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새뮤얼 울먼) 나이로 따지는 청춘은 한시적이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청춘은 영원할 수 있다. 소나무처럼 언제나 푸르름을 간직한 중장년의 인생 3막을 돕는 사회적 기업 ‘에버영코리아’가 탄생한 지 어언 10년. 그 사이 60대를 맞았지만, 여전히 푸릇한 10대의 마음으로 기업을 이끌고 있는 정은성 대표를 만났다.
2013년 송파 시니어클럽에서 운영한 ‘송파 인터넷 콘텐츠 사업단’이 토대가 된 에버영코리아. 당시 고령화 현상을 주시해온 정은성 대표는 사회적 취약계층으로 인식되던 노년층에서 남다른 경쟁력을 발견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늘어나는 고령인구를 더 생산적이면서도 가치 있는 존재로 이끌어내겠다는 포부로 에버영코리아를 설립한 것. 특히 기존 노인층 대상의 공공 일자리에서 벗어나 IT를 주요 업무로 내세우며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0년 전만 해도 노인들이 IT 업무를 한다는 건 획기적이었어요. 주된 업무는 ‘네이버 지도’ 거리뷰(촬영한 거리의 실제 모습을 360도 회전하는 사진으로 보여주는 서비스)에 나오는 인물이나 자동차 번호판 등을 블러링(개인정보 등을 가리기 위해 사진을 흐릿하게 보정하는 작업)하는 거였죠. 기술적으로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당시 시니어 직원 30명 중 스마트폰 보유자가 딱 한 분이었거든요. 그만큼 당사자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생소한 일이었죠. 그러나 저는 확신이 있었고 자신이 있었어요. 다행히 예상대로 사업이 순조롭게 잘 진행됐고, 저희를 롤모델로 한 다양한 단체와 사회적 기업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긍심을 느껴요.”
AI 시대, 평생 현역으로 생존하기
시니어만 고용해서 일이 되겠느냐, 얼마나 가겠느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10년 차 기업에 접어든 걸 보면 기우였을 테다. 그만큼 기업의 10년은 여러 가지를 증명해내는 의미 있는 숫자다.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하는 정 대표다.
“10년 업력을 사람 나이에 비유하면 30~40대 정도로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아직도 10대 같다는 마음이 들어요. 사춘기처럼 아직 불안한 부분도 있고, 때론 무모하기도 하고 그래요. 또 변화 속도가 빠른 IT 분야를 하다 보니 안정됐다가도 또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시기를 겪곤 하죠. 최근에는 AI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많은 직업군이 위기를 맞았잖아요. 저희도 기존에 하던 블러링 작업을 AI가 대체하면서 관련 업무가 꽤 줄었습니다.”
정 대표는 ‘무모함’이라 표현했지만, 그 말에는 10년 전 에버영코리아를 선보였을 때와 같은 열정과 의욕이 내포된 듯했다. AI 기술의 발전으로 진행하던 사업에도 적잖은 타격을 입었지만, 역으로 그는 다시 성장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현재 신사업들은 대체로 AI 기술을 기반으로 준비 중입니다. 어쩌면 시니어들이 AI와 관련된 일을 선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나간다면 오히려 청년층보다 경쟁력과 잠재력이 크다고 보는 거죠. 이런 시도를 하는 기업이 거의 없을 텐데, 저희에겐 그간의 경험과 노하우가 있으니 그만큼 성공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해요.”
에버영코리아의 모토 중 하나는 ‘배우는 것을 그만두면 노인이 되고, 계속 배우면 젊다’는 공자의 말씀이다. 그는 시니어 직원들이 변화에 적응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길 바란다. 기본적으로 신기술에 대한 교육뿐만 아니라 매주 관련 정보들을 모은 웹진 형태의 ‘비타민E’도 공유한다. 이렇게 익힌 기술과 내용을 점검하는 차원의 시험도 수시로 치르며 정성평가에 반영한다. 회사의 방침에 불만을 표하는 직원들도 있지만, 그는 현 시대에 생존하기 위한 선택이 아닌 필수 영역이라 강조한다.
“각자 일도 바쁘고 자주 내용을 전달하다 보니 버거울 수 있겠죠. 한편으론 부담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시도를 하기도 해요. AI 같은 기술은 이제 좋든 싫든 가져가야 하는 큰 흐름이니까요. 에버영코리아 직원들은 오래 일하기를 희망하세요. 실제로 초창기 직원의 52%가 아직도 계시니까요. 그런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함께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귀찮고 힘들겠지만 이 정도 부담이라도 있어야 트렌드를 읽고 익히려 노력하시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쓰는 방법이에요. 물론 스스로 변화하려는 분도 많아요. 결국 그런 태도가 뭔가를 바꿀 수 있고, 평생 현역으로 생존하는 길이라고 봐요.”
짐이 되면 노인, 힘이 되면 신중년
정 대표는 10년간 에버영코리아를 이끌며 ‘평생 현역으로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함께하는 직원들 또한 같은 목표와 꿈을 갖길 바란다.
“나이가 들수록 두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외로움은 커지고 자존감은 낮아진다는 건데요. 이걸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게 바로 ‘일자리’라고 생각해요. 저희 직원들에게 ‘일하면서 뭐가 좋은가’ 여쭤봤는데, 한 분이 ‘가족이 생긴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 옆에서 ‘가족보다 낫지!’라고 하시더군요.(웃음) 또 어떤 여직원분은 월급을 모아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너무나 뿌듯하셨대요. 그동안은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만 생활했는데, 처음 자신이 번 돈으로 무언가를 해봤다는 거죠. 한편으론 늙으면 배우자보다 자식에게 기대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런 점에서 경제적으로 자립했다는 자부심도 크게 느끼시더라고요. 노후에 일자리는 단순히 돈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셈이죠. 그런 내면적인 자원이 채워지니까요.”
그는 직원들에게 CEO 칼럼을 통해 ‘짐이 되면 노인, 힘이 되면 신중년’이라는 메시지를 공유한 적이 있다. 사가(社歌)에 ‘몸은 시니어 마음은 청춘’이라는 가사가 있을 만큼 평소 마음의 힘을 믿으며, 누구나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독려하는 정 대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때때로 체력이 마음처럼 따라오지 않기도 한다. 때문에 내면의 건강뿐만 아니라 외적인 건강도 뒷받침돼야 평생 현역, 자립하는 노년을 살 수 있다. 그는 작은 습관들을 통해 직원들의 건강도 살피고 있다.
“매년 직원들에게 수첩을 만들어주는데요. 앞부분에는 분기별 컨디션을 진단하는 ‘백세건강체크’와 하루하루 건강한 습관을 들일 수 있는 ‘몸 마음 관리표’가 있어요. 여기에는 식습관, 운동 습관, 마음 습관 3가지 항목이 있는데, 이걸 매일 기록해보는 거죠. 단순히 O, X 정도로 체크만 하면 돼요. 강압적인 건 아니지만, 해마다 관리를 잘하신 직원들에겐 포상도 하고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근력이 참 중요한데, 운동을 하려면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잖아요. 막상 계획했다가 잘 지키지 않기도 하고요. 그래서 일상에서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습관을 들이면 좋아요. 아무리 소소한 거라도 그걸 해냈을 때 성취감도 따라오고요.”
정 대표가 말하는 소소한 습관은 가령 이런 것들이다. 근력 유지를 위해 면도하는 동안 무릎 살짝 굽히기, 15분 거리의 식당에서 점심 먹기(오고 가며 30분은 걸을 수 있다고), 출근해 회사 문을 열며 마음속으로 1초간 ‘행복’이라 외치기. 어렵고 힘든 일은 못 하는 이유를 찾기 일쑤지만, 이러한 작은 습관은 핑곗거리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지키기도 수월하단다.
“저는 17년 전부터 이런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어요. 몸 건강, 마음 건강을 위해서인데, 이는 곧 평생 현역이 되기 위함이죠. 그런데 막상 오랜 세월 중장년과 일을 하다 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건강하니까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일을 하니까 건강해진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보면 결국 노후는 일자리가 바탕이 돼야 한다는 걸 다시금 깨닫습니다.”
가장 좋은 기업을 위한 최선의 방법
정 대표와 대화를 나누며 중장년 직원들을 위한 배려가 돋보인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에버영코리아만의 복지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타 회사라면 ‘자녀 출산 축하금’이 책정되지만, 이곳에서는 ‘손주 출산 축하금’이 나온다. 부모가 아닌 ‘본인 환갑, 고희 축하금’이 있고, ‘형제상(喪) 조의금’이 있다. 황혼육아의 짐을 지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 육아휴직은 없지만, 해외여행을 충분히 즐기고 올 수 있도록 장기휴가는 제공한다. 정년은 따로 없지만, 직원들에게 동기부여와 목표의식을 주기 위해 형식적으로나마 ‘100세 정년’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저곳에 입사해볼까’라고 관심을 보이는 중장년도 있을 터. 그러나 일반적인 중장년 채용과 비교해 에버영코리아의 입사 과정은 꽤 까다로운 편이다. 이 역시 정 대표만의 뜻이 담겨 있었다.
“보통 경력이 많은 중장년을 채용할 때는 서류를 점검하는 차원의 가벼운 면접을 보곤 하죠. 저희 채용 프로세스는 서류, 필기, 실기, 면접으로 크게 4단계를 거쳐야 해요. 뭘 이렇게까지 하느냐고도 하는데, 어려운 과정을 통해 입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일하시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또 가급적 서류 과정에서 많은 인원을 통과시키려 해요. 전에 면접장에서 한 분이 9년째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데 면접은 처음 왔다며, 되든 안 되든 스스로 가능성을 발견해서 뿌듯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차원에서 최대한 기회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물론 IT 업무를 해야 하기에 디지털 문해력이나 실무 능력은 필수다. 그가 재차 강조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려는 노력’ 또한 중요시하는 인재상이란다. 아울러 사회와 환경을 위한 마음과 실천력까지 겸비했다면 플러스알파(+α)가 될 수 있다. 이는 회사의 비전과도 일맥한 부분이다.
“제가 내세운 비전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회적 기업’입니다. 기업에게 ‘가장 좋다’는 건 최대(Biggest), 최고(Greatest) 같은 걸 생각하기 쉽지만, 저는 베스트(Best)를 생각했어요. 이건 영어에서 굿(Good)의 최상급 표현인데요. 여기엔 ‘착하다’는 뜻이 포함되죠. 그러니까 ‘가장 선한 기업’을 꿈꾸는 거예요. 사회적 기업도 기업이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돈을 벌어야 해요. 그래야 사업이 유지되니까요.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오래 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선한 기업은 결국 그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쓸 것이냐, 즉 누가 혜택을 볼 것이냐를 따지는 거죠. 우리 직원들은 함께 탄소중립 생활을 실천하고 그 뜻에 동참하고 있어요. 그런 선한 직원들이 평생 현역으로서 사회에 기여하도록 돕는 일, 그게 제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최선(最善)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그건 말이지, 마치 이런 것과 같아. 냉장고에 먹을 만한 게 없는 것과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의 차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남편이나 아내가 있는데도(애인이라고 해도 좋고) 마음이 허전한 것과 혼자 살기 때문에, 옆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공허한 것의 차이란 말이야. 전자는 냉장고 안에 먹고 싶은 게 없는 거고, 후자는 냉장고가 완전히 텅 비어 배고플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말이지.”
남편과 사별 후 혼자 산 지 15년. 늘 배고픈 사람처럼 항상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제는 지겹기조차 한 나에게 역시나 혼자 사는 친구가 해준 말이다. “너와 나는 냉장고가 비어 있는 사람들”이라면서. 그러니 남편이, 연인이 옆에 있어도 외롭다든가, 한술 더 떠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냉장고가 그득한데도 딱히 먹고 싶은 음식이 없어서, 입에 맞는 식재료가 없어서 짜증이 난다는 말이지?”라고 응수해주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럴듯한 비유처럼 들린다. 냉장고가 완전히 텅 비어 있을 때와 먹을 만한 것, 내 입에 맞는 것이 없을 때의 차이란 차원이 다른 비교이지 않나. 아예 비교가 불가하거나. 그래서 냉장고가 텅 빈 사람들은 먹을 것 자체를 찾아 허덕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환상 속에서나마 가슴속에 어떤 남자, 어떤 여자를 들여놓게 된다고. 그 친구 말이 그렇게 막연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허기진 마음을 달래는 것은 당연히 무죄이고, 냉장고는 차 있지만 먹고 싶은 게 없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소위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유죄란다.
그러면서 친구가 덧붙였다. 늘 배가 고프니까 먹을 수 없는 것조차 먹을 것인 줄 알고 간혹 마음에 품는 경우도 있다고.
품지 말아야 할 사람을 품은 나
1년 전 나는 과거 결혼할 뻔한 옛 연인을 만났다. SNS를 통해 내가 그 사람을 찾았다. 문득 궁금했고 그 궁금함이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은 조바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만난 것이다. 듣기에 따라선 얼마나 로맨틱한가. 아내와 이혼 후 젊은 시절 자신을 짝사랑하던 여성과 재혼한 운 좋은 50대 남자 이야기를 어느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남자는 적극적으로 그 운명의 여인을 찾아 나섰다고. 20년 전 자기를 좋아해주었다는 인연만으로 용기를 낸 남자. 그 여자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하는지 궁금했고, 좋아한다 해도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면(응당 꾸렸을 테고) 아무 의미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무작정 찾아보고 싶었고, 무모한 짓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했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발을 들여놓았을 때 요단강이 갈라졌던 것처럼,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 나섰을 때 기적 또한 찾아온 것이다. 어떤 연유인지 그 여자는 결혼하지 않은 채 혼자 살고 있었고, 비록 재혼이지만 가슴 설레던 풋풋한 시절 짝사랑하던 남자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나 청혼을 해왔으니 ‘Why not?’, 그 청혼을 덥석 받아들여 두 사람은 지금 알콩달콩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기적을 바란 것은 아니다. 그저 한 번 보고 싶었고, 인터넷 세상이니 큰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었던 것뿐이다. 그는 물론 기혼남이었다. 나를 기다리며 결혼하지 않은 기적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내 마음은 설렜다.
32년 만이었다. 내가 결혼하던 해가 그와 헤어진 해이니. 결혼의 인연은 따로 있다지만, 그렇다고 작정하고 ‘연애 따로, 결혼 따로’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따로 인연이지 않았냐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나는 결혼하기 3년 전 여행지에서 그를 만났다. 대학 졸업 전에 친구 세 명과 함께 간 2박 3일의 늦가을 강릉 여행이었다. 셋 다 남자 친구가 없었기에 여행지에서 근사한 일이 생겼으면 하는 20대다운 기대와 설렘으로 떠난 여행. 그런데 그 바람대로 여행지에서 대학 졸업반 남학생 세 명을 만난 것이다. 군대 다녀온 복학생들이어서 나이는 우리보다 많았지만, 그래서 더 의지가 되고 든든한 면도 있었다. 그중에서 그와 내가 커플로 맺어졌다. ‘커플 탄생’이라고 했지만 여행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일상으로 돌아온 후 그에게서 연락이 왔고 이후 둘이 사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3년을 만났다. 그리고 내가 결혼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 그도 물론 결혼했다.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내가 다른 남자(15년 전 세상 떠난 남편)와 결혼을 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그 남자는 직장 동료였다. 의상학과를 나온 나는 졸업 후 곧바로 취업이 되었고, 같은 해 입사 동기로 남편을 만났다.
당시 호황기를 타고 야근하는 일이 잦았는데, 마침 집이 같은 방향이라 늦은 밤 퇴근길에 나를 집에 바래다주고 가는 것이 죽은 남편의 또 다른 일상이 되었다. 물론 나는 여행지에서 만난 연인이 있었지만 일이 바쁘던 그 무렵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 틈을 타고 ‘오피스 와이프’라는 말처럼 그가 ‘오피스 연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30년을 뛰어넘어 찾아온 설렘
업무상 실수가 발생한 것은 입사 후 3년을 넘긴 직후였다. 내가 오더를 내는 과정에서 숫자를 잘못 기입하는 바람에 문책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마침 그도 같은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상황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그 위기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나 대신 징계를 당할 각오를 하고 자신이 실수한 것으로 상부에 보고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다른 직원들은 모르게 하느라 애를 쓰는 모습이 내게는 더 감동적이었다. 그 일로 그와 나 사이엔 비밀이 생기게 되었다.
하늘이 도왔을까, 다행히 징계는 면했고 이후 그와 나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단순히 고마운 마음을 넘어 나는 그를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타서 그는 내게 사랑을 고백해왔다. 내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한 고백이니 그로서는 모험이자 용기가 필요했을 터.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나는 그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 3년을 사귀던 애인을 배신하게 된 것이다. 물론 결혼을 약속하고 사귄 것은 아니었지만 연애의 배신도 배신이었다.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수밖에. 내 마음은 이미 직장 동료에게 기울어져 있었으니.
날벼락을 맞은 건 당시 나의 연인. 그러니까 남편이 죽고 32년 만에 만난 지금 이 사람. 한 가지 현실적 변명을 하자면 그 사람과 나는 동성동본이었다. 당시 동성동본은 결혼을 해서는 안 되는 때였다. 사귀고 있을 때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서로 애를 쓰던 장애물이 헤어지려고 하니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어 수면에 떠올랐다. 저절로 떠오른 게 아니라 내 쪽에서 일부러 밀어 올렸다는 표현이 옳다. 그와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은 세상에 없는 오피스 연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나는 물론 옛 연인을 좋아했다. 여행지에서 만났기 때문일까, 그와 함께 있으면 흥겹고 재미있었다. 고된 업무의 스트레스를 날리고 일상의 지루함과 피로를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사람이었다.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내 기질에도 잘 맞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피스 연인을 선택했으니, 업무의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 일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랬던 그를 남편과 사별한 후 다시 만난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많이 설레었다.
냉장고가 꽉 찬 사람
만남이 1년으로 이어지면서 친구의 ‘냉장고론’을 떠올린다. 그는 유부남, 나는 사별녀. 한때 아무리 사랑했다 해도 우리의 현주소는 이러하며, 그의 냉장고는 채워져 있고 나의 냉장고는 텅 비어 있다. 그에게 나는 별 의미가 아니지만 내게 그는 큰 의미다. 아내가 있는 그는 재미로, 호기심으로 나를 만나는 거겠지만, 혼자인 내게는 그가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커지고 있다. 여기서 그만 끝내야 한다. 윤리적으로 비난받는 것이 두려운 것보다 내가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 두렵다.
재혼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뿐 아니라 혼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재혼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두기 마련이다. 재혼까지는 아니라 해도 친구로 지낼 정도의 누군가를 사귀기를 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만남 쪽으로 내 마음이 자꾸만 쏠린다는 것이다. 나의 냉장고는 늘 비어 있으니 지금 이 사람으로 채우고 싶은 강박적 생각을 끊지 못하고 있다.
사실 나는 지인으로부터 곧 누군가를 소개받기로 되어 있다. 소개를 받는다고 맺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 사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소개조차 받고 싶지 않은 게 문제다. 아무 실속도 없고, 실속은커녕 결국 가슴앓이로 끝날 관계, 나만 상처받게 될 인연임을 잘 알면서도.
그는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시들하든 무심하든 그는 자신의 냉장고를 채우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결코 자신의 냉장고를 비우지 않을 것이며, 꽉 채워진 그 상태 그대로 나를 만나려고 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로 질주하는 내 마음을 어찌할까. 이대로 그에게 사로잡혀 그의 노리갯감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좀 그러면 어떤가.
데뷔 25년차, 중년배우가 된 이필모
아버지 역할을 연기하며 세월을 체감하지만 이 또한 기분 좋은 변화로 받아들인다
“제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하겠죠. 중년의 로맨스를 선보일 수도 있겠고요. 새롭게 펼쳐질 배우 인생이 기대됩니다”
이필모는 스스로를 ‘노력형 배우’라 말한다. 노력해도 빛이 나지 않던 무명 시절, 많이 힘들었지만 그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배우가 언제 가장 행복한지 아세요? 출연하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 중일 때예요. 대중의 반응에 힘을 얻는 거죠”
‘필연 커플’로 유명한 이필모와 아내. 그는 아내의 장점은 털털한 성격이라며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아내에게 늘 고마워요. 두 아들을 예쁘게 낳아주고,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엄마로서 역할을 잘 해주고 있어요.”
중년을 넘어 노년까지 연기하겠다는 이필모
시간이 흘러도 색다른 향기를 내뿜는 배우, 연기 참 잘했던 배우로 기억되길 바란다.
“누구라도 행복하기만 한 인생은 없어요.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도 이겨내면 행복한 시간이 찾아올 거예요”
이필모(49)는 결혼과 함께 배우 인생의 변곡점을 맞았다. 5년 전 아내를 만나 두 아들을 슬하에 둔 그는 작품 속에서도 아버지 역할을 연이어 연기했다. 그 과정을 통해 어느덧 ‘중년 배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체감된다. 이필모는 이 변화를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배우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
이필모는 하반기 방송 예정인 JTBC 드라마 ‘이 연애는 불가항력’에 출연한다. 인터뷰 당시 막바지 촬영에 한창이었던 그는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이번에 새롭게 보여줄 모습을 묻자 “아버지 역할을 맡은 점이 아닐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극 중 주인공 로운의 아버지 역할을 연기하는 이필모. 재벌 캐릭터지만 권위적이지 않고 친구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그는 2021년 방송된 KBS 2TV 드라마 ‘연모’ 이후 두 번째로 아버지 연기를 펼친다. ‘연모’에서는 이휘(박은빈 역)의 아버지 혜종 역을 연기한 바 있다.
“이게 세월의 흐름인가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한 감정이 들어요. 이제 주인공이 아니고 아버지가 되어 조력자 역을 맡게 된 것이니까요. 물론 모든 역할이 중요하고, 이전과 다름없이 최선을 다해 연기하고 있지만 말이죠. 그리고 중년 배우가 됐다는 뜻이기도 한데, 이전과는 다른 제 나이에 맞는 새로운 연기를 하게 되겠죠. 중년의 로맨스 연기를 할 수도 있겠고요. 앞으로 새롭게 펼쳐질 배우 인생이 기대됩니다.”
데뷔 25주년 필모그래피
1998년 영화 ‘쉬리’로 데뷔한 이필모는 올해 데뷔 25주년을 맞았다. 그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저는 타고난 끼가 많은 사람이 아니고 노력형 배우다”라고 자평했다. 중학생 때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후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현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저는 매우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그나마 중학생 때 키가 178cm였으니, 키가 크다는 게 특징인 정도였죠. 별다른 꿈도 없이 살다가 어느 날 홍콩 누아르 영화를 봤는데, 갑자기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보이는 거예요. 전문 용어로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것을 그때 느낀 거죠. 그리고 그날부터 제 꿈은 배우가 됐습니다.”
이필모는 데뷔 후 연극에 주로 출연했던 터라 인지도가 낮았다. 대중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전까지를 무명 시절로 여겼다. 노력해도 빛이 나지 않는 무명 시절. 많이 힘들었지만 그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이필모는 “할 줄 아는 게 연기밖에 없었다”면서 빛을 볼 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는 2006년 KBS 2TV ‘아줌마가 간다’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아침드라마였지만 시청률이 20%(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넘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어 그는 2009년 KBS 2TV 주말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에 출연하게 된다.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44.2%를 기록하며 대박을 터뜨렸고, 이필모는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극 중 솔약국집 둘째 아들이자 소아과 의사 송대풍 역을 연기했다. 이필모의 능청스럽고 유쾌한 연기가 캐릭터의 매력을 배가시켰다. 딱 그 시절 나올 수 있는 청춘의 모습이었다.
“배우를 하면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제가 출연하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한창 방영 중일 때예요. ‘솔약국집 아들들’은 54부작인데, 30~40회가 방영 중일 때 가장 행복했어요. 가장 바쁠 시기이기도 한데, 대중의 반응이 느껴지니까 힘이 나는 거죠. 그런데 40회가 넘어가면 그 행복한 순간도 끝나요. 마지막이 다가오니까 아쉬워지는 거죠.”
‘솔약국집 아들들’ 외에도 이필모의 가슴에 오래 남은 작품들이 있다. 가장 먼저 그는 MBC ‘빛과 그림자’를 언급했다. 극 중 악역 차수혁을 연기한 이필모는 캐릭터의 사연에 깊이 공감하며 아직까지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MBC ‘가화만사성’에서 뇌종양 환자 연기를 펼친 것, tvN ‘응급남녀’에서 냉철한 의사 연기를 한 것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셋째 계획 가진 필연 커플
이필모에게 작품 선정 기준을 묻자 “불러주시면 감사하고 가리지 않는다”는 겸손한 답을 했다. 특히 가장이 된 현재 그는 가족을 위해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려고 한다. 이필모는 2019년 인테리어 전문가 서수연 씨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첫째 담호는 2019년, 둘째 도호는 2022년에 각각 태어났다.
“아침에 까치가 입에다 뭔가를 물어서 둥지의 새끼들한테 갖다주는 모습을 보고, 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새끼 새들을 위해 알아서 돌아다니는 거잖아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인 것 같아요. 저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혼하고 부모가 되는 과정을 통해 많이 성숙해지거든요.”
이필모와 서수연 씨는 ‘필연 커플’로 유명하다. 두 사람은 2018년 TV조선 ‘연애의 맛’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 부부로 발전했다. 첫 만남부터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던 그들을 향해 대중의 응원이 쏟아지고 있다. 부부의 근황에 대해 이필모는 “아내의 장점은 털털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다”라고 전했다.
“아내한테 늘 고마워요. 담호, 도호를 예쁘게 낳아주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엄마로서 역할을 잘 해주고 있죠. 저희 부부도 여느 부부와 똑같아요. 가끔 싸울 때도 있죠. 저는 오히려 부부가 안 싸우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남녀가 같이 사는 것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을 수는 없죠. 한두 가지만 맞아도 잘 맞는 것이고, 나머지 여덟 가지는 맞추면서 사는 거예요.”
필연 커플의 2세인 담호와 도호 역시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필모는 두 아들의 장래에 대해 “연예인은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묻자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힘든 연예인을 할 필요가 있을까. 연예인은 아버지가 이미 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마음을 전했다.
또한 이필모는 셋째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아내와 어느 정도 얘기가 된 부분이라고. 그는 “옛날부터 아이가 셋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삼 남매로 자라서 그런지 둘은 외로울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최근 딸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커진 특별한 이유를 전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애들이 방에서 뛰어나와 아빠를 반겨주는 것이 저의 로망이에요. 사실 예전에 여자아이 옷을 사놓은 게 있습니다. 최근 딸을 갖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겼는데요. 부모님이 아프셔서 병원을 정말 밥 먹듯이 다녔어요. 병원에서 제일 많이 본 장면이 무엇이냐면, 중년 여성이 아버지를 케어하는 모습이에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나중에 늙고 병들었을 때 딸아이가 챙겨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담호, 도호를 못 믿는다는 게 아니에요. 어쩌면 딸아이를 갖고 싶은 욕심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죠.”
모친상, 건강의 중요성 깨달아
부모가 되면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닮아간다고 하지 않나. 이필모의 아버지는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 그는 “현재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 요양병원에 계신다”라고 말했다. 삼 남매 중 막내인 이필모는 부모님의 케어를 담당했다. 부모님을 병원에 모시고 다닌 것도,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의 주치의·간병인과 소통하는 것도 모두 그다. 지난 3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차마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전할 수 없었다.
“지난해 12월 23일에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고, 4일 후 아버지가 골절상을 입으셨어요. 아버지는 현재 거동을 못 하시고, 귀가 거의 안 들리는 정도예요. 치매 증상도 있으시고요. 아버지께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말하지 못했죠.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아뵈었는데, 간병인분이 ‘혹시 3월 초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아버지가 그날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순간 소름이 확 돋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버지를 뵈러 가니까 이제 엄마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이필모의 어머니는 쓰러진 후 3개월간 병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힐링이 필요할 때 찾는 제주도에서 어머니를 보내는 시간도 가졌지만, 아직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터뷰 당시 이필모는 영정 사진으로 쓰인 어머니 사진을 기자에게 공개하며 결국 눈물을 보였다. 지난해 서울장미축제에서 그가 직접 찍은 것으로, 사진 속 어머니는 유난히도 밝게 웃고 계신다.
“장미축제에 같이 갔을 때 어머니께서 정말 좋아하셨는데…. 그렇게 좋은 곳에 많이 못 모시고 다니고, 못 해드린 게 너무 많아서 가슴이 아파요. 어머니는 자식만을 위해 살았는데 말이죠. 어머니는 우리나라 격동기를 이끈 분이라고 생각해요. 나라를 위해 뭘 했다는 게 아니라 모든 힘듦을 묵묵히 견뎌내고, 자식을 잘 키워내셨으니까요. 어머니 덕분에 배우 이필모도 있는 것 같아요.”
이필모는 어머니를 보내고 ‘건강’의 중요성을 또 한 번 느꼈다. “가족이 무탈하고 건강한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는 깨달음을 전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운동한다. 건강을 유지해 오래 일하며, 아버지로서 역할도 다하고 싶다. 중년을 넘어 노년까지 연기하고 싶다는 이필모는 “색다른 향기를 내뿜는 배우가 되고 싶다”면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연기 참 잘했던 배우로 기억해줬으면”이라고 말했다.
“누구라도 행복하기만 한 인생은 없어요. 어려움과 힘듦의 정도 차이가 있는 거겠죠.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들에게 ‘이겨내면 행복한 시간이 올 것’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저도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 가족을 위해 이겨낼 거예요. ‘아버지’라는 거룩한 이름을 갖고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이름으로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부부로 함께하는 세월 또한 늘어났다. 예언대로 120세 시대가 온다면, 길면 100년 가까이 배우자와 살게 될지도 모른다. 때문에 부부 관계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따져보면 우리는 부모도 선택할 수 없고, 자식도 선택할 수 없다. 오롯이 선택 가능한 가족은 ‘배우자’뿐이다. 평생의 동반자로 택한 사람과 오랜 여생을 행복하게 사는 일, 노력 없이는 쉽지 않다. 이에 가정의 달을 맞아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원장을 만나 중장년기 부부 관계 해법에 대해 물어봤다.
김숙기 원장이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을 설립한 건 2000년. 그 시절만 해도 공공연하게 가족 갈등이나 부부 문제를 드러내는 문화는 아니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일쑤였고, 가족의 치부라도 드러내는 양 숨기고 회피하기 바빴다. 한창 결혼 생활에 대한 회의와 고민이 깊어갔던 김 원장은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그는 직접 부부 갈등의 해결책을 모색해보기로 했다.
“당시 우리 가정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가족 해체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어요. IMF 직후였는데, 매스컴에서는 경제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췄지만 그 내면에 가족 구성원들이 병들어가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저는 결혼을 스물두 살에 일찍 한 편인데 ‘결혼 생활이 이런 건가?’라는 의구심이 많이 들었어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놔도 ‘다들 그러고 살아’, ‘애 보면서 참고 지내면 좋은 날 올 거야’라는 식으로 조언하더라고요. 제가 유난스럽다고들 했죠. 그런데 도저히 참고만 지낼 수가 없었어요. 나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이 터놓고 이야기할 장이 필요하다 느꼈죠. 그렇게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을 열게 됐습니다.”
부부 갈등, 자녀의 상처로 번지지 않도록
김 원장은 그렇게 20여 년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을 이끌며 가족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부부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 당초 본인의 문제에서 시작했기에,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겪은 아픔도 치유하고 성장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일을 하며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제가 원가족(김 원장의 부모와 형제) 관계에서 상처가 있었더라고요. 오롯이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 사랑은 주로 오빠를 향해 있었고 저는 ‘착한 딸’, ‘말 잘 듣는 아이’가 돼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거예요. 조건부 사랑인 거죠. 그런 결핍이 있었던지라, 남편을 만났을 때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해지겠지’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신혼살림 장만하고 물질적인 준비는 열심히 했는데, 정작 결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마음가짐은 결여돼 있었죠.”
막연히 시작한 결혼 생활은 막막함으로 다가왔다. 지금 생각하면 결혼 생활이 험난하게 느껴졌던 건 남편 개인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그런데도 당시엔 이런저런 갈등으로 부부 싸움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그 상황에서 피해를 본 건 다름 아닌 자녀들이었다.
“가족 관계에서 핵심은 부부예요. 부부 관계가 안정적이라야 자녀들도 편안함을 느끼죠.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눈치를 보고, 불안감을 안고 살 수밖에 없어요. 자존감도 결여되고요.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도로 가족 상담 시간을 마련했어요. 아빠, 엄마, 아들, 딸 넷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서로의 상담사가 되어주었죠. 그렇게 회복하는 모습이 보이면 2주에 한 번, 그러다 한 달에 한 번, 이제는 분기별로 한 번 정도 진행해요.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는구나 느꼈던 건 10년 정도 됐을 때예요. 우리 가족은 상처가 참 많았거든요. 그만큼 오래 걸리지만 가족이라면 꼭 해야 할 일이죠.”
두 자녀가 30대 성인이 됐지만, 여전히 청소년기에 있었던 일화나 감정을 살피며 치유에 힘쓴다는 김 원장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부모의 태도. 자식일지라도, 오래된 일이더라도 사과할 일이 있다면 꼭 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고 가족 간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단다.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이들 어릴 때 부부 싸움하고 집을 나간 일 같은 걸 생생히 기억하더라고요. 그것도 어른이 된 이후에나 들었죠. 물론 우리 부부도 나름 사정이 있었지만, 그런 건 차치하고 아이들이 겪었던 감정에 대해 충분히 들어주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아직 그런 경험이 없으시다면 ‘가족 대화의 날’ 같은 걸 만들어보셨으면 해요. 특별한 안건이 없어도 됩니다. 처음엔 어색해서 겉도는 말만 하게 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씩 자연스럽게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죠. 어떤 분들은 자녀가 옛날 얘기를 꺼내면 ‘엄마가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는 식으로 반응하는데, 그러면 소통이 단절되고 말아요. 끝까지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함께 울기도 하며 보듬어줘야 치유됩니다.”
비난하지 않는 입, 경청하는 귀
자녀뿐 아니라 부부끼리도 서로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제 부부 갈등으로 상담을 청하는 이들을 보면, 대체로 일방적 소통이나 방어적인 태도 등이 문제가 된다고. 중장년 부부의 경우 ‘수십 년 이렇게 살았는데 고칠 수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이 또한 훈련을 통해 개선 가능하단다.
“두 가지가 중요해요. 먼저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대를 비난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배우자 때문에 속이 상한다면, 결국 그 감정의 주체는 나예요. ‘내가’ 속상한 거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당신은 사람이 왜 그따위야’라는 식으로 말하면, 벌써 비난이 들어간 거예요. 그럼 상대는 ‘내가 뭘 어쨌다고?’라며 맞받아치고, 결국 감정싸움으로 번지게 되죠. 그러니 주어를 ‘나’로 두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어렵다면 말 앞에 늘 ‘내가 생각할 때는’, ‘내가 느끼기에는’이라는 토시를 달아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그렇다면 듣는 입장에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김 원장은 가급적 말하는 배우자의 감정을 헤아리려 노력하되, 선뜻 이해가 안 되더라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방어적인 태도가 문제예요. 그저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80%는 해결된다고 봅니다. 내 의견은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 입장에서 경청하는 거죠. 내 관점만 인식하면 상대가 하는 말이 잘 안 들리고 따지려 들 수 있어요. 그렇게 한번 브레이크가 걸리면, 상대는 대화가 안 된다고 여기고 ‘아, 백날 얘기해봐야 소용없구나’라며 포기하죠. 그렇게 입을 닫게 되고 마음도 닫는 거예요. 다 들은 후에는 ‘이런 얘기를 해줘서 고마워’, ‘그동안 당신 심정이 어땠을까’라며 상대를 배려하는 한마디를 해주면 좋습니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부 생활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바탕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설사 갈등이 오래된 부부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얻어 차차 좋은 관계로 거듭나게 된다. 김 원장은 “백세시대에는 결국 관계가 좋은 부부만이 살아남는다”고 언급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 황혼이혼, 졸혼, 별거 등 부부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고. 과거에 비해 수명이 늘어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더 활발해지는 추세라고 한다.
“부부 갈등이 있더라도 자녀가 있을 땐 그럭저럭 관계를 유지하려 해요. 그러다 자녀들이 출가하면 상황이 달라지죠. 60대 전후로 그런 시기를 맞게 되는데, 예전보다 수명이 훨씬 늘어났잖아요. 웬만큼 참고 살기엔 여생이 너무나 긴 거죠. 그러니 ‘이렇게 살 수는 없다’며 이혼을 택하는 거예요. 문제는 보통 이 시기쯤 남성들은 퇴직을 겪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를 느껴요. 여성들은 나이가 들어도 주변인들과 소통하고 융화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남성들은 그렇지 않은 편이죠. 고독하고 고립된 존재로 노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요즘은 이런 위기감을 느끼는 남편분들이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많아요. 다만 너무 늦게 찾아오셔서 이미 아내의 마음이 떠난 상태가 적지 않아 안타깝죠.”
늘어난 황혼기, 제2의 신혼 맞이하길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서 김 원장이 우려하는 사안 중 하나는 비혼 인구 증가 문제다. 자신이 그랬듯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채 섣불리 결정하는 것은 반대한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문제로 인해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쌓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울러 그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부모 세대에게 달렸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저출산, 비혼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죠. 단순히 자가 마련이나 양육비 같은 경제적인 차원에서만 볼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령 부모의 불화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자신의 결혼 후 삶에 대해서도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기 힘들죠. 행복한 부부, 단란한 가정에 대한 롤모델은 바로 자신의 가족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이 부재하니 결혼 생활이나 양육이 두려운 거예요. 만약 자녀가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너는 왜 결혼을 안 하느냐’며 독촉하고 윽박지르기보다는 우리 부부가 좋은 본보기가 됐는지, 가족 안에서 아이가 상처 입은 부분은 없는지 돌이켜보셔야 합니다.”
그는 가족이나 부부 관계를 점검해볼 수 있도록 건강검진 같은 형태의 사회적 차원에서의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동시에 가정에서는 중장년 부부들이 관계를 리모델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자녀들이 출가하면 가정 안에서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부부도 오랜 세월 함께하며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을 테죠. 상대의 비인간적인 모습이나 되돌릴 수 없는 실수에도 마지못해 살아온 지경이 아니라면 충분히 좋아질 수 있어요. 돌이켜보면 부부가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하며 살았던 순간은 거의 없어요. 신혼 때는 양가 어른들 눈치도 보고, 효도한다고 신경 쓰고, 아이를 낳으면 키우느라 정신없고. 비로소 이제야 다른 것에서 놓여나 서로를 바라보는 위치가 된 거죠. 그런 면에서 제2의 신혼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가족은 성장 가능성이 있는 존재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가정의 달엔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시간을 꼭 한 번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아무도 없다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고 세상이 무채색이 되었다가 누군가 날 알아주면, 단 한 명이라도, 갑자기 숨이 쉬어지고 세상이 색깔을 입게 돼. 그제야 살아볼까 하지.”
가정의 달을 맞아 5월호 주제를 일찌감치 ‘날 알아주는 한 사람의 힘’으로 잡고 여유를 부리던 필자는 마감이 점점 다가오면서 여러 목소리와 이야기 사이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애만 태우다가 시댁 형님들과 나눈 대화방에서 글머리를 찾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큰형님!
‘하늘꽃’ 지고 ‘땅꽃’ 피는 계절
모진 서너 해, 역병 맞은 세상 꿋꿋하게 견디더니 긴 세월 품었던 설움 한꺼번에 폭발한 올봄. 산수유, 벚꽃이 천지사방 만발했습니다. 그동안 자기 순서 지키며 차례로 피던 봄꽃이 너나 할 것 없이 꽃망울 펑 펑 펑 터트렸으니까요. 긴 겨울 메마른 가지 애써 외면하면서 덩달아 하늘 볼 일 마다했는데, 마을마다 거리마다 천변(川邊) 따라 펼쳐진 꽃 대궐 덕분에 하늘 한껏 올려다보며 봄을 만끽했습니다. 필 때도 갑자기, 질 때도 후두둑 하더니 행여 아쉬울세라 영산홍, 철쭉, 민들레, 오랑캐꽃, 할미꽃까지 땅꽃이 뒤를 이었습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시샘이나 하듯 노랑, 보라, 진분홍, 연분홍 색색 향연을 펼치지 뭡니까. 독자분들이 이 글을 읽을 5월엔 아마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담쟁이덩굴, 등나무 잎겨드랑이에서 주렁주렁 앙증맞은 꽃을 피우겠지요.
우울하고 기운 없는 날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을 연결해 가득 충전해주는 존재가 바로 부모 아닐까요. 이름 모를 혹은 이름 없던 꽃에 일일이 이름 붙여 불러주면 내게 다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에 낳아 이름 지어 명자야, 경희야, 향순아, 옥임아, 종섭아 부르고 또 부르던 부모.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부모.
우울하고 기운 없는 날, 필자는 부모님 뵈러 갑니다. 결혼하고 처음 맞은 어버이날, 스물넷 어린 새댁이던 필자는 같이 살던 시부모님 몰래 친정에 다니러 갔습니다. ‘힘들다, 시어른과 같이 지내기 참 무섭다, 엄마 아버지 너무 보고 싶다’ 입 밖으로 하소연이 시작되려던 찰나 한 말씀 하셨습니다. “얼른 집에 가거라. 어른들 걱정하실라.”
아버지는 딸내미 옷차림새만으로도 허락 없이 왔다는 게 보이는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때는 참 서운하고 서러웠는데 철이 조금 든 지금 생각해보니 시어른들 눈 밖에 날까 봐 애틋한 마음 숨기고 서둘러 시댁으로 보내셨다는 걸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내 편’ 응원이 필요할 때면 필자는 부모님 뵈러 갑니다. 좋아하는 배추전 잔뜩 부쳐주시면 손으로 주욱 찢어 양념장 콕 찍어 맛나게 먹습니다. 사랑 한가득 충전해 배부르면 그제야 웃음 찾아 돌아오곤 합니다.
아름다운 신부, 두봉 주교
올해 93세를 맞은 두봉(杜峰, 본명 르네 뒤퐁) 주교는 1969년부터 1990년 정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지냈습니다.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난 그의 한국식 이름 두봉(杜峰)을 풀면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라는군요. 극빈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였던 한국에 파견된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선교사에게 가장 어려운 나라로 가는 것만큼 기쁘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하는 그는 마음 그릇 크기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꼬박 두 달 반 배를 타고 도착한 한국에서 스물여섯부터 구순이 넘은 지금까지 헌신하고 봉사한 두봉 주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당시 한국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 시절 한국 사람은 좋았다며, 그렇게 참담한 지경에 처했음에도 참 떳떳하고 친절하고 인간다운 인간이랄까 한국 사람이 풍기는 인상이 좋았다고 회고합니다. 불우한 청소년과 농민을 돌보고 교육하고 인권을 신장하는 일에 한평생 헌신해온 그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기쁘고 떳떳한 삶의 원동력
한국으로 선교 온 32년간 신부가 된 아들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온 아버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자식을 한국에 바치는 입장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며 편지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두봉 주교 품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습니다.
“일어나서 편지를 쓴다. 친애하는 나의 작은 르네야. 나는 어둡고 흔들리는 외로움 속에 서서 편지를 쓰고 있단다. 여긴 비가 너무 많고, 한국에는 비가 너무 적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하늘에서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니.”
어머니도 떠난 텅 빈 집, 병상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아들에게 삐뚤빼뚤 써 내려간 편지를 생전 아버지 대하듯 귀하게 여기는 두봉 주교. 특히 1986년 5월 9일 아흔이 되신 아버지가 부친 마지막 편지를 자주 꺼내봅니다. 보름에 한 번 프랑스로 답장을 보내던, 이제는 구십 훌쩍 넘긴 아들이 1986년 구십 아버지한테 시간여행하듯 답장을 합니다.
“아빠, 고마워요. 내가 아빠 엄마로부터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았다는 것을. 이 편지 30년 동안 계속 보내주신 것 고마워요. 난 아빠 엄마 너무 좋아. 하늘나라에서 기쁘게 영원히 행복하게 사실 거예요. 나도 언젠가 따라갈 거예요. 따라갈 때까지는 돌봐주시고, 그 다음에도 함께 기뻐할 거예요. 고마워요, 고마워.”
누군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두봉 주교는 생전이나 돌아가신 뒤나 아버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 힘이 70년 가까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나누고 헌신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일상에서 누군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느끼나요. 곁에 가족이 있어도 고립과 단절로 외로워하는 게 요즘 우리 모습입니다. 각자 방문 쾅 닫고 마음도 굳게 닫아걸고 말입니다. 열려고 있는 문인지, 닫으려고 있는 문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두드립니다. 문도 두드리고 맘도 두드려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숨통 트이고 휴, 살 만해지니까요.
진정 난 몰랐었네
다리가 불편한 아들에게 곁을 주지도, 다정하게 대하지도 않은 엄마. 학교에서 직장에서 불구라고 차별받으며 서러움만 켜켜이 쌓여가던 아들. 남편마저 일찍 여읜 엄마는 아들이 약해질까 하는 노파심에 되레 강하게 키우려 했지만, 평생 아들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아파합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jtbc)에 등장하는 엄마와 아들 이야기입니다. 그런 엄마가 덜컥 치매에 걸리면서 가족의 갈등이 점점 커지고 고통은 증폭됩니다. 치매로 기억을 잃은 엄마가 어느 날 요양원에서 사라집니다. 불편한 다리로 주변을 찾던 아들은 저만치 요양원 마당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치우는 엄마를 발견합니다. 자식 고생시키는 엄마에게 버럭 화가 났다가 불현듯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릅니다.
내 앞의 눈을 쓸어준 사람
가난했던 그때 달동네 꼭대기에 살던 모자는 한겨울 내리는 눈 때문에 엄청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등교할 때마다 누군가 깨끗하게 쓸어놓은 덕에 눈길을 넘어지지 않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랫집 아저씨가 눈 쓰는 모습을 본 아들은 ‘아, 저분이 그동안 눈을 쓸어주셨구나’ 합니다.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은 엄마가 습관처럼 눈이 오는 날이면 빗자루로 눈을 치우는 모습을 보고서야 아들은 깨닫습니다.
‘내가 비탈길에서 넘어질까 봐 엄마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눈을 쓸었던 거구나.’
아들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엄마는 또 눈을 쓸러 나갔던 것입니다. 그제야 얼어붙은 아들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엄마를 향한 원망과 서러움과 미움이 한순간에 눈물로 녹아내립니다.
버림받은 마음에 새살 돋도록
자녀의 경제적 독립과 출세, 아니 취업과 결혼이 힘겨운 최근엔 사람 노릇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비는 게 부모 심정입니다. 내 자식 걱정에만 우리가 안달할 때, 사회 한편에서는 부모 학대와 유기로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시설 보호를 마치고 해마다 2000~3000명씩 ‘자립준비청년’(예전에 ‘보호종료아동’으로 불렸던)이란 이름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2023년 현재 보육원 졸업할 때 지급되는 정착금(1000만 원)과 자립수당(5년간 월 40만 원)이 조금씩 올라서 경제적으로 힘이 된다지만,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 불안과 무력감이 삶을 포기하도록 몰고 가는 경우도 많은 게 현실입니다. 비슷하게 힘든 상황에서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한 청년의 경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고 합니다. 소통하고 의논하고 연락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고 없고가 생사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사례가 참 많다네요. 보육원 원장님이나, 시설 프로그램에서 만난 멘토나, 그 누구든 고민을 들어주고 모르는 것 물어보면 가르쳐줄 수 있는 어른 한 명만 있어도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나를 지켜줘야 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마음에 새살이 차오르도록 저부터 움직여야겠습니다.
내가 당신 받침이 될게요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고, 귀 기울이고, 가슴으로 안아줄 때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갓난아기 업을 때 포대기 두르고 아기 엉덩이를 손으로 받쳐주면 한결 가볍습니다. 책이며 서류며 물건이며 온갖 것 가득 넣은 가방을 어깨에 멜 때도 한 손으로 아래를 살짝만 받쳐줘도 아프던 어깨가 훨씬 가볍습니다. 공책에 교과서에 연필로 볼펜으로 꾹꾹 눌러쓰면 뒷장에 우툴두툴 글자가 튀어나오고 물듭니다. 그럴 때 플라스틱 책받침 하나 끼우면 뒤탈이 없어 속상하지 않습니다. 살짝만 받쳐주어도 우리 짐은 가벼워지고 삶의 무게는 덜어지고 아팠던 어깨는 견딜 만해집니다. 서로 받쳐주며 손 잡고 맘 잡고 살아볼까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풍파가 잦은 게 귀농 생활이다. 성실하게 농사를 지어도 어찌된 영문인지 흔히 혼선이 빚어진다. 무주군 설천면 산기슭에 사는 신현석(62) 역시 두루 시행착오를 겪었다. 올해로 귀농 13년 차. 이제 고난을 딛고 완연하게 일어선 걸까? 어느덧 산정에 성큼 올라섰나? 그의 얘기는 이렇다. “내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다!” 그러나 농사로 손에 쥐어지는 건 여전히 변변치 않다. 어쩌면 이제야 본격적인 레이스에 뛰어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행복하다고?
신현석이 귀농을 한 건 어지러운 도시를 벗어나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서였다. 도시라고 매력과 평화가 없으랴. 그러나 직업상의 스트레스에서 오는 괴로움을 씻기 위해선 시골로 들어가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대전에 살며 긴 세월을 매진한 건축 인테리어 사업으로 선량한 가장의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심하게 지친 몸과 마음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단다.
“건축업이라는 게 스트레스가 많다. 공사를 마치고도 대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러면 속이 탄다. 심지어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불상사가 반복되자 사람 자체가 싫어지더라.”
사람 드문 시골에 살면 한결 나은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나?
“도시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는 게 시골이라고 봤다. 농촌에서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라기론 TV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살고 싶었다. 약초를 기르며 마음 편하게, 그 무엇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살고 싶었다. 이건 사실 막연한 희망에 불과했지만 여하튼 시골에 살 작정으로 농토 3000평을 미리 사둔 게 있어 귀농을 추진하는 게 수월했다.”
첫 농사 작물은 어떤 것이었나?
“매실이었다. 미리 사둔 땅이 묵은 매실밭이어서 비교적 용이하게 농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어떤 작물을 기르든 유기농을 추구하자는 기본 방침대로 나름 충실한 농사를 했다. 첫 농사였지만 성과가 있었다. 당시 매실 가격이 상당히 좋기도 했고. 그러나 어느 날 매실청이 설탕물에 가깝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당시 전국의 매실 농가 대부분이 큰 타격을 받았는데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활로를 찾기 위해 매실 식초를 생산했으나 영 신통치 않았다.”
결국 매실 농사를 접고 새로 도전한 게 다래 농사였다지?
“무주군이 다래 농가를 정책적으로 육성하던 때였다. 따라서 승산 있는 작물로 판단해 다래를 재배, 토핑용 가공 상품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잔뜩 재배만 권장하고 후속 연계 지원은 전혀 없는 농정의 얄팍함을 실감했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대안을 가진 농정이 아니었다. 당시 나 역시 기대를 가지고 주변에 토종 다래를 많이 보급했다. 결과적으로 욕만 먹었지만.(웃음)”
매실 농사에 이어 다래 농사에서도 쓴맛을 본 셈인데, 귀농 초기에 홍역을 단단히 치른 것 같다. 이를 피할 방법은 없었던 걸까? 귀농 교육이라거나 사전 준비에 소홀한 측면은 없었나?
“비록 손실이 컸지만 매실 식초와 머루 가공품을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긴 했다. 사전 준비는 충실하지 않았다. 귀농 뒤 교육을 받아 물정을 익혔으니까. 하지만 농사 초심자에겐 어떤 작물이든 만만치 않았다. 실패한 작물이 다수였으니까.”
대충 농사지었을 리 만무하지만
신현석은 그저 ‘자연인’처럼 살고 싶다는 기분을 가지고 시골 생활을 선망했을망정 막연한 충동에 이끌려 일을 추진하진 않았다. 그는 아마도 삶이라는 교실에서 배운 대로, 매사 구체적으로 숙고하는 버릇을 몸에 붙이고 사는 게 유능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실천하는 인물이다. 이를테면 그는 귀농 전에 토지를 미리 장만해뒀지만 서둘러 집을 짓지 않았다. 집은 천천히 짓기로 했다. 일단 농장 저 아래 마을의 빈집을 임대해 5년쯤 살며 농사를 했다. 지역의 풍토와 경향을 파악하고, 농사 물정을 익히고, 아울러 자금을 효율적으로 분배해 사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충분히 고려하고 헤아려 귀농 생활의 리스크를 줄여나가고자 했다. 그러니 농사인들 대충 생각하고 대충 덤벼들어 대충 지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실패에 가까운 기록이 즐비하다.
“남의 논을 빌려 벼농사를 한 적이 있다. 화학비료를 배제한 자연농법으로. 그런데 이게 품이 무척 많이 들더라. 반면 소득은 보잘 게 없었다. 남들이 쌀 열 가마를 거둘 때 난 겨우 두세 가마를 수확했으니까.(웃음)”
재배 기술이 부족한 탓이었을까?
“그렇다. 의욕만으로 안 되는 게 농사다. 게다가 귀농 교육장에서 배운 이론적인 기술로는 한계가 자명했다. 벼농사 실패 뒤엔 콩 농사를 했는데 죽정이 수준의 콩을 소량 수확했을 뿐이다. 보리 농사도 했지만 실패했다. 전통주를 만들기 위해 누룩용 밀도 재배해봤지만 아예 제대로 자라지 않더군. 멧돼지나 고라니 등 야생동물들도 흉작에 기여했다. 무엇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손을 댄 작목마다 어긋나다니. 농사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이론보다 농사에 박사인 농민들에게 농사를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경험을 확실하게 했다. 귀농을 할 경우엔 현지 멘토를 선정해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 그런데 크든 작든 실패의 경험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노하우라는 게 생기니까. 덩달아 자신감도 생긴다.”
현재 주력하는 분야는 어떤 것이지?
“토종 다래로 만든 청고추장을 생산하는데 꽤 인기가 있다. 주력 상품은 머루 발사믹(Balsamic) 식초다. 전에 매실 식초를 생산했던 경험을 살려 고품질 발사믹 식초 제조에 전념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발사믹 식초는 샐러드드레싱과 스테이크 소스 등으로 활용되는 식재료로 일반 식초보다 향과 풍미가 뛰어나다. 신현석은 무주군에서 유일하게 머루를 원료로 하는 발사믹 식초를 생산해 주변의 관심을 사고 있다.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정통 발사믹 식초를 만든다. 그가 식초에 뜻을 둔 건 10년 전부터인데, 이제 머루 발사믹 식초로 본격적인 행진을 할 참이라고 한다. 귀농 이후 난항과 혼선이 흔했지만 발사믹 식초를 견인차 삼아 대차게 질주하고 싶은 것이다.
비로소 얻은 마음의 여유
“귀농 이후 가장 난처한 건 경제 문제였다. 사실상 이렇다 할 농업소득이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반면 거듭 자금을 투여할 일은 많았다. 시설과 장비 확보에 자주 큰돈이 들어갔다. 귀농엔 자금력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걸 절감하며 살아왔다.”
생활비는 그간 무엇으로 충당했나?
“틈틈이 건축 일을 해 생계 문제를 해결해왔다. 대전에 살 때 벌어들인 소득수준에 미치지 못하지만 아내와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늘 쫓기는 기분으로 고민에 사로잡히곤 했다.”
농사와 건축업을 병행한 형국이다. 이건 이상적인 배합이지 않을까? 농외소득을 최대한 끌어올려 농사의 부진을 메워나가는 건 고육지책이라기보다 진취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단점도 있다. 건축 일을 하다 보면 농사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게 바로 그렇다. 나와 아내는 이 산골에서 여생을 살다 흙으로 돌아갈 걸 작정하고 귀농했다. 농업에 전적으로 몰두하며 살 수 있는 여건 마련이 향후 숙제다. 이제 발판은 마련됐다. 매우 긍정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당신은 무주군귀농귀촌협의회 리더 그룹에 속해 있다. 귀농인들의 실정에 밝을 테지. 농사 문제를 제외할 때 귀농인들은 흔히 어떤 사안에 가장 큰 애로를 느끼는가?
“토박이 주민들과 융화하는 문제다. 대체로 원주민들은 귀농인들에게 심적 불편을 느끼는 것 같다. 일부 주민들은 대놓고 ‘굴러온 돌’ 취급을 한다. 내가 사는 마을에선 다행히 예민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 13년을 살며 좋은 유대관계를 맺어온 나를 내심에선 여전히 이방인으로 여긴다. 불화와 반목이 심한 마을에선 귀농인이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반면 일부 귀농인들이 물을 흐려놓는 경우도 있다. 어느 한편에만 문제의 원인이 쏠려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해결책이 있다면?
“깊이 들어가 보면 농업지원금 문제로 갈등이 유발되는 걸 알 수 있다. 토박이들은 귀농인들이 지원금을 독식한다 하지만, 귀농인들은 혈연과 학연의 힘을 가동하는 원주민이나 귀향인들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불합리를 지적한다. 그렇다면 관에서 매우 공정한 룰을 운용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융합교육도 시급하다는 생각이다.”
올더스 헉슬리라는 작가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다른 행성에서 바라보면 지옥일 수 있다’고 했다. 어디서든 유쾌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 수는 없다. 내 생각에 시골의 풍속은 기본적으로 순한 것 같더라.
“정중하게 다가가면 마음을 열어주는 게 시골 사람들이다. 본심은 다 좋다. 순박하다. 이해관계가 발생했을 때 서로 아량을 베푸는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신현석의 산골 거처는 고요하고 평온하다. 집은 집주인을 닮는다던가? 정갈하면서도 묵직한 기운을 품은 집만큼이나 그가 풍기는 분위기 역시 담백하다. 눈길은 따사로워 뿔도 발톱도 없이 사는 초식동물처럼 양순하다. 도시에서 그의 영혼까지 쥐어박았던 스트레스와 번민은 어느덧 바람처럼 흩어졌나? 농사에선 혼선과 부진이 많았지만 삶의 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고 한다. 중심을 놓치지 않고 한 방향으로 달려온 덕분인데, 그의 중심엔 ‘가족 사랑’이 들어 있다.
“귀농으로 얻은 게 많다.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게 됐다. 게다가 아들 내외까지 이곳에 합류해 각자의 일을 한다.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산다. 난 어릴 적 혼자 성장하다시피 해 한없이 외로웠다. 따라서 가족과 동행하는 삶에 가치를 두었는데, 그걸 성취한 셈이다. 내겐 지금보다 더 행복한 시절이 없었다.”
신현석이 주는 귀농 Tip
•냉정한 현실 감각을 가지고 귀농의 제반 상황부터 면밀하게 파악하라.
•농사를 시작한 뒤 일정 정도 소득이 나오기까지 최소 4, 5년은 걸린다는 걸 유념하자. 여유자금 비축이 필수라는 뜻이다.
•집부터 먼저 짓지 마라. 임대하거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농인의 집’에서 일단 살아보고 물정을 충분히 파악한 뒤 천천히 짓는 게 현명하다. 농토 역시 처음엔 임대해 쓰는 게 좋다. 찾아보면 무상으로 빌릴 수 있는 전답도 있다.
•농업 기술은 현지에서 멘토를 선정해 배우자. 그래야 재배 작목 선정은 물론 판매망 문제 등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부부가 과수 농사를 할 경우 3000평 정도 규모가 적당하다.
•반짝하다가 추락하기 쉬운 유행 작물보다 기본 작물을 충실하게 짓는 게 안정적일 수 있다.
•농사는 1년 내내 하는 게 아니다. 농한기나 여유시간엔 봉사활동이나 취미생활을 해 활력을 돋우자.
김두엽 할머니의 그림 생활은 여든셋의 어느 날, 달력 뒷장에 무심코 그린 사과 한 알에서 시작됐다. “아따, 엄마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라는 아들의 칭찬에 춤을 추듯 마음 가는 대로 그렸다. 무심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 끝없이 이어지는 가난과 싸우며 고생스러운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그마저도 추억’이라며 밑천 삼는다. 어느덧 아흔여섯의 화가가 된 그는 오늘도 작은 나무 책상에 앉아 모진 세월을 희망으로 바꾸고 있다.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알록달록 물감 칠해진 시골집에는 늦깎이 예술가, 김두엽 할머니가 살고 있다. 그의 그림은 거실, 부엌, 안방 곳곳을 꿰찼다. 완벽한 직선은 아니지만 꼬불꼬불 섬세하게 이어진 선과 과감한 색 조합은 ‘사람 냄새’를 짙게 풍긴다. 여든셋에 그림을 시작해 올해로 14년 차 화가가 된 그는 현재까지 600여 점을 그려냈다. 그동안 수십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KBS 교양 프로그램 ‘인간극장’, 토크쇼 ‘황금연못’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그림 그리기 딱 좋은 나이
김두엽 화가는 매일 아침 8시 반, 아침 식사를 한 뒤 어김없이 그림을 그린다. 한번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영감은 지난날의 기억, 일상에서 본 풍경,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등에서 다양하게 얻는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손을 움직인다. 택배 일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끄적인 그림이 이토록 인생의 큰 줄기가 될 줄은 예상치 못했으리라.
“아들도 화가예요. 그림을 팔기 위해 그리지 말자는 신조를 지녔죠. 그래서 낮에는 택배 일을 하고, 퇴근하면 틈날 때마다 작업실에 있더라고요. 나는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지. 집에 굴러다니는 연필을 주워 가지고 달력 뒷장에 사과를 그렸어요. 아들이 집에 와서 ‘엄마, 이거 누가 그렸어?’ 그래요.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신이 났지요. ‘내가 진짜 잘 그리나?’ 싶었어요. 그러다가 읍내 나가서 스케치북을 두 개 사왔어요. 이것저것 그려서 벽에 붙여뒀는데 손님이 우리 집에 와서 보고는 잘 그렸다고 하셨어. 그때부터 기분이 좋아서 그리고 또 그리고 그랬지요.”
그가 창작 활동을 본격적으로 이어나간 데는 아들 정현영 화가의 도움이 컸다. 정현영 화가는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등단해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에 참여했다. 중견 화가의 눈에도 처음 그려낸 어머니의 사과 그림은 놀랍도록 꼼꼼했다. 배우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계속 그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색연필, 물감 등 다양한 색채 도구를 쥐여드렸다. 원색 위주의 과감한 색을 사용하지만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졌다.
세월이라는 재료
김두엽 화가는 192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학교는커녕 공부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상황에 제약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꿈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귀국한 뒤 결혼해 아들, 딸을 낳아 길렀다. 너무 가난했던 탓에 그저 굶지 않고 사는 것, 내 가족이 평안한 것, 남편과 다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생계를 잇기 위한 노동은 계속됐다.
김 화가의 그림은 구김살 하나 없이 화사하고 또렷하다. 모진 시간이었지만 아팠던 과거를 오히려 사랑하고 마음에 품었기 때문일 테다. 시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은 김두엽 화가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수십 편의 시를 썼고, ‘지금처럼 그렇게’라는 시화집을 펴내기도 했다. 두근거림이 있는 그림이라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원하는 삶을 산 건 아니었어요. 꽃피는 봄날에 사랑하는 사람과 예쁜 원피스를 입고 나들이 가고, 어스름한 저녁 산책하다 들꽃 한 아름 받고 싶었네요. 지금이라도 내 바람을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어 좋아요. 괴로웠던 기억도 저편으로 날아가거든.”
최근에는 함께 노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시니어 컬러링북 시리즈’를 출간했다. 김 화가가 70대 중반부터 시작된 수전증을 그림으로 극복한 것처럼, 동년배들도 손의 감각을 되찾는 기쁨을 느꼈으면 해서다. “참 오래 살았어요.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참이더라고. 나이 먹어서 그림을 매일 그릴 줄 누가 알았겠어. 기력이 없을 때도 있지만 붓을 잡고 있으면 힘이 좀 나는 것 같고 그래요. 느리더라도 천천히, 계속 그려봐야지. 여러분도 다들 힘냈으면 해요.”
어니스트 헤밍웨이, F. 스콧 피츠제럴드 등의 미국 고전을 즐겨 읽던 사람이라면 김욱동이라는 ‘옮긴이’가 익숙할지도 모른다. 그는 ‘노인과 바다’, ‘위대한 개츠비’, ‘허클베리 핀의 모험’, ‘주홍 글자’ 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비롯해 ‘앵무새 죽이기’, ‘그리스인 조르바’ 등 대표적인 영·미 문학 작품을 다수 번역했다. 2013년 은퇴 후에도 번역가이자 영문학자로서 번역서와 문학 연구서를 출간해온 그는 신간 ‘번역가의 길’을 통해 번역 이론의 지평을 또 한 번 넓히고 있다.
진짜 사람처럼 맥락을 이해하고 대화한다는 인공지능(AI) 서비스 ‘챗GPT’가 영어로 쓰고, 인공지능 번역기 ‘파파고’가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 최근 출간됐다. 삶을 행복하게 꾸리는 방법에 관한 자기계발서다. 집필, 번역, 교정·교열, 편집 과정을 거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30시간. 기획부터 출간까지 걸린 총 시간은 7일에 불과하다. AI 기술, 기계 번역이 산업을 넘어 사회 전 영역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미래에 사라질 직업으로 번역가가 빠지지 않고 포함된다.
“번역가는 정말 없어지고 말까요?”
원로 번역가인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를 만나 물었다. 어쩌면 실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입을 뗐다. “기계 번역은 문법 구조가 복잡하거나 상황과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문장, 중의적 표현이나 문장, 신조어나 고유명사 같은 낱말을 번역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미묘한 감정을 다루는 문학 번역에서는 더더욱 사람을 능가할 수 없죠.”
김 교수는 기계 번역의 한계를 증명한 사례로 2017년 열린 인공지능 번역기와 인간 번역가들 간의 대결을 꼽았다. 구글, 파파고, 시스트란은 ‘The dog was rude to the blanket’(강아지가 담요에 실례를 했다)이라는 문장을 ‘강아지가 이불에 예의가 없었다’고 바꿨다. 번역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일어나는 결과다. “가령 구글로 ‘나 말리지 마’라는 문장을 영어 번역하면 어처구니없이 ‘Don´t dry me’가 나와요. 옷을 말리는 게 아닌데 말이에요. 고유명사는 이보다 더 심각해요. 경남 진주를 입력하면 ‘Gyeongnam Pearl’로 나오기도 해요. 바다의 보석 진주라니, 황당하죠.”
어떻게 번역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가 번역한 작품이 처음 활자로 찍혀 나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이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할 때 미국 소설가 맥스 슐먼의 단편소설 ‘사랑은 오류’를 번역해 교내 잡지에 실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 ‘호루라기’에 관한 일화를 번역해 당시 월간 교양 잡지 ‘샘터’에 싣기도 했다. 어린 시절 프랭클린이 호루라기를 실제 값보다 네 배나 비싸게 샀던 일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이때까지도 그는 영문학자가 되려 했으나, 부실하게 중역한 작품을 새롭게 바꿔 한국 문학의 지평을 넓혀보고자 번역가의 길을 택했다.
이제는 번역계에서 이름난 김 교수지만, 번역을 하면 할수록 ‘번역’과 ‘반역’ 사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단다. 정확한 의미 전달과 동시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가독성까지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번역은 좀처럼 이룰 수 없는 드높은 이상일지 몰라도 번역가는 ‘차선’을 향해야 합니다. 번역가는 육지와 육지 사이에 가로놓인 강을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룻배를 젓는 뱃사공이 없다면 한 육지에 머물 수밖에 없듯이 번역가가 없다면 한 나라의 문학은 민족 문학의 울타리에 갇혀 있게 되겠죠. 우리가 침묵하며 변방에 살지 않고 다른 나라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며 사는 건 다름 아닌 번역의 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시대의 감수성을 옮기다
그는 번역에도 ‘소비기한’이 있다고 말한다. 번역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받기 때문에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은 기존의 번역을 다시 점검하고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의미다. 한 시대에 좋은 번역으로 평가받던 작품도 다른 시대에서는 그러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별에 관한 번역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냥 ‘교사’, ‘검사’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여교사’, ‘여검사’라는 말을 사용하는 거죠. 과거에는 해당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중 남성이 여성보다 월등히 많아 생겨난 단어라고 해도, 현재는 그 비율이 뒤집어져 ‘남교사’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여교사’라는 말이 여전히 자연스레 쓰이는 걸 보면 그만큼 언어에 남성 중심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 수 있어요. 시대를 거듭할수록 독자의 감수성도 바뀌니, 번역가들도 능동적인 태도를 취해야죠.”
책은 독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긴다. 은퇴 후에도 김 교수는 독자에게 긍정적인 흔적을 남기고자 매일 개인 사무실에 나가 번역과 저술 작업을 하고 책을 읽는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도 거르지 않는다. 번역가는 낱말의 넓이를 키우고 깊이를 더해야 하며, 언어 감각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폭넓은 독서만큼 다양한 낱말을 익힐 방법은 없습니다. 대신 책의 내용을 무조건 수용하기보다 한 번쯤 저자의 의견을 의심하며 비판적 사고를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한 권이라도 천천히 내용을 음미하다 보면 깨닫는 것이 참 많죠. 지금까지 해온 만큼 앞으로도 오래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습니다.”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뤄주고, 남의 추함을 이뤄주지 않으나,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논어’ 안연편
필자가 오늘 소개할 세 사람은 바로 군자(君子)가 추구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늘 자기를 살펴 고치고, 그동안 해온 업(業)을 배움과 덕으로 더욱 널리 펼치는 모습이 지극히 아름답고 숭고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어느결에 새 마음이 헌 마음이 되었습니다. 다져 먹었던 결심과 각오는 흔들리고, 마음에 새겼던 약속은 또 다른 변명과 구실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영웅호걸 찾기 힘든 시절, 업을 이어 승화시킴으로써 세상에 나누는 여장부(女丈夫) 세 사람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대설 내리는 날, 구둣방에서
혹독한 한파가 몇 날 며칠 계속되더니 드디어 큰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한 날 이른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남편 등산화 수선을 맡기러 평소 눈여겨보던 답십리 사거리 구둣방을 찾은 것입니다. 하필이면 대설로 천지 분간도 안 되는 날을 잡았지 뭡니까. 교차로 신호등이 바뀌기 무섭게 잰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저만치 백열등 알전구가 노란 불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휴, 다행이다. 속으로 안심하며 드르륵 가게 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사장님?” 인사를 건넵니다.
이곳은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구두 수선집입니다. 40년 가까이 해온 이 일의 진짜 주인은 남자 사장님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여자분이 가게에 종종 보이더니 아예 사장님 자리를 꿰찼네요.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조심스레 여쭤보았습니다.
“사장님이 바뀌셨나요? 남자 어르신은 이제 안 보이시네요. 어디 편찮으신가요?”
대답을 듣지 못해 민망해진 필자는 더는 묻지 못하고 본론을 꺼냈습니다. 등산화 바닥이 많이 망가져서 고칠 수 있는지 물어보았지요.
세상 뜬 남편 대신 업을 이어 붙이며
“한 3년 됐어요.”
낡은 신발 바닥을 잘라내고, 덧대고, 기우고, 못질로 신발 몸체와 단단히 연결시키는 과정을 빨려들듯 지켜보느라 처음에는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아무 대꾸도 않는 제게 그녀는 다시, “칠십도 안 된 남편, 담낭암과 황달로 3년 전에 보냈어요. 그이 생전에 어깨너머 배운 것과 밖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걸로 닫았던 가게 문 다시 열었어요.”
왜 맨손으로 작업하시느냐 물으니 장갑을 끼면 감각이 무뎌져 정교함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손톱 밑이며 손바닥과 손등까지 시커멓게 변한 손이 마치 ‘뻬빠’(사포) 같습니다. 거친 자신의 몸을 문대어 운동화며 구두며 장화며 부드럽고 매끄럽게 하니까요.
신발 바닥 덧대는 여자
요즘엔 서방 알기를 개떡같이 아는 세상이 되어서인지 몰라도 남편 구두 반짝반짝 닦아 현관에 대령은커녕 벗어놓은 신발 걷어차거나 밟지 않으면 다행이라고들 합니다. (이 말은 제 뒤에 앵클부츠 한 짝을 들고 온 초로의 여자분이 필자에게 요즘 젊은 것들 흉보며 한 말입니다.) 필자 역시 별다르지 않아서 먼지투성이 남편 신발을 꺼내놓자니 갑자기 부끄러워지더라고요. 한데 구둣방 여주인은 험하고 더러운 데며 온갖 곳을 돌아다녔을 등산화를 소중히 안고 구석구석 매만지고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를 헤매고 다녔는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왜 관리는 제때 안 했는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그맣고 여린 손으로 낡고 더러워진 신발을 귀한 물건인 양 정성스레 대하는 그녀 머리 뒤로 후광이 퍼지는 듯 마음이 짜르르해졌습니다. 아프고 상처 난 마음, 억울함과 분노로 막히고 뭉친 마음에 반창고 붙인다고 다니는 필자는 그날 비좁은 구둣방에서 숨고 싶어질 만큼 작아졌습니다.
숟가락 장단에 희로애락 담아
‘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진짜가 나타났다 지금’
나무 숟가락 두 개를 한 손에 쥐고 유행가 따라 장단을 맞추며 춤추는 이복자 숟가락난타협회 대표. 실용음악 재즈피아노를 전공하고 음악치료 석사과정을 공부한 이 대표는 일평생 음악학원을 하며 생업을 이어오다, 환갑이 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했습니다. 이 대표는 평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도 형편이 되지 않아 아예 시도하지 못하거나, 배우는 과정이 어려워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에 일상에서 흔히 쓰는 도구를 악기 삼아 연구하고 연습하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해 즐길 수 있도록 악보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단순명료하게 만들었습니다. 세모, 네모, 별, 화살표, 이렇게 딱 네 개 기호만으로 만든 그녀만의 악보는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별도 볼 수 있고, 세모, 네모 다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갈증을 쉬운 악보와 도구로 풀어준 이 대표는 숟가락 난타를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린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위기가 가져온 인생 반전
이 대표는 숟가락난타협회를 만들어 울산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대면, 비대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강사 양성과 공연에 열중했습니다. 그 공로로 2021년 제40회 스승의 날 기념 ‘한국강사신문이 선정한 제1회 대한민국 명강사 12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숟가락 난타 강사이자 음악가로 활동하며 자신이 양성한 제자들이 전국 방방곡곡 숟가락 난타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힐링·음악치료 분야에서 수상한 만큼 그 정성과 열정을 인정받은 셈이지요.
어쩌면 코로나19는 이 대표에게 인생 2막을 열어준 전화위복의 불씨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면 수업 중심이던 음악학원이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아 모든 활동이 멈췄을 때 비대면 온라인 교육을 접하며 활로를 모색할 수 있었으니까요. 30년이 훌쩍 넘도록 운영해온 음악학원을 딸에게 물려준 이 대표는 ‘내 삶의 주인공’으로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노후에 펼칠 로망으로 간직했던 꿈을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음악 분야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악기와 음악을 쉽게 접하고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을 더 늦기 전에 펼치게 되었지요. 오랜 궁리 끝에 ‘세상에서 가장 쉽고 빠르게 배워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바로 숟가락 난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악기 가운데 관객 호응이 가장 좋은 점도 함께 즐기기 안성맞춤이고요.
마음 장단 맞추기는 참 어려워요
흥과 끼라면 지구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리 민족은 악기가 있건 없건 가락과 장단에 맞춰 잘 놀 줄 압니다. 쿵짜락 쿵짝 삐약삐약. 왕년에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하고 춤춰보셨습니까. 지역마다 독특한 장단이 있습니다. 장단 맞추기 쉬울까요? 즐겁고 행복한 인생 2막을 위해 숟가락 난타를 개발해 전국을 다니며 장단 맞추기를 가르쳐온 이 대표에게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인간관계에서 부딪히는 갈등이라고 합니다. 어제 막역한 친구였다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적이 되어 자신을 공격해오는 경우는 정말 마음이 힘들었다고 하네요. 평생 음악학원에서 십대 안팎 어린 교육생들만 상대하다 숟가락 들고 만나는 어른들은 영판 달랐으니까요. 스스로 마음 단련하는 법을 익히느라 고생도 했지만, 숟가락 두드리며 가슴속 진심이 상대에게 전해져서 서로 위안이 되는 따뜻함을 나누었으면 하는 게 이 대표의 바람입니다. 밥 먹던 숟가락이 이제는 신명과 즐거움을 먹고 그 행복을 베풀게 되었습니다.
높이 말고 낮게, 예술을 나누는 천사
하프 소리는 사람이 듣기에 가장 좋은 음파를 낸다고 합니다. 서툰 연주도 신경을 긁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할까요. 초보자가 연주해도 아름답게 들린다는 게 하프가 지닌 강점이라네요.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그런 게 아닐까요. 하늘에서만 연주할 것 같은 고상하기 그지없는 하프를 지상으로 가져와 누구든지 어디에서나 배우고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이가 바로 안영숙 한국하프교육협회 회장입니다. 사실 회장보다 교수라는 호칭으로 오랜 세월 살아온 안 회장은 한국에서 하프 연주자, 일명 하피스트 1세대로 불리는 유학생 1호입니다.
악기 제작자로 변신한 하피스트
하프 대중화라는 목표에는 우리 국민의 마음이 정서적으로 따뜻해지기를 바라는 안 회장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하프는 이동과 보관이 너무 불편할 뿐 아니라 실제 연주할 때도 불편을 넘어 고통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 정말 까다롭고 비싼 악기입니다. 이런데도 그동안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은 걸 이상하다고 느낀 안 회장은 자신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용감하게 뛰어들었습니다. 주변의 무관심과 싸늘한 시선을 뒤로하고 결국 목공학교를 5년이나 다니면서 사서 고생을 한 끝에 미니 하프 ‘줄리’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나누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정서적으로 풍부하게 만들겠다는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그녀의 노고는 속속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2022년 12월 10일 제1회 줄리 하프 국제 콩쿠르 본선을 한국영상대학교에서 열어, 초등부에서 실버 부문까지 전 연령대에 걸쳐 수상자를 선정하며 하프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또 12월 21일에는 ‘2022 한국 소비자 베스트 브랜드 대상’ 악기 개발 및 하프 교육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직접 만든 소형 하프로 하프 대중화와 악기 시장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안영숙 회장. 줄리 하프는 해외 시장에도 진출해 악기 수출뿐 아니라 교육센터를 통해 누구나 쉽게 하프에 접근해 즐길 수 있도록 저변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충남 공주시 단골 철물점에서 직접 고른 철사줄을 매어 하프를 손보던 안 회장은 가게에서 즉석 연주를 합니다.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연주했던 ‘문 리버’(Moon River)가 그녀의 손을 타고 계룡산까지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
오늘도 헌 구두 하나 꺼내며
옆 사람 표정과 눈빛에 상처 입고, 가족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폐부 깊이 찌르는 송곳이 되어 아플 때. 이런 날이면 필자는 신발장을 기웃거립니다. 뭐 고칠 것 없을까 공연히 이 신 저 신 꺼내놓습니다. 오늘은 아들 구두 손볼 차례입니다. 새 신 바닥 앞뒤로 미리 고무창을 덧대면 발바닥도 덜 아프고, 우툴두툴 고무 요철이 미끄럼도 막아주고, 신발 수명도 늘려준다고 하니 일석삼조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구둣방에 미리 오신 옆자리 손님은 자기 것과 딸내미 롱부츠까지 바닥 창을 덧대달라는 주문을 하네요. 구두처럼 우리 마음에도 다치기 전, 아프기 전 미리 반창고 하나씩 붙여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