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인생에 장마가 지고, 눈이 올 때마다 점점 깊숙하게 땅속에 처박힌다. 하지만 실종된 꿈을 찾지 않으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꿈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찬찬히 살펴보면 꿈이 보인다. 이렇게 자신을 후벼 파서 꿈을 찾다 보면 옵션이 생기고, 다채롭고 재미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 인생을 한 번 글로 서봤다.
◇꿈의 발원지
초등학교 때 신작로로 등ㆍ하교했다. 역고개를 넘어 역말다리를 건너 다시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즐비한 읍내를 지나 산 아래 있는 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당시 신작로 양옆으로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끔 트럭이 지나갈 땐 먼지가 풀풀 날리어 사람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충북 괴산군이 고향이다. 도서관은 교과서에서 나오는 그림에서 봤을 정도의 촌이다. 다행스럽게 학교와 집의 중간 정도에 살는 임명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명희 아버지는 필자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동화책과 위인전을 전집으로 사놓았다. 그 집은 여러 형제가 있지만 그 누구도 책을 즐겨 읽지 않았다. 하굣길이면 늘 친구 집에 들러 책을 팠다. 처음 ‘알프스 소녀’를 읽고 하이디에 빠진 후로 괴산의 하이디라고 생각했다. 책에 흠뻑 빠져 전집을 몇 번씩 읽었다.
그 시간은 자신만의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명희는 깔깔거리고, 팔짝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필자는 마루 끝 구석에 앉아 고개가 아프도록 책을 읽었다. 해가 저물고, 그 집 식구들 저녁상이 들어올 때까지도 죽치고 읽었다. 천국이었다. 명희 어머니가 “영희야, 이제 해가 저물었다. 집에 가야지”라고 해야 그제야 일어나 땅거미 내린 1.5㎞의 신작로를 마치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듯 사뿐거리며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책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발견, 다시 꿈꾸다
늘 필자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때는 역사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든 것이 다르게 흘러갔다. 매우 실망했고, 무기력해졌다.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가도 되고 싶었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작가 꿈을 꾼 적도 있었으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 아무 생각 없는 주부로 살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작가로서 자서전 쓰기 전문가로 나서게 되었다. 작가라는 토대 위에 ‘자서전 쓰기 전문가’라는 건물을 올린 것이다. 또 그것은 재능이라는 골조로 지어졌고 취향이라는 마감재로 모양을 갖추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은 특별함을 준다. 삶 속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진솔하고, 진실한 만큼 자신을 대신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다. 또 세월의 경험이 축적돼야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채워야 할 게 많고 더 부족함을 느낄 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 보면 꿈이 구체화하게 된다. 많은 사람과 필자가 자서전을 쓰며 받았던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필자의 어릴 적 꿈은 여장군이었다. 군인을 거느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또 작가도 되고 싶었다. 군인이 되고 싶은 것이 겉 꿈이었다면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속 꿈이다. 첫 번째 꿈은 이미 사라졌고, 두 번째 꿈은 얼마든지 꿀 수 있다. 또 어릴 때 그림도 그리고 싶었는데 매주 수요일 밤이면 누드크로키를 한다. 그 시간은 행복하다. 지금은 글쓰기 강사와 집필, 그림에 열중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냥 별이다. 그래서 필자는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더 나가보자. “내 꿈은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화법으로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꿈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내 몸이 체득해서 토해 내는 것이다. 또한 찾는 것도, 쇼핑하는 것도 아닌 매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와집 맏손녀
1956년 음력 섣달 보름, 밝게 비추는 달 아래서 저녁 먹고 한참 후에 필자는 태어났다. 오봉산 봉우리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산 아래, 앞에는 동진천이 흐르고,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에 첫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쁨이었다.
조부모, 부모, 고모, 일하는 아재들, 부엌에 밥하는 언니, 애 보는 사람 등 대식구가 모여 살았다. 애보는 사람이 필요했던 이유는 필자의 형제가 칠 형제여서다. 필자 느낌으론 학교만 다녀오면 갓난아기의 울음이 들린 것 같았다. 가방을 마루에 던진 채 심통이 나서 뒤 곁으로 확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 기억
색동저고리를 입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추운 봄에 역고개를 넘어 학교에 가고 있자니 “주머니에 손 넣고 가지 마라” 하면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채 쌩하고 눈길을 지났던 것도 생각난다. 필자는 발을 동동거리며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아침이면 학용품 살 돈을 달랬다. 아버지는 잔돈이 없으면 읍내까지 가서 바꿔다 주었다. 가계부는 아버지가 기록했다. 필자에게는 별말이 없었고 필자도 어려워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셔널라디오를 사왔다. 저녁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모여들었다. 필자는 라디오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다.
3학년 때는 아버지가 네모난 빨간 비닐 책가방과 쑥색의 슬리퍼를 사 왔다. 슬리퍼의 뒤축에 자갈이 수시로 박혀 그것을 빼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밤색 코르덴 바지를 뜯어 타이트스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집에 싱거 미싱이 있었고, 아버지도 미싱 기술이 있었다.
6학년 때는 주름치마에 스트라이프 무늬의 봄 스웨터를 사 주기도 했다. 그걸 입고 서울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가서 수세식 변소를 처음 사용해 보았다. 사용 방법을 몰라 이곳저곳을 눌러 보고 물이 쏴 나오자 아이들과 함께 놀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양복 기술을 배웠다. 이태 정도 기술을 배우다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주농고와 충북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산림청에 근무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면 대가 끊기게 되니 산속에 숨어 있었다. 할머니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6세 무렵, 무를 묻어 두었던 구덩이에 빠져 숨졌다. 하나 남은 아들을 애지중지하느라 쌀 두 가마니를 들여 군대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별 할 일이 없어서 책을 뒤적이거나 바깥마당 한쪽에 돼지를 길렀다. 누에와, 양봉도 했다. 잉크를 찍어 노트에 뭔가를 쓰는 것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필체가 좋았는데, 필자 보고 “글씨가 그게 무어냐”며 자주 타박하였다. 농사를 적극적으로 해 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고향에서는 조부모가 중농,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 겉으로 보기에는 부러울 게 없었다. 다만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패가 되어 어머니를 나무라곤 했는데 그게 유일한 분란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옆구리에 보따리를 끼고 나갔다가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필자는 처음에는 울고불고했는데 나중에는 외면해 버렸다.
◇그 오해와 진실
아들은 남이다. 고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아내 편을 든다고 필자는 당장에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 필자 남편은 부모 편만 들고 효자이더니, 이제 아들은 마누라 편만 드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난 그래서 불행해’ 라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해 진다. 그래서 남편이 부모편만 들었을 때 마음이 상했던 걸 떠올렸다. 그 속상함을 며느리가 가져야 하는 거는 더 안 될 일이다. 남편은 자기 부모에게 잘했으니 효자였고, 아들은 자기 부인에게 잘하니 괜찮다고 마음 다잡았다.
◇둘째 아들 1
필자는 둘째 아들은 스스로 자라게 키웠다. 그래서 이 아이는 매우 주체적이다. 유치원 때의 일이다. 봄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캐 오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은 한두 개만 가지고 왔으나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질질 끌고 왔다. 물론 주인아저씨가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갖고 가라고 했지만 가져올 수도 있고, 안 가져올 수도 있는 그 순간 아들은 이렇게 스스로 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모든 학용품도 스스로 선택해서 사도록 했다. “친구들은 어떤 회사 물건을 사 왔니”,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이 괜찮아 보이니”라고 한 뒤 돈을 주었다. 그랬더니 물건을 잘 골라왔다.
학교에서 폐휴지를 가져오라고 하면 위층에 사는 외동아이는 그 엄마가 나서서 난리다. 학교까지 날라다 주고, 복도가 시끄럽게 한바탕 소동이다. 아들은 만약 집에 신문지가 없으면 경비아저씨한테 사정이라도 해서 지하에 갖다 둔 신문지를 바퀴 달린 가방에 넣고 혼자 끙끙대며 끌고 간다. 애처롭지만 그냥 두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려고 할 때도 “엄마, 보이스카우트 해보고 싶어”라며 “보이스카우트는 단복 입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배우는 첫걸음”이라며 필자한테 설명했다. 그래서 “그래 그럼 한번 해 봐”라고 했더니 아들은 3년 동안 스스로 열심히 했다. 운동장에서 1박 2일 야영훈련 때도 필요한 것 외에는 스스로 물건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끝난 후 아이들이 버리고 간 물건 중 먹을 만한 것은 전부 집으로 한 보따리를 가져왔다. 대견했다.
5학년 때는 자전거를 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자전거를 요구하면서 시장조사 뒤 비교 분석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한술 더 떠 “네가 가서 사와라”라며 13만원을 주었다. 그랬더니 서비스품목까지 모두 챙겨왔다. 자기가 골라온 자전거라 그런지 애착을 가졌다.
6학년이 끝나고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스카우트활동을 잘했다고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런데 담임교사가 “진우 어머니세요. 어쩜 학교를 안 찾아오세요. 원래 진우가 단장감인데 할 수 없이 학교를 자주 오는 어머니 중의 아들을 단장으로 시켰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네 괜찮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란 대답만 했다.
중고생이 되면 학부모들은 학교 앞에까지 자가용을 끌고 가서 모두 픽업하느라 난리다. 그러나 필자는 가지 않았다. 버스 네 정거장 거리였다. 혼자서 해결하라고 했다. 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잘못하더라도 아이들과 다투더라도 혼자 해결하도록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는 하고 있었다.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학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칠판을 지우고 청소를 해 놓으면 학원비를 면제해 주겠다고 하니 그 일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근면, 성실성까지 있는 아이다.
아들이 빠져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게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얼마나 몰두하든지 ‘어주 구리, 이것 봐라’ 했다. 이때는 필자도 속이 좀 탔다. 전국게임회장이 되어 게임머니를 주무를 땐 특히 그랬다, 그러나 필자는 참았다, 되레 ‘어 이놈 봐라, 사업하면 잘하겠네’고 오히려 좋게 봐줬다. 더구나 대학 가서는 거의 안 했다. 안심됐다. 하지만 결혼하고 게임을 다시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며느리가 싫어하니 담배와 게임을 끊었다. 아마 지금은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가서도 후배와 선배, 교수들과의 관계를 잘 맺었다. 자기한테 자꾸 일을 맡긴다고 투덜댄다. 일을 맡기면 잘해낼 뿐 아니라 믿음이 가서 일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완급을 조절해 보라’ 고 조언하는 게 전부다. 사실은 필자도 큰아들한테 보다는 작은아들한테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된다.
군대에 복무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럴 때만 대꾸를 했다.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신 어머니로서 아들을 향한 기도를 늘 했다. 어머니가 올리는 기도가 대단히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운동을 시작한 지 15년 되었지만 도복을 입고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국체대 체육관에 가 보았다, 열심히 군인으로 생활하고 이다음에 퇴직하면 운동을 보급하면서 살아갈 예정. 자기의 인생목표가 뚜렷했다
결혼을 한 지금도 스스로 잘 헤쳐 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다. 상의하거나 어떤 사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 진지한 의견을 교환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될 수 있으면 간섭을 하지 않으려 매사 애를 쓴다.
◇밤새워 할 부부이야기
찰칵찰칵 엿장수 가위 소리에 골목이 떠들썩했다. 남루한 차림의 어른과 아이들이 그 옆에서 뭔가 호기심에 찬 눈을 굴리고 있다. 엿판을 실은 손수례 아래에는 구멍 뚫린 솥단지, 고무신짝, 철사 토막까지 구경거리가 많았다. 단조로운 시골 마을에 엿장수의 등장은 일종의 문화행사였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기웃기웃. 무쇠 가위를 엿에 대고 치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에 놀러 갔는데 엿장수 가위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엿가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웃집 여인은 대뜸 "그 가위 마음에 들면 줄까" 한다. 말이 바뀔까 봐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가위를 받아들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어떤 선물보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 퇴근 후 남편이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 가위 어디서 가져 왔나. 당장 버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닌가. . '엿장수 한 조상이 있나 봐, 왜 그래'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그냥 “구질구질해서 싫다”는 것이었다. 개포주공아파트 4층, 지금은 분리수거를 하지만 그 당시는 쓰레기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그냥 투하했다. '쨍그랑'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오메, 아까운 엿가위, 지금도 가위가 눈앞을 아른거린다.
필자 집에는 골동품과 민속품이 즐비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좋으니까 모든 것이다. 심란한 마음이 들 때 먼지를 닦으면서 만지작거리면 얼마나 행복한지. 며칠 전 일이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더니 "이사를 하게 되면 저런 것들도 가져갈 거야"라고 민속품을 삿대질하면서 다그쳐 묻는다. 필자는 이에 “물론이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방으로 슬슬 가더니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 부부는 잘해 보려고 하거나, 좀 더 친하게 지내보려 노력하면 할수록 결국은 티격태격 싸운다. 의지와 사고방식이 참 많이 다르다.
어느 날, 무릎을 탁 쳤다. ‘본처가 아닌 첩처럼 살자’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자는 달라졌다. 이야기 중에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면 ‘아니 여보, 왜 이리 졸리지’ 핑계를 대며 안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불을 켜 놓고, 할 일을 하든가 잠을 청하게 되었다.
필자는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한다. ‘그랬군, 이제 고생 끝났네, 대단해요’ 하는 추임새까지 넣어주면서 말이다. ‘미주알고주알’ 해봐야 누더기가 되기에 십상임을 몸의 체득을 통해 알고 있다.
◇인수봉 정상에 오르다
인수봉을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북한산 바위를 오르는 연습을 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동호회에 참가해 원효길, 우정1ㆍ2길. 인수AㆍB길에서 바위에 손을 짚어 기어올랐다. 한 발자국만 헛디디면 그대로 가는 거다. 의도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뭐라고 말할 수 있다.
주요 봉우리인 인수봉, 백운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불렸다. 인수봉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 고양시에 걸쳐 있는 삼각산 세 봉우리 가운데 하나. 세 봉우리 모두 산 정상에 바위 암반이 그대로 노출된 모양이라 산 아래서 올려다보아도 ,직접 올라도 그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산이다. 특히 인수봉은 81m가 매끄러운 화강암 봉우리다.
필자가 이 봉우리에 도전한 그 날은 눈발이 스산하게 날리며 찬바람이 제법 불었다.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도 있었으나 그냥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물러날 곳은 없다. 그냥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른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이 올라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필자 팀은 산봉우리의 기쁨을 느끼며, 줄에 의지하여 모두 하산했다. 그때 로프 줄에 엉킨 젊은 두 남녀가 줄을 풀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죽음과 삶은 한 끗발 차이다. 사람들은 사고를 보고도 또 올랐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인수봉에 이르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훈련했다. 이 세상에서 줄을 타고 인수봉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에 잊지 못할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필자는 항상 ‘남편은 큰 아들’이란 정신에 충만해 있다. 내내 참고 산다. 어떻게 필자 마음대로만 하고 살겠는가. 어찌 할 말을 다하고 살겠나. 요상스러운 것은 저녁이면 남편이 그리워지고 올 때를 기다린다. 소통하며 친하게 지내야 한다.
하지만 남편은 필자의 이런 ‘소통 모드‘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필자가 있는 맘 없는 맘 잔뜩 먹고 잘 지내려 가까이 가면 여지없이 어기짱을 놓는다. 반드시 싸우게 된다. 오히려 데면데면 지내야 별 탈 없다. 너무 오랫동안 달라진 서로의 입장이 안타깝다.
특히 남편은 술을 먹고 오는 날이 문제다. 이런 날은 자기의 의견을 말한다. 평소에 맑은 정신으로 이야기하면 좋겠다. 그리고 자기 주장만 한다. 떼쓰는 듯 기분 잡치는 말만 한다. 말할 때 잘난 척을 하고 남편을 무시했단다. 그런 문제가 대화를 못 하게 한듯하다. ‘당신한테 말해봤자’ 라는 생각이 들며, 이야기하기가 겁난다고 했다. 그때 서로 솔직한 대화를 했어야 했다. “당신한테 이야기해봐야 안 통해” 끝말을 쏟아 놓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밤에 베개를 껴안고, 마루를 오가며, 며칠을 힘들어 했다. 밤 2시에 아파트 마당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선생님, 한 밤중에 돌아다니시데요.” 이런 말을 경비원한테 듣기도 했다. 가슴에 통증을 올 때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와 다툼이 있으면 기운이 지치면서도 대항해 보려고 했다. 서로 대화의 기법이 달랐다. 지금은 오로지 필자 마음 아프지 않게 살아야 한다. 이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하다.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다툼이 시작되려고 하면 어느 시점에서 “아이 왜 이리 졸려, 자야겠네.” 하면서 일단 방으로 들어가는 지혜가 생겼다. 내게 강 같은 평화를 주소서. 암시를 한다. 잠들기 전 화난 마음으로 잠들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되었다.
남편에게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한테 이야기해 봤자 바뀌지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내 생각만이 옳다는 생각에 사로 집히지 말자. 오로지 일에 열중하는 남편, 나와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 남편에 대한 미움이 컸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 낫다. 옆집 아저씨다. 그런데 그 아저씨 참 착하다. 나한테 용돈을 주지 않는가. 캄캄한 밤이 오면 기다릴 사람이 있다. 서성거리는 그림자라도 좋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참는다.
지금은 각자 자신이 하는 일을 격려하며 지내고 있다. 그의 사업장에 찾아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는다. 그런데 그는 필자가 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지금껏 살아보니 남편과 필자는 많이 다르다. 그는 현실적이고 필자는 감성적인 편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겠다. 솔직하게 표현하고 공유해야겠다. 여러 번을 반복해서 어깃장 놓는 소리를 해도 ‘그랬군요.’ 동조를 해준다.
‘내가 전생에 진 빚 갚겠습니다.’
‘남편 밥은 앉아서 먹고, 자식 밥은 서서 먹는다.’ 이 두 구절로 참는다.
퇴직하고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면 세상을 잘못 산 것처럼 자기비하에 빠져든다. 아내의 눈치도 보이고 아내도 친구들로부터 ‘요즘 너 남편 뭘 해?’ 하는 소리에 답변이 궁해진다. 아파트 경비도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이 시간에 이 사람이 왜?’ 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불러서 함께 놀러 다닐 만만한 친구도 없다. 노인정이나 경로당에 가기는 죽기보다 싫다. 이것이 5,6십 세 퇴직자의 현실이다.
등산이나 낚시로 소일 해보려하지만 주말에 어렵게 시간 내서 가는 것이 취미생활이지 매일 직업처럼 등산이나 낚시 다니는 것은 낭만이 아니다. 어느 산에 가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아무리 큰 물고기를 잡아도 어디 자랑할 곳도 없다 이내 이런 취미가 시들해진다. 무엇보다 나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퇴직이라는 형벌로 시베리아 벌판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투명인간처럼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것이 서러움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대다수 직장 은퇴자들은 직장에서 누구와 더불어 사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 어려서는 가족의 관심과 사랑 속에 커왔고 학교, 직장생활도 사람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다. 그러나 50이 넘어 퇴직의 대열에 휩쓸리면 더 이상 나는 어디가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가족이 모이는 초대받는 자리에도 어른으로써 반짝 관심만 받다가 이내 손자손녀에게 주인공 자리를 물려줘야한다.
남자들이 가족을 부양하기위해서 곁눈질하지 않고 너무 직장에만 올인 해서 변변한 취미하나 만들지 못한 잘못이다. 이런 변화에 익숙하지 않아 견디기 어렵도록 외로워하고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비관하거나 신세 한탄을 하면서 술이나 도박에 빠져들고 외도나 낭비벽으로 심신이 타락의 늪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고독이 나를 강하게 키운다는 신념을 갖고 고독에 맞서야 한다. 고독에 당당히 맞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퇴직 후 젖은 낙엽처럼 아내에게 딱 달라붙어서 아내의 숨통을 조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혼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키우는 것이 고독력이다. 고독력은 숨 오래참기처럼 가만히 오래 견디는 것이 아니다. 고독력은 혼자 잘 지내는 법이고 연습이 필요하다. 내 친구 한사람은 퇴직 후 자신의 적성은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사진을 찍겠다고 100만원이 훌쩍 넘는 카메라를 사고 동네 사진 강좌도 등록하여 열심히 배웠다. 찍은 사진을 편집도 하여 컴퓨터에 정리하는 실력까지는 도달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진을 보자는 사람이 없다. 보여줄 사람도 없고 당연히 평을 해주는 사람도 없다. 시간에 비례하여 열정이 식어버리고 카메라는 먼지만 덮어쓰고 있다. 친구는 사진을 이용하여 뭘 해보겠다는 청사진이 미흡했다.
중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려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생활에 필요한 기초 공부를 잘 해두어야 한다, 필연코 오는 퇴직이나 은퇴 후의 무었을 할 것인가 미리 준비해야한다. 고독력을 키우고 혼자 일하고 노는 법을 터득해야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과 같이 혼자여서 장점도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공부하면 집중하기 어렵다. 남들과 대화하면서 사색에 빠져들지 못한다. 고독은 우리 자신이 집중해서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성철스님은 생전에 파계사에서 철조망을 치고 8년의 세월을 장좌불와(長坐不臥) 생활을 했다. 피아니스트는 화려한 무대를 위해 혼자서 수 만 번의 건반을 두드린다. 사진작가 변용도 선생은 4년간 무려 30만장의 사진을 혼자서 찍으면서 사진작가로 우뚝 섰다. 영어를 잘 하려면 수 백 번의 혼자 하는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 이름난 선수는 남들이 모르는 혼자만의 피눈물 나는 고독한 연습이 있었다. 무엇이든 적성에 맞는 목표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한다면 성공의 축배까지는 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는 있다.
새 출발을 하기위한 고독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첫째로 나는 법을 준수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늘 주문한다. 과거 회사 대표를 했고 대학 수석 입학 따위는 다 흘러간 일이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내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면 할수록 주위에서 멀어질 뿐이고 자신의 지금 처지에 비관만 든다. 두 번째로 나는 건강해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수명100세 시대에 5,6십대는 이제 겨우 반환점을 돌았을 뿐이다. 현대는 근육질의 노동력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아직은 싱싱한 내 육체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내 두뇌는 새로운 것을 받아드릴 여유가 있고 누구와도 대화가 가능한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배우는데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좀 더 노력하면 뒤처질 이유가 없다는 자신감이있어야 한다. 넷째로 나는 남의 시선에 별로 개의치 않고 마이웨이를 외친다. 그렇다하여 남으로 부터 지탄을 받을 일을 할 사람은 아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다. 원칙대로 양심껏 사는 것이 행복이다.
은퇴 전에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기위해 자신의 처지와 적성을 잘 알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를 적고 가능한 것부터 실천에 옮긴다. 필자는 육체적인 활동이 좋다. 테니스도하고 마라톤도 한다. 일하는 젊은이들과 부딪히는 것이 좋아서 틈틈이 건설현장에서도 일한다. 현장은 언제나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여기서 나를 지키기 위한 긴장이 즐겁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내가 좋아 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독서마라톤 대회에도 출전하면서 일 년에 200여권의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움이다. 읽고 느끼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글로서 재탄생을 시킨다.
남편의 밥 때문에 아내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도 싫다. 혼자서 밥하고 빨래해야 할 때는 직접가 하면 된다. 고독이 사람을 강하게 키운다는 신념을 가지면 인생이 더 자유롭고 여유로워 진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고 고독력으로 즐기며 발전시켜야 노후가 보람된다.
시니어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일’이다. 샐러리맨 사회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에서 시니어가 되어 마침내 만나게 되는 ‘은퇴’라는 단어에는 인생의 패배자라는 좌절감과 괴리감을 심어주게 만드는 힘마저 담겨 있다. 수많은 시니어가 은퇴 이후의 삶을 꿈꾸면서 계속해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은퇴 후 다시 일을 하는 어려움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경영의 세계에서 인생 2막을 열어가고 있는 김진뢰(金鎭雷·63) 카스인바이오 부사장을 만나 그 열정을 찾아본다.
화려하고 성공적이었던 과거를 가진 시니어일수록 은퇴 이후의 직업 설정에서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과거를 생각하면 선택폭이 줄어든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과 함께 두려움도 있다. 주변의 걱정 어린 얘기들이 실제로도 벌어지는 것 아닐까. 이런저런 고민들이 시니어들에게 새로운 인생 2막을 여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다.
화장품이 2막 인생 여는 전환점
“쉬운 일이 어딨어요. 다 발품 팔아야 되는 일이지.”
20대 청년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 그러나 이 말을 한 사람은 예순두 살의 시니어다. 바로 카스인바이오에서 부사장을 맡고 있는 김진뢰씨.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만든 2막 인생에 대해 다분히 생활인적인 감수성을 보여줬다.
그는 과거 삼성생명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상무이사까지 올라갔으며 삼성생명의 자회사였던 인피언컨설팅의 사장을 지내고 퇴직한, 성공적인 대기업형 인재였다. 그랬던 그가 근무하고 있는 카스인바이오는 사원수 20여 명 정도의 작은 회사로, 김 부사장은 화장품인 SRB 제품군을 맡고 있다. 고농도 효소 처리한 미강(현미에서 백미로 정미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쌀겨와 깔눈으로 이루어진 속껍질 가루)을 활용해 피부 자극도를 낮춘 ‘SRB(Stabilized Rice Bran)’는 사용해 본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매니악한 유저층을 확장시키고 있는 중이다.
종전에는 쌀겨 성분자체에서 산화가 쉽게 일어나는 특성 때문에 최근까지 화장품에 적절히 활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SRB 환한 쌀뜨물 효소 세안제는 레티놀과 감마오리자놀, 비타민 B군과 비타민 E, 비오틴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이에 따라 풍부한 보습과 영양공급, 브라이트닝 효과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잘나가던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까지 했는데 갑자기 화장품 판매업으로 업종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다지는 이유가 참 궁금했다.
그렇다. 아무리 호평을 받는 제품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근무했던 삼성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비교하면 현재 근무하고 있는 곳은 더없이 작은 중소기업이다. 더군다나 그가 과거에 했던 보험과 현재 하는 유통은 하는 일의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많은 격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그가 자리를 옮길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엔지니어 연구원 출신인 사장이 굉장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에요. 차근차근 회사를 키워온 과정을 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품이 좋았어요. 그래서 확신이 들었죠.”
한국에서의 중소기업 경영, 정말 대단한 일
경영자와 제품에 대한 믿음이 그의 선택을 결정하게 만들었다는 우직한 답변. 그러나 조직의 사이즈가 다르고 하는 일의 종류가 다른 일이었다. 어려움이 없었을 리 없다. 김 부사장은 삼성그룹의 이사에서 중소기업의 부사장이 되어 겪은 어려움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제가 대기업에 오래 있어서 잘 몰랐는데, 요즘은 중소기업을 경영한다는 어려움을 피부로 느낍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시는 분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우선 대기업의 갑질이 너무 심합니다. 상품 소개를 위해 미팅을 갔을 때 살면서 그렇게 푸대접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어요. 넥타이를 안 매고 갔더니 경비실에서부터 차단하더군요. 그나마 삼성 계열사 같은 데는 제가 전직 임원이다 보니 이름 치면 나와서 괜찮았지만…. 현직에 있다 나오면 눈높이를 최대한 낮추지 않으면 적응하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30년간 비즈니스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왔으니 여기에 다른 아이템을 적용해도 될 것이란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어차피 고객을 끌어들여 상품을 판다는 기본적인 원리는 똑같지 않은가.
후배에게 ‘나 아직 얻어먹을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
삼성을 떠난 임원들의 친목 모임 ‘성우회’에 가서도 자신있게 화장품 설명을 하거나 기업체 사업 설명회, 공기업 바자회, 골프 모임 등 하물며 생일파티 판촉물에도 화장품이 들어갈 정도니 김 부사장의 수완과 흡인력은 탁월하다.
어느 날에는 50개들이 화장품 박스를 들고 주차장에서부터 올라가야 하는 일도 있었다. 또, 어느 날에는 물건을 싣고 하루에 200km를 이동한 적도 있었다. 김 부사장은 그날을 다시 일하기 시작한 뒤 가장 힘들었던 날로 기억했다. 하루동안 미팅 장소에 도착해서 자료 보여주고, 샘플 주고, 설명을 반복하기를 수 차례.
“막노동이 따로 없더군요. 그 외에도 제품 홍보를 위해 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 아파트 부녀회, 관리사무소 등등.”
그는 인터뷰 도중 SRB에 관한 다양한 동영상을 보여줬다. 그가 제품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자료들이다. 그가 얼마나 준비된 상태에서 일을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힘들지 않으냐고 물어봤다. 그 말에 그는 “너무 즐겁다”라고 말했다.
“‘이 제품, 좋은 제품이야’라면서 추천해주고 ‘같이 윈윈해보자’라고 말하는 거예요.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시니어가 갖고 있는 노하우가 얼마나 많아요? 그게 사장되고 있어요. 삼성 출신 임원 모임에 나가보면 일하는 분들 수는 한 10% 남짓 되는 거 같아요. 저는 그건 아니다 싶어요. 연봉 몇 억씩 받다가 여기 와선 반도 못 받고 있지만, 제 용돈은 됩니다. 후배들한테는 ‘나 아직 얻어먹을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죠. 지금도 후배나 친구를 만나면 제가 밥을 사요.”
그는 “솔직히 우리 세대가 직장을 나와서 요즘 하는 일이 뭐예요?”라고 되물었다. “산에 가는 거, 골프 치는 거, 당구장 가는 거. 요즘 평일에 종로에 있는 당구장에 가면 한 층을 전부 쓰고 당구대는 70개가 넘어요. 손님들을 보면 60대부터 할아버지들까지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사실 그런 건 주말에도 할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일을 하려면 대기업에 있었다는 자존심을 내려놔야 하는데, 쉽지 않죠.”
김 부사장은 조금만 둘러보면 ‘정말 할 게 많다’라고 말한다. 일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해당될 수 있는 말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김 부사장은 말할 자격이 있다. 자신의 집을 손수 지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삼성에 있던 시절 타워팰리스를 분양받아서 살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커서 미국에 유학을 갔고 그러다보니 가족이라곤 아내와 단 둘인데 50평이 넘는 집에 살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타워팰리스는 세를 놓고 용인에 가지고 있던 땅에 전원주택을 지어서 살기로 했다.
“집을 짓겠다니 제 아는 친구 열이면 열은 다 반대를 하더군요. 차라리 땅을 팔지 그러냐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팔려니 세금이 40%나 됐고 그렇게 세금 내고 땅을 팔자니 차라리 그냥 내가 거기에 집을 지어 사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설계, 감리 등등 직접 진행하여 6개월 동안 집을 지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집에 들어간 부품 종류 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1029개. 견적서를 받아본 그가 한 일은 인터넷에서 각 부품의 가격을 조회한 것이었다. 비용을 줄여 실속 있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덕분에 3.3㎡당 330만원으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가 은퇴 후에도 꾸준하게 일할 수 있는 천성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인생 마지막 목표를 걸고 하는 일
“지금도 제가 참석하는 모임은 35개입니다. 거기서 알고 지내는 지인들의 입소문이 굉장히 도움이 되고 있죠. 처음에는 고생도 많이 했지만 점점 판매가 늘어나니까 재밌어요. 주문도 솔솔 들어오고 있고.”
올해 김 부사장이 계획하고 있는 건 제품 퀄리티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중국 시장 개척과 주부 사원 육성이다.
“소비자보호원이 충북 음성에서 개원식을 할 때 저희 제품을 세트로 구매해서 손님들에게 방문 선물로 사용했어요. 그 입소문과 함께 제품에 대한 긍정적인 검증이 이뤄져서 공정거래위원회 바자회에서도 활용됐죠. 저희 제품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은퇴한 시니어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새로운 세상에 맞닥뜨린 이라면 누구나 두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무모한 일이라고 했지만 과감히 개척한 김 부사장이 갖고 있던 남다른 강점은 그런 모험심과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 아닐까.
“대형 마트 입점을 거절당했을 때, 과거에 보험을 하면서 거절당하던 게 생각나고…. 하지만 보험은 안 보이는 걸 파는 일이잖아요. 지금 하는 건 눈에 보이는 물건이니 자신감이 있죠. 그래서 30년 동안 한 보험 세일즈보다 3년 동안 한 이 일이 더 맘에 들어요.”
낯선 사람과의 인터뷰는 항상 곤욕이다. 사람 만나는게 일인 기자도 이런 사람을 만나기는 흔치 않다. 의도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인터뷰 말미에 “저도 화장품 바꿔볼게요”라고 이실직고할 뻔했다.
겹겹이 쌓인 사람만남 만큼 농익은 열정으로 2막을 펼치는 그에게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 있다. 그의 나머지 시간을 모두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소원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가볼 만한 여행지 100곳’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그곳들 중 30곳을 여행해 봤어요. 그 100곳에 저희 ‘SRB’ 매장을 내는 게 생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나는 아주 작은 것에도 다른 사람보다 매우 행복해하는 사람”이라 말하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한순간 반짝이는 별이 비친다.
두 자녀를 결혼시키고 아내 없이 홀로 사는 김모(72)씨는 서울 구로구에 있는 공시지가 1억5000만원짜리 아파트에 거주하며 아파트경비일을 해 월급 140만원을 받는다.
하지만 김씨 할아버지는 그동안 기초노령연금은 받지 못했다. 재산소득을 고려하지 않아도 정부가 인정한 김씨의 근로소득(월급 140만원-근로소득공제 48만원=92만원)이 기초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는 소득인정액 87만원을 넘었기 때문이다.
김씨가 하반기부터 도입되는 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면 변경된 기초연금 소득인정액 기준을 적용해 계산해야 한다.
6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기초연금 수급자 대상을 결정하는 소득 인정액은 근로소득, 사업소득, 재산소득등을 합산해 결정하는 기초노령연금 수급자 선정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달라진 점은 기존 근로소득공제액 48만원에 추가 30% 공제가 가능하고, 고가자동차와 고가회원권의 재산소득환산율은 5%가 아닌 100%가 적용되며, 무료임차소득은6억원 이상의 자녀 명의 주택에 거주하면 연 0.78%의 소득환산이 적용되는 부분이다.
김씨는 아파트와 경비일로 받는 월급이 재산의 전부이기 때문에 소득 인정액은 {(주택 1억5000원 - 대도시 기준 기본재산공제 1억800만원) × 소득환산율 5% ÷ 12개월} + [(근로소득 140만원 - 근로소득공제48만원) - {(근로소득 140만원-소득공제 48만원)×30%}]=81만9000원이 된다.
이는 2014년 기초연금 단독가구 선정기준액(87만원)에 못 미치는 금액이다.
김씨가 국민연금에 가입한 적이 없다면 그가 받는 기초연금의 금액은 20만원으로 책정되고, 국민연금에 가입했더라도 수령액이 30만원 이하라면 가입기간과 관계없이 20만원을 받을 수 있다.
만약 국민연금이 30만원을 넘었다면 기초연금액은{기준연금액 20만원-(조정계수 2/3×국민연금 가입기간과 연계된 A급여) + 국민연금수급자부가연금액 10만원}의 산식을 적용해 계산한다.
이를 바탕으로 매달 기초노령연금 7만7천440원씩 받았던 박모(70)씨(국민연금 가입기간 13년, 국민연금 49만9천120만원 수령)와 그의 아내 남모(68)씨(국민연금 가입기간 5년, 국민연금 12만1천330만원 수령)의 기초연금액을 계산해보자.
남씨는 가입기간이 10년 미만이라 기초연금을 매달 20만원씩 받을 수 있지만 부부 감액 20%을 적용받아 최종적으로 기초연금액은 16만원이 된다.
민연금공단이 결정하는 김씨의 A급여가 21만원이라고 가정하면 그의 기초연금액은{20만원-(2/3×21만원)+10만원}=16만원이 되며 부부 감액 20%가 적용돼, 최종기초연금액은 12만8천원이 된다.
현재 기초노령연금을 받는 노인 대부분은 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지만 일부 고가재산을 소유한 노인은 수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이모(69·여)씨가 대표적이다.
이씨는 아들 이름으로 된 10억원짜리 아파트에 살며 1억원짜리 벤츠를 타고 1억원짜리 골프회원권으로 여가생활을 즐기지만 소득인정액이 38만원으로 책정돼 매달 9만9천원의 기초노령연금을 받았다.
하지만 개선된 기초연금 소득인정액의 방식에 따르면 이씨의 소득인정액은 2억을 넘겨({(골프회원권 1억원+승용차 1억원-대도시 기준 기본재산공제 1억800만원)+(무료임차소득 10억원x연 0.78% ÷ 12개월)=2억65만원})기초연금을 받을 수 없다.
복지부는 “기초연금이 도입되면 전체 노인 639만명 가운데 447만명이 기초연금을 10만원 이상 받을 수 있으며, 이 가운데 406만명이 기초연금 상한금액인 20만원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선진국의 실버타운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실버타운이 가장 발달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1900년경 300만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70년 동안 미국의 총인구가 약 3배 증가할 사이 노인인구는 7배가 늘어날 정도로 노령화 속도가 빨랐고 실버타운을 비롯한 실버산업도 함께 발전했다.
◇민간주도로 은퇴자 도시 형성된 미국
미국의 실버타운 CCRC(Continuing Care Retirement Community)은 이미 1960년대부터 비영리단체나 민간기업을 중심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여개의 CCRC가 조성돼 있으며 80%는 민간기업이 운영이 운영한다. 주로 기후가 온화하고 경치가 좋은 버지니아, 플로리다 등 남동부 지역과 서부 캘리포니아에 집중돼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애리조나주 피닉스 근교의 선시티(Sun City)로 약 1090만평(여의도 120배)의 대지에 2만6000가구(4만2000명)가 주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미국의 대표적 은퇴자 도시다. 55세 이상만 입주할 수 있다. 골프, 테니스, 수영, 컴퓨터 등 다양한 여가 프로그램과 편의시설을 즐길 수 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목수출신 건설업자 델웹은 2차대전 후 미국 사회가 급속히 고령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은퇴자 마을조성을 구상했다. 그는 피닉스 인근 목화밭을 개발해 은퇴자를 위한 거주시설을 공개했고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리면서 거주자와 면적이 꾸준히 커져 하나의 도시가 됐다. 선시티의 성공으로 미국 전역에서 CCRC와 은퇴자 도시가 형성됐다.
◇유료 노인홈 사태 이후 규제 나선 일본
고령화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일본도 1963년 일본 노인복지법을 제정하면서 노인주거시설인 노인홈을 규정했다. 일본의 노인홈에는 노인복지법 규제를 받는 양호노인홈, 특별양호 노인홈, 경비노인홈이 있고 노인복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유료 노인홈이 있다.
이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특별양호 노인홈으로 전국에 6200여개가 있다. 수용인원은 44만명 정도로 같은 수만큼의 노인들이 입소를 대기하고 있을 정도다. 입소하려면 보통 2~3년은 기다려야 한다. 65세 이상으로 신체상, 정신상 현저한 장애로 인해 상시 개호(간호)가 필요한 노인만 입소 가능하다. 특별요양 노인홈이 이렇게 인기를 끄는 것은 복지시설로 월 100만원 정도(6만~15만엔)의 저렴한 비용으로 입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노령화로 간병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폭발하자 재정에 부담을 느낀 정부가 민간 업자의 진출을 적극 장려했다. 민간업자가 운영하는 유료 노인홈을 노인복지시설에서 제외해 완전히 민간사업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운영업체의 부실운영 등이 불거진 ‘유료 노인홈 사태’를 겪으면서 유료 노인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설치단계부터 행정지도를 받아야 하고 운영회사가 파산하더라도 시설을 폐지할 수 없도록 하는 등의 ‘유료 노인홈 설치 운영 지도 지침‘을 1994년 제정해 규제를 시작했다.
◇정부와 민간이 적절히 조화된 독일의 실버타운
미국과 일본이 상대적으로 민간주도의 실버타운이 강한 반면, 독일은 정부와 민간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 노인의 주거시설을 마련하고 있다. 독일의 실버타운은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한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알텐본하임, 가사를 보조해주는 알텐하임, 요양원인 알텐플레게하임으로 구분된다.
모두 유료지만 입소 노인들은 자신의 연금과 보험금으로 그 비용을 지불하고 부족한 부분은 국가가 사회부조로 채워준다. 가장 큰 특징은 사회복지법인만이 운영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적으로 행정적 통제로 이어지기 때문에 민간이 주도하는 실버타운에 비해 보다 안정적인 운영이 보장된다는 장점이 있다.
핀란드의 경우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실버타운을 만들었다. 지난 2000년 친구 사이인 은퇴 할머니 넷이 모여 노인공동체 설립을 추진했고 협동조합을 결성했다. 협동조합의 출자금으로 2006년 58가구가 수용 가능한 7층짜리 아파트가 완공됐다. 이 아파트의 이름은 로푸키리(‘마지막 전력질주’라는 뜻)로 붙여졌다.
입주 노인들이 직접 아파트 설계와 디자인을 계획했다. 이들은 공동의 생활 규칙을 만들고 식사·청소·빨래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을 서로 분담, 협동해 해결한다. 서로 심리적으로 의지하면서 핀란드에서는 불황으로 노인 자살률이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로푸키리에서 자살한 노인은 한명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장경영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고령화를 일찍 경험한 선진국은 실버타운을 포함한 모든 고령화 이슈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개선해왔다”며 “한국은 선진국의 선례를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면서 보완해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종합3보)
정부가 2주택 보유자로 주택임대소득이 연 2천만원 이하인 집주인에게 2016년부터 분리과세를 적용하고 필요경비율을 45%에서 60%로 높여 세 부담을 줄여주기로 했다.
2주택 보유자의 전세임대소득도 2천만원 이하라면 분리과세 대상에 포함된다.
다른 소득이 없다면 전세보증금 10억원을 전후해 12만원 정도의 세금을 부담하면 된다.
영세 임대자의 과거분 소득과 향후 2년분에 대해서는 납세여부를 따지지 않고 사실상 묵인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 대책은 ‘임대차시장 선진화 방안’ 발표 일주일만에 나온 것이어서 ‘정부가 설익은 정책으로 시장 혼란을 부추겼다’는 비난을 면키는 어려워 보인다.
정부는 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이런 내용을 담은 ‘주택 임대차시장 선진화 방안 보완조치’를 확정했다.
현 부총리는 “임대소득 세원관리로 과세정상화가 기대됐으나 소규모 임대사업자의 세부담 증가 등에 따른 임대시장의 불안이 나타나고 있다”며 “과세 정상화 측면에서 올바른 방향이라 하더라도 시장이 불안해한다면 시장을 안심시킬 수 있도록 정책의 타이밍과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정부는 이번 보완책에서 주택임대소득이 연간 2천만원 이하인 2주택 보유자에 대해서는 한시적으로 2년간 비과세하고 2016년부터 분리과세를 적용하기로 했다.
분리과세는 단일세율 14%를 적용하되 필요경비율을 종전 45%에서 60%로 높여 적용하기로 했다. 필요경비율은 증빙서류 없이도 소득의 일정 부분을 경비로 간주하는제도다.
이는 현재 장기임대사업자(국토부 등록 임대사업자)의 단순경비율을 적용한 것으로 아파트 등 공공주택의 임대사업자 대상 경비율(45.3%)보다 높은 수준이다.
다른 소득이 없거나 임대소득이 2천만원 이하인 경우는 기본공제액 400만원을 인정한다. 인적공제(2인 300만원)외에 표준공제 상당액을 적용하는 것이다.
또 낮은 종합소득세율을 적용받던 임대소득자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종합소득 과세방식과 비교한 뒤 그 중 낮은 금액으로 과세하기로 했다. 추가공제를 받는 노인이나 장애인 등은 과세금액이 늘지 않도록 보완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2주택을 갖고 배우자와 둘이 살면서 연간 임대소득이 1천200만원인 은퇴 가구주의 경우 종전에 소득세 15만원을 냈지만 앞으로는 세액이 11만원으로 4만원 줄어든다.
정부는 또 2주택 보유자의 전세 임대소득(간주임대료)을 월세 임대소득자와의 형평을 고려해 2016년부터 과세하기로 했다. 현재는 3주택 이상 보유자만 과세한다.
방식은 월세와 똑같이 2천만원 초과 소득자에게는 종합소득세로 과세하고, 2천만원 이하면 분리과세를 적용한다.
김낙회 기재부 세제실장은 “기준시가가 3억원을 넘지 않는 국민주택 이하 주택은 전세 임대소득 과세대상에서 제외되고 간주임대료 2천만원 기준이 높아 실제 세금을 내야하는 전세 집주인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세보증금 가운데 3억원을 초과하는 부분의 60%만을 과세대상으로 하며 간주임대료 산출 이자율을 2.9%로 적용하기 때문에 실제 과세 부담은 미미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국토교통통계연보에 따르면 기준시가 3억원을 넘지 않는 국민주택규모 이하 주택은 전체 1천509만가구 가운데 69.7%를 차지한다.
정부의 시뮬레이션 결과 과세대상 주택은 전세보증금 10억원 이상 주택일 것으로 추산됐다. 다른 수입이 없다면 세액은 12만원, 다른 소득이 연 5천만원이라면 68만원 가량 세금 부담이 발생한다.
한편 정부는 소규모 주택임대자의 임대소득에 대해 향후 2년간 비과세하는 점을감안해 과거분 소득에 대해서는 세정상 배려하기로 했다. 사실상 묵인하고 추징 등 과세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지난달 정부가 보증금과 월세, 임대 기간 등의 정보가 담긴 전·월세 확정일자 자료 400만건을 국세청에 건넬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은퇴자 등 사이에서 분 불안심리를 차단키 위한 조치다.
이전환 국세청 차장은 “2013년 소득에 한해 확정일자 자료를 수집하고 3주택 이상 보유자, 2주택자 중 임대소득 연 2천만원 초과자, 1주택자 중 기준시가 9억원 초과 주택 보유자에 대해서만 신고 안내자료를 발송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오는 6월 임시국회에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한 소득세법 개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최근 은퇴를 맞이한 베이비부머들을 비롯해 많은 수의 퇴직 중장년층이 재취업에 몰리고 있다. 이들의 고민은 무엇보다 은퇴 이후에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다. 특히 불안한 대내외 경제 상황의 장기화로 인해 창업이나 편안한 노후생활보다 재취업을 선택하는 비율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고용률을 70%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한 축으로 청년과 여성 그리고 중장년층을 주요 축으로 삼고 이들의 재취업을 위한 본격적인 정책 마련에 나섰다. 풍부한 업무 경험과 노하우를 살린 이들의 재취업은 사회 전체적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은퇴 이후를 생각하면 막막하다. 그동안 몸에 익은 일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새로운 일에 적응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많은 고령자들은 자신의 경력과 전문성을 활용하기보다는 단순 노동의 허드렛일을 준비하려 하고 있다. 정부는 이런 중장년층을 위해 노인 일자리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형별 노인 일자리를 정리해 제공하고 있다. 재취업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이를 꼼꼼히 파악하고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춰 원하는 일자리를 파악하는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노인 일자리를 크게 공공분야와 민간분야로 구분해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는 숲 해설가, 문화재 해설가 등 다채로운 일자리가 포함돼 있다. 구체적으로 5가지 유형으로 유형별로 잘 살펴보면 자신의 성향에 맞게 일을 선택할 수 있다. 공공분야는 국가가 비용을 부담하고, 민간분야는 국가와 민간 기업이 비용을 나눠 부담한다. 유형별로 공공분야는 공익형, 교육형, 복지형이 있고 민간분야는 인력파견형, 시장형이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유형별로 일자리를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선 공익형은 지방자치단체 및 공공기관에서 공공서비스 향상을 목적으로 창출한 일자리다. 공급 수가 가장 많다. △학교주변 교통정리 △아동안전보호 △초등학교 급식 도우미 △주정차 질서 계도 지원 △도서관 관리지원 사업 등이 공익형에 속한다.
또 교육형은 고령자가 자신의 경륜과 지식을 전달해 교육대상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목적을 가진 일자리다. 최근 많이 소개되고 있는 △1-3세대 강사파견 사업 △신문활용(NIE)교육 사업 △숲 해설 사업 △문화재 해설 사업 △해외이주자 교육지원 사업 등이 교육형에 속한다. 자신의 경력을 살릴 수 있고, 교육을 통해 타인을 돕는다는 점에서 만족도가 높은 유형이며 많은 고령자들이 원한다.
복지형은 소외계층의 안정적 생활 유지를 도와주기 위한 일자리다. △노-노 케어 △노인학대예방 사업 △장애인 돌봄 사업 △지역아동센터 돌봄 지원 등의 일을 한다. 업무 특성상 주로 여성 고령자들이 많이 참여하며 여성들의 만족도가 남성보다 높다.
인력파견형은 민간기업에서 요청할 경우 일정 교육을 수료하거나 업무 능력을 갖춘 지원자를 기업에 파견하는 직종이 많다. 초창기 경비원, 미화원 등 노동 강도가 높은 일자리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기업과의 제휴가 늘며 고령자의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는 일이 늘고 있다. 시니어 인턴십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어, 향후 이 분야의 일자리 수는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시장형은 고령자에게 적합한 업종 중 소규모 창업이나 전문직종 사업단을 공동으로 운용해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말한다. 사업단을 구성해 식품, 특산물, 공산품 등을 제작·판매하거나 아파트 택배, 지하철 택배 등의 사업도 있다. 장기 근로나 안정된 소득을 희망하는 고령자에게 적합하다.
해당 사업은 지역사회 시니어클럽, 대한노인회, 노인복지회관, 종합사회복지관, 노인복지센터, 대한노인회, 지역문화원 등의 사업수행기관이 업무를 위탁·수행하고 있다. 참여를 원하면 이들 기관에 문의하면 되며 신청자격은 만 65세 이상이다.
자격기준은 유형별로 차이가 있다. 공익형은 선정에 있어 경제적 수준을 가장 크게 고려하고, 그 다음은 노인 일자리 참여 경력을 본다. 교육형은 관련 교육 이수 여부와 전문성 또는 자격증 유무를 1순위로 본다. 경력이 있는 참여자 역시 선호도가 높다. 복지형은 관련 교육 이수 여부와 자원봉사 경력을 참고한다. 시장형은 전문성과 경력, 인력파견형은 관련 교육 이수와 경력을 참고해 선별한다.
한편 정부는 지난 7월 제3차 사회보장위원회를 열고 노인 일자리 사업을 확장해 매년 5만개씩 늘린다는 내용의 ‘노인 일자리 종합계획’을 확정·발표했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된 노인 일자리 사업은 점점 늘어나는 노인 인력을 끌어안기 부족했던 것이다. 지난 2011년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를 희망하는 노인은 약 106만명에 달했지만 올해 지원되는 일자리는 23만개에 불과했던 것이다.
최근 은퇴를 맞이한 베이비부머들을 비롯해 많은 수의 퇴직 중장년층이 재취업에 몰리고 있다. 이들의 고민은 무엇보다 은퇴 이후에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다. 특히 불안한 대내외 경제 상황의 장기화로 인해 창업이나 편안한 노후생활보다 재취업을 선택하는 비율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고용률을 70%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한 축으로 청년과 여성 그리고 중장년층을 주요 축으로 삼고 이들의 재취업을 위한 본격적인 정책 마련에 나섰다. 풍부한 업무 경험과 노하우를 살린 이들의 재취업은 사회 전체적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은퇴 이후를 생각하면 막막하다. 그동안 몸에 익은 일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새로운 일에 적응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많은 고령자들은 자신의 경력과 전문성을 활용하기보다는 단순 노동의 허드렛일을 준비하려 하고 있다. 정부는 이런 중장년층을 위해 노인 일자리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형별 노인 일자리를 정리해 제공하고 있다. 재취업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이를 꼼꼼히 파악하고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춰 원하는 일자리를 파악하는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노인 일자리를 크게 공공분야와 민간분야로 구분해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는 숲 해설가, 문화재 해설가 등 다채로운 일자리가 포함돼 있다. 구체적으로 5가지 유형으로 유형별로 잘 살펴보면 자신의 성향에 맞게 일을 선택할 수 있다. 공공분야는 국가가 비용을 부담하고, 민간분야는 국가와 민간 기업이 비용을 나눠 부담한다. 유형별로 공공분야는 공익형, 교육형, 복지형이 있고 민간분야는 인력파견형, 시장형이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유형별로 일자리를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선 공익형은 지방자치단체 및 공공기관에서 공공서비스 향상을 목적으로 창출한 일자리다. 공급 수가 가장 많다. △학교주변 교통정리 △아동안전보호 △초등학교 급식 도우미 △주정차 질서 계도 지원 △도서관 관리지원 사업 등이 공익형에 속한다.
또 교육형은 고령자가 자신의 경륜과 지식을 전달해 교육대상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목적을 가진 일자리다. 최근 많이 소개되고 있는 △1-3세대 강사파견 사업 △신문활용(NIE)교육 사업 △숲 해설 사업 △문화재 해설 사업 △해외이주자 교육지원 사업 등이 교육형에 속한다. 자신의 경력을 살릴 수 있고, 교육을 통해 타인을 돕는다는 점에서 만족도가 높은 유형이며 많은 고령자들이 원한다.
복지형은 소외계층의 안정적 생활 유지를 도와주기 위한 일자리다. △노-노 케어 △노인학대예방 사업 △장애인 돌봄 사업 △지역아동센터 돌봄 지원 등의 일을 한다. 업무 특성상 주로 여성 고령자들이 많이 참여하며 여성들의 만족도가 남성보다 높다.
인력파견형은 민간기업에서 요청할 경우 일정 교육을 수료하거나 업무 능력을 갖춘 지원자를 기업에 파견하는 직종이 많다. 초창기 경비원, 미화원 등 노동 강도가 높은 일자리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기업과의 제휴가 늘며 고령자의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는 일이 늘고 있다. 시니어 인턴십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어, 향후 이 분야의 일자리 수는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시장형은 고령자에게 적합한 업종 중 소규모 창업이나 전문직종 사업단을 공동으로 운용해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말한다. 사업단을 구성해 식품, 특산물, 공산품 등을 제작·판매하거나 아파트 택배, 지하철 택배 등의 사업도 있다. 장기 근로나 안정된 소득을 희망하는 고령자에게 적합하다.
해당 사업은 지역사회 시니어클럽, 대한노인회, 노인복지회관, 종합사회복지관, 노인복지센터, 대한노인회, 지역문화원 등의 사업수행기관이 업무를 위탁·수행하고 있다. 참여를 원하면 이들 기관에 문의하면 되며 신청자격은 만 65세 이상이다.
자격기준은 유형별로 차이가 있다. 공익형은 선정에 있어 경제적 수준을 가장 크게 고려하고, 그 다음은 노인 일자리 참여 경력을 본다. 교육형은 관련 교육 이수 여부와 전문성 또는 자격증 유무를 1순위로 본다. 경력이 있는 참여자 역시 선호도가 높다. 복지형은 관련 교육 이수 여부와 자원봉사 경력을 참고한다. 시장형은 전문성과 경력, 인력파견형은 관련 교육 이수와 경력을 참고해 선별한다.
한편 정부는 지난 7월 제3차 사회보장위원회를 열고 노인 일자리 사업을 확장해 매년 5만개씩 늘린다는 내용의 ‘노인 일자리 종합계획’을 확정·발표했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된 노인 일자리 사업은 점점 늘어나는 노인 인력을 끌어안기 부족했던 것이다. 지난 2011년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를 희망하는 노인은 약 106만명에 달했지만 올해 지원되는 일자리는 23만개에 불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