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세 할머니는 남편 사별 후 함께 살자는 자식들의 제안에도 혼자가 편하다며 20여 년을 따로 지내셨다. 남편은 3층 주택을 남겼는데, 1층과 2층은 세를 주고 할머니는 3층에서 살았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꽃을 키우는 것이었다. 1층 화단에는 여러 가지 꽃나무들이 심어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꽃화분들이 1층 대문 앞과 3층 현관까지 이르는 계단에 비단길처럼 쭉 이어져 있었다. 할머니의 일과는 화단과 화분을 가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낡은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벌과 나비가 찾아드는 화분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이었다.
어느 날 음식이 삼켜지지 않고 자꾸 구토를 해 병원을 찾아간 그는 식도암 진단을 받았다. 나이도 있고, 암도 넓게 퍼져있어 수술과 항암치료를 포기했다. 그의 소원은 화분을 가꾸는 일상을 살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먹지 못해 살이 빠지고 기력이 없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어려웠다. 암 진단 후 근처 사는 50대 후반 큰딸이 3층 집에 들어와 함께 살았는데, 그는 종일 딸에게 짜증을 냈다.
할머닌 왜 인생 말년에 자신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죽진 않겠다고 가정형 호스피스를 신청한 그는 그의 집을 찾아간 내게 끝없이 하소연을 했다. 세상도 하늘도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큰딸의 무력감도 컸다. 삶을 비관하며 누워 신음하고 짜증만 내는 어머니 옆에 있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어떤 음식도 삼킬 수 없는 어머니를 두고 차마 밥을 넘기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 컸다.
딸은 간절하게 무엇이든 어머니에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대한민국 어디든 마지막 효도 여행이라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할머닌 딸의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그저 종일 침대에 누워 끙끙거릴 뿐이었다. 우리 가정 호스피스 팀이 그 댁을 방문한 날 딸은 우리와 대화하던 중 그동안의 속상함과 서러움에 복받쳐 왈칵 눈물을 쏟았다. 나는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온 할머니에게 소원이 있는지 물었다. 할머니는 단호하게 두 가지를 말했다. 얼음물 한 모금을 시원하게 삼켜보는 것과 1층부터 3층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식 같은 화분들을 다시 가꾸는 것이었다.
자녀들은 멋진 경관이 펼쳐진 곳으로 추억여행을 다녀오자고 했지만 그는 자신이 가꾼 화분들보다 더 어여쁜 것들은 세상에 없다고 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분가한 자녀들이 가정을 이뤄 각자의 바쁜 삶을 사는 동안 할머니를 위로하고 삶의 의미가 되어 준 것은 화단과 화분들이었다. 1층부터 3층까지 이어진 화분들은 그의 시간들이었고 바로 자신이었다. 그래서 모든 제안과 도움을 거절당해 서운할 대로 서운한 딸에게 좀 힘들겠지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저 화분들과 꽃들이 바로 어머니의 분신이자 정체성이니 어머니를 대신해서 화분들을 열심히 가꾸면 어떻겠냐고. 그리고 1, 2층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매일 화분들을 3층으로 옮겨 어머니가 현관에 의자를 두고 감상하도록 해드리자고 말이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영양수액을 달고 의자에 앉아 현관에서 매일 자신이 하나하나 가꿔왔던 화분들을 다시 바라볼 수 가 있었다. 그러다가 배에 복수가 차고 기력이 더 떨어지던 어느 날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을 했다. 병원에서도 병동 옥상에 있는 정원을 무척 좋아하셨다. 매일 휠체어를 타고 정원으로 올라가 벤치에 누워 꽃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간병을 위해 함께 병원에 들어온 딸에게 사방이 꽃과 나무로 둘러싸인 이곳이 천국 같다고 했다. 그 말에 딸은 다시 왈칵 눈물을 쏟았다.
두 주가 흘러 할머니는 이제 정원마저 갈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해지고 종일 깨지 않고 잠만 주무셨다. 나는 지난 토요일 아침 회진을 돌며 작은 목소리로 따님에게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할머니를 보며 손을 잡아 드렸는데, 할머니께서는 언제부터 깨어 계셨던 걸까. 눈을 감은 채로 내 손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가시더니 내 손에 입을 맞추셨다. 한동안 그렇게 내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으셨다. 그 광경을 본 딸이 깜짝 놀라 “엄마!”하며 탄성을 내질렀고, 주변에 다른 환자 보호자들도 할머니의 침대 곁으로 몰려와 내 손에 입 맞추는 할머니를 보며 함께 전율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 오늘 새벽에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유족들은 우리 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정하였기에 나는 오후에 호스피스 팀원들과 함께 조문을 갈 수 있었다. 따님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다른 가족들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 엄마한테 뽀뽀 받은 선생님이셔.”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지 약 8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상속 고민은 속 시원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재산을 물려줄 사람의 거주지에 따라 법이 다르고, 밟아야 할 절차가 복잡해서다. 아직 법률에서 전 세계 통합이 이루어지기는 요원한 듯하다. 그러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 법률 가이드에서는 사례를 통해 해외 상속의 대략적인 흐름을 살펴보자.
case
“미국에 사는 54세의 Kate Song(케이트 송)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미국 유학 시절 어머니를 만나 결혼해 저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은 이a혼하셨고,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셨어요. 새 사람과 재혼해 아들도 태어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더군요. 그 아들은 저의 이복동생인 셈이죠. 행복하게 지내시는 듯했지만 최근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을 찾아가 애도의 뜻을 표하고 계모, 이복동생과 상속에 관한 대화를 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꽤 많은 부동산 자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고 있는 데다 평소 관계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합리적인 분배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들은 받을 재산이 거의 없다며 아버지의 재산 내역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해당 사례는 피상속인의 이혼 전 자녀(전혼 자녀) 케이트 송 씨와 이혼 후 재혼 배우자, 그 자녀 간 상속 분쟁이 일어난 경우다. 통상적으로 이들은 모두 상속인으로 인정되지만, 전혼 자녀는 가족관계등록부에 등록돼 있지 않으면 재산을 받을 수 없다. 더불어 전혼 자녀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과정이 더욱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선 국제적인 문제에서는 어느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이 경우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법령에 따라 상속 절차를 진행하게 된다. 국제사법상 상속은 고인의 국적에 따라 관할하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상속 절차를 진행하는 방법
계모와 이복동생이 아버지의 자세한 재산 내역을 알려주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겠지만 다행히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상속인이라면 고인의 자산과 채무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부24에서 제공하는 안심상속 원스톱 서비스를 통해 기관 방문 없이 국세(체납, 고지세액), 금융거래(은행 잔고, 대출, 보험, 주식 등), 국민연금(가입 여부), 지방세(체납, 고지세액), 자동차(소유 정보), 토지(소유 내역) 등 사망자의 재산 상황을 볼 수 있다. 서류를 구비하면 대리 신청도 가능하다. 사망일이 속한 달의 말일부터 6개월 이내에 신청해야 한다. 처리 기한은 7~20일가량 소요된다. 금융감독원 역시 상속인이 사망자의 금융 재산 및 채무를 확인할 때 각 금융회사를 일일이 방문해야 하는 불편을 덜어주고자 상속인 금융거래정보 조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알고 보니 케이트 송 씨의 아버지는 서울시 강남구의 아파트 세 채와 예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계모, 이복동생과 협의를 마친 끝에 부동산을 한 채씩 나눠 갖기로 했다. 예금은 상속세 납부에 보태기로 한다. 그러나 송 씨는 한국에 자주 방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성인이 된 후 한국 방문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터라 아는 친척이나 친구도 없다.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할까?
고인의 재산을 내 명의로 가져오려면, 기본적으로 상속인 전원의 ‘인감증명서’가 첨부된 합의서가 필요하다. 하지만 외국인이나 해외 거주자는 인감이 등록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 다소 복잡하지만 방법은 있다.
먼저 예금 수령 또는 상속등기에 동의한다는 합의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본인 확인을 위한 서명확인서와 신원 확인을 위한 거주확인서를 작성하고 여권 사본을 첨부한다. 대신 인감증명서를 대체할 공식 절차가 필요하다. ‘아포스티유’ 또는 ‘영사인증’을 받아야 한다. 본인이 거주하는 국가가 미국, 일본 등 아포스티유 협약국이면 아포스티유를, 그렇지 않으면 영사인증(캐나다, 중국 등)을 받으면 된다.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영사관을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영문으로 작성된 서류는 모두 한글 번역문을 제출해야 하지만, 한국에 직접 가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러한 서류는 반드시 원본이어야 하니 ‘Fedex’ 등 국제우편을 통해 원본을 한국으로 보내야 한다.
준비해야 할 서류 적지 않아
케이트 송 씨가 어릴 적 아버지가 한국에 출생신고를 했던 모양이다. 가족관계증명서의 이름은 송지연이었다. 미국 여권 속 Kate Song이라는 이름과 다른데, 가족관계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한국 내 등록된 이름이 따로 있다면 동일인확인서(Certification of Identity)라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여권 이름과 한국 이름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동일인확인서도 함께 준비해 아포스티유 또는 영사인증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아파트를 내 명의로 상속등기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를 대신할 ‘부동산등기용 등록번호’ 부여까지 신청하면 상속등기를 포함한 모든 상속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외국인 토지취득신고까지 마치고, 상속세를 납부하면 마무리된다. 드디어 모든 서류 작업을 마치고, Kate Song 명의로 압구정 아파트 한 채의 등기를 끝냈다.
그러나 케이트 송 씨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매각 대금을 미국으로 가져오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임대료를 받기도 번거롭고, 임차인 관리 또한 쉽지 않아서다. 한국에 그대로 두자니 아깝고, 해외 거주자 신분으로는 투자도 녹록지 않다. 게다가 세금 신고와 납부의 번거로움까지. 이럴 때는 중개업체를 통해 부동산을 처분한다. 매수인과 계약을 마친 후에는 매도인 인감증명서가 필요하다. 앞서 설명한 아포스티유 또는 영사인증을 통해 처분위임장과 관련 서류를 준비하면 된다.
한국 비거주자인 케이트 송 씨는 상속으로 취득한 부동산의 매각 대금을 외국으로 송금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를 상속받았다는 점을 입증할 관련 서류를 외국환은행에 제출해야 한다.(외국환거래규정 제9-43조) 거주자란 상속 개시일 현재 국내에 주소를 두거나 183일 이상 거소를 둔 개인을 말하며, 비거주자는 거주자가 아닌 자를 말한다. 주소는 거주 기간, 직업, 국내에서 생계를 같이하는 가족, 국내 소재 자산의 유무 등 생활 관계의 객관적 사실을 기초로 판단한다. 상속세, 양도소득세를 모두 완납했다는 세금완납증명서 역시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외국인이 국내 재산을 상속받기 위한 절차는 결코 쉽지 않다. (여담이지만 쓰면서도 몇 번이나 주제를 바꾸어야 하나 고민이 컸다. 이를 모두 읽었다면 자녀들에게 문해력을 자랑할 법하다.) 실제로 진행할 때는 서류에 문제가 있을 경우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할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니, ‘가능하다’는 점만 알고 반드시 경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것을 권한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며칠 전 글 수업 시간에 우연히 나온 40년 전 내 친구 이야기, 그 사연을 풀어보려 한다. 나는 2018년 경영하던 사업체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후, 회사에 묶여 있을 때 하지 못했던 일을 해보고 싶어 3년 전부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일대일 나눔이라 나와 지도 선생 둘 다 내밀한 속내를 드러낼 수 있어서 글과 함께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유용한 시간이 되고 있다.
글 선생의 지론은 글은 발가벗고 써야 한다는 것이고, 혼자 벗기 민망할 거라며 본인도 가차없이 벗어 보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글을 쓰기 위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날, 부모 등 윗대가 아닌 나와 동년배, 구체적으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한 일이 있냐고 글 선생이 물었을 때 나는 그 친구를 떠올렸다. 그 친구의 서글프고 황망한 죽음에 대해, 아니 죽음보다 더 아리고 허망한 두 번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40년 전의 친구를 떠올리는 것은 순전히 나의 상념 속 일이지만, 여리고 섬세한 성정을 가졌던 친구의 내면만큼은 사실로 기억된다. 철인(哲人)처럼 고뇌했고 시인처럼 노래했던 친구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는지는 모르지만 누구보다 진실했으며, 거기에 더해 유약한 운명의 냄새를 풍겼다. 결과적인 소리지만 성격 속에 이미 예고된 불행을 배태하고 있었다고 할지…. 그렇게 그 친구를 추억하며 기억의 묵은 빗장을 열자 형체 없이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40년 전의 상념이 뒤엉켜 떠올랐다.
40년 전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
그 친구와 나는 서울대 철학과 동창. 지금도 그렇지만 75세인 내가, 그리고 그 친구가, 우리 과 동기들 모두가 철학과를 택했을 당시는 세상살이에 어눌하고 현실 감각이 둔하고 무엇보다 부모를 실망시키기로 작정한 불효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철학과를 나와 무슨 밥벌이를 어떻게 할 것이며, 부모 봉양은 고사하고 처자식이나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을지가 세상 사람들의 우려이자 반대의 이유였던 때였다.
그러한 우려 속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전공을 살려 살지 못했다. 졸업 후 변리사 자격시험 공부에 바로 돌입했던 것이다. 그렇게 ‘철학과 출신 변리사’란 꼬리표를 달고 우여곡절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전공과는 무관한 영역에서 삶의 기반을 닦았고, 순탄하게 장래가 풀려 지금까지 무난한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변리사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그 친구는 전공을 살려 서양 철학의 본산지인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는 국제 통화도 여의치 않았고 기반을 닦느라 서로 정신없이 달리던 때라, 가족이 아닌 한 외국으로 간 친구와는 자연히 연락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처럼 그 길로 소식이 안 왔으면 차라리 잘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서로 잊고 지낸다 한들 그 또한 감사한 일이었겠지만….
그로부터 약 10년 후 나는 친구의 관을 메고 친구의 고향인 충청도 어느 산자락을 오르게 된다. 친구를 지상에서 영원히 작별하기 위해. 학창 시절 모습만을 기억할 뿐인 내겐 30대 중반에 주검으로 돌아온 친구와의 만남은 당혹스러웠다. 또한 가혹했다. 땅에 묻은 후엔 시신을 담고 있던 관을 제거한 후 깨서(파관) 불에 태우든가 없애버리던 그 지역 풍습으로 인해 친구의 관은 얇고도 위태로웠다. 관을 걸머쥔 손에 시신의 차가움이 닿는 듯했고, 관을 뚫고 친구의 손이 불쑥 나와 그간 격조했다며 내게 악수라도 청할 것처럼 차가움 더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졸업과 동시에 바로 외국으로 갔기 때문에 동기생 중 ‘내가 아무개와 각별한 사이였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운구 대열에 낄 줄이야. 살아 있을 때의 인연보다 죽은 후의 인연이 더 깊게 다가왔다.
친구는 밤에 자다 죽었다고 했다. 옆에는 한 여인이 함께 자고 있었고. 친구의 죽음이 그 여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30대 중반의 신체 건강하고 정신 멀쩡한 남자라면 아내든 애인이든 이성과 동침한 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을 테고. 다만 35년 남짓 살다 간 친구의 짧은 생에서 두 여인과 인연이 있었고, 친구는 두 번째 여인 곁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의 전부다.
아이 딸린 이혼녀와 결혼 그리고 이혼
친구는 독일 유학 시절 같은 한국 유학생과 결혼했다. 유학생끼리의 만남이란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이국에서는 가장 무난한 인연이었으리라. 아내가 된 여자의 전공은 독문학이었다고 들었다. 철학도와 독문학도의 결합이란 이지적 커플 탄생에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도 같고. 둘은 대화가 잘 통했을 것이며, 샤프하면서도 여성에 버금갈 감수성과 섬세함을 갖춘 내 친구는 다정다감한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나 선뜻 내릴 수 없는 선택을 내릴 수 있었을 테고. 상대 여성은 아이 딸린 이혼녀였으니까. 몇 살인지는 들은 바 없지만 이혼 후 딸 하나를 데리고 독일로 유학 갈 정도면 그 시대로선 당찬 부류에 속한 여성이었을 테지. 독립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거리낌 없이 앞날을 열어가는 페미니스트. 문학 전공자이긴 해도 그 여자는 외향적이며 진취적 성향이지 않았을까? 한 번의 실수는 용납해도 두 번은 허용하지 않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는 여성에게 두 번의 실수는 실패와 다름없을 테니까. 원래 성격은 그렇지 않았다 해도 이혼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갔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내 친구는? 내 친구는 스마트한 엘리트지만 내향적 성격을 가진 사색가. 본인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를 묵묵히 수용하고 들어주는 타입이다. 친구도 그 사이 변했을 수 있지만, 친구의 아내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도 친구에 대해서는 절반쯤 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둘이 상반된 성격으로(순전히 나의 추측이라 할지라도) 마치 보색관계처럼 튀면서도 개성 있는 조화를 이뤄 잘살았다면야 성격 다른 남녀가 오히려 잘산다는 경험치를 보여줬을 테지만, 둘은 7년 정도를 함께 살다 헤어지고 말았다. 친구의 아내로서는 두 번째 이혼이었고, 내 친구는 첫 이혼이었다. 그렇게 각자 이혼 경력만 쌓은 짧은 인연 속에서 이혼 사유는 알 수 없었다.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이혼 후 친구의 아내보다 친구가 더 좌절하고 헤맸을 것 같다. 친구로서는 이혼 경험이 처음이니까. 갈라선 이후 각자는 공부를 마쳤고, 친구의 전처는 학위를 딴 후 한국의 어느 지방 대학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했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다. 세 번째 결혼을 했는지는 들은 바 없고.
아이 딸린 여인 곁에서 영원히 잠들다
내 친구는 어찌 되었을까. 친구의 옆에서 함께 잔 여자는 누구였을까. 이혼녀였다던가, 사별녀였다던가, 그 여자 또한 아이가 딸려 있었다. 함께 공부하거나 일로 만난 사이는 아닌 것 같고, 그야말로 오가다 만난 사이라는 것을 장례 때 들었다. 둘은 동거를 했던 것 같다. 결혼으로 상처를 받았으니 내 친구 쪽에서 선뜻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혼인신고를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 이목이나 형식이 중요했다면 또다시 그런 만남은 갖지 않았을 테니까.
35년이란 짧은 생애에 두 여자가 있었지만 세상 떠나는 날에 두 여자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나의 추측, 나의 상상력으로는 그 친구의 허망한 죽음에 두 여자의 관여와 영향이 가장 컸을 것 같음에도. 섬세한 내면과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친구인 만큼 이혼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며, 그 여파로 뒤이어 만난 인연이 안정적이고 안온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두 여자 모두 지난 결혼이나 과거의 인연으로 자녀가 있었고, 결혼 상대자의 그런 평범하지 않은 상황을 받아들인 친구의 모질지 못한 성정이(모질지 못하다는 말을 이런 상황에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혼자 져야 할 삶의 고뇌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 기준에서 다소 빗겨난 관계가 지속적인 부담이나 족쇄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럴수록 그 친구 쪽으로 하중이 쏠렸을 것이다. 불균형하게 출발한 결혼과 관계가 자신을 먼저 챙기거나 이기적이지 못한 내 친구의 삶에서 에너지를 빼앗고 삶의 의욕을 갉아먹었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친구의 죽음을 안타까이 돌아보게 하지만, 이 모든 것 또한 부질없는 상념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학창 시절 이후 그 친구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어쩌다 내가 운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친구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거나 다른 누구보다 친구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굴 이유도 없다.
75세가 된 지금, 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에 부모도 형제도선배도 아닌 동년배로서 가장 먼저 떠나보낸 이가 그 친구라는 사실이 그저 각별하게 다가올 뿐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남편의 장례식에 그 여자가 왔다. 경황이 없던 터라 옆에 있던 친구가 “혹시 저 여자 아니냐?”며 귀엣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상주에게 인사를 건네기는 고사하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안개처럼 스며들어 소리 없이 조문을 하고는 그림자처럼 홀연히 자리를 떴으니. 나중에 부의금을 챙길 때도 그 여자 것은 없었다. 철저히 존재를 감춘다는 것이 오히려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할지. 다녀간 걸 알고 나니 부의금을 내지 않은 이유가 짐작되면서, 꽁꽁 감춘다고 감춘 것이 티를 낸 꼴이라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 장례식에 그 여자의 등장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좋다 나쁘다 할 게 뭔가. 이미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두 여자의 심리적 줄다리기도 남편의 사망으로 맥없이 끝이 나버렸으니. 한쪽 줄은 남편과의 내연 관계인 그 여자가, 다른 쪽 줄은 아내인 내가 잡고 있던 줄다리기.
간호사와 환자로 만나 결혼
위암 판정을 받은 남편은 꼬박 1년을 투병한 후 세상을 떠났다. 47세였다. 평소 소화가 잘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한 증상이 잦아 소화제로 버티다 못해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암이었다. 남편은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 치료는 하되 아울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도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니까요” 하는 말로 대꾸했을 뿐이었다. 문학청년, 아니 문학장년다운 말이었다고 할지.
감정적 동요를 거의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이이가 이 정도로 담대한 사람이었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아니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실감을 못 하는 건가?’ 하고 놀란 건 되레 나였다. 아니면 본인이 진단받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내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의연함을 가장하는 건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남편의 암 진단 후에도 나는 계속 일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겠나. 현실은 더 힘들어졌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야속했던 건 남편이 아니라 오히려 나였던 것 같다. 결혼 전부터 해오던 일을 결혼 후 아이 출산하고 산후조리 때 잠깐 쉬었을 뿐 20년 넘게 해오면서, 막말로 죽을 날 받아놓은 남편이건만 그때조차 옆에 있어 주질 못했으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금, 만약 옆에 있어 주느라 생활비에 치료비도 감당하지 못했다면 그나마 1년 투병도 채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나는 간호사다. 30대 초반에 일을 시작해 경력 따라 연륜 따라 52세인 지금은 중간급 병원의 수간호사로 근무 중이다. 남편은 나의 환자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로맨틱한 설정의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간호사와 환자 관계에서 부부가 된 경우였다.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은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무난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 무난함을 지탱해준 것은 두말할 여지 없이 내가 가지고 오는 일정한 수입이었고. 결혼 후 지금까지 돈을 벌어본 적 없는 남편이 묵묵히 가사와 살림을 꾸려온 것도 우리 결혼의 무난함에 일조했음을 물론 인정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녀의 전통적 역할을 바꾼, 바깥일하는 아내 집안일하는 남편 구도의 가정이었던 것이다.
다만 남편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또 하나의 아내처럼 의지하며 지냈고, 나는 그런 두 사람 관계를 묵인한 채 결국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정리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렇다. 무난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처음부터 결코 무난할 수 없었던 결혼 생활이었음을 인정한다. 애초 우리의 결혼은 세 사람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문학폐인 단짝이 내연녀로
그해 추석 명절 연휴 마지막날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밤늦게 병원에 온 30대 후반의 남자. 그날 나는 야간 근무 중이었다. 미혼인 데다 뒤늦게 간호학을 전공한 나이 많은 새내기 간호사였던 나는 명절마다 당직이나 야간 근무에 배정됐다. 가정을 가진 선배 간호사들을 대신해 당연한 양보라고 생각했기에 딱히 불만도 없었다. 명절이라 봤자 갈 곳도 없었기에 더욱.
오빠 집에 갈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안 계신 친정은 이미 친정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연이어 돌아가신 지 2년, 3년 정도밖에 안 되었던 때라 명절에 간다고 해도 눈치나 푸대접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오빠는 몰라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을 올케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교회에 다녔던 우리 집은 차례도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차례 핑계를 대고 찾아갈 명분도 없었다. 세상 아래 피붙이라곤 오빠와 나 남매뿐이었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도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으니 부모님이 떠나신 마당에 새삼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명절 근무는 갈 곳 없는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연휴에는 환자가 많을 때도 있고 아주 없을 때도 있다. 그야말로 환자 마음. 그해 추석 명절은 환자가 없는 편에 속했다. 밤 11시경 응급처치를 받은 그 남자, 미래의 내 남편은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다음 날 정식으로 치료를 받고 며칠 입원하는 정도로 회복되었는데, 그 며칠 사이에 그와 나는 상당히 가까워져서 1년 만에 결혼을 했다. 내 나이 40을 넘긴 때였다.
내가 남편 내연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결혼 후 5년 만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 연인 중 한쪽이 결혼을 하자 둘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결혼하지 않은 여자 쪽이 내연녀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 남편은 애인이 있는 남자, 그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 결혼한 남자였던 것이다. 둘은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남편의 무능력 탓이었다. 돈 벌 재주가 없었던 사람, 어쩌면 돈 벌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니 두 사람은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쪽에서도 돈 벌 능력이 없었을 테고.
두 사람은 작가 지망생이었다. 둘 다 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니던 중에 어느 문학 단체에서 만났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갔지만 두 사람 모두 글은 써지지 않았고, 그럴수록 서로 간의 연민과 공감대가 깊어갔을 것이다. 고시폐인, 공시폐인 등 폐인증후군 중에서 이른바 ‘문학폐인’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경제력 있는 내가 남편 눈에 띄었고 남편은 운 좋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결혼과 동시에 그 여자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됐을 뿐. 나는 병원 일로 정신없다 보니 남편의 정서적 빈자리는 풋풋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그 여자가 메워주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관계 정리
만약 남편이 자기 일이 있었다면,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이 있었다면 결혼과 함께 그 여자와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그러지 못했다. 마흔 살이 넘으면서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고, 그럴수록 그 여자와의 유대는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 여자로선 어차피 결혼 상대가 없을 바에야 남편만큼 편한 사람이 또 있으랴. 내가 번 돈이 그 여자한테로 쏠쏠이 넘어갔을 걸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 때가 있지만 그 또한 다 지나간 일이다.
둘 사이를 알게 된 것은 소설을 쓴답시고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인터넷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내가 퇴근하기 직전까지 둘이 속닥거리다가 미처 컴퓨터를 끄지 못한 상태에서 들켜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병원에 있는 낮 시간 동안 두 사람은 SNS나 전화로 늘 교류해왔던 것인데, 핑곗거리로도 얼마나 좋은가. 글에 관한 대화 중이었다고. 자기들 스스로도 단지 글 이야기를 하는 거라며 관계를 합리화했을 테고. 돌이켜보면 남편이 그 오랜 세월 묵묵히 살림을 맡아 꾸려준 것도 내가 출근한 사이에 가지는 그 여자와의 밀회 덕이었으리라.
내가 알게 된 이상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정리되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쪽에서 그 여자를 만나 헤어져달라고 말한 것도 정리에 대한 경고의 몸짓은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이혼하지 않는 이상 어쩔 것인가. 남편을 믿을 수밖에. 그러나 내 쪽에서 다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다. 그랬다. 나는 묵인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3년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안 후에도 두 사람이 계속 만났는지, 아니면 관계를 정리했는지 나는 모른다.
남편이 떠난 지금 남편과의 추억을 그 여자와 나눠 가진다고 해서 억울할 것도 없다. 다만 추억의 부피로나 깊이로나 나보다 그 여자의 것이 훨씬 두껍고 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를 쓰라리게 한다. 그의 아내는 내가 아니라 그 여자이고 내 인생은 두 사람을 먹여 살리느라 흘러간 게 아닐까 하는 자학적 망상에 빠져들 때도 있지만, 어쨌든 세 사람의 인연은 이걸로 끝이 나게 됐으니….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의료진 입장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를 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예기치 못한 합병증이 발생하기도 하고,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하다. 게다가 지칠 대로 지친 가족까지 상대하는 일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비유될 정도다. 그런데 병원이 아닌 말기 환자의 집을 직접 찾아가 치료하는 의사들이 있다. 바로 가정형 호스피스 제도에 참여하는 ‘마지막 주치의’다. 인천성모병원에서 만난 서민석 교수도 그중 한 명이다.
“이 환자의 마지막 주치의는 나다. 늘 이런 마음가짐으로 다녔죠. 다른 의료진이 더 이상 무언가를 해줄 수 없다고 판단한 상태에서, 나는 이 환자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요. 그렇게 한집 한집 찾아다녔어요.”
서 교수는 2016년 가정형 호스피스 제도의 시범사업이 진행될 때 참여한 의사 중 한 명이다. 5년간의 시범사업 내내 인천 지역 환자를 찾아다녔고, 매년 100곳 이상의 가정을 방문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서 교수의 활약을 높이 평가해, 지난해 장관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병원이 참여 기피
가정형 호스피스는 초고령사회로 초고속 진입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제도다. 임종이 가까워진 암 환자나 만성호흡부전, 만성간경화, 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를 가정에서 돌볼 수 있도록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 자원봉사자 등이 각 가정을 방문한다. 집에서 치료하거나 임종하기를 바라는 고령 환자들의 선호도가 높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필요로 하지만 운영하기는 가장 어려운 제도로 꼽힌다. 바로 의사 부족 때문이다.
가정형 호스피스에 참여하는 의사들은 하루에 네다섯 가정을 방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무리 동선을 잘 계산해도 물리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 포털사이트에서 의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가정의학과 평균 환자 수는 주당 312명. 주 6일로 계산해도 하루에 52명을 진료하는 셈이다. 모시기 힘든 몸값 높은 의사를 데려다가 일반적인 진료의 10% 환자만 치료하는 제도를 병원 측이 좋아할 리가 없다. 때문에 전국에서 이 제도에 참여하는 의료기관은 37개소뿐이다. 대부분 종교병원이나 공공병원이고, ‘알 만한’ 유명 대학병원들은 쏙 빠져 있다.
“처음 시범사업이 시작됐을 때 모든 언론이 주목했어요. 주치의가 직접 가정을 방문하는 풍경이 이색적이었을 테고, 정부도 제도 홍보에 집중했으니까요. 그러다 환자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병원 수 때문에 항의가 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난감해했죠. 의사를 확보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결국 방문한다는 것은 외래 진료나 병동 환자의 진료 시간을 빼야 하는데, 호스피스 전담 인력이 충분한 의료기관이 아니라면 어려운 부분이 있죠. 방문을 통해 발생하는 의료수가(진료비)도 낮게 책정되어 있어 병원의 참여를 유도하기 어려워요. 수가를 높이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고, 결국 봉사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죠.”
암 환자를 기준으로 본인부담금은 대략 의사 방문 시 6300원, 간호사는 4200원, 사회복지사는 2500원이다.
병원 밖을 나서 환자의 집을 찾아다니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더운 여름이나 한겨울엔 한두 곳만 돌아도 녹초가 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서 교수가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뻐하는 환자와 가족들의 모습이었다고.
“실제로 환자 가족을 대상으로 만족도 조사를 하면 가정형 호스피스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아요. 의사가 직접 찾아와 병원에서만 가능했던 치료를 해주니 좋아할 수밖에요. 특히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또 의료적인 처치 이외에도 사회복지사님이 장기요양서비스와의 연계라든가 장례식장 등 임종 전에 준비해야 하는 다양한 부분을 안내해드리기도 하고, 신부님이 같이 가셔서 미사를 드리기도 하고, 음악·마술요법 선생님이 함께 가기도 하니 만족도가 매우 높죠.”
남의 집도 내 집처럼 편안해져
가정형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는 환자들이 임종하는 데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적으로 한 달. 죽음과 가까운 환자만 상대하는 일은 의료진 입장에서도 감정적으로 지치는 일이다. 실제로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들은 병원 측에서 제공하는 심리 관리 프로그램에 주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정신적 소모가 크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어땠을까?
“의료진 입장에선 ‘소진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죠. 다행히 저는 성격적으로 우울감이 심해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진 않았어요. ‘마지막 주치의’로서 임종하는 과정까지 최선을 다해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임종 이별이라는 것이 슬픈 과정이지만,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도왔다고 생각하면 막 지치지는 않아요.”
서 교수의 이런 성품은 가정의학과를 전문과목으로 선택한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전문적으로 하나의 질환만 파고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결국 의사가 대하는 것은 질병이 아닌 환자이니, 환자의 여러 문제를 두루 배워서 이야기 나누며 치료하는 것이 내게 맞을 것 같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처럼, 간병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당연히 살림에는 소홀해지고, 집 안은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 의료진의 방문, 그것도 대학병원 교수라는 의사가 방문한다면 환자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당연히 긴장을 하세요. 저는 그냥 환자를 보러 간 것이기 때문에 집 안의 환경이 어떻든, 지저분해도 상관없는데 환자나 보호자분들이 너무 조심스러워하세요. 청소를 해야 하나, 대접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세요. 하지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편히 대하시면 돼요. 저도 그냥 방바닥에 털썩 앉아 일부러 더 제 집처럼 행동해요. 처음에는 쭈뼛대기도 했는데, 제가 편히 행동해야 가족들의 마음도 안정되더라고요.”
아직은 병원 임종 많아
사회가 고도화되고 가정의 형태가 달라지면서, 가족을 돌보고 임종을 맞이하는 과정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가정형 호스피스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서 교수는 임종 때까지 집에서 머물 수 있는 기간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단다.
“대가족이 많았던 과거에는 가정에서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자원이 풍부했죠. 충분히 집에서 간병할 수 있었고, 가정에서 임종하면 장례까지 치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녀들이 경제활동에 매달려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나이 많은 환자의 배우자가 돌보는 경우가 많고, 그마저도 어려우면 병원으로 오시죠. 집에서 임종까지 바라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막상 그날이 가까워지면 가족이 돌볼 수 없는 어려움이나 다른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병원행을 선택하게 되죠. 집에서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텨보다가 입원을 하는 겁니다. 애초에 가정형 호스피스는 가정에서 임종까지 맞이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사업을 막상 진행해보니 집에 계시고 싶은 만큼 계실 수 있게 돕고 이후 임종은 병원에서 맞이하는 형태로라도 가정형 호스피스로서 의미는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국내 베이비붐 세대는 기준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600만 명에서 8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어느 쪽이더라도 대단한 숫자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요양 서비스가 필요할 15~20년 후에 대해 우려 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요양시설 등 기반은 한정되어 있는데,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정부가 가정이나 마을에서 치매 환자를 돌보는 지역사회 통합 돌봄이나 일부 질환에 대해 가정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일차의료 방문진료 사업 등을 추진하는 것도 이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가정형 호스피스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 그 미래를 서 교수는 “의원급이 활발히 참여하는 형태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각 병원마다 코로나19 치료 병상 확보를 위해 가장 먼저 줄인 것이 있어요. 바로 호스피스 병동이에요. 병동이 사라지면서 당연히 이용하는 환자 수도 통계상 감소했는데, 줄지 않은 분야가 있었어요. 바로 가정형 호스피스 이용자죠. 게다가 앞으로는 노인 인구가 더욱 증가하니까 이 서비스를 원하는 환자들도 늘어날 겁니다. 네 가지로 제한되어 있는 대상 질환도 만성질환이나 치매 등으로 확대가 예상되고요. 이런 질환은 임종까지 기간이 긴 만큼 가정형 호스피스를 받는 사람도 더 많아질 겁니다. 물론 지금 담당기관에서 이 많은 수요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고, 해외 사례처럼 지역사회 의료기관과 연계해서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차의료 방문진료 사업에 참여하시는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어봐도 결국 임종까지 돌봐주는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하시고요. 대만이 이와 비슷한 모델입니다. 호스피스 이용률이 58.7%에 달해요.”
우리나라 호스피스 대상자 중 서비스 이용률은 20% 정도다.
서 교수는 현실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그래도 가정형 호스피스 제도는 존재 의의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초기에 만난 환자분인데, 유방암이 뇌에 전이돼 뇌압 조절이 안 되어 정기적으로 뇌척수액을 빼내야 했어요. 뇌압이 올라가면 의식이 떨어지고 호흡도 억제되니까요. 병원에선 퇴원을 말리는데 환자는 집에서 지내길 너무나 원했어요. 다행히 저희에게 의뢰가 와서 의료진이 방문해 도와드렸습니다. 하필 병원에서 가장 먼 송도 지역이어서 하루를 그 환자만을 위해 써야 하는 상황이었죠. 뇌압 조절만 해드리면 다른 증상이나 통증 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어서, 군대 간 아들이 제대하는 것까지 보고 집에서 돌아가실 수 있었어요. 한 사람으로서 존엄을 지키면서 평소 지내던 곳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고 가족이 지켜보는 상태에서 임종을 맞이하셨죠. 가정형 호스피스 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누군가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권리’라고 하며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양한 방식의 조력 존엄사를 허용하는 국가가 많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캐나다, 벨기에,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안락사나 조력 존엄사를 허용하는 국가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포르투갈 의회에서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의지로 목숨을 끊는 조력 존엄사와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지난 2002년 엄격한 조건을 만족했을 때 의사가 삶을 끝낼 수 있는 약물을 투여하거나 환자에게 제공함으로써 생명을 끝낼 수 있도록 해 안락사와 의사 조력 존엄사를 합법화한 최초의 국가다. 네덜란드에서는 매년 평균 약 6000명이 안락사로 삶을 마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이 5년 새 1.5배 정도 늘었다.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150만 명을 넘어갈 것으로 예상한다. 노화를 겪으며 다양한 질병에 노출되는 노인에게 연명 치료, 안락사 등은 더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은, 살겠습니까?
“태어날 때는 선택할 수 없었지만, 죽을 때는 원할 때 죽을 수 있다”는 광고가 TV에서 흘러나온다. 광고 속 노인은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어 만족한다’며 웃는다. 담당 공무원이 공원에 앉아있는 노인들에게 ‘죽음’을 권유한다. 국가에서는 안락사를 선택한 노인에게 10만 엔을 주고 장례를 치러준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가가 선택한 정책 제도 ‘플랜75’다. 여행사에서는 위로금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여행을 기획한 온천 여행 상품이 인기를 끌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들어주는 콜센터도 생겼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해결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다. 위 내용은 하야카와 치에(早川千絵) 감독 데뷔작 ‘플랜75’의 줄거리다.
이 일본 영화 속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3년 후인 2025년을 떠올리게 된다. 일본에서 다가올 2025년은 ‘문제’라고 불리고 있다. 2025년, 약 800만 명에 이르는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의 절반 이상이 75세가 된다. 일본 국민의 20%가 ‘후기 고령자’(75세 이상)가 된다는 뜻이다. 2025년부터 의료비와 사회보장비용 부담이 커질 거라는 우려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일본에서는 이를 ‘2025년 문제’라고 부른다.
감독은 이 영화로 2022년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카메라 도르’라는 특별 언급상을 수상했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75세 이상 노인을 ‘후기 고령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이 영화를 기획했다. “‘후기’라는 단어는 곧 너의 인생이 끝난다는 식”이라며 “나라가 나이로 인간을 구분하는 것에도 위화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는 주인공을 통해 ‘사람이 사는 것을 긍정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제작 의도를 전했다. 영화는 질문을 던지며 끝난다. “당신은, 살겠습니까?”라고.
존엄한 죽음 준비 ‘광의의 웰다잉’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롯해 많은 국가가 안락사나 조력 존엄사를 금지하고 있지만, 영화 ‘플랜75’는 우리에게 기시감을 준다. 안락사는 의사가 환자에게 직접 약물 투입을 하는 것(적극적 안락사), 연명 치료 중단을 허용하는 것(소극적 안락사), 약물 처방으로 환자가 스스로 약물 주입을 하도록 하는 것(조력 존엄사)으로 나뉜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걸까?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윤영호 교수팀이 2021년 진행한 ‘안락사 혹은 조력 존엄사에 대한 태도’ 설문 조사 결과 응답자의 76.3%가 입법화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지난 2016년 진행했던 같은 설문 조사 응답률과 비교하면 6년 새 찬성 비율이 1.5배 정도 증가했다. 찬성 이유로는 △남은 삶의 무의미(30.8%) △좋은(존엄한) 죽음에 대한 권리(26.0%) △고통의 경감(20.6%) △가족 고통과 부담(14.8%) 등이 꼽혔다. 반대 이유로는 △생명존중(44.4%) △자기결정권 침해(15.6%) 등이 있었다.
안락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이를 선택하고 싶다는 응답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제도의 도입이 아니라 ‘웰다잉’(Well-Dying)의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연명 의료 등을 결정하는 ‘협의의 웰다잉’을 두고 찬반을 논의할 게 아니라 ‘광의의 웰다잉’으로 존엄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광의의 웰다잉이란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호스피스·연명 의료 결정 확대와 함께 독거노인 공동 부양, 성년 후견인, 장기 기증, 유산 기부, 인생 노트 작성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앞선 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85.9%는 '광의의 웰다잉'을 위한 체계적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찬성했다. 또한 약 85.3%가 광의의 웰다잉이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사회적으로 호스피스나 웰다잉 관련 제도들이 잘 마련되면, 개인이 호스피스를 이용할지 연명 의료를 할지 조력 존엄사를 할지 고민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질환의 말기 환자로 제한되어 있다.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없고, 연명 의료를 선택하자니 비용이 많이 들면 결국 조력 존엄사 외에는 선택권이 없는 구조라는 비판도 있다. 광의의 웰다잉을 논의하며 사회적 환경을 먼저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안락사나 조력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기 이전에 광의의 웰다잉을 논의하고 사회적으로 충분한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이런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안락사를 허용한다면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2018년 고령사회에 들어선 우리나라는 10년도 채 되지 않은 2025년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중 20%인 사회)에 진입한다. 2045년에는 고령 인구가 전체 인구의 37%를 차지해, 세계 최고의 노인 국가가 될 전망이다. 2060년에는 43.9%로 사실상 인구 절반이 노인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영화 ‘플랜75’ 말미에는 뉴스에서 “정부는 ‘플랜75’가 호조를 보임에 따라 ‘플랜65’도 검토하고 있습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죽음을 선택하기에 앞서 사회적으로 존엄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2021년 말 미국은퇴자협회(AARP)와 내셔널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은 ‘제2의 인생 연구’에서 미국 고령자를 대상으로 ‘노화’의 개념을 재정립했다. 연구에 참여한 시니어들은 건강, 재무, 관계, 죽음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존의 관념과는 다른 생각을 내놓았다. 그 결과부터 요약하자면, 이전보다 노화를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연재를 통해 담아왔다. 이번 호에서는 그 마지막 순서로 ‘웰다잉’에 대해 알아본다.
AARP 조사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대체로 감소한다.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가?’라는 물음에 ‘극도로 또는 매우 많이’라고 답한 비율은 40대가 22%로 가장 높았고, 80대 이상이 4%로 가장 적었다(50대 17%, 60대 7%, 70대 10%).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답한 비율은 나이와 비례해 높아졌다. 80대 이상의 절반가량(47%), 70대의 약 3분의 1이 죽음을 염두에 둔 상태라고 응답했다(60대 22%, 50대 12%, 40대 8%).
오랜 기간 노인복지 현장에서 죽음 준비 교육을 펼쳐온 유경 사회복지사는 “AARP 조사처럼 죽음을 덜 두려워하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다”며 “각자의 인생관, 죽음관, 건강 상태, 가족관계, 배우자 유무 등에 영향을 받는다. 살면서 다양한 사별(死別)을 경험하며 죽음을 인식하고 수용했거나, 자기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경우 두려움이 적다. 반면 삶에 대한 애착이나 집착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라면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마지막 인사나 주변 정리를 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는 일도 많다”고 말했다.
‘죽음 준비’라고 했을 때 유서 및 재산분할 서류 작성, 상조회사 가입 등 실질적인 절차를 떠올릴 수 있다. 죽음 준비도가 가장 높게 나타난 미국의 80대 이상 응답자 중 변호사를 통해 자산 관련 문서를 정비해둔 경우는 70%였다. 장례 절차 계획서를 작성한 노인은 절반을 웃돌았다(55%). 최근 관심이 늘어난 DNR(Do Not Resuscitate, 심폐소생술 거부) 문서를 써두었다고 답한 이는 65%에 달했다.
데브라 휘트먼 AARP 부사장은 “최근 노인들은 죽음 자체의 두려움보다는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스스로 상황 통제가 가능할지, 연명의료 등을 선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크다”며 “과거보다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며, DNR을 작성해두는 모습은 평안한 죽음,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인식과 욕구가 커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제 조사에서 이들 세대의 81%는 죽음의 순간 고통 없이 편안한 상태이길 원했으며, 84%는 영적 평화가 깃들길 소망했다. 이러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 최근 ‘웰다잉’(Well-dying)을 통해 정신적·심리적 죽음 준비를 실천하는 노인이 늘고 있다.
유 사회복지사는 “죽음 준비는 물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면 슬프고 두렵지만,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보면 인생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렇게 죽음을 기억하며(Memento Mori)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 정성껏 살아가는 것이 곧 죽음 준비”라며 웰다잉을 위한 다음 4가지 방법을 소개했다.
첫째, 내가 원하는 방식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인체조직기증 의사도 미리 밝혀둔다. 둘째, 죽음을 단순히 치료의 실패가 아닌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셋째,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과 상속에 대해 알아두고, 장례와 장묘에 대해 고민해둔다. 넷째, 사별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나눠야 한다. 죽음 준비는 자신에 대한 것으로 끝내지 않고,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이로 인해 아픔을 겪는 이들을 헤아리고 위로하는 과정까지 아우른다.
도움말 유경 사회복지사(‘유경의 죽음 준비학교’ 저자)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명절을 맞이해 제수를 준비하는 집안 여성들이 앓는 후유증을 이르는 신조어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이맘때쯤 붕대나 깁스가 평소보다 많이 팔린다. 명절 제사 준비에서 빠지기 위한 ‘약은 며느리’들의 노력 때문이다. 이렇게 제사는 다양한 사회현상을 만들어낼 정도로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왜 그럴까?
제사(祭祀) 혹은 제례(祭禮)는 신령에게 음식을 바치고 기원을 드리거나 죽은 이를 추모하는 의식을 말한다. 가정에서 지내는 제례에는 기제사와 차례, 시제 등이 있는데 요즘은 많이 간소화되고 있다. 장례를 치르다 보면 장례 도중에 제례를 지낸다. 종교에 따라 생략하기도 하지만 장례지도사의 안내에 따라 지내는 경우도 많다. 얼떨결에 따라 하는 제례는 종류도 많고 용어도 생소하다.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성복제(成服祭). 입관 후 유족이 상복을 갖춰 입고 올리는 첫 제사다. 의식은 차례와 비슷하다. 발인제(發靷祭)는 장례식장에서 장지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제사다. 노제(路祭)는 장지로 가는 도중 고인의 생가나 평소 자주 머물던 장소에서 치르는 제사다. 나의 경우 아버지가 자주 다니시던 길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대신했다.
매장할 경우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땅을 파기 전 산이나 땅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다. 성분제(成墳祭)는 묘지의 봉분이 완성되고 나서 지낸다. 간단한 음식을 놓고 절을 한다. 평토제(平土祭)는 하관 후 흙을 메우고 땅을 평평하게 다진 후 지내는 제사다. 지역에 따라 생략하기도 한다.
초우제(初虞祭)는 삼우제(三虞祭) 중 첫 번째, 재우제(再虞祭)는 초우제 다음 날, 삼우제는 세 번째 제사를 말한다. 49재는 돌아가신 날로부터 일주일 단위로 한 번씩 일곱 번 치르는 제사를 말한다. 49일 되는 날에 한 번 지내기도 한다.
나는 불교도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칠재(七齋)를 다 했다. 남양주의 어느 절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경을 외우고 영가를 천도했다. 재를 치를 때마다 100만 원씩 상차림 비용이 들어 제사 비용만 총 700만 원을 지불했다. 누님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한 것인데, 동생과 나는 별로 내키진 않았다. 장례와 제사에 이토록 큰돈이 드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기제(忌祭)는 돌아가신 전날에 준비해 새벽에 치르는 것인데, 요즘에는 돌아가신 날 치르기도 한다. 차례(茶禮)는 설이나 추석에 기제사와 별개로 지낸다. 발인 이틀 뒤 제사도 차례라 한다. 생신제는 고인의 생신에 치르는 제사다. 첫 번째 기제사 전에 한 번만 지낸다.
제사는 언제, 왜 시작되었을까. 아마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왔겠지만 이를 체계화한 것은 유교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정치이념이자 정신적 근간으로 삼았다. 유교는 사회나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가정으로 본다. 가정이 잘 다스려지면 국가는 저절로 잘 돌아갈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사람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효(孝)를 꼽았다.
효의 대상은 아버지, 할아버지 혹은 맏형이 해당된다. 효를 국가로 연장한 것이 충(忠)이다.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백성의 도리였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배운다. 그 뿌리가 유교의 가부장제다.
나라의 가부장은 왕이다. 왕은 절대 권력을 갖는데, 그 권력을 강화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제사다. 왕은 자신의 권력이 조상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해마다 종묘에서 장엄하게 제사를 지냈다. 이 원리는 집안 제사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그 뒤에 조상령들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내려면 많은 돈이 들었다. 일 년에 수십 차례 제사를 지내고 좋은 음식을 차려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제사를 물려받는 장남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준 것이다. 딸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는 그릇된 상속법은 1990년대 초반까지 굳건히 지켜졌다.
제사는 권력과 부의 상징이기도 하다.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3품 정도의 양반뿐이었다. 대부분 백성은 부모의 제사만 지낼 수 있었는데, 능력이 되는 사람은 그 윗대까지 제사를 지냈다.
한국인만큼 제사에 공을 들이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설이나 추석을 전후해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어도 ‘민족대이동’이라 불릴 정도로 수천만 명이 움직인다. 이 고된 노동은 몇 백 년 동안 끊이지 않고 반복돼왔다. 장시간 운전에 지치고 상 차리느라 허리가 부서진다. 이런 기이한(?) 풍경이 요즘 들어 많이 바뀌고는 있지만 앞으로 꽤 긴 시간 지속될 것 같다. 관습은 뿌리가 깊다.
나는 장례를 치를 때 되도록 제사를 치르지 말라고 권한다. 정 마음이 쓰이면 성복제 정도만 했으면 한다. 제사는 가부장제의 유산일뿐더러 비용도 많이 든다. 장례비도 만만치 않은데 제사 비용까지 더할 이유가 없다. 제사는 명절 차례로 족하다. 기일에 고인을 모신 곳을 다녀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고인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있다.
김경환 채비장례 상임이사
2011년 조합원 가입 후 줄곧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다. 그전에는 주로 콘텐츠와 미디어에 종사했는데, 이 경험을 살려 조합의 홍보를 지원하고 있다. 기획하는 것을 좋아하고 성취했을 때 큰 보람을 느낀다. 저서로는 ‘죽음이 삶에게 안부를 묻다’ 등이 있다.
물가는 치솟고 경기는 얼어붙고 있다. 전문가들의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 2023년은 검은 토끼의 해다. 토끼는 풍요의 상징이며 예로부터 검은색은 인간의 지혜를 뜻한다고 한다. 20인의 중장년 취·창업 전문가에게 2023년 중장년이 주목할 만한 분야를 물었다. 전문가들의 전망을 잘 살펴 약간의 지혜를 더한다면 계묘(癸卯)의 미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인생 도전을 위한 2023 중장년 취·창업 트렌드를 소개한다.
▲ trend1 전체 시장 전망
창직과 N잡러의 해
2023년에는 경기 불황이 예상되는 만큼 적지만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가 중장년에게 적합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장년에게 강도 높은 노동력이 요구되는 직무는 한계가 있지만 기술이나 자격이 필요한 직무 직종은 3D 업종을 기피하는 청년들로 인해 취업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노인·장애인 관련 복지 서비스 분야에서도 대면 기술과 상담 능력 면에 강점이 있는 중장년이 유리할 수 있다.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장 희유 스님은 정부가 정책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돌봄, 디지털, 환경 분야를 중장년이 공략해볼 만한 일자리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2023년 중장년 취업‧재취업 시장이 더 어려워질 것으로 내다보고 창업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경력, 취미, 특기 등을 기반으로 새로운 직업을 만드는 창직이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문성식 창직교육협회 이사장은 “창직을 통해 긱이코노미(필요에 따라 일을 맡기고 구하는 경제 형태) 시장에서 N잡러(여러 개의 직업을 가진 사람)가 될 중장년이 앞으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이종근 디올연구소 대표는 “소자본으로 시작하는 저가형 프랜차이즈 창업, 무자본ㆍ무점포형 창업, 플랫폼 노동자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체크 포인트
전문가들은 현직에 있을 때보다 수입이 줄어들 것을 인정하고, 업무 수행 성과 또한 과거와 다를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나이를 내려놓고 무엇이든 배워야 한다. 더불어 건강관리는 필수다.
▲ trend2 취업 시장 전망
시간제 일자리가 대세
안정적으로 오래 일할 수 있고, 자신의 적성과도 맞으면서, 업무 강도가 낮고, 수입은 적절하게 나오는 일이 중장년에게 가장 적합하다. 풀타임보다는 시간제 일자리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취업‧재취업 시장에서는 새로운 일을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노사발전재단 같은 기관을 통해 나에게 적합한 직무가 무엇인지 잘 알아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심우정 한양대 실버산업학과 교수는 “중소기업은 자문 수준이 아니라 경험을 살려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중장년을 원한다”면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배우고 활용해 자신의 역량을 넓히고 기업에 적용해 변화를 이끌어내는 중장년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취업 유망 직업 및 분야
장례·웰다잉 분야 기존 장례지도사, 유품정리사뿐 아니라 디지털 장례 수목장 등 새롭게 변하는 장례 문화에 따라 새로운 직업들도 나타나고 있다.
돌봄 분야 인지건강지도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간병사 등 노인 돌봄 분야의 수요는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다.
안전관리 분야 기업재난안전관리사, 고령자 주택 개조사, 연구실 안전전문가 등 안전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앞으로 채용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직업·전직 상담 및 컨설팅 분야 전직지원 전문가, 직업상담사, 은퇴 코치 노년 플래너, 창직 컨설턴트, 스타트업 컨설팅, 귀농귀촌 컨설팅 등 코칭 분야가 유망하다.
이외에도 반려동물 간식 시장, 도시농업활동가, 건강식품 및 간편식, 도시농업관리사, 주택관리사, 조경기능사, 신용상담사, 손해평가사, ESG나 환경 관련 직업, 자연·문화해설사, 관광통역안내사 등이 꼽혔다.
이진서 인생다모작연구소 소장
신중년 적합 직무는 고용노동부에서 지원하는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에 어떤 분야가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혹은 공공에서 지원하는 뉴딜 인턴십, 시니어 인턴십 등의 사업을 통해 훈련 후 일자리 연계를 노려볼 수도 있다. 구인·구직 사이트 검색을 통한 취업 시도보다는, 일할 경험을 주는 공공 취업지원 플랫폼을 활용해보길 권유한다.
▲ trend3 창업 시장 전망
지식과 기술 창업 유망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 창업이 대세일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중장년에게 적합한 분야는 ‘지식 창업’ 분야다. 사회에서 쌓은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시장성과 경쟁력이 있다는 전망이다. 또한 시니어가 가진 사회 경험과 네트워크가 창업에서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유연성 언더독스 본부장은 “대기업이 접근하기에는 규모가 작지만 창업가에게는 적합한 규모의 틈새시장을 공략하면 창업 생존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갑용 이타창업연구소 소장은 “중장년 창업은 소자본 창업, 직접 일하는 창업, 최소 인원으로 가능한 창업, 돈보다 일이 재미있는 창업, 오래 할 수 있는 창업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업 트렌드
프랜차이즈보다 무인 창업 최근 많은 중장년이 ‘오토 매장’(본인의 노동력 투입 없이 소수의 직원으로 자동 운영되는 매장)에 혹해 프랜차이즈를 고려하지만, 정말 수익성이 잘 나오는지 따져봐야 한다. 차라리 무인 매장이 나을 수 있다. 반찬, 고기, 문구, 옷 등 아이템도 다양하다.
1인 지식 창업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녹인 1인 지식 창업이 많아질 전망이다. 한때 MZ세대 사이에서 유행했던 퍼스널 브랜딩(자신을 브랜드로 만드는 일)을 이제는 중장년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자영업보다 기술 창업 시니어 대상 가상현실 콘텐츠 개발, 반려로봇 개발, 빅데이터 기반 노인 안부 확인 사업, 위급상황 대처 기술 사업, 기술을 통한 정서 교류 상담 등의 기술 창업이 유망하다. 또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세대융합형 기술 창업도 도전해볼 만하다.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창업 청년에 비하면 창업 자금이 넉넉하다는 게 중장년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실패하면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청년보다 큰 것도 현실이다. 소자본 혹은 무자본 창업 가능한 온라인 창업이 유망하다.
권정훈 ‘장사 권프로’ 채널 유튜버
인력난이 심각한 외식업계에서 기회를 찾아보자. 대부분의 예비창업자들은 프랜차이즈 문을 두드리고 자본금을 과도하게 투자한다. 하지만 저렴한 값으로 전수창업을 배우는 것도 틈새시장이다. 전수받은 레시피에 나만의 색깔과 브랜드를 입혀 창업해보면 어떨까. 외식시장 인력난 기회를 놓치지 말자.
▲ trend4 새로운 시장 전망
떠오르는 新분야는?
중장년에게 적합한 새로운 분야로 디지털, 모빌리티(이동성을 높여주는 이동 수단 혹은 서비스), 시니어 뷰티 등이 꼽혔다. 전혜진 이지태스크 대표는 “비대면 활동이 증가하면서 40~50대의 비대면 활동 경험이 90%를 넘어섰다”면서 “디지털 중년 시대를 맞이해 체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역량을 활용할 수 있는 비대면 분야에서 중장년의 활약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신철호 상상우리 대표는 “청년들은 단순하고 지루한 반복 작업이라 좋아하지 않는 데이터 라벨링(인공지능 학습을 위해 수집한 데이터에 라벨을 다는 작업) 같은 일자리에 대한 중장년의 만족도가 의외로 높다”면서 “정식 출시 전인 제품 및 서비스 결함을 파악하고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베타 테스터도 좋다. 앞으로 모빌리티 시장에서의 중장년 수요도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진서 인생다모작연구소 소장은 “일본에서는 화장을 해주며 심리상담과 만족감을 높여주는 ‘뷰티 터치 테라피스트’라는 직업이 생긴 지 오래”라며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젊게 살고 싶어 하는 중년의 욕구인 ‘네버랜드 신드롬’이 트렌드라고 짚은 것처럼, 무인 ‘피터팬 스토어’ 같은 창업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조언했다.
새롭게 눈여겨볼 직업
디지털 분야 디지털 라벨러, 베타 테스터, 디지털 문해 교육자, 디지털 중개사
모빌리티 분야 프리미엄 택시 운전사, 드론조종사, 이동수단용 콘텐츠 큐레이터, 운송 서비스
시니어 뷰티 분야 안티에이징, 젊은 감성 입힌 패션, 뷰티 터치 테라피스트
박지혁 초고령사회 뉴노멀라이프스타일연구소 소장
초고령사회로 흘러가는 만큼 실버 비즈니스와 관련된 직무, 직업, 창업 분야가 새롭게 열릴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언택트, 메타버스 등의 기술 창업 분야도 커질 전망이다.
설문 참여 전문가 리스트
▲강소랑 서울시50플러스재단 정책연구팀 박사
▲김갑용 이타창업연구소 소장
▲김경환 성균관대 글로벌창업대학원 원장
▲김숙응 숙명여대 실버비즈니스학과 교수
▲김중진 한국고용정보원 미래직업연구팀 연구위원
▲김찬흥 국민은행 경력컨설팅센터 센터장
▲권정훈 ‘장사 권프로’ 채널 유튜버
▲문성식 창직교육협회 이사장
▲박영란 강남대 실버산업학과 교수
▲박지혁 초고령사회 뉴노멀라이프스타일연구소 소장
▲변영조 한밭대 중장년기술창업센터 센터장
▲신철호 상상우리 대표
▲심우정 한양대 실버산업학과 교수
▲유연성 언더독스 본부장
▲이종근 디올연구소 대표
▲이진서 인생다모작연구소 소장
▲전혜진 이지태스크 대표
▲조연미 리봄 시니어플래너 대표
▲한희윤 신한은행 은퇴사업부 수석
▲희유스님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센터장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당한다. 가족이 오래 병을 앓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 해도 죽음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잠든 새, 간병 중, 짧은 순간에 닥친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 아득한 단절감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가족이 떠난 후 우리는 장례식이라는 열차에 올라탄다. 별일 없다면 대개 3일 동안 정신없이 달려야 한다. 그동안 정신을 차려야 고인과 제대로 이별하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다. 그 방법을 알아보자.
【임종 전】 사전상담을 받아놓는 것이 좋다. 가족이 장례 전 과정을 소상히 알고 직접 실행할 것이 아니라면 전문 장례지도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생전에 상조회사를 정해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고, 그동안의 이력을 볼 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곳을 선택한다. 사전상담을 통해 매장이나 화장 여부, 봉안당이나 장지, 전국 장례식장 현황과 사용료, 조문객 식음료대, 제단 꽃장식, 제사 음식 등을 알아보고 정해야 한다.
【1일 차】 의료기관에서 임종할 경우 병원 원무과에서 사망진단서를 7부 정도 발급받는다. 자택에서 임종할 경우에는 지체 없이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고 검사지휘서를 수령해야 한다. 장례업체 콜센터에 연락해 안내받을 수도 있다.
조치를 취한 후 장례지도사와의 상담을 통해 장례식장을 정하고 운구 차량으로 고인을 이송한다. 화장, 매장 등 장법에 따라 장지를 결정하는데, 화장 시 화장 예약을, 매장 시 장지 예약을 한다. 그 후 장례 일정(입관 및 발인 시간 등)을 정하고 견적을 확인한다. 또 빈소에 차릴 영정사진, 제단, 제사상 등을 결정하고 가족, 친지, 지인에게 부고 문자를 발송한다.
【2일 차】 장례지도사 및 장례관리사(도우미)와 협의해 음식을 정한 후 조문객을 맞이한다. 입관식은 고인의 몸을 깨끗이 씻겨드리고 수의를 입힌 후 관에 모시는 절차다. 입관실에서 진행되며 보통 1시간 정도 걸린다. 고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입관식이 끝나면 제사를 지낸다. 종교의식을 진행할 수도 있다. 차량, 운구 인원, 발인제 지낼 장소 등 장지로 이동하기 전에 필요한 사항을 점검한다.
【3일 차】 발인 전 장례식장 비용을 정산한다. 미사용 물품은 반납하고 상조회사 비용도 정산한다. 개인 물품을 챙기고 빈소를 정돈하며 개인 짐을 정리한다. 발인은 장례식장에서 장지로 떠나는 과정이다. 발인 전 제사상을 차려 추모의식을 갖는다. 종교마다 발인식과 함께 종교 예식을 진행하거나, 영결식장으로 이동해 별도로 진행하기도 한다. 발인식을 마치면 관을 운구하여 장의차량에 모신다. 유족의 규모에 따라 버스와 리무진을 다 쓰거나 버스 혹은 리무진만 쓸 수도 있다. 장지에 따라 화장장 또는 묘소로 이동한다.
화장하는 경우 예약 시간 30분 전까지 화장장에 도착해 접수 절차를 마쳐야 한다. 사망진단서(시체검안서), 검사지휘서, 고인의 주민등록등본을 각 1부씩 준비한다. 화장이 시작되면 유족대기실에서 대기한다.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인데, 이때 종교별 추모의식을 지내기도 한다. 화장이 끝나면 유골을 한지로 감싸 준비한 유골함에 모신다. 그 후 유골 안치를 위해 이동한다. 안치 방법은 봉안당, 봉안담, 봉안묘, 수목장, 해양장 등이 있다.
매장하는 경우 관을 장지로 운구한다. 공원묘지 등을 이용할 경우 서류 접수 후 직원의 안내를 받는다. 정해진 묘역으로 이동해 미리 파놓은 묘지 광중(구덩이)에 관을 모신다. 광중과 관 사이를 흙으로 채워 평지와 같은 높이가 되도록 한다. 그 후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든다. 평토제, 성분제 같은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봉분 조성 후 종교별로 추모의식을 진행한다. 매장의 경우 봉분묘, 평장묘, 문중묘, 공원묘원 등에 고인을 모신다.
【장례 후】 자택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를 치른다. 사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사망자의 주소지와 관할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에 신고한다. 개인묘를 설치할 경우 30일 이내에 사후 신고해야 한다. 가족묘, 문중묘, 법인묘는 설치 전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망자의 상속 재산은 ‘안심상속 원스톱서비스’를 신청하면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방문록이나 SNS 등을 확인한 후 조문이나 위로를 전한 분들에게 답례 문자를 발송하고, 고인의 유품을 정리한다. 경우에 따라 전문 청소업체를 쓰기도 한다.
장례와 행정 절차를 마쳤다고 해서 고인에 대한 기억이나 흔적조차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고인은 마음속에 있다. 사랑의 기억은 남기고 나쁜 기억은 털어버린다. 슬픔을 살아갈 힘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남은 이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