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2

“기억 잃어도, 하고픈 말 남아” 치매환자 7천 마디 보니

입력 2026-08-12 07:00

김동선·최현주 교수, 치매 어르신 120명 연구… “대화 속 가족·정체성·주체성 드러나”

(어도비스톡)
(어도비스톡)

치매가 진행되면 말이 짧아지고 대화는 자주 끊긴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치매 또는 인지저하 고령자 120명의 실제 대화를 2년간 분석한 연구가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줬다.

김동선 한국외대 투어리즘·웰니스학부 초빙교수(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와 최현주 나사렛대 언어치료학과 교수가 함께 쓴 ‘치매 단계별 대화의 토픽 모델링 분석’이 미국노년학회(GSA)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더 제론톨로지스트(The Gerontologist)’ 제66권 8호에 이달 수록됐다. 노년학 연구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저널이다.

연구진은 가정과 주야간보호센터, 요양시설을 찾아다니며 경도인지장애(MCI) 36명, 초기 치매 43명, 중기 치매 41명(중증은 제외)을 2년간 만나 대화를 녹음했다. 이 가운데 치매 당사자의 발화 6989개를 추려 단어 빈도와 맥락, 주제를 분석했다.

데이터를 모으는 일부터 만만치 않았다. 김 교수는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데이터가 필요한데 치매노인을 만나기도 힘들고 치매노인과 대화하는 것도 힘들었다”며 “주변의 도움을 받아 치매 어르신들을 찾아가 라포를 쌓고 이야기를 끄집어내 이를 녹음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2년 동안 120명의 치매노인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병과 고통만 이야기한 건 아니야”

가장 큰 화두는 건강과 삶의 고난이었다. 대화를 5개 주제로 분류한 LDA 분석에서는 연구진이 ‘삶의 고난’으로 이름 붙인 주제가 전체의 51.7%를 차지했다. 그 안에는 ‘없다’ ‘혼자’ ‘죽음’ ‘병원’ ‘고통’ ‘건강’ ‘관절염’ ‘다리’ ‘휠체어’ 등이 주요 단어로 포함됐다. 상실과 아픔, 몸의 불편함이 한데 얽힌 이야기였다.

그러나 치매 당사자들의 말은 병과 고통에만 머물지 않았다. 가족과 관계, 지금의 기분, 오래전 기억,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까지 다양한 주제가 함께 흘러나왔다. 더 세밀하게 들여다본 분석에서는 출신 지역, 직업, 종교, 배움, 가족 안에서의 역할 같은 이야기가 ‘정체성’이라는 독립된 주제로,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려는 ‘주체성’이 또 하나의 주제로 떠올랐다.

김 교수는 “치매노인의 이야기라고 하면 부정적인 것만 있을 것 같지만 상당히 다양한 주제들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 결과는 그가 연구해온 사람중심돌봄의 관점과도 맞닿아 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중심돌봄(Person-Centered Care)’이다. 치매 당사자의 말을 기억력 저하나 언어장애의 결과로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지금의 바람을 읽어내는 자료로 대하자는 관점이다. 김 교수는 이 이념을 확산하는 PCC실천네트워크의 대표로도 활동 중이다.

김 교수는 “치매노인이라고 하면 모든 말과 행동이 다 ‘치매증상’으로 해석된다”며 “하지만 증상이 드러나는 순간은 짧으며 대부분의 시간에는 평소 그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다. 평생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의 ‘정체성’을 대화를 통해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큰아들이 아파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넘긴다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어르신이 있다. 이를 단순한 반복 발화로 넘길 일이 아니다. 자녀가 그 사람 삶에서 얼마나 큰 기둥인지가 읽힌다. 젊어서 고생한 이야기를 거듭한다면 그 안에는 자신의 고생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을 수 있다. 김 교수는 “치매노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면 치매케어에 단서가 보인다”고 했다.

“말이 짧아져도 대화 포기할 이유는 없어”

물론 치매가 깊어질수록 대화 방식은 달라진다.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이어간 평균 대화 횟수는 경도인지장애 8.16회, 초기 치매 4.79회, 중기 치매 3.14회로 줄었다. 인지기능이 떨어질수록 한 주제를 오래 붙들기 어려워지는 경향이 통계적으로도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고 대화를 접을 이유는 없다는 게 연구진의 강조점이다. 어르신이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로 새면 “아까 이런 이야기를 하셨죠?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라며 원래 주제로 돌아오도록 도울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할 때는 “어르신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군요”라고 대신 정리해 주는 방법도 있다. 언어적 소통 자체가 어려운 단계라면 눈을 맞추고 적절한 스킨십을 활용하는 비언어적 소통으로 대화를 보완할 수 있다.

문제는 정작 돌봄 현장에서 이런 대화가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2018년 영국 브래드퍼드대 방문을 계기로 사람중심돌봄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요양시설의 의사소통 문제에 주목했다. 종사자와 어르신이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거의 말을 섞지 않고, 그나마 나누는 말도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위험해요”처럼 행동을 막는 표현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의 표면만 믿어서도 안 된다. 어르신이 “괜찮아” “좋아”라고 해도 실제 상태까지 괜찮은 것은 아닐 수 있다. 김 교수 연구팀은 앞선 연구에서 치매 고위험군의 음성을 분석했다.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음높이와 미세한 떨림 같은 음성 특질을 학습시켜 감정을 인식하는 AI 모델을 만든 것이다.

김 교수는 “‘나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음성특질을 살펴보면 그게 괜찮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며 “감정과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불안이나 초조가 느껴질 때 “어르신 지금 많이 힘드시죠”라고 공감해주는 한마디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AI 돌봄기술에 던지는 숙제

이번 연구는 확산 중인 AI 안부전화와 소셜로봇, 챗봇에도 과제를 남긴다. 연구 초기에는 음성인식 기술로 녹음을 문자로 옮기려 했지만 불분명한 발음과 강한 사투리, 개인별 말투를 정확히 잡아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연구진이 직접 녹음을 확인하며 전사 작업을 진행했다.

발음만의 문제도 아니다. 챗봇이나 로봇의 기계합성음이 어르신의 청력 특성과 맞지 않아 제대로 들리지 않기도 하고, 말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답변이 늦고, 반대로 어르신이 말하는 도중 끼어드는 경우도 있다. 맥락을 잘못 짚기도 한다. 한 실험에서는 이용자가 ‘부채’라고 했는데 로봇이 ‘부침개’로 알아듣고 “부침개가 먹고 싶네요”라고 답해 웃음이 터졌다.

김 교수는 “제일 중요한 것은 치매노인이 이 로봇들과 대화할 동기와 흥미가 없다는 점”이라며 “커뮤니케이션만으로 이용자의 몰입을 높이기가 어려운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말을 알아듣는 능력을 넘어 어떤 주제로 어떻게 물어야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지는지를 연구하는 ‘대화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화 오류가 반복되면 당사자의 자존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김 교수는 소셜로봇이 한 어르신의 말을 여러 차례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자, 어르신이 “내가 말을 못해서 로봇이 힘들구나. 미안하다”고 말한 사례를 소개했다.

김 교수는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자신에게로 원인을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노인들의 자존감을 더욱 손상하는 일이 된다”며 “아직 덜 성숙한 기술을 현장에 빨리 보급하기보다 기술적 오류를 없애고 이용자 중심의 기술을 만든 뒤 보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처음 사용할 때 제3자가 곁에서 사용법을 알려주고, 이용자 반응을 관찰해 개발자에게 다시 전달하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했다.

▲김동선 교수.(이준호 기자)
▲김동선 교수.(이준호 기자)

‘말로 하는 사람역사책’을 꿈꾸다

김 교수는 이 연구를 실제 치매 친화형 AI로 잇고 있다. 원유권 라온시큐어 선임연구원과 함께 개발 중인 대화형 건강상담 챗봇 ‘온하루(On-HARU)’다. ‘온전히 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돕는다’는 뜻을 담았다.

온하루는 이용자가 “아무 일 없었어” “잘 기억이 안 나”라고 답해도 대화를 끝내지 않는다. 미리 확보한 관심사와 정보를 바탕으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시는데 오늘도 그림을 그리셨나요”라고 다시 묻거나, “예전에는 심심할 때 무엇을 했나요” “기억이 잘 안 나시면 달력을 보시고 알려주세요”라며 기억의 단서를 건넨다.

궁극의 목표는 한 사람의 역사와 가치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까지 이해하는 개인화된 AI다. 김 교수는 이를 “말로 하는 사람역사책”이라고 표현했다. 훗날 자신이 치매에 걸려 혼자가 되고 누군가에게 돌봄을 부탁해야 할 때, 온하루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돌봄 제공자에게 전달하고 노후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근거가 되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런 기술은 통합돌봄과 재가의료가 확대되는 흐름에서 쓰임이 커질 수 있다. 다만 김 교수는 AI가 감시와 통제의 도구로 흘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기술을 만드는 사람들은 치매나 장애가 있는 노인들을 ‘넘어지기 쉬운 사람’ ‘배회하는 사람’ ‘실종 위험’만을 염두에 둘 것이 아니라, 노인 당사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자립행동을 지원해야 한다”며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 개입하는 역량 중심의 기술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이 연구가 가리키는 곳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치매가 있어도 여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김 교수는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삶이 중단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에서 배제돼서는 안 된다”며 “치매니까 이야기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제 연구는 치매를 가진 사람들도 매우 다양한 삶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을 보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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