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 요즘 ‘청산별곡’을 부르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지난해 귀농·귀촌한 사람도 50만 명에 달한다. 자연과 농촌, 어촌, 산촌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높아진 관심이 TV 화면 속으로 옮겨졌다. 자연·자연인 열풍이 TV를 강타하고 있다.
최근 들어 자연과 농촌·어촌·산촌·오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담은 교양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들이 급증하고 있다. 시청자의 반응도 높아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들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자연과 자연인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으로는 오지, 산골 등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사연과 일상, 자연에 대한 생각들을 들어보는 MBN의 , 전국 방방곡곡 산간 오지를 찾아 그곳의 생활을 경험하는 TV조선의 , 오지를 찾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꾸미지 않은 삶과 생활을 보여주는 SBS의 등이 있다. 또한 도시생활에 지친 연예인들이 자연으로 떠나 그곳에서 만난 젊은 자연인(30~40대)과 함께 생활하며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는 O tvN의 , 강호동·김희선·정용화 등 도시에서 사는 연예인들이 섬에 일정 기간 머물면서 섬사람들의 생활과 일상을 경험하고 도시인이 생각하는 자연과 자연인에 대한 단상을 보여주는 올리브TV의 , 농촌이나 어촌에서 생활하며 먹거리를 직접 구해 식사를 해결하는 tvN의 등이 자연과 자연인을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으로 재미를 주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연과 자연인을 여행이나 체험 등 다양한 소재·형식과 결합해 만든 프로그램들도 양산되고 있다.
외국의 오지 사람들을 만나 용기, 지혜, 위로를 얻는 MBC의 ,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제주에서 생활하는 이효리·이상순 부부 집에 일정 기간 민박을 하며 바다와 자연을 접해보는 JTBC의 , 김병만·이상민 등 연예인들이 어촌과 바다를 찾아 혹독한 미션을 수행하며 어촌 생활과 먹거리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는 SBS의 등도 자연·자연인의 모습과 의미를 엿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밖에 귀농·귀촌인이 많기로 소문난 충남 홍성군 홍동면 사람들의 일상을 방송한 KBS의 (6월 25일 방송분) 등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도 최근 들어 자연인과 귀농·귀어·귀촌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어촌·산촌의 사람들과 그들의 모습을 전달해주는 KBS의 은 근래 들어 코너도 다양해졌고 시청자의 관심도 높아졌다.
왜 이처럼 자연과 자연인, 귀농과 귀촌 등을 다룬 TV 프로그램들이 급증하는 것일까. 의 박상혁 PD는 “많은 사람, 특히 도시 주민이 일, 건강(힐링), 가치관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농촌·산·숲·바다·섬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대해 관심이 많이 늘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욕구와 관심이 자연과 자연인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 증가 원인이 됐다”라고 분석했다. 치열한 경쟁이 일상화하고 돈과 물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의 삶에 염증을 느끼거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꿈꾸며 자연 속의 삶을 동경하기 시작한 것도 자연과 자연인 관련 프로그램의 증가를 초래했다. 또 환경 변화와 의학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연장됐지만, 은퇴시기가 빨라져 인생 2막을 열어야 하는 장·노년과 산업화로 고향을 떠나 서울 등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 중 여생을 농촌이나 어촌에서 일하면서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자연·자연인 프로그램 제작으로 이어졌다.
일자리가 감소하고 높은 주거비와 생활비로 어려움을 겪는 도시에 비해,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고 주거비와 생활비도 저렴해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된 농어촌을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현상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부부가 결혼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은 따로 하는 졸혼 등 새로운 가족 형태가 등장하면서 그동안 가족 때문에 선택하지 못했던 자연인의 삶을 사는 사람도 증가했다. 이러한 사회적·문화적 현상을 프로그램에 수용하는 방송 제작진의 움직임이 자연과 자연인을 다루는 프로그램의 양산으로 연결된 것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귀농어·귀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귀농·귀촌을 선택한 사람은 49만 6100명에 달했다. 도시에서 읍·면으로 이주한 사람 중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귀농인은 2만 600명, 읍·면으로 거주지를 옮겼지만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귀촌인은 47만 5500명이었다. 자연과 자연인을 다룬 프로그램은 대중,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함께 힐링과 위로의 시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귀농과 귀촌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는 등 긍정적 효과가 적지 않다. 서울에서 사업하는 박문수(57)씨는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다룬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도시의 피곤한 일상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는다. 노년에 서울을 떠나 농촌으로 내려가 생활하고 싶은데 이에 대한 다양한 정보도 얻어 좋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연과 자연인, 농어촌과 농어민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의 폐해도 적지 않다. 이들 내용이 농어촌, 농어민의 현실과 실상이 거세된 것들이 주류여서 시청자에게 자연과 자연인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심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에서 미디어가 농촌 현실과 농민의 노동을 도외시한 채 농촌을 목가적 이상향으로 그리거나 촌스러운 곳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했듯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다룬 TV 프로그램의 상당수가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이상적인 삶의 전형으로만 현시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 TV 프로그램에서의 농어촌과 자연은 각박한 생활에 지친 도시인들의 휴식 공간이자 도시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재기 무대인 경우가 허다하다. TV 속 농어촌에는 심화하고 있는 도시와 농어촌의 양극화 문제, 1년 365일 일해도 빚만 느는 현실, 악화하는 가족 해체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그를 봤던 그때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마치 온몸에 전기가 감돌고 있는 전기맨(?) 같았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 로비에 나온 젊고 낯선 배우는 차갑고 깊은 까만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MBC 드라마 에서 열연한 배우 한갑수(韓甲洙·48)다. 불꽃 카리스마로 연극 무대를 내달리더니 어느 날 갑자기 TV 속에 나타났다. 그것도 강아지 같은 함박웃음과 함께 말이다. 연기 인생 30년. 그 누구도 몰랐던 반전 연기로 사랑받은 배우 한갑수를 만났다.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다는 대세 배우의 삶과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이고 어른이고 많이도 알아봅니다
“촬영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다가와서 친구 부르듯 그냥 이름을 불러요. 제가 아무리 ‘이놈! 아저씨한테!’라며 무서운 표정을 지어도 신이 나서 그러는 거예요.”
MBC 주말 드라마 는 한갑수에게 드라마 하나 끝난 것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작품이 됐다. 배우로 살면서 처음 가져보는 기분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무대에 올라 관객의 박수를 받아왔지만, 조명이 없는 거리로 나서면 박수갈채는 온데간데없었다. 이 드라마는 달랐다. 촬영장에 모인 아이들은 한갑수를 “아바디”를 목 놓아 외치는 또래 친구 대훈이로 대했다. 드라마가 끝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알아봐도 너무 알아보니 인기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인생을 바꿔준 대박 드라마가 된 것. 지금 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한갑수는 방송 연기 초반 배우로서 자존심이 상해 고사하는 일이 많았다.
“캐스팅 디렉터들이 제 연극을 봤는지 연락을 해오더라고요. 한 회 잠깐 출연할 수 없냐고요. 그런데 처음에는 기분 나쁘다고 안 한다고 했어요. 내가 연극을 몇십 년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연락을 해오던 디렉터 중 한 명이 한갑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연극은 많이 했어도 카메라 연기는 안 해봤으니 경험해보라 권유했다. 미디어 매체에도 시선을 줬으면 한다고 말해줬다. 연극을 많이 했지만 생각해보니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후 경찰이건 면접관이건 주어지는 역할은 작건 크건 열심히 해냈다. 한갑수가 시청자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작품은 MBC 드라마 과 이다.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특히 이휘향에게 간 이식을 해주는 오빠 역할을 했던 은 인생작 로 가는 도움닫기 역할을 해주었다.
“의 김사경 작가님이 을 보시고 저를 추천하셨어요. 당시 북한 외교관 태영호씨가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제 역할이 그와 비슷한 북한의 고위직이라더군요. 이제는 좀 지성인을 연기하나 싶었죠. 드라마가 시작하고 한참 지나 제가 등장하는 대본이 나왔다며 작가님이 연락하셨어요. 그런데 열 살 아이 연기가 가능하냐고 묻더라고요.”
연극 에서는 피바람을 일으키는 윤원형을, 유진 이오네스코의 잔혹극 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 역할을 했던 그다.
무대 위 선 굵은 배우, 아이를 연기하다
잔인함과 공포를 연기하던 배우가 열 살 아이 지능을 가진 연기라니.
“네? 저는 열 살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바보냐고도 물어봤어요.”
걱정돼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상의 언어로 흐르는 드라마에 나이 든 남자가 아이처럼 연기하는 것이 과연 어울릴까 걱정에 걱정을 더해갔다. 이에 김사경 작가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아이처럼 본능대로 말할 것과 북한 아이만의 순수함을 표현해 달라고 했다.
“순수를 어떻게 하지? 일단은 맑게 웃자는 것이 큰 콘셉트였어요. 내가 눈도 크고 쌍꺼풀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걸 시청자가 귀엽게 봐줬던 거 같아요. 그리고 이휘향 선배님과 (임)수향이가 너무 악한데 제가 팍팍 시원하게 요즘 말로 사이다처럼 이야기하니까 많이들 좋아하신 것 같아요. 두 분이 잘했기 때문에 제가 덕 본 겁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사이가 나빴지만 평소에 제일 친했어요.”
연기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영역이었다. 시청자에게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에 자신의 능력보다 함께한 선후배의 도움이 컸다며 겸손하게 공을 돌리는 배우 한갑수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얼굴, 꽤 쓸모 있습니다
경남 거창 출신인 한갑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지역의 한 청소년 극단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도우며 연극을 시작했다. 무일푼 극단 생활 3년 만에 배우로 무대에 오른 그는 경남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연극제의 연기상을 휩쓸었다. 괴물 같은 연기력을 눈여겨본 연출가 이윤택이 2001년 그를 서울 무대에 올려세웠다. 30대 중반의 한창 물이 오른 남자 배우의 연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의 역할은 늘 실제 나이에 비해 한참이나 많았다. 지금도 주어지는 역할은 실제보다 열 살 이상 많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KBS 2TV 저녁 일일 드라마 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나이가 많은 선배 연기자가 아들로 혹은 동생으로 등장하는 일은 이제 다반사다. 본인의 나이와 맞지 않은 역할을 하는 게 서운하지 않을까? 아니라고 했다.
“연출가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도 연출가님한테 흰머리가 좀 있는데 염색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제 헤어스타일이 좋다면서요. 한 촬영 감독님은 오히려 제가 늙어 보이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왜냐하면, 실제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면 대사 암기가 좀 어렵고 50대 연기는 남자 배우나 여자 배우나 할 수 있는 배역이 많이 없다더라고요. 제가 사실 많이 하는 역할이 주인공 아버지 역할입니다. 대부분 60대 역할일 수밖에 없죠.”
이번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상대 배역으로 등장한 배우가 예순두 살이었는데 한갑수가 오히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던 것. 결국, 상대 배역을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려고 분장팀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내가 노안이라는 걸 알아요. 어디 가서 나이 얘기하면 깜짝 놀라더라고요. 변희봉 선생님이 저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봐서 ‘오십입니다’ 했더니 ‘애’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또 좋은 건 역할도 역할이지만, 나이가 한참 들어 보이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더라고요(웃음).”
천생 배우 어린 아내의 특급 매니지먼트
한갑수는 소속 회사 없이 아내 변혜경(39)씨와 촬영 현장을 다니고 있다. 아내가 한갑수의 매니저인 셈. 드라마를 하게 되면서 단 하루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 가면 사람들이 아내 변혜경씨를 더 많이 찾는다. 배우 이휘향도 그랬다.
“미스 변 어디 있느냐고 이휘향 선배님이 그러세요. 밥 먹으러 가야 한다고요. 나랑 가자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랑요. 감독님도 너무 좋아하셨어요.”
아내는 현장 스태프와 친해질 수 있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잘 웃고,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인사를 잘했다.
“만약 저 혼자 다녔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제 스타일이 원래 연기에 집중해야 하니까 누구랑 말도 안 하고, 친해질 수 없거든요. 그런데 옆 사람이 분장이나 의상 스태프랑 친하니까 편안하게 이것저것 부드럽게 부탁합니다. 우리 집사람 덕분에 참 좋죠. 현장에서 저 혼자 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아내가 해주고 있습니다.”
배우 한갑수의 아내로 매니저로 사는 변혜경의 직업 또한 배우다. 그것도 천부적인 연기실력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 무대 위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관객과 호응하던 모습이 생생한 멋진 배우였다. 열 살 차이 어린 여배우는 2001년 무대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한갑수를 보고 반해버렸다.
“거창에서 연희단거리패로 옮겨서 연극을 할 때였는데 밀양에서 합숙생활을 했어요. 아내는 연희단 소속 배우였고요. 아침마다 단원들이 조별로 다 모이는데 한 달 내내 아내가 ‘한갑수 내 꺼다’ 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정말 장난인 줄 알았어요. 저리 가라고도 했어요.”
장난 같던 아내 변혜경의 고백은 사실이었다. 결국 연극의 주인공으로서 공연을 닷새 앞두고 아내는 사랑의 탈출(?)을 하고야 말았다. 장례가 촉망되는 여배우의 결혼을 극단은 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도 극단 대표인 이윤택 선생님 마음에 우리가 남으셨나봐요. 진주에서 신혼살이할 때 그 지역으로 강연을 오신 적이 있었어요. 강연하시다가 ‘한갑수 저놈이 우리 혜경이를 훔쳐갔어요’ 그러셨답니다(웃음). 이 선생님이 아내를 딸처럼 예뻐해서 상심이 크셨을 거예요.”
최악의 궁합을 이기고 최고 부부가 되다
“결혼 전에 저희가 결혼하면 아내가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애를 못 낳거나 낳아도 불구가 될 거란 말을 들었어요. 다행히 애도 낳고 별일 없는가 싶었는데 아내가 아이 낳고 100일 만에 쓰러졌습니다.”
깨소금 냄새나는 신혼생활도 잠시, 시련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아내 변혜경씨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급기야 상대방의 말도 왜곡돼 들린다고 하다 정신을 잃었다. 뇌전증이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도 원인이 나오지 않았어요. 한의원에도 갔었고, 심지어 신병이란 말도 들었어요.”
처가에서 아이를 대신 키워주고 병원비 대부분을 지원했지만, 가족 부양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인어른이 서울대병원 앞에 가서 시위도 했어요. 딸의 머리라도 한 번 열어봐 달라고요.”
발병 7년 만에 아내 변혜경씨는 뇌 수술을 받았다. 수술 두 번째에 문제의 위치를 찾아냈고, 세 번째 누운 수술대에서 원인을 제거했다. 수술 직후 만난 아내는 딸도 한갑수씨도 못 알아봤다고. 그래도 젊은 사람이라 의료진이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몸이 좋아졌다.
배우가 숙명인 한갑수의 해피스토리
작년 하반기 한갑수는 가족과 함께 경남 진주에서 서울 근교로 이사 왔다. 이곳으로 오고 얼마 안 있어 드라마를 하게 된 것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의 직업이 가진 숙명적 불안감과 사랑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는 진짜 배우였다.
“배우는 오래가기 쉽지 않습니다. 소모되고 금방 잊히죠. 평생 숙명처럼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찾아줘야죠.”
한갑수라는 배우가 지금보다 선명해질 때까지 소속사에 들어가는 일 없이 아내와 함께 일할 생각이다. 지금의 상태로 소속이 되면 다작을 해야 하거나 정체성이 모호해질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가 다시 배우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스갯소리로 ‘10년 후에는 나는 일을 좀 쉬고 아내가 열심히 연기했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몸도 완쾌되고 아이도 다 키웠으니 아내도 연기를 많이 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혜경이가 나이 들면 연기자로서 더 빛을 낼 것이라고 봅니다. 현장을 같이 다니는 이유가 많이 보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거든요.”
현장을 함께 다닌 덕에 아내 변혜경씨도 잠깐이나마 에 얼굴을 비치기도 했다. 매니저 일을 하는 틈틈이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아내가 대견스럽다.
“부부생활 15년을 해보니 조금씩 서로 알게 된 거 같습니다. 힘든 것이 좀 거쳤으니 저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필자가 활동하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창립 2주년 행사에서 댄스공연을 하기로 했었다. 필자가 이끌고 있는 댄스스쿨도 공연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일 년 전 도심권 50플러스센터 시절, 같은 무대에서 차차차로 공연을 한 적이 있어 이제는 그런 행사에는 당연히 댄스를 보여줘야 하는 것으로 인식된 모양이다.
그러나, 댄스스포츠는 커플댄스이므로 제약이 많다. 우선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남녀 성비가 맞아야 커플을 만들 수 있다. 필자 전공인 왈츠, 탱고 같은 모던 댄스는 적어도 호텔 그랜드볼룸 정도의 공간이 있어야 하므로 서울 시청 태평홀 무대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그 정도 무대에 맞는 라틴댄스로 이번에는 자이브를 추기로 한 것이다.
체면이라는 것도 있었다. 수강생들을 무대에 올려 보내야지 선생이 직접 무대에 올라간다는 것은 보기에 안 좋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 올라갈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빠른 템포의 자이브 동작 열댓 개를 남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소화한다는 것부터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이나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니 기회 있을 때 하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6개월 이상 자이브를 가르쳤는데 적어도 공연에서 보여 줘야 단락이 마감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같이 춤을 출 파트너였다. 대상이 될 만한 사람들은 미리 사유를 들어 공연에 못 나간다고 빠졌다. 다행히 춤에 열정을 가진 한 수강생이 있어 공연 얘기를 했더니 일단 수락했다. 그러나 날짜가 다가오자 갈등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몇 차례 못하겠다고 포기 의사를 밝혔다. 춤을 추다가 순서를 까먹는 경우, 동작이 틀리는 경우, 관객 중에 우리보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이 와서 혹평을 할 경우, 춤 자체에 자신이 떨어져 남들 앞에 서기 이르다는 생각 등이 갈등을 촉발했을 것이다.
이윽고 디데이가 왔다. 좀 일찍 도착해서 무대를 점검해 보니 바닥이 카펫이었다. 마루에서 연습하다가 카펫에서 춤을 추려면 발이 미끄러지지 않아 춤추기가 어렵다. 특히 회전 동작이 많은 여자로서는 더 어렵다. 그러나 하기로 했으니 무대에 올랐다. 다행히 무난하게 잘 했다. 파트너가 몇 가지 동작이 틀렸으나 관객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파트너의 순발력 덕분에 안 보이는 것이다. 춤은 대부분 여성을 위한 것이다. 남자는 그 여성을 돋보이게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파트너는 외모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짧은 머리라 젊어 보이고 체형도 좋은 편이다. 끼도 넘쳐서 동작이 적극적이고 커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이 나게 만든다.
파트너는 어디선가 빨간 원피스 드레스를 준비해 왔다. 아직은 첫 무대이니 치마 길이가 무릎 아래까지 왔지만, 춤이 익숙해지면 스스로 치마 길이가 짧은 것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검정 드레스에 검은 색 모자를 썼다. 벗겨진 이마를 가리려면 모자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동영상을 보니 그런대로 잘 했다. 사진으로 본 드레스 모양과 콤비도 좋았다. 욕심 같아서는 좀 더 빠른 템포의 음악을 선곡했더라면 좀 더 박진감 있는 춤을 보여줬을 텐데 그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천장이 높고 어두운 극장 안은 어린 배우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무겁고 답답했다. 찾아다닌 끝에 밖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여니 주황빛 석양이 스며들다 온몸을 감싼다. 문밖에는 까치머리에 안경을 쓴 사내가 태양과 마주하고 앉아 있다. 그는 미래의 마임이스트 유진규(柳鎭奎·64)다. 내면의 대화와 몸짓 언어를 택한 그는 오늘도 소통의 벽에 길을 내며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장난장, 오랜만에 몸 좀 풀까?
“어디서 만날까요?”
서울시청 앞 광장 한복판에서 만났다. 인터뷰 약속을 잡은 날, 마임이스트 유진규는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올해로 세 번째인 김장문화제의 축제 프로그램 ‘김장난장’ 예술감독을 맡은 것. 그는 마임이스트이기도 하면서 관록의 축제 장인(匠人)이기도 하다. 축제 불모지였던 춘천에서 국제마임축제를 만들어 25년간 예술감독을 해왔다. 그의 손을 거치면 일상으로부터 탈출이 가능했고, 남녀노소가 한바탕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축제로 거듭났다. 유진규는 이날 새로운 도전, 시민들과 함께하는 김장 퍼포먼스 생각에 한껏 신나 있었다.
“김장문화제 주최 측에서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고 제안을 해왔어요. 잠깐 고민을 했죠. 지금까지 공연예술축제를 해왔는데 김장이라니? 그럼 어떻게 접목시켜야 하지? 그때 머리에 그린 그림이 춘천국제마임축제 때 하던 아수라장과 도깨비난장이었어요. 축제다운 난장을 한번 해보겠다고 해서 만든 것이 ‘김장난장’이에요. 저는 축제 난장 전문가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리허설을 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모일지도 헤아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11월 5일 진행된 ‘김장난장’은 젊은 세대에서부터 시니어 세대까지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말 그대로 한판 난장이었다. 몸빼 바지에 고무장갑을 낀 시민들은 스스로 절여지고 다듬어지는 배추 역할로 참여했다. ‘김장난장’이 끝난 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유진규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재밌어했다. 색가루(인체 무해한 전분가루를 사용했다)를 뿌려대서 시민들이 도망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어울려 한껏 즐기는 모습을 봤다. 잘 노는 민족임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축제의 달인(?) 손에서 또 한 번 위트 넘치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마임 하면 유진규, 유진규 하면 마임
자, 그럼 이제부터는 마임이스트 유진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정신없이 자신의 근황을 쏟아냈다. 그런데 도통 이 글을 읽으면서도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라며 궁금해 하는 독자를 위해 친절한 설명 들어간다. 유진규는 마임하는 예술가, 즉 마임이스트다. 그렇다면 ‘마임’이란 무엇인가. 들어도 생소할 수밖에 없는 예술, 직접 물었다. 마임이 무엇입니까?
“마임이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찰리 채플린이나 어릿광대들이 보여주는 판토마임을 생각할 거예요. 쉽게 얘기해서 말은 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몸짓과 재주를 통해서 자기를 보여주고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그런데 판토마임과 마임은 달라요. 희극배우들이 하는 판토마임이 대중적 형태라면, 마임은 다분히 예술적이고 개인적인 세계가 개입됩니다.”
지금까지 ‘마임 하면 유진규, 유진규 하면 마임’으로 인식됐다. 축제의 장인보다는 ‘한국 마임의 아버지’라는 이름표가 그를 따라다닌다. 45년간 이어진 몸짓에서는 독보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다양한 변화와 시도를 통해 담백하고 깊은 숨을 마임에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다.
물끄러미 앉아 있기를 좋아한 소년, 마임에 빠지다
유진규가 마임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운명이었다. 말 없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타고난 것일 수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사실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은 말 없는 세계이거든요.”
어렸을 적 그의 꿈은 수의사. 동물원이 있던 창경원(지금의 창경궁)에 자주 드나들면서 동물들과 함께하는 삶을 그렸다. 건국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해 잠시나마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시대였다.
“제가 70학번이에요. 유신시대 직전이었죠. 대학생이 고등학생보다 더 자유롭지 못했어요. 나는 대학교 들어가면 자유를 맘껏 누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방황하다 만난 것이 연극이었어요. 1년은 휴학하고 1년은 방황했어요. 삶에서 중요한 시점이었죠.”
결국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길을 버리고 연극을 택해 극단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극단 안에서도 유진규는 모순점을 발견했다.
“예술은 자유로워야 하는데 극단 역시 철저한 조직사회였어요. 한 사람이라도 어긋나면 안 되는 조직화, 분업화된 곳. 한쪽으로는 재밌었는데 다른 한쪽으로는 억압을 느꼈어요. 그럴 때 마임을 알게 됐습니다. 마임은 내가 생각한 것을 글로 써서 내 몸으로 표현하면 되는 거였어요.”
극단을 나온 그는 독립적인 마임의 길로 들어섰다. 그 길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1981년 춘천으로 내려간 그는 소를 키우며 살았다. 건강문제로 생사의 기로에 서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 흘러 그 또한 빛바랜 과거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길 위의 공연자, 나를 부르는 그곳이 무대
유진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춘천국제마임축제 예술감독이라는 타이틀이다. 스스로도 한 몸과 같다고 말해왔던 춘천국제마임축제 예술감독직에서 그는 2013년 물러났다. 흔히들 말하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갑작스럽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또 다른 도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2년 동안은 혼돈 상태였어요. 마음 정리를 하면서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나가야 하나 나 자신과 대화를 많이 했어요. 결국 나는 공연하는 사람, 예술가였습니다.”
찾아주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 무대에 오르리라 마음먹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2014년 진주골목길아트페스티벌에서 길거리 공연이 가능한지에 대한 타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진규는 자신이 무대가 있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런데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제 자신에게 물었죠. 넌 배우잖아. 거리에서 널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극장에서만 공연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거리와 극장은 뭐가 다르냐. 극장은 모든 것이 보장된 곳이고 거리는 던져진 공간이죠. 거리에서는 보고 싶으면 보고, 안 보고 싶으면 안 보는 게 가능해요. 보다가 가도 괜찮고, 중간에 봐도 괜찮고 보면서 떠들어도 괜찮고 보면서 먹어도 되죠. 네가 배우라고? 그렇다면 어디서든 공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했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한 번도 거리에서 공연을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게다가 마임축제를 할 때는 매년 거리공연을 하는 200여 명의 사람을 일일이 보고 선택했다. 공연 장소를 지정해주고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평가하던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평가하던 사람이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된 것.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반쪽자리 공연자밖에 안 되는 거죠. 기왕 깨진 몸 부딪혀보자. 극장에서도 공연할 수 있지만 거리 무대에도 서보자. 그것이 완전한 공연자라고 생각했어요.”
일주일이 지난 뒤 주최 측에 다시 전화를 걸어 공연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거리공연에 모험을 걸었다. 다행히 관객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왜냐하면 아무도 못 가게 해야 하잖아요. 가는 사람이 보이면 마음이 흔들려. 막 불안하고(웃음). 관객들은 재미없으면 무조건 가버려요. 볼 이유가 없잖아요. 그다음에는 대학로에서 했습니다. 첫날은 관객이 많았는데 둘째 날은 다르더라고요. 가는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말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관객과 함께 살아남는 배우가 진짜 배우라는 생각을 거리공연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됐어요.”
자연 속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는 기타, 바이올린, 타악기 등 모든 것이 더 생생하게 어울렸고 분위기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공연을 했다.
“연주자와 함께 작업을 하다 보면 분위기에 따라 많이 달라져요. 현실로부터 떨어져서 공연하면 사람도 자연의 흐름에 맡기게 됩니다. 비도 올 수 있고 바람도 불 수 있고요. 알게 뭐야 어떤 일이 생길지(웃음).”
디어 마이 손주, 할아버지는 사양할게
유진규는 4년 전 할아버지 대열에 합류했다. 마임축제 일로 힘든 와중에 웃음을 안겨준 고마운 손주다. 그리고 2년 만에 또 외손주를 봤다. 지금은 두 아이의 할아버지가 됐다. 할아버지라니, 처음에는 좀 거부감이 들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 꺾여버리더라고. 할아버지니까 이러면 안 되지.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할아버지로 내면 정리가 되는 것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 거부! 할아버지 아니야! 초반에는 그랬어요.”
물론 손자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지고 좋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게 자칫 진짜 할아버지로 가는 길이 될까봐 슬쩍 경계한다.
“주위에도 손주가 생기면 사람들이 정신이 없어요. 술 마시다가도 손주 보러 간다면서 가버려요. 일단 할아버지처럼 마음이 꺾이고 구부러지면 안 되거든요. 특히 내가 하는 일은 어디서나 당당하게 맞서고 깨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언제나 외손주하고 맞짱을 떠야 한다고 생각해요. 친구처럼 지내야 해요. 할아버지와 손주 관계로 가버리면 자꾸 아이들의 작전에 말립니다. 안아주기도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아요(웃음). 맞짱뜨는 게 늘 중요해. 관계가 정립되고 어느 한쪽에서 고개를 숙이는 순간 소통은 끝나거든요.”
나? 무대에서 안 내려갈 거야!
춘천국제마임축제와 헤어진 것이 두고두고 아쉽겠지만 그는 요즘 들어 부쩍 왕성한 활동을 하는 중이다. 자연 속, 무대 위, 광장. 어디든 그의 발길이 닿고 필요한 곳이면 찾아가 공연을 펼친다. 전성기가 제대로 왔다는 느낌이다. 은퇴시기를 물어보니 절대 자신의 인생에는 접수되지 않을 단어가 바로 ‘은퇴’란다.
“일본 부토 무용의 대가 중에 100세가 돼서도 공연을 한 분이 계셔요.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큰 극장 무대에 배우인 아들이 아버지가 앉아 있는 휠체어를 밀고 무대 위를 걸어 나오더래요. 느릿하게. 그리고 무대 중앙에 멈춰선 아들은 휠체어를 객석 앞쪽으로 돌려놓았대요. 늙은 배우는 휠체어에 앉아 손을 들었고요. 그 순간 일본 사람이 좋아하는 빨간 장미 꽃잎을 수도 없이 날렸다는 거야. 나도 그렇게 될 때까지 공연할 겁니다.”
유진규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끝까지 놓지 않고 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마임이스트 유진규. 그는 오늘도 내일도 차가운 길, 붉은색 흙길 위 그리고 뜨거운 조명 아래서 깊은 몸짓으로 세상과 소통할 것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욘사마 열풍’이 한창이던 시절, 시청 앞 광장과 남대문시장 그리고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걷다 보면 배낭을 메고 지하철 지도를 손에 든 채 어설픈 한국어로 길을 묻는 중년의 일본 여성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이돌에 열광하는 10대도 아니고 40대를 훌쩍 넘은 중년 여성들이 왜 욘사마를 찾아 한국까지 왔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인 교수 덕분에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일본의 중년 여성들이야말로 한때는 입시지옥 아래 자식교육에 올인하기도 했고, 이젠 거품으로 끝나버린 부동산 버블의 주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저속 성장과 끝 모를 불황의 늪에 빠지자 ‘자식도 아니고 돈(부동산으로 대변되는)도 아니더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들 중년 여성이 ‘욘사마 열풍’을 주도하면서 의 자취를 찾아 한국 땅을 밟는 것이라는데, 정작 이들이 찾아 나선 건 욘사마가 아니라 를 보며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에 가슴 설레어하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자식 뒷바라지 하랴, 빠듯한 남편 월급으로 살림하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렸던 자신을 뒤늦게나마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일본 중년 여성들의 절실함이 왠지 남 이야기 같지 않다.
언젠가 고령화를 다룬 책을 읽다가 멋진 문장을 만나게 되었다. “부부 나이를 합해 100세가 되면 라이프스타일 이주(移住)를 준비하라. 결코 빠르지 않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호기심도 떨어지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도 감퇴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50대가 시작되면 인생 이모작을 시작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책 쓴 이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던 차에 정말 우연치 않게 주말이면 초보 농사꾼으로 변신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찾아왔다. 오래전 세종시 인근에 땅을 사두셨던 이모님께서 은퇴 후 이모부와 사별하고 귀농을 결심하시면서 ‘가족농장’을 시작한 덕분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쉰둘이었는데, 어느 새 햇수론 7년이 지났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농사라곤 대학교 1, 2학년 때 소양강 근처의 부귀리란 마을로 농촌 봉사활동 가서 콩밭의 풀 뽑았던 경험이 전부였던 내가, 겁도 없이 농사에 살짝 한 발을 걸쳐보았는데, 의외로 농사일이 적성(?)에 맞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살아 있는 생명을 다루는 데서 오는 기쁨이 남다른 것 같다. 농사 첫해엔 소나무 묘목을 심었는데 “나무는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크는 것”이라고 했던 마을 이장님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말 못하는 나무도 사람의 손길을 이토록 탄다는데, 하물며 사람 하나를 키우는 데는 얼마나 깊은 사랑과 남다른 정성이 필요한 것인지….
소나무 키우기의 묘미는 가지치기라는 주변 이야기가 아니어도, 해마다 쳐내야 하는 잔가지와 굵은 가지들이 초보자의 눈에도 선명하게 들어온다. 전문가들이라면 수년 후의 나무 모양까지 정확히 머릿속에 그리며 과감히 가지치기를 하겠지만, 초보자 눈엔 어느 가지를 쳐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아 망설일 때가 잦다. 우리네 삶도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해야 크고 굵은 가지들이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갈 수 있으련만, 과한 욕심에 필요 없는 가지를 늘어뜨리고 이것도 저것도 포기 못 한 채 초라한 삶을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쓰잘데없는 상념도 잠시, 소나무 밭에 앉아 가지치기를 하고 있노라면, 잡념도 없어지고 머리도 맑아지는 것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농사 두 번째 해엔 2년생 블루베리를 심었다. 어릴 때는 생김새가 비슷해 품종을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조생종 패트리어트는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엉덩이 부분이 익었는지 판별이 어렵고 열매의 신맛이 강한 대신, 가을 단풍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빨강 빛으로 물이 든다. 중만생종인 토로는 넓적한 이파리에 가지 또한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가는데 열매의 끝 맛에 달달함이 오래도록 남는 것이 일품이다. 만생종 넬슨은 유선형의 날렵한 잎에 큰 키를 자랑하는데 시큰한 맛과 달콤한 맛의 조화가 매력적이고 탱탱한 식감도 훌륭하다.
예전에 대학 은사님께서는 “인생은 혼자 뛰는 마라톤이다. 비교급으로 살지 말고 절대급으로 살아라’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사노라면 항상 나보다 잘난 사람들 때문에 주눅 들고 상대적 박탈감에 좌절하면서 스스로를 초라하게 몰아가기도 한다. 꽃이든 열매이든 자연 속에선 아무도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데 말이다.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어쩌다 농사가 잘되면 3년을 고생하고 한 해 농사를 망치면 3년이 편안하다’라고 한마디 툭 던지고 가신다. 왜 농사를 망쳤을까. 두루두루 이유를 찾다 보면 배수도 챙기고 거름도 제때 주고 풀 관리도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연한 행운보다는 노력이 더욱 값진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주옥같은 말씀이다.
얼마 전 카톡방에 유튜브 동영상이 전달되었다. 열어보니 미국의 대학 강의실인 듯했는데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유리병을 채우는 실험이었는데 먼저 조약돌로 유리병을 가득 채우도록 했다. 다음은 작은 자갈을 가득 넣도록 했다. 그다음엔 모래를 살살 뿌려 유리병을 채우도록 했다. 마지막엔 물을 가득 붓도록 했다. 실험을 끝내며 교수님 왈, “여러분, 만일 순서를 바꾸어 물부터 부으면 유리병 속에 모래와 자갈과 조약돌을 넣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네 인생길에서 조약돌과 자갈 그리고 모래와 물이 무엇일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조약돌이야말로 평소엔 잊고 사는 삶의 의미, 삶 속에서 이루고자 했던 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가치 등이 아닐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삶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필자는 어느 날 인생 1막에서 인생 2막으로의 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그리고 ‘용도변경’이라는 적극적인 자기 변신을 통해 활기찬 후반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용도변경’은 필자의 이름 ‘변용도’를 원용해 만든 단어다. 한자의 의미는 다르지만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도(用途)와 한글 표기는 같다. 필자는 이 단어로 가족을 위한 그동안의 헌신적 삶에서 자신을 위한 삶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또 생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어두었던 꿈에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47세의 조기퇴직, 금융위기 등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용도변경’된 삶을 통해 사진작가, 강사로 거듭나 현재는 인생이모작의 결실을 거두고 있다. 손해보험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필자는 이후에도 보험과 관련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고 지금은 평생 일거리를 만들어냈다. 그 스토리를 오늘 들려드리려고 한다.
47세에 용도 폐기되다
필자는 대학교 졸업 직전 고려화재해상보험에 입사해 20년을 다녔고 촉망받는 직장인이었다. 20년 전에는 임원으로서 부산·경남 본부장을 맡았고, 1977년 12월 말에 해임되었다. 회사에서 쓸모가 없는, 즉 용도가 없어진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이름에 빗대어 ‘용도폐기’되었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금융위기(IMF)까지 닥쳐 재취업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밥벌이를 위해 고육지책으로 창업을 해야 했다. 만화방으로 시작해 부대찌개 음식점까지 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 또 다른 일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급여의 많고 적음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월 40만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 조경관리사로 취업해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회사 마당을 쓰는 마당쇠 역할도 했다. 일당을 벌으려 MBC 드라마 의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퇴직 후 10년간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엔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고 용도변경된 삶을 살기로 하다
필자의 나이 57세 때 두 친구를 갑자기 잃었다. 모두 심장에 이상이 생겨 어느 날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곰곰 생각했다. 퇴직 후 잡다한 일을 하며 보낸 10년을 되돌아보았다. 분명 열심히 살았으나 세월만 쏜살같이 지나가고 내로라할 만한 성취는 없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두 친구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될 것 같았다. 100세 장수시대에 어떻게 하면 보람 있는 후반 인생을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40, 50년이 될지도 모르는 노후의 긴 시간이었다. 필자와 같은 세대는 가족을 위해 하기 싫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것은 내 인생이면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사는 삶이었고, 타인을 위한 용도, 즉 타(他) 용도로 사는 삶이었다. 뒤늦게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는 주인공으로 내 인생을 살아보자!” 필자는 먹고사느라 오래전에 접어둔 꿈을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들은 꿈을 실현하는 데 쓰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사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은퇴하면 언덕배기에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는 꿈을 꾸곤 했는데, 그 꿈과 유사한 사진으로 바꾸었다. 붓 대신 카메라를 든 인생 2막의 길이었다.
60세에 늦깎이 사진작가가 되다
필자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자연과 함께하며 감성을 키웠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수채화를 자주 그렸던 기억이 있다. 사진은 직장에서 홍보 업무와 사보편찬 업무를 담당할 때 흥미를 키웠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60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사진을 배울 용기를 가졌던 것 같다. 2010년 7월, 필자는 고양시 무료사진 교실에 참여했다. 환경은 열악했다. 초보자 솜씨에 카메라 장비 또한 콤팩트 카메라가 전부였다. 함께 공부한 다른 수강생의 고가 카메라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현실과 형편을 인정하고 사진 실력 향상에만 몰입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 후부터 공인 사진작가 공모전에 도전했다. 공인 사진작가 인증을 받으려면 공모전에 출품해 입선이나 입상으로 일정 점수를 얻어야 했다. 이 목표를 이뤄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 년에 스물여덟 번 응모해 절반을 낙선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지만 멈추지 않고 도전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2011년 9월에 드디어 인증을 받아 공인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도전을 이어갔다. 그리고 사진을 배운 지 3년째 되던 해 국전에 입선했고 부산일보가 주최한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작품 ‘닭장’이 좋은 심사평으로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 공모전 사진 부문에서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으로 뽑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이러한 결과의 이면에는 사진을 통한 재능기부가 큰 역할을 했다. 좋은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스스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게 배우는 것이라는 말은 옳은 말이었다.
40만장을 찍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2010년 7월부터 지금까지 6년 4개월을 매일같이 사진에 빠져 살았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는 무려 40만장에 이른다. 역산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200여 장을 찍어야 나오는 숫자다. 어느 날은 파파라치로 오인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뒤늦은 나이에 도전해 좌절과 고난의 순간도 있었지만 몰입하고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11월 24일에는 KBS 1TV 에 사진작가로 출연함으로써 삶의 정점을 찍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사)은퇴연금협회와 머니투데이 방송이 주최한 ‘The Senior 2016’에 사진 전시 초대를 받아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을 주제로 사진을 전시했다. 판매 목적이 아니었는데 작품 모두가 팔려나가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사진을 바탕으로 명강사에 도전장을 내밀다
카메라를 들면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 시간이 짧기만 하다. 이제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되었고 카메라는 필자의 또 다른 친구다. 100세 장수시대가 두렵지 않다. 은퇴 전의 직업과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뒤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참 잘 선택한 결과가 됐다. 이후 필자는 사진을 바탕으로 또 다른 영역 확대를 꾀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통한 여가관리의 모범적 사례가 되면서 그 경험을 배우려는 퇴직 예정자와 은퇴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62세에 또 다른 분야인 강사 활동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여가설계, 변화관리 강사로 활동을 넓혀나갔다. 이제는 사진작가로서의 활동보다 강사로서의 활동이 더 많아져 기업체와 국가 산하 인력개발원, 대학교의 평생교육원, 사회종합복지관 등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KBS 1TV , SBS라디오 러브에프엠의 프로그램에 3년간 고정 출연, 토마토TV와 머니투데이 방송에서 특강, 한국직업방송 로 출연도 했다.
열악한 환경을 기회로 전환하는 ‘용도변경’의 삶이 성공의 핵심
필자는 사진작가, 강사로서 삶의 보람을 만끽하면서 평생 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제2직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전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 있었지만 과거를 내려놓고 현실을 인정하며 몸집 줄이기(다운사이징)로 환경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한 ‘용도변경’의 생활 방식이 성공의 핵심 역할을 해줬다. 뱀이 고통을 참으면서 허물을 벗어야 살아갈 수 있듯 환경 변화에 대한 꾸준한 자기 변신, 즉 용도변경을 통한 2차 성장은 인생 2막의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라 생각하고 실천한 결과다.
베풀고 나누면서 다 쓰고 가리라
필자의 오늘은 많은 사람의 도움과 은혜로 이루어졌다. 이제 그 은혜에 보은할 할 때라 여긴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경험과 지혜를 베풀고 나누는 사회공헌을 위해 또 다른 용도변경, 즉 ‘공(公)용도’를 인생의 최종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과정의 하나로 두 권의 책, 와 를 출간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가보지 않은 길도 많음을 느낀다.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꿈을 꾸며 도전을 멈추지 않으리라. 필자의 소소한 경험담이 같은 길을 가려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요즘 힙합 열풍이 대단하다. 힙합이 음악의 대세로 떠올라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대중들의 일상 대화에 다이믹 듀오, 도끼, 매드 크라운, 비와이, 보이비 등 힙합 뮤지션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멜론 등 각종 음원차트 상위를 ‘데이 데이’, ‘포에버’, ‘호랑나비’ 등 힙합곡들이 차지한다. , , 등 힙합 관련 프로그램들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KBS 등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힙합 스타와 힙합곡 패러디가 유행이다.
힙합 열풍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이지만 힙합에 관심이 있는 중·장년층도 적지 않다. 물론 “힙합이 노래냐?”라는 냉소를 보내는 사람도 있고, 욕설까지 포함된 랩 등 일부 힙합 가사를 두고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며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또 방송에 나온 힙합 뮤지션들의 팔과 몸에 드러난 문신과 파격적인 패션 스타일에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는 중·장년층도 많다.
하지만 중·장년층이 음악을 비롯한 젊은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다가가는 태도는 자식들을 포함한 젊은 세대에 대한 이해의 접점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소통을 배가시키는 첩경이다. 압축적인 고도성장, 급변하는 사회, 고령인구 증가, 산업구조 변화, 전통적 가족 해체, 가족 구성원의 역할 변모, 젊은 세대의 미래지향적 태도와 장·노년층의 과거지향적 인식의 충돌 등 다양한 원인으로 세대 간의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세대 간의 갈등은 여러 곳에서 표출되고 있는데 문화도 예외는 아니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간극은 벌어질 대로 벌어져 서로의 문화와 콘텐츠 향유는 고사하고 이해조차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세대 간의 문화에 대한 무시와 폄하 행위까지 횡행한다.
정성호 강원대 사회학과 교수는 저서 에서 세대 갈등의 해결책으로 “세대 간에 서로의 창조적 자의식을 북돋우면서 포용력 있는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며 열광하는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문화와 생활,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힙합을 이해하는 것 역시 젊은이들의 문화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자 젊은 세대와의 소통의 기회를 확장하는 기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힙합을 통해 미국 젊은이들의 현실과 고뇌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1970년대 미국의 가난한 흑인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거리의 음악, 힙합은 비트가 빠른 리듬에 맞춰 일상의 삶이나 욕망과 분노를 드러내는 랩, 레코드 스크래치, 브레이크 댄스 등이 가미된 음악과 문화를 지칭한다.
힙합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 젊은이들의 폭발적 인기를 얻은 음악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1990년대 라임을 이루는 말을 리듬에 맞춰 음악적으로 발성하는 랩이 한국 음악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힙합이라는 음악 장르가 한국 대중과 처음 만났다.
1990년대에는 듀스, 서태지와 아이들, 지누션, 드렁큰 타이거가, 2000년대에는 다이나믹 듀오, 에픽하이 등이 힙합 음악을 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한동안 힙합 음악은 일부 청소년과 젊은이들만이 환호하는 하위문화, 비주류 음악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와 힙합 뮤지션이 많이 늘어났고 , , 등 힙합 관련 방송 프로그램과 공연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로 급부상했다. 무엇보다 힙합에 환호하는 대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힙합 신드롬이 일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힙합에 환호하는 이유는 힙합이라는 음악이 갖는 매력 때문뿐만이 아니다. 저항과 분노, 욕망을 거침없이 표출하고 편견을 깨는 음악에 자신들의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분을 차지한 아이돌 음악과 발라드, 트로트는 사랑 아니면 이별을 소재로 하는 비슷한 가사와 멜로디가 많다. 이런 음악에 식상함과 진부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힙합은 기존 음악과 확연한 차별화를 보이며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문제의식, 저항, 분노를 풍자나 디스, 스웨그 등으로 다양하게 표출한다. 또한 개인적인 감정과 입장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3포 세대, 흙수저, 헬조선으로 표현되는 어려운 현실 속 젊은이들은 이러한 힙합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과 의견을 표현하거나 감정을 거침없이 표출한다. 그래서 힙합을 이해하면 젊은이들의 음악과 문화는 물론 그들의 고통과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Coffee shop에서/ Part time job으로 나는 Two job/ 아침과 밤이 다른 나의 자화상이/ 또 나를 부르네/ 생활비는 내 손으로 벌어 써/ 두발로 딛는 서울 땅에서 …척하면 척인 나의 눈칫밥만 더 늘어나는 사이/ 현실 앞에서 누구도 대변해줄 수가 없지/ 이것도 피하지 못한 내 현실’ 에서 우승한 자이언트 핑크가 부른 ‘돈벌이’ 가사의 일부다.
‘어쩌다 내가 이 게임에 몸을 던졌나/ 가난이 죄고, 학벌이 깡패라는데 아/ 너 그렇게 과속하고 달려가면/ 개천의 용은 멸종위기 1급 동물/ 시작도 하기 전에 아연실색/ 쫓아가는 것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네/ 뒤처지기 싫어 꽉 어금니 깨물어도/ 노력과는 상관없어 뒤처지는 경쟁 구도…’ 힙합 뮤지션 MC메타가 지난 5월 방송된 에 소개한 ‘개천에서 용이 날까용?’ 랩 가사다.
우리는 이 두 곡의 힙합 가사를 읽고 무엇을 느껴야 할까?
사상 최대 규모 5.8 지진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수백 차례의 여진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이 우리를 여전히 불안하게 하고 있다. 때맞춰 9월 30일부터 10월 6일까지 동작구 서울소방재난본부 보라매안전체험관에서 2016 안전체험이 열렸다.
사람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10월 4일 10시 서울소방재난본부 김종섭 행정주임 소방관의 안내로 실내 체험 실습에 참여했다. 이날의 체험 행사는 화재시 대피와 소화기·풍수해·지진체험 등을 주제로 했다. 각 코스마다 시청각 교육과 체험 실습이 진행됐으며 무엇보다 인명 안전에 최우선 목적을 두고 훈련 방법이 확 바뀌었다.
실감난 지진대피 체험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지진대피 체험이 특히 인상 깊었다. 지진 동영상을 시청하고 대피 훈련을 거쳐 사후 수습 가정까지 체험했다. “지진이야!” 하고 구호를 외친 뒤 머리를 보호하면서 탁자 밑으로 대피했다. 지진을 가상한 흔들림은 언론을 통해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제대로 대피할 수 있을지 많은 염려가 됐다.
소화기 체험도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이전에는 소화기를 들고 불난 곳으로 달려가는 훈련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번 체험에서는 정전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벽을 더듬으면서 대피하는 요령을 배웠다. 비상상황이 실제처럼 느껴지는 훈련이었다.
김 소방관은 “벽면 쪽 손을 이용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따라가면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화재 현장에서는 자세를 최대한 낮춰야 한다. 연기는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바닥에서 30~60센티미터 정도에는 맑은 공기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소화기는 인화물 밑 부분에 분사해야 소화 효과가 있다.
태풍, 안전벨트, 지하철 화재 관련 체험
태풍은 재해 예보에 귀를 잘 기울이고 대비하면 극복할 수 있다. 시속 30킬로미터의 태풍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태풍은 위험한 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버스사고 시 안전벨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배웠다. 급커브, 급브레이크의 위험성을 체감할 수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만약 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공중부양했을 것이다.
지하철 화재 때는 골든타임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화재 현장에서 2~3분 이내에 탈출해야 한다. 먼저 다른 칸으로 신속히 대피한 뒤 1층 출구로 나가야 한다. 불가능할 경우에는 철로를 이용해 1~2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역으로 탈출해야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매우 위험하므로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해야 한다.
일반인들도 많이 참여해야
안전체험은 학생들이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단체로 참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제는 일반인들의 참여 방법도 강구해봐야 한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시니어들은 재난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더 많으므로 대피요령에 대한 교육이 더 절실해 보인다. 즐기면서 익힐 수 있는 안전체험을 마련해주신 서울소방재난본부와 친절과 성의를 다해 안전체험을 즐겁게 이끌어준 김종섭 소방관과 직원에게 감사드린다.
최근 걷기 운동을 하면서 서울에 가볼 만한 박물관과 미술관 등이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가본 곳도 있지만 이번 기회에 새로 알게 된 곳도 많다. 이런 곳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다니면 관람시간을 배정하기가 쉽지 않다. 또 입장료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입장료가 아주 비싸지 않으면 간 김에 관람을 하는 것이 좋다.
서울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대부분 강북에 위치해 있다. 신흥도시인 서초구, 강남구는 그래서 삭막한 동네다. 강남은 경부고속도로가 생긴 후 새로 형성된 도시라서 역사도 당연히 없겠지만,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짓기에는 땅값이 너무 비싼 것도 문제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려면 시간을 얼마나 잡을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마음먹고 제대로 돌아볼 생각을 하고 나왔다면 한나절 정도의 시간이면 큰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때는 작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좋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 어떤 볼거리가 있는지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다.
큰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둘러보고 싶다면 독립문역 서대문형무소, 이촌역 중앙박물관 및 한글박물관, 삼각지역 전쟁기념관, 한강진역 리움미술관, 풍납토성역 한성백제박물관 등을 추천하고 싶다. 경복궁역 서울역사박물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도 규모가 크다. 시청역 근처 서울시립미술관도 있다. 전철로 가기에는 경복궁역에서는 좀 멀지만 부암동 서울미술관도 가볼 만하다. 월드컵공원역에서 30분은 걸어야 하는 박정희기념관도 그렇다.
작은 박물관으로는 경복궁역 경찰박물관, 농업박물관, 경교장, 동아일보 신문박물관, 동대문역 한양도성박물관, 청계천박물관, 제기역 한방박물관 등이 있다. 양재시민의숲역 윤봉길기념관, 강서 쪽에는 허준박물관도 있다. 인사동에는 작은 미술 전시회들이 상시 열린다.
박물관은 귀한 자료를 한 곳에 모아놓은 곳으로서 국가나 지자체가 만들기도 하고 개인들이 희사해서 만들기도 한다. 역사가 있는 민족이라면 당연히 박물관이 많아야 한다. 미술관도 작가들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전시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귀중한 장소다. 작품 감상을 제대로 하려면 전시 관련 홍보물이나 작가소개 등을 미리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너무 빨리 변하고 바뀌는 세상이라 그런지 요즘 사람들은 멀쩡한 물건들도 주저 없이 내다버린다. 구식이라거나 공간을 차지한다는 게 이유다. 아파트 같은 공동 주택에서는 공간 활용이 빤하기 때문에 옛 물건들을 무작정 쌓아둘 수 없어 버리기도 한다. 다듬잇돌 등과 같은 옛날에 흔하던 물건은 다 내다버려서 이젠 골동품에 속한다. 혼수용품으로 집집마다 있던 재봉틀도 사라진 지 오래다. 옛 물건들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옛것들을 그나마 볼 수 있는 곳이 박물관이다. 생활 속에서 친숙하게 봐왔던 것을 보는 시니어들과 어디에 쓰는 용도인지도 모르고 보는 젊은 세대들과 관람하는 느낌은 다르겠지만 각 세대가 공감하고 소통하기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올 가을에는 산책과 함께 박물관, 미술관 나들이를 해보자.
글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뮤지션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연기자로서 최고의 찬사가 쏟아진다. 방송 진행자로서 수많은 고정 팬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8월 출간한 에세이집 를 비롯한 에세이와 소설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바로 우리 시대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뮤지션인 김창완이다.
김창완은 자신의 창작과 예술 활동의 원동력은 책이라고 단언한다. 책을 직접 쓰기도 하지만 김창완만큼 책을 많이 읽는 연예인은 드물다. 김창완은 책을 통해 상상력을 키우고 인생을 배운다고 했다. 그런 그의 가슴에 강렬하게 울림을 남긴 책은 어떤 책일까.
“치열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고 예술적인 삶에선 필수적이다.” 바로 미술 평론가 마이클 키멜만의 을 관통하는 주제다. 걸작은 고흐나 피카소만 남기는 것이 아니고 교과서에 나오는 딱딱한 미술사처럼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예술은 우리 자신이 생활 속에서 발견하고 창조하고 또 재창조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열정을 쏟아붓고, 진심을 쏟으면 아름다운 걸작”이라는 의미를 잘 담은 것이 이다. 김창완은 을 보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하고, 뮤지션으로서 활동도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고 권한다.
김창완처럼 다른 스타들도 가슴에 평생 간직하는 책이 있다. 스타들이 감동하고 인생의 좌표로 삼는 책이 있다. 스타들을 움직인 책은 무엇일까.
하루에도 연예계에는 수많은 별이 뜨고 지는 상황에서 최불암은 50여 년을 한결같이 빛을 발산하는 현재 진행형의 큰 스타다. 그가 연기를 통해 내뿜는 빛을 보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은 용기를 얻고, 좌절에 빠진 사람은 위안을 받으며, 절망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은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는 단순한 연기자를 넘어 삶의 좌표 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 아버지’ 최불암에게도 삶의 이정표 같은 책이 있다. 바로 일본 소설가 고미카와 준페이의 이다. 징병으로 끌려가 참전한 저자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의 사랑의 절절함을 전하는 한편 전쟁의 비인간성을 질타한 이 소설이 왜 최불암의 마음속에 각인된 책으로 남았을까.
최불암은 “책 한 권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을 을 읽으면서 절감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읽었는데 감전된 듯 감정의 변화를 느꼈다. 에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 사랑을 지키는 순수함이 있고 양심이 있고 인간이 있다. 그리고 남성의 자존심을 강하게 느꼈다. 얼마나 이 책에 감동했는지 나는 가지(소설 속 남자 주인공)처럼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머니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힘은 위대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사랑합니다”라는 2004년 KBS 연기대상 수상소감으로 많은 이에게 감동의 파문을 일으킨 고두심. 그녀 앞에 조건반사적으로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어머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고두심을 떠올릴 때 ‘어머니’라는 단어를 조건반사적으로 연상한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연극에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자식을 위해 살아온 이 땅의 어머니를 연기했기 때문이리라.
“모르겠어요. 운명이고 숙명인가 봐요. 처녀 때도 어머니역을 했으니까 말이에요. 많은 모습의 어머니가 있는데 제가 맡은 캐릭터는 강인한 어머니의 성격이 강해요”라고 말하는 고두심은 수기공모에 응모한 김인숙 씨를 비롯한 일반 여성들이 자신들의 어머니에 관해 쓴 수필을 모아 책으로 펴낸 를 보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이 책에는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교사에게 맞고 온 아이를 보고 학교에 가 “아이가 숙제를 안 해왔거나 공부시간에 장난을 쳐서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다면 이렇게 아프지 않을 겁니다. 부모 잘못 만나서 그렇게 된 것이니 절 혼내 주십시오. 제 손바닥을 때려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어머니 등 평범하지만 위대한 우리 주위 어머니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고두심은 제주 해녀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자식들을 지켜 주던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자식들에게 어떤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지를 마음으로 알게 해 준 책이 라고 했다.
평범한 한 남자가 있다. 길거리에서 만나면 그에게 눈길을 줄 수 있는 흡인력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도 그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흔히 이웃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그가 화면 속으로, 스크린 속으로, 무대 속으로 들어간다. 평범함은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한 파문을 일으킨다. 엄청난 흡인력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그의 비범함은 깊은 수렁이 되어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에게 빠져들게 한다. 배우 조재현이다. 드라마와 영화, 연극 등에서 강렬한 캐릭터마저 생명력을 불어넣어 현실 속 인물로 인식하게 하는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 조재현을 움직인 책은 바로 가출과 반항을 일삼던 사춘기 시절 누나가 선물한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이다. “은 내게 반항하는 마음을 다스려 주었고 감성과 사랑에 대해 폭을 넓혀 준 책이다. 그리고 정서적인 연기를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된 책이다. 인간과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준 책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조재현은 ‘첫사랑’에서 드러난 인물들의 심리나 감성, 그리고 행동들은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을 때 연기의 원동력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안녕하십니까. 남희석입니다. 요새 저보고 자꾸 변했다고 하시는데 제가 우유입니까? 변하게!” 한동안 남희석에게 전화하면 이 소리가 흘러나와 웃음을 짓곤 한 적이 있다. 한때 최고 MC로 군림했던 남희석은 요즘에도 여전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 최고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줬지만 늘 시청자의 시선의 중앙에 서 있는 MC다. TV에 나오는 코미디언 이주일이 너무 좋아 개그맨의 꿈을 안고 열한 살 때 고향 충남 보령을 떠나 서울행 기차를 탔던 남희석은 대본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프로그램 진행으로 스타 MC가 됐다.
프로그램과 진행, 그리고 삶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면 구분하지 않고 책을 읽는 독서광으로 잘 알려진 남희석은 대상과 현상을 다양한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한 힘을 준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과 이 의미 있는 책이라고 말한다. “과 , 이 두 권의 책은 단순한 용어 정리가 아닌 하나의 트렌드나 현상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한 책입니다. 그리고 실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인데 지나치기 쉬운 이면의 의미를 알기 쉽고 명쾌하게 정리했습니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한국문화와 세계문화에 관한 책도 재미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여섯 살 때 레스토랑에서 가수였던 아버지(이대현, ‘먼지가 되어’ 작곡자이자 가수)의 공연을 본 적 있어요. 인기가 높지 않았던 아버지 공연에 관객들의 차가운 반응을 보면서 눈물이 났어요. 그때부터 가수가 되려고 했어요. 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추구한 아버지를 가장 존경해요. 그런데 무명이셨던 아버지의 공연이 외면 받는 게 슬펐어요. 그때 유명한 연예인이 되고 싶었지요. 이제는 유명한 연예인이 아니라 대중에게 실력으로 인정받는 연예인이 되는 것으로 꿈이 바뀌었지만요.” 독특한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소화력과 자신만의 향기가 배어나는 연기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뛰어난 가창력과 작곡실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하나다.
이하나는 스타의 반열에 올랐어도 여전히 신인 때 보였던 담백한 마음과 연기를 향한 진지한 태도를 견지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계속 던지는 태도도 버리지 않고 있다. 인기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인기를 초연하게 바라보는 이하나의 자세는 다른 연예인과 큰 차이점이다. 이하나의 이 같은 태도는 그녀가 좋아하는 책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로 잘 알려진 파울로 코엘료의 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코엘료의 책은 나를 돌아보게 해요. 나는 어디에 와 있고 나는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아요. 나이가 어려서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못 했지만 코엘료 책을 보면서 삶의 지향점을 생각하고 현재의 나를 반성해요. 그리고 실패와 성공이 순식간에 이뤄지고 경쟁이 치열한 연예계에서 평점심을 찾게 해주는 것이 코엘료의 예요. 이 책을 보면서 좌절했을 때 용기를 얻었고 인기를 얻었을 땐 저를 돌아봤지요.” 이 말을 들으면서 코엘료가 그의 책에서 펼쳤던 “내 속의 헛된 바람들 속에서 길을 잃지 말라”는 잠언적 메시지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이하나를 읽을 수 있다. 스타들은 이처럼 자신의 삶과 인생, 예술적 활동에 영향을 준 책들을 가슴에 아름다운 화인(火印)으로 새겨 놓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예술 활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