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운을 타고나 이룰 것 다 이뤘는데도 탁구 천재 현정화의 눈매는 아직도 살아 있고 견고한 에너지를 방출 중이다. 시사평론가 이봉규의 강한 스매싱(?)과 날카로운 서브를 넣어도 그녀의 핑퐁 토크는 명불허전이었다. 역시 레전드와의 만남이었다.
용인시에 있는 ‘현정화 탁구교실’에 들어서서 그녀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분명 얼굴은 현정화가 맞는데 마치 고등학교 탁구선수가 훈련을 준비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비쩍 마른 체구에 얼굴은 조막만 하고 짧은 머리가 영락없는 고교생 이미지였다.
6~7명의 중·고생 탁구 유망주들이 그곳에서 현정화의 지도를 받기 위해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문밖에서 보니 나이 오십인 현정화도 그 학생들과 또래처럼 보였다.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해서 “왜 이리 말랐나?” 하고 물었더니 “나태한 걸 싫어한다. 많이 일하고 움직이다 보니까 살찔 시간이 없는 것 같다”고 대답하면서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안심시킨다.
몸매도 몸매이지만 눈매도 아직 배고픈 선수처럼 살아 있었다. 탁구선수로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갔고 지금도 부러울 것 없는 탁구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눈매가 살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한시도 흐트러짐 없이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이 같은 눈매와 자세가 그녀를 만리장성의 벽을 깨고 세계 최고로 만든 원동력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룰 거 다 이루고 나이도 오십쯤 되었으니 이젠 느슨해질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그녀는 견고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기러기 엄마, 독수리 엄마
현정화의 강직한 힘을 빼기 위해 한량 이봉규가 슬쩍 찔러봤다. “당시 현정화 선수는 실력이나 외모 등 지금의 김연아급 인기를 끌었는데 실감했나?” 그러자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재미없게 살았다. 탁구만 쳤다. 운동 잘하는 선수로 국민들이 인정해주는 줄만 알았다.” 현정화의 대답에 다시 꼬리를 물었다. “예쁜 얼굴에 인기 절정의 현정화에게 대시하는 남자가 없었나?” 급작스런 질문에 현정화는 몇 초간의 인터벌을 갖더니 “당시 선수촌에서 남자 상비군인 연습 파트너와 짜릿한 비밀 데이트를 했다”고 털어놨다.
다소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의 이봉규를 달래기라도 하듯 곧바로 “그 남자와 10년 후 결혼했다”고 마무리를 했다. 당시 다른 선수들은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에게 아마 다 눈치 채고도 남았을 텐데 현정화 본인만 그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그녀는 “그래봤자 탁구 잘 치면 그만이다”라며 당당한 표정이다.
중2 딸과 고2 아들을 둔 지금에 와서야 편하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당시 인기 절정의 현정화가 선수촌에서 몰래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007작전을 방불케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연애가 결실을 맺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지금 두 아이는 미국에서도 유명한 명문 학군인 캘리포니아 얼바인에서 아빠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른바 ‘기러기 엄마’인 셈이다.
현정화 본인은 ‘독수리 엄마’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갈수 있기 때문에 기러기가 아니라 독수리라는 해명이다.
남편은 미국에서 탁구 레슨을 하면서 두 아이를 돌보고 있다. 현정화 감독도 시합이 끝나면 무조건 미국으로 달려가 일주일 정도 머물며 가족들과 함께한다. 다행히 딸이 미국의 대입시험인 SAT 1600점 만점에 1500점이라는 높을 점수를 얻어 스탠포드대학교나 존스홉킨스 의대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 “엄마 아빠가 운동선수 출신인데 왜 운동을 안 시켰나?” 하고 따지듯 물었더니, “일부러 운동을 안 시켰다. 운동은 너무 힘들어서”라고 말꼬리를 힘없이 흩뿌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이들이 중간만 하고 살면서 행복하면 좋겠다”는 것. 즉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본인이 훈련에 힘들었고 온 국민의 기대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서 자식들에게는 그러한 고통을 물려주기 싫었을 것이다. 현정화는 “육체적 훈련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실토했다.
태극마크에 대한 소중함을 안다
운동 얘기가 나온 김에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남북 단일팀 이야기로 넘어갔다.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에 대해 현정화는 결과적으로 단일팀은 선수들에게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했다.
“온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에서 일생의 큰 경험과 기회가 됐을 것”이라고 단일팀을 경험해 본 선배로서 의견을 비췄다. 그런데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는 사정이 좀 달랐다고 설명했다. 참가규정 인원이 5명인데 당시에는 이번 여자 하키 단일팀과 달리 국가별 참가 선수 인원을 늘려주지 않았다. 만약에 단일팀을 꾸리지 않았다면 “다른 남한 선수들이 출전 기회를 얻었을 테고 설령 금메달은 따지 못했어도 은메달이나 동메달은 딸 수 있지 않았을까”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국가가 있어야 선수도 있고 국민도 있다”고 강조한다. “태극마크에 대한 소중함을 안다”고 부연 설명도 한다. 당시 같이 출전 못한 국가대표팀 동료에게 다소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국가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대표선수의 당연한 의무였기에 복잡한 심경이었으리라 이해된다.
어쨌든 당시 현정화는 북한의 리분희와 함께 단일팀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복 받은 선수임에 틀림없다. 본인도 “나는 정말 운을 타고난 운동선수”라고 겸손하게 인정했다.
천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선수
현정화의 타고난 운은 사실 88서울올림픽이었다. 그때 탁구 종목이 처음으로 채택됐는데 그 대회를 위해 국가는 수년 전부터 어린 꿈나무를 육성시켰다. 그 선수들 중 한 명이 현정화였다. 당시 현정화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시대적 상황으로도 천운이라 할 만했다. 그때 그녀는 복식에서 양영자 선수와 함께 금메달을 땄다. “우리는 금메달 딸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복식에서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해서, 단식을 접고 복식 연습을 3년간 하루에 서너 시간씩 했다. 나중에는 눈만 쳐다봐도 언니가 뭘 원하는지 알 정도로 서로가 완벽하게 호흡이 잘 맞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평창올림픽에서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화제가 되었다. 단일팀의 원조격인 현정화에게 탁구 남북 단일팀 결정으로 인한 당시의 심경이 어땠는지 물어봤다.
“사실 진짜 제 속마음은 ‘이거 왜 하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만들어져서 해야 하는 상황이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빨리 우리가 단합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했다. 또 나는 개인적으로도 성적을 잘 내는 걸 원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서로 간에 합심해서 성적을 잘 낼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런 마음으로 했다. 우리가 한 달간 합숙훈련을 하고 보름을 같이 시합해서 45일 정도 함께 지냈는데, 절대로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양영자 선배랑 복식 3년을 준비한 것처럼 준비를 해도 메달을 딸까 말까였는데, 남북 단일팀이 한 달 만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그런 의구심은 들었다. 그냥 결승만 올라가도 우리는 할 일을 다 하는 거라는 생각으로 시합을 했다. 북한의 에이스가 리분희이니까, 그 선수도 마찬가지 심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또 대한민국의 에이스이니까 책임감을 갖고 시합을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그녀는 차분하게 자신의 심경을 설명했다.
남북 단일팀과 리분희에 대한 추억
“북한의 에이스 리분희 선수가 간염으로 아팠다. 그래서 훈련을 제대로 소화 못했기 때문에 예선전부터 계속 리그를 치러야 하는 부담감이 고스란히 나한테 왔다. 북한 선수가 한 명 나가고 내가 나가서 함께 힘을 합쳐 해야 하는 경기여서 정말 부담스러웠다.” 현정화로서는 리분희 선수가 컨디션이 나쁜 걸 아니까 그래서 더 파이팅을 하고 또 집중했을 것이다.
그 결과 만리장성의 벽을 남북 단일팀으로 넘을 수 있었다. 현정화와 리분희는 서울올림픽 때 만나서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 때 한 번 보고, 그 후로 25년 동안 한 번도 못 봤다. 이번 평창 패럴림픽 때 리분희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에 관해 현정화는 “얼마 전에 리분희가 인터뷰한 걸 봤는데, 현정화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얘기해서 사실 감동받았다”고 말한다. 그 표정을 보니 온 마음을 다해 리분희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평창 패럴림픽 개막식이 3월 9일인데 이 잡지가 나간 후 아마 둘이서 만나는 장면이 각 언론사 톱뉴스로 실릴지도 모르겠다. 25년 만의 현정화와 리분희가 다시 만날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또 어떤 옷을 입고 TV 화면에 나타날지 몹시 궁금하다. 천운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치열한 노력을 해야 한다. 천운을 타고난 현정화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비싼 돈 주고 헬스장이나 요가, 탁구 ,배드민턴 등 운동을 하는 것도 좋지만 평소 생활이 그대로 운동이 되는 생활운동이 좋다. 필자는 이런 지론을 살려 원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고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보다는 계단을 이용한다. 출퇴근길도 일부러 멀리 돌아서 다니면서 이런저런 세상구경을 한다. 직장에서도 특별히 바쁜 일이 없는 날은 눈치를 봐서 점심을 일찍 먹고 한 두 시간 할애하여 인근 산에도 오르내렸다.
아무리 생활운동이 좋아도 처음가보는 산에는 절대로 혼자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사건이 있다. 지방의 소도시 건설현장에 근무할 때였다. 그날도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옆 사람에게 말하고 움직이는 사무실인 휴대폰만 챙겨 넣고 한두 시간정도의 인근 동네 구경을 해볼 심산 이었다. 시골 마을에 접어들자 똥개수준의 잡종견들이 도둑인지 지나가는 행인인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마구 짖어 된다. 햇볕은 따갑도록 내리 쬔다. 이러다가 얼굴 다 타겠다고 걱정하고 걷는데 마을뒤쪽에 산길이 보였다.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이라 그늘 진 것이 걷어 가기에 참 안성맞춤 길이다. ‘그래 산길을 걸어보자 숲길은 피톤치드의 보고다.’ 속으로 쾌잴르 부르며 ‘힐링은 역시 숲속길이야!’ 하면서 숲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필자는 길눈이 어두운 길치여서 한번 갔던 길을 다시가라면 잘 못 찾아간다. 심지어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보면서도 어리바리하다 꺾어야 할 길을 지나치거나 못미처 운전대를 조작하여 낭패를 본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렇게 처음 가는 숲길을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되어 길의 좌우를 잘 살폈다. 지나가는 길의 역순으로 내려오면 되고 멀리가지 않고 복잡한길이 아니니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스마트폰을 켜서 이어폰을 꼽고 유튜브로 소리만 즐겼다. 유튜브의 대담소리에 흠뻑 빠져 든 것이 문제로 길을 제대로 머릿속에 입력을 하지 못했다. 이제 그만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발길을 되돌렸다. 한참을 되돌아오는데 뭔가 길이 어색하다. ‘아차차 이거 큰일 났다.’ 산 능선을 잘못 접어들면 방향이 엉뚱 한데로 가게 된다. 이럴 때는 다시 되돌아가서 아는 지점까지 가야한다. 다시 돌아 올라가서 내려와도 또 그 길이 아니다. 겁이 덜컥 났다. 스마트 폰의 길 찾기 앱을 동원했다. 산속의 점하나로 현제의 위치만 알릴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산 밑으로 내려와 사람을 만나서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을 물어봐야 했다. 한참을 산속을 해매고 논밭을 가로질러 걸어가도 사람이 없다. 마음이 불안하니 이마에 진땀이 다 난다. 이쪽으로 가야 큰길이 나오는지 저쪽으로 가야 큰길이 나오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받을 처지도 못되고 119에 조난시고를 하기도 창피하기도하고 일을 키우는 것 같아 망설이다 포기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무조건 한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드디어 찾던 큰길이 나왔다. 버스정류장도 보이고 아주머니 두 분이 버스를 기다린다. 일면식도 없는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산속에서 해맨 시간이 무려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길을 찾고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으면 어찌되었을 까 생각하니 등이 오싹하다.
아주머니를 통해 대략의 위치파악을 할 수 있었다. 시외버스로 세 정거장을 가니 택시가 있는 면소재지에 내릴 수가 있었다. 산을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한 바퀴 돌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무사히 사무실애 도착했다. 직장 동료들에게 창피해서 말 할 수가 없었다. 필자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비밀로 간직해야만 했다. 잘 모르는 산길을 혼자 걸으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혼자 가는 산행은 험한 길이므로 예상치 못하게 다칠 수도 있다. 나지막한 야산이라도 사람이 없는 산의 산행은 삼가야 한다.
서울시 지하철 1호선 동묘역과 6호선 창신역 사이의 창신동은 최근 예쁜 옛 동네로 주목받고 있다. 낡고 오래되면 ‘뉴타운’이라 이름 붙여 첨단 건축물을 세우고 땅값을 올리는 것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도시의 운명이었다. 창신동은 개발을 거부하고 주민들의 푸근함을 담아 이른바 재생의 길을 택했다. 창신동 구석구석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가 바로 동덕여자중·고등학교다. 1960년대, 단발머리 어린 숙녀 박혜경(朴惠慶·66)은 창신동 이곳저곳을 누비며 추억을 쌓았다.
우리 학교 동덕여자중·고등학교
박혜경 동년기자에게 창신동은 동덕여중·고 시절 기억과 함께한다. 1986년에 학교가 서초구 방배동으로 이전해 사실상 그 시절의 흔적이라든가 추억 한 자락 남은 것이 없었다.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참새방앗간 드나들듯 다녔던 문방구는 반찬가게가 돼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박혜경 동년기자의 눈은 기자의 눈과 달랐다. 아파트 입구를 보며 학교 정문을 설명하고, 그 너머 너른 학교 운동장과 숱한 세월의 더께가 앉은 수위실이며 귀밑머리 1cm를 외치는 규율부 학생들을 회상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 속 교정을 거니는 듯 말이다.
“지금 창신동 두산아파트 자리가 바로 우리 학교가 있던 자리예요. 요즘은 가수 아이유가 나온 학교로 유명하더라고요.(웃음) 우리 때는 시험을 쳐서 들어갔는데 저도 무사히 잘 붙어서 동덕여중·고를 다녔어요. 일제강점기 때 조동식 박사가 우리 민족이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이고, 여성도 교육받아야 한다며 세운 게 우리 학교거든요.”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인 탁구선수 정현숙 씨와는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다. 동덕여고는 사라예보대회로 세계에 이름을 날리기 전에도 탁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당시 이에리사 선수(서울여상)를 제외한 정현숙, 나인숙, 박미라, 김순옥 선수 모두가 동덕여고 출신이다.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무용을 할 때마다 강당 한 편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탁구선수 친구들을 봐왔다.
민족학교이자 독립운동가의 산실
여기서 잠깐! 현재 동덕여자고등학교 사서교사이자 59회 졸업생인 이숙희 씨의 추억 속을 좀 들춰보기로 하자. 옛 사진을 구하기 위해 동덕여고에 연락을 했더니 마침 이 학교 졸업생인 이숙희 씨를 소개해준 것.
“동덕은 순수 민족자본으로 세운 민족학교입니다. 1908년 스물두 살이던 조동식 박사가 동원여자의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빨리 독립을 하려면 여성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옛날 양반 댁은 딸들을 동덕여고로 보냈다더군요. 그리고 여성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학교이기도 합니다.”
3·1운동 만세사건 때 동덕 학생들이 태극기를 몸에 숨겨 만세 현장으로 가서 전달했다. 현재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는 동덕여고 시절 단짝이었던 18회 이효정과 박진홍이 눈물의 상봉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고상이 설치돼 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돼 1935년 4월 이곳에서 재회했다. 일제강점기 학교의 명성 또한 높았다고 덧붙였다.
“그 시기 우리 학교는 전국구 학교였어요. 함경도 함흥, 명천, 경상도 봉화, 울주, 마산, 전라도 고창, 제주도 등지에서도 동덕을 왔으니까요.”
지방의 한 중학교에서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던 이숙희 씨 또한 1972년 서울로 유학을 올 때 여성 교육의 전통적인 명문의 이미지를 가진 동덕여고를 선택했다.
동대문 아파트와 낭만의 스케이트장
다시 박혜경 동년기자의 추억으로 돌아가서 학교 주변 이야기에 대해 들어보자. 학교 밖을 나와 학생들 사이의 핫 플레이스는 바로 동대문 스케이트장이었다. 이곳도 안타깝게 남아 있는 것 하나 없이 찜질방 건물이 들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동대문 친구들이랑 자주 가서 놀았어요. 얼음 바닥 정리 시간이 되면 다들 스케이트장 밖으로 나가잖아요. 그때 매점에서 남학생들을 만나는 거예요. 일종의 즉석만남이요.(웃음) 음악소리가 들리면 스케이트장으로 가서 기차를 만들 듯 길게 늘어서서 같이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어요.”
1964년 1월에 문을 연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우리나라에 생긴 첫 실내 스케이트장이었다. 스케이트가 붐이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스케이트를 타려면 논바닥이 꽝꽝 어는 겨울을 기다려야만 했다. 사시사철 얼음을 지칠 수 있는 실내 스케이트장의 출현은 일대 사건이었다.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된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성황을 이루다 롤러스케이트장의 출연과 다양한 놀이 시설 도입으로 경영 악화를 겪다가 여러 번의 폐점 위기에 봉착하더니 1990년대 중반 자취를 감췄다.
동대문 스케이트장 바로 옆에는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연예인 아파트’로 불리던 동대문 아파트가 있다. 1965년 완공된 7층짜리 건물로 지은 지 50년이 넘은 이 아파트는 지금까지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고급 아파트였던 동대문 아파트는 중앙정원형으로 지붕이 없는 형태로 요즘 건축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로 만들어졌다. 영화 숨바꼭질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현존하는 아파트 중 두 번째로 오래된 동대문아파트는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창신동 일대 입학과 졸업 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진고개 식당을 끝으로 박혜경 동년기자와의 데이트를 마무리했다. 창신동 이곳저곳을 거닐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박혜경 동년기자의 웃음소리가 지금까지도 들리는 듯하다. 창신동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도 많지만 여전히 남아 함께 숨 쉬고 있는 것도 많다. 동대문 아파트도 그렇고 백남준의 생가를 복원한 백남준 기념관, 곳곳에 옛집들도 남아 있다. 창신동의 추억이 있는 독자라면 날씨가 풀리는 어느 날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산책 나가 보시기를 권한다.
필자가 몇 년 째 영어 강의를 하고 있는 중구 노인대학에서 이 겨울이 끝나면 새 학기가 시작 된다. 새 학기가 되면 강의 시간도 조금 바뀌고 새로 생기는 강의도 있다. 필자는 강의 시간에 변동이 없어 지난 학기 학생이 거의 연속 수강을 하게 된다.
학생 중에는 몇 년을 다녀도 조용하게 별 존재감도 없이 다니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선생인 필자에게 반찬을 만들어서 가지고 온다든가 집에 놀러 오는 특별한 학생도 가끔 있다.
C는 나이가 60세 정도의 특별한 학생이다. 여고 때 탁구 선수를 했으며 나에게 특별하게 잘 한다. 가끔 반찬도 집으로 해오고, 강의 시간이면 brand 커피도 따로 날 위해 준비한다.
그런데 며칠 전 학생 C가 문자를 보내 왔다. 자기가 2학기에는 선생님 강의를 못 듣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유는 새로 하모니카 강의가 생겨서 배우고 싶은데 그게 내 강의랑 똑같은 시간이라 필자 강의인 영어를 포기하고 하모니카를 선택 하겠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들은 필자는 엄청 서운했다, 아니, 그렇게 잘하고 생전 그만두지 않을 것 같이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강의에 참석한 C가 내 강의를 떠나다니 필자의 강의가 하모니카만도 못 하단 말인가??
C가 우리 집에도 온 적이 있어 남편도 물론 C를 안다. 필자가 서운하다며 C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은 항상 그런 법이라고, 특별히 잘 하는 사람이 맘도 금세 변하는 거라고 날 위로해 준다. 그래도 서운한 맘은 가시지 않는다. 화도 나고, 하모니카도 밉고, 난데 없이 자존심(?)은 왜 또 거기서 상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던 중 필자가 얼마 전 감기로 며칠 앓고 나니까, 남편이 새 학기부터 강의를 그만 하는 게 어떠냐고 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고, 그 동안 할 만큼 했고 또 필자의 몸이 불편허고 나이도 먹었으니 고만 하는게 좋겠다는 말이었다. 그야말로 불난 데 부채질이다. 사실 복지관까지 일주일에 한번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은 남편이 하는 일이니 봉사의 반은 남편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혹시라도 남편이 그걸 싫어한다면 그만 둘 수 밖에 없는 거다.
자, 어떡한다? 계속 할 것이냐,말 것이냐? 우선 남편의 확실한 뜻을 물으니 모든게 날 위한 것이고 오히려 계속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테고 필자만 원하면 얼마든지 계속하는 것이지 자기는 다른 뜻은 전혀 없다고 분명하게 말을 하는 것이다. 남편의 확실한 뜻을 안 필자는 우선 영어반 반장과 상의를 하고 내 뜻을 밝혔다. 필자의 말을 들은 반장은 C 빼고 딴 사람은 사람이 아니냐며 절대로 사퇴는 안 된다며 펄쩍 뛴다. 한편으로는 필자를 말려주는 반장이 고마웠다. 필자는 사실 봉사는 자신을 위한 것이지 결코 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거다. 정신 건강을 위헤서라고 한 때의 기분으로 일을 그만 두는 건 후회만 남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못이기는 척 강의를 계속 하기로 하고 나니 어두웠던 마음이 금세 환해 지는 것을 느꼈다.
12년 만에 최고로 길었던 추석 연휴가 지났다. 긴 연휴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수많은 며느리들에게 육체적인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늘어난 휴일만큼 더 많은 가사에 시달리면서 허리와 손목, 어깨 등에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정형외과는 명절 연휴 직후가 성수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연세에이스정형외과에서 만난 이순옥(李純玉·64)씨도 명절이 고달픈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보통의 며느리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녀가 겪은 질환은 파스 몇 장으로 끝낼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처음엔 뒤늦게 시작한 취미가 문제라고 생각했죠.”
이순옥씨는 남편을 통해 알게 된 노래 모임을 통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6년 전 일이다. 처음 배우는 악기라 당연히 쉽지 않았고, 코드를 잡는 손부터 허리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도 기타를 다루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통증은 점점 사라져갔다. 연주로 인한 즐거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유독 왼쪽 어깨에 남아 있는 통증은 그대로였다. 이러다 말겠지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명절이 지나면 통증은 더 심해졌다. 그러다 남편의 무릎 치료를 위해 들른 병원이 믿을 만해서 자신의 어깨도 검사해봤다. 진단 결과 석회성건염이었다.
원인 모를 석회화가 통증 불러와
석회성건염은 어깨에 돌덩이 같은 것이 생기는 병이다. 관절에 석회 물질이 저절로 발생한다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질 않는다. 치료를 담당한 정형외과 전문의 윤홍기(尹洪基·46) 원장은 석회성건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석회성건염은 말 그대로 어깨 힘줄 부위에 석회 침착물이 생기면서 염증을 일으키는 병이에요. 이 염증이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죠. 사실 이 병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진 바가 없어요. 힘줄의 노화 과정에서 석회화가 일어난다는 가설과 힘줄 세포의 변성으로 석회가 생긴다는 이론이 지지를 받고 있지만 확인되진 않았어요.”
우리가 흔히 오십견으로 알고 있는 유착성관절낭염과는 완전히 다른 병이다. 어깨에 통증이 발생하는 병이기 때문에 비슷하다 여길 수 있지만, 오십견은 어깨 관절의 운동 범위가 직접적으로 감소되는 점이 가장 다른 부분이다. 석회성건염도 어깨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증상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치료를 받지 않아도 나을 수 있다는 오십견에 대한 속설이다. 어깨통증을 모두 오십견이라도 단정 짓고 병을 키울 경우 응급실 신세를 질 수도 있다.
“아팠을 텐데 지금까지 어떻게 참으셨어요?” 윤 원장이 이씨를 만나자마자 건넨 말이다. 윤 원장은 일반 환자보다 커다란 석회덩어리를 보고 걱정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다행히 덩어리 크기에 비해 환자가 느끼는 통증은 비교적 적었다. 석회성건염은 생성기, 휴지기, 흡수기의 3단계를 거치는데, 흡수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극심한 통증이 나타난다. 만약 어깨가 너무 아파 응급실을 찾을 정도라면 대부분 석회성건염일 가능성이 많다.
윤 원장은 환자의 통증이 심하지 않아 일단 보전적 치료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함부로 어깨에 칼을 대기보다는 수술을 하지 않고 치료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한 통증이 없다면 비수술적 치료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석회를 없애기 위해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쓰입니다. 석회물이 부드러운 상태라면 주사기로 빨아들여 크기를 줄이고, 딱딱하면 체외충격파 치료로 부순 다음 분산시켜요. 이순옥씨의 경우 체외충격파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어 결국 수술을 결정하게 됐죠.”
제사를 모셔야 하는 며느리의 숙명
올해로 결혼생활 28년째. 집안에선 둘째 며느리이지만 내 손으로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성격 탓에 시어머니로부터 모든 제사를 물려받았다. 제사만 1년에 4차례. 설과 추석의 차례상 준비도 그녀 몫이다. 단 한 번도 빼먹은 적도, 소홀히 넘긴 적도 없다.
이순옥씨가 처음 병원을 찾은 것은 설 명절 직후인 지난 2월이다. 집안의 연이은 행사 때문에 어깨 질환이 생긴 거라고 지목하지 않았어도,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중압감은 그때마다 어깨 위로 쌓이지 않았을까?
“워낙에 내 일로 남 일로 바빠요.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향이니까. 한때는 백화점에서 일도 했고, 부대찌개 식당도 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올해부터는 제사를 한 번에 지내기로 했어요. 부담이 좀 줄어들었죠.”
그녀의 활달한 성격은 여가생활에서도 나타난다. 남편을 통해 알게 된 노래 모임 ‘관악산 통사모(통기타 사랑 모임)’는 활동한 지 10년째다. 이제는 보컬을 담당하는 남편보다 그녀가 ‘핵심 멤버’로 꼽힐 정도다. 이 노래 모임은 ‘관악산 통사모 7080 음악회’라는 제목으로 매달 2, 4번째 일요일에 관악산 제2광장에서 정기공연을 갖는다.
관악산 통사모를 통해 알게 된 티뷰크사회복지재단을 통해 봉사활동도 해왔다. 민원으로 인해 중단될 때까지 신대방동 인근에서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간식을 나눠주는 ‘빵 봉사’를 6년이나 했다. 많을 때는 1000명 이상의 사람이 몰렸다. 말 그대로 쉴 틈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어깨를 많이 쓰는 야구선수 사이에서는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는 속설이 떠돈다. 그러나 이씨에게도 적용되는 말일까? 윤 원장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모든 관절은 과부하가 걸리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에요. 많이 쓸수록 좋아지고 건강해진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나이 들면 어깨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배드민턴이나 탁구 같은 운동 역시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전기나 배관과 같은 팔을 올리고 작업하는 직업군 역시 어깨 질환이 자주 발생합니다.”
석회성건염의 불편한 특징 중 하나는 여성들의 발병이 남자에 비해 두 배가량 높다는 것. 연령을 기준으로 하면 30대에서 50대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발병 원인이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왜 여성이 더 많이 걸리는지, 나이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통증보다 더 무서웠던 것
지난 7월 결국 이씨는 수술대에 올랐다. 사실 수술은 그녀에게 그렇게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대장암 수술을 통해 투병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어깨 수술은 겁나지 않았다. 대장암은 이미 제거되었고 완치 직전에 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제가 폐쇄공포증이 좀 있어요. 아주 심한 편은 아니지만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있을 때가 있어요. TV 장식장 안처럼 좁은 공간은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요. 그래서 찜질방도 못 가요. 수술 전 MRI 촬영을 위해 관처럼 좁은 공간에서 30분 정도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다 때려치우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죠. 눈 질끈 감고 노래를 부르면서 버텼어요. 그때 아는 노래 모두 불러버린 것 같아요(웃음).”
수술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얇은 튜브 모양의 관절경이 들어갈 수 있도록 어깨의 앞, 뒤, 옆에 작은 구멍을 내 수술을 하는 방식이다. 관절경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석회물이 생성된 부위를 직접 들여다보면서 힘줄이 다치지 않도록 제거해낸다.
윤 원장은 “간혹 수술을 해도 석회물이 남는 경우가 있어요. 이순옥씨의 석회화 부위는 넓은 편이었지만 다행히 모두 제거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수술 후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10일 입원 지시를 받았지만, 몸이 들썩거려 6일 만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퇴원했다. 어깨는 그래도 괜찮을 정도로 빠르게 좋아졌다.
“수술 후 첫날부터 어깨가 잘 움직여 물리치료사가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운동 치료도 잘되고 몸 상태도 빨리 좋아지자 병원에 계속 누워 있기가 싫더라고요. 일반 사람들보다 회복이 빨랐던 이유는 아마 요가 때문인 것 같아요. 10년 정도 요가를 꾸준히 해왔거든요.”
그녀는 자신의 부지런한 성격과 평소에 해왔던 운동이 몸이 회복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리고 병원에서 가장 말을 잘 듣는 환자는 자신일 거라며 웃었다. 병원 방문날짜를 어긴 적도 없고, 운동도 빼먹지 않고 했다. 시키는 동작은 통증이 느껴져도 모두 다 해냈다.
이씨는 부지런한 성격이지만, 석회성건염 환자들 대부분은 게으르다. 윤 원장은 석회성건염 환자들은 합병증도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부 환자들은 병세가 호전되지 않는다고 치료를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치료가 지겹기 때문일 거예요. 운이 좋으면 석회물이 자연 흡수되는 경우도 있어 통증이 사라지고 힘줄이 회복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운이 나쁘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어 일상생활이 더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당장 좋아지지 않아도 성실하게 치료를 받으시라고 권합니다. 아무리 느려도 그것이 가장 빨리 낫게 하는 방법입니다.”
2개월 만에 거의 회복된 몸
수술 후 변화를 묻는 질문에 그녀는 재미있는 답변을 했다.
“이제 차 앞자리에서 뒷자리 물건을 집을 수 있어요. 수술 전에는 뒷자리에 있는 물건을 전혀 집을 수 없었거든요. 기타 연주를 마음놓고 할 만큼 회복되진 않았어요. 통기타는 쇠줄을 잡아야 해서 힘이 필요한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요가도 비슷해요. 그러나 정상일 때에 비하면 90% 정도는 회복됐다고 봐요. 더 건강해지기를 기대하지만, 수술 후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자상한 남편은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그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고 남편 얼굴만 보였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치료 후 어깨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최근 걷기에 집중하고 있다고 이씨는 말했다. 많이 걸으면 두 시간도 너끈히 걷는다고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걸으려고 노력해요.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 걸 좋아해요. 지하철 계단도 열심히 걷고. 걷는 속도도 꽤 빨라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도 앞장서서 가요.”
수술 후 하고 싶은 것이 있을까. 그녀에게 묻자 또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요즘 유행하는 플라잉 요가를 해보고 싶어요. 물론 어깨가 완전히 나은 후에 해야겠죠. TV에서 연예인들이 하는 것을 봤는데 멋져 보이더라고요.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제게는 일종의 도전 같은 것이에요. 나를 위한 도전을 계속 하고 싶어요. 플라잉 요가를 위해서라도 빨리 완치되고 싶어요.”
5070세대는 먹고살기 힘들었던 헝그리(hungry) 세대다. 악착같이 모으고 아끼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신보다는 가족, 소비보다는 저축이 몸에 배어 있다. 자식과 가족을 위해서는 아까운 줄 모르지만 ‘나’를 위해 쓰는 것은 몇 번이나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이 5070세대다. 필자의 부모님도 평생 자신을 위해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은 적이 없는 분들이다. 어쩌다 자식들이 좋은 옷을 선물로 드리면 “이건 얼마짜리냐?”, “환불은 안 되냐?” 하며 자식들 눈치를 본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를 위해 소비하는 것에 인색하고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 5070세대가 모으고 아끼고 저축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꼈다면 이제는 ‘나’를 위해 투자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누리면 어떨까? 이에 이번 호에서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소비(이하, 나·행·소)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 원칙을 살펴보고자 한다.
소유가 아닌 경험을 위해 소비하라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호 교수는 “행복의 기준이 과거에는 돈을 어떻게 버느냐에서 이제는 돈을 어떻게 소비하느냐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즉 지금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하고 나눌 수 있는 소비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소비는 크게 ‘소유를 위한 소비’와 ‘경험을 위한 소비’로 나눌 수 있다. 과거 5070세대는 소유하기 위한 소비가 대부분이었다. 가령 자동차, 집, 옷 등을 소유하고 사용하면서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이런 소비의 행복감은 단발적이고 일시적이다.
그렇다면 경험을 위한 소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가령 학습하며 강의를 듣는 것, 여가활동, 여행을 떠나는 것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직접 체험하며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소유보다는 경험을 위한 소비가 훨씬 행복감이 크다고 한다. 그 이유는 뭘까? 경험은 이야깃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가활동으로 가장 선호하는 여행([자료1] 참조)을 예로 들어보자. 여행을 떠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해한다. 왜 그럴까?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여행이라는 경험을 통해 나만의 이야기가 생기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면서 행복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5070세대에게 ‘경험하고 체험하는 소비’는 익숙하지 않다. 경험을 위한 여가활동은 기껏해야 TV 시청 정도뿐이다. 5070세대가 성장해왔던 과거 1970년대에는 마땅한 여가 활동도 없었다. 화투 정도가 전부였고 1980년대에 와서야 도심에서 탁구, 당구, 볼링, 테니스 등을 즐겼다. 최근에는 골프와 캠핑 등도 여가활동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경험을 위한 소비’가 반드시 여가활동이나 여행일 필요는 없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의 좌표를 배움에서 찾는 5070세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 기준 60세 이상 학점은행제 등록자는 2만2915명(대학학점인정 과정 기준)이며, 55~64세의 평생교육 참여현황은 OECD 평균보다 높은 편이다(교육과학기술부 국가평생교육 통계조사). 또한 지난 2013년에는 1972년 방송통신대 개교 이래 최고령자인 정한택(입학 당시 91세)씨가 입학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5070세대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소비’를 위해서는 ‘갖고 싶은 것’에서 ‘하고 싶은 것’으로 소비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일본에서도 여가활동의 주역이 10대에서 60대 이상으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생산성본부에 따르면, 고수입의 활동적인 70대가 레저시장의 주도세력이다.
유병장수시대 행복하게 하는 소비
과거 학창 시절 무조건 외우기만 했던 ‘매슬로우 욕구 5단계 이론’을 기억할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 따르면, 사람은 의식주와 안전의 욕구가 해결되면 상위 욕구로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받고 더 나아가 자아실현을 궁극적으로 꿈꾸고 싶어 한다고 한다. 물론 모든 욕구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 이론이자 경험론이다. 나·행·소 관점에서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을 적용해보면 어떨까? 1단계 생리 욕구는 의식주 관련 소비로, 2단계 안전 욕구는 건강 예방을 위한 소비로, 3단계 소속감 욕구는 친구/동호회 활동을 위한 소비로, 4단계 존경 욕구는 학습/교육 활동을 위한 소비로, 5단계 자아실현 욕구는 여행을 위한 소비로 매칭할 수 있다([자료2] 참조).
앞서 필자는 ‘경험을 위한 소비’가 나·행·소 첫 번째 요소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매슬로우 욕구 이론에 따르면 모든 5070세대가 ‘경험을 위한 소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빼어난 경치라도 당장의 배고픔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은퇴생활을 하는 5070세대의 소비 성향과 욕구도 동일하지 않다. 은퇴 후에 소득이 중단되어 의식주 관련 소비가 전체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지는 경우도 있다([자료3] 참조). 여기에 의료, 간병을 위한 소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경험을 위한 소비’는 사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5070세대가 나·행·소를 위한 소비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소비욕구 5단계에 따르면 1, 2단계처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노화와 건강과 관련된 소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은퇴재무설계 관점에서, 자산을 모으는 웰스(wealth)가 아닌 건강을 지키는 헬스(health)에 관심을 갖는 50대가 많아지고 있다. 건강이야말로 최선의 노후대책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아닌가. 건강하지 못하면 노후생활의 질은 떨어지게 된다. 반대로 준비된 노후자산은 조금 부족해도 몸이 건강하면 긴 노후의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산의 품질이 아닌 몸의 건강품질을 높이는 소비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건강은 목표가 아닌 수단이 될지 모른다. 건강을 통해 더 젊게 살고, 더 즐겁게 살며, 더 행복하게 사는 궁극적 가치에 한발 다가서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잘 먹고, 건강을 예방하는 가장 기본적인 소비야말로 나를 지키고 행복하게 하는 소비가 아닐까?
Clean & Dress up 소비에 인색하지 말라
몇 년 전 개봉한 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퇴직 후 은퇴생활을 즐기다 시니어 인턴으로 일하는 70세 노신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주인공(로버트 드 니로)은 다운타운에 방 여럿 딸린 자택을 소유한 나름 성공한 중산층이다. 비록 아내와 사별했지만 자녀도 별 탈 없이 잘 자라 독립했고, 취미로 요가나 화초 재배를 하며, 가끔 손자 재롱 보는 것을 삶의 낙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평범한 은퇴세대다.
주인공은 혼자 사는 은퇴세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소 옷매무새 하나도 빈틈이 없다. 그는 언제나 젊은 사람보다 더 깨끗하고 말끔한 시니어다. 옷차림새뿐만 아니다. 항상 주변을 깨끗이 한다(Clean up). 수십 년 직장생활에서 비롯된 노하우와 나이만큼 풍부한 인생 경험은 CEO뿐만 아니라 젊은 직장 동료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액티브시니어들도 나이가 들수록 옷차림에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옷은 비즈니스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편한 게 좋은 것이여!”라며 집에서도 외출할 때도 늘 입는 아웃도어 복장은 아닌지 살펴보라. 이왕이면 깔끔하게 잘 갖춰 입고(Dress Up) 다니자. 나이 들수록 깨끗하게 잘 차려 입어야 한다. 옷이 날개란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반듯하게 차려 입은 상대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 손주들도 좋은 향기가 나는 할아버지를 더 좋아한다. 무엇보다 잘 차려 입은 옷은 자신감을 더해준다. 그러므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Clean & Dress Up 소비’에 절대 인색하지 말자.
어떠세요?
어여쁜 여성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죠?
바로 그거예요.
"아름다운 헤어스타일은 샤넬의 재킷보다 디올의 구두보다 당신을 빛나게 합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헤어스타일이 환상적으로 아름답죠? 옷 입는 것도 일종의 예술행위이거든요.
이왕에 입는 거 예쁘게.
여성이 아름다우면 남성이 행복하고 남성이 행복해지면 세상이 평화로워집니다.
"나는 애란씨를 첫눈에 보고 어떻게 저런 미인이 내 주변에 계시나 황홀했는데 장미의 가시에 찔릴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서초문화원에서 같이 수필공부를 하고 있는 남자 회원의 카톡문자다. 필자가 황홀할 정도의 미인? 천만의 말씀이다. 필자는 결코 선천적 미인은 아니다(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들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의 절세미인으로 태어나고 싶다). 자신에게 잘 맞게 연출을 할 뿐이다.
부모에게서 듣는 칭찬은 자녀들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애란이는 코가 잘생겼어.” 10대 중반의 필자를 바라보며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세 살 위인 언니는 필자보다 예쁘고 머리도 좋고 키도 크고 성격도 좋았다. 여러모로 우월한 언니를 유독 사랑하던 아버지였다. 열여섯 살 무렵 어느 날 우리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필자 뒤통수에 대고 동네 총각이 휘파람을 불었다. 영 껄렁껄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감히 나를 넘봐? 필자는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마침 마당에 계신 아버지께 "아버지, 저 사람이 글쎄 나한테 휘파람을 부는 거예요. 뭐 저딴 사람이 다 있어! 아유! 자존심 상해!" 하며 신경질을 냈다. 그러자 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대전시장이 대전 제일의 미인이라고 한 네 작은고모도 너처럼 그러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인물이 시원찮은 둘째 딸이 잘난 척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었던 것이다. 편을 들어주실 줄 알았는데… 아버지 말이 서운했던 필자는 속상해하며 속으로 말했다. ‘아버지, 예쁘다고 다는 아니에요.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거예요."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탤런트 뺨치는 미남미녀였다. 아버지는 외탁을 한 필자를 늘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코만'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필자는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했다. 오늘의 필자는 그 결과다. 옷을 입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예쁘고 멋지게 보일까 궁리하며 입었다. 그러므로 수필반 남자 회원은 말하자면 필자 옷발에 넘어간 것이다. 필자는 옷을 입을 때 잘 어울리는 색과 디자인을 고민하며 입는다. 또 체형의 단점을 감추고 장점은 더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체중과 체지방량부터 체크한다. 거울에 전신을 비춰보고 뱃살도 확인한다. 사이즈가 66이 넘지 않도록 긴장한다. 필자가 좋아하는 백화점의 영 캐릭터 브랜드 옷들이 66까지만 나오기 때문이다. 학교에 재직할 때는 환상의 55사이즈였다. 그러다가 체중이 57kg까지 늘어나면서 옷맵시가 나지 않았을 때는 외출하기도 싫었고 기분까지 우울해졌다. 이러면 안 돼지. 그때부터 다이어트가 일상이 되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끼, 채식과 현미밥 위주로 먹었다. 설거지할 때는 까치발로 서서 하고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한다. 일주일에 세 번은 왈츠, 모델워킹, 탁구 등 운동도 한다.
"얘들아 너희들 좋은 남자 만나고 싶지? 그러면 내가 좋은 여자가 돼야 해. 이제 거울은 그만 보고 독서로 내면을 채워야 해. 몇 번 만나다 보면 얄팍한 지식이 드러나거든. 그럼 그 남자가 나를 계속 만나고 싶어 할까?"
학교에서 열여덟 살 제자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공짜인 삶은 없다. 지속적으로 탐구해 내면을 꽉 채우고 겉모습도 멋진 여성이 되고자 필자는 오늘도 노력한다. 사람은 몇 살이 되든 자신의 마음밭과 겉모습 가꾸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몸 여기저기에 공작 털을 듬성듬성 꽂은 까마귀는 아닐까?’ 한껏 치장을 하고 나간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공작새로 위장한 까마귀면 어떠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50세가 넘으면 몸 이곳저곳이 고장 나고 아프기 시작한다. 배불뚝이에다 운동 부족으로 계단을 오를라치면 금방 숨이 차오른다. 이렇게 되면 누구나 나이를 의식하게 되고 운동의 필요성을 느낀다. 대안으로 헬스장을 찾기도 하고 등산도 해본다. 더러는 탁구나 배드민턴 같은 운동에 얼굴을 내밀어보는 등 마음이 급해진다.
그러나 신체의 지구력이나 민첩성은 젊을 때와 다르다. ‘왕년에는 내가’ 하는 의욕만으로 덤비다가는 운동 효과를 보기 전에 몸부터 다친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하지만 몸도 정신을 받쳐줘야 한다. 안 그러면 작심삼일이 될 가능성이 많다.
건강을 챙기는 운동은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부이든 운동이든 뭐든 일찍 시작해서 나쁠 것 없다. 20대부터 자신의 신체와 적성에 맞는 운동을 한 가지씩은 챙겨 꾸준히 하면 평생 자신만의 특화된 스포츠로 자리를 잡아 나이가 들어도 충분히 즐기며 건강을 챙길 수 있다.
서양 선진국 국민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자신만의 스포츠를 하나씩 선택해 평생을 즐긴다고 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는 언감생심이다. 눈만 뜨면 순위 경쟁에 내몰리고 대학 입시에 올인하느라 미래의 건강을 걱정할 틈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체육부나 교육부에서는 엘리트 선수들을 위한 스포츠 못지않게 국민들의 건강을 도모하는 생활 스포츠에도 더욱 관심을 가져주길 희망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 정책 탓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적어도 직장에 들어가고 생활이 안정되는 30대에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운동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필자는 운 좋게 30대에 직장 테니스 서클에 가입했다. 테니스를 평생 스포츠로 간직하게 된 것이 자랑스럽고, 필자를 이끌어준 선배들이 늘 고맙다.
세상사 어떤 일이든 오래 지속적으로 하려면 적성에 맞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흥미롭고 즐거워야 한다. 운동을 할 때는 이기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승부에 집착하면 몸과 마음을 다친다. 필자와 젊은 시절 테니스를 함께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나갔다. 승리게임보다 패배게임이 많아질수록 스스로 분을 못 참고 씩씩거리다 떠나갔다.
운동은 오래하려면 마음을 비우고 지는 것에 이골이 나야 한다. 필자보다 운동신경이 좋고 선천적인 신체조건과 자질이 있는 사람들은 늦게 입문해도 필자를 뛰어넘어 고수의 길로 갔다. 지고 나서 기분 좋은 사람은 없지만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 승부의 세계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건강으로 하는 스포츠라면 지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한때 밀림을 호령하던 사자도 이빨이 빠지고 늙어지면 하이에나에게도 내쫓김을 당한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다. 필자는 스포츠에는 워낙 둔재여서 시합에서 지는 것을 마음 상하지 않고 잘 받아들인다. 이러한 여유가 필자를 아직 운동장에 남아 있도록 해준 것 같아 가끔 너털웃음을 짓는다.
프로선수들이 경기 중 큰 점수로 앞서가면서도 심판 판정에 불만이 있을 때 강하게 어필하는 모습을 볼 때 다 이기고 있는 승부에서 한두 게임 져줘도 될 텐데 왜 저렇게까지 할까 하며 이해하지 못했다. 프로는 목숨을 걸 정도로 악바리 승부근성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이 들어 건강을 위해서 하는 운동은 승패에 연연해하지 않아야 오래할 수 있다. 승부에 대한 집착은 마음을 다치게 하고 결국 운동에 싫증을 내게 만든다. 나이 들수록 운동을 통해 기분이 좋아지고 건강해지면 만족해야 한다. 이기려고 무리하다가 몸이라도 다치면 큰일이다.
건강하게 운동을 오래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자기적성에 맞는 스포츠를 선택하고 승부에 연연해하지 않고 지는 것에 관대해져야 한다. 특히 동호회 회원들에게 나이를 앞세워 군림하면 안 된다. 한발 뒤에 서 있겠다는 양보정신이 있어야 오래도록 즐겁게 건강운동을 할 수 있다.
‘정해진 둥지도 없어 아무 데나 누우면 하늘이 곧 지붕이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 흔들리는 풀잎 소리, 흐르는 도나우 강물이 그저 세월이리라. 우린 자전거 집시 연인이다.’ 최광철(崔光撤·62) 전 원주시 부시장이 유럽 자전거 횡단 중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그의 여정에는 빠질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아내 안춘희(安春姬·59)씨다.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언제 어디서나 나란히 함께하는 두 사람의 유유자적 여행기를 들어봤다.
최광철 전 부시장이 50세가 되던 해의 어느 날, 부부는 여느 때처럼 한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는데, 한 청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흙으로 범벅된 청년의 자전거를 본 남편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자전거가 흙투성이라 물어보니까 산악자전거라는 거예요. 어? 왜 위험하게 자전거를 산에서 타지? 이상하게 생각했죠. 조금 이따가 그 청년이 다시 자전거를 타고 터널로 달려가는데, 그 뒷모습이 참 터프하고 멋져 보였어요. 그러고 조금 지나니 뭔가 아쉽더라고요. 우리는 그런 것도 못 누렸는데 나이가 들어버렸잖아요. 근데 아내도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길로 아내랑 같이 가서 자전거 두 대를 질러버렸죠.”
인생 2막의 ‘도전’, 인생 1막으로부터의 ‘도피’
우연한 기회로 취미를 찾은 부부는 전국 방방곡곡을 달리며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10년 후, 남편은 은퇴를 앞두고 인생 2막에 대한 고민에 휩싸였다.
“은퇴를 하고 나면 어떨까? 나름 부시장이라는 직책으로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환경이나 생활리듬이 바뀌면 적응할 수 있을까? 하릴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직장 동료라도 만나면 우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곳(원주)에서 그대로 지내는 게 영 가시방석처럼 불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고민 끝에 그가 찾은 돌파구는 ‘자전거 세계일주’였다. 영혼의 동반자이자 자전거 파트너인 아내도 함께 가기로 했다. 은퇴 후 무력감에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일찍 떠나고 싶었다. 퇴직일은 2016년 6월 30일, 그로부터 보름 후인 7월 16일을 디데이(D-day)로 잡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발해 독일, 룩셈부르크, 프랑스, 영국을 가로지르는 3500km 횡단 종주를 목표로 하고, 여행 기간은 3개월로 정했다. 부부가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도전에 감탄하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도전’보다는 ‘도피’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남편이다.
“여행을 다녀와서 인터뷰도 많이 했지만 아직도 그 계기에 대해 스스로 되묻곤 해요. 남들은 은퇴하고 크루즈를 타고 지중해도 가고, 더 편하고 고상하게 여행을 즐기는데 난 왜 그 험난한 여정을 택했을까? 그동안은 누가 물어보면 도전이나 열정처럼 그럴싸한 이유를 댔는데, 사실 그보다는 현실도피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공무원 생활을 하며 평탄하게 지내왔는데, 뭔가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져보고 싶었어요. 그런 담금질의 기회를 얻고 나면 용기와 자신감이 생기고, 막연하게나마 새로운 희망이 보이리라 생각했죠.”
남편에게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아내에겐 ‘남편’ 그 자체가 이유가 됐다. 오랜 시간 자전거를 취미로 삼았지만, 유럽 횡단은 꿈도 안 꿨다는 아내다. 낯선 환경에 장기간 해외여행이라는 점도 우려스러웠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아내의 건강이었다. 떠나기 3개월 전, 허리에 통증이 와서 병원을 찾은 아내는 척추협착증 진단을 받았다. 자전거를 무리하게 타지 말라는 주의를 받은 터라 무작정 일정을 강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리려던 그때, 아내는 병원에서 두 달 치 진통제를 처방받아왔다. 체념 섞인 비장함으로 그렇게 무리수(?)를 던진 부부는 예정대로 여행을 떠났다.
부부가 함께 쓰는 명함
유럽 자전거 여행을 성공리에 마친 그들은 다음 해에 동북아 자전거 횡단 길에 올랐다. 첫 여행의 두려움과 낯선 자신감과 희망으로 채워졌다. 점점 탄력이 붙어 최근에는 ‘달려라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뉴질랜드를 누비고 왔다. 당시 기자와의 첫 통화에서 “뉴질랜드에서 아내와 자전거 타고 있어요!”라고 말하던 최 전 부시장의 건강한 음성이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만난 부부의 건강한 미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똑같은 헬멧에 똑같은 점퍼, 똑같은 아웃도어를 입은 부부는 똑같은 명함을 내놓았다. ‘수상한 여행, Bike Bohemian 최광철·안춘희’라고 쓰여 있는 부부명함이다.
“영화 를 보면 칠순 할머니가 우연히 청춘사진관에 들어갔다가 20대로 변하거든요. 다시 젊음을 만끽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리 여행이랑 콘셉트가 맞더라고요. 그래서 ‘수상한 여행’이라고 지었어요. 직장이나 직함 대신 자전거 집시 ‘바이크 보헤미안(Bike Bohemian)’, 그리고 나와 아내의 이름을 넣었죠.”
‘소박하고 쾌활하게 유랑생활을 하면서 삶의 고통을 이해하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아가는 자전거 여행 부부’라는 의미가 담긴 명함이라고. 새 명함으로 은퇴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남편처럼, 아내 역시 명함이 생기면서 이전과는 다른 생동감을 느끼며 산다.
“잠깐 직장생활을 하긴 했지만, 30년 넘게 전업주부로 살다 보니 명함이 익숙하지는 않았어요.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했죠. 남편 덕분에 명함이 생겨서 요즘엔 어디 가면 나도 내 명함이라고 주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다 보니 뭔가 더 의미부여도 되는 것 같고, 남편이랑 함께 쓰는 명함이라 그런지 더 좋더라고요.”
그런 아내의 모습에 가슴이 뿌듯해지는 남편이다. 최 전 부시장은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들처럼 부부명함을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얼핏 이런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한 건데, 막상 만들고 보니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들이 들으면 주책없다 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동행할 사람인데 같은 명함 쓰면 좋잖아요. 직장생활 할 때도 상무든 대표든 그의 아내 누구 이렇게 써놓으면 어때요. 그게 뭐 나쁜가요? 부부는 일심동체인걸요.”
시간이 지배하던 일상을 벗어나다
명함에 적힌 ‘보헤미안’이라는 수식어처럼, 해외여행을 다니며 그야말로 집시의 삶을 살았다는 그들이다. 가고 싶은 곳으로 달리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미션은 단 하나, 90일 안에 최종 목적지인 영국 서쪽 대서양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유유자적하고 낭만적인 모습에 부러움을 사는 그들이지만, 이러한 생활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고 한다. 특히 38년 공직생활에 몸담아온 남편에게 자유란 출퇴근보다도 낯선 존재였다.
“9시에 출근하고, 9시 반에 회의하고, 10시에 기관 협의하고…. 그렇게 30분, 1시간 단위로 하루를 살았어요. 내가 시간을 관리한 게 아니라 시간이 나를 관리했던 거죠. 특별한 게 없는데도 6시엔 호텔에 도착해야지, 8시엔 저녁을 먹어야지. 그런 시간의 강박관념 같은 게 있는 거예요. 6시에 호텔에 가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누가 나를 기다리나? 아직 배가 안 고픈데 저녁 좀 늦게 먹으면 어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조금씩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 편안해지더라고요.”
그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이 바로 보헤미안의 삶’이라며 아직은 온전히 그 자유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있으니, 점점 더 좋아지리라 희망한다. 일상에서의 탈피는 또 다른 변화를 불러왔다. 익숙했던 배우자의 새로운 면모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새벽에 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 아내 얼굴을 봤는데 ‘어? 이 사람이 누구지?’ 깜짝 놀랄 정도로 새롭고 낯설 때가 있어요. 여행을 하다 보면 ‘여기가 어디더라?’ 그런 생소함이 들기도 하고요. 내 환경이나 의식이 완전히 탈태됐다고 할까? 직장생활 할 때는 나는 나대로 일하느라 바쁘고, 아내는 아내대로 혼자 집에서 뭔가를 했잖아요. 우리는 텐트생활을 많이 했는데, 텐트는 혼자 개고 펴기가 쉽지 않아요. 서로 마주보고 양쪽 귀퉁이를 잡아야 접을 수 있고, 다시 펴는 것도 함께해야죠. 그렇게 함께하는 것들이 많아지니 전보다 더 가까워진 기분이에요.”
아내 역시 “때론 남편이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며 알콩달콩 장단을 맞췄다.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이국에서 남편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낯선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와인 한 잔은 연인들의 데이트처럼 로맨틱했다.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마오!
모든 순간이 그렇게 낭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텐트에 비가 들어 눅눅한 채로 잠들어야 하는 날도 있었고, 밤늦게 길을 잃어 경찰이 출동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무더운 날씨에 오르막길을 오르며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남편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우격다짐해서 온 건데 아내가 후회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드니까 오히려 ‘집에 가고 싶지 않냐, 힘들지 않냐’ 못 물어보겠더라고요. 나도 힘든데, 아내는 얼마나 더 힘들겠어요. 내가 그렇게 물어보면 대번에 돌아가자 할 것 같은 거예요. 그럼 내 마음도 약해지니까, 더 못 물어봤죠.”
애써 힘든 줄 알면서도 마음을 감춘 남편의 마음을 아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편이 나에게 ‘돌아갈까?’ 이렇게 묻지 말아 달라고 속으로 바랐어요. 그렇게 물어보면 정말 가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그이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지 잘 아는데, 나 때문에 포기하게 할 수 없었어요. 만약에 내가 집에 가자고 했으면 다 접고 왔을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힘들어도 절대 그런 나약한 소리는 하지 않았죠.”
부부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했던가. 함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꾹꾹 감춰뒀던 속마음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보헤미안 부부처럼 행복한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있을 터. 그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은퇴하고 배우자가 여행을 가자고 하면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40~50대부터 함께 취미생활도 하고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여행을 떠나는 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시간이 나면 배드민턴을 하든 탁구를 하든 작은 취미활동이라도 함께하길 권해요. 그리고 자유여행을 가게 된다면 너무 완벽한 계획을 세워서 가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거기에 맞추느라 재미가 없거든요. 큰 흐름을 갖고 함께 겪어가면서 즐거운 흔적, 또 조금 힘든 흔적을 남겨가면서 추억을 만들다 보면 더 자유롭고 신선한 여행이 될 거예요.”
대학 2학년 때인 12월 24일 오후 5시 무렵, 소공동 미도파 백화점 옆에 있는 맥스웰인가 그 비슷한 이름의 커피숍에서 남녀 학생 10명 정도가 자리를 함께했다. 같은 과 남자친구 대여섯 명이 오래전부터 각자의 재주와 인맥을 총동원해 다른 대학 여학생들과의 미팅을 주선해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지내기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필자도 주변 인맥을 총동원해 알아봤으나 단순한 미팅이 아니라 밤새 함께 지내는 조건이다 보니 아무리 점잖게 행동하겠다고 다짐을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 친척 여동생의 협조 하에 필요한 비용은 남학생이 전부 부담하고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으면 중도에 돌아가도록 보장하겠다는 조건에 어렵사리 겨우 미팅을 성사시켰다. 결과적으로 필자가 주선한 모양이 되어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낼 음식점도 앞장서서 예약하게 됐다. 신경 쓸 일이 많아 은근히 필자가 주선한 것이 후회되었지만 어찌어찌하여 어려운 일은 다 해결하고 함께 만나 예약 장소로 옮겨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약속시간이 한 시간 이상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30분 이상이 더 지체되자 여학생들이 술렁이더니 자기들끼리 실랑이를 벌였다. 일부가 그만 가겠다고 나가버리자 나머지도 그냥 따라서 나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끼리 허탈하게 앉아서 아직 오지 않는 친구 욕도 하면서 이러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2시간 이상이 지난 7시가 넘어서야 마침내 그 친구가 씩 웃으며 “어~ 일이 있어 좀 늦었어, 미안해들! 그런데 여자들은 어디 있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눙치면서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필자는 너무 화가 나서 왜 늦었는지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대뜸 그 친구에게 “야! 이 새끼야! 너는 전화할 줄도 모르냐? 개 상놈의 새끼!”라고 거친 욕을 퍼부어주었다. 필자가 욕을 하자 그 친구도 화를 내며 “야! 네가 뭔데 나에게 쌍욕을 해?” 하며 대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실랑이는 결국 그날 밤 눈 내리는 소공동 길 위에서 주먹다짐으로까지 이어졌다. 다행히 다른 친구들이 결사적으로 말려 싸움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석관동 들판에서 다시 만나 결투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약속한 날 오후, 석관동 시내버스 종점에서 함께 만나 널찍한 장소를 찾아가 심판도 없이 둘이서 맞짱을 떴다. 한 10여 분쯤 싸웠을까. 쉬는 시간이 없어서 그랬는지 둘 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그만 싸우기로 합의하고 헤어졌다.
그 후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 때 만나 서로 악수만 했고 한참 동안은 서먹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차츰 가까워졌고 함께 시험 준비도 하고, 수업이 없는 자투리 시간에는 탁구와 당구도 치고, 음악 감상도 함께하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사회에 나온 후에도 서로의 조경사를 챙겨주며 가끔 연락해 만난다. 그렇게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우리들의 우정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악연이 오히려 수십 년 지기 절친한 친구의 인연이 된 것이다.
그때 비록 성사는 안됐지만, 그런 미팅을 내 남은 생애에 언제 또다시 주선해볼 수 있을까? 지나간 추억은 대부분 아름다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