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노년층을 삶의 주체로 재정의하고, 길어진 생애주기에 맞춰 사회 전반의 시스템과 비즈니스를 재설계하는 ‘LX(Longevity Transformation·장수사회 전환)’ 논의가 구체화하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가족 돌봄 기능이 약화하고 1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노년기 돌봄부터 생애말기 준비(웰다잉)에 이르는 전 과정을 뒷받침할 서비스 디자인과 지역사회의 역할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서울 강서50플러스센터(센터장 조한종)는 지난 29일 센터 1층 50+라운지에서 ‘LX(장수사회전환)와 웰다잉, 서비스 디자인’을 주제로 시니어비즈니스 테이블 토크콘서트를 개최했다. 조한종 센터장은 개회사에서 “장례와 웰다잉은 죽음의 의식을 넘어 한 사람의 삶과 가치관을 존중하고 남겨진 이들을 돌보는 일이며, 가족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지역사회와 소셜 비즈니스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취지를 밝혔다.
“돌봄, 가족 안팎의 관계망과 대화로 준비해야”
제1발표에 나선 주지현 동국대학교 대우교수(가족학 박사·’미술관에서 노년을 만났습니다’ 저자)는 ‘장수사회, 나이 듦과 돌봄을 다시 생각하다’를 주제로 노년기 돌봄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제언했다. 주 교수는 80세 이후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노년희망’을 제안하며, 앙리 마티스가 70대 암 수술 이후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컷아웃(Cut-outs)’ 기법을 고안하고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예술혼을 이어간 사례를 소개했다.
주 교수는 “대다수 중장년이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며 누군가에게 도움받는 순간을 삶의 끝처럼 두려워하지만, 적절한 도움과 환경이 뒷받침될 때 오히려 좋아하는 일을 변화된 몸에 맞춰 더 오래 이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영국 사회학자 피터 라슬렛의 생애주기 구분을 인용해, 자기 성취를 누리는 ‘제3기 인생’ 못지않게 의존과 돌봄의 필요가 커지는 ‘제4기 인생’을 직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주 교수는 “우리 사회의 정책과 중장년의 시선은 제3기를 늘리는 데만 머물러 있고,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제4기는 없는 것처럼 외면한다”며 “가족의 규모와 사는 방식이 달라진 시대에는 돌보는 이의 수고를 알아주고 돌봄 받는 이의 뜻을 묻는 평소의 대화는 물론, 가족 밖 지역사회 서비스를 어떻게 연계할지 미리 알아두는 것이 진정한 노후 준비”라고 말했다. 또한 가정 내 실천 과제로는 돌봄 수행자가 마음 놓고 자리를 비울 수 있도록 식사나 복약 확인 등 구체적인 역할을 분담해 실질적인 휴식을 보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AI 시대의 ‘휴먼 서비스’가 갖춰야 할 조건
제2발표를 맡은 이준호 브라보마이라이프 노인복지 전문기자는 ‘장수사회 전환과 시니어 비즈니스의 재구성’을 주제로 국내외 취재 현장에서 포착한 시장 변화를 짚었다. 이 기자는 장수사회에서는 소비자와 공급 인력이 함께 고령화되는 만큼, 생물학적 나이로 묶은 ‘고령자 전용’ 기획 대신 퇴직, 자녀 독립, 면허 반납 등 구체적인 ‘생활 사건’에 맞춰 불편을 덜어주는 방식으로 서비스가 전환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한·일 5060 여성 중심의 1인 단위 여가 서비스, 현장 종사자 부담 경감을 우선시하는 에이지테크 도입 기준, 외국인 돌봄 인력의 숙련 인재화, 신원보증부터 사후 사무까지 계약으로 위탁하는 일본의 ‘종신지원 서비스’ 사례를 통해 수요의 구체성과 사후 이행의 신뢰 장치가 시니어 비즈니스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제3발표에서는 최학희 시니어라이프비즈니스 대표(‘시니어 트렌드 2027’ 저자)가 ‘AI로 보는 웰다잉·레거시 서비스의 미래’를 조망했다. 최 대표는 인공지능(AI)이 인간의 도구적·이성적 기능을 빠르게 대체하는 시대일수록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비즈니스와 삶의 핵심이 된다고 진단했다.
최 대표는 “AI 시대에는 말만 하면 기획부터 생애 스토리 정리까지 가능해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Who)’와 ‘왜 이것을 하는가(Why)’라는 본인의 의도와 맥락”이라며 “도구적 업무를 AI가 대신할수록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간극을 메우는 휴먼 서비스가 핵심 가치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웰다잉과 레거시 영역을 ▲곁(선택 가족) ▲뜻(뜻대로 마침) ▲기억(기록 정리) ▲유산의 네 축으로 제시했다. 부부간에도 각자의 공간과 도움의 범위를 정하는 ‘생활의 약속(룰 세팅)’이 필요하며, 자녀에게 유품 정리 부담을 떠넘기는 대신 생전에 사진과 이야기를 AI 등으로 손쉽게 기록하고 무빈소 장례 등 자신이 바라는 작별 방식을 미리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AI 기록 과정에서는 결정하지 않은 ‘미정’의 상태까지 본인의 뜻으로 존중해 왜곡을 막고, ‘기록-본인 확인-공유 범위 설정-기관 연결’로 이어지는 4단계 ‘신뢰 레일’이 공공 인증 기반 위에 설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공 웰다잉’과 50+ 시니어 활동가의 가능성
제4발표에서는 김범용 부천희망재단 상임이사가 ‘웰다잉의 공공영역(경기도 부천) 접근 사례 및 시사점’을 통해 민관협력 실천 모델을 발표했다. 김 상임이사는 1인 가구와 무연고 사망이 급증하는 현실 속에서 ‘혼자 떠나지 않는 부천’을 만들기 위한 공공성의 원칙으로 ▲접근성 ▲자기결정 ▲공동체 책임을 제시했다. 부천희망재단은 시민 기부금으로 예산을 확보해 시·보건소 및 3개 노인복지관과 손잡고 연명의료, 유언·상속, 데스크리닝, 엔딩노트 작성을 아우르는 8주 과정의 웰엔딩 교육을 운영 중이다.
특히 ‘사전장례의향서’ 보급과 중장년 시민활동가 조직인 ‘부천채비사업단’ 사례가 큰 주목을 받았다. 재단은 민간자격 과정인 ‘채비플래너’를 통해 시민들을 교육하고, 지난 5월 5060 여성들이 주축이 된 18명의 부천채비사업단을 출범시켰다.
김 상임이사는 “기존 장례식장은 고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기리기보다 방명록을 쓰고 육개장만 먹고 나오는 절차에 그친다”며 “누구에게 알리고 어떤 방식으로 배웅받을지, 아끼던 물건이나 반려동물은 누구에게 맡길지 미리 적고 대화로 잇는 ‘사전장례의향서’가 시니어 비즈니스의 중요한 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천채비사업단은 웰다잉 강의와 사전장례의향서 작성 지원은 물론, 지역 내 교회·성당·사찰 및 부천시와 협력해 무연고자를 위한 ‘공동체 추모식’을 직접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재단은 최근 108명의 시민이 참여한 ‘부천시민 100인의 유산기부 선언식(시민의 유산)’을 성사시키며 삶의 마지막 나눔을 지역의 미래로 잇는 모델을 구축했다.
이어진 2부 패널토론에서는 50+ 세대의 실천 과제와 제도적 대안이 논의됐다. 주지현 교수는 “특히 남성들이 은퇴 후 배우자나 자녀에게만 의존하기 쉬운데, 아플 때 병원에 함께 가줄 수 있는 동네 친구 등 상호적인 돌봄 관계망을 지금부터 가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생애말기 뜻의 이행 수단인 ‘신탁’과 관련해 최학희 대표는 “인지 저하 등 질병 시기에 재산과 돌봄의 뜻을 정리하지 않으면 분쟁으로 이어지기 쉬운 만큼, 금융기관과 후견 시스템을 통해 뜻을 집행하는 신탁과 가족 간 사전 소통 문화가 확산해야 한다”고 짚었다. 이준호 기자는 베이비부머의 자산이 대부분 주택 한 채에 묶여 있으나 시중은행의 신탁 기준은 25억 원 이상으로 문턱이 높은 현실을 지적하며, ‘치매머니’의 처분만 논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남은 삶과 자립을 지원하는 통합돌봄 연계형 ‘공적 신탁’ 제도를 서둘러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김범용 상임이사는 “60세 전후 퇴직한 중장년은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젊은 세대”라며 “강서구와 50플러스센터 같은 공공 거점이 이들을 웰다잉 강사나 채비플래너 같은 ‘시니어 활동가’로 양성한다면, 중장년의 일자리 창출은 물론 고독사와 무연고 장례 같은 지역사회의 사각지대를 메우는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한종 센터장은 “삶의 마지막을 바꾸는 일은 곧 지금 우리의 삶과 사회를 더 존엄하게 바꾸는 일”이라며 “오늘 논의된 서비스 디자인과 지역사회의 실천 사례들이 한국 사회 전반에 존엄한 마무리 문화와 중장년의 의미 있는 활동으로 뿌리내리는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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