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에는 은퇴자를 위한 놀이터, ‘청춘놀이터 목공방’이 있다.
청춘놀이터 목공방은 은퇴자 혹은 은퇴 예정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동 작업장이다. 이곳에서 책상, 의자, 장난감 교구 등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제작하고 수리할 수 있다. 개인이 마련하기 어려운 각종 목공, 용접 작업 장비를 갖추고 있다.
은퇴자들의 생산적 여가문화를 도와, 삶의 보람, 취미, 일거리를 찾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제작한 물건은 전시, 판매해 수익 창출도 한다.
청춘놀이터 목공방은 55세 이상 익산시 거주자는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수준에 맞는 교육과 실습도 제공한다. 취미 과정, 전문가 과정으로 나뉘어 교육이 진행되며, 수료 후 목공방을 이용할 수 있다.
한 이용자는 “청춘놀이터 목공방에 오기 전에는 무료한 삶을 살다, 목공방을 이용한 뒤부터 활발하고 규칙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며, “내 손으로 직접 목공 제품을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동물 모양 장난감을 만들어 손자 손녀에게 가져다주었는데 즐겁게 잘 갖고 놀아 뿌듯했다.”고 이용 소감을 밝혔다.
청춘놀이터 목공방은 전북도에서 조성한 ‘은퇴자 작업공간’ 중 하나다. 남원의 ‘목금토 공방’도 운영 중이다. 전북도는 전주시와 고창군에도 조성을 추진하고 있으며, 올해 사업 대상지 1개소를 추가로 선정할 계획이다.
전북도의 은퇴자 작업공간은 뉴질랜드의 ‘남자의 헛간’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남자의 헛간은 남성 은퇴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으로, 목공, 금속, 전기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작업장이다. 대형 기계, 장비가 마련돼 있다.
소정의 이용료를 내면 누구나 원하는 물건을 만들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지역사회에서 장비 제작, 보수 공사 등이 필요할 때 이용자들을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은퇴한 이들에게 소일거리를 마련하고, 취미 생활을 즐기고, 사회생활을 이어가도록 돕는다.
전북도는 남자의 헛간을 국내 실정에 맞게 변형, 도입하여 전국 최초로 은퇴자 작업공간을 조성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패자의 역사는 폐허 더미에 묻히거나 전설로만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일까? 기를 쓰고 남을 짓밟아 승자로 남고 싶어 하는 이들은 유독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높은 탑을 쌓고 더 큰 영토에 집착하며 영역 표시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 역사는 승자를 주로 기록하지만 패자에게도 눈길을 준다. 아니 후세의 이야기꾼들은 승자보다 패자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며 가슴 절절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댄다. 태생적으로 아웃사이더 기질을 갖고 태어난 이야기꾼들의 귀는 승자보다 드라마틱한 패자의 삶에 더 솔깃하기 때문이다.
쓸쓸하기만 했던 부여 유적지, 미륵사지 복원으로 옛 영광 되찾아
옛 부여가 지배했던 지역을 여행할 때면 어쩐지 쓸쓸하다. 지금은 그나마 좀 나아졌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 역사 현장들은 남루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웅진백제 시대의 도성이었던 공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가 1990년 가을. 공주에 가면 으레 그곳에 가야 한다는 일행을 따라 방문한 무령왕릉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역사적인 유적지, 옛 부여의 왕이 묻혀 있는 지하 무덤방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물론 관람객을 차단하는 유리벽이 있었지만 그리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론 왕의 무덤을 봤다는 두근거림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역사적 유물 현장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다는 것이 너무 위험해 보였다. 결국 1997년경 유리벽에 곰팡이가 생기고 물이 새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면서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해 송산리 고분의 석실 관람이 전면 금지됐다. 현재는 모형전시관에서만 그 형태를 유추해볼 수 있다.
미국에서 돌아와 근 26년 만에 다시 공주 송산리 고분을 방문했을 때 무덤방 개방이 전면 금지된 것을 알고 아쉽기는 했지만 이제야 제대로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일제강점기에 도굴꾼보다도 더 졸속으로 17시간 만에 유물들을 꺼내 옮겼다는 무령왕릉 발굴은 두고두고 한국 고고학계의 수치이자 치욕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당시 발굴 단장이었던 서울대 고고학과 故 김원룡 박사의 회고록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고구려 유적지는 대부분이 북한 지역에 위치해 있어 비교 대상이 신라밖에 없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백제의 유물들만 유독(?) 수난을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도 든다. 사실 경주를 방문할 때 느끼는 깔끔하고 웅장한 박물관이며 유물 단장 상태를 보면 이런 의혹이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은 듯하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의혹을 한순간에 없애주는 곳을 다녀왔다. 익산의 미륵사지 터다.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조선총독부가 무너지기 전의 미륵사지 석탑을 실측하고 무너져 내린 석탑 뒷면을 콘크리트로 땜질해 세워놓았다.
지난해 4월 말, 몰락한 왕조의 찬란한 유산이 마침내 20년간의 해체와 복원 과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 준공식을 한다는 기사를 본 후,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익산 여행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전남 지역을 한 번 훑고 전북을 돌아다녀보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차일피일 늦어졌다. 그러던 차에 지난 7월, 전남 장성 필암서원을 취재차 가야 할 일이 생겨, 벼르고 벼르던 익산 여행을 코스에 넣고 일정을 짰다.
미륵사지 동석탑, 일본의 호류지 목탑과 유사해 깜짝 놀라
마침내 익산 미륵사지 터를 방문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여름 끝자락 주중이라 그런지 찾는 이도 없었다. 고즈넉한 미륵사지 터 곳곳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복원해놓은 미륵사지 동석탑을 보다가 어디선가 본 듯한 석탑이 자꾸 떠올랐다.
2016년 일본 교토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교토 여행 마지막 날, 나라 현의 호류지를 찾아가기 위해 일본 시골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기억이 샘솟았다. 호류지에서 봤던 5층 목탑과 그 위의 풍탁까지… 복원해놓은 미륵사지 동석탑의 모습이 호류지에서 봤던 목탑과 형태가 정말 똑같았다.
당시 교토를 건너가기 전 한국에서 경주 여행을 마치고 다음 날 일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해의 여행은 마치 천년의 시간과 공간이 건너뛴 듯 아주 특별하고 소중했다. 이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미륵사지 터에 복원된 동석탑을 보는 순간 4년 전 뜨거웠던 그해 여름, 찾는 이 없이 적막했던 호류지 사찰 경내의 그 목탑이 불현듯 떠올랐다.
백제와 고구려 장인들이 건너가 전수한 일본 아스카 문명의 꽃 ‘호류지’
일본의 아스카 문명을 꽃피웠던 쇼토쿠 태자에 의해 창건된 호류지(법륭사)는 1993년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세계적 불교문화의 보고다. 호류지 본당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호류지의 박물관인 대보장원에는 백제에서 선물했다는 설과 백제의 후예가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지는 대형 목불상 ‘백제관음상’이 보존돼 있다. ‘일본관음상’이 아닌 ‘백제관음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면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가 일본에까지 건너가 꽃을 피웠던 건 분명해 보인다.
호류지의 금당 내 벽화는 고구려 승려 화가인 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데, 1945년 화재로 소실됐다고 한다. 아쉬운 대로 소실되기 전 촬영해놓은 사진을 근거로 디지털화된 3D금당벽화를 인터넷에서 감상할 수 있다.
동양 최대 미륵사지 석탑, 해체와 복원 20년 걸려
미륵사지 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감상해야 할 석탑은 당시 모습을 유추해 복원한 동석탑이 아니라 머리 부분과 위의 두세 층이 사선 모양으로 비스듬히 허물어진 서석탑이다. 국보 제11호, 동양의 최대 석탑이다. 20년 동안 일본이 뒷면에 발라놓은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본래 모습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치아 스케일링 기계까지 동원해 콘크리트의 흔적을 말끔하게 벗겨내, 마침내 1910년대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일본은 1910년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문화자원을 조사하면서 유독 백제 문화 유적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미륵사지 석탑을 실측하고 빽빽하게 조사 보고서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미륵사지 터를 발견하고 조사할 당시 동석탑은 이미 무너져 내려 흔적만 남아 있었고 힘겹게 남아 있던 서석탑도 무너져가는 상태였다고 한다.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된 사리장엄구 등 볼거리 풍성해
일본이 미륵사지 서석탑 뒤에 콘크리트를 발라 세워놓은 것은 자신들의 본류를 조사하고 분석하기 위해서였을까? 국립 익산박물관에는 뒷면이 콘크리트에 쌓인 채 흉물스럽게 숨 쉬고 있던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해 복원하기까지 걸린 20년간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서석탑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출토된 유물들도 전시돼 있다.
또한 익산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다큐멘터리(문화유산 채널 K-HERITAGE TV 제작)를 통해, 무너져 내린 미륵사지 석탑 등을 촬영한 사진을 보며 백제 문화와 유적에 얽힌 가슴 아픈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몰락한 왕조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권력과 무상함 깨우치는 곳
7세기 백제의 무왕이 왕비의 청으로 불사를 일으켰다는 미륵사지.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불이 나타나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함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대규모 사찰 미륵사지는 왕조의 몰락과 함께 오랜 시간 몰락과 소멸의 길을 걷다가 기적적으로 환생했다. 물론 똑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곳을 거닐며 고증에 입각해 해체와 복원을 하며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되살리기 위해 쏟았을 문화재 보존 관련자들의 정성을 느껴본다. 몰락한 왕조의 유물이 이제야 온전히 평가받고 그에 걸맞게 대접받고 있다는 안도감도 든다.
넓이가 5만 평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 절터였다는 미륵사지. 양쪽의 석탑과 가운데 목탑, 가람도 3개나 있었다고 한다. 3탑 3금당의 구조로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했다는 미륵사지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절터 뒤편을 병풍처럼 막아서고 있는 안개 머금은 미륵산 자락과 주춧돌로 옛 영광을 유추해보며 광활한 절터를 걸어봤다.
흔적 없이 사라진 화려한 유물 대신, 세월의 이끼 낀 주춧돌만이 시간의 영겁과 헛되고 헛된 화려함을 누르고 2020년 후손들을 만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지난 20일 전북지역본부에서 5개 공공기관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시니어 공공데이터 구축 지원 시범사업’을 실시했다고 21일 밝혔다.
협약에는 한국노인인력개발원과 한국국토정보공사,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한국소비자원, 한국승강기안전공단 등 5개 공공기관이 참여했다.
이번 협약을 통해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시범사업을 총괄 지원하고, 협업기관들은 기관특성에 맞는 공공데이터 수집을 위한 노인일자리를 창출하기로 했다.
각 기관은 시니어의 경력과 기술을 활용해 기관별 공공데이터를 수집하고, 수집한 공공데이터는 각 기관의 정보플랫폼을 통해 국민에게 개방할 예정이다.
이번 사업으로 구축하는 데이터는 국민의 편의 및 안전과 관련 있는 지역공간정보, 전자파 측정‧모니터링, 전통시장 소비물품 가격정보, 승강기 사물기반 위치 정보 등이다.
올해는 시범적으로 광주, 전주, 익산에서 총 40명의 시니어 공공데이터 수집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지속적으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시니어 공공데이터 수집 전문인력은 각 지역에 거주하는 만 60세 이상을 모집‧선발했으며, 3일간 사전교육 후 9월부터 12월까지 근무한다.
이들은 평일 3시간씩 월 60시간 근무하고, 약 71만원(주휴수당 포함)의 월 급여를 받는다.
강익구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원장은 “이번 협약을 통해 추진하는 시범사업은 코로나19에 대응해 노인일자리를 디지털로 전환하는 단초가 되는 사업”이라며 “앞으로도 공공기관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양질의 언택트 노인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데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북쪽의 음식’이라고 말한다. 실향민들이 그리워하는 음식이다. 한국전쟁 무렵 월남한 이들은, 당연히 고향 음식을 그리워한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서울 장충동, 오장동 냉면, 전국적으로 퍼진 족발, 북한식 큼직한 왕만두가 바로 그것이다.
젊은 층들도 북한 음식에 열광한다. 부모님의 고향이 북한도 아니다. 가본 적도 없다. 한국전쟁 무렵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북한 음식’을 찾는다. 이른바 젊은 층의 핫플레이스인 서울 홍대 지역에도 ‘북한 음식 전문점’이 성행이다. 실향민들의 음식과는 또 다르다. 최근 한국으로 온 새터민들이 차린 음식점들이다. 평양냉면, 함흥냉면, 왕만두, 어복쟁반, 가리탕, 가자미식해 등 종류도 다양하다.
왜 젊은 층들도 북한 음식에 열광할까? ‘북한 음식’은 어떤 음식인가? 만두, 냉면을 중심으로 북한 음식을 알아본다.
평양냉면과 국수
왜 평양의 음식이 발달했을까? “북에는 평양이 있고, 남에는 진주가 있다”는 말이 있다. 북에서는 평양이 가장 번창한 도시이고, 남에서는 진주가 가장 큰 도시라는 뜻이다. 도성인 한양을 제외하면 북에서는 평양이 으뜸, 남에서는 진주가 으뜸이었다. 평양냉면이 있듯이, 진주에도 냉면이 있었다. 진주냉면이다. 냉면이 상업적으로 팔렸음은 큰 도시였고, 관청이 있었고, 시장이 있었다는 의미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으면 시장이 서고, 시장이 서면 밥집도 많이 생긴다. 두 도시 모두 큰 도시였고, 높은 벼슬아치가 있었고, 시장도 있었고, 왕래하며 식사를 하는 이도 많았다.
북한은 중국과 맞닿아 있다. 중국 쪽 관문은 국경 도시 의주다. 대중국 통로였다. 중국과 조선을 드나드는 중국 혹은 조선의 사신들은 ‘북경-의주-평양-개성(해주)-한양’을 잇는 도로를 따라다녔다. 한양과 중국 북경을 잇는 길은 멀었다. 최소 3개월이 걸리는 긴 노정이다. 사신단은 늘 주방장[廚子, 주자]를 동행했다. 음식점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수백 명의 사신단 식사는 주자 몇 명이 감당했다.
주자들은 중국에 가서 새로운 음식들을 만난다. 귀국할 때는 의주-평양을 잇는 길을 따라온다. 북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평양에서 사신들은 제법 오랜 기간 머물며 피로를 풀고 휴식을 취했다. 평양의 관리들은 중국과 조선의 사신단 맞이가 주요 업무였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사 모시고 손님을 맞이하려면 늘 음식이 필요하다. 평양은 문물의 선진국이었던 중국의 음식을 받아들이는 큰 도시였다.
국수와 만두, 돼지고기 등은 중국이 앞섰던 음식들이다. 이런 음식들은 중국-의주-평양을 거쳐 한반도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들어왔다.
냉면은 차가운 국수다. 국수는 중국이 발달했다. 한반도에는 밀가루가 귀했다. 중국은 밀가루가 흔했다. 우리의 주식이 쌀인 반면, 중국 북쪽은 밀가루가 주식이다. 앞선 국수 음식이 한반도로 들어온다. 국수를 가장 먼저, 널리 받아들인 곳은 평양이다. 평양에서 국수의 일종인 냉면이 발달한 이유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반도에 ‘경부철도’를 건설한다. 경부철도는 의주와 부산을 잇는 철도다. 북, 만주, 중국, 한반도의 물자를 빼앗다시피 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1920~30년대에 평양의 최고 생산물 중 하나는 냉면이다. 건면 냉면 공장이 있었고 이미 평양냉면은 유명했다. 일본은 중국에서 대량 생산되는 각종 곡물과 한반도의 곡물을 이용해 냉면을 만들고, 이를 ‘수출’이라는 이름으로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1930년대에는 냉면집을 중심으로 ‘동맹파업’도 일어났다. 1938년 12월 1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평양의 냉면집 파업’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평양면업노동조합(平壤麵業勞動組合)’의 피고용인 240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했다”는 내용이다. 요구 조건은 역시 임금 인상이다. 11월 18일, 이들이 현행 임금 90전을 1원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한다. 주인들은 12월 1일 자로 올려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날짜를 12월 10일로 연기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결행한 것이다. 결국, 민간의 마찰에 경찰이 개입한다.
평양에서만 냉면이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에도 냉면집이 많았다. 파업도 있었다. ‘평양냉면 파업 사건’ 이전인 1931년 6월 1일 자 신문기사다. 제목은 ‘평안냉면옥 배달부맹파(平安冷麪屋 配達夫盟罷)’다. 평안옥이라는 냉면집 배달부들이 동맹파업을 했다는 뜻이다.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평안옥’은 경성의 중심지인 서린동 89번지에 있는 냉면 전문점이다. 이곳에는 종업원 10명이 있었다. 모두 배달부다. 일급은 1원. 문제는 기사가 실리기 전인 5월 29일, 주인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90전으로 낮췄다. 다음 날엔 직원 3명을 해고했다. 배달부들은 일하지 않겠다고 동맹파업으로 맞선다. 경성 한가운데인 서린동의 냉면집 이름이 ‘평안옥’이다. 결국 평양냉면이다.
‘평양냉면’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전국적으로 유행한다. 경성을 비롯해 각 지방에도 냉면이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평양냉면이 널리 퍼진다.
긴 세월 동안 중국-평양-서울을 잇는 길을 따라 음식은 전해졌다. 중국 국수 문화가 평양에 전해지고, 평양의 냉면이 서울을 비롯해 전국으로 퍼졌다.
만두와 상화
만두는 냉면보다 더 복잡하게, 여러 차례 한반도로 건너온다. 처음은 고려시대 말기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만두는 몽골 침략 때 한반도로 처음 건너온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 초기 기록에는 만두가 없으나,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쌍화점’의 쌍화(雙花), 상화(霜花)는 만두다(쌍화점이 만두 전문점이 아니라 액세서리 파는 곳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시대 말기에는 궁중에서 만두를 훔쳐먹었다가 사형당한 도둑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려·조선시대를 지나면서 만두는 만두 혹은 상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나타난다. 조선시대 말기, 임오군란과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중국 군인, 민간인, 상인들이 한반도로 건너온다. 이때 짜장면, 짬뽕과 더불어 만두를 한반도에 전한다. 지금도 인천 차이나타운, 금강 유역의 군산, 익산 등에는 화상노포가 많다. 이들은 여전히 ‘청요리’와 더불어 짜장면, 만두 등을 내놓고 있다.
조선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은 중국이다. 외교적으로도 사대의 나라였다. 조선은 1년에 최소한 4차례 중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수백 명의 인원이 중국과 조선을 오갔다. 중국 측 사신도 빈번히 한반도를 오갔다. 사람을 따라 음식도 전해진다.
우리는 중국에는 없는 만두전골, 만둣국도 만들었다. 만두가 한식이 된 것이다. 평양, 의주는 중국으로부터 만두를 받아들여 한반도 전역으로 퍼뜨렸다. 서울에서도 만둣국을, 남쪽에서도 교자를 흔하게 먹는다. 조선시대 말기,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로 들어온 화상들도 만두를 전했다. 북쪽의 큰 만두, 왕만두는 한반도로 들어온 중국 만두와 비교적 닮았다. 남쪽으로 넘어오면서 만두는 작아진다. 개성만두도 있고 서울식 만두도 있다. 한반도는 음식의 용광로다. 모든 음식을 받아들인 다음 변형, 변화, 발전시킨다. 중국 음식, 북한 음식은 서울로 오면서 또 달라진다.
오늘날 서울의 북한 음식도 마찬가지다. 여러 차례 중국에서 받아들인 다음, 한반도 식으로 바꾼 것이 다시 서울로 전해진다. 실향민들이 전하고, 새터민들이 또 전한다. 북한 음식이라고 부르지만, 시대별로 음식은 달라진다. 자신들이 떠났던 순간의 ‘북한’ 음식이다. 실향민들의 북한 음식과 새터민들의 북한 음식이 다른 이유다.
만두와 냉면은 우리 것이지만 우리의 전통음식은 아니다. 외국에서 들여온 다음, 변형·발전시켜 우리 음식으로 만든 것이다. 중국, 북한 지역 사이에도 여러 차례 교류가 있었다. 이런 교류로 만두, 냉면은 발전해 한식이 된다. 북한 음식도 마찬가지. 한국전쟁과 그 이후 여러 차례 한국으로 건너온다. 한국에 온 음식들은 조금씩 변화, 발전하다 어느 순간에는 서울식, 한국식, 한식이 될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북한 음식에 대해 열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다. 존재하는 나라, 뉴스 등에서 자주 보는 나라, 그러나 갈 수는 없는 미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다. 유럽과 미국, 일본 음식에 대한 호기심보다 더 강하다. 쉽게 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익산의 핫 스폿은 여기다.
흔히들 인스타 명소라 하여 새롭게 만들어 내거나 요즘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어 단장한 곳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리하여 SNS에 등장하고 무수한 '좋아요'를 누른다. 그런데 아주 아득한 날의 이야기가 그대로인 듯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 있다. 전라북도 익산에 가면 1300년 전의 석탑이 너른 터에 우뚝 서서 우리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익산의 미륵사지탑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많이 보아오던 탑이다.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에 남아있는 탑으로 사적 제150호다. 백제 무왕 때 창건되었으나 조선 중기에 폐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 절터에 처음 가보는 사람들의 눈에도 어쩐지 익숙하다.
어릴 적 역사 동화나 매스컴의 기사에서도 자주 보았던 모습이다.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 공주와의 설화가 저절로 떠오를 만큼 이미 잘 아는 곳에 와 있는 느낌이다.
절터에 들어서면 먼저 드넓은 면적에 놀란다.
절터를 배경으로 한 삼각산의 남쪽 자락에 드넓게 펼쳐진 옛 절터의 흔적들이 흩어져 있다. 20여 년에 걸친 해체. 복원공사를 통해 원형에 가깝게 재현해 낸 미륵사지 사탑을 볼 수 있다. 복원과 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가까이 다가가 보면 국내 최대 규모의 석탑답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벌판에 부는 비바람과 햇볕을 맞으며 서 있던 석탑이 이제는 어엿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위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흙 한 줌과 돌 하나하나가 이루어낸 미륵사지 석탑이다.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너른 땅에 백제인들의 땀과 정성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그 자연 속에 고여있는 옛사람들의 정신을 느껴본다면 익산을 찾은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 석탑은 이제 보존과 사후 관리 그리고 활용방안에 집중할 차례다.
백제의 역사를 가득 품고 있는 그 땅의 남측에는 왕궁리 유적 전시관이 있다.
백제 왕궁 왕궁리 유적, 왕궁리 유적의 백제 건물, 왕궁의 생활,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백제왕궁 등 5개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관의 차례에 따라 둘러보면 그 시대의 생활을 이해하기 쉽다.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 화장실 유적이 조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서 석축 배수로의 남쪽을 조사하다가 특이한 구덩이가 발견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무 막대와 곡물 씨앗이 나왔고 출토된 흙을 분석했더니 기생충 알이 나와 화장실 유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또한, 용도 미상의 반질반질한 나무 막대는 뒤처리용일 거라는 추측으로 그 시절의 위생처리 모습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왕궁의 건물지와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과 후원, 출토 유물, 금과 유리 등의 백제 최고 귀중품의 전시를 보면서 백제인들의 찬란했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영상으로 백제왕궁의 다양한 내용을 관람하는 공간도 있다.
왕궁리 유적지는 단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곳뿐이 아니다.
여행지로도 더할 나위 없다. 그 너른 터에서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고 혼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에도 적당하다. 아이들의 교육현장으로도 좋다. 백제인들의 삶이 현재 우리 미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곳, 익산 왕궁리 유적이다.
이것만으로 익산을 떠나기가 아쉽다면 3만여 평 대지에 4000여 개 숨 쉬는 항아리가 볕을 받아 반짝이는 곳을 찾아볼 수 있다. 햇볕 아래서 또는 토굴 속에서 전통 장류들이 익어가고 있는 ‘고스락 전통장’. 정원을 산책하며 느리게 사는 여유를 맛보고 유년기의 추억도 되살려 볼 수도 있는 곳이다. 곳곳에서 유기농 재료로 만든 장류와 식초, 효소 등이 발효 숙성되고 있다. 체험활동 프로그램도 있으니 원한다면 미리 신청하면 된다.
밥 한 끼를 먹어도 이쁜 곳에서.
메뉴 하나하나가 모두 알차고 가성비도 괜찮은 편이다. ‘고궁정 한식’
뿐만 아니라 음식 담음새나 그릇도 허투로지 않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꿈의 공간인 ‘만화방’. 사방으로 둘러싸인 만화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된 기분이다. 동네에 하나씩 있었던 만화방은 만화의 디지털화로 급격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아쉬운 마음이 들 때쯤, 만화방은 시대에 맞춰 ‘만화카페’로 진화해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만화책의 집합소 ‘만화박물관’
수원역 바로 앞에 위치한 ‘만화박물관’은 아직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대형 만화방이다. 복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만화 포스터와 마커로 휘갈겨 쓴 ‘신간도서목록’을 보니 ‘아 예전엔 이랬었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난다. 양옆도 모자라 천장까지 뚫고 나갈 기세의 엄청난 양의 만화책은 마치 ‘만화책 천국’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협, 판타지, 로맨스, 요리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잘 분류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고 쓰여 있는 붉은 딱지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혹시나 해서 “처럼 오래된 책도 있나요?”라고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사장님의 대답은 “그런 건 진짜 박물관에 가서 보셔야죠” 하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만화책’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간식거리. 짭조름한 과자를 입에 넣고 만화책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과장 봉지는 텅텅 비어 있다. ‘만화박물관’에서도 이런 쏠쏠한 묘미를 아는지 음료, 과자 심지어 아이스크림까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간식과 원하는 만화책을 골랐다면 자리를 잡아보자. 늦게 들어오면 아쉽게도 여럿이 푹 꺼진 소파에 앉아야 한다. 책장 사이사이에 놓인 1인석은 단골 사이에서 ‘VIP석’으로 통한다고!
주소 경기 수원시 팔달구 덕영대로 923-1 새수원빌딩 2층
기본요금 시간당 1500원
영업시간 매일 24시간
전화 031-254-0828
청결, 재미, 편안함까지 모두 갖춘 ‘만화카페’
사실 ‘만화박물관’ 같은 대형 만화방을 주위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저렴한 요금과 다양한 만화책은 만화 마니아들에겐 좋은 소식일 순 있지만 퀴퀴한 담배 냄새와 쾌적하지 않은 환경을 싫어하는 사람에겐 끌리지 않는 장소다. 그렇다면 요즘 새로 문을 열고 있는 ‘만화카페’는 어떨까? ‘카페’와 ‘만화방’이라는 개념이 한데 어우러진 만화카페는 청결하고 밝은 분위기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기를 얻고 있다. ‘콩툰’, ‘벌툰’, ‘섬’ 등 인기몰이 중인 만화카페 프렌차이즈점은 대학로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해 최근에는 지하철역 근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강남역에 위치한 만화카페 ‘섬’을 방문해봤다.
흰색과 파란색이 조화를 이룬 만화카페 ‘섬’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다와 백사장을 테마로 한 만화방이다. 들어가려면 문 앞에 비치된 신발주머니에 신발을 넣고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한다. 입장부터 청결을 중요시하는 이곳에서 담배 냄새란? 당연히 흡연은 꿈도 꿀 수 없다. 은은한 커피 향만이 존재할 뿐이다. 매장 군데군데 놓인 캐릭터 피규어와 인기만화 포스터는 만화카페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준다. 시간당 이용요금은 2400원으로 만화방보다는 약 1000원 정도 비싼 편. 하지만 쾌적한 환경에서 만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또 누워서 볼 수 있는 공간도 있으니 책을 보다 잠이 오면 잠깐 눈을 붙여도 좋다. 무엇보다도 만화방의 핵심은 만화책. ‘섬’은 오래된 만화책보다는 요즘 인기 있는 웹툰 서적, 그래픽 노블 그리고 1990년대에 이어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 , 등 젊은이들을 타깃으로 한 만화책을 주로 보유하고 있다. 그 분량만 해도 3만 권이 넘는다.
‘섬’에선 각종 먹을거리도 판매하고 있다. 과자는 물론이고 한강에서 유행한다는 ‘즉석 라면’까지 맛볼 수 있다. 여기에 갈증을 날려줄 시원한 음료는 몰디브에서 먹는 모히토 한잔 부럽지 않다.
주소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98길 25 2층
기본요금 시간당 2400원
영업시간 월~목, 일 11:00~23:00 금, 토 11:00~24:00
전화 02-538-3756
옛날 느낌 물씬, 동네 ‘만화방’
서울에서 기차로 한 시간이면 가는 멀고도 가까운 전북 익산에 40년의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킨 만화방이 있다. 바로 익산역에서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하는 ‘맹호만화’. 1973년에 문을 열어 만화책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아침 8시가 되면 한결같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린다. 여름을 맞이한 만화방엔 구식 선풍기가 탈탈거리며 돌아가고 낡은 소파와 빛바랜 만화책은 ‘맹호만화’의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시간제가 아닌 권당 요금을 매기는 점 또한 특별하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대부분 50~60대의 남성. 학창 시절 놀 거리가 없어 만화책을 찾던 학생들이 이젠 반백의 나이가 되어 추억의 만화방을 찾기 시작했다.
주소 전북 익산시 중앙로1길 30 2층
기본요금 만화책 권당 300원 / 소설 권당 1000원
영업시간 매일 08:00~24:00
전화 063-855-6316
지난 5월 익산 관광 때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유적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러나 발굴 중이라 땅만 파놓았지 막상 볼 것이 없어 실망했다. 제대로 보려면 익산까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함께 지정된 공주 부여를 돌아봐야 한다고 들었다. 검색으로 공주는 볼 것이 그리 많지 않고 부여에 유적지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부여로 향했다.
폭염의 날씨라 목적지는 실내 위주로 짤 수밖에 없었다. 첫 목적지는 부여 박물관이었다. 경로 우대를 생각하고 갔는데 무료입장이었다. 입구의 어린이박물관은 백제문화를 어린이들 눈높이에 맞게 잘 꾸며놓았다. 백제시대의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는데 이 또한 무료였다. 바로 옆에서 왕흥사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본관으로 들어가니 천장에서 자연광이 들어오는 스카이라이트 지붕 아래 커다란 돌그릇이 있었다.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 시대별로 그릇, 무기의 변화를 유적으로 잘 전시해놓았다. 이 박물관의 대표 유물은 황금대향로였다. 백제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그런지 특별실에 따로 전시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 얼마나 큰 감동이 있었을까 상상이 되었다. 크기로나 모양으로나 과연 대단한 보물처럼 보였다.
백제문화는 너무 오래된 역사이기 때문에 친숙하지 않다. 더구나 한성백제 500년도 있어 분산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일본 문화가 백제의 영향을 받았고 한때는 한반도를 지배하기도 했던 백제였으므로 재조명을 해볼 필요는 있겠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낙화암에 갔다가 실망하고 온 적이 있다. 3천 궁녀가 신라의 침략에 강으로 투신했다는 야사만 기억에 있지, 정작 볼 것은 없다는 기억에 날씨도 더워 가지 않았다. 그 대신 동네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부여 박물관 인근에 있는 신동엽문학관을 찾아갔다. 39세에 요절한 민족 시인이란다. 대표작으로 ‘껍데기는 가라’가 있다. 범상치 않은 외관이어서 알아보니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건물이라고 했다. 바로 옆에 있는 생가에 육필 원고와 신동엽 평전 등 관련 책자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궁남지였다. 7~8월이 절정이라는 연꽃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이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군에서 인근 논밭을 사서 계속 궁남지를 늘려간다고 했다. 과연 사람 키보다 더 큰 연꽃잎과 탐스러운 연꽃들이 볼만했다. 인근 음식점에서는 연밥을 팔고 있었다. 잡곡밥을 연잎에 싸서 내오는 것인데 다른 반찬은 평범했다. 원래 충청도 음식은 별 특징이 없다.
백제 하면 떠오르는 것이 도자기류다. 백제요 등 도자기 굽는 가마가 근처에 있다 해서 찾아가 봤다. 거대한 가마가 공룡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30분마다 버스가 있고 두 시간이면 도착한다. 유적지가 많아 당일로는 좀 빡빡하다. 여름은 너무 더우니 서늘한 봄가을에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거기, 아무 것도 없어”
공주와 부여, 익산 일원의 백제역사유적지구 팸투어를 간다는 말에 지인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가방을 메고 출발하는데 김빠지는 소리였다. 그러나 공주 공산성에서 시작해 공주와 부여 일원을 둘러보자, 지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됐다. 기원 전 18년, 고구려에서 쫓겨난 비류와 온조가 한강유역 위례성에 세운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한성을 내주고 웅진(공주)으로 쫓겨 내려갔다가 사비(부여)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지만, 결국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멸망하고 만다. 패배의 역사로 얼룩진 백제역사유적지구엔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 벌판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며 1500년 전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내야 했다.
백제인들의 삶은 고단했으리라. 삼국은 늘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고, 한성에서 공주, 사비로 수도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성을 쌓느라 백성들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을 것이다. 성 안에 있던 커다란 사찰에도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리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인들이 남긴 유물이나 유적들을 들여다 보면 온화하고 부드럽다. 모든 왕릉이 도굴 당했지만 고맙게도 무령왕릉 하나가 온전히 남아있어 백제인들의 세련되고 앞선 문화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유네스코는 백제역사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며 국제성과 개방성을 갖춘 보편적 가치를 인정했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포함돼 있기도 하다.
공주 공산성에서 시작해 1박 2일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둘러보았다. 백마강이 내려다 보이는 공산성이나 소나무가 울창한 부소산성을 걷고, 유람선을 타고 아찔하게 깍아내린 낙화암을 보았다. 또한 정림사지에선 정림사 5층 석탑을 보며 돌을 쪼던 백제인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무왕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익산이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부르게 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사실 무왕은 호방하고 걸출한 기상을 지닌 왕이었다고 한다. 익산에서 백제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무왕은 엄청난 크기의 왕궁과 사찰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인 미륵사지는 건물은 다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의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절 터엔 복원을 위해 번호를 매겨 놓은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투어는 과거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퍼즐조각을 맞추는 게임 같았다. 대부분의 유적들은 사라지고 덩그러니 터만 남아있는 그 곳에서 옛사람들의 숨결을 듣고 목소리를 되살리고 기상을 느껴보려 애썼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에 있던 무령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무령왕의 어진 위로 새로 선출된 대통령 얼굴이 떠오르며 우리나라도 하루 빨리 동아시아에서 제 위치를 찾을 수 있길 빌어보았다.
매달 시니어의 제2인생과 직결된 새로운 직업을 소개해온 이 코너가 2017년 정유년(丁酉年)을 맞이해 새해 각오와 어울릴 만한 주제를 준비했다. 바로 특정한 직업이 아닌 ‘창업’이다. 취미활동이나 공부를 통해 익숙해진 일 혹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를 세우는 것. 창업은 시니어에게는 거창한 일로 여겨지지만, 벤처나 스타트업이 뜨고 있는 요즘 사회에선 어렵지만도 않다. 또 시니어의 창업을 돕기 위한 관련 기관의 도움도 쏠쏠하다. 새해 계획을 이미 세워놨다면 ‘창업’이라는 꿈을 하나 더 집어넣어보면 어떨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올해 사업 활동 결과는 이상이며, 내년 사업 계획을 보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스크린의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은 말쑥한 정장 차림도, 대기업 임원도 아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 여성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니어의 모습.
지난해 12월 7일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진행하는 인큐베이팅 지원사업에 참여한 단체들이 지난 1년간 사업 결과를 평가하고 다음 해 활동을 소개하는 자리. 현장에선 센터에 의해 ‘보육’되고 있는 스타트업 기업 10개 업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성과를 자축했다.
비록 프레젠테이션이 서툴러도, 아직 대표라는 직함이 쑥스러워도, 한 회사를 설립해 성장시키고 있다는 보람 때문인지 이들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이들은 어떻게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을까.
창업은 ‘소자본’ 1억원 내외로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2017년 한국경제 7대 이슈’ 보고서에서 60대 이상의 연령층에서 경제활동인구 증가가 취업자 증가보다 커 고용 여건이 악화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취업활동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취업활동이 어렵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는 ‘창업’. 그러나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종목 선정이나 자금 마련, 동료나 직원 확보, 판로 개척 등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시니어들은 어떻게 창업을 추진할 수 있을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최근 은퇴 후 창업 시 망하지 않는 5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소자본으로 창업하기 ▲365일 묶여 있는 창업 피하기 ▲가족의 지지 확보하기 ▲잘 알고, 좋아하는 일 선택하기 ▲사업가 마인드로 무장하기 등이다.
소자본 창업을 추천하는 이유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이 창업할 때 은퇴 자금을 한꺼번에 투자해놓고 사업이 안 되면 곤란을 겪기 때문이다. 또 잘 알지 못하거나 가족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다면 그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창업 금액은 1억원 내외가 적당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창업진흥원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 프로그램을 활용하자
창업을 원하는 시니어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장치들이 정부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기관 중 하나는 창업진흥원. 만약 어떤 ‘아이템’을 갖고 사업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창업진흥원을 노크해보라. 창업진흥원에서는 각 지역 23개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를 운영하면서 시니어의 창업을 돕고 있다. 또 별도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통해 창업에 필요한 기술교육도 제공하고 있다.
창업진흥원 지식서비스창업부 이경희 대리는 창업진흥원의 활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창업진흥원에서 기술창업, 즉 기술을 바탕으로 한 창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시니어의 창업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시니어들은 창업에 올인할 경우 사회적 약자가 되기 쉽고,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은 창업은 폐업률이 높습니다. 때문에 창업에 필요한 지식과 준비 과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술교육을 지원해 안정적인 창업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창업진흥원은 지난해까지 진행했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올해부터는 각 지역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로 이관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는 교육뿐만 아니라 설립된 회사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입주공간지원 사업, 창업자금지원, 마케팅활동지원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다. 기업이 설립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지원받을 수 있는 셈이다. 또 시니어에 국한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창업진흥원의 창업지원 교육이나 프로그램들은 연령 제한이 없기 때문에 창업 전 꼼꼼하게 살펴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
모임과 함께 사업 계획 다듬은 뒤 출발해도 늦지 않아
하고 싶은 사업은 있는데 누군가의 힘을 빌리고 싶다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서울50플러스재단 산하 각 지역의 50플러스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와 인큐베이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현재 센터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회사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센터에서는 2016년 현재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10개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사업계획 심사와 인터뷰를 통해 10개 업체를 선정해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멘토링을 통해 사업이 다듬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또 지자체나 다른 기관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면 저희가 다리 역할을 하고, 사업 내용에 따라 센터가 직접 돕기도 합니다.”
센터에서 지원 기업을 선정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일반 창업지원 기관과는 다소 다르다. 기업 활동을 통한 이윤이나 생존을 위한 기존 기업 혹은 청년창업 기업과의 경쟁에 그 초점이 맞게 되면 취지와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거나, 사회 참여적 조직, 협동조합, NPO(비영리 민간단체)를 지향하는 곳을 우선시한다. 물론 사업성이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기업들은 전 단계로 센터 내 커뮤니티를 선택한다. 동호회 활동과 비슷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사업 계획을 보완하고 아이디어를 덧붙이는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다. 또 센터 내 활동을 통해 인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재 인큐베이팅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 중 일부는 이미 협동조합을 갖췄거나, 사단법인의 형태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참여 기업 중 한 곳인 주식회사 리스타트의 경우 창업투자회사를 통해 자금 투자를 약속받기도 했다. 준비하고 있는 기업의 일자리와 은퇴 후 구직자들을 맞춰주는 서비스가 좋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 전국 시니어 창업 기술센터 |
서울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테크노파크 1203호(02-944-6038),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18 마포창업복지관 601호(070-7727-4101),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 211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 B104(02-941-7257) | 경기 경기 의정부시 경의로 114 영빈빌딩 4층(031-828-8877), 경기 수원시 영통구 광교로 107 창업보육동 B2(031-259-6692),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로 205번길 26, 213호, 214호(031-707-5962) | 부산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로 365 행정관 302호(051-629-7971) | 울산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곡천동문길 20-22(052-277-1996),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진순환도로 1138(HRC빌딩8층)(052-219-8632) | 대구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수로 64, 1층(053-784-8261),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28, 1층(053-643-7994),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서대로 675, 복지관 3층(053-589-7932) | 경북 경북 칠곡군 왜관읍 공단로 1길, 2층(054-973-9605) | 인천 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주대로 506-1 서울외과 4층(032-567-5051) | 광주 광주시 동구 금남로 238 무등빌딩 10층(062-236-3262) | 경남 경남 양산시 주남로 288 영산 테크노폴리스 산학협력관 3314호(055-380-9577), 경남 진주시 동진로 33 경남과학기술대학교 8동 3층(055-751-3610) | 강원 강원 춘천시 동면 장학길 48 한림성심대학교 산학관 1층(033-240-9833) | 충북 충북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377-3 서원대학교 글로벌관 B203호(043-217-1311), 충북 청주시 상당구 교서로 8-2, 3층(070-4814-6515) | 전북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기린대로 945-6 소상공인희망센터 희망관 1층(063-717-1322), 전북 익산시 인북로 187, 1층(063-841-7480) | 전남 전남 목포시 석현로46 목포문화산업지원센터 1층(061-280-7492)
매화꽃은 가장 먼저 봄을 알려온다. 겨울에 피는 꽃이라 하여 ‘설중매’라고 부르기도 한다. 회색빛 도시, 겨울옷이 무겁게만 느껴질 때 오아시스처럼 섬진강변에 매화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긴 겨울에 숨이 막힐 듯 답답한 사람들은 도심을 벗어나 매화꽃을 찾아 장거리 여행 채비를 서두른다. 타 지역은 아직도 썰렁한 산하지만 섬진강 주변으로는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청매실 농원엔 눈이 내린 듯 흐드러지게 매화꽃이 만발하고
일기에 따라 조금 차이는 나겠지만 3월 중순쯤 섬진강가의 온 마을에는 매화꽃이 만발한다. 길거리에도, 집 뒤뜰에도, 그리고 강변 옆으로도 꽃 천지다. 허허로운 산야에 핀 흰 꽃은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야 제멋이 난다. 꽃잎 하나하나 뜯어보면 예쁘지만 꽃이 작고 나무줄기가 있어서 한 그루만 모여 있으면 제빛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화마을로 알려진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삼벅재 골짜기로도 부르는 이 마을 농가들은 산과 밭에 곡식 대신 모두 매화나무를 심었다. 봄이면 하얗게 만개한 매화꽃이 눈꽃처럼 휘날리고 하얀 꽃구름이 골짜기에 내려앉은 듯 장관을 이룬다.
꽃이 만개하면 으레 매화 축제가 열린다. 매화꽃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청매실 농원이 가장 유명하다. 수십년 묵은 매화나무 아래, 청보리가 바람을 타는 농원 중턱에 서면 굽이져 흐르는 섬진강 너머 하동 쪽 마을이 동양화처럼 내려다보인다. 매화꽃 군락을 감상하기에는 이곳만큼 좋은 곳도 없지만 해마다 몰려드는 인파 탓에 교통체증과 사람들에게 치인다. 초보 여행객들이 아니라면 이 북적거림을 피해 섬진강 하류를 기점으로 강변 드라이브 길로 나설 것이다. 그곳 또한 아름다운 여정의 풍광을 보여준다. 진월에서 신아리, 신구리, 월길리 등 낯선 이름의 마을을 지나친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꽃이 도로 옆을 화사하게 장식해 인적 드문 산간지역에 아름다운 전경을 만들어냈다.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농민들은 소를 이용한 밭갈이에 여념 없고 산등성이에도 무심하게 하얗게 봄꽃을 피워내고 있다. 잠시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 위해 열어놓은 차창 밖으로 진하면서도 달콤한 매화향이 코끝을 감싸온다.
윤동주 시인의 애련한 흔적이 남은 망덕포구엔 벚굴이 한창
이어 발길을 멈추는 곳은 섬진강 물줄기가 바닷물과 조우하는 망덕포구다. 배알도라는 자그마한 섬 앞으로 띄엄띄엄 배들이 정박해 있고 횟집이 길게 이어진다. 섬진강 끝자락에 남은 포구라는 것 빼고는 딱히 볼거리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곳엔 윤동주(1917~1945) 시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포구는 매력적이다. 그저 시인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편이 싸하다. 측은지심에 가슴이 저려 온다. 일제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 일제강점기에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사그라진 시인의 인생을 어찌 몇 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시리디시린 삶의 자그마한 흔적이 이 망덕포구에 있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보관했던 낡은 정병욱 가옥(근대문화유산 제341호, 1925년 건립)과 시비가 있다. 횟집 즐비한 포구 앞에, 인기척 없는 가옥 한 채가 썰렁하게 있다. 굳게 닫힌 유리창 너머로 윤동주 시인과 친구의 학창 시절 얼굴이 해맑게 미소 지으며 반긴다. 마루 한쪽이 열려 있고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이라는 안내 글자가 있다.
어떤 연유로 이곳에 윤동주 시인의 원고가 숨겨져 있었을까? 시인이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 3부의 원고를 만들었다. 1부는 자신이, 1부씩은 은사 이양하 교수와 절친한 친구이자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맡겼다. 정병욱이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광양의 어머니에게 원고를 맡긴다. 어머니는 일제의 수색을 피해 집 마룻바닥 밑에 원고를 숨기고 보관해왔다. 무사히 돌아온 정병욱은 1948년 유고시집 를 발간하게 된 것이다. 주옥 같은 윤동주 시인의 시가 이렇게 알려지게 된 데 큰 기여를 한 집인 게다. 광양시에서는 윤동주, 정병욱 작은 기념관, 도서관, 문학관으로 리모델링하고 소공원을 만들 계획이다. 또 윤동주 백일장, 문학상을 추진하는 등 윤동주 시인의 제2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할 생각이다.
또 이 봄, 망덕포구를 찾아볼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벚굴이다. 1~4월이 제철인 벚굴은 이곳이 아니고서는 먹을 수가 없다. 벚굴은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짜지 않고 굴의 비릿한 맛이 적다. 거기에 일반 굴에 비해 보통 10배 정도나 크다. 서너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다.
동백꽃 흐드러지게 핀 옥룡사지에서 즐기는 봄날의 오수
광양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백계산(505m) 자락의 옥룡사지다. 주차장에서부터 걸어가야 한다. 도로 옆, 길목(해발 403m)에는 대규모(약 2100평) 동백군락지(도지정 기념물 12호)가 있다. 온 산을 동백나무가 에둘러 감싸고 있다. 신라 경문왕 4년(864), 도선국사가 옥룡사를 창건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보호수를 심었다는 전설이 흐른다. 절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충하려고 꾸몄으며, 제자들의 심신수련을 위해 차밭을 일궜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 동백군락지는 ‘아름다운 숲’으로 우수상을 받았다. 찾는 이 많지 않은 그곳에 피어난 동백꽃은 따사로운 봄날과 잘도 어울린다. 동백숲길에 폭 빠져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금 오르면 옥룡사지(사적 제407호)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터는 큰 연못이었는데 9마리의 용이 살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에 도선국사가 용을 몰아냈는데 유독 백룡만이 말을 듣지 않자, 지팡이로 용의 눈을 멀게 하고 연못의 물을 끓게 하여 쫓아낸 뒤 숯으로 절터를 닦아 세웠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이 옥룡사에서 30여년 동안 홀로 앉아 말을 잊고[宴坐忘言] 지내다 입적했다. 조선 후기에 화재로 타 버려 폐사된 후 긴 세월 절터만 남아 있다. 대신 우측 언덕을 넘으면 도선국사비와 부도탑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에 비석이 유실되었으나 2003년 본래 자리에 복원되었다. 또 이곳에서 산 길로 거슬러 오르면 동양 최대의 청동약사여래불이 서 있는 운암사를 만나게 된다.
도선국사와 고로쇠 이야기
도선국사(827~898) 하면 고로쇠 수액의 전설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참선하다 몸을 일으키려던 도선국사. 무릎이 금세 펴질 리 만무하다. 도선은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는데 나무가 부러졌고, 부러진 나무에서 수액이 흘러나왔다. 그 물을 마신 도선의 다리가 펴져 ‘뼈에 이로운 물’이라 하여 ‘골리수(骨利水)’로 불렀는데, 나중에 고로쇠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해마다 경칩이면 백운산에서 고로쇠 약수제(3월 5일)와 축제를 연다. 어쨌든 옥룡사지에는 도선국사가 심었다는 동백나무, 녹차나무가 남아 옛터를 지키고 있다. 또 옥룡사지 가는 길목에서 중흥사(061-763-6655)를 찾아도 좋다. 중흥산성 3층석탑(보물 112호)과 중흥사 석조지장보살반가상(전남도 유형문화재 142호)이 있다. 근처 도선국사마을(061-762-6716, dosun.go2vil.org)도 재미가 있다. 다도, 도자기, 염색, 전통 손두부 만들기 등 계절별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전통농촌테마마을. 특히 물 맛이 좋아 원님 전용 식수로 애용되었다는 사또약수터가 있다. 이 약수를 이용해 만든 손두부를 농가에서 판다.
Travel Tip!
가는 길 서울 출발 → 호남고속도로 → 익산JC → 완주JC에서 순천 광양 방향 간 고속도로 이용 → 광양IC → 광양읍에서 매천 유적지를 보고 10여분 가면 옥룡면 소재지다. 옥룡면에서 광양읍내로 다시 나와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진월IC로 나오면 망덕포구를 만나기 쉽다. 그리고 하동 쪽으로 가면 섬진강변을 만나고 근처에 청매실 농원이 있다. 청매실 농원부터 여행을 하려면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 구례를 거쳐 들어오는 것이 편하다.
숙박정보 백운산 자연휴양림(061-763-8615, www.gwangyang.go.kr)은 울창하고 소나무 숲이 가히 장관이다. 특히 휴양림의 황톳길은 흙에 들어 있는 원적외선이 뿜어져 나와 맨발로 걸으면 혈액순환에 큰 도움이 된다. 읍내 덕계리(순천, 보성 가는 방면)는 모텔촌이다.
주변 연계 여행지 광양 시내에는 매천생가와 유적공원, 장도박물관(061-762-4853, www.jangdo.org)이 있다. 어치계곡, 동곡계곡, 금천계곡, 성불계곡 등은 빼어난 계곡미를 자랑한다.
별미집 광양읍내엔 불고기 특화거리가 있다. 매실한우(061-762-9178), 3대광양불고기(061-762-9250), 조선옥숯불갈비(061-792-8559), 금목서(061-761-3300) 등을 꼽는다. 봉강면의 지곡산장(061-761-3335, 닭숯불구이)이 아주 괜찮다. 고로쇠 수액이 나오는 철에는 미리 예약하면 음용이 가능하다. 그 외 이 계절에는 광양의 계곡 주변 민가 식당에서 고로쇠와 함께 닭숯불구이를 먹을 수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