의 아틀리에 17’이라는 판화제작소에서 판화 공부를 했다. 1970년에는 뉴욕으로 옮겨서 1990년까지 메조틴트 판화를 집중적으로 찍었다. 2000년에는 영구 귀국하여 판화뿐 아니라 회화작업도 하여 유화작품만의 전시로도 큰 호평을 받았다. 그의 판화는 대부분 20cm x 30cm 이내의 작은 화면이지만, 오랜 명상과 사색으로 짜인 구도의 조밀함, 깊고 우아한 색상이 감탄을 자아낸다. 잔디밭 위에 놓인 손수건이나 팽이, 실패, 부러진 성냥개비, 조약돌 하나, 날아가는 기러기의 물빛 날개 등 어쩌면 오랜 외국생활 동안 고향이 연상되는 하잘것없는 소품들 모두가 밀도 높은 화면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 판화 ‘Rose’는 몇 해 전 경매회사에서 시행한 5월의 경매에서 120만원에 낙찰 받은 작품이다. 판화는 50만원 전후에 낙찰되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 작품은 경쟁자가 하도 많아서 그렇게 올라갔다.
잔잔한 잔디 위로 푸르른 달빛 가득 내린 들판에, 여섯 그루의 향나무 같은 침엽수가 늘어섰다. 하늘 위로 부푼 상현달이 안개를 뿜으며 떠 있다. 바로 그 아래 잔디 위로 여느 풀꽃 하나 없이, 다만 장미 줄기 하나가 달 가까이 치솟아 올연하다. 잎 그물도 선명하고 빨간 꽃 한 송이는 달에 빛바래 핑크의 요염을 뽐내고 있다. 달과 장미의 사랑의 밀어가 시작되었다. 잔디와 잇닿은 풀밭과 숲의 경계가 달그림자와 안개에 몽롱하게 묻히고, 하늘빛마저 옅은 구름 사이 푸릇한 휘장을 신비롭게 드리워 야릇한 여름밤은 무르익고 있다. 수묵화의 물감이 종이에 스미어 번지듯 동판의 수많은 미세구멍에서 흘러나온 물감이 침엽수 가지와 그 떨기를 흔들리게 하고 있다.
서양화에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이 있는데, 이 말은 이탈리아어 스푸마레(sfumare, 연기처럼 사라진다)에서 유래되었다. 회화에서 사물의 경계가 희미하게 그려지고, 그 희미함이 선명함을 만들어 내는데, 황규백 판화에서 그 환상적 기법을 보게 된다.
달이 이울고 새벽이 오면 오롯이 이슬 머금고, 그러나 다시 밤을 기다릴 장미의 설렘이 꽃이 지는 그 순간까지 이어질 여운을 즐길 수 있으니.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오랜 집주인이 버리고 떠난 적산가옥(敵産家屋) 조흥상회. “쓰레기더미니 버려 달라” 했던 집안 물건에는 우리네 살아온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월세 15만원에 내놓아도 외면받던 옛날식 창고는 요일마다 주인이 바뀌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공간이 됐다. 인천 배다리(인천시 동구 금곡동의 옛 지명)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과 요일가게 다 괜찮아(이하 요일가게)는 이렇게 우연한 발견으로부터 시작했다. 시간을 거슬러 동인천 끝자락에 다다르면 잊고 지냈던 시절의 우리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1990년대 이전까지 인천 배다리의 마루지(랜드 마크)였던 조흥상회 건물은 부자 삼대를 넘기지 못하고 경매에 넘어갔다.
비밀스럽던 부잣집 대문이 열리는 순간. 눈앞에는 쓰레기 더미가 가득했다. 쓰레기 치우는 데만 두 달 넘게 걸렸다. 집안을 청소하고 묵은 때를 벗겨내고 나니 옛 부잣집 티라도 내는 듯 조흥상회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집 여인네들이 손수 지은 한복과 배냇저고리, 수만 번은 사용했을 것 같은 끝이 닳은 밥주걱, 속이 가득 찬 전지분유와 미제 주스, 양주, 분쇄기 등 근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수백 점의 물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찾아낸 물건을 모아서 2014년 3월, 배다리 안내소로 사용하고 있는 조흥상회 건물 2층에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을 열고 관람객을 맞기 시작했다.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은 ‘1인칭 박물관’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곳이다. ‘1인칭 박물관’이란 나(1인칭)와 가까운 사람의 것, 혹은 멀지 않은 과거 물건들을 나름의 이야기를 담아 전시하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반드시 그곳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의 전시품들은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조금씩 바뀐다. 아직도 꺼내놓지 않은 물건들이 집안 곳곳에 숨어 있다. 하지만 전시를 서두르지 않는다.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을 기다려온 만큼 찬찬히 제 빛깔을 찾으면 이야기와 함께 관객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