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동구에 위치한 ‘충장로’는 옛 모습을 간직한 보기 드문 상권이다. 현대적으로 개발된 신도시가 각광받는 요즘, 충장로는 쇠퇴한 도심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광주 시내’ 하면 여전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충장로. 이곳에는 86년간 자리를 지킨 ‘광주극장’이 있다. 고화질 사진 대신 손그림 영화 포스터, 키오스크 대신 사람이 발권하는 매표소, 거대한 필름 영사기와 빨간색 벨벳 의자까지. 광주극장의 곳곳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이자 예술영화전용관인 이곳 광주극장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광주극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독점한 지역 문화계 상황에 맞서 조선인의 자본으로 설립, 운영된 호남 지역 최초의 극장이다. 광주극장이 개관한 1935년 10월 1일은 광주의 인구가 10만 명이 넘어 광주읍에서 광주시로 승격한 날이기도 하다.
광주의 빛과 그림자를 동행해온 단관극장
그만큼 많은 광주시민의 축하 속에서 개관했으며, 광주의 성장과 민족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25년째 광주극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형수 이사는 “1930년대를 생각해보면 1250명 수용 규모의 극장 건물을 조선인이 세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냐”라며 “당시 광주극장은 광주의 랜드마크였다”라고 설명했다.
일본인이 설립한 극장들은 일본 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것에 반해, 광주극장은 조선인을 위한 문화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당시 극장 외에 시민회관이나 공연장 등 문화를 향유할 공간이 없어 지역의 모든 문화행사는 광주극장에서 진행됐다. 영화는 물론이고 한국 고유의 창극, 국극 등의 공연을 비롯해 판소리, 연주회, 그리고 예술대학의 졸업발표회까지 이곳에서 열리며 광주 지역의 다채로운 문화공간으로 기능했다.
이외에도 일본인의 눈을 피해 조선인들끼리 응집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다양한 목적으로 집회의 장이 되기도 했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 메달을 따온 선수들의 환영회도 암암리에 진행됐고, 해방되던 해에는 해방 축하대공연도 광주극장에서 열렸다. 김 이사는 “광주극장의 역사를 들어보면 극장이란 공간이 참 다이내믹하다”라며 “한 편의 영화와 같이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극장이다”라고 설명했다.
1968년 1월 큰 화재로 건물 전체가 전소되면서 광주극장은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TV가 보급되던 1960년대 후반, 극장 산업이 크게 주춤했던 터라 극장을 접으라는 주위의 만류가 많았다. 하지만 당시 광주극장을 운영하던 설립자의 아들 최동복 씨는 아버지의 유지를 저버릴 수 없다며 극장을 개축해 같은 해 10월 다시 운영하기 시작했다. 외관은 달라졌지만 더 튼튼한 건물을 세울 수 있었고, 1935년에 새긴 석각은 다행히 화재를 면해 건물 상단에 다시 세웠다. 이 석각은 광주극장의 상징이 되었다.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1980년 5월엔 광주의 아픔도 함께했다. 광주시민들은 그들에게 가해진 무차별 폭격을 피해 광주극장으로 숨어들었다. 해방 이후 벌어진 잔인한 사태에 광주극장은 다시 한번 시민들을 보호했다.
독립예술영화로 관객과 호흡
광주와 오랜 역사를 공유하며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 역할을 해오던 광주극장은 2000년대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이했다. 기존의 단관극장과 달리 복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고, 첨단 시설로 영화 감상의 질을 제고하는 ‘멀티플렉스’의 등장은 영화 산업의 성장과 함께 자본에 의해 극장이 운영되는 변화를 가져왔다. 단관극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했고, 잘 만든 한국 영화들이 극장에서 대우받지 못하고 상영 기간마저 보장받지 못한 채 내려가는 경우도 다수였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광주극장은 2000년부터 광주에서 개봉되지 않은 영화를 골라 심야에 상영하는 ‘레이트쇼’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등 뛰어난 작품성에도 주목받지 못한 영화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독립영화의 유통이 어려워진 구조적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영화진흥위원회는 2003년 ‘예술영화전용관’ 사업을 실시했고, 광주극장은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선정되어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상에서 극장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여러 가지다. 김 이사는 “다채로운 영화를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 독립예술영화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것 전부 극장의 역할이다”라며 “광주극장은 대중성은 부족해도 의미 있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로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극장이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길이었다. 상업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예술영화전용관은 보조금 없이 입장 수익만으로는 극장 유지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광주극장은 관람료도 매우 싼 편이다. 주말이면 1만 원이 훌쩍 넘는 멀티플렉스의 관람료에 비해, 광주극장의 관람료는 주말, 평일, 시간대에 상관없이 8000원이다. 65세 이상 노인은 50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물가가 크게 오른 최근 10년 동안 변동이 없는 가격이다. 관객이 많은 편도 아니다. 하루 관객이 몇 명 정도 되냐는 질문에 김 이사는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가 활개를 치는 코로나 시국에도 극장에 발걸음해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라며 “독립예술영화를 통해 시민들의 취향과 생각을 공유하고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라고 답했다. 그의 말처럼 광주극장은 이곳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애정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광주극장은 입장 수익과 예술진흥위원회 사업 보조금, 그리고 440여 명의 후원자가 매달 1만 원 이상씩 기부하는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말이다.
상영할 영화가 마땅히 없었던 예술영화전용관 사업 초창기와는 달리, 지금은 관객들도 다양한 영화를 보고자 하는 니즈가 있어 독립예술영화를 수입하는 배급사, 만드는 제작사도 다양화됐다. 광주극장은 이왕이면 멀티플렉스에서 소외된 영화들을 관객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매년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예술성을 인정받는 영화들이 나오는데 그런 영화들조차 생각보다 접근성 좋게 볼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광주극장은 이렇게 작품성이 뛰어남에도, 대중성이 떨어지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한 영화들을 적극적으로 상영하고 있다.
광주극장의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작년부터는 젊은 세대에게 광주극장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기념품을 제작·판매한다. 주로 광주극장에 애정을 가진 광주시민 작가들과 협업하여 광주극장의 역사를 아카이빙하고 옛 디자인을 활용해 스티커, 포스터, 에코백 등 기념품을 만들었다. 광주극장의 오랜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도 판매 중이다. 김 이사는 “극장의 미래를 위해서는 젊은 관객이 필요한데, 기념품은 이들에게 극장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극장의 역사가 쌓이니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해 정체성을 표출할 수 있어 좋다”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극장 옆 골목을 활용해 문화예술 공간으로서의 정체성도 확장했다. 흉흉했던 골목길에 광주의 극장들과 영화문화사를 볼 수 있는 ‘메모리 월’ 등을 설치해 문화와 역사가 있는 골목길로 탈바꿈하고, ‘영화가 흐르는 골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골목이 정비되니 인문학 서점, 독립기획자들의 갤러리도 생겨났다. 김 이사는 “젊은 기획자들이 들어옴으로써 앞으로 더 특색 있는 문화기획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며 “이런 문화자원들이 몰려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충장로를 찾을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는 곳, 광주극장
한때는 광주의 자랑스러운 랜드마크였던 광주극장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그저 낡은 건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누가 광주극장의 가치를 알아줄까’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한결같이 광주시민들의 곁을 지켜오고 있다. 그 세월이 긴 만큼 소년·소녀 시절부터 40~50년 동안 광주극장을 애용하신 할머니, 할아버지 단골손님들도 극장을 찾는다. 이들에게 광주극장은 언제 방문해도 변함없이 충장로 5가를 지키는 반가운 공간이다.
김 이사 역시 광주극장을 사랑하는 시민 중 한 명이다. 그는 사원으로 입사해 이사직에 오르기까지 25년을 광주극장과 함께하고 있다. 그 25년에는 멀티플렉스가 들어서며 극장이 위기에 처한 순간부터 예술영화전용관으로서 정체성을 키워오기까지 광주극장의 역사와 그의 청춘이 함께 맞물려 있다. 김 이사는 “일을 하면서 힘들 때는 극장을 뛰쳐나가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극장에서 상영되는 많은 영화를 보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내가 느낀 영화의 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라며 살짝 웃었다.
광주극장에 대해 알면 알수록 광주극장이라는 공간과 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들 간의 따뜻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의 끊임없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잔잔하게,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는 극장. 그리고 노후한 극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변함없는 애정으로 극장을 찾는 지역시민들. 이들의 호흡이 광주극장에 쌓인 오랜 시간을 함께 지켜가고 있다. 올해 86주년을 맞은 광주극장에 90주년, 100주년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차 한잔 마실 공간이면 충분하다는 뜻일까. 용암정 별서(別墅)엔 별반 있는 게 없다. 물가에 정자 하나 세우고 끝! 조선의 별서치고 이보다 가뿐한 구성이 다시없다. 별서란 요즘 말로 ‘세컨드 하우스’다. 상주하는 살림집 인근의 경치 좋은 곳에 지은 별장으로, 사교와 공부와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었다. 그래 일쑤 멋 부려 꾸몄다. 연못을 파거나 정원을 꾸리고, 객실을 보태기도 했다. 용암정은 다르다. 치레를 극구 삼갔다. 은자의 심중은 허허롭다. 차 몇 잔이면 하루가 가득 찬다. 그러니 정자 외에 무엇을 덧붙일 것인가.
용암정은 거창의 경승지인 위천(渭川) 중에서도 빼어나다는 요수천 계곡에 있다. 예로부터 신선이 살 만한 동천이라 이름난 골이다. 가을이 깊어 물가에 서린 고적한 정취가 짙다. 숲에선 단풍이 곱게 무르익다 못해 어느덧 잎잎이 지상으로 추락한다. 발길에 밟히는 마른 낙엽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짠해 정이 간다. 접때는 은성한 초록 잎이었던 게 순식간에 저물다니. 이게 잎사귀만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나. 목숨 가진 것들 모두 머잖아 시들 수밖에 없다. 나날이 조락으로 가는 길이다. 가을은 이렇게 문득 삶의 순리를 바라보게 한다. 낭만과 여행을 즐기기에 제격인 계절이지만 그 뒷면엔 서러운 게 있다.
용암정으로도 낙엽이 분분히 흩날려 내린다. 고요한 눈길을 매달고 하늘하늘 내려오는 낙엽들. 스산하다기보다 애틋한 정경이라 가슴을 파고든다. 물가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늦가을의 정자 하나. 이는 어쩌면 내향적 풍경의 절정이다. 거기엔 뭔가 사람을 위무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그대여, 지친 마음을 여기에서 내려놓아라, 야윈 등을 기둥에 기대고 까짓것 세상 근심일랑 헹구어라. 정자가 그리 속삭이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면 정자란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센서를 부착한 전위적 시설물이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안는 시(詩)이자 추상화다. 하기야 정자를 폼 잡자고 지었으랴. 허영으로 지었으랴. 마른 멸치대가리처럼 누추한 게 삶일망정 마음을 돋워 생기를 얻을 방편으로 지은 공간일 것이다. 정자에 올라 자연으로 진입, 뿔과 발톱이 없어도 야성으로 생동하는 초목을 닮고자 지은 ‘정신의 집’일 테다.
용암정은 향촌의 선비 임석형(林碩馨, 1751~1816)이 지은 별서다. 그는 행실과 학문이 빼어나 당세는 물론 후세까지 추앙받았다더라. 그의 가문에는 벼슬길에 오르기보다 초야에 묻히기를 좋아하는 풍조가 대대로 이어졌다. 청빈을 삶의 꽃으로 삼았던가 보다. 임석형 역시 가풍의 영향을 받아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백수로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재물과 권세라면 껌뻑 넘어가는 게 사람이다. 임석형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취직을 한 바 없어 생계는 팍팍했겠지만 배포는 태산이었나? 그는 적게 먹고도 유유하게 노니는 재능을 발휘했다. 일러 안빈낙도다. 생의 절반쯤을 백수로 살며 찬연한 족적을 남긴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 조선의 인걸들 중엔 궁색한 호구에도 아랑곳없는 뚝심으로 기차게 활갯짓한 아웃사이더가 많았다. 임석형이 바로 이 늠름한 계보에 속한다. 그는 숲을 소요하는 낙을 최상으로 쳤다. 용암정을 지어놓고 읊조린 노래가 이랬다. ‘이곳에 만약 학을 탄 나그네가 찾아온다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숲에서 늙으리라.’
숲 사이 계곡으로는 물이 흐른다. 덕유산과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합쳐진 물길로 수정처럼 맑다. 깊디깊은 산골짝 물도 아닌 것이 티 없이 순수하니 희한하다. 여름철엔 여기서 텀벙, 저기서 풍덩, 물놀이하는 이들이 숱하다. 늦가을의 물은 차가워 물빛조차 푸르다. 파란 유리를 얹어놓은 듯이. 물 위로는 당싯당싯 낙엽이 떠내려간다. 물 아래는 숫제 낙원이다. 크리스털로 세공한 양 투명한 물고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풍처럼 몰려다닌다. ‘초사’(楚辭)에서 어부가 말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는다.’ 청정한 물에서 담백한 처신의 방법을 읽은 셈이다. 임석형이 청명한 물을 그윽이 관조할 수 있는 냇가에 정자를 지은 이유가 또렷해진다. 뒤집히고 또 뒤집히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이 요란한 소동을 청류로 빗자루 삼아 쓸어냈을 테다. 그런 뒤에야 풍류도 옹골찬 법이다.
물만이 용암정의 뜻과 멋을 돋우는 건 아니다. 보라! 희디흰 기암괴석이 지천으로 널브러져 한바탕 경연을 벌이는 게 아닌가. 물에 발목을 담근 바위들. 바위의 무릎을 베고 누운 소(沼). 바위벼랑을 쏜살처럼 내닫는 물살의 아우성. 이를 일러 임석형은 ‘하늘의 작품’이라 했다. 이곳을 ‘별유천지’라 일컬었다. 물과 바위의 컬래버레이션은 늘 성황리에 펼쳐지게 마련이다. 옛 선비, 자그만 정자 하나 짓고 볼 것 다 봤다. 큰돈 안 들이고 놀 것 다 놀았다. 풍류란 돈으로 살 수 없다. 주저앉은 생각을 탓할망정 주머니 사정 핑계될 일이 아니다.
답사 Tip
위천변엔 호젓한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다시 경승을 만날 수 있다. 용암정 위쪽에는 신선이 내려왔다는 강선대와 강선정이, 아래쪽으로는 요수정과 수승대가 있다.
바야흐로 'OTT 춘추전국시대'다. 좋아하는 방송을 ‘본방사수’하기 위해 TV 앞에 앉는 것이 특별한 이벤트가 될 정도로, 언제 어디서든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원하는 콘텐츠를 선택해 보는 것이 일상이 됐다. 넷플릭스, 왓챠, 티빙 외 최근 디즈니+와 애플TV+ 등 글로벌 OTT(Over-the-Top, 인터넷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들도 국내 출시를 본격화하면서 OTT 서비스 구독자도 크게 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중장년층 역시 OTT를 적극 이용하고 있다. 5060 세대 라이프 스타일 조사 플랫폼인 ‘에이풀’에 따르면 8월 13일~8월 27일까지 50세 이상 264명을 대상으로 ‘5060 세대의 OTT 서비스 이용률’을 조사한 결과, 65%인 10명 중 6명 이상이 OTT 서비스를 이용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OTT 서비스 브랜드에 대한 질문에 ‘넷플릭스’가 46%로 1위를 확인됐다. ‘웨이브’,‘티빙’이 14.3%, ‘유튜브 프리미엄’ 11.1%로 뒤를 이었다.
넷플릭스는 현재 가장 유명한 OTT 서비스로서 많은 중장년층의 선택을 받고 있지만, 다양한 플랫폼이 출시돼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자신의 취향에 맞는 OTT를 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OTT 구독의 가장 큰 기준은 '어떤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는가'다.
OTT의 대명사, ‘넷플릭스’
2016년 한국 시장에 진출한 넷플릭스는 가장 오래된 OTT 플랫폼이자 'OTT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넷플릭스의 성공을 이끈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장르 불문 다양한 콘텐츠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 예능,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를 제공한다.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는 오리지널 콘텐츠 역시 넷플릭스에 인기를 더한다. 콘텐츠 투자에 아낌이 없는 넷플릭스는 '킹덤', 'D.P.'에 이어 최근 '오징어 게임', ‘지옥’이 전 세계에서 '잭팟'을 터트렸다.
오리지널 콘텐츠와 전 세계 다양한 국가의 콘텐츠가 넷플릭스의 큰 장점이지만 국내 콘텐츠에서는 약세를 보인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를 제외한 예능 프로그램 등 다채로운 장르의 콘텐츠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아울러 ‘마블’이나 ‘해리포터’ 등 큰 팬덤을 지닌 유명 시리즈들도 넷플릭스엔 없어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콘텐츠는 많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콘텐츠는 없어서다.
이 영화가 있다고? ‘왓챠’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최근 콘텐츠를 다수 보유한 넷플릭스와 달리, 타 플랫폼에 없는 다양한 영화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왓챠의 차별화된 장점이다. 쉽게 보기 어려운 독립영화나 해리포터, 홍콩영화, 2000년대 인기 드라마‧예능 등 매니아 층이 두터운 콘텐츠를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인기 유튜브 콘텐츠 ‘좋좋소’, ‘가짜사나이 시즌2’ 등 인기 유튜브 콘텐츠도 제공하고 있다.
고전 영화 등 쉽게 보기 어려운 콘텐츠를 보유했지만 아쉽게도 최신작은 부족한 실정이다. 큰 규모의 대형 콘텐츠나 최신작보다는 고전 영화나 독립영화, 단편영화 등의 취향을 가진 이용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지상파 방송이 보고 싶다면, ‘웨이브’
2019년 국내 OTT 시장에 뛰어든 웨이브는 SK텔레콤의 옥수수(Oksusu)와 지상파 3사의 푹(POOQ)이 합쳐져 탄생한 서비스로, 지상파 3사와 종합편성채널(JTBC 제외)의 콘텐츠를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무한도전·1박2일·런닝맨 등 인기 지상파 예능을 즐기거나 Quick VOD를 통해 실시간 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
다만 다양한 콘텐츠로 국내 콘텐츠 트렌드를 이끄는 JTBC와 tvN의 콘텐츠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것은 웨이브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또 충성도 높은 시청자층을 보유한 스포츠 채널 역시 서비스하지 않는다.
CJ, JTBC 콘텐츠를 원한다면, ‘티빙’
국내 최장수 OTT 서비스인 티빙은 웨이브에서 볼 수 없는 CJ ENM과 지상파 방송 등 케이블 TV 채널, 그리고 JTBC의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다. tvN, Mnet, On Style, Olive, OCN 등을 포함한 CJ 계열사 채널과 JTBC, EBS, YTN, 연합뉴스 등 38개 채널의 콘텐츠를 실시간 및 다시 보기가 가능하다. CJ 계열 영화의 업로드가 빠르다는 것도 티빙의 큰 장점이다. 최근에는 ‘환승연애’, ‘유미의 세포들’, ‘술꾼 도시 여자들’ 등 오리지널 콘텐츠로 트렌드를 이끌며 눈에 띄는 성과도 내는 중이다. 반면 CJ ENM 콘텐츠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그 외 다른 콘텐츠는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디즈니‧마블 마니아라면, 디즈니+
지난 12일부터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 디즈니+는 LG유플러스와 손잡고 국내에 발을 디뎠다. 넷플릭스가 새로운 콘텐츠 부분에서 우리를 즐겁게 했다면, 디즈니+에는 그동안 우리를 즐겁게 했던 익숙한 콘텐츠가 있다. 디즈니, 픽사, 마블,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디즈니 브랜드’의 각종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을 전부 볼 수 있다. 특히 어벤져스, 스타워즈 등 국내 많은 팬을 보유한 유명 시리즈 물을 보유해 국내 출시 전부터 많은 팬의 기대를 받은 바 있다.
애플 오리지널 콘텐츠만, ‘애플 TV+’
애플TV+는 지난 4일 SK브로드밴드와 손잡고 한국에 진출했다. 언제나 평범함을 거부하는 애플은 이번에도 색다른 행보를 선보였다. 콘텐츠의 양이 인기와 직결되는 것처럼 모든 OTT 플랫폼이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고자 애를 쓴다. 하지만 애플TV+는 ‘애플 오리지널 콘텐츠’만으로 운영하겠다는 방침으로 “양보다는 질로 승부보겠다”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애플TV+가 한국에 론칭하면서 내세운 한국 오리지널 작품인 ‘닥터브레인’으로 국내 이용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그 외 눈길을 사로잡는 콘텐츠를 찾기는 힘들고 자체 콘텐츠 라인업은 타 플랫폼보다 현저히 적다. 콘텐츠 확보는 애플 TV+의 큰 숙제로 보인다.
이 밖에도 ‘HBO맥스’, ‘아마존프라임비디오’ 등도 한국 진출 시점을 점치고 있어 OTT 서비스의 치열한 경쟁은 앞으로도 지속할 전망이다. 국내 OTT에 이어 글로벌 OTT의 한국 진출도 가속화하면서 소비자들은 여느 때보다 방대한 콘텐츠에 둘러싸이고 있다.
문제는 각 플랫폼마다 보유하고 있는 콘텐츠가 달라 OTT 플랫폼 다양화로 구독료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탓에 일각에서는 절약 차원에서 모르는 사람과도 계정을 공유하는 이용자들이 많아지고, 최근엔 계정 공유를 안전하게 중개해 주는 업체까지 다수 등장하는 상황이다.
가을이라 해도 날씨는 여전히 온화하다. 강릉으로 떠나며 날씨를 검색해보았더니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다. 환절기의 쌀쌀함을 즐길 때는 아닌 것 같아 머플러랑 니트를 주섬주섬 더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릉은 언제나 따스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고, 그곳은 언제나 따스하게 날 맞는다. 아마 앞으로도 또 그럴 것 같은 강릉.
명주동 거리, 강릉의 ‘핫플레이스’이라고 했다. 명주(溟州)는 신라 시대에 강릉을 이르던 지명으로 ‘바다와 가까운 아늑한 땅’이란 뜻이다. 1500년 전의 고도 명주는 예부터 문화·행정의 중심지이던 곳인데 강릉 시청이 옮겨가면서 한물간 구도시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런데 이젠 달라졌다. 구도심 귀퉁이 마을인 명주동 일대가 요즘의 레트로 바람을 타고 찾아가고 싶은 원도심으로 변신했다.
가을볕 아래 명주동 문화마을 천천히 걷기
강릉 대도호부 관아 건너편에서 시작해 그 주변 동네와 골목 한 바퀴를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어릴 적 추억도 소환하고, 숨겨진 예쁜 가게를 발견하는 재미가 걷는 내내 이어지는 풍경. 드라마 시대극을 연상케 하는 오래된 주택과 상점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나미 명주. 시나미는 ‘천천히’ 또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강원도 말이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존하는 뉴트로 강릉의 모습이 보인다. 시공을 넘나드는 이 골목에서는 저절로 천천히 걷게 된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벽돌담 모퉁이를 돌면 유년의 뜰에서 늘 보았던 백일홍이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 있다. 반쯤 열린 나무 대문 앞으로 한 무더기씩 뿌리내린 채 꽃을 피워 올린 소박한 식물들이 예쁘다.골목 여행을 하는 이들을 위한 주민들의 자발적 배려다. 저절로 따스함을 얻는다. 낡은 담벼락에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바른 글씨체로 세 줄 적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세월이 느껴지는 담장에 켜켜이 스며 있는 옛이야기를 느끼며 그 길을 걸어간다. 쭉 걷다 보면 빈티지하면서도 멋스러운 건물들이 간간이 눈길을 끈다.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봉봉 방앗간’ 건물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장면으로 더 유명해진 집이다. 근처의 작은 공연장, 박물관, 예술마당, 프리마켓 등의 문화공간에 슬슬 가을 분위기가 덧입혀지는 중이다. 골목길을 걷다 잠깐 앉았다 갈 수 있도록 가게 앞에 의자를 놓은 인심이 더 멋진 풍경을 만든다. 그 의자에 한 번씩 앉아 사진을 담는 여행자들 덕분에 아예 포토존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찾아가 보고 싶은 ‘인싸들의 강릉 여행지’가 되었고, 곳곳에 젊음의 생기발랄한 에너지도 풍겨난다.
오래된 건물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 단장한 소박한 점포들, 골목상권의 소상공인을 여행자와 연결해주고 쇠락한 골목길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신구(新舊)가 공존하는 원도심 거리답게 옛집을 개조한 카페 ‘오월’의 격자무늬 창문 너머로 동네 할머니가 뒷짐 지고 걸어가시던 골목길 풍경 또한 가을볕에 아련하다. 정겨운 가을날이다. 강릉의 구도심을 온몸으로 느끼며 마실 가듯 천천히 느릿느릿 타박타박 걸었던 명주동 골목 나들이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명주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건너편 강릉 대도호부 관아(사적 제388호)에 들어가 보는 것도 의미 있다.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곳이다. 강릉 임영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객사문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대청이 있는데 '임영관'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이다. 현재 객사문은 이 터의 남측에 국보 제51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은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했던 집경전(集慶殿) 터다. 해설사님의 해박하고 구수한 해설로 역사적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누구나 원하면 미리 신청해서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관아 곳곳에 우뚝 선 고목이 되어버린 은행나무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바다 언덕 위에 펼쳐진 예술 세계
이제는 시원한 바다를 보며 예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는 전시 공간에서 감성을 충전할 때다. 묵은 스트레스도 날려버릴 시간이다. 강릉의 괘방산 자락을 배경으로 등명마을에 자리 잡은 ‘하슬라 아트월드’. 산과 바다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함께하는 아트월드다.
조각가 부부가 힘을 모아 만들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움을 선보이고 있는 하슬라 아트월드. 하슬라는 고구려 때 부르던 강릉의 옛 지명이다. 현대 미술관, 아비지 갤러리, 터널 설치미술, 체험학습실, 피노키오 박물관, 마리오네트관 등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가 터널을 통과하고 고래 뱃속 터널을 지나 지하 계단, 그리고 피노키오 전시관과 마리오네트 전시관까지 감상하는 내내 눈이 즐겁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곳. 발길 닿는 곳마다 포토존이다.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야외 조각공원은 예술 정원으로 3만3000평의 드넓은 자연 속에 있다. 어딜 돌아보아도 산과 바다. 이처럼 바다가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 또 어딜지. 이어지는 스카이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자연을 만끽한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건강하게 로스팅한 산야초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다. 문화예술 공간에서 하루나 이틀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해 아트월드 안에 호텔도 있다.
설화 속의 월화거리 즐기기
강릉을 떠나기 전 전통시장인 강릉중앙시장에도 잠깐 들러봐야 하지 않을까. 강릉역으로 가는 길에 들른 시장통엔 매스컴을 통해 이미 유명해진 아이스크림호떡과 치즈호떡을 맛보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맛집들이 즐비하다. 마늘빵과 닭강정 역시 인기여서 사람들이 찾아드는 모습이다. 군것질을 하며 시장 구경을 즐기다 보면 여행은 더욱 흐뭇하다.
중앙시장을 지나 KTX를 타러 가는 길목에 월화거리로 가는 화살표가 있다. 강릉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교동의 ‘월화거리’는 강릉 도심을 지나던 폐철도 부지에 조성된 공원 시설이다. KTX 강릉선 개통으로 강릉 도심 철도가 지하화되면서 옛 지상 철길은 유휴지로 남게 됐다. 강릉시는 기차가 달리지 않게 된 이 공간을 공원화한 것이다.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월화 풍물시장은 기존에 있던 시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어졌다. 메밀전병이나 감자떡 등 강원도 토속음식은 물론이고 다양한 간식거리로 옛 분위기를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월화거리는 강릉 월화정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시대 화랑 무월과 강릉 지방 토호의 딸 연화는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경주로 돌아간 무월에게서 연락이 없고 연화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상황에 처한다. 이에 연화는 산책하던 연못의 잉어에게 편지를 전달함으로써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혼인하게 된다는 것이 월화 설화의 주요 내용이다. 사랑의 메신저가 잉어라니. 무월과 연화의 이름에서 따온 월화정이 있는 이곳을 월화거리로 만들어낸 것이다. 걷는 내내 눈길을 끄는 갖가지 구조물이나 꽃 조형물들이 시민들과 여행자들에게 힐링을 선사한다. 강릉역에서 부흥마을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노선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시장과 월화거리를 지나며 강릉역이 저편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에 서울 강릉 간 KTX가 개통되면서 114분 만에 강릉에 도착할 수 있어 강릉 당일 여행이 쉬워졌다. 강릉선은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청량리-상봉-양평-만종-횡성-둔내-평창-진부-강릉 도착이다. 일상을 벗어나 바다도 보고 하루쯤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을 때 강릉이 있다.
그녀는 일종의 구원이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모임에 끌려다녔던 시절, 자리에 빈 병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신입생은 순서대로 일어나 노래를 한 곡씩 뽑아야 했다. 흥이 나는 노래는 잘 몰랐지만, 평소 즐기는 노래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당신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인연은 인생의 주요한 길목에서 계속 힘이 되어줬다. 어려서는 이 노래의 주인이 누구인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가수 이자연을 만나기로 했을 때, 혼란스러웠던 시절 힘이 되어주었던 이 노래에 대한 감사 표시는 하고 싶었다. 그간의 도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자연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발견한 한 가지 특징은 바로 ‘가족’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그 애틋한 마음을 오래 품고 살아서인지, 그녀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을 가족에 비유하기를 즐겼다.
형제애로 다져진 나훈아와의 인연
일본에서 활동할 때 NHK 한국어 프로그램 출연의 계기가 된 재일교포 민단에서 활동하던 언론인을 ‘일본 아버지’라고 부른다. ‘일본 엄마’는 두 분이나 계신다. 4년간이나 이어졌던 일본 생활에 힘이 됐던 사람들이다. 아직 생존해 계신 일본 엄마는 여전히 안부를 챙길 정도다.
또 다른 가족 중에는 가요계의 거목 ‘나훈아’가 있다. 그녀는 “아마 전생에 형제였을 것”이라 표현한다.
“1982년 길옥윤 선생님 소개로 한일친선협회 일본 공연에 합류하게 됐어요. 거기서 나훈아 선배님을 처음 알게 되었고요. 무명이었던 제가 두 분께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나중엔 선배님과 반반씩 나눠 공연할 정도가 됐으니까요. 나훈아 선배님과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많은 빚을 지고 있죠.”
일본 공연이 끝나던 1986년 이자연은 나훈아에게 큰 선물을 받았다. 온 국민이 손뼉 치며 불렀던 그 노래 ‘당신의 의미’다. 애초에 이 곡은 나훈아가 1969년 발표했던 ‘내 당신’이 원곡이다. 개사를 거치고 제목까지 바뀌었으니 ‘감히 나훈아의 곡을 개사했다’는 오해도 받았다.
“처음엔 신곡인 줄 알았어요. 나훈아 선배님이 주신 곡이라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죠. 이 곡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개사된 곡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죠. 선배님이 여자 노래로 가사를 바꿨다고 설명해주시더라고요.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아서, 나중엔 ‘내가 더 잘 불렀다’고 농을 할 수도 있었어요.”
실제로 나훈아와의 인연은 그녀가 ‘가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사나이 눈물’ 역시 나훈아가 불렀던 곡을 다시 받아 발표한 것이고. ‘서울나그네’는 나훈아가 작곡한 다음 날 이자연에게 곡을 소개했다가 주인이 바뀌었다. 그녀는 당시 상황을 “빼앗다시피 졸라 곡을 얻어왔다”고 표현했다. 이자연의 곡 ‘만남과 이별’, ‘백세시대’, ‘친구야’를 만든 작곡가 박성훈도 나훈아를 통해 알게 된 인연이다.
“남들은 선배님 얼굴 한 번 보려고 티켓 구하느라 분주하고 암표도 사는데 저는 옆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어 늘 감사해요. 대한가수협회 회장이 되고 나서 인사드리러 갔을 때는 협회 발전기금까지 주셨으니까요. 선배님의 제자로 데뷔 때부터 계속 도움만 받으며 살고 있어요. 선배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살아요.(웃음)”
잊지 못할 인생의 버팀목, 아버지
그 많은 아빠와 엄마, 오빠와 언니 가운데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주는 기둥이 한 사람 있다. 진짜 가족, 바로 아버지다. 그녀가 중학생 신분으로 1973년과 1974년 지역 MBC와 KBS 노래자랑에서 최고상을 연이어 수상하고, 음반 취입까지 이뤄졌을 때 아버지는 한탄했다. 자신의 딸이 딴따라가 돼서도 아니고, 당신이 희망하는 직업을 갖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자식의 재능이 빛나는 분야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맘껏 지원해줄 수도, 맘 편히 응원할 수도 없어서 한스러웠다.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걱정은 어느 날 현실이 됐다. 성인이 된 이자연의 가수 선언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활동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죠. 늘 무대를 꿈꾸던 소녀였으니 제안을 마다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죠. 1년만 하게 해달라고. 그 후에는 진학을 하든 시집을 가든 아버지 뜻에 따르겠다고 설득했어요.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을 얻어 야간업소를 시작으로 무대를 찾아다녔죠.”
하지만 그 1년이라는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딸은 늘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겠다’며 고집스럽게 맹세를 이어갔지만,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이 상황을 변화시켰다. 이자연은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됐고, 가수 생활로 동생 네 명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전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어요. 아버진 소년 시절부터 동네에서 노래 잘하기로 유명했는데, 동네의 열성 팬 중에 외할머니도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점찍어놓고 어머니와 결혼시켰어요.(웃음) 아버지는 재능을 펼쳐볼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대신 저를 내보내신 것 같아요. 노래할 때 고음에 다다르면 아버지 목소리가 나와요. 어릴 때 듣던 그 목소리 말이에요.”
꼬마 이자연은 일터에 나가는 아버지를 꼬리처럼 따라다녔다. 그 자리에서 노동요처럼 불렸던 ‘황성옛터’나 ‘번지 없는 주막’을 배웠다. 또 아버지가 좋아하던 ‘새타령’이나 ‘릴리리아’ 같은 민요도 함께 불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들을 사이좋은 부녀는 함께 불렀고, 아버지의 노래가 좋았던 소녀는 가수의 꿈을 키웠다. 이 곡들은 이자연이 자신의 노래가 많지 않던 신인 시절 공연의 레퍼토리로 쓰였다.
“콘서트에서 이 곡들을 부를 때는 기타나 아코디언 하나만 놓고 무대를 꾸며요. 조용한 반주 속에 노래하다 보면 하늘에서 아버지가 들어주실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그러다 보면 자꾸 눈물도 나고요. 요즘엔 공연 전에 아버지를 향해 ‘파이팅’을 외치며 무대에 오르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MZ세대와 동기동창이 되다
“나 학교를 다녀볼까?” 언니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동생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라에 연이어 국장이 생기며 설 무대가 사라진 언니가 궁핍해졌나 걱정돼서가 아니었다. 네 명의 동생은 가수 언니를 후광 삼아 대학도 나오고 출세를 했는데, 정작 본인은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늦은 나이지만 배움을 시작하겠다 선언한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자매는 쉬지 않고 눈물을 훔쳤다.
늦은 나이에 배움의 한을 풀기 위해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학부생부터 차근차근 제대로 절차를 밟아나가는 이는 찾기 힘들다. 이자연은 정공법을 택했다. EBS 교재를 손에 잡고 방송 수업으로 기초부터 공부했다.
“처음엔 당연히 어려웠죠.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고. 기초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냥 무작정 반복해서 수업을 듣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어요. 나중엔 선생님 농담까지 외워지더라고요. 쉰 살이 넘자 공부를 제대로 못 한 것이 늘 아버지에게 죄스러웠는데, 학교에 들어가니 맘이 놓이더라고요.”
그렇게 2011년 건국대학교 예술문화대학 예술학부에 합격했다. 이자연의 11학번 동기들은 그 면면이 화려하다. BTS의 진과 배우 이종석이 대표적이다. 선배로는 샤이니의 민호, 배우 고경표가 있다. 이자연은 소속사도 없던 신입생 시절의 모습이 강렬한지 아직도 BTS 진을 ‘석진이’라고 부른다.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신입생 두 사람이 와서 말을 걸어주었어요. 그때 건네준 한마디가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 친구들은 모를 겁니다. 어딘가에서 제 노래를 실컷 불러놓고는 ‘열창했다’며 너스레를 떨 때는 친동생처럼 귀여워요. 아이들이 제게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제 노래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노래가 새로운 인연을 더 깊게 만들어줄 때마다 노래의 힘을 느껴요.”
이후 이자연은 대학원까지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도 그녀답다. ‘TV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대중가요의 특성에 관한 연구 : KBS 를 중심으로’라는 다소 긴 제목의 이 연구는 가요무대에 등장한 곡들을 통해, 시기마다 사랑받은 노래들이 어떤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지 연구했다. KBS의 도움을 받아 30년이 넘는 기간을 모조리 살폈다.
“우리 대중가요는 역사적 큰 사건을 기점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가 많아요. 일제강점기에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한국전쟁 때는 가족을 찾는 식이죠. 역사 속에서 우리 가요가 어떻게 사랑받았는지 보면서 대중가요의 사회적 역할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죠.”
가요계 보살피는 어머니로
최초의 여성 대한가수협회장. 그녀를 장식하는 또 다른 수식어다. 2018년 갑자기 공석이 된 회장직을 선출하기 위해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부회장이었던 이자연이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당시 비대위의 좌장 격이었던 협회 명예회장 남진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또다시 소녀 가장 생활을 시작하느냐고. 그 얘기를 들으니까 오히려 용기가 생겼어요. 그냥 집에서 내 살림하듯이 꾸려나가면 되겠구나 하는 용기가 나더라고요.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쉬워졌어요. 그래서 겁 없이 정부 기관부터 시작해 다양한 분야의 분들을 만나러 다녔죠. 그렇게 움직이다 보니 하나둘씩 결과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살림 실력이 좋았던 덕일까. 대한가수협회는 창립 64년 만에 지정기부단체로 지정받는다. 협회 후원 확보에 날개를 단 셈이다. 코로나19로 설 곳이 없어진 후배들을 위한 예산 마련에도 힘썼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전국민 희망콘서트’, ‘전국 TOP 가요쇼’ 같은 무대를 만들었다. 사라진 무대를 직접 되살린 셈이다.
“‘전국민 희망콘서트’는 드라이브스루 형식으로도 진행됐어요. 코로나19 상황에서 팬과 가수가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었죠. 300여 대의 차량이 제천 활주로를 가득 메운 가운데 신나는 리듬에 차들이 들썩거리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어요.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폭발적이었죠. 무대가 그리웠던 가수만큼이나 팬들 역시 우리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이자연은 지난 9월 대한가수협회 제7대 회장으로 연임이 확정됐다. 그녀의 왕성한 활동이 인정받은 것이다. 이제 그녀의 관심은 협회의 새로운 사업 분야인 역사를 담을 그릇에 집중되어 있다.
“얼마 전 이미자 선생님이 이사하시면서 공간 문제로 개인적인 자료를 한 트럭 가까이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쳤어요. 이런 경우를 흔히 봐요. 스타 선배님이 돌아가시면 남겨진 유품은 모두 개인이 소장해버리고, 나중에 공익적인 목적으로 확보하려고 해도 큰돈이 들죠. 협회 차원의 ‘박물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료들을 확보해놓을 수 있는 자료실 정도는 만들고 싶어요.”
가요계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걱정은 많은 변화를 이뤄낼 것이다. 이렇듯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간 그녀가 인생의 과정에서 보여준 많은 결과와 성과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자연이 좋아하는 가족에 빗대 표현하자면, 이제 그녀는 가요계에서 어머니 역할을 해나가는 중이다. 트로트라는 고질적인 명칭 문제에서부터, 협회 회원 자격 기준 정리, 신인 전통가요 가수가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서 원곡 가수의 권리 보호에 관한 문제까지, 그녀의 관심사는 넓고 깊다. 가요계 구석구석 어머니의 마음이 미치고 있다.
요즘 방송가가 노리는 주요 시청층은 시니어, 즉 중장년층이다. 젊은 세대는 넷플릭스, 유튜브와 같은 OTT 프로그램으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에 TV 앞에 남은 세대는 시니어가 된 것. 이에 방송가에서는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요즘 방송의 트렌드를 보면, 트렌디하고 재밌기보다는 시니어들이 보기 편한 프로그램들이 많은 편이다.
그 프로들을 보면 공통점이 많다. 먼저 장치적인 부분을 보자면, 자막은 보통 시니어들이 알아보기 편하게 크고 강한 편이다. 소리를 잘 못 들었을 경우의 시청자를 위해 이해를 돕는 자막도 찾아보기 쉽다. 사회자도 톤이 높고 큰 목소리로 알아듣기 쉽게 얘기한다. 다인원의 패널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들의 큰 리액션은 시청자도 함께 반응하게 하고,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제작진의 노력에 시니어들은 응답했다. 물론 앞서 말한 장치적인 부분은 부가적인 것이고, 콘텐츠가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어떤 콘텐츠의 프로그램이 시니어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공통점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 오디션 프로의 식지않는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에 젊은 세대가 열광한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다. TV조선의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이후 판도가 바뀌었다. '미스-미스트롯' 이전에 트로트는 기성 세대의 전유물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등장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젊은 세대가 간드러지게 트로트를 부르자, 시니어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푹 빠져버렸다.
특히 오디션 프로그램이 주는 긴장감과 함께, 덧붙여지는 참가자들의 사연이 시니어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 심지어 어느 순간 마음에 드는 참가자를 아들, 혹은 딸을 보는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고, 팬덤까지 형성하게 된다.
최근 '미스-미스트롯' 제작진은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 '국민가수'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트로트가수가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K-POP스타, 국민가수를 뽑는다. 1회 16.1%, 2회 15.4%(닐슨코리아 유료방송가구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미스-미스터트롯' 시청자들이 '국민가수'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트로트'에서 'K-POP'으로 주제가 바뀌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구성이 이전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앞서 말한 자막, 진행자, 패널 등 장치적인 부분 역시 비슷하다. 아무 정보 없이 '국민가수'를 본 시청자는 '새로운 트로트 오디션인가?'라고 착각하고 볼 수 있을 정도다.
'미스-미스터트롯'과 달리 이번에는 다양한, 시니어들에게 어려울 수도 있는 노래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미 여러 번의 오디션을 거치면서 시니어들도 실력자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길러졌기 때문에 무리가 없다. 중장년층은 프로그램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편이다. 오디션이 특히 그러한데, 한 번 빠지면 끝까지 보고 진심으로 출연자를 응원하게 되는 것. 때문에 '국민가수'가 더욱 대박나려면, 송가인, 임영웅과 같이 시니어들을 확 사로잡을 출연자가 필요해 보인다.
# 전원생활도 예능으로
나이가 들수록 전원 생활에 대한 욕망이 강해진다. 과거에는 드라마 '전원일기'가 있었다면, 현재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니어들은 대리 만족하고 있다. 전원 생활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힐링하게 되는 것. 특히 이러한 프로들은 잠깐만, 어쩌다 봐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MBN의 '나는 자연인이다'이다. 2012년부터 방송된 스테디 인기 프로그램으로 중년 남성들에게 특히 인기 있다. 현재도 평균 시청률 4%대가 나오고 있다. 여성 중년들은 KBS2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마음을 뺏겼다. 현재 세 번째 시즌이 방영 중이고, 수요일 저녁 방송인데도 5~6%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나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 중인 혼자 사는 중년 여자 스타들의 동거 생활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전원생활과 함께 같이 밥 해 먹고 수다 떠는 것이 거의 전부이지만, 오고 가는 아줌마 입담이 웃음을 자아낸다. 리얼하고 현실적이어서 공감하면서 보기 좋다.
# 스포츠 예능의 감동
스포츠 예능도 시니어들이 사랑하는 TV 프로그램이다. 시니어들이 올림픽 경기에 열중해서 보는 것과 유사한 심리다. 스포츠 예능의 인기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잘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시니어들은 출연자들을 자신의 자녀를 보는 듯이 보고 응원하게 되는 것. 또한 '왕년에는 나도 저랬는데'라는 생각으로 이입해서 예능을 보기도 한다.
시니어들에게 인기를 끈 대표적인 스포츠 예능으로 JTBC '뭉쳐야 찬다'를 꼽을 수 있다. 현재 시즌2가 방영 중이며, 6~8%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화려한 스타 캐스팅은 물론, 웃음과 감동이 이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다. 지난 6월부터 방송되고 있는 SBS '골 때리는 그녀들' 또한 시니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본업이 축구선수인 것처럼 연습하고 임하는 출연진을 보면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시니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재밌거나 공감이 되어서 몰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웃음보다는 감동과 서사가 있는 것을 선호한다고 보여진다. 시니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다음 프로그램은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손효정 기자 shjlife@etoday.co.kr
김주영, 그는 청송의 기적이다. 맹자 어머니는 맹자를 장터에 둘 수 없다며 결연히 거처를 옮겼지만, 주영의 어머니는 장터 한복판에 아들을 뒀다. 맹자 어머니는 맹자를 학교 부근에 묶어두었지만, 주영의 어머니는 아들이 학교를 가는 둥 마는 둥 온종일 장터를 맴돌아도 그냥 내버려뒀다. 그리하여 맹자는 당대에 가장 말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작가가 되지 못했고, 주영은 장터를 샅샅이 뒤진 덕에 대한민국 최고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쯤 되면 맹모삼천지교가 무색하다. 적어도 주영에겐. 그러기에 기적이라는 것이다. 장터와 길 위의 작가 김주영, 그는 지금도 돌아다니는 중이다.
청송의 기적, 보부상 문학을 낳다
“보이는 것은 머리 위 하늘과 사방의 산뿐이었죠. 마치 항아리 속에 갇혀서 세상을 보는 것 같았어요. 하루에 한두 번 완행버스가 다녔는데 버스 안의 사람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차창 밖으로 던져주는 사과 껍질을 받아먹으며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사는 걸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넋 놓고 바라보았지요. 그러다 장이 서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는 거죠. 왁자지껄 흥정에, 욕설에, 국밥에, 막걸리에…. 장날엔 학교는 뒷전이고 장터에 눌어붙어 있었지요. 제게는 장터가 학교였어요.”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청송의 첩첩산중 외딴 마을. 1939년생인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도 그런 가난이 없이 자랐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도시락 한 번 못 싸 다녔을 뿐 아니라 교과서도 없이 잡기장 하나 들고,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그저 바퀴벌레처럼 왔다 갔다’ 했다. 푸른 소나무의 고장, 그래서 ‘청송’이지만 정작 그는 푸른 소나무를 그려본 적이 없다. 늘 흰 소나무를 그렸다. 왜냐하면 크레파스를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사정사정해서 친구들한테 빌릴 수 있는 색은 오색 중에서 제일 안 쓰는 흰색이었으니까.
그는 지금도 옥수수, 감자는 먹지 않는다. 수제비, 칼국수도 질리고 물렸다. 그의 소설 ‘잘 가요, 엄마’에는 반죽부터 썰기까지 칼국수 만드는 과정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어머니가 칼국수 만드는 걸 하도 많이 봐서 그렇단다. 그가 시인이 되겠다고 하자 모친 왈 “지금까지 굶은 것으로도 한이 덜 찼냐?”였다니. 그래서 그랬을까,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온 그는 시 빼고는 다 쓰는 작가다. 운문 말고 산문은 소설부터 동화까지 가리지 않고 쓴다.
감수성 예민한 산골 소년의 외로움과 소외감, 육체적 허기와 정서적 따돌림을 운명처럼 보듬으며 그를 키운 8할은 장터였다. 소년 주영은 작가로서의 토양이 되어준 장터 속으로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갔고, 성년이 되어서는 팔도의 장터를 마당마냥 누볐다. 길 위에서 먹고, 길 위에서 자고, 길 위에서 글을 썼다. 그에게는 길을 가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동일한 일이며, 길 위의 삶이 그의 인생의 메타포가 되었다.
“결혼해서도 한 달에 집에 가는 날이 열흘이나 됐을까요? 습관이 돼서 일 없이 여관에서 잠을 잘 때도 있었지요. 하하.”
토속어 풍미 짙은 ‘객주’와 객주문학관
2013년, 34년 만에 대망의 10권으로 완간된 ‘객주’는 장돌뱅이들의 행로를 따라 저잣거리를 치열하게 답사하며 1878~1885년 조선 후기 보부상들의 애환과 시대상을 담은 소설이다.
그는 보부상 작가다. 보부상은 ‘보상’과 ‘부상’을 합친 말이다. 보상은 보자기나 걸망에 걸머지는 봇짐장수를, 부상은 등이나 지게에 지고 다니는 등짐장수를 가리킨다. 1979년 6월부터 5년간 총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한 ‘객주’는 김주영이 대학 노트를 봇짐으로 걸머지고, 카메라를 등짐에 진 채 ‘팔고 다닌 물건’이다. ‘객주’를 쓰기 위해 보부상의 발자취를 따라 200개에 달하는 시골 장터를 누볐다. 글은 길에서 써서 길에서 송고했다. 분량을 줄이려고 펜촉을 뒤집어 최대한 작은 글씨로 썼다. 말 그대로 깨알 같은 크기로 대학 노트 한 쪽에 200자 원고지 35매를 빼곡이 채웠다.
“처음에는 장터를 묘사하는 중편소설 정도를 써보고 싶었는데 남쪽 땅끝에서 휴전선 턱밑까지 전국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다 보니 그만 대하소설이 되어버렸어요. 보부상에 대한 자료도 없고, 역사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어서 어디 가서 물어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지요. 조선 후기 상업사에 관한 논문만 100편 쯤 읽고 관련 서적도 200권 넘게 읽었지요.”
‘객주’의 작품 가치는 조선 천지의 토속어가 총망라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빛난다. 방방곡곡 장터와 산골을 누비며 옛말을 수집하고, 여기에 작가적 상상력과 고증이 버무려져 독특한 풍미의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객주’에는 중노미(음식점, 여관 따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남자), 지청구(아랫사람의 잘못을 꾸짖는 말), 반거충이(무엇을 배우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 매나니(무슨 일을 할 때 아무 도구도 가지지 아니하고 맨손뿐인 것), 복장거리(마음이 쓰리고 아프도록 걱정스럽거나 성가신 일), 새물내(빨래하여 이제 막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 등 국어사전에도 미처 오르지 못한 토속어들이 활어처럼 튀어 오른다.
그가 주축이 되었던 보리회(대구 경북 출신의 문인 모임, 보리문둥이란 뜻)에서 함께 활동한 언론인이자 소설가 이상우 씨는 김 작가에 대해 “낭만적이고 낙천적인 성정을 가졌죠. 술도 엄청나게 좋아해서 마셨다 하면 같은 회원이었던 이문열, 김원일 등과 함께 2, 3일간 쉬지 않고 마셨어요. 기질이 그렇다 보니 일생을 걸고 끈덕지게 민속 언어를 발굴, 수집하고 다닐 수 있었을 겁니다. 걸어 다니는 민속 언어 사전이라고 할 만큼 탁월하고 독보적인 존재입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2014년, 고향 청송에 그의 문학 세계를 오롯이 보여주는 3층 규모의 객주문학관이 개관했다. 전국의 50여 개 문학관 가운데 객주문학관은 알찬 전시실과 옹골진 자료를 갖춘 곳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향이 그에게, 그가 고향에게 가장 잘한 일이다. 객주문학관은 그에게 또 다른 장터다. 여느 문학관과 달리 작가가 관람객들을 직접 맞이하고, 함께 어울려 떠들썩하게 대화 마당을 펼친다. 어릴 때는 벗어나고만 싶었던 고향이 이제는 그의 가장 친근한 벗이 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것이 제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저의 작가적 영혼을 낳고 길러준 곳이니까요.” 문학관과 함께 그의 생가 및 주막, 전통시장 등을 복원하여 보부상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테마 마을도 조성되어 있다.
어머니, 아 어머니!
김주영의 작품은 ‘객주’를 비롯해 ‘활빈도’, ‘천둥소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화척’, ‘홍어’, ‘멸치’, ‘빈집’, ‘아라리 난장’ 등 나열하기도 벅찰 정도다. 1971년 ‘휴면기’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래 200여 권에 달하는 작품으로 유주현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그의 작가적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가난, 외톨이, 떠돌이, 약자 의식 등을 들 수 있겠으나, 가장 밑바닥에는 어머니가 원형처럼 자리하고 있다. 김주영 문학의 원천이라 할.
“참 고생 많이 하셨지요. 아니 고생하셨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혹독하고 가혹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당시에는 흠이라 할 재혼까지 하셨지만 여전히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웠지요. 96세에 돌아가신 후 호적 정리를 하다 보니 두 번의 혼인 모두 신고가 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가족 내의 위치조차 없었던 분이니 그 한평생의 신산함이 어떠셨겠어요? 글도 읽지 못하고 숫자도 구분 못 하신 분이었어요. 저는 70 평생 어머니를 봐왔지만 정작 어머니를 몰랐습니다.”
그의 소설에는 유독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앞서 언급한 ‘잘 가요, 엄마’는 불효한 자신의 참회록이라고. 한 달이면 쓸 수 있는 분량임에도 일 년 반이나 걸려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어머니를 소환해내는 것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의미일 터. 그의 가장 큰 불효는 너무 늦게 어머니를 발견했다는 것이니, 어머니를 등장시킨 소설은 어느새 가족소설로, 가족소설은 성장소설로 잇대어졌다.
“소설이나 시를 쓰는 행위는 거짓이 개입되지 않은 반성문 같은 거예요. 말하자면 자기 인생의 변형이 소설인 거죠. 특히 성장소설은 비록 좁고 제한적인 경험이지만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던 유년 시절의 내밀한 시선으로 더듬어나간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거지요. 서로 미워하는 아버지와 외삼촌 사이에서 집 나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 ‘멸치’는 저의 대표적 성장소설입니다.”
소설은 작가의 감수성을 타고 흐른다. 그는 삶에서 감수성을 잃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다. “나이 들면 몸도 뻣뻣해지고, 가슴도 뻣뻣해지고, 감수성도 무뎌지죠. 홍시처럼 말랑하던 살결이 딱딱하게 굳는 것과 같고, 기름 떨어진 차와 같아요. 차에 기름이 없으면 아무 데도 못 가잖아요. 감수성을 유지하려면 연애를 해야 해요. 반드시 이성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나무 한 그루를 봐도 애정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사랑이 뭡니까. 애틋하고 뿌듯한 감정 아닙니까. 연애를 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해 그 감정을 품는 것이니, 많이 보고 많이 느낄 수 있어야 글이 나옵니다.”
그래서일까. 객주문학관에는 소설 도서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평생 그가 모은 소설이 빼곡이 서가를 메우며 방문객들의 메마른 감수성을 적셔주고, 동료 문인들의 마르지 않는 감수성의 원천이 되고 있다.
“저는 단편소설을 한 편 써도 반드시 배경이 되는 곳을 직접 가봅니다. 1987년에 나온 ‘쇠둘레를 찾아서’를 쓸 때도 배경이 된 철원을 세 번이나 갔지요. 그 고장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사람이 사는지, 말씨는 어떠한지 철저히 조사하고 답사합니다. 제게 문학은 사실을 기초로 하여 상상력의 집을 짓는 것이니까요. 31세에 데뷔해 83세인 지금까지 참으로 많은 글을 썼어요. 제가 쓴 글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죠. 그만큼 많이 다녔다는 뜻도 되지요. 요즘은 그간 쓴 제 작품 모으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설 한두 편을 더 쓰고 남은 시간은 제 삶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그는 작가 인생 50여 년을 결산하며 지난 5월, 신작 장편소설 ‘광덕산 딱새 죽이기’를 냈다. 2017년에 출간한 ‘뜻밖의 생’ 이후 4년 만이다. 시간에 곰삭아 웅숭깊은 성찰의 샘에서 길어 올린 신작은, 전통을 지키며 자연과 함께 삶을 일궈나가는 한 마을에 문명과 자본이 밀어닥치면서 마찰과 갈등을 빚는 내용이다. 김 작가 특유의 입체적인 인물 설정과 입심 가득한 해학적 문장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자문하게 한다.
울고 싶을 땐 오히려 웃는 남자
그에게 문학은 길이요, 생명이다. 그의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문학을 길 위에서 떠돌며 만났기에.
“보부상이 그랬듯 우리 모두는 뜨내기이자 떠돌이로 오늘이란 시간을 살아갑니다. 떠도는 인생은 세파에 시달리며 때론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지요. 제가 80세에 쓴 ‘뜻밖의 생’은 바보가 주인공이에요. 바보는 이리 치이고 저리 당하지만 긍정심을 잃지 않지요.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수용하는 절대 긍정성, 산다는 건 결국 그런 거지요.”
한 시대를 오롯이 관통해온 대작가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표상은 어떨까.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내면과 관계는 피폐한 세대를 향한 따스하지만 따끔한 일침이 있을까.
“저는 영락없는 외톨이에 철저한 약자였어요. 그러나 그 한계를 이겨낼 수 있는 내면적 힘도 동시에 있었던 것 같아요. 제게는 글이 그 힘이었지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동력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너무 쉽게 좌절하고 스스로를 내던져버리지만 않는다면. 돈이라는 것도 그래요. 돈은 매우 중요하지만, 돈보다 소중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돈보다 가치 있는 것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10가지라면, 저는 20가지쯤 나열할 수 있어요.”
노령의 작가에게는 강인한 삶의 신념이 있다. 모든 고통과 아픔에 의연히 대처하는 것이 그것이다. 고통, 아픔, 슬픔, 사랑도 모두 내 것이니 비빔밥처럼 한데 섞어 견디고 인내하는 것. 그는 글을 통해 인생의 파고를 넘었지만, 누구에게나 잠재된 에너지가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된다. 그는 잘 웃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한다. 울고 싶을 땐 오히려 웃는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잘 웃는다. 80 평생 울고 싶은 날이 더 많았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광한루원의 본색은 ‘춘향전’과 무관하다. ‘춘향전’ 스토리의 한 배경으로 차용됐을 뿐이다. 독자적인 조성 역사와 미적 가치를 지닌 조선 중기의 빼어난 원림이라는 데 광한루원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럼 주객전도? 마치 곁다리처럼 끼어든 ‘춘향전’의 사랑 이야기가 대중에게 각인돼 조선 원림으로서의 드높은 가치는 사뭇 뒷전으로 밀린 게 아닌가.
사실 광한루원이 ‘춘향전’의 배경 장소로 사람들에게 부각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광한루원과 ‘춘향전’의 연관성을 표 나게 드러낸 최초의 구조물인 사당 ‘춘향사’가 들어선 때가 불과 90여 년 전이니까. 광한루원의 600여 년 역사에 비하면 새 발의 피 같은 연원이다.
춘향사 건립 이후 현대에 이르러선 춘향관, 월매집, 완월정, 전통놀이체험장 등을 꾸미고, ‘춘향제’를 흐벅지게 펼치면서 본격적인 관광지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이건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국가적 문화유산인 조선 원림이 관광을 위한 갖가지 시설물들과 맥락 없이 뒤섞이면서 정체성을 담보하기 어려워진 게 아닌가. 일부 전문가들은 정색하며 상업주의를 자제하라고, 원림의 본질과 원형을 유지하는 일에 공을 들이라고 일갈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광한루원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을 마치 ‘춘향전’ 영화의 세트쯤으로 여기며 즐기다가 돌아간다. 유심히 살펴보고 감동을 누릴 만한 멋진 조선 원림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정작 또렷이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시 눈여겨보는 관점이 필요할 텐데, 관광 소재로 들어앉은 시설물들을 시야에서 걷어내고 원림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겠다.
광한루원은 중심 누각인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그 일원에 조영된 관아 원림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관아가 주도해 본때 있게 조성한 이 원림의 스케일은 상당히 웅장하다. 깨알처럼 섬세하게 구사한 디테일로 아름답다. 유례가 드물도록 거대한 조선 원림이다. 특히 광한루는 고유한 건축 메커니즘으로 빼어나 갈채를 받을 만하다. 지방 관아가 지은 누각으로는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삼척의 죽서루, 평양의 부벽루 등이 있지만, 광한루를 개중 으뜸으로 친다.
광한루는 조선의 명재상 황희가 남원에서 유배를 살며 지은 작은 누각 광통루(廣通樓)에서 유래했다. 이 광통루를 남원부사 민여공이 1434년에 증축한 게 지금의 광한루다. 광한루라는 이름은 1444년 전라감사 정인지가 지었다. “아하, 여기가 바로 달나라의 미인 항아가 산다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로구나!” 이렇게 찬탄한 정인지가 광한루라 이름 붙였던 거다.
투박하면서 묵직한 기운을 뿜는 돌기둥들에 떠받쳐진 광한루는 월궁(月宮)을 상징한다. 천상의 궁궐인 셈. 이렇게 천상계를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천상계에 흔전만전 지천으로 뿌려진 것은 별인데, 광한루 전면의 너른 연못은 다름 아닌 은하수를 상징한다. 은하의 못 가운데에선 세 개의 섬을 만들어 신선이 산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표상했다. 네 개의 홍예로 만들어진 오작교는 견우성과 직녀성이 칠월칠석에 만나는 다리다. 베를 짜는 직녀에게 필요한 도구인 지기석은 연못 속에 넣었고, 견우를 위해서는 은하수를 건널 때 쓰일 배 하나를 만들어 수면에 띄웠다.
관아원림이란 한마디로 고을의 벼슬아치들이나 오고가는 시인 묵객들이 회포를 풀며 노닌 야외 정원이다. 산수엔 오고감이 없지만 인간사는 살면 살수록 시들어 덧없다. 옛사람들은 이곳에서 달과 별을 끌어안고 우주적으로 부푼 상상력을 즐기며 야유회를 즐겼다? 그렇게 봐야 할 것 같다. 벼슬이든 공부든 지상의 질서와 규율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정신의 나래를 자유롭게 펼친 것이다.
원림은 원래 자연과 소통하고 싶은 선비들이 지닌 갈망의 산물이다. 이 점에서도 광한루원은 빼어나다. 오늘날엔 원림 곁으로 대로와 강변 둑이 생겨 경관이 크게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저 옛날엔 숲과 강, 멀리 지리산 자락까지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자연의 도가니였다. 관광지처럼 번잡하다고 만만하게 볼 원림이 아니다.
답사 Tip
광한루원 연못가에 어우러진 거목들이 예스럽고 웅숭깊은 운치를 자아낸다. 500살 남짓한 나이를 지닌 버드나무, 팽나무, 능수버들 등 오래 산 나무들의 거쿨진 자태를 보라! 이곳이 아니고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가을철 풍성한 결실의 기쁨을 나타내는 옛말이다. 추석 명절의 풍요는 밥상 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사람들 간 왕래를 막아도 풍성한 계절까지 막을 수는 없다. 코로나19 2년차, 코로나19 팬데믹 이래 네 번째 명절을 앞두고 있다. 아직 장을 보지 못했거나 싸고 좋은 물건 사러 전통시장을 방문하고 싶지만 주차 문제나 인파가 걱정된다면 스마트폰을 켜보자. 비대면 장보기 서비스가 추석날 풍속도를 바꿔놓고 있다.
네이버ㆍ쿠팡 대형 플랫폼 활용하는 전통시장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9월 26일까지 ‘온라인 전통시장 추석 특별전’을 개최한다. 네이버 장보기, 놀장, 장바요 외에도 ‘모두의 장날’, 위메프, 우체국 쇼핑에서 진행하는 이번 행사에는 전국 전통시장 300여곳, 온라인 쇼핑몰 10여곳이 참여했다. 1만 원 이상 구매하는 모든 고객에게 배송비를 지원하며, 5만 원 이상 구매 시에는 추첨을 통해 모바일 온누리상품권과 자체 쇼핑몰 포인트를 지급한다.
서울시에서도 ‘온라인 장보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같은 시장 내 여러 점포 물건을 한꺼번에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하면 배송을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네이버 장보기나 쿠팡이츠나 ‘놀러와요 시장’(놀장) 앱, ‘장바요’ 앱과 같은 쇼핑 플랫폼을 활용한다. 현재 서울시내 70곳에 달하는 전통시장이 온라인 장보기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네이버 동네시장 장보기 서비스에는 암사종합시장, 화곡본동시장, 노량진시장, 마장동시장 등 서울시내 대표적인 전통시장 8곳이 입점해 있다. 이 중 신선한 해산물과 육류로 유명한 노량진시장과 마장동시장은 서울시 전 지역 당일배송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고객 만족도가 높다. 놀장과 장바요는 앱에서 전국 전통시장 중 원하는 곳을 지정해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모두 주문 후 2시간 내 배달을 지원하며, 1만 원 이상 구매시 배송료가 무료다.
동네 전통시장 장보기, 앱 하나면 충분
자체적으로 개발한 애플리케이션(앱)이나 플랫폼을 활용한 배달 서비스를 지원하는 전통시장도 늘고 있다. 서울 동작구에서는 지난해부터 전통시장 배달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미 지난해 5월부터 12월까지 성대전통시장 978건, 남성사계시장 676건, 상도전통시장 1135건, 남성역 골목시장 106건 등 총 2895건의 배달 서비스도 시행한 바 있다.
전통시장과 배달이 성공적으로 결합한 데에는 동작구에서 자체 개발한 온라인 플랫폼 ‘장봄’ 덕이 컸다. 주민들이 이용하고 싶은 전통시장을 고르고, 입점해있는 상점들 중 2만원 이상 물건을 구매해 배달서비스를 신청하면 당일 배송이 이뤄진다. 성대전통시장은 주문 금액이 2만원 이상이면 2시간 이내에도 상품을 받아볼 수 있다.
성대전통시장을 필두로 시작된 배송서비스는 남성역골목시장, 상도전통시장, 남성사계시장 등 동작구의 다른 전통시장과 성동구의 할인마트, 노원구의 도깨비시장까지 이용 가능 지역을 넓혔다. 결제 수단은 카드와 온누리상품권, 지역사랑상품권 등을 사용할 수 있으며 픽업 서비스를 지원하는 매장들도 많다. 시장마다 영업 시간과 배달 최소 금액, 무료 배달 최소 금액이 다르므로 홈페이지 내 매장 상세정보를 확인하고 이용할 필요가 있다.
강동구민이라면 전통시장 무료 배달 플랫폼 ‘빈손장보기’를 참고한다. 빈손장보기 역시 온라인으로 각 전통시장의 상품을 구입하고, 구매 가격에 따라 무료배송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소비자에게는 빈손장보기에 입점한 전통시장의 물품을 각각 따로 구매해도 하나로 묶어서 배송하는 합배송을 받아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게다가 강동구 전 지역으로 배달하며 기본배달료가 500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2시간 내 배달을 원칙으로 하나 주문 마감시간인 오후 8시 이후 주문건은 다음날 배달된다. 현재 둔촌시장, 길동시장, 명일시장을 이용할 수 있으며, 오는 10월부터는 송파새마을시장도 서비스할 예정이다.
경기도에서는 공공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배달특급’에 ‘전통시장 장보기 코너’를 개설했다. 현재는 구리전통시장과 오산시 오색시장, 부천상동시장, 일산시장, 화서시장 등 5개 시장에서만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해당 시장 인근에 거주하는 경기도민은 배달특급 내 ‘편의점·시장’ 메뉴를 선택해 시장 물건들을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배달 받을 수 있다. 일반 배달앱과 비슷한 배달 속도와 지역화폐, 온누리상품권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고객 호응도가 높다.
이 외에도 상인과 영상통화로 가격 흥정도 가능한 대전 신도꼼지락시장의 ‘꼼지락배송’ 앱, 당일 배송과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제고현시장 ‘모두의장날 고현시장콜’ 앱 등 시장 자체적으로 개발한 시스템도 편리한 장보기를 지원하고 있다.
명절 대목을 맞아 전통시장들이 활로 개척을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다. 다양한 할인 혜택도 제공하고 있으니, 이참에 전통시장 온라인 장보기 서비스를 통해 발품도 덜고 비용도 줄여 알찬 추석 차례상을 차려보는 것은 어떨까.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게 이렇게 자학 증상이 깊은 줄 몰랐다. 니체는 사랑이란 정과 망치로 하는 거라고 했다. 돌 안의 형상을 망치와 정으로 쪼고 깨서 오롯이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나의 사랑은 그녀의 날카롭고 거친 정과 망치에 맞아 아예 형체도 없이 부서질 지경이다.
내가 옛 연인을 통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옛 연인’이란 말은 정정하자. 쓰라리고 아프지만 그 말은 쓰지 않기로 하자. 나의 이런 표현이 그녀를 더 질색팔색하게 하니까. 건강한 사랑은 자존감이 우선이어야 한다지만 그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의 꼬락서니라니.
나는 안정된 직업과 안온한 가정을 가진 중년의 ‘멀쩡한’ 남자다. 지난 사랑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것만 빼고는 관계 맺는 데에도 상식적인 사람이다. 전문직을 갖고 있지만 이게 그녀의 더 큰 밉상을 사게 될 줄이야. “나이 들어서도 먹고사는 걱정이 없으니 재미 삼아 날 쫓아다니는 거냐,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나는 살아가느라 하루하루 허덕이는 사람이다. 당신처럼 한가하게 사랑 타령이나 할 여유가 없다”며 내게 쏘아붙였던 것이다. 벌침 정도가 아니라 말벌에 쏘인 듯 몸을 가눌 수 없는 충격이었지만 반응을 끌어냈다는 것만으로도 한동안은 살 것 같았다. 그렇게 따라다닌 결과가 결국 그런 통박이냐고? 당신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냐고?
전문직 종사자라는 소개는 방금 했고, 객관적으로 봐서 나는 외모도 괜찮은 편이다. 곱상한 얼굴도 얼굴이지만, 60대 중반의 남자로 배 안 나오고 머리 벗겨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본 이상이 아닌가. 성격은 내성적이며 소극적인 편이다. 그녀를 쫓아다니는 적극성만 빼고는.
소위 ‘꽃미남’이었던 나는 사춘기 때부터 여학생들의 관심을 끌었고, 때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예민한 자의식의 시기, 이성에게 인기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시절, 내 매력에 내가 ‘쩔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매번 거절당했고 단 한 번도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적 없이 무심히 세월만 흘렀다. 그렇게 좌절된 내 사랑은 지금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남들은 집착이라고 했고, 그녀는 스토킹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봄 교회 수련회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나도 그녀도 새 신자에 속했으니 그룹 내에서 동질감을 느낄 법도 하건만, 고3이 되어서도 2년 내내 그녀는 시종일관 내게 무관심했다. 그녀 말마따나 우리에겐 어떤 추억 한 자락도 없다. 그러기에 지금 와서 만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이 들고 세파에 치인 모습도 보이기 싫다며. 인정한다. 그녀와 내가 공유할 추억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무리 속에 있었으니까. 단 한 번 핑곗거리를 만들어 빵집에서 크림빵과 우유를 시켜놓고 마주 앉았지만 그녀는 멀뚱했고 나는 애만 탔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이야기다. 그러니까 나는 무려 50년 동안 첫사랑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그의 자전적 소설 ‘첫사랑’에서 40대 주인공 블라지미르를 내세워 ‘겨우’ 30년밖에 안 된 사랑에 괴로워했지만 나한테 비하면 약과인 셈이다.
아, 여기서 잠깐, 어쨌거나 당신은 유부남 아니냐고 비난하지는 마시라. 내가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으니까. 난 그냥 말을 붙여보고 싶고 만나 차 한잔 하고 싶을 뿐이니까. 그렇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봐온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난 50년 동안 그녀는 늘 내 가슴속에서 살았으니까. 참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만 내 가슴 한편은 늘 시렸고 구멍이 나 있었다. 결코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이. 그 구멍을 내 맘속 그녀의 존재로 채우고 있었지만, 동시에 나는 모범 가장이자 자상한 남편, 애정 많은 아빠였다. 그 사실은 그 공허함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단 뜻도 된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며 이렇다 할 추억거리 하나 없는 우리의 사랑, 아니 나의 사랑을 한심해하며.
10년 전쯤 그녀가 남편과 사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분이 묘하고 정신이 멍했다. 지금까지 1년에 한두 번 정도 나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문자를 보내오다 그녀가 혼자가 되었다는 말에 용기를 낸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10년이나 지나서.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에 균열을 가져온 것일까.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단지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응답이 없다가 50년 만에 반응이 왔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문자 메시지로 목소리 한 번 들을 수 있겠냐고 했다가 예상대로 된통 구박을 받았다.
아까 말했듯이 ‘나는 삶에 지치고, 해결해야 할 현실의 문제만으로도 골치 아픈 사람이다. 당신처럼 추억에 잠길 새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 사귄 적이라도 있냐. 왜 일방적으로 이러냐. 다시는 이런 것 보내지 마라. 또다시 이러면 당신 아내한테 알릴 수도 있다’는 답이 온 것이다. 불쾌감과 노기가 서린 글자 하나하나마다 굳은 표정으로 정과 망치를 들고 내 가슴을 찍고 쪼개는 그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된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도 저럴지 모른다. 나라는 존재가 언제 한 번이라도 그녀 마음 한 귀퉁이나마 차지한 적이 있었던가. 도대체 나는 왜 자존심도 없는 찌질한 인간이 되었을까.
그럴 듯한 사회적 위치의 나를 망각한 채 그녀를 향한 마음의 고삐를 어찌하여 50년 동안이나 다잡지 못하는 것일까. 이렇게 수모를 겪고도, 그녀의 매몰찬 말을 가슴에 비수로 꽂고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내 마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남자들은 여자들과 달리 이별 후 애도 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한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와 나는 이렇다 할 연인 사이가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차이가 없다. 정신의학자이자 죽음 연구자인 퀴블러로스는 죽음에 버금가는 상실의 단계를 이렇게 말한다.
뜻하지 않게 연인과 헤어지거나 버림을 받았을 경우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별은 기정사실이 되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분노하게 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유명한 영화 대사가 이 단계에서 나온 것이라나. 그러다 분노는 슬픔으로 변하고 그(그녀)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부터 한없이 우울하고 깊은 슬픔에 빠지지만, 동시에 떠나보냄의 애도 과정이 완성되면서 삶은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내 사랑에 대한 애도는 어느 단계에서 멈춘 것일까. 부정일까, 분노일까, 슬픔일까, 아니면 아직 한 스텝도 내딛지 못한 것일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