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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실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도산의 삶과 함께 살다
-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깨어나서 반성하라’고 말한 도산 안창호는 그 모든 위업을 아우를 수 있기에 진실이 화두인 요즈음,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태산처럼 서 있는 거목이다. 대학 시절 처음 도산의 존재를 접한 후 평생 동안 그를 사숙했다. 일과 삶 모두에 도산의 정신을 새기기 위해 산 김재실(金在實)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지금 시대야말로 도산의 신념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광복 72주년을 맞이한 올해 72세인 그가 평생을 바칠 정도였던, 도산에게서 발견한 거대한 화두란 무엇일까? 우리나라 역사에서 도산 안창호는 유독 커다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그는 1878년에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한 후 언더우드 학당에서 수학했다. 그야말로 조선 말기의 혼돈과 신문물의 합리주의를 동시에 겪으면서 자라난 세대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탁월한 연설을 통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일찌감치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지적이고 신중한 조직가였던 도산 안창호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여 재미동포들이 민족의식을 자각하는 데 일조했으며 일제가 나라를 빼앗으려 하자 바로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 대성학교와 태극서관을 설립해 민족운동을 펼쳐나갔다. 안창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무력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기보다는 지적인 조직가로서 신중한 행보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신중함은 머뭇거림이 아니다. 그가 그 누구보다도 확고한 민족의식과 미래에 대한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이뤄진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은 일제강점기 동안 세계 이곳저곳을 오가며 벌인 그의 행적을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를 통해 오늘날에도 표표히 흐르고 있다.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했어요. 흥사단은 민족운동에 매진할 인재를 모으고 양성하기 위해 조직됐죠. 흥사단 일을 하느라 대학교를 휴학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때는 도산 선생의 이념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흥사단을 어떻게 전파하느냐만 생각하며 살았죠.” 김재실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오롯이 도산에게 바친 것으로도 모자라 그 후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5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도산의 정신을 실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충남 천안이 고향이며 병천중학교를 거쳐 서울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산 안창호와 만나게 된다. “1963년 대학 1학년 때였습니다. 도산 서거 25주년 추모식장에 걸린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는 글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죠. 이를 계기로 흥사단 대학생 아카데미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흥사단은 유력한 사회인사들이 청년 시절 거치는 대표적인 모임이기도 했다. 전남도지사를 지낸 박준영, 순천향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이윤배, 교육부장관을 지낸 황우여가 그 면면이다. 흥사단에 바친 청춘 흥사단 활동은 김 회장의 젊은 시절 꿈이 신문기자가 되게 하는 데도 영향을 줬다. “흥사단에서 라는 잡지가 나와요. 왜 인가 하면 도산 선생의 말씀 중에 ‘기러기는 항상 줄을 맞춰 다닌다’는 말에서 따온 거예요. 그래서 흥사단의 상징이 기러기이기도 하죠. 이걸 제가 3년 동안 편집하고 책을 냈어요. 그래서 언론계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생 여섯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기 때문이다. 가장이 되자 그는 생활인으로서 충실한 선택을 했다.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한 그는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2000년부터는 산은캐피탈 사장으로 활동했다. “산은캐피탈 CEO가 된 뒤 180여 명의 직원들을 책임져야 했죠. 그 고민이 매우 컸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일했어요. 그 와중에도 도산 선생의 정신을 경영에 도입하고자 노력했죠.” 도산의 삶에서 배운 교육자의 삶 산은을 나온 김 회장은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상임고문과 대통령 자문 동북아경제추진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내며 잠시 동안 공직에서의 모험을 하고, 다시 기업계로 돌아왔다. 대아건설 감사와 경남기업 관리총괄 사장, 성신양회 대표이사 사장, 태강코퍼레이션 고문을 거쳐 현재는 동양시멘트(삼표시멘트) 상임감사로 있다. 다양한 조직의 요직을 거치면서도, 그는 도산이라는 자신의 롤모델을 놓치지 않았다. 숭실대와 성균관대, 성신여대에서 ‘경제통계학’, ‘경제수학’, ‘경영정책’ 등을 강의하고 대학 재학 중 도시 빈민 미취학 아동을 위해 청영고등공민학교(야학)를 설립·운영했으며, 흥사단 이외 ‘나라발전연구회’ 총무를 맡는 등 교육이라는 도산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자신의 삶에 심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흥사단은 나이 제한이 없어요. 흥사단 후배들을 제가 많이 만났죠. 대학생활 아카데미 회장, 고등학생 아카데미 지도교사도 했으니. 그때 가르친 고등학생들이 지금 칠십이 다 됐어요(웃음).”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 그렇다면 도산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입니다. 그는 나라가 망한 것도 이완용 때문이 아니라 거짓 때문이라고 하실 정도였죠.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했습니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도층이 진실하지 못한 것을 지적했다. “다른 문제는 아무것도 없어요. 지도층이 거짓말을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도산은 진실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다가온 커다란 유혹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이였다. “1907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도산을 중심으로 청년내각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때 도산이 그 제안을 거절했죠.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는 도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해요.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에 설립됐는데 도산이 5월 25일에 미국에서 상해로 와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해 독립운동에 매진했죠. 또 미국과 상해를 오가며 대독립당 결성 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했어요. 당시 미국에 있는 교포들이 돈을 모아서 상해에 지원금을 보낸 것도 도산의 공이라 할 수 있죠.” ‘도산의 희망편지’로 청년들에게 희망을 김 회장은 도산을 가리켜 ‘사람을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도산 선생이 다른 독립운동가와 다른 것은 그가 인격 훈련을 중시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도산 선생은 항상 교육을 강조했고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래서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들보다도 더 우리가 생활 속에서 닮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게 됐죠.” 그는 도산의 사상이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근거를 도산의 말들에서 찾는다. “도산 선생은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힘이란 신용의 힘, 그리고 지식의 자본, 마지막으로 금전 자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통한 관계를 중요시했고, 한 사람이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갖게끔 공부를 하라고 했으며 돈을 벌어서 저축하여 돈의 힘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죠. 이건 현재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김 회장은 도산이 말한 ‘힘’을 믿고 ‘도산의 희망편지’ 보내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SNS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일이죠. 2016년 3월 10일 선생 서거 78주년이 되는 날부터 시작한 일입니다. 요즘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에게 도산의 말씀 중 한 구절씩을 선정해 매주 목요일에 이메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대략 2만여 명에게 보내고 있고, 받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라도 연락하면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는 대로 그 글귀들을 모아서 책자로 발간할 계획입니다.” 여생은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에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하는 일은 다양하다. 1973년, 사업회는 도산의 묘소를 서울 망우리 산꼭대기에서 도산공원으로 이장했다. 1998년에는 도산기념관 건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마다 3월 10일이 되면 도산의 추모식을 거행한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 때 도산 선생은 일제에 붙잡혀 취조를 받게 됐어요. 그 사건에 도산의 제자 60여 명이 잡혔기 때문이죠. 고문을 당하면서도 도산은 초인간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12월에 병보석을 나와서 다음 해 3월 10일에 사망하시고 말았죠.” 또한 도산학회를 조직해 도산 사상에 대한 논문집도 내고 있고, 연설문이나 서신 등도 책자로 발간했다. 청소년들 대상으로는 도산 정신을 2세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취지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는데 매년 2000명이 넘게 참여한다고 한다. 글짓기 공모도 매년 실시하여 도산의 탄신일인 11월 3일에 시상식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국제학술대회도 열고 있다. 그야말로 도산 안창호와 관련한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멈추지 않고 살아야 멋지게 나이 든다 사업회가 하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은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김 회장의 정의와 묘하게 부합되는 면이 있다. 어쩌면 그 많은 사업들을 추진하는 에너지가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김 회장이 말하는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이란 바로 ‘뭔가를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멈추면 안 되죠. 생각으로 하든 몸으로 하든, 쉬지 말아야 멋지게 나이 드는 겁니다.” 그가 말하는 멋지게 나이 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이다. “도산은 사람을 좋아했어요. 그는 사람을 만나면 성의를 갖고 만나는 사람이었죠. 그렇게 나이 들어서도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는 데 돈이 많이 든다고 안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돈이 많이 드는 걸 피하려면 공동체에 속하는 게 좋습니다.” 점점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어질 수밖에 없는 시니어에게 커뮤니티는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김 회장은 사람 대하는 법을 간략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요즘은 이메일도 있고 전화도 있고 문자도 있잖아요. 그런 도구들로 관심을 가져주고 표현하다 보면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는 거죠.” 도산 정신이 뿌리 내리도록 전파 “도산 선생은 정말 성실하고 매사를 철저히 챙기면서도 크게 생각하신 분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런 도산의 생활 태도를 닮아보려고 노력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해 정의하면서 김 회장은 다시 한 번 도산을 불러왔다. 사람을 키우는 일을 그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도산의 마음은 김 회장을 통해서 그대로 실천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김 회장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를 응축하고 있었다. “날 기억할 게 뭐가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묵묵하게 도산 사상 전파 운동을 할 것입니다.” 김재실 회장은 “1947년 사업회 출범 이래 신익희 선생이나 강영훈 전 국무총리처럼 사회적 지위와 덕망이 높으신 분들이 이끌어왔는데 부족한 제가 회장이 돼 송구스럽고, 두려움이 앞선다”고 밝혔다.
- 2017-09-1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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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인생 후반전
- ‘글을 잘 쓰는 패션 디자이너’ 필자의 후반생 꿈이다. 2012년 퇴직한 후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봤다. 패션 디자인, 패션 모델, 발레와 왈츠 그리고 탱고 배우기, 영어회화, 서유럽 여행하기, 좋은 수필 쓰기, 오페라와 발레 감상하기, 인문학 공부하기 등 많기도 했다. 사람이 살아갈 때 무엇이 중요할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필자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선생님이 되어 30여 년을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일했다. 퇴직을 했어도 공무원 연금이 나와 최소한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우리나라 노인들의 빈곤은 정말 심각하단다. 절반이 빈곤층이라고 한다. 그래도 필자는 평생 원하던 일을 하고 퇴직 후에는 최소한의 생활까지 보장이 되니 이처럼 다행스런 일이 없다. 지금부터는 필자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 공부는 주로 집에서 한국방송 통신대 강의를 통해 충족한다. 요일별로 국문학과 철학, 역사와 서유럽 문화기행,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강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창 자랄 때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의지만 있다면 TV와 인터넷 그리고 서울 각 구의 문화원에서 무료로 혹은 가성비 높은 비용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TV를 바보상자라면서 멀리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필자는 제자들에게 ‘정보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인터넷에서 전복을 구하느냐 미역을 건져 올리느냐는 매체를 이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요즘엔 방송대 강의도 그렇고 교양 프로그램과 양질의 다큐멘터리 등 좋은 콘텐츠가 넘쳐난다. 방송대 강의가 너무 재밌어서 외출을 못할 때도 있을 정도다.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의욕에는 세월도 못 당한다. 필자는 퇴직 후 제일 먼저 강남 라사라 학원에 등록했다. 패션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 선생님 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 패션디자인이었다. 이곳에서 패션디자인 과정 초급 3개월, 중급 3개월을 마치고 서울시 창업스쿨에서 2개월간의 패션디자인 과정을 수료했다. 패션에 대한 열정은 아마 평생 가지고 가게 될 것 같다. 발레는 어려서부터 필자의 로망이었기에 패션디자인 과정을 마친 후 바로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발레를 할 때마다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는지 모른다. 발레가 어린 시절의 로망을 실현시켜주는 취미 정도라면 왈츠와 탱고는 능숙하게 아주 멋들어지게 추고 싶다. 운동할 때는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왈츠와 탱고를 출 때는 어느새 끝나는 시간이 되곤 한다. 건강을 위해, 바른 자세를 위해, 힐링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춤이라고 생각한다. 스웨덴에서는 팔십이 넘은 노인들도 발레를 한다. 노인분들의 표정이 참 행복해 보인다. 서초문화원에서는 수필을 잘 쓰기 위한 수업을 받고 있으며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기자단으로 활동하며 쓴 글이 96편이 될 정도로 글쓰기가 생활화되어 있다. 틈틈이 압구정역에 있는 무지크 바움에 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몇 해 전에는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워킹반에도 등록했다. 주 1회 모델워킹을 연습하고 있다. 2년 동안 패션쇼도 다섯 번 했다. 개성 강한 동료들의 기상천외한 옷차림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옷차림은 전략이고, 옷 입는 것도 일종의 예술 행위’다. 기왕이면 예쁘게 입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훌륭한 액세서리는 젊음이다. 젊은이들을 값싼 옷을 입어도 예쁘지만 나이 들면 옷차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물기 빠진 피부에 옷차림까지 추레하면 볼품이 없기 때문이다. 녹화가 있는 토요일은 될 수 있으면 여의도로 간다. 서포터즈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5포세대, 혼밥, 실업문제, 4차 산업혁명 등 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다루며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메인 브로드캐스터가 강연한 후 미래참여단 서포터즈들이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장에서 녹화에 참여하면 더 생생한 공부가 된다. 20대 젊은이에서 70대 시니어까지 다양한 세대와의 만남도 즐거움 중 하나다. 주 2회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주관하는 서울 둘레길 걷기에 참여한다. 둘레길 걷기는 주 3회 30분 이상 운동을 해야 하는 시니어들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배움이 이어지면 기회가 이어진다’고들 한다. 지금 같아서는 지구촌에서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배움에 대한 열정이 식을 것 같지 않다. 이래도 되는 거야? 삶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거냐고요! 어제는 너무 좋아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올해 4월부터 활동하게 된 온․오프라인 잡지 에 필자 글이 실렸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온라인에만 꾸준히 실렸는데 잡지사에서 정해준 주제 ‘으이구! 주책이야!’에 맞춰 쓴 글 ‘교재를 망가트려 죄송합니다’가 7월호에 실린 것이다. 제시한 주제에 맞춰 처음 써낸 글이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한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필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다. 에서 주관한 시니어 헬스 콘서트에 필자와 함께 온 사람들은 대부분 필자 스타일을 좋아하는 여성과 남성들이다. 모두들 성격이 활발하고 적극적인 분들이다. 하는 일도 인터넷 기자, 사회복지사, 공예가, 모델, 시인, 수필가, 교수 등 다양하다. 서초문화원 문화기행 프로그램에서 만난 분도 있고 동대문 제일평화시장 구두매장에서 필자 스타일에 필이 꽂혀 인연을 맺게 된 분도 있다. 평택여고에 재직할 때 필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정성껏 대하라. 그 사람이 나와 어떤 인연으로 맺어질지 모른다.” 서둔야학 단톡방, 서민동 단톡방, 서울시 낭송회 시음 단톡방, 왈츠 단톡방, 명견만리 서포터즈 단톡방, 꿈방송 단톡방, 뉴시니어 리더스포럼21 단톡방, 강남시니어프라자 해피미디어단 단톡방, 모델워킹 단톡방, 서리풀 문학회 단톡방, 오페라 동호회 모임,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친구들 등 단체회원 단톡방만 해도 만만치 않은 인적 네트워크다. 살아보니 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다. 2년 전 메르스 사태로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에서 녹화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느라 고심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필자가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 모델워킹하는 동료들과 해피미디어단 회원들을 왕창 모시고 갔다. 담당 PD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필자는 바람잡이 역할을 즐긴다.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행사를 할 때는 담당 PD를 초대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필자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각자의 재능을 활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시니어 헬스 콘서트에 참석한 분들도 너무 재밌었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필자에게 말했다. 다음 행사에도 초대해주기를 바란다면서. 아자아자! 이런 것이 바로 윈윈이다. 날개를 달아준 에 감사해하며 오늘도 필자는 저 푸른 하늘을 향해서 힘차게 날갯짓을 한다. 지금 필자의 삶은 글자 그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다. 이런 삶이 수어지교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기쁨! 따봉, 원더풀!
- 2017-07-0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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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AVO’ 정신으로 BRAVO를 외치다
- 30년 이상 정든 직장을 퇴직하고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순간 1억원의 연봉을 받던 필자는 연봉 0원을 받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퇴직 후의 삶에 대해 나름 준비는 했지만 그동안 화려했던 현실은 사막과 동토의 땅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고 단절되어 방향 감각도 점점 둔해져갔다. 그런데 마침 이때 인생이모작지원센터, 종로 3가에 있는 도심권50플러스센터 및 KDB 시니어브리지센터와 같은 교육 과정(인생설계 아카데미)이 있어 참여했다. 인생 2모작 준비를 위한, 액티브 시니어의 길로 가는 첫 발걸음이었다. 인생 2막의 나침반, 액티브 시니어연구원 필자는 위 센터의 교육 과정을 수료한 후 함께 수업을 들은 교육생들과 의기투합했다. 우리나라의 시니어들이 퇴직 후 방황하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나갈 수 있도록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대기업, 금융기관, 교육기관 등 다양한 곳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참여해 만든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 연구원. 본 연구원은 참여자들이 축적한 경험과 지식을 사장시키지 않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사례 중심으로 강의할 수 있는 전문 강사로서의 길을 찾아주면서 한편으로는 퇴직 전후의 시니어들이 강사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연구원의 첫 사업은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액티브 시니어 과정을 개설하는 것이었다. 연 2회 과정으로 고려대 측과 무사히 협의를 마친 액티브 시니어 연구원은 강사진의 자질 향상을 위한 강의안 작성 및 시연 일정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교육 과정에 필요한 재능기부 명강사 확보에도 주력했다. 마침 베이비부머들이 퇴직 후 쏟아져 나오는 시기이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시니어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상황이어서 그런지 신문 매체 홍보와 학교 측의 협조가 순조롭게 이뤄져 액티브 시니어 전문가 과정 정원 40명이 금세 채워졌다. 연구원들은 그동안 갈고닦은 강사로서의 자질을 발휘해 재능기부 강사로 참여했고 본 과정은 2014년 3월 6일 출범식을 가졌다. 액티브 시니어의 정신 : PRAVO 본 연구원 이사회는 교육 방침이자 모토로 ‘PRAVO’를 제정했다. 1. Pride : 자존감 중시 2. Relation : 소통, 관계 중시 3. Active : 적극적인 활동 4. Valuable : 가치 있는 삶 지향 5. Occupied : 평생 현역 이제 시니어들은 정년퇴직 이후 과거처럼 ‘뒷방 노인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와 함께 사회 및 경제 발전에 참여하고 상호 윈윈하는 상생의 파트너십을 발휘해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교육 과정은 은퇴 설계 4분야, 즉 건강, 재무, 관계, 시간 관리에 대한 사례 중심 발표로 이뤄졌는데 현실감 있는 생생한 강의로 수강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 성황리에 마무리된 이 과정은 수강생들이 재능기부와 봉사를 하는 등 다른 유사 강좌와 차이점을 보였다. 자문 및 진행 교수가 멘토로 참석해 교육이 끝날 때까지 함께한 것도 차별화된 프로그램이었다. 필자는 교육 과정을 진행하면서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한 주축을 담당했던 시니어들이 비록 은퇴는 했지만 여전히 대단한 능력과 건강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이들이 앞으로도 우리나라가 제2의 도약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대했던 대로 일취월장 발전을 거듭해온 본 과정은 이번 3월이면 어느새 제7기생 교육 과정에 들어간다. 현재 액티브 시니어 연구원 및 고려대 액티브 시니어 전문가 과정 출신들은 사회 곳곳에 진출해 ‘PRAVO’ 정신을 구현해나가고 있다. 강의 수요 창출하고 콘텐츠 보급한다 고려대 액티브 시니어 전문가 과정 출신들은 현재 사회 각계각층에 진출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제1기 한정수씨는 70세의 나이에 스타 강사가 됐고 김미정씨는 전업주부에서 감성하모니 코치로, 변용도씨는 인생 2막을 용도변경하는 전문 스타강사로서 열정 넘치는 인생 2막의 삶을 보내고 있다. 제2기 김점옥씨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사랑의 노래를 하며 봉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1기부터 6기까지 14인의 활동 상황은 롤모델화해 올해 상반기 라는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이외에도 ‘더평생진로정보연구소’,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한국생활건강연구원’, ‘앙코르브라보노’, ‘희망도레미’ 등에서 활동하는 본 연구원 출신들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액티브 시니어 연구원의 꿈 본 연구원은 비영리 사단법인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새로운 도전을 해나갈 계획이다. 우선 전 지역에 액티브 시니어 연구원과 같은 지사를 설립해 서울 지역 활동에만 국한하지 않고 전국의 도·시·읍·면에 지부를 두고 고려대 평생교육원의 ‘액티브 시니어 전문가 과정’을 전국적으로 확대해나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니어 전문 강사만 최소 500명 이상이 확보돼야 하기 때문에 시니어 평생 현역의 꿈을 실천하는 전당으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액티브 시니어 연구원은 지금도 시연 활동을 매월 지속하고 있으며 특별강사를 초빙해 강의도 들으면서 연구 회원들의 능력 향상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많은 회원들이 자원봉사활동은 물론 공무원 연금공단 강사, 시니어 명강사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중 한 가지 사례를 대표적으로 소개하면 한국 시니어 블로거 협회다. 액티브 시니어 연구원의 김봉중 회원은 한국 시니어 블로거 협회 회장이 되어 활발한 PRAVO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액티브 시니어 연구원은 동작50플러스센터 인큐베이팅룸(이솔터룸)에 입주해 있다.
- 2017-02-0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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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브라보 기획] 시니어 세대, 우리의 소망은요~!
- 2017년 붉은 닭의 해 정유년이 밝았다. 어수선하고 복잡했던 일들이 올해는 꼭 정리되고 치유됐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그렇다면 우리 시니어 세대의 마음은 어떨까? 새해를 여는 시니어들의 마음도 한번 열어보았다. 취재협조 강남시니어플라자 은막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서임철(서대문구 홍은동·76) 저는 시니어 배우입니다. 서울노인영화제에 제가 출연한 작품이 출품된 적도 있어요. 연극부에서 회장을 맡고 있는데 활동이 좀 더 활기찼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단원이 열일곱 명인데 올해는 좀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각 지역 노인대학이나 단체를 방문해 공연 봉사를 하고 싶어요. 노인 연기자를 위해 정부 차원의 문화 관련 분야 지원이 늘었으면 해요. 제가 노후에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봐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연기생활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느낌입니다. 개인적인 소망은 영화 주인공을 꼭 한번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디션도 열심히 보고 있어요. 난타 여왕을 꿈꾼다! 윤상민(강남구 개포동·66) 작년 8월부터 난타를 시작했어요. 10월에는 재능기부 공연도 했고요. 아직 미흡하지만 열심히 배워서 전문 공연자만큼 난타를 잘하고 싶어요. 왕성하게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일어 공부도 시작했어요. 완벽하게 잘하고 싶어서 올해는 더 열중해서 공부를 해볼 생각입니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길 바랍니다. 2017년 나는 댄싱퀸 문혜경(강남구 청담동·69) 젊을 때는 운동도 많이 했는데 10년 정도 안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한 4~5년 전부터 많이 아팠어요. 혈압, 신장, 부정맥 이런 걸로요. 아프면서 버킷리스트를 한번 써야겠다 생각했죠. 그중에 무용을 좀 배우고 싶었습니다. 우선 라인댄스를 배웠어요. 시작한 지는 1년 정도 됐는데 너무 좋아요. 올해는 차밍댄스도 하고 고전무용에도 도전할 겁니다. 줌바댄스도 할 거예요. 신나는 음악에 다양한 스텝과 세련된 춤 동작이 멋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춤을 추면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시니어 모델 콘테스트 대상에 도전한다! 남궁유선 (강남구 방배동·69) 즐겁고 재밌게 사는 것이 소망 아닐까요? 더 늙기 전에 예쁜 모습을 남기고 싶어서 시니어 워킹을 배우고 있어요. 어렸을 때 못했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어요. 사는 것에 급급했고 아이들 키우느라 나를 돌볼 시간이 없었어요. 다 끝났으니까 이제 열심히 나를 위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요. 제 꿈은 시니어 모델 콘테스트에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입상하면 좋겠어요. 올해 도전하려고 합니다. 딸? 결혼하면 안 되겠니? 구신자(관악구 삼성동·70) 제가 허리가 많이 아픈데 치료 꾸준히 받고 더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 딸이 올드미스예요. 마흔셋인데 시집을 안 가요. 시집 좀 갔으면 해요. 그런데 딸은 이대로가 좋다고 하네요. 굳이 등 떠밀고 싶지는 않아요. 혼자 사는 게 행복하다면 말입니다. 제가 강남 시니어 모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2014년부터 TV, 신문, 잡지에 많이 나왔어요.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데 욕심이라면 일인자는 아니더라도 내 이름 석 자가 알려지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글 쓰는 남자 기대해요! 송영섭 (경기도 용인시 영덕동·72) 우선 풍전등화 같은 우리나라가 빨리 안정을 되찾고 바람직한 지도자도 뽑고 평화통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평화통일의 여건을 만드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외교통일 분야에서 공직생활을 30여 년 했어요. 국제정치나 남북통일에 관한 책도 내고 논문도 많이 썼습니다. 올해는 수필 같은 부드러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동안 유머와 관련한 책을 두어 번 낸 적은 있어요. 또 제가 한국검도협회 고문으로 있는데, 기 수련에 관련한 책도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거 다 떠나서 순수한 삶의 철학이 담긴 수필을 쓰고 싶습니다. 화려한 외출은 이제부터다! 한명희(강남구 역삼동·62) 연극을 시작한 지는 몇 개월 안 됐어요. 그래도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연기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전에는 주부였어요. 그러다가 환갑이 지나 나를 위해 산 적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울해하고 있을 때 친구가 연극을 권하더군요. 연극이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완전 초보자인데 주연이셨던 분이 안 나오시면서 얼떨결에 주인공이 됐습니다. 지금 연기에 푹 빠져 있어요. 바람이 있다면 시인으로 등단을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비전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가족들이 제가 하는 활동을 인정해줬으면 해요. 우선 가족한테 칭찬을 듣고 싶어요. 제2인생에서 다시 청춘인데 제가 집에만 있으면 되겠어요?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보니 화려한 외출이었어요.첫 공연 때 가족을 초대할 겁니다. 장한 나를 보여주고 잘했다는 소리를 꼭 들을 거예요. 발길 닫는 대로 떠나는 해가 됐으면… 이주현(중랑구 중화동·72) 남편 병간호를 14년 동안 하면서 저도 허리 수술을 두 번 했습니다. 운동을 할 수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의사 선생님이 소리 지르고 두들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춤이랑 사물놀이를 배우고 있어요. 힐링도 되고 자세 교정에도 도움이 됩니다. 사실 제가 자세가 좀 엉거주춤하거든요.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도 무용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면 자세를 다시 잡아요. 올해는 혼자 여행을 가고 싶어요. 남편을 챙겨야 했고 저도 아팠기 때문에 여행을 많이 못 다녔어요. 국내 여행도 많이 못해봤는데, 더 늦기 전에 제주 올레길을 걸어볼까 합니다. 혹시 여유가 생기면 유럽 여행도 꿈꿔 보려고요. 그러나 꿈으로 끝날 거 같아요. 허리가 아파서 비행기를 오래 못 타거든요.
- 2016-12-3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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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포럼] KCERN ‘고령화와 4차 산업혁명 포럼’ 스케치 “시니어는 보호의 대상이 아닌 생산의 일각”
- 저출산과 수명연장, 베이비부머의 은퇴로 초고속 고령화가 진행 중인 대한민국. 그중에서도 베이비붐 세대의 대거 은퇴는 한국 사회만의 특수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특단의 대책과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 9월 27일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열린 창조경제연구회(KCERN) 제29회 정기포럼 ‘고령화와 4차 산업혁명’에 참여한 각계 분야 패널들의 조언을 담아봤다. 첫 주자로 나선 이남식 계원예술대학교 총장은 ‘고령화 위기 진단’이라는 주제를 발표하며 이번 포럼이 지니는 의미를 강조했다. 이 총장은 “디자인 분야에 있는 사람은 사용자(실제 고객)와의 공감을 중요시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니어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고,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라며 “실질적이면서 훨씬 더 폼 나고 위엄 있게 노후를 디자인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토론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시니어 분야의 리더십을 발휘해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이번 포럼의 주최 측인 창조경제연구회의 이민화 이사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이사장은 “지구온난화보다 더 심각한 것이 고령화”라고 언급하며 “속도는 빠르게, 질은 나쁘게 늙어가는 게 한국의 문제”라고 화두를 던졌다. 그는 KSM(KCERN Silver Model)을 제시해 고령화 현상 및 정책을 분석하며, 고령화 문제는 4차 산업혁명이 선행돼야 해결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공유경제와 긱(Gig) 이코노미의 등장도 눈여겨봐야 한다. 긱은 일종의 소규모 밴드로 인력 매칭 직업의 종말과 프리에이전트의 등장을 의미한다”며 “미국의 긱 플랫폼, 일본의 클라우드웍스 등 사례를 참고해 한국도 시니어 프리랜서와 사내 기업가 양성에 관심을 쏟아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그는 끝으로 “초고령화 국가가 되기까지 10년 남았다. 만약 고령화가 선행된다면 4차 산업혁명으로 가는 에너지가 없을 것이다. O2O(Online to Offline)제도와 기술혁신 등으로 4차산업 완수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두 발표자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김일섭 aSSIT 총장의 진행으로 패널 토론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운을 뗀 강시우 창업진흥원 원장은 “현실적으로 재취업이 어려운 은퇴자들은 대개 치킨집이나 편의점 등의 창업에 도전한다. 창업 경쟁이 과열되면 성공할 확률이 낮은데, 그보다는 기술창업 쪽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개인과 사회에 이롭다”고 제안했다. 그는 “현재 전국에 시니어창업기술센터가 23곳, 여기에 투입된 기업만 430여 개다. 이곳에서 중·장년들이 기술을 습득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 사업으로 이어지도록 지원하고 있다. 예산은 정부 보조금과 크라우드 펀딩을 활용해 마련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시니어가 경제활동에 기여하고 일자리 창출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고 말했다. 소기업의 창업지원을 돕고 있는 박광회 르호봇 대표는 “시니어 세대와 주니어 세대의 협력을 통해 청년과 고령자 취업 문제를 함께 해결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협업 모델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멘토 모델이다. 은퇴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을 청년 세대와 공유하고,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고 배워나가는 등 세대 간 융합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민간의 지혜와 집단의 지성이 존중되는 형태로 그들을 돕기 위한 정책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이삼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고령화대책 기획단 단장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며 은퇴자와 청년 세대 간 일자리 경쟁을 고려해야 할 시점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단장은 “그동안 노인은 부양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지만, 고령화 사회에서는 경제의 주체가 돼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고령자의 노동력을 저평가하는 연령 차별주의가 사라져야 하며, 시니어 스스로도 일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노후의 경제력 문제뿐만 아니라 건강하고 유익한 삶에 대한 고민도 빼놓지 않았다. 노호성 웰니스IT협회&협동조합 부회장은 ‘맞춤형 행복 플레이팅 서비스’ 시장을 개척하고자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노 부회장은 “시니어 인력 활용에 대해 논의할 때 그들의 건강과 체력은 기본”이라며 “시니어의 체력을 측정하는 기준은 젊은 세대와 차별화해야 한다. 가령 윗몸일으키기나 달리기 등은 그들의 신체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가 될 수 없다. 자립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능력이 기준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시니어의 건강을 증진할 수 있는 제도와 서비스를 찾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해 각자의 형편에 맞게 노후를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재 이투데이 대표 겸 한국SR전략연구소 소장은 고령화 문제를 바라보는 언론인의 관점을 언급했다. 이 대표는 “저출산 고령화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컨트롤타워가 분명하지 않아 두루뭉술한 이야기만 오갈 뿐”이라며 “고령화 문제를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책임감 있게 해결해나갈 주체가 필요하다. 연구소나 언론 등 객체의 역할도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보람찬 노후를 위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액티브 시니어가 많다. 그런 이들을 위해 언론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지, 사회의 큰 흐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 함께 고민해나갈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 2016-10-2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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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정리수납 컨설팅 업체 ‘덤인’ 정경자 대표- “물건에 애정 그만 쏟고 좀 버리세요!”
- “오늘만 해도 태안군 안면도, 양평·가평을 갔다가 내일은 대구로 갑니다.” 여유가 없어 보인다는 질문을 건네자 덤인 정경자(鄭京子·50) 대표의 카랑카랑 애교 섞였던 목소리가 풀이 죽으며 답한다. 바빠서 달리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다. 집안일로만 여겼던 ‘정리하고 수납하는 일’을 전문 분야로 끌어올린 주인공 정경자 대표.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스며들 듯 부드러운 방법으로 시장을 넓혀갔다. 쇄도하는 강의 요청과 방송 출연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 취재가 있던 날에는 한 아파트의 광고 모델로 발탁돼 촬영을 마쳤다. 그렇다 쳐도 여전히 생소한 정리수납 컨설팅. 우리 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왜 필요한지 들어봤다. “저를 납득시켜 주세요, 정리수납에 왜 돈을 쓰죠?” 정경자 대표가 정리수납 컨설턴트를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캐나다 주재 한국 물류회사의 법인 대표로 일하고 있었다. “저는 캐나다에서 정리수납 전문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미 캐나다나 유럽에는 20~30년 전부터 있던 직업이더라고요. 자기 물건을 자기가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정리해주기도 하는구나. 막연하게 나중에 한국에 가면 이걸 꼭 직업으로 만들어야지 했습니다.” 막연하게 생각만 해보겠다는 것도 잠시. 회사에서 캐나다 법인의 철수 결정이 갑작스럽게 났고 2002년 한 달 만에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정경자 대표는 회사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물어보는 사람마다 직업으로는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어요. 어찌됐건 아무리 아이템이 좋아도 아직 우리나라에선 인식이 안 돼 있어 사업성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바로 정리수납으로 시작하지 않았어요.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를 교육하고 양성해서 파견하는 일을 했어요.” 당시 맞벌이 부부가 많아져 아이를 자기가 키우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던 때였다. 사업을 하면서도 정리수납에 관한 준비를 꾸준히 했다. “5년 정도 준비 끝에 정리수납 교재와 매뉴얼을 만들고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 교육을 할 때 가르쳤어요. 1대 1서비스를 잘 하기 위해서 정리수납교육을 한 거죠. 그런데 베이비시터가 아이 옷을 잘 정리하니까 고객들 반응이 좋았습니다. 가정관리사도 옷을 세탁하고 개는 것을 달리해주니까 고객 만족도도 좋고 일 하는 사람들 또한 좋아했습니다.” 2010년부터 방송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다 보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저런 거 배웠으면’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다. 드디어 2011년 11월, 한국정리수납협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정리수납 컨설팅 활동을 시작했다. “협회를 만들고 3개월 정도 됐을 때 여성능력개발원에서 여성유망직종으로 정리수납 관리사를 선정했더라고요. 아이템 자체를 보고 한 것 같아요. 경력단절 여성 일자리 창출에서부터, 2015년에는 신직업지원 육성정책에도 정리수납이 들어갔습니다. 여성가족부, 노동부 등 정부기관이 육성한다고 하니 이와 관련한 일자리가 많이 늘어났어요. 사람들 관심도 높아졌고요. 저희만 봐도 정리수납 컨설팅을 교육받고 있는 회원이 전국에 3만9000명 정도입니다.” 정리수납, 한국 사람에게 절실하다 정리수납에 있어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심어지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 교육에 정리수납을 접목해 이용자들에게 미래 사업을 노출시켰다. “저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외국에서 이것을 매우 당연하다고 봤고, 우리나라에서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사람은 어렵게 살아온 시절이 있기 때문에 돈만 생기면 집이랑 차 넓히고 물건 사고 그래요. 자신이 어렸을 때 옷을 잘 사 입지 못해서 아이한테만큼은 옷을 잘 입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과 장난감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제 한계가 왔고, 물건을 버릴 때도 돈을 지불하는 사회가 된 거죠.” 시니어, 정리습관을 기르자 정경자 대표의 말에 의하면 시니어들의 정리 습관은 참으로 심각하다. “지금 제가 잘 버리는지 엄마가 잘 버리는지를 비교하면 우리 엄마가 더 잘 못 버려요. 나이가 들수록 더 못 버리게 돼요.” 시니어 세대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정경자 대표는 ‘애정결핍’의 문제라고 했다. 젊었을 때는 관심 가질 것도, 행동할 것도 많아서 물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이거는 어디서 산 거고, 누가 준 선물이며, 의미를 사람이나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물건에서 찾으려 한다고. “나이가 들면 자식이 분가하거나 배우자가 죽을 수도 있죠. 결국 자기 혼자 남기도 해요. 자식들과 자주 만나 생활한다면 선물해준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요즘은 혹시 온다 해도 아주 잠깐만 있다 가죠. 그러니 이거는 큰아이가 사준 거였고, 이건 누가 사준 거고 말입니다.” 버리는 습관과 정리하는 습관은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 한다. “80세에 갑자기 잘 버릴 수 있느냐?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가 85세신데 제가 뭘 버리라고 말하지 않아요. 어머니 집에 가서 저는 정리 안 해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있기 때문에 제가 하루아침에 바꿔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상처가 될 수 있어서 삶을 이해하려 하지 바꾸려고 들지는 않아요.” 시니어 고객에게 하는 조언은? “제가 시니어를 만났을 때 하는 얘기가 딱 그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죽었을 때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죽는 순간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다 버려지게 된다. 돈 혹은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니면 다 버려진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물건을 정리하는 자식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왜 엄마는 아직까지 이걸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냐고 합니다. 좋은 얘기 안 하죠. 물건을 보며 엄마를 추억하지 않아요. 내가 살아 있을 때 쓰레기들을 남에게 버리게 하는 수고로움은 덜어주고 가야죠. 그게 시니어가 돼가는 것이고 내 삶을 정리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정경자 대표는 시니어에게 정리수납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주방 싱크대 상부장 맨 위에 의자를 받치고 올라갔다가 떨어져 허리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면 기력이 쇠하고 점점 더 빨리 늙는 것을 봐왔다는 것. “왜 거길 올라가는 거죠? 10년에 한 번 쓸까 말까 하면서요. 본인이 그렇게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드려야 합니다.” 한국의 여성 CEO, 일하는 여성을 말하다 사업을 시작한 지 이제 5년째. 여성 CEO로서의 고충을 물어보자 고충보다는 이 분야 선구자로서 할 일이 태산이라고 했다. 벤치마킹할 곳도 없고, 슬로건 교재도 만들어야 해서 바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라고. “그리고 좋은 건 정리수납은 여자들의 섬세함이 필요하잖아요. 남자들이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도 장점이라고나 할까요(웃음)?” 경력단절 여성들과 작업에 대해서도 흥미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전업주부들이 사회적응을 잘 못한다고들 하죠. 그런데 정리수납을 가르치고 기본 원칙을 알려줬더니 이만큼의 전문가가 없는 거예요. 생소한 분야가 아닌 거죠. 자기 삶의 가치가 바뀌었죠. 정리를 못하는 사람에서 정리 전문가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자신감이 생기니까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도 내고요.” 바쁘게 사는 그녀, 복지관 예쁜이 할머니 꿈꾸다 올해 딱 50세가 된 정경자 대표. 그런데 누가 봐도 50대로 볼 수 없는 그녀는 지금 일이 아니면 뭘 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일이 우선 많아요. 결혼도 연애도 시간이 없어서 못 했거든요. 20대 때부터 세계여행도 하고 뭐든 다해봐서 혹시 시간이 좀 생긴다면 운동을 해야겠어요. 얼마 전에 면역력 저하로 세균이 번식을 해서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반성을 많이 했죠. 그런데 퇴원하는 날 방송사 가서 10시간 촬영했어요. 책 읽는 것도 좋아했는데 도무지 시간이 안 나요.” 그리고 그녀에게는 원대한 꿈이 하나 있다. 복지관에서 인기 있는 예쁜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돈을 많이 벌어서 기회가 되면 지금 우리 직원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직원 전용 실버타운을 짓고 싶어요. 이분들이 나이 들어서 정리수납 강의도 하셔서 강사료도 받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100만원 정도의 수입만 있으면 시니어가 되어서도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여기서 나이 먹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리고 90세가 됐을 때 목표는 제가 다니는 복지관에서 가장 예쁜 할머니가 돼 있는 거예요. 그럼 거기서 내가 가장 인기 있는 할머니가 된다면 무척 바쁠 것 같아요. 밥 사준다는 할아버지들도 많을 거 같고요. 내가 아파 복지관 못 나가면 우리 가족이 나한테 전화해 주는 것이 아니라 복지관에 있는 분들이 어디 아프냐고 죽이라도 사가겠다고 하겠죠? 늘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거죠.”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함께 잘 살아가는 세상 꿈꾸는 정경자 대표의 멋진 미래가 궁금해진다. 무엇보다 복지관 퀸카 할머니가 꼭 되길 바란다.
- 2016-08-1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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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국남 뉴컬처 키워드] ‘레드 머니’의 역습
- “중국 자본의 한국 콘텐츠 산업에 대한 투자가 급증했습니다. 근래 들어 연평균 10%대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 콘텐츠 시장이 한국 콘텐츠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중국 레드 머니와 시장의 역습이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윤호진 정책개발팀장은 2016년 콘텐츠 산업을 전망하면서 올해 두드러질 10대 트렌드 중 하나로 ‘레드 머니의 확산과 레드 콘텐츠의 역습’을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중국에서 연출 제작해 후난(湖南) TV가 방송하고 있는 12부작 예능 프로그램 제작비는 한국의 한 지상파 방송사(KBS, MBC, SBS)에서 1년 동안 만드는 모든 예능 프로그램 제작비와 맞먹을 정도로 엄청납니다. 이는 중국 방송 시장의 규모를 바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1월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김영희 전 MBC PD의 말이다. “이번 사건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일인지 본사 스태프도, 어린 쯔위도, 심지어 저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후회스럽고 죄송스럽게 생각됩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다른 나라와 함께 일하는 데 있어 그 나라의 주권, 문화, 역사와 국민 감정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JYP 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 박진영이 지난해 11월,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멤버 쯔위가 방송에서 대만 국기를 흔든 것에 대해 중국인의 비난이 쏟아지고 중국 기업의 트와이스 광고 모델 취소가 잇따르자 공개사과했다. 중국 자본과 시장의 공습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증언들이다. 중국 자본과 시장의 위력이 대단하다. 중국 자본과 시장의 공습은 우선 중국 기업의 국내 제작사와 기획사의 인수 및 투자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한국 인력 및 콘텐츠 중국 진출 봇물, 콘텐츠 제작 관행의 변화, 한국 인력과 노하우가 투입된 중국 콘텐츠의 세계 진출 등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근래 들어 중국 자본의 방송, 영화, 게임 등 한국 콘텐츠 산업에 대한 투자와 기업 인수가 급증하고 있다. 지난 2월 2일 한국 인터넷 음원 사이트의 원조 소리바다가 100억원에 중국 기업 ISPC 리미티드에 넘어갔다. DMG 엔터테인먼트의 방송 콘텐츠 제작사 초록뱀 미디어 인수, 베이징 싱아이 쟈정 인베스트먼트의 연예기획사 겸 제작사 씨그널 엔터테인먼트 인수, 쑤닝 유니버설의 레드로버 인수, 화처 미디어의 영화 투자배급사 NEW에 536억원 투자, 소후닷컴의 연예기획사 키이스트 150억원 투자, 산다게임스의 게임업체 Eyedentity Games에 1112억원 투자, 텐센트 홀딩스의 CJ 게임스에 4877억원 투자 등 중국 자본의 게임 업체, 콘텐츠 제작사, 연예기획사의 인수와 투자가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 현대증권 윤정선 연구원의 보고서 ‘2016년 응답하라 콘텐츠 산업’에 따르면 2010년 9월부터 2015년 9월까지 5년 동안 한국 콘텐츠 기업 인수와 투자 등에 투입된 중국 자본은 무려 1조92억원에 달한다. 또한, 영화 , 드라마 등 콘텐츠 제작 등에도 막대한 중국 자본이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콘텐츠 및 연예인 에이전시 사업을 펼치고 있는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 배경렬 이사는 “최근 중국 기업의 한국 연예기획사, 제작사에 대한 투자나 인수 작업이 급증하고 있다. 중국 기업을 사칭한 투자 사기가 자주 일어나는 것은 중국 투자의 현주소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멤버 쯔위가 지난해 11월 22일 공개된 MBC 사전 인터넷 방송에서 자신이 대만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극기와 대만기(靑天白日旗)를 함께 흔들었다. 이에 대해 중국인과 중국 매체에서 비판과 비난을 쏟아내고 중국 기업들이 쯔위의 광고 모델 계약을 취소하자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트와이스의 소속사 JYP 엔터테인먼트, 박진영, 쯔위의 공식 사과가 이어졌다. 쯔위 논란은 한류의 가장 큰 시장으로 부상한 중국의 현재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재 한류 콘텐츠가 가장 많이 수출되고 한국 제작진의 진출이 가장 왕성하게 이뤄지는 곳이 중국 시장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게임 전체 수출액 29억7383만 달러 중 중국 수출이 32.2%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게임뿐만 아니다. 등 다양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수출, 등 예능 프로그램 포맷 판매 등 방송 콘텐츠, 웹툰, 캐릭터 등 한국 문화 콘텐츠의 가장 큰 수출 시장이 바로 중국이다. 또한, 이민호, 김수현, 전지현, 송혜교, 송승헌, 비, 김태희 등 한류 스타들의 중국 드라마와 영화 출연이 붐을 이루고 있다. 의 장태유, 의 표민수, 의 신우철 등 드라마 PD와 의 김영희, 의 장혁재, 조효진 등 예능 PD, 곽재용, 허진호, 안병기, 오기환 등 영화감독을 비롯한 한국 제작진의 중국 진출이 급증했다. 최근 들어서는 한국 유명 1인 방송 BJ들도 속속 중국 YY, 롱쥬 같은 1인 방송 서비스 업체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보고서 ‘2016년 콘텐츠 사업 전망’에 따르면 중국의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시장 규모는 2014년 1473억달러로 추산되고 2019년 2421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됐다. 세계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4년 8%에서 2019년 11%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규모의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시장으로 급성장했다. 현대증권 윤정선 연구원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시장은 단연 중국이다. 중국은 전 세계 콘텐츠 시장 규모 10위 국가 중 2018년까지 연평균 11%의 독보적인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되는 나라다. 한국 콘텐츠 기업들이 중국에 주력해야 할 이유다”라고 지적했다. 중국 자본과 시장의 위력은 한국 콘텐츠 제작 시스템의 변화를 초래하는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바로 한국 드라마의 사전 제작제 도입이다. 중국에서는 동영상 사이트나 방송에서 당국의 사전 심의를 받은 드라마나 동영상 콘텐츠만을 내보낼 수 있다. 또한, 중국 방송사와 동영상 업체들은 대부분 한국과 동시에 중국에 방송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최근 사전 제작 드라마가 많아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 드라마는 ‘쪽대본’으로 대변되는 당일치기식 제작 형태가 주류를 이뤘다. 드라마의 초반 3~4회만 제작하고 방송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지만 중국 시장 때문에 등 적지 않은 드라마가 방송 전 제작을 완료하는 사전 제작을 하고 있다. 중국 자본과 시장의 위력은 한국 인력과 콘텐츠 노하우가 투입된 중국 영화나 드라마, 프로그램의 세계 진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송혜교가 출연한 오우삼 감독의 중국 영화 이 칸영화제에 진출한 것을 비롯해 한국 연예인이 출연하거나 한국 PD와 감독이 작업에 참여한 중국 콘텐츠들이 세계 시장에 속속 진출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 CJ E&M과 공동 제작한 영화 등으로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시장에 진출했다. 중국 화이브라더스는 향후 3년간 한국 쇼박스와 최소 6편의 합작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고, 중국 화처 미디어는 한국 NEW와 중국에 공동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한중 합작 영화를 제작 할 계획이다. 한중 합작 영화들은 중국과 한국을 넘어 세계 시장을 겨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중국에서 예능 프로그램 를 제작해 후난 TV에서 방송하고 있는 김영희 PD는 “중국은 엄청난 규모의 콘텐츠 시장이 있다. 뛰어난 콘텐츠만 있으면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다. 중국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해외로 속속 수출되고 있다. 는 오는 4월 열리는 세계 최대 콘텐츠 마켓인 칸 MIP TV 2016에도 진출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 막강한 중국 위안화를 바탕으로 위력을 더해 가고 있는, 한국 콘텐츠 산업에 대한 중국 레드 머니와 시장의 공습에 우려의 시선도 존재한다. 바로 양질의 인력 유출로 인한 국내 콘텐츠 제작 역량의 약화와 중국 콘텐츠의 경쟁력 상승으로 인한 국내 콘텐츠 경쟁력 하락이 그것이다. 또한, 대만처럼 한국 콘텐츠 기업이 중국 자본의 인수와 투자로 인해 중국 콘텐츠 하청업체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문제도 제기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국 콘텐츠의 우수 인력이 계속 양성되고 있어 중국 콘텐츠의 하청기지로의 전락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윤호진 정책개발팀장은 “한국 콘텐츠의 중국 시장 의존도가 매우 높은 것은 분명 우려할 만한 문제다. 동남아 등 다른 해외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 2016-03-25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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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라이프] 대학 강단에 선 연예인들
-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해주는 일이 정말 보람 있어요. 강의하면서 젊은이들의 열정과 신세대의 문화코드를 배우기도 하지요.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학생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해 강단에 서는 것이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드라마, 영화, 연극무대를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견 연기자 이순재의 또 다른 직업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다. 대학가는 3월 입학식과 함께 활기찬 새 학기가 시작된다. 최근 들어 대학 캠퍼스에 교수나 강사로 나선 연예인들의 모습이 크게 늘었다. 방송, 연예, 연극, 영화, 음악 등 연예인 지망생이 급증하면서 대학교들이 경쟁적으로 관련 학과를 신설하거나 학생 수를 늘려 대학 강단에 서는 연예인들도 많아졌다. 무엇보다 방송, 연예, 연극, 영화 관련 학과에선 풍부한 현장 경험과 실무가 중요하므로 학생들이 연예인 교수를 선호한다. 또한, 연예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전문성, 대중적 인지도가 대학교 홍보나 학생 모집에 큰 도움이 돼 유명 연예인을 교수로 임용하는 대학이 증가하고 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 대학 강의를 병행하다 전업 교수로 돌아선 김동수 동덕여대 모델학과 교수 같은 경우도 있지만 강단에 서는 연예인 대부분은 연예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대학 강의를 하는 연기자, 가수, 개그맨, 방송인, 모델 등은 석좌교수, 정교수에서부터 초빙교수, 객원교수, 특임교수, 강사 등 다양한 형태로 강의하고 있다. 출강하는 곳도 4년제 대학에서부터 전문대학, 특수 직업학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다. 생생한 현장이야기 학생들 좋아해 이순재는 세종대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가천대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20년 넘게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에게 연기론을 강의하고 있다.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 정교수로 있는 중견 연기자 장미희도 지난 1998년부터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순재나 장미희처럼 대학 강단에 서는 연기자들이 적지 않다. 중견 배우 최란은 한서대 교수를 거쳐 2015년 2학기부터 서강대 영상대학원에서 초빙교수 자격으로 ‘연기 세미나’ 과목을 강의한다. 드라마와 연극무대에서 정교한 연기력을 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하는 정보석은 수원여대 연극영상과 부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스타 연기자 고현정은 2014년부터 동국대학교 연극학부 겸임교수로 위촉돼 매체 연기 과목을 강의하고,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탤런트 배종옥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 밖에 최불암 유인촌 유동근 서인석 노주현 정동환 이인혜 명세빈 이영하 류승룡 이범수 김성령 남성진 등 많은 연기자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현재는 강의하고 있지 않지만, 한때 김희애처럼 교수로 재직하며 대학 강단과 인연을 맺었던 연기자들도 적지 않다. 정보석은 “연기자 교수들은 연기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므로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실기 강의를 하는 데 유리하다. 연예계에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전달하고 조언도 해줘 학생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한, 최란은 “미디어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학생들에게 현장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산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강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가수와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 급증하면서 각종 대학의 실용음악과와 뮤지컬학과에서 강의를 하는 가수와 뮤지컬 배우들도 크게 늘었다. 가수 장혜진은 지난 2009년 한양여자대학교 실용음악과 전임교수로 임용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장혜진은 “전임교수로 실용음악과 보컬 전공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가수로 활동하고 있기에 가수 지망생인 학생들의 강의 참석률이 매우 높다. 실기뿐만 아니라 이론도 철저히 지도한다”고 강조했다. 가수 옥주현은 겸임교수 자격으로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실용음악과에서 강의한 바 있으며 현재 동서울대학 공연예술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뮤지컬을 지도하고 있다. 가수 김연우는 서울종합예술학교 실용음악예술학부 전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인순이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실용음악학부에서 강의하고, 바비킴은 서울예술전문학교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뮤지컬 배우 겸 감독인 박칼린은 호원대학교 방송연예학부의 뮤지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밖에 대학 강단에 서는 가수로는 송대관 김경호 알리 등이 있다. 개그맨들의 대학 강단 진출 바람도 거세다. 개그맨 이윤석은 서울예술전문학교 방송연예학부 학과장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이봉원, 김한석은 한국방송예술진흥원에서 개그맨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희극 연기론을 강의하고 있다. 슬랩스틱 코미디와 다큐 예능의 1인자 김병만은 백제예술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로, 개그맨 박준형은 경인여자대학 방송연예과에서 강사로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남희석 이영자 김미연 김수용 등도 대학 강단에 서는 개그맨으로 유명하다. 방송인, 모델, 쇼호스트 역시 속속 대학 강단에 서고 있다. 아나운서로 활동한 뒤 성신여대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던 손석희 JTBC 사장처럼 아나운서 중에는 대학 강의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KBS 등에서 명진행자로 활동하는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이금희는 모교인 숙명여대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MBC 아나운서 출신인 김경화는 연세대 생활환경대학원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임성민 문지애 박혜진 서현진 김병찬 김성경 등이 아나운서 출신으로 대학 강의를 하는 방송인이다. 일부 연예인 교수들 부실강의로 문제 김동수 동덕여대 모델학과 교수처럼 모델 출신 대학 강사, 교수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모델 박둘선은 한국예술원 모델과 전임교수로 활동하고, 한국모델협회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향기는 대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유난희를 비롯한 쇼호스트들 역시 대학의 방송학과나 쇼호스트학과에 출강하고 있다. 이처럼 연예인들이 대학 강단에 서는 이유는 자신이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 등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연예인들이 대학 강의를 하면서 공부와 연구를 통해 새로운 정보와 지식, 이론을 습득해 연기나 무대에 적용해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대학 강단에 서는 이유다. 이 밖에 대학 강의가 연예인의 이미지 제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점도 대학에 진출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서인석은 “열정이 넘치는 학생들을 보면서 연기자로서 초심을 잃지 않게 된다. 연기와 대학 강의를 병행하는 것은 힘들지만, 대학 강의를 하면서 새로운 이론을 공부하고 현장에 적용할 수 있어 시너지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상당수 연예인 교수들이 탄탄한 실기 실력과 풍부한 현장 경험으로 학생들에게 유익한 강의를 해 학생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하지만 일부 연예인 교수들은 부실한 강의 등 문제점도 드러내고 있다. 시간강사, 겸임교수, 초빙교수, 전임교수, 정교수 등 각종 형태로 대학 강단에 서고 있는 연예인 중 일부가 방송연예 활동과 강의를 병행하는 관계로 잦은 수업 결강, 부실한 수업 내용, 신변잡기로 일관하는 강의 등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유명한 연예인 교수 수업을 신청했다가 강의 내용이 부실해 실망을 표하기도 한다. 새 학기에 강단에 서는 연예인 교수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해 내실 있는 강의로 학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를 원하고 있다. 경북 경산의 대경대학 방송학과 학과장으로 방송 MC 진행 실기, TV 예능 화법, 코멘트론, 아이디어 개발론 등을 강의한 바 있고 요즘에는 특강 형태로 대학생들을 만나고 있는 개그맨 남희석은 “대학 강단에 설 때 학생들이 정말 수강을 잘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강의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나 한 사람이 잘못하면 연예인 전체에 누를 끼치게 된다. 연예인들은 대학 강단에 서는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2016-03-0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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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건의 사회사②] 180여 년 전 처음 나온 하모니카, 구순의 나에겐 80년 친구
- 글 황경춘 전 외신기자클럽 회장 하모니카는 서민들에게도 친숙한 가장 대중적인 악기 중의 하나입니다. 가격이 적당하고, 배우기 쉽고, 그러면서도 오묘한 트레몰로(tremolo)음을 내어 음악 애호가를 매혹합니다. 게다가 100세 시대를 지향하는 요즘의 노인들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한때 침체했던 우리나라 하모니카 동호 운동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습니다. 하모니카의 기원과 확산 이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하모니카가 언제 어떻게 발명되었는지에 관해 여러 설이 있었으나, 현재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것은 1827년 독일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부시만(Christian Friedrich Ludwig Buschmann)이 하모니카의 원형을 발명했다는 설입니다. 베를린에 사는 오르간 직공의 아들이었던 부시만은 이보다 6년 전 16세일 때, ‘오라(AURA)’라는 오르간 조율용(調律用)으로 철제 리드(reed)를 붙인 퉁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모니카 발명의 단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모니카는 꾸준히 개발돼 현재 1500여 종의 모델이 있습니다. 가장 정교한 모델은 1200개 이상의 부품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수작업은 약 50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품 중 많은 부분이 이렇게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고 있어 대량생산이 어렵다고 합니다. 하모니카에는 복음(複音), 단음(單音), 중음(重音)의 세 종류가 있으나 복음이 가장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부시만이 하모니카를 발명한 뒤 몇 차례의 모델 개발을 거쳐, 하모니카의 상업생산을 시작한 것은 독일의 호너(Hohner)사입니다. 전 세계로 판로를 확대한 호너사는 지금도 하모니카 생산의 중심에 있습니다. 1857년 창립된 호너사는 독일 남부의 소도시 트로싱엔(Trossingen)에 있는 군소 하모니카 공장을 흡수했습니다.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부품 제작의 분업화를 실시함에 따라 한때 지역 주민의 약 3분의 1이 하모니카 제작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창업자 마티아스 호너(Matthias Hohner)는 캐나다로 이민한 4촌 형을 통하여 6개의 하모니카를 1862년에 처음으로 북미대륙에 수출하였습니다. 이때 하모니카 한 대의 수출가격은 단 1달러였다고 합니다. 미국에 수출된 이후 번창 미국에 소개된 하모니카는 특히 흑인들이 즐겨 부르는 블루스, 재즈, 포크 뮤직 등의 연주에 좋은 반응을 얻어 크게 유행하고, 독특한 모델도 많이 개발되었습니다. 뉴저지주 유니온에 두 개의 하모니카 제조공장까지 설립되어 번창하였습니다. 이렇게 대중화된 미국의 하모니카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뜻하지 않은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하모니카의 리드에 필요한 특수 합금이 군수품 통제의 영향을 받게 된 데다 하모니카 제작에 긴요한 자재를 적국인 독일이 수출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모니카가 군인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자 미국 정부는 하모니카 제작에 필요한 특수 제강을 하모니카 공장에 계속 배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시라서 자재가 부족해지자 미국은 플라스틱 리드(plastic reed)를 발명하여 이를 하모니카에 사용하였습니다. 이 플라스틱 리드는 미묘한 음질의 차이는 있었지만, 미국 하모니카 산업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대중의 반응도 좋았다고 합니다. 미국 음악계에서 하모니카가 차지하는 위치는 미국 음악연맹이 1948년에 하모니카를 ‘합법적 악기’로 인정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엽에 하모니카 연주 음반은 극소수였고 주로 흑인을 위한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하모니카 연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백인을 위한 음반도 나오게 됐습니다. 당시 하모니카 연주자 래리 애들러(Larry Adler)가 처음으로 저명 작곡가들이 클래식 음악을 위해 쓴 곡을 하모니카로 연주했습니다. 그때까지 하모니카는 역시 ‘완구 악기(toy instrument)’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20년대 19세기 말엽에 이 하모니카가 일본에도 수입되었는데, 그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1896년 8월에 발간된 월간지에 ‘손풍금 독학’이라는 기사가 있고 하모니카 판매 광고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1902년에는 어느 완구 도매상이 독일 호너사의 불량품을 수입하여 완구로 팔아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제 하모니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10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통치가 시작된 후, 이 하모니카가 일본으로부터 흘러들어 1928년에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하모니카 밴드가 결성되고, 1935년에는 역시 평양에 YMCA 밴드가 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필자의 기억에 당시 라디오에서 가끔 하모니카 연주가 방송되었지만, 이것이 우리 동포의 연주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렇게 명맥을 이어 온 우리 하모니카 활동이 광복 후인 1952년 고려하모니카연구단이 결성되고 1957년 대한하모니카협회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체신부 차관이었던 조응천 박사가 초대 회장을 맡은 이 협회는 곧 문공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협회 외에도 한국하모니카연맹, 오케스트라 하모니카 교육센터, 한국하모니카아카데미 등 여러 단체와 수많은 동호회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0년에는 ‘아시아 태평양 페스티벌’을 유치하고, 올해 8월에도 ‘국제 하모니카 페스티벌(International Harmonica Festival)’을 주최하는 등 국제 교류도 활발합니다. 그리고 노인회나 의료기관의 환자 재활에도 하모니카 동호인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하모니카 제작사는 45년의 역사를 가진 미화악기사가 유일합니다. 이 회사는 2008년부터 자체 브랜드의 하모니카를 시장에 공급하고 있는데, 회사 측은 국내외에서 평판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브라질에도 하모니카 애호가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모니카 생산은 독일, 일본 및 중국이 주요 생산국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생산에 노동력의 비중이 큰 만큼, 일본도 국내에서는 교육용으로만 생산하고 중국에서 주문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초등 4학년 때 털장갑 대신 산 악기 올해 92세인 저와 하모니카와의 인연은 열두 살이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됐습니다. 특별히 음악에 취미나 소양이 있는 어린이는 아니었으나 가끔 라디오에서 듣는 하모니카 연주가 어린 저를 홀렸습니다. 그러나 하모니카를 원한다고 사줄 가정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자 어머니는 제게 털장갑을 사라고 30전을 주셨습니다. 제게는 큰돈이었는데 문득 이 돈으로 평소에 원했던 하모니카를 사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학교가 끝난 뒤, 제가 찾은 곳은 장갑 가게가 아닌 악기점이었습니다. 지금 확실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 장갑 살 돈으로 연습용 새 하모니카를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담배 한 갑이 5전 정도였다고 기억합니다. 장갑을 사오지 않은 저의 꼼수는 금방 탈이 났습니다. 인자하신 어머니는 크게 야단을 치기는 하셨지만, 하모니카를 빼앗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간단한 동요나 아리랑 같은 쉬운 노래는 독학으로 하모니카로 불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입학으로 부모 밑을 떠나 진주에서 하숙을 하면서 객지의 외로움을 달랜 것이 이 하모니카였습니다. 당시 최고 인기였던 진주 출신 가수 남인수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 외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고복수의 ‘타향살이’ 등 당시에 배웠던 곡들을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습니다. 음악 소양이 없어 정식 악보는 읽지 못하는 처지지만 하모니카로는 동요, 유행가 등을 즐겨 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일제 하모니카는 광복의 혼란 속에서 행방불명이 되어 1950년 미국공보원에 근무할 때 피난 수도 부산에서 미국인 동료에게 부탁해 구입한 일제 하모니카를 지금까지 쓰고 있습니다. 하모니카는 들숨과 뱉는 숨으로 소리를 내는 리드(reed)가 교대로 배열되어 있어 나이 많은 분이 연주하기에도 별 어려움이 없는 단순하고 편리한 악기입니다. 노인들의 폐활량을 증강시키는 데 효과가 크다고 하니 늦다고 생각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도전해볼 만한 간단한 악기입니다.
- 2015-10-1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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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bby] 드론, DRONE
- 이런 상상해봤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상상. 아직 인간이 직접 하늘을 날 수는 없지만, 드론은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줄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드론의 미래는 무궁무진하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드론은 너무 작동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Nope! 레저용 드론은 몇 시간만 배우면 금방 즐길 수 있다. 벌이 ‘웅웅거린다’라는 뜻을 가진 ‘드론(Drone)’. 바야흐로 드론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드론 기술이 발전하면서 최근 수많은 기업이 드론을 이용해 사업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드론은 일반인들의 생활에까지 깊숙하게 침투하고 있다. 아마존이나 도미노피자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미국 내에서 드론을 이용해 택배서비스를 시범 활용하는 데 성공했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페이스북도 드론을 띄워 무선인터넷 중계기로 활용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산업 전반에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드론이 앞으로 산업과 일상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지마켓에 따르면 1~5월 드론 판매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1%나 증가했을 정도로 그 인기가 폭발적이다. 6월 첫째 주에는 완구 검색순위 중 드론이 1위를 차지해 레저나 취미용으로도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드론,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저 높은 창공에서 도시의 전경을 찍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창공을 가르는 드론에 스트레스를 담아 높이 날려버리자. 식상한 취미에 찌들어 있던 신중년의 생활에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 신중년들에게 추천하는 이유 드론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신중년에게 추천할 만하다. 첫 번째는 어렸을 적 품었던 기계에 대한 로망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드론은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조작이 쉽기 때문이다. 둘째는 재미있으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여기에 써야 한다. 당장 드론을 사서 컨트롤러를 잡으라. 셋째,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드론을 잡고 놀다보면 자연스럽게 손주들의 관심은 드론과 당신에게 가 있을 것이다. 손주와의 밀당은 드론으로 가능하다. 넷째, 은퇴 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삼을 만 하다. 최근 드론 스쿨이나 드론협회를 찾아 드론 수업을 듣는 인원 중 절반은 신중년이라고 한다. 취미도 취미지만 제 2인생의 새로운 활로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건축일을 하는 한 신중년은 매일 들어가는 건축 공정을 촬영해 홈페이지에 올리거나 부동산 홍보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 드론은 어디서 배울까? 경기도 광명시에 위치한 드론스쿨은 이론 교육에서 실습까지 다양한 커리큘럼으로 신중년을 맞이할 채비를 갖췄다. 이론 교육은 항공법과 드론 일반론을 시작으로 드론의 발전 흐름과 세팅법까지 진행한다. 교육장 내에 마련된 실내 체험장과 근처 공원에서 다양한 기종의 드론을 날릴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입문 과정은 2시간 이상 진행되며, 강의자가 3년 넘게 촬영하면서 얻은 경험과 안전한 비행 등 다양한 정보도 제공한다. 입문 과정에 이어 중급, 고급 과정도 준비돼 있다. ◇ 드론 Best 4 - Syma X5C 쿼드콥터 네티즌 사이에서는 일명 ‘국민드론’으로 손꼽힐 정도로 입문자용으로 인기인 드론이다. 가격대비 성능이 뛰어난데다 영상촬영까지 가능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초보자가 사용하기 쉬운 저감도 모드와 고감도 모드 2가지가 지원이 된다. 기본 배터리로 비행은 약 7분 정도 가능하다. 가격 7만원 - 드론파이터 국내업체 ‘바이로봇’에서 제작한 드론파이터다. 기체가 크지 않아 휴대가 간편하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나사가 없이 조립과 분리가 가능해 입문자가 사용하기에 편리하다. 사용자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몰라도 바로 비행이 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조작법이 쉽다. 드론파이터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배틀기능이 포함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러 기체를 날릴 때 적외선 레이저를 이용해 상대기체를 6번 맞추면 착륙시키는 시스템으로 배틀을 할 수 있다. 가격 12만 8천원 - 팬텀3 프로페셔널 깔끔한 외관에 금색 띠를 두른 것이 눈에 띈다. 거기에 1200만 화소의 4K 카메라가 장착돼 항공촬영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다른 기종은 ‘호버링’(제자리에 떠 있는 기능)을 수동으로 해야 하지만, 팬텀3는 GPS를 이용한 자동 호버링 기능을 갖추고 있다. 또한 GPS 시스템과 함께 GLNASS시스템을 듀얼 적용해 최소 36개의 인공위성이 기체의 위치정보와 비행경로를 정확히 추적할 수 있다. 가격 163만원 - 인스파이어1 카본 재질의 프레임과 윤기 나는 하얀색 바디는 마치 에일리언을 연상시킬 만큼 인상적이다. 본체 옆의 랜딩 기어는 이륙할 때 위로 들어 올려진다. 이것은 이 기체에 달린 1200만 화소의 4K 카메라로 360도 촬영을 가능하게 한다. 낮은 지역, GPS가 없는 지역, 실내에서 비행을 할 때 시각 및 초음파 센서 스캔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정확하게 이동할 수 있는 비전 포지셔닝 기능도 갖추고 있다. 중급자 이상에서는 팬텀3와 함께 베스트 셀링 드론으로 손꼽힌다. 가격 380만원 협조 한국드론협회, 드론스쿨(www.droneschool.kr)
- 2015-08-07 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