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뉴스, 그 사람]-①가장 슬픈 아침의 기억...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고

기사입력 2015-10-06 08:45 기사수정 2015-10-06 08:45

그날 무너진 것은 국가시스템 전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였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멀쩡하던 한강 다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국민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했던 10월을 맞아 21년 전 그날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되새겨 본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1994년 10월 21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서울 전역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7시 40분을 약간 지난 시각, 믿을 수 없는 참사가 발생했다. 서울 성동구와 강남구를 잇는 성수대교의 중간지점이 갑자기 푹 꺼지면서 한강으로 내려앉은 것. 다리를 지나던 여러 대의 차량도 함께 추락했다. 떨어져 내린 차량에는 등교 중인 학생과 출근 중인 직장인 등이 타고 있었다.

국민들은 귀를 의심했다. 남아 있는 자료화면 속 현장의 모습은 처참하다. 내려앉은 교량 위로 찌그러진 버스와 승용차가 널려 있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끊어진 부분에는 철근이 흉측한 모습으로 구부러져 보는 이들을 섬뜩하게 했다. 아비규환의 현장 위로 눈물처럼 가랑비가 계속 내렸다.

거짓말인 것만 같았던, 아니 거짓말이길 바랐던 뉴스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복 이후 가장 불행한 사고 중 하나로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다리가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한편으로는 ‘빨리빨리’로 상징되는 성장일변도 대한민국의 그늘진 이면을 들춰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경찰청 상황실에서 근무했던 최준영 경찰청 사이버안전국 팀장은 “정말이지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무전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혼선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던 때였다. 그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무전을 누군가의 장난으로 의심했다. 이런저런 사건사고를 실시간으로 접해왔지만 이번은 너무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근의 다른 근무자를 통해 확인한 후에야 그는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음을 실감했다고 했다.

총 6대의 차량과 49명의 탑승자가 추락했고, 이 중 32명이 사망했다. 24명은 16번 시내버스 승객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 서울교육대학교 여대생 1명이 포함돼 있었다. 하필이면 아침 등굣길에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 국민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범인은 대한민국... 안전 불감증이 부른 최악의 참사

성수대교는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1979년 10월 개통됐다. 그 이전에 세워진 한강 다리와 달리 교량의 기능 외에 미적인 기준까지 고려한 첫 사례였다. 교량의 조형미를 높이려고 당시 국내에서는 파격적인 ‘트러스식 공법’으로 설계됐다. 시원한 경관, 입체교차로, 날렵한 곡선미는 당시 한강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개통된 지 15년밖에 되지 않은 성수대교가 당연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수대교를 시공한 동아건설에는 새로운 공법에 대한 충분한 기술력이 없었다. 완공기한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부실공사가 이뤄진 사실도 적발됐다.

붕괴 원인은 부실 용접과 설계였다. 교량 상판을 떠받치는 철제구조물의 연결이음새 용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10㎜ 이상이어야 하는 용접두께도 8mm밖에 되지 않았다. 부식된 철제 구조물을 보수하지 않고 녹슨 부분만 페인트로 감추는 등 관리 부실도 드러났다. 안전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안일한 인식이 종합적으로 쌓여 빚어진 참사였다.

정부는 성수대교 안전에 무관심했다. 성수대교의 통행허용 한도는 32.4톤이었지만 40톤을 넘는 과적차량들이 제재조치 없이 지나다녔다. 1993년 동부간선도로 개통으로 교통량이 폭증했지만 서울시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성수대교 설계 당시의 하루 통행량은 8만 대 정도였지만, 붕괴 당시 하루 통행량은 그 두 배가 넘는 16만 대 이상이었다.

안전관리 국가적 전환 약속, 21년 지났지만

국민적 분노가 거세지자 이영덕 국무총리가 사임했고, 이원종 서울시장이 경질됐다. 사흘 뒤인 24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이뤄진 조치와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신속한 대응이었다. 국민적 정서를 감안해 교량 건설과 안전관리 관련자들에게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정부는 건축물 안전에 대한 국가적 전환을 약속하고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한강 다리에 대한 일제점검을 실시해 당산철교, 광진교, 한남대교, 양화대교 등을 재시공하거나 전면보수했다. 제도적으로도 시설물안전 특별법이 제정됐고 부실공사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다. 시설물 안전관리를 전담하는 한국시설안전공단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부의 약속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 대형 안전사고는 그 후로도 끊이지 않았다. 국민들의 경계심도 쉽게 희석됐다. 같은 달 충주호 유람선 화재가 발생했고, 이듬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그 뒤로도 대구 지하철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등 대형 안전사고가 이어졌다.

희미해지는 국민적 관심, 유족 아픔은 ‘진행형’

어느덧 21년이 지났다. 날벼락처럼 가족을 잃은 이들은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품고 있을까. 몇몇 유족과 접촉했지만 이들은 사고와 관련한 인터뷰를 원치 않았다. 하나같이 돌아온 대답은 “그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 유족은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이같이 전했다. “달라진 게 있나요? 앞으로도 사고가 일어나겠죠. 그리고 호들갑을 떨고 잊힐 겁니다. 연결해서 보면 사고는 그냥 계속 진행 중인 거예요. 그래서 계속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요.”

희생자의 유지를 이어 세상에 등불을 밝힌 이들도 있다. 사고로 숨진 여대생 이승영씨(당시 21세)의 가족들이 승영씨의 생전 소원을 이뤄주려고 희생자 보상금 전액(2억5000만원)을 들여 만든 ‘승영장학회’는 설립 이후 오늘날까지도 해마다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업도 어려움을 겪게 됐다. 사업 초기에는 원금을 운용한 이자수익으로 장학금을 지급해 왔지만 금리가 낮아지면서 원금을 까먹기 시작한 것이다. 남서울교회 오성섭 집사(승영장학회 사무국장)는 “이대로라면 약 10~15년 정도 갈 수 있을 것”이라며 “장학회 출신을 주축으로 기금을 만들어보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성수대교 북단 인근에는 붕괴사고 희생자 유족들이 만든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 옆에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사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관리에 대한 의식을 높이겠다는 취지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기자가 위령비를 찾았던 날에도 21년 전 그날처럼 비가 내렸다. 그곳에서 위령비 부근을 오가는 시민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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