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암센터가 2005년 1월 첫 간이식 수술을 시행한 이래 최근 간이식 800례를 달성했다.
국립암센터에 따르면 간이식 800례 중 살아있는 사람의 간 일부를 절제해 환자에게 이식하는 ‘생체 공여 간이식’이 95% 이상(775례)을 차지했다.
국립암센터는 고령의 공여자 등을 대상으로 한 고난도 간이식 수술에서도 연이은 성공사례를 기록 중이다.
질병관리본부의 통계에 따르면 2019년도 기준으로 총 1578건의 간이식 중 뇌사자 간이식은 391건에 불과했다. 이처럼 이식 대기자에 비해 장기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생체 공여자의 간은 말기 간질환이나 간세포암 등으로 간이식이 필요한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생체간이식을 위해서는 건강한 공여자의 간 일부를 잘라내야 하기 때문에 간이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여자의 안전이다.
국립암센터는 공여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 ‘이식 후 회복증진을 위한 외과적 프로토콜’을 확립했다. 그 결과 수술시간은 4시간에서 2시간 30분(최단시간 1시간 42분)으로, 입원 기간은 8일에서 7일로 줄었다. 전체 합병증 발생 비율은 16%에서 1% 이하로 개선됐다.
국립암센터는 안전성에 대한 우려로 공여자 선정에서 제외했던 60세 이상 고령자, 복부수술 경험자, 잔여 간 용적률이 30% 미만 공여자에 대해서도 생체 간이식을 선별적으로 시행해 높은 성과를 냈다.
전체 775명의 생체 간이식 공여자 중 60세 이상 고령자는 15명, 잔여 간 용적률이 30% 미만인 공여자는 60명으로 확인됐다. 특히 2012년에는 76세 공여자의 간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세계 최고령 공여자로 주목을 받았다.
‘아빠 오늘부터 출근한다.’
‘재취업 축하해요! 안녕히 다녀오세요.’
집안 식구들의 대답을 귓전으로 흘리며 쾅! 하고 현관문을 닫고 쿵쾅쿵쾅 힘 있게 내딛는 구둣발자국 소리를 내보는 것이 재취업의 문을 두드리는 퇴직한 시니어의 속마음이다. 기술을 갖고 있으면 평생직장은 없지만 평생직업인으로 살 수 있다. 기술이 있다는 증명이 기술 자격증이다. 그러나 그 기술은 현장에 기반을 둔 최신기술이어야 한다. 해마다 기술자격자는 변화된 기술에 대한 교육을 받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기술 자격증을 직접 활용하지 않는 즉 장롱 자격증에 대해서는 교육의 의무가 정지된다. 기술계에서 오래 떠나있으면 기술능력은 퇴보한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이미 지난 기술은 더 이상 기술이 아니다.
서울 광장동에 사는 김성수(65세,가명) 씨는 공대를 나오고 30년간 대기업에서 마지막에는 임원으로 승진까지 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술자격인 기술사 자격을 30대 초반에 취득할 만큼 젊어서는 기술력이 탄탄했다. 그는 점점 승진하여 수백 명의 부하직원을 거느리며 그들의 보직 배치와 승진의 전권은 김성수 씨 손에 있었다. 점점 기술자면서 기술 현장과는 멀어져갔고 회사의 경영진의 한사람으로 변해있었다. 그는 사람 관리능력은 향상했겠지만 기술력은 정체된 아니 퇴보한 오늘의 기술현장을 모르는 옛날기술자에 불과했다.
김성수 씨는 퇴직하면 이곳저곳에서 스카웃 제의를 해 올 것으로 믿었다. 최악으로 급여만 반 토막으로 줄인다면 일할 곳은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퇴직하자 그를 부르는 전화벨은 별로 울리지 않았다. 대기업체는 나이제한에 걸렸다. 소규모업체는 북치고 장고치고 일인다역을 소화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커버렸다. 자랄 때로 다 자란 큰 나무를 이식해서 자기 정원에 심으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기술사라는 자격증의 힘으로 중소업체에 기술고문으로 취업했다. 일감을 수주해 오는 일도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영업능력은 인맥이 중요한데 그가 알고 있는 인맥은 이미 은퇴를 하고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일감을 그에게 줄 이유는 없었다. 밑에 직원들이 만들어준 보고서를 검토하고 결재를 오래 해왔기 때문에 그 스스로는 아래한글 정도만 해봤지 액셀이나 워드, 파워포인트 등 문서 생산능력이 부족했다. 남들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된 문서를 만들지 못했다. 현장의 기술도 변화되고 향상되어 그가 하는 말은 옛날이야기처럼 허공을 맴돌았다. 결국 스스로 자격지심에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 현장에서 너무 멀리 떠나버린 무늬만 고급기술자로 현장에서 환영받지 못한 일반적 사례에 불과 하다.
기술자로서 재취업에 성공하려면 현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의과대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환자를 직접 대면하고 수술실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로 대접받는다. 김성수 씨는 기술직이면서도 현장을 잊고 사무실에서만 앉아 부하 직원들의 인사관리만 해 왔기에 현장 기술력은 옛날기술자에서 머무르고 만 것이다. 영국인이면서 30여 년간 한국에 산 어떤 분이 웃으면서 한국에 와서 한국말만 했더니 영어를 잊어버렸다고 영국 사람임에도 영어 배우러 영어학원에 다녀야겠다는 말을 했다. 모국어도 오래 쓰지 않으면 점점 잊어버리는데 변화하는 현장을 잊어버린 기술은 환영받지 못한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기술도 변화하고 진화한다. 현장에 있었던 기술자는 건강만 하다면 재취업에 별 어려움이 없다. 현장을 떠나 오랜 시간 사무실에서 행정업무만 다루던 사람은 서류상 경력으로 인정받아 스펙은 화려해도 면접에서 낙방을 한다. 옛날 기술만 알고 있는 옛날 기술자는 현재로는 기술자가 아니다. 현재에 살면서 옛날 이야기하는 사람을 아무도 채용하려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회사에서 승진이 되어 직접 현장 업무를 하지 않게 된다면 도서관에서 책을 통해서도 신기술을 늘 새롭게 익혀야 한다.
치매 환자를 집에서 돌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호자 등 가족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치매는 본인뿐 아니라 가족의 일상을 위협하는 대표적 질환으로 인식되고 있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치매센터가 지난 4월 발표한 ‘대한민국 치매 현황 2019’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 환자 수는 75만488명으로 추정된다. 65세 인구 10명 중 1명은 치매로 고통받고 있다는 얘기다.
이대로 가면 2025년에는 100만 명, 2030년에는 137만 명을 넘어선다는 전망도 있다. 정부는 ‘치매 국가책임제’를 선언했지만, 여전히 치매 환자 간병은 가족이나 천편일률적으로 운영되는 요양원 입소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치매 환자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을 바꿔나갈 때가 된 것이다. 치매 환자는 반드시 격리된 공간에서 돌봐야 하는 것일까. 평범하게 일상의 삶을 누릴 방법은 없는 걸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선진국 사례에서 찾아봤다.
◇길 잃어도 안심, 물건 값 계산도 맘대로
치매 환자 관리의 특별한 사례로 꼽히는 네덜란드 ‘호그벡’(Hogeweyk, 호헤베이크) 마을이 화제다. 암스테르담 외곽에 위치한 이 마을은 노멀 라이프를 실현하는 ‘천국의 마을’로 불린다. 2009년 문을 열었고 비영리 단체 ‘비비움’(Vivium)이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1만2000㎡의 규모에 영화관, 카페, 마트, 헬스장, 레스토랑, 미용실 등 웬만한 편의시설을 다 갖춘, 치매 환자가 거주하는 곳으로 보기에는 매우 독특한 마을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치매 환자는 마트에 가서 물건을 고르고 살 수도 있다.
물론 이곳에선 물건 값이 따로 없다. 계산을 안 해도, 잘못 계산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후정산 개념으로 정부가 보조해주기 때문이다. 또 산책을 하다가 마을 안에서 길을 잃어도 의료진과 요양관리사 등 치매 환자의 2배에 가까운 인력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가 언제든 도움을 주므로 평소처럼 생활하면 된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을 수도 있고, 작은 텃밭을 가꿀 수도 있고, 다른 입주자와 취미생활을 함께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웃과 교류하며 음주를 즐기는 치매 환자도 있다고 한다.
◇정신 흐릿해도 종일 누워 있을 필요 없어
거주 시설은 치매 환자 개인의 삶과 취향을 조사해 일곱 가지 인테리어로 지어 선택하도록 했다.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공방, 상류문화를 즐기는 이들을 위한 클래식 감상실도 있다.
비록 정신이 흐릿하고, 손과 머리를 떨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어도 이 마을에서는 일반 요양원에서 지내는 경우처럼 종일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 치매 등급을 받은 입소자들은 개인 형편에 따라 한 달 최소 500유로(약 64만 원), 많게는 2500유로(약 322만 원)만 정부에 내면 된다.
병세가 깊은 치매 환자도 일상생활이 가능하도록 배려하는 호그벡 마을은, 고령화에 직면한 나라들이 마주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게 해준다. 처음에는 다들 이 실험적인 시도가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성공을 거뒀다. 이제는 각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돼 미국과 뉴질랜드, 이탈리아 등지에서 제2의 호그벡 마을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 용산구에서 옛 양주휴양소 부지에 거주시설, 편의시설, 산책로, 텃밭, 문화시설을 갖춘 치매 환자 마을을 조성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 착공해 2022년 완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바이러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요즘. 바이러스를 둘러싼 궁금증과 그 해답을 정리해봤다.
감수 및 도움말 이찬희 충북대학교 미생물학과 교수
참고 및 발췌 도서 ‘우리가 몰랐던 바이러스 이야기’(대한바이러스학회)
Q1 바이러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아직 바이러스의 기원은 명백하지 않다. 먼저 자체적으로 증식하지 못하고 다른 생명체에 기생하는 특성 때문에 생명체 출현 이후 나타났다고 보는 측면이 있다. 한편 가장 기본적인 생명 요소인 유전자와 단백질로 구성돼 있기에 세포보다 먼저 출현했다는 주장도 있다.
Q2 인간이 바이러스를 만들 수도 있을까?
2003년 미국 생물에너지대안연구소에서 단 14일 만에 인공 바이러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2008년에는 한국 과학자들이 치료 목적의 암세포 킬러 인공 바이러스를 제조해냈다.
Q3 바이러스의 크기는 얼마나 작은 걸까?
막대 모양 바이러스는 수백 ㎚(10억 분의 1m)이며, 둥근 모양 바이러스는 수십 ㎚에 불과하다. 일반 세균은 ㎛(100만 분의 1m) 단위로, 바이러스에 비하면 1000배 정도는 큰 입자인 셈이다.
Q4 지구상의 바이러스, 얼마나 될까?
1989년 노르웨이 베르겐대학교 연구팀은 전자현미경을 통해 바닷물 1㎖ 속에서 2억5000만 개에 달하는 바이러스를 찾아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일각에서는 지구상의 바이러스 수가 1030개에 이른다고 하는데, 일렬로 죽 세우면 그 길이만 무려 2억 광년이 넘는다. 이는 태양계 너머 은하수의 가장자리에 다다르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수치다.
Q5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실제로도 둥글까?
코로나19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많은 바이러스가 정20면체 구조를 가진다. 정20면체는 정다면체 중 면의 수가 가장 많고, 구에 가까운 안정된 구조다. 바이러스의 유전물질을 둘러싼 단백질 껍데기(capsid)가 정20면체 모양을 띠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외부 충격으로부터 유전물질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증식할 수 있다.
Q6 모든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해로울까?
바이러스 99.9%는 인간이 아닌 다른 숙주에 서식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0.1%만이 인간에게 감염되는 바이러스인 셈인데, 이 또한 절대량으로 보면 무수히 많다. 그렇다고 모든 바이러스가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다. 대부분 바이러스는 우리 몸에 감염돼도 질병을 일으키지 않는다.
Q7 착한 바이러스, 나쁜 바이러스?
‘박테리오파지’는 다양한 병원성 세균을 파괴하고 섬멸하는 바이러스다. 이러한 특징을 이용해서 항생제 대신 전염병을 치료해 일명 ‘착한 바이러스’라 불린다. 이와 반대로 ‘나쁜 바이러스’도 있다.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가 이에 해당하는데, 대표적으로 조류 인플루엔자를 꼽을 수 있다. 원래는 야생 조류에게만 감염되던 바이러스였는데 돌연변이를 일으켜 사람에게도 감염을 일으킨다.
Q8 바이러스의 생존기간은 얼마나 될까?
바이러스의 생존과 관련해 흔히 ‘바이러스가 죽었다’는 표현을 쓰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바이러스가 감염성을 잃어버렸다’(불활화)고 설명하는 게 정확하다. 바이러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온도와 습도가 맞으면 수일은 물론 수년까지도 감염성을 지닌다. 최근 유행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자외선이나 열, 에탄올 함량 70% 및 염소 함유 소독제 등에 노출되면 감염성을 잃는다.
Q9 바이러스가 생태계 균형을 맞춘다?
해양 생태계에 존재하는 박테리아의 20~40%는 매일 바이러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덕분에 수계 내 세균 개체 수가 조절된다. 이렇듯 바이러스가 특정 숙주 집단이 지나치게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걸 억제함으로써 생태계의 다양성이 유지된다.
Q10 간염 바이러스는 몇 종류일까?
A, B, C, D, E형 총 5가지
Q11 바이러스 감염이 암으로 진행될 수 있나?
전 세계 암 환자 중 약 12%가 ‘바이러스 감염’ 때문에 암에 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암 유발 바이러스는 총 7가지인데, 20여 종의 암과 연관돼 있다. 자궁경부암과 B형 간암을 제외하고는 아직 백신이 없어 감염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바이러스에 감염됐더라도 건강 상태에 따라 영향이 다르니, 면역력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Q12 열대 모기 전염 바이러스는 안심해도 될까?
다양한 열대 바이러스성 질병은 모기로부터 전파된다. 우리나라에서 지카 바이러스, 뎅기 바이러스 감염이 일어날 확률은 극히 드물지만 지구온난화로 열대 모기를 숙주로 삼던 바이러스들이 온대 지방의 모기에도 적응한다면 안심할 수만은 없다. 뎅기나 지카의 경우 아직 치료제와 백신이 없어 바이러스가 창궐할 경우 그 여파는 상당할 것이다.
Q13 인간은 어떤 경로로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Q14 성인 90%는 암 유발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인간에게서 최초로 발견된 암 유발 바이러스는 ‘엡스타인-바 바이러스’다. 놀라운 건 전 세계 성인의 90% 이상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암에 걸릴까? 결론은 아니다. 엡스타인-바 바이러스는 주로 유아기에 가족에 의해 타액으로 감염된다. 그러나 성장하는 동안 면역 세포에 의해 거의 제거되고, 극히 일부만이 암을 유발한다.
Q15 중장년만 지닌 바이러스 기억면역세포가 있다?
1980년 WHO가 지구상에서 박멸됐다고 선포한 천연두가 다시 출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렸을 때 천연두 예방접종을 받았거나 약하게 감염된 적 있는 어느 정도 나이 든 성인의 일부만 이 바이러스에 대한 기억면역세포를 갖고 있어 이로 인한 대규모 집단감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예방접종 없이 지내다가 만약에라도 이러한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면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Q16 우리나라에도 ‘스페인 독감’ 영향이 있었나?
우리나라도 약 740만 명이 감염되어 14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스페인 독감이 창궐한 1918년이 무오년이어서 ‘무오년 독감’으로 기록됐다. 당시 인구가 1770만 명 정도였으니, 얼마나 위협적인 상황이었을지 짐작이 된다.
Q17 역사상 최초의 팬데믹 사태는?
1918년 미국과 유럽에 퍼지기 시작한 스페인 독감이다. 이 바이러스로 인해 약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미군 병사 4만3000여 명이 사망했다. 이로 인한 전투력 상실로 제1차 세계대전을 앞당겨 끝낼 수밖에 없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당시 전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스페인 독감을 앓았으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인명 피해를 입힌 최악의 바이러스였다.
Q18 코로나19 이전 우리를 위협했던 바이러스는?
전 세계적으로 발병을 일으킨 여러 바이러스가 있지만, 아무래도 한국인의 뇌리에 남아 있는 건 사스(2002년), 신종플루(2009년), 메르스(2012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Q19 코로나19 사태 언제까지 계속될까?
코로나19 완치 후 재확진을 받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그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으나 가능성 중 하나가 재발감염이다.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잠복해 있다가(이때는 바이러스가 없는 것처럼 보임) 특정 조건에서 다시 증상을 보이는 현상이다. 입술 포진이나 감기처럼 코로나19 역시 잠복과 재발이 일어나며 우리 일상에 만연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금융시장이 출렁이면서 노후 자산관리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은퇴 후 고정수입이 줄었거나 사라졌다면 자산을 늘리기는커녕 지키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변동성이 커진 만큼 투자전략을 다시 점검해야 할 시기다.
호주는 어떤 상황일까? 호주 국민은 노후 자산관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한다. 호주가 전 세계 연금시장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배경에는 그들만의 투자원칙이 있다. 김혜령 하나은행 은퇴설계센터 수석연구원은 “호주 국민의 투자원칙은 노후 자산관리 측면에서 성공적인 모델로 꼽힌다”고 말했다. 김 수석연구원을 만나 호주 국민의 노후 투자원칙에 대해 물어봤다.
◇왜 미국과 유럽이 아닌 호주인가
“호주는 전 세계 연금시장 경쟁력을 평가하는 멜번-머서 글로벌 연금 인덱스(MMGPI)에서 3위를 차지한 나라입니다. 그 명성에 맞게 지난해 12월 기준 자산규모가 2조9000억 호주달러(약 2300조 원)나 됩니다. 지난 20년 동안 연평균 수익률을 6.7%나 거둬 성공적인 노후 자산관리 모델로 꼽힙니다. 비결은 ‘글로벌 자산배분’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덕분에 지난 20년 동안 IT버블, 글로벌 금융위기 등 시장의 부침 속에서도 꾸준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노후 자산관리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호주 국민은 어떻게 투자를 할까
“호주 국민은 자산배분에 능숙합니다. 요즘처럼 변동성이 커진 시기일수록 처음 수립한 자산배분에 충실합니다. 웬만해선 도중에 투자처를 바꾸는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장기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니어 세대 역시 다음 세대에 물려줄 자산을 불리는 식으로 멀리 내다보며 노후를 준비합니다. 한국의 시니어도 장기적인 전략으로 노후 자산관리를 실현해나가길 제안합니다.”
◇국내와 해외 중 어느 곳이 좋을까
“분산투자는 필수입니다. 국내에 한정하지 않고 해외까지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주식뿐만 아니라 채권 등 안전자산도 바라봐야 탄탄한 노후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글로벌 자산배분이 필수입니다. 미국 증시를 보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가 연초 대비 20% 하락했습니다. 반면 중국은 회복세를 보이며 선방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투자자산에 분산투자를 하는 게 리스크를 줄이는 길입니다.”
◇더 쉽게 글로벌 자산배분을 하려면
“글로벌 자산배분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상장지수펀드(ETF)를 추천합니다. ETF를 활용하면 자산배분이 더 빠르고 수월해집니다. IT업종이 유망하다고 판단되면 종목을 개별적으로 선별할 필요 없이 해당 업종 ETF를 매수하면 됩니다. 투자가 좀 더 쉬워지는 거죠. 예전에는 ETF 내 주식의 비중이 컸지만 요즘은 채권, 섹터, 원자재까지 종류가 다양해졌습니다.”
◇ETF를 추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ETF는 거래소에서 일반 주식처럼 빠르게 매매할 수 있습니다. 일반 펀드의 경우 매수와 매도에 따른 손익이 실현되기까지 7~8일 정도가 소요되지만, ETF는 실시간 매매가 가능합니다. 운용비와 수수료도 낮은 편입니다. 지난해 ETF 순자산 총액은 역대 최고 금액인 52조 원을 기록했습니다. 수익률은 해외 주요 증시와 연동된 상품이 좋았습니다. 가장 수익률이 높은 종목은 80%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추천하는 자산배분 모델이 있다면
“연평균 6~7%의 수익률을 유지하는 호주의 연금은 지난해 12월 기준 국내 주식 22%, 해외 주식 25%, 국내외 채권 21%, 부동산 및 인프라 12%, 현금 12%, 헤지펀드 등 7%로 다양하게 자산이 분배됐습니다. 국내 모델 중에는 국민연금의 자산배분 사례를 참고하면 좋습니다. 국민연금은 700조 원이 넘는 기금을 운용하며 연평균 5%의 수익률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은 50% 가까이 되는데, 최근에는 대체 자산 비중을 늘리고 있습니다. 국민연금 자산배분 모델은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배당수익을 염두에 둔 투자 방법은
“배당주나 우선주 등에 투자하는 방법도 추천합니다. 우선주 중에선 최소배당금이 정해진 특수우선주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배당수익을 지급합니다. 물론 지금은 전반적으로 글로벌 경기가 둔화돼 배당액이 당분간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회복될 전망이라 투자 매력이 살아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역시 장기적인 측면에서 자산배분 원칙을 지킬 수 있는 확신이 있어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김혜령 하나은행 은퇴설계센터 수석연구원
전 교보생명보험 법인영업지원팀, 전 NH투자증권 연금운영팀, 전 미래에셋대우 은퇴연구소 수석연구원, 은퇴설계 가이드북 ‘Hana하나 실천해보는 행복노하우’와 은퇴분석 보고서 ‘서구 은퇴소득시장 현황 및 시사점’ 저자, 하나은행 은퇴 및 연금설계 강사.
세상에서 제일 먹기 싫은 것이 있다면 바로 나이가 아닐까? 시니어기에 접어들고 나이 앞자리가 무거워지면 모든 것이 억울하고 슬퍼지는 상황을 맞기도 한다. 그런데 어차피 먹을 나이 좀 맛있고 멋지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세상 모든 이가 맞이하는 그 나이 듦에 당당해져보자.
도움말 전수경 남서울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생애주기에 있어서 50대 이후에 겪게 되는 정신적 스트레스의 요소는 다양하다. 갱년기 우울증을 비롯해 자식들의 독립으로 인한 빈 둥지 증후군, 이혼, 사별, 부모의 죽음 등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가질 수밖에 없는 외부적 요건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전수경 남서울대학교 교수는 “에이징, 즉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외로움, 소외감, 박탈감, 허무함 등을 시니어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년기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건강한 정체성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른바 ‘웰에이징’이란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신체적 건강만큼 정신건강도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의 근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의 표현을 빌리면, 성인후기(노년기) 마음의 근육은 ‘자아통합감’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그대로 수용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조화롭고 균형 잡힌 견해를 가지는 성숙한 인격을 의미합니다. 성공적인 노화(successful ageing)와 심리적 안녕(psychological wellbeing)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인 것이죠. 이를 갖지 못하면 우울감과 타인에 대한 원망, 인생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찰 수 있습니다.”
동화작가 겸 극작가인 설용수 씨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각종 불안감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환갑을 넘기고 나니 새로운 삶이 열린 것처럼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아들의 결혼으로 인한 빈 둥지 증후군은 자전거 타기와 독서로 조금씩 이겨내기 시작했다. 집은 작은 평수로 줄여서 이사했다. 2년 전부터는 사교댄스를 배워 한 달에 한 번은 춤을 추기 위한 모임에도 간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싱글라이프를 즐기고 있다고.
“아무런 부담이 없어요. 자식을 키워야 한다는, 부모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내가 직장을 다니고 뭘 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습니다. 남자 여자라는 성(性) 구분이 없는 것도 해방에 가깝습니다. 다들 나이가 있으니까 누구를 만나도 사람 그 자체로 만날 수 있어요. 시간도 돈도 마음도 뭐든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것도 좋습니다. 혼자 사는 것에 적응하니 지금 정말 행복해요.”
빈 둥지의 허탈감과 늙어간다는 부적정인 생각을 밟고 더욱더 성숙하고 완전한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을 설용수 씨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깊은 우울감 대신 좀 더 나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누구든지 신나고 당당하게 나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와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 심리학 교수 애덤 그랜트는 ‘옵션 B’라는 공동 저서를 통해 ‘상실과 역경으로 마주하게 된 삶을 ‘옵션 B’라는 말로 설명했다. ‘옵션 B’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회복탄력성’이 요구되는데, 이는 “절망감 속에서 빠져나오는 심리적 근육”을 말한다. 자아통합감과 회복탄력을 지니려면 마음을 단단히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전 교수는 이를 위해 “무엇이든지 인정하고, 긍정적이며, 과도하게 의존적이지 않아야 하고, 스스로 홀로서기를 하면서, 타인을 배려하고,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레이스 리보와 바버라 케인이 쓴 ‘나이 든 부모와는 왜 사사건건 부딪힐까?’라는 책을 보면 시니어기에 접어들어 정서적,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었을 때부터 그러한 인자(요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니어가 되어 갑자기 고집스러워진다거나, 독단적이고 의존적인 성향으로 변한 게 아니라는 것. 전 생애에 걸쳐 원래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니어기에 부각되거나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물론 나이 들면서 더욱 문제가 도드라지기도 한다. 그레이스 리보와 바버라 케인은 나이 듦으로 해서 겪는 6가지 문제 성향을 책을 통해 열거해놓았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서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돌아보고 개선하고자 노력한다면 나이 먹는 스트레스 없이 긍정적이고 멋진 시니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전 교수는 조언했다.
시니어의 문제적 성향
❶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유형이다.
❷ 흑백의 세계에 있으며 나쁜 면만 보는
유형이다.
❸ 자기밖에 모르는 유형이다.
❹ 만사를 자기 뜻대로만 하는 유형이다.
❺ 자기학대를 하는 유형이다.
❻ 두려움에 빠진 유형이다.
전수경 교수의 어드바이스
❶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한다.
남에게 과도한 의존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❷ 좋은 면을 보는, 긍정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관점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❸ 자기중심적이어서는 안 된다.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❹ 자기 뜻대로 사람이나 상황을 조정하려고 하는 통제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❺ 자기를 사랑하고 보듬어야 한다.
❻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생산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
1935년에 태어난 박종규 씨는 무슨 일을 하든 올인했다. 중도에 포기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정도(正道)와 성실(誠實)을 깊게 뿌리 내린 그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두 번의 암 선고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고 “까짓것 죽어주지” 하며 담담하게 쳐내는 의연한 어른을 만났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알짜’이자 숨겨진 강자로 불리는 기업들을 강소기업이라고 부른다. KSS해운은 해운업계에서 강소기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박종규 바른경제동인회 고문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그 KSS해운을 창업한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리에서 물러나 고문 역할만 하고 있는 그는 KSS해운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로 투명경영을 꼽는다. 자신이 세운 기준을 평생 추구했고, 그 결과로서의 기쁨을 오롯이 누리는 중인 그는 제주도에서 칩거하며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KSS해운은 해운 운송 전문업체로서 가스, 석유, 화학제품의 운송을 전문적으로 맡는다. 현재 초대형가스선(VLGC) 선단으로는 국내 최고, 세계 9위의 규모를 자랑하며 2018년 매출 2025억 원에 영업이익 실적이 471억 원에 이르는 견실한 강소기업인 KSS해운은 올해로부터 50년 전인 1969년, 박종규 고문이 맨손으로 세운 회사다.
난생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는 만연했던 선원들의 밀수를 근절하며 회사를 정직하게 경영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의 근저에는 독립군 출신이며 민족자본 형성을 위해 유한양행을 세워 윤리경영의 대명사가 된 유일한 박사가 있었다.
“꿈도 없이 막연하게 월급쟁이 생활을 10년 했거든. 그때도 유한양행의 유일한 씨를 존경해서 내가 만약 사업을 하게 된다면 유일한 씨처럼 해야겠다는 게 꿈이었어. 어떻게 하다 보니 사업을 하고 성공도 했는데, 그저 유일한 씨처럼 한 것뿐이야.(웃음)”
KSS해운, 스스로 떠나다
밀수를 근절하자 사고가 안 생겼고 화물 하역과 인도가 차질 없이 이뤄졌다. 그러면서 회사에 대한 신뢰는 자연스럽게 쌓였다. 그렇게 KSS해운의 성장이 지속되던 25년 차, 박 고문은 수장 자리에서 내려와 회사의 고문이 되었다.
그렇다면 KSS해운은 그의 자식들이 맡게 되었을까? 아니다. 정도경영, 윤리경영이라는 그의 철학과는 맞지 않는 일. 회사는 그의 아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후배 전문 경영인이 맡았다.
“아들들은 각자 자기의 길을 갔죠. 지금 서울에 한 명, 미국에 두 명 있는데 미국에 간 두 명은 과학자예요. 서울에 있는 아들은 사업가고. 다들 나한테 원조 받은 일도 없고, 원조 줄 아버지도 아니고…. 다만 독립심을 길러줘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 ‘각자 자기 살길을 가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서로 신세지지 말자. 나도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에서 이렇게 됐으니까’라는 생각이었죠. 유산 많이 남겨야 소용없어요. 독립적인 정신을 갖게 하는 게 정말로 중요한 유산이야.”
제2의 인생, 바른경제동인회
그러나 박 고문이 KSS해운의 대표 자리를 물러날 즈음은 또 다른 제2의 인생이 펼쳐지고 있던 때였다. 1993년에 바른경제동인회를 창설했다.
“1990년대 초는 노동조합운동이 아주 격화되어 혼란한 시대였죠. 불법파업도 많았고. 그때 ‘회사를 노사 공동의 파트너십으로 생각하자, 사용자와 피고용인의 구분을 떠나서 함께 가자’는 생각에 바른경제동인회를 만들었죠.”
바른경제동인회에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투명성이었다. 경영을 투명하게 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았다.
“그러려면 CEO의 의지가 있어야 하죠. 그런데 참여하는 사람 찾기가 어려웠어요. 현실은 돈을 갖다 줘야 일이 됐으니까. 그래도 투명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했지만, 사회 전체가 워낙 불투명하니까 힘들었죠.”
박 고문이 바라본 당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막대한 지하자금이었다. 세무 신고를 하는 음식점이 30%도 안 되던 때였다. 나머지는 다 탈세였던 셈이다. 그러니 지하자금도, 뇌물도 엄청나게 돌았다. 그런 현실을 보다가 그는 마침내 세상을 바꿀 해법을 찾았다.
지하자금 줄인 ‘신의 한 수’
“지하자금을 정리해야겠다, 그래야 투명경영이 가능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런데 지하자금을 줄이는 방법으로 뭐가 있을까? 바로 신용카드를 많이 쓰도록 활성화하는 거였어요.”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쓰도록 해서 신용사회를 만들자는 바른경제동인회의 아이디어는 지하자금의 양성화, 경제의 투명화와 함께 내수시장의 양적 증가와 자금 유동성 활성화를 이끌 방법이기도 했다. 때마침 IMF 체제를 돌파해야 했던 정부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나은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바른경제동인회의 솔루션이 채택되어 1999년부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지하자금의 축적은 줄어들고 전자화된 세금 징수와 보다 투명화된 재정 운영이 가능해진 국가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다. 박 회장이 만든 대한민국 역사의 변곡점이었던 셈이다.
2004년이 되자 그에게 또다시 큰일이 맡겨졌다.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이 된 것이다. 박 고문을 그 자리에 올린 사람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1년 후배인 고건 전 총리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결의안이 국회를 통과해 직무 정지가 되자 고건 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고, 그전까지 한사코 거절하던 그를 결국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에 앉혔다. 그는 위원장 일을 하며 정부와 많이 싸웠다고 회고한다. 정치 논리로 새로운 안을 만들어서 규제를 하려는 걸 막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는 2006년까지 위원장 일을 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그가 싸워야 했던 대상은 또 있었다. 2006년 그는 서울을 떠나 본격적으로 제주도에 정착했다. 그는 그 일에 대해 담담하게 이유를 밝혔다.
“죽으러 간 거지. 위암에 걸렸거든.”
죽기 위해 제주도로 가다
박 고문은 위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받을 때 의학 책을 보게 됐다. 책에는 “위암 4기는 수술을 하든 안 하든 사망률이 90%에 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놀라진 않았어. 나이 71세에 암에 걸린 거니 죽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 ‘젊은 사람도 많이 죽는데 70년 이상 살았으면 많이 산 거다’ 싶었지. 그런데 죽을 때 서울에서 죽고 싶진 않더라고. 왜냐하면 사는 데는 아파트, 밖을 나가면 아스팔트잖아요. 사람이 흙을 밟지도 못하고 시멘트 안에서 아스팔트를 걸으며 살았는데, 마지막에라도 자연 속에서 죽고 싶었지.”
그는 병원에서 권한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아내와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죽을 장소를 찾아간 셈이었다. 그리고 아무 치료도 받지 않고 한라산을 왔다 갔다 하며 생활했다. 그러다 보니 암이 자연스럽게 나았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사람에게 자연치유 능력이란 게 있는 거지. 항암 치료를 받았으면 아마 죽었을 거야. 거절한 바람에 살았어. 역설적이지.”
자서전을 반드시 써야 했다
그러나 박 고문의 시련은 위암으로 끝나지 않았다. 2017년이 되자 또 다른 암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방광암이었다.
“괴로웠죠. 소변이 안 나오니까. 이건 항암 치료를 안 하면 죽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따랐는데… 그런데 못하겠어. 치료받다가 죽을 거 같았지. 여섯 번 하고 안 하겠다고 하니까, 병원에서 방사능 치료로 바꿔주더라고.”
그의 몸에는 아무래도 방사능 치료가 맞았나보다. 그는 다시 한 번 기적처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이때 그의 책 ‘직원이 주인인 회사’가 쓰였다.
“자서전을 하나 내보라고 해서 쓸까 말까 하다가 방광암에 걸렸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못 살 거 같았지. 그러니까 좀 섭섭하더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 못하고 죽으면 안 되겠다, 책 한 권 남겨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항암주사를 맞으며 썼죠. 쉬었다가 조금 쓰고… 힘들었지. 제목을 뭐로 할까 했는데, 적당한 게 없어서 직원들에게 책을 보내 ‘자네들이 읽고 정해 달라’고 했어요. 그때 제일 많이 추천한 게 이 제목이었죠.”
직원들이 제목을 지어준 책. 어떻게 보면 그 과정 자체가 자기들이 회사의 주인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지금 사장은 내 의견이 들어간 사람이 아냐. 되려 내가 모르는 사람이지.(웃음) 내가 그만둘 때 지금 사장이 대리급이었으니까 특별히 만난 일도 없어요. 그런데 경영을 너무 잘해. 투표해서 뽑힌 사람이 더 잘한다는 증거죠.”
그가 행복한 이유
창립자이지만 박 고문은 회사 경영에 일체 간섭을 안 한다. 당연히 보고도 안 받는다.
“‘이익 배당만 잘해다오’ 그러지.(웃음) 대신 투명한 회사야. 그러니까 맡길 수 있어.”
인터뷰 말미로 갈수록 박 고문 목소리에는 웃음이 많이 더해졌다. 자신이 이뤄낸 것들을 복기하면서 즐거워진 것일까. 그는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다. 암에 두 번이나 걸리면서도 겁을 안 냈고, 되려 ‘까짓것 죽어주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 무조건적인 긍정성은 자신의 삶을 후회 없이 살아왔고 그를 통해 이뤄낸 성과들을 확인했기에 가질 수 있는 마음일 것이다. 그의 정도경영, 투명경영이 사회적 의미와 더불어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다.
“회사를 세웠는데 직원들이 주인처럼 하니까 기업인으로서 성공한 거지. 부의 창조만이 아니라 사회에 부가가치를 남긴 것 같아 그게 가장 행복해.(웃음)”
산에 미쳐도 단단히 미쳐 살았다. 그러니 일이 터질 수밖에. 주목할 만한 기록이 나왔고 사람들은 갈채를 보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미치지 않고서 도달할 길이 없다. 선무당처럼 대충 미쳐서는 히말라야 고봉을 오를 수 없다. 지구상의 극한적 험지인 세 극지(히말라야, 남극, 북극)를 찾아 누빈 탐험가 허영호(65). 그의 격렬한 모험이 거둔 성과가 경이롭지만, 스스로 선택한 일을 향한 온전한 몰입으로 삶을 만족스럽게 끌어온 성취는 더욱 놀랍다. ‘온전한 몰입’이 있는 인생이라는 게 어디 시중에 흔하던가.
일찍이 소년기 때 동네 산꼭대기에 오르는 쾌감을 맛본 게 등산에 빠진 계기였다지. 군대를 다녀온 뒤엔 인생을 몽땅 산에 걸기 시작했단다. 서막은 그저 그렇게 자연스러웠으나, 이후 산악 역사에 두고두고 마르지 않을 이름을 등기했으니 허영호의 행장은 사실상 비범한 것이었다.
허영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83년, 히말라야 마나슬루를 산소통 없이 단독 등정하면서였다. 마나슬루는 1972년, 돌연한 산사태를 일으켜 한국 산악인 16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고봉이다. 1987년 12월, 허영호는 다시 기세를 돋웠다. 세계 등반사상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성공했던 것. 이것으로 마침내 세계적 산악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1994년엔 남극점을, 1995년엔 북극점에 도달했다. 진기한 드라마를 연속 상영한 셈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허영호를 ‘7대륙 최고봉과 남극점, 북극점 도보 탐험에 성공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로 기록하고 있다. 이쯤이면 역사적 인물이다. 역사에 남는다는 것. 허영호는 그게 매우 기쁘다.
“나는 실로 꾸준히 세계적인 것에 도전해왔다. 매번 엄청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모험에 나섰다. 가치 있는 도전이라는 것, 역사를 가치 있게 만든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세계적인 역사를 만들지 못하는 가치 없는 도전이란 말짱 꽝이지 않은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강렬한 집념. 그게 모험에 나서게 했다는 얘기인가?
“극지에 도전하는 모험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과정의 연속이다.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이 남는다는 건 고귀한 일이지 않은가.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등반을 죽기 전에 완료하겠다는 게 나의 지향이었으며, 그게 모험에 나서게 하는 힘이었지.”
세상의 위업들은 맹렬한 명예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당신에게서도 강한 명예욕이 느껴진다.
“명예, 명망에 대한 기대는 자연스럽게 찾아오더군. 그러나 명예라는 건 결과적으로 오는 것이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백지상태인 미답의 땅을 섭렵한다는 성취감, 극지의 신기한 자연 풍경에 대한 감동, 이런 요소 역시 나를 모험에 빠지게 했다.”
히말라야에 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산악인들도 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흔히 탄식한다. 공연히 위험한 등산을 자청, 하나뿐인 아까운 목숨을 허무하게 버리는 게 안타까워서.
“프로 산악인들의 등반은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등산과 다르다. 특유의 어떤 정신세계를 가지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게 아니겠는가.”
아예 죽음을 각오하고 출발하나?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약해진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재앙이 벌어지는 게 인생이지만 여하튼 어디서건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난 산이 좋아 산에서 죽을래!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바보에게나 어울린다. 나는 항상 죽는 일 따위는 내게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등반에 나섰다.”
죽을 뻔했던 무산소 등정
에베레스트는 이 산의 측량 전문가였던 영국인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초모랑마’라는 티베트 이름으로 불린 산이었다. ‘세계의 어머니 신(神)’이라는 뜻으로 티베트인들은 예로부터 이 산을 숭배해왔다. 산악인들도 정신의 산, 신비의 영산으로 숭상하며 거룩한 사유를 펼치곤 한다. 생사 여부마저 산령(山靈)의 뜻에 달렸다는 식의 감상을 털어놓기도 한다. 허영호에게 이는 어림없는 생각이다. 내 목숨은 오직 내가 간수할 수 있을 뿐 그 무엇도 간섭할 수 없는 거라는 실사구시에 충실할 따름이다. 완벽한 사전 준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정신력, 팀을 통제하는 엄격한 규율. 그것들만이 사고를 피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라 믿는다.
특히 원정 대원들의 관리에 추상같다. 인상에 쓰여 있듯이 평상시엔 온유하지만 등반할 때는 돌변한단다. 엄격하고 날카로운 독수리로 변하는 모양이다. 눈빛부터 사납게 바뀐다는 게 아닌가. 예측할 수 없는 대자연이 성깔을 부리면 한순간에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해서, 군기반장처럼 엄한 규율로 대원들을 다그친다. 덕분에 단 한 사람의 대원도 다치지 않았으며, 이는 다른 원정대에선 찾아보기 드문 성과라고 한다. 그러나 위기 상황은 빈발했다. 벼랑에서 추락했고,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눈사태에 휩쓸려 파묻혔다가 셰르파에 의해 구조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죽음과 직면하기를 거듭했다.
“1993년 4월, 무산소 등정으로 에베레스트를 횡단하며 비박할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산소 등반과 무산소 등반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걸 절감했다고. 가슴이 터져나갈 듯 고통스러웠는데 심장이 당장 멈출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지. 하늘을 쳐다보며 절규를 했다고. 천신만고 끝에 38시간 만에 캠프에 도착, 비로소 물을 마실 수 있었지. 오열을 하면서.”
지독한 사경을 겪고도 또다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배짱이라니.(웃음)
“나 이젠 다시는 산에 안 가! 그런 외침이 속에서 터지긴 한다. 아주 잠깐, 현장에서만.(웃음)”
기어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자연에 도전하는 게 서구적 알피니즘의 전통이지만, 우리 선인들은 산을 그저 욕심 없이 편하게 노닐었다. 이게 더 수준 높은 산행 방식 아니었을까?
“과학의 발달로 일찌감치 산과 바다로 당차게 진출한 서양과 달리 우리는 다분히 정적인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봤다. 어릴 적에 부모님들은 흔히 자식에게 타일렀다. 산에 가지 말라고, 물가에 가지 말라고.”
우리 민족은 누가 말린다고 산수 간에 머물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면 DNA에 이미 산야의 기질이 상속된 게 아닐까.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양과 사뭇 다른 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도 일찍부터 등산이라 일컬을 만한 장르가 존재했다. 혹자는 승려들의 입산을 등산의 효시로 보며, 혹자는 신라 화랑도의 유산(遊山)을 원조로 간주한다. 조선시대 중엽의 민화 중엔 밧줄을 타고 암벽을 오르는 모습이 있기도 한다. 이 희귀한 사례를 통해 도전적 차원의 등산마저 행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산을 몹시 애호해 산행을 즐겼다. 일테면 남명 조식 선생은 지리산을 16회나 오르내렸다. 사대부들은 등산이라는 개념보다 관산(觀山), 요산(樂山), 유산(遊山)이라는 코드로 산을 누렸던 것 같다. 오늘날 한국의 등산객들이 산을 즐기는 방식도 이와 꽤 유사한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한국의 산은 스케일은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정답다. 위험요소가 드물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수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쌓인 불만과 스트레스를 산에서 해소하고 있어 사회가 그나마 덜 시끄럽다고 봐야 하겠지.”
히말라야의 광막한 설산을 묵묵히 오르는 산악인들의 모습은 고행하는 수도승을 연상시킨다.
“고행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고자 한다는 점에선 수도승과 다를 게 없겠지. 그러나 산악인은 자연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수도승과 다르다. 도전이란 정복을 겨냥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정복하나? 잠깐 정상을 딛고 내려올 뿐인데.”
에베레스트 고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떻던가?
“아름답고 경이롭다. 그러나 너무 춥고 숨이 가빠 사실상 풍경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텐트 밖으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게 잠시잠깐의 감상일 뿐이거든.”
등반 중에는 무슨 생각을 하나?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극한 상황에서도 산과 대화를 했던 것 같다. 거짓말하지 않는 자연에서 겸손을 배우고, 인내심을 기르고, 분노를 자제하는 능력을 얻었다. 이건 극지 등반에서의 일만은 아니다. 어디서건 자연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심성이 더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속세의 거친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아 자살까지 하는 경우가 있지만, 산을 좋아하게 되면 달라지지. 어떻게든 사람을 자연으로 끌어내는 게 옳다는 거. 특히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산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탐험과 운명적 사랑에 빠진 종(種)
허영호는 지난 2010년, 대학생이었던 아들 재석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또 한 번 매스컴의 관심을 샀다. 좌우간 산에서 배우는 게 인생을 잘 사는 비결이라는 생각. 등반에 인간과 인생의 모든 게 담겨 있다는 확신. 그는 그걸 널리 홍보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아니랴. 인생에도 크레바스가 있고, 추락이 있으며, 눈사태가 있게 마련이지 않던가. 이 모든 요상한 난리블루스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과 안목을 산에서 얻을 수 있다는 얘기는 언제 들어도 신선한 뉴스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허영호도 어느덧 늘그막에 접어들었다. 난다 긴다 하는 모험 고수이지만 이젠 체력을 고려해 자제하며 산다. 그러나 탐험을 멈출 방법이 없다. 좀 부풀려 말하자면, 그는 탐험과 운명적 사랑에 빠진 종(種)이니 말이다. 요즘은 경비행기에 빠져 산다지. 경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해 또다시 역사적 기록을 남기겠다는 웅장한 포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경비행기를 타고 독도를 비롯해 국내 곳곳을 비행 훈련하며 세계로 비상할 날을 대비해왔다. 문제는 자금이란다. 스폰서를 잡아야 하는데 여의치 않다는 것.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 자력으로 탐험하는 방식은 실로 불가능한가? 매우 내성적인 성격으로 보이는 당신은 어디 가서 쉽사리 손을 내밀지도 못할 것 같다.
“원정대를 꾸려 착수하는 극지 탐험에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가는 것을 무슨 수로 개인이 감당하겠나? 원정대 지원이 일방적 수혜도 아니다. 주로 등산 장비업체가 스폰서로 붙는데, 그들은 나의 원정 활동상을 비즈니스 마케팅에 활용하거든.”
직업이 탐험가인 당신에게 누가 월급을 주지? 가족을 어떻게 건사하나?
“가족은 나에게 탐험보다 소중하다. 가족 생계를 등한시하는 산악인은 산악인의 자격조차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난 꽤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강연 초대를 자주 받았으며, 그게 무난한 생활 대책이 돼주었다. 사람들이 내게 가장 흔히 하는 질문이 뭔지 아나? 등반으로 돈이 생기느냐, 반사이익이 있느냐, 라는 것이다. 그러나 등반 자체는 무상(無償)의 행위일 뿐이다. 대신 강연료가 들어와 살 수 있었지.”
우리 사회가 나름 똑똑해지는 모양이다. 허영호를 강연장으로 끌어들여 경청을 하는 걸 보면.
“글쎄다. 난 나를 비롯해 프로 산악인들을 더 활용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가령 유능한 산악인들을 모아 특공구조대 같은 걸 만들면 자연재난이나 산악조난 구조에 크게 쓰일 수 있지 않겠는가. 119소방대만 고생시킬 게 아니라는 얘기다. 언젠가 국무총리 공관에서의 오찬에서 그런 취지의 제안을 했으나 소용없더라고.”
어디서나 일관하는 인생관이 있겠지?
“노력하며 살자! 그거. 탐험하며 살다 보니 ‘자기 노력’이 인생 성공의 99%를 차지한다는 걸 깨닫겠더라. 행복이라는 것도 노력의 산물이지 않겠는가.”
평생 노력만 하면 무슨 재미? 잘 노는 데에서도 행복의 샘물이 퐁퐁 솟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긴긴 세월 극지와 맞붙었던 사람에겐 실없는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애석한 사실 하나 귀띔하고 그의 귀농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귀농 7년 차. 농사도 살림도 어언 자리 잡힐 만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문기운(60) 씨는 아직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자나 깨나 진땀을 흘리는 것 같다. 화살을 쏘았으나 여태 과녁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속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일쑤 ‘귀농우수사례’로 치지만, 사실은 실패 사례에 가깝다는 게 아닌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세월이 줄레줄레 길어진다면? 안간힘을 다했으나 자꾸 스텝이 꼬인다면? 기세가 꺾일 수 있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던 초심의 열정이 얼어붙을 수 있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고난을 차라리 디딤돌 삼아 맥락을 잡아간다. 심술궂은 운명아, 넌 그래라, 난 내 길 간다! 그런 태세로. 고난과 정면으로 독대해 희망의 불씨를 지속하는 일. 인생의 요점을, 그는 그리 생각하는 것 같다.
시골에서 누리는 ‘인생 2막’. 도시생활의 중압과 불쾌로부터 벗어나 경치 좋은 산골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일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오전엔 운동 삼아 약간의 노동을 하고, 오후엔 책을 읽는다. 밤이면 두릿두릿 돋아나는 별들과 교신하며 영속하는 가치를 생각한다. 이런 삶, 그 무엇보다 이상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문기운 씨는 그런 식의 삶에 들뜬 적이 없다. 그는 사업에서 명퇴를 했다. 그러나 사업적 욕망까지 명퇴하진 않았다. 그는 산촌을, 농촌을 매력적인 사업장으로 판단했다. 농업 경영인으로 도약해 생의 후반을 흥미진진하게 돋우겠다는 야심. 그게 귀농을 선동했다.
“흔히 은퇴 이후엔 격렬한 삶과 멀어집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휴식을 추구하는 것이죠.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은퇴를 계기로 또 하나의 격렬한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 봤지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직업을 잡아 나를 새롭게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그 방편으로 귀농을 택한 건, 농사가 지닌 사업적 가망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직격탄 맞은 조경수 사업
그는 KT 출신이다. 줄곧 KT에 근속하다 자회사를 창업, 6년간 대표이사로 일한 뒤 퇴직했다. 마음은 일찌감치 산골로 먼저 이주해 그를 열렬히 호명했던 모양이다. 퇴직을 한 바로 그날, 잽싸게 짐을 싸 귀농을 했다는 게 아닌가. 이전에 미리 사두었던 이곳 홍천의 산골짝 터전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 매봉산 자락 해발 780m 고지에 있는 터전의 규모는 조경수 농장 2만 평을 포함, 총 4만 평. 광활한 터이니 광폭의 행보를 예감하며 기꺼웠을 게다. 새 삶의 기획자인 자기 자신에게 진정 새로운 삶을 선사할 기회가 도래했다는 확신으로 설레었을 테고.
“사실 귀농은 오래된 계획이었어요. 도시보다 시골이 좋았고, 농사가 제 적성에 부합한다고 봤으니까. 일테면, 제가 흙냄새 좋아하고, 몸 쓰기를 좋아해요. 게다가 땅이 지닌 생산성에 호감을 느껴 나름대로 농업 연구도 해왔죠. 그러하니 지당한 귀농이었다는 거.”
“부인께선 찬동했고?”
“찬동까지는 아니었지만 반대하지도 않았어요. 부부이니까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도시생활에 지친 남편을 조용히 응원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시골생활에 닻을 내리기까진 시간이 걸렸어요. 이모저모 버거운 경험을 하며 아내가 한동안 마음고생 좀 했습니다.”
“농사의 사업적 가망성에 착안한 건 어떤 근거에 의해서였죠?”
“조경수 농업이 매우 유망하다 봤던 겁니다. 제가 농장을 사들인 10여 년 전엔 나무시장이 생동했어요. 남북경협이 기폭제였죠. 산림 황폐화가 심각한 북한으로 막대한 물량의 나무들이 보내졌으니까. 당시 국내 과실수 묘목의 40%가 북한으로 넘어갈 정도였지요. 그 매우 긍정적인 상황에 착안하고 나무 농장을 사들였던 겁니다.”
“천안함 사건의 여파로 2010년, 남북경협이 중단됐어요. 상황이 돌변했겠군요. 호재가 사라지고 악재가 덮쳤으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 순간에 벌어진 거죠. 직격탄을 맞았다 할까, 국내 조경사업 자체가 냉각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더라고요. 게다가 이 사업이 원래 건축 경기하고도 맞물려 있는데 건축 바람마저 가라앉아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시퍼런 꿈과 야심이 실린 그의 ‘무네미농장’엔 주목과 소나무를 주종으로 한 조경수들 1만5000그루가 자라고 있다. 농장 사위엔 초목들이 비밀 회합을 하는 숲의 연쇄. 가을이 붓을 들어 서서히 주황을 칠할 테지. 그러나 10월 초의 숲은 여전히 초록을 토하는 재미에 심취해 있다. 저 기고만장한 풍경의 기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환하게 밝아질 것만 같은 낙토(樂土)라 말 못할 게 없는 가경이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풍경에 별 관심 없다. 오나가나 경치를 즐겨 일상에 흥을 부여하는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거니와, 한가하게 자연에 눈 돌릴 때가 아니라 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상의 활로를 찾아야만 하는 현실이지 아니한가.
“자연도 일상이 되면 무료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자연보다는 노동이지요. 기질이나 체질이 그래요. 물론 노동 자체가 목적일 리는 없죠. 수단일 뿐이니까. 사실 귀농 준비부터 소홀했던 것 같아요. 따라서 뜻대로 사업이 진척되지 않았지만 이게 다 성과가 발생하기 직전의 과정이거니, 그런 생각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새로 태어난 ‘무네미농장’
그는 어쩌다 귀농한 사람이 아니다.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농사로 구현하겠다는 또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후미진 산속에 들어왔다. 모든 기량과 경험과 뚝심을 쏟아 농업 경영인으로 부상하겠다는 신념을 스스로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붓고 있다. 조경수로 쓴맛을 봤지만 쓴맛 안엔 보약이 들어 있는 법. 그는 혼선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콘셉트를 고안했다. 다목적 관광농원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간 것. 현재 그의 농원에선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갖가지 나물을 재배해 가공 판매를 하며, 수영장이 있는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휴양객들을 불러들인다. 농사 체험, 별보기 체험, 계곡 트레킹, 잔디밭 웨딩, 동아리 워크숍 등등 각종 프로그램과 시설물들을 구비해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 그간의 총 투자비용이 30억 원 이상이란다.
“투자금은 자체 조달했어요.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동산을 정리해 확보한 자산이었죠. 만약에 자산이 부족했다면, 부채를 얻어 썼다면, 이미 망가졌겠죠.”
“귀농지의 특산 작물을 재배하는 게 귀농 성공의 한 가지 비결이라고들 합니다. 이 지역은 고랭지 배추의 주산지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많다고 알려졌고요. 배추 농사엔 관심 없었을까?”
“고랭지 채소 농사로 고소득이 가능한 건 분명합니다. 이 마을 배추 농가들이 보통 연평균 1억 원쯤의 매출에 순소득 5000만 원 정도를 기록하더군요. 홍천군 전체 농가 평균 매출 500만 원에 비하면 압도적인 금액이죠. 저는 조경수 외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설령 배추 농사에 뛰어들었다 해도 실패했을 수 있죠.”
“왜죠? 불굴의 투지. 당신에게선 그런 게 엿보이는데.”
“직장생활만 했던 사람이잖아요. 내 안엔 뛰어난 적응력이 있다, 그런 착각 속에 귀농을 했어요. 알고 보면 등신이라는 거.(웃음) 고랭지 채소 농부들, 이분들 참 대단합니다. 고도의 집중력, 냉철한 상인정신, 생활상의 모든 움직임이 이윤과 관련돼 돌아가더라고요.”
그도 한동안 농사에 주력했다. 조경수 사업의 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엄나무, 마가목, 오미자 등 가장 일손이 적게 드는 작물들을 재배했다. 그러나 이 역시 헛수고. 소득이 되질 않더라는 거다. 무엇보다 유통 루트를 발굴하기가 어려웠다지. 그렇게 농사에서 다시 빙벽을 만났던 그는 이후 관광농원 조성에 전력투구, 근래에 근사한 복합 농원 구축을 완료했다. 그러나 수익구조는 여전히 불안하다. 해서, 지금도 몇몇 나물류를 재배해 가공 판매한다. 이런 그가 농업을 바라보는 눈은 지극히 신중하다. 농사란 냉혈의 세계라는 인식에서겠지.
“귀농하려는 분에게, 부디 충분한 준비를 통해 농사 물정과 실력을 비축한 뒤 본격 농사에 뛰어들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거주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는 건 그나마 현명한 선택이라 말하고 싶고요. 유통망 개척의 수고를 덜 수 있고, 재배 기법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가장 좋은 건 농사를 아예 짓지 않는 겁니다.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니까. 특히 자연주의 농법은 100% 망합니다. 그 위험한 모험을 하겠다는 사람을 보면 저는 뜯어말려야겠죠.”
“이 농원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데다 멋진 시설물들이 즐비해 호감을 자아내요. 그러나 시련은 여전한 거예요? 문제가 어디에 있죠?”
“홍보도 아직 미흡하지만, 상당히 외진 산기슭이라 가볍게 접근하기 어렵다고들 느끼는 것 같아요. 강원도 오지 특유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이 길게 이어지니까. 그러나 낙관합니다. 특유의 농업 비즈니스 모델로 부상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그래도 시퍼런 꿈 안고 달려가겠다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갈망과 갈증. 사람은 다들 그런 걸 속에 두고 산다. 하지만 선한 믿음이 있는 한, 게임은 차라리 스릴 있게 계속된다.
“사업 성취를 위해 몰두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를 놓치기 쉽죠.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죠?”
“오락 삼아 기타를 치지만 사실 정서적 만족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에요.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과 가까워지진 않더라고요. 바람이 나무숲을 흔들 때나 계절이 바뀔 때 잠시 잠깐 자연의 존재를 느끼는 정도에 불과해요.”
“귀농했으나 도시를 향한 심한 향수에 젖어 사는 이들도 있더군요. 도시의 휘황한 야경이나 파도 같은 인파 속에 있을 때 오히려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사회적 동물이죠.”
“도시의 흥청거림, 텁텁한 공기, 생맥주집에서의 대화,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 이런 것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도시일까, 자연일까? 이는 단정 짓기 어려운 문제예요.”
적막한 자연에 때로 외로운 심사를 느끼는 모양이다. 오랜 로망이었던 귀농을 위해 가차없는 질주로 산골에 들어왔지만, 만사가 술술 풀리기는커녕 착오와 장애로 점철된 시간들. 쓸쓸한 감회를 피할 수 있으랴. 인간관계의 헐거움과 얕음에서도 그는 시골생활의 애환을 느낀다.
“깊은 산골에 살다 보니 도시와 접촉하기 어렵고 읍 소재지조차 멀어 불편이 많더라고요. 무엇보다 교류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폐단이죠. 그저 마을 농부들과 농사 얘기를 나누는 정도니까. 의미 있는 소통에 관한 허기, 고립감, 공허감, 이런 게 달라붙는 겁니다.”
“다정한 벗 하나, 따뜻한 커피와 음악, 잘 익은 술 한 잔, 이런 게 곁에 있다면 안도할 만한 생활이겠죠. 특별한 이유 없는 행복감이 그런 것에서도 나오니까. 이건 너무 소박한가?”
“동호인들과 음악회도 열고, 저 나름대로 친선을 즐기는 면이 있긴 해요. 그러나 사실 여유시간이라는 게 없어요. 일이 워낙 많기도 하지만, 체질상 일을 안 하면 우울해지고 몸도 아프더라고요. 일종의 강박증도 있어요. 보람 있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 조금치의 시간 낭비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런 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생각 하나에 집중하며 사는 겁니다. 너무 속물적인가요?(웃음)”
속물 플러스 미물. 인간 안에 그런 성분을 집어넣어 디자인한 조물주의 계략에 누가 삿대질할 수 있으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 그러나 기어이 뜻을 이루려 발버둥치는 게 또한 인생사. 예외 없이 누구나 그렇듯, 그도 트랙 위에 선 경주마다.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는.
◇ 문기운 씨가 주는 귀농 Tip ◇
•경관만을 추구해 터를 구하지 마라. 나만의 왕국을 세울 듯이 외진 골짜기로 들어가 살다보면 외롭고 불편해진다. 그런 터는 농사에도 금물이다. 생산성이 낮은 비탈이기 십상이어서다. 약간 비싸더라도 반듯한 농지를 매입하자.
•강원도 고원지구로 귀농할 경우엔 고랭지 채소 농사가 유망하다. 제반 조건에 최적화된 작물이라 다른 농사보다 경제성이 높다. 그러나 투기성 다분한 재배 풍토를 유념해야 한다.
•허영과 허세에 찬 농사를 짓다가 파산하는 사례가 많다.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점검, 과욕 없는 규모를 설정하라.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으로 흉작을 볼 수 있는 게 농사라는 인식도 철저해야 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A(89·남) 씨는 1970년대에 회사를 설립해 연평균 매출액이 2000억 원가량 되는 탄탄한 중견기업으로 키워냈다. A 씨는 형식적으로 아직 회사 대표이사로 등재되어 있지만, 건강 문제로 6여 년 전부터 실질적인 경영은 사내이사인 장남 B 씨가 담당하고 있다. A 씨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고, 평생을 바친 회사가 자신이 은퇴한 뒤에도 잘 운영되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기업을 운영했던 지인들로부터, 높은 증여세와 상속세 때문에 가업승계를 포기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A씨는
가업을 승계한다면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걱정이 많다.
상속세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으로 높다. 상속세 최고세율인 50%에 더해, 대기업의 경우는 최대주주 할증까지 적용돼 65%까지 세율이 치솟는다. 성공적인 가업승계는 상속세와 증여세를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전문적인 세법 지식을 지닌 회계사 또는 세무사라 해도, 상속세와 증여세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다. 상속세와 증여세의 주된 타깃인 고액 자산가들은 세금을 줄이기 위해 늘 새로운 방법을 찾아왔지만, 과세관청이 그에 맞춰 세법을 개정하거나 제도를 보완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가업승계를 위한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단계적으로 이행하면 합법적으로 세금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 있기 때문에 미리 포기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IBK경제연구소의 ‘우리나라 가업승계 현황분석(2019)’에 따르면, 창업자가 CEO인 중견·중소기업 5만1256개사 중 CEO가 60세 이상인 잠재적 가업승계 기업은 1만7021개사로 약 33.2%에 달한다. 만약 구체적인 가업승계 대책이 수립되지 않으면 경영권 확보에 필요한 주식 이전이 어려워져 후계자가 회사를 물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 또 가업승계가 이루어질 때 부과되는 막대한 세금 때문에 회사의 주요 재산을 헐값에 팔아버리거나 승계를 포기하는 일까지 생길 수 있다.
가업승계의 첫걸음은 기업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종업원 수와 현금흐름, 리스크와 전망, 보유 주식, 개인 명의의 부동산과 부채, 후계자의 경영 소질, 소유 주식과 경제적 능력, 예상 상속세와 증여세 액수 및 이를 부담할 수 있는 현금 등의 자산,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계자 외 가족들과의 분쟁 가능성 등을 살펴봐야 한다.
현황을 살펴본 다음에는, 아들딸 등 친족에게 회사를 물려줄 것인지, 전문 경영인 등 외부 후계자에게 승계할 것인지, 기업인수 또는 합병 등을 통해 제3자에게 매각할 것인지 등을 결정해야 한다.
장남에게 물려주고 싶은 A 씨의 사례처럼 친족에게 회사를 승계하기로 결정했다면, 다른 후계자 후보들, 회사 임직원들, 거래처 등 기업 경영과 관련된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이들에게 경영자의 결단을 설명하는 등 적극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가족 간 갈등이 생기면 상속 분쟁, 유류분 분쟁 등으로 이어져 가업승계가 복잡해지고 가족관계가 해체되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
그다음으로 들여다봐야 할 부분은 소유권과 경영권 이전 절차다. 이 시점에서는 절세 전략이 가장 중요하다. 후계자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세금이 부과된다면 기업 유지가 어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업승계를 위한 절세 방안에는 중·장기적 전략과 단기적 전략이 있다. 중·장기적 절세 방안의 가장 일반적인 예는, 1세대가 오랜 기간을 두고 2세대에게 부동산이나 주식, 현금 등을 증여하는 것이다. 사전에 주식 등을 증여하지 않고 회사가 크게 성장한 뒤에 증여하면 증여세 부담 역시 커지기 때문이다. 가업승계를 목적으로 가업의 주식 또는 출자지분(100억 원 한도)을 증여받을 때는, 일정한 조건과 범위에서 증여세를 10%(과세표준 30억 원 초과금액에 대해서는 20%)로 낮춰주는 과세특례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업 구조조정을 통한 중·장기적 절세 방안도 있다. 기업 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마친 후 향후 성장성과 수익성이 높은 사업을 분리해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고 그 회사를 후계자에게 증여하는 방법이다. 이밖에 후계자가 세운 별도 법인과 기존 회사를 합병하는 방법,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방법, 신설회사를 세우고 기업공개를 기대하는 제3자 투자를 받는 방법, 현물출자와 유상증자 등을 거쳐 국내외 제3자에게 매각하는 방법 등이 있다.
한편 가업승계와 관련한 단기적인 절세 방안으로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에 따른 가업상속공제가 있다. 예컨대 매출액 3000억 원 미만의 중견기업으로서 오랜 기간 피상속인이 경영한 기업은, 그 기간에 따라 최대 500억 원 상당의 가업상속재산에 대해 공제를 받을 수 있다.
오늘날 가업승계는 단순한 부의 대물림이 아니다. 기업의 존속, 장인정신 계승, 고용시장 안정과 같이 국가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사안이다. 가업승계를 잘 연구하고 미리부터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김성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2002년부터 판사로 활동. 2015년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한정후견개시사건을 담당했고, 2018년부터 2019년 2월까지는 상속재산분할사건, 이혼과 재산분할 등에 관한 가사항소사건을 담당하는 합의부 재판장을 역임했다. 2019년부터 법무법인 율촌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상속, 후견, 가사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