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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통영의 ‘뜨거운 위로’의 맛
- 통영은 혼자 가면 안 된다. 파도만 넘실대는 곳이 아니라 역사와 장인의 솜씨마저 희망처럼 요동치는 곳이다. 혼자서는 통영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에 제한이 있고 고독한 나그네의 가슴도 울렁대기 마련이어서 시인처럼 낮술을 마시고 시를 짓거나 우체국 창을 바라보며 연애편지를 하염없이 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혼자 여행을 하게 된다면 통영은 온 발바닥을 땅에 대고 걸어야 한다. 그래야 나라를 지키려는 열망으로 가득했고 사랑의 기억으로 응축된 항구도시의 역사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시인 백석의 표현대로 “자다가도 일어나 가고 싶은 바다”가 있으며, 유치환처럼 행복론을 시로 쓸 수 있는 곳이요, 윤이상의 창작의 근원이었던 한려수도의 해조음을 들을 수 있는 도시다.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지만 축복받은 자연에서 이곳 사람들은 본능적 감각을 쪽빛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에게서 배운 듯하다. 이순신과 통영의 예술 충무공의 통제영이 있었던 도시이며,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한산대첩의 배후 항구였고, 전국적으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모이던 인재와 문화의 집합소였다. 통영이란 도시는 이순신과 불가분의 관계다. 통영의 시작은 조선 수군의 통제영 설치와 연관된다. 3도수군 통제영(統制營)의 설치로 12공방을 비롯한 전국적인 장인집단이 대량 유입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시를 짓고 문장을 쓰던 예술가였다. 초대 수군통제사로 이곳에 와 혼합의 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통영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군사도시 통영에서 예술가들이 많이 나온 건 이순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통영은 그리하여 다양한 예술과 음식문화를 꽃피웠다. 통제영이 있던 세병관 뒤쪽에 가면 통제영의 물적 기반을 제조하던 12공방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통영의 거리를 걷노라면 통영 출신 예술인들의 거리명을 통해 그들이 남긴 흔적을 훑게된다. 보도블록 사이로 유치환의 ‘행복’을 비롯해 통영을 빛낸 시들이 새겨져 있고, 건물의 벽이나 창에는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통영의 처자를 찾아 이 도시를 찾았던 백석 시인의 시도 있다. 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작품도 보인다.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의 각 학교 교가 악보도 눈에 띈다. 물론 이곳 출신의 전혁림 화백의 그림이나 통영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이중섭 화가의 그림이 새겨진 동판도 볼 수 있다. 통영은 홀로 다니는 여행자에게 음식 쪽에서는 불친절하다. 1인분짜리 음식도 있기는 하지만 현지인이 아닌 외부인은 다찌나 정식으로 통영의 다양한 맛을 보고 싶다. 다찌란 일본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통영 지방 특유의 음식 문화다. 부산과 여수 사이의 주요한 항구에는 스쳐지나가는 나그네가 많아서 서서 먹었나보다. 다찌는 항구에서 ‘서서 마시는’(立ち飮み) 항만 노동자들의 음식문화였다. 충무김밥이라 불리던 음식도 항구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상하지 않게 밥과 음식을 따로 제공하던 전통 풍습에서 만들어졌다. 서서 음식을 먹던 다찌 문화는 그 후 다소 변화되어 테이블에 비닐을 깔고 다양한 통영의 음식을 곁들인 정찬 요리, 잔치 음식으로 바뀌었다. 가격은 보통 1인분에 3만 원 정도 하는데 대부분 2인분부터 주문한다. 요즘에는 2인분도 꺼려하는 분위기다. 항만 노동자들의 선술집에서 많은 변화를 거친 것이다. 대신 반다찌가 있는데 온다찌의 화려한 비주얼을 상상하던 사람은 실망하고 만다. 술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비스로 나오며, 음식은 손님이 먹는 속도에 따라 맞춰 나온다. 혼자 하는 여행도 좋지만 밥을 먹을 때는 아쉽다. 특히 통영은 그렇다. 요즘 같은 겨울에 가장 어울리는 음식은 서호시장의 시락국이 최고다. 특히 아침 식사로 일품이다. 중앙시장의 물메기탕은 별미다. 물메기, 꼼치, 잠뱅이 명품은 심플하다. 통영의 음식은 바다의 밭이라는 천혜의 환경 덕분에 재료가 탁월하여 요리법이 심플하다. 기교를 거부한다. 겨울에만 한정 판매되는 물메기는 명품 해장국의 주인공이다. 명품에는 유사품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정판도 나온다. 물메기는 동해에 가면 꼼치, 서해로 가면 잠뱅이라고 불린다. 겨울에만 나오기 때문에 한철 음식에 쓰인다. 식도락가와 주당의 목이 타는 이유다. 그만큼 사랑도 듬뿍 받는다. 음식 기행을 한다면 단연 통영이다. 사시사철 먹거리가 넘친다. 남해의 건강한 바다에서 때맞춰 해산물이 올라오고 남풍을 맞고 자란 싱싱한 채소가 어우러져 통영은 미식가들이 들락거리는 한국 최고의 ‘미항’(味港)이다. 역사적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어서 중인계급이 발달하였고 이들에 의해 문화와 예술이 진작된 도시이며 음식 맛도 여수에서 통제영이 이전하면서 전국의 맛이 집합했다. 또 지리적으로도 음식 맛이 좋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다. 우스갯소리로 맛의 고장으로 대표적인 전주 사람들이 왔다가 기죽어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새만금 갯벌이 사라져가면서부터는 통영이 맛의 수도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도다리, 갯장어, 물메기, 굴, 미역, 전복, 졸복 등이 차례로 밥상에 오르는 통영은 단 한 번의 여행으로는 그 맛을 다 볼 수 없는 곳이다. 미항에서 미도(味都)로 발돋움하고 있다. 무한하지 않아서 인생이 애틋하듯 단 한철이라 애지중지 각광받는 물메기는 겨울에만 등장하는 미식계의 겨울 진객이다. “인생의 으뜸은 만취”라는 바이런의 시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통영의 제철 안주 상차림 명물 다찌집에서는 취하기 마련이다. 통영에서는 취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른 새벽 서호시장으로 가서 시락국으로 해장을 하거나 강구안 쪽 중앙시장으로 들어가 복국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이라면 더 취해도 좋다. 바로 물메기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겨울 한철 통영은 물메기로 뒤덮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메기가 대형 공장의 빨래처럼 걸리는 섬이다. 조그만 포구마다 이 천하에 못생긴 물고기를 다듬는 데 여념이 없다. 겨울 물메기철 어부는 밤새 물메기를 퍼 올리고 날이 밝으면 아낙들과 퇴역 어부들이 포구에 나와 물메기 등을 따서 내장을 꺼내 손질하고 세척한 뒤 건조한다.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물메기는 표준어가 꼼치라고 한다. 서해안 보령에서는 잠뱅이라고 부르고 강원도에서는 곰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영의 꽃인 동백꽃도 수백 가지 종류가 있듯 비슷하면서 다른 이 물고기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요즘은 국립수산과학원에서 꼼치와 물메기를 같은 어종으로 표기한다고 한다. 해장국의 명품을 맛보려면 통영으로 물메기탕은 물메기국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무를 푹 고아서 소금으로 간을 한 뒤 물메기를 넣고 살짝 데칠 정도만 끓인다. 모자기와 다진 마늘을 넣으면 맑은 국물이 나온다. 맑은 국물을 낼 때 대파를 얹고 고기와 함께 마시듯 먹는다. 물메기는 지방이 적고 아미노산이 풍부해 감칠맛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육질이 부드럽다. 멸치젓을 곁들이기도 한다. 통영의 겨울 새벽의 맛은 맑은 국물 맛이다. 물메기는 탕을 만들 때는 주로 생물을 쓰고 건메기는 찜을 해서 먹는다. 육질이 매우 부드러워 해장국으로 끓여 먹으면 입에서 살살 녹는다.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면서 한입 떠 넣어 삼키면 간밤의 숙취가 그 뜨거움과 부드러움에 도망을 친다.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술병을 잘 고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예로부터 해장에는 빠질 수 없는 물고기였다. “고기 살은 매우 연하다. 뼈도 무르다.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라고 쓰여 있다. 11월 마지막 주 정도가 되면 주당들은 물메기탕을 먹으러 몰려든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통과의례이자 어민들에게는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즐거운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최근에는 새로운 맛을 찾으려는 소비자들의 심리가 더해져 대구에 육박하는 인기를 끌고 있다. 가격도 대구 값에 가깝다. 통영에서 물메기 경매는 서호시장 옆 통영수협 도천위판장에서 열린다. 새벽 4시부터 물량에 따라 한두 시간 경매가 이루어진다. 시장은 새벽 5시경부터 활력이 넘치기 시작한다. 인근의 500원짜리 커피가 불티나게 팔리고 시장 내의 시락국집에는 한 그릇을 해치우는 시장 상인들로 북적거린다. 건메기는 12시에 경매를 한다. 대구나 복국도 물메기로 만든 시원 담백한 해장국 맛을 따라오지 못한다. 겨울철 통영에 가서 술 마시고 새벽에도 깨어나지 못한 여행자는 뜨거운 위로를 받는 듯한 물메기 해장국 맛을 경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겨울철만 놓고 봐서는 최고의 해장국이다. 봄날 도다리쑥국이 나오기 전까지는 겨울 통영에서 해장국 명품의 호사를 누려보시라! 파도가 멈추는 해안선이 기다란 통영은 오목하게 들어간 포구가 발달해 있다. 한려수도의 바다와 섬 전망은 미륵산 정상이 최고이고 통영항 전망은 세병관 둥근 기둥에 기대어서 봐도 좋지만 20여 분 땀을 흘리고 올라 북포루에서 보면 완벽하다. 백석의 시 ‘통영2’처럼 충렬사 계단에 앉아 동백꽃 필 무렵 한산도 뱃사공이 되어도 좋으리라. 최치현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로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 2021-02-0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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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목싸목 떠나는 ‘나주식탐여행’
- 바람이 서늘해지자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건 인지상정인가보다. 지인들과 서울 곰탕 맛집 정보를 공유하다 멀리 나주곰탕 이야기로 흘렀다. 꿀꺽 군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주곰탕, 돼지국밥처럼 향토색 강한 음식은 타지역에서 먹으면 왠지 그 맛이 안 난다. 곰탕 먹으러 나주에 갈 거라는 내 말에 지인들이 숟가락을 얹었다. “나주곰탕 포장 부탁해.” 말은 이래도 그들도 안다. 나주곰탕은 나주에서 먹어야 제맛인 것을. 3味로는 부족한 맛의 고장 나주가 호남 물류 중심지였던 호시절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나주평야와 뱃길 교통이 편리한 영산강을 품은 지리적 여건 덕이었다. 100여 년 전 영산강 나루터에는 특산물과 산해진미가 넘쳐났다. 사람이 몰려드는 만큼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그 문화가 ‘나주 3味’라 불리는 ‘나주곰탕’, ‘영산포 홍어’, ‘구진포 장어’로 이어졌다. 나주곰탕은 우시장에서 나오는 머리 고기와 뼈, 내장 등을 푹 고아낸 장터국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예부터 조선시대 관아인 금성관 앞에 큰 장이 섰다는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과 구경꾼들이 밥에 고깃국을 말아 후루룩 먹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군납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나온 소 부산물로 국을 끓인 것이 나주곰탕의 시초라는 설도 있다. 시초가 무엇이든 맛있는 곰탕을 지금 시대에도 맛볼 수 있으니, 식탐 많은 나 같은 여행자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나주 사는 지인이 “나주에 오면 곰탕보다 홍어를 먹어야죠” 하며 홍어 자부심을 드러냈다. 물론이다. 나주 3味에 연탄돼지불고기까지 야무지게 맛볼 생각이었다. 나주 여행의 시작은 곰탕으로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나주행 KTX를 타면 아침 식사로 곰탕을 먹을 수 있다. 나주역에서 구도심의 나주곰탕거리까지는 차로 약 5분 거리다. 많은 곰탕집 중에서 주로 가는 곳이 하얀집, 노안집, 남평할매집이다. 하얀집은 개업한 지 110년이나 되었고, 노안집과 남평할매집은 60년 정도 되었다. 동네 주민에게 최고 맛집을 물어도 똑 부러진 대답을 듣기 어렵다. “어느 집에서 먹어도 맛있어요. 다만, 식당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요. 서울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고, 나주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어요” 한다. 결국 직접 맛을 보고 비교할 수밖에 없다. 나주곰탕은 설렁탕과 달리 국물 색이 맑다. 나주곰탕과 설렁탕 모두 소뼈와 고기를 푹 고아내는 방식은 같지만, 나주곰탕은 소뼈를 적게 넣고 양지나 사태로 육수를 내기 때문이다. 밥은 말아져 나온다. 밥이 담긴 뚝배기에 가마솥에서 펄펄 끓은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몇 차례 토렴한다. 밥알에 짭조름한 간이 배고, 뚝배기가 뜨끈해지면 살코기, 달걀지단, 대파를 올려 손님상에 낸다. 곰탕 맛은 국물 빛깔처럼 맑고 개운하다. 다진 양념을 풀면 칼칼해진다. 숭덩숭덩 썰어 넣은 고기는 새콤달콤한 초고추장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다. 곰탕 맛을 북돋는 김치도 중요하다. 숟가락 위에 밥, 고기, 잘 익은 배추김치 또는 깍두기를 올려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다. 노안집의 배추김치는 감칠맛과 시원한 뒷맛이 일품이다. 사장에게 비결을 물었다. “김치 담글 때 여러 가지를 섞은 잡젓을 넣어요. 봄배추를 싹둑싹둑 썰어서 잘 익힌 김치가 최고 맛있지요. 봄에 또 오세요.” 곰탕 먹고 나주읍성 산책 곰탕거리 일대에는 고려시대 초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호남의 중심지였던 ‘나주목’의 사적지들이 모여 있다. 조선시대 객사이자 나주목의 중심 관청이었던 금성관, 나주 관아의 정문 정수루, 나주목을 다스렸던 목사들의 살림집 목사내아, 고려시대 때 세운 나주향교 등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왜구 방어를 위해 축조한 고려시대 읍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문과 성곽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1993년부터 나주읍성 사대문 복원 사업을 추진, 2018년 완공해 나주읍성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최근 나주향교 옆에 ‘39-17마중’이 들어서 구도심에 활기를 더한다. 39-17마중은 카페&와인바, 게스트하우스, 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은 원래 나주 의병장 난파 정석진의 손자 정덕중이 1939년에 어머니를 위해 지은 난파 고택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이 집을 한 젊은 부부가 매입해 ‘1939년의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하다’라는 뜻을 지닌 39-17마중을 조성한 것이다. 부부의 눈에는 한·일·양의 건축 양식이 결합한 근대 건축물과 마당의 아름드리 금목서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고 한다. 영화 세트장 같은 난파 고택은 게스트하우스로, 마당의 큰 창고는 벽면을 통유리로 마감한 카페로 탈바꿈해 손님을 맞는다. 향교 담장이 카페 창가에 앉아 나주산 농산물로 만든 음료를 마시노라면 진짜 나주 여행하는 것 같다. 홍어 튀김 먹을 줄 알아야 홍어 고수 “홍어앳국 드셨나봐요.” 택시기사가 딱 알아본다. 홍어앳국 첫 경험을 이야기하자 “제대로 만든 홍어앳국을 드셨네요. 홍어 숙성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손님이 드신 앳국이 가장 많이 삭힌 등급 같아요. 나주 사람들은 그 정도 삭힌 걸 좋아해요. 앳국에는 4~5월에 나는 여린 보리 순을 넣어야 제맛이 나죠”라며 거든다. 홍어앳국은 홍어 뼈 육수에 된장을 풀고, 삭힌 홍어 내장과 보리 순을 넣어 얼큰하게 끓인다. 홍어 애는 홍어 간이다. 생 홍어 애는 연두부처럼 부드럽고 고소해 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삭힌 홍어 애를 넣은 홍어앳국은 암모니아 향이 매우 강하다. 알싸한 냄새에 막혔던 코가 뻥 뚫린다.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먹기 힘들지만 후각이 조금 마비되면 얼큰하고 구수한 맛이 느껴진다. 삭힌 홍어가 나주의 별미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고려시대 말 공민왕 때 왜구 침략을 피하고자 흑산도 사람들을 나주 영산포로 이주시킨 적이 있다. 흑산도 사람들이 생선을 잡아 배에 싣고 며칠 동안 나주로 건너오는 사이 생선들이 상하고 말았다. 그런데 상한 생선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맛있는 생선은 홍어뿐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 영산포에 정착한 사람들이 홍어를 삭혀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산포는 곰탕거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영산포 선창가에 40여 개의 홍어 식당과 홍어 판매장이 자리해 있다. 거리에서부터 홍어 삭히는 냄새가 풍긴다. 홍어요리 전문점에서 홍어정식을 주문하면 홍어삼합, 홍어튀김, 홍어무침, 홍어찜, 홍어전 등이 한 상 차려진다. 삭힌 홍어는 열을 가할수록 향이 강해지므로 차가운 음식부터 나온다. 홍어무침, 홍어삼합, 홍어전, 홍어찜, 홍어앳국, 홍어튀김 순으로 먹어야 삭힌 홍어 맛에 차차 적응할 수 있다. 마지막에 등장한 홍어튀김은 홍어 고수라고 자부했던 내게 굴욕감을 안겼다. 한입 먹었을 뿐인데 입천장이 까져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사심 가득한 나주 4味 연탄돼지불고기 영산포 선창가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구진포 장어거리가 있다. 1981년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던 곳이라 민물장어가 흔했다. 당시에는 장어 식당 열댓 채가 성업했다. 지금은 다섯 채 정도만 남아 장어거리의 명맥을 유지한다. 구진포 장어 원조집으로 알려진 신흥장어도 이제는 타지역 장어를 사용하지만, 오랜 내력의 깊은 손맛은 여전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나주 3味에 별미 하나를 추가한다면 송현불고기집의 연탄돼지불고기를 손꼽는다. 외지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맛집이다. 8년 전 송현불고기집에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길가 허름한 식당 안에 손님이 많아 놀랐고, 주인이 연탄불 앞에 앉아 석쇠 위 삼겹살을 쉴 새 없이 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번듯한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고기 맛이 바뀌었을까봐 걱정했는데, 고기 표면에 기름이 번드르르하고, 달고 짭조름한 맛은 그대로다. 가위로 고기를 직접 잘라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맛으로 상쇄하고도 남는다. 싼값에 배불리 한 끼 먹었으니 가성비와 가심비를 다 잡았다. ◇ 이색 명소 & 맛집 ◇ 나주목사내아(금학헌) 목사내아는 조선시대 나주목 최고 수장인 목사의 살림집이다. 건물 이름이 금학헌이다. 1825년에 건립된 ‘ㄷ’자형 전통한옥으로서 내아 1동과 행랑채 1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사 의복 무료체험과 한옥 숙박체험을 할 수 있다. 성정을 베푼 목사들의 이름을 딴 온돌방에는 옛집에 걸맞은 전통가구와 침구가 갖춰져 있다. 나주시에서 운영해 숙박료가 저렴한 편이다. 나주시 금성관길 13-8, 09:00~18:00 관람료 무료, 061-332-6565 영산강 황포돛배와 영산포등대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면서 농수산물을 실어 나르던 황포돛배가 사라졌다가 30여 년 만에 관광용으로 부활했다. 영산포 선착장을 출발해 다시면 회진리 천연염색문화관 앞 풍호나루터까지 약 5km 구간을 왕복 운항한다. 영산포등대는 내륙 하천에 남아 있는 유일한 등대다. 지금은 등대 기능을 상실했지만, 밤마다 불을 밝혀 옛 추억을 되살려준다. 나주시 등대길 80, 10:00~17:00 월요일 휴무, 영산포 선착장 매표소 061-332-1755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와 도래한옥마을 산포수목원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에는 명품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있다. 수목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풍산 홍 씨 집성촌인 도래한옥마을도 둘러볼 만하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홍기응 가옥과 홍기헌 가옥, 한국 내셔널트러스트의 시민유산 제4호로 선정된 도래마을옛집 등 조선시대 양반집이 많다. 나주시 산포면 산제리 산23-7, 09:00~17:00 입장료 무료, 061-336-6300
- 2020-09-28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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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캉스’ 떠나는 가족 위한 호텔 패키지
- 여름내 휴가를 못 즐긴 이들이라면 추석 연휴를 활용해 바캉스를 떠나는 이른바 ‘추캉스’도 고려해볼 만하다. 손주들과 함께라면 더욱 즐거워질 객실 패키지와 더불어 추석을 겨냥해 출시된 다양한 프로모션을 소개한다. 사진 각 사 제공 3대가 즐기는 패밀리 투게더 패키지 제주신화월드는 독립된 침실 구성으로 몸이 불편한 어르신은 물론 아이, 어른 모두 편히 쉴 수 있는 ‘패밀리 투게더’ 패키지를 마련했다. 3대가 함께하는 추석 여행을 계획한다면 제격이다. ‘스카이 온 파이브 다이닝’ 디너 뷔페, ‘탐모라 찜질방’ 이용권을 비롯해 손주를 위한 키즈 액티비티 프로그램들을 제공한다(12월 30일까지, 55만6000원부터). 시그니처 추석 선물 세트 파크 하얏트 서울은 추석을 맞아 그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시그니처 아이템을 모아 선물세트를 선보인다. 코너스톤 시그니처 육류세트(35만 원)를 비롯해, 월악산 벌집 꿀(14만 원), 다문 디저트 플레이트(23만 원), 소믈리에 주류 셀렉션(30만 원, 45만 원), 컴포트 오일 디퓨저 세트(17만 원) 등으로 구성됐다. 추석 당일인 10월 1일까지 호텔 2층 이탈리안 레스토랑 ‘코너스톤’을 통해 예약 및 문의가 가능하다(유선 또는 온라인). 풍천장어 해피아워 9월부터는 두 달간 프리미엄 뮤직 바 ‘더 팀버 하우스’에서 ‘풍천장어 해피아워’ 프로모션을 진행한다(1인 6만9000원). 가을을 맞아 살이 통통하게 오른 일품 풍천장어를 활용한 장어구이, 덮밥 등을 세트로 맛볼 수 있다. 여름내 지쳐 있던 원기도 보충할 겸 가족과 함께 영양만점 다이닝을 즐겨보면 어떨까. 오아시스 카바나 패키지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은 여름휴가의 아쉬움을 가족과 함께 달랠 수 있는 ‘오아시스 카바나 패키지’를 10월 11일까지 선보인다. 흰 천으로 둘러싸인 카바나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온수 시설이 설비된 개인 풀과 푹신한 침대형 소파와 다이닝 테이블이 마련돼 있다. 4인(73만 원부터) 또는 6인(80만 원부터) 가족에게 안성맞춤이다. 취향 존중 가을 패키지 5종 워커힐 호텔 앤 리조트는 가을 패키지 5종을 구성했다. 식사까지 호텔 내에서 해결하고픈 이들을 위한 ‘가을이 폴폴’(그랜드 워커힐, 24만 원부터), ‘폴 겟어웨이’(비스타 워커힐, 31만 원부터), 일상 탈출과 힐링을 위한 ‘어텀 이스케이프’(28만5000원부터), ‘가을 하늘’(33만 원부터) 등 다채로운 패키지를 11월 30일까지 만날 수 있다. 호텔 개관 20주년 기념 특별 객실 패키지 JW 메리어트 호텔 서울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한가위처럼 풍성한 객실 패키지를 운영한다. 디럭스 객실 숙박 시 마카롱 세트와 JW 시그니처 향 룸 스프레이 세트를 선물한다. 호텔 내 카페와 레스토랑 20% 할인을 비롯해, 당첨 확률 100% 경품 이벤트에도 참여할 수 있다. 추석 연휴의 끝인 10월 4일까지, 200개 객실로 한정 판매한다(22만 원).
- 2020-09-0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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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기 충전 돕는 ‘이열치열’ 건강법
- 본격적인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여름은 양(陽)의 기운이 넘쳐 밖으로 뻗어나가는 계절이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다. 더위가 지속되면 체내의 양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온다. 시니어들 가운데 요즘 따라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쉽게 피곤함이 느껴진다면 더위로 인한 기력 소모가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 땀을 많이 흘렸을 때 몸이 지치는 걸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양기소모는 면역력을 떨어뜨리면서 각종 질환에 취약하게 만들어 주의가 필요하다. 이 상태로 겨울을 맞이할 경우 건조한 날씨, 심한 일교차로 잔병치레를 할 수도 있다. 여름에 양기를 충분히 흡수해야 겨울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 폭염 속 부족해진 기력을 채울 건강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흔히 ‘더위 먹었다’는 말은 기력이 쇠해 나타나는 ‘기허증’(氣虛證)을 의미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양기를 북돋워줘야 하는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평소보다 잘 먹고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보양식 섭취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뱃속의 기운은 차가워져 소화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 몸 안팎의 균형을 맞추려면 열기를 머금은 따뜻한 성질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열을 열로 다스리는 ‘이열치열’ 건강법이다. 많은 사람이 복날에 삼계탕, 추어탕 등 따뜻한 음식을 찾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여름철 보양식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음식이 삼계탕이다. 닭의 따뜻한 성질이 원기를 더해주고 위장을 덥혀 소화 능력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부재료인 인삼, 황기는 기운을 보충하고 생강, 마늘은 몸의 열을 올려준다. 육개장과 추어탕도 훌륭한 여름 보양식이다. 육개장에 들어가는 쇠고기는 소화를 돕고 떨어진 기운을 북돋워준다. 함께 먹는 파, 마늘 등도 따뜻한 성질을 지닌다. 추어탕은 기력 보충과 갈증 해소에 좋으며 위를 보호해 신진대사를 돕는다. 특히 미꾸라지는 단백질 함유량이 높아 소화가 잘되며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 성분이 함유돼 성인병 예방에도 좋다. 이외에 최근 인기가 높은 전복, 낙지, 장어 등도 여름철 건강관리에 도움을 주는 음식들이다. 그러나 지나친 보양식으로 양 기운이 넘칠 경우 오히려 몸의 열을 소통시키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과잉 섭취를 삼간다. 음식뿐 아니라 생활 방식도 중요하다. 날씨가 무덥다고 에어컨이나 선풍기 등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몸에 해롭다. 특히 항시 따뜻하게 해줘야 하는 배가 찬 기운에 자주 노출되면 소화불량으로 인한 복통, 설사를 일으키기 쉽다. 특히 여성의 경우 자궁 등 여성 질환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복부와 허리에 냉기가 오래 머물면 주변 근육이 경직되어 요통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증상들은 모두 냉방병의 일종이다. 냉방병 하면 감기 같은 질환을 떠올리기 쉬운데, 냉방병의 본질은 과도한 냉방에 신체가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만큼 증상이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더울 때는 적절히 냉방은 하되 배와 골반만큼은 따뜻하게 해주고 특히 잠잘 때는 배에 이불을 꼭 덮어준다. 반대로 머리는 시원하게 해주는 게 좋다. 머리에 열이 많으면 두통이나 어지러움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화가 나거나 오랜 시간 일에 몰입할 경우 머리가 무겁거나 몽롱해질 때가 있다. 피가 머리로 몰려 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름철에는 기온이 높아 머리가 과열되기 쉬우므로 시원하게 해줘야 한다. 이는 “찬 기운은 올라가고 더운 기운은 내려가야 건강하다”는 한의학의 ‘수승화강’(水乘火降) 원리와도 통한다. 적당한 강도의 신체 활동을 규칙적으로 해주는 것도 여름철의 급격한 체력 저하를 막고 몸의 기운이 원활히 순환하는 데 도움이 된다. 걷기, 조깅, 맨손체조, 스트레칭 등 유산소운동을 통해 땀을 내주면 체내 각종 노폐물 배출에도 효과적일 뿐 아니라 몸의 기혈 순환을 촉진해 건강상태를 개선할 수 있다. 또 규칙적인 운동은 근력 및 유연성을 강화하고 숙면도 돕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아진다.
- 2020-07-29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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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철 '척추피로증후군' 이렇게 대처하자
- 바캉스의 계절 여름이 찾아왔지만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은 올여름 휴가 풍경을 크게 변화시킬 전망이다. 해외여행은 사실상 어려워졌고 생활 방역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국내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이 대다수다. 실제 한 글로벌 여행사가 국내 성인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7%가 ‘올해는 국내로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답했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되고 복지시설들이 휴관하면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시니어들은 여름휴가만큼은 재충전의 기회로 삼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휴가를 계획할 때 건강과 안전에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한다. 올여름 휴가 시즌에 가장 주목받을 여행 테마는 인파가 몰리지 않는 ‘산과 들로 떠나는 여행’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람들과 거리두기도 용이하고 환기도 자연스럽게 이뤄져 실내보다는 코로나19 감염 위협에서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파가 몰리지 않는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자차를 이용해야 할 경우가 많다. 또 휴가철이라 교통대란을 피하기 쉽지 않다. 올여름 휴가는 국내로 여행하는 사람이 많아 더더욱 그럴 것이다.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도로 위에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더구나 앉은 자세는 서 있을 때보다 허리에 가해지는 하중이 1.5배가량 늘어난다. 차량에서 앉은 자세로 오래 있을 경우 척추에 부담이 돼 목과 허리가 뻐근해지기도 하고 통증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척추피로증후군을 의심해봐야 한다. 척추피로증후군은 장시간 불편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을 때 발생하는 근골격계 질환이다. 방치하면 추간판탈출증(디스크)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척추·관절 노화가 진행 중인 시니어는 대수롭게 여기면 안 된다. 척추피로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목과 허리 근육의 긴장을 줄여야 한다. 장거리 운전 시에는 엉덩이를 운전석 뒤로 밀착해 허리와 목을 곧게 펴야 척추가 받는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다. 또 적어도 2시간 간격으로 휴게소나 졸음쉼터에 차를 세우고 스트레칭을 해줘야 한다. 귀가 후 온욕으로 긴장을 풀어주는 것도 방법이다. 40℃ 전후의 따뜻한 물에서 즐기는 온욕은 수축된 몸을 이완, 완화해준다. 이때 목욕물에 한약재나 허브를 넣어주면 더 효과적이다. 만약 피로가 쉽게 해소되지 않거나 목과 허리 통증이 3일 이상 지속된다면 전문가를 찾아 진단을 받아봐야 한다. 한방에서는 추나요법을 비롯해 약침, 침 등 한방통합치료로 척추피로증후군을 포함한 허리 통증을 다스린다. 추나요법은 경직된 관절과 뭉쳐서 굳은 근육을 교정해 신체 균형을 바로 잡고 통증을 해소해준다. 한약재를 정제한 약침과 침 치료는 기혈과 체액의 순환을 촉진해 빠른 회복을 돕는다. 올여름은 여느 해보다 더 더울 것이라고 한다. 더운 날씨는 신진대사를 빠르게 하고 땀을 많이 흘리게 해 기운을 소모시킨다. 지친 상태의 몸은 자연스레 면역력도 떨어져 각종 질환에 취약한 상태가 된다. 따라서 여름에는 섭생이 중요하다.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먹어 양기를 몸 안에 저축해야 한다. 삼계탕, 장어, 추어탕 등과 같은 보양식을 이따금씩 섭취해주면 좋다. 등산이나 산책 등 적당한 신체 활동과 함께 규칙적인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것도 체력 저하를 막고 체내 기운이 원활히 순환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름은 ‘내실을 기하는 계절’이다. 휴가를 즐기는 데 집중하느라 건강관리에 소홀하면 양기를 소진한 상태에서 가을과 겨울을 맞이하게 돼 잔병치레를 할 수도 있다. 휴가지에서도 평상시의 생활 패턴을 유지하면 좋다.
- 2020-07-0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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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콤쌉싸래했던 주문진 여행
- 본격적인 여름에 들어서자 하루에도 몇 번씩 마스크를 집어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산들산들 부는 자연의 바람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사람들 북적이는 서울을 벗어나 쪽빛 하늘, 쪽빛 바다가 있는 청정지역에서 말이다. 간절히 원하면 길이 보인다 했던가? 지인에게서 지난 수요일 전화가 왔다. “이번 주 주문진 아파트 비었는데 놀러가실래요?” 어이쿠 이게 웬 떡? 예정에 없던 주문진행 주말 나들이가 이뤄졌다. 주문진에 위치한 아파트는 지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직원 복지를 위해 구입해 펜션으로 이용하는 곳이다. 몇 번 주말에 가겠다고 요청했는데 늘 대여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나보다. 6월 초 주말 스케줄이 빈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놀기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런 찬스가 아주 쏠쏠하다. 이렇게 해서 2박 3일 주문진 여행이 시작됐다. 사실 동해를 안 가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대 중반을 넘겼으니 가 봐도 수십 번은 가봤을 곳이지만 그래도 일상을 떠나 바다를 보러 간다는 것 자체는 늘 설렘과 기대를 주는 아주 작은 행복 중 하나다. 특히 요즘과 같은 코로나 정국에서는 말이다. 나이 들면서 여행을 떠나니 여행지에서의 즐거움이 예전과 좀 달라진다. 광폭 행보로 이곳저곳 사진 찍기 바쁘게 움직이는 것보다 묵을 곳 정해놓고 동네 마실 다니듯 기웃거리며 보고 먹고 마시는 소소한 즐거움이 더 새롭다. 금요일 오후 동서울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탔다. 주문진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장치찜을 먹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문진수산시장 쪽으로 재빠르게 걸어갔다. 수요미식회에서 소개한 장치찜을 먹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점심부터 굻고 왔다는 후배와 나는 부지런히 걸어 마지막 손님을 받고 한숨 돌리고 있던 월성식당에 무사히 터치다운했다. 닫으려는 문을, 서울에서 지금 막 내려왔다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며 읍소! 결국 주방일하는 남자 사장님에게 다시 앞치마를 두르게 하고 마침내 한 접시 수북한 장치찜을 맛봤다. 어라? 근데 이 장치라는 놈, 아구도 아닌 것이 장어도 아닌 것이 요상한 형태의 생선이었다. 살은 말랑말랑하고 적당한 기름기에 매콤한 양념이 어우러져 아구찜보다 기름지고 장어와는 달리 매콤해서 밥도둑이 따로 없다. 여기에 곰배령 생옥수수 막걸리까지 소박한 호사를 부리고 숙소로 갔다. 밤늦게 아파트에 도착해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잠이 들었다. 주위의 깊은 어둠 때문일까? 불면증 때문에 고생이라는 후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며 잠을 자기 시작했다. 도시에 살아서 불면증일까? 늦은 저녁을 포식해서 잠이 쏟아진 걸까? 어찌됐든 오랜만에 자는 꿀잠이 도시에서도 계속되길 바랄 뿐이다. 아침부터 막국수 아파트가 위치한 주문진 소돌마을. 이른 아침부터 아파트 근처 곳곳에서 닭을 키우는지 여기저기서 닭이 우렁차게 울어댄다. 푹 자고 일어나 상쾌한 몸으로 한 바퀴 돌며 동네를 염탐해봤다. 멀지 않은 도로변에 깨끗하게 생긴 막국수 집이 눈에 띈다. 오픈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8시부터 문을 연단다. 흠 아침부터 막국수 먹는 사람이 많나? 부지런히 숙소로 돌아와 나갈 채비를 하고 막국수 집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인데 벌써 막국수 먹으러 온 외지인들이 하나둘 눈에 띈다. 실내를 둘러보니 심상치가 않다. 어젯밤 주문진수산시장 인근 월성식당에서 먹었던 장치찜도 수요미식회에 나왔다는 정보를 갖고 찾아갔는데 아침부터 막국수 먹겠다는 가상한 용기를 예뻐하셨는지 이 집 막국수 맛 또한 환상이다.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드렸다. 심드렁한 주인아저씨 왈, “우리 집 맛집이여. 모르는가벼?” 이번 여행은 주문진에서만 머물기로 했다. 일단 차가 없기 때문에 장거리 이동이 불편하기도 했고 몇 번씩 가본 곳들을 또 가려고 렌터카나 택시를 이용하기도 내키지 않았다. 오직 주문진 바닷가를 거닐고 산책하고 샛길, 오솔길, 큰길… 길이란 길은 다 걸어 다녔다. 시골 산길을 걷다 분위기 넘치는 돌계단이 있어 올라가 봤다. 계단을 오르자 양지바른 언덕에 고즈넉하게 단장돼 있는 누군가의 무덤이 나타났다. 뜻하지 않게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에게 잠깐 묵념을 하고 내려왔다. 묘역이 웅장하지 않지만 품위 있어 보였다. 후손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졌다. 언덕 위 묘역에 잠드신 분보다 이렇듯 품격 있게 관리하는 후손이 더 대단해 보였다. 한참 돌아다닌 끝에 의외의 산책 코스를 발견했다. 주문진 바닷가 건너편 향호리에 위치한 호수 향호다. 향호는 강릉 경포대, 고성 송지호와 함께 강원도의 대표적인 석호라고 한다. 석호란 파도가 해변의 모래를 밀어 올려 둑을 쌓고 모래섬이 커지면서 바닷물이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길을 막아버려 생긴 호수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려 다시 그곳에 정착한 실향민 혹은 이민자 같다. 마치 내 신세 같다고나 할까? 바다 깊이가 얕고 밀물 썰물의 차이가 큰 서해안은 갯벌이 발달해 석호가 생기기 어렵지만 동해안을 끼고 있는 강원도와 함경도에는 큰 석호가 많단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포대가 가장 큰 석호 중 하나이며 향호는 주문진 바닷물이 돌아가지 못한 작은 석호다. 바람의 길, 트레킹 코스 향호를 지나는 트래킹 코스도 발견했다. 이른바 강릉 바우길 13구간 바람의 길이다. 이 길은 주문진 해변에서 시작해 산간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교각을 지나 향호 호수 제방을 따라 산길까지 15km 구간을 트레킹하는 코스다. 산길을 거닐며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어 바람의 길이라고 불린단다. 이름이 참 예쁘다. 강릉 바우길은 제주 올레길 성공에 자극받아 지난 2009년도부터 개발됐다고 한다. 바우는 바위를 의미하는 강원도 말로, 백두대간의 시작인 강원도의 트레킹 코스를 일컫는 용어로 정착됐다. 기존 산악 등산로와 연결돼 손쉽게 개발된 코스 외에도 바우길 개척대가 신설한 코스 등을 합해 현재는 총 19구간으로 확대됐다. 2010년에는 사단법인 강릉 바우길이 설립돼 스토리텔링과 코스 개발 등을 맡고 있다. 산에 난 오솔길 등산로를 걷는 즐거움도 있지만, 강릉 바우길 13구간 바람의 길에서 향호 호수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에서 매력을 느낀다. 산책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호숫가 옆에 나무데크를 설치해 호수를 노니는 물새들을 바라보며 갈대 숲길을 따라 걷다가 주문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흐르는 땀을 식힐 수 있다. 중간중간 설치한 등나무 쉼터 벤치에 앉아 동네 촌로가 가꿔놓은 정갈한 경작지에서 자라는 야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 집 뒷마당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것 같은 편안함을 맛보게 된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노래 한 곡을 듣고 일어났다. 이제 주문진 바닷가로 향할 참이다. 이른 아침 막국수 한 그릇으로 채운 배가 신호를 보낸다. 회는 언제 먹을 것이냐고. 주문진 바닷가를 향해 걸어가 본다. 관광객들이 모여 있는 주문진 바닷가에서 벗어나 소돌해변 쪽에서 들어가면 식객 허영만 화백의 백반기행에서 소개한 섭국 전문점 미경이네 횟집이 나온다. 메뉴를 찬찬히 살피다 일단 오늘은 회를 먹고 섭국은 내일 아침 식사로 도전해보기로 했다. 자연산 회와 소주 각 1병씩으로 운동의 피로를 적당히 풀었다. 부산스럽지 않은 여유로운 여행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이른 저녁의 술 한잔도…. 바닷가를 걷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해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버스정류장 앞에 외국 여학생들이 까르르르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해 버스정류장을 살펴보니 2017년 BTS가 발매했던 ‘봄날’ 앨범 재킷 사진을 촬영했던 향호 해변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세상에나!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구나. 우리 역시 라인업을 하고 쪽빛 바닷가를 배경으로 녹슨 버스정류장에서 인생 샷 한 컷을 건졌다. 아무 할일 없이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는 일은 인생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중대 사건이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면 몰라도 연령대별로 해야 하는 과업에 낙오하지 않고 패스하기 위해 우리는 늘 여유가 없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바쁘게 살아야 했다. 지하철 환승 칸을 체크하며 바꿔 탈 때마다 종종걸음으로 옮겨 다녔고 버스로 환승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이제 인생의 숙제는 다 끝냈고 난 나의 길을 찾아 이길 저길 돌아다녀본다. 내게 맞는 길은 어디 있는지, 이 길은 맞는 길인지, 또 이 길은 어디로 맞닿을 길인지. 섭미역국은 모범생, 섭국은 깡패 같은 맛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마지막 할일 하나가 남았다. 섭국을 맛보는 일. 미각여행의 끝을 보고 말리라. 둘째 날 이른 아침 짐을 챙겨 일단 미경이네로 향했다. 아침 식사로 섭국을 맛보기 위해서다. 섭은 자연산 토종 홍합으로 옛날에 쌀이 귀하던 시절, 어민들이 채소에 밀가루 반죽을 입혀 홍합을 듬뿍 넣어 끓이는 국에 이 채소를 넣고 매콤하고 알싸하게 끓여 먹었던 국이라고 한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사장님이 서울 촌놈들을 대상으로 섭의 유래와 섭국 끓이는 법까지 일장 강의를 하신다. 강의가 끝난 후 섭국이 나왔다. 우리가 자주 먹는 국밥의 내용물이 홍합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해장에도 좋고 아침 식사 한 끼로도 충분했다. 그때 식사가 끝난 것을 본 사장님이 또 출동. 허영만 선생이 섭미역국은 모범생, 섭국은 깡패 같은 맛이라고 설명했다며 우리에게 맛이 어땠는지 물어보신다. 아! 집요한 사장님. 이래서 성공했구나. 우리 둘은 “알싸한 맛이 깡패 같아요“ 하고 대답해줬다. 매우 흡족해하신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해안가 산책을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걷다가 언뜻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어 가까이 가봤다. 도로변 나뭇가지에 나란히 꼬챙이에 꽂힌 오징어가 말라가고 있었다. 다리는 모두 잘린 채. 그 오징어 사이사이로 보이는 쪽빛 바다, 쪽빛 하늘…. 2박 3일 완벽한 힐링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뭔가 빠진 듯 내내 허전함이 느껴졌다. 뭐지? 이번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꺼내본다. 맨 마지막 사진. 다리 잘린 오징어. 그 사진을 보자 떠올랐다. 맞아! 주문진은 오징어였지? 다음 여행을 기약해본다.
- 2020-06-1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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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그대로 재미지게 사는 것이 중년의 멋”
- 그 누구보다 신사다운 이미지의 배우, 어느 장면에 나와도 화면 안에 그만의 안정감을 불어넣는 독보적인 배우라고 하면 홍요섭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경자년(庚子年)인 올해 예순다섯 살, 서글서글한 눈매와 주름이 더 매력적인 남자, 참 묵직한 홍요섭을 만났다. 배우로서의 삶도 어언 40여 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세월 다져진 배우로서의 캐릭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홍요섭은 브라운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배우다. 다작을 하지 않고 겹치기 출연도 사양하며 철저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지향하며 살기 때문이다. “제대 후 스물여섯쯤 됐을 때였죠. 그 시대가 소위 ‘말하면 잡혀가는 시대’였는데 소극장 공연에서 그 ‘잡혀갈 소리’들을 시원하게 하는 거예요. 원래는 전공이 신문방송학과였는데 그걸 본 이후 연극영화과로 전과하게 됐죠.” ‘생각도 못한 일’. 홍요섭은 자신이 배우가 된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런 길을 선택한 자신에게 아버지가 한 말은 평생 지침이 되었다. “너 하고 싶은 거 해라. 다만 네 아내나 친구들 창피하지 않게 해라.” 삶의 철학을 만들어준 아버지 홍요섭을 말하려면 그의 아버지인 홍영의 목사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그의 삶 전반을 지배했던 것은 아버지의 존재와 삶의 태도, 남겨진 말들이다. “아버지가 독특한 분이셨어요. 교육자이자 목사님이기도 하셨고…. 김일성과 동갑이셨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죠.(웃음)” 故 홍영의 목사는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서자 토지 개혁이 시행되기 전에 일가친척을 다 데리고 나와 해주를 거쳐 인천에 도착했다. 그리고 교육사업을 하고 목사로 일하면서 평생을 나눔에 힘썼다. “처음엔 참 답답했죠. 우리나 좀 주지.(웃음) 결혼하면서 얼마나 창피했는데요, 가진 게 없었으니. 그런데 아내의 친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었어요. 결혼하기 전 그분이 ‘홍 박사 자식이면 볼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장인도 저희 결혼을 쉽게 결정하시게 됐어요.” 그가 지금 전무이사로 있는 브리지스톤골프 또한 그의 아버지의 신념과 일치하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소위 팔리는 것만 만드는 게 아니라 여성, 아이들 등 보다 다양한 사람을 위해 제품을 만들고 사회공헌 철학이 투철한, 나누는 회사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 뭐 있나?”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그와 그의 아버지의 기질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쾌하게 치러진 아버지 장례식 “아버지는 82세에 떠났어요. ‘나 갈 때 됐다’ 하며 ‘화장해서 버려라. 뼈다귀 들고 돌아다니지 말고. 그리고 살아 있을 때 잘해라. 장인·장모님 자주 찾아뵙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라고 말씀하셨죠. 사람들 다 모아놓고 마지막 인사를 받은 후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홍영의 목사의 죽음을 맞이하는 거침없는 말투에서 그 시절 이북 사람다운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그런 태도는 아들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 한마디로 끊어주셨어요. ‘남들이 보기 싫은 거 하지 말고, 아내 될 사람한테 부담 안 가게 해라.’ 그 말을 들으며 ‘아, 이렇게 날 잡는구나’ 싶었죠. 형들은 공수부대도 가고 해병대도 가고 저도 군대를 힘들게 갔다 왔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 신경 안 썼어요. 하나님 다음이 국가였던 분이셨으니까.” 그런 아버지를 둔 집안답게, 장례식도 매우 유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문상객들이 ‘이게 장례식이야?’ 하며 놀랐어요. 우리는 아버지가 좋은 데 가셨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도전정신으로 스쿠버에 더 열중 “알아서 해라. 단, 재밌게 살다 가라”고 말하는 강골과 기백이 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만큼, 홍요섭은 외면의 신사적인 이미지와 내성적인 인상과는 정반대로 단련된 사람이었다. 그가 방송계와 친해질 수 없는 것 또한 자신의 기준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프로그램에는 나갔지만 겹치기 출연은 거절했다. 예전에 예능 프로그램에 한 번 나간 적이 있는데 나가보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오버해야 해서 다시는 안 나갔다. 밤무대도 그의 성정과는 맞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산을 타고 오지 여행을 다니며 다이버가 됐다. “아버지 말씀을 생각해보니 갇혀 지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이 200년 살면 모를까. 다양한 걸 해봐야지. 팔라우에 조그만 집을 갖고 있었어요. 드라마 제의가 들어와도 다이빙 약속이 있다고 거절할 정도였죠.”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시작했던 그의 다이버 생활은 45세까지 20여 년가량 이어졌다. 그런데 나이가 들자 조금 힘들어졌다. 그때부터 골프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제대로 커리큘럼을 배워보자 하고 미국으로 가서 고덕호 프로와 함께 생활했죠. 시니어 프로 골퍼 자격까지 얻었어요. 그런데 그때 무릎에 문제가 생겼죠.” 골퍼의 삶에 찾아온 좌절 프로 자격까지 획득해 골프 선수로서의 미래도 생각할 수 있었던 시기, 드라마 촬영을 하던 중 무릎이 시큰시큰하더니 확 주저앉는 일이 벌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많이 해서 무릎이 상했기 때문이다. 큰 수술을 한 뒤 재활했지만 골프 선수로서의 미래는 어렵게 되었다. “회사로부터 2년간 지원을 받기로 했는데, 2년 차에 주저앉은 거죠. 그래서 많이 좌절했어요. 화가 나서 골프대를 쳐다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십자 인대 말썽으로 좌절해 있던 그에게 재활치료 차원에서 의사가 승마를 권했다. 2007년의 일이었다. “말? 돈 많은 사람이나 타고, 영화에서나 보는 거 아니냐고 되물었죠. 아니라는 거야. 승마는 허리 아프거나 고지혈증이 있는 사람한테 권하기도 한다는 거예요. 알았다 하고 화성 구석으로 가서 시작했어요. 누가 올려주면 올라가고 손잡고 끌어주면 덜렁거리며 가고…. 그런데 승마를 하니 가장 먼저 바뀌는 게 변이었어요. 장이 좋아지고 살이 조금씩 빠지니까 ‘괜찮네,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싶었죠.” 한 번 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집념 그로부터 14년여가 지났다. 그는 여전히 승마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젠 승마 코치이자 마사회 홍보위원으로도 활동한다. 또 누구보다 열정적인 승마 예찬론자가 되었다. 그가 데리고 있는 애마 이름은 ‘아줌마’. 올해 열여섯 살로 전성기는 지난, 사람으로 치면 중년쯤 되는 말이다. “독일에서 승마하는 사람에게서 구했어요. 그 사람이 ‘여자처럼 대하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막막했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당근은 쓰다듬으며 줘야 먹고, 엎드려 있을 때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지도 않아요. 우아한 성격인데, 함께 지내면서 여자가 이렇구나 싶었어요. 말에게서 많이 배웠죠.” 사람들은 말이 제멋대로 움직이면 말에게 문제가 있어 그러는 줄 착각한다. 그러나 그는 말이 잘못 행동하는 건 다 기수 탓이라고 말한다. “승마는 착석부터 잘해야 해요. 말 위에 타면 겁이 나니 고삐를 잡아당기는데, 앉아 있는 걸 잘해야 말에게 부담을 안 주거든요. 달리기는 한두 달 하면 누구든 할 수 있어요.”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이지만 승마의 진정한 매력은 교감에 있다고 한다. “말은 타는 것이 아니고 말이 나를 태워주거든요. 말의 컨디션을 살피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말과의 즐거움과 기쁨을 배우고 나니 사람과의 관계, 삶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깨닫게 되더군요. 승마가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욕심을 덜어내야겠다는 생각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도 했다고. “승마는 제 인생의 마지막 스포츠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진짜 운동할 사람만 하게 되었거든요. 5~6년 전부터 말을 탄다는 얘기가 없어졌어요. 대신 운동했느냐고 물어봐요.” 그가 인상적으로 보는 현상은 젊은 부부들이 승마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돈은 꽤 들어도 주말 이틀 동안 승마로 운동을 하면 다른 스포츠를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들 중엔 아예 마주가 되려고 말 값을 알아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도중 자신의 말 ‘아줌마’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보여줬다. 걸음걸이에서 다른 말들과는 구별되는 비범함과 안정감이 느껴졌다. 문외한이 봐도 멋있는 그의 말을 보니 그가 말에 빠져든 이유가 단숨에 체감됐다. 정치 입문 권유도 있었으나… 무릎 수술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 비슷한 시기에, 그의 삶을 바꾼 비사(祕事)가 하나 더 있었다. 정치와 관련된 일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위치의 사람에게 정치계의 유혹이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과거에 국회의원 영입 제안이 왔었죠. 그런데 보니까 정말 황당한 사람들이 국회의원 후보로 나오더라고요. 이건 아닌 거 같다 싶어서 사양했죠. 그런데 제가 무릎을 다쳤을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선출돼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죠. 그때 방송 유세에서 마지막 지지 연사가 저였어요.”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속사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빈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에게 방송에서 지지 연설을 해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정당인이 아니고 정치하는 사람도 아닙니다’라는 전제를 하고, 연설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죠. 그리고 그걸로 녹화를 하기 위해 방송국으로 갔어요.” 그런데 막상 방송국에 도착하니 문제가 생겼다. 논조가 바뀐 원고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읽어보니 완전히 정치인들이나 하는 말들이었다. 녹화 당일이라는 급박한 타이밍에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BBK사건이 터졌기 때문이죠. 상대를 물어뜯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원래 원고대로라면 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걸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거였죠. 그런데 당장 정치인이 될 판이었어요. 함께 온 와이프와 친구에게 보여주니 ‘이거 하면 큰일나겠다’고 걱정을 하더군요.” 그를 섭외한 쪽에서 설득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었다’. “정치를 할 거면 벌써 했지.(웃음) ‘못합니다’ 하고 돌아왔어요. 나중에 보니 4~5년 속 썩을 뻔했죠. 그래도 BBK사건 전의 원고는 논조가 참 좋았는데, 아쉬워요.” 채운 것들 덜어내며 달관에 이르다 홍요섭에게는 달관한 사람의 넉넉함이 있다. 세계 곳곳의 오지를 여행하고 바다를 사랑한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얻게 된 태도다. “어지간한 건 탁탁 털어버립니다. 당하기도 많이 당했어요. 변호사 친구들이 난리쳤지만 고발하기 싫어서 넘어간 일도 있죠. 그런데 돌아보니 그게 내 게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죠.” 그 역시 요즘 나이 들면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석모도다. “인천 석모도에는 강도 있고 낚시도 잘되고 물 좋은 온천 단지도 있어요. 거기에 조그맣게 집 짓고 사는 것도 좋죠. 장어를 키워보고도 싶어요. 난 물을 좋아하니까. 장어를 키우는 게 손이 많이 간답니다. 그럼 계속 일할 수 있으니까, 재밌잖아요? 흙 묻히고 사는 일.” 그는 자신을 아무도 기억 못하면 좋겠다고 담담히 말했다. 자신이 작정한다고 사람들 기억에 남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가 사랑하는 물과 바람처럼, 삶을 사랑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아버지처럼 그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그의 시원시원한 대답에는 미련이 없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은 길만을 걸었기에 잘못되지 않았고, 돈과 명예로도 살 수 없는 그 진정한 자유를 즐기는 그가 다시 한번 부러웠다.
- 2020-01-13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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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하게 걷고 실비로 먹는 ‘Road & food' (3)
- 여수엑스포역은 관광지 철도역으로는 만점짜리 자리에 있다. 열차에서 내려 역 구내를 빠져나오자마자 엑스포 전시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 왼쪽에서는 쪽빛 바닷물이 넘실댄다. 일정이 바쁜 사람들은 열차 도착 시각에 맞춰 역 앞에 긴 줄로 늘어서 있는 택시를 바로 잡아탄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끌리듯 엑스포 전시장으로 직진한다. 높낮이 없이 평평하게 설계된 전시장 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걸어도 걸리는 곳이 없다. 시니어들에겐 맞춤 산책길이다. 자기도 모르게 왼쪽에 있는 바다 쪽으로 접근해 걷게 된다. 조금 걷다 보면 왼편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조그만 섬 하나가 눈에 잡힌다. 소문 난 오동도다. 전시장 끝자락에서 이어지는 다리가 있으니 그 섬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만만한 섬! 천천히 걸어도 30분가량이면 다 돌 수 있다. 이 섬이 소문난 건 동백꽃 덕분이다. 동백꽃은 한창 피어나는 겨울보다는 지기 시작하는 초봄에 장관을 이룬다. 바닥에 무리를 이뤄 떨어져 있는 빨간 꽃송이와 꽃잎들은 처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들에게도 질 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지라고 충고하는 듯하다! 그 교훈을 실감 나게 체득하려면 동백꽃이 떨어지는 3~4월께 오동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 실비로 먹는 ‘시골밥상...’ 식당 오동도 구경을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뱃속에서 신호가 오게 마련이다. 더욱이 이곳이 맛의 고장 여수임에랴! 오동도 앞에서 돌산으로 가는 해상 케이블카 탑승장 바로 밑에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다. 8000원짜리 여수 가정식 백반을 파는 ‘뚱땡이 할머니의 밥상 시골밥상’ 집은 언제나 손님이 차고 넘쳐 끼니때는 이용이 쉽지 않다. 칠순을 넘긴 뚱땡이 할머니와 마흔도 채 안 돼 아이를 넷이나 출산한 ‘애국자’ 따님이 운영한다. 맞은편 엠블 호텔 투숙객들도 이 식당을 많이 찾는단다. 특별한 반찬은 없지만, 하나하나 간을 잘 맞춘 맛깔스러운 반찬들과 매일 바뀌는 국 종류 때문에 밥 한 그릇을 더 시키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식사를 끝낸 자리엔 종업원이 큰 통을 들고 가서 남은 ‘아까운’ 반찬들을 모두 담는다. 음식 재활용을 않는다는 걸 손님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좁은 자리가 꽉 차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아 사진도 못 찍고 문전에서 아쉬운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아쉽기는 뚱땡이 할머니와 따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문 앞에 서서 손님을 그냥 보내는 눈빛에 미안함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진남관 앞 ‘서울해장국’ 식당 그렇다고 애써 맛집을 다시 찾아야 한다면 여수가 아니지.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진남관. 그 오른쪽 앞과 길 건너편 거리에 여수의 오래된 먹자골목이 있다. 모두 다 소개하고 싶은 맛집들이다. 그중에서도 시민들이 많이 찾는 ‘서울해장국’이 있다. 아니, 맛집 고장 여수에서 엉뚱하게 옥호를 ‘서울~~’로 쓰다니! 그러나 사실 이상할 게 없다. 수십 년 전 여수가 관광지로 채 발돋움하기 전에 개업했으며 그 당시만 해도 서울은 대단한 동경의 대상이었기에. 마치 50, 60년대 서울의 빵집과 양복점 등의 이름으로 뉴욕, 파리, 런던 등을 많이 썼던 것처럼. 이 식당은 새벽 5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영업한다. 바싹 말린 우거지를 장어로 국물 맛 낸 된장국에 넣어 푹 끓여낸 우거지국, 바삭바삭한 식감을 즐길 수 있는 콩나물국, 두툼한 선지국은 모두 한 그릇에 6500원, 돼지고기를 아낌없이 넣은 김치찌개(8천 원) 등이 하나같이 별미다. 이 식당은 특히 밑반찬에 들이는 정성이 남다르다. 그 때 그 때 구워주는 생김을 찍어 먹게 집간장과 양념간장을 함께 내주고 갓 만들어 내오는 숙주나물, 고추멸치볶음, 계란부침 등도 모두 싱싱하고 맛깔스럽다. 주인 할머니와 따님이 조그만 식당을 무려 종업원 10명가량을 쓰며 운영한다. 김 굽는 직원, 식재료 다듬는 직원, 우거짓국 끓이는 직원, 김치찌개 끓이는 직원 등이 제각각이다. 맛집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불친절은 찾아볼 수 없고 직원들이 손님상을 수시로 체크하며 모자란 반찬은 알아서 채워주는 친절함까지 보인다. 손님들이 저마다 이 식당 칭찬하기에 바쁘다. 팔순이 넘어 보이는 어르신이 선짓국을 들고 계신다. 궁금해서 말을 붙여보았다. “40년 단골이지. 맛도 맛이지만 정성이 들어간 건강식이고 배고프던 시절 추억을 떠올려 더 좋지.” 여러모로 완벽한 맛집인 셈이다. 그 밖에도 복춘식당, 조롱박 등 여수의 별미를 즐길 수 있는 맛집들이 이 일대에 많다. 서대회, 아귀찜, 아귀탕, 생선 내장탕, 돌게장, 삼치회 등이 주메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일대의 많은 아귀찜 식당과는 비교도 안 되게 풍부한 아귀를 넣은 아귀탕이 1만 원. 둘이서 다 먹기 부담스러운 양의 아귀찜도 2만 원 미만이다. 마산 일대가 주산지로 알려진 아귀는 여수에서 더 풍족하게 요리된다. 여수 앞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삼치의 선어회는 여수의 특징적인 음식 중 하나다. 처음 접하면 물컹한 식감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지만 익숙해지면 삼치회만 찾을 정도로 중독성이 있다. 구이로 먹는 삼치 머리는 클수록 맛이 좋다. 진남관. 이순신광장. 장군섬 식사를 마치고 여수의 상징인 진남관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이순신 광장을 ‘참배’ 할 차례다. 여수를 하루만 둘러봐도 곳곳에 있는 이순신의 흔적을 발견하곤 새삼 놀라게 된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거처했던 곳까지 여수에 있고, 거북선을 건조하고 수리하던 ‘선소’도 세 곳이나 있다. 어머니 처소는 보존작업이 마쳐져 관광객들의 발길이 띄엄띄엄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는 그 앞에 새로 이순신 공원 조성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심지어 실재하지 않은 소설 속 인물까지 끄집어내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데 ‘점잖은’ 여수 시민들은 ‘이순신 자원’을 그리 요란하게 활용하지 않는다. 기자도 여수를 몇 번 찾기 전까지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전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해 곳곳에 이렇게 많은 흔적을 남긴 줄은 알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사후에도 여수민들을 여러모로 ‘살려주고 있는’ 중이다. 거북선 빵집, 이순신 햄버거 등 여수 상가의 옥호 중 이순신과 거북선이 가장 많이 활용된다. 여수민들의 충무공에 대한 애정과 충성도 역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나라와 국민을 위한 충정이 한없는 불멸의 영웅은 여수에서 그 숨결이 가장 생생하게 느껴진다. 진남관은 2020년 봄까지 보수 일정이 잡혀있어 내부 관람이 금지돼 있다. 광장의 장군 동상 앞에 실물 크기로 지어졌다는 거북선도 기자 일행이 찾았을 때는 수리 중이어서 입장을 할 수 없었다. 관람객이 너무 많아 수시로 보수를 해야 한단다. 진남관 입구와 장군 동상 너머 장군섬에 이르는 곳까지 장군의 위세가 당당하게 뻗쳐져 있는 일대를 보는 것만으로 성웅 충무공에 대한 참배를 대신해야 했다. 참고로 해방 즈음까지는 장군 동상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차 있었단다. 종포공원 거쳐 오동도 가는 길 이순신 광장에서 오동도 방향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자산공원이 있는 방향으로 나지막한 언덕길을 거쳐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몇 해 전부터 여수의 포장마차 촌으로 유명해진 종포공원을 거쳐 바다를 끼고 가는 길이다. 우선 종포공원부터 걸어보기로 한다. 이 일대는 여수의 오래된 바닷가 놀이터 중 하나다. 지금은 공원으로 명칭이 붙여져 있지만, 낚시꾼이 모여들고 고기잡이배가 들락날락하던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바로 옆에 새벽마다 경매가 열리고 종일 생선 판매가 이뤄지는 선어 시장이 있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낚시꾼들도 간간이 모습을 보인다. 몇 년 동안 성시를 이루던 포장마차 촌은 인근 하멜기념관 옆으로 옮겨졌다. 정비 차원이었던 모양인데 아직은 포장마차 촌의 모습으로 보기엔 익숙하지 않다. 행정력도 자연스러움에 초점이 맞춰져야 바람직한데... 종포 공원 일대에 펜션 서너 곳이 있고 펜션 부근에 맛집이 꽤 늘어서 있다. 포장마차와는 구분되는 식당들이다. 여수 특산물 중의 하나인 돌문어 식당이 많다. 돌문어삼합, 돌문어라면 등등. 진화한 여수 음식 종류 중 하나는 해산물을 활용한 라면 요리다. 이 돌문어 식당엔 점심때부터 줄이 늘어서 있다. 젊은 층이 많다. 돌문어라면 뿐만 아니라 해물라면, 돌문어삼합 등 새로운 메뉴가 계속 개발되고 있다. 돌문어라면 1만 원, 네 사람이 먹어도 남을 정도의 푸짐한 돌문어삼합은 3만9000원. 기자도 몇 년 전 여수에 와서 라면 요리를 ‘개발’했었다. ‘꼴뚜기 라면’. 시장 아지매한테 1만 원만 주면 한 접시 가득 주는 꼬록(여수에선 꼴뚜기를 꼬록이라고 부른다)을 특별한 레시피 없이 라면과 함께 끓여주면 색다른 국물 맛을 내는 아주 맛깔스러운 라면이 완성된다. 강추!!! 몰포 나비와 나비 반도 여수 자산공원은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공원이다.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걸어 올라가기에 좀 힘이 들기 때문이다. 관광버스들도 코스로 잘 잡지 않는다. 그러나 노인 체력으로도 천천히 걸어 올라갈 만 하다. 아침저녁으로 산이 아름다운 자색으로 물든다 하여 자산으로 이름 붙여진 그 산속 공원엔 여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또 생뚱맞은 이름의 전시관이 하나 있다. 곤충체험관인데 이름하여 ‘빠삐용(나비) 전시관’이란다. 여수에 빠삐용 전시관이라니.. 입구에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 역을 맡았던 미국 배우 ‘스티브 맥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여수에 빠삐용? 생각해보고 거듭 생각해 봐도 생뚱맞다! 전시관에 들어가 설명을 들어봤다. 여수시의 전직 공무원 한 분이 현직에 있을 때부터 집념으로 나비를 채집해 개인적으로 만든 전시관이다. 시에 기증해 지금은 시가 운영하고 있다. 수많은 나비 표본 중에서 대표적인 전시물이 저 멀리 중남미 원산의 몰포나비. 푸른 금속성 광택이 나는 아름다운 몰포나비와 그 나비 모양을 빼닮은 여수반도 그림이 나란히 전시돼있다. 아하! 그제야 조금 몰포나비 채집자의 의도가 이해될 듯했다. 그는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폈음 직하다. “지구 저편에서 몰포나비가 너울너울 날아와 한반도 끝자락에 앉았다. 여수반도다!” 여수의 강남이라는 웅천에서 여수에서는 걷다가 가끔 시내버스도 타볼 만하다. 2층 관광버스도 좋지만 무작정 시내버스를 타고 한가롭게 시내를 돌다 보면 대충 여수 시내의 윤곽이 들어와 다음날 일정에 참고하기에도 좋다. 물어물어 버스 몇 번 갈아타고 여수의 강남이라는 웅천지역으로 갔다. 고급 아파트촌이 있고 인공 해변이 조성돼있으며 입구 상가엔 여수답지 않게 주차난이 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서울 사람들에겐 식상한 풍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구원은 ‘예울마루’다. 전시회와 음악회를 수시로 여는 이 건물은 여수 산단에서 매출을 많이 올리는 어느 대기업이 외국인 건축가에 설계를 맡겨 지어서 시에 기부한 것이다. 건물 외벽 없이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 건축물 문외한이 보기에도 시원하다. 건물 바깥쪽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있는 것도 특이한 모습이다. 예울마루 관람을 마치고 15분가량 옆의 산길을 돌아 걸어가면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짓고 수리했다는 선소가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또 다른 작품 ‘선소’ 이 선소는 여수반도를 에워싼 바다의 ‘골목길’ 맨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적군에게 노출되지 않는 장소를 고른 것이다. 실제로 가까운 웅천 쪽에서도 선소는 보이지 않고 웅천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촌에서도 이곳이 보이지 않는다. 입지 선택이 탁월했던 셈이다. 그러니 여유롭게 안정적으로 거북선을 짓고 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북선과 수전의 각종 전략 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지모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순신 장군은 영국의 넬슨 제독과 함께 세계 해전사에서 최고의 명장으로 기록된다.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일본의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 장군에게 존경을 표한 것도 거북선 뿐만 아니라 해전 전술, 주민 친화력, 그리고 선소 운영 능력 등을 보았기 때문이다. 충무공께 새삼스러운 존경의 묵례를 보내고 이번엔 선소 길 건너의 그 유명한 보리굴비 식당으로. 명사들이 찾는 여수의 보리굴비 식당 ‘석정’ 굴비 하면 영광 굴비, 법성포 굴비다. 그런데 여수에 명사들도 즐겨 찾는 보리굴비 전문식당이 하나 있다. 옛 여천 지역, 여수 시청 부근에 있는 석정 식당이다. 이 식당도 덕장은 법성포에 두고 있다. 법성포에서 굴비를 말려 여수로 가져와 조리한다. 식당에서 판매하는 굴비 정식엔 굴비와 함께 해물 보쌈김치, 여수산 각종 나물 등 17가지의 반찬을 내놓고 직원이 각 테이블을 돌면서 먹기 좋은 크기로 굴비를 찢어 준다. 기름기 잘잘 흐르는 보리굴비 속살, 군침이 돈다. 보리굴비 정식 2만 원. 여수엑스포 준비위원장을 지낸 전 건설교통부 장관 강동석 씨, 지금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윤정희, 백건우 씨 부부 등 명사들이 오래된 단골이란다. 여수에서 11월에 열렸던 세계한상대회 때의 에피소드 한 토막. 대회기간 중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온 참가자들이 각자 이 식당을 찾았다가 우연히 만나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단다. 각국 한인들에게까지 이 식당 소문이 났다는 식당 측의 자화자찬이다. 식당 판매보다는 전국에 보내는 택배 영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선물 포장된 다섯 마리에 택배비 포함하여 6만5,000원, 10마리 세트는 12만5,000원. 구여수와 신여수 여수시청이 있는 구 여천지역과 구 여수를 잇는 길은 크게 두 갈래다. 내륙 쪽 버스들이 다니는 길과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이다. 웅천지역을 지나 구 여수로 가는 길목 왼쪽에 한국화약 소유 대지가, 있으며 그 건너편엔 여수반도에서 가장 탁 트인 넓은 바다가 있다. 트레킹 코스로 개발하든지 아니면 대단위 리조트로 개발할 만한데, 웬일인지 방치되고 있다. 띄엄띄엄 바닷가 길을 둘러 가면 구 여수의 전통 항인 국동항이 나온다. 옛 여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동항엔 항상 낚싯배들이 수백 척 정박해있고 경매장에선 새벽마다 활발하게 경매가 이뤄진다. 바로 앞 경도엔 미래에셋이 경도 리조트 재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경도는 골프장과 함께 여름 한 철 먹거리인 하모(갯장어의 일본말)의 주산지이다. 경도와 고흥 일대의 하모를 최고의 갯장어로 꼽는다. 경도 안엔 하모를 회와 샤부샤부(일본말. 유비끼라고도 함)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있다. 혹자는 일본사람들처럼 갯장어에 기름이 끼는 7월 이후엔 맛이 별로라고도 하고 혹자는 그때의 하모 맛이 일품이라고도 한다. 정답은 없고 각자 취향에 따르면 될 일이다. 자매식당 등 국동항의 맛집들 그러나 여름철이건 겨울철이건 바닷장어 요리를 꾸준히 하는 식당들이 여수에 많다. 특히 국동항 주변엔 갯장어를 통째로 끓여 내놓는 통장어탕 식당이 몇 곳 있다. 그중에서 여수 시민들 사이에서도 소문 난 자매식당을 찾았다. 장어를 잘라서 국 끓이는 게 아니라 통째로 넣어 끓인 후 손님상에 내와서 종업원이 국자로 장어를 으깨서 먹기 좋은 크기로 나눠준다. 된장 국물에 우거지를 넣어 장어 맛과 함께 시원하고 구수한 맛이 잘 어우러진다. 일반적으로는 토막 낸 장어를 숙주나물을 넣어 함께 끓여 내놓는다. 통장어탕 14000원, 장어 소금구이 2만 원을 받는다. 여수에 가장 많은 식당이 장어탕 식당과 돌게 간장게장 식당이다. 장어탕 식당은 수산시장 안, 시청 주변, 시내 곳곳에 있다. 그중 자매식당이 가장 생명력이 있다는 여수 지인들의 전언이다. 이 식당에서 밑반찬으로 내놓는 멍게 젓갈이 또 일품이다. 자꾸 더 달라는 손님이 늘어나 포장 판매를 시작했단다. 한 통(3kg)에 3만 5000 원, 택배비 4000원이란다. 여수의 수산시장 여수에는 수산시장이 몇 곳 있다. 수산시장, 특화시장, 교동시장, 선어시장. 그중 수산시장이 중앙시장 격이다. 몇 년 전에 이 시장에 큰불이 나서 시장이 완전히 전소했었다. 주변의 지원과 상인들의 복구 노력에 힘입어 업그레이드된 새 시장 모습으로 태어났다. 시장 내 수십 곳 되는 활어 판매대에서 펄펄 뛰는 생선을 잡는 활발한 모습은 장관이다. 생선 잡는 사람들의 정신 건강이 매우 좋다는 어느 보고서에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새횟집 아지매. 수십 년간 온 가족이 이 업에 종사해왔단다. 종포공원 옆에 자그마한 건물도 소유하고 있다. 재빠르고 시원시원하게 생선을 잡고, 손님과 흥정도 시원시원하게 하며, 횟감은 그야말로 맛깔스럽게 썰어낸다. 전문가가 따로 없다. 일본 시장 상인들과 일 합을 겨루게 해봤으면 좋겠다. 여기서 회를 떠 가져갈 수도 있으나,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2층 식당으로 올라가 상차림 값으로 한 사람당 4,000원과 매운탕값 5,000원을 주고 식사를 한다. 서울의 가락시장, 노량진 시장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실비다. 생선 산지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세 명이 싱싱한 돔, 갑오징어, 농어, 삼치 등 각종 회를 남길 정도로 푸짐하게 먹고도 6만 원 미만을 냈다. 시내의 실비식당 ‘와사비’ 게장 골목 소개는 생략한다. 여수의 전통적인 먹거리 중의 하나인 간장게장 식당들은 이제 시설과 메뉴에서 한 등급 더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대신 시내의 횟집 한 군데를 더 소개하고 여수의 맛집 소개를 마친다. 여서동 네거리 근처의 ‘와사비’식당. 옥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름 때문에 최근 곤욕을 치렀단다. 얼마 전부터 보는 시선들이 좀 누그러지더란다. 옥호를 ‘고추냉이’로 바꿀 생각은? 이제 겨우 정착단계인데요... 이 식당은 문 연 지가 몇 해 되지 않았다. 6년 전께 문을 열자마자 여수에서 오래된 횟집들을 제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유는 초간단. 남자 사장이 새벽에 바다에 나가 직접 생선을 잡아 오고 여수 주변에서 구하기 어려운 건 통영 등지로 달려가 구해와서 오후부터 바쁘게 회를 만든다. 혼자서 몇 사람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게 몇 년을 일해 얼굴이 수척해졌을 정도다. 부인은 서비스 메뉴를 개발하고 상차림을 연구하는 한편 수시로 주방에 들어가 남편과 주방 보조 여인을 돕기도 한다. 이들의 노력은 상차림과 회접시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 식당도 갈치회, 삼치회가 일품이다. 가격도 비싸지 않다. 회 한 접시에 4만 원에서 6만 원이면 세 사람이 푸짐하게 즐길 수 있다. 맛집 몇 곳을 소개했지만, 여수의 장점은 어느 식당에 가든 다른 지방에 비해 만족할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식당마다 자부심이 대단하고 음식에 들이는 정성이 손님들 눈에도 보일 정도다. 전통인지, 요즘의 트렌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특히 엑스포 이후 시설과 함께 식당들의 자세가 확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다. 먹방과 인터넷에서 칭찬은 많이 받고 악평은 덜 받는 곳, 여수가 됐다. 오동도 입구의 일출 여수에서 일출을 보는 장소로는 돌산섬 일대를 많이 꼽는다. 그중에서도 섬 끄트머리의 향일암(向日庵)은 일출로 유명해진 곳이다. 정동진과 함께 일출 사진이 워낙 많이 나돌아다녀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일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여수 현지의 정보로는 요즘 오동도 입구의 일출이 장관이란다. 새벽에 일어나 이틀을 기다렸다. 해는 우리의 애를 태우면서, 햇살만 내려보내 고기잡이배들을 비춰줄 뿐이었다. 붉게 솟아오르는 태양 대신에 빛줄기만 담았다. 일정상 일출 장면 촬영을 포기하고 서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하면서 여수 지인에게 일출 촬영을 간곡히 당부했다. 간곡히 간곡히 거듭 부탁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일출 사진이 메일로 왔다. 쌩큐 오 선생! 쌩큐 여수!
- 2019-12-13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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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철 보양식 ‘비빔밥’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더운 여름철에 엉뚱하게 비빔밥 이야기를 한다.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보양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이가 많다. 지난번에도 ‘보양식은 없다’고 말했다. 비빔밥이 여름철 보양식이다. 굳이 찾자면 우리가 ‘환자식’이라 부르는 죽(粥)이 바로 보양식이다. 한식에는 보양식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매스컴까지 나서서 복날 음식 특집을 방송하는 지경이다. 외국 어느 나라도 매스컴까지 나서서 복날 음식을 소개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약한 나라들도 이렇게 ‘보양’을 찾아서 헤매지는 않는다. 우리만 튼튼하고 보양식을 먹지 않는 외국인들은 여름철이면 비실비실한가? 보양식 관련해서 한국은 문화적 후진국이다. ‘문화적 문맹’ 수준이다. 1년 내내 ‘치맥’을 먹는 한국인들이 보양식으로 또 닭을 먹는 것도 코미디다. 정작 인삼 소비는 나날이 줄고 있다. 일상에서는 인삼을 거의 찾지 않으면서, 복날에만 인삼 들어간 삼계탕을 먹는 것도 우습다. 치맥은 건강에 좋든 나쁘든,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뿐이다. 한식이 추구하는 바는 평(平)의 세계다. 음식을 평하는 게 하는 일이니, 여름철만 되면 보양식 원고청탁과 더불어 ‘보양식 강의’도 심심치 않다. 백화점 문화강좌나 공무원, 회사원 연수 프로그램 등에서도 ‘보양식 강좌’를 청한다. 강의를 할 경우 “한식은 평의 음식이다. 그러므로 보양식은 없다”고 미리 선을 긋는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상당히 실망하는 눈치다. 더러, “에이, 뭐야?” 하는 이도 있다. “오늘 낮에도 여름철 보양식으로 삼계탕을 먹었는데 보양식이 없다니 그럼 삼계탕, 자라, 장어, 민어를 먹고 힘이 나는 건 뭐지?”라고 묻는 이들도 있다. 겨우 21일 자란 병아리 수준의 닭을 먹고, 내 몸에 보양을 했다고 좋아하는 것은 슬프지 않냐고 묻는다. 그 닭이 항생제, 성장촉진제 등을 먹으며 A4 용지보다 좁은 바닥에서 자랐음을 아냐고 묻는다. 그제야 고개를 갸웃하며 한편으로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끝내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반가에는 보양식이 있지 않았냐고 따지는 이들도 있다. 굳이 보양식으로 꼽자면 죽과 동짓날 팥죽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비빔밥이다. 비빈다? 여러 음식을 골고루 먹다 1994년,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선생의 인터뷰. “내 예술은 비빔밥 예술이다. 동양과 서양, 일본과 한국 그리고 과거와 현대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한 그릇에 넣고 비빈다. 그릇 속에서 여러 요소들이 뒤섞이고 충돌, 화합한다. 제3의 맛을 만들어낸다. 내 예술은 비빔밥 예술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비빔밥을 비빌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은 앞으로 디지털 시대에 선두에 설 것이다.” 25년 전의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넷이 아직 민간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무렵이다. 스마트폰도 없었다. 백남준 선생은 마치 예언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맞았다. 미국 가수 마이클 잭슨이 한국에 와서 여러 번 비빔밥을 먹었다고 자랑하지 말자. 어느 항공사에서 비즈니스 클래스 이상의 기내식으로 비빔밥이 가장 인기가 높았다고 우쭐할 일도 아니다. 백남준 선생이 먼저 비빔밥, 비빔밥 문화를 정확하게 예언(?)했다. 비빔밥은 여러 가지 식재료를 동시에 섞고 비비는 것이다. 비빔밥을 먹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여러 가지 식재료를 골고루’라고 말한다. 이게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여러 가지, 골고루 먹으면 다양한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다. 보양식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여러 가지 식재료’를 섞은 맛을 정확하게 구분한다. “◯◯가 비빈 비빔밥이 제일 맛있다”는 표현도 있다. 전북 전주의 한 비빔밥 집에서는 늘 주인이 밥을 비벼준다. 비빔밥을 비빌 줄 모르는 이는 없다. 이 가게에 가면 필자도 늘 “비벼주세요”라고 청한다. 주인이 ‘숟가락 두 벌로’ 쓱쓱 비벼주면 희한하게 맛있다. 전주 사람들이 설마 비빔밥을 비빌 줄 모르랴? 현지 주민들도 늘 “비벼주세요” 한다.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빔밥을 위한 변명 비빔밥의 역사는 길고 넓다. 조선시대 중기 문신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쓴 ‘기재잡기’에는 무관 전임(田霖, ?∼1509)과 혼돈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혼돈반은 비빔밥이다.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혼돈반’과 같이 만들어 내놓으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웠다. 무관 전임은 조선시대 전기의 관리다. 15세기 중후반과 16세기 초반을 살았던 이다. 지금을 기점으로 셈하자면 500년 훨씬 전의 사람이다. 그때도 비빔밥이 있었다, 100년 이상 뒤의 사람인 문신 박동량이 그 내용을 남겼다. 특별하게 설명하지도 않고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혼돈반’이라고 했다. 흔하게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전임이 먹었던 것은 생선과 채소를 넣고 비빈 밥이다. ‘혼돈반=비빔밥’이다. ‘혼돈’은 뒤섞여 어지러운 상태다. 혼란, ‘골동(骨董)’과도 비슷하다. 비빔밥을 ‘골동반’이라 부르고,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끓인 국물을 골동갱(骨董羹)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자연스레 받아들이지만, 외국인에게 비빔밥은 어렵다. 일본 언론인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씨는 “비빔밥은 양두구육의 음식”이라고 했다. ‘양두구육’은 전임의 혼돈반과 닮았다. “처음 그릇에 내올 때는 굉장히 아름다운데 그걸 마구잡이로 섞어서 먹는다. 처음과 끝이 전혀 다른 음식이다.” 일본인의 시각으로 보기에 한국 음식, 비빔밥은 그야말로 뒤죽박죽, 아름다움을 파괴한 음식이다. 처음은 멀쩡한데 막상 먹을 때는 뒤섞어서 엉망으로 만든 음식이다. 겉으로는 ‘양 대가리’를 걸어놓고, 정작 ‘개고기’를 파는 식이다. 일본인들의 가마메시[釜飯, 부반]는 솥밥이다. 한국 비빔밥과 닮았지만 전혀 다른 음식이다. 비빔밥은 비비지만 가마메시는 간장을 얹어서 떠먹는 식이다. 한반도의 돌솥밥은 비비지만, 일본의 가마솥 밥은 마지막까지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가마메시가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비빔밥이 맛있다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가마메시는 닫힌 음식이다. 고명을 더하거나 빼지 못한다. 처음 나온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고수한다. 정해진 식재료와 정해진 방식을 따른다. 한국 비빔밥은 열린 음식이다. 정교한 아름다움만 자랑하는 닫힌 음식이 아니다. 비비다가 말고 나물을 더 넣기도 하고, 밥이나 장을 더하기도 한다. 뒤죽박죽인 듯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비비는 비빔밥의 ‘설계도’를 머리에 넣고 있다. 비빔밥, 평(平)을 향하다 너른 들판. 동네 사람들이 두레로 일을 한다. 논주인은 새참과 식사를 준비한다. 광주리에 여러 나물을 준비하고 밥을 큰 그릇에 담은 다음, 들판에 와서 광주리를 펼친다. 일하던 동네 사람들이 광주리 주변에 모여든다. 큰 그릇을 하나씩 받아든다. 그다음부터는 자유다. 밥을 얼마나 퍼 담든, 어떤 나물을 담든, 모두 자유다. 싫어하는 나물은 먹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나물은 많이 넣어도 된다. 고추장을 넣든 된장을 넣든 모두 개인의 취향이다. ‘흔한 식재료를 귀하게’ 사용하는 것이 한식의 길이다. 나물 잎사귀와 뿌리, 줄기의 맛이 다름을 우리 조상들은 알았다. 전 세계에서 산나물을 이렇게 흔하게, 자주, 많이 먹는 민족은 없다. 산나물, 들나물로 밥상도 차렸다. 나물들을 넣고 비비면 산채비빔밥, 산나물비빔밥이다. 세상의 모든 산에는 산나물이 있다. 세상의 어떤 민족도 산나물을 넣고 비비는 ‘산채비빔밥’을 식당 메뉴로 내놓지 않는다. 산나물과 비빔밥은 우리 고유의 건강식이다. 산나물을 이토록 다양하게 먹는 나라는 없다. 비빔밥을 먹는 민족도 없다. 산나물 비빔밥은 우리 고유의 것이고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보양식이다. 여름철이면 몸의 영양 균형이 무너진다. ‘영양 부족’이 아니라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균형이 허물어지면 영양을 더할 것이 아니라 균형을 잡아야 한다. 특정 고기와 생선 등을 탐할 일이 아니다. 다양한 식재료를 동시에 섞은 비빔밥이 보약이자 여름철 보양식이다. 여러 영양소와 미네랄, 효소 등으로 몸의 균형을 잡아주니 건강식이다. 현대인들은 영양 부족이 아니라 영양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름 파이프가 고장 난 차량에 자꾸 휘발유를 부을 일은 아니다. 영양 과잉으로 힘든 몸에 영양분을 더할 일은 아니다. 여러 가지를 넣고, 섞고 비빈 음식, 비빔밥은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시대다. ‘더하는 음식’, 호화로운 식재료가 아니라 ‘빼는 음식’, 소박한 음식이 필요한 시대다. 여름철, 시큼한 열무물김치, 보리밥, 고추장 조금 넣은 열무김치비빔밥이 그립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 2019-07-3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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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보양식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조금은 마뜩잖은 내용으로 글을 시작한다. 곧 여름철이다. 여기저기서 보양식을 찾는다. 주로 닭, 장어, 민어다. 답답하다. 여름을 앞두고 ‘보양식 원고 청탁’도 많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전화로 설득한다. “보양식은 없다. 제발 보양식 원고 청탁하지 말라”고. 보양식. 참 그럴 듯하지만, 우리 시대의 탐욕이자 꼼수다. 음식을 먹었는데 몸도 좋아진다? 더하여 ‘정력에 좋다’는 소문까지 돌면 그야말로 횡재한 기분이 든다. 동식물의 여러 부위가 보양의 재료로 등장하기도 한다. 식사를 했는데 갑자기 몸이 좋아진다니 싫어할 사람이 없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다. 식사하고 강장(强壯)도 된다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다. 음식점 주인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초복이면 오피스타운의 해물탕 전문점에서도 삼계탕을 내놓는다. 하루에 100그릇 이상 삼계탕을 판다. ‘초복 특수’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보양식은 없다. 음식 먹고 몸도 튼튼, 강장, 강정(強精)까지 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보양은 ‘保養’ 혹은 ‘補陽’이다. 전자의 보양은 ‘잘 보호해 양육한다’는 뜻이다. 보양식은 ‘보양(補陽)’의 의미를 갖는다. 몸의 ‘양기(陽氣)’를 잘 지키고 더하는 일이다. 우리 선조들은 늘 ‘평(平)’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정조 19년(1795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환갑을 맞았다. 그해 윤이월 9일부터 16일까지 수원 화성(華城)에서 환갑잔치가 열렸다. 이때 차린 밥상의 반찬 그릇 수가 모두 16기(器). 그중 음의 반찬이 8기, 양의 반찬이 8기로, 평을 맞추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기록된 ‘혜경궁 홍씨 환갑날 밥상’은 한식 최고의 밥상이라도 해도 좋다. 이 밥상의 구성은 ‘보양’이 아니라 ‘평(平)’이다. ‘평’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남거나 모자라지 않음이다. 진정한 보양식은 음양이 조화를 이룬 ‘평(平)의 밥상’이다. 동지(冬至)는 깊은 겨울. 해가 가장 짧은 날이다. 황진이 시조의 한 구절,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낼 만큼 밤은 길다. 해는 양(陽)이다. 이날부터 해가 조금씩 길어진다. 음의 기운이 강하다. 양을 도와야 한다. 붉은색은 양이다. 음식 중 양의 성격을 지닌, 붉은 팥죽을 먹는다. ‘동짓날 팥죽’은 양을 돕는 소박한 식품이다. 우리 선조들은 ‘동짓날 팥죽’을 양을 보완하는, 보양식으로 여겼다. 그야말로 보양하는 음식이다. 반가의 보양식 중 으뜸은 민어다? 누가 이야기했는지 불확실하다. “반가의 보양식 중 으뜸은 민어, 두 번째는 삼계탕, 세 번째는 장어, 마지막이 개고기”라는 표현이 있다. 엉터리다. 추정컨대,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표현일 것이다. 개장국[狗醬]은 특별한 보양식이 아니라, 상식(常食)이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여섯 종류의 가축을 길러 먹도록 했다. 육축(六畜)으로 소, 말, 개, 돼지, 양, 닭이다. 소는 농경의 도구이니 함부로 도축하지 못했다. 금육(禁肉)이다. 말은 교통수단이다. 돼지는 하는 일 없이 인간의 곡물을 축낸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개와 닭만 남는다. 닭은 개체가 작으니 주막 등에서 내놓기는 힘들다. 주막에서 개고기[狗]를 된장[醬] 푼 물에 넣고 끓이면 구장, 개장국이 된다. 조선시대 후기, 청나라 만주족의 습관을 따라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이 생긴다. 개장국 대신 ‘쇠고기[肉]+개장국’, 육개장이 태어난다. 민어는 가장 흔한 생선이었다. “특별한 것이 없으니 별도로 기록하지 않는다”(허균의 ‘도문대작’)고 했던 생선이다. “큰 조기는 민어, 작은 것은 조기”라 했다. 별다를 것 없다. 조선시대 기록 어디에도 민어를 보신, 보양 음식으로 사용했다는 흔적은 없다. 삼계탕의 인삼은 1~2년 자란 수삼이다. 어떤 방식으로, 누가 길렀는지 알 수 없다. 약효? 알 수 없다. 농약은? 비료는? 알 수 없다. 닭은 20여 일 기른, 병아리 치고도 어린 것이다. 영양가? 짐작할 수 없다. 맛은 물론 엉망이다. 삼계탕에 견과류나 들깻가루를 듬뿍 얹는 이유다. 이걸 먹고 보양을 하겠다니 부끄럽다. 20여 일 자란 병아리를 먹고 보양을 할 만큼 우리 살림살이가 허망하지는 않다. 장어도 마찬가지. 일본인들의 ‘우나기’를 옮긴 것이다. 일본인들은 초여름 ‘우나기 동(민물장어 덮밥)’을 먹고, 우리는 화력 좋은 불에 구워 먹는다. 장어에 바르는 간장 양념? 일본과 비슷하다. 장어 뼈 곤 국물에 여러 가지 한약재(?)를 넣고 졸인다. 여기에 물엿, 조미료, 어설픈 효소를 넣는다. 보양? 알 수 없다. 우리 선조들의 최고 보양식은 ‘죽(粥)’과 ‘미음(米飮)’이었다. 몸이 아픈 대비전(大妃殿)에 죽을 올렸다는 기록은 여기저기 남아 있다. 지금보다 가난하던 시절이다. 왕실이라 해도 지금 서민들이 먹는 음식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음식 약’ ‘보양식’은 죽이었다. 인삼을 넣고 끓인 죽이 있는가 하면, 좁쌀을 넣고 끓인 것도 있었다. 왕대비께서 빈청에 언문(諺文)으로 하교하기를, “(중략) 나와 같은 병으로 연명하여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속미음(粟米飮)을 마셨기 때문인데 이것까지 들지 않고 날짜를 표시해놓고서 죄다 봉해서 놔두었다. 비록 미음을 든다고 대전(大殿)에 말하기는 하였으나 지금의 병세는 실로 부지하기 어렵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10년(1786년) 12월 1일 왕대비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다. 좁쌀 넣은 미음으로 연명하고 있는데 험한 일을 당하니, 이제 그것도 끊겠다고 한다. 비록 아들인 정조에게는 “먹고 있다”고 말하지만 먹지 않고 봉해두었다고 밝힌다. 이때도 보양식은 좁쌀을 넣은 미음이었다. 조선시대의 국왕 중, 가장 장수한 이는 영조대왕이다. 평생 스트레스도 심했다. 재위 52년, 83세까지 살았다. 장수의 비결? 간단하다. 소식(小食)이다. 영조는 입이 짧았다고 전해진다. 가려 먹되 자주, 조금씩 먹었다. 보양식은 소식이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 2019-05-27 1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