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들려주는 얘기의 톤도 내용도 화창하다. 꽃 핀 개나리처럼 밝다. 전공은 미나리 농사. 청초하기로 개나리에 맞먹을 미나리와 자신이 딱 닮았단다. 미나리의 억센 생명력, 그걸 집어 자신의 정신적 초상으로 여기는 거다. 미나리의 초록처럼 싱그러운 시절은 아쉽게도 이미 몸에서 떠났다. 그러나 이옥금(62) 씨가 누리는 귀농생활은 베어낸 자리에 다시 싹눈이 돋는 미나리처럼 싱싱하다.
농사란 정한(情恨)의 사업이다. 흠뻑 정을 쏟아도 일쑤 허무한 결산이 돌아오는 게 농사이니까. 그러나 미나리 농군 옥금 씨는 구슬피 우는 일 한 번 없이 쾌속 직진했다. 미나리 농사를 시작한 첫해부터 오붓한 결산을 봤으며,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거침없이 질주할 게 빤하다는 게 아닌가.
‘뭐시라? 그럼 나도 미나리 농사에 뛰어들어볼까나!’ 이렇게 솔깃해하며 미나리를 믿고 귀농에 용기를 내는 이가 있다면 그는 머잖아 싱긋 웃을지도 모른다. 썩 유능한 작목을 선택했다는 안도감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옥금 씨의 믿을 만한 귀띔에 따르면, 개중에 유망하면서도 수월한 게 미나리 농사라는 게 아닌가. 물론, 남의 흉내만으로 덩달아 성취할 수는 없는 게 농사다. 야무진 자립 의지와 노력, 그리고 속 깊은 꾀주머니가 필요하다. 행운을 배달하느라 늘 업무에 바쁘신 천사의 내방도 필요하다. 여하튼 농사 초보자에게 미나리만큼 대견한 작물이 다시없다는 게 옥금 씨가 주는 금쪽같은 힌트다. 그녀 자신이 일련의 성취를 이룬 본이라는 자부심도 크다.
미나리 연간 매출액 약 7000만 원
흔히 남편의 근사하고도 집요한 꼬드김에 따라 부부 귀농이 이루어진다. 옥금 씨의 경우는 달랐다. 옥금 씨가 먼저 남편 정덕근(69) 씨를 유인했다. 아마도 신혼 첫 밤의 속삭임처럼 자못 감미로운 유혹이지 않았을까. 지루한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자연을 즐기며 인간의 고유한 의무인 평온한 삶을 구가하자, 피로에 찌든 두 사람의 영혼에 생기를 부여해보자는 요지의 제안을 했던 모양이다. 거기엔 아무런 먹구름이 없었다. 해서, 은퇴 이후의 나날을 다소 따분하게 보냈던 덕근 씨는 노년의 신세계가 멋들어지게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마침내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저 멀지 않은 곳에서 희양산의 우뚝한 바위 봉우리가 눈부신 빛을 뿜는 경북 문경군 가은읍의 변두리께 시골로. 그게 10년 전의 일이었다.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했어요. 문경으로 귀농한 것도 여행 중에 만난 문경 산수에 반한 호감 때문이었지요. 명산이 많아 어딜 보나 아름다운 지역이니까요. ‘문경’(聞慶), 즉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지명의 뜻도 아주 기분 좋더라고요.”
“귀농하자마자 미나리 농사를 시작했나요?”
“처음 한동안은 오미자 농사를 했어요. 오미자가 문경의 명산물이거든요. 지역의 대세를 따랐던 셈이죠. 그런데 전지(剪枝) 작업을 비롯해 모든 게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나 부부 둘 다 키가 작아 오미자 덩굴을 지지대 위에 올려주는 작업이 엄청 힘들더군요. 남편의 불평불만마저 심해져 자칫하면 이혼 법정에 설 것 같은 상황이기도 했어요.(웃음) 이래저래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미나리로 바꿨지요.”
미나리엔 두 종류가 있다. 물속에서 길러 뿌리째 생산하는 물미나리와, 밭에다 재배해 잎자루를 수확하는 밭미나리. 옥금 씨는 비닐하우스를 지어 밭미나리를 기른다. 경지 면적은 1200평. 그간의 연간 매출은 평균 6000만~7000만 원이며 이것의 70%가 순소득이란다. 미나리 재배 첫해부터 이런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니 놀랍다. 더욱 기똥찬 건 연중 작업기간이 다만 두어 달이라는 점.
“미나리 농사의 매력은 한둘이 아니에요. 우선은 첫해부터 수익 발생이 가능하다는 점이지요. 생산까지의 작업 과정도 단순하고, 다년초라서 한 번 심으면 과수처럼 해를 이어 계속 수확이 됩니다. 농약이나 농기계가 필요한 일도 아니고요.”
“연중 작업기간이 불과 두어 달이라 했죠? 그 이상은 생산이 어려운가요?”
“연중 생산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늦겨울과 초봄 사이 두어 달만 집중해도 채산성이 좋기에 그리 하고 있어요. 이 시기엔 잡초도 거의 없어 일이 한결 쉽지요.”
“판로 문제는? 생산이 쉽더라도 판매조차 쉽지는 않을 텐데요?”
“그게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즙으로 가공하지 않는 한 저장 판매가 불가능해 생물로 즉시 팔아야 하는 게 미나리이니까. 저는 밭을 살 때 일부러 차량 내왕이 많은 도로변을 택했어요. 관광지구 문경을 드나드는 관광객들이 직접 재배 현장을 구경하고 시식까지 겸할 수 있도록 찻길 가에 간이식당이 딸린 농장을 조성한 게 주효했지요. 지인들을 통한 택배 판매나 SNS 마케팅도 겸해왔지만 현장 판매가 참 재미있어요. 주말이면 허리에 찬 전대가 순식간에 불룩해지던걸요.(웃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밤낮없이 식은땀을 흘리기 쉬운 게 농사다. 물정에 어두운 귀농인의 시련은 더 자심할 수밖에 없다. ‘하이고, 이건 뭐 모래성을 쌓는 거 아녀?’ 그런 푸념이 푸짐하게 터져 나올 수 있는 것. 하지만 옥금 씨는 까딱없다. 오미자로 초기에 잠시 죽을 쑨 것 외엔 순풍을 만난 돛배처럼 길찬 행보를 거듭해왔다. 이게 오로지 자력으로 이뤄진 것만은 아니란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적극 거들어준 대목이 많다는 게 아닌가. 멘토를 붙여주고 판로를 함께 모색하는 식으로. 올봄부터는 관에서 주도하는 ‘문경 미나리삼겹살 식당 단지’에 미나리를 납품할 예정이며, 공급 물량의 지속을 위해 미나리를 연중 생산할 계획이다.
“사견이지만, 제가 파악하기로는 전국의 미나리 농가들이 대체로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것 같아요. 경북 청도군에 이어 미나리 농업 특화지구로 부상하고 있는 문경군으로 귀농한 건 행운이었지요. 애초 농사에 전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정말 재미있게 빠져들었어요. 귀농 이후 할일이 많아졌지, 사귄 사람 많아졌지, 갈 곳과 오라는 곳 많아졌지, 이모저모 즐거워요.”
고충은 낙관적 근성으로 해결했다
신바람 났다, 옥금 씨. 예상하지 못한 고난으로 어혈이 든 심정으로 헤매기 쉬운 게 귀농생활. 그러나 그녀에겐 무관한 얘기다. 두루두루 즐거운 일 속에서 활갯짓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이는 옥금 씨가 몹시 사랑해 마지않는 희양산의 정기를 받은 덕택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스스로 기른 활달한 기상의 정기를 받은 덕이라 봐야 할 것 같다. 타고난 근면성, 낙관적인 근성, 거침없는 사교성을 겸비했으니, 한마디로 어느 물에 던져놔도 물방개처럼 능숙히 활개칠 성향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딱 부러지게 대찬 투지마저 타고났다. 귀농 초기, 그녀는 여기저기서 몇 번 맞붙었단다.
“귀농인들에게 던지는 눈초리부터 차가운 게 시골 분위기입니다. 초기에 저는 세 차례 들었다 놨다, 원주민들과 싸워 이겼어요. 한번은 공무원들과도 싸웠지요. 농지원부 관련 일처리에 너무도 미온적이라 분통을 터트렸던 건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일단 책상을 탕탕 치며 ‘면장 나오라고 해!’라고 버럭버럭 고함을 치라고요. 그래 그대로 했더니 비로소 태도를 바꾸더라고요.(웃음)”
“원주민 한 사람과 싸우고 나면 마을 전체가 돌아앉을 수 있지요. 미운 털이 박힐 걱정은 하지 않으셨나?(웃음)”
“통과의례를 피할 수는 없지요. 충돌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긍정적 관계의 조성을 앞당겼다고 봐요. 뭐 사실, 저의 단점은 인정합니다. 매사 너무 적극적이라는 거!”
“문경군 귀농귀촌협의회장으로도 활동했죠? 조용하고 한가한 시골 생활을 계획했던 처음의 구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온 셈인가요?”
“별안간 방향이 달라진 게 사실이지요. 그런데 일이 즐거워 집 안에만 박혀 있긴 힘들더라고요. 이왕 시골에 온 김에 남들과 어울려 더 즐겁고 더 보람찬 일을 찾아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누를 수가 없어서.”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남들의 유익까지 생각했다는?”
“남들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 결국은 저 자신에게 보람으로 돌아오는 거 아니겠어요? 저는 지인들이 일손을 필요로 할 경우엔 무조건 달려갑니다. 불편하고 험한 일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게 저의 특질이기도 해요. 예전엔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을 자주 했는데 그때에도 주로 오지를 누볐지요. 그런 여행이 삶의 본질 같은 걸 사색하게 하니까.”
귀농을 통해 자연 속에 살다 보니 이젠 딱히 여행 충동을 느끼지도 못한단다. 가만히 바라보면 주변의 자연 풍경이 경이로워 이미 이색이며 충분한 사색의 재료이기 때문에.
“삶의 본질? 그걸 뭐라고 보죠?”
“황량하고 쓸쓸한 게 인생의 본질 같아요. 그러나 다 긍정하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가급적 재미있게 살아야겠다는 것. 그런 걸 자주 생각해요. 제가 한번은 국수집을 차려 즐거웠어요. 문경 아줌마들이 모이는 수다방을 만들고 싶어 한 그릇 가격을 3000원으로 정해 문턱을 낮췄지요.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났어요. 어휴, 남녀노소 손님이 어찌나 많던지 남편의 원성이 하늘에 뻗치던걸요.”
“박수가 아니라 원성이?”
“일을 거들던 남편이 질려 나가떨어진 겁니다. ‘이거야 원, 농사도 힘들어 죽을 맛인데 내가 국수까지 말아야 하느냐? 이젠 정말 못 살겠다!’ 그런 비명을 지른 거예요. 냉큼 가게를 접었지요. 하하하!”
투덜이 남편은 하나뿐인 길벗
옥에 티라 할까. 옥금 씨의 미끈한 시골생활에도 폐단이 있다. 남편과 앙앙불락 실랑이가 잦았으니 말이다. 이는 사실 간단한 ‘티’가 아니라 토네이도의 전조일 수 있었지만 용한 곡예로 어렵사리 넘어온 것 같다. 내외는 한집에 살면서도 3년째 별거하고 있다. 옥금 씨는 안채에, 덕근 씨는 별채에. 이렇게 소가 닭 보듯이 사는 게 서로 속 편하단다. 규격화된 부부 시스템에서 진취적으로 벗어나 호젓하게 개체의 인권과 자유를 누리기에. 용무가 있을 때면 상대의 주둔지로 면회를 가겠지. 영치금을 넣어주듯이 간간이 풍미 넘치는 별식을 넣어줄지도 모르겠다. 잠이야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달빛이 있으니 한 이불을 덮지 않아도 될 테지.
아직 불후의 저작을 내지는 못했지만 옥금 씨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해 시(詩)로 등단도 했다. 덕근 씨는 국토교통부 산하 기관에서 항공교통관제 공무원으로 35년을 근무하다 퇴직했다. 사회와 이웃을 교란한 적 없는 이 무고한 사람들은 제각각 억울하다고 하늘에 대고 탄원서를 쓴다. 할 만한 일이라는 일은 모두 찾아 나를 쏟아 부음으로써 명랑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게 무슨 죄냐고 옥금 씨는 툴툴거린다. 반면, 덕근 씨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날이면 날마다 나를 일에 처박아 골병들게 하느냐고 투덜거린다. 그것도 ‘무보수 명예직’으로 말이다. 덕근 씨는 괜스레 아내의 꾐에 코 꿰여 애초 기대했던 시골이라는 낙원은커녕, 만고에 허무한 지옥에 풍덩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씩 웃으면 해맑은 표정이 드러나는 이 순둥이 남자는 낙원을 찾아 모퉁이를 돌다가 왕퉁이 벌에게 쏘인 격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금 씨는 고고싱! 어디까지나 직진이다. 인생이란 저마다 외로운 별처럼 홀로 광을 내야만 하는 고독 드라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제가 이젠 남편을 완전 포기했어요. 남편 역시 저를 도저히 뜯어고칠 수 없는 여자라는 걸 명석하게 알아차린 것 같아요.(웃음) 그러자 살짝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아요. 연민이라 하나? 그런 감정도 생기고요. 알고 보면 남편이 엄청 착한 사람이거든요.”
유유상종할 게 드문 연이라는 걸 귀농하고서야 알았단다. 그러나 근 한평생을 동행한 남편이란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길벗. 그걸 인정하고 이젠 연민으로 남편을 보듬을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옥금 씨의 머릿속에는 지금도 일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 좋은 시골을 놔두고 왜 아비규환 같은 도시에서들 살까요? 요즘 저는 어떻게 해서든 도시 주부들을 한 트럭씩 실어다 1주일이라도 시골 체험을 하게 할 생각에 골몰해 있어요. 귀농을 유도하기 위해.”
이옥금 씨가 주는 Tip
•시골에서 살고 싶다면 주저 없이 용기를 내라. 이것저것 재다 보면 세월만 축난다. 어떻게든 기어이 살아남겠다는 결심이면 길이 열린다.
•시골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지 말자. 이웃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 팔기도 어렵다.
•사전에 잠깐이라도 살아보고 귀농지를 결정하자. 농사는 지역 환경이 중요 변수이니까.
•유아독존할 게 아니라면 경치 좋다고 깊은 산중에 올라가 살지 마라. 눈길이나 빗길에 구르기 십상이다. 3년쯤 지나면 다 내려온다. 좋은 경치야 슬슬 근방을 찾아다니며 즐기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유종순 시인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40년 만에 편지라는 것을 써봅니다. 젊은 시절 교도소에서 부모님께 올렸던 불효자의 안부편지 외에는 여태껏 편지라곤 써본 적이 없습니다. 고민 끝에 오늘 그대에게 편지를 쓰기로 하였습니다. 40년 전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부모님이었다면 지금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편지는 깊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대에게, 그래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그대에게 아마 배달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대에게 위로와 격려와 감사의 편지를 쓰겠습니다. 동가숙 서가식하던 가난한 운동권 시인을 지아비로 삼아 수십 년 동안 사랑과 헌신으로 보듬어주어서 고맙다고,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아픈 몸, 아픈 마음 잘 추스르면서 여기까지 잘 견뎌왔다고 말입니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그대가 손놓아버린 집안일,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핑계 삼아 아픈 그대에게 따스한 위로의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넨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씩 나는 약에 취해 깊이 잠든 그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떠올립니다. 그대가 마치 마녀가 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잠이 든 공주처럼 느껴집니다. 동화 속 공주는 백마 탄 왕자의 입맞춤에 깨어났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대를 잠 속에서 구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백마 탄 왕자를 흉내 내며 입맞춤 대신 그대가 좋아하는 ‘체 게바라 평전’이나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몇 구절을 읽어주거나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이상국 선생의 시 ‘혜화역 4번 출구’를 읊어주곤 합니다. 훌훌 털고 어서 빨리 일어나라고요. 그러나 깊은 잠에 빠진 공주는 왕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깨어나지 못합니다. 동화는 동화이고 현실은 현실인가봅니다. 마음이 많이 아프고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가 만나 서로 사랑한 날들과 우리가 함께 세상을 향해 걸어갔던 날들을 추억하곤 합니다.
그대와 나는 추운 겨울 삼전동 반지하 자취방을 선점한 처제를 피해 골목에 주차된 남의 봉고에 들어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면서 밤을 지새웠지요. 경기도 수동이었던가요, 단체수련회 때는 새벽에 몰래 둘이 빠져나와 뜨거운 입맞춤을 하기도 했고요. 또 최루탄 가스 뒤덮인 저 80년대의 광화문과 종로 거리를 우리는 손을 잡고 백골단을 피해 내달리기도 했지요. 그리고 우리의 두 아이를 얻은 그날, 정말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그 감동은 절대로 잊을 수 없어요. 추억하다 보면 고마운 사람은 지금 아픈 그대를 돌보고 있는 내가 아니라, 나의 모자람을 채워주고 보듬어준 바로 그대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그대의 사랑과 헌신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존재할 수 있게 한 힘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참으로 그대에게 감사드려요.
그대와 함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함께 가꾸어야 할 삶에 대한 꿈을 꾸던 그 시절로 말입니다. 돌아보니 그대와 나 참 많이 변했습니다. 나는 세상과의 투쟁을 피해 이리 숨고 저리 피하면서 사는 동안 어느덧 경멸스러운 꼰대가 되어버렸고, 그대는 게으른 병자가 되어 자기 안에 갇힌 채 세상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초심을 잃은 것이지요. 내가 잠든 그대에게 체 게바라와 조나단 리빙스턴을 읽어주는 것은 다시 좋은 꿈 꾸자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대, 기억하나요?
우리의 꿈과 이상은 무엇이었는지, 꿈과 이상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주었으며,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기억하나요. 꿈을 꾸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었는지 기억하나요. 그래요. 꿈은 우리를 희망으로 이끄는 힘이었지요.
꿈이 있기에 사람들은 어제의 절망과 고단을 이겨내고 내일의 희망을 향해 전진할 수 있지요. 그러나 꿈만으로는 희망을 이룰 수 없어요. 좋은 꿈에 걸맞은 부단한 노력과 실천이 있을 때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요. 그래서 꿈과 희망을 이루려면 정말로 간절한 염원과 함께 부단한 노력과 실천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꿈과 희망을 꿋꿋하게 사랑해야만 해요. 그래야 열악하고 왜소한 현실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지켜낼 수 있어요.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요, 그대.
나는 항상 그대 옆에 있을 테니, 어서 일어나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꿈은 다시 꿀 수 있어요.
유종순 시인
시인, 문화평론가. 1987년 무크지 ‘문학과 역사’, 1988년 ‘창작과 비평’ 복간호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한국작가회의 평화통일위원장, 이사, 인터넷저널 대표이사 등 역임. 마로니에시낭송회 회장. 시집 ‘고척동의 밤’, 저항음악평론집 ‘노래, 세상을 바꾸다’가 있음.
정유경(57)은 봄바람 같았다. 세월의 흔적이 슬쩍 묻은 눈매, 말랑말랑한 화법 그리고 인사를 건넨 이들에게 짓는 미소가 사랑스러웠다. 봄날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세월이 흐른 만큼 그녀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꿈만큼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시원시원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KBS ‘젊음의 행진’ 백댄서 팀이었던 짝궁들 출신 정유경은 1983년에 노래 ‘꿈’을 부르며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미국 국적을 가진 그녀는 큰 눈의 귀여운 외모와 성악과 출신답게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가수 활동은 성공을 거뒀으나, 이내 비자 만료로 인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중년이 되어 다시 우리들 앞에 섰다. 가수와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깝다고도 할 수 없는, 바로 연극배우로서 말이다. 제2의 인생을 촉망받는 연극배우로 맞이한 반가운 얼굴, 가수 정유경은 대학로 극단 거리에서 겨울 볕을 쬐고 있었다.
우연히 시작한 첫 연극, 배우로 마주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오랫동안 잊혔던 정유경이 다시 대중 앞에 선 것은 2012년 SBS ‘K팝스타’에 그녀의 아들 맥케이 김이 나오면서부터였다. 맥케이 김은 당시 자작곡과 가창력으로 호평을 받으며 톱5에 올라갈 정도로 성공했다. 당연히 그의 어머니인 정유경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고, 이후 그녀는 방송 출연과 패널 활동을 이어나갔다. 연극은 그 과정에서 우연처럼 다가왔다.
“연극하는 친구와 모임을 하면서 나도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연락이 왔어요. ‘연극 캐스팅이 필요한데 오디션을 보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무조건 보겠다 하고 갔더니 치매 할머니 역할이더군요.”
그녀가 지원한 연극은 ‘엄마의 레시피’. 대만을 배경으로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딸,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 중인 손녀가 만나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연극으로 매년 대학로에 올라가는 인기 레퍼토리다. 그녀에게 있어선 첫 오디션이고 첫 소극장 공연이었다. 그런데 연기를 너무 잘했다. 오는 2월 17일부터 시작하는 새 연극 ‘5인실의 그녀’(가제) 극단 대표도 그 연기를 보고 바로 같이하자고 했다.
“저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많은 분에게 칭찬받았어요. 이게 첫 연극이라는 걸 믿지 않더군요. 연극은 물론 마음에 들었죠. 사실 제가 평소에 음식을 잘하는 편이어서 정서적으로도 닮아 있었던 거죠. 제가 나이가 들면 이러지 않을까 싶은 걸 연기해서 칭찬을 받은 셈이에요.”
천생 무대 체질, 무대가 너무 좋다
‘엄마의 레시피’ 제작자는 모든 게 처음인 정유경의 오디션을 볼 때, ‘대본을 하나도 안 떨고 읽더라. 이 사람은 연기가 되든 안 되든 무대에서 떨지는 않겠다’ 싶어 뽑았다고 한다. 제작자의 눈썰미처럼, 그녀에겐 배우로서의 자질이 이미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수 출신인 그녀의 발성이 무척 좋고 톤과 발음이 명확하다는 걸 인터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가수 생활이 도움됐던 거 같아요. 사실 가수도 연기예요. 연기하면서 노래를 하는 거니까요.”
또 하나, 그녀는 무대공포증 따위는 없는 사람이다. 아니 되려 무대를 매우 사랑한다.
“어떤 무대든 올라가면 떠는 일이 없어요. 그냥 무대가 너무 좋아요. 가수 김장훈 씨가 한 말이 생각나요. 저랑 나이가 같다 보니까 응원 차 연극을 보러 왔는데, 자기가 집에 가서 생각을 했대요. ‘아니, 저 끼를 어떻게 숨기고 살았을까…’ 하고요.”
무대를 오래 떠나 있었어도 무대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람, 정유경 본인이 아닌 무대의 인물 그 자체가 된다는 사람이 그녀였다. 천생 무대 체질인 그녀는 ‘무대에서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고 했다.
“사실 제가 나이가 많잖아요. ‘너무 늦은 나이 아닌가?’ 싶어서 두렵기도 했죠. 그런데 연극을 하다 보니 그건 저만의 두려움이었어요. 실력만 있으면 나이는 상관없어요.”
정유경은 ‘다 때가 있고 기회가 있다’는 숙명론적인 말을 좋아한다. 그 기회가 왔을 때 주어진 자리에서 얼마만큼 열심히 하느냐, 그게 관건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모토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이다.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자 할 뿐이다.
“연극의 매력은 숨소리까지 표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다른 사람과 함께 숨 쉬는 것조차 연기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관객이 호응하니까요. 그래서 1초도 허투루 할 수 없어요. 거기에 매력이 있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이혼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중년의 베테랑과 얘기를 한다기보다는 막 사회에 나온 열정 넘치는 청년 신예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물론 제2의 인생을 맞이한 사람을 만났을 때 으레 그런 패기를 경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나 정유경의 에너지는 남달랐다. 자연스럽게 미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졌다.
“현지 아나운서를 했어요. 교회 성가대 지휘도 했고. 집에만 있진 않았죠. 그래서 사람들이 남편더러 ‘힘들겠어, 저런 여자를 와이프로 데리고 살려면. 아이고 끼가 보통이 아니야’라고 말하곤 했죠. 그런데 이혼했어요.”
인터뷰 중에 불쑥 나온 이혼 얘기.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자연스러움에는 당당한 이유가 있었다.
“아직 전 남편과는 친구예요. 가족들과도 계속 교류하고 있고요. 나쁘게 헤어진 게 아니고 남편 사업이 실패하고, 그리고 제가 예술적 끼가 많다 보니 그리 됐어요. 이혼하기 전에 아이들에게도 말했어요. 엄마는 아무래도 미국에서 행복하지 않으니 이혼해야겠다고요. 아이들이 상처를 안 받진 않았겠죠. 하지만 이해해줬어요.”
억지로 사는 부부들은 좀…
정유경의 지론은 ‘이혼하면서 서로 원수가 되는 건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헤어져도 아이들의 부모인 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한국 사회의 부부들은 이상하다.
“한국에서 제 나이 또래 부부들을 보면 ‘따로 또 같이’예요. 대화도 안 하고 방도 따로 쓰고…. 왜 그렇게 사냐고 물으면 ‘어쩌겠어, 자식 때문에…’라고 답해요. 참 안타깝지요. 그게 진정 가족일까요? 그렇게 살면서 부모들이 싸우면 아이들은 싸우는 게 당연한 줄 알게 돼요. 그럴 거면 차라리 쿨하게 이혼하고 서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자식들에게 정서적으로도 바람직하다 생각해요.”
틀린 부분이 없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졸혼이 수용되는 이유도, 어쩌면 이혼과는 다르면서도 같은 의미에서의 부부간 절충점을 찾은 결과 때문이 아닐까. 미국에서 남편과 친하게 지내니까 사람들이 다시 재결합하라고 하는데, ‘친한 것과 합치는 건 다른 것’이라며 딱 부러지게 선을 긋는 그녀의 당당함은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더 자주 만나게 될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자연스러운 삶이야말로 행복
“나이 먹는 걸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름다워요. 거기서 헤어나려고 할수록 추해지죠. 그 나이대로 그대로 가는 게 익어가는 거지. 설익은 과일을 억지로 익히면 맛이 없잖아요.”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정유경의 생각은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옮겨졌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기 때문이다.
“풋볼, 골프선수였던 아들은 노래를 하고 싶어서 지금 음악을 공부하고 있어요. 딸은 어릴 때부터 남 돕는 일을 좋아해서, 가난한 사람을 병원과 연결해 도와주는 소셜 워커로 일하고 있고요. 그래서 아이들이 가끔 ‘누가 하버드 갔대, 예일대 갔대’ 하면 ‘야, 공부 잘하는 사람만 있으면 세상 안 돌아가. 너처럼 음악하는 사람, 밥 잘하는 사람도 있어야 돌아가지’라고 말해줬어요.”
그녀는 “오늘 50점 받았으면 내일은 51점 받으면 된다. 내려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기준을 갖고 있었다. 그 기준으로 아이들을 믿었기에 그녀의 아이들도, 그녀 자신도 행복해진 것 아닐까. 그녀에게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나온 대답도 그 행복의 증거였다.
“이혼했지만 남편을 만나 아이들을 낳은 것, 그리고 마음 모질게 살지 않은 것이에요. 저는 받는 것보다는 주는 걸 좋아해요. 그리고 제가 그런 사람이란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연기자 되고파
정유경의 삶의 틀을 마련해준 건 아버지였다. 그녀는 아버지 덕분에 자신이 바르게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원래 제가 성악을 했잖아요. 그런데 가수를 한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딱 한마디하시더라고요. ‘유경아, 가수를 하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네 노래가 사람들 술안주가 되게 하진 말아라.’ 그걸 지키며 살았죠. 술 담배는 아예 안 했고 밤무대도 안 섰어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그게 제가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그녀의 인생은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물론 아무런 굴곡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응어리를 안고 추락하기보다는 되려 발판 삼아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익혔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삶에 대해 묻자 그녀는 담담하게 답했다.
“물론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고민은 있죠. 그런데 그런다고 당장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스텝 바이 스텝, 한 걸음씩 가다 보면 해결되겠지 싶어요. 그렇게 신중하게 가다 보면 좋은 기운도 만나게 될 테고…. 그걸 믿고 가려고 해요.”
정유경이라는 사람 안에 숨어 있던 새로움을 찾았다. 착한 그녀가 사랑스럽다.
그 누구보다 신사다운 이미지의 배우, 어느 장면에 나와도 화면 안에 그만의 안정감을 불어넣는 독보적인 배우라고 하면 홍요섭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경자년(庚子年)인 올해 예순다섯 살, 서글서글한 눈매와 주름이 더 매력적인 남자, 참 묵직한 홍요섭을 만났다.
배우로서의 삶도 어언 40여 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세월 다져진 배우로서의 캐릭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홍요섭은 브라운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배우다. 다작을 하지 않고 겹치기 출연도 사양하며 철저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지향하며 살기 때문이다.
“제대 후 스물여섯쯤 됐을 때였죠. 그 시대가 소위 ‘말하면 잡혀가는 시대’였는데 소극장 공연에서 그 ‘잡혀갈 소리’들을 시원하게 하는 거예요. 원래는 전공이 신문방송학과였는데 그걸 본 이후 연극영화과로 전과하게 됐죠.”
‘생각도 못한 일’. 홍요섭은 자신이 배우가 된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런 길을 선택한 자신에게 아버지가 한 말은 평생 지침이 되었다.
“너 하고 싶은 거 해라. 다만 네 아내나 친구들 창피하지 않게 해라.”
삶의 철학을 만들어준 아버지
홍요섭을 말하려면 그의 아버지인 홍영의 목사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그의 삶 전반을 지배했던 것은 아버지의 존재와 삶의 태도, 남겨진 말들이다.
“아버지가 독특한 분이셨어요. 교육자이자 목사님이기도 하셨고…. 김일성과 동갑이셨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죠.(웃음)”
故 홍영의 목사는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서자 토지 개혁이 시행되기 전에 일가친척을 다 데리고 나와 해주를 거쳐 인천에 도착했다. 그리고 교육사업을 하고 목사로 일하면서 평생을 나눔에 힘썼다.
“처음엔 참 답답했죠. 우리나 좀 주지.(웃음) 결혼하면서 얼마나 창피했는데요, 가진 게 없었으니. 그런데 아내의 친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었어요. 결혼하기 전 그분이 ‘홍 박사 자식이면 볼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장인도 저희 결혼을 쉽게 결정하시게 됐어요.”
그가 지금 전무이사로 있는 브리지스톤골프 또한 그의 아버지의 신념과 일치하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소위 팔리는 것만 만드는 게 아니라 여성, 아이들 등 보다 다양한 사람을 위해 제품을 만들고 사회공헌 철학이 투철한, 나누는 회사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 뭐 있나?”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그와 그의 아버지의 기질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쾌하게 치러진 아버지 장례식
“아버지는 82세에 떠났어요. ‘나 갈 때 됐다’ 하며 ‘화장해서 버려라. 뼈다귀 들고 돌아다니지 말고. 그리고 살아 있을 때 잘해라. 장인·장모님 자주 찾아뵙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라고 말씀하셨죠. 사람들 다 모아놓고 마지막 인사를 받은 후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홍영의 목사의 죽음을 맞이하는 거침없는 말투에서 그 시절 이북 사람다운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그런 태도는 아들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 한마디로 끊어주셨어요. ‘남들이 보기 싫은 거 하지 말고, 아내 될 사람한테 부담 안 가게 해라.’ 그 말을 들으며 ‘아, 이렇게 날 잡는구나’ 싶었죠. 형들은 공수부대도 가고 해병대도 가고 저도 군대를 힘들게 갔다 왔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 신경 안 썼어요. 하나님 다음이 국가였던 분이셨으니까.”
그런 아버지를 둔 집안답게, 장례식도 매우 유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문상객들이 ‘이게 장례식이야?’ 하며 놀랐어요. 우리는 아버지가 좋은 데 가셨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도전정신으로 스쿠버에 더 열중
“알아서 해라. 단, 재밌게 살다 가라”고 말하는 강골과 기백이 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만큼, 홍요섭은 외면의 신사적인 이미지와 내성적인 인상과는 정반대로 단련된 사람이었다. 그가 방송계와 친해질 수 없는 것 또한 자신의 기준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프로그램에는 나갔지만 겹치기 출연은 거절했다. 예전에 예능 프로그램에 한 번 나간 적이 있는데 나가보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오버해야 해서 다시는 안 나갔다. 밤무대도 그의 성정과는 맞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산을 타고 오지 여행을 다니며 다이버가 됐다.
“아버지 말씀을 생각해보니 갇혀 지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이 200년 살면 모를까. 다양한 걸 해봐야지. 팔라우에 조그만 집을 갖고 있었어요. 드라마 제의가 들어와도 다이빙 약속이 있다고 거절할 정도였죠.”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시작했던 그의 다이버 생활은 45세까지 20여 년가량 이어졌다. 그런데 나이가 들자 조금 힘들어졌다. 그때부터 골프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제대로 커리큘럼을 배워보자 하고 미국으로 가서 고덕호 프로와 함께 생활했죠. 시니어 프로 골퍼 자격까지 얻었어요. 그런데 그때 무릎에 문제가 생겼죠.”
골퍼의 삶에 찾아온 좌절
프로 자격까지 획득해 골프 선수로서의 미래도 생각할 수 있었던 시기, 드라마 촬영을 하던 중 무릎이 시큰시큰하더니 확 주저앉는 일이 벌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많이 해서 무릎이 상했기 때문이다. 큰 수술을 한 뒤 재활했지만 골프 선수로서의 미래는 어렵게 되었다.
“회사로부터 2년간 지원을 받기로 했는데, 2년 차에 주저앉은 거죠. 그래서 많이 좌절했어요. 화가 나서 골프대를 쳐다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십자 인대 말썽으로 좌절해 있던 그에게 재활치료 차원에서 의사가 승마를 권했다. 2007년의 일이었다.
“말? 돈 많은 사람이나 타고, 영화에서나 보는 거 아니냐고 되물었죠. 아니라는 거야. 승마는 허리 아프거나 고지혈증이 있는 사람한테 권하기도 한다는 거예요. 알았다 하고 화성 구석으로 가서 시작했어요. 누가 올려주면 올라가고 손잡고 끌어주면 덜렁거리며 가고…. 그런데 승마를 하니 가장 먼저 바뀌는 게 변이었어요. 장이 좋아지고 살이 조금씩 빠지니까 ‘괜찮네,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싶었죠.”
한 번 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집념
그로부터 14년여가 지났다. 그는 여전히 승마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젠 승마 코치이자 마사회 홍보위원으로도 활동한다. 또 누구보다 열정적인 승마 예찬론자가 되었다. 그가 데리고 있는 애마 이름은 ‘아줌마’. 올해 열여섯 살로 전성기는 지난, 사람으로 치면 중년쯤 되는 말이다.
“독일에서 승마하는 사람에게서 구했어요. 그 사람이 ‘여자처럼 대하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막막했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당근은 쓰다듬으며 줘야 먹고, 엎드려 있을 때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지도 않아요. 우아한 성격인데, 함께 지내면서 여자가 이렇구나 싶었어요. 말에게서 많이 배웠죠.”
사람들은 말이 제멋대로 움직이면 말에게 문제가 있어 그러는 줄 착각한다. 그러나 그는 말이 잘못 행동하는 건 다 기수 탓이라고 말한다.
“승마는 착석부터 잘해야 해요. 말 위에 타면 겁이 나니 고삐를 잡아당기는데, 앉아 있는 걸 잘해야 말에게 부담을 안 주거든요. 달리기는 한두 달 하면 누구든 할 수 있어요.”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이지만 승마의 진정한 매력은 교감에 있다고 한다.
“말은 타는 것이 아니고 말이 나를 태워주거든요. 말의 컨디션을 살피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말과의 즐거움과 기쁨을 배우고 나니 사람과의 관계, 삶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깨닫게 되더군요. 승마가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욕심을 덜어내야겠다는 생각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도 했다고.
“승마는 제 인생의 마지막 스포츠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진짜 운동할 사람만 하게 되었거든요. 5~6년 전부터 말을 탄다는 얘기가 없어졌어요. 대신 운동했느냐고 물어봐요.”
그가 인상적으로 보는 현상은 젊은 부부들이 승마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돈은 꽤 들어도 주말 이틀 동안 승마로 운동을 하면 다른 스포츠를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들 중엔 아예 마주가 되려고 말 값을 알아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도중 자신의 말 ‘아줌마’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보여줬다. 걸음걸이에서 다른 말들과는 구별되는 비범함과 안정감이 느껴졌다. 문외한이 봐도 멋있는 그의 말을 보니 그가 말에 빠져든 이유가 단숨에 체감됐다.
정치 입문 권유도 있었으나…
무릎 수술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 비슷한 시기에, 그의 삶을 바꾼 비사(祕事)가 하나 더 있었다. 정치와 관련된 일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위치의 사람에게 정치계의 유혹이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과거에 국회의원 영입 제안이 왔었죠. 그런데 보니까 정말 황당한 사람들이 국회의원 후보로 나오더라고요. 이건 아닌 거 같다 싶어서 사양했죠. 그런데 제가 무릎을 다쳤을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선출돼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죠. 그때 방송 유세에서 마지막 지지 연사가 저였어요.”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속사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빈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에게 방송에서 지지 연설을 해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정당인이 아니고 정치하는 사람도 아닙니다’라는 전제를 하고, 연설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죠. 그리고 그걸로 녹화를 하기 위해 방송국으로 갔어요.”
그런데 막상 방송국에 도착하니 문제가 생겼다. 논조가 바뀐 원고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읽어보니 완전히 정치인들이나 하는 말들이었다. 녹화 당일이라는 급박한 타이밍에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BBK사건이 터졌기 때문이죠. 상대를 물어뜯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원래 원고대로라면 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걸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거였죠. 그런데 당장 정치인이 될 판이었어요. 함께 온 와이프와 친구에게 보여주니 ‘이거 하면 큰일나겠다’고 걱정을 하더군요.”
그를 섭외한 쪽에서 설득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었다’.
“정치를 할 거면 벌써 했지.(웃음) ‘못합니다’ 하고 돌아왔어요. 나중에 보니 4~5년 속 썩을 뻔했죠. 그래도 BBK사건 전의 원고는 논조가 참 좋았는데, 아쉬워요.”
채운 것들 덜어내며 달관에 이르다
홍요섭에게는 달관한 사람의 넉넉함이 있다. 세계 곳곳의 오지를 여행하고 바다를 사랑한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얻게 된 태도다.
“어지간한 건 탁탁 털어버립니다. 당하기도 많이 당했어요. 변호사 친구들이 난리쳤지만 고발하기 싫어서 넘어간 일도 있죠. 그런데 돌아보니 그게 내 게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죠.”
그 역시 요즘 나이 들면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석모도다.
“인천 석모도에는 강도 있고 낚시도 잘되고 물 좋은 온천 단지도 있어요. 거기에 조그맣게 집 짓고 사는 것도 좋죠. 장어를 키워보고도 싶어요. 난 물을 좋아하니까. 장어를 키우는 게 손이 많이 간답니다. 그럼 계속 일할 수 있으니까, 재밌잖아요? 흙 묻히고 사는 일.”
그는 자신을 아무도 기억 못하면 좋겠다고 담담히 말했다. 자신이 작정한다고 사람들 기억에 남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가 사랑하는 물과 바람처럼, 삶을 사랑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아버지처럼 그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그의 시원시원한 대답에는 미련이 없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은 길만을 걸었기에 잘못되지 않았고, 돈과 명예로도 살 수 없는 그 진정한 자유를 즐기는 그가 다시 한번 부러웠다.
한적하고 조용했던 송파구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의 옥상 텃밭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작은 상자 텃밭에 심어놓은 배추가 제대로 크기가 무섭게 배추벌레에 점령당해버렸다. 어찌나 많은지 걷어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초보 도시농부는 애벌레를 잡는다고 열성을 다하지만 꿈틀거리는 생명체 앞에서 담대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도시농부는 낭만이 아니라 현실임을 몸소 느끼고 있는 그녀 이미숙(53) 씨를 만났다.
구멍은 뻥뻥 잘도 뚫려 있었다. 초록색, 검은색 애벌레가 배춧잎을 신나게 포식한 현장. 흙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원래 이곳에서 저희가 재배한 농작물로 팜파티를 열기로 했거든요. 노사발전재단에서 함께 공부했던 팀들도 불러서 뭔가 맛보이려고 했어요. 가락시장에서 사서 할 수도 없고 이거 참 걱정입니다.”
한창 벌레를 잡다가도 이미숙 씨의 손을 피하지 않고 풀 위에 그대로 앉아 있는 방아깨비를 보자마자 화색이 돈다.
“너무 사랑스러워요. 도망가지도 않아요. 색깔도 예뻐요. 그렇죠? 생명은 정말 좋은 거야.”
전라북도 순창 출신 농부의 딸이라 소개한 이미숙 씨는 정작 어린 시절 농사일은 안 해봤다고 했다. 송충이도 최근에야 보고 알았다.
“노사발전재단에서 ‘신중년 1일 직업체험과정’으로 도시농부 교육을 한다는 공고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사이트에서 보고 신청했습니다. 올해 5월 초 토요일에 모여서 7시간 정도 교육을 받았어요. 농사에 필요한 기후 조건이나 유기농법 등에 대해 배웠죠. 식물도 심어보고요. 재밌더라고요.”
하루 체험한 도시농부 교육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교육을 같이 받은 사람들은 모두 다 학번은 다르지만, 방통대 동문이다.
“저는 간호학과 출신이고 지금도 간호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같이 교육받았던 사람들 10명이 모여서 공동체를 만들었어요. 마침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옥상 텃밭에 사회적기업 ‘에코11’에서 운영하는 텃밭이 쉬고 있어서 그 자리를 저희가 쓰기로 했죠.”
좀 더 체계적이고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싶은 마음에 ‘송파도시농업공동체’를 만들고 송파구의 지원을 받기 위해 기안서를 구청에 냈다.
“제가 송파구민이에요. 아무래도 텃밭이 송파구에 있으니 구민이 대표가 되면 좋겠다고 의견을 모으다 보니 제가 대표가 됐습니다. 모두의 공통 주제는 ‘농사짓고 싶다’였습니다. 구청 지원을 받게 되면 개인이 아닌 사회환원사업으로 운영하려고요. 우리가 만든 공동체의 취지예요. 에코11 안철환 대표님이 가이드와 코치를 해주셨고, 노사발전재단에서 도시농부 강의를 해주신 서울시농수산식품유통공사 백혜숙 전문위원도 대가 없이 저희를 도와주셨어요.”
백혜숙 자문위원이 어떤 작물을 심으라고 말하면 종묘상에 가서 씨를 사 와서 심었다. 처음에는 열무, 부추, 비트 등 아주 다양했다.
“텃밭을 가꾸는 게 너무 좋아요. 아마도 어렸을 때 농사를 짓던 부모님의 정서가 몸에 남아 있는 거 같아요. 어머니는 독자이셨던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일하며 자식들을 키워내셨어요. 아버지가 간경화로 마흔아홉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셔서 홀로 그 힘든 농사일 다 해내셨거든요. 87세이신데 손과 무릎과 허리 쪽이 안 좋아 장애 3급이세요. 허리 교정도 하시고 무릎 인공관절도 하셨어요. 제가 도시농부를 한다니까 펄쩍 뛰셨어요. 그런데 저는 행복해요. 농사일 시작한 건 얼마 안 됐지만 내내 동경하던 거예요.”
8월에 심었던 열무를 뽑고 나니 아쉽고 허전해서 상추 모종을 가져다가 심었다. 비를 맞으면서 밭에 상추를 심는데 감동이었다는 이미숙 씨.
“제가 올해 농사를 시작하면서 목표가 있었는데 ‘벌레와 친해지자’였어요. 그런데 그게 아직 잘 안 되네요.(웃음) 그래도 기뻐요. 식물이 커가는 걸 보는 건 너무 행복한 일입니다. 예전에는 땡볕에서 일해서 팔이 벌게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힘들다는 말은 안 해요.”
“텃밭에 물 좀 주소, 목마르오!”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옥상 텃밭은 추워지기 시작해서인지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점심식사 후 산책을 하는 사람들과 몇몇 이름이 적혀 있는 개인 텃밭에 물을 주기 위해 한 커플이 온 정도였다. 송파도시농업공동체의 밭에는 상추가 건강하게 잘 자라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에 물을 정기적으로 주러 오는 사람이 이미숙 씨 한 명뿐이라고. 그나마 한 주에 한 번 혹은 두 주에 한 번 남자 회원이 오는 정도다.
“8월에 본격적으로 텃밭 농사를 시작했는데 한 달 뒤에 물을 주겠다는 분들이 없더라고요. 다들 도시 텃밭에 대한 생각은 있는데 제대로 흥미를 못 느낀 걸 수도 있습니다. 단체 카톡방에 좀 와달라는 얘기를 하면 답장하는 분이 거의 없어요. 어떤 분이 한동안 안 나오시다가 텃밭에 오시더니 ‘왜 작물들이 잘 안 자라냐’고 하더군요. 사실 누구의 탓도 아니죠. 우리가 함께 가꾸는 곳이니까요.”
내년부터는 회칙과 스케줄을 만들어 매일매일 오는 당번을 정할까도 싶다. 처음 공동체를 결성했을 때만큼 회원들이 따라주지 않아 속상하지만 조금씩 자라나는 작물들은 보면 기분이 남다르단다.
“농민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작물이 자라난대요. 적어도 매일 한 명이 와서 물 주고 풀도 뽑아주고 하면 좋을 텐데 답이 없어요. 송파구청에 들어가서 그 얘기했어요. 지원금을 오히려 안 받고 싶다고요. 사익이 될 것 같더라고요. 제가 좀 쓰더라도 올해 시작했으니까 시범적으로 해볼까도 싶어요. 분명히 성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자고 얘기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5년 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현재 이미숙 씨는 화상 전문 베스티안부천병원에서 간호사이자 이사로 재직 중이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오랫동안 자기 일을 유지하면서 농부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전적으로 농부가 되겠다는 생각은 아니에요. 결혼 초기에 남편과 했던 얘기가 60세까지만 일하고 봉사하며 사는 거였어요. 그런데 요즘 60도 너무 젊잖아요. 특히 간호 쪽은 건강만 허락하면 80세까지도 일할 수 있어요. 이제 60이 돼도 또 어디선가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퇴직이 6년 남았습니다. 농사를 지을 거예요. 노하우가 생겨서 연간 농부 계획서를 짤 수 있을 거 같아요. 중구난방이기는 하지만 농부 일기를 쓰고 있어요. 옥수수는 언제 심고, 재배에 필요한 영양분은 무엇이고 이런 걸 기록해 보려고요. 남양주 텃밭이 기대됩니다. 마침 남양주에 텃밭을 마련했는데 내년부터 저도 농사지을 거예요. 남편이랑 아들에게 말해놓았습니다. 바로 뽑아서 신선한 야채들을 조금씩 주위 분들에게 나눠줄 계획을 하고 있어요. 5년 뒤에는 좀 체계적인 농부가 되어 있을 거 같아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는 결혼을 하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출산을 하고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하면서 살다 보면 젊은 시절의 경력은 온데간데없어진다. ‘이렇게 사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지’ 하면서 단념하려던 순간,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잘해보겠다고 다짐하며 빛을 따라 즐겁게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취업과 생애 설계 분야 전문 강사이자 컨설턴트인 일·생애연구소 임순열 대표는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이에요”라며 활짝 웃었다.
지난 10월 10일 경기도 파주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일·생애연구소 임순열(55) 대표와 만나기로 했다. 이곳은 임순열 대표에게 친정과도 같은 곳. 작년 말까지 센터 내에 있는 파주상공회의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직업상담 팀장으로 일해왔다. 이날은 일·생애연구소 대표로서 강단에 서는 날이었다.
“10월 1일에 일·생애연구소 사업자등록증을 받았어요. 직업상담사로 일하면서 취업 역량 강화,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 작성법, 면접 교육 관련 일을 해왔는데 좀 더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싶었어요. 취업과 생애 설계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할 계획입니다. 오늘은 ‘중장년의 셀프 마케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합니다. 일자리를 찾을 때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얻는 방법을 전달해드릴 계획입니다.”
목적이 있는 삶을 살다
임 대표는 직업상담사로 사는 게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도와서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도, 취업이 된 사람들이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단다.
“거의 직업상담 일에 미쳐서 살았어요. 구직자들이 처음에 센터를 찾아올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십니다. 경력이 단절된 여성분들도 그렇고요. 어떤 경력이 있는지 자격증은 있는지 등등 초기 상담을 하면서 맞춤 일자리를 지원해드렸습니다. 이력서 쓰는 방법도 알려드리고 동행 면접 서비스를 원하시면 같이 갔습니다. 별종 소리를 들을 정도로 7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때를 회상하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냈을까 싶을 정도로 제대로 빠져 있었다. 막내아들의 군 입대가 계기였다고 했다.
“2010년에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친구랑 동반 입대를 했어요. ‘그래, 넌 나라 지켜라. 엄마는 엄마 일 할게’ 이런 마음으로 가족상담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랑은 성향이 맞지 않았어요. 그 무렵 누군가 직업상담사도 있다고 소개해줘서 2011년 5월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상담에 필요한 자격증은 부지런히 공부해 하나씩 따냈다. 가족상담사 2급을 시작으로 직업상담사 2급, 평생교육사 2급 등을 취득한 후 2017년에는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까지 섭렵했다. 상담사 자격증을 따면서 동시에 교육자로서의 꿈도 함께 키우기 시작했다.
“고양시에서 직업 관련 교육을 받을 당시에 강사님이 인상에 남았어요. 나도 저런 강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강의를 너무 잘하셨어요. 상담사 공부를 할 때부터 강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지금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특히 임순열 대표가 취득한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은 전국적으로 500명이 조금 넘는 정도. 직업상담사 2급 자격증 보유자가 5만여 명인 것을 감안하면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1%밖에는 안 된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임순열 대표다.
“2012년 파주시교육문화회관에서 계약직 직업상담사로 일을 시작했는데 2년 후에 정년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버렸어요.”
파주상공회의소가 고용노동부 사업인 중장년일자리 프로그램 사업을 따오자 임순열 대표의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2015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짜리 채용공고가 났습니다. 물론 제 판단으로는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자리였고 상담보다는 교육 관련 일을 주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기계약직 체결을 해줄지는 알 수 없었어요. 그래도 해보고 싶어서 지원했는데 채용됐어요. 파주상공회의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팀장으로요. 무기계약직도 좋았지만 저는 상담보다는 교육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고 도전하는 것에 큰 두려움도 없었어요.”
비서교육 제대로 받은 커리어우먼
직업상담사의 길을 걷기 전까지 임순열 대표도 몇 번의 경력단절을 겪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결혼을 하면 으레 회사를 나가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다.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한국과학기술대학(현 카이스트)에서 학장 비서로 근무했어요. 그때는 비서 하면 커피나 타고 전화만 받던 시절이었는데 저희 학장님은 달랐어요. 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오셔서 비서를 제대로 쓸 줄 아는 분이셨죠. 스케줄 관리에서부터 서류작업, 각종 스크랩 업무 등을 보면서 VIP 응대도 자주 했습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그룹 회장님도 만났어요. 비서로서 제대로 일을 배웠습니다. 제가 결혼할 무렵 학장님이 한국과학재단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저도 함께 갔는데 그만둬야 했어요. 재단 쪽 분위기가 결혼한 여자가 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저도 학장님께 폐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 후 아이 낳고 가정주부로만 살다 보니 좀 답답하더라고요.(웃음)”
임 대표가 집 밖으로 뛰쳐나온 계기가 된 건 2001년 친정부모님이 다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부모님과의 이별에 우울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밖에 나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고 결국 주부가 쉽게 도전 할 수 있는 학습지 선생 일을 4년간 했다. 그리고 5년여를 다시 쉬다가 2010년부터 직업 상담 분야에 눈을 떠 지금에 이르렀다.
“2018년 12월에 사표를 내고 프리랜스 강사로 독립했습니다. 오랜 시간 참 많이도 다니면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좋은 인맥들이 생겼어요. 올해까지는 준비하는 상황이라서 홍보도 못했는데 강의해 달라고 연락을 주십니다. 한 달에 네다섯 번 정도는 하고 있습니다.”
서울 강의 입성기
임 대표가 주로 강의활동을 하는 곳은 고양, 파주, 청주 등 수도권이다. 그런데 지난 9월 처음으로 서울에서 강의할 기회가 찾아왔다.
“노사발전재단에도 중장년일자리지원센터가 있어요. 노사발전재단에서 퇴직 교원들을 위한 전문강사 양성과정을 진행했는데, 퇴직 교원이 아니더라도 구직자라면 그 과정을 들을 수 있었어요. 양성과정이 끝날 때 강의 시연을 할 기회가 있었어요. 원하는 사람만요. 시연을 잘하면 노사발전재단에서 전문 강사로 쓰겠다는 문구가 떠올라서 저도 한다고 했습니다. 생애설계 관련 주제였는데 퇴직 교사들에게 맞춘 강의을 했어요. 전문 강사 한 분과 노사발전재단 소장님이 심사위원이셨는데 좋은 평가를 주셨어요. 이후 강의제안서를 냈고 제가 된 거죠. 노사발전재단은 공공기관이잖아요. 강의자리 따기가 쉽지 않아요. 서울에서 강의를 마친 다음 날 청주에서 강의가 있어 새벽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서울 입성기를 올렸어요. 라디오 DJ가 첫 사연으로 읽어줬습니다.”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겪은 어려움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고 임순열 대표는 말했다.
“의미 없는 시간은 없어요. 비서 시절에는 높은 분을 많이 상대하면서 예절을 잘 배웠고요. 학습지 선생으로 활동할 때는 교육 일과 영업 일을 경험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제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됐습니다.”
60세 전에 퇴직하는 사람이 꽤 많다. 그 뒤에도 20~30년은 더 살게 될 텐데 아무 일도 안 하고 지내기엔 너무 고약한 현실이다. 그래서 나이 들어서도 일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임 대표는 말한다.
“노년의 삶에 대해 공부를 더 해서 봉사도 하고 강사로도 활동하면 좋겠어요. 역량이 되는 한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며 살고 싶습니다.”
나른한 퇴근길, 서울 지하철 1호선 전동차 안에서 그를 보고는 자동으로 인사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참 오랜 친구였다. 뽀뽀뽀 체조로 아침잠을 깨면 항상 볼 수 있던 뽀병이었고, 주말 밤에는 두루마기나 정장을 입고 앵커석에 앉아 “지구를 떠나거라~” 혹은 “나가 놀아라~” 같은 유행어를 쉴 새 없이 제조하던 웃긴 아저씨였다. 문득 생각하니 이런 특이하고, 특별하고, 독보적인 캐릭터가 존재했었나 싶다. 지금은 그때의 기운 센 스타 말고 세월에 깎이고 다듬어진 신사가 되어 지하철 옆자리에 앉았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시사풍자 개그의 효시이자, 명심보감 전도사, 조선대학교의 김병조(金炳朝·69) 특임교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서울역사에서 김병조 교수를 다시 만났다. 지하철에서 묵례만 하고 헤어졌던 짧은 만남을 이야기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인기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알아본다고 기뻐하거나 알아보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아요.”
지방 강연이 있는 날이면 용산역이나 서울역에서 KTX를 이용한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강연이 있다고 했다. 개그맨에서 교수로 직업의 영역은 달라졌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그리고 명심보감과 함께한다는 점이다. 옛 기억에도 그는 어렵고 긴 한문 구절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읊곤 했다.
“방송하던 시절에는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어요. 마침 제 뜻에 공감하고 좋아하는 피디 한 분이 계셨습니다. 방송도 공익을 위한 것이니 교육 기능을 강조해야 한다던 분이셨죠. 고전에서 취득하자고 해서 명심보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까지 제 평생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얄개
선비 집안의 장손인 김병조는 어려서부터 벗삼던 명심보감을 개그 소재로 삼았다. 작가가 써주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아이디어를 발굴해 글을 쓰고, 시사 개그의 앵커 멘트를 고쳤다. 짧고 간결하지만,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이야기에 많은 시청자가 귀 기울였다. 그가 진행했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7년 동안 평균 70%의 시청률을 기록한 시사 풍자 프로그램이었다.
“제 대본은 거의 다 제가 썼습니다. 고서 인용만이 이유는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청중 앞에 섰는데, 그 끼는 타고난 것 같아요. 면 단위 동네에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사회도 보고, 응원 단장도 하고, 웅변대회에서 상도 타고 말이죠. 아주 오랜 경험이 쌓여 있었으니 사람들을 웃길 자신이 있었어요. 작가가 써준 대본을 수정할 경우 양해는 구했죠. ‘내가 고쳤는데 만약에 대사가 재밌고 유익하면 용서해달라’고요. 당연히 재밌지.(웃음) 작문에도 재능이 있었거든요. 개그맨은 작가적 소양을 지닌 연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했다. 원래는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하던 우등생. 서울대학교를 바라봐도 될 성적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는 대학교에 가야만 했다. 서울대 합격률이 높은 광주일고 대신 육사 진학률이 좋은 광주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육사에서 장학금 받을 정도면 연극영화과 학교에 가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영화와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1학년 1학기 때 과 수석을 제외하고 4년 내내 학년 수석을 했습니다. 장학제도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 전액 장학금을 받을 방법은 학년 전체 수석이었습니다. 정말 공부만 했어요.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뉴스 형식의 시사풍자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자양분이 됐습니다.”
김병조의 인터뷰에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는 한학자 아버지와 가난에 대한 내용이다. 이번에도 지나치지 않았다. 고희가 다 된 나이에도 가난했던 얘기를 굳이 또 꺼내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김병조는 가난했던 그 시절이 어두웠거나 피해가고 싶은 시간들이 결코 아니기에 마음놓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스타가 될 사람이 아닌데 스타가 된 유일한 사람일 겁니다. 꼬장꼬장하고 성격도 강했죠. 타고난 재능과 끼가 있어서 연예인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덕망 쌓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가난한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가난하면 비관하고 항거하고 투쟁하는 쪽으로 이끌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저 수용했습니다. 제가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것도, 전철을 타고 다니는 것도 복 받은 거죠. 집에 있는 가래떡이나 김만 봐도 너무 좋습니다. 제 행복의 비법은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귀이망천자불구(貴而忘賤者不久), 사람들은 성공하면 어려운 시절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이 오래가지 못하는 거예요.”
젊은 시절 ‘배추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김병조는 방송 활동 내내 톱스타 중에서도 톱스타였다. 어린이 프로그램과 시사 코미디를 넘나들며 모든 세대의 사랑을 받던 슈퍼스타였다. 광고모델로 억대 출연료를 받은 연예인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은 폭발적인 시청률을 자랑했다. 대체할 만한 인물도 없었다. 한학을 바탕으로 시청자를 배꼽 잡게 하는가 하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던 이. 말 그대로 김병조 전성시대였다.
그날 이후, 다른 삶을 살다
1987년 6월 10일. 이날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진일보했다. 김병조는 이날의 사건으로 삶을 정리하고 돌아봐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현대 역사의 결정적 장면과 맞물려 제대로 된 소명 한 번 못해보고 시대의 막을 내려야 했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혼란한 시절이었죠. 그날은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 날이었어요. 당원들이 모여 투표하는데 누구 아이디어인지 축제와 함께 진행을 한 거예요. 당대 최고가수도 불렀고 저도 개그맨으로 참석해 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정당 측에서 코미디를 잘 모르니까 저한테 한 3분 정도 웃길 내용을 적어오라고 하더군요. 대본을 써가지고 보여줬더니 거기다가 뭘 또 적어주더라고요. 그 내용을 보고 사실 대단히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집권 여당을 옹호하고 야당을 폄하하는 발언이 들어 있었다. 단 몇 초 분량의 내용이었지만, 읽어야 할 사람이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던 김병조라는 게 문제였다.
“전당대회에서 대본을 읽기 전까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몰라요. 최종적으로는 제 잘못이죠. 과감하게 ‘못합니다’ 하고 거절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말 후회됩니다. 선비 집안의 장손답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말았어야 해요. 저는 정치투사도 아니고 한 집안 가장이었어요. 또 늘 그래왔듯 대본대로 읽어야 하는 연예인이었습니다.”
당원들끼리 하는 내부 행사라서 방송 전파를 타지 않았지만 한 일간지에 그가 한 말이 보도되면서 일파만파로 사건이 커져버리고 말았다.
“자숙의 기간이 필요해 방송을 쉬고 싶다고 했는데 쉬는 것조차 어렵더라고요. 우리 집사람까지 나서서 ‘원하는 멘트를 했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문제를 확대해서 자기네한테 유리한 정쟁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죠. 잘 모르는 분들은 그 당시 제가 방송계에서 퇴출당한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스스로 관둔 게 맞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정치권의 제의도 있었습니다만 다 거절했습니다. 또 방송에도 복귀했지만 실의를 느꼈습니다.”
SBS가 개국하면서 자리를 옮긴 김병조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전성기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지만, 이미 방송에 대한 매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마침 그때 KBC 광주방송이 개국했습니다. 노래자랑 프로그램 ‘열창 무대’ MC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잘됐다! 고향의 방송을 하자!’ 하고 갔습니다.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요. 그리고 조선대학교에서 강의 요청도 해왔고요.”
조선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지도 벌써 23년째다. 평생교육원을 시작으로 학부와 대학원을 두루 다니며 강의를 해왔다.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의 모습이 시청자들 눈에서 서서히 멀어져간 과정은 그러했다. 몇 해 지나고 개그맨이 아닌 대학교수가 되어 나타난 그는 어딘가 모르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젊은 시절 흑발의 보글보글하던 머리카락은 단정한 커트의 은발이 됐다. 푸짐해 보이던 몸은 마라톤으로 다져 보통의 건강한 체격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사건의 스트레스로 오른쪽 눈은 결국 실명됐다. 그래도 사는 데 불편함은 없다고 했다. 혼자서도 잘 걸어 다닌단다. 당시 정치 상황에 휘말리지 않았어도 그는 지금의 길을 택했을까?
“가르치는 것이 꿈이었어요. 방송에 몸담고 있을 때도 어머니 교실이나 어린이 교실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죠. 지금 제가 가고자 했던 길을 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때 그 사건마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기사를 쓴 기자와 기사가 제 스승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시래기톡’
요즘 김병조가 강의 외에 집중하는 건 바로 작년 10월부터 아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이다. 카카오TV와 유튜브에 ‘시래기톡’이라는 채널을 개설해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세대 공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왜 방송 이름이 ‘시래기톡’일까. 파릇파릇했던 배추 머리가 세월이 흘러 묵직하고 담백한 맛과 향을 내는 시래기로 탄생했다는 의미다. 지금의 김병조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인 듯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살아생전의 목소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어요. 산소에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차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엉엉 울었어요. 그 카세트테이프를 CD로 구워두었죠. 제가 올해 칠십인데 아버님이 일흔둘에 돌아가셨어요. 어느 날 아들이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신 할아버지 나이가 서서히 되어가시네’ 하더라고요. 뭔가 남기고 싶었나봐요. 아들의 생각과 명심보감 구절을 포함해 젊은이들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제가 느낀 것들을 영상으로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자기 눈으로 보지 말고 상대의 눈으로 보고 다름을 인정하자’가 시래기톡에서 추구하는 의미란다. 아울러 유튜브 채널을 통한 한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의미 있고, 온고지신(溫故知新) 같은 방송도 있어야죠. 훌륭한 일을 하고도 대우받지 못하는 어른 세대와 희망과 꿈이 있음에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방송은 제 유언이기도 합니다. 남기 유(遺), 말을 남기는 것이죠. 먼 훗날 세상을 떴을 때 아들이 우리 아버지의 철학이 여기에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고요.(웃음)”
아버님이 카세트테이프에 목소리를 남겨놓은 것처럼 그의 이야기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가 제 철학입니다. 진분수 같은 삶을 살고 싶죠. 가식과 허황한 사람이 주목받는 세상에서 있어도 없는 듯 낮추고, 줏대 있는 가난을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꿈이 유예되는 날들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 부부는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아파트를 팔아 한적한 시골마을로 들어가 난생처음 지은 집은 2층짜리 컨테이너 하우스. 1만여 장의 LP 음반이 놓인 공간은 자연스럽게 ‘음악 카페’가 됐다. 어느 볕 좋은 날, 정성 들여 쓴 ‘프럼나드’ 간판을 걸고 김기호(金基鎬·74) 씨는 스피커 볼륨을 한껏 높인 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들었다. 아내 양정필(楊汀畢·64) 씨는 커피를 내리고 달콤한 과자를 구워냈다. 해가 지면 파주 탄현면 만우리의 노을이 부부의 마음을 자주 물들인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차로 10여 분간 더 달리니 시골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너른 논밭의 곡식들이 땀 흘리며 받아내는 가을볕은 꽤나 뜨거웠다. 고운 마을길에 끌려 차바퀴는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고 하마터면 목적지를 지나칠 뻔했다. 김기호, 양정필 부부가 사는 컨테이너 하우스는 마을 안쪽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었다. 뒤쪽으로는 야트막한 산이 이어져 있고, 아래쪽으로는 옹기종기 민가가 모여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부부의 철학이 담긴 집
부부가 이 마을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건 2016년. 무역업을 하던 남편이 도시에서의 삶은 그만 정리하고 시골에 가서 살자는 제의를 했다.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내는 정년이 아직 몇 년 더 남아 있었지만 그 뜻을 따랐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소망해온 삶이었기에 도시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땅을 사고 집 짓는 일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잖아요. 오래 고민한다고 반드시 좋은 결정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저희도 맘에 드는 땅을 구하기 위해 김포, 강화, 양평, 가평, 춘천 등지로 많이 돌아다녔지요. 그러다가 문득, 너무 먼 곳에 살면 자식들이나 친구들이 만나러 올 때 사방 막히는 길에서 시간을 다 허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몸이 아플 때를 대비해 병원과의 접근성도 고려해야 했고요. 파주가 그런 기준들에 가장 적합했어요.”
땅을 매입한 뒤에는 컨테이너 하우스 견적 상담을 받았다. 서울을 떠나면 절대로 집을 마련하는 데 큰돈을 쓰지 않겠다는 철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지인들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울 텐데 시골에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며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조언을 했지만 계획은 흔들리지 않았다. 주변에서 내 집 짓다가 10년은 폭삭 늙어버렸다는 얘기도 많이 들려왔고, 무엇보다 20여 년 전 외국에서 본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꼭 살아보고 싶었다.
“사업 차 덴마크에 갔을 때 바이어가 자기네 집에서 자라며 데리고 갔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동이 가능한 컨테이너 집이더라고요. 일반 주택과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건물이었어요. 감탄했지요.”
대지 137평에 지은 부부의 컨테이너 하우스는 토목공사비 7000여 만 원, 총 55평의 건축비 1억5000여 만 원이 들었다. 땅값까지 다 합쳐봐야 4억 원도 안 되는 비용에 2층짜리 집을 번듯하게 세운 것이다. 공사기간도 단축했다. 주방 설치 등의 내부 공사와 함께 상하수도 연결, 마무리 페인트칠까지 2개월여 만에 끝냈다. 아파트 살림에 비하면 관리비도 절반밖에 안 됐다.
“비용이 많이 절약됐어요. 나이 들어 큰 집에 살면 관리하기만 힘들지 무슨 쓸모가 있겠어요. 우리가 죽은 뒤에는 자식들이 들어와 살 거 아니면 이 집은 고철로 팔아버리면 돼요. 일반 주택은 철거비용도 만만치 않아요. 컨테이너 하우스는 그런 면에서 친환경 건축이라 할 수 있지요. 폐기비용도 거의 안 들고 재활용도 가능하니까요.”
LP 음악 들으며 떠나는 시간 여행
그렇게 부부의 철학이 녹아든 집은 독특한 외관으로 방송과 신문에 종종 소개되면서 입소문을 탔다. LP 음반 위에서 바늘이 치직거리며 불러오는 노래가 좋아 음악 카페에 찾아오는 단골도 생겼다. 대부분 지긋한 나이에 아날로그 감성을 그리워하는 이들이다. 만나면 자기 사연 하나씩은 있는 음악 감상도 하고 레코드 너머로 먼지 쌓인 추억담도 나눈다. 김기호 씨가 가장 아끼는 물건은 1만여 장의 LP 음반. 다양한 장르의 명작 DVD도 4000여 장이나 된다. 이 보물들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방법을 찾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서울에 사시는 할머니가 방송을 보고 가족과 함께 여길 찾아왔어요. 나이 드신 분이 오셨으니 이미자 노래를 선곡해 들려드리려 했더니 ‘노’ 하시면서 레이 찰스의 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를 틀어달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젊은 시절 팝송깨나 들으신 분 같았어요. 어느 날은 한 분이 조안 바에즈 앨범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길래 그 이유를 물었더니 첫 월급 타서 그 판을 샀다가 엄마한테 제정신이냐며 등짝을 맞았대요. 노래를 듣다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난 거죠.”
프럼나드에 오는 사람들은 그렇게 울다가 웃다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아파트에 살 때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음악을 실컷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김기호 씨는 요즘 그 바람을 제대로 성취하며 지낸다. 그러나 “시골에 가면,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겠다”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아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을 일개미로 표현할 정도로 남편은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1년 정도는 게으름을 좀 피우며 지낼 줄 알았는데 3개월 만에 손들고 말았다.
“매일 하는 일 없이 노니까 죽을 날 받아놓고 기다리는 것 같더래요. 어느 날 학교에 김치배달해주는 일을 구하더니 새벽 4시에 일어나 나가더군요. 조금 하다가 그만두겠지 했는데 그 힘든 일을 1년 넘게 하더라고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나이 먹어도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대요. 요즘은 남편이 사업할 때 하청을 주던 회사에 일자리 하나 만들어 달래서 거길 다녀요. 최근에 연봉을 더 올려줬다는 걸 보니 일을 잘하긴 하나봐요.(웃음) 무리하면 걱정이 되지만 적당히 일하니까 건강해 보이고 좋아요.”
김기호 씨는 은퇴 후에도 체력 유지를 위해서 일은 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그 시간이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질 수 있고, 경제적 활동을 하면 집 안의 평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퇴직한 지 6개월 된 지인이 얼마 전에 저희 집엘 왔어요. 퇴직금 등 가진 돈이 좀 있기는 하지만 일자리를 찾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찾아보면 일거리 많다. 공장이라도 다녀라. 그동안 해온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 노동은 다 똑같다’라고요.”
기호 씨와 정필 씨가 사랑하는 법
아내 양정필 씨는 남편이 출근하면 그제야 느긋하게 카페 문 열 준비를 한다. 이윤을 남기려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손님이 많아도 반갑지 않다. 매일 한두 팀 정도만 와서 즐겁게 잘 놀다가 가면 좋겠다고 말한다. 가끔 들르는 손님들도 전직 교장선생님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곳이 조금은 특별한 공간이라며 편안해한다.
“문은 오전 10시쯤 여는데, 일찍 오는 손님들은 없어서 상황 되는 대로 올라와요. 저는 이 시간이 제일 좋아요. 커피 한 잔 내려서 혼자 음악을 들으며 신문을 읽고 있거나 자연과 눈 맞추고 있으면 이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제가 만났던 사람들은 학생, 선생, 학부모밖에 없었잖아요. 여기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어요. 사회 경험을 새로 하는 느낌이에요. 전혀 몰랐던 세계도 알게 되고요. 우리 사회를 그동안 이끌어온 사람들이 이분들이구나 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김기호 씨는 배우자와 뜻을 같이하면서 해로하면 그게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부부가 하루 종일 같이 시간을 보내면 다툴 일이 많을 거라고 했지만 아내가 커피도 내려주고 쿠키도 구워주고 또 음식을 이렇게 잘할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면서 “마치 새 여자하고 사는 것 같다”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아내는 제가 외출할 때면 ‘지갑 좀 검사하겠습니다’ 하고 10만 원씩 넣어줍니다. 옛날부터 그랬어요. 이렇게 존중해주니까 저도 아내를 받들어 모시게 됩니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아내 입에 먼저 넣어줍니다. 그러면 얼마나 사랑받는 느낌이 들겠어요. 학교에서 근무할 때도 한 달씩 혹은 보름씩 여행을 간다 하면 ‘당신은 선생이니까 많이 알아야 해, 잘 다녀와’ 하고 응원해줬어요. 황혼 이전에는 그렇게 살다가 여기 와서 또 아내를 겪어보니 제가 알던 마누라가 아니더라고요. 음식도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 모습이 새롭고 예뻐요. 다시 신혼을 사는 기분입니다.”
양정필 씨는 그동안 나이 드는 걸 완숙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환갑이 넘으면서부터는 주변 사람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끔은 서글픈 마음도 들 때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건강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다 잃는 거니까요. 저는 ‘남편 바보’이기도 하지만 나이 드니까 배우자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나이에는 그래서 사랑보다는 존경을 하며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인터뷰하기 전에 남편에게 ‘당신 삶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예요?’ 하고 물었더니 ‘지금까지 당신이 날 존중해줬으니 당연히 브라보 마이 라이프지’ 하더라고요.(웃음)”
인생 후반전. 더 반짝이는 사랑을 시작한 부부는 요즘 마음의 표현도 자주 한다. 상대에게 받기만 하고 돌려주지 않는 것은 도둑 심보라는 것. 그래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고백하듯 아낌없이 말한다. “사랑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전주를 감싸고 있는 완주군은 전주보다 존재감이 덜할 뿐 매력이 차고 넘친다. 아마도 완주에 안 가본 이는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이는 없을 듯하다. 완주를 음식에 비유하면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우러나는 ‘곰탕’ 같다고나 할까. ‘어느 날 문득, 무궁화열차를 타고 완주 삼례에 다녀오리라’ 했던 결심을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걷기 코스
삼례역▶ 삼례문화예술촌▶ 삼례책마을▶ 수도산근린공원▶ 비비정▶ 비비정예술열차▶ 호산서원▶ 비비낙안▶ 삼례역
느린 무궁화열차 타고 삼례 여행
완주 삼례에는 삼례문화예술촌, 삼례책마을, 비비정, 비비정예술열차, 카페비비낙안 등의 명소가 모여 있다. 모두 삼례역에서 도보 5~10분 거리에 있어 걸으며 둘러보기에 좋다.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가 정차하는 삼례역은 서울 영등포역에서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긴 이동시간이 지루해지면 4호차에 들른다. 무궁화열차 4호차는 자유석 객차이며 창밖을 볼 수 있는 좌석이 있다. 이 좌석에 앉아 멍하니 창밖 풍경을 감상하거나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글을 쓰며 기차에 머무는 시간을 즐긴다. 연산역, 계룡역, 부황역, 개태사역 같은 낯선 간이역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삼례역에 도착한다.
1920년대 양곡 창고의 대변신, 삼례문화예술촌
삼례역을 빠져나와 3분 정도 걸으니 삼례문화예술촌 입구가 나온다. 맹꽁이 조형물의 환영 인사를 받고 입장한다. 옛날 이 지역은 습지여서 개구리, 두꺼비, 맹꽁이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삼례 농민들에게 수탈한 쌀을 보관하기 위해 대규모 양곡 창고들을 지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창고들을 개조해 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한 곳이 바로 삼례문화예술촌이다. 이로써 삼례에도 옛 건물을 공간 재생한 뉴트로 콘셉트 명소가 탄생했다.
삼례문화예술촌 안에는 어울마당을 중심으로 모모미술관, 문화카페 뜨레, 책공방, 커뮤니티 뭉치, 김상림목공소, 디지털아트관, 소극장 시어터애니 등이 자리해 있다.
삼례문화예술촌에 들어서면 모모미술관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녹슨 건물 외벽에 흰 페인트로 쓴 ‘삼례농협창고’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출입구 옆에는 로봇 태권브이 조형물이 문지기처럼 지키고 있다. 모모미술관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교육아카데미, 미술 체험 등을 진행한다.
모모미술관 뒤에 있는 문화카페 뜨레는 차를 마시며 음악 공연과 미술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는 힐링 공간이다. 천장이 높고 실내가 시원하게 트여 있어 갤러리 같은 느낌을 준다. 뜨레 옆에는 책공방이 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의 인쇄 기계들과 책 만드는 옛 공구들이 가득하다. 이곳에서 팝업북, 앨범북, 가죽다이어리 만들기 등의 체험을 진행한다.
건물 앞에 목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은 김상림목공소다. 목공소 안에 들어서자마자 청량한 소나무 향이 풍겨온다. 전통 목가구 전시장과 목수들의 작업실 공간으로 나뉜다. 작업실 벽에 전시된 옛 목수들의 손때 묻은 연장이 눈길을 끈다.
김상림목공소에서는 김상림목수학교와 나무 브로치, 나무 목걸이, 나무 촛대 등의 소품 만들기 체험을 진행한다. 이밖에 VR기기를 통해 미술 작품을 입체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디지털아트관과 국악·마술 공연 또는 영화 상영을 하는 시어터애니가 있다.
삼례책마을에서 즐기는 독서삼매경
삼례문화예술촌 앞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삼례책마을에 닿는다. 잔디밭에 창고형 건물 세 동이 ‘ㄷ’ 자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곳 건물도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 사이에 지어진 양곡 창고를 공간 재생한 것이다.
삼례책마을의 중심 건물은 고서점, 헌책방, 북카페로 이루어진 북하우스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지었고, 내부는 목조로 마감했다. 이곳에서 10만 권에 달하는 헌책과 고서를 만날 수 있다. 북하우스에 입장하면 옛 창고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천장에 시선이 먼저 간다. 천장 분위기와 어울리게 헌책방 서가도 아날로그 감성으로 꾸몄다. 곳곳에 있는 벤치는 관람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2층 서가에는 1인 책상을 짜 넣은 코너가 있어 학창 시절 독서실에서 공부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2층에서 고서점인 호산방이 한눈에 보이는데 서가의 높이가 아찔하다. 한국, 중국, 일본, 서양 고서까지 취급한다고 하니 그럴 만하다. 헌책을 사면 1층 북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차를 마실 수 있다. 북하우스 옆에는 전시장, 공연장, 강연실, 자료실, 무인 헌책방 등으로 사용하는 건물 두 동이 있다.
기러기도 쉬어가는 경치 좋은 비비정마을
삼례책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삼례역 방면으로 가다 보면 문화생태탐방로 이정표를 만난다. 비비정 방향으로 걷는다. 삼례역사 왼쪽 담장을 따라가는 길로, 붉은 바닥에 자전거 표시가 되어 있다. 통행하는 이가 적어 자전거를 피해 걸어 다닐 일은 없겠다. 낯선 길에서 불안하던 참에 자전거를 탄 아이가 지나간다. 아이에게 비비정 가는 길을 물으니 모른다 한다. 다시 제 갈 길을 가던 아이가 잠시 뒤 자전거를 멈춘다. “가르쳐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가 가본 적이 없어서요”라고 외친다. 삼례가 더 좋아진다.
삼례역 상공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를 지나면 수도산근린공원이 나온다. 누군가 부르는 7080 대중가요를 엿들으며 구릉 같은 공원을 넘는다. 공원을 벗어나 오른쪽 찻길로 내려가다 보면 후정리 남쪽 언덕에 세워진 비비정을 만난다. 비비정은 조선시대 선조 때 정자인데 소실되어 1998년에 복원했다. 한자로는 ‘飛飛亭’이라 쓴다. ‘날아가던 기러기가 쉬어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옛날 선비들이 비비정에 올라 한내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바라보며 풍류를 즐긴 것을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고 했다. 비비정 아래로는 한내라 부르는 삼례천이 흐르고 주변에 넓디넓은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다. 하얀 백사장에 기러기 떼가 내려앉은 옛 풍경은 사라지고, 갈대와 풀이 무성한 강변에 낚시꾼들만 보인다.
비비정에 오르면 한내를 가로지르는 옛 만경강 철교가 한눈에 보인다. 일본이 호남평야의 농산물을 반출하기 위해 세운 다리다. 2011년 근처에 호남선 철교를 새로 놓아 폐철교가 되었다. 폐철교 위에 놓은 비비정예술열차가 명물이다.
새마을열차 객차 네 량을 개조해 각각 레스토랑, 카페, 수공예품 가게, 갤러리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맨 마지막 칸의 카페는 일몰을 기다리는 손님들로 늘 붐빈다. 비비정예술열차 카페에서 호남선 철교를 건너 삼례역을 오가는 열차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비비정에서 언덕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비비정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카페비비낙안에 도착한다. 사방이 탁 트여 가슴이 벅차다. 삼례에서 이처럼 트렌디한 카페를 만나게 될 줄이야. 카페 뜰의 옛 물탱크를 활용한 전망대에 오르자 마을 전경과 만경강, 호남평야가 와락 달려와 안긴다.
주변 명소 & 맛집
새참수레
새참수레는 완주시니어클럽에서 운영하는 한식뷔페 레스토랑이다.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완주 지역의 식자재를 이용해 슬로푸드를 만든다.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으면서도 음식을 맛깔나게 요리해 단골이 많다. 메뉴는 쌈채소, 샐러드, 꽃김밥, 한방수육, 두부까스, 잡채, 제철 나물 등 20여 가지나 된다. 삼례문화예술촌 앞에 있다. (봉동읍 봉동동서로 11)
호산서원
비비정 아래에 아담한 호산서원이 있다. 조선시대 순조 때 송시열, 정몽주, 김수향, 정숙주, 김동준을 추모하기 위해 송시열이 거주했던 비비정 옆에 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모셨다. 누가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 헐렸다가 1958년 다시 세워졌다. 현재 홍살문, 강당, 외삼문, 사당 등이 남아 있다. (삼례읍 후정리 137)
삼례성당
삼례문화예술촌과 이웃한 삼례성당은 2016년에 개봉한 독립영화 ‘삼례’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1951년 한국전쟁 중에 본당이 창설되었고, 전쟁 직후인 1954년에 착공해 이듬해 8월에 준공했다. 붉은 벽돌 건물로 정면 중앙에 종탑이 우뚝 솟아 있고, 좌우에 8각 첨탑이 설치돼 있다. 종탑 아래 주 출입구와 보조 출입구를 아치형으로 만들어 장식미를 더했다. (삼례읍 삼례역로 65)
여행 정보 걷기 Tip
• 삼례 여행 전에 전북투어패스를 구매해두면 알뜰하게 여행할 수 있다. 삼례문화예술촌 안내소에서 전북투어 패스를 제시하고 무료 관람권을 받으면 된다. 삼례문화예술촌 내 모든 시설을 할인받아 관람할 수 있다. 비비정예술열차도 할인 혜택이 적용된다. 전북투어 패스 홈페이지나 네이버 예약에서 모바일 패스를 구매할 수 있다.
• 삼례문화예술촌은 장애인, 어르신, 영유아 동반 가족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무장애 시설이다. 장애인 전용 주차장, 촉지 안내판, 장애인 화장실 등을 갖췄으며 휠체어 이동 동선을 안내한 브로슈어를 제공한다. 안내소에서 휠체어와 유모차도 대여해준다. 삼례책마을 북하우스는 시각장애인 겸용 도서관을 운영한다.
퇴직하고 나서도 유유자적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당당하게 늙어야 한다. 누군가의 아버지, 할아버지로 내가 없는 제2인생이 싫어서 큰마음 먹고 평생 생각하지 못한 길을 택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출신 이발사 조상현(68) 씨. 지금 생각해도 이 길을 택하길 참 잘했다. 어찌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마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너와나 이용원’. 대부분의 이발소가 7시에서 8시 사이에 문을 연다는데 이곳은 오전 10시에 연다. 게다가 월, 수, 금은 오전 봉사 일정이 있기 때문에 1시에 영업을 시작한다. 너와나 이용원의 주인장인 조상현 씨는 5년 전 40년 교직생활을 마치고 고심 끝에 이발사라는 직업을 택했다. 올해로 3년째. 분필이 아닌 흰 가운에 가위를 잡은 모습이 이제 제법 잘 어울린다.
“‘너와나’는 ‘우리’를 뜻합니다. 우리보다는 너와나 그렇게 쓰면 어떻겠냐고 친구가 지어준 상호입니다. 정감이 가는 말이어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개업 초기에는 손님이 빠져나가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단골이 꽤 된다고 했다.
“이발소 문을 처음 열었을 때 손님이 들어오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더라고요. ‘저분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하노’ 하는 걱정밖에 없었습니다. 6개월 후쯤 보니 그 무렵에 방문했던 손님 중 3분의 2는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내 첫 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단골도 생겼고, 내 솜씨가 마음에 차지 않아 오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웃음) 이번 여름휴가를 2박 3일을 생각하고 갔는데 너무 좋아서 하루 더 연장했습니다. 그런데 전화가 몇 통씩 오더라고요. 이발소 문 언제 여냐고요. 기다려주는 손님들에게 늘 고마울 따름입니다.”
전원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퇴직 후 바로 이용 기술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은퇴하면 전원생활을 해볼 생각으로 경남 진주시 진성면에 텃밭을 장만하고 조립식 주택을 지었다.
“마산역에서 진성역까지 완행열차를 타고 출퇴근했습니다. 진성역에서 내린 뒤에는 자전거를 타고 갔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낭만적이었는지 몰라요. 시골길을 한 10분쯤 타고 가면 농장이 눈에 보였습니다.”
산행도 하고 약초도 좀 캐고, 고구마에 콩 등 각종 채소를 키웠다. 혼자 밥도 먹고 나름 재미있었다. 진성에서의 전원생활.퇴직 후의 삶으로 꽤 괜찮은 시작이었다.
“텃밭이 300평이었어요. 처음에는 옆집에서 고구마 모종을 받아다가 키우면서 신이 났지요. 그런데 6개월 정도 되니까 짜증이 나는기라!(웃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데 밭에서 있는 시간이 많으니 도통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나마 말동무하던 이웃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마음이 힘들더라고요. 접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마침 이발소와 관련해 지인들과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실행에 옮기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발사를 노후 일자리로 만나다
우연히 찾게 된 이발소에서 80세가 넘어 보이는 이발사를 만나게 된 것. 벌초하듯 머리카락을 자르고 염색을 대강대강 해주고는 1만 원을 받았다.
“이 양반이 팔십은 돼 보이는데 일을 하고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도 그때까지 일할 수 있겠다! 손이 안 떨리면 되고 나이가 들면 값을 싸게 받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자신감이 생기면서 이용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 가족회의를 했어요.”
두 아들은 적극 찬성, 함께 교직생활을 했던 아내는 반대했지만 아들들의 호응 속에 이용학원에 등록했다. 만류한 아내에게는 비밀로 하고 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쉬운 도전이 아니라는 것을 학원 등록 후에나 알게 됐다.
“학원에서 교육 이수만 하면 누구나 이용원 문을 열 수 있는지 알았어요. 알고 보니 국가자격증을 따야 한다더군요. 그래도 명색이 교장 출신인데 기능시험에는 합격을 못해도 자존심상 필기시험에서는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안 떨어지려고 공부 정말 열심히 했어요.(웃음) 필기시험은 한 번에 붙었고 기능시험은 세 번 도전한 끝에 자격증을 땄습니다. 합격하기까지 경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했기에 자격증 취득이 쉽지는 않았다. 2016년 12월에 그 관문을 모두 뚫은 그는 이듬해 3월 개업했다. 하루에 5명에서 6명, 그러다 10명 정도 손님을 받는 날이면 혼자 두발을 깎고 감기느라 하루가 바쁘게 흘러갔다.
봉사와 함께 실력도 쌓다
이용 면허증을 받고 개업 준비를 하면서 시작한 것이 바로 이용 봉사였다. 하지만 이때는 실력 배양에 더 신경 쓰면서 봉사 대상을 취사선택했다고 조상현 씨는 고백했다.
“초반에 제 솜씨가 어떤지 알고 싶어서 봉사를 다녔습니다. 요양원에 가서 어르신들 두발을 잘라드리면 좋다 안 좋다 말을 하지 않으시니 실력이 늘지 않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상이군경회, 육군종합정비창, 노인회관을 중심으로 찾아다녔습니다. ‘여기 다시 잘라 달라, 둥글게 좀 해 달라’ 요구를 하시니까 실력이 좀 연마가 됐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 있어서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다녀요. 물론 제가 안 간다고 하면 다른 분을 부르겠지만 제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봉사를 다닐 생각입니다.”
금년 들어서 줄곧 반대하던 아내가 생각을 조금 바꿔 이용 일을 하는 자신을 인정해줬다고 한다. 큰아들은 처음부터 조상현 씨에게 이발을 맡겼으나 작은아들은 2년이 지나고 나서야 아버지의 이발소 문을 두드렸다.
“말로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머리를 어떻게 손질하는지 직접 봐야 알겠지요. 이제야 둘째가 저를 인정하는 거라고 봅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 도전하기 힘든 직종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발사라는 직업을 낮게 보는 경향도 있었고 말이죠. 이용원을 하고 싶다면 서비스마인드도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성향에 맞아야 해요. 이 나이에 해보지 않았던 일에 도전하고 실행에 옮기려니 만만치 않더군요.”
조상현 씨가 이용원을 운영하는 이유는 나이 들어서도 쉬지 않겠다는 일념이 크다. 돈을 벌겠다거나 가족을 부양할 생각보다는 노후 생활을 일과 더불어 즐기며 누리고 싶었다.
명예보다 노후 일자리가 필요했다
“아무래도 저희 부부는 교장으로 있다가 퇴직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아들자식들도 다 안정적으로 직상생활을 하니 도울 일이 없죠. 명예보다 저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일자리를 선택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조상현 씨는 손님이 오면 더 좋고 손님이 안 와도 좋다고 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여유롭게 글도 쓰고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삼는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면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것도 낙이다.
“지금은 내가 참 잘했구나. 오늘 어디 가서 놀까 하는 걱정도 없고 말입니다. 그리고 10시에 문을 열고 6시 반이 되면 문을 닫습니다.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니까 내 위주로 합니다.(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도 서비스직이기 때문에 손님들과 약속한 시간만큼은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제 나름의 영업 방침이죠.”
교직이 있을 때와 다른 점은 걱정거리가 없어진 일상이라고 했다.
“학교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매번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판단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해야 상대가 잘 받아들일지 고민이 많았어요. 늘 걱정의 연속이었죠. 지금 하는 일은 몸이 좀 고단하다는 것 말고는 마음이 정말 편안합니다.”
앞으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거냐고 물었다.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만약에 눈이 나쁘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다행히 두 눈이 정상입니다. 손떨림 없고 눈만 건강하다면 쉬지 않고 일할 생각입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