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보험 회사죠? 차가 퍼져서요”
서수지 톨 게이트 갓길에서 바라본 6월 하늘은 맑고 쾌청하다. 구십 노모와 시외나들이 귀가 중에 사달이 난 것이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하니 적잖이 당황스럽다.
2003년 산이니 올해로 16년. 298990km, 어림수로 30만 km를 달린 셈이다. 그동안 수고로움에 고맙고, 큰 사고 없이 오늘까지 와주어서 더 고맙다.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되어서 지금까지 함께 한 좋은 사이다. 비록 기계에 불과하지만 오랜 친구 이상이다. 천수를 다한 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누군가는 깨끗이 세차해서 보냈다는데, 기계와의 헤어짐이 낯설고 이별을 어찌 해야 할지 맘이 쓰인다.
차가 없는 일상은 상상이 안 된다. 언젠가 전기배선 문제로 별안간 차가 멈춰 버렸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얼음이 된 것처럼 생각도 딱!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는 묘한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애지중지는 아니었어도 많은 시간을 안전하게 함께 해 준 것에 고마움을 표한다. 목숨을 담보하는 것이기에 비교적 우호적이고자 했다. 출발 전후에 고맙다는 인사도 나름 보내며….
참 많이도 다녔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주말마다 강릉, 봉화, 삼천포, 성주, 강릉, 동해, 속초 등 전국 각지로 휴가와 나들이하러 다녔고, 평일에는 이동하는 사무실로 나의 준마로써 충성을 다 했다. 어느 해에는 강아지들과 여름휴가로 대천을 다녀오면서 차를 온통 모래 범벅으로 만들었다. SUV의 참맛을 알게 해준 차다. 늘그막에는 딸아이 운전 연습용으로도 요긴했다. 덕분에 훌쩍 떠날 수도 있었고, 좋은 삶을 만드는데 이바지한 바가 크다.
저감장치 수난사! 어느 날 찾아온 사람들이 정부정책이라며 저감 장치를 달아야 한다기에 '그러마' 했다. 공짜 지원의 기쁨은 잠시, 그 이후부터 급속하게 나의 준마가 노후 되어 갔다. 장착 후 차가 무거워지고, 연비저하, 불완전 연소로 몇 번의 응급처치와 수리로 어찌어찌 버텨오다가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제행무상이니 끝 날을 예상했지만, 인연의 마무리는 역시 쉽지 않다.
폐차의 절차를 알아보니 그것도 만만치 않다. 구청에 가니 차에 연체, 미납부채가 있단다. 기억에도 없는 10여 년 전의 주차위반 범칙금과 밀린 과태료를 내야 폐차가 가능하다는 담당자의 말이다.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인간의 장례 절차와 겹치며 되며 조용히 처리했다.
인연의 시작과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과정이 기억으로 남아서 삶의 씨실과 날실이 될 뿐이다. 사진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추억한다. 많은 시간을 늘 함께했던 5580에 마음 깊이 감사를 보낸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올해로 19회를 맞이했다. 지역에서 열리는 영화제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던 ‘전주국제영화제’가 내 가슴 속에 들어온 건 지난해 전주시가 제작비를 지원한 ‘노무현입니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난 뒤였다. 전주시는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어지러웠던 정국 속에서도 이 영화의 제작을 지원함으로써 영화제가 표방하는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지켜주었다. 덕분에 어떤 간섭과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 있는 영화제로 국내에서 인정을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해에는 미국의 영화전문매체 ‘무비메이커’가 꼽은 세계에서 가장 멋진 25개 영화제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개막식 날, 영화제가 열리는 전주돔을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객리단길을 잠깐 걸었다. 세련되고 멋진 가게들이 전주돔 주변에 가득했다. 어디든 문을 열고 들어가 영화제 뒷얘기를 나누다 보면, 레드카펫을 걸었던 멋진 배우들을 평범한 옷차림을 한 이웃처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제 동료 기자들이 배우들과 마주친 곳은 가맥집(가게맥줏집)이었다고 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낭만을 더하는 ‘포장마차촌’이 있다면, ‘전주국제영화제’엔 안주가 놀랍도록 맛있는 ‘가맥집’이 있다. 숙소에서 잠만 자느라 밤새 이런 멋진 일이 일어나는 줄 몰랐던 나는 좀 아쉬웠다.
레드카펫 때문인지 개막식이 열리는 전주돔은 강렬하게 느껴졌다. 상업성을 띤 영화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른바 슈퍼스타는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배우들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 그 자체가 진풍경이었다. 하얀 전주돔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잔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개막식 전 레드카펫 행사가 마련됐다. 영화제에 참가한 배우나 감독, 심사위원 혹은 관계자들이 속속 붉은 카펫 위를 걸었다. 관객들은 영화인이 등장할 때마다 열렬한 박수로 환영했다. 유명 배우들뿐만 아니라 낯선 이름이 불려도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개막작 ‘야키니쿠 드래곤’의 주연 배우 김상호 씨가 등장하자 엄청난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영화인들의 다양한 포즈와 몸짓으로 레드카펫 행사는 50여 분 동안 뜨겁게 이어졌다.
이어 배우 김재원 씨와 채수빈 씨의 사회로 개막식이 진행됐고, 곧바로 개막작 상영에 들어갔다. ‘야키니쿠 드래곤’은 1970년대 간사이공항 근처 마을에서 곱창구이 집을 꾸려나가는 재일교포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이 싸우고 화해하며,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야기다. 재일교포 극작가 정의신 감독이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주인공들이 떠들썩하게 싸우고 상처 입고, 다시 사랑하는 과정을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보니 극장에서와는 또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전주돔에선 매일 저녁 7시 야외상영을 한다. 전주돔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영화제 기간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색다른 재미다. 특히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에게 권하고 싶다.
전주에 가면 영화뿐 아니라 전통문화가 가득한 도시에서 전주비빔밥과 콩나물국밥 등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도 좋다. 저녁에는 야시장이나 막걸리골목에서 축제에 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운이 맞아떨어진다면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바로 옆자리에서 만날 수도 있다.
작곡자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지담이 신곡인 ‘우리 다시 만나면(If We Ever Meet Again)’을 8일 공개했다.
지담의 이번 노래는 얼마 전 4주년을 지냈던 세월호 희생자와 그들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진 곡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먼 곳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꿈꾸며 살아갈 힘을 갖는다는 내용이다. 연주에는 피아니스트 박세윤이 참여해 음악적 완성도를 높였다.
지담은 “이별의 아픔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을 노래에 담았다”고 밝혔다.
지담은 버클리 음대 영화음악 작곡과를 졸업하고 작사‧작곡과 함께 프로듀싱, 공연 연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음악적 재능을 과시하며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해 6월 보컬그룹 빅마마의 이지영이 참여한 첫 싱글 ‘기억한다’를 발표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건강 캠페인 ‘브라보 체조’의 음악감독을 맡은 바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가족을 잃은 이에게 우리가 가장 흔하게 하는 말이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면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막막해진다. 누구나 하는 위로의 말은 상투적이고 진심이 담기지 않은 것 같아 고민스럽다. 이렇듯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사람을 위로하는 데 익숙지 않다. 유족을 보듬는 일은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제대로 위로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는 그동안 없었다. 최근 웰다잉이나 호스피스 등 죽음과 관련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함께 주목받고 있는 분야가 있다. 애도상담이 그것이다. 국내에 애도상담을 보급하고 있는 윤득형 박사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는 무엇인지 들어봤다.
애도 과정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애도상담은 다양한 형태의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겪는 심리적, 영적, 정서적, 신체적 문제들을 잘 헤쳐 나갈 수 있게 도와주며, 슬픔의 과정을 제대로 겪어내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과정이라 정의된다. 국내에서는 아직 낯선 분야이지만 해외에서는 그리프 카운셀링(Grief Counseling)으로 불리며 이미 상담의 한 전문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호스피스 기관에서는 사별 가족을 위한 팀이 운용될 정도다. 윤득형 박사도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애도상담을 세부전공으로 연구했고, 각당복지재단에서 상담활동이 필요한 상담가나 종교인 등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애도의 첫 단계는 함께 있어주기
애도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그동안 가장 궁금했던 내용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유족을 만나면 어떤 말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윤득형 박사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질문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애도를 위해 간단한 한 문장을 말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아무 생각 없이 ‘안녕하세요’라는, 상황에 맞지 않는 인사를 건네기도 하지요. 보통 목례 정도만 해도 큰 문제는 없지만, 뭔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다면 ‘뭐라 위로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심정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나치게 종교적 언어로, 좋은 데 가셨다거나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지 않아요. 유족의 생각에 고인에게 좋은 장소는 자신의 곁이고 그곳이 안식처이니까요.”
그렇다면 제대로 된 애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윤 박사는 3가지를 추천한다. 첫째는 함께 있어주기. 물리적으로 옆에 있어주는 것이다.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연락하고 만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다음 단계는 열린 질문 하기. “애들은 어때?”, “기분은 좀 어떠니”와 같은 질문을 통해 상대가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가장 중요한 들어주기가 있다. 이때 감정을 섣불리 이입하거나 자신의 경험을 투사하면 안 된다. 유족이 슬픔을 실컷 표현할 수 있도록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윤 박사는 예견했던 죽음이든 갑작스런 이별이든 유족이 겪는 슬픔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상실 후에 남아 있는 이들이 겪는 극한 감정을 그는 ‘비탄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보통 2~3주 정도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애도의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때는 돌봄이나 상담 등이 도움이 됩니다.”
슬픔 해소하지 못하면 후유증 남아
윤 박사는 애도상담의 필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애도의 과정을 제대로 겪지 못하면 복잡한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비탄의 과정이 비정상적으로 오래 지속돼 몇 년이 지나도 슬픔에 잠길 수 있고, 사별한 후 십수 년 후에 느닷없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격동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 신체적인 질병이나 이상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어요. 특히 어휘력이 떨어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본인 탓을 하며 괜한 죄책감을 갖게 될 수도 있어요.”
특히 세월호 사건과 같은 국가적 대형 재난에서는 유족이 겪는 슬픔을 사회가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족들이 슬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실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데, 시신을 확인하지 못하거나 원인을 알지 못하면 진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사회적으로도 이들의 슬픔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순구하게 애도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벚꽃이 만발하는 4월, 이달의 추천 전시·공연·행사를 소개한다.
진해군항제
일정 4월 1~10일 장소 중원로터리 및 진해 일대
국내 최대의 벚꽃축제로 손꼽히는 ‘진해군항제’가 개최된다. 벚꽃 명소인 여좌천, 경화역, 진해탑 등에선 36만 그루의 아름다운 왕벚나무를 감상할 수 있다. 축제 동안에는 평소 출입이 어려운 해군사관학교, 해군진해기지사령부의 영내 출입이 가능하며 해군복 입기, 요트크루즈 승선 등 다양한 체험 행사가 열린다. 특히 금요일 저녁과 주말에 개최되는 군악의장페스티벌은 진해군항제에서만 볼 수 있다.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
일정 4월 3~8일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는 출연진과 관객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공연으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없앴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중년 여성들에게 아직도 아름답고 열정을 내뿜을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지난 6년 동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민참여형예술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신나는 예술여행 등의 사업에 선정됐다.
돌아온다
일정 4월 5일~5월 6일 장소 드림아트센터 2관 더블케이씨어터 출연 강성진, 정상훈, 김수로, 김곽경희 등
포스터에 ‘그리운 사람이 돌아옵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연극 ‘돌아온다’는 군대 간 아들을 기다리는 초등학교 여교사, 집 나간 필리핀 아내를 기다리는 청년, 욕쟁이 할머니 등 후회와 미련이 많은 주인공들의 사연을 통해 기다림과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배우 김수로와 강성진을 필두로 다양한 연극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정상훈, 김로사, 김사울 등이 참여한다.
아드만 애니메이션 – 월레스&그로밋과 친구들
일정 4월 13일~7월 12일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아드만 스튜디오’는 영국의 유명한 클레이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드만 스튜디오의 대표작 ‘윌레스와 그로밋’, ‘숀더쉽’, ‘치킨런’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볼 수 있다.
2018 앙상블마티네
개막 4월 2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지휘 윤승업 연주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단
모차르트 시리즈를 목관, 현악, 금관, 심포니 총 4가지 테마로 나눴다.
이번 첫 번째 시리즈에서는 모차르트 작품 중 유일한 클라리넷 협주곡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1악장’이 연주될 예정이다.
사랑해요, 당신
일정 4월 28일~6월 3일 장소 KT&G상상마당 대치아트홀 출연 이순재, 장용, 정영숙, 오미연 등
연기 베테랑 이순재, 장용이 남편 '한상우' 역을, 정영숙, 오미연이 아내 '주윤애' 역을 맡았다. 연극 '상랑해요, 당신"은 평범했던 부부에게 치매라는 불청객이 찾아오면서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렸다.
모든 부모가 처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자식들이 상상하지 못할 뿐, 그들에게도 감수성 예민한 10대 사춘기, 호기롭고 꿈 많던 20대 시절이 있었다. 노명우(盧明愚·52)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그런 부모의 삶을 대신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원고를 완성하기 전 2015년과 2016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연이어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부모를 잃는다는 건 ‘응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응석’을 비워내기 위해 잠시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호칭을 유예하고, ‘자연인 노병욱’과 ‘자연인 김완숙’의 삶을 ‘인생극장’에 담았다.
노명우 교수는 ‘인생극장’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을 통해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동시대 평범한 이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3년에 걸쳐 탄생한 이 책의 집필은 본래 대학생들에게 과거 대중영화를 매개로 한국 사회의 형성 과정을 이야기할 목적에서 ‘영상사회학’ 강의를 개설한 것이 계기가 됐다. 노 교수의 아이디어를 눈여겨본 ‘세상물정의 사회학’(노명우 저·사계절출판사)의 편집자가 이 강의를 캠퍼스 울타리를 넘어 세상 밖으로 꺼냈고, 고전영화를 감상하고 토론하는 ‘세상물정극장’을 만들었다. 일종의 확장된 거실처럼 작은 극장엔 많은 사람이 모여 영화를 보며 울고 웃었고, 그 자리엔 늘 노 교수의 어머니가 관객으로 함께했다.
“세상물정극장이 열리는 날이 어머니에겐 일주일에 하루뿐인 소중한 외출 시간이었어요. 당시 아버지가 치매를 심하게 앓으셔서 어머니가 돌보고 계셨거든요. 그때 아버지의 삶과 고전영화를 연결해 ‘인생극장’의 초고를 쓰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죠. 그러고 7개월 후엔 어머니가 시한부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저도 어머니도 충격이 꽤 컸어요.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나는 어머니가 하루를 살더라도 열흘처럼 느끼게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삶을 대신 써드리는 것이더라고요. 그렇게 책의 주인공을 더블캐스팅으로 바꾸게 됐습니다.”
‘아버지이기도 했던’ 한 남자의 인생
어머니 생전 책을 완성하려 했지만, 간호를 병행하며 원고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았다. 책이 나오면 아들과 함께 출판기념회이든 강연회이든 다니고 싶다던 어머니의 바람은 안타깝게도 이뤄드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남짓 만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시면서 반년 정도는 원고를 한 자도 못 썼어요.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도 감정이 솟구치고 한이 생겨서 키보드 끌어안고 울고…. 또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인생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았죠. 한 사람의 삶을 쓰다 보면 불가피하게 어떤 가치평가라는 게 들어가는데, 그런 것에 대한 고민과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에 주저하던 시간이 길었어요.”
마음을 잡고 글을 쓰려 해도 부모의 삶을 객관화해 바라보기는 어려웠다.태어날 때부터 내 아버지, 어머니였던 그들의 삶을 회고할 때마다 어떠한 한계에 부딪히는 답답함이 생기곤 했다. 그러던 그에게 돌파구처럼 한 단어가 떠올랐다.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나 제가 가진 정보만으로 인생을 써내기엔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러다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세상을 살다 간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생각을 전환하니 비로소 보이는 삶의 궤적들이 있더라고요. 그때 떠오른 단어가 ‘심정’이었어요. 아버지는 결혼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설을까? 엄마를 사랑했을까? 첫아이를 낳았을 땐 어땠을까? 그런 심정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기 시작했죠.”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수록 노 교수는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누구보다 평범했던, 그래서 그 스스로 ‘그저 그런’이라 표현할 정도로 보편적인 삶을 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야말로 그 시대의 심정을 대변할 수 있는 역사였다.
“아주 부자이거나 엘리트라서 시대가 주는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부모님의 이야기 속에 동시대인들이 공감하는 놀라운 삶의 공통분모가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들의 삶이 얼마만큼 우리 시대에 기록되고 전달되나 고민해보니 아들로서의 의무감을 넘어 사회학자로서의 책임감까지 생기더라고요. 어떤 형태로든 서둘러 이들의 삶을 남겨야겠다고 강하게 느꼈어요. 그때의 심정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들은 오늘도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니까요.”
유예된 사춘기, 어머니의 삶을 추적하다
젊은 시절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려 노 교수는 직접 추억의 장소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청년기를 간접 경험하기 위해 만주 선양, 일본 나고야를 순회했고, 어머니의 사춘기를 엿보고자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일대를 ‘소녀’의 심정으로 걸어보기도 했다.
“엄마의 흔적을 따라서 창신동 꼭대기에서 출발해 효제초등학교까지 걸어갔어요. ‘나는 가난한 집에서 구박받는 한 소녀다’라고 감정이입을 하고 그 길에 서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모습이 허깨비처럼 나타나기 시작했죠. 당시 산동네에서 내려오면 고래 등처럼 으리으리해 보였을 이화장, 조금 지나면 눈에 들어오는 경성제국대학, 그 거리를 오가는 예쁜 여대생과 멋진 신여성들을 보며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저들과 같은 삶을 살겠지’ 라는 희망을 안고 학교에 가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끊어진 삶의 조각들을 이어갈 수 있었죠.”
소녀였던 어머니도 세월이 흘러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노 교수는 6·25전쟁이라는 사건과 겹쳐 볼 때 어머니는 ‘증발된 사춘기’를 보냈으리라고 짐작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저 역시 사춘기를 겪었지만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너무나 다른 경험을 했어요. 특히 어머니는 전쟁통에 사춘기를 보내셔야 했죠. 원래 사춘기는 자기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고도 ‘사춘기’라는 핑계로 본인도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고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그런 감정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 전쟁을 겪으며 뭐든 꾹꾹 눌러 담고 숨기는 데 선수가 되어버리신 거죠. 유예된 사춘기를 보내셨다고 생각해요. 그 영향으로 어머니 또래 분들은 평생 하고 싶은 것, 필요한 것을 드러내지 않고 사셨고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파고들수록 절절히 전해지는 심정은 노 교수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아프다’는 말로는 부족해 마음이 ‘아리다’고 표현했다. 두 단어가 주는 차이는 ‘부모의 부재’를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장례를 치를 때만 해도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다 마치고 집에 오니 슬픔이 확 밀려오더라고요. 힘든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엄마가 딱 ‘고생했네 우리 아들’이라고 하는 게 익숙한 경험인데,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허전함이 컸어요. 칼국수를 먹다가도 느닷없이 엄마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리고…. 슬프고 힘든 건 남에게 설명이 돼요. 그런데 아린 감정은 말로 설명하려면 너무나 길고 복잡해서 표현이 안 되죠. 그전까지는 슬픔을 제어할 수 있는 게 어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진짜 성인은 부모를 잃고 나서 찾아오는 아린 감정을 느끼고, 그것과 마주했을 때 스스로 대처하는 방법까지 아는 사람인 것 같아요.”
부모님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
그는 아린 마음을 ‘인생극장’을 쓰면서 달랬다. 노 교수는 책을 엮는 동안이 극복의 과정이었고,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듯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내면의 성숙을 경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전에는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내가 이걸 성공했을 때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참 좋아하시겠다’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얻었어요.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슬픈 일보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더 마음이 아려요. 뭔가를 해냈을 때 ‘아이고 우리 아들 장하네’라는 환청까지 들리는데, 실제 전할 대상은 없잖아요. 그러면 앞으로 내 삶의 동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전까지는 부모의 칭찬을 기대하며 힘을 얻었다면, 요즘은 내 부모처럼 글로 전하지 못하는 삶을 산 이들과 이후 세대의 가교역할을 해내는 것을 새로운 동력으로 삼고 있어요. 그렇게 사회학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관계를 맺거나 끊는 것이 아주 쉽다고들 한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기능을 이용해 한 줄 보내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만남도 쉽지만 이별할 때도 카톡으로 통보를 한다고 하니 기성세대가 살았던 시절과는 참 많이 달라진 세상이다.
어느 사진작가는 나무 사진을 찍을 때 나무 둘레를 천천히 한 바퀴 쭈욱 돌아본다고 한다. 사진 찍는 걸 나무가 동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동의를 구했을 때만 좋은 사진이 나온다는 말을 필자는 믿는다. 나만 좋으면 그만인 이기적인 마음에는 소통되지 못한 불협화음이 남아 있다. 그저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즉각 무시하거나 툭 잘라내는 행위는 일상의 기쁨을 느낄 줄 아는 평범하면서도 선한 마음을 잃은 흔적일 수 있다.
이제는 사람과의 관계보다 나만의 나무 한 그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모두들 함께하는 시간보다는 개인적인 시간을 더 추구하는 시대다. 굳이 누가 내 편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내 일과 내가 원하는 장소, 도구만으로도 소통을 하고 위안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문명의 이기가 있다. 개인주의적 삶에 익숙해지고 있는 세대들에게 문명의 이기가 선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것들이 창조되고 흡수되는 과정에서 잠깐씩 가까운 이들을 잊고 살기도 한다. 심심할 때는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불편할 때는 도움도 준다. 반드시 사람을 통해 위로받아야만 인간적이고 따스한 감정이 전달된다고 믿었던 시절과는 많이 달라진 요즈음이다.
기성세대들은 흔쾌히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문명의 이기가 삶이 동력이 되고 있는 시대의 메시지는 진취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람들에게는 제각각의 결핍이 있다. 그래서 위로를 받고 누군가 내 편이 되어주길 바라기도 한다. 반면 상대의 그런 마음을 아프게 건드리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사람도 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이 진정성 있는 위로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의 모습도 본다. 허약한 인간의 마음과 각자의 결핍이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다. 필자도 최근에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식의 상처를 받고 인간이 주는 위로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주는 위로가 낡은 가치로 전락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사회와 문명사회의 장단점을 자신에게 맞게 부분적으로 수용하면 된다. 물론 인간과 만나 풀어야 할 문제까지도 기기들에게 의존하고 위안을 받는 요즘 세대들을 바라보며 공감하지 못하는 시니어도 있다.
그러나 삶의 방식에 정답은 없다. 새로운 문명사회를 억지로 이해하기보다는 인정해버리면 된다. 그렇게 두 시대를 공존할 수도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적당한 어울림. 그 속에서 각자 자신에게 맞는 위안을 찾으면 된다. 어쩌면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보완해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끊임없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내 편이 되어줄 대상을 찾으며 의존적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시대 변화에 맞춘 또 다른 삶의 방법도 찾아야 한다. 오직 인간 속에서만 본연의 가치를 찾기보다는 급변하는 세상에 맞춰 자유롭게 사는 방법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서 자신을 더욱더 사랑하면 될 것 같다.
서울의 동쪽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며 서울둘레길의 제2코스(용마-아차산코스)의 일부분인 아차산(285m)이 있다. 등산하는 산이라고 말하기는 낮 간지럽지만 뒷동산 같은 평탄한 산길이여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한가한 토요일 오후 유튜브의 음악을 들으며 아차산에 올랐다.
아차산의 중턱쯤에 누군가 소나무위에 장갑을 벗어놓고 깜빡 잊고 그냥 가버렸다. 누가 봐도 탐이 날 분홍빛 예쁜 장갑 이다. 장갑주인이 잠시 쉬어간다고 배낭을 벗으면서 손에 낀 장갑이 불편하여 벗어서 나무위에 올려놓고 바위에 걸터앉아 쉬었을 성싶다.
일어나서 갈 때는 눈높이 보다 높은 나무위에 올려놓은 장갑이라 잘 보이지 않으면 깜박 잊어버리고 그냥 간다. 여러 사람이 단체로 산행을 오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듣다보면 정신이 없다. 더러는 빨리 가자고 독촉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깜박 잊어버린 모양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장갑 주인이 몇 발작 걸어가다 ‘아차차 내 장갑’하고 돌아와서 가져 갈 것으로 기대했다. 남의 물건은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주인이 찾아가기 쉽다. 선량한 마음에 주인을 찾아준다고 들고 내려오다가 관리사무소에 맡기다가는 장갑주인을 영영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산행을 하고 두 시간이 지나 그 자리에 와보니 장갑은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장갑주인은 ‘에이 오늘 일진이 나빠 장갑을 두고 왔네! 지금 가봐야 누가 가져갔을 거야“ 라고 미리 예단하고 찾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도 장갑을 잊어버린 줄도 모르고 기분 좋게 하산해서 일행과 술판을 벌리고 있을 수도 있다.
주인을 기다리는 장갑이 애처로워 장갑에 주인의 전화번호나 무슨 연락처가 있으면 알려주려고 장갑을 이리저리 살펴봐도 아무런 표시가 없다. 아쉽지만 장갑주인 찾기를 포기하고 그냥 그 자리에 장갑을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이라도 주인이 찾아가면 다행이지만 남의 손을 타면 영영 장갑과 주인은 이별이다. 남의 물건이라고 아무도 손을 대지 않으면 장갑은 그대로 비가 오면 비를 맞을 것이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밤이고 낮이고 오직 주인만을 기다릴 것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아직도 난 널 사랑하는데 넌 벌써 나를 잊어버렸나’ 하고 장갑이 말하는 것 같다. 문득 ‘미생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마고 약속하고는 나타나지 않는 연인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 홍수로 불어난 물에 떠내려갔다는 미생이란 사람이 있었다. 실제 이런 사람이 존재했는지는 모르지만 약속을 지키고 끝까지 기다린 믿음의 화신으로 미생을 추켜세우는 사람도 있고 미련바보같이 물이 불어나면 피해야지 목숨을 잃는 행동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요즘의 미생이라면 핸드폰으로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을 것이다. 소나무 위의 장갑은 꼭 옛날의 미생처럼 죽어도 주인을 기다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지하철에는 할아버지 택배 배달원이 있다. 배달하는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체인으로 물건과 자신의 몸을 감아두는 것을 봤다. 나이가 들면 뭘 자주 잊어버리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한다. 손에 들고 있다가 불편하다고 옆자리에 둔 것이 일어날 때는 깜박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하고 그냥 나온다.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손에 뭘 들고 다니지 말고 주머니나 가방 속에 넣는 것이 좋다. 전철이나 시외버스의 선반 위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 두는 것도 피해야 한다. 집에서 나올 때 가방이나 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되새겨 보고 집을 나서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사랑하는 스승을 하늘로 떠나보낸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여느 해 같았으면 활기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는 엄숙했고, 숙연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리지만 길지 않다. 한국 연극계 큰 별이고 원로였던 故 윤조병(1939~2017) 극작가가 살아생전 죽을힘을 다해 정성을 쏟았던 희곡교실의 마지막 수업 현장. 제자들은 조명 켜진 무대에 올라 객석을 주시한다. 아이 볼에 입꼬리 닿는 것처럼 해맑게 웃던 윤조병 선생이 저만치 객석에 앉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또… 바라본다.
배우 입김을 불어넣은 희곡, 무대에 오르다
과천시설관리공단의 ‘극장에서 쓰는 희곡’ 프로그램은 2006년부터 매년 진행하고 있는 글쓰기 교실이다. 말 그대로 연극의 주재료이면서도 기초인 희곡을 극장에서 배우며 써보는 특별한 수업. 과천시민극장의 상주 단체인 극단 모시는사람들(대표 김정숙)과 함께 기획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작년 12월 5일 과천시민극장 소극장에서 가진 낭독회를 끝으로 2017년 전 과정을 마무리했다. 23명의 수강생 중 총 10명의 희곡이 낭독회 무대에 올랐다.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배우 3명(문상희, 신문성, 이재훤)과 수강생이 무대에 나와 앉아 배역을 나눠 실제 연기하듯 희곡을 읽었다. 세월호를 주제로 한 ‘갈매기가 전해준 편지(현재경 작)’를 시작으로 그로테스크한 반전이 돋보이는 ‘어디만치 왔어요(박수자 작)’, 노부부의 허망한 이별을 다룬 ‘늦은 오후에 병을 만나니(김영희 작)’, 연천 GOP 총기난사 사건을 생각하게 만드는 ‘나는 GOP 병장입니다(정진영 작)’ 등 작가 10명의 작품이 무대 조명 아래 빛을 발했다. 다양한 주제와 각기 다른 연령에서 담아낸 작품은 전문가 못지않았다. 글을 꾸준히 써야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재수강이 가능해 오랜 시간 희곡을 쓰고 배우면서 나날이 성장한 결과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희곡을 알게 되고 또 작가로도 활약하는 수강생도 꽤 되는 내공 깊은 글쓰기 모임이다.
극작가 윤조병의 후학(後學)이 꽃피다
이날은 수강생의 희곡 발표와 함께 그리움을 나누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극장에서 쓰는 희곡’ 교실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극작가 겸 연출가 윤조병 선생이 마지막 수업 한 달여를 남기고 타계했다. 윤조병 선생은 수업이 하고 싶은 마음에 진통제를 먹어가며 최선을 다한 진정한 스승이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극작가의 꿈을 꾸는 제자들에게 용기 북돋워주는 말은 물론이고 거침없는 독설까지 뱉어내면서 애정과 열정으로 가르쳤다. 제자들은 스승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희곡을 써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희곡교실 전체가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제자들은 침통해했고 상황을 버거워했다. 이날 낭독에 앞서 추모글을 읽은 현재경 씨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 글 한 줄을 적을 수 없었다”며 애끊는 마음을 전했다.
2011년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열두 번의 강의를 한 윤조병 선생. 이를 통해 제자 240명을 만나 희곡을 가르쳤고 함께 성장했던 노장이자 현역 극작가였다. 윤조병 선생 사후 그가 각색한 연극 ‘위대한 놀이’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올라 죽어서도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윤조병 선생은 드라마센터연극아카데미 1기 출신으로 극작가 노경식과 함께 유치진, 차범석의 계보를 잇는 한국 사실주의극의 계승자였다. 윤조병 선생을 대신해 남은 수업을 진행해온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김정숙 대표는 이날 인사말을 통해 “윤조병 선생님이 틀림없이 이곳 어딘가에서 앉아 여러분이 갈고닦은 보석 같은 작품을 함께 들어주실 것”이라면서 “밑거름이 돼주신 선생님이 더욱더 생각나는 밤”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조용한 가운데 낭독회를 마친 수강생들은 시원섭섭한 마음과 함께 윤조병 선생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강생 강수정 씨는 “살아오면서 글 쓰는 사람을 많이 만났는데 작가라고 부르고 싶은 한 사람이 윤조병 선생님이고, 글쓰기를 즐길 수 있게 가르쳐주신 그분이 오늘 많이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현역 극작가인 정승진 씨는 “2015년부터 희곡교실을 다닌 덕에 희곡을 쓰며 살고 있는 것에 감사드리며 거짓 없는 글을 쓰겠다고 마음속으로 선생님과 약속했다”고 밝혔다.
살아생전 마지막 수업 날 몸이 너무 아파 목에 뭐가 넘어가지 않는다며 힘들어하던 윤조병 선생. 앉아 있기도 힘든 상황에도 끝까지 수업을 이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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