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등으로 상품이나 서비스 주문을 받아 오프라인으로 해결해주는 ‘O2O 서비스’(Online to Offline Service). O2O 서비스 앱 중 가장 보편화된 것이 배달음식 앱이나 택시 부르기 앱 등이다. 그밖에 활용해볼 만한 몇 가지 앱을 소개한다.
도움말 SNS 소통연구소 이종구 소장
◇ 크린 바스켓
세탁 수거·배달 서비스 앱이다. 원하는 세탁물의 종류와 수량을 체크하고 세탁 수거 및 배달 일시를 선택해 이용할 수 있다.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운영하며, 실시간 세탁물 추적·관리가 가능하다.
◇ 당신의 집사
집 안 청소 가사 도우미를 부를 수 있는 앱이다. 집 안 구조(방, 욕실, 부엌 등 선택), 청소 시간을 직접 입력해 견적을 낼 수 있다(기본 2시간, 2만6000원). 원하는 날짜·시간을 예약하면 엄격한 면접과 현장 실습을 통해 선발된 집사 클리너가 방문한다.
◇ 세차왕
출장 세차 예약과 세차장 검색을 손쉽게 할 수 있다. 세차 종류, 일자, 시간, 차량 정보를 입력하면 세차왕(직원)이 직접 사용자의 차량이 있는 곳에 찾아가 세차 서비스를 한다. 친환경 워터리스 세차법으로 물 사용량과 외부 손상을 최소화했다.
덜덜거리는 중고차를 끌고 남편을 마중 나갔다. 미리 나와 기다리던 남편은 반갑게 가족을 향해 달려왔다. 남편은 그날 저녁을 쏘겠다며 ‘엘폴로코’라는 멕시칸 음식점으로 안내를 했다. 온갖 인종 사람들이 주문을 하기 위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처음으로 먹어보는 훈제 치킨요리는 소오스가 약간은 이상했지만 그런대로 동양인 입에는 맞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필자는 일 주일에 한번씩은 멕시칸 음식을 즐겨먹었고, 다이어트 식으로도 아주 좋았다. 온 가족이 기분 좋게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편이 일하는 세탁소는 다우젼옥스라는 동네에 있었고 필자의 집은 시미벨리라는 곳에 있었다. 23번 후리웨이를 타다가 다시 101번 후리웨이를 타고 또다시 118번 후리웨이를 타야만 비로소 씨미벨리라는 시골 동네로 들어 설수가 있다. 말이 시골동네이지 숲이 우거지고 나무들이 무성한 완전한 전원도시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 라이브러리(기념 도서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동네이기도 하다. 집들은 거의 궁전처럼 커다랗고 전형적인 서부 미국의 베드타운 도시였다.
동네 뒤편으로는 뺑뺑 돌아 겹겹이 울창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그 아래 골짜기에 아늑하게 집들이 분포되어있는 분지 형 도시였다. 백인들은 주로 은퇴를 하고 조용히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 도시는 한적했다. 한인들도 약 300명 가량 살고 있어 너나 할 것 없이 가족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특히 여름이면 뜨겁고 건조해서 더운 동네로 이름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한낮에는 그 열기로 집밖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어 나가 돌아 다닐 수가 없었고, 밤에는 너무 건조한 탓에 코가 헐기도 했다. 모든 실내에서는 가습기와 에어컨이 왕왕 돌고 있었다.
퇴근길에 이런 저런 이야기로 남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앞으로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석양의 노을이 길고 멋지게 깔려 있었다. 너무나 또렷하고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필자는 눈을 뗄 수가 없어 가족들에게 손짓을 하며 가리켰다. 남편과 두 딸도 두리 번 거리며 멋진 노을장면을 눈에 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아무리 쳐다봐도 무어라 표현 할 수 없는 묘한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멋진 사진 같은 장면은 무언가 지나침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필자의 집 쪽으로 다가 갈수록 매쾌한 냄새가 풍겨오며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열심히 앞을 주시하며 산등성이 고개 길을 돌아 씨미벨리 초입으로 들어서자마자 남편은 소리를 질렀다.
“산불이다. 산불! 저거 불 난 거야!” 자세히 보니 정말 뺑뺑 둘러진 산등성이를 따라 불꽃이 길다랗게 잔잔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필자가 본 것은 석양이 아니라 산불이 나면서 시작된 불꽃의 여명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바라보는 잊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당황과 흥분이 시작되었고, 필자가 사는 동네 쪽이라 우선 빨리 집으로 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동네 입구로 들어서자 회오리 바람이 탄내를 몰고 다니기 시작했다. 차 창문을 꼭 닫고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도 아파트 주변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필자가족은 궁금해서 그냥 집에 머물 수가 없었다. 불구경 이나 싸움구경은 누구도 못 말린다고 다같이 구경을 나가기로 합의 끝에 온 가족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집에서 조금 멀리 산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동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와서 이리저리 더 잘 보이는 장소를 찾고 있었다. 맥없이 돌아다니는 차들이 어찌나 많은지 혼란스러웠으나 모두들 긴장한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북쪽 산등성이로 갔을 때는 이미 도착한 차들이 빈틈없이 들어 차있어서 차를 세울 공간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 백인 흑인 멕시칸들은 각양각색의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그 신비로운 자연의 놀라운 한 장면을 담아두기 위해 하나같이 애를 쓰고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불꽃들을 찍어대느라 산등성이에 서있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필자가족도 얼떨결에 빈손으로 나온 것을 후회 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눈으로 구경하기도 바쁜데 그것들을 촬영까지 한다는 여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불은 조용히 점점 더 길게 뻗쳐 나갔고 그 불 줄기는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타고 밤하늘에 꽃처럼 피어올라 석양의 노을처럼 환하게 비추어나갔다. 목이 칼칼하게 매연으로 가득한 공기였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한인주민들은 들뜬 마음으로 이 집 저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멀쩡한 평일 저녁에 한자리에 모여 티타임을 갖게 되었다. 터주대감인 집주인 집사님도 조금은 당황한 듯 흥분된 목소리로 그 동네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캘리포니아 전 지역은 해마다 여름이면 산불이 연중행사가 되었고, 다만 그때마다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는 모른다고 했다. 씨미벨리에도 10여 년 만에 찾아온 큰불이라고 했다. 캘리포니아는 사막지대로 무척 고온 건조했다. 특히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풀이나 나무들이 바싹 말라 바람만 심하게 스쳐도 그 부딪힘으로 불이 날수도 있다고 했다.
간혹 누군가 담뱃불을 아무 곳에나 버려서 그 불씨들이 끝내는 몇 날 몇 일, 심지어는 몇 달 동안 불꽃의 행진이 이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방화범은 언젠가는 꼭 잡혀왔고, 하늘에 뜬 헬기와 함께 소방관들은 맞불작전으로 뜨거운 열기를 진압해 나갔다. 미국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소방관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중에 하나라고도 했다.
한 달 내내 타오른 거대한 산불이 초보 이민가족에게는 경이롭고 대단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천사의 도시라는 대자연의 축복아래로 인간이 겪어야 할 한편의 재앙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늘아래 축복과 재앙의 아이러니, 지구의 균형된 일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캘리포니아는 전 세계 최고의 기후를 자랑하지만 매년 여름이면 산불이라는 골치 아픈 연중행사가 자리매김을 한다. 천사의 도시 산등성이에는 올 여름에도 타오르는 불꽃들이 수를 놓으며 이글거리는 붉은 빛으로 하늘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날 무너진 것은 국가시스템 전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였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멀쩡하던 한강 다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국민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했던 10월을 맞아 21년 전 그날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되새겨 본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1994년 10월 21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서울 전역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7시 40분을 약간 지난 시각, 믿을 수 없는 참사가 발생했다. 서울 성동구와 강남구를 잇는 성수대교의 중간지점이 갑자기 푹 꺼지면서 한강으로 내려앉은 것. 다리를 지나던 여러 대의 차량도 함께 추락했다. 떨어져 내린 차량에는 등교 중인 학생과 출근 중인 직장인 등이 타고 있었다.
국민들은 귀를 의심했다. 남아 있는 자료화면 속 현장의 모습은 처참하다. 내려앉은 교량 위로 찌그러진 버스와 승용차가 널려 있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끊어진 부분에는 철근이 흉측한 모습으로 구부러져 보는 이들을 섬뜩하게 했다. 아비규환의 현장 위로 눈물처럼 가랑비가 계속 내렸다.
거짓말인 것만 같았던, 아니 거짓말이길 바랐던 뉴스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복 이후 가장 불행한 사고 중 하나로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다리가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한편으로는 ‘빨리빨리’로 상징되는 성장일변도 대한민국의 그늘진 이면을 들춰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경찰청 상황실에서 근무했던 최준영 경찰청 사이버안전국 팀장은 “정말이지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무전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혼선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던 때였다. 그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무전을 누군가의 장난으로 의심했다. 이런저런 사건사고를 실시간으로 접해왔지만 이번은 너무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근의 다른 근무자를 통해 확인한 후에야 그는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음을 실감했다고 했다.
총 6대의 차량과 49명의 탑승자가 추락했고, 이 중 32명이 사망했다. 24명은 16번 시내버스 승객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 서울교육대학교 여대생 1명이 포함돼 있었다. 하필이면 아침 등굣길에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 국민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범인은 대한민국... 안전 불감증이 부른 최악의 참사
성수대교는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1979년 10월 개통됐다. 그 이전에 세워진 한강 다리와 달리 교량의 기능 외에 미적인 기준까지 고려한 첫 사례였다. 교량의 조형미를 높이려고 당시 국내에서는 파격적인 ‘트러스식 공법’으로 설계됐다. 시원한 경관, 입체교차로, 날렵한 곡선미는 당시 한강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개통된 지 15년밖에 되지 않은 성수대교가 당연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수대교를 시공한 동아건설에는 새로운 공법에 대한 충분한 기술력이 없었다. 완공기한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부실공사가 이뤄진 사실도 적발됐다.
붕괴 원인은 부실 용접과 설계였다. 교량 상판을 떠받치는 철제구조물의 연결이음새 용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10㎜ 이상이어야 하는 용접두께도 8mm밖에 되지 않았다. 부식된 철제 구조물을 보수하지 않고 녹슨 부분만 페인트로 감추는 등 관리 부실도 드러났다. 안전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안일한 인식이 종합적으로 쌓여 빚어진 참사였다.
정부는 성수대교 안전에 무관심했다. 성수대교의 통행허용 한도는 32.4톤이었지만 40톤을 넘는 과적차량들이 제재조치 없이 지나다녔다. 1993년 동부간선도로 개통으로 교통량이 폭증했지만 서울시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성수대교 설계 당시의 하루 통행량은 8만 대 정도였지만, 붕괴 당시 하루 통행량은 그 두 배가 넘는 16만 대 이상이었다.
안전관리 국가적 전환 약속, 21년 지났지만
국민적 분노가 거세지자 이영덕 국무총리가 사임했고, 이원종 서울시장이 경질됐다. 사흘 뒤인 24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이뤄진 조치와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신속한 대응이었다. 국민적 정서를 감안해 교량 건설과 안전관리 관련자들에게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정부는 건축물 안전에 대한 국가적 전환을 약속하고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한강 다리에 대한 일제점검을 실시해 당산철교, 광진교, 한남대교, 양화대교 등을 재시공하거나 전면보수했다. 제도적으로도 시설물안전 특별법이 제정됐고 부실공사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다. 시설물 안전관리를 전담하는 한국시설안전공단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부의 약속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 대형 안전사고는 그 후로도 끊이지 않았다. 국민들의 경계심도 쉽게 희석됐다. 같은 달 충주호 유람선 화재가 발생했고, 이듬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그 뒤로도 대구 지하철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등 대형 안전사고가 이어졌다.
희미해지는 국민적 관심, 유족 아픔은 ‘진행형’
어느덧 21년이 지났다. 날벼락처럼 가족을 잃은 이들은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품고 있을까. 몇몇 유족과 접촉했지만 이들은 사고와 관련한 인터뷰를 원치 않았다. 하나같이 돌아온 대답은 “그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 유족은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이같이 전했다. “달라진 게 있나요? 앞으로도 사고가 일어나겠죠. 그리고 호들갑을 떨고 잊힐 겁니다. 연결해서 보면 사고는 그냥 계속 진행 중인 거예요. 그래서 계속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요.”
희생자의 유지를 이어 세상에 등불을 밝힌 이들도 있다. 사고로 숨진 여대생 이승영씨(당시 21세)의 가족들이 승영씨의 생전 소원을 이뤄주려고 희생자 보상금 전액(2억5000만원)을 들여 만든 ‘승영장학회’는 설립 이후 오늘날까지도 해마다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업도 어려움을 겪게 됐다. 사업 초기에는 원금을 운용한 이자수익으로 장학금을 지급해 왔지만 금리가 낮아지면서 원금을 까먹기 시작한 것이다. 남서울교회 오성섭 집사(승영장학회 사무국장)는 “이대로라면 약 10~15년 정도 갈 수 있을 것”이라며 “장학회 출신을 주축으로 기금을 만들어보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성수대교 북단 인근에는 붕괴사고 희생자 유족들이 만든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 옆에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사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관리에 대한 의식을 높이겠다는 취지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기자가 위령비를 찾았던 날에도 21년 전 그날처럼 비가 내렸다. 그곳에서 위령비 부근을 오가는 시민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남자의 계절 가을.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날엔 홀로 고독을 휘어 감고 앉아 위스키 한 잔을 즐겨보는 것 어떤가. 그렇다면 여심을 자극하는 아기자기한 레스토랑보다는 투박하지만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제격이겠다. 남심을 사로잡는 뉴 아메리칸 다이닝 ‘보타이드버틀러’를 소개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나비넥타이를 한 집사’라는 뜻의 ‘보타이드버틀러(Bowtie de Butler)’는 빈티지하면서도 중후한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체스판 무늬 바닥부터 벽에 걸려 있는 흑백 사진, 바 테이블 옆에서 나오는 무성영화까지 레스토랑 곳곳에서 묻어나는 흑백의 조화가 아날로그적인 향수를 자극한다. 화려함보다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보타이드버틀러만의 분위기는 20대 여성 고객 위주의 맛집과는 차별화된 이곳만의 매력이다. 실제 레스토랑을 찾는 고객도 40대 이상의 중년 남성들이 많다고 한다.
인테리어 분위기는 남성 취향이지만, 음식 맛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만한 다양한 메뉴가 준비돼 있다. 보타이드버틀러는 1980년대 뉴욕에 이주민들이 몰리며 여러 나라의 식재료와 레시피가 어우러지며 탄생한 뉴 ‘아메리칸 다이닝’을 선보인다. 혼자 가볍게 식사와 와인을 즐기러 오는 중년 남성부터 기념일을 맞이한 커플, 가족 모임이나 회식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고객까지 누가 오더라도 나름의 멋과 맛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무채색 배경이 주를 이루는 보타이드버틀러에서 가장 색감이 두드러지는 것은 키친과 마주한 에머럴드색 소파다. 소파 바로 위의 빈티지한 창문과 함께 어우러져 오픈된 주방에 활력과 빛을 더한다. 보타이드버틀러의 윤영기 총괄셰프는 신선한 제철 식재료를 엄선하여 최선을 다한 정찬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보통 고객들이 오시면 여러 메뉴를 시켜서 나누어 먹곤 하죠. 다양한 음식 맛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한 가지 음식에 대해 온전히 다 느끼긴 어렵기 때문에 늘 아쉬워요. 한 분이 오셔서 한 가지 음식을 드시더라도 충분히 풍미를 느끼고 든든하게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있어요”라며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며 즐겨볼 것을 조언했다.
보타이드버틀러는 다양한 코스와 단품 메뉴, 주류를 제공한다. 런치 코스는 3만 9000원이고, 총 4가지로 구성된 디너 코스는 메뉴에 따라 4만 5000원, 6만 3000원, 8만 9000원, 10만원이다. 스파클링, 레드, 화이트 등 수십 여 가지 와인은 물론, 간단하게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튜브형 와인도 판매하고 있다. 싱글몰트 위스키, 버번 위스키, 블렌디드 위스키 등 다양한 위스키와 코냑, 보드카, 데킬라 등도 즐길 수 있어 도수가 높은 주류를 선호하는 이들에겐 안성맞춤이다.
주소 서울 강남구 청담동 84-20
영업 시간 12:00~15:00, 18:00~22:00 /일요일 휴무
예약 및 문의 02-3443-6643, www.bowtiedebutler.com
주차 유료 발레 서비스(3000원)
소위 로얄 패밀리, 연봉 2억원 이상, 기업 오너, 자산가와 전문 경영인, 스포츠 스타와 문학인 들이 와서 쉬는 곳. 그러나 오로지 한 손님, 한 가족만을 위한 공간으로서 존재하는 곳. 강화에 위치한 담담각(淡淡閣)은 조용한 자신만의 프리미엄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20년 동안 준비된 공간이다. 그동안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알려져 왔던 담담각의 특별한 모습을 담백하게 담았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bravo-mylife.co.kr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담담각(淡淡閣)의 도우미와 집사들이 바쁘다. 디테일한 취향에 따라 저녁 식사를 위해 더덕구이, 바비큐 숯과 그릴 장비를 준비하고 어디선가 테이블을 가져와 정원에 가지런히 셋팅한다. 바지런히 패 둔 장작을 가져와 벽난로를 피우니 거실이 금방 따뜻하게 데워진다. 손님들을 위해 호박죽, 전복죽으로 건강한 아침이 차려졌다. 게다가 직접 재배한 상추, 딸기, 고구마, 건강한 오골닭이 매일 낳는 담담각표 유정란을 삶아 강화순무김치와 함께 얌전히 차린 아침 테이블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정갈하고 예의 바르게 손님들의 불편함을 해결해 주는 집사ㆍ 도우미들은 다른 어떤 숙소에서도 느껴 보기 힘든 한국식 명품 서비스를 보여줬다.
그들만을 위한 새로운 문화공간, 현대판 아방궁
한국을 방문한 글로벌 기업들이 전통문화를 경험하고자 숙소로 임대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일반에 문을 열게 됐다. 집 전체를 대여하는 조건으로 임대료는 하루 150만원 선. 회의룸과 리셉션 장소도로 적합한 영빈관을 제외한 모든 공간을 한 가족이나 한 팀에게 통째로 빌려준다.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이 재방문하기 때문에 굳이 홍보나 광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현재도 10월까지 예약이 차 있는 상황이다.
“짬짬이 시간 내서 조금씩, 계속해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담담각의 규모가 크다는데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한 저로서는 규모가 큰지 작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3개의 정원과 2채의 한옥(본채, 행랑채), 3개의 침실과 욕실, 2개의 거실, 별도의 쉼채로 구성된 5000평 규모의 담담각은 완공까지 무려 20년이 걸렸다. 소유주인 지동훈 강화한옥문화연구소 소장이 긴 시간만큼이나 공을 들인 건 소수의 그들만을 위한 완벽한 휴식처로서의 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걸 증명하듯 내부 곳곳에서는 진품 골동품과 미술품이 놓여 있어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격조 높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덕망있는 분들은 가족 여행을 이곳으로 오는 경우가 많은데, 어른들은 한옥이 정서에 맞는 편이지만 아이들은 불편해 할 줄 알았는데 너무 좋아하고 즐거워 하더군요.”
지 소장은 “불면증인 분들도 여기 와서는 잠도 푹 주무시고 하루 머물다 가면 생명이 연장된다는 생각이 든다고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실 때 가장 보람이 있다”며 웃는다.
VVIP만을 위한 완벽한 휴식처를 만들다
한옥의 공간이라 빛과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볕 몇 조각이 어우러지는 방마다 그의 수집 작품에 터를 잡는다. 저마다 삶과 체취를 품은 작품들은 독특한 예술적 분위기를 뿜어낸다. 왠지 모를 행복감이 밀려온다. 특별한 프라이빗 공간을 나름 재해석하고 연출함으로써 담담각은 럭셔리하게 정취가 물씬 익어가고 있다.
5000평 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돌담은 지 소장의 수집 인생의 대표 작품이다. 강화도 자연석으로 돌담을 쌓고 한옥 바깥은 원형을 유지하면서 내부는 현대인이 생활할 때 불편하지 않게 재배치했다, 새 둥지도 지방에 내려가서 입수하는 등 꼭두 소품 하나 하나 애정을 갖고 배치하고 천천히 뜯어 고친 결과 우물이 있던 마당이 부엌으로, 거실로 바뀌며 집이 커졌다.
각 방과 거실, 주방 곳곳에 좋은 컬렉터와 좋은 스토리텔링을 보여주고 있는 지 소장은 추억과 취향을 작품 하나 하나에 깃들게 하고 싶어했다.
계단의 장대석은 서울 상왕십리 공사 현장에서 가져왔다. 연개소문 생가에 가서 소나무를 어렵게 모셔와 정원에 심었다. 고재상을 거치지 않고 20년간 직접 발품 팔며 사 모으니 이제 전국에서 고귀한 물건들이 있다 싶으면 지 소장에게 먼저 연락이 온다.
주한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 산하 유럽·코리아재단의 이사장으로도 있는 지 소장은 “월급 타서 아파트·상가 같은데 투자하지 않고 한옥 가꾸는 일에 돈을 쓰니까 사람들은 저 보고 미쳤다며, 시간이며 노동력까지 버리느냐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왔다”고 말했다.
1인용 침대와 쇼파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북유럽풍 스타일 가구와 뱅앤올룹슨 오디오를 설치한 쉼채는 원래 경기도 용인에 있는 조그만 절의 본당이었다. 도시개발로 철거될 절을 옮겨놓은 것. 지 소장이 담담각에 쏟는 스케일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빈관 앞 입구 마당도 현재는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나 조만간 박물관을 꾸밀 생각이다. 또한 이미 논밭을 일구고 있는 담담각 마을 입구 터에도 조만간 카페를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