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부부로 함께하는 세월 또한 늘어났다. 예언대로 120세 시대가 온다면, 길면 100년 가까이 배우자와 살게 될지도 모른다. 때문에 부부 관계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따져보면 우리는 부모도 선택할 수 없고, 자식도 선택할 수 없다. 오롯이 선택 가능한 가족은 ‘배우자’뿐이다. 평생의 동반자로 택한 사람과 오랜 여생을 행복하게 사는 일, 노력 없이는 쉽지 않다. 이에 가정의 달을 맞아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원장을 만나 중장년기 부부 관계 해법에 대해 물어봤다.
김숙기 원장이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을 설립한 건 2000년. 그 시절만 해도 공공연하게 가족 갈등이나 부부 문제를 드러내는 문화는 아니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일쑤였고, 가족의 치부라도 드러내는 양 숨기고 회피하기 바빴다. 한창 결혼 생활에 대한 회의와 고민이 깊어갔던 김 원장은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그는 직접 부부 갈등의 해결책을 모색해보기로 했다.
“당시 우리 가정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가족 해체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어요. IMF 직후였는데, 매스컴에서는 경제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췄지만 그 내면에 가족 구성원들이 병들어가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저는 결혼을 스물두 살에 일찍 한 편인데 ‘결혼 생활이 이런 건가?’라는 의구심이 많이 들었어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놔도 ‘다들 그러고 살아’, ‘애 보면서 참고 지내면 좋은 날 올 거야’라는 식으로 조언하더라고요. 제가 유난스럽다고들 했죠. 그런데 도저히 참고만 지낼 수가 없었어요. 나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이 터놓고 이야기할 장이 필요하다 느꼈죠. 그렇게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을 열게 됐습니다.”
부부 갈등, 자녀의 상처로 번지지 않도록
김 원장은 그렇게 20여 년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을 이끌며 가족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부부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 당초 본인의 문제에서 시작했기에,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겪은 아픔도 치유하고 성장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일을 하며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제가 원가족(김 원장의 부모와 형제) 관계에서 상처가 있었더라고요. 오롯이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 사랑은 주로 오빠를 향해 있었고 저는 ‘착한 딸’, ‘말 잘 듣는 아이’가 돼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거예요. 조건부 사랑인 거죠. 그런 결핍이 있었던지라, 남편을 만났을 때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해지겠지’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신혼살림 장만하고 물질적인 준비는 열심히 했는데, 정작 결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마음가짐은 결여돼 있었죠.”
막연히 시작한 결혼 생활은 막막함으로 다가왔다. 지금 생각하면 결혼 생활이 험난하게 느껴졌던 건 남편 개인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그런데도 당시엔 이런저런 갈등으로 부부 싸움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그 상황에서 피해를 본 건 다름 아닌 자녀들이었다.
“가족 관계에서 핵심은 부부예요. 부부 관계가 안정적이라야 자녀들도 편안함을 느끼죠.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눈치를 보고, 불안감을 안고 살 수밖에 없어요. 자존감도 결여되고요.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도로 가족 상담 시간을 마련했어요. 아빠, 엄마, 아들, 딸 넷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서로의 상담사가 되어주었죠. 그렇게 회복하는 모습이 보이면 2주에 한 번, 그러다 한 달에 한 번, 이제는 분기별로 한 번 정도 진행해요.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는구나 느꼈던 건 10년 정도 됐을 때예요. 우리 가족은 상처가 참 많았거든요. 그만큼 오래 걸리지만 가족이라면 꼭 해야 할 일이죠.”
두 자녀가 30대 성인이 됐지만, 여전히 청소년기에 있었던 일화나 감정을 살피며 치유에 힘쓴다는 김 원장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부모의 태도. 자식일지라도, 오래된 일이더라도 사과할 일이 있다면 꼭 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고 가족 간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단다.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이들 어릴 때 부부 싸움하고 집을 나간 일 같은 걸 생생히 기억하더라고요. 그것도 어른이 된 이후에나 들었죠. 물론 우리 부부도 나름 사정이 있었지만, 그런 건 차치하고 아이들이 겪었던 감정에 대해 충분히 들어주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아직 그런 경험이 없으시다면 ‘가족 대화의 날’ 같은 걸 만들어보셨으면 해요. 특별한 안건이 없어도 됩니다. 처음엔 어색해서 겉도는 말만 하게 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씩 자연스럽게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죠. 어떤 분들은 자녀가 옛날 얘기를 꺼내면 ‘엄마가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는 식으로 반응하는데, 그러면 소통이 단절되고 말아요. 끝까지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함께 울기도 하며 보듬어줘야 치유됩니다.”
비난하지 않는 입, 경청하는 귀
자녀뿐 아니라 부부끼리도 서로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제 부부 갈등으로 상담을 청하는 이들을 보면, 대체로 일방적 소통이나 방어적인 태도 등이 문제가 된다고. 중장년 부부의 경우 ‘수십 년 이렇게 살았는데 고칠 수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이 또한 훈련을 통해 개선 가능하단다.
“두 가지가 중요해요. 먼저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대를 비난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배우자 때문에 속이 상한다면, 결국 그 감정의 주체는 나예요. ‘내가’ 속상한 거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당신은 사람이 왜 그따위야’라는 식으로 말하면, 벌써 비난이 들어간 거예요. 그럼 상대는 ‘내가 뭘 어쨌다고?’라며 맞받아치고, 결국 감정싸움으로 번지게 되죠. 그러니 주어를 ‘나’로 두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어렵다면 말 앞에 늘 ‘내가 생각할 때는’, ‘내가 느끼기에는’이라는 토시를 달아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그렇다면 듣는 입장에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김 원장은 가급적 말하는 배우자의 감정을 헤아리려 노력하되, 선뜻 이해가 안 되더라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방어적인 태도가 문제예요. 그저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80%는 해결된다고 봅니다. 내 의견은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 입장에서 경청하는 거죠. 내 관점만 인식하면 상대가 하는 말이 잘 안 들리고 따지려 들 수 있어요. 그렇게 한번 브레이크가 걸리면, 상대는 대화가 안 된다고 여기고 ‘아, 백날 얘기해봐야 소용없구나’라며 포기하죠. 그렇게 입을 닫게 되고 마음도 닫는 거예요. 다 들은 후에는 ‘이런 얘기를 해줘서 고마워’, ‘그동안 당신 심정이 어땠을까’라며 상대를 배려하는 한마디를 해주면 좋습니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부 생활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바탕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설사 갈등이 오래된 부부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얻어 차차 좋은 관계로 거듭나게 된다. 김 원장은 “백세시대에는 결국 관계가 좋은 부부만이 살아남는다”고 언급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 황혼이혼, 졸혼, 별거 등 부부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고. 과거에 비해 수명이 늘어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더 활발해지는 추세라고 한다.
“부부 갈등이 있더라도 자녀가 있을 땐 그럭저럭 관계를 유지하려 해요. 그러다 자녀들이 출가하면 상황이 달라지죠. 60대 전후로 그런 시기를 맞게 되는데, 예전보다 수명이 훨씬 늘어났잖아요. 웬만큼 참고 살기엔 여생이 너무나 긴 거죠. 그러니 ‘이렇게 살 수는 없다’며 이혼을 택하는 거예요. 문제는 보통 이 시기쯤 남성들은 퇴직을 겪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를 느껴요. 여성들은 나이가 들어도 주변인들과 소통하고 융화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남성들은 그렇지 않은 편이죠. 고독하고 고립된 존재로 노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요즘은 이런 위기감을 느끼는 남편분들이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많아요. 다만 너무 늦게 찾아오셔서 이미 아내의 마음이 떠난 상태가 적지 않아 안타깝죠.”
늘어난 황혼기, 제2의 신혼 맞이하길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서 김 원장이 우려하는 사안 중 하나는 비혼 인구 증가 문제다. 자신이 그랬듯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채 섣불리 결정하는 것은 반대한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문제로 인해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쌓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울러 그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부모 세대에게 달렸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저출산, 비혼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죠. 단순히 자가 마련이나 양육비 같은 경제적인 차원에서만 볼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령 부모의 불화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자신의 결혼 후 삶에 대해서도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기 힘들죠. 행복한 부부, 단란한 가정에 대한 롤모델은 바로 자신의 가족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이 부재하니 결혼 생활이나 양육이 두려운 거예요. 만약 자녀가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너는 왜 결혼을 안 하느냐’며 독촉하고 윽박지르기보다는 우리 부부가 좋은 본보기가 됐는지, 가족 안에서 아이가 상처 입은 부분은 없는지 돌이켜보셔야 합니다.”
그는 가족이나 부부 관계를 점검해볼 수 있도록 건강검진 같은 형태의 사회적 차원에서의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동시에 가정에서는 중장년 부부들이 관계를 리모델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자녀들이 출가하면 가정 안에서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부부도 오랜 세월 함께하며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을 테죠. 상대의 비인간적인 모습이나 되돌릴 수 없는 실수에도 마지못해 살아온 지경이 아니라면 충분히 좋아질 수 있어요. 돌이켜보면 부부가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하며 살았던 순간은 거의 없어요. 신혼 때는 양가 어른들 눈치도 보고, 효도한다고 신경 쓰고, 아이를 낳으면 키우느라 정신없고. 비로소 이제야 다른 것에서 놓여나 서로를 바라보는 위치가 된 거죠. 그런 면에서 제2의 신혼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가족은 성장 가능성이 있는 존재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가정의 달엔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시간을 꼭 한 번 가져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