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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생한방병원, ‘코로나 회복 클리닉’ 개설… 증상별 후유증 환자 진료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국민들의 건강을 지속해서 위협하고 있다. 추가 확진자 수는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으나 아직 수도권 외 지역에서 확산세가 지속되며 지난 11일 기준 재택치료자는 112만 1480명, 전체 누적 확진자 수는 1542만 명에 달한다. 회복 이후에도 각종 후유증이 계속되는 이른바 ‘롱 코비드(Long COVID)’ 현상도 사회 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실제 코로나19 완치자 2만 1615명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바탕으로 실시한 국내 연구에서는 전체 5분의 1 가량이 합병증으로 의료기관을 찾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자생한방병원은 코로나19로 야기된 각종 증상 치료를 위한 ‘코로나 회복 클리닉’을 지난 11일부터 전국 21개 자생한방병원∙자생한의원에 개설하고 진료를 실시한다고 12일 밝혔다. 자생한방병원 코로나 회복 클리닉은 환자가 각자 상황에 맞게 대면 및 비대면 진료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 코로나19 후유증 뿐만 아니라 재택치료자들도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대면 진료를 받는 재택치료자는 일반 환자와 동선이 철저히 구분된 진료 환경에서 치료와 더불어 접수, 수납 등 모든 병원 서비스를 안전하게 이용 가능하다. 코로나19 증상은 기침, 가래와 같은 호흡기 증상 외에 발열, 피로, 후각∙미각 상실, 두통, 어지럼증 등 매우 다양하다. 코로나19 후유증의 경우 극심한 피로감 혹은 기침, 가래 등 증상들이 오래 지속될수록 완전한 일상 회복이 어려울 수 있어 치료에 면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면역 단백질인 사이토카인의 생산량을 늘려 척추와 관절에 신경학적으로 염증성 통증을 유발해 환자의 약 10%가 1년 내 근골격계 통증을 호소한다는 연구 논문도 있는 만큼, 향후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인한 척추∙관절 근골격계 환자의 증가도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에 자생한방병원 코로나 회복 클리닉에서는 코로나19 및 후유증 증상 별로 한약, 약침, 침, 추나요법 등 진료 지침을 세부적으로 마련하고 환자의 증상에 맞는 체계적인 진료를 실시한다. 먼저 진단 결과를 기반으로 기침, 피로, 발열, 소화 불량 등에 효과가 입증된 한약을 처방해 주요 증상들을 완화시킨다. 여기에 면역력 강화 효능이 뛰어난 약침 치료와 함께 영양혈과 인당혈 등 혈자리에 침치료를 병행해 호흡기를 비롯한 전신 기능의 강화를 돕는다. 또한 추나요법을 통해 경추(목뼈) 및 두개골을 교정함으로써 누적된 피로를 줄이고 뇌혈류량을 증가시키는 등 한방 수기치료도 진행된다. X-ray, CT 등 영상검사와 혈액검사, 필수 영양분을 공급하는 비타민 수액처방 등 한∙양방 협진도 이뤄진다. 이를 통해 자생한방병원은 각종 코로나19 및 후유증에 대한 전문적인 협진 치료가 코로나 회복 클리닉의 특장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자생한방병원 이진호 병원장은 “한의학은 전인적인 관점에서 증상의 원인을 찾아 치료한다는 점에서 면역계 이상 증상을 부작용 없이 치료하는데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며 “코로나19 증상 및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신속한 치료가 중요하므로 증상이 만성적으로 발전해 일상생활을 방해하지 않도록 미리 치료에 나서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 2022-04-1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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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죽걸산’에 ‘530 걷기’로 발바닥 통증 생겼다면
- 건강관리에 관심이 많은 이모(63) 씨는 ‘누죽걸산’을 실천하고 있다. 누죽걸산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의미로 건강을 중시하는 시니어들 사이의 유행어다. 이를 위해 이모 씨는 주 5회, 하루 30분 이상 걷는 ‘530 걷기’ 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날이 따뜻해지면서 운동량을 갑자기 늘리다 보니 최근 발바닥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계속 걷다 보면 증상이 나아졌지만 자고 일어나면 통증이 다시 나타났다. 치료를 위해 가까운 병원을 찾아 전문의와 상담한 결과 족저근막염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액티브 시니어 사이에 ‘누죽걸산’이 유행이다. 죽기 살기의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걷고 운동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여기에 따뜻한 봄이 찾아오며 부족했던 야외 활동을 채우고자 밖으로 나서는 시니어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겨울 동안 굳어 있던 몸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봄철 건강관리에 신경 쓰는 게 중요하다. 꽃구경을 위해 산에 오르거나 오랜 시간 걷다 보면 발 사용량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된다. 이때 발바닥에 넓게 퍼져 있는 섬유 띠가 반복적으로 미세한 손상을 입어 염증이 발생하는 족저근막염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시니어의 발은 지방층이 얇아 족저근막염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실제로 족저근막염 치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는 시니어가 주를 이룬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50~60대 족저근막염 환자는 전체 비중의 48.1%(40만 3648명)를 차지하며 20~30대 환자의 두 배가 넘는다. 족저근막염의 대표적인 증상은 아침에 일어나 첫발을 디딜 때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이다. 신체 활동이 없는 밤 동안 족저근막은 수축된다. 그런데 아침에 활동을 시작하면 갑작스럽게 근육이 펼쳐지게 돼 통증이 나타난다. 그 외에도 가만히 서 있을 때 발이 뻣뻣해지거나 발뒤꿈치부터 시작해 발 가장자리를 따라 통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비슷한 증상이 있다면 자가진단법으로 상태를 점검해볼 수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발뒤꿈치를 들고 일어서는 것이다. 이때 발바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면 족저근막이 손상됐을 확률이 높다. 족저근막염은 참고 걷다 보면 근육이 풀려 통증이 줄어들기 때문에 증상이 완화됐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를 방치하면 만성화되거나 시간이 갈수록 통증이 심해져 보행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증상이 의심될 경우 전문의와 상담 후 정확한 발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좋다. 한방에서는 족저근막염 치료를 위해 약침과 한약 처방을 중심으로 보존적 치료를 실시한다. 한약재 추출물을 경혈에 놓는 약침으로 발바닥의 염증을 제거한다. 이후 통증 조절에 효과가 있는 작약감초탕 등 한약 처방으로 염증을 개선한다. 근골격계 질환 치료에 널리 이용되는 자생한방병원 ‘신바로 약침’은 관련 연구논문을 통해 족저근막염 증상 완화 효과가 입증된 치료법이다. 대전자생한방병원과 대전대학교 한의학과 공동연구팀이 발표한 임상증례 보고 논문에 따르면 족저근막염 환자의 통증 수치는 약침 치료 전 10(격한 통증)에서 치료 후 최소 6(중간 통증), 최대 2(약한 통증)까지 감소했다. 족저근막염은 치료에 앞서 예방도 중요하다. 예방을 위한 관리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발이 편한 신발을 신어야 한다. 밑창이 얇고 딱딱한 신발은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바닥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따라서 날씨가 풀리더라도 샌들보다는 쿠션감 있는 운동화를 신는 것이 족부 질환 예방에 도움이 된다. 발바닥뿐만 아니라 발 전체적으로 불편함이 있다면 뒤꿈치 패드를 신발에 넣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실리콘이나 고무로 만든 보조기인 뒤꿈치 패드는 발뒤꿈치 연부 조직을 감싸 쿠션 역할을 하고 발의 부담을 줄여준다. 두 번째로 발 마사지를 권한다. 발은 심장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시니어의 경우 혈액순환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 이때 골프공이나 페트병 등을 발바닥 안쪽으로 굴리면 혈액순환을 촉진해 근육이 이완된다. ‘인체의 노화는 발로부터 시작된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발은 건강한 삶을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젊게 사는 액티브 시니어라면 평소 발 건강에 주의해야 한다. 장시간 보행으로 족저근막이 손상될 수 있음을 주의하며 봄철 건강관리에 힘쓰도록 하자.
- 2022-03-30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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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피는 봄맞이 ‘1·3·5 건강법’
- 코로나19로 재택근무와 원격학습이 늘어나고 외부활동이 줄어들면서 비만율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지난 15일 통계청에서 발간한 ‘2021 국민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비만율은 38.3%로 2019년(33.8%)보다 4.5%p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비만은 고혈압, 당뇨, 지방간, 골다공증 등 각종 합병증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질환이다. 새해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운동 계획을 세우지만 작심삼일이 되곤 한다. 잠실자생한방병원 신민식 병원장은 일상 속에서 간단하게 실천할 수 있는 ‘1·3·5 건강법’을 제안하며 건강관리에 적극적으로 임해볼 것을 권했다. 봄은 활동하기 따뜻한 날씨다. 새해 다짐했던 운동 계획을 다시금 되새기며 지방은 줄이고 근육은 늘려보자. 출퇴근길 ‘한 정거장 걷기’로 군살 제거하자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2019년 24.7%였던 유산소 운동량이 2020년 19.8%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산소 운동은 지방을 연소시키고 심폐 기능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꾸준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일상 속에서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유산소 운동으로는 ‘걷기’가 있다.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렵다면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한 정거장(약 1km) 전에 내려서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운동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발이 지면에 닿을 때 발뒤꿈치부터 발바닥, 엄지발가락 순으로 닿도록 해야 한다. 빨리 걷기 위해 일부러 보폭을 크게 하면 엉덩이 근육을 다칠 수 있으므로 키에서 1m를 뺀 정도로 자연스럽게 한 발 내딛는 게 좋다. 발의 방향도 중요하다. 걸을 때 양발의 끝이 바깥쪽으로 향하거나 발 간격이 좌우로 벌어지는 경우 무릎 연골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팔자걸음이 습관이라면 보도블록의 선을 따라 걸으며 두 발이 11자로 나란히 유지되도록 연습하는 것이 좋다. 또한 쿠션감이 있는 운동화를 착용하면 보행 시 무릎 및 척추에 전달되는 충격을 줄일 수 있다. ‘플랭크 3분 버티기’로 전신 운동 및 코어 힘 강화 늘어난 군살을 걷기 운동으로 제거했다면 이제는 근육을 늘릴 차례다. 근육은 체중의 약 40%를 차지하며 인체 장기들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도 몸 중심의 척추, 골반, 복부를 지탱하는 코어 근육은 몸의 균형과 안정성에 기초가 된다. 따라서 건강한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틈틈이 코어 운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운동법으로는 ‘플랭크’가 있다. 플랭크는 엎드린 상태에서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어깨와 팔꿈치가 90도가 되도록 바닥을 지지하는 동작이다. 이때 발끝은 가지런히 모아 세우고 엉덩이가 처지지 않게 주의해 허리와 엉덩이, 허벅지가 일직선을 이루도록 한다. 자세가 바르지 않을 경우 허리에 무리가 갈 수 있으므로 올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확인해야 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에너지 소모가 큰 운동이어서 처음에는 30초를 버티는 것도 쉽지 않을 수 있으므로 꾸준히 연습하며 서서히 시간을 늘리는 것이 좋다. 신민식 병원장은 “만약 플랭크 동작 후 허리 부위에 통증이 심하다면 허리 근육이 이미 약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가까운 의료진을 찾아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한방에서는 허리 통증 완화를 위해 추나요법을 중심으로 침치료, 한약처방 등을 포함하는 한방 통합치료를 실시한다”고 말했다. ‘5층 계단 오르기’로 엉덩이·허벅지 근육 단련 근육 강화 운동의 효과를 더욱 높이고 싶다면 하체 운동이 효과적이다. 우리 몸의 근육은 50% 이상이 하체에 분포돼 있어 하체 운동을 병행하면 근육량 증가에 크게 도움이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엉덩이 근육이다. 엉덩이 근육은 상체를 받쳐주고 몸을 바로세우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허리와 상하체 관절 건강까지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평소 엉덩이 근육을 강화하는 생활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계단 오르기는 엉덩이 근육과 함께 허벅지 등 하체근육을 자극하는데 효과적이다. 계단 오르기를 5분 동안 하면 수영을 5분 한 것과 같은 열량이 소비돼 체중 관리에도 좋다. 특별한 운동기구 없이 어디든 계단만 있다면 운동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계단을 오를 때는 발바닥 전체를 디디면서 미는 듯한 느낌으로 걸어야 한다. 이때 엉덩이와 아랫배에 힘을 주고 등과 어깨는 곧게 펴는 것이 좋다. 반면 계단을 내려올 때는 체중의 5배 정도의 하중이 무릎에 전해지기 때문에 계단보다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신민식 병원장은 “군살을 줄이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강도의 운동을 꾸준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다”며 “이번 봄에는 마음만 먹으면 일상에서 손쉽게 따라할 수 있는 ‘1·3·5 건강법’을 통해 건강한 일상을 되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 2022-03-2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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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스장 찾다, 무리한 근력 운동에 '허리 삐끗' 조심
- 시니어들에게 겨울철 운동은 실내외 온도차와 고농도의 미세먼지, 빙판길 등으로 위험할 수 있다. 이에 시니어들은 헬스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유산소 운동을 할 수 있고, 시니어들에게 가장 필요한 근력 운동까지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 척추와 관절 등이 굳어진 상태에서 헬스를 시작한 시니어들의 부상이 우려된다. 시니어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부상 부위로 허리가 꼽힌다. 흔히 바벨 등을 이용해 운동하다 보면 허리를 ‘삐끗’하곤 한다. 대부분 척추 주변의 인대와 근육 등이 늘어난 요추 염좌다. 젊은 사람의 경우 삐끗한 허리는 휴식과 찜질 등으로 회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척추 퇴행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니어들은 회복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특히 오랜만에 운동에 나서면 관절 유연성이 떨어지고 근육량이 적어 부상 정도가 심각해질 수 있다. 심한 경우 허리에 전달되는 부담이 쌓여 척추뼈 사이의 디스크(추간판)가 돌출되거나 탈출하는 허리디스크(요추추간판탈출증)로 이어지기도 한다. 부상의 직접적인 이유를 살펴보자. ‘스포츠 안전사고 실태조사’에 따르면 ‘무리한 동작’이 84.2%로 가장 높다. 대부분 전문적인 지도 없이 운동하면서 발생하는 사고다. 하지만 시니어 중에는 전문 트레이너가 상주하지 않은 구청 혹은 아파트 내 헬스장 등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값비싼 수강료도 전문가의 코칭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시니어들의 건강한 헬스를 위해서는 몸에 맞는 운동 강도 조정이 먼저다. 일례로 척추기립근 강화에 좋은 시니어용 플랭크 동작을 살펴보자. 플랭크 동작은 엎드리고 팔꿈치를 바닥에 댄 상태에서 어깨와 90도가 되도록 몸과 머리를 일직선상에 맞추고 버티는 자세다. 시니어의 경우 30초도 버티기 힘들고 허리에 부담이 많이 가해질 수 있다. 대신 기존 플랭크 자세에서 무릎을 바닥에 대고 양손을 일직선으로 펴고 버티는 동작을 하면 부상 위험이 줄어든다. 중량의 기구로 근력 운동을 하고 싶은 시니어라면 두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고중량으로 운동하면 몸이 버티지 못하고 관절이 삐끗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낮은 중량으로 반복된 동작을 하는 것만으로도 근력을 늘리는 데 충분하다. 두 번째로는 정확한 자세가 중요하다. 잘못된 자세는 오히려 몸에 무리를 줄 수 있다. 특히 특정 관절에 힘이 과도하게 들어가는 순간 부상이 발생한다. 요즘에는 시니어들을 위한 운동법 등을 다룬 콘텐츠가 많다. 이를 주의 깊게 숙지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헬스에 나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헬스 운동 이후 요추 염좌를 겪은 시니어에게는 어떤 조치가 우선돼야 할까. 가장 먼저 충분한 휴식이다. 즉시 운동을 멈추고 냉찜질로 부기를 가라앉히며 2~3주간 경과를 보자. 만약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면 가까운 전문의를 찾아 자신의 허리 상태를 꼼꼼하게 체크하고, 필요하다면 적극적인 치료에 나서는 것이 현명하다. 요추 염좌로 인한 극심한 통증으로 거동이 불가능하다면 자생한방병원의 동작침법(MSAT)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동작침법은 한의사가 통증을 일으키는 부위에 침을 놓고 환자의 능동적·수동적 움직임을 유도해 통증을 제어하는 응급침술이다. 특히 동작침법의 효과는 연구 논문을 통해 입증되기도 했다.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가 국제 통증 학술지 ‘PAIN’에 게재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동작침법의 요통 경감 효과는 일반 진통제보다 5배 이상 뛰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헬스를 하며 겪을 수 있는 허리디스크도 비수술 접근법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추나요법을 중심으로 침 치료와 약침 등이 병행된 한방 통합 치료는 통증의 근본적인 원인인 척추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효과적이다. 먼저 한의사가 척추와 주변 조직을 손으로 밀고 당기는 추나요법은 비뚤어진 척추를 바로잡아준다. 제자리를 벗어난 디스크가 신경을 자극해 생긴 염증 제거에 약침이 쓰인다. 한약재의 유효한 성분이 담긴 자생한방병원의 신바로 약침은 여러 연구 논문을 통해 항염 및 조직 재생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노화에 따라 근육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80대의 근력은 30대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근감소증과 관련 있는 관절염, 당뇨, 보행장애 등 노인성 질환을 예방하려면 근력을 지켜야 한다. 단, 근육을 지키려는 과도한 욕심은 오히려 허리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 헬스에 나선 시니어들이여 조심하자. 참으로 신경 쓸 게 많은 나이다. 허리 건강에 도움되는 스트레칭 버드독 스트레칭 ▶ 버드독 스트레칭은 코어 근육을 강화할 수 있는 동작이다. 등부터 허리, 골반, 엉덩이, 복부 근육까지 고루 단련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먼저 양손과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엎드린 상태에서 오른팔과 왼쪽 다리를 동시에 곧게 뻗는다. 반대쪽도 동일하게 하루 10회 3세트 실시한다. 하지만 균형 감각이 떨어지는 시니어의 경우 이 자세가 어려울 수 있다. 이 경우 다리 또는 팔 한쪽만 들고 복부에 힘을 준 상태에서 실시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동작이 익숙해졌다면 위 설명대로 팔과 다리를 동시에 뻗는 자세로 이어나간다. 데드버그 스트레칭 ▶ 누워서 하는 코어 근육 강화 운동으로 데드버그 스트레칭이 있다. 이 동작은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복부 근력을 발달시킴으로써 허리 안정화에 도움을 준다. 편안히 누운 상태에서 천장을 향해 양손을 뻗는다. 무릎을 구부리고 다리를 한쪽씩 들어 올려 골반과 무릎이 90도가 되도록 한다. 이어 왼팔은 머리 위로 오른쪽 다리는 쭉 뻗는다. 천천히 되돌아와 양쪽을 번갈아가며 하루 3회 3세트 실시한다. 만약 무릎 들기가 힘든 시니어라면 사진처럼 무릎을 구부리고 동작을 진행하자. 이어 반대쪽 손으로 허리를 지지한 채 운동해도 된다.
- 2022-02-09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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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호랑이, 찬란한 먹빛을 입다
- 화가이자 만화가인 정석호(55) 화백은 36년째 먹 냄새를 맡으며 종이에 붓을 휘두른다. 호랑이해를 맞아 펴낸 수묵 만화 ‘불멸의 호랑이’는 어미 잃은 아기 호랑이가 산중호걸로 자라나는 짧은 줄거리지만,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생동하는 호랑이의 기운을 전한다. 옛 고(古)에 집 헌(軒), 고헌. 정석호 화백은 어릴 때부터 옛것에 푹 빠져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에서 흰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회장님이 난초를 치는 장면을 보았다. 어찌나 멋있어 보였던지, 그는 그 후로 남몰래 화가를 꿈꿨다. 짧은 찰나였지만 붓끝의 힘 있는 움직임이 강렬히 머리에 남았다. 고달팠던 젊은 예술가의 삶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부터 태백에서 살았다. 한약방을 4대째 이어 꾸리신 아버지는 내가 4형제 중 장남이라 가업을 물려받길 바라셨다.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반대하신 거다. 노트에 낙서를 많이 했는데 가벼운 흔적조차 싫어하셨다.” 당시 아버지의 눈을 피해 동네에서 그림을 구경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만화방이었다. 친구들을 따라 우연히 방문했는데, 아지트 삼아 부단히 들락거렸다. 그림으로 먹고살겠다 결심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만화계로 발을 들였다. 한국화의 전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컸던지라 유명하다는 선생님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수묵화, 문인화 등 다양한 한국화 공부를 20여 년간 했다. 젊은 예술가의 삶은 고달팠다. 중간중간 만화, 교과서 삽화 작업, 사극 대역이나 소품 제작 등 그림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드라마 ‘다모’, ‘미스터 션샤인’, ‘성균관 스캔들’ 등 다수 작품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주로 용모파기 그림이나 난을 칠 때 대역으로 많이 등장했다. “다양한 분야를 부지런히 배워둔 덕에 방송업계에서 자주 일감을 줬다. 보통 예술가들은 전문 분야 하나만 파는데 나는 그들이 원하는 산수화, 사군자, 서예 등 다양한 작품을 다 만들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순수미술만 고집하기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한국은 연륜과 경력이 있는 작가의 그림은 잘 팔리는데, 비교적 젊은 작가 것은 안 팔린다. 최소한 50세가 넘어야 인정받는 것 같다. 수묵화 경우에는 경력이 30년, 40년 되는 사람도 많으니까. 순수미술에 비로소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작년, 재작년부터다.” 정 화백은 수묵화에서 방향을 틀어 동물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워낙 동물을 좋아해 대한민국 국견협회에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이 협회는 진돗개의 혈통을 지키고 보급하는 활동을 펼치는 단체다. 그는 이곳에서 진돗개 순종을 감별하는 일을 도맡았다. “감별사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돗개를 많이 그렸다. 눈을 감고도 진돗개의 특징이나 성향을 읊고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동물화를 집중적으로 그리는 사람이 없어 그 분야에서 자리 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다 조금 더 강렬한 동물을 그려보고 싶어 호랑이 그림을 시도했다. 예상보다 주변 반응이 좋아 꾸준히 발전시켰다.” 수묵화를 알린 호랑이 도사 그는 올해로 20년 차 호랑이 화가다. 많은 동물 중 특히 호랑이에 꽂힌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동물에게는 찾을 수 없는 기상과 용맹성에 매료됐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좋아했고, 산신령으로도 여기지 않았나. 맹수보다 영물로서의 호랑이를 표현하려 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엔 서울대공원을 자주 찾았다. 동물들의 생김새와 활동을 보며 사진도 찍고 간단히 스케치한 후 작업실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TV로 늘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고 도록을 독파했으며,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도 열심히 봤다. “호랑이 도사가 될 정도로 많이 그렸다. 그러다 우연히 일본 에이전시를 통해 후타바샤 편집국장의 눈에 띄어 2014년에 수묵 만화책 ‘백호’를 출간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수묵 기법을 알리고 싶어 만화로 장르를 넓혀봤다. 모든 컷을 손으로 한 장 한 장 그려낸 한국화로 채웠다.” 후타바샤는 인기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를 책으로 엮어낸 메이저 출판사다. ‘백호’는 지난해 모든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절판됐는데, 한국 출판사와 협업해 호랑이해를 맞아 다시 ‘불멸의 호랑이’로 새롭게 선보였다. 영웅은 일시적으로는 숨어 있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세상에 드러난다. ‘맹호복초’(猛虎伏草, 용맹스러운 범은 풀밭에 엎드려 있다)가 주제다. 시베리아 불곰에게 공격당해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은 어린 백호는 오랜 시간 홀로 시련을 극복하며 대자연에서 맹호로 성장한다. 그 후 원수였던 불곰을 물리치고 결국 산의 주인공이 된다는 게 전체적인 줄거리다.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어떠한 역경에도 당당히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다는 말도 있듯이, 이 책에 담긴 그림과 메시지를 보며 독자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길 바란다.” 책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은 백호가 원수 불곰과 당당히 싸워 물리치는 부분이다. 모든 장면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다 보니 수정에 한계가 있어 그렸다 버리기를 반복했다. “전자 기기로는 느낌이 절대 안 살아난다. 수묵이 주는 중후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색을 가능한 한 적게 사용하되 묵의 농도로 질감을 표현했다. 부드러운 붓의 선과 역동적인 터치감에서 오는 매력이 있다. 특히 백호는 줄무늬가 도드라지는 짐승이라 수묵으로 그리는 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3~4시간 걸린 장면도 있고, 15일 이상 그린 그림도 있다.” 끝없는 붓질, 보장된 우연 온 마음을 쏟아내 작품을 완성하지만, 정 화백에게 그림은 항상 어려운 분야다. “쉬운 건 없다. 만화와 순수미술 둘 다 어렵다. 만화는 지루하지 않아야 한다. 보는 사람에게 재미와 감동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순수미술도 마찬가지다. 한 폭에 모든 걸 담아야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있다.” 그는 오후 2시 30분에서 3시쯤 일어나 식사를 한 뒤 작업실로 나온다. 한마디로 저녁형 인간이다. 한두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는 것 외에 나머지 시간에는 온전히 그림을 그린다. 작업이 길어지면 동이 틀 때까지 몰두하기도 한다. 낮에는 사람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간이라 집중력이 분산되고, 방해받는 게 싫어서 새벽에 작업하게 됐다. 노력과 연륜이 쌓여 한 점당 20만~30만 원에 팔리던 그림 가격도 몇 배로 뛰었다. “이제는 300만 원을 준다고 해도 잘 안 판다. 제일 비싸게 팔린 그림은 1500만 원쯤 했다.” 수묵화의 경우 보통 한 달에 5~6점, 호랑이는 1~2점 정도를 그린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쉼 없이 그리는 게 아니라 구도를 잡아둔 뒤 벽에 붙여놓고 보고 또 본다. 어디가 삐뚤어지지는 않았는지, 중심이 제대로 잡혔는지 오랜 시간 살핀다. 그 후 호랑이를 조금씩 그리며 계속 진행 상태를 체크한다. 배경도 어떤 계절이 좋을지, 바위나 나무는 얼마나 그릴지 생각하는 데 며칠이 또 지난다. 완성까지 1년이 꼬박 걸리는 작품도 있다. “사람들이 보통 벽에 잠깐 걸었다 버리려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는 게 아니지 않나. 10년, 20년 동안 걸려 있을 거라 생각하면 대충 그릴 수가 없다.” 정 화백은 호랑이 눈에 가장 공을 들인다. “표정이 편안하지 않으면 새로 그린다. 무섭지 않게, 최대한 차분하고 선한 모습을 그리려고 노력한다. 눈이 제대로 그려지면 90% 이상 완성한 거나 다름없다. 예전에 그린 그림들은 마음에 안 들 때가 많다. 결과물에 완벽히 만족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대통령이 각국 정상들에게 선물로 주는 그림의 주인으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궁에는 그가 그린 ‘참매’, 인도네시아 대통령궁에는 ‘백호 부부’, 아랍에미리트 대통령궁에는 ‘설악 참매’가 있다. “처음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청와대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시절이었다. 우즈베키스탄에 매가 많으니 매 그림을 선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나 보더라. 그것이 계기가 돼 인도네시아와 아랍에미리트 정상 방문 때도 내가 그린 매와 호랑이 그림을 증정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도 아랍에미리트 첫 방문 선물로 내 그림을 채택했다. 이후에도 요청이 들어왔지만, 4점이 채택됐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우연 혹은 운이었다고 말한다. “특별히 내가 잘나서 그렇다기보다 당시 운 좋게 매 그림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우연히 비서관의 눈에 띄어 대통령 마음에도 들었다고 생각한다. 참 신기하고 쑥스럽다. 대통령이 선물로 주는 그림으로 채택된 게 생각보다 홍보에 도움이 많이 됐다. 이제는 내 그림을 하나만이라도 가지는 게 꿈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생겼다. 예술가로서 정말 뿌듯하다.” 한국 호랑이의 진정한 의미 35년의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면서 그 잔재가 그대로 남아 호랑이의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직도 호랑이가 무섭게 포효하고 이빨을 드러내는 듯한 공격적인 이미지로 많이 왜곡돼 있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강한 기질의 호랑이를 그린 병풍을 방 뒤에 많이 놓았다. 특히 대나무 숲에 호랑이가 있는 그림이 대다수였는데, 그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같다. 벵갈 호랑이야 인도 쪽 기후의 영향을 받아 갈대나 대나무 숲에서 서식하지만, 사실 우리나라 호랑이는 대나무 숲을 싫어한다. 대나무 이파리에 몸이 쓸리면 소리가 나 먹이 사냥에 방해를 받는 탓이다. 민화를 살펴보면 보통 소나무와 함께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정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호랑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고 싶다고 말한다. “옛날 호랑이 그림을 살펴보면 주로 산신령이나 동자 등과 함께 편안한 모습으로 있다. 산에서 우리 민족을 내려다보며 든든하게 지켜주는 영물의 의미였던 거다. 김홍도 선생의 맹호도 정도만 살짝 거칠고 나머지 그림들은 대부분 재밌고 친근한 이미지다. 문헌 자료와 조선시대 그림을 많이 찾아봤는데, 조선시대 호랑이는 대표적으로 ‘까치 호랑이’로 설명할 수 있다. 편안한 인상의 까치 호랑이를 보고 이제는 해학적인 요소를 많이 담으려 노력한다. 눈도 좀 크게 그리고, 인상도 순하게.” 요즘은 담비나 족제비를 등장시켜 그림에 스토리를 가미해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호랑이 한 마리만 그리기보다 숲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작은 동물들도 함께 넣어서 마치 대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려고 한다. 고 김기창 선생의 바보 산수도 많이 참고한다. 우리 민화를 이어받아야 하지 않겠나.”
- 2022-02-0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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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리디스크 한방치료 '강산 변해도' 효과 지속
- 10년 뒤에도 허리디스크(요추추간판탈출증) 환자의 비수술 한의통합치료 효과가 유지된다는 연구논문이 최근 최초로 발표돼 화제다.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는 7일 자생한방병원의 한의통합치료를 받은 허리디스크 환자들을 10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통증과 기능 개선 정도가 안정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자생한방병원 이진호 병원장(제1저자) 연구팀은 2006년 1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허리디스크로 자생한방병원에 내원해 추나요법과 침치료, 약침, 한약 처방 등 한의통합치료를 6개월간 받은 환자 가운데 10년 추적관찰에 성공한 65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팀은 치료로부터 10년째 되는 2018년 2~3월에 이들의 치료 효과를 분석했다. 이를 위해 △요통·하지방사통 시각통증척도(Visual Analog Scale, VAS) △허리 기능장애지수(Oswestry disability index, ODI) △삶의 질 평가척도(SF-36 Health Survey) △MRI 디스크(추간판) 탈출량 측정 등이 평가 지표로 활용됐다. VAS(0~10cm)와 ODI(0~100점)는 모두 숫자가 클수록 통증과 장애가 심함을 나타낸다. SF-36(0~100점) 지표는 신체와 정신영역 총 36개 문항으로 이뤄진 삶의 질 측정도구로 점수가 높을수록 삶의 질이 향상됐음을 뜻한다. 분석결과 10년이 넘어서도 많은 환자들의 치료효과가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연구팀은 치료효과가 지속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출된 결과치를 앞서 실시된 한의통합치료 6개월, 1년, 5년 후 효과 측정 연구와 비교 분석했다. 먼저 10년 추적관찰에서 하지방사통 VAS는 치료 전 심한 통증 수준인 7.42가 6개월 후 1점대로 떨어진 후 10년 후까지 0.88로 안정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요통 VAS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치료 전 중등도의 통증인 4.39에서 통증이 거의 없는 1.15로 떨어졌다. ODI 지표에서도 동일한 효과를 보였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치료 전 41.36점으로 다소 심한 기능장애 수준이었던 ODI가 치료 6개월 후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이 없는 11.84점으로 개선됐다. 연구팀이 이번 연구에서 살펴본 10년 후의 ODI는 11.26점으로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SF-36 지표에서는 치료 전 35.62점이 10년 뒤에는 74.09로 2배 이상 올라 긍정적인 변화가 확인됐다. 또한 이번 연구는 환자의 주관적 증상 측정 외에도 MRI 검사를 통해 10년에 걸쳐 디스크 탈출량과 근육량 변화를 객관적으로 살펴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연구에 따르면 치료 전보다 10년에 걸쳐 디스크 탈출량이 점차 줄어들고 허리 근육량은 증가하는 것이 확인됐다. 10년간의 안정적인 호전세의 영향으로 환자들의 한의통합치료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연구팀이 10년 시점의 치료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95.83%(62명)가 ‘만족’ 이상의 답변을 보였다. 특히 한의통합치료에 대한 후회 정도를 묻는 설문에 모든 환자들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자생한방병원 이진호 병원장은 “이번 연구는 허리디스크 치료에 있어 한의통합치료 효과를 다각적이고 장기적으로 추적 관찰해 최초로 입증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척추 질환의 근본을 치료하는 비수술 한의통합치료가 앞으로도 디스크 치료법 가운데 효과적인 대안으로 제시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2022-02-0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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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추압박골절’ 위험 줄이는 안전 습관 3가지
-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다. 겨울은 시니어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계절이다. 건조한 날씨와 실내외 큰 온도 차이, 미세먼지 등이 이어져 감기나 알레르기성 비염이 쉽게 발생하고, 요통·관절염 등 근골격계 질환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겨울철 시니어들을 괴롭히는 것이 바로 빙판길이다. 빙판길은 보행자의 낙상사고 위험이 높아 겨울철 안전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특히 시니어는 균형 감각과 유연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탓에 다른 연령대보다 낙상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낙상으로 진료받은 환자는 5만 5107명이다. 80대 이상이 1만 1204명으로 가장 많았고, 70대 1만 112명, 60대 9023명, 50대 7415명 순이었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낙상 환자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부분의 낙상은 가벼운 타박상이나 염좌 정도에 그치지만 시니어는 근육량과 골밀도가 낮은 만큼 ‘척추압박골절’과 같은 큰 부상에 주의해야 한다. 척추압박골절은 외부 충격으로 인해 척추가 납작하게 주저앉는 질환을 말한다. 초기에는 통증이 가볍게 느껴지다 점점 심해지며, 허리디스크(요추추간판탈출증)와 달리 마비·저림 등 신경 증세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단순 근육통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다. 척추압박골절을 방치하면 허리가 굽는 척추후만증이 나타나거나 척추신경의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낙상 후 통증이 지속된다면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이 좋다. 낙상 후 간단하게 척추압박골절 자가진단을 해볼 수 있다. 척추를 손으로 눌렀을 때 특정 부위의 통증이 심하다면 척추압박골절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기침·재채기를 할 때나 음식물을 삼키는 등 사소한 움직임에 통증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척추압박골절을 의심할 수 있다. 한방에서는 척추압박골절 치료를 위해 침, 약침, 추나요법 등을 병행해 보존적 치료를 실시한다. 먼저 침 치료를 통해 근육·인대 등의 긴장을 풀고, 한약재의 약효 성분을 추출한 약침을 경혈에 놓아 염증을 가라앉히고 근육과 신경을 강화해 골절 부위의 회복을 촉진시킨다. 이후 골절 부위가 충분히 붙으면 추나요법으로 등과 허리의 긴장을 풀고 척추 배열과 균형을 바로잡는다. 추나요법은 한의사가 직접 자신의 손과 신체 일부분을 이용해 틀어진 뼈와 인대를 밀고 당겨 바르게 교정하는 수기요법이다. 2019년부터 건강보험 급여화가 적용돼 많은 근골격계 환자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 근골격계 질환은 치료도 중요하지만 예방이 선행돼야 한다. 낙상사고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안전 습관 3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안전하게 걷는 습관을 익혀야 한다. 겨울철에는 쉽게 손이 차가워지기 때문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보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으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을 때 대처하기 어려워진다. 롱 패딩이나 코트 등 다리를 덮는 긴 외투를 입는 것도 움직임에 제약이 발생해 낙상으로 이어지기 쉽다. 따라서 빙판길을 지날 때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아래쪽 단추를 풀어 하체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좋다. 또한 뒤로 넘어지는 낙상이 부상 위험도가 훨씬 크기 때문에 상체 무게중심을 앞으로 하고 보폭을 줄여 걷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지면과의 발 마찰력을 높이기 위해 구두보다는 운동화 신는 것을 추천한다. 둘째, 낙상을 당하더라도 바로 일어서지 말고 몸 상태부터 살펴야 한다. 낙상 직후 바로 몸을 일으키려다 부상 정도가 심해질 수 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친 곳이 없는지 천천히 몸을 살피자. 만약 허리나 엉덩이 통증이 심할 경우에는 척추와 골반 부위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 셋째,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 낙상 예방을 위해서는 운동을 통한 신체 균형 능력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운동 중에서도 적극 추천하는 것이 하체 근력 및 골밀도 향상을 꾀할 수 있는 ‘체중 부하 운동’이다. 체중 부하 운동이란 뼈에 무게가 실릴 정도의 근력 운동을 의미한다. 초심자는 맨손체조나 조깅, 줄넘기 같은 가벼운 운동으로 시작해 강도를 자신에게 맞는 수준으로 늘려나가자. 일주일에 3일 이상, 하루에 20분 이상 꾸준히 진행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시니어 낙상 환자 중에는 낙상으로 인한 부상을 평소 자주 오는 요통 등 퇴행성 질환으로 착각하고 치료를 받지 않다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소한 낙상이라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2022년 신년을 맞이하는 때에 엉덩방아로 건강을 망칠 수는 없지 않겠는가.
- 2022-01-10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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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눈의 한의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 푸른 눈의 한의사로 잘 알려진 라이문트 로이어 자생한방병원 소속 원장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한의학 세계화와 해외시장 개척 공로를 인정받았다. 자생한방병원 로이어 원장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국내 최초 서양인 한의사다. 1999년 한의사 면허 취득 이후 한의학 세계화를 위해선 외국인들이 효능을 직접 경험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는 철학을 갖고 20년 넘게 해외 환자들의 한방 진료에 앞장서 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해외 재진 환자들을 대상으로 비대면 사후관리 지속에 힘쓰고 있다. 로이어 원장은 과거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태권도 훈련 중 다친 발목을 한의원에서 치료받으면서 한의학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됐다고 소개한 바 있다. 한의원 특유의 한약 냄새 등이 신기했는데, 대학을 통해 체계화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한의대에 지원했다고. 이외에 로이어 원장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를 비롯한 공공기관에서 추진하는 한국의료관광 명예홍보대사, 해외 팸투어 등 다양한 국제 한의학 홍보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의료관광의 저변 확대와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자생한방병원 로이어 원장은 “전세계 환자 및 의료진들에게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리고 글로벌 역량을 키우는데 노력하겠다”며 “코로나19 이후 한의학 세계화를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할 준비가 돼있다”고 말했다.
- 2022-01-0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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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동 불편 중장년 환자, 한의사 방문진료 받는다
- 질환을 앓고 있어 거동하기 힘든 고령층 환자가 한의사를 집으로 불러 한방 방문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보건복지부는 30일부터 ‘한의 방문진료 시범사업’을 한다고 29일 밝혔다. 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따르면 최근 ‘일차의료 한의 방문 진료 수가 시범사업’ 참여 한의원 모집 및 선정을 완료한 가운데 오늘(30일)부터 한의 방문진료 시범사업을 시행한다. 앞으로 마비(하지·사지마비·편마비 등)와 근골격계 질환, 통증, 신경계 퇴행성 질환, 인지장애, 수술 등으로 거동이 불편한 중장년층 환자가 시범사업 참여 한의원에 방문진료를 요청할 수 있게 됐다. 원칙적으로는 진료사고 방지와 환자 안전을 위해 한의원을 방문해 1회 이상 진료를 받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다만 초진 환자도 한의사가 왕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방문진료 이용자(환자)는 방문진료료 9만3210원의 30%인 2만7963원을 부담하면 된다. 나머지는 건강보험이 지원한다. 이번 사업에는 한의원 1348곳이 참여기관으로 선정됐다. 지역별로는 서울 306곳, 경기 245곳, 부산 100곳, 인천 72곳, 대구 69곳 순이다. 선정된 한의사는 시범기간 동안 진찰과 한약제제 처방, 침·구·부항 등의 한의 치료, 각종 검사·의뢰, 교육 상담을 수행한다. 복지부는 ‘일차의료 방문진료 수가 시범사업’을 2019년 12월부터 의과분야를 중심으로 추진해 왔다. 거동 불편자의 의료 접근을 높이고 국민의 다양한 의료 서비스 수요에 대응하는 것이 목표다. 이번 시범사업 시행으로 ‘의과’에서 ‘한의과’ 분야로 방문진료 분야가 확대된다. 한의 방문진료 참여 기관은 300여개인 의사 방문진료 대비 4배 이상 많기 때문에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최종균 복지부 건강보험정책국장은 “향후 시범사업을 운영하며 나타나는 개선 필요사항과 성과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평가해 거동불편 환자가 자택에서도 안심하고 충분한 서비스를 누리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보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방문진료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일반 의원 및 한의원은 복지부와 심평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2021-08-3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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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대륙에서 길을 묻다
-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021-08-27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