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리 카페 ‘쏭아’에서의 밤 11시, 전설적인 포크 가수이자 대한민국 가수 송창식은 막 공연을 끝내고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남양주 작업실로 이동했다. 새벽 5시에 잠들어 오후 2시에 깨는 생활을 수십 년째 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 이 늦은 시간은 보통 사람들로 치면 저녁식사 시간쯤 된다. 국내에 단 두 대 있다는 1억 원짜리 스튜디오 모니터 스피커, 1982년에 만들어진 아다마스 기타 등등 송창식의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수십 년 묵은 것들과 함께, 그리고 그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노래와 인생에 대한 인터뷰를 시작했다.
“저에게 트윈폴리오는 없었던 역사예요.”
충격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인기 듀오였으며 자신이 소속해 있었던 트윈폴리오를 부정하는 송창식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만큼이나 그가 트윈폴리오를 부정하는 이유에는 단단한 논리가 있었다.
트윈폴리오로의 복귀, 불편했다
기인, 괴짜, 천재, 도사 등등 그를 가리키는 과장된 별명은 많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자극적인 별명들이 무색할 정도로 철두철미한 음악인이다. 사실 송창식은 한창 쎄시봉 열풍이 일었을 때 언론에서 곧잘 언급이 되었지만 뭔가 겉도는 느낌이 있었다. 음악인 송창식의 입장에서 볼 때, 쎄시봉으로 인한 복고 열풍 속에서 트윈폴리오가 다시 세상에 불려나오는 것은 이상하고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상황을 “사기 치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과격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수’ 송창식에게 그 말은 더없이 솔직한 심경의 토로이기도 했다. 어째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그 결론을 이해하려면 그의 노래와 삶을 들여봐야 한다.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길 가는 사람
1947년생 송창식은 지난해 6월 목 수술을 했다. 지금은 목소리의 폼은 회복됐지만 음정 등 컨트롤이 좀 덜 되는 단계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연습을 해도 일이 년 이상은 지속해야 다시 예전의 컨디션으로 돌아가는 게 가능하단다.
“연습을 안 하면 음정이 안 돼요. 노래는 계속 연습해야 역량이 쌓이죠. 지금 성대의 새순이 올라왔으니, 이제 노래하는 성대로 만들어야 해요.”
대한민국 영원한 가객이라고도 불리는 그가 하는 말은 갓 가요계에 데뷔한 연습생들의 마음가짐과 비슷했다. 말하자면 그는 철저한 현역 프로 음악인으로서 안주를 거부하고 있었다.
“저도 처음에는 가수로서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어요. 노래 잘하고 싶었고 인기가수가 되고 싶었고 돈도 잘 벌고 싶었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욕구로부터 떠난 지 오래됐죠. 송창식은 거기 있는 거 같지 않다는 인식은 그 때문일 거예요. 노래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니까.”
그렇다면 송창식에게 노래란 무엇일까. 그는 한마디로 ‘공부거리’라 표현했다. 그리고 공부거리이기 때문에 계속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할 게 계속 생기니까요.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죽을 때까지 해도 다했다고 보긴 어려울 거예요.”
노래는 평생의 공부거리
그에게도 소위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이의 기준으로는 ‘그 정도면 다 이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송창식에게 인기는 큰 의미가 없다. 인기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기는 내 일이 아니에요. 사람들 것이지. 사람들이 최고 인기가수를 만드는 거지, 가수가 잘나서 최고 인기가수가 되나.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뿐이죠. 인기는 계속 내려가요. 그리고 인기는 공부가 안 돼요. 공부는 습득해야 가능한 일인데 인기를 공부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인가?(웃음)”
그가 스튜디오에서 녹음용으로 쓰는 1억 원짜리 모니터 스피커를 갖고 있는 이유도 ‘공부’ 때문이다. 과거에 그는 자신의 앨범을 녹음할 때 당연히 엔지니어들에게 맡겼는데, 어느 때부턴가 그들을 믿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아예 오디오 엔지니어링을 공부해서 1979년부터는 자신의 앨범을 직접 레코딩했다. 카페 ‘쏭아’에서 노래를 하는 이유 또한 그의 목적인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연을 매일 할 수 있는 곳은 카페밖에 없어요. 그게 공부예요. 어떤 때는 열렬하게 반응하고 어떤 때는 취한 사람들이 떠들고 말도 걸고. 보통 콘서트장에서 하는 노래와는 너무 다른, 다양성이 있는 환경에서 연주 경험을 쌓는 게 가능하죠. 그래서 다른 어떤 곳보다 카페가 좋아요.”
인터뷰가 있던 날, 그는 목이 안 좋다고 하면서도 열한 곡이나 불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공부를 한 거냐고 묻자 ‘컨디션이 안 좋은 상황에서 억지로 어떻게든 끝내 해내는 공부’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개량 한복 입고 새벽 1시에 껄껄 웃는 송창식은 일반적이지 않은 인물이긴 하다.
인기는 내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
그렇다면 그는 요즘 가수들을 어떻게 바라볼까. 궁금했다.
“노래에는 기본기가 있어야 해요. 복싱으로 치면 샌드백 치고 로드워크 하고 줄넘기 하는 것과 같죠. 그다음에 링 위에 올라가 스파링을 하죠. 기본기를 안 하고 스파링만 해도 권투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챔피언이 되기 어려워요. 그처럼 옛날에는 기초 없이 노래해도 부른 노래가 유행가가 돼서 가수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가요계를 바라볼 때 늘 그 점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죠.”
그는 기본기와 연습이 가져다주는 위대한 결과를 철저하게 믿고 스스로 실행하는 사람이다.
“노래와 연습량은 완전히 정비례해요. 그러니까 천재적인 음악가다, 이런 표현은 인정하기 어려워요. 우리가 알기에 최고의 음악 천재는 베토벤인데 이 사람이 정말 둔재였거든요. 아버지가 때려가면서 연습을 시켰기에 세계의 악성(樂聖)이 될 수 있었던 거죠. 모든 것은 몸으로 하는 거예요. 제가 바둑을 3단쯤 두는데, 바둑을 하면서 느낀 게 머리도 몸이라는 거였어요.(웃음) 매일 놓는 사람과 안 놓는 사람은 천양지차. 부단하게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습량이 많으면 확실히 노래를 잘할 수 있어요. 연습 없이 재주만 있으면 언젠가는 고꾸라지죠.”
트윈폴리오가 ‘지워진 역사’가 된 이유
그는 요즘 가수들은 기초가 잘되어 있다고 평했다. 그런 면에서는 옛날 가수들보다 확실히 낫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초만 잘되어 있지 옛날 가수들처럼 대중과 스킨십하며 치열하게 파고들며 돌파하려는 자세가 없다고 했다.
“나는 요즘 가수들이 하는 방법이 좋아요. 그런데 끝까지 가야만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데 중간에 멈추는 것 같아요. 일장일단이 있는 거지. 그게 좀 아깝죠. 그런데 그건 더, 나중 후배들이 하게 되겠죠. 그 친구들은 지금 가수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하니까. 한 이삼십 년 후에는 대형 가수들이 나올 수 있겠죠.”
이제 그가 트윈폴리오로서의 역사를 부정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술의 발전을 믿으며 매일 공부하며 사는 그에게 있어 트윈폴리오로서의 복귀는 자신의 삶을 후퇴시키는 일과도 같았다. 그래서 트윈폴리오로서 사람들에게 불려 나올 때면 환호 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계속 불편했다.
“트윈폴리오가 일흔 살이 됐으면 발전한 흔적이 있어야지 전혀 없었으니까. 옛날 추억에 기대서 돈이나 벌려는 것 같았으니까. 가수 송창식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는데 트윈폴리오는 계속 뒷걸음치는 것 같았으니까요.”
첫 번째는 안 하지만 두 번째도 안 한다
송창식은 자라섬 포크 페스티벌 무대에도 선다. 파트너는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인 함춘호다.
“나는 첫 번째는 안 하는데 두 번째도 안 해요.(웃음) 그 사람과 경쟁이 안 된다면 그 사람이 하지 않는 걸 추구해서 내 것으로 만들지. 그래서 함춘호와 함께 기타를 치는 게 맞는 거예요.”
악기는 시작이 언제냐에 따라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고 한다. 20대부터 기타를 치는 사람은 10대부터 기타를 친 사람이 갖는 테크닉은 절대 안 생긴다는 것이다. 10대 때 기타를 치면서 잡히는 손가락 모양과 뼈가 자라면서 생기는 특별한 테크닉은 나이 먹으면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타를 스무 살 이후에 친 송창식은 일찌감치 기타를 친 사람들과는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딴 걸로 메꿔야죠, 나는 오랫동안 음악을 해서 훨씬 폭이 넓기 때문에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할 수가 있죠.”
함춘호와의 협연에서 그가 세컨드 기타를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이 잘할 수 있고 공연을 더 멋지게 만들 수 있는 역할을 선택한 것이다. ‘첫 번째는 안 하는데 두 번째도 안 한다’는 그의 말은 가요계에서 그가 어째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는지 설명해주는 절묘한 묘사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가 자신만의 자리를 갖게 된 것은 그런 허허실실로 균형 감각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송창식처럼 사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
따라서 송창식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집요하게 구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점에서 그는 불가의 구도자 같은 인상에 묵직한 도인의 아우라를 갖게 된 것이리라. 다소 왜곡되는 게 있다 해도 크게 개의치 않고 자신이 믿는 길을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내가 어쩌면 오해 속에서 사는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그게 아닌데 좋다고 여기는 건 아닌가 의심할 때가 있긴 해요. 그런데 원래 성격이 그냥 넘어가는 성격이라서요. 빠릿빠릿하지 않고 게으르고.(웃음)”
송창식을 멘토로 여기고 그의 삶을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내가 가진 가치를 실제로 느낀다면 모를까, 내 방식이 정석이 되긴 어려워요. 단지 ‘저 사람이 하는 저 방식도 괜찮지’ 정도로 인식될 순 있어요. 사람들에겐 내가 멘토가 되는 건 불편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죠. ‘나는 이걸 자연스럽게 갖게 돼서 여기까지 온 것이지 너희들은 나를 멘토로 삼으면 너무 힘들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요. 노래를 잘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나처럼 사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거든요.”
돈이 없으면 안 쓰면 된다
송창식처럼 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자부심이라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삶을 가만히 반추하면서 나온 솔직한 결론이다. 우선 그가 가진 인내의 기준은 보통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어렸을 때 너무나 가난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심지어 거지조차도 못 되었다. 그는 거지 굴에 갔다가 매를 맞고 쫓겨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거지도 자신들끼리 뭉쳐서 만든 사회가 있었는데, 자신은 거기에도 못 끼었다는 것이다.
“견딘 게 많았어요. 너무 춥고 배고팠으니까. 그런데 그걸 언급할 수 없는 게, 견딘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추우니까 ‘아, 추워. 배고파’ 했던 적은 있었지만 ‘죽겠네, 이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은 없었어요. 그냥 습관적으로 견뎠죠. 그래서 나에게 견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희열도 없죠. 견딘 게 아니니까. 그냥 인생 살면서 넘어간 거니까.”
그는 돈에 집착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생각에 돈은 없으면 안 쓰면 되는 일이다.
“그게 안 된다는 게 웃겨요. 난 돈이 없어서 서울예고를 중퇴했는데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스님이 됐을 것
송창식이 노래를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새벽 2시가 다 되도록 음악 얘기만 한 터라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당사자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노래를 하지 않았으면 아마 중이 됐을 거예요. 남 도움 없이 혼자 공부하는 일이니까요.”
송창식을 스님이라고 가정할 때 납득이 잘 안 되는 사람은 그리 없을 것이다. 그는 즐거운 상상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스님은 사회 속에 있죠. 울타리 속 계급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아마 종단에서 빠져 나오지 않았을까.(웃음)”
송창식이 세상에서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 한다는 게 있다. 종교 교주다. 누구보다도 교주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또 캐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왜냐하면 제일 높은 거니까요. 제일 높은 건 제일 나쁜 거예요.”
너무 단순한 대답인데도 설득력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클래식 쪽에 야망이 있었죠. 그러나 고등학교를 중퇴하며 그 야망이 꺾였죠. 당시엔 죽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때의 내가 있으니 지금의 내가 있다고 봐요. 필연적인 거였던 셈이죠. 그래서 지금은 새옹지마보다, 더 나아가서 ‘나쁜 건 다 좋은 거다, 좋은 건 다 나쁜 거다’라고 생각해요.(웃음)”
나쁜 것은 좋고 더 좋은 것은 더 나쁘다. 송창식이 사는 법을 우직하게 정의하는 그 문장은 삶에 대한 끝없는 긍정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절대로 상하지 않는 금강(金剛)
송창식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긍정과 자신감, 그 힘의 원천은 삶과 사람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자신감은 원래 사람들이 갖고 태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감은 절대 상할 수 없어요. 동네 깡패들에게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빌지언정 자신감은 안 상하는 거예요.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니까요. 그때 자신감이 상했다면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그런 걸 불교에서는 금강이라고 해요. 금강은 절대로 안 상합니다. 그것을 갖고 있으면 세상 살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어쩌면 금강에 대한 얘기야말로 송창식이 말하는 삶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문답 후에 남는 것은 사람 좋은 웃음이었다. 즐겁고도 평온한 웃음. 그리고 송창식은 그 웃음에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내가 죽어도 사람들에게 기억이 안 됐으면 좋겠어요. 죽을 때 내가 냈던 노래판들 다 가져가면 좋겠어요. 그것들이 정말 가치가 있는 거라면 다음 세대의 누군가가 또 나와 같은 걸 할 테니까요. 그런데 이미 남겼으니 어쩌겠어.(웃음)”
“그거면 된 거지” 하며 그가 너울거리듯 웃으면 기자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수요일, 토요일, 일요일 해가 진 후 미사리 쏭아에 가면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손님도 소홀히 하지않고 진지하게,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애간장 태우는 목소리로 부숴버릴 듯 노래한다. 또 가 보고 싶다.
1960~70년대 신민요의 기수로 불리며 가요계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가수가 있다.
바로 김부자(金富子·70)다. 그 시절은 어느덧 이미 반세기 전의 얘기이지만, ‘달타령’을 비롯한 그녀의 대표곡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번에 만난 김부자는 과거에 묻힌 가수가 아니라 현재를 개척하는 가수로서의 모습이 더 어울리는 에너지가 있었다. 그녀가 털어놓는 롤러코스터와도 같았던 삶을 뒤돌아보며 젊은 날의 봄을 맞이하듯 김부자와의 즐거운 만남을 가졌다.
12가지 달의 모습을 묘사한 민요풍의 노래 ‘달타령’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드물 것이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듣게 되는 ‘달타령’은 1972년에 발표된 이래 수많은 가수들의 리메이크와 수많은 인용으로 반세기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 국민적 아우라의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바로 김부자. 1965년에 아마추어 여고생 가수로 가수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자신이 가요계에 들어와서 이렇게 오랫동안 활동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고했다.
궁핍했던 시대의 위로와 희망, 그 힘겨운 시대를 노래와 함께한 가수 김부자. 반세기를 돌아 지금은 비록 혼자이지만 음악으로 인해 결코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며 이제는 더욱 원숙해진 기량을 펼치며 관객들과 만나고 싶단다.
시간을 잊고 살 정도로 꿈같은 세월 보내다
“동아방송의 ‘가요백일장’에 입상하면서 가수생활을 시작했죠. 그리고 1968년에 ‘팔도 기생’이라는 영화의 주제곡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졌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수로서의 공연을 했어요.”
올해는 김부자가 프로 가수로서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어느새 칠순. 그러나 누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칠순이라고 할까. 인터뷰 내내 유쾌하게 웃으며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얘기를 풀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젊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꿈같은 세월이었어요. 시간을 잊고 살 정도로.”
‘달러 박스’ 김부자의 시대
트로트, 신민요 등등 전성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김부자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전통 가요의 세계를 추구했다. 또 한 명의 당대 슈퍼스타였던 김세레나와는 유명한 라이벌 구도를 이뤘다.
“요즘도 사람들이 제가 지나가는 걸 보면 김세레나로 헷갈려 해요.(웃음) 하나도 안 닮았는데! 김세레나와는 친하죠. 조민희, 김세레나, 김아정 등 돼지클럽 모임이 있어요. 돼지해이던 1971년에 클럽을 만들어서 ‘돼지클럽’이라 부르죠.”
그녀는 대략 2000여 곡의 노래를 불렀다. 오아시스레코드에 몸담고 있던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음반 취입을 했다. ‘김부자가 부르면 팔린다’, ‘달러 박스가 왔다’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 ‘일자상서’, ‘당신은 철새’, ‘카츄샤’ 등이 연속적으로 성공했고 ‘사랑은 이제 그만’은 발매 3개월 만에 판매량 10만 장을 돌파하기도 했다.
거듭된 성공, 그녀를 사로잡은 오만과 독선
김부자 하면 무조건 히트를 쳤다. 그리고 그런 시절이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녀에게선 이상신호들이 나오고 있었다.
“통금이 12시였고 극장식 캬바레가 성행하던 시절이었죠. ‘하루에 내가 얼마를 불렀지?’ 계산하면 50곡을 부르고 그랬어요. 목이 아프고 잠긴 상태에서 또 나가야 했고…. 이게 즐거운 생활만은 아니고, 뭔가에 매달린 느낌이었죠. 내 삶이 아니고 남을 위해 사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분명 스타가 됐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몸이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의 쏟아지는 무조건적인 칭찬 세례들도 그녀의 마음을 둔하게, 그리고 왜곡되게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시작했다.
“후회되는 일이 많죠. 철모르게 내가 이 세상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주위에서 나를 너무 떠받들어주니까, ‘이 정도면 최고지’라는 자만심이 생겼죠. 그때를 뒤돌아보면 부끄러워요. 그때 남들이 나를 보며 뭐라 했을까….”
김부자는 자신의 오만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져버리는 인기와 대중의 관심에 매달려 살아가는 연예인에게 그런 오만은 어떤 종류의 성장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김부자는 그러한 성장통을 겪고도 좌초하지 않고 여전히 현역으로 살고 있다. 말하자면 고통의 강을 건넜다는 의미다.
한때 전성기를 누려본 사람으로서 바닥부터 올라가는 것보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 절박하고 뼈저린 고통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내면의 힘은 자신과 마주하기에 충분했다.
믿었던 지인에게 30억 원을 사기당하다
“어찌 보면 인기도 다 헛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런 사랑이 없었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았겠죠. 그때는 사랑을 받는 줄만 알았지 줄 줄 몰랐어요. 이제야 나눠주면서 행복을 느껴요. 몸도 좋아지고 마음도 편해지고 모든 것이 지금 삶이 더 행복해요.”
어떻게 김부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지금의 삶에 안착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인생을 격변하게 만든 커다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게 아니라 제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는데, 그걸 20년 가까이 하니 스트레스와 책임감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가 1990년대 초반, 1992년이네요. 심적으로 버거울 때였는데, 이혼한 뒤 주위 사람을 잘못 만나 큰돈을 잃었지요.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까지 내려갔어요. 그때 당시 돈 30억 원이면 굉장히 큰 거죠? 지인이라 믿었는데 그게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었죠.”
처절하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다
믿었던 사람 때문에 엄청난 돈을 탕진하고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느낀 좌절의 깊이는 그만한 돈의 액수를 경험해보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금액인데 1990년대 초에 30억 원은 그야말로 천문학적 액수였다. 김부자는 하루아침에 엄청난 돈을 탕진했고, 한 달에 이자만 400만~500만 원을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말도 안 나오는 불운과 배신감과 고통에 그녀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에게 구원이 내려왔다.
“너무 힘든 시절을 보내다가 교회를 가게 됐어요. 저희 아들과 딸이 먼저 교회에 다니면서 자꾸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바른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해 교회에 다니도록 했는데 정작 저는 안 갔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저를 위해 많이 기도를 했어요. 거기에 감동받아서 교회를 나가게 됐죠. 그리고 신앙을 만나면서 생활이 많이 바뀌었어요. 지난날의 나를 되돌아보게 된 게 그때부터였죠. 살면서 내 딴에는 잘했다,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 싶은 것이 실은 아니었던 거예요.”
꽃이 봄에 저절로 피듯 절망 끝에 부활하다
김부자는 신앙을 갖고, 자기반성을 했다. 그녀의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사건 이후 10여 년이 지난 2000년 즈음부터라고 한다. 그때 모든 문제들이 회복되면서 어려웠던 것도 해결되고 마음의 안정도 되찾게 됐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할 정도로 생활이 확 달라졌어요. 울면서 기도했던 것을 들어주셨구나 싶었죠.”
그녀의 생활은 이제 안정적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고, 철저한 건강관리도 뒷받침되고 있는 삶이다.
“운동은 유산소, 스트레칭, 걷기를 꾸준하게 하고 있어요. 생활에 무리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게 참 좋고, 거기에 즐거움이 있더라고요.”
약은 전혀 먹지 않고 강화에서 보내주는 홍삼 원액만을 먹고 있다는 그녀는 몸이 쑤시거나 관절에 이상이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그녀의 모습에서 활기가 넘쳤다. 마음이 건강해지니 몸도 자연스럽게 건강해진 것이리라. 계속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소소한 행복이 가장 소중하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는 거 같아요. 내 나이에 뭘… 하다가도 이거 정도는 하고 싶다는 게 있죠.”
작년부터 지나온 시간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는 김부자는 그동안 꾸준히 쉬지 않고 디너쇼 중심의 공연을 해왔다. 올해는 50주년 공연을 5월로 계획하고 있고 외국 초청 공연도 있다. LA와 뉴욕 쪽에서 연락이 온 상태다. 작사가 겸 작곡가 조운파 선생과도 협의 중이다.
“새로운 음반에는, 지금까지 여러 노래들을 많이 불렀으니 이제는 조금 더 재밌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노래를 싣고 싶어요. ‘달타령’보다 좀 더 신나면서 현실적인 풍자가 있는 그런 인생 노래를 하고 싶죠. 지금까지는 주로 한복을 입고 불렀는데, 이제는 좀 망가지는(웃음) 노래를 하고 싶어요. 그러나 예전보다 좀 더 진한 정서가 있는 그런 노래를요.”
‘노래란 나를 지켜주는 것이며 나의 생명이고 삶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삶의 담금질을 통해 더 단단해진 가수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그대로 기억해주면 좋겠다 말한다. 그런데 그 말 뒤에 ‘그러나’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는 여전히 펄펄 뛸 수 있는 가수로서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
“굳이 욕심을 부린다면 그래도 팬들이 사랑해서 여기까지 왔기에 보답하고 싶어요. 지금 나이를 생각하면 그냥 무조건 잘하고 싶죠. 그리고 옛날에 나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으면 잘해주고 싶어요. ‘잘 보이고 싶다가 아니라 진심으로 잘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들이 새록새록 드는 거 보면 내가 나이 들면서 철이 드나 싶기도 하고.(웃음) 나쁜 건 아닌 거 같아요.”
한 시대를 풍미하고 아스라이 손 흔들며 사라졌던 대형 가수가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던 가수, 바로 김연자(金蓮子·58)다. 오랜 시간 일본에서 ‘엔카(えんか)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 한국으로 돌아와 조용히 활동하는가 싶더니 8년 만에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트로트도 엔카도 아닌 강렬한 사운드의 댄스음악 이른바 EDM으로 말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젊은이들의 마음까지 단숨에 사로잡은 김연자와의 만남. 수은등 불빛 아래를 지나 찬란한 인생을 다시금 맞이한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김연자는 몰라도 ‘아모르파티’는 안다
가수 김연자가 부른 ‘아모르파티’의 인기는 대단하다. 좋아하는 연령대도 어린이에서부터 시니어 세대까지 다양하다. TV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아모르파티’가 흘러나온다. 한 번 들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전자악기 리듬에 몸을 맡기다가 결국에는 가사의 매력에 더 빠져버리고 마는 노래가 ‘아모르파티’다.
“이 곡을 쓴 작곡가 윤일상씨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냐고 묻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이 모든 것이 앞으로 다가올 내 인생을 위해서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후회하지 않고 앞만 보고 살겠다는 ‘인생 찬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탄생한 곡이 ‘아모르파티’입니다. 가사는 ‘철이와 미애’의 신철씨가 써줬어요. 아모르파티란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라 하더군요.”
‘아모르파티’는 2013년 발표곡이다. 윤일상씨는 이 노래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놓아야 할 대박곡이라고 예견했지만 지금과 같이 폭발적이지 않았다. 노래가 빠르다 보니 따라 부르기 힘들어 중년 팬들에게 어려운 곡이었다. 4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 곡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낸 이들은 중년 팬이 아닌 10대 팬들. 올해 TV의 한 음악 프로그램을 방청한 10대들이 김연자가 부르는 ‘아모르파티’를 듣고 SNS에 퍼트린 것. 신나고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찾아내 그들의 문화로 김연자와 ‘아모르파티’를 끌어당긴 것이다. 음악 순위 역주행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제 무주 구천동에서 노래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학생들이 ‘꺅! 언니!’ 하고 난리가 났어요. 저인 줄 몰랐는데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더라고요. 어머니들이 환호해 주시는 건 있었어도 이런 기분 처음이죠.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거든요. 근데 어쩜 그렇게 꺅 하고 소리를 잘 내요(웃음)? 육십을 바라보는 나한테 언니래요. 근데 너무 좋더라고요. 새로운 행복감에 젖어 있어요.”
국보급 가수 한류 열풍 초석을 다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김연자의 인기는 톱스타란 말로 부족했다. TV만 틀면 안 나오는 곳이 없었다. 가요 프로그램이며 합동 공연이며 대미는 늘 김연자 차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간드러지면서도 폭발적인 목소리는 국보급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홀연히 사라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보. 대스타가 한순간에 떠나는 일이 있었던가.
“사라진 게 아니에요. 시댁이 일본이었고, 속으로 늘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계속 일이 잘되니까 갈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거죠. 마침 무슨 사정인지 당시 매니저가 일본에 가도 된다고 했어요. 이때다 싶어 얼른 간 거죠. 그런데 그때가 일본에 처음 간 것은 아니었어요.”
이발소를 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가요계에 데뷔한 김연자는 일본 음반회사 오디션을 통해 일본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제가 운이 좋은지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좋은 기획사에 들어갔어요. 월급이 꽤 괜찮았던 곳입니다. 25만엔을 벌면 집으로 20만엔을 보냈어요. 엔화 가치가 높을 때라 그런지 한국에 갈 때마다 집이 바뀌더라고요.”
김포공항으로 가족이 마중 나오지 않으면 집을 찾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일본 생활을 접고 들어갔을 때는 작은 연립주택을 장만했다. 일본에서 보낸 돈을 어머니께서 열심히 모아주신 덕이다.
“3년 동안의 일본 생활이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제 인생에는 많은 도움이 됐어요. 실패의 원인을 생각해봤는데 일본을 갈 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고요. 진짜 몸만 갔죠. 일본에 다시 가려면 일본에 대해서 알아야겠다 싶어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 한문 등을 따로 공부했어요. 스물아홉 살에 다시 갔을 때는 마음이 참 편했어요.”
한류의 원조, 20년 생활의 막을 열다
서울올림픽 찬가였던 ‘아침의 나라에서’를 일본어로 번안해 부르며 자연스럽게 일본 음악계에 진출했다. 각종 공연이며 TV며 행사며 한국에서는 대형 가수였지만 신인의 자세로 매사 임했다. 언어의 장벽도 내려앉았다. 일본인들도 감탄하면서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고 응원해줬다.
“다 내려놓고 마음만은 스타라는 생각으로 갔어요. 캠페인에도 나가고요, 일본 신인들하고 똑같이 했죠.”
유독 공연 무대가 많은 일본에서는 노래 가사를 완벽하게 외우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엔카 가수이지만 탱고, 블루스, 발라드 등 다양한 노래를 배우고 관객 앞에서 선보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무대에서 최소 20곡은 소화해야 하는 강행군. 한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었다.
“매년 가을에 3400석 규모의 NHK홀에서 콘서트를 했어요. 공연을 위해서 여름에는 계속 노래 연습을 했어요. 가끔 쉴 때는 집 앞 공원으로 반려견들을 데리고 나가 산책하면서 노래 가사도 외우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없으면 노래 연습을 하느라 중얼중얼… 그때 당시 저희 집에 많을 때는 반려견이 다섯 마리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겠어요(웃음). 일본에서의 여름은 그렇게 보냈습니다.”
나도 뮤지컬 배우였다!
일본에서의 다양한 활동 이야기를 하다 보니 뮤지컬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김연자의 뮤지컬 도전기로 이어졌다.
“니나가와 유키오(1935~2016)라는 유명한 연출가가 계셨는데 제 목소리가 좋다고 불러주셨어요. 라는 작품에서 집시 역할을 맡았어요. 연기 진짜 어렵더라고요. 노래는 5절까지 이어져도 하나도 안 잊어버리는데 대사는 맨날 까먹는 거예요(웃음).”
역시 김연자의 이름에 걸맞게 개런티도 주연배우 다음으로 많이 받았다고. 그런데 개런티로 받은 돈을 의상비로 다 써버렸다는 톱스타 김연자.
“사실 말이 좋아 주인공 다음이지 뮤지컬 한 달 하고 받은 개런티가 제가 노래 하루 불러서 받는 개런티에도 못 미쳤어요. 원래 의상팀에서 의상을 다 준비해주기는 했는데 너무 값싸 보이는 거예요. 역할이 집시이지만 밍크도 가짜고, 자존심이 너무 상했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제 옷으로 다 하겠다고 허락받고 따로 준비했어요. 그랬더니 개런티가 그렇게 없어지더군요(웃음).”
동경과 오사카에서 공연하는 동안 동생들도 공연을 관람하러 왔다고.
“나 같지가 않았나봐요. 저는 노래 부를 때 외에는 저 같지가 않아요. 다른 거 하면 작아 보이고 불안해 보이고요. 아,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때 알았죠.”
단 한 번의 배우 체험 뒤 연기 분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본에서 한국 가수 그리고 한국 사람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김연자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을 때는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다. 문화·정치적으로 냉랭하던 시절을 버티고 이겨내 엔카 여왕의 자리에 앉은 김연자.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고 모두에게 허락된 일도 아니었다. 처음보다 마음이 편했다지만 한국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은 물론이고 숱한 편견과 맞서야 했다.
“제가 그냥 보통 가수였다면 진작 문제 일으키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거예요.”
한창 일본에서 활동할 때 일이 힘들면 여권을 들고 길을 나서기도 했다는 충격 발언.
“한국에 가려고 공항으로 갈 택시를 잡는 거죠(웃음). 그런데 살던 동네가 시내와 너무 떨어져서 택시가 안 오는 거예요. 그러면 택시 기다리다 생각을 하는 거죠. 가수 김연자에 대한 것은 참겠는데 ‘한국 가수’ 김연자가 뭘 잘못했다는 기사는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내가 한국으로 가버리면 이런저런 매스컴에서 ‘한국 가수’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떠들어댈 것이 뻔하잖아요. 한국 사람으로서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도 듣기 싫었어요.”
길에 서서 망설였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했다. 그때마다 다음 날 신문에 올라갈 지독한 기사 제목이 떠올랐다. ‘한국 가수 김연자가 스케줄 펑크 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 우리나라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지. 그러고는 마음 다잡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내 감정을 억누른 것 같아요. 그렇게 20년을 일본에서 생활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한국행을 결심하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 안 통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련하게 말끝이 잦아든다. 광주에서 이발소를 하시던 아버지에게 노래 잘 부르는 딸은 그저 자랑이었다. 아버지의 “야! 너 서울 가서 가수 돼!” 한마디에 무대에 올라갔다가 아직도 그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가수가 된 거죠. 감사하죠. 가수 될 운명을 알아보시고 어린 시절에 빨리 뭔가를 겪게 해주셨죠. 한국 복귀도 아버지 때문이었고요.”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가족들은 바쁜 김연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돌아가시고 열흘이 지난 다음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어요. 스케줄이 있는지 물으셔서 없다고 했더니 그제야 아버지가 떠났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날 일본의 작은 고깃집에 앉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버지도 공연 보러 일본에 많이 오셨었죠.”
아버지가 타계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연자는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오가며 활동 중이다. 그사이 재일교포 남편과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김연자가 일본에서 거액의 돈을 벌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남겨진 재산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매니저 겸 밴드 단장이던 전 남편을 평생 동반자로 생각했기에 쓰지 않았던 계약서가 문제였다. 일본에서는 계약서를 쓰지 않은 김연자를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일본 팬들과 연예 관계자들을 마주하면서 사정을 얘기했고 조금씩 김연자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전 남편과 지낸 세월이 아깝지 않은지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거액은 숫자일 뿐이죠. 제 눈에 현금이 오가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제가 후회를 별로 안 해요.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해요. 지금이 이 순간이 있어야 내일도 있잖아요. 난 항상 그렇게 살기 때문에. 어떨 때는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다 잊어버려요(웃음). 단념도 빠르고 꿈도 빨리 꾸고. 그런 거 없어요. 그리고 저는 부자는 아니지만 하루 삼시 세끼 잘 챙겨먹고 사니까 괜찮아요. 나름 부동산도 있고 집도 있어요.”
어렸을 때 많이 의지했던 전 남편에 대해 그녀는 남은 감정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내보였다.
“솔직히 저나 전 남편이나 0에서 시작했죠. 오랜 시간 정신적으로 의지했어요. 일본 연예계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전부 알려줬어요. 서로 상부상조한 거죠 뭐.”
미국에 셰어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연자!
“어머니가 오래전 저에 관한 점을 보셨다는데 제가 일흔까지 노래를 부른대요.”
처음에 그 얘기를 우습게 들었는데 이제 슬슬 현실이 돼가는 느낌이 밀려온다고. 하고 싶은 공연만 하고 여유롭게 사는 것을 꿈꿨는데 젊은 가수들하고 똑같이 뛰고 있어 자기 모습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좋다.
김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미국 가수 셰어(Cher)가 떠올랐다. 1960년대까지 포크 가수로 활약하던 셰어. 한참을 배우로 지내더니 1999년 ‘빌리브(Believe)’란 음악을 선보이며 전 세계를 전자 음악 열풍에 빠뜨렸다. 올해 71세인 셰어는 지난 5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빌보드 아이콘 어워드를 수상했다.
김연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인 팬을 상대로 노래 부르다 어느 날 갑자기 세대를 뛰어넘어 EDM 열풍에 불을 지폈다. 71세의 셰어 언니도 망사옷 입고 무대를 누비고 있으니 한국 ‘EDM 대모’, ‘연자방아’로 거듭난 70세 김연자의 무대도 기대한다.
우리사회는 지금 초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다. 시니어들의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많은 기업이 참여하였다. 모르면 손해이다. 그냥 숨만 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많이 보고 듣고 배우고 실행하여 건강 수명을 최대한 늘려야만 한다. 알고 실천하는 만큼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
삼성동 코엑스 C3 4홀에서는 '액티브 시니어 페어 2017' 행사가 열리고 있다. 기간은 10월 11일부터 3일간이었다.
혈액순환을 돕는 운동기구,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건강베게 등이 있고 백내장 검사, 혈당 검사, 몸의 불균형을 잡아주는 도구 등 건강을 위한 다양한 제품들이 참살이를 추구하는 시니어들을 기다리고 있다.
박람회에서 문화 충격을 받은 것은 장례문화였다. 지금의 장례문화는 일제의 잔재란다. '헐! 이럴 수가! 80년대 초에 이외수의 를 읽고 경악했었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산맥마다 중심에 쇠막대기를 박았다. 우리민족의 혼을 말살하려는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때 '악독한 일본놈들'이라고 이를 갈았는데 다시 한 번 디테일한 일본인들의 교활함에 섬짓해졌다. 삼베옷은 불효했다는 의미로 자손들이 입는 거지 망자가 입는 옷이 아니란다. 죄수나 천민이 입던 삼베옷을 일제가 의례준칙을 통해 수의로 제정한 후 실행을 강제했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값비싼 수의를 장만하느라고 애를 쓴 것이다. 대표 이미지 한복이 수의로 추천되는 샘플 중 하나이다. 중국산 삼베수의를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싸구려 폴리에스터 제품이 80만원짜리라고 하였다. 패션과 패블릭을 공부한 내가 보기에는 여간 허접한 것이 아니었다. 국화는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꽃이라 한다. 장례식에 추천되는 꽃은 카네이션이나 계절꽃을 사용하면 된다고 하였다. 수의도 본인이 좋아하던 옷을 입히면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 생활 깊숙이 박혀 있는 일제 잔재를 하루속히 뿌리 뽑아야 한다. '우리 문화 바로 알리기' 캠페인을 벌여서라도 반드시 우리 고유의 문화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이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을 때 정말 기뻤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오고 직장생활 몇 년째인 서른 살 때였다. 안도감이 컸던 이유는 필자가 결혼적령기를 넘긴 27세까지 시집을 가지 못해 친정엄마가 엄청난 걱정을 하셨던 게 생각나서였다.
그 당시엔 여자가 27세까지 시집을 못 간 건 창피한 일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어 27세 되던 해엔 엄마의 한숨소리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려왔다. 27세를 넘기기 직전인 12월에 중매를 통해 결혼이 결정되자 안심하던 엄마의 웃는 모습이 지금도 애틋하게 기억난다.
아들이 연애를 하는 것도 못 봤고 여자 친구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아 내심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그 옛날 엄마가 시집 안 가는 딸(필자) 때문에 노심초사했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은 결혼적령기가 따로 없어서 아주 늦은 나이에도 인연을 만나 잘 사는 부부가 많으니 결혼이 늦는다고 그리 큰 걱정들은 하지 않는다. 또한 매우 귀하게 기른 딸이 아까워서 시집보내기를 망설이는 부모도 있다고 한다. 결혼하고도 속 썩을 일 있으면 그냥 이혼하고 돌아오라고까지 한다니 아들 가진 엄마 입장에서는 좋은 며느리 찾는 결혼 문제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런 세태에 순둥이 우리 아들이 결혼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필자는 전형적인 중매결혼을 했다. 전문 중매 아주머니의 소개로 양가가 만나 선을 보고 결혼을 결정했다. 아들이 나이 들어가자 필자도 중매를 통해야 할지 어떨지 고민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좋아하는 아가씨를 소개한다 하니 천만다행이었다.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아들이 그저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강남의 모 음식점에서 처음 본 우리 며느리는 참으로 단아하고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연애 한 번 못해본 것 같은 아들이 어디서 이런 아가씨를 만났는지 흐뭇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직장 선배의 소개로 사귀었다고 한다. 둘을 같이 앉혀놓고 보니 얼굴도 눈도 코도 동글동글한 게 서로 닮았다.
결혼적령기를 지나도 결혼하지 못한 딸을 두었던 우리 친정엄마의 노심초사와 필자가 나서지 않고도 사랑스러운 짝을 찾아 필자를 안심시킨 아들이 비교되며 엄마께는 미안하고 아들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흡족한 마음에 기분이 좋았는데 이제부터 결혼시킬 일이 걱정되었다. 필자가 결혼할 땐 모든 것을 어른들이 알아서 해주셨으니 아들 결혼에 필자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가구와 전자제품 등 혼수를 장만하시며 즐거워하시던 친정엄마가 떠오른다.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하지 않는 딸을 시집보내게 되어서 정말 기쁘셨던 것이다. 시댁에서 준비해주신 패물이 엄청났다. 보석으로 7세트를 받았다. 목걸이가 주렁주렁 걸리고 반지와 귀걸이 팔찌 브로치 등이 7개씩 진열된 커다란 보석함을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며 흐뭇해하시던 엄마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렇게 남에게 보이는 걸 중요시했던 필자의 결혼이었다.
우리 며느리에게 그렇게까지는 해줄 수 없어 미안하지만, 성의껏 준비하겠다고 하자 아들이 요즘은 모든 걸 당사자끼리 알아서 한다며 엄마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정말 일사천리로 웨딩업체를 정하고 반지도 저희끼리 맞추고 예단도 저희끼리 준비했다. 양가 어머니의 한복도 어느 날 몇 시에 청담동 한복집에 가서 맞추시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시어머니가 될 필자는 너무 할 일이 없었다. 필자는 철없이 어른이 해주시는 대로 받기만 했는데 아들은 며느리와 의논해 모든 일을 어른스럽게 결정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신경을 많이 썼던 필자와 달리 실속 있게 알찬 결혼을 한 아들은 알콩달콩 예쁜 손녀손자를 필자에게 안겨주며 잘 살고 있다. 그 모습에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보다는 평범함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으며 아들네가 항상 건강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중매를 통해 어렵게 결혼했던 필자보다 연애로 멋진 결혼을 한 아들이 더욱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925년 7월 10일은 필자 어머니의 생년월일이다. 지금까지 그 연세치고는 젊게 보이고 건강도 괜찮은 편이시다. 그리고 아직도 어여쁜 모습을 잘 간직하고 계셔 정성을 다해 단장을 하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우시다. 특히 오뚝한 코와 시원한 이마등 이목구비가 여전히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고운 한복을 입고 자주 입으셨다. 한복 차림으로 학교에 오시면 친구들이 “영애야, 엄마 오셨다. 정말 예쁘시다!” 하며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그러면 으쓱해지면서 필자 얼굴엔 웃음꽃이 만발했다.
어머니는 못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일본 여학교를 다녔던 어머니는 자로 잰 듯 정확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을 많이 낳았으면서도 그런 것들을 자상하게 가르쳐준 적이 없다. 학교 갔다가 오면 어머니는 맛난 것들을 만들어놓고 우리를 기다리셨다. 우리는 그저 맛나게 먹기만 했다. 몇 년 전에 왜 음식 만드는 것도 딸들에게 안 가르쳐줬냐고 물으니 다 자기 방식대로 잘해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시시한 대답만 하셨다.
옷본만 있으면 무슨 옷이든 만들었고 수선하는 일에도 선수였다. 하지만 우리 딸들은 하나도 배운 게 없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여자로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어느 한 가지도 가르쳐준 게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그때 방법을 찾아내며 살았다. 막내는 큰언니인 필자에게 가끔 전화를 해서 묻기도 하지만, 둘째나 셋째와 필자는 스스로 알아서 결혼생활을 했다. 어머니의 조언 같은 건 전혀 없었다.
8년 전 어머니랑 함께 살게 되었다. 이 기회에 모든 것들을 전수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곧 희망으로 마음이 들썩였다. 어머니의 미모 유지법이 도대체 뭔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지도 눈여겨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특별한 비법이 있을까 해서 물으면 그런 거 없다는 짧고 싱거운 대답만 하셨다. 그럴 때면 은근히 야속한 마음이 보글거렸다.
딸들에게 당신의 철학을 얘기해주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그럴 마음이 없는 듯 보인다. 이것이 질투심에서 나오는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그저 혼자 즐기면서 남들에게 칭찬받고 사는 걸로 만족하시는 듯하다. 우리 딸들은 아무도 어머니의 미모를 닮지도 못했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나 동안 유전자만큼은 제대로 받은 거 같다. 딸들이 제 또래보다 모두 젊어 보이니 말이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면 될 텐데 가끔 유별나게 피어오르는 작은 분노가 잘 삭혀지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이다. 아버지가 딸들 교육을 맡아 하셔서 어머니는 아예 우리에게 신경을 안 썼던 것이다. 딸은 어머니의 거울이라는데, 본받아야 할 것들이 있는데…. 어머니의 장점들을 물려받지 못한 원인이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 때 아주 가끔 조잘 안 되는 마음들이 웅성거리곤 한다.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명칭이 항상 헛갈리는 곳! 은평한옥역사박물관이 맞는지 아니면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 제대로 된 이름인지? 여러분은 어떻게들 알고 계시는지요? 오늘은 작심하고 그를 만나러 왔다. 그러나 그를 만나려면 삼가야 할 순서가 있다는 생각이다. 먼저 싸리문을 열고나 보자.
조선의 3대로를 아시는가? 큰길을 따라 서발, 북발, 남발의 삼발로가 조직되었으니 그중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서로(서발)는 기발(말을 타고 이동)에 해당되는데, 바로 이곳 박물관 인근을 경유했던 것이다(구파발, 지명의 유래). 때문에 입구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조선의 역참제도에 대한 내용은 빼놓을 수 없을 터이다.
유리판 아래로 생생한 발굴 현장을 재현해놓은 김자근동 묘를 스릴 있게 체험하는 잔재미도 느껴보며(현재 유적 발굴 과정에 있는 서울 은평구 이말산에서 발굴됨), 세종의 6남 금성대군(단종 복위에 가담했다가 32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함)을 모신 사당인 금성당(실제는 은평뉴타운 우물골 소재) 코너에선 무속신앙, 즉 샤머니즘에 잠시 빠져보기도 한다. 2층의 한옥 상설전시관으로 오르다 보면 계단길 벽면으로 전국의 한옥촌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으며, 한복체험 코너에선 끼리끼리 방문 인증샷도 남길 수 있다. 멀리서 온 객을 위한 대접이 이만하면 융숭한 편이다. 자, 이제 헛기침 한번 해볼 차례다. 그가 버선발로 반겨줄지 모를 일이다.
노을빛 치마에 새긴 가족사랑
슬하에 자식 아홉을 두었던 그, 그러나 그중에 여섯이 그만 병사하고 마는데 자식을 먼저 보내는 어버이의 그 마음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을까.” 유배길에 전남 영암의 월출산을 바라보며 두고 온 집과 가족을 그렸을 그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 있는 시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는 이 길이 무려 18년간이나 지속되리라고 짐작조차 했을까? 참으로 헛헛한 독백이 아닐 수 없다.
“주인 없는 초당엔 적막만이 가득하고, 처마 끝에 방울방울 낙수지어 반기는가?”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친구와 함께 초당에 들린 적이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길을 더듬어 그를 만나러 갔던 그 길, 한적한 초당 대청에 걸터앉아 낙수에 손 비비며 그가 만들었다는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기억이 오버랩된다.
부부간의 애틋함, 자식을 향한 아비의 마음은 옛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고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뺄셈은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다. 유배생활을 하던 그는 부인이 보내온 치맛자락을 재단하여 두 아들과 그 후손들이 간직하도록 아비의 당부를 글로 표현한 서첩을 만드는데 그중 3첩이 남아 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또 남은 천으로는 시집가는 딸에게 매화나무 가지 위에 두 마리 새가 앉아 있는 '매화병제도'를 그려줌으로써 다복한 가정을 꾸미고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원했다.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강진에서 수년간 유배 중일 때, 부인 홍씨가 해진 여섯 폭 비단 치마를 보내왔다. 세월이 오래 흘러 붉은색이 퇴색되었다. 네 첩의 글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보내고, 남은 천으로 작게 장정하여 딸아이에게 보낸다.”
짐작하셨겠지만 오늘 필자가 만나러 온 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하피첩, 은평에 오다
은 노을 하, 치마 피, 엮을 첩의 의미로 부인이 시집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색이 바랬음을 은유한 것으로 지어미에 대한 지아비로서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리 넓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좁지도 않은 기획전시실, 그 공간의 범위로는 감히 재단할 수 없는 선생의 마음과 정신은 결국 오랜 유배생활을 이겨내고 고향(남양주시 능내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고, 만년에도 저술을 놓지 않았던 선생은 회혼일(결혼 60주년 기념일)에 그만 세상을 떠난다. 생의 마직막엔 곁을 지켜준 부인이 있었으니 선생의 임종은 외롭지 않았으리라. , , 등 다산 사상의 핵심은 사회 현실을 바탕으로 제도와 법을 맞도록 바꾸자는 것이 그 골자로 정치 및 행정체제, 형률제도, 경제제도, 생산기술, 군사제도 등 제반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선생이 저술한 책은 모두 503권이라고 한다. 인고의 세월 동안, 그리고 말년에도 평생 붓을 놓지 않았던 선생!
나는 어떤 남편이고 어떤 아버지인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본 기획전은 6월 11일까지 이어지며 문의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으로 하면 된다.
색다른 분위기를 자랑하는 상점이 많기로 유명한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평일 점심시간이었지만 가로수길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듣던 대로 각양각색의 개성들이 넘치는 상점들이 즐비했다. 그중 ‘한복 팝니다’라는 네온사인이 기자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 너머로 갓을 쓰고 곰방대를 문 흑인 모델 사진이 보였다. 외국인과 곰방대 그리고 한복과의 조화라니. 이곳의 이름은 ‘ㄹ(리을)’, 전통 한복이 아닌 ‘네오(NEO, 새롭다는 뜻) 한복’을 판매하는 매장이다.
21세기 한복을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
“저희는 대학교 선후배도,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에요. 예전에 다른 사업으로 팀이 꾸려졌는데 그때 알게 된 분이 유지연씨예요. 아쉽게도 그 사업이 흐지부지되면서 팀은 해체됐지만, 이후 ‘ㄹ’을 기획하게 되면서 다시 연락하게 됐어요.”
‘ㄹ’은 김종원(25)·유지연(27) 대표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김 대표는 20세 때부터 사업을 시작한 5년 차 CEO, 패션을 전공한 유 대표는 ‘ㄹ’을 위해 다니던 교복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 다른 누구와 함께 뜻을 맞추고 공동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김 대표는 유 대표와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사업가 중에선 혼자 일하는 걸 편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유 대표랑 일하면서 느낀 건 ‘정말 잘 맞는다’는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잘 통하는 그런?(웃음)”
두 대표가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는 ‘ㄹ’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한글과 한복을 세계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매장을 열기까지 순탄치 않은 일들이 많았다.
“처음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사업하지 말고 공무원 준비를 하라면서요.”
어느 날 갑자기 자식이 잘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대부분 김 대표의 부모 같은 마음일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걱정은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한 능력껏 준비했죠. 저희 브랜드 취지에 공감해주신 분들이 투자를 해주시는 덕분에 자본금 0원으로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들의 독특한 아이디어에 매료된 것일까. 매장을 연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스타일리스트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하다. 그 명성에 힙입어 벌써 10곳 넘게 협찬 의뢰가 들어왔고, 얼마 전에는 가수 솔비의 뮤직비디오 촬영 의상을 협찬하는 등 꽃길을 걷고 있다.
문득 왜 브랜드 이름을 ‘ㄹ(리을)’로 정했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자음을 고집했다면 ‘ㄹ’이 아닌 다른 글자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기억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ㄱ(기역)’을 쓸 수도 있고 사람 인(人)을 닮은 ‘ㅅ(시옷)’을 고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브랜드 이름으로 외국인에게 한글을 알리는 동시에 ‘ㄹ’이라는 브랜드는 한복을 판매하는 곳이라고 알리고 싶었어요. 해외에 나가서 외국인과 대화하다 보면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아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하지만 아직 외국인한테 ‘ㄹ’을 보여주면 숫자 ‘2’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외국인이 저희 매장을 들르거나 브랜드가 유명해진다면 다음부터는 2가 아닌 한글 ‘ㄹ(리을)’로 봐주시겠죠.”
한복의 변신은 무죄
이제 한복은 한국인도 잘 입지 않는, 실용적이지 못한, 옛날 옷이 되었다. 최근 서울시에서 ‘일상 속에서 한복 입기’ 장려책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경복궁이나 인사동 주변으로 대여를 해주는 매장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을 뿐이다. 참 씁쓸한 풍경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외국인 친구가 한복을 대여해 입어보더니 ‘예쁜데 실생활에서 입기엔 불편해. 너희도 불편해서 안 입는 거 아니야?’라고 물어보더라고요. 현대인들에게 19세기 옷을 겨우 알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저 체험에 불과한 일이 되어버린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도 불편해서 안 입는데 과연 외국인이 한복이 예쁘다고 살까? 그리고 입고 다니기는 할까?’ 이런 질문을 해보고 트렌드에 맞춘 한복이 필요하다는 답을 찾았죠. 최종적으로 저희가 선택한 건 한복의 원단을 선택해 옷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실제로 매장 안에서 본 그들의 옷은 놀랍게도 모두 한복 원단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어 청재킷인 줄 알고 만져봤던 옷 또한 말이다.
“만져보시면 아시겠지만, 한복 원단이에요. 자수도 직접 디자인하고 있고요!”
자신 있게 말하는 유 대표의 목소리에서 ‘ㄹ’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저희가 디자인한 정장의 경우 두루마기처럼 겉옷을 만들 때 사용하는 양단을 사용했고, 미니스커트는 옛날 속치마나 치마 안감으로 사용한 깨끼원단으로 제작했어요. 이렇게 서양 옷 패턴에 한복 원단을 사용함으로써 동양과 서양 문화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네오 한복’이 탄생되는 거죠.”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이냐고 물어봤을 때 돌아온 답변은 다소 의외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드는 한복은 한복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자인에 있어서 신경 쓰는 부분은 없어요. 저희는 옷의 패턴에 그냥 한복 원단을 사용할 뿐이거든요. 원단을 보다가 ‘아, 이 색의 원단으로는 반바지를 만들면 예쁘겠다’라는 생각이 들면 반바지를 만드는 식으로요. 물론 처음 딱 보면 한복으로서는 약간 낯설게 느껴질 수 있겠죠. 근데 그거 아세요? 김치도 처음엔 백김치였는데 고춧가루가 들어오면서 지금 우리가 먹는 빨간 김치가 됐죠. 한복의 이미지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을 알리는 국가대표 ‘ㄹ’이 되고 싶다
수입이 생기면 돈에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ㄹ’의 대표는 달랐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웃음). 저희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알리는 브랜드가 되자고 했거든요. 사실 지금 인기를 끌면서 수입이 생기다 보니 어떤 디자인으로 똑같이 대량생산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우리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맞춤제작 옷을 많이 만들기로 다짐했어요. 돈 때문에 브랜드의 목적을 잃고 싶지는 않아요.”
이들의 초심을 최근에 다시 한 번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ㄹ’의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한 혼혈인 학생이 감사 인사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이 학생은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ㄹ’의 옷을 보더니 “너희 나라 옷이냐?”고 물어보면서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줬다는 내용이었다.
“뿌듯했죠. 우리가 만든 브랜드로 인해 관심을 받고 또 한복을 알린 거니까요.”
김 대표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고 한다.
“저는 원래 검도를 했었는데 국가대표가 되지는 못했어요.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축구나 농구 같은 스포츠 종목에 출전하는 것도 국가대표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국가대표의 의미는 조금 더 넓어요.”
김 대표는 20대 초반에 국가에서 지원금을 받아 해외에 많이 다녀왔다고 한다. 이런 활동도 국가대표라고 생각하는 그는 사회 공헌 프로젝트 국가대표로서 해외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ㄹ’ 브랜드의 한복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해외에서 유명인사나 높은 분들을 만나면 ‘내가 국가대표로 이 자리에 왔는데 한국을 알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한 적이 엄청 많아요. 그래서 한국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 사연을 받아 ‘ㄹ’의 옷을 선물하고 싶어요. 그분들 한 분 한 분이 특별한 국가대표가 되길 희망하면서요.”
어느 날, 배우자가 나의 괴팍한 면까지 닮아버린 걸 보고 심장이 덜컥할 때가 있다. 하물며 옷 입는 스타일까지 비슷해지는 건 부부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여기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 커플들이 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벌의 패션으로 부부애를 과시하는 커플룩의 선구자들.
글 김민정 프리랜서 패션에디터 사진 instagram.com/bonpon511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에서 중년 부부로 분한 고두심과 장용의 대화가 떠오른다. 사기를 당할 뻔한 이 시대의 대표 중년남 장용이(극에서의 이름도 ‘신중년’이다) 고두심에게 용서를 구하자, 고두심이 눈물을 흘리며 친 대사다. “욕해달라고? 뭐라고 욕해줄까? 부모님은 당신을 낳았지만, 40년 넘게 살아온 건 나야. 내 거울이 당신이야. 당신 거울이 나고. 끼리끼리 산다는 게 맞아. 나 당신한테 돌 못 던져”라며 그를 용서했다. ‘당신은 나의 거울’. 이 말처럼 입맛이 같아지고, 취향이 비슷해지고, 심지어 외모나 패션까지 자연스레 닮아가는 것이 부부의 숙명이다. 애정이 깊은 부부는 자연스레 서로를 공유한다. 20대의 불타오르는 커플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광고하고 증명하기 위해 커플룩을 입는다면, 중년은 다르다.
한창 젊은 시절에는 똑같은 옷을 입는 게 ‘커플룩’의 정석이라 여겼지만, 나이가 지긋해지면 같은 ‘옷’이 아니라 같은 ‘느낌’으로 입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좋은 예가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화제가 된 60대 일본인 부부다. ‘bonpon511’이라는 아이디로 활동 중인 이 부부는 1980년에 결혼해 올해로 37년째 부부로 살고 있다. 백발의 부부는 작년 12월부터 100여 벌의 커플룩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는데 그 인기가 어마어마하다. 팔로워 수만 이미 43만여 명! 웬만한 연예인도 울고 갈 숫자다. 그들이 업로드한 사진에는 보통 4만 개가 넘는 ‘좋아요’가 달린다. “저흰 완벽한 커플룩보다는 색상과 무늬, 패턴 면에서 통일성이 있는 패션을 즐겨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부부는 커플룩의 노하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유니클로나 GU 같은 SPA 브랜드에서 주로 쇼핑을 하며 쇼핑 취향이 비슷해 자연스레 커플룩을 입게 되었다는 부부. 부인이 굵은 줄무늬 티셔츠를 입으면, 남편은 그보다 얇은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부인이 빨간 원피스를 입으면 남편은 빨간 니트로 분위기를 맞춰준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컷의 사진으로 부부애를 과시하고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패션의 힘 아니겠는가.
커플룩의 또 다른 사례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를 들 수 있다. 앞서 만난 일본인 부부와는 또 다른 리듬감으로 커플룩을 완성한다. 70세를 넘긴 이 노년의 커플은 연출이 1%도 섞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커플룩을 선보인다. 부인의 머리를 남편 백건우가 직접 잘라줄 정도로 애정이 깊은 부부는 공식석상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비슷한 분위기의 옷을 입는다. 한때 화려한 여배우의 길을 걸었던 윤정희는 남편 백건우를 만나 소박하게 변했다. 머리 손질은 남편이 해주고, 어떤 자리에 가든 메이크업 역시 자신이 직접 한다. 미니스커트와 베레모를 즐기던 패셔니스타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백건우, 윤정희 부부로서는 완벽한 패션을 보여준다. 백건우가 하얀 터틀넥에 턱시도를 입고 무대에 서면(이 또한 얼마나 백건우스러운가), 윤정희는 검정색 롱 드레스에 그레이 스카프를 하고 옆을 지킨다. 어깨선을 한참 벗어난 오버사이즈의 코트를 입고 파리 거리를 걷는 부부의 모습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멋지다. 앞에서 고두심이 말한 ‘당신은 나의 거울’이라는 표현이 이 사진의 캡션으로 딱 어울린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잘 기억하는 커플룩의 또 다른 사례는, 영화 의 주인공들. 76년째 함께한 부부는 주로 고운 한복을 같은 컬러로 맞춰 입는다. 꽃분홍에서 쪽빛 한복까지, 그들은 눈부신 컬러들로 부부임을 강조한다. 둘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 몸이 된 부부의 모습이 옷에서도 읽힌다.
젊은 커플들에게는 커플룩은 어떻게 연출해야 멋지며, 어떤 아이템이 제일 낫다는 식의 스타일링 팁이 어울릴지 모른다. 하지만 수십 년, 서로를 비춰온 시니어 부부들에게는 그런 팁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커플룩을 만들지 모른다. 이미 많은 것들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는 부부들은 옷장만 열어봐도 알 수 있다. 다만 나의 남편과 함께, 나의 부인과 함께라는 생각을 지우지 않고 옷을 고르는 시간마저 함께한다면 커플룩은 자연스레 완성될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매력적인 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