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자원봉사센터와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이 자원봉사 전문가 육성을 위해 ‘서울시민대학 자원봉사 시민석사과정’을 신설했다. 수강을 마친 수강생은 서울시장 명의의 시민 석사가 수여될 예정이다.
서울시민대학은 시민의 강좌 수강과 활동을 학습 시간으로 인정하고 이수 시간에 따라 서울시장 명의의 명예시민학위(시민 학사·석사·박사)를 수여하는 명예시민학위제도를 운영한다. 2018년 처음 명예시민 학위제를 도입한 이래 지금까지 1257명의 시민 학사 및 시민 석사가 배출됐다.
이번에 신설된 ‘자원봉사-시민석사과정’은 서울학·시민학 등 서울시민대학 석사과정 필수과목과 현장 활동으로 축적된 자원봉사자의 경험을 성찰해보는 인문학 과정과 자원봉사 실무 역량을 향상하는 자원봉사 특화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이 과정을 수료하려면 1년간 총 200시간 학습에 참여해야 한다.
또, 봉사활동을 통해 쌓아온 봉사자의 경험과 지혜를 공익자원으로 환원할 수 있도록 지식화하는 전공세미나 과정도 진행된다. 졸업 연구 결과물로 제출하는 자기보고서는 지도교수와 소그룹 연구를 통해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하고 이를 통해 쌓은 지식과 비결을 담을 계획이다.
23일 서울시민대학 동남권 캠퍼스에서 진행되는 입학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자원봉사-시민석사과정이 진행된다. 김주명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원장은 “올해 처음으로 시도되는 ‘자원봉사-시민석사과정’은 학습과 실천을 연계해 새로운 학습 경로를 제시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며 “학습자가 수동적 지식소비자에서 자발적 지식생산자로 성장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국고용정보원(원장 나영돈)은 50~60대 신중년들의 재취업 성공스토리를 담은 취업 지원 동영상 ‘신중년들의 취업가이드’를 워크넷(www.work.go.kr)을 통해 서비스한다고 지난 17일 밝혔다.
총 15편의 동영상으로 구성된 ‘신중년들의 취업가이드’는 재취업에 성공한 신중년들의 취업 준비 경험과 비경 등을 생생한 인터뷰로 담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신중년들이 알아두면 도움이 될 구체적인 취업 정보도 제공한다.
신중년 재취업 사례(12편), 노동시장의 변화와 신중년 일자리 영향(1편), 새로운 형태의 신중년 일자리 소개(1편), 신중년 진출 가능 신직업(1편)으로 구성됐다.
또한, 사례 중심으로 동영상별 15분 내외로 제작된 만큼 동영상 시청에 집중될 수 있도록 제작되어 시청자의 몰입도를 높이게 제작되었다고 평가된다.
새로운 분야로의 재취업형
57세 김모씨는 발로 뛰고 현장을 누빈 덕분에 재취업의 문을 열었다. 영어 학원 강사로 근무하다 코로나로 인한 학원 상황이 나빠져 퇴직한 김씨는 고용센터 위탁 교육기관에서 환경 분야 자격증을 취득하고 관련 직군의 회사에서 현장 실무를 경험하는 등의 노력으로 환경인허가 관련 회사에 취업했다.
“고용노동부의 정보지원을 꾸준히 찾아봤어요. 직접 일해보지는 못하지만, 현장 실무는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고 고용센터를 통해서 관련 직군에서 일하는 분의 회사에 가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어요. 일종의 견학식으로요. 어깨너머로 실제로 어떻게 일하는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런 게 비결일 것 같아요. ‘발로 뛰는 것!’ 가만히 있는다고 누가 제 할 일을 제 코앞에 가져다주지 않아요.”
경력을 살린 재취업형
운수회사 관리자였던 66세 박모씨는 전 직장에서 쌓은 경력과 경험을 살려 제 2인생을 활기차게 보내고 있다.
박씨는 이전의 일자리가 자격증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도록 바뀌면서 경쟁력을 잃어 그만두게 됐다. 퇴사 후 고용노동부에서 제공하는 직업훈련과 자동차정비연합회 산하에서 교육받고 정비 능력을 발전시켜 자동차 검사원으로 재취업했다.
“퇴사하고서는 닥치는 대로 더 열심히 살았어요. 유사 업종 아르바이트도 하고, 영업용 화물차를 사서 운송도 직접하고 그랬다니까요? 그동안 평생 차와 관련한 일을 해서 자신 있었고 하나씩 단계를 밟아 오다 보니 자동차 검사원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개인 점포도 내 볼까 했는데 거의 다 판매나 식당 이런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언제 밥을 지어봤습니까, 뭘 팔아보길 했습니까, 그래서 잠깐 고민해보다가 자동차 분야로 굳히기를 했죠.”
우연한 기회를 살린 재취업형
57세 권모씨는 취미를 특기로 살려 재취업에 성공했다. 권씨는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다 다쳐 일자리를 그만두게 된 후 건강 관리와 취미를 위해 점핑 운동을 하다가 전문가 프로그램 자격증을 따서 지금은 점핑 클럽 강사로 일하며 건강과 수익을 동시에 챙기고 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운동을 배우다가 점핑을 알게 되었어요. 조금씩 하다보니까 재미도 있고 몸이 회복 되는걸 느꼈던 것 같아요. 그때 문득 ‘내가 가르칠 수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동을 하면서 몸도 지키고 일도 하는 일석이조! 그때 점핑 강사를 선택했습니다. 점핑 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배우다 보면 전문가의 프로그램 자격증을 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코스가 있습니다. 또 일을 할 수 있는 클럽도 서로 공유하며 지내기 때문에 수입을 만들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점핑 강사는 수입도 만들고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직업이라 신중년에게 특히 더 좋은 직업인 것 같습니다.”
고용센터를 적극 활용한 재취업형
전업주부 생활 중 빈둥지 증후군이 걱정돼 재취업을 결심한 56세 유모씨는 고용센터 취업컨설팅을 적극 활용해 재취업했다.
재취업 준비를 위해 고용센터를 방문해 취업정보에서부터 자기소개서, 이력서 쓰기 등까지 다양한 취업 지원을 받았고, 지금은 보험회사 총무팀으로 출근하면서 만족스러운 중년을 보내고 있다.
“몇 번의 이력서를 내고 몇 번의 거절 통보를 받고 그리고 달콤한 열매를 맛보는 것 아닐까요? 자기소개서 쓸 때 고용센터에 방문해서 교육해주시는 선생님께 이력서 쓰는 걸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어요. 3일을 매일 갔었는데 성의를 다해 도와주셨고 그 덕에 취업할 수 있던 것 같아요.”
나영돈 원장은 “신중년들의 재취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동영상을 통해 재취업에 성공한 사례자들의 경험담을 생생하게 들려주고자 한다”라며, “고령화에 따라 증가하고 있는 신중년들을 위한 맞춤형 경력설계 서비스를 더욱 개발하고 확대하여 제공하겠다”라고 밝혔다.
‘신중년들의 취업가이드’ 동영상은 취업정보사이트 워크넷*과 유튜브 한국고용정보원 채널에서 볼 수 있다.
오미크론 대유행으로 소폭 조정된 거리두기 4월 3일까지 시행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른 사적모임 제한을 6인에서 8인으로 완화하는 내용의 거리두기 방침을 발표했다. 식당 등의 다중이용 시설 영업시간은 밤 11시까지로 그대로 유지된다. 완화된 거리두기 방침은 오는 21일부터 4월 3일까지 2주간 시행된다.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은 18일 세종청사에서 열린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의 새 거리두기 방침을 발표했다. 권 장관은 “지난 2주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새롭게 조정해야 하는 시점이지만, 오미크론의 대유행과 의료대응체계의 부담, 그리고 유행 정점을 예측하기 불확실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거리두기를 대폭 완화하기에는 우려가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국 코로나19 중환자 병상 가동률이 66.5%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지역적으로는 가동률이 90%에 이르러 포화 상태인 곳도 생겨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분들의 생업 고통을 덜고, 국민들의 일상 속 불편을 고려해 인원수만 소폭 조정하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사적모임 기준을 현행 6명에서 8명으로 2명 늘린 것 외에 바뀌는 사안은 없다. 동거가족이나 아동·노인·장애인 등 돌봄이 필요한 경우에도 기존과 같이 예외가 허용된다.
다중이용 시설의 영업시간은 감염 위험에 따라 분류한 1·2·3그룹과 기타 시설 모두 오후 11시까지로 제한된다. 1그룹은 유흥주점, 단란주점, 클럽(나이트), 감성주점, 헌팅포차, 콜라텍·무도장 등의 유흥시설이다. 2그룹은 식당·카페, 노래연습장, 목욕장업, 실내체육시설 등 4종이 해당한다. 3그룹 및 기타 시설에는 평생직업교육학원, PC방, 오락실, 멀티방, 카지노, 파티룸, 마사지·안마소, 영화관·공연장 등이 포함된다. 학원은 평생직업교육학원에만 오후 11시 제한이 적용된다.
영화관과 공연장은 상영·공연을 시작하는 시각 기준으로 오후 11시까지 허용된다. 행사·집회, 종교시설에 대한 조치도 유지된다. 행사와 집회는 접종여부에 관계없이 최대 299명 규모로 열 수 있고, 300명 이상이 모이는 비정규 공연, 스포츠대회, 축제 등의 행사는 관계부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미사·법회·예배 등 정규적인 종교활동은 접종여부와 관계없이 수용 인원의 70% 범위에서 열 수 있다.
정부는 향후 이번 유행이 정점을 지나 감소세로 전환되고 의료체계 여력이 안정적인지 확인한 후 운영시간, 사적모임, 행사와 집회 등을 본격적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다시 검토할 예정이다.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은 시니어들을 위해 유망 직업을 소개한다. 대한민국은 2000년 고령사회가 됐고, 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다. 이에 노인 문제와 이로 인한 복지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으며, 노인심리상담사는 유망 직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노인 문제는 주거, 생활환경, 고용, 의료 등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심리·정서로 인한 개인적인 문제도 동반한다. 노년기에는 경제적 불안감, 고독으로 인한 우울증, 상실감 등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1940~50년대 출생 세대는 한국전쟁을 경험했거나 발발 직후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젊은 시절에는 독재와 억압 속에서 급격한 산업 발전을 일궜다. 그리고 현재 저성장 경기침체 속에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 부응해 노인 문제 해결의 효과를 기대하는 동시에 ‘상담 없이는 노인 복지를 논할 수 없다’는 역사적 과제가 부여됐다. 이는 노인심리상담사가 탄생한 배경이며, 이후 자격 제도도 생겼다.
노인심리상담사는 신체적·정서적·심리적 장애를 겪거나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들과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진단과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전문가의 역할을 수행한다. 궁극적으로는 노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을 한다.
자격증 취득과 밝은 전망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은 민간자격증이다. 1·2급으로 나뉘어 있으며, 나이와 경력에 따른 제한은 없다. 다만 심리학 전공, 심리상담 관련 자격증 소지자, 사회복지사, 간호사, 요양보호사 등은 업무가 겹치는 부분이 있어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이 유리하고 활용도가 높다.
특히 노인심리상담사와 요양보호사는 연관이 깊다.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하다 보면 치매 예방교육 및 심리상담 기법을 배울 수 있다. 이에 요양보호사, 특히 재가요양, 가족요양 쪽으로 구직을 원한다면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은 많은 도움이 된다.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 시험은 1차 필기시험, 2차 직무교육으로 진행된다. 1차 필기시험은 상담심리학, 임상심리학, 이상심리학, 노인심리학, 총 네 과목으로 구성된다. 과목별 최소 40점, 전체 평균 60점을 넘으면 합격이다.
시험은 객관식으로 난이도가 높지 않다. 교육을 성실하게 받고 공부하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합격할 수 있다. 특히 나이가 많을수록 노인 세대에 가깝기 때문에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재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민간자격증이기 때문에 실제로 취업에 도움이 되겠냐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앞으로 더욱 수요가 많아질 것이며 전망이 밝다는 입장이다.
노인심리상담사는 다양한 교육, 복지, 의료, 종교기관의 노인상담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 노인복지기관, 요양원, 실버타운, 노인대학, 지역마을회관, 지역사회문화센터, 개인 심리상담소 등으로 취업이 가능하다. 특히 각 지역의 노인심리상담센터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노인들의 소외감과 우울증이 심화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다만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해서 바로 상담사로 활동하기는 어렵다. 노년층의 인생 경험은 상담사보다 훨씬 풍부하므로 충분한 임상 훈련이 필요하다. 노인 관련 센터나 복지관에서 실무를 경험하거나, 사회복지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어야 상담사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
노인심리상담사는 심신이 힘든 노인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잘 어울린다. 기본적으로 노인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더불어 상담할 때 지식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노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줘야 한다.
노인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포함해 배우자, 자녀, 손주 등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나이거나 질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존재론적인 고민도 함께 나눠야 한다. 즉 노인심리상담사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기 때문에 어떤 상담사보다도 숙련도가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심리상담사는 명예와 부를 축적하기보다 사명감이 필요한 직업이다. 현직에 있는 상담사들은 끊임없는 공부와 봉사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인심리상담사 교육 어떻게?
노인심리상담사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관련 교육도 증가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창구가 많다. 한국교육검정원, 한국사이버진흥원, 사회교육중앙회 등이 있다.
서울사이버대학교에서도 노인심리상담사 기초과정을 신설했다. 노인상담의 이해, 전생애발달과 노인심리, 노인상담 이론과 기법, 노인 문제와 심리평가, 노인상담의 실제 등 5과목으로 구성됐다. 노인심리상담에 필요한 실제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과정이다. K-MOOC 플랫폼을 통해 강의를 무료 수강할 수 있다.
노인 인구가 전체의 33%로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경남 고성에서는 노인 복지에 관심이 많고, 그중 하나로 노인심리상담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고성군 종합사회복지관은 거제대학교와 지역맞춤형 인재 양성 및 지역 상생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이 가운데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반이 가장 인기가 좋다.
1월에 2기 수료식이 있었다. 교육생들은 ▶노인 문제와 상담 ▶노인의 특성 ▶놀이 및 미술 상담 ▶노인 우울 및 중독 ▶음악치료 ▶노인 레크리에이션 ▶보드게임 ▶음식을 활용한 감정표현 등 다양한 노인상담 이론과 실습 위주의 강의를 받았다. 총 16명이 수강 신청해 14명이 수료 및 자격을 취득했다.
◇ “경청·공감·인정하는 법 배웠어요”
정석철 노인심리상담사 인터뷰
정석철(67) 씨는 고성군 종합사회복지관의 교육을 통해 노인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평생을 보건복지 관련 공무원으로 일한 사람이다. 고성군 보건소 소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했다.
정석철 씨는 “그동안 공무원으로 편안하게 잘 살아왔으니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특히 어르신들을 돕고 싶었고 작은 일부터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사회복지사들과 어울리면서 봉사활동을 하곤 했죠. 사회복지사 자격증, 요양보호사 자격증은 원래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퇴직한 뒤 남는 게 시간밖에 없잖아요? 본격적으로 사회복지사 영역에 뛰어든 거죠. 사회복지시설, 요양원, 재가복지센터 쪽으로 많이 다녔어요. 나이에 걸맞게 노인 쪽으로 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정석철 씨는 재가노인복지센터를 직접 열었고, 센터장을 맡고 있다. 방문 요양, 방문 목욕을 위주로 하고 있고, 요양보호사 양성 교육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을 하면서 노인심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노인심리상담 교육을 듣게 됐다.
“어르신들을 만나보면 혼자 있어서 우울해하시는 분들도 많고 치매 환자이신 분들도 많아요. 그분들을 어떻게 하면 더 따뜻하게 잘 대해드릴 수 있을까 생각했죠. 그래서 교육을 듣게 된 거예요. 제가 수료생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어요. 저는 배움이 필요하면 무엇이 됐든 달려가요. 아주 욕심이 많습니다.”
3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정석철 씨는 ‘자신의 심리 상태를 파악해서 발표하기’ 과제가 가장 어려웠고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남을 상담하기에 앞서 자신의 심리를 볼 줄 알고 드러낼 수도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배운 것 같다.
“자신의 심리를 얘기할 때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치부나 약점도 있잖아요. 그것을 모두에게 공유한다는 것이 쉽지 않죠.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린 여성분도 있었어요. 용기가 대단하다고 느꼈고, 모두 박수를 쳐줬어요. 저도 많은 용기를 얻었어요.”
그는 자격증 취득이 업무에 도움이 되냐는 말에 “아직 응용은 안 해봤지만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고 답했다. 교육에 음악 수업도 있었는데, 그는 이제 어르신들을 방문하면 노래도 부르고 더욱 살갑게 대한다는 것. 반응 역시 매우 좋다.
더불어 정석철 씨는 자신과 같은 중장년이 어르신들의 심리에 보다 공감하기 쉬울 것 같다면서 자격증 취득을 추천했다. 그는 어르신들을 위해 현재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다. 기타, 수영, 골프를 배우는 것은 물론 제과제빵, 이미용까지 섭렵했다. 특히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으로 성숙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많이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도 달라졌어요. 무슨 얘기를 하든 경청하고 공감해주고 인정해주고 있어요.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더라도 남을 먼저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전진해나가고, 지역사회가 건강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의 50대 이상에게 전공투에 대해 묻는다면 영화를 보러 간 극장의 대한뉴스에서 반복된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이 불타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일부 과격한 학생들이 학교 건물을 점거하여 경찰에 진압되며 화재가 발생했고, 그 때문에 천하의 도쿄대학이 그해 신입생을 받지 못했다는 결론이 따라붙었다. 전공투는 일본 학생운동의 과격화와 몰락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좌절한 학생들은 과거를 묻어버리고 체제에 투항하여 기업 전사 ‘시마 과장’(課長 島耕作)이 되어 ‘기업 사회 일본’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전공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다. 그러나 이러한 패배와 좌절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조된 것은 아닌가? 2019년 전공투 운동 50주년을 맞아 시행된 설문조사에 답변한 전공투 참가자들의 85%는 ‘운동에 참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68%는 ‘현재의 삶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적극적으로 회신을 보내온 집단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모두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일본 대학가에 과격한 학생운동이 등장했다. 수업 거부와 데모를 넘어서 본관을 점거하여 행정 업무를 마비시켰다. 학부 단위의 자치회와 별도로 학부와 분파를 넘어선 연합 조직이 전체 대학 단위로 결성되었다. ‘전공투’는 이러한 연합 조직인 전학공투회의(全學共鬪會議)의 줄임말이다.
이 시기 학생운동의 폭발은 구조적 문제였다. 단카이 세대라고도 불리는 제1차 베이비붐 시기(1947~1950년)에 탄생한 이들이 18세가 되는 1965년부터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본래 일본의 고등교육은 도쿄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7개의 구 제국대학이라는 엘리트 양성 기관과 그 외의 지방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일본 정부는 후자를 통해 대량 양산 교육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부실한 대학들이 급증하며 사립대학의 등록금 인상, 입학 및 회계 부정, 공립대학의 사립화, 무차별적인 연구비 수주 등의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대학은 학생들의 대화 요구를 거부하거나,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을 약속했다가도 정부의 압력을 받아 약속을 번복하고 기동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을 계속했다. 학생들은 소속 학부와 정파를 넘어 학교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 조직을 만들었고, 1969년 9월 5일에 전국 전공투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지도부가 투옥되고 이후 당파 간의 항쟁이 격화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전공투 운동은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
1960년대의 안보투쟁이 외부의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면 전공투 운동은 대학과 학생, 연구자의 존재 방식을 묻는 ‘대학의 이념과 학문의 주체를 둘러싼 운동’으로 발전해갔다. 대학은 ‘제국주의적 관리에 편입된 교육 공장’에 불과하며, 교수는 ‘관리 질서를 담당하는 권력의 말단 기구’에 불과했다. 결국 이러한 관리의 질서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률적으로 전공투 세대라고 표현하지만 20대 후반의 대학원생부터 19세의 신입생까지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다양한 그룹이 있었다. 이미 사상적 자아를 형성하고 직업적 교육도 어느 정도 완수한 대학원생이나 학부의 상급 학년은 운동이 쇠퇴한 후에도 의사나 변호사,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전공투를 상징하는 인물, 도쿄대 전공투의 대표이자 전국 전공투 의장으로 선출된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도쿄대 투쟁 당시 물리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이었다. 제도권 학계를 떠난 그는 출옥 후 유명 입시학원의 물리 강사로 30년 넘게 일하면서 자연철학과 과학사 분야의 연구를 계속했다. 학원 교재로 출판한 ‘물리입문’도 유명했지만, 2003년에 집필한 ‘자력과 중력의 발견’은 학술상과 출판 저작상을 휩쓸며 학술적 능력을 입증했다. 그 밖에도 논픽션 작가이자 도쿄 도지사에 당선된 이노세 나오키, 설명이 필요 없는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 유명 프로듀서 테리 이토 등이 있다.
‘속 전공투백서’에 의하면 70대 중반이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설문 응답자의 10%는 700만 엔 이상의 수입이 있으며, 최고 소득자는 3000만 엔이었다. 1000만 엔 이상의 수입도 꽤 있었다. 한편으로는 일본 65세 이상 고령자 세대의 평균 소득인 308만 엔에 훨씬 못 미치는 250만 엔 이하의 수입을 가진 이들이 40% 정도 된다고 한다. 노년의 활동가들 사이에도 생활의 격차는 존재했다.
투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 의료와 복지, 농업, 장애인, 노동 등의 분야에서 꾸준히 활동한 이들이 많다. 특히 여성의 경우, 여성은 차 심부름이나 하던 당시의 일본 사회에서 전공투 경험은 세상을 보는 시야를 키울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한편으로 상처도 남았다. 운동을 그만둔 이유로 ‘동료들이 서로 죽이는 내부 폭력’과 ‘취직’이 거의 비슷한 비율이었다. 후회는 하지 않지만 패배감과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이다. “합계 37년간 평사원으로 정년을 맞았다. 내부 항쟁으로 중증 장애를 입은 활동가를 만난 일이 있다. 속죄의 마음으로 평생 평사원에 머무르겠다 결심했다. 이전 활동가의 부음을 들을 때마다 속죄의 마음이 강해지며 무언가 종교에 귀의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다”와 같은 회상에는 살아남은 자들의 무게가 느껴진다.
현재의 정치 성향도 명확하다. 아베 정권의 개헌에 대해서는 95% 이상이 반대하며, 선거에는 항상 참여한다는 대답이 77%였다. 지지 정당은 입헌민주당이 52%, 자민당도 8.8%이며, 공산당은 6.8%에 불과했다. 은퇴한 헤이세이 덴노에 대해서는 65.5%가 긍정적 평가였으며, 도쿄올림픽에 대해서는 68.9%가 전혀 평가하지 않았다. 정치 참가 의사를 묻자 과반수가 앞으로 참가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70대 중반이 넘어도 그들의 의욕은 당분간 꺾이지 않을 것 같다.
내일(5일)부터 식당과 카페 등 다중이용시설 12종의 영업시간이 오후 11시까지로 한 시간 더 연장된다.
전해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2차장(행정안전부 장관)은 4일 중대본 모두발언을 통해 “고심 끝에 현재 밤 10시까지 허용되고 있는 식당, 카페 등 12종 다중이용시설의 영업시간을 내일(5일)부터 1시간 연장키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영업시간 연장은 오는 20일까지 적용된다. 사적모임 6명 제한은 현행대로 유지된다.
이에 따라 식당·카페, 노래(코인)연습장, 목욕장업, 실내체육시설, PC방, 멀티방·오락실, 파티룸, 카지노, 마사지업소·안마소, 유흥시설, 평생직업교육학원, 영화관·공연장은 내일부터 밤 11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전 차장은 “그간 추진된 손실보상 확대, 거리두기 일부 완화 조치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계속되어온 자영업·소상공인분들의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위험군 관리를 중심으로 방역체계가 개편됨에 따라 방역패스 중단, 동거인 자가격리 의무 면제 등의 다양한 조치들이 시행 중인 만큼 거리두기도 이와 연계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 지자체, 일상회복 지원위원회 그리고 다양한 현장 의견을 바탕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개편안을 면밀히 검토해왔다”며 “앞으로도 위중증의 안정적 관리를 비롯한 의료 여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 등을 바탕으로 코로나19 대응체계를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중대본은 4일 0시 기준 신규 확진자가 26만6853명 발생해 누적 369만1488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사망자는 186명으로 전날에 이어 다시 역대 최다치를 기록했다. 위중증 환자도 31명 늘어나 797명이 집계됐다.
전 차장은 “1월 3째주부터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 모두 위험도 ‘높음’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며 “이번 주 중환자 병상 가동률은 약 50% 수준까지 증가했지만, 누적 치명률, 중증화율 등 핵심 방역지표들은 현재까지 의료대응 역량 내에서 관리가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늘부터 내일까지 이어지는 제20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와 관련해서는 “격리자 등의 선거권 보장을 위해 내일 오후 5시부터 자가 격리자의 선거 목적 외출을 허용했다”면서 “오후 6시 이전에 투표소에 도착한 경우 일반 투표소와 분리된 전용 임시 기표소에서 투표에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하고 발열체크와 거리두기 등 투표소 내 방역수칙을 철저히 준수해 달라”고 당부했다.
‘트로트의 황제’ 설운도(64)의 노래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의 노래에는 추억이 녹아 있고(사랑의 트위스트), 아픈 이별의 기억이 떠오른다.(보랏빛 엽서) 힘든 순간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다함께 차차차) 설운도가 대한민국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 벌써 40년이다. 그 스스로도 “오랜 시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냐”고 말할 정도로 가수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렇다고 권위적이거나 까탈스럽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젊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시대를 읽는 눈을 갖고 있다. 40년의 역사는 결코 그냥 써지지 않았다.
설운도는 ‘트로트계의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그는 노래도 잘 부르지만 작곡 실력도 뛰어나다. 설운도의 히트곡 ‘쌈바의 여인’, ‘보랏빛 엽서’, ‘사랑이 이런 건가요’ 등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더불어 ‘사랑의 트위스트’, ‘여자 여자 여자’는 설운도가 작곡하고 아내 이수진이 작사한 곡들이다.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설운도가 임영웅에게 선물한 노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대박 나기도 했다.
이처럼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진정한 가수, 설운도.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DNA로 가수가 됐지만, 꾸준한 노력 없이는 오늘날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국회의원들을 보면 2선, 3선 계속하잖아요. 그러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나요. 우리도 똑같아요. 노력하지 않고 히트곡이 없으면 안 되죠. 그래서 지금도 한해 한해 열심히 사는 거죠. 노래 연습도 열심히 하고, 음악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작곡도 계속하죠. 제가 트로트 가수 작곡가 중 현대적인 감각의 노래를 많이 만들잖아요. 저는 현재 어떤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해요.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한 곡 만드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죠. 저한테 곡 받으려고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이 와요.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도와주고 싶죠.”
가수가 될 운명
설운도에게 가수는 ‘운명’이었다. 6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설운도(본명 이영춘)는 유독 어머니를 빼닮았다. 얼굴, 성격, 그리고 노래 실력까지. 설운도의 어머니는 치과의사 아버지 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시청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노래자랑에 나갔는데 단번에 MBC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그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설운도의 어머니는 가수가 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됐다. 꿈을 이루지 못하면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이에 그녀는 자신을 닮아 노래를 잘 부르는 설운도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노래를 정말 잘 부르셨어요.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당신의 못다 이룬 꿈이 가수였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너라도 내 꿈을 이뤄다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맴돌았어요. 저에게 가수가 되는 것은 과제였고, 결과적으로 효도했죠. 문화관광부 주최로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이 있어요. 1995년에 어머니께서 그걸 받으셨는데 정말 많이 우셨어요. ‘엄마의 한을 풀어줘서 정말 고맙고 기쁘다’고 하셨죠.”
설운도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금수저 출신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어졌고 어머니도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울산의 한 회사 구내식당을 운영했다. 설운도는 어머니를 보러 울산에 갔다가 울산 MBC 주최 노래자랑에 출연하게 됐다. 그때 불과 열여섯 살이었던 설운도. 놀라운 노래 실력으로 울산 대표로 뽑혀 서울 MBC에서 진행하는 전국 노래자랑까지 진출했다. 당시 그는 금메달을 네 개 받았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는 늘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요. 어머니는 제가 꿈도 이뤄드리고, 잘되는 모습을 보시고 돌아가셨잖아요.(2016년 별세) 그런데 아버지는 제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제가 서울 MBC에 갔다가 금메달을 하나씩 들고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동네에 자랑하고 다니시던 모습이 생각나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제가 잘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게 늘 가슴이 아파요.”
가수로서의 재능을 확인한 설운도는 이후 부산의 극장 쇼, 라이브 클럽을 전전하며 무명 가수로 활동했다. 부산에서도 인기가 많고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굳이 서울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때 군 복무를 마친 그에게 숙자매의 매니저 안태섭 씨가 찾아왔다. 안 씨의 권유로 설운도는 1982년 KBS ‘신인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프로그램이다.
설운도는 5주 연속 우승하며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고, 이듬해 ‘잃어버린 30년’을 발표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이 곡은 ‘남북 이산가족 찾기’ TV 방영 당시 메인 곡으로 선정됐고, 설운도의 구슬픈 목소리는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뜨거운 관심 속에 설운도는 그해 KBS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극장 쇼부터 지방 업소를 다니고,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요. 졸업도 못 하고 중퇴하고 그랬죠. 특히 제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어머니께서 하시던 사업이 망해서 정말 어려웠어요. 저도 자리 잡은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했죠. 그러는 바람에 엄마하고 형제자매들이 다 흩어졌어요. ‘잃어버린 30년’이 히트치면서 다시 만났죠.”
2세로 이어진 가수 DNA
마침내 오랜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주목받은 설운도. 그러나 그의 가수 인생은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1984년 회사에 문제가 생겨 문을 닫게 된 것. 설운도는 당시에 대해 “졸지에 홀로서기를 하는데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더라. 10대 가수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는 3~4년 일본에서 엔카 공연을 했다.
그리고 돌아온 설운도는 1991년 ‘다함께 차차차’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MBC ‘10대 가수상’을 2년 연속 받으며 트로트 4대 천왕으로 급부상했다. 듣기만 해도 힘이 나는 ‘다함께 차차차’는 현재도 국민 송으로 통한다. 더불어 그해 겹경사가 터졌다. 설운도는 이수진과 결혼했고, 이듬해 설운도 작곡·이수진 작사 ‘여자 여자 여자’가 탄생했다.
설운도와 이수진의 결혼은 당시 큰 화제였다. 이수진은 1980년대 ‘빨간 앵두’, ‘자유부인’ 등에 출연한 영화배우였다. 연예인 커플, 특히 가수와 배우 커플은 흔치 않았기 에 두 사람은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수진은 결혼 후 설운도의 노래를 작사했고, 현재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설운도의 무대 위 화려한 의상들은 그녀가 만든 것이다. 설운도의 의상들이 유독 멋스러운 이유는 아내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는 파티 장소에서 만났는데, 옆자리에 앉았어요. 외모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더라고요. 말을 붙였는데 고향이 부산 쪽인 양산이라는 거예요. 더욱 호감이 갔죠. 사실 제가 숫기가 없는데 이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아내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앨범 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유명한 작곡가라며 곡을 주겠다고 거짓말로 아내를 꾀었어요. 사실 아내 노래 실력은 형편없었는데, 당시 누가 아내를 가수로 키우려고 바람 잡았던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아내와 데이트를 했는데 큰아들이 바로 생겨버린 거예요. 이 여자를 만나라는 하늘의 뜻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동거하다가 애 낳고 결혼했어요.”
설운도는 아내 이수진에게 ‘강원도 포수’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밝혔다. “강원도는 워낙 숲이 우거져서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 우리 아내는 돈을 벌어다 주면 돈이 밖으로 안 나온다. 그만큼 알뜰하다는 소리다. 덕분에 애들도 잘 컸고 내조를 잘 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했다. 둘 다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강해 부부 싸움을 많이 했다고. 설운도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이승현은 1990년에 태어났고, 이듬해 둘째 아들 이승민이 태어났다. 막내딸 이승아는 1996년생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가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첫째 아들 이승현은 루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아이돌 그룹 포커즈, 엠파이어로 활동했고, 최근에는 솔로로 신곡을 발표했다. 딸 이승아는 가수 지망생으로 KBS 2TV ‘트롯 전국체전’에 출연한 바 있다. 설운도는 이승아의 근황에 대해 “가수는 물론 연예계 생각을 접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저는 엄마, 아빠가 연예계에 있었지만, 아이들은 다른 길을 가길 바랐어요. 애들이 워낙 하고 싶어 하니 막지는 못하지만, 노래로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제가 어디 나가서 ‘우리 아들입니다’ 소개하는 그런 것을 못 해요. 우리 딸도 오디션에 나왔는데, 제가 심사위원인데도 내 딸 나온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해서 떨어졌잖아요. 아무리 딸이라도 실력이 안 되면 떨어져야죠.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노력하고 실력도 향상돼요. 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좋죠.”
다시, 트로트 전성기
2020년 TV조선 ‘미스터트롯’으로 트로트 열풍이 이어지면서 설운도는 제2의 전성기를 썼다. 지난해 ‘미스터트롯’ 우승자 임영웅 효과로 설운도의 노래 세 곡이 동시에 히트를 쳤다. 설운도는 이를 두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표현하면서 “영웅이와 나는 묘한 조합이다. 둘의 시너지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짚었다.
먼저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보랏빛 엽서’를 불러 설운도는 23년 만에 역주행 신화를 썼다. 또한 2019년 나온 설운도의 노래 ‘사랑이 이런 건가요’도 임영웅이 부르며 재조명됐다. 이에 설운도는 임영웅에게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작곡해 선물해줬다.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 5000만 뷰 돌파를 앞두고 있다. 트로트 역사상 유례없는 인기다.
“‘보랏빛 엽서’가 히트하면서 나도 동반 성장하게 된 거죠. 영웅이한테 고맙잖아요. 그래서 곡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영웅이한테 가게 된 거죠. 많은 국민들이 노래를 좋아해주셔서 작곡가로서 기쁘고 뿌듯해요. 요즘 사랑이 메말랐잖아요. 사랑의 전도사 같은 노래예요. 삭막한 세상에 모두가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후배 영웅이 덕을 많이 봤으니까 늘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걔가 속이 깊어서 고마움을 알고 항상 감사해하는 친구예요.”
설운도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히트곡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랑이 이런 건가요’를 꼽은 것. 그는 “젊은이들이 트로트를 좋아하게 만든 노래다. 펑키한 리듬이라 트로트 느낌도 안 나고, 이 노래에 자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설운도는 트로트가 중장년층의 전유물이 아닌 젊은 세대에도 통하는 음악이 된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트로트가 재조명받은 이유로 신선해졌다, 맑아졌다, 수준이 높아졌다, 트로트 하는 친구들이 젊고 다양한 연령층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등을 꼽을 수 있어요. 예전에는 트로트는 부모들이나 듣고 옛날 사람이 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트로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죠.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고 우리의 노래구나라고 사람들이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트로트를 좀 더 신선하고 수준 높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설운도는 이처럼 젊은 세대와 통합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앞날을 선도해가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래 유망 사업인 NFT에도 관심이 아주 많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대체 불가 토큰을 말한다. 설운도는 ‘잃어버린 30년’ LP를 등록해 NFT 기부 챌린지에 참여했다.
“NFT로 기부 챌린지 말고 조만간 새로운 도전을 할 예정이에요. NFT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이에요. 죽더라도 나는 그 가상공간에 살아 있게 되죠. 가상공간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우주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오던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현실이 되고,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세상이 온 거죠. NFT는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해요. 나중에 가서 하면 늦죠.”
설운도는 “트로트는 나의 모든 것”이라면서 파란만장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산 밤업소를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좌절도 맛봤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힘든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을 배로 했기 때문에 기회가 찾아왔고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설운도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K-트로트’다. 한국의 정서가 담긴 트로트가 전 세계에서 통하길 바라는 대부의 마음이다.
“저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고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트로트 가수로 남을 거예요. 트로트 가수로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어야죠. 힘들었던 역경을 지나오면서 지금의 제가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희망과 꿈,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K-트로트’라는 개념은 전 세계인이 트로트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K-트로트’ 문을 누가 열지는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그 문을 열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모두가 주력해야겠죠. 세계 문화를 주도해가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자는 거죠.”
서울시는 서울시립대와 손잡고 만 60세 이상 서울 시민(1962년 12월 31일 이전 출생자)이라면 다양한 강좌를 들을 수 있는 비학위 과정 ‘서울 시니어 대학’을 운영한다고 전했다. 오는 4월에서 12월까지 2학기제 대면 강좌로 진행된다.
대면 강좌는 4월에서 12월까지 2학기 제로 운영된다. 1학기는 4월에서 8월까지(10주) 4개 과목(▲시니어 근력 강화 운동 ▲아트 인문학 ▲사회복지학 개론 ▲인간 행동과 사회환경), 2학기는 9월에서 12월까지(15주) 5개 과목(▲스포츠 강좌 ▲수묵화 ▲서울의 역사 ▲노년 자서전 쓰기 ▲사회복지정책론)의 강좌가 다양하게 마련돼있다.
수강자는 3월 7일부터 서울시립대 평생교육원 홈페이지에서 선착순 30명을 선착순 모집한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온라인 접수만 가능하며, 현장 접수는 불가능하다. 수강료는 한 과목당 5만 원으로 9개 과목 기준 총 수강료는 45만 원이다. 수강생에게는 학습 동아리 장소 이용, 동아리 지도교수 배정, 서울시립대 평생교육원 시설 이용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더불어 수료 기준 충족 시 서울시립대 총장 명의의 수료증이 발급된다.
구종원 서울시 복지기획관은 “노년기는 쇠퇴의 시기가 아닌 계속된 발전과 성장의 시기이므로 성공적인 노후를 계획할 수 있는 평생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시는 올해 '서울 시니어대학' 비학위 과정을 시범 운영하고 이를 토대로 학위과정 과목을 개발해 내년부터는 학점은행제 학위과정(2∼3년)을 운영할 계획이다.
119만 평의 대지에 웅장한 건물, 그리고 바람에 펄럭이는 815개의 태극기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절로 뭉클해진다. 1919년 3월 1일 그날의 함성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103주년 3·1절을 앞두고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한시준(68) 독립기념관 관장을 만나 우리 역사에서 독립운동이 중요한 이유와 의의를 들어봤다.
지난해 제12대 독립기념관 관장에 취임한 한시준 관장은 평생을 ‘독립운동’을 연구한 역사학자다. 그는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1988년부터 2019년까지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한국광복군, 대한민국임시정부, 한중 공동 항일운동 등을 연구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시준 관장은 “제 전공이 독립운동사여서 독립기념관이 만들어질 때부터 교육, 강의도 하고 자문을 하기도 했다. 2006년부터 2년 동안은 독립기념관 내에 있는 한국독립연구소 연구소장을 맡았다”며 독립기념관과의 특별한 인연을 얘기했다.
더욱이 그는 기존의 관습을 깨고 선출된 의미 있는 독립기념관 관장이다. 한시준 관장은 “독립기념관이 건립되고 대대로 관장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 아닌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학자가 관장을 맡은 건 제가 처음이다”라고 밝혔다.
이는 그만큼 한시준 관장이 독립운동 전문가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벌써 1년을 보낸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리고 앞으로 독립기념관을 어떻게 이끌고 싶을까.
“밖에서 볼 때와 관장으로 안에서 보는 게 다르더라고요. 독립기념관을 이렇게 크게 지어놓고, 국민뿐만 아니라 정부도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른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워요. 독립기념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념관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념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1900년대 20세기 전반기에 제국주의가 만연했고 많은 약소국들이 식민지가 됐죠. 식민지가 된 나라들은 독립운동을 했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거의 다 독립했어요. 그런데 독립한 나라들 중에 우리나라처럼 독립기념관을 엄청난 규모로 지어놓고 독립운동 역사를 공부하고 교육하는 나라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독립기념관이 세계적인 기념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나라가 1945년에 해방했잖아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해서 나라를 되찾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미국이 일본하고 싸워서 이겨 어부지리로 해방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우리가 일본과 싸워서 나라를 되찾았다는 것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크죠.”
독립운동의 중요성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 일제 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독립하기 위해 민족운동을 벌인 것을 독립운동이라고 한다. 특히 1919년에는 한국 독립운동 역사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한시준 관장은 독립운동이 우리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에 대해 “한민족의 역사를 반만년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는 오랫동안 다른 민족한테 나라를 빼앗겨본 적이 없다. 그런데 1910년 처음으로 일본에 나라를 뺏겼고, 다시 되찾아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을 다시 살아나게 한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시준 관장은 3·1운동에 대해 “대한민국의 어머니”라고 표현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일제의 폭압적 지배에 맞서 일어난 비폭력 만세 시위운동이다. 전국을 넘어 해외 방방곡곡에서 태극기를 든 사람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3·1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유관순 열사가 꼽힌다.
한시준 관장은 3·1운동에서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부분에 주목했다. 독립선언서에는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한 관장은 “이 핵심 문장은 대한민국이 건립되는 계기가 됐다”며 “3·1절과 대한민국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짚었다.
이후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됐다. 3월 1일에 독립국을 선언했기 때문에 국가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 그러나 이날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보는 것이 맞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대한민국 건국일을 보는 시선은 두 가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1일이라는 입장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봐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린다. 한시준 관장은 “역사적 사실로 보면 1919년 4월 11일이 맞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이다”라고 강조했다.
사실 그동안 암묵적으로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1일에 세워졌다고 봤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고 2008년 광복절에 ‘건국 60주년’ 행사를 열면서 잡음이 불거졌다. 이에 한시준 관장은 칼럼과 강연 등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뿌리”라며 1919년 4월 11일을 건국일로 인정받았다. 문 대통령은 2019년을 ‘건국 100주년’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건국일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고 확실하게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
“1919년에 대한민국이 세워지면서 우리나라 역사는 확 바뀌었어요. 단군 때부터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국가의 주인은 군주였죠. 그때는 국민이라고 하지 않고 백성이라고 했어요. 백성은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죠. 지금은 국민이 주권을 갖고 있고, 권리도 갖고 있어요. 우리 반만년 역사에서 주권을 처음으로 행사하게 됐으니 그때 국가가 세워진 것이 맞는 거죠.”
한시준 관장은 현재도 역사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는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역사가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한 관장은 “1945년 해방 후를 현대사라고 한다. 보통 그때 우리 역사가 새롭게 출발했다고 생각하지만, 독립운동에서 계속 이어진 것이다. 독립운동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해방 시기에도 살고, 그 이후에도 살면서 계속 연결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의정원’이라고 국회도 만들었어요. 국군도 이미 독립운동 시기에 독립군, 광복군이 있었죠. 지금 대한민국 정부도, 국군도, 국회도… 한국의 현대사는 1945년 해방되고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시기의 역사적 경험이 그대로 이어진 거예요.”
독립기념관, 전 세계에 알릴 것
독립기념관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기리고 후세를 위한 산 역사의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관련 사료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민족 기념관이다. 1982년 건립이 추진됐고, 1987년 8월 15일 개관했다. 한시준 관장은 “국민들이 성금을 내서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지었고, 관련 자료도 많이 기증해주셨다”면서 국민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독립기념관의 한 해 관람객 수는 약 180만 명이라고 한다. 지난해는 코로나19의 여파로 114만 명에 그쳤다. 한시준 관장은 “그러나 관람객 중에 외국인의 비율은 1%도 안 된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전시가 흥미롭지 않기 때문에 거의 오지 않는 것”이라고 문제점을 짚었다.
이에 따라 관장으로서 그의 목표는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고, 독립기념관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이다. 한시준 관장은 앞으로 2년 내에 ‘연합국(미국·중국·영국)과 함께한 독립운동’ 전시관 만들기를 추진하고 있다. 1000평의 대규모 전시가 될 전망이다.
독립기념관에서는 지난해 8월 ‘한중 공동 항전 특별전’을 열었고, 올해는 한미 수교 140주년을 맞아 ‘한미 공동 항전 특별전’을 개최한다. 한시준 관장은 “1945년에 광복군이 미국 OSS라는 정보기구에서 훈련을 받고 작전을 수행한 바 있다. 보통 6·25 때 한미 동맹이 맺어진 줄 알지만 이미 오래전 맺어졌다”고 설명하며, 이를 들은 미군 장교도 놀랐던 일화를 소개했다. 이렇게 특별전을 통해 자료를 풍부하게 수집해 최종적으로는 ‘연합국’ 전시를 열 계획이다.
“독립운동가들은 우리 혼자 힘으로는 일본을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1910년에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해서 차지했는데, 한반도로 만족하지 않을 것을 알았죠. 일본이 중국, 러시아, 미국과도 충돌할 것을 예상했고, 일본이 그 나라들과 싸울 때 함께 전쟁한다는 전략을 세웠어요. 실제로 그분들이 예견했던 대로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고, 1941년에는 미국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으며, 아시아를 차지하면서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도 침략했죠. 그래서 일본은 중국, 미국, 영국과 전쟁을 했어요. 우리는 그때 같이 연합해서 일본과 싸웠습니다. 우리나라가 연합국과 독립운동을 같이 해서 나라를 되찾은 것이죠. 그 전시를 보면 우리나라가 독립을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쟁취했다는 것을 알게 되겠죠.”
이처럼 독립운동가들은 전략가였다. 한시준 관장은 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조소앙 선생(1887~1958)의 업적을 특히 높게 평가했다. 더욱이 한 관장과 조소앙 선생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20대 시절 한시준 관장은 사학과 학생이긴 했지만 사실 역사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군대를 가면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군대에서 한 관장은 조소앙 선생의 조카를 만났는데, 그가 집에 있는 조소앙 선생의 책들을 갖다줬다고. 한시준 관장은 그 책들을 읽으면서 역사에 관심이 생겼다. 특히 독립운동을 전문적으로 파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재에 이르렀다.
“조소앙 선생은 독립하면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지 생각한 분이에요. 특히 선생은 삼균(三均)주의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어요. 자본주의 국가도, 공산주의 국가도 각각 장단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선생은 자본주의가 가진 장점, 공산주의가 갖고 있는 장점을 모은 국가를 만든다는 논리를 세웠고, 그게 삼균주의예요. 인류 사회에서 누구도 세우지 못한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 한 사람이죠.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고 안중근 의사, 청산리 전투 등도 모두 훌륭하지만 저는 우리나라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했던 조소앙 선생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박상돈 천안시장은 독립기념관에 ‘K-컬처 전시관’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시준 관장은 이에 대해 “독립기념관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세계에 알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면서 긍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특히 그는 “백범 김구 선생도 문화 국가를 세워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독립기념관의 취지와도 맞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여 눈길을 끌었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그때의 나라를 되찾으려는 간절한 움직임이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으로 이어졌다는 생각도 든다. 한시준 관장은 ‘불가능에 도전하여 가능을 창조한 독립정신’이라고 말한다. 그 독립정신이 바로 대한민국 모든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여기 독립기념관에 오면 엄청난 정신, 기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독립운동 정신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독립운동을 한마디로 비유할 때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달걀이고 일본은 바위죠. 달걀로 바위 못 깨잖아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과 협력하는 길로 갔잖아요. 독립운동가들이라고 달걀로 바위를 깰 수 있다고 생각했겠어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낸 것이 독립정신이죠.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갖고 독립기념관에 오면 독립정신,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정신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으로 많이 많이 오세요.”
보건복지부가 20년 이상 흡연한 중증·고도흡연자의 금연을 지원하는 2022년 ‘전문치료형 금연캠프’를 운영한다.
중증·고도흡연자란 △20갑년(pack year) 이상 흡연력이 있고 2회 이상 금연실패를 경험했으나 금연 의지가 높은 흡연자 △ 폐암, 후두암, 협심증, 뇌졸중 등 흡연 관련 질병을 진단받고도 흡연을 계속하는 자를 의미한다.
갑년이란 하루 흡연량(갑)×흡연기간(년)으로 산출하는 단위이다. 매일 담배 1갑씩 20년을 피우거나 매일 2갑씩 10년을 피우는 흡연자라면 20갑년의 흡연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전문치료형 금연캠프는 4박 5일간 합숙하며 전문적인 금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국가금연 지원 서비스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중증·고도흡연자에게 금연상담과 교육, 건강검진 및 전문의 진료, 흡연 중증도 평가, 심리상담과 스트레스 관리, 운동 프로그램, 금연 치료제 등이 제공된다.
금연캠프는 전국 17개 지역금연지원센터에서 운영되며, 거주지역과 상관 없이 원하는 어디에서나 이용 가능하다. 참가횟수는 흡연자별로 평생 3번 이용 가능하나, 마지막 퇴소일로부터 12개월은 재등록이 불가능하다. 이미 이용 중인 국가금연 지원 서비스가 있는 경우 이용이 끝난 후에 금연캠프에 참가해야 한다.
참가비는 10만 원이지만 수료 시 전액 환급된다. 캠프 수료 후에는 6개월간 총 9회 이상 금연상담 및 관리를 제공한다. 참가자에게는 다양한 금연 행동 강화 물품을 제공하고, 6개월 금연성공자에게 소정의 기념품을 증정한다. 또한, 참가자가 원하는 경우 6개월 이후에도 금연상담전화 및 온라인 금연 커뮤니티 ‘공감톡’에서 지속적인 금연정보를 얻을 수 있다.
금연은 올바른 정보제공, 금연상담, 금연 치료제 등을 병행하면 금연 성공률이 6배까지 증가한다. 실제로 미국에서 중증·고도흡연자 등을 대상으로 운영된 4주치 금연캠프 성공률은 70~80%에 이른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19년 발표한 세계적 담배 유행 현황에 대한 보고에 따르면 스스로 의지만으로 금연 성공률은 4%에 불과하지만, 정보제공·상담·금연 치료제 병행 시 금연 성공률이 최소 3.3배~최대 6.3배 증가한다.
조신행 보건복지부 건강증진과장은 “흡연자의 금연 성공은 본인 의지 및 전문적 치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지지와 응원이 동반되어야 한다”라며 “새해를 맞아 금연을 결심한 중증·고도흡연자들에게 금연캠프는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