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임머신 타고 선사시대로 떠나는 오이도
- 6000년 전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의 삶, 바쁜 세상에 상상조차 못하고 지내는 게 이상할 것 없다. 시간 여행은 이럴 때 재미를 준다. 멀리 가지 않아도 떠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언제라도 가능한 곳, 서울이나 수도권을 기준으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게다가 놀이나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맛도 쏠쏠하다. 지하철 4호선이 닿는 곳, 오이도역. 무엇보다도 접근성이 좋다. 소박한 바다마을 오이도의 다채로운 스폿들 중에 선사유적공원은 나지막한 능선 아래 편안히 자리 잡았다.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의 생활을 느껴보며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의 자연을 산책하듯 색다른 시간을 보내는 것, 해볼 만하다. 한적한 구릉 선사유적공원 선사유적공원은 뜨겁던 햇살도 적당히 누그러진 아침나절, 혼자도 좋고 친구나 부부, 또는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기 편한 공원이다. 서울 상암동의 월드컵공원과 비슷한 면적인 33만5859m²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서 띄엄띄엄 거리두기를 하며 느긋함과 탁 트인 자연을 만끽해본다. 여기저기에 선사시대 마을을 구현한 움집들은 규모와 마을 크기가 작지 않다. 이곳은 우리나라 중부 서해안 최대의 패총 유적지이면서 다양한 신석기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그래서 선사시대 서해안 생활문화유산의 보존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같은 문화적 가치를 보호하고 활용하기 위해서 2018년에 공원으로 조성해 국가 사적 제441호로도 등재됐다. 선사 마당에서는 한반도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적당한 곡선의 구릉 위에 드문드문 만들어진 움집 마을 마당에 서서 두리번두리번 옛사람들이 오갔을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TV예능 ‘정글의 법칙’에서 김병만 족장처럼 불씨를 만들어 볼 수도 있고, 통나무를 굴려서 목재이동 방법도 체험해 볼 수 있어 아이와 어른 모두 심심하지 않다. 야영 마을과 발굴터를 비롯해서 움집 생활과 수렵 모습, 둘러앉아 조개를 구워 먹는 모습은 조개구이로 유명한 요즘의 오이도 맛집 거리를 연상시킨다. 그 옛날 다양한 삶의 형태를 살피며 선사인들의 일상을 상상해 보는 색다른 시간이다. 놀이 참여도 여행의 맛 움집 건물마다 주제가 달라서 한군데씩 구경하다가 문이 열린 곳을 살그머니 들여다보았다. 이때 안에서 누군가가 “들어오세요”하며 상냥하게도 맞아준다. 무심결에 들어가 보니 체험 프로그램을 하는 교실이었다. 선사인들의 생활도구나 의류 같은 걸 진열한 채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진행 강사의 도움을 받으며 계획에 없던 조가비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나니, 체험 프로그램의 맛이 요런 것이구나 싶게 즐겁다. 아이들처럼 옛날에는 ‘이렇게 살았어? 이렇게 구워 먹었구나, 이런 데서 잤나 보다’ 하며, 그저 눈으로만 느끼다가 이렇게 직접 만져보고 사용해 보며 만들어 보니 한층 이채롭고 뜻 깊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신종 바이러스가 온 지구를 비상 사태에 빠뜨린 이즈음 ‘코시국’ 모습이 훗날 시간을 거슬러 어떻게 이야깃거리가 될는지…. (코로나19 방역에 따른 변동으로 체험 프로그램과 문화해설사 안내는 미리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선사 마을 뒤편에 펼쳐진 억새가 꾸며놓은 예쁜 언덕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차분한 자연 속에서 제 빛을 내는 꽃과 나무를 만날 수 있다. 몇 년 되지 않은 신상 공원이다 보니 아주아주 오래된 신석기시대를 보여줌에도 대부분이 산뜻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꼭 새 것만 있는 건 아니다. 한쪽에는 고사를 지내고 도당굿을 했다는 불타버린 당산나무가 있고, 그 옆에 후계목이 자라고 있다. 세상은 또 이렇게 이어져 가고 있는 중이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산책하듯 걷다 보니 공원 전체에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이럴 땐 걷다가 벤치나 풀숲에 털썩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누리는 맛도 세상 행복하다. 잔디 능선길 옆으로 한적하게 앉혀진 패총전시관이 보인다. 조개무덤인 패총을 재현한 공간에서는 각종 전시물과 영상이 오이도 지역에 있었던 신석기시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패총이 만들어진 과정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여기서 다시 이어지는 오름길을 따라 가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오이도 전경이 360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멀리 송도 국제도시가 보이고, 더 멀리에는 서해바다까지 내다보인다. 군데군데 몇 척의 갯배가 떠 있는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도시생활의 번잡함을 잠시 잊고 호젓한 기분에 잠긴다. 특히 저녁 시간대에 펼쳐지는 멋진 해넘이가 장관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도 사랑의 열쇠 꾸러미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체험을 하고 천천히 여유롭게 산책을 한다 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이면서 단순한 공원을 넘어 역사적 가치도 높은 곳이다. 조금 여유가 있다면 10분 거리에 있는 시흥 오이도 박물관에 들러 선사인들의 삶과 역사를 더 알아볼 만하다. ♧경기 시흥시 서해안로 113-27 바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바다의 맛 오이도에는 선사유적공원 말고도 가볼만한 곳이 많다. 이 중에서도 섬이 아니면서 섬인 듯 빨간색 등대의 강렬함이 먼저 떠오르는 곳, 도심 가까이에서 바다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오이도 거리를 꼽는다. 선사유적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의 랜드마크인 빨간 등대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에는 어딘가로 훌쩍 나서고 싶었던 마음들이 모여서 그 시간을 즐기고 있다. 눈앞에 우뚝 선 빨간 등대와 비릿한 바닷바람이 떠나고 싶다는 마음에 설렘을 부추긴다. 등대전망대는 코로나19 여파로 입장할 수 없다. 하지만 빨간 등대를 중심으로 무수한 갈매기 떼가 시시때때로 날고 있어서 바다여행을 실감할 수 있다. 제방 둑으로 새하얀 생명의 나무가 한낮의 햇볕에 눈부시게 반짝인다. 생명의 나무는 오이도가 가진 역사와 생명, 사람의 흔적을 되살리고 후대에 길이 알리고자 제작됐다. 생명의 나무 전망대를 지나면 함상 전망대가 바다를 앞에 두고 나타난다. 쭉 걷다 보면 바닷길을 따라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이들이 무리 지어 씽씽 지나간다. ♧경기 시흥시 오이도로 175 부둣가 쪽으로는 작은 수산시장이 난전을 이루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도로 아래로 건너가면 오이도 전통수산 시장이 있어 꽃게와 소라, 조개류 같은 싱싱한 수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 이른 아침부터 천천히 다녔음에도 한나절이 지나 점심 무렵에 이른다. 오이도 제방을 따라 쭈욱 늘어선 음식문화거리엔 각종 활어회와 조개구이 같은 이곳만의 향토음식이 넘쳐난다. 맛집 밀집 지역으로 오이도가 패총 유적지답게 지금도 각종 어패류 요리가 지천이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무한리필 되는 쫄깃한 모둠 조개구이 한판? 콜~! 가리비와 대합, 백합, 키조개 등 푸짐한 구성에 풍미를 더하는 모차렐라 치즈를 포함해 모두 무한리필로 실컷 먹을 수 있다. 치즈 조개구이가 대표 메뉴인데 알밥과 라면까지 추가된다. 슬기롭게 '태양을 피하는 방법' 음식문화거리에서 유혹을 즐기고 나면 어느덧 햇볕이 뜨거운 오후에 이른다. 이럴 때 시원한 실내에서 창의적인 놀이로 차분하게 보낼만한 체험프로그램이 있다. 오이도와 인접한 섬이었던 옥구공원에 가면 재밌는 목공체험이 여러분을 기다린다. 요즘에는 조금 규모가 있는 공원에서는 이런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이 많다. 산림 부산물을 적극 활용하는 실습으로 숲의 자원화를 실현하고 목재문화 활성화를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온라인과 현장 접수를 선택해서 이용하면 된다. 두 시간 정도면 손잡이 달린 멋스런 트레이를 만들 수 있다. (참고로 트레이 체험비는 1만4000원이었다.) 준비된 나무 재료에 자연색감의 칠을 하고 → 사포로 문지르고 → 모양대로 짜 맞추기 → 스텐실 무늬 넣기 → 손잡이 달고 → 다시 한번 유약 칠하면 → 완성이다. 내 손으로 만들어낸 목공 작품 하나, 볼 때마다 뿌듯하다. 시흥의 옥구공원은 환경친화적인 공원으로 워낙 넓어서 자연 생태계를 살피며 공원을 산책하기에도 좋다. 축구장에서는 아이들이 경기를 하고, 군데군데 조각 작품들이 품격을 더한다. 숲 속 도서관과 장미원, 옥구 숲과 곰솔 누리 숲을 이용한 산림치유 프로그램으로 차분한 힐링 공간에서 심신을 안정화하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경기 시흥시 정왕동 2138 축복처럼 번지는 노을 풍경, 미생의 다리 시흥에 가면 저녁 무렵에 또 한 군데 들러볼 만한 곳이 있다. 시흥 늠내길 들판에 펼쳐진 생태 교량인 자전거 다리다. 일명 '미생의 다리'로 부른다. 시흥시 월곳의 갯골과 소래포구 사이에 새롭게 만든 다리로, 일출과 일몰 시점에 다리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어서 사진가들이 많이 찾는다. 특히 연말이나 연초엔 해넘이와 해돋이 풍경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이 일대가 대규모 염전 지역이어서, 이 다리의 모양을 염전에 물을 대는 수차 바퀴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 드라마 제목과 같은 동음인 '미생'이긴 하지만 바둑의 미생(未生)과는 뜻이 조금 다르다. '미래를 키우는 생명도시의 다리'라는 의미다. 짭짜름한 생명력 가득한 갯골 앞에 미려한 곡선으로 놓인 미생의 다리. 이곳엔 짜릿한 노을 풍경이 여러분을 맞이한다. ♧경기 시흥시 방산동 779-43
- 2021-09-07 17:07
-
-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숨이 멎는 순간까지 나의 변신은 계속 되리
- 2004년 2월 28일 난 평생 잊을 수 없다. 이유는 40년간 몸담아 온 직장을 하루 아침에 쫓겨나다시피 잃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부터 교육계에 퍼진 정년 단축이 내게 먼저 닥친 것이다. 그렇다고 난 미리 준비한 계획은 전연 없었다. 만 61살 일손을 놓기에는 빠른 나이다. 당장 내일부터 할일이 없다. 가진 기능이나 특기도 없고 남과 같이 기운이 세거나 막노동을 할 정도의 힘도 없다. 또 바둑이나 장기, 화투 등 오락도 취미도 없고 내놀만한 운동기능도 전연 없다. 오직 학교와 집밖에 모르는 샛님같은 아주 여린 봄꽃같은 난 모든 일에 쓸모가 없었다. 퇴직 후 생활은 기상하여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전철을 타고 종점에 도착해 값싼 점심과 목욕이 전부며 할 일이 없이 멍하니 약장사 구경만 종일토록 관람하며 흘러간 유행가에 젖어 마실 줄 모르는 막걸리 한 두잔에 취하거나 해져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러길 몇달째 참다참다 폭발한 아내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살바에는 다 죽자고” 짜증을 낸다. 이러길 수차례 어느날 울분과 흥분을 참지 못한채 길거리를 방황하는 난 가슴이 답답하여 길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지나가는 고등학생의 신고로 119가 몇분만에 도착하여 난 분당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평생 처음타본 응급 앰뷸런스에 계속 말을 시키는 간호원 구급대원의 봉사에 처음으로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수분 후에 응급실에 도착한 나는 기본 검사와 링겔 등 응급처치를 받고 병실 구석 후미진 코너 침대에 눕혀졌다. 사방을 살펴보니 별별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금방 목숨을 거둘 것 같은 나이든 할머니, 뼈만 앙상하여 마치 해골같은 머리가 흰 할아버지, 한쪽 발이 없는 중년의 남자, 울다지쳐 버린 갖난애, 거기다가 지독한 소독약 냄새.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온전한 것이 없었다. 아비규환 속 분위기에 젖기도 전에 난 담당 간호원에게 이제 멀쩡하니 퇴원하겠다고 말하니 반기는 기색을 하며 뒤늦게 찾아온 아내가 퇴원 수속을 해서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집에 돌아와 시원한 내방에 누워 명상에 잠겼다. 병원에서 본 환자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내 나이 61세,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기는 너무 젊은 나이임을 실감했다. 뭔가 해봐야하고 한번 죽이되든 밥이되든 시도해 보고 후회해도 늦지않을 것 같아, 난 큰 결심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벼룩시장’, ‘교차로’ 등 길가에 비치된 정보지를 봤다. 내게 맞는 일감은 없었다.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은 머리도 식힐 겸 친구와 만나 울분을 풀 셈으로 과천 서울대공원을 찾았다. 친구와 어울려 동물원을 걷는데 눈에 뜨인 광고판에 ‘한국에서 처음 시도하는 동물해설사’ 양성기사가 확 눈에 들어왔다. 난 친구에게 컨디션이 안좋아 먼저 간다는 핑계로 일찍 돌아와 동물원에 확인 전화를 했다. 나는 동물해설사이자 한 마리의 영리한 원숭이 “여보셔요. 거기 서울동물원 기획과죠. 동물해설사를 뽑는다는데, 나이 제한은 없나요?” “어떤 서류를 갖추어야 하나요?” 난 급한 마음에 여러 가지 궁금한 문제를 애원하다시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다양한 서류를 갖추어 인터넷 접수를 했다. 다행히 서류전형엔 합격했다. 그뒤는 몇 주간 강습이었다. 강의 내용은 수많은 동물과 멸종위기의 동물 종보전, 자연생태계 복원, 인간의 탐욕으로 남획을 막고 인간과 공존하는 법 등 다양한 전문적인 교육이었다. 교육이 끝나면 필기시험과 면접 실연을 통해 실제 동물 앞에서 뭇관중이 보는 가운데 동물해설을 하며 최종선발을 거쳐 43명을 뽑는데 난 당당히 합격했다. 난 기뻐 날뛰면서 방안을 빙돌며 괴성을 질렀다. 아내가 놀라 날 쳐다보았다. 마치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 같았다. 이렇게 환희의 순간을 만끽한채 동물원의 출근은 계속되었다. 동물원의 일과는 날 새로운 변신을 꾀하게 했다. 이유는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그날 체험학습을 올 아동 수 대로 당근, 배추잎(케일), 사료 등을 손질하는 것인데 당근은 하나하나 씻어 크기가 알맞게 자른 뒤 바구니에 준비하며 물기를 닦는 것이다. 그리고 코스별로 해설을 하며 체험교육을 시키는 것인데 예를 들면 최고의 광대처럼 재미있고 교육적인 산 교육이어야 인기가 있어 환영받는다. 즉 해설 방법 및 내용은 이러하다.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셔요. 저는 동물해설사 xxx입니다. 제 별명은 영리한 원숭이구요. 오늘은 여러분을 남미 페루에서 많이 사는 기니피그 먹이주기, 다음엔 말, 나귀 다른 점 관찰, 다음에 사막에 사는 미어캣은 무엇을 즐겨먹나요? 여러분이 만약 이 침에 쏘인다면 생명이 위험하지만 이 동물은 즐겨먹는 전갈을 맛있게 먹지요. 다음엔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토끼 먹이주기, 꼭 장갑을 끼고 먹이를 줘야해요 하며, 케일잎과 배추잎을 잡는 법을 알려주고 다음엔 원숭이, 그리고 염소, 양 등의 특징을 설명하고 먹이를 주면 돼요. 먹이를 던지거나 동물을 귀찮게 하면 안돼요.” 머리를 흔들며 재롱을 떨고 나이 많은 노인답지 않게 귀여운 표정, 손짓으로 윙크를 날리며 분위기를 잡고 해설이 끝나면 지도일지를 깨알만한 글씨로 가득 채운 뒤 일과를 반성하고 정리한 뒤 귀가하는 것인데 이 생활이 어찌나 즐거운지 나의 즐거운 변신은 대만족이며 거기다가 듬직한 해설사 월급을 받는다. 도랑치고 가재 잡고 하듯이 건강챙기고 시간보내고 급료 받는 나이든 늙은이로는 최대한 대우며, 피복, 모자, 소지품, 간행물 등 다양한 혜택을 받아 최고의 나날을 보낸다. 정말 교직에 버금가는 변신이다. 나의 변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 변신을 준비하고 실천했다. 실패의 나날에서 난 성공의 열쇠를 찾았다 -모형항공(글라이더, 고무동력 입상 및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동물원 해설이 없는 쉬는 날의 무료함을 달래고 내 취미생활 건강을 위해 고심하던 어느날 난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 블랙이글 축하비행과 공군참모총장배 스페이스 첼린져 모형항공기 대회를 참관했다. 아주 멋진 행사며 이 늙은 나이에도 나도 참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다. 내 자신도 할 것 같아서 서울과학사를 찾아가 모형항공기 셋트를 구입했다. 설명서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만들었다. 밤을 새우면서 거의 완벽하게 조립하여 인근학교 운동장에서 시험 비행을 해봤다. 처음 만든 모형비행기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날고 체공 시간은 1분대였다. 몇 번을 날려봐도 아주 잘 날라서 기분이 아주 좋았고 자신이 생겼다. 이렇게 몇 번을 연습했다. 그리고 예선대회 즉 경기, 인천 예선대회가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에서 있었는데 그 대회에 참가했다. 내 차례가 되어 공군 보조원이 50m 후방에서 글라이더를 날려 주는데 왠지 몹시 서툴러서 믿음이 가지 않아 몇 번을 뒤돌아 보면서 뛰는데 글라이더가 영 상승을 하지 않고 왼쪽으로 “휙” 곤두박질하며 앞날개가 활주로 바닥에 부딪쳐 두동강이로 갈라져 1차 비행은 0점이었다. 난 당황해서 날개 조각을 회수하고 2차 비행 순서만 기다리고 있는데 남은 한 대 글라이더도 날개가 튼튼하지 못해 날개 중앙에 금이 가있었다. 급히 강력 접착제를 바르고 순서를 기다렸다. 두 번째 마지막 시합에서는 옛학교 과학주임이 와서 보조역할로 글라이더를 뒤에서 잡아주어 사수, 조수, 보조가 맞아 멋지게 바람을 가르며 높은 창공에서 선회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앞날개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망가진 채 공중에서 빠른 속력으로 활주로에 꼴아 박았다. 더 이상 기회도 없고 글라이더도 없어 퍽 아쉬웠지만 난 대강 비행기 잔해를 끈으로 묶어 보루지 박스에 쳐넣고 승용차편으로 귀가했다. 1년간 공들인 노력이 허사였고 그 공역과 재료비 등이 너무 아까워 눈엔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무참하게 실패한 나는 집에 돌아와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노트에 기록하며 내년을 기약했다. 실패의 원인분석 ◎ 모형 항공기가 튼튼하지 못해 쉽게 부서졌다. → 다른 참가자들은 낚싯대 카본으로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 재료 문제 ◎ 견인자(사수)와 보조자(조수)의 싸인이 전연 안 맞음 → 혼자만의 힘으로는 글라이더를 띄울 수 없음. 보조자 대동해야 함. : 보조자 양성 ◎ 바람의 강약에 맞는 견인 연구 → 견인 기술 부족. 연습이 필요함. 또 실패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또 재료 및 여러 가지 계측장비 등을 준비해야 함을 알았다. 또 기록이 좋은 모형항공기는 스마트폰에 사진을 찍어 살펴봤다.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한국 최고의 장인에게 사사 받았다. 그러니까 한국 모형항공의 대부 격인 경복궁 옆 동학과학 심xx 사장의 50년 이상의 노하우를 하나씩 익혀가며 모형항공기 킷트 공장제품을 이용하지 않고 수제품을 하나씩 만들었다. 즉 앞날개, 동체 수평, 수직꼬리날개 종이는 외제를 사서 가볍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음해에 대한 준비를 하나씩 진행했다. 제작 기술도 늘고 요령이 생겨 견인방법도 바람의 세기를 큰 연을 만들어 날리면서 익혔고 이탈 및 체공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을 습득했다. 두 번 다시 실패는 없다는 나의 각오는 연습으로 더욱 자신을 얻어갔다. 실패 후 1년이 지나 난 또 제 10 전투비행단 활주로에 시합을 위해 섰다. 조수는 우리집 차남이다. 평소에 같이 호흡하며 연습을 한 터라 손발이 “착착” 맞았다. 내 차례가 되어 계측하는 심사위원 대위의 신호가 떨어졌다. 난 무수히 연습을 한 터라 자신있게 센바람을 줄의 길이와 느슷함과 당김의 조화를 섞어 요리조리 걷다 뛰다하며 글라이더를 마치 살아있는 황새처럼 어루고 달래며 하늘 높이 띄우며, 그러니까 상승기류를 찾아 마치 강태공의 잉어낚시인양 뛰면서 글라이더 상태를 보며 살펴시 이탈시켰다. 많은 참가자와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며 “무한대∞”를 연호했다. 아니나 다를까 난 일반부에서 3분(1차), 2차 3분 도합 6분으로 1위, 금상을 받았다. 60이 훨씬 넘은 노인이 상을 받는다고 축하박수가 유난히 컸다. 이렇게 예선은 작년의 패배를 설욕하고 회심의 미소를 먹음은 채 기쁜 마음으로 본선 대회를 준비했다. 대회는 9월이라 시간적 여유도 있지만 난 마음을 다시 잡고 제작 및 견인을 더욱 열심히 했다. 글라이더는 완전히 터득했다. 새파란 멍이 온 몸에 퍼져 기력이 쇠약해도 고무동력기는 내려야 했다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본선, 공군참모총장대회, 고무동력기 이야기. 더 강하게 변신한 나의 모습 글라이더는 전국을 제패하고 몇 년간 노력 끝에 제 1인자로 자리메김 다. 이제는 고무동력부문이다. 처음부터 이 영역에는 값비싼 외국제품 및 부속으로 무장한 전국의 과학사의 문하생들이 주름잡고 있어 난공불락이었다. 거기다가 최신장비, 풍향풍속 계측기, 강력한 드릴로 신축성이 뛰어난 고무줄을 사용하는 그들을 따라잡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끈기와 변신의 귀재인 나는 하나씩 착착 계획을 진행했다. 그러니까 외제 고무동력기의 설계도를 수소문 끝에 구입하여 하나하나씩 내 기술로 개조했다. 고무동력기 동체, 외제는 값비싼 두랄루민·티타늄 등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난 이점을 가벼운 플라스틱을 말아 가늘게 쪼갠 대나무 껍질을 이용하여 트러스 공법으로 동체를 만들었는데 단단함은 물론 가볍기가 기본동체의 1/3 무게도 안되었다. 대성공이었다. 또 프로펠라의 크기가 기성품은 작기에 대추나무로 세밀하게 깎았고 고무줄은 미제를 구입했다. 또 프로펠라를 돌려 고무줄을 감는데 조수가 꼭 있어야 하는 번거러움을 덜기위해 혼자서도 고무줄을 감을 수 있는 장치를 발명했다. 즉 강력드릴에 강철고리를 부착시킨 뒤 프로펠라 걸이를 세워있는 기둥이나 나무에 감고 프로펠라를 회전시켜 감는 방법인데 어른이 잡아주는 힘보다 서너배 많이 감고 아주 편했다. 이렇게 만전을 기한 나의 변신 기술은 공군참모총장배 본선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가슴쓰린 추억이었다. 그러니까 본선대회 1차 시기에서 연병장의 축구 꼴대에 고무줄 감기와 드릴을 이용해 두서너배 많이 감은 고무동력기를 날렸는데 연병장 주위 아주 높은 반절쯤 죽어가는 소나무에 걸려 프로펠라는 허공을 향해 “빙빙”돌면서 ‘퍼덕’ 거렸다. 급히 달려가 행사 보조위원에게 내려 줄 것을 이야기했다. 보조요원은 철제 사다리를 펴서 준비한 장대로 내리려고 애썼지만 고무동력기에 닿지 않고 위험하다는 핑계로 포기하라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난 보조원의 만류도 뿌리치고 사다리를 올라 소나무에 다람쥐처럼 올라가 장대에 갈쿠리를 달아서 힘껏 끌어당겼다. 하지만 고무줄이 가지에 감겨 풀리지 않아 한참만에 겨우 비행기를 내려서 떨어트리고 사다리가 걸쳐진 나무둥지를 디디는 순간 사다리가 넘어가 함께 떨어져 풀숲에 내동댕이쳐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회수한 비행기를 손보고 날개를 바로잡고 고무줄을 바꿔 꿰어 다시 드릴로 감아 마지막 2차시기에 임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2차시기 비행 체공 기록은 만점 3분 무한대였다. 내가 속한 조에서는 1등인데 다른 조의 기록이 궁금해서 각조의 기록을 조마다 쫓아 다니며 살펴봤다. 만점은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전체 시합이 끝나고 시상식만 남았는데 난 기록이 좋아 늦게까지 대기했다. 몇 시간 뒤 시상식이 열렸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는 마지막이었다. “일반부 고무동력 금상, xxx” 내 이름이 호명됐다. 별이 4개이신 공군참모총장님이 직접 금메달을 목에 걸어 주시며 빙그레 웃으시며 “노익장을 과시하니 보기 좋습니다”하시며 부상과 상장을 주셨다. 그리고 기념촬영. 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전국을 제패한 벅찬 변신이었다. 영광뒤에 따른 무서운 변화에 난 몇 달을 고생하며 치료에 온 정신을 쏟았다 -고무동력기를 내릴 때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아픈 이야기 (낙상사고 후유증에 헤멤) 하지만 시상식이 끝나고 귀가하는 승용차 안에서 엉덩이와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엉치뼈 그 다음엔 허리, 다음엔 목 등 차가 흔들릴 때마다 통증은 더 심했다. 난 천안 휴게소에서 내려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팬티를 내리고 아랫도리를 살펴봤다. 멍 비슷하게 푸르슴한 색이 하체에 내려앉았다. 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차를 타고 귀가했다. 금메달을 딴 기분이 가시지 않았기에 약간의 통증은 견딜만했다. 하루가 지났다. 통증은 온몸에 퍼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온몸을 살핀 뒤, 멍을 보고 주사와 처방전을 간호원에게 시키며 한달 가량 쉬면, 멍이 가실거니 걱정 말라며 진료를 마쳤다. 약국에서 복용약을 받아서 복용한지 일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온몸에 번진 시퍼런 멍, 거기다가 성기며 고환까지 자주빛 멍이 소변을 볼 때마다 공포가 더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난 아내 몰래 한방병원을 방문했다. 한의사가 내 온몸을 보는 순간 혀를 차며 “빨리 왔어야지요. 이지경이 될 때까지 참고 있어요. 피가 굳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데”하며 날 나무랬다. 그리고 온몸에 수없이 많은 침과 뜸을 뜨고 1시간 쯤 후엔 부항을 뜬다며 엉덩이 부분을 내리고 부항을 수십차례 색이 진한 부분마다 검붉은 피를 뽑았다. 참 신기하고 시원했다. 이러길 하루 건너 두달 치료 끝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난 처음으로 한의학에 경이를 표했다. 멍이 가시자 마자 나의 변신은 계속되었다. 각종 모형항공대회와 더 나아가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여 대표자격을 땄다. 그러니까 모형항공의 귀재로 변신한 나는 고등학교, 중학교 심지어는 경기도 과학연구원 위촉 강사로 뽑혀 모형항공 지도를 했다. 하지만 요즈음은 드론이 대세라 막이 내렸지만 퍽 아쉽다. 그렇지만 난 드론에 도전하기엔 너무 손놀림이 늦어 포기했다. 내가 할 일이 아니기에. 낙방의 고배를 마시며 다져지는 나의 글쓰기 실력은 마침내 빛을 보았다 -백일장에 도전한 나의 이야기 나는 모형항공기 기능 섭렵을 끝내고 또 다른 변신을 꾀하던 어느 날 문득 백일장대회 현수막을 지나가던 길에서 눈여겨봤다. 또 변신의 기회를 잡으려고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준비를 했다. 먼저 서울 ‘교보문고’를 방문해서 백일장 입상문집을 사서 탐독했다. 그리고 입상작품의 특징과 글의 짜임, 쓰는 요령을 습득 뒤 나도 백일장대회에 참가했다. 내 딴에는 정성껏 바른 글씨와 내용을 그럴싸하게 써서 제출했다.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입상자 발표가 있는데 내 이름은 없고 정성을 쏟은 보람도 없이 낙방이었다. 영문을 몰랐다. 떨어진 이유를. 돌아오는 전철에서 난 글쓰기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닐까 반문해봤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은 수수께끼였다. 그 뒤 계속 백일장대회에서 낙방을 연거푸 서너차례한 뒤 난 그 어떤 1% 부족한 내 자신을 찾았다. 그러니까 난 겉만 번지르한 실속 없고 알맹이 없는 미사여구만 늘어놓고 감동이 없는 허황된 글을 쓴 것이다. 내 결점을 찾은 뒤 백일장 대회를 기다린 어느 날 대전 동구에서 ‘우암송시열’ 백일장이 있었다. KTX를 타고 원거리 대회를 참가했다. 전국에서 수많은 문사가 참여한 전통 있는 대회라 난 기가 팍 죽었다. 축하공연이 끝나고 글제가 발표됐다. 주제는 ‘어머니’였다. 난 어머니와 같이 산 50년을 눈물을 흘리면서 회상하는 글을 써내려갔다. 내 어머니는 70여리가 넘는 먼길을 걸어서 쌀을 머리에 이고 자취하는 전주의 언덕빼기 집까지 부식을 마련하여 난 배고픔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어려운 시절에. 그리고 내가 교사로 발령을 받아 전등불도 안 들어오는 산간 벽지 오지 학교에 부임했을 때 삼시세끼를 따뜻한 밥을 해주시며 허름한 관사에서 동고동락하시며 내 뒷배를 후원하셨는데 끝내는 영화를 못 누리신 채 돌아가셨는데 눈물겨운 사연을 하나하나씩 깨알같은 글씨로 써냈다. 그뒤 서너 시간 뒤에 입상자 명단이 벽에 붙고 호명이 되었다. “수필부 금상, xxx 나오셔요” 처음으로 받은 상 그것도 장원이었다. 돌아오는 KTX열차가 왜 그리 느린지 난 처음으로 느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영광은 서울 한강 ‘구상백일장’, 고양 ‘어르신 백일장’, 수원 ‘정조대왕승모백일장’, 평택 ‘사랑사랑백일장’ 등 무수한 영광을 안은 채 난 제 2의 변신을 계속했다. 늙은 나이에 그 기쁨은 날 흥분케 했고 생에 대한 그 어떤 자신이 생기는 나날이었다. 난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변신을 꾀하고 싶어 도전을 계속했다. 젊은이와 경쟁에서 스피드를 요하는 시합은 무리인가 -KBS1 ‘우리말 겨루기’에서 변신은 요원한 길인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40분 KBS1 TV의 ‘우리말 겨루기’는 날 들뜨게 한다. 그러니까 방영되는 월요일에는 모든 약속과 내 생활은 비상이다. 몇 년째 노트와 동영상을 캠코더를 찍어보고 여기에 수반되는 문제집, 국어사전, 속담, 사자성어, 크로스워드 책. 필요한 서적은 모두 구입해서 보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도 모두 구입하여 보고 준비는 매일 밥 먹듯이 한다. 하지만 달인을 향한 내 꿈은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다. 석두일까? 자책도 해봤다. 치매증상이 있나? 치매 검사도 했지만 치매는 아니었다. ‘우리말 겨루기’ 예심이 인터넷에 뜨면 내 마음은 왠지 급해진다. 그러니까 예심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KBS홀에서 수많은 경쟁자와 한판 겨루기를 한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지필고사 20문제를 크로스워드, 십자말 칸을 인쇄한 용지와 대형 스크린을 비추면서 두 번 읽어주고 단 20분만에 답안지를 회수하여 30분쯤 채점이 완료되면 참가자의 10% 정도 합격자를 불러 2차 면접 및 실기 그리고 방송에 하자가 없고 유모어, 또는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재미있고 재치있는 참가자를 선별하는 테스트 과정이다. 난 예심에는 언제나 수월하게 통과하며 본방에 출연까지는 항상 무난하게 뽑힌다. 그 이유는 다 까닭이 있다. 40년간 교직에서 다져진 말솜씨, 동물해설사로 활동하면서 익힌 유모어, 평소 내 나이에 걸맞지 않는 가곡 레파토리가 있다. 예전 유럽 현지 이탈리아에서 외국 여행객 이탈리아 가곡 부르기에서 상을 탄 저력이 있기에 말이다. 예심을 합격한 나는 마지막 단계 면접에서 뜻밖에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는 면접심사위원의 청에 망설이다 정색을 하며 무대에서 그 당시 뜨는 가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열창했다. 면접대기자와 심사위원 전원이 앵콜을 연호했다. 난 주저하지 않고 ‘슈벨트의 세레나데’를 더 열정적으로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모두들 “늙은이가 웬 노래를 저렇게 잘 부르지”하며 혀를 찼다. 며칠 후 인터넷에 합격자의 이름이 떴다. xxx 상위에 랭크된 내 이름 석자. 본방송 출연을 연락받고 밤새워 깨알같은 국어사전 글자를 돋보기도 쓰지않고 보던 어느 날 더 이상 눈이 침침하고 흐려 안과에서 백내장 수술을 했다. 보름 후엔 글씨가 똑똑하게 보였다. 그런 어느 날 ‘우리말 겨루기’ 녹화가 있으니 10시까지 KBS 녹화장이 있는 본관으로 오라는 연락을 담당 PD에게 받고 새옷을 입고 이발을 하고 달려갔다. 내가 제일 먼저 온 것이다. 이윽고 출연자 전원이 당도하여 분장실에서 마치 장가가는 새신랑마냥 아주 정성이 담긴 분장을 받았다. 기분이 황홀했다. 한 시간 뒤 녹화방송으로 ‘우리말 겨루기’가 엄지인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첫 단계부터 중간까지는 최상위 점수로 정상이었다. 우승이 눈앞에 보이며 젊은이들도 별것 아니구나 하며 자신이 생겼다. 마악 누름단추 벨을 누르며 우승을 확정짓고 싶은 감정이 앞섰다. 지나친 과욕이었다. 기다리면 결승단계에 진출하는데 감점이 시작됐다. 오답이 연속된 나의 경거망동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한 채 끝났다. 멋진 변신, 변태는 지나친 욕심과 만용 때문에 끝났다. 하지만 한 번 출연한 사람은 2년을 기다리기에 매미는 땅속에서 수년을 기다리는데 난 다시 변신의 칼을 간다. 2년간 그리고 화려한 날개를 펴며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다닐 그날의 변신을 꿈꾸며 오늘도 내 길을 간다. 숨이 멎는 순간까지 나의 변신은 계속될 것이며, 이 길을 기꺼이 간다. 오늘따라 하늘이 더 높게 보인다. 이제 내 나이 80.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가며 끝없는 변신을 꾀하며 더 행복한 나날을 영위해야 하지 않을까? 무한한 변신. 이제 무엇을 찾아 또 화려한 변신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변신은 날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 만병통치약인가 보다. 나의 변신은 오늘도 계속된다. •수상소감 - 우수상 미니자서전 은정남 “죽는 순간 숨이 멎는 순간까지 도전하고파” 응모하신 사람 중에서 나이가 좀 많습니다. 팔순이니까요. 그래서 저의 하찮은 글을 건져 올려주셔서 너무 고맙고요. 용기를 주신 선생님들과 캐나다에 이민을 간 아들한테 축하 인사 받았는데 정말 뿌듯합니다. 큰 용기와 힘을 얻었어요. 그래서 이제 앞으로 이제 세상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쓰고 또 갈고 닦아야겠죠. 죽는 순간까지 숨이 멎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해보고 싶어 공모전에 출품하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노인들이 많잖아요. 노인들은 지하철 공짜로 타며 놀러 다니고 또는 복지관이나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도움이 안 돼요. 그래서 이제 그런 걸 탈피하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 여러 가지 해봤는데 이번에 글을 한 번 써봤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시인 신석정 시인이 저희 은사였습니다. 그래서 글을 좀 잘 쓰려고 나름대로 좋은 책 많이 읽고 또 문학 활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제가 글을 쓰면 항상 친구들이나 동호회 회원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했어요. 그러면 그분들이 모니터링해 주면 수정하며 첨삭하면서 배웠습니다. 학창 시절 백일장에 장원은 떼놓은 당상일 정도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자신감 가지고 소설을 써보려고 합니다. 제가 경험했던 동물해설사, 모형항공기, 우리말 나들이 도전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이나 사건을 소재로 삼아서 소설을 써보고 싶습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이 있어 행복합니다. 일감이 있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는데 이번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준비한 주최 측에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다시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쓸 만한 어른들과 아까운 시니어들이 많거든요. 사실 어르신들은 좋은 자원과 자산을 갖고 있고 재능과 경험이 다양한데 쓸모없이 이렇게 소멸해 가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이번 공모전이 뜻 깊은 일을 하고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시니어들에게 힘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보다 더 저를 믿어준 가족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 2021-08-27 10:00
-
- 모래시계 보고, LP 모으고…시니어 ‘추억’ 즐기는 요즘 애들
- 요즘 레트로가 대세다. 기성세대의 추억으로 여겨졌던 ‘옛 것’들이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레트로 감성’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레트로는 과거의 모양·정치·사상·제도·풍습 따위로 돌아가려 하고, 이를 본보기로 삼아 그대로 좇으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평범했던 일상이 그리워지면서 과거로 돌아가려는 ‘레트로 감성’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다시 돌아온 LP와 턴테이블의 전성기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음악을 선택해 바로 들을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LP(long playing record)와 이를 재생하는 턴테이블(turntable)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과거 LP를 경험해본 중장년층뿐 아니라 레트로 트렌드를 주도하는 MZ세대(1980∼2000년대생) 중에서도 집에 턴테이블을 두는 이들이 늘고 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온라인 쇼핑몰 G마켓에서 올해 상반기 턴테이블 매출은 지난해 동기보다 30% 증가했다. 같은 기간 SSG닷컴의 턴테이블 매출은 44% 뛰었다. LP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국내 LP 업계는 MP3 플레이어 등장과 디지털 시대가 오면서 바닥까지 내몰렸었다. 하지만 최근 LP 판매량이 증가세를 보인다. 음반 판매 사이트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LP 판매량은 2019년보다 73.1% 증가했다. 2018년 26.8%, 2019년 24%의 증가율을 보이다가 지난해에 급격하게 판매량이 늘었다. LP와 턴테이블은 특유의 감성과 분위기가 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날로그적인 작동 방식에서 신선함을 느끼는 셈이다. 중장년층의 추억이 깃든, 그리움을 상징하는 물건이 젊은 세대에게는 못 겪어 본 ‘새로움’으로 작용했다. 기성세대와 조금 다른 MZ세대의 LP 사랑 LP는 기성세대에게 ‘LP판’, ‘빽판’ 등으로 불리지만 MZ세대에겐 ‘바이닐’이란 용어가 더 익숙하다. 바이닐(Vinyl)은 PVC(염화비닐)를 말한다. LP판의 주재료이기도 하다. ‘빽판’이란 단어가 주는 감성은 LP가 빽빽이 꽂혀 있는 DJ 부스를 아는 기성세대가 더 제대로 느낄 수 있듯이, MZ세대가 공유하는 LP의 감성은 ‘바이닐’이라는 단어에 함축돼 있다. 2016년 전후로 이런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돼 감각적인 공간이 속속 생기기 시작했다. 2016년 한남동에 개장한 현대카드의 ‘바이닐앤플라스틱’을 비롯해 음반 구매와 청음이 가능한 젊은 감각의 전문숍이 곳곳에 생겨났다. 단순히 음반만 파는 게 아니라 음악과 관련된 티셔츠, 포스터, 스티커 등 다양한 굿즈를 취급하는 게 특징이다. 과거에는 10곡 이상 담을 수 있는 지름 12인치짜리 LP판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출시되는 ‘바이닐’은 더 다양한 개성을 뽐낸다. 음반 외에 스티커, 화보집 등을 묶어서 소장 욕구를 자극하기도 한다. LP 한 장에 가능한 한 많은 곡을 담아 가성비를 극대화했던 과거와 다르게, 수록곡 수와 관계없이 LP 자체가 하나의 굿즈로 자리 잡았다. 모래시계 보는 요즘 애들 최고 시청률 64.5%를 기록한 드라마 ‘모래시계’는 해방과 6·25 이후 최대의 격동기였던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개성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1995년 ‘귀가시계’라고도 불렸을 만큼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려고 직장인들이 일찍 귀가해 서울 시내가 텅 비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 지금 떨고 있냐”,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같은 명대사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들에 의해 매번 회자된다. 이 모래시계가 온라인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에서 다시 인기다. 특히 모래시계 시청자가 20~30대 젊은 층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왓챠에서 모래시계를 시청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MZ세대였다. 모래시계가 방영되던 1995년에 이들은 너무 어리거나 심지어 태어나지도 않았다.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영화들도 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가장 인기가 많은 ‘중경삼림’(1994년)은 27년 전, ‘타락천사’(1995년)는 26년 전 작품이다. 5060 시니어들에게는 이 작품들이 자신들의 과거이자 추억이다. 하지만 MZ세대에게는 새롭고 신선한 영화인 셈이다. 김효진 왓챠 콘텐츠 사업 담당 이사는 “이제 MZ세대들은 과거의 것을 재해석한 콘텐츠를 넘어 과거의 콘텐츠 자체를 직접 즐기고 주체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MZ세대들에 의해 20세기의 올드 콘텐츠들이 21세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 2021-08-12 17:48
-
- 폭염도 잊게 만드는 8월 문화 소식
- ● Exhibition ◇요시고 사진전 일정 12월 5일까지 장소 그라운드시소 서촌 코발트빛 바다와 그 위를 헤엄치는 관광객, 알록달록한 파라솔. 전시장에 걸린 사진들은 잊고 있던 어느 여름날의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휴양지의 찬란한 순간을 프레임에 담아낸 요시고의 전시가 국내 관객을 찾았다. 요시고는 스페인 출신 포토그래퍼 겸 디자이너로 본명은 호세 하비에르 세라노다. 유명 IT 매거진 ‘와이어드’와 베네통 매거진 ‘컬러스’로 이름을 알렸으며, 현재는 ‘킨포크’, ‘비트라’ 등 글로벌 브랜드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중해부터 마이애미, 두바이, 부다페스트 등 세계 여러 여행지를 기록한 350여 점의 사진을 선보인다. 대칭적 구도와 기하학적 기법 등 작가만의 표현 방식이 두드러지는 ‘건축’ 섹션을 시작으로 미국, 아랍에미리트 등 사막의 풍광을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섹션을 거쳐 해변과 바다, 관광객의 모습을 담은 ‘풍경’ 섹션으로 마무리된다. 작가가 작품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방식으로 구성해, 세계 곳곳의 여행지를 함께 거니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방문객이 많고 대기 시간이 길어, 여유롭게 관람하고 싶다면 평일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윌리엄 웨그만 : 비잉 휴먼 일정 9월 26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개념미술의 선구자 윌리엄 웨그만의 전시가 호주, 뉴질랜드, 스위스, 네덜란드를 거쳐 한국에 상륙했다. 윌리엄 웨그만은 화가의 그림을 기록하는 데 그쳤던 1970년대 미국 사진계의 보수적인 관행을 깨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며 사진 예술을 주류로 끌어내는 데 이바지한 예술가다. 특히 그는 자신의 반려견 ‘만 레이’를 의인화해 인간 사회를 풍자하고 내러티브를 시각화하는 사진 작업을 발표했다. 촬영 즉시 인화되는 대형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활용해 후보정 없이 반려견과의 교감만으로 즉석에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는 대표작 ‘캐주얼’, ‘키’를 비롯해 희소성 높은 대형 폴라로이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점의 작품을 망라한다. 지금까지 대중에게 선보인 작품 외에 50점 이상이 국내에 처음 공개되며, 디올, 입생로랑, 마크제이콥스 등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작도 선보인다. 반려견을 모델로 삼아 독특한 작업 세계를 구축한 윌리엄 웨그만의 이번 전시는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지친 현대인에게 웃음을, 반려동물 가구에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 Book ◇나는 치매 의사입니다 (하세가와 가즈오 외 공저·라이팅하우스) 평소와 달리 기억이 흐릿할 때 떠올려보는 질문이 있다. ‘100에서 7을 빼보세요.’ ‘하세가와 척도’의 문항 중 하나로, 치매 여부를 진단할 수 있는 인지 기능 검사법이다. 이 척도를 만든 하세가와 박사는 평생 수천 명의 치매 환자를 돌본 치매 의료계 1인자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치매에 걸렸다. 그의 나이 88세의 일이다. 신뢰받던 의사에서 치료받는 환자가 된 그는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며, 마지막까지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공개해 치매 연구에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이듬해 치매에 걸린 사실을 공표하고, NHK 방송국과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 이 책은 그 기록의 결과물이다. 50년 넘게 치매를 연구했지만, 그는 환자가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치매에 걸렸다고 24시간 비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것. 기억력은 흐릿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그렇기에 주변인이 치매 환자를 삶에서 배제해선 안 된다고 당부한다. 대신 “나는 치매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남긴 2년간의 투병 기록은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병이기에 겁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불안은 줄어들고 희망은 커진다. 치매를 절망적인 질환으로 여기는 사회 속에서 “불편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의 단단한 태도 덕분이다. 의사와 환자의 기로에 선 그의 이야기는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은 물론, 치매를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억을 잃어도 삶은 계속될 수 있다는 단서와 희망을 보여준다. ◇빨리 은퇴하라 (최승영 저·이은북) 은퇴를 앞둔 이들을 위한 진로탐색서. 단순히 불안한 마음을 잡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점점 단단해지는 중입니다 (김영미 저·혜윰터) 노화로 우울감을 느끼던 저자가 환갑의 나이에 자전거 라이더가 된 이야기를 담았다. 어릴 적 사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전국 자전거길을 섭렵한 저자의 도전이 짜릿한 설렘을 선사한다. ◇빅토르 위고와 함께하는 여름 (로라 엘 마키 외 공저·뮤진트리)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인생 철학을 그가 남긴 희대의 명작들로 살펴본다. 평생 민중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정의를 향해 나아갔던 위고의 삶이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전한다. ● Stage ◇엑스칼리버 일정 8월 17일~11월 7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권은아 출연 김준수, 이지훈, 신영숙, 민영기, 최서연, 이상준 등 EMK뮤지컬컴퍼니의 창작 뮤지컬 ‘엑스칼리버’가 2년 만에 재연을 올린다. ‘엑스칼리버’는 혼란스러운 고대 영국을 지켜낸 영웅 서사 ‘아더왕의 전설’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시골 청년 ‘아더’가 성검 엑스칼리버를 뽑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기사들의 틈에 끼지도 못했던 평범한 인물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여정이 벅찬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서양 신화 속 인물의 이야기인 만큼 국내 관객의 정서를 반영해 초연 당시 서사를 대폭 수정했으며, 아더의 내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춰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이번 공연 또한 초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수정과 보완을 거쳐 더욱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특히 물, 불, 연기를 비롯한 특수 효과와 샤머니즘적인 퍼포먼스, 신비로운 영상 등 다양한 시청각적 장치로 마법과 마술이 공존하던 시대의 배경을 극대화해 몰입감을 더할 예정이다. ◇분장실 일정 8월 7일~9월 12일 장소 대학로 자유극장 연출 신경수 출연 배종옥, 서이숙, 정재은, 황영희 등 일본 현대 연극의 거장 시미즈 쿠니오의 대표작으로, 연극 ‘갈매기’가 공연 중인 어느 극장의 무대 뒤편 분장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서로 다른 사연을 지닌 네 여배우가 ‘맥베스’, ‘세 자매’ 등 고전의 명장면을 연기하며 무대를 향한 열정과 삶에 대한 회한을 풀어낸다. 배종옥, 서이숙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표현하는 진짜 ‘배우 연기’가 완성도를 더한다. ◇광화문연가 일정 ~9월 5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연출 이지나 출연 윤도현, 엄기준, 강필석, 차지연, 김호영, 김성규 등 이지나 연출, 고선웅 작가, 김성수 음악감독 등 최고의 제작진이 의기투합해 2017년 처음 선보인 창작 뮤지컬로, 죽음을 눈앞에 둔 ‘명우’가 미스터리한 시간여행 안내자 ‘월하’와 함께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고(故) 이영훈 작곡가의 주옥같은 명곡을 토대로 해 ‘붉은 노을’, ‘옛사랑’, ‘소녀’ 등 1980~90년대를 장악한 음악이 옛 시절의 추억을 깨운다.
- 2021-08-01 11:04
-
- 황혼 로맨스와 부부의 세계, 브라보 마이 라이프 8월호 발간
-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때와 이때의 어스름한 빛을 ‘황혼’이라 한다. 삶을 마무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어스름한 단계에 무슨 사랑이 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부의 인생에서 황혼은 죽음만을 준비하는 차분한 시간이 아니다.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시간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8월호는 커버스토리에서 ‘황혼 부부’에 관한 은은한 편견을 벗겨내는 그들만의 로맨스와 부부관계를 소개한다. 서로에게 다가가는 중년 부부 소통법, ‘관심 더하고 남 탓 줄이고’ 황혼 부부 행동 가이드, 부부가 함께하는 은퇴 설계, “내려놓으니 보였다” 퇴직 부부의 다시 쓴 이모작 등 다양한 콘텐츠로 황혼에 이른 부부가 함께 나아갈 지표도 제시했다. 김찬숙 고문의 ‘매일 나누고 베풀며 어른이 되어가는 삶’을 표지와 기사로 만날 수 있다. 서울대 총동창회 고문이자 서울대치과대학 총동창회 고문이기도 한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성실하게 채워온 진정한 멋을 느낄 수 있다. 주어진 삶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이제 ‘아이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할머니’로 거듭나고 있는 김찬숙 고문을 만나 답답했던 인생 고민의 답을 구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구해줘 부동산에서는 ‘경매로 노후 자산 만들기’를 이야기한다. 연일 집값이 고점을 찍고 있는 부동산 시장에서 경매가 새로운 투자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경매 열풍의 이유를 알아보고 경매 시 주의사항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령이 된 창업주들에게 최대 관심사는 바로 가업 승계다. 사전에 가업 승계를 위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막대한 상속세로 인해 2세대 경영자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가기 때문이다. 생활 속 법률 상식에서 소개한 ‘가업 승계를 위한 솔루션’을 살펴보면 이에 대한 준비가 가능하다. 코로나19로 답답했던 마음을 잠시나마 달랠 수 있는 이야기도 준비했다. 공항이란 장소는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공간이다. 그 설렘을 잊고 지낸 지 어느덧 2년째. 국립항공박물관에서 비행기와 하늘길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만나며 하늘 위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을 달래는 것은 어떨까? 바야흐로 여름 휴가철이다. 경탄할 만한 조선 원림을 구경할 수 있는 담양 소쇄원을 추천한다. 옛 선비들은 수상한 세상에 질려 일쑤 산야로 스며들었다.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도 그랬다. 잘 나가던 스승 조광조가 훈구파에 몰려 유배되자 그는 세상에 염증을 느껴 산골짝으로 들어가 줄곧 산중 원림 ‘소쇄원’을 가꾸며 살았다. 아름다워 정들기 쉬운 소쇄원의 매력을 물씬 느낄 수 있다. 이 외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 8월호는 ▲중년의 사랑을 보듬어주는 ‘브라보 마이 러브’ ▲김용준 프로의 골프 레슨 ‘이완’과 ‘수축’ ▲요즘 세대의 최신 문화를 파헤치는 신문물 설명서 ‘앱, 크루와 함께하는 요즘 러닝’ ▲5060 마음에 핀 청춘의 꽃, 팬덤 문화로 활짝 피다 ▲메타버스, 시니어 플랫폼으로 가능할까? 같이 알짜배기 콘텐츠로 시니어 독자들을 찾아간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8월호는 전국 서점과 인터넷에서 구매할 수 있다.
- 2021-07-28 15:09
-
- 꿈에서라도 함께 살아보고 싶었다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사랑은 언제 멈출 거나?” “볶은 콩에 싹이 나면.” 어느 드라마 속 두 여인의 대사다. 40년 전 풋사랑을 우연히 마주치면서 시작된 가슴앓이, 어쩌다 보니 그도 혼자, 나도 혼자, 그렇다고 선뜻 그를 따라나설 수도 없는 현실의 굴레에서 걷잡을 수 없는 추억의 급물살을 맞는 주인공. 가까운 친구에게 자신의 속앓이를 털어놓는 그 소용돌이에 내가 똑같이 말려들 줄이야. 사는 동안 맞닥뜨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가 있는데, 옛사랑의 현재 모습이 그 하나란다. 나머지는 작가의 맨얼굴, 요리사의 손톱 밑이라나. 그런데 어쩌랴. 봐선 안 될 40년 전 옛사랑이 내 앞에 나타났으니.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건 드라마에서처럼 우연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1년째 되던 해. 우울과 무기력으로 잿빛 세상을 버티고 견뎌내던 어느 봄날, 고향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의례적인 안부에도 지쳐 있을 나에 대한 친구의 배려였을까? 거두절미하고 전화기 너머에서 대뜸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ㅁㅁ 씨 기억나? 한번 만나볼래? 큰 의미는 둘 거 없고 잠깐 활기나 얻으라고. 너 혼자 됐다고 하니까 한번 보고 싶은가 봐. 네 남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사람으로선 네가 첫사랑 아니니.” 그의 이름을 되뇌는 순간, 나와 세상 사이의 가림막이 거둬지고 무채색 캔버스에 채색 물감이 번져갔다. 멈췄던 삶의 시간이 다시 흐를 수만 있다면…. 그는 남편의 대학 선배이자 나를 사이에 둔 사랑의 라이벌이었다. 그와 남편의 성향은 동과 서, 남과 북만큼 달랐다. 남편이 내향적이라면 그는 외향적이었고, 남편은 선비 기질인 반면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남자다웠다. 학자 타입의 남편은 섬세함에 더해 자상한 면이 있었지만, 그는 대범하고 호방했으나 예민한 감수성이나 예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40년 만의 해후임에도 남편과 세밀히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전부터 그의 기질과 성격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남편과 살면서 가슴속에 아련히 그를 품고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니다. 단지 그와 만난 3개월 동안에 파악한 것이니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내 마음의 반영이리라. “ㅇㅇ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스무 살 고운 모습 그대로네. 그때 내가 너에게 청혼도 못 해보고 네가 내 후배와 결혼한 후 한 5년을 방황했지. 이러다 폐인 되겠다 싶어서 적당한 여자를 만나 뒤늦게 결혼을 했고. 물론 좋은 여자야, 무척 헌신적이고.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네 자리를 단 하루도 더듬지 않은 날이 없었어. 꿈에서라도 한번 같이 살아보고 싶었지.” “호호. 오빠, 농담 말아요. 지금 내 나이가 60이 가까워오는데 스무 살 때 모습이 그대로 있다니. 그때 청혼하지 왜 안 했어요? 그랬다면 다시 생각해봤을 텐데.” “장난스레 말하지 마. 그때 네 남편이 군에 있었잖아. 그 사이 너와 가까워질 수도 있었지만 그건 공정한 행동이 아니지. 더구나 내가 3년이나 선배인데 요즘 젊은애들 말로 후배와 썸을 타고 있는 여자에게 대놓고 구애하는 건 안 될 일이지. 그 친구가 제대한 후 너에게 결정하도록 하려고 했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너와 그 친구가 많이 가까워져 있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활짝 열렸다. 남편과 나에 대한 배려심, 속 깊은 정의감 등이 그를 믿음직하고 매력적으로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마주 보며 대화할 수 있고 원하면 만질 수도 있다. 남편이 떠난 이후 가장 힘들었던 건 아무리 그 사랑이 컸다 해도 오감에 잡히는 한 조각의 그 무엇이 더는 없다는 것이었기에. 늦은 봄, 고즈넉한 교외의 일식 레스토랑에서 그는 머뭇대며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세 번째 만남이었다. “ㅇㅇ아, 손 한번 잡아봐도 될까?”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그의 두툼한 손이 내 손등 위에 살포시 놓였다. 따스하고 든든했다. 잠시 후 그의 손이 내 얼굴 언저리로 다가왔다.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주춤대는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 다시 나의 손등 위에 얹어놓았다. 그에게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계절의 봄은 저물고 있는데 내 인생의 봄은 이렇게 다시금 찾아드는 걸까. “꿈에서라도, 그도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부부로 만나 한번 살아보고 싶었어. 그런 너의 손을 잡아보는 데만 40년이 걸렸구나. 지금이라도 부부처럼 여행도 가고, 애들처럼 놀이공원도 가고, 손 붙잡고 맛있는 집 찾아 전국을 돌면서 걱정 없이 웃고 즐기며 젊은 한때로 돌아가고 싶다.” 남자는 시각에 약하고 여자는 청각에 약하다고 했던가. ‘꿈에서라도 살아보고 싶었다’란 그의 말이 귓바퀴를 로맨틱하게 간지럽혔다. 황홀했다. 남편과 사별 후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죽고 초라해진 내면에 자존감의 바람이 차올랐다. 허방을 딛고 있던 공허함이 메워지며, 구겨진 자존심이 펴지고, 우울증의 얼룩이 씻겨나갔다. 나는 그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며, 단 하나의 옛사랑이 아닌가! 허름한 중년 남녀가 남루한 외로움 때문에 그렇고 그렇게 만난 게 아니다. 환상이어도 좋았다. 설혹 착각이었다 해도, 허영이면 또 어떠랴. 하나로 흐르고 있는 그와 나의 시간도 물이 수소와 산소로 나뉘듯이 언젠가는 다시 분리될 것이다. 그가 나에게 가진 감정이 사랑이라 해도 결국 그는 가정으로 돌아갈 거라는 통속적인 결말을 나 또한 예상해야 할 테지. 복잡한 심사는 그뿐만이 아니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이 깊어갈수록 내 사랑의 방에는 아직 남편이 살고 있다는 것을 언뜻언뜻 확인한다. 내게 사랑의 방은 하나뿐일까. 그 방에 남편이 기거하고 있는 한 그를 온전히 들여놓을 수는 없는 것일까….
- 2021-07-09 08:00
-
- ‘밥이 보약?’ 110세↑ 장수하는 비결 따로 있다
- 밥이 보약이라는 옛말이 있다. 밥을 잘 챙겨 먹어야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오랜 믿음에서 비롯된 말이다. 어려웠던 시절, 삼시세끼 챙기는 것만으로도 장수를 바랐던 어르신들의 소망이 담겨있는 셈이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장수는 여전히 시니어의 오랜 꿈이다. 최근 외신들이 110세를 넘겨 세계 최고령자 기록을 새로 쓴 노인들의 장수 비결을 소개했다. 그들이 세계 시니어들에게 제안한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세계 최고령자로 추측되는 터키의 119세 할머니 세커 아슬란의 장수 비결은 버터와 꿀, 치즈였다. 영국 매체 메트로 등 외신은 할머니의 딸 세라프 유켈이 “어머니의 장수 비결이 자연식품을 즐겨 먹는 식습관”이라며 “식탁 위에는 늘 버터와 꿀, 치즈가 놓여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매일 아침 삶은 달걀을 드신다. 요거트도 직접 만들어 먹는다”고 말했다. 아슬란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지만 건강에 큰 이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외신은 "아슬란 할머니가 공식적으로 살아 있는 세계 최고령자일 수 있다"고 소개했다. 지금까지 세계 최고령자 기록은 일본에 사는 다나카 가네 할머니가 갖고 있다. 1903년 1월 2일 출생으로, 현재 나이 118세 5개월이다. 아슬란 할머니의 운전면허증에 적힌 출생일자는 1902년 6월 27일이다. 운전면허증 기록이 확실하다면 올해 나이 119세로, 아슬란 할머니가 세계 최고령자가 된다. 아슬란 할머니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스페인 독감(1918),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같은 역사적인 순간을 모두 겪었다. 외신은 그가 사는 동안 대통령이 12번 바뀌었고, 올해 초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도 무사히 넘겼다고 전했다. 생존하고 있는 ‘세계 최고령 남성’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112세 할아버지는 남다른 마음가짐을 장수 비법으로 꼽았다. 푸에르토리코의 에밀리오 플로레스 마르케스가 주인공이다. 1일(현지 시간) 미국 폭스뉴스와 영국 데일리메일 같은 외신에 따르면 기네스북 월드 레코드는 전날 에밀리오 플로레스 마르케스를 생존해 있는 최고령 남성으로 인증했다. 그는 1908년 8월 8일에 태어나 113세 생일을 한 달가량 앞두고 있다. 마르케스 할아버지의 장수 비결은 ‘화내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기’다. 그는 외신을 통해 “충만한 사랑을 가지고 화를 내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어 “부친이 생전에 나를 사랑으로 키웠으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아버지는 항상 착하게 살고,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말했다. 또 마음 속에 항상 예수가 살고 있음을 믿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마르케스 할아버지는 101살이었던 지난 2009년 심장 수술을 받고 심장박동조절장치를 삽입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노화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상태다.
- 2021-07-05 18:16
-
- ‘5무(無) 흙수저’로 꽉 찬 운을 뜨다
- 눈을 감고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의 오톨도톨한 점자혼용 명함을 손끝으로 더듬어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상생 염원을 담은 정 이사장의 평생 화두 ‘동반성장’ 의지가 명함에도 아로새겨져 있다. 그의 일생은 동반성장이란 궤적을 따라 굵고 길게 이어지고 있다. 관악구 신림동의 ‘동반성장연구소’에서 그를 만나 참 좋은 시절, 그때는 그랬지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본다. 운이 꽉 찬 아이, 그래서 운찬이지 ‘정운찬’, 이름을 짓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녀석 운이 꽉 찬 놈이구먼. 사주가 이렇게 좋은데 이름이 뭐 그리 대수라고 식전 걸음을 하셨나? 세상 나올 때부터 운을 가득 차고 나온 놈이니 이름은 운찬이지.” 충남 공주가 고향이지만 7식구가 상경, 도시빈민으로 동숭동 언덕배기 단칸방에서 살았다. 식구마다 칼잠에, 한 사람은 앉아서 자야 할 만큼 방은 비좁았다. 11남매 중 살아남은 5남매의 막내, 그나마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니 대박 운과는 애초 거리가 멀었다. 하기야 그는 태아 적 자궁이란 방마저 허락되지 않을 뻔했으니 세상 빛을 본 자체가 운이 좋았다고 할지. 당장 밥 한 숟가락이 절실했던 곤궁한 살림에 입 하나 더 느는 것이 무서워 어머니는 독한 약초를 진하게 달여 마셨다. 그런데 하필 그게 시궁창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익모초(益母草)였으니, 이름 그대로 산모와 태아를 ‘이롭게’ 하여 노산임에도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그로서는 기가 막힌 첫 운이었다. 그러나 27세 결혼 때까지 운찬은 여전히 ‘5무(無)의 흙수저’로 ‘운 찬’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가 크나, 인물이 좋나, 부모가 있나, 돈이 있나, 장래가 있나.” 예비 장인 장모의 평가는 가혹했다. 그러나 타고난 운은 그를 저버리지 않아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컬럼비아대 교수, 서울대 총장, 대한민국 국무총리, 동반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KBO 총재 등 올해 74세에 이를 때까지 그의 운은 숨 가쁘게 펼쳐졌다. 물론 그에게 운이란 성실성, 정직성과 같은 뜻, 다른 말이다. 어떤 학생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가르치든 대학에 맡겨야 ▶서울대 총장 시절 / 2002. 7 ~ 2006. 7 서울대를 없애려던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학교를 지킨 것을 비롯, 학원자율화 및 지역균형선발제, 소수정예화 정책을 폈다. “대학에는 자율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어떤 학생을 어떤 식으로 선발하여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든 전적으로 대학 재량에 맡겨야 한다는 뜻이지요. 지역 균형을 위해서는 전국 1700개 고교에서 최대 3명씩 추천받아 그중 1200명을 선발하는 지역균형선발제를 실시했습니다.” 또한 서울대 정원을 4000명에서 3000명으로 줄여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도쿄대나 베이징대학이 3000명대, 하버드대는 1600명대, 프린스턴대·예일대·컬럼비아대는 1300명대인 것을 감안하면 대학 수준이 양질의 교육과 비례하는 것은 자명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밖에 기초교육 강화를 위해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여 재학생들이 여유 있게 진로를 모색토록 했고, 대학 내 건물 증설보다 연구비 후원에 중점을 두었다. 삼성, 웅진 등에서 현금으로 1600억 원을 지원받아 그 가운데 100억 원을 자연과학대에 투입, 생명과학부에서 탁월한 인재를 배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특히 삼성의 도움이 커서 현금으로만 500억 원을 지원받았다. 한편 총장 공관을 부수고 그 자리에 교수 아파트를 증설하여 250여 세대에 삶의 터전을 보급했다. 그 일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칭찬을 받았다고 웃으며 회고했다. 세종시 총리 “한 나라에 행정부가 둘로 나뉠 수는 없다” ▶국무총리 시절 / 2009. 9 ~ 2010. 8 그가 국무총리가 된다고 했을 때 서울대 관계자들은 실망했다. 옛말로 하자면 총장은 대제학이고 총리는 영의정인데 자고로 대제학이 더 품위 있는 자리가 아니냐며. 그깟 총리가 뭐라고, 그것도 시시하게 이명박 정부에서 총리를 하냐며. “당시 광우병 사태로 골머리를 앓으면서 탕평책의 일환으로 제가 발탁된 느낌이었어요. 무엇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당신도 서민 출신이고 나도 서민 출신이니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마음을 움직였죠. 경제, 사회 양극화 완화 기회가 아닌가. 어려운 사람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있을까 싶었던 거죠.” 양극화 완화, 경색된 남북관계 유연화라는 나름의 청사진을 품었지만 취임 6개월 만인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남북관계는 곧바로 얼어붙었고, 설상가상 세종시 문제가 불거졌다. 그는 임기 시작도 전에 ‘세종시 총리’로 불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반쪽 행정수도 세종시는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 한 나라의 행정부가 둘로 나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대신 세종시를 기업도시, 문화도시, 과학도시화하자고 제안했으나 수도의 꿈에 부풀었던 지역민의 반대는 거셌다. 공주 출신인 총리가 되레 고향 발전을 저지한다며 ‘매향노’란 소리마저 들었다. “그 당시 매 주말마다 15차례 이상 방문하여 지역 대표들을 설득하고, 삼성·롯데·한화·웅진 등에서 기업도시 투자 명목으로 4조5000억 원을 약속받았어요. 그런데 그 안 자체가 국회에서 부결되면서 세종시 구상은 끝내 무산됐죠. 반대파한테서 차기 대권 노림수라는 오해까지 받으며 세종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결국 1년 만에 총리를 그만두게 된 거죠. 제 성정이 모질지 못하고, 무엇보다 정파적 언어를 이해 못 했던 데다 정치적 센스도 부족했다고 봅니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2010년 5월, 한 중견기업인이 찾아왔다. 연 매출이 7000억~8000억 원 되는데, 대뜸 이민을 가겠단다. 납품가 후려치기를 더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 사유였다.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 길로 대통령을 만났다. “중견기업인이 이민 가겠다고 하니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는 오죽하겠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아니면 이 나라 파탄난다”고 직언했다. 그해 9월 경제인들이 청와대에 모였고, 같은 해 12월에 동반성장위원회를 설립, 발족했다. 총리직을 물러난 뒤라 그가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코로나 무풍지대 한국 야구, 110개국에 중계방송 ▶KBO 총재 시절 / 2018. 1 ~ 2020. 12 1982년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 이래 매년 20여 회 야구장을 찾았고, 2008년에는 야구 해설도 했다.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가 된 후엔 야구계의 동반성장을 위해 노력했다. “이대호의 연봉이 25억 원인 것에 반해 무명 선수는 2700만 원에 불과해요. 연 수입이 100배 가까이 차이 나는 거죠. 어떻게든 올려보려고 애쓴 결과 3000만 원으로 타결되어 미약하나마 선수 간 연봉 격차를 좁힐 수 있었지요.” 각 팀 간의 원활한 선수 교류를 위해 자유계약제를 개선하는 등 구단과 구단 간의 동반성장에도 주력했다. 세계야구연맹 총재와 미국, 일본, 대만, 호주의 커미셔너(총재)를 자주 만나 국제화에도 기여했다. 코로나 시대 최대 성과는 720회 전 게임을 다 치렀다는 것과 게임 기간 중 1군 선수 가운데 확진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 프로 스포츠에서 유일한 경우다. 또한 코로나로 인해 자국에서 경기를 하지 못하자 미국의 스포츠 전문 방송 ESPN이 전 세계 110여 개국에 한국 야구를 중계한 것도 뜻밖의 수확이었다. 임기 동안 2018년 아시아야구대회 우승, 2019년 세계야구대회 준우승을 한 것도 큰 보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2012년 6월 스코필드 박사 동상 제막식 참석차 토론토를 방문해,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시구를 한 이후, 2018년 미국 올스타 게임 때 뉴욕양키스와 뉴욕메츠 경기에서 또 한 차례 시구한 것이 큰 추억이 되었죠. 메이저리그에서 한 팀의 시구자는 연 10명 정도라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여담이지만 역대 KBO 총재 중 경비원, 미화원들과 함께 식사한 유일한 총재이기도 했습니다.” 약자에겐 비둘기, 강자에겐 호랑이 ▶멘토 스코필드 박사와 조순 교수 캐나다인이면서 3.1운동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와의 만남은 그에게 신의 선물과도 같았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 1970년 국립현충원에 묻히기까지 한국의 가난한 학생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스코필드 박사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제게는 아버지 그 이상인 분이셨죠. 중학교 때까지 재정적 지원을 해주셨고 저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입주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면서 약자에겐 비둘기처럼 자애롭고 강자에겐 호랑이 같은 기개를 보여주신 박사님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제가 평생 추구해온 동반성장의 모본이 되신 거지요.” 그의 인생에 또 다른 멘토는 조순 교수. 조 교수는 한국 대학이 반정부 데모로 어수선했던 1960년대 후반에 경제학에 대한 그의 흥미를 북돋웠고, 미국 유학길도 열어줬다. 모교 강단에 섰을 때도 그의 옆에는 조 교수가 있었고, 반대가 극심했던 결혼도 조 교수가 중간에서 부드럽게 풀어준 덕에 성사될 수 있었다. 코로나 시대, 동반성장이 해법이다 ▶48년 해로한 캠퍼스 커플 아내와 가족 간 동반성장도 “2012년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9년째 그 해법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76차례 현장 포럼을 진행했습니다. 동반성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뿐 아니라 빈부 간, 도농 간, 지역 간, 남녀 간, 세대 간 등 사회 전반에 적용돼야 하는 희망의 가치입니다. 코로나 이후 저성장과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될 테죠. 지금도 재택근무자들은 또박또박 월급을 받는 반면 일용직이나 자영업자들은 고통에 내몰리고 있지 않습니까. 코로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는 동반성장으로 가야 합니다.” 한편 가족은 어떤 동반성장을 해왔을까. “아버지는 어린 제게도 반말을 안 하셨어요. ‘~ 하게, ~는 아니네’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머니는 저를 핥으실 정도로 아껴주셨죠. 가난했지만 사랑을 흠뻑 받고 자라서 저도 제 아이들을 민주적으로 대합니다. 48년째 ‘동반성장’을 하고 있는 서울대 미대 출신의 아내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존중하며 키웠습니다. ‘아빠찬스’를 쓴 적도 물론 없고요. 아들과 딸이 아버지, 어머니를 존경한다고 하니 이만하면 가정 내 동반성장도 이룬 것 아닌가요?” ‘신아연 작가와 나누는 참 좋은 시절’ 다음 호에는 서울신문사 발행인, 한국일보사 일간스포츠 사장, 국민일보 대표이사, 경향미디어그룹 회장 등을 거치고, 한국추리작가협회장을 지내며 400여 편의 장편 및 중단편소설을 낸 베테랑 신문인이자 소설가 이상우 씨를 만납니다.
- 2021-07-05 07:00
-
- 손주와 함께 즐기는 넷플릭스 괴수 영화
- 여름이 다가오면 공포 영화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며 흥행 보증수표로 꼽히는 장르가 있다. 바로 괴수 영화다. 거대한 몸집과 무시무시한 생김새를 보고 있으면, 화면 너머 가상의 캐릭터라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고 더위가 절로 날아가는 듯 머리털이 쭈뼛 선다. 한동안 ‘코로나19’라는 괴물로 여름의 스릴을 느끼지 못했다면, 올해는 집에서라도 즐겨보는 것이 어떨까.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상상력 풍부한 손주와 함께 즐길 만한 괴수 영화를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쥬라기 월드 (Jurassic World, 2015) 멸종한 공룡이 되살아난다는 참신한 시나리오와 시대를 앞서간 컴퓨터 그래픽(CG) 기술, 압도적인 규모. 1993년 1탄 개봉 후 3부작 시리즈로 공룡 열풍을 이끌었던 영화 ‘쥬라기 공원’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시니어라면 당시의 열풍을 기억할지 모른다. 그로부터 14년 만에 개봉한 영화 ‘쥬라기 월드’는 오리지널의 명성을 이어가면서도 한층 더 커진 스케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는 22년 전 예기치 못한 사고로 끝내 문을 열지 못했던 ‘쥬라기 공원’이 ‘쥬라기 월드’로 재탄생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새 시리즈 탄생 전까지 기나긴 공백이 있었음에도, 오리지널 시리즈와 이어지는 서사로 기존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 테마파크의 공룡이 탈출해 위기에 처한다는 줄거리가 ‘쥬라기 공원’ 1탄과 유사하지만, 화면 속을 뛰어다니는 공룡은 그 시절보다 더 다양하고 생생하다. 그와 동시에 ‘쥬라기 공원’을 오마주한 듯한 몇몇 장면은 추억을 관통한다. 옛 향수와 기술의 진보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작품. 넷플릭스에서 오리지널 시리즈도 함께 즐길 수 있다. 2. 콩: 스컬 아일랜드 (Kong: Skull Island, 2017) 시니어의 기억 속 ‘킹콩’은 로맨티스트다. 1933년 원작에서 인간의 위협을 피해 사랑하는 여인 앤을 데리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로 올라가 전투기와 싸우는 순간은 최고의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킹콩의 광팬이라는 피터 잭슨 감독의 2005년 리메이크 버전 역시 원작의 감성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12년 뒤 개봉한 ‘콩: 스컬 아일랜드’는 조금 다르다. 로맨스를 없애고, 그 빈틈을 액션으로 채운다. 또한 주인공 콩은 여인을 지키던 로맨티스트에서 섬을 지키는 수호자로 변신한다. 영화는 괴생명체를 찾는 단체 ‘모나크’가 미지의 섬 ‘스컬 아일랜드’에서 섬의 왕인 ‘콩’과 혈투를 벌이며 벌어지는 내용을 다룬다. 그곳에서 조우한 콩은 그간의 킹콩 시리즈 중 가장 막강하다. 몸집이 18m였던 원작과는 달리 30m로 킹콩 시리즈 사상 가장 거대하고, 괴문어와 도마뱀 등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괴수를 한 번에 제압해 그 위력을 입증한다. 이를 통해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며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교만함을 응징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반성을 끌어낸다. 시각적인 재미와 더불어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다. 3. 고질라 (Godzilla, 1998) 킹콩의 영원한 라이벌 ‘고질라’도 괴수 영화 장르에서 빠질 수 없는 작품이다. 1954년 일본 영화 ‘고지라’에서 출발한 고질라는 반세기 넘게 30여 편의 시리즈물로 탄생하며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캐릭터다. 크고 날카로운 발톱과 위협적인 뿔 등 킹콩 못지않게 무시무시한 생김새를 갖고 있지만, 원작 개봉 당시 관객들이 고질라를 두려워한 이유는 따로 있다. 고질라는 단순히 몸집만 큰 생물이 아닌 핵실험 중 노출된 방사능으로 만들어진 돌연변이 괴수다. 그래서인지 거칠거칠한 가죽은 도마뱀을 연상케 하고, 생김새는 공룡을, 거대한 몸집은 킹콩을 닮았다. 이 같은 설정을 바탕으로 원작에서는 일본 도시를 습격하고, 1998년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작품에서는 미국 뉴욕을 파괴한다. 괴수라는 비현실적인 공포에 핵폭탄이라는 현실의 두려움까지 더해져 큰 반응을 끌어낸 것이다. 1998년 버전 ‘고질라’는 원작을 재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론가들 사이 썩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지만, 킬링타임으로 즐기기에는 나쁘지 않다. 세계를 대표하는 두 괴수가 대결을 벌이는 ‘고질라 vs 콩’도 함께 추천한다.
- 2021-06-25 08:00
-
- ‘유산기’(遊山記)로 본 조선 선비들의 산행 방법
- 산을 애호하는 건 산에 사는 나무나 다람쥐만이 아니다. 사람도 산을 좋아한다. 특히나 한국인은 등산을 유난히 좋아하는 민족이다. 등산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냐고, 다투어 천명하는 이들이 많다. 등산에 거의 미친 사람도 숱하다. 손에 쥐면 쥘수록 번뇌의 개수도 많아지는 게 인생이다. 작가 조세희의 말마따나 ‘정신만 빼고 모든 게 다 있는 게 요즘 세상’이다. 욕망과 물신의 사주로 뭐든 배가 터지도록 탐닉하기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지구라는 행성이다. 그러나 마음은 때로 갈피 없이 흔들린다. 모래밭에 세운 부실한 가건물처럼 자주 휘청거린다. 이럴 때 사람들은 흔히 산을 찾아간다. 몸 건강을 생각해 산을 ‘야외 헬스장’처럼 애용하는 이들도 많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초록으로 반짝이는 별이 지구라지. 뭔가 고차원의 다른 별에서 바라보면 지지고 볶는 인간들로 바글거리는 지구가 영락없는 지옥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히 그러기만 하랴. 희로애락의 요지경으로 점철되는 게 지구 위의 풍정이지만, 한 번 태어나 근사한 인생을 실현하고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몸을 벗기에 좋은 게 지구별에서의 삶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등산… 등산의 효시 이렇게 골치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이 행성에서 최초로 산에 오른 이는 누구였을까? 등산의 효시를 또렷하게 짚어내기는 어렵다. 창으로 먹이를 꿰기 위해 산야를 누빈 선사시대의 호모사피엔스를 등산의 시조로 봐야 할까? 저 높은 산꼭대기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으로 산에 오르거나, 하늘의 별과 달, 또는 신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보려고 산정에 오른 자를, 혹은 산 너머 부족들의 동향을 영특하게 탐지하기 위해 은밀히 고산에 올라간 자를 최초의 등산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게다. 여하튼 등산이라 일컬을 만한 행위는 아득한 과거부터 계속 이어졌다. 우리의 선조들도 일찍부터 산에 올라가 다양한 용무를 봤다. 고대부터 숭산(崇山)을 신앙으로 삼은 민족이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다. 그리고 대체로 산이 나지막하고 아기자기해 오르기도 쉽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도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이런 유순한 산세는 오늘날까지 한국에 산행이 성행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이다. 역사서를 보면 삼국시대에 이어 고려에서도 등산이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산행이 더욱 활발했다. 학술적·군사전략적·유람적 성격의 산행이 잦았다. 암벽을 오르느라 용을 쓰는 모습이 드러나는 민화까지 보여 흥미롭다. 무엇보다 확연한 건 문인 사대부들이 즐긴 유람 성격의 산행 역사다. 자연에서, 즉 산수의 본질에서 삶의 유토피아와 학문의 지향점을 찾은 게 성리학자들이지 않은가. 사대부들은 산처럼 물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는데, 그들은 산행 뒤에 흔히 ‘유산기’(遊山記)를 기록해 남겼다.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등산은 1900년대 중반, 서구의 알피니즘(Alpinism)을 통해 유입됐다. 정상 정복의 성취 욕구를 중심에 둔 등산의 이념과 기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급적 더 높은 산을, 가급적 더 단시간에 후다닥 오르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등산이 대중 속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조선 선비들이 산을 즐긴 전통적 방식은 이와 사뭇 달랐다. 그들은 대략 세 가지 코드로 산을 즐겼다. 가만히 앉아서 산을 관조하는 ‘관산’(觀山)과 흐뭇한 경치를 즐기는 ‘요산’(樂山), 산을 돌아다니며 노니는 ‘유산’(遊山)이 그것이다. 이 셋 가운데 ‘유산’의 방식으로 산행을 했던 이들이 남긴 기행산문이 바로 유산기다. 유산기 안에는 물론 ‘관산’과 ‘요산’의 정신과 감성 역시 화학적 합성처럼 결부돼 있다. 조선이 남긴 진귀한 문화유산인 유산기는 총 560여 편에 달한다. 한가락 한 선비들이라면 다들 유산기를 남긴 것 같다. 자못 거창했던 선비들의 유산(遊山) 대열 오늘날과 달리 조선시대의 산행은 상당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번거로운 행위였다. 접근 경로도 열악하고 맹수가 들끓던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거침없이 산을 올랐다. 산을 우주의 축약으로 본 거시적 자연관을 지닌 선비들에겐 산이야말로 생생한 체험을 해볼 만한 수신(修身)의 아카데미였던 것이다. ‘나여! 너는 누구냐?’ 그런 자문자답을 습으로 삼았던 선비들은 산행을 또한 자성(自省)의 찬스로 삼았다. 아무도 뜯어말릴 길이 없도록 지독한 유산의 버릇을 가진 걸로 유명한 이는 남명 조식(1501∼1572)이다. 그는 지리산의 ‘황소갈비 같은 산마루’를 무려 열일곱 번이나 주파했으며, ‘유두류록’(流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차라리 지리산의 넋이 되고 싶었나? 기행문을 보면 “(지리산 탐승을 하다가) 초가지붕에 걸린 박처럼 죽은 송장이 되고 싶었다”고 썼으니 말이다. 남명은 평생을 일관해 경(敬)과 의(義)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새벽처럼 명증하게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고자 진력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쩔렁쩔렁 소리를 내는 방울인 성성자(惺惺子)를 늘 허리춤에 차고 살았던 건 정신의 해이를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이런 그에게 지리산은 도심(道心)을 기르는 수련장이었다. 비지땀을 쏟으며 오르막을 오르는 것을 ‘선(善)을 좇는 것’이라 했고, 내리막에서 힘쓰는 것 없이 저절로 흘러 내려가는 것을 ‘악(惡)을 좇는 일과 같다’고 빗댔다. 선을 행하긴 어렵고 악에 편승하긴 쉽다는 것을 얘기한 셈이다. 산의 운치를 맛보고, 풍경의 미태를 반기며, 벼랑을 움켜쥐고 버티는 노송의 고고한 기품을 감상하는 데에서 나아가, 인간됨의 도리를 산을 통해 새삼 깨닫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었던 거다. 그런데 조선 선비들이 고리타분한 공부벌레에 그친 건 아니었다. 풍류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살았으니까. 공부는 공부대로 열나게 하고, 짬짬이 놀 때는 또한 열나게 놀았다. 해서, 유산 목적의 산행은 풍류를 즐기는 여정이기도 했다. 주로 명산을 골라 탐승했던 그들의 유산 행차는 자못 거창했다. 오늘날 에베레스트 빙벽을 오르는 알피니스트들이 셰르파를 고용하고 원정대를 조직하는 정도는 저리 가라는 듯 화려하게 팀을 짜고 산에 올랐다. 지리산을 오를 때 남명이 거느린 무리의 면면은 실로 다양했다. 선두 대열엔 예인이나 기생들을 배치해 허리에 찬 북을 치거나 피리를 불게 했으며, 남명과 고을의 벼슬아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뒤를 따르며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음식 꾸러미나 술통을 짊어진 짐꾼들은 후미 대열을 형성했고, 길 안내는 지리산의 물정을 잘 아는 승려가 맡았다. 유산기의 귀감으로 꼽히는 ‘청량산 유록’을 남긴 주세붕(1495~1554)이 청량산을 오르며 대동한 유흥 그룹의 구색도 장관이었다. 당대 풍류계의 선수였던 주세붕 역시 인근의 공무원과 선비, 기생과 가수, 연주하는 재인, 여종 등을 두루 대동했으니, 마치 물고기들을 꼬챙이에 꿴 두름처럼 기다란 행렬이 산길을 따라 주르륵 이어졌다. 선비들의 유산에 술과 가무가 있는 유흥은 아마도 유행 품목이었던 것 같다. 요즘의 등산객들도 일쑤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나 하산 뒤에 기념으로 한잔 걸치곤 하는데, 조선 선비들의 풍성한 유흥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음마야, 선비들이 엄청 요상하게 놀았네?” 이렇게 의아해하며 눈에 쌍심지를 켤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왕지사 노닐 거라면 제대로 노니는 게 사리에 맞겠다. 게다가 조선 선비들이 유산 중에 즐긴 풍류는 어디까지나 청유(淸遊)였다. 거칠거나 혼탁한 구석이 없었다. 산중 유숙의 달밤에 한잔 마시며 주거니 받거니 음풍영월의 시를 지어 나누는 것으로 만족했다. 분수와 염치를 중히 여겨 처신을 맑게 하길 본분으로 삼은 게 선비 정신이지 않겠는가. 두 눈으로 보지 않아서 모를 일이긴 하지만, 산에 올라 엉덩이에 뿔난 짓을 한 삐딱이 선비가 있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이제 퇴계 이황(1501~1570)이 산을 사랑한 방식을 살펴볼까? 퇴계는 산을 연인처럼 평생 애지중지했다. 고도로 발육한 합리적 이성과 세련된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산은 족집게 레슨 교사처럼 믿을 만한 선생이기도 했다. 그는 도학(道學)의 번성을 평생 과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낸 인물이다. 거경궁리(居敬窮理, 경건한 마음으로 이치를 추구함)로 일관한 석학이었다. 그리고 그 위업에 부합하는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퇴계 본인은 자신을 매우 혹평했다.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다”고 탄식했다. 어이 하나? 그는 산에서 배우는 것으로 부족분을 채우고자 했다. 그에게 산은 ‘보는’ 게 아니고 ‘읽는’ 대상이었다. “사람들 말하길 글 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 하지만/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그는 시를 통해 이렇게 읊었다. 사람들은 흔히 산의 외물(外物)에 경도된다. 그러나 퇴계는 근원적인 묘리를 내장하고 있는 게 산이라 보았다. 글을 읽어 진리를 길어 올리듯, 산 또한 근본 이치를 깨칠 수 있는 학당이니 산을 유람하는 일이란 결국 인생 공부라 판단했던 거다. 퇴계도 유산기를 남겼다. 소백산을 탐승한 뒤 ‘유소백산록’을 썼다. 당시 그의 나이 48세. 유산 일정은 3박 4일. 당시의 직분은 풍기군수. 건강 상태는 매우 불량해 대동한 승려들이 의논을 하더니 견여(肩輿, 좁은 길을 오를 때 잠시 쓰는 간단한 가마)를 타고 오르라고 권유했고, 퇴계는 응했다. 이렇게 해서 때로는 두 다리로, 때로는 말을 타고, 비탈길에선 견여를 이동 장비 삼아 유산을 했다. 이런! 견여를 탄 퇴계야 편했겠지만, 가마꾼들은 그 무슨 고생이람.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꼴불견이겠으나 만족스러웠던 퇴계는 “빼어난 경치를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마”라는 논평을 적어두었다. 사람의 도리를 평생 궁구한 천하의 도학자였지만 내 몸 편하고자 남의 몸에 얹혀가는 결례엔 마음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윗분’이 따로 있고, ‘아랫것’이 별도로 있었던 계급사회에서의 일이었으니, 퇴계보다는 시대가 자아낸 소극(笑劇)이라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퇴계는 말했다. “나는 산야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DNA 자체가 산에 심취하게 구성됐다는 얘기다. 이쯤에서 그의 호 ‘퇴계’(退溪)의 뜻이 선연해진다. 그는 항상 뒤로 물러서 계곡으로,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가 산을 체험하고 궁구하며 얻은 특유의 지론도 많았다.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도산잡영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예로부터 산림을 즐겼던 사람엔 두 종류가 있다. 현허(玄虛)를 그리워하고 고상(高尙)을 섬기며 즐기는 사람이 있었고, 도의(道義)를 기쁘게 여기고 심성을 기르면서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전자를 따르자면 윤리를 어지럽힐까 두렵고, 후자의 경우는 성현이 남긴 글 찌꺼기를 탐하는 데에 그칠까 두렵다. 그러나 차라리 후자를 위해 힘쓸지언정 앞의 것을 위해 스스로를 속이진 않으리라.” 지금까지 조선조에 성행한 유산기와 선비들의 산에 관한 생각을 대략 살펴봤지만 편린에 불과할 따름이다. 고릿적 선비들의 유산과 오늘날의 등산이 서로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요량해볼 만한 대목도 없진 않을 게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잴 것도 없다. 풍속이란 어차피 시대를 따라 변전하는 것이니까. 그래도 산을 탐스럽게 주유한 건 옛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풍류는 오졌고, 심성은 산에다 조율했으니까. 특히 퇴계의 지론은 청명해 구미가 동한다. 그를 통째 청산이라 일러도 실언은 아니리라.
- 2021-06-11 1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