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브라보가 만난 사람] 영화감독 김동원, 다시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요즘 젊은 세대가 가장 관심을 갖는 아이템인 피규어. 그런데 시니어 대부분은 잘 모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 선입견을 비웃듯, 기자가 3000여 점의 피규어가 전시된 마니아들의 성지 피규어뮤지엄W를 방문하게 된 것은 한 시니어 독자의 제보 덕분이었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감식안이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젊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피규어뮤지엄W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피규어와 그리고 피규어에 친숙한 아이들과 함께하며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김동원(金東元·54) 피규어뮤지엄W 관장을 만나 피규어 가치에 대해 그리고 캐릭터 문화에 대한 식견을 물어봤다. 몸은 중년, 마음은 초등학생. 어릴 적 좋아했던 캐릭터 피규어를 모으며 동심에 빠져 사는 오타쿠적 기질의 아재들이 늘고 있다. 구매한 피규어를 개봉하지 않고 박스째로 나란히 차곡차곡 쌓아둘 정도로 피규어를 모으고 즐기는 이들은 자신이 자신에게 선물을 하듯 살뜰히 챙긴다. “평소 그다지 대화가 없던 부자가 함께 와 캐릭터를 매개로 ‘말문’이 터지는 경우도 있고, 손주 손잡고 온 시니어가 오히려 키덜트족이 돼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피규어를 좀 안다는 분들이 이곳 뮤지엄에 와서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며 저마다 탄성을 터뜨리죠.” 피규어 소장의 즐거움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라고 여기는 김동원 피규어뮤지엄W 관장은 지난 10월 마니아들의 감성을 채워주는 일에 합류했다. 그에게 피규어 마니아들 사이에 부의 상징인 레어 아이템, 즉 희소성 있는 피규어가 있냐고 짓궂게 물었다. “어지간한 피규어는 다 구경해봤는데 여기 뮤지엄에 와서는 제가 아는 피규어는 빙산의 일각이었어요. 사실 피규어 가격은 크기에 따라, 희소성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건담 시리즈를 진열했더니 사무실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지더라고요. 간혹 사람들이 놀러 와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해요. 장난감 하나만으로 사무실 공간이 위트 있고 재미있게 변한 것 같아 좋아요.”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피규어뮤지엄W는 피규어와 토이를 통한 테마파크를 지향하며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의 공간이다. 전시공간은 6층의 총 6개 테마로 구분되어 있으며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놀이공간, 카페가 있는 그랜드홀, 직접 피규어를 구입할 수 있는 마니아 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장품은 프라모델, 히어로 액션 피규어, 자동차 다이캐스트 등 3000여 점에 달하는 막대한 숫자를 자랑한다. 영화 촬영에 실제 쓰인 자동차 모형, 에 출연한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실제로 입었던 가죽 의상, 리샤오룽 타계 40주년 기념 특별 피규어 등 진귀한 수집품으로 가득하다. ‘감정가 2억원을 호가하는 건담 모형’, ‘순금으로 만들어진 나이트 오브 골드’까지 눈이 호사를 누리는 동안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추억, 누군가에게는 보물창고, 누군가에는 꿈과 희망이 되는 곳이다. 피규어뮤지엄W는 예상치 못했던 그 시작처럼 기존 뮤지엄과는 다른 발상과 사고로 사업을 전개할 계획을 갖고 있다. 대중문화적 취향을 가진 영화감독 김동원 감독을 관장으로 기용한 것도 그러한 계획의 일환이다. 김동원 관장은 , , 등의 영화들을 감독한 바 있다. 피규어를 처음 접했을 때 받은 충격 “주변에서는 의아스럽다는 반응이죠. 그런데 사실 저는 방향을 튼 게 아니라 감독으로서 또 하나의 파트너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규어의 상당수가 미국의 마블, DC코믹스에서 나오는 히어로를 소재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런 피규어들은 전 세계의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감독으로서 김동원 관장이 피규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 영화계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 “현재 한국 영화는 수익을 관객으로만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캐릭터 산업을 병행해 나 처럼 관객 동원에 캐릭터 판매가 플러스돼서 거기서 창출할 수 있는 수익이 있다면 영화 산업의 규모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시리즈는 영화 관객을 통한 수익보다 몇백 배 더 많은 저작권 수익을 가져가고 있고 거기서 또 다른 고부가가치들이 창출되는 상황입니다.” 김 관장은 처음 피규어를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 굉장히 부러운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도 영화 속 캐릭터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과 기꺼이 돈을 지불하면서 그 피규어를 보며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언맨이 피규어 시리즈로 나오고, 각 피규어들이 노멀 버전, 파이팅 버전 등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도 이런 걸 갖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 은 193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캐스팅이 바뀌어가면서 영원히 존재하잖아요? 이제 우리도 그런 한국적 캐릭터가 있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감독과 관장 그리고 나 김 관장은 피규어뮤지엄W이 문화예술계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놀이와 문화를 함께 담은 박물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피규어뮤지엄W는 피규어를 테마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도록 하여 즐거움을 줌으로써 박물관의 개념을 확대시켰다고 봅니다. 문화예술을 종합적으로 보 여주는 박물관인 만큼 전시, 교육뿐만 아니라 캐릭터 발굴과 개발을 넘어 그래픽 노블, 영화 등 콘텐츠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를 이끌고 다양한 시도를 할 것입니다.” 그는 감독으로서의 역할과 뮤지엄 관장으로서의 역할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결국 피규어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재현입니다. 기억 속에 있는 걸 다시 만들고 추억 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작업이죠. 저로선 영화감독의 길을 가면서 피규어라는 좋은 재료를 영화에 접목시켜 하나의 콘텐츠로 발전시킬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피규어가 결합된 한국의 마블 스튜디오를 꿈꾼다 영화와 캐릭터 산업을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 확장시키고 싶다는 그의 생각은 한류 관련 콘텐츠 사업의 차원으로까지 넘나들고 있다. “일부에서는 피규어를 단순히 아이들 장난감, 키덜트만으로 생각하는데 그보다 더 큰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와 예능과 애니메이션을 아울러서 기존의 한류 문화처럼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내는 거죠. 이제는 예능도 처럼 미국에 수출하게 됐습니다.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봤던 , , 등도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이미 피규어뮤지엄W에서 과거 심형래 주연의 인기 시리즈물이었던 영화 의 판권을 구매했다는 소식도 있다. 그런데 과거 우리가 가졌던 캐릭터를 현대에 더 발전시켜 만들자는 생각은 왜 아직까지 구체화되지 못했던 걸까? “한국적 캐릭터가 미약해요. 미국은 오래전부터 슈퍼맨, 배트맨 등의 캐릭터를 만들었고 TV가 활성화되자 TV드라마 시리즈로 만화 원작인 히어로 물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이 성장해서 이제는 헐리우드에서 정교하게 만든 히어로 물을 만들고 시리즈로 만든 거죠. 그러면서 히어로 물이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원작조차도 남아 있지 않고 판권을 가진 분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그런 것들을 찾아 재조명하면서 디테일하게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시도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걸 한번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매우 어려운 시도가 될 것입니다.” 캐릭터 산업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싶다 김 관장이 토로하는 우리나라 캐릭터 제작 현실의 후진성은 놀이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문화적 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캐릭터를 소중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취급했다면 그토록 많은 것들이 모호하게 방치되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한국적 캐릭터를 만들어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기 위한 문화적 기반이 만들어지려면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 현장에 있는 김 관장의 의견을 들어봤다. “흔히들 하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문화적인 계기가 있어야 한다’, ‘대기업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들은 기본적인 얘기들이에요. 저희들의 구상이 잘 맞아떨어져서 하나의 시도가 성공을 거두면, 위의 얘기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책임감을 갖고 돌파하면 된다는 거죠. 피규어뮤지엄W와도 그런 부분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겁니다.” 시니어 중에서도 동심이 그립거나 상상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피규어뮤지엄W는 그런 사람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시니어들이 손자와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시니어들은 피규어뮤지엄W에서 과거 추억의 캐릭터를, 아이들은 자신이 어른이 됐을 때의 모습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디자인해보고 컬러링해서 완성해보는 ‘피규어아티스트’ 체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프라모델, 석고, 클레이 등 다양한 재료로 피규어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만화가, 캐릭터디자이너, 큐레이터, 피규어아티스트 등 다양한 직업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활발히 운영 중입니다.” 나이 들면서 깨달은 것들 히어로 물을 제작하고 싶다는 그에게 인생에서 언제가 가장 즐거웠는지, 젊게 늙어가는 비법은 뭐냐고 물어봤다. “저는 그냥 막 놀 때가 행복했어요(웃음). 작품을 만드는 건 일이죠. 고등학교 때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얘들하고 사고나 치고 다니고… 굳이 재밌었던 시절을 말하라면 그때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젊게 늙어가는 비법이요? 비법은 전혀 없고 캐릭터 좋아하고 철없이 살다 보니(웃음) 어렵게 생각 안 해요. 긍정적으로 사는 게 덜 노화되는 비결인 듯해요.” 그는 향후 계획을 중국이나 홍콩 등에 진출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을 구상하는 데 두고 있다. 당장은 피규어뮤지엄W를 태국에 개관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사실 좀 더 진행이 되어야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해요. 이곳과 같은 규모로 생각하고 있는데 파트너가 중요하겠죠. 그 과정 중에 캐릭터 산업으로서 하는 시도들이 영글어져야겠고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충무로 감독이라는 명함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소박하다는 느낌을 연거푸 받았다. 그는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영화에 제 인생까지 다 담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에 따라 작품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져요. 30대, 40대 때는 선배님들 인터뷰를 보면서 멋있는 말만 하시네 했어요. 그런데 제가 나이가 들어보니 그때 그분들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것 같더라고요. 그게 나이가 드는 것이겠죠. 예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잔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제가 그런 말을 하고 있고,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도 보게 되는 거죠.” 시간은 철없는 사람도 어른으로 만들어준다.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지 물어봤다.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 아닌가요? 누가 날 기억해주냐가 중요하겠죠. 매순간 열심히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요.” 김동원 관장은 피규어뮤지엄W가 얼마 전 판권을 구입한 영화 버전을 기획 중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피규어뮤지엄W의 전시를 볼 수 있도록 전시장 오픈도 계획 중이다. 현재 태국 파타야에 ‘피규어뮤지엄W 파타야점’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 청담동(84-9번지)에 위치한 피규어뮤지엄W는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며,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3500원, 어린이 1만2000원이다.
- 2016-12-09 08:40
-
- [브라보가 만난 사람] 만화가 김광성의 일탈로 행복해지는 비결 “요즘은 틈만 나면 놀러가고 싶다”
- 10월 14일부터 11월 11일까지 서울역 1·4호선 환승 통로에서 서울역 일대의 역사를 그린 만화가 김광성(金光星·62)의 그림이 전시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참 따뜻하다, 정겹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수묵담채로 그려진 한국적인 특유의 색감도 그렇거니와 세밀하게 그려진 인물과 풍경들에서 오래전에 볼 수 있었던 서울의 옛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주제와 소재들로 밀도 높은 작품세계를 꾸준히 확장하고 있는 김 작가의 그림은 파리 크리스티 옥션에서 거래될 정도로 그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삶과 일에 관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두 번째 만남인지라 준비해간 질문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인사동 통인가게 2층 찻집에서 내준 발효 생강차가 채 식기도 전이었다. “대표작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앞으론 뭘 그리고 싶은가요?” 이런 질문은 ‘김광성’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아니, 이런 진부한 질문들을 의미 없이 던지는 것은 그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는 데 걸림돌만 될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노트북을 덮었다.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광성 작가는 올해 62세다. 만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다소 늦은 36세 때였다. 당시 인기 만화잡지였던 이 그 전까지 대기업 직장인, 가게 사장님으로 살았던 그를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했다. 이후 26년간 펜을 놓지 않은 그는 자신의 경력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 그와 비슷한 또래의 만화가들은 대부분 30년 경력을 넘겼을 테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또래이면서 활동하는 만화가가 적은 현실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의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30대 후반에 도전하게 된 만화가의 삶 “학생 때 만화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명랑만화에서부터 극화만화까지 만화란 만화는 다 좋아했죠. 살던 데가 부산 외곽 시골이었는데 만화방이 생긴 게 행운이었다고나 할까.” 김 작가의 아버지는 남사당 사물놀이 꼭두쇠였다. 아버지는 농기구를 예술적으로 만들고 돗자리나 가마니도 전부 손으로 만들곤 했다. 그 끼를 물려받은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림을 그리다 사회에 나와서 십 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죠. 학창시절 때 그림을 그리면 아버지께 혼쭐이 났어요. ‘그림 그리지 마라, 빌어처먹는다’라는 말씀이셨죠(웃음). 그래서 그림을 접어야 했어요.” 그러나 인연이라는 것은 의외로 끈질기다. 회사를 가니 유화반이 있었고, 그는 거기서 유화를 배우게 된다. “회사 다닌 지 십 년째가 되니 사회 영향을 받아 회사에 변화가 생겼어요. 마침 저도 십 년 다녔으면 지긋지긋하게 했다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죠. 1986년에 아시안게임이 있었고 1988년에 올림픽이 있었죠. 그때 곳곳에서 무허가 건물들이 들어섰는데 어머니가 ‘넌 그림 실력이 있으니 간판집이나 해라’ 하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도 괜찮겠다 싶어서 가게를 차려서 2년 동안 쏠쏠하니 재밌게 일했어요.” 간판집 사장으로 일하던 그는 그동안 전혀 접하지 못했던 만화를 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됐다. 당시 만화계에는 신인들이 올라오던 시절이었고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들도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좋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가져와서 보는데, 만화 보느라 간판 제작일이 잘 안 됐어요(웃음).” 처음에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재료를 사서 허영만, 이현세 등 기성작가들의 작품을 베껴봤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시장이 굉장히 활발했어요. 내가 거기에 끼어들면 색다른 작가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 를 그렸죠. 그게 반응이 좀 좋았고, 그러면서 만화가로서의 삶이 시작됐어요.” 만화는 농사와 같다 이후 30여 년 가까이 만화가 생활을 했다. 이제 중견 만화가이자 인정받는 작가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만화는 농사다’라고 말한다.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농사를 지었어요. 만화도 농사처럼 뭔가 다져지고 공부하고 비축이 된 상태에서 나온다는 의미죠. 그림도 기초가 되어 있어야 표현을 하잖아요. 만화는 머리에서 먼저 그려야 해요. 머리에서 먼저 안 그려지면 아무것도 안 돼요. 그러기 위해선 머리에서 그릴 수 있도록 많은 것들이 쌓여야 하죠.” 김 작가는 우리만화연대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우리만화연대는 만화인들의 모임으로 이론적으로 만화계 저변을 단단하게 다듬는 걸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만화에 대한 분석과 만화계가 처한 상황에 대한 해법 등을 제시하는 활동은 김 작가의 성향과 공명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요즘 바라보는 만화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나마 우리 만화계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있어서 다른 예술 분야보다는 형편이 좀 좋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수년 전부터 만화에 대한 효용가치가 달라졌어요. 만화가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인식하게 된 거죠. 요즘은 어디를 가더라도 만화가에 대한 대접이 과거에 비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문제는 이제 신인, 기성 할 것 없이 양질의 작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거죠. 잘나가는 작가들은 에이플러스 주고 싶을 정도로 잘해요. 그런데 그런 작가들은 한정되어 있거든요. 그 외의 친구들은 많이 분발해야 하는데, 최근 웹툰 업체들이 많이 생겼어요. 이 업체들은 작품을 달라고 성화죠. 그렇게 되면 작품성이 좀 떨어져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돼요. 작가들이 좀 더 자신의 개성을 살린 작품들을 발표하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죠.” 나이를 거꾸로 먹을 수밖에 없는 일 김 작가는 만화를 그릴 때, 그 안에서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감동받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잘 풀려나갈 때 느끼는 감동은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일 것이다. “대개 새벽 두세 시에 잠자리에 드는데, 그때 창문을 열고 밖을 보면 참 뿌듯해요. 화가를 꿈꿨던 시절도 있었는데, ‘다시 태어나도 만화가 할 건가요?’라고 누가 물으면 그러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싶어요. 직업적으로도 매력이 있고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며 즐거워하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나도 한 역할을 하고 있구나 느끼게 되고 동시에 조심도 하게 됩니다. 또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내 작품에 대해서는 스스로 평을 못 하잖아요. 그런데 시인 고은 선생의 글을 읽고 ‘맛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제 만화를 보고 맛이 있다고 하니 최고의 칭찬이죠.” 그는 아직도 자신이 청춘이라고 말한다. 그저 말로만 청춘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여전히 어린이 만화 제작 요청을 받는 활발한 현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면서 그는 나이를 계속 ‘거꾸로’ 먹는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지 않으면 그릴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 만화가는 동방신기도 알아야 하고 걸그룹도 알아야 하고 아이들의 언어도 알아야 해요. 그러다 보니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애니메이션도 수시로 보게 되죠.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작품을 보게 될 수밖에 없거든요.” “도태? 난 도태되고 싶어” 김 작가가 오랜 세월 만화계에서 일하면서 가져야 했던 작가적 태도가 궁금해졌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가 계속해서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만화가 우월하다거나 대단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활동하는 게 필요하니까, 직업일 뿐이니까 한 거죠. 직업이라고 말하면 한쪽에서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그런데 요즘 사회학자들이 인생에 대해서 많이 걱정하잖아요. 사람들이 소위 새로운 무언가에 몰입해서 휩쓸려 다니는 게 보이니까요. 이건 개개인의 문제여서 스스로 뭔가를 깨닫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좀 더 진지하게 감성이나 비전, 사유를 접하면 사유하고 감성이나 비전을 가지면 좋겠어요.” 그는 자신이 겪은 반(反)문명론자로서의 사연(?)을 하나 소개했다. “어떤 젊은이가 내게 핸드폰을 줬어요. 그런데 복잡해서 도대체 어떻게 써야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짜증을 내니까 그 젊은이가 ‘선생님, 그거 안 하면 도태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도태? 도태시켜. 난 도태되고 싶어’라고 말했죠(웃음). 뭔가 새로운 게 나오면 다 그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몰라도 된다고 봐요.” ‘역시 아날로그적 도구로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백다운 발언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김 작가는 SNS 등 인터넷 활용은 물론 포토샵까지 다룰 줄 안다. 심지어 권당 200페이지짜리인 전 10권을 모두 포토샵으로 컬러링 작업까지 한 디지털 능력자다. 제대로 반(反)문명론자가 되려면 문명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어야 가능한 것일까. 틈만 나면 놀러 다니고 싶은 나이 100세 시대라는 말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김 작가의 미래는 앞으로 적어도 30년은 남은 셈이다. “요즘은 틈만 나면 놀러가려고 해요. 원래는 놀지 않고 일만 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돼요. 돈도 안 되는 걸 밤새면서 왜 그렇게 했나 싶고요.” 아직도 일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김 작가에게는 현재진행형인 얘기일 수 있다. “참 족쇄를 풀 수가 없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의무 같은 게 생겼어요. 그런데 의무가 무게를 가지면 참 골치가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2년 동안은 일 안 한다고 도망 다녔어요. 나중에 박재동 작가가 잡으러 왔어요(웃음).” 김 작가에게는 버킷리스트가 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같은 동네에 사는 비구니 스님과 함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려고 제주도에 가서 스킨스쿠버를 하고 유명산 밑에 가서 패러글라이딩도 해봤다. “스킨스쿠버를 하면 세상이 확 차단돼요. 거기가 천국이에요. 물고기들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스님이 다음에는 바이크 면허 따서 할리데이비슨 타자고 하더라고요(웃음).”
- 2016-11-11 10:05
-
- [브라보가 만난 사람] 그림으로 세 번째 삶 사는 하효순씨
- 남편을 잃은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두 딸과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살고 있던 그때 집 안에서 그녀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그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의 빈정거림을 참아가며 모았던 그 그림들. 그리고 자녀들이 모두 출가한 뒤 다시 찾아온 인생의 위기에서 그림은 또다시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판교에서 만난 하효순(河孝順·66)씨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그녀 나이 41세였다. 하늘같이 믿고 의지했던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녀 곁에는 아이 셋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강한 생활력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편안한 삶을 살아왔다. 고향인 진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자도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 뜻에 따라 상경해 중앙대학교 보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을 채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 제의가 들어왔다. 막연히 꿈꿔왔던 큰 회사의 비서 자리였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회사에 다니다 남편을 만났다. 그녀가 일하던 인천제철은 인천시청 근처. 자주 점심을 먹으러 가던 곳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알고 보니 지인의 친구였고, 자연스레 연애가 시작됐다. 그리고 결혼했고 아이 셋을 얻었다. 빈정거림 속에서 수집한 그림들 느닷없는 남편의 죽음. 하늘이 무너졌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죠. 남편에게만 의지하고 살았었으니까. 세상 물정을 모르니 돕겠다는 다른 이들의 선의도 악의로 느껴졌어요. 날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래도 다행인건 딱 하나 제대로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어요. 아이들은 제대로 공부를 가르쳐, 바르게 키우겠다는 결심이었죠.” 생계는 부동산 사업을 크게 하는 친구를 도우며 유지했다. 오직 아이들의 공부에만 집중하며 지냈다. 그 와중에 유일한 그녀의 버팀목이 된 것은 그림이었다. “동양화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영향인지 자연스럽게 그림을 좋아했어요. 남편과 백화점에 가면 늘 들르던 곳이 있는데 맨 위층이었어요. 그곳에 갤러리와 분재 매장이 함께 있었는데, 남편은 분재를, 저는 그림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때부터 그림을 한 점씩 사모으기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그림을 산다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집이 화랑이냐는 핀잔은 양반이었다. 어떤 친구는 돌았냐고도 했다. 동향 사람이라 더 애착이 갔던 박생광(朴生光·1904~1985) 화백의 작품은 할부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밖에 배정례(裵貞禮·1916~2006),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문봉선(文鳳宣·1961~ ) 화백 등 내로라하는 작가의 그림들로 집안을 채워나갔다. 남편을 보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삶의 낙은 갤러리를 찾는 것이었다. 갤러리 직원들은 그녀를 ‘청담동 지영이 엄마’로 잊지 않고 기억할 정도였다. “문봉선 화백은 그가 대학원생일 때 처음 만났어요. 작품에 관해 묻자 수줍어하던 문 화백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그 이후 그분의 작품을 하나 더 살 기회가 있었는데, 사정상 다시 돌려드려야 했어요. 그때도 절 기억해 주시더라고요. 그림을 수집하는 것은 단지 작품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작가와의 관계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죠.” 큰딸 한마디에 정신 번쩍, 생계현장 속으로 어느 날 “엄마 우리 괜찮아?”라는 큰딸의 질문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고 했다. 부동산 경기는 꺼져가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을 주변의 지인들에게 그림을 팔아 위기를 겨우 넘기고 있는 상태였다. 남편을 보내고 난 뒤 7년째, 아이의 지적에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광명의 프랜차이즈 피자 매장이었다. 젊은이들과 계속 만날 수 있고, 일찍 끝날 수 있는 일을 찾다 발견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잘 됐죠. 잘 돼야만 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같이 왕복 34km 거리를 출근했어요. 시장도 직접 다니고, 주방에서 설거지도 도맡아 했죠. 그 매장을 시작하면서, 본사 회장에게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만들 것이라고 큰소리 쳤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죠. 덕분에 빚도 갚고 세 아이의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자식 농사’만큼은 떵떵거릴 수 있게 됐다. 첫째 딸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모 대학 교수로 활동 중이고, 둘째 딸은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로펌에서 11년째 비서로 근무 중이다. 막내아들은 국내 은행을 다니다 뉴욕주립대학에서 MBA를 마치고 미국 유명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 중이다. 짧게 보낸 두 번째 결혼과 맞닥뜨린 지옥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어 갈 때쯤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재혼이다. 54세가 됐을 때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다가 큰애 결혼시키고, 막내 군대 보내고 나니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아이들은 내 손에서 멀어져 가고, 밥 한 끼 함께할 사람이 없게 되더라고요. 자식도 소용 없다는 생각을 할 때쯤 친구들의 소개가 있었어요.” 차관까지 지낸 관료 출신에 무엇보다 성격이 잘 맞았다. 둘 다 따지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일은 순식간에 진행됐고, 그렇게 두 번째 인생은 순조로운 듯 보였다. 새 남편의 고향에 내려가 살겠다는 결심도 했고, 집도 마련했었다. 하지만 10년이 채 안 돼 남편을 식도암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남편을 두 번이나 떠나보내고 남겨진 여자의 마음이 편안할 리 없었다. “지옥 같았어요. 세상 사람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었어요. 계속해서 숨고만 싶었고, 실제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 숨어 있었죠. 건강도 순식간에 악화됐고요.” 그래서 미국 뉴욕에 있던 아들에게로 갔다. 한국에 있는 것만으로도 비난받는 기분이었다. 그때도 힘이 되어 준 것은 그림이었다.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많지만, 센트럴파크 근처에 작은 화랑들이 많아요. 그곳에 출근도장 찍듯 매일 가서 종일 그림만 보고 살았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는 아들이 함께 관광지에 갔다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카메라 뷰파인더 속에 비치는 엄마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인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죠.” 그 이후로 2년을 더 그렇게 살았다.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큰 소리도 못내고 그렇게. 고희(古稀)에 개인전 통해 인생 되돌아볼 터 집 안에만 머물다 인생의 활기를 찾은 계기는 두 권의 책이었다. 부산의 친구가 선물한 컬러링북과 며느리가 가져다준 흔한 잡지 한 권. 무채색의 컬러링북에 하나하나 색을 입혀가다 보니 그림은 소유하고,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스스로 색을 입히고,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지금 그림 인생의 원천이 된 갤러리 겸 커뮤니티인 ‘아트담’이다. “살면서 4B연필 한 번 잡아본 적 없었는데 그림을 어떻게 그릴 수 있겠어요. 그냥 무작정 이곳으로 찾아와 졸랐어요. 유치원 다니는 아이 한 명 가르친다는 기분으로 가르쳐 달라고. 그 이후로 2년 가까이 한 번도 결석 없이 나왔어요.” 그렇게 세 번째로 그녀의 인생에 다시 기둥이 된 그림은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림을 직접 그려서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관계들과 자신감, 재발견한 삶의 목적 때문이었다. “지금은 전에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여요. 이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꽃잎이 어떻게 나고 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유심히 관찰할 수 있게 됐죠.” 무작정 피하려는 삶,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던 삶에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물론 건강도 되찾았다. 이제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몇 잔 마실 수 있게 됐다. “이렇게 개인사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죠. 회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스케치하러 이곳저곳 다니고, 마음을 나눈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이제는 손주들한테도 피자 할머니가 아닌 화가 할머니로 설 수 있어 더 좋고. 앞으론 손주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하효순씨의 또 다른 도전은 이제 개인전이다. 개인전은 아마추어에서 대중에게 평가를 받는 위치로 올라선다는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선 단순한 전시 이상의 무엇이다. 그동안 아트담 회원들과 함께했던 두 번의 그룹전과는 성격이 다르다. “제 나이 일흔 살을 기념해 그간에 그린 작품들이 모여지면 전시회를 하는 것이 꿈이에요. 열심히 노력해서 그리다 보면 그 결과물들을 남에게 보여줄 마음이 생기겠죠. 나이가 많더라도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증명해내고 싶어요.” 그 이야기와 함께 그녀가 내보인 자신의 작품의 제목은 ‘내 인생의 오후’였다. 그림 속에서는 곧 황혼을 앞둔 슬픔보다는 행복한 오후의 한순간이 느껴졌다. 이미 전해들은 인생의 굴곡이나 어려움이느껴지지 않는 그런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늙는 건 생각보다 그리 나쁜 건 아니에요. 불필요하게 의식하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으면 해요. 밝은 면만 보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인생은 아름다워져 있을 겁니다.”
- 2016-05-19 10:21
-
- [배국남의 뉴컬처 키워드]어른들에게 감성과 행복을…
- 1. 30~50대 중·장년층 아버지들이 자녀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드론(무인 항공기) 제품 코너에선 눈을 떼지 못하고 제품을 보며 좋아 어쩔 줄 몰라 한다. 사람보다 더 큰 피규어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촬영한다. 조립한 레고를 전시하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드론을 좋아하고 피규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레고를 조립하는 사람은 어린 자녀가 아니라 바로 30~50대 중·장년들이다. 1월 7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6 키덜트&하비 엑스포’의 풍경이다. 2. 이마트는 지난해 6월 킨텍스 이마트타운에 피규어 전문관을 비롯해 드론과 각종 첨단 장난감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드론존, 스마트 토이존을 마련했다. 어린이 손님보다 20~50대 어른 손님이 압도적으로 많다. 롯데마트가 지난해 9월 서울 구로점과 잠실점, 그리고 판교점 등 세 곳의 키덜트 전문점을 열었는데 각종 피규어 제품과 드론, 무선 조종 자동차를 구매하는 손님의 90퍼센트가 20대 이상 성인들이다. 3. 지난해 7월 종이접기 전문가 김영만이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이후 서점가에는 때 아닌 종이접기 책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을 일으킨 주역은 유치원생이나 초등생이 아닌 30~40대였다. 그뿐만 아니라 20~30대 여성을 중심으로 ‘색칠놀이’컬러링북 신드롬이 일었다. 정교한 그림을 따라 원하는 색을 칠하는 컬러링북은 2015년 한 해 전년보다 교보문고, 영풍문고 등 대형서점마다 2~4배 판매가 증가했다. 이 세 개의 풍경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키덜트 문화(Kidult Culture)다. 키덜트 문화의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덩달아 키덜트 문화 상품 시장도 급성장하고 있다. “키덜트 시장은 2015년 현재 5000억~7000억원 규모로 매년 20퍼센트 이상 성장해 2~3년 내 1조 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는 한슬기 NH투자증권 연구원의 설명은 키덜트 문화 열기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키덜트 문화란 무엇일까. 키덜트(Kidult)는 어린이를 뜻하는 키드(Kid)와 어른을 의미하는 어덜트(Adult)의 합성어다. 키덜트는 성인처럼 꾸미는 10대, 혹은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이의 감성을 추구하거나 어린 시절 누렸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 어른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서는 후자의 의미로 키덜트가 주로 사용된다. 키덜트 문화는 바로 성인들이 귀엽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처럼 유치한 것을 거부감 없이 즐기는 문화를 통칭한다. 한때 키덜트 문화는 철없고 독립성과 책임감이 결여된 정신적 퇴행을 하는 일부 어른들이 즐기는 미성숙한 문화라는 부정적인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소비층이 급증하면서 긍정적이고 다양한 모습의 키덜트 문화가 등장하고 주류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키덜트 문화는 광범하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출판, 만화, 게임, 캐릭터 용품, 완구,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등 키덜트 문화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고 다양하다. 키덜트 문화의 막을 연 것은 1980~1990년대 미국 월트 디즈니를 비롯한 할리우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1990년대 어린이 관객만으로 수익을 맞출 수 없었던 월트 디즈니가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등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한편 등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나 판타지물을 제작함으로써 키덜트 문화의 촉발제 역할을 했다. 인기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의 캐릭터물과 피규어가 어린이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인기를 끌면서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용품 수집 마니아인 탤런트 심형탁은 “집에 도라에몽 캐릭터 인형부터 침대, 베개까지 다 있다. 한 때는 도라에몽 피규어 등 관련 상품을 사는 데 1000만원이 든 적이 있다. 사람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이해를 못한다. 그런데 나는 도라에몽 관련 물품을 구입하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 도라에몽 상품은 나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준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캐릭터 산업백서’에 따르면 2014년 한 해 키덜트 캐릭터 시장규모는 500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성인 동호회는 수천 개에 달하는 것에서 키덜트 문화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다.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동호회를 동시에 하는 조흥호씨(53)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무인 조종 자동차를 갖고 놀면 철이 없다고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이 크게 줄었다. 무인 조종 자동차나 드론 동호회는 한 달에 10여 개 넘게 생겨나고 있다.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대회가 속속 개최되고 있다”고 말했다. 송지혜씨의 컬러링북 과 시리즈가 2015년 한 해 10만 부가 팔리는 등 출판에서도 키덜트 문화의 부상은 확연하다. 컬러링북을 비롯한 키덜트 문화와 관련된 만화, 종이접기 책, 캘리그래피북 등 키덜트 관련 도서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송지혜 씨는 “제 컬러링북이 어린이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머니나 아버지들이 무척 좋아해서 깜짝 놀랐어요. 알고 보니 최근 일고 있는 컬러링북 신드롬은 20대 이상 성인들이 주도한 거였어요”라고 설명한다. 키덜트 문화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완구점 역시 요즘 손님의 20~30퍼센트는 성인들이라는 것이 상인들의 설명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완구점을 운영하는 강창호씨(40)는 “요즘에는 바비 인형이나 건담 시리즈 캐릭터를 구입하는 20~50대 성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고 전했다. 키덜트 문화를 더욱 확산시키는 곳은 바로 백화점, 할인마트, 편의점 등 유통업계와 화장품 및 의류 업계다. 현대백화점은 판교점에 레플리카 등 키덜트 매장을 운영하고 롯데마트는 구로점을 비롯한 세 곳에 키덜트 전문관을 마련해 ‘어벤져스 마리아 힐 피규어 한정판’ 등 80여 종류의 키덜트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밖에 이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할인 매장과 서울 용산 아이파크백화점과 신세계 백화점 등 적지 않은 백화점들도 키덜트를 겨냥한 상품코너를 따로 마련해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유니클로를 비롯한 의류업체와 LG생활건강 등 화장품 업체들도 키덜트를 겨냥해 캐릭터 업체와 제휴한 상품을 속속 내놓고 있다. 키덜트 문화가 이처럼 열기를 더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생존경쟁이 치열해지고 구조조정이 횡행하는 팍팍한 현실에서 유년 때 편하게 즐겼던 문화나 상품을 소비하면서 스트레스를 날리려는 성인들이 많아진 것을 키덜트 문화의 주원인으로 꼽는다. 오리콤 브랜드 전략연구소는 보고서 ‘키덜트 문화’를 통해 “성인들이 동심이 깃든 상품을 소비하면서 각박한 생활에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한편 정서를 안정시키고 재미와 유쾌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키덜트 문화가 부상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영포티(Young Forty)’, ‘신중년(Young Old)’, ‘100세 시대’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물리적 나이에 비해 정신적 성장이 느려진 것도 키덜트 문화의 부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물론 키덜트 문화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일부 전문가들은 키덜트 문화는 정신적 퇴행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문화이고 책임감 없는 철없는 어른들을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도 이제 키덜트 문화는 성인들에게 다양한 감성과 경험을 제공하며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문화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키덜트 문화는 유통, 캐릭터산업, 의류, 화장품 등 산업 전반에 보다 많은 수요를 창출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 2016-02-05 1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