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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로부터의 독립, 오롯한 ‘나’로 성장하다
- 2013년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를 통해 수많은 딸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던 한성희(韓星姬) 이한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딸의 결혼을 앞둔 한 엄마이자, 정신과 전문의로서 건넨 진정 어린 조언이 큰 사랑을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잠시 절판됐던 도서가 최근 다시 출간됐다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시간의 흐름 때문일까? 표지에 그려진 딸의 모습은 한층 더 성숙해져 있었다. 당시 50대였던 한 원장 또한 어느덧 60대에 이르렀다. 딸 못지않은 인생의 전환점을 지났을 터. 그녀는 “잘 성장하고 있다”며 담담히 안부를 들려줬다. 하나뿐인 딸아이의 결혼, 그것은 한 원장이 책을 펴낸 계기이자 크나큰 성장통을 앓게 한 사건이었다. 자녀의 독립이 시원섭섭한 건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녀의 상황은 좀 달랐다. “딸이 미국 유학을 갔는데, 당연히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여겼죠. 그런데 어느 날 결혼 얘기를 꺼내더니 아예 미국에서 살 거라더군요. 제 나이와 여건을 감안할 때, 앞으로 20년 동안 1년에 한 번씩 본다 해도, 평생 딸을 볼 기회가 20번 남짓인 거예요. 너무나 기가 찬 노릇이었죠. 영원한 이별은 아니더라도, 그 못지않은 심정이었어요. 공항에서 서로 엉엉 울며 헤어졌지만, 즐거운 신혼을 앞둔 젊은 딸과 점점 늙어만 가는 엄마가 느끼는 아픔은 천지차이죠. 그 옛날 우리 친정엄마도 같은 마음으로 나를 보냈을 텐데, 이 정도로 상실과 아픔이 크리라고는 그땐 상상도 못했어요.” 아직 어린 딸을 이것저것 챙겨주고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녹록지는 않았다. 아쉬운 마음도 달랠 겸 그동안 딸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아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가 완성됐고, 덕분에 그녀는 엄마로서의 삶 1부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하기도 어렵지만, 부모가 자녀로부터 독립하는 건 더욱 쉽지 않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부모가 말로는 ‘독립하라’고 하면서도 막상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죠. 아이를 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하는데 내가 외롭고 힘들다고 계속 붙잡아두는 거예요. 겉으로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럴싸한 이유를 대겠지만, 사실상 소유욕에서 비롯된 착취나 다름없죠. 물론 저도 아주 쿨하게 딸을 보내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만큼 자녀에게서 독립하는 건 누구에게나 참 힘든 일이죠.” 입체적 삶을 위한 경험 투자 그토록 힘든 일임에도 해내야 하는 까닭은 한 인간으로서의 ‘성장’에 있었다. 딸의 성장은 물론 엄마의 성장까지 말이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것, 여자에서 엄마가 되는 것, 그리고 엄마에서 다시 ‘나’로 돌아오는 것. 한 원장은 이러한 성장을 통해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고 보다 성숙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과정 같지만, 역할 변화에 따른 전환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 시기가 고통스러워서 어떤 이들은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죠. 자신에게 주어졌던 역할의 고리들을 과감히 끊어내는 용기가 필요해요. 물론 그것이 더러 외롭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겠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라면 다 겪어야 할 일들이죠. 흔들리다가도 중심을 찾는 오뚝이처럼 스스로 바로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하는 과정이고, 그렇게 성숙해야 왜곡과 갈등 없이 자녀와 잘 분리될 수 있습니다.” 삶의 키워드를 ‘성장’이라고 언급한 한 원장은 몇 해 전 과감히 유학을 결정했다. 딸도 결혼하고 안정적으로 병원을 운영하던 차였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선택을 의아해했다. 늦은 나이에 웬 공부냐는 반응이었다. 단순히 커리어만을 위했다면 단행하지 못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성장을 바랐기에 가능했다. “커리어는 성장을 통해 얻는 일종의 부산물이죠. 애당초 그걸 목적에 둔 건 아니었어요. 물론 현실적인 면에서 내가 잃는 것과 얻는 것을 두고 저울질을 많이 했었죠. 금전적인 리스크도 있었지만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거예요. 그러나 돈이란 것은 결국 나의 잠재성을 실현하고 내 삶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쓰이는 거잖아요. 나중에 죽음에 이르렀을 때 돈이나 나이 등등 때문에 성장의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갑자기 남자가 된다거나, 공학자가 된다거나 하는 비현실적인 바람도 아닌데 말이죠. 그저 내가 해오던 것을 더 심화하려는 욕구였기에 조금만 발돋움하면 되는 거였어요. 그렇게 ‘돈을 경험에 투자하자’고 마음먹었죠.” 기품 있는 중년의 아름다움 그러나 이제 막 가정을 꾸린 자녀 세대의 경우 개인의 성장보다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한 원장은 자신을 찾아오는 워킹맘들의 우울한 심정을 절절히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워킹맘으로 고단한 현실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단, 허덕이며 사는 삶 속에서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땐 당연히 먹고살려고 일하지 자기실현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생계를 위한 일이 꿈을 이루는 일이면 참 좋겠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죠. 그러나 그런 중에도 자기 꿈을 위한 여지는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장은 실현되지 않을 것 같아도 조각을 쌓다 보면 언젠가 실체가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애 키우고 일하느라 아직은 버겁더라도 가슴 한편에 꿈을 품고 살아야 언젠가 이모작, 삼모작의 기회도 잡을 수 있습니다. 짬짬이 단 15분이라도 취미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한 원장 역시 수십 년 동안 천천히 조금씩 즐겨온 취미가 있다. 바로 ‘첼로’다. 딸이 세 살 무렵 첼로를 샀는데, 이제 중급 정도의 실력은 된단다. 자신의 여든 살 생일에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하리라는 야무진 꿈도 생겼다. “인생 별것 없다. 재미있게 살아라”라며 힘든 시절 그녀를 위로했던 친정어머니의 말씀처럼,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다짐도 해본다. 그런 한 원장 역시 딸아이가 늘 즐겁게 또 아름답게 중년을 맞이하길 바란다. “언젠가 제인 구달이 한국에 왔을 때 백발을 늘어뜨린 수수한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여든이 넘은 나이에 민낯이었는데도, 메이크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지더군요. 코코 샤넬은 ‘스무 살 때의 얼굴은 자연의 선물이고, 쉰 살의 얼굴은 당신의 공적이다’라고 했는데, 자기 삶을 잘 다져온 이가 뿜어내는 고유의 아우라가 있는 거죠. 그렇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만의 향기를 품는, 아름다운 중년의 딸을 보고 싶습니다.”
- 2020-05-1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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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기념일 '로즈데이'… 장미 색상별 꽃말은?
- 연인끼리 사랑의 표현으로 장미꽃을 주고받는 5월 14일 ‘로즈데이’를 맞아 색상별 꽃말과 기념일이 된 유래에 대한 관심이 높다. 먼저 빨간 장미의 꽃말은 ‘불타는 사랑, 아름다움, 사랑의 비밀, 열정적인 사랑’이며, 주황색 장미는 ‘첫사랑, 수줍음’을 뜻한다. 분홍색 장미의 꽃말은 ‘행복한 사랑, 사랑의 맹세’, 흰색 장미는 ‘순결, 존경’, 보라색 장미는 ‘영원한 사랑’을 의미한다. 노란색 장미의 꽃말에는 ‘우정, 평화’라는 뜻이지만 ‘질투, 시기, 이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파란색 장미의 꽃말 역시 ‘맹세, 기적, 희망, 포기하지 않는 사랑, 행복한 사랑’이지만 ‘얻을 수 없는 불가능함’의 의미가 있다. 로즈데이의 유래는 미국에서 꽃 가게를 운영하던 청년 마크 휴즈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가게 안에 있던 모든 장미꽃을 바치며 사랑 고백했다는 데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알려지기만 했을 뿐 실제로 파악된 것은 없다. 5월 14일을 로즈데이라고 기념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심지어 로즈데이는 미국에서 밸런타인 위크의 첫날을 부르는 말이다. 2월 7일부터 밸런타인 데이인 14일까지를 부르는 밸런타인 위크는 ‘사랑의 주’라고 불리며 이 첫날을 사랑의 장미를 주며 기념하는 날로 여긴다. 이외에 매달 14일 기념일은 △2월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4월 블랙데이 △5월 로즈데이 △6월 키스데이 △7월 실버데이 △8월 그린데이 △9월 포토데이 △10월 와인데이 △11월 쿠키데이 △12월 허그데이가 있다.
- 2020-05-1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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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 로랑생의 초상화 거부한 코코 샤넬
-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하면 그녀의 연인이자 시인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떠올린다. 그녀를 비롯한 당대 여성 예술가들은 사랑하는 연인의 빛에 가려 탁월한 예술성이 평가절하되곤 했다. 로댕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 디에고 리베라의 연인 프리다 칼로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그녀들의 작품도 속속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누군가의 연인’이 아닌 독자적인 아티스트로서 작품세계를 인정받고 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마리 로랑생이다. 로랑생의 작품에는 기욤 아폴리네르를 향한 애틋한 사랑이 특유의 그루미한 무드로 녹아 있다. 특히 그와 이별한 후의 작품에는 그러한 분위기가 한층 두드러진다. 주로 핑크, 블루, 그레이 등 파스텔 톤을 사용해 몽환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미묘한 나른함에 취하고, 때론 쿨한 색조 안에 스며든 사랑스러운 온기를 느끼기도 한다. 지난해 코코 샤넬(Coco Chanel, Gabrielle Chanel, 1883~1971)의 일생을 다룬 영화 코코 샤넬(Coco Before Chanel, 2009)을 봤다. 패션의 아방가르드이며 모더니스트인 샤넬의 삶이 어쩐지 로랑생과 퍽 닮아 보였다. 짧지만 연인과 열렬히 사랑했고 온 열정을 쏟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해낸 강인함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들. 사실 두 여인에겐 한 가지 사연이 있다. 로랑생이 무대 디자이너로 명성을 날리고 있을 즈음, 샤넬이 로랑생에게 직접 초상화를 의뢰했던 것. 그런데 완성된 초상화를 본 샤넬은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쓸쓸하면서도 우울한 기운이 감도는 그림 속 자신이 실제 자신과 닮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에도 로랑생은 그림을 수정하지 않았다. 두 여인의 팽팽한 신경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결국 샤넬의 초상화(Portrait of Mademoiselle Chanel, 1923)는 로랑생이 평생 소장하고 있다가 사후 오랑주리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로랑생의 그림을 내키지 않아 했던 샤넬의 심정은,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과 명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수녀원의 고아원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샤넬은 그곳에서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패션업에 뛰어든 그녀는, 모진 세파와 우여곡절 속에서도 가장 독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일궈나간 당찬 여인이었다. 모던하면서도 우아한 샤넬의 디자인은 화려한 오브제를 포인트로 단조로움을 없애며 절제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생전 그녀가 구축한 샤넬 디자인은 현재 ‘샤넬’ 브랜드 패션쇼에서도 명맥을 잇는 고유의 콘셉트가 됐다. “심플함은 우아함의 열쇠다”,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남는다”, “성공은 종종 실패를 모르는 사람에 의해 달성된다”, “나는 당신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도 당신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까” 등 샤넬이 남긴 수많은 명언 중에서도 최고를 꼽자면 “내가 바로 스타일이다”(Style, that’s what I am)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여성성 안에서 여성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악하면서도, 자존심과 당당함을 패션으로 승화하며 현대 여성을 대변했다. 샤넬의 근거 있는 자신감에 반해버린 까닭일까? 개인적으로 로랑생이 그린 샤넬 초상화도 좋아하지만, 샤넬이 그토록 거부했던 마음도 절절히 이해가 간다. 아마도 그녀는 백년전쟁의 선두에서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처럼 자신감이 충만한 진취적 신여성의 모습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 2020-05-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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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처럼 반전이 온다면
- 당신이 암에 걸려 절망하고 있을 때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알았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마 인생 최악의 순간이 되지 않을까? 이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녀온 날 우연히 남편의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으로. 영화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는 항암 치료 중인 여주인공이 암과 남편의 바람이라는 절망의 순간에 딸의 결혼식이 있는 이탈리아로 혼자 떠나게 되는 과정에서 우연히 딸의 시아버지 될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아이들도 다 자라고 무뚝뚝하지만 평범한 남편과 미용사라는 직업이 있는 ‘이다(트리네 뒤르홀름)’는 갑자기 암 선고를 받고 치료 중에 남편이 젊은 여자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다. 남편은 그동안 자신도 힘들었다며 별로 미안한 기색이 없다. 이탈리아에서 하게 될 딸의 결혼식도 따로 가자고 간다. ‘이다’는 그동안의 삶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느끼고 딸의 결혼식을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다. 혼자 떠나는 길이 익숙지 않은 ‘이다’는 주차를 하다가 ‘필립’(피어스 브로스넌)의 차를 들이받는다. 알고 보니 '필립'은 딸의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필립'은 오래전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지내는 중이다. 결혼식이 다가오면서 '이다'의 남편은 바람을 피운 젊은 여자와 같이 나타나고 약혼자로 소개한다. 결국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를 모두 알게 된다. 딸의 결혼식은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흘러간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이다'의 모습은 필립의 관심을 끌고 생각이 바뀐 남편은 다시 시작하자고 ‘이다’에게 용서를 구한다. 일상으로 돌아온 '이다'의 미용실에 필립이 찾아온다. '필립'은 '이다'에게 마음을 전하고 떠난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한 '이다'는 남편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필립을 찾아간다. 이 영화는 2013년 개봉작이다. '수사네 비르(Susanne Bier)'라는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의 여자 감독이 만들었으며 제26회 유럽 영화상을 받았다.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이 영화를 보는 내내 빠져들게 한다. 요즘 영화 다시 보기를 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예전에 본 영화를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처음 봤을 때와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영화도 그렇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변한 것일까? 누구나 나이가 들면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홀로 남겨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이혼이든 사별이든 어떤 이유로 혼자가 되었을 때 이런 멋진 사랑이 다시 찾아온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혹시 지금 혼자 있다면 주위를 둘러보라. 영화 속 '필립' 혹은 '이다'처럼 멋진 주인공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다시 뜨겁게 사랑하게 될지도.
- 2020-04-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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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빈 작가,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물건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딸이 백혈병으로 그의 곁을 떠났고, 28년을 같이 살았던 사람과 헤어졌고, 아들은 해외에 있어 자주 만날 수도 없다. 게다가 자신이 쓴 분신 같은 책들을 모두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올 1월 이다빈 작가(55세)가 에세이집 ‘잃어버린 것들’에서 고백한 이야기다. 힘들었던 시기를 담백하고 진솔하게 써내러 간 그의 책을 읽노라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1996년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작가, 글쓰기 강사, 출판편집자 등 다양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동안 동화집 ‘모자 선생님’, 시집 ‘문 하나 열면’, 인터뷰 에세이집 ‘길 위의 예술가들’, 세계문학기행집 ‘작가, 여행’, 국내 테마여행기 ‘소소여행’ 등의 책을 썼다. 작년에는 24년 동안 글쓰기 지도를 하면서 만난 아이들의 글쓰기 치유기 ‘말하지 않는 아이들의 속마음’을 선보였다. 그런데 작년 말 배본사에서 출고를 기다리고 있던 책들이 모두 불에 타버리는 사건을 계기로, 그는 잠시 삶의 여행을 멈추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잃어버린 것들’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그는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생각해 보니 잃어버린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자리로 돌아간 것이었다.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짐이 그동안 늘어난 모양이었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온통 결핍 덩어리들이었다. 그 결핍 때문에 사랑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이별을 했다. 이제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 위해서 기억과도 이별을 하려 한다.” 1부 ‘잃어버린 나’에는 저자가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에 관한 글을, 2부 ‘나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는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기 위해 떠난 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네서점에서 이다빈 작가를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 일을 하느라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공부보다는 돈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의 아버지는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고 했고, 그는 오로지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다. 진주에서 태어난 그는 부산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후 학생회 일을 하면서 사회 모순에 대해 탐구를 하고 편집장으로 활동을 했다. 졸업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서 10년 가량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했고, 잡지사에서 기자와 주간으로도 활동했다. “서울에 와서 소설가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죠. 남편의 직업상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평생 일을 놓아본 적이 없어요.” 사단법인 부설단체를 운영하면서 초등학생들에게 글쓰기 수업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모자 선생님’은 당시 가르치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동화집으로 문예창작기금을 수상했다. 그는 또 학생들이 글을 발표하고 기자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한국문예신문’을 발행하고, 폭넓은 글쓰기를 위해 학생들을 데리고 국내외 여행을 다녀온 후 아이들이 쓴 글을 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도서관 상주 작가로 일하기도 했다. 7년 전부터는 고양, 성남, 인천, 서울 등 시민대학이나 도서관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를 해오고 있다. “그동안 치유 글쓰기, 시 쓰기, 여행 에세이 쓰기, 자서전 쓰기 등 다양한 강의를 했어요. 강의하고 책을 쓰면서 저 스스로도 많은 공부를 하고 있어요. 지금은 국내 다섯 개 도시를 배경으로 여행기를 쓰고 있는데 곧 출판할 거예요.” 이다빈 작가에게 책 쓰기는 그리 어려운 작업으로 보이지 않는다. 생각만 하고 주저하는 이들이 보기에 그는 추진력이 대단해 보인다. 강의를 한 후 일반인들에게 매번 책 쓰기를 권하는 이유는 뭘까. “책 쓰기를 하면 암 덩어리처럼 제 안에 뭉쳐 있던 고민 같은 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어요. 뭐든지 고이면 딱딱해지고 병이 되기 때문에 흘려보내야 해요. 혈액도 생각도 뭐든 흐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현대인들은 받아들이는 정보량은 많은데 내보내기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책도 내보내는 것이니 누구든지 책 쓰기가 필요하다고 봐요. 글쓰기나 책 쓰기는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니까 겁내지 말고 도전해 보기를 권해요.” 그는 누구나 시인이며 작가이자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라는 걸 자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코로나19도 이기고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저는 뭘 하든지 간에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편이에요. 멋있지도 않은데 멋있게 쓰려고 하면 독자들도 부담스럽죠. 저는 진지한 편이어서 가볍게 써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해요. 독자들은 무거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실수투성이고 완벽하지 않잖아요?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생각이 흐르다가 고이는 것을 담아내면 책이 되지요.” 여행과 글쓰기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이다빈 작가는 여행이나 글쓰기를 주저하는 이들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다. 앞으로도 그는 다양한 곳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며 함께 책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 2020-04-1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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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에 담긴 그리움과 진심, ‘밥정’
- 음식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았다. 방랑 셰프 임지호님의 자연주의 요리 이야기는 매체를 통해서 많이 보고 듣고 하던 터였다. 영화 시사회 초대를 받고 무조건 가기로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세상이 뒤숭숭해도 잠깐 숨통 트여보자 싶었다. 지뢰를 피하듯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조심조심 동대문 메가박스까지 다녀온 것이 두 주 전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밥정이든 요리 이야기든 할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저 영화 속 음식들을 들여다보기만 하다가 이제야 그 이야기들을 주섬주섬 꺼내본다.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기대를 했었다. 밥정이라는 말도 정겨웠고 자연 속에서 만들어지는 요리에 잔뜩 호기심이 생겼다. 요즘은 집에서 밥 한 끼 준비하기가 귀찮을 지경이 됐지만' 한때는 요리의 즐거움에 푹 빠졌던 적도 있었으니까. 밥정은 방랑 식객으로 잘 알려진 임지호 셰프의 이야기다. 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삶의 이야기와 요리 철학을 담기 위해 박혜령 감독이 10년에 걸쳐 만들어낸 82분짜리 다큐멘터리다. 그리고 세계 최고 권위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핫독스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를 비롯해 각종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된 수작이기도 하다. 방랑 셰프 임지호 선생의 자연주의 요리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서 시작된다.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어머니, 길러주신 어머니, 그리고 떠돌다가 지리산 마을에서 만난 김순규 할머니, 세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밥정으로 표현한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죽을 때까지 누군가에게 밥을 해주는 게 나의 책임”이라고 임지호님은 말한다. 들판에 풀 한 포기나 바닷가에 떠다니는 해초만 보아도 맛있는 밥상 차릴 생각에 손길 닿는 대로 채취해서 담는다. 자연의 재료로 두툼하고 거친 손이 만들어 낸다. 흙냄새 바다 냄새나는 음식에 담긴 정이 감동의 맛으로 전해진다. 그 여정 속에 변화하는 사계절의 풍광을 보는 맛도 남다르다. 시골길을 따라 걷거나 깊은 산골 마을이나 바닷가를 따라 방랑하는 셰프. 비바람 속에서, 눈보라 치는 들판에서 식재료를 얻는다. 그 길에서 만나는 나물, 이끼, 잡초, 바다풀로 마을 어른에게 밥상을 차려 드린다. 솔방울과 나뭇가지가 멋진 소품이 되어 주기도 한다. 자연에서 나는 것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고 임지호 셰프는 강조한다. 그는 어느 날 안동댐 주변을 지나가는데 이 길에서 자신을 낳아주신 엄마가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생모가 김씨라는 것밖에 모르고 얼굴도 알지 못하지만, 이 길을 갈 때면 눈물이 난다는 말에 그분의 그리움과 외로움이 전해진다. 2009년 지리산으로 식재료를 구하러 떠났다가 산골 마을의 텃밭에서 나물을 뜯던 김순규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 인연으로 가끔 찾아가 밥을 지어드리거나 과자와 사탕을 전해주며 만남을 이어갔다. 그렇게 7~8년 지내오다가 어느 날 김순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 세 어머니와 이별을 하게 된 마음을 표현하는 108가지의 자연친화적인 음식을 3일 동안 장만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할 수밖에 없다. 밥과 사랑과 그리움은 닮았다. 거기엔 누군가와 이어지는 따스함과 은근한 속정이 함께 한다. 결국엔 그것이 가슴 뭉클하게 하는데 혹시 이것을 밥정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잔뜩 겉멋 부린 요란한 영화들 속에서 냇물에서 세수만 한 듯한 순하고 담백한 영화, 이야기를 예상할 수 있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다만 허기짐을 채워주는 따뜻함이 있다.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있는 듯 평화롭다. 빨리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지기를 고대한다. 지치지 말고 서로 마음 모아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 이렇게 봄볕 좋은 날 속정 깊은 누군가와 마주 앉아 마음 놓고 밥정을 나눌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 2020-03-09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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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시킨이 사랑한 도시 ‘트빌리시’
- 바쿠의 구도시를 걷다 보면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근교 일일투어를 권한다. 사실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자유여행으로 바쿠의 근교 투어를 하는 건 시간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가격을 좀 깎아달라고 하니 여행사 사무실을 안내해줘 그곳으로 갔다. 결국 1인당 20AZN(한화 약 1만4000원)을 할인받아, 다음 날 4만9000원짜리 일일 투어를 했다. 아침 9시, 구시가지 성문 앞에서 가이드와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6명을 만나 일일투어를 시작했다. 준비된 미니버스를 타고 아름다운 카스피해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갔다. 고부스탄(Gobustan)에 도착한 뒤에는 대기해 있던 여러 대의 낡은 승용차로 갈아탔다. 왜 차를 바꿔 타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목적지인 머드 볼케이노(진흙 화산)까지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10여 km 더 가야 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그 길을 ‘사파리 투어’라 표현했다. 그러나 마케팅 목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동물 구경은 할 수 없었다. 억지스러웠지만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차창 밖 풍경은 영화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했다. 미국의 텍사스나 어느 사막 지역처럼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다. 전 세계 700여 개의 진흙 화산 대부분이 아제르바이잔에 있다고 한다. 그중 일부가 이곳에 있었다. 용암 대신 진흙이 흘러내리는 화산 가까이 다가갔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화산 분화구에서 진흙이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기포가 부풀어 올랐다가 터졌다. 피부에 좋은 효과가 있는지 남자 몇 명이 머드팩을 즐기고 있었다. 진흙 화산에 오기 전 미니버스에서 내렸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사시대로 여행을 갈 수 있는 관광지가 있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부스탄 암각화 문화경관구역’이다. 공원 입구에는 박물관이 있었고, 암각화 구역은 입구에서 1km를 더 가야 했다.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넓은 사암지대에 흩어져 있는, 약 5000년에서 2만 년 전에 원시인들이 돌에 그린 그림을 불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의 무게가 주는 중량감 때문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 모습, 사냥하는 모습, 바다에서 고기 잡는 모습, 춤추는 모습 등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풀, 돌, 바위만으로 구성된 암각화 공원을 본격적으로 탐방하기 전 앞서 가던 가이드가 넓고 평평한 바위를 만나자 갑자기 타악기처럼 두드리기 시작했다. 돌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이 지역의 타악기 ‘가발 대시’(Gaval Dash)를 만들 때 사용하는 석재라고 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의 꺼지지 않는 불 불을 접하기 쉬워서 그랬는지 바쿠의 동쪽 외곽에 조로아스터교 성지인 ‘아테시카 사원’(Ateshgah Temple)이 남아 있다. 사원 안에는 470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불이 있다. 불을 숭배해서 배화교로 알려진 고대 페르시아 종교 조로아스터교. 현재는 신도 통계가 없을 정도로 사라져가는 종교다. 하지만 최근 이슬람 극단주의에 환멸을 느낀 쿠르드족들이 개종하면서 그쪽 지역에서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또 얼마 전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록 밴드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후손인 파르시(Parsi) 출신이기도 하다. 수도원이었던 사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개조됐다. 방마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설명과 모형,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교세는 미약하지만 조로아스터교를 경험할 수 있는 건 바쿠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이외에도 바쿠 외곽에는 불과 관련한 ‘야나르 다그’(Yanar Dag)라는 이름의 불타는 언덕도 있다. 지하에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어 가스가 나오는 분출구에서는 계속 불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 개발로 지하 압력이 내려가 과거에 비해 불꽃이 많이 약해졌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 현재와 과거의 절묘한 조화, 손님과 이방인에게 친절한 문화, 동서양의 경계선 위에서 유럽을 향해 있는 도시, 맛있는 음식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 바쿠 여행을 하면서 받았던 인상이다. 아직 구 소련 치하의 흔적도 남아 있고,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등 여행 인프라가 부족한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 관광청이 글로벌 캠페인으로 선정한 ‘기대, 그 이상의 아제르바이잔’(Take Another Look)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들 사회에 내재돼 있는 역동성과 경계를 넘나드는 수용의 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트빌리시행 야간 특급열차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주황빛으로 바뀌면서 나란히 뻗어 있는 녹슨 철길 위로 떨어졌다. 검은색 섞인 파란 하늘이 배경이 될 무렵 그림자도 사라져가는 플랫폼 앞으로 둥근 쇳덩이가 슬며시 발을 들이밀었다. 흰 수증기를 내뿜으며 거친 숨을 내쉴 것만 같은 짙은 암녹색 기차였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와 ‘안나 카레니나’를 운명처럼 만나게 했던 그 기차다. 조지아의 고리 시(市)에 전시돼 있는 스탈린 전용 열차도 같은 색이다. 소설 내용처럼―창 너머로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전송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뒤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 규칙적으로 덜커덕덜커덕 흔들리면서 플랫폼을 지나고 (…) 열차는 점점 신나고 매끄럽게 경쾌한 소리를 내며 레일 위를 미끄러져 갔다―그렇게 바쿠와 이별했다. 오래된 열차이지만 2인 1칸인 1등석은 불편한 점이 전혀 없었다. 새것으로 바꾼 하얀 침대 시트가 마음에 들었다. 바쿠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전 시추공에서 나오는 가스 때문에 큰 불꽃이 타오르는 공장들이 창밖으로 스쳐지나갔다. 때맞춰 창틀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왈츠 Ⅱ’가 흘러나왔다. 출발 전 역에서 산 와인으로 영혼을 적셨다. 그렇게 떠나는 아쉬움과 새로운 풍경을 만나러 가는 길의 떨림을 가라앉히며 수없이 꿈꿔왔던 침대열차에서의 밤을 보냈다. 기차는 쉬지 않고 트빌리시를 향해 달려갔다. 저녁 9시에 출발한 기차는 꼬박 12시간을 달려 다음 날 아침 9시경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 새벽 5시쯤 조지아 입국 절차가 한 차례 있었다. 카메라가 연결된 노트북을 들고 조지아 군인들이 열차로 올라왔다. 입국신고서 작성, 여권 제출, 사진촬영, 그리고 이어진 간단한 가방 검사로 국경 통과 절차가 끝났다. 조지아는 한국 여권 소지자의 경우 무비자로 360일 체류할 수 있는 나라다. 미국 조지아가 아니고 ‘조지아’ “조지아? 미국 조지아?” 이번 여행 목적지는 ‘조지아’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몇몇 사람은 구 소련이 지배하던 시절의 ‘그루지야’는 알고 있었다. 1991년에 독립하면서 국명을 ‘조지아’로 바꿨다고 설명하면 미국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름이 그러냐는 반응들을 보였다. 정말 그랬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농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게오르기오스’에서 빌려왔다는 설과 트빌리시의 핫플레이스 ‘자유광장’에 황금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다. 조지아에는 스위스처럼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프랑스처럼 풍요로운 와인, 이탈리아처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스페인처럼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있다. 트빌리시는 재즈다 종착역이 가까워지면서 기차 속도가 느려졌다. 트빌리시는 BC 4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AD 5세기 말에 조지아의 수도가 된 오래된 도시다. 창문 밖으로 트빌리시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폐쇄된 기지창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는 녹슨 객차와 화차들,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신도시,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나리칼라 요새와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는 구도시가 줄지어 얼굴을 드러냈다. 마치 한 곡의 재즈를 듣는 것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재즈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연결될 때 주로 사용한다. 그만큼 조지아 사람들은 뭐든 잘 받아들인다. 혼합에 익숙하다. 트빌리시라는 도시도 그랬다. 색소폰의 끈적한 느낌과 와인의 나른한 분위기가 뒤섞여 있는 듯 보였지만 퇴폐적 숨결이 느껴지지는 않는 골목의 모습이 그랬고, 클래식함과 모던함이 서로 뒤엉켜 하나가 된 도시의 풍경이 그랬다. 올드 트빌리시가 보여주는 것들 트빌리시는 도시를 관통하는 ‘므츠바리’(Mtkvari) 강(쿠라 강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을 중심으로 남쪽의 ‘올드 트빌리시’(구도심)와 북쪽으로 나누어진다. 잘 알려진 관광지 대부분이 구도심에 몰려 있어 걸어 다닐 만하다. ‘아블라바리’(Avlabari) 전철역에서 내려 강 언덕에 있는 ‘메테키 교회’(Metekhi Church)로 먼저 갔다. 13세기에 세워진 이 교회는 서른일곱 번이나 다시 지어진 사연으로 수많은 전쟁에 시달렸던 조지아의 얼굴이 됐다. 구 소련 시절에는 감옥과 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최근에서야 교회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옆에는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긴 ‘바흐탕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 왕의 기마상이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기마상이 있는 곳에서 북쪽을 보면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강 오른쪽으로 ‘리케 공원’(Rike Park)이 있다. 시민과 여행자들에게 은은한 꽃향기로 피로를 풀어주는 곳이다. 강변에는 1200개의 LED 전구가 빛을 내는 ‘평화의 다리’가 있어 므츠바리 강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2GEL(한화 약 810원)을 내면 ‘메테키 다리’를 건너 므타츠민다 산 정상에 있는 나리칼라 요새까지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다. 도시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요새는 4세기에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요새 바로 옆 능선에는 왼손엔 와인 잔, 오른손엔 칼을 들고 있는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다. ‘친구에게는 와인 잔을 건네지만 적에게는 칼을 든다’는 의미로 건국 1500년을 기념해 만든, 높이 20m의 대형 석상이다. 트빌리시를 사랑한 작가들 러시아의 문호들은 조지아를 사랑했다. 막심 고리키는 이곳에서 일하며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썼다. 이때 사용한 필명이 ‘고리키’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함과 낭만적 기질을 지닌 이곳 사람들 덕분에 방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됐다”고 회고했다. 톨스토이도 이곳에서 주둔군으로 4년을 복무한 후 조지아를 배경으로 몇 편의 소설을 썼다. 푸시킨의 시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코카서스의 죄수’가 대표적이다. 누구보다도 조지아의 와인과 음식을 사랑한 푸시킨은 대표적인 친조지아 인사였다. 그래서인지 구도심 자유광장 옆에는 ‘푸시킨 공원’이 있다. 구도심 중앙에 위치한 ‘자유광장’은 주변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교통의 요충지로 트빌리시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장소다. 마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 같은 곳이다. 레닌 동상이 있던 광장 중앙에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의 황금동상이 있다. ‘자유광장’에서부터 ‘루스타벨리 메트로 역’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걸었다. 러시아 간섭에 저항하는 조지아인들의 데모가 토요일마다 열리는 국회 앞 광장, 조지아 국립박물관, 루스타벨리 극장, 트빌리시 오페라·발레 극장, 트빌리시 현대미술관들이 이 거리에 있다. 중간중간 보이는 작은 카페와 거리의 화가들 작품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트빌리시의 숨결을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트빌리시의 과거와 현재의 눈부신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했다. 아무리 걸어도 질리지 않는 하염없이 걷고 싶은 길이다 므츠바리 강을 건너는 ‘사브뤼켄’(Saarbruecken) 다리 옆 ‘데대나’(Dedaena) 공원에서는 트빌리시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이 열린다. 구 소련의 군용 제품에서부터 은식기,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등 온갖 물건들이 거래된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랜 세월이 빚어낸 추억의 물건들이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치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조지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찰나에 그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희망과 그리움, 설렘도 봤다.
- 2020-02-10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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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만배우 진선규, 연극 복귀
- 범죄도시에 이어 극한직업으로 영화계 핵으로 부상한 배우 진선규가 ‘우리 노래방 가서… 얘기 좀 할까?’(이하 우노얘)라는 작품으로 대학로에 복귀했다. 연극 ‘우노얘’는 서울의 한 노래방에서 펼쳐지는 가족, 사랑, 청춘에 관한 이야기로 우리 시대의 소통 부재와 단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 삶에 있는 수많은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다섯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했다. 앞서 말한 진선규를 비롯해 김민재, 임강성 등 연극보다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낸 배우들이 주역을 맡아 캐스팅 초반부터 관심을 끌었다. 2월 8일 첫 공연을 앞두고 ‘우노얘’ 베우들이 직접 영상작업에 참여해 관객 몰이를 전선에 뛰어들었다. 각 에피소드에 출연하는 배우가 등장해 직접 장면의 내용을 소개와 관객에게 인사말을 전한다. 공개한 영상에서는 열기 가득한 연습 현장도 볼 수 있다. 첫 번째 장면 소개 영상은 배우 진선규와 윤석현이 전달했다. ‘아버지와 아들’ 에피소드는 모두가 그렇듯, 가까이 있으나 서먹함이 공존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그린다. 재혼을 결심하고 이를 전달하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을 노래방으로 부른다. 어색한 공기가 맴도는 사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둘의 소통은 쉽지 않다. 진선규는 “서로가 조금만 더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자신과 서먹한 관계에 있는 가족과 사람들에게 툭하고 살갑게 얘기를 던질 수 있다면 좋겠다. 또한 공연을 관람하시는 분들이 관계의 거리감을 많은 부분 좁힐 수 있으면 좋겠다”며 관객들이 이번 공연을 통해 느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두 번째 장면은 오의식과 박소진이 전했다. ‘아들과 여자친구’ 에피소드는 어린 시절 가정환경으로 인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20대 청년 희준과 사랑에 미숙하지만 또래보다는 성숙하고 깊은 속내를 지닌 민정의 이야기다. 희준과 민정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연애 방식 때문에 헤어짐을 앞두고 있다. 폭발할 것 같은 20대 청춘 남녀를 표현해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낼 것을 예고했다. 박소진은 “공연은 감동을 지닌 것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많은 생각을 하게 구성되어 있다. 많은 분이 공연을 즐겼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 장면에는 유연, 김하진, 한수림이 등장했다. ‘여자와 그녀의 친구들’은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친구들의 위로를 받기 위해, 함께 노래방을 찾은 민정의 에피소드다. 친한 친구 셋이 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노래방에 모인다. 연애에 대한 생각이 다른 은혜와 정연은 투덕대며 논쟁을 벌인다. 이별 당사자인 민정에게 위로를 건네기보다는, 둘의 의견 충돌이 점점 대화의 중심이 된다. 유연은 “사람마다 생각하는 포인트가 다르다. 연극을 보면서 자신이나 친구를 떠올릴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이라며 관객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까지 세 개의 영상을 공개했고 추후 다섯 개 연극 구성에 맞춰 네 번째, 다섯 번째 영상도 이어질 예정이다. 한편, ‘우리 노래방 가서 얘기 좀 할까’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중장기창작지원사업으로 선정되었으며, 2월 8일(일)부터 2020년 3월 8일(일)까지 서경대 스콘 1관에서 공연한다. 티켓 가격은 R석 5만 원, S석 4만 원이며 인터파크 티켓에서 예매 가능하다.
- 2020-02-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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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의 족보에 오른 실험적 사랑
-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새해 아침, 한 중견 시인의 시집 제목에 마음이 출렁였다. “무슨 끝이 있나요”라는 물음이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인간의 성찰 없는 사랑을 비판하며 “오늘날의 사랑 담론은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이해관계’만 작동하는, 흔해빠진 결판의 스토리만 분분한 탓이다. 세기의 족보에 기록된 저 유명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은 어땠을까. 자기 존재에 대한 결사항전의 나날이 아니었다면 진즉 서로의 손을 놔버렸을 것이다. 51년간 유지된 계약결혼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 20세기의 프랑스 최고 지성 커플로 불리는 이름이다. 규정된 인간이 아닌 행동하는 주체로서 살려고 노력했던 두 사람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 연인이자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의 관계가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성과였다”고 말했고,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 대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 “나의 검열관” 등으로 표현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만난 건 1929년.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 그녀는 그보다 세 살 어렸다. 보부아르는 배움에 대한 호기심이 남다른 모범생이었다. 한마디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반면 사르트르는 160cm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한쪽 눈은 시력을 거의 잃은 사시(斜視)였다. 첫인상은 쉽게 호감이 안 가는 외모였지만 그는 해박한 지식과 유머로 주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요즘 말로 뇌섹남이었다. 어느 날, 밤새 논쟁을 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완벽한 대화 상대자임을 알게 됐다. 지적 반려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신들의 운명을 동시에 꿰뚫어본 것이다. 실제로 보부아르는 아무도 말 걸어오지 않는 상태를 죽음으로 봤다. 사르트르가 죽자 “더 이상 그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매우 슬퍼했다. 이들이 2년간의 계약결혼을 시작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건 까다로운 철학교수 자격시험에서 각각 수석(사르트르)과 차석(보부아르)으로 합격하고 나서였다. 그 후 둘 사이의 계약은 51년간 파기되지 않았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2년 동안은 함께 살면서 둘 중 누구도 자유를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고, 그 후에는 각자의 길을 가며 자유를 누리되 헤어지지는 말 것. 상대가 찾을 때는 반드시 응해줄 것, 강압과 관습에 방해받지 않는 관계가 될 것,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거짓말도 하지 말 것, 각자 경제적으로 독립할 것.” 전통적인 결혼제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었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이 제안을 즉각 받아들였다. 여성의 창조적 본성을 억누르지도 않고 가사노동자로 전락하게 만들지도 않을 이상적 삶의 모델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사랑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훗날 사람들은 두 사람의 특별했던 결혼생활을 관습과 제약에 매이지 않고,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추구한 실험적 사랑이었다고 평가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사르트르가 남긴 이 명언에는,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수많은 선택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르트르와 그의 연인 보부아르도 자신들의 존재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물론 두 삶에 제3의 인물이 끼어들면서 종종 질투와 분노를 일으키고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끝까지 사랑의 총량을 채워나가며 서로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견지했다. 1970년대 초, 사르트르는 시력을 점점 잃어갔고 더 이상 그가 쓴 글을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런데도 1980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가 떠난 후 그의 고통스러운 말년을 기록한 ‘이별의 의식’을 출간했다. 그리고 6년 뒤 그녀도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전부가 되려고 하지 않았기에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사르트르와의 관계에서 더 고독했어야 했다고 고백했다. 호사가들은 이들의 삶에 흠집을 내기 위해 두 사람에게 닥쳤던 위기와 다양한 인물들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를 파헤쳤다. 그러나 사랑의 통념들에 저항하기 위해,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기 위해, 완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이들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는지도 알게 됐다. 사르트르와 잠시 헤어져 있던 그녀는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누워 있는 사르트르 곁으로 돌아갔다. “사랑하는 남자와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삶이에요!”라고 말했던 보부아르는 늘 ‘여인들’이 끊이질 않아 온전히 독차지할 수 없었던 남자와 영원히 함께 있게 된 것이다.
- 2020-01-2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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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생애연구소 임순열 대표 “인생 여정이 만들어준 직업을 찾아냈습니다”
-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는 결혼을 하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출산을 하고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하면서 살다 보면 젊은 시절의 경력은 온데간데없어진다. ‘이렇게 사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지’ 하면서 단념하려던 순간,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잘해보겠다고 다짐하며 빛을 따라 즐겁게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취업과 생애 설계 분야 전문 강사이자 컨설턴트인 일·생애연구소 임순열 대표는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이에요”라며 활짝 웃었다. 지난 10월 10일 경기도 파주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일·생애연구소 임순열(55) 대표와 만나기로 했다. 이곳은 임순열 대표에게 친정과도 같은 곳. 작년 말까지 센터 내에 있는 파주상공회의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직업상담 팀장으로 일해왔다. 이날은 일·생애연구소 대표로서 강단에 서는 날이었다. “10월 1일에 일·생애연구소 사업자등록증을 받았어요. 직업상담사로 일하면서 취업 역량 강화,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 작성법, 면접 교육 관련 일을 해왔는데 좀 더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싶었어요. 취업과 생애 설계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할 계획입니다. 오늘은 ‘중장년의 셀프 마케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합니다. 일자리를 찾을 때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얻는 방법을 전달해드릴 계획입니다.” 목적이 있는 삶을 살다 임 대표는 직업상담사로 사는 게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도와서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도, 취업이 된 사람들이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단다. “거의 직업상담 일에 미쳐서 살았어요. 구직자들이 처음에 센터를 찾아올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십니다. 경력이 단절된 여성분들도 그렇고요. 어떤 경력이 있는지 자격증은 있는지 등등 초기 상담을 하면서 맞춤 일자리를 지원해드렸습니다. 이력서 쓰는 방법도 알려드리고 동행 면접 서비스를 원하시면 같이 갔습니다. 별종 소리를 들을 정도로 7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때를 회상하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냈을까 싶을 정도로 제대로 빠져 있었다. 막내아들의 군 입대가 계기였다고 했다. “2010년에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친구랑 동반 입대를 했어요. ‘그래, 넌 나라 지켜라. 엄마는 엄마 일 할게’ 이런 마음으로 가족상담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랑은 성향이 맞지 않았어요. 그 무렵 누군가 직업상담사도 있다고 소개해줘서 2011년 5월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상담에 필요한 자격증은 부지런히 공부해 하나씩 따냈다. 가족상담사 2급을 시작으로 직업상담사 2급, 평생교육사 2급 등을 취득한 후 2017년에는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까지 섭렵했다. 상담사 자격증을 따면서 동시에 교육자로서의 꿈도 함께 키우기 시작했다. “고양시에서 직업 관련 교육을 받을 당시에 강사님이 인상에 남았어요. 나도 저런 강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강의를 너무 잘하셨어요. 상담사 공부를 할 때부터 강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지금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특히 임순열 대표가 취득한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은 전국적으로 500명이 조금 넘는 정도. 직업상담사 2급 자격증 보유자가 5만여 명인 것을 감안하면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1%밖에는 안 된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임순열 대표다. “2012년 파주시교육문화회관에서 계약직 직업상담사로 일을 시작했는데 2년 후에 정년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버렸어요.” 파주상공회의소가 고용노동부 사업인 중장년일자리 프로그램 사업을 따오자 임순열 대표의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2015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짜리 채용공고가 났습니다. 물론 제 판단으로는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자리였고 상담보다는 교육 관련 일을 주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기계약직 체결을 해줄지는 알 수 없었어요. 그래도 해보고 싶어서 지원했는데 채용됐어요. 파주상공회의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팀장으로요. 무기계약직도 좋았지만 저는 상담보다는 교육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고 도전하는 것에 큰 두려움도 없었어요.” 비서교육 제대로 받은 커리어우먼 직업상담사의 길을 걷기 전까지 임순열 대표도 몇 번의 경력단절을 겪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결혼을 하면 으레 회사를 나가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다.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한국과학기술대학(현 카이스트)에서 학장 비서로 근무했어요. 그때는 비서 하면 커피나 타고 전화만 받던 시절이었는데 저희 학장님은 달랐어요. 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오셔서 비서를 제대로 쓸 줄 아는 분이셨죠. 스케줄 관리에서부터 서류작업, 각종 스크랩 업무 등을 보면서 VIP 응대도 자주 했습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그룹 회장님도 만났어요. 비서로서 제대로 일을 배웠습니다. 제가 결혼할 무렵 학장님이 한국과학재단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저도 함께 갔는데 그만둬야 했어요. 재단 쪽 분위기가 결혼한 여자가 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저도 학장님께 폐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 후 아이 낳고 가정주부로만 살다 보니 좀 답답하더라고요.(웃음)” 임 대표가 집 밖으로 뛰쳐나온 계기가 된 건 2001년 친정부모님이 다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부모님과의 이별에 우울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밖에 나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고 결국 주부가 쉽게 도전 할 수 있는 학습지 선생 일을 4년간 했다. 그리고 5년여를 다시 쉬다가 2010년부터 직업 상담 분야에 눈을 떠 지금에 이르렀다. “2018년 12월에 사표를 내고 프리랜스 강사로 독립했습니다. 오랜 시간 참 많이도 다니면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좋은 인맥들이 생겼어요. 올해까지는 준비하는 상황이라서 홍보도 못했는데 강의해 달라고 연락을 주십니다. 한 달에 네다섯 번 정도는 하고 있습니다.” 서울 강의 입성기 임 대표가 주로 강의활동을 하는 곳은 고양, 파주, 청주 등 수도권이다. 그런데 지난 9월 처음으로 서울에서 강의할 기회가 찾아왔다. “노사발전재단에도 중장년일자리지원센터가 있어요. 노사발전재단에서 퇴직 교원들을 위한 전문강사 양성과정을 진행했는데, 퇴직 교원이 아니더라도 구직자라면 그 과정을 들을 수 있었어요. 양성과정이 끝날 때 강의 시연을 할 기회가 있었어요. 원하는 사람만요. 시연을 잘하면 노사발전재단에서 전문 강사로 쓰겠다는 문구가 떠올라서 저도 한다고 했습니다. 생애설계 관련 주제였는데 퇴직 교사들에게 맞춘 강의을 했어요. 전문 강사 한 분과 노사발전재단 소장님이 심사위원이셨는데 좋은 평가를 주셨어요. 이후 강의제안서를 냈고 제가 된 거죠. 노사발전재단은 공공기관이잖아요. 강의자리 따기가 쉽지 않아요. 서울에서 강의를 마친 다음 날 청주에서 강의가 있어 새벽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서울 입성기를 올렸어요. 라디오 DJ가 첫 사연으로 읽어줬습니다.”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겪은 어려움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고 임순열 대표는 말했다. “의미 없는 시간은 없어요. 비서 시절에는 높은 분을 많이 상대하면서 예절을 잘 배웠고요. 학습지 선생으로 활동할 때는 교육 일과 영업 일을 경험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제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됐습니다.” 60세 전에 퇴직하는 사람이 꽤 많다. 그 뒤에도 20~30년은 더 살게 될 텐데 아무 일도 안 하고 지내기엔 너무 고약한 현실이다. 그래서 나이 들어서도 일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임 대표는 말한다. “노년의 삶에 대해 공부를 더 해서 봉사도 하고 강사로도 활동하면 좋겠어요. 역량이 되는 한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며 살고 싶습니다.”
- 2019-12-02 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