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라디안(대표이사 김범기)과 가천의료기기융합센터(센터장 김선태)가 공동 개발한 의료기기가 국내와 세계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가천의료기기융합센터는 길병원, 가천대학교, 라디안 등 산, 학, 병원이 공동 연구 개발한 고속제세동기(Heart Guardian)로 올해 약 2000만불(한화 약 226억 6800만원)의 수출을 달성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산자부의 산업핵심기술개발사업 지원으로 개발된 이번 의료기기는 ‘이중 고압방전 래더회로를 이용한 안정 고속 자동심장충격기 개발’로, 가천대(임준식 교수)와 길병원 응급의학과(연구책임자 양혁준 교수)와의 산, 학, 병원 공동 연구된 제품이다.
가천대는 (주)라디안에 기술 이전을 통해 기존 타사 제품에 비해 안정적이고, 반응 속도가 빠른 제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왔다. (주)라디안은 R&D 역량과 투자를 집중해서 짧은 시간 내에 제품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국내뿐만 아니라 수출의 포문을 열었다.
또한 길병원 의료진은 제품에 대한 임상적 조언, 평가 및 동물 실험을 통해 제품 평가 및 업그레이드에 힘써왔고, 제품을 직접 구매해 제품의 판로를 개척하는 데 일조했다.
이는 대표적인 산, 학, 병원의 성공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주)라디안은 현재까지 이 제품으로 약 1000만불의 수주 실적을 올렸고 올해 내에 추가로 1000만불의 수주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가천의료기기융합센터 김선태 센터장은 “현재 가천의료기기 융합센터는 국내 의료기기 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임상시험 및 임상 의사들의 컨설팅,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 등을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며 “의료기기 기업과 상생, 발전할 수 있도록 기업들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라디안의 김범기 대표는 “정부의 지원과 함께 대학과 병원에서 지속적으로 기술력 지원과 임상테스를 통해서 세계적인 자동심장충격기 제품이 나올 수 있었으며, 기업의 다양한 판로개척으로 국내를 뛰어 넘어 세계 속의 한국을 표방할 수 있는 자동심장충격기다 나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주)라디안은 최근 진행된 ‘제33회 국제의료기기 & 병원설비 전시회’에 참가해 ‘저출력 자동심장충격기’를 새롭게 선보이며 바이어들의 시선을 끌며, 최종 조율 끝에 프랑스와 스페인 등의 유럽지역과 태국, 몽골 등 동남아시아로 수출계약을 확대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라디안은 글로벌한 자동심장충격기 수출기업으로 성장하며 2017년 서울특별시와 SBA(서울산업진흥원)의 우수 중소기업 인증사업인 ‘2017 하이서울브랜드’의 우수 일자리 창출상 부문에 선정이 되며, 2016년과 2017년 2년 연속 ‘하이서울브랜드’로 선정이 됐다.
김범기 대표는 “수출확대와 함께 올해부터는 국내 자동심장충격기(AED) 보급은 2만~3만대에 불과하지만 2017년을 시작으로 라디안은 자동심장충격기(AED) 렌탈사업을 전개해 렌탈을 통한 헬스케어 서비스 조직을 구축해서 가정에서도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자동심장충격기 렌탈 사업도 시작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김범기 대표는 “2016년이 아시아로 수출을 시작한 원년이라면 2017년은 아시아 시장을 더욱 확대하고, 2017년을 유럽과 미주로 수출시장을 넓혀 나가는 전략으로 수출 원동력의 한해가 되는 발판으로 삼을 것이다”고 전했다.
그해 봄부터 매주 목요일 아침 10시, 목동 파리공원에서 우리들은 작은 모임을 가졌다. 연령도 20대에서 60대요, 직업도 틀리지만 쇠귀 신영복(牛耳 申榮福, 1941~2016) 선생의 책과 신문 칼럼 이야기를 듣고,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기탄없는 자유토론의 시간이 즐거웠다. 이야기가 길어지거나 토론이 격해지면 인근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며 분위기를 진정시키곤 했다.
신 선생은 잘 알려졌다시피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경제학을 강의하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어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고, 1988년 8월 15일 만기 출소했다. 한동안 몸을 추스르더니 11월 말엽, 서울 중구 정동 성공회 건물 지하 ‘세실레스토랑’에서 40여 점의 서예 작품으로 첫 서예전을 열었다. 옥중에서 20년을 정진한 그 서예 작품들을 보고, 신선한 충격과 큰 감동이 가시지 않았다. 연말에는 이라는 옥중 서신들을 책으로 출간해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또 1889년 1월에는 결혼을 해 서울 목동에서 가정을 이루고, 성공회대학교에서 경제학 등을 강의하며 가히 생활인으로서 새 출발을 했다. 1993년에는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냈던 엽서들을 모아 를 출간했고, 1995년 11월부터는 중앙일보에 를 기고했다.
1995년 3월 17일부터 26일까지는 인사동 학고재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당시 학고재 사장의 소개로 처음 선생을 상면하고, 50여 점의 서예에 대한 소회를 직접 들었다. 작품을 소장하고 싶었지만 선생을 돕고자 하는 여러 지성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마음에 정해둔 작품이 금방 팔려 기회를 잃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다가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은근히 휘호를 받고자 하는 속내도 있었다.
그의 부드럽고 자상한 성품은 누구의 청(請)도 거절 못했다. 필흥(筆興)이 솟아 경오(庚午, 1990)년 황화(黃華, 가을)에 써두었던, 편의 한 구절인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에서 취한 ‘夜深星輝’와 임신(壬申, 1992)년 성하(盛夏, 한여름)에 시필(試筆)한 맹자 진심상(盡心上) 편에 있는 관어해자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에서 뽑은 ‘觀海難水’의 예서체(隸書體) 두 작품을 받아 소장하게 되었다. 소위 ‘신영복체’, ‘어깨동무체’라는 한글 휘호도 받고 싶었으나 너무 무례한 것 같아 눈치만 보고 있는데, 그해 섣달그믐께 전화를 받고 나가보니 그토록 소망하던 ‘어깨동무체’의 를 말아서 들고 계셨다. 펼치니 먹 향이 그윽하고 관지(款識)의 인주 빛이 선명했다. 이후 선생은 대학 강의와 신문 기고가 늘어나며 일정이 바빠져, 주 1회 모임에서나 잠깐씩 상면했다. 나도 바쁜 일이 생기면 서너 주 거르기가 일쑤였다. 아내를 비롯해 친구들이 선생의 전력(前歷)을 들어 모임 참여를 말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는 의미의 ‘야심성유휘’는 선생이 아주 즐겨 썼는데, 남다른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디어온 원동력이기도 했을 것이다. 맹자(孟子, BC 372~BC 289 추정)가 공자(孔子, BC 551~BC 479)를 언급한,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의 ‘관어해자난위수’는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깊은 함의(含意)가 있는 들어 있는 글이기도 하다.
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선생만의 독특한 서체다. 두 줄의 굵고 납작한 글자들은 서로 부딪치고 얼싸안으며 힘찬 기운을 발한다. 옥중에서 받았던 노모의 한글 글씨체에서 골격을 찾아 변용했다고 말하지만, 한글 서체의 미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목원대학교 미술대 교수인 김태호(1967~) 조각가가 이탈리아 카라라(Carara) 국립미술학교로 유학 떠나기 전에 부인과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다. 1996년 여름쯤으로 기억되는데, 식사를 대접하려고 불고기집으로 안내했으나 한사코 냉면만 먹겠다고 하여 조촐한 송별이 되고 말았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젊은 부부의 깊은 속내가 대견했다. 부인이 종교음악을 전공했기에 바흐의 음반을 건네는 게 고작이었다.
김태호의 조각작품과의 인연은 1993년으로 되돌아간다. 인사동 어느 화랑에 놓여 있던, 하얀 대리석으로 깎은 을 눈 깊게 만났다. 까까머리의 동자가 무릎을 두 팔로 감싸고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는 작품이었는데, 기교 없는 순수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화랑의 큐레이터도 ‘동자상’에 반해 매일 한두 번씩 쓰다듬는다며 화랑의 ‘지킴이’라 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막 군대를 다녀온 풋풋한 조각가의 작품이었기에, 몇 주 동안 드나들며 “누구에게 팔지 말라”고 이르고 관찰만 했다. 화랑 주인은 ‘중진 조각가의 작품과 견줄 만한 수작(秀作)이라서 값싸게 팔 수 없고, 상당한 가격에 구입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화랑에서 소장한다’며 애를 태웠다. 아내와 상의해 통장을 비워, 기어이 혼자 들기 버거운 을 택시에 싣고 와 온 식구가 쓰다듬으며 한 가족으로 삼았다. 조각작품 수집의 시작이었다.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는 ‘따뜻한 인간애’다. 지치고 고달픈 현대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려는 예술혼은 얼음처럼 차가운 대리석을 헤집고 인애(仁愛)의 형상을 쪼아낸다. 샐러리맨의 고독과 실직자의 아픔도 용해해 젊은이들에게 힘찬 형상을 선사하기도 한다. 은 2010년 벽두에 서울 서촌의 ‘갤러리 자인제노’ 전시회에서 만난 작품이다. 좌대까지 하나의 대리석으로 깎아낸 수작이다. 어린 남매를 배 위에 얹고 있는 따뜻한 모정이, 작품의 안정감과 리듬감을 균형 있게 전달한다. 세파(世波)에도 흔들림 없는 굳건한 ‘가족사랑’이 위대한 성(城)을 구축하고 있다. 한낱 돌덩이에 맥이 돌고,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따뜻한 미소가 번지게 된다. 누구나 성(城)에 안주하려 들지만, 그 성을 쌓아가는 고뇌의 노정(路程)을 잊지 말진저.
>>이재준(李載俊)
1960년 경기 화성에 태어났고 아호 송유재(松由齋)로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중이다. 중학교 3학년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 천여 점을 수집해왔다.
필자가 이끄는 모임에서는 늘 하룻밤을 같이 자는 엠티를 고집한다. 하룻밤을 같이 자본 사람들은 끈끈한 동료의식이 생긴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말로만 친하다고 떠드는 모임은 그때만 친하지 친밀도가 낮다. 그래서 엠티를 가는 것이다.
이번에 엠티를 간 모임은 필자가 새로 회장이 된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총동문회’다. 시내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만나 결속을 다지자니 주인에게 눈치가 보이고 문 닫을 시간이 되면 아쉬워도 헤어져야 한다. 그러나 엠티에서는 시간 제한이 없으므로 충분한 대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엠티는 늘 장소가 문제다. 이번에는 임원 중 한 사람이 강원도 원주에 소유하고 있는 별장이 있다 하여 그리로 정했다. 일단 숙박비가 안 드는 것이다. 총 9명이 참석했는데 자가 운전자가 있어 차량 2대도 손쉽게 정했다.
복정역에서 오후 2시에 만나 2시간가량 새로 난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가니 어느새 목적지였다. 앞뒤로 넓은 풀밭과 통유리가 시원하게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멋진 집이었다. 집 옆으로는 개울이 있었고 신록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지대에 집이 위치해 있어 독립적인 안온함이 있었다.
엠티의 즐거움 중 하나는 먹는 즐거움이다. 숯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 재미가 필수이자 엠티의 절정이다. 숯불은 늘 주인이 피워주었고 우리는 석쇠 위에 고기나 올려 잘라 먹었기 때문에 숯불 피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동안 잘 몰랐다. 그러나 이번에 해보니 손이 많이 가고 기술이 필요한 노동이었다. 며칠 전 동해안 산불로 연일 시끄러웠던 터라 불 피우는 일이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상추 등 야채와 갓 익은 고기들을 싸 먹는 재미가 좋았다. 마침 비까지 내려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감상에 젖기도 했다.
바비큐 식사 후 방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토의에 들어갔다. 먼저 회장 인사에서 엠티의 취지와 효과, 그리고 최근 시니어 리더십에 필요한 ‘커뮤니티 리더십’과 ‘서번트 리더십’에 대해 설명했다. 직장처럼 서열이 있는 모임이 아니므로 수평적 입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중점 사업으로 계획하고 있는 동문회보 발간, 동문 온라인 카페 개설, 봉사활동과 연계한 일일호프 행사에 대해서도 협의했다. 이어서 지난해에 했던 행사 중 정기사업인 산행과 송년행사, 정기총회 등에 대해서도 의논했다.
밤늦게까지 협의하고 각자 자리를 잡고 취침에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식사 후에는 차를 마시며 여러 가지 후일담을 나눴다. 나서는 길에 인근 토지문화관 산책에 나섰다. 점심 겸 해서 막국수로 배를 채우고 서울로 향했다. 1인당 회비 3만원으로 잘 먹고 좋은 과정과 결과를 만들었다. 모두들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했고 만리장성을 쌓으며 한결 친해진 느낌이었다. 이 원동력으로 앞으로 1년 임기를 끌 고나갈 작정이다.
연극무대에 선 배우 정동환(鄭東煥·69)을 만나면 단연 그 에너지에 압도될 것이다. 곧 칠순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쏟아내는 힘과 광기에 가까운 열연은 그가 어째서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인터뷰는 정동환을 최근 화제의 중심에 올려놨던 연극 이야기로 시작됐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방대한 원작을 국내 연극 사상 가장 긴 일곱 시간짜리 연극으로 만든 에서 그는 무려 4개의 배역을맡았다. 너무 길어서 1부와 2부로 나누고 중간에 인터미션까지 있는 이 상상하기 힘든 프로젝트가 그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내가 아는 기존
연극은 두 시간짜리 압축판이었어요. 그런데 연출자인 나진환 교수가 이걸 일곱 시간짜리로 하자니까, 진짜 마음만 있는 건지 능력도 있는 건지 처음에는 의심도 했지. 요즘 그런 사람 많아요. 생각을 갖고 시작하는데, 하다 보면 자기도 이걸 왜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만약 그러면 참 복잡해지는 거지. 말이 일곱 시간이지 공연을 일곱 시간을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
을 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했을 때도 정동환의 고민은 여전했다. 막상 잘하지 못해서 ‘굳이 할 이유가 있었나?’ 하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고생은 몇십 배 하고 듣는 게 비난이면 무슨 가치가 있나 걱정이 된 것이다.
“그런데 당장 나에게 떨어진 배역들을 보니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싶었어요(웃음). 시간이 쏜살같이 막 지나가는데, 한 시간 지나가면 자지러질 것 같은. 재미있는 걸 느꼈어요.”
‘재미있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서, 그가 가진 연극의 혼이 훅 들어왔다.
아직도 재미있는 것을 찾는다
“연습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열한 시쯤 되는데 ‘아니, 내일 아침까지 열 시간도 안 남았단 말야? 뭐부터 분석하고 뭐부터 외워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정신적 압박에 하루가 가는 게 너무 아까워서 큰일 났네 했죠(웃음).”
자신의 모든 걸 던져야 하는 극한 상황. 바닥을 치고 거울을 보며 정동환은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했다.
“치열하게 했죠. 그럴 수밖에 없었고. 충분한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무조건 두 시간짜리 연극의 세 배 분량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오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리고 배역이 네 개로 쪼개져 있으니 머리가 한쪽으로 안 가는 거예요. 지난번 공연에서는 클로디어스를 했는데, 그건 고통을 많이 겪어도 한 인물로서만 고통스러우면 되는 거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이건 한쪽에만 정을 줄 수도 없고, 시간을 줄 수조차 없어서 하나도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새삼 칠순을 앞둔 연극인이 겪은 그 지독한 모험에 대한 경외감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감 속에서, 연극 시작하기 전날 밤 기분이 어땠을지 궁금했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는 다 포기했지. 이젠 죽었다 하고 포기했어요.”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
정동환은 을 하면서 겪은 고통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해도 알아들을 사람도 없고 말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내 마음을 아무도 알 수 없었죠. 다만 ‘내가 조금 잘못하면 내 인생은 끝난다’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3m 탑 위에 올라가서 대사 한마디만 빠져도 전체가 어그러져서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그럼 난 내려올 수밖에 없다. 네 시간을 했든 일곱 시간을 했든, 네 개의 역을 했든 일곱 개의 역을 했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어느 순간이 나를 추락시킬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내려올 때까지 했어요. 그런 절대고독 속에서 ‘그 무모한 짓을 왜 했어?’라고 누가 물어오면 ‘누군가는 해야 하는 거였으니까’라고 대답했을 거예요.”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이라는 말은 연극인으로서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그 말 한마디에 담긴 힘에 자신을 싣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걷는 배우다.
“저는 이 작품이 굉장히 좋았어요. 처음에는 많이 우려했죠. 그러다가 우려가 오히려 작품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었고 보는 사람도 틀림없이 만족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관객들도 제 가족들도 만족했고, 그 점에 대해선 안도합니다. 그래서 일곱 시간이 아니라 더 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왔는가, 뭐하러 왔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정동환에게서는 연극인을 넘어서 연극 그 자체가 삶으로 체화된 듯한 인상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그도 건강은 쉽지 않은 숙제였다.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로 오가게 된 것도 건강 때문이에요. 한때는 운전을 못할 정도로 공황장애가 심했어요. 몇 년 지나니 이제는 괜찮아요. 그런데 항상 걱정되죠. 나는 그 상태를 일종의 과부하 상태로 봐요. 자꾸 새롭게 뭔가를 벌이다 보니 내 능력이 한계를 보이는 거고 정신적으로 혼란이 오는 거겠다 싶었어요. 이제 좀 편하게 살아야 하는데 자꾸 어려운 일, 새로운 일을 찾아서 하니….”
“그럼 더 이상 도전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기자가 말하자 그가 긍정했다. 그러나 이내 “그런데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라고 한다.
보리는 올라올 때 밟아줘야 잘 크기 마련이다. 배우 정동환은 그런 보리밟기 같은 과정을 자신의 자아 본연에 심어놓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예술가적 기질, 그 꿈틀거림을 현실과 주고받는 훈련에 철저한 배우다.
“인생을 사는 것도 연극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극은 등·퇴장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연극은 ‘왜 왔는가, 뭐하러 왔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로 온통 채워져 있어요.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세상이 이러니까 이런 거지’가 아니라 ‘진짜 필요한 건가,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그에 따라 움직일 줄 아는 것. 그게 연극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고 내가 연극과 인생이 같이 가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유예요. 새로운 세상이니까 더욱 숙고하면서 뭔가를 해야지, 그저 세상이 백세인생 시대이니까 그에 맞춰가는 건 아니죠.”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길, 가족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연극을 즐겨 보러 다녔다고 한다. 물론 지금처럼 연극 공연이 많지는 않았다. 1년에 한두 편 정도 볼 수 있었던 시절이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65년에 전국남녀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으면서 연극인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햇수로 따지면 무려 52년이라는 시간이다. 그는 연극을 하지 않았다면 성직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젊어서부터 종교에 심취해서, 어머니의 바람은 내가 성직자가 되는 거였죠. 나는 성직자에 뜻이 없었지만, 그래도 연극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신학교를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지금 하는 일이 거기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아니고.”
성직자와 연극인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그의 말은 연극에 대한 그의 태도가 얼마나 헌신적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배우 정동환은 매번 작품 속에서 타인이 이해 못할 고독을 마주하며 살고 있지만, 그는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그에게 가족은 무엇보다 중요한 인생의 의미로 작용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결국은 가족에 맞춰서 사는 게 아닌가,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가족을 위한 어떤 것을 갖춰나가기 위한 거죠. 누구한테 ‘난 이래서 이래’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연히 가족을 중심으로 가족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을 걷고 있는 거죠.”
그에게 가족은 다시 돌아오는 길과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가족으로 어머니와 아내를 꼽았다.
“어머니는 어렵게 사셨어요. 저희가 3남 1녀
였는데,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식 교육을 다 시키셨죠….”
그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침묵했다. 마치 절대고독 속에 들어간 사람처럼 보였다. 기자는 기다려야 했다.
딸의 삶을 바라보는 기준은 행복
화제를 돌려 그의 둘째 딸 정하늬도 그와 같은 연극인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쉽지 않은 연극의 길을 걷는다는 것에, 그는 ‘좋다’고 말했다.
“딸이 어떤 연기자가 되길 원하는 것은 없어요. 나는 치열한 쪽을 택했지만 딸은 그런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게 틀렸다는 생각은 아니고, 내 세상하고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사는구나 싶어요.”
딸의 삶을 인정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그저 방임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난 이거밖에 안 돼’ 하며 포기하는 순간만 없으면 언제든 가능성이 있어요. 저는 고통스럽고 고뇌가 있는 길을 가야 그 뒤에 보이는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피해 간다면 그 뒤에 오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거지. 그런데 그 어떤 것을 보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삶에 만족한다면 그것도 좋다고 봐요.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을 보면 딸도 알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것은 연극인 선배로서의 질책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딸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틀림없이 그렇다고 보고 있어요. 만족은 자기마술이거든요.”
행복은 질이 아니라 양일 수도 있다. 순간순간에 느끼는 행복이 모아지면 그게 더 큰 의미와 행복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정동환은 요즘 세상 사람들이 그 생각을 잃었다는 게 엄청난 안타까움이라고 말했다.
“지금이 행복이어야 하는데, 내일을 위해 지금을 희생해야 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잘못된 것인데 갈수록 심해지고 있죠.”
지금을 위해 견뎌온 삶
삶의 우여곡절을 지나, 정동환은 지금이 가장 평온한 시기로 보인다. 그에게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묻자 ‘지금 같은 때를 위해 견뎌온 것 같다’고 답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어려운 길을 일부러 자초하고 가는 게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냐’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나는 그게 필요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계속 새로운 것을 찾는 그가 맞이할 미래를 물어봤다.
“별다른 것은 없어요. 연극하자는 제안이 아주 많아요. 그중에서 내가 해야 할 게 무엇인가 분명히 알고 그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해졌죠. 결과보다는 작업을 하려는 목표 자체에 대한 가치에 비중을 두고 작업해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할 필요가 있지요.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더 들어요. 자신 있게 나가지 못하고 준비가 덜 된 사람이 뭘 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은 느낌? 서커스를 하는 듯한 정신적인 위축이 들 때도 있고, 그러다 죽어버리면 마는 거지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뇌하고 견디는 실체의 기쁨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요. 그래서 후배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큰 의미는 아니더라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라고 얘기되는 사람이 되면 고맙고 좋은 거지. 어렵더라도 조금 더 견뎌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로 정동환다운 대답이고, 정말 말도 안 되는 대답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정동환이다. 한 번 경험하면 누구도 잊기 힘들 ‘그런 사람’.
“아마 남대문 방화도 문화해설 체험을 통해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없었을 일일지도 모르죠.”
우리문화숨결 궁궐길라잡이 오정택(吳政澤·52) 대표의 말이다. 그냥 넓은 공터가 있는 옛날 건물이 아니라, 누가 살았고 어떤 역사가 있었고, 왜 우리가 아껴야 하는지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면 방화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궁궐길라잡이들은 그런 면에서 중요한 사람들이다.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리고 보존활동에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2002년에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건축 반대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궁궐길라잡이가 설립된 것은 1999년. 당시 청년단체였던 ‘서울KYC’가 중심이 돼 출범했다. 오정택 대표는 초창기부터 참여하다 대표를 맡은 지는 10년이 넘었다.
궁궐길라잡이는 오랜 역사 속에서 변화도 많았다. 초창기에는 경복궁과 창경궁, 덕수궁만 해설하다가 이후 창덕궁과 경희궁, 종묘까지 해설을 맡았다.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대통령상 등 수상 내역도 화려하다. 그만큼 정부로부터 수고를 인정받은 것이다. 현재는 서울시에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되어 있다.
이들의 각 궁궐에서 하는 해설은 모두 무료로 진행된다. 문화재청에서 단체 운영에 필요한 일부 예산을 후원받을 뿐 대부분의 활동은 회원들의 재능기부로 이뤄진다.
“비영리단체이고 해설에 대한 비용도 없어 운영이 쉽지 않긴 하죠. 하지만 그만큼 이해관계나 갈등의 요소가 적어 원활한 모임 운영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혹시 궁궐길라잡이분들을 보시면 자부심과 보람만으로 하시는 일이니 꼭 응원해주셨으면 해요.”
매주 일요일 각 궁궐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궁궐길라잡이는 대략 400여 명. 해설이 가장 많은 경복궁의 경우는 하루 10회 이상 해설이 이뤄지기 때문에 문화해설사도 그만큼 필요하다. 오 대표는 그중 상당수는 시니어라고 말한다. 현역 최고령 회원은 1943년생이다.
“약 20% 정도는 은퇴하신 분들이죠. 자긍심과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이다 보니 나이가 많으신 분들에게 적합한 것 같아요. 일요일 궁궐 해설뿐만 아니라 청소년 대상 사업이나 심화강좌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시니어가 참여할 수 있는 일거리가 적지 않습니다.”
교육을 통한 길라잡이 배출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9개월 교육기간에 비용은 20만원에 불과한데 강사진 중 상당수는 대학 강단에서 활동을 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올해는 45명이 교육을 받고 있다.
오 대표는 경희궁 해설 활동을 최초로 시작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경희궁은 입장료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현장 중 한 곳입니다. 저희의 해설 활동 시작이 경희궁의 가치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적 복원이 어려울 때 해설로 그 가치를 복원하는 셈이죠. 또 달라진 관람문화도 저희가 기여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둘러보고 쉬다 가는 관람문화가 지금은 체험하고 이해하는 문화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해설사들의 노력이 있습니다.”
전쟁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맹목의 뜨거운 싸움이 끝나면 이제부터 그 땅에 살아남아야 하는 개인들의, 살벌하고 차가운 또 다른 전쟁터가 열린다. 그래서 전쟁은 더욱 참혹하다. 전쟁은 늘 고상한 명분을 앞세우고 시작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불분명한 법이다. 전쟁은 그래서 더욱 추악하다.
전쟁영화 하면 식의 영웅담이 먼저 떠오른다. 승자 의식을 고취시키고 역사의 주도권을 확인하는 주류 영화들이다.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스펙터클하고 승자의 미담이 주를 이룬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는 아픔을 이런 식으로 봉합해왔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가 아물면서 이젠 전쟁 그 자체를 똑바로 직시하는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은 전쟁이 끝난 이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총소리 한방 들리지 않지만, 전쟁보다 더 스릴 넘치고, 오감과 심장을 쥐어짜고, 정서의 참담함을 성취한다. 이 기이한 전쟁영화는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고 도덕성을 황폐시키는지, 그리고 그러한 폐허에서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잔잔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덴마크 서부해변은 독일군이 매설한 200여만 개의 지뢰가 남아 있었다. 승전한 연합군 측은 이 지뢰를 독일군 포로들을 동원해 제거하려 한다. 그중 영화 속의 ‘스캘링엔’ 지역을 담당한 것은 주로 독일의 소년병들이었다. 그들은 작업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죽음에 내몰린다.
소년병들이 지뢰 해체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장비도 없이 작은 탐지봉 하나에 의지하여 모래밭을 기어가며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다. 아름다운 해변의 모래사장이 그들에겐 죽음의 땅인 셈이다. 영화는 그들 중 일부인 ‘칼 상사(로랜드 몰러)’ 휘하 소년병들의 이야기를 통해 종전되었지만, 결코 끝나지 않은 전쟁의 깊은 상처를 증언하고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독일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는 덴마크 군인 ‘칼 상사’에겐 소년들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때문에 소년병들에게는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고 허름한 판잣집에 몰아넣은 채 지뢰 제거 작업에만 몰두하게 한다. 한때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나치 독일이라는 괴물과 싸웠지만, 이제는 그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원제는 덴마크어로 ‘모래 아래(under sandet)’라는 뜻이었지만, 영어 제목으로 바뀌면서 ‘지뢰의 땅’이라는 의미와 ‘나의 땅’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됐다. 그러니까 소년병들에겐 이 땅의 절망과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이 늘 교차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이 간절한 소망이 그들을 살리는 힘이며 칼 상사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지뢰가 폭발하면 팔다리가 찢어지는 이 지옥의 땅도 눈을 들어 보면 평화롭고 아름다운 해변이듯, 상사의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빛도 부모의 마음으로 보면 그들도 그저 순박한 아이들일 뿐이다. 상황이 만들어낸 잔인한 ‘칼 상사’도 소년들의 선한 눈망울을 보며 점차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며 구원의 길로 나아간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덴마크의 마틴 잔드블리엣 감독은 무명에 가까운 배우와 평범한 소년들을 통해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간하기 어려운 전쟁의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전쟁이란 본디 아이러니로 가득한 인간들의 맹목임을.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세계적 문화유산 2가지를 말하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아주 많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 불국사, 석굴암, 수원화성, 고인돌 유적, 해인사 대장경판, 종묘, 판소리, 강강술래 등 유형 및 무형 문화유산이 많은 편이다. 특히 제주도는 최근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되었다.
우리는 그런데도 공기나 물처럼 그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마운 것인지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그중에서도 세계 제일인 것을 말하라면 한국인에게 자랑스러운 유형의 한글과 무형의 선비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높은 문맹률 퇴치와 자본주의의 폐단인 이기적인 삶의 만연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점을 해결해줄 수 있는 이러한 아름다운 문화를 전파하는 일에 우리나라 발전의 새로운 동력인 액티브 시니어들이 나선다면 우리의 인생 2막은 훨씬 더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이 되리라 생각한다.
1. 훈민정음
한글은 유엔이 인정한 세계 최고의 문자다. 유엔의 산하기관인 유네스코는 매년 지구촌 문명퇴치에 공이 큰 각국의 기관과 단체에게 세종대왕 문해상(King Sejong Literary Prize)을 수여하고 있다. 현재 서울 간송 미술관에 보관 중인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1962.12.20)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종 28년 (1446년) 창제 반포된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한글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는 이유는 표음문자, 음소문자, 자질문자의 3요소를 모두 갖춘 지구상의 유일한 문자일 뿐만 아니라 인류가 발명한 문자 중 창제 목적이 확실하고, 창제 일이 정확하고, 창제자가 분명한 문자는 한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한글은 과학적이고, 보편적이며 아주 실용적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인 언어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글은 인류가 발명할 수 있는 최고의 문자라고 격찬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IT시대를 맞이하여 한글의 우수성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한글의 세계화 운동을 더 적극적으로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어를 제1외국어 또는 제2외국어로 가르치는 국가가 2012년 현재 23개국 799개 학교로 증가하고 있다고 하며 그 학생 수는 약 7만6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가 세계 10대 무역국가로서 농수산물, 공산품 등 제품의 수출입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이제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한글이라는 문화도 함께 수출하여 세계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나라가 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한글이 지구촌 인류의 소통과 평안, 평등,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위대한 문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자로 모든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체계다. 오늘날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영어는 자음과 모음이 26자이지만 사실상 이를 표현하는 데는 26x4=84자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문화를 통일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한글로 문자를 통일한다면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2. 선비정신
오늘날 선비라는 말은 뭔가 고전적이며 구태의연한 느낌을 주는 단어다. 또 막상 선비에 대해 한마디로 말하라면 머리에서만 맴돌 뿐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는 일제 통치시대 때 일본의 한국 문화 말살 정책 결과에 따른 부정적인 영향일 수도 있다.
선비란 “인·의·예·지의 인간 본성으로 개인 인격을 수양하고, 효·충·경·신의 조직 원리로 사회 인격을 수행하여 만인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홍익인간을 실천하는 리더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아주 멋진 말이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오늘날 영어의 신사(gentleman)나 군자의 의미이지만 이런 낱말이 주는 뉘앙스보다 훨씬 더 멋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선비라는 말의 어원은 대략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선비란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알타이 어족 몽골어 기원설이다.
둘째, 고구려 조의선인(皁衣仙人)의 호칭인 선배(신라의 화랑도와 유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셋째, 선비 사(士, 하나를 알면 열 가지를 안다), 선비 유(儒,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 선비 언(彥, 문무를 겸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나온 의미라고 한다.
선비들이 갖춰야 하는 근본정신과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
오늘날 한국 선비정신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선비 아카데미 회장인 화원 선생은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살신성인, 거의소청, 극기복례, 법고창신, 솔선수범이다.
그러면 선비 정신의 보편적 핵심 가치는 무엇일가?
공자가 강조한 것은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이자 사회적인 존재로서 대동사회를 펼치기 위해 유학사상을 창안했고 이는 선비정신의 근본이다.
유학은 인도주의 사상으로 수기치인지학(修己治人之學)이다.
유학은 현실 중심 사상이다. 매순간 인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자는 강령으로 하의상달로 요약된다. 유학은 실천중심 사상이다. 유학은 관계구현 사상이다.
공부와 학습은 개인의 인격 완성을 위해 하는 것이고 나아가 조직의 인격완성을 위해 하는 것이다.
퇴계 이황은 개인 인격의 완성으로 독립할 수 있고 사회 인격의 완성으로 상생할 수 있다.
개인 인격은 인간의 근본인 진실함인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격물, 치지, 성의, 정심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이를 지도자의 셀프 리더십 근본으로 삼았다.
이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태도 및 행동의 뿌리다.
여기서 격물이란 대상에 대한 깊은 궁리로 밑바닥까지 캐내고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을 뜻하며 과학적 탐구를 뜻한다.
치지란 정확한 지식의 종착점을 말하며, 성의란 성실한 의지로 열정과 집중을 한곳에 투입함을 뜻한다.
정심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래의 양심으로 옳고 바르며 순수한 편견이 없는 마음이다.
수신이 이루어지면 개인 인격의 독립이 완성되고 스스로 빛을 밝히게 된다.
그다음 단계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빛을 이끌어내는 행위다.
즉 나와 남이 빛을 함께 발할 수 있어야 대동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
따라서 선비 리더십의 8가지 요소는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다.
이황이 성의 정심에 무게를 두고 정신적인 면을 강조했다면 이이는 격물, 치지에 중심을 두고 물질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선비란 어짊인 사랑과 섬김인 존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또한 선비는 자기 자신을 닦아 개인 인격을 완성하고 나아가 공동체를 위한 조직 인격과 사회 인격을 확립시키는 사람이다.
선비가 되기 위해서는 수기안인, 위기지학, 법고창신을 해야 한다.
오늘날 사용하는 언어로 대체하면 인간성 교육, 전문성 교육, 창의성 교육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비정신은 붓의 문화이며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인 칼의 문화와 구분된다.
따라서 한국은 붓의 문화로 칼의 문화를 감싸 안고 이를 극복하여 세계 문화의 창달에 힘을 써야 한다. 또 나아가 선비정신을 전 세계에 수출하여 아름다운 세계문화 창달과 홍익인간의 이념 실현을 위해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맞벌이가 대세인 요즘 손자녀들의 양육과 교육의 절반이 조부모 몫이다. 예전에도 손자녀의 돌봄이 있었지만 밥이나 챙겨주는 소극적 양육이었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또래 아이들과 떠들고 장난치고 밤이 깊어 가는지도 몰랐고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면 그때 달려서 엄마 품에 안기면 끝이었다. 과외공부도 없었고 고작 학교 숙제가 발목을 잡는 그야말로 숙제였다.
지금의 아이 양육은 먹이고 씻기는 일은 기본이고 시간 맞춰 과외수업 현장으로 내 몰아야하고 교통사고나 유괴의 우려가 없는지 늘 매의 눈으로 아이를 살펴봐야 한다. 금쪽같은 내 손주 누구나 다 잘 기르고 싶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잘 기르는 방법은 모른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떤 놀이를 해줄까?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좋아할까? 늘 궁금증은 있었다. 그러던 차에 건강가정 지원센타에서 "3가지로 좋은 조부모 되기"강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참가하게 되었다. 3가지는 "마음이 통하는 조부모, 신체 놀이가 통하는 조부모, 구연동화가 통하는 조부모" 가 가되기 위한 교육이었다. 손자녀의 마음을 읽고 유아의 눈높이에 맞춘 조부모의 구연동화는 장차 손자녀가 살아가는데 마음속에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고 강사가 강조한다. 할머니 무릎에서 들었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도 가슴에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봐서 틀린 말이 아니다. 피아제(스위스출생, 아동발달심리학자 1896~1980)의 인지 이론에 의하면 유아기의 심리는 돌멩이를 비누로 상징하고 모래로 밥을 짓고 풀잎으로 나물을 만들어 소꿉놀이를 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보고 듣는 직관적 사고로 무생물도 살아서 숨 쉬고 느끼고 자란다는 물활론적 판단을 갖고 있다. 더구나 자기가 꾼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믿으며 사물이나 현상을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사물의 여러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이와 어른은 다르다. 내 아이를 키울 땐 거창한 이런 걸 모르고 못 느끼고 가슴의 사랑으로만 키웠다. 나이 들어서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면서도 피아제의 인지 이론을 공부했지만 감동 없이 그러려니 했다. 잊고 있던 유아기의 심리상태를 선생님 말씀과 그동안 손자녀의 행동을 견주어보니 아이들 마음이 이런 마음 이었구나 하고 이해가 가고 배우고 안다는 것이 즐겁다. 유아원에서 첫 아이에게 아빠 직업을 물었더니 도둑 잡는 경찰관이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너희 아빠 참 훌륭하시다. 우리 친구들 여기 봐요! 누구 아빠 대단해요 우리 박수 한번 쳐줘요"한 후 다음 유아에게 아빠 직업을 물으면 경찰관 이라고 대답 한단다. 그 다음 유아도 또 그 다음 유아도 모두가 자기 아빠가 경찰관이라고 대답 한단다. 유아에게 거짓말 한다고 야단 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유아의 심리 상태란다. 아이들끼리 소꿉놀이 하는 걸 유심히 보면 모래로 밥을 하고 풀잎을 뜯어서 김치를 담근다. 아이들 세계는 그것이 정상이다.구연동화를 위해서는 작품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동화를 익힌 후 거울을 보면서 연습하고 녹음을 해서 듣고 고쳐가며 많은 실연을 해야 자연스러운 동화구연이 된다. 시니어에게도 봉사활동이나 직업으로도 구연동화가는 매력적임에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풍부한 인생사가 들어있으니 자연스럽게 실감나는 구연동화가 가능하다.
원래 구연동화는 어떠한 소품도 사용하지 않고 교육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의 동화를 입으로 연기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다양한 교재를 활용하거나 집에 있는 간단한 소품들을 이용하면 더욱 실감나는 연기를 재미있게 할 수 있다. 음의 높낮이 와 등장인물에 적합한 음성을 모방하고 가끔 효과음을 넣는다면 아이들은 행복하고 놀라운 가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좋은 조부모되기 위해 노력하고 아이의 마음 상태를 알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인도 유아의 심리상태로 돌아간다. 얼굴과 목소리는 녹슬었지만 마음만은 유아가 된다. 회춘이 따로 없다. 생각이 젊으면 몸도 젊어진다. 유아의 눈높이에 맞는 종이접기, 구연동화 실제 해보기로 서툴지만 한바탕 웃음으로 끝이 났다. 배움은 끝이 없고 배워야 산다.
운에 관한 이야기를 논하다 보니 정말 어떻게 하면 운 좋은 사람 대열에 들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성공적 삶을 살고 있는 분야별 대가, 아름다운 가정에서 근심 걱정 없이 사는 이들을 만나다 보면 공통점이 느껴진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임에도 이구동성 하는 말과 행동이 있다는 것. 일본의 정신경영 대가 니시다 후미오의 저서 과 , 미국의 에리카 J. 초피크와 마거릿 폴이 함께 쓴 , 지금까지 만난 취재원의 인생이야기를 바탕으로 ‘운 좋은 습관 만들기 5일 행동강령’을 구성해보았다.
◆1일차◆ “긍정적인 말과 표현을 하자”
2014년 개봉된 시니어 본격 로맨스 다큐멘터리 영화 를 보면서 긍정적 표현과 말의 힘을 느꼈다. 영화 속에서 소녀 감성 89세 강계열씨가 남편과 대화할 때 사용되는 단어와 문장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이뤄져 있다. 행동 또한 사랑이 넘쳐난다. 운이 좋아지는 습관을 만들어주는 31일간의 행동강령으로 구성된 의 3일 차에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긍정적인 말’이다.
‘말은 마음(혼)을 만들기 때문에 무섭다.’
책에서 인용한 이 말은 일본인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말이다. 부정적인 말을 사용함과 동시에 안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고 나쁜 감정으로 빠져버리기 쉽다. 마치 불쾌한 경험을 했거나 어디선가 그 일이 이뤄진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결과는? 당연히 좋을 리 없다. 차가운 분위기가 흐르고 말을 못 걸 뿐 아니라 며칠을 지속하다 보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나 고민스럽다.
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한 끗 차이다. 더 많은 문장을 생각해보길. 일상생활에서 내가 쓰는 말이 어떤지 말이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안정적이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감이 넘친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취재원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선택한 말을 손으로 옮기면서 그 사람의 인상, 심상 등을 생각하게 된다. 안정적인 목소리와 함께 긍정적인 단어 사용은 상대방에게 신뢰와 믿음을 주고 다시 만나고 싶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가? 긍정적인 표현이 첫 번째 단추가 될 것이다.
☞솔루션
부정적인 말, 긍정적인 말로 바꿔 말하자.
입버릇처럼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훈련이다. 말을 내뱉기 전에 자기가 할 말을 곱씹어 보고 천천히 말을 한다. 밉다, 싫다, 짜증, 아니다. 불쾌하다, 재수 없다 등만 일상에서 쓰지 않도록 주의하자.
◆2일차◆ 상대방을 감동시키자
니시다 후미오의 책 의 내용은 정말 간단하다. 하루에 한 번씩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행동이 일상에 좋은 기운을 불어넣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삶을 개선해나가는 성공 법칙이라고 소개한다. 성공을 위해 뭘 배우고, 어떤 사람을 찾아가는 것 말고 먼저 남을 위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것. 배려하고 좋은 행동을 하려는 마음은 소소한 변화에서 집단적 실천까지 불러일으킨다. 선한 일을 생각하거나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안정되고, 인체 면역력이 높아지는 효과를 ‘테레사 효과(The Mother Theresa Effect)’(하버드의대 보고서·1988)라고 부른다. 테레사 수녀가 명상록에서 밝힌 일화, 즉 9000명분의 식사가 똑 떨어졌을 때 빵을 한 가득 실은 트럭이 오는가 하면, 죽어가는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약이 기증 품목에 들어 있었던 사례는 너무 유명하다.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가능했을까? 테레사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이 불러온 긍정적인 효과다. 최근 식품업체 ‘오뚜기’에 대한 국민적 성원도 테레사 효과의 일면이다. 시식사원 전원 정규직 전환,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 1500억원의 상속세 완납 약속 등으로 ‘갓(God)뚜기’라는 별칭까지 얻고 ‘이젠 오뚜기만 먹겠다’는 소비자들도 늘어났다. 이들은 결코 어떤 효과를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다. 한결같은 선행을 이어나갔고 시간이 흘러 긍정적인 효과로 다가온 것일 뿐이다.
☞솔루션
1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람의 장점을 생각해볼 것.
2 진심을 다해 인사할 것.
3 연애하라. 그리고 더욱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상대에 대한 좋은 마음이 쌓여 행동으로 옮겨지면 운 좋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3일차◆ ‘부정적 생각이 엄습할 때 3초의 룰’
사람이 살다 보면 실패도 있고, 기분 나쁜 일, 견디기 힘든 일도 당하게 된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풀이 죽고, 화를 내고, 한숨을 내쉬고, 눈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심지어는 운다. 니시다 후미오는 에서 이런 동작과 표정은 뇌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킨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힘든 상황이 닥치더라도 의식적으로라도 부정적인 표정과 동작을 취하지 말기를 조언한다. 그 비책이 바로 ‘3초의 룰’이다. 불쾌한 일이 있어났을 때 그 일을 잊기 위한 신호를 정해두는 것이다. 최면에서 깰 때 ‘레드선’ 하면서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표정, 동작 또는 말도 좋다. ‘3초의 룰’은 부정적으로 흘러갈 감정선을 긍정의 에너지로 변환해준다.
☞솔루션 : 에잇! 물러꺼라~! 나쁜 생각, 나쁜 상황이여!!
나만의 스타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밟고 지나갈 수 있는 룰을 만들어 사용하라. 행동, 말, 동작 뭐든 좋다.
예) 손뼉을 친다, “아무 일 아니야!”라고 말한다. 또는 발을 구른다든지, 물을 마신다든지 한다. 가능한 한 간단한 것이 좋다.
◆4일차◆ 당당하고 씩씩하게 걷자
20대 초, 한 연극배우가 연극배우와 뮤지컬 배우를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준 적이 있다. 뮤지컬 배우는 딱 봐도 ‘내가 배우야’라는 걸 강조하듯 세련된 옷을 입고 구름 위를 통통 튀듯 당당하게 걷는다, 머릿결을 찰랑거리면서 누군가를 만나면 ‘솔’ 음에 목소리를 맞춰 리듬감 있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연극배우는 잦은 연습으로 트레이닝복을 입고 무대가 아닌 이상 화려함은 내려놓고 걷는다. 한 사람의 의견이었지만 납득이 가는 내용이었다. 노래와 춤을 추고 큰 무대에서 관객을 아우르는 공연을 주로 하는 뮤지컬 배우와 대사를 통해 섬세한 연기를 해내는 연극배우의 표현 방식 차이에서 오는 행동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실생활에서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뮤지컬 배우의 걸음걸이를 권하고 싶다. 어깨를 쫙 펴고 턱도 좀 살짝 올리고 웃으면서 당당하게 걷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치유를 느낀다. 심각하게 힘든 일이 있었다면 더 어깨를 펴고 걷는다. 이 또한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 무엇보다 당당하게 걷는 사람은 폼도 나고 다른 사람에게 신선한 느낌을 준다.
☞솔루션 : 당당하게 걷기 전에 할 일
어깨와 등, 무릎을 쫙 편다. 목도 크게 한 번 돌려준다. 얼굴 표정도 중요하다. 한껏 당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내 몸 구석구석에 말한다. “컨디션 최고!”라고.
◆5일차◆ ‘내면아이’ 존중하고 사랑하기
최근 등 인간의 심리를 소개한 다양한 책들이 출간되었다. 그중 공감하면서 실생활에 적절히 대입해봤던 것이 에서 말하는 실천이었다. 책 한 권의 내용을 짧게 설명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인간 누구에게나 내면아이와 내면어른이 존재한다. 내면아이가 내면어른으로부터 방치되거나 혹은 억압당했을 때 분노나 고통의 표현은 과격해질 수 있고 피해의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 반면 내면아이를 사랑으로 보듬고 훈련시키면 놀라운 능력과 자기 발전의 원동력을 주기도 한다.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아니라 둘 다 나라는 것. 둘의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살아가는 데 무리가 없다. 간혹 말을 내뱉기 전 ‘이 말을 하면 실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말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보자. 그런 일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혹 그랬다면 이는 내면아이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생기는 일일 수 있다. ‘내면아이’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면 이에 관한 책을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내면아이가 가진 순수하고 맑은 정신은 ‘막돼먹은 아이’로 혹은 ‘창조적이고 획기적인 실천성’으로 표출된다. 가장 어려우면서도 반드시 알아야 할 나. 내 안에 꿈틀거리는 아이가 있다고 느껴지면 말을 걸어보길 바란다.
☞솔루션
내면아이 깨우는 세 가지 방법
1 글을 써서 대화한다. 그것이 부정적일지라도 글로 써서 뭐가 문제인지 생각해본다.
2 혼자서 역할놀이를 하듯 내면아이와 큰 소리로 대화한다. 이상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말도 안 되는 투정처럼 일을 그르쳤던 상황이 있었다면 꼭 필요한 과정이다.
3 그리고 마음껏 말하도록 내버려둬라. 음성언어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운 좋아지는 습관에 대해 찾아보고 글을 쓰다 보니 느끼는 것은? 운이 좋고 나쁜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이나 현상이 혼자만의 생각으로 한순간에 부정적이거나 또는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 너무 의미심장하게 운 좋은 습관을 만들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어제 에스컬레이터를 탔으면, 오늘은 계단으로 가보자. 내게 가까운 작은 선택과 실천이 어느새 반짝반짝 빛나는 운을 가져다줄 것이다.
힘든 상황이 닥치면 의식적으로라도 부정적인 표정과 동작을 취하지 말기를 조언한다. 그 비책이 바로 ‘3초의 룰’이다. 불쾌한 일이 있어났을 때 그 일을 잊기 위한 신호를 정해두는 것이다
10월 14일부터 11월 11일까지 서울역 1·4호선 환승 통로에서 서울역 일대의 역사를 그린 만화가 김광성(金光星·62)의 그림이 전시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참 따뜻하다, 정겹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수묵담채로 그려진 한국적인 특유의 색감도 그렇거니와 세밀하게 그려진 인물과 풍경들에서 오래전에 볼 수 있었던 서울의 옛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주제와 소재들로 밀도 높은 작품세계를 꾸준히 확장하고 있는 김 작가의 그림은 파리 크리스티 옥션에서 거래될 정도로 그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삶과 일에 관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두 번째 만남인지라 준비해간 질문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인사동 통인가게 2층 찻집에서 내준 발효 생강차가 채 식기도 전이었다. “대표작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앞으론 뭘 그리고 싶은가요?” 이런 질문은 ‘김광성’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아니, 이런 진부한 질문들을 의미 없이 던지는 것은 그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는 데 걸림돌만 될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노트북을 덮었다.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광성 작가는 올해 62세다. 만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다소 늦은 36세 때였다. 당시 인기 만화잡지였던 이 그 전까지 대기업 직장인, 가게 사장님으로 살았던 그를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했다. 이후 26년간 펜을 놓지 않은 그는 자신의 경력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 그와 비슷한 또래의 만화가들은 대부분 30년 경력을 넘겼을 테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또래이면서 활동하는 만화가가 적은 현실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의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30대 후반에 도전하게 된 만화가의 삶
“학생 때 만화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명랑만화에서부터 극화만화까지 만화란 만화는 다 좋아했죠. 살던 데가 부산 외곽 시골이었는데 만화방이 생긴 게 행운이었다고나 할까.”
김 작가의 아버지는 남사당 사물놀이 꼭두쇠였다. 아버지는 농기구를 예술적으로 만들고 돗자리나 가마니도 전부 손으로 만들곤 했다. 그 끼를 물려받은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림을 그리다 사회에 나와서 십 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죠. 학창시절 때 그림을 그리면 아버지께 혼쭐이 났어요. ‘그림 그리지 마라, 빌어처먹는다’라는 말씀이셨죠(웃음). 그래서 그림을 접어야 했어요.”
그러나 인연이라는 것은 의외로 끈질기다. 회사를 가니 유화반이 있었고, 그는 거기서 유화를 배우게 된다.
“회사 다닌 지 십 년째가 되니 사회 영향을 받아 회사에 변화가 생겼어요. 마침 저도 십 년 다녔으면 지긋지긋하게 했다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죠. 1986년에 아시안게임이 있었고 1988년에 올림픽이 있었죠. 그때 곳곳에서 무허가 건물들이 들어섰는데 어머니가 ‘넌 그림 실력이 있으니 간판집이나 해라’ 하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도 괜찮겠다 싶어서 가게를 차려서 2년 동안 쏠쏠하니 재밌게 일했어요.”
간판집 사장으로 일하던 그는 그동안 전혀 접하지 못했던 만화를 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됐다. 당시 만화계에는 신인들이 올라오던 시절이었고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들도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좋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가져와서 보는데, 만화 보느라 간판 제작일이 잘 안 됐어요(웃음).”
처음에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재료를 사서 허영만, 이현세 등 기성작가들의 작품을 베껴봤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시장이 굉장히 활발했어요. 내가 거기에 끼어들면 색다른 작가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 를 그렸죠. 그게 반응이 좀 좋았고, 그러면서 만화가로서의 삶이 시작됐어요.”
만화는 농사와 같다
이후 30여 년 가까이 만화가 생활을 했다. 이제 중견 만화가이자 인정받는 작가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만화는 농사다’라고 말한다.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농사를 지었어요. 만화도 농사처럼 뭔가 다져지고 공부하고 비축이 된 상태에서 나온다는 의미죠. 그림도 기초가 되어 있어야 표현을 하잖아요. 만화는 머리에서 먼저 그려야 해요. 머리에서 먼저 안 그려지면 아무것도 안 돼요. 그러기 위해선 머리에서 그릴 수 있도록 많은 것들이 쌓여야 하죠.”
김 작가는 우리만화연대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우리만화연대는 만화인들의 모임으로 이론적으로 만화계 저변을 단단하게 다듬는 걸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만화에 대한 분석과 만화계가 처한 상황에 대한 해법 등을 제시하는 활동은 김 작가의 성향과 공명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요즘 바라보는 만화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나마 우리 만화계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있어서 다른 예술 분야보다는 형편이 좀 좋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수년 전부터 만화에 대한 효용가치가 달라졌어요. 만화가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인식하게 된 거죠. 요즘은 어디를 가더라도 만화가에 대한 대접이 과거에 비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문제는 이제 신인, 기성 할 것 없이 양질의 작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거죠. 잘나가는 작가들은 에이플러스 주고 싶을 정도로 잘해요. 그런데 그런 작가들은 한정되어 있거든요. 그 외의 친구들은 많이 분발해야 하는데, 최근 웹툰 업체들이 많이 생겼어요. 이 업체들은 작품을 달라고 성화죠. 그렇게 되면 작품성이 좀 떨어져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돼요. 작가들이 좀 더 자신의 개성을 살린 작품들을 발표하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죠.”
나이를 거꾸로 먹을 수밖에 없는 일
김 작가는 만화를 그릴 때, 그 안에서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감동받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잘 풀려나갈 때 느끼는 감동은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일 것이다.
“대개 새벽 두세 시에 잠자리에 드는데, 그때 창문을 열고 밖을 보면 참 뿌듯해요. 화가를 꿈꿨던 시절도 있었는데, ‘다시 태어나도 만화가 할 건가요?’라고 누가 물으면 그러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싶어요. 직업적으로도 매력이 있고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며 즐거워하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나도 한 역할을 하고 있구나 느끼게 되고 동시에 조심도 하게 됩니다. 또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내 작품에 대해서는 스스로 평을 못 하잖아요. 그런데 시인 고은 선생의 글을 읽고 ‘맛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제 만화를 보고 맛이 있다고 하니 최고의 칭찬이죠.”
그는 아직도 자신이 청춘이라고 말한다. 그저 말로만 청춘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여전히 어린이 만화 제작 요청을 받는 활발한 현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면서 그는 나이를 계속 ‘거꾸로’ 먹는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지 않으면 그릴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 만화가는 동방신기도 알아야 하고 걸그룹도 알아야 하고 아이들의 언어도 알아야 해요. 그러다 보니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애니메이션도 수시로 보게 되죠.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작품을 보게 될 수밖에 없거든요.”
“도태? 난 도태되고 싶어”
김 작가가 오랜 세월 만화계에서 일하면서 가져야 했던 작가적 태도가 궁금해졌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가 계속해서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만화가 우월하다거나 대단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활동하는 게 필요하니까, 직업일 뿐이니까 한 거죠. 직업이라고 말하면 한쪽에서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그런데 요즘 사회학자들이 인생에 대해서 많이 걱정하잖아요. 사람들이 소위 새로운 무언가에 몰입해서 휩쓸려 다니는 게 보이니까요. 이건 개개인의 문제여서 스스로 뭔가를 깨닫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좀 더 진지하게 감성이나 비전, 사유를 접하면 사유하고 감성이나 비전을 가지면 좋겠어요.”
그는 자신이 겪은 반(反)문명론자로서의 사연(?)을 하나 소개했다.
“어떤 젊은이가 내게 핸드폰을 줬어요. 그런데 복잡해서 도대체 어떻게 써야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짜증을 내니까 그 젊은이가 ‘선생님, 그거 안 하면 도태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도태? 도태시켜. 난 도태되고 싶어’라고 말했죠(웃음). 뭔가 새로운 게 나오면 다 그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몰라도 된다고 봐요.”
‘역시 아날로그적 도구로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백다운 발언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김 작가는 SNS 등 인터넷 활용은 물론 포토샵까지 다룰 줄 안다. 심지어 권당 200페이지짜리인 전 10권을 모두 포토샵으로 컬러링 작업까지 한 디지털 능력자다. 제대로 반(反)문명론자가 되려면 문명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어야 가능한 것일까.
틈만 나면 놀러 다니고 싶은 나이
100세 시대라는 말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김 작가의 미래는 앞으로 적어도 30년은 남은 셈이다.
“요즘은 틈만 나면 놀러가려고 해요. 원래는 놀지 않고 일만 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돼요. 돈도 안 되는 걸 밤새면서 왜 그렇게 했나 싶고요.”
아직도 일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김 작가에게는 현재진행형인 얘기일 수 있다.
“참 족쇄를 풀 수가 없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의무 같은 게 생겼어요. 그런데 의무가 무게를 가지면 참 골치가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2년 동안은 일 안 한다고 도망 다녔어요. 나중에 박재동 작가가 잡으러 왔어요(웃음).”
김 작가에게는 버킷리스트가 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같은 동네에 사는 비구니 스님과 함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려고 제주도에 가서 스킨스쿠버를 하고 유명산 밑에 가서 패러글라이딩도 해봤다.
“스킨스쿠버를 하면 세상이 확 차단돼요. 거기가 천국이에요. 물고기들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스님이 다음에는 바이크 면허 따서 할리데이비슨 타자고 하더라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