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세대가 가장 관심을 갖는 아이템인 피규어. 그런데 시니어 대부분은 잘 모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 선입견을 비웃듯, 기자가 3000여 점의 피규어가 전시된 마니아들의 성지 피규어뮤지엄W를 방문하게 된 것은 한 시니어 독자의 제보 덕분이었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감식안이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젊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피규어뮤지엄W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피규어와 그리고 피규어에 친숙한 아이들과 함께하며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김동원(金東元·54) 피규어뮤지엄W 관장을 만나 피규어 가치에 대해 그리고 캐릭터 문화에 대한 식견을 물어봤다.
몸은 중년, 마음은 초등학생. 어릴 적 좋아했던 캐릭터 피규어를 모으며 동심에 빠져 사는 오타쿠적 기질의 아재들이 늘고 있다. 구매한 피규어를 개봉하지 않고 박스째로 나란히 차곡차곡 쌓아둘 정도로 피규어를 모으고 즐기는 이들은 자신이 자신에게 선물을 하듯 살뜰히 챙긴다.
“평소 그다지 대화가 없던 부자가 함께 와 캐릭터를 매개로 ‘말문’이 터지는 경우도 있고, 손주 손잡고 온 시니어가 오히려 키덜트족이 돼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피규어를 좀 안다는 분들이 이곳 뮤지엄에 와서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며 저마다 탄성을 터뜨리죠.”
피규어 소장의 즐거움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라고 여기는 김동원 피규어뮤지엄W 관장은 지난 10월 마니아들의 감성을 채워주는 일에 합류했다.
그에게 피규어 마니아들 사이에 부의 상징인 레어 아이템, 즉 희소성 있는 피규어가 있냐고 짓궂게 물었다.
“어지간한 피규어는 다 구경해봤는데 여기 뮤지엄에 와서는 제가 아는 피규어는 빙산의 일각이었어요. 사실 피규어 가격은 크기에 따라, 희소성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건담 시리즈를 진열했더니 사무실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지더라고요. 간혹 사람들이 놀러 와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해요. 장난감 하나만으로 사무실 공간이 위트 있고 재미있게 변한 것 같아 좋아요.”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피규어뮤지엄W는 피규어와 토이를 통한 테마파크를 지향하며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의 공간이다. 전시공간은 6층의 총 6개 테마로 구분되어 있으며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놀이공간, 카페가 있는 그랜드홀, 직접 피규어를 구입할 수 있는 마니아 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장품은 프라모델, 히어로 액션 피규어, 자동차 다이캐스트 등 3000여 점에 달하는 막대한 숫자를 자랑한다. 영화 촬영에 실제 쓰인 자동차 모형, 에 출연한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실제로 입었던 가죽 의상, 리샤오룽 타계 40주년 기념 특별 피규어 등 진귀한 수집품으로 가득하다. ‘감정가 2억원을 호가하는 건담 모형’, ‘순금으로 만들어진 나이트 오브 골드’까지 눈이 호사를 누리는 동안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추억, 누군가에게는 보물창고, 누군가에는 꿈과 희망이 되는 곳이다.
피규어뮤지엄W는 예상치 못했던 그 시작처럼 기존 뮤지엄과는 다른 발상과 사고로 사업을 전개할 계획을 갖고 있다. 대중문화적 취향을 가진 영화감독 김동원 감독을 관장으로 기용한 것도 그러한 계획의 일환이다. 김동원 관장은 , , 등의 영화들을 감독한 바 있다.
피규어를 처음 접했을 때 받은 충격
“주변에서는 의아스럽다는 반응이죠. 그런데 사실 저는 방향을 튼 게 아니라 감독으로서 또 하나의 파트너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규어의 상당수가 미국의 마블, DC코믹스에서 나오는 히어로를 소재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런 피규어들은 전 세계의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감독으로서 김동원 관장이 피규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 영화계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
“현재 한국 영화는 수익을 관객으로만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캐릭터 산업을 병행해 나 처럼 관객 동원에 캐릭터 판매가 플러스돼서 거기서 창출할 수 있는 수익이 있다면 영화 산업의 규모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시리즈는 영화 관객을 통한 수익보다 몇백 배 더 많은 저작권 수익을 가져가고 있고 거기서 또 다른 고부가가치들이 창출되는 상황입니다.”
김 관장은 처음 피규어를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 굉장히 부러운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도 영화 속 캐릭터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과 기꺼이 돈을 지불하면서 그 피규어를 보며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언맨이 피규어 시리즈로 나오고, 각 피규어들이 노멀 버전, 파이팅 버전 등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도 이런 걸 갖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 은 193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캐스팅이 바뀌어가면서 영원히 존재하잖아요? 이제 우리도 그런 한국적 캐릭터가 있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감독과 관장 그리고 나
김 관장은 피규어뮤지엄W이 문화예술계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놀이와 문화를 함께 담은 박물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피규어뮤지엄W는 피규어를 테마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도록 하여 즐거움을 줌으로써 박물관의 개념을 확대시켰다고 봅니다. 문화예술을 종합적으로 보 여주는 박물관인 만큼 전시, 교육뿐만 아니라 캐릭터 발굴과 개발을 넘어 그래픽 노블, 영화 등 콘텐츠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를 이끌고 다양한 시도를 할 것입니다.”
그는 감독으로서의 역할과 뮤지엄 관장으로서의 역할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결국 피규어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재현입니다. 기억 속에 있는 걸 다시 만들고 추억 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작업이죠. 저로선 영화감독의 길을 가면서 피규어라는 좋은 재료를 영화에 접목시켜 하나의 콘텐츠로 발전시킬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피규어가 결합된 한국의 마블 스튜디오를 꿈꾼다
영화와 캐릭터 산업을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 확장시키고 싶다는 그의 생각은 한류 관련 콘텐츠 사업의 차원으로까지 넘나들고 있다.
“일부에서는 피규어를 단순히 아이들 장난감, 키덜트만으로 생각하는데 그보다 더 큰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와 예능과 애니메이션을 아울러서 기존의 한류 문화처럼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내는 거죠. 이제는 예능도 처럼 미국에 수출하게 됐습니다.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봤던 , , 등도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이미 피규어뮤지엄W에서 과거 심형래 주연의 인기 시리즈물이었던 영화 의 판권을 구매했다는 소식도 있다. 그런데 과거 우리가 가졌던 캐릭터를 현대에 더 발전시켜 만들자는 생각은 왜 아직까지 구체화되지 못했던 걸까?
“한국적 캐릭터가 미약해요. 미국은 오래전부터 슈퍼맨, 배트맨 등의 캐릭터를 만들었고 TV가 활성화되자 TV드라마 시리즈로 만화 원작인 히어로 물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이 성장해서 이제는 헐리우드에서 정교하게 만든 히어로 물을 만들고 시리즈로 만든 거죠. 그러면서 히어로 물이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원작조차도 남아 있지 않고 판권을 가진 분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그런 것들을 찾아 재조명하면서 디테일하게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시도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걸 한번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매우 어려운 시도가 될 것입니다.”
캐릭터 산업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싶다
김 관장이 토로하는 우리나라 캐릭터 제작 현실의 후진성은 놀이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문화적 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캐릭터를 소중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취급했다면 그토록 많은 것들이 모호하게 방치되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한국적 캐릭터를 만들어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기 위한 문화적 기반이 만들어지려면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 현장에 있는 김 관장의 의견을 들어봤다.
“흔히들 하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문화적인 계기가 있어야 한다’, ‘대기업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들은 기본적인 얘기들이에요. 저희들의 구상이 잘 맞아떨어져서 하나의 시도가 성공을 거두면, 위의 얘기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책임감을 갖고 돌파하면 된다는 거죠. 피규어뮤지엄W와도 그런 부분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겁니다.”
시니어 중에서도 동심이 그립거나 상상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피규어뮤지엄W는 그런 사람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시니어들이 손자와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시니어들은 피규어뮤지엄W에서 과거 추억의 캐릭터를, 아이들은 자신이 어른이 됐을 때의 모습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디자인해보고 컬러링해서 완성해보는 ‘피규어아티스트’ 체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프라모델, 석고, 클레이 등 다양한 재료로 피규어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만화가, 캐릭터디자이너, 큐레이터, 피규어아티스트 등 다양한 직업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활발히 운영 중입니다.”
나이 들면서 깨달은 것들
히어로 물을 제작하고 싶다는 그에게 인생에서 언제가 가장 즐거웠는지, 젊게 늙어가는 비법은 뭐냐고 물어봤다.
“저는 그냥 막 놀 때가 행복했어요(웃음). 작품을 만드는 건 일이죠. 고등학교 때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얘들하고 사고나 치고 다니고… 굳이 재밌었던 시절을 말하라면 그때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젊게 늙어가는 비법이요? 비법은 전혀 없고 캐릭터 좋아하고 철없이 살다 보니(웃음) 어렵게 생각 안 해요. 긍정적으로 사는 게 덜 노화되는 비결인 듯해요.”
그는 향후 계획을 중국이나 홍콩 등에 진출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을 구상하는 데 두고 있다. 당장은 피규어뮤지엄W를 태국에 개관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사실 좀 더 진행이 되어야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해요. 이곳과 같은 규모로 생각하고 있는데 파트너가 중요하겠죠. 그 과정 중에 캐릭터 산업으로서 하는 시도들이 영글어져야겠고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충무로 감독이라는 명함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소박하다는 느낌을 연거푸 받았다. 그는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영화에 제 인생까지 다 담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에 따라 작품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져요. 30대, 40대 때는 선배님들 인터뷰를 보면서 멋있는 말만 하시네 했어요. 그런데 제가 나이가 들어보니 그때 그분들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것 같더라고요. 그게 나이가 드는 것이겠죠. 예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잔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제가 그런 말을 하고 있고,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도 보게 되는 거죠.”
시간은 철없는 사람도 어른으로 만들어준다.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지 물어봤다.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 아닌가요? 누가 날 기억해주냐가 중요하겠죠. 매순간 열심히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요.”
김동원 관장은 피규어뮤지엄W가 얼마 전 판권을 구입한 영화 버전을 기획 중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피규어뮤지엄W의 전시를 볼 수 있도록 전시장 오픈도 계획 중이다. 현재 태국 파타야에 ‘피규어뮤지엄W 파타야점’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 청담동(84-9번지)에 위치한 피규어뮤지엄W는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며,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3500원, 어린이 1만2000원이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감성적인 카페와 맛집, 편집숍 등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동네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이곳을 ‘망리단길’(이태원의 경리단길 초창기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부른다. 그 소문만 듣고 찾아가 인근 홍대거리나 가로수길의 비주얼을 기대했다면 조금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망원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망원시장’의 아우라가 무척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걷다 보면 느낄 수 있다. 그 이중적인 분위기가 바로 망원동의 매력이라는 것을.
‘망리단길’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말하기는 모호하다. 그러나 어디서 시작해도 좋고, 어떻게 가도 망원시장을 만나게 된다. 특별히 어느 가게를 가려고 정한 것이 아니라면 망원역 2번 출구로 나와 망원시장을 중심으로 지그재그로 거닐어볼 것을 추천한다. 주택가와 시장 사이 골목마다 보석 같은 공간이 숨어 있다.
사실 망원동 마니아들은 자신들의 단골집이 알려지는 것을 꺼린다. 수수하고 한적했던 몇몇 가게가 입소문을 타는 바람에 관광지처럼 변해 버리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상인들을 만나면 이곳이 ‘망리단길’로 유명해지는 것이 싫다고 이야기했다. 대부분 욕심 없이 장사하고 편안하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가게를 낸 것인데, 뜨내기손님들이 몰려와 일상의 여유도 사라지고 단골들도 떠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이들이다. 언론 매체에 소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거나, 그 가게에 두세 번 방문해 충분히 어떤 곳이라는 것을 느껴야지만 취재를 허락한다는 곳도 있었다. 잠시 카메라를 끄고 만난 한 상인은 “처음 이곳에서 느꼈던 매력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며, “월세도 많이 올라 조만간 다른 지역으로 가게를 옮길 계획”이라고 했다.
망원동 사람들의 바람처럼 그곳만의 소소하고 느릿한 매력을 해치지 않는 좋은 방법으로 ‘혼자, 또는 둘이서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혼자 와서 밥 먹고, 차 마시고, 편집숍을 둘러보는 이들이 꽤 많은 편이다. 그곳이 주는 즐거움은 누구와 대화를 하거나 함께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커피가게 동경 망원동 410-1 지하
드립커피를 주문하면 취향을 물어 그에 맞게 커피를 내려준다.
황인호의 원당수제고로케 망원동 486-39
망원시장 입구에 있는 고로케 맛집. 1000~1500원 선.
카페부부 망원동 376-15
노부부가 30년 동안 살던 주택을 젊은 디자이너 부부가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 커피, 디저트, 간단한 식사 주문이 가능하다.
디자이너 편집샵 RHOO 망원동 375-1
감각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전시 및 판매하는 곳. 가게 한쪽에 있는 테이블 공간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다.
장난감가게 마마미투 망원동 404-38
키덜트를 겨냥한 인형, 피규어, 캐릭터 문구 용품 등을 판매한다.인터넷 쇼핑몰(www.mamametoo.com)도 함께 운영.
만일 책방 망원동 399-46
대형 서점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아늑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동네 책방이다. 가게는 작지만 커다란 테이블이 인상적이다.
에그머랭&쇼룸 더 팩토리 망원동 376-14
핸드메이드 모자, 가방, 신발, 매니큐어 등을 구경하면서 음료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소쿠리 망원1동 414-16
‘작고 느린 상점’이라는 콘셉트로 운영하는 곳으로, ‘소쿠리’라는 이름처럼 투박하고 정겨운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다. 옛날 시계나 접시, 물병 등 향수를 자극하는 소품들이 눈에 띈다.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 집에 얹혀살면서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현상이 미국에서도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캥거루족, 키덜트(Kidult), 어덜테슨트(Adultescent) 같은 신조어에도 익숙해졌다. 제 앞가림을 못하는 자녀 때문에 베이비붐 세대의 속앓이가 심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애지중지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이런 현상에 대한 학계의 연구와 언론 보도가 봇물을 이루고 전문가들의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AARP(미국은퇴자협회)가 5월호에 게재한 ‘끔찍한 22세들(The Terrible 22s)’이란 제목의 특집 내용을 소개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시각 :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요즘 20~30대인 밀레니얼 세대는 애지중지 키웠더니 제 구실을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그건 한쪽에 치우친 말이다. 정말 문제는 부모인 베이비붐 세대다. 원인을 제공했고 날개까지 달아줬다. 줄리 리스코트-하임스 스탠포드대학 교수는 그의 저서 에서 “많은 부모가 자녀를 지나치게 보호하고 간섭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힘든 경험을 해보지 않은 밀레니얼 세대는 온실의 난처럼 현실 적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20대일 때는 해외여행이나 연수를 가도 부모가 일정을 세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해외에서 엽서나 편지 한 장 보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당시 부모는 자녀가 20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뒀다.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첫 봉급을 받을 때까지 생필품과 방값을 지원해 주면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여겼다.
이런 경험을 한 베이비붐 세대가 자신들의 자녀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딴판이다. 성인이 된 자녀를 여전히 품안에 끼고 있다. 자녀와 함께 지내면서 내밀한 생활까지 공유하려는 욕심 때문일 수도 있다. 소셜미디어와 같은 현대기술 덕분에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베이비부머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을 이용해 자녀의 일상생활과 고민을 낱낱이 파악하고 간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자녀의 연예나 결혼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 청년과 몇 년째 교제를 하고 있는 딸에게 시간 낭비니 단교하라고 종용하는가 하면 중매 사이트에 자녀의 세세한 이력과 취향까지 올려 배필을 물색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자녀의 직장 생활에까지 발 벗고 나서는 부모도 적지 않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녀의 취업인터뷰 절차를 알아보는 것은 기본이고 연봉 계약과 승진 문제로 직장 상사와 직접 상담을 하고, 자녀의 업무 성과까지 평가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자녀가 어린이일 때보다 부모의 역할이 더 커진 셈이다.
미국 부모의 과보호 현상은 지난 1979년, 당시 여섯 살이던 에단 파츠가 학교버스를 타러 가다가 행방불명되면서 미국 전체가 공포에 빠진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 1980년대 초 미국 어린이의 학력이 세계 수준에 못 미쳐 국가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내용의 대통령 보고서가 발간되면서 ‘헬리콥터 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6명 중 1명이 불안증세로 진단을 받았거나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정신력이 약해졌다.
부모가 병원 예약에서부터 선물 구입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일을 대신해주니 자녀는 성인이 되어도 사소한 일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부모는 아들딸이 도움 없이도 잘 지내게 되면 자신은 쓸모없는 늙은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한 분위기다.
네브래스카의 임상심리학자 제인 워렌은 “좋은 가정에서 곱게 자란 자녀들의 자립심이 더 낮은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니 독립할 이유가 없어진다. 부모들도 고분고분 잘 따라주는 자녀와 함께 살고 싶으니 독립이 반가울 리 없다. 맨해튼의 심리치료사 제리 애게이트는 “자녀가 독립하면 부모는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우선 들지만 자녀로부터 소외된 느낌도 들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오리건주립대학 리처드 세터스턴 교수와 작가인 바바라 레이는 공동 저서 에서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조언과 자문을 받을 뿐 아니라 동료애와 위안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이 덕분에 세대 차이가 많이 좁혀지고 있다. 1970년대나 1980년대와는 달리 자녀의 생각이 부모와 닮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자녀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스스로 자유로운 생활을 접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면을 감안할 때 이제는 자녀들이 21세기에 직면할 문제를 스스로 해결토록 하는 공동 목표를 세우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음 세대가 번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자녀인 밀레니얼 세대의 시각 : 부모님은 몰라요
베이비붐 세대는 헌신적인 노력에도 자녀들이 무기력하고 생활을 꾸려갈 준비도 안 됐다고 낙담하고 있는 것 같다. 공포와 수치심이 뒤섞인 숨 막힐듯한 태도로 자녀를 대하는 느낌마저 준다. 밀레니얼 세대를 평가절하하는 근거없는 이야기도 많이 나돈다.
입사 면접에까지 부모와 함께 간다는 소문이 단적인 예다. 이 이야기는 2013년 9월 월스트리트저널에 ‘면접장까지 부모와 함께 가야 하나?’라는 제목의 기사로 소개됐다. 인력관리회사인 아데코가 대학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근거로 한 이 기사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응답자의 8%가 입사 면접에 부모와 함께 갔고 3%는 자리를 같이했다는 내용이다. 사실을 제대로 파악해 보면 황당해진다. 차가 없는 자녀를 면접장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면접장 주위에 앉아 기다린 부모의 비율을 집계한 통계를 왜곡해 큰 제목으로 기사화한 것이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미국에서는 부모가 어디든 차로 데려다 주는 것은 자연스런 일상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경제력이 떨어진다는 분석도 왜곡된 점이 없지 않다. 2013년, 25~34세인 남성의 수입은 1980년 그 또래의 남성에 비해 물가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18.5%나 감소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기간 젊은 여성의 수입은 40.5%나 증가해 전체적으로 보면 그 전 세대와 수입 차이가 별로 없다.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의 하위 60%는 부모세대 때보다 재정상태가 훨씬 열악하다. 1989년, 18~34세의 젊은 성인들은 평균 3300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했으나 2013년의 그 또래는 7700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 학자금 융자가 빚 증가의 주요인이다.
그렇다면 밀레니얼 세대가 과거 부모세대에 비해 더 많이 파산했냐 하면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대학을 졸업한 경우 베이비붐 세대보다 형편이 더 낫고 고등학교 이하 학력의 경우는 부모세대 때보다 수입이 훨씬 떨어지는 상반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이런 자녀를 위해 옹호자, 친구, 상담사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녀와 좀 더 가까워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자녀의 생각은 좀 다르다. 부모가 자신만의 소셜미디어 영역에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하고 있다. 부모 집에 같이 사는 것도 밀레니얼 세대만의 현상은 아니다. 1911~1924년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세대 때는 대공항의 여파로 직업을 구하지 못해 부모와 함께 지낸 캥거루족이 더 많았다. 고용여건이 악화되고 임대료 부담이 가중되면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요즘 직장 상사들은 “밀레니얼 세대들이 문자를 주고받느라 근무를 태만히 하지만 일일이 나무랄 수 없어 포기하고 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무 태만은 밀레니얼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징계를 하거나 해고를 하면 될 일을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밀레니얼 세대는 아직 젊다. 앞으로 수십 년을 살아가면서 미흡한 생활능력을 키우고 재산도 모으며 자녀도 낳아 기를 것이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면 밀레니얼 세대도 다른 세대와 별 차이가 없다. 더 예민한 부모가 있을 뿐이다.
1. 30~50대 중·장년층 아버지들이 자녀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드론(무인 항공기) 제품 코너에선 눈을 떼지 못하고 제품을 보며 좋아 어쩔 줄 몰라 한다. 사람보다 더 큰 피규어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촬영한다. 조립한 레고를 전시하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드론을 좋아하고 피규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레고를 조립하는 사람은 어린 자녀가 아니라 바로 30~50대 중·장년들이다. 1월 7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6 키덜트&하비 엑스포’의 풍경이다.
2. 이마트는 지난해 6월 킨텍스 이마트타운에 피규어 전문관을 비롯해 드론과 각종 첨단 장난감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드론존, 스마트 토이존을 마련했다. 어린이 손님보다 20~50대 어른 손님이 압도적으로 많다. 롯데마트가 지난해 9월 서울 구로점과 잠실점, 그리고 판교점 등 세 곳의 키덜트 전문점을 열었는데 각종 피규어 제품과 드론, 무선 조종 자동차를 구매하는 손님의 90퍼센트가 20대 이상 성인들이다.
3. 지난해 7월 종이접기 전문가 김영만이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이후 서점가에는 때 아닌 종이접기 책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을 일으킨 주역은 유치원생이나 초등생이 아닌 30~40대였다. 그뿐만 아니라 20~30대 여성을 중심으로 ‘색칠놀이’컬러링북 신드롬이 일었다. 정교한 그림을 따라 원하는 색을 칠하는 컬러링북은 2015년 한 해 전년보다 교보문고, 영풍문고 등 대형서점마다 2~4배 판매가 증가했다.
이 세 개의 풍경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키덜트 문화(Kidult Culture)다. 키덜트 문화의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덩달아 키덜트 문화 상품 시장도 급성장하고 있다.
“키덜트 시장은 2015년 현재 5000억~7000억원 규모로 매년 20퍼센트 이상 성장해 2~3년 내 1조 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는 한슬기 NH투자증권 연구원의 설명은 키덜트 문화 열기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키덜트 문화란 무엇일까. 키덜트(Kidult)는 어린이를 뜻하는 키드(Kid)와 어른을 의미하는 어덜트(Adult)의 합성어다. 키덜트는 성인처럼 꾸미는 10대, 혹은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이의 감성을 추구하거나 어린 시절 누렸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 어른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서는 후자의 의미로 키덜트가 주로 사용된다.
키덜트 문화는 바로 성인들이 귀엽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처럼 유치한 것을 거부감 없이 즐기는 문화를 통칭한다. 한때 키덜트 문화는 철없고 독립성과 책임감이 결여된 정신적 퇴행을 하는 일부 어른들이 즐기는 미성숙한 문화라는 부정적인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소비층이 급증하면서 긍정적이고 다양한 모습의 키덜트 문화가 등장하고 주류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키덜트 문화는 광범하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출판, 만화, 게임, 캐릭터 용품, 완구,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등 키덜트 문화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고 다양하다. 키덜트 문화의 막을 연 것은 1980~1990년대 미국 월트 디즈니를 비롯한 할리우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1990년대 어린이 관객만으로 수익을 맞출 수 없었던 월트 디즈니가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등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한편 등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나 판타지물을 제작함으로써 키덜트 문화의 촉발제 역할을 했다. 인기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의 캐릭터물과 피규어가 어린이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인기를 끌면서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용품 수집 마니아인 탤런트 심형탁은 “집에 도라에몽 캐릭터 인형부터 침대, 베개까지 다 있다. 한 때는 도라에몽 피규어 등 관련 상품을 사는 데 1000만원이 든 적이 있다. 사람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이해를 못한다. 그런데 나는 도라에몽 관련 물품을 구입하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 도라에몽 상품은 나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준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캐릭터 산업백서’에 따르면 2014년 한 해 키덜트 캐릭터 시장규모는 500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성인 동호회는 수천 개에 달하는 것에서 키덜트 문화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다.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동호회를 동시에 하는 조흥호씨(53)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무인 조종 자동차를 갖고 놀면 철이 없다고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이 크게 줄었다. 무인 조종 자동차나 드론 동호회는 한 달에 10여 개 넘게 생겨나고 있다.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대회가 속속 개최되고 있다”고 말했다.
송지혜씨의 컬러링북 과 시리즈가 2015년 한 해 10만 부가 팔리는 등 출판에서도 키덜트 문화의 부상은 확연하다. 컬러링북을 비롯한 키덜트 문화와 관련된 만화, 종이접기 책, 캘리그래피북 등 키덜트 관련 도서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송지혜 씨는 “제 컬러링북이 어린이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머니나 아버지들이 무척 좋아해서 깜짝 놀랐어요. 알고 보니 최근 일고 있는 컬러링북 신드롬은 20대 이상 성인들이 주도한 거였어요”라고 설명한다.
키덜트 문화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완구점 역시 요즘 손님의 20~30퍼센트는 성인들이라는 것이 상인들의 설명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완구점을 운영하는 강창호씨(40)는 “요즘에는 바비 인형이나 건담 시리즈 캐릭터를 구입하는 20~50대 성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고 전했다.
키덜트 문화를 더욱 확산시키는 곳은 바로 백화점, 할인마트, 편의점 등 유통업계와 화장품 및 의류 업계다. 현대백화점은 판교점에 레플리카 등 키덜트 매장을 운영하고 롯데마트는 구로점을 비롯한 세 곳에 키덜트 전문관을 마련해 ‘어벤져스 마리아 힐 피규어 한정판’ 등 80여 종류의 키덜트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밖에 이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할인 매장과 서울 용산 아이파크백화점과 신세계 백화점 등 적지 않은 백화점들도 키덜트를 겨냥한 상품코너를 따로 마련해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유니클로를 비롯한 의류업체와 LG생활건강 등 화장품 업체들도 키덜트를 겨냥해 캐릭터 업체와 제휴한 상품을 속속 내놓고 있다.
키덜트 문화가 이처럼 열기를 더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생존경쟁이 치열해지고 구조조정이 횡행하는 팍팍한 현실에서 유년 때 편하게 즐겼던 문화나 상품을 소비하면서 스트레스를 날리려는 성인들이 많아진 것을 키덜트 문화의 주원인으로 꼽는다. 오리콤 브랜드 전략연구소는 보고서 ‘키덜트 문화’를 통해 “성인들이 동심이 깃든 상품을 소비하면서 각박한 생활에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한편 정서를 안정시키고 재미와 유쾌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키덜트 문화가 부상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영포티(Young Forty)’, ‘신중년(Young Old)’, ‘100세 시대’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물리적 나이에 비해 정신적 성장이 느려진 것도 키덜트 문화의 부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물론 키덜트 문화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일부 전문가들은 키덜트 문화는 정신적 퇴행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문화이고 책임감 없는 철없는 어른들을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도 이제 키덜트 문화는 성인들에게 다양한 감성과 경험을 제공하며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문화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키덜트 문화는 유통, 캐릭터산업, 의류, 화장품 등 산업 전반에 보다 많은 수요를 창출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빠빠라빠빠 빠빠빠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라 태권브이’ 이제는 익숙한 이 멜로디. 1970년대 어린이들의 가슴에 승리의 브이를 그려 넣었다. 이제는 그 어린이들이 모두 성인이 돼 또 다른 어린이들의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태권브이를 찾는다. 당시에는 우상, 이제는 추억이 돼 버린 태권브이. 그 역사적인 만화 뒤에는 감독 김청기(金靑基·74)가 있었다.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까지 왕성하다. 그에게 욕심이 아닌 꿈 그리고 한국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내년이면 벌써 불혹이다. 사람이냐고? 그게… 사람은 아니고 키가 장장 56m에 달하는 로봇이다. 그러니까 올해 39세. 사람으로 따지면 아직 청춘 그 자체지만, 로봇들 사이에서는 원로 스타이자 대선배님인 ‘로보트 태권V’다.
지난 7월 24일은 태권브이의 39번째 생일이었다. 서울 피규어 뮤지엄W에서는 태권브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1층 전시장을 태권브이 캐릭터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점점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태권브이가 처음 나왔을 1970년대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태권브이의 피규어와 영화 필름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성인들(요즘은 ‘키덜트’라 부르는)도 보이고, 아들의 손을 잡고 온 40대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모두 1970년대, 그 시절엔 태권브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어린이들이었으리라. 이들은 한 사람을 기다리며 얼굴에 드러나는 기대감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화백이오’라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표현을 하는 듯 베레모를 쓴 노신사가 등장하자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다. 바로 ‘태권브이의 아버지’ 김청기 감독이다. 들뜬 것은 그들뿐만 아니었다. 김 감독도 들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기분이 너무 좋아요. 이렇게 제 작품을 기억해주고 아직까지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니 제가 다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 창작은 늙지 않는다
부천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김 감독은 색다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수묵화가 바로 그것. 그런데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수묵화 사이로 태권브이가 의연하게 솟아 있는 점이다. 고전과 현대의 조화. 일흔 넷의 나이에도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감각은 바로 꾸준한 창작 활동에 있었다.
“창작을 하는 것은 유일하게 제가 젊다고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에요. 창작과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더 좋은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창작이란 경험과 실패를 딛고 일어나야 멋있고 참신한 것이 나오니 말입니다. 요즘은 상식을 뛰어넘는 엉뚱함이 있어야 합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절대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만화 감독이라는 세계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다. 트렌드와 시대 흐름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TV와 드라마, 책 등을 꾸준히 보면서 ‘왜 인기가 많은지’ 또는 ‘어떤 매력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지’에 대한 분석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대중의 요구를 파악해 그에 맞는 창작을 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수묵화도 새로운 창작을 하는 재미있는 일 중 하나예요. 하지만 제 꿈은 따로 있죠. 어린이뿐만 아니라 남녀노소가 모두 즐길 수 있는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를 만드는 것이에요. 우리나라에서도 디즈니의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 태권브이도 벌써 불혹이야
“저는 태권브이를 기획할 때 이렇게까지 재평가를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재평가 받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항상 뿌듯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 만들 걸 그랬네요.”
1960년 만화가로 입문한 김 감독. 1976년 ‘로보트 태권브이’가 탄생하기 전까지 그는 TV 광고나 프로그램 타이틀 로고를 그리곤 했다. 그러나 그가 꿨던 꿈은 그것이 아니었다. 장편 만화를 그리는 것. 이나 같은 일본 만화가 당시 어린이들을 사로잡던 시절. 대한민국 만화감독 김청기는 위기감과 절박함을 느꼈다. 일본의 문화에 우리나라 문화가 잠식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 시절 김 감독이 기획했던 태권브이는 그처럼 대한민국 만화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그렇게 태어난 태권브이는 일본 만화에 빼앗겼던 대한민국 만화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초석이 됐다. 이렇게 감독의 혼과 작가정신이 담긴 태권브이에 대한 반응이 움트기 시작하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겨났다. 밤낮없이 태권브이 작업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피로가 몰려와 실수로 주인공 훈이의 얼굴을 약간 찌그러지게 그린 것이다. 작은 선의 변화도 실제 만화에서는 윤곽선이 크게 보이기 때문에 꽤나 큰 실수였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실수도 대중은 심오하게 해석했다.
“당시 피곤이 몰려와 실수를 한 것이었는데, 혹자는 ‘훈이의 얼굴이 찌그러진 것은 작가의 심오한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려고 하더라고요. 이제야 고백합니다만 그것은 단순한 실수였습니다. 하하.”
◇ 1970년대와 현재
김 감독은 1970년도를 돌아보면 어찌 만화를 그렸나 싶다. 요즘은 케이블TV를 통해서 수많은 만화영화를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TV조차 보급이 많이 안 됐던 시기 아닌가. 또, 그 당시 부모들의 인식은 ‘만화영화는 아이들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만화가는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었다. 김 감독은 그때 회의감 때문에 펜을 놓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40년이나 지난 지금. 그 어린이들이 한 아이의 부모님이 됐다. 김청기 만화를 향유했던 그들은 이제 아이들의 손을 잡고, 태권브이가 있는 곳을 향한다.
“그 당시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해요. 이렇다 할 문화 콘텐츠가 전무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그 어린이들이 커서 태권브이를 보는 것을 넘어 캐릭터까지 구매를 하고 있어요.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 멈추지 않는 도전, 그리고 로봇
김 감독은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첨단 기술을 사용해 완성도 높은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김 감독은 이런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인프라가 부족했던 1980년대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의 시초격인 를 제작한 경험이 있어 자신감도 넘친다. 아직 가제지만 제목도 정해놓았다. ‘RG로봇’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 거는 기대가 상당하다. , 등 성인들도 좋아하는 일본 만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요즘. 한국에서도 어린이에게만 국한된 영화가 아닌 성인도 좋아하는 만화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만화영화는 너무 어린이들에게 편중돼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타깃을 조금 더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년 여름 개봉을 목표로 ‘RG로봇’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나리오와 기획, 스토리보드 구성을 맡고 있죠.”
김 감독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욕심이 열정으로 보이는 것은 김 감독의 깊은 고민이 그 꿈에 비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