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09

“경도인지장애는 치매 막는 골든타임, ‘졸업’ 가능해”

입력 2026-11-09 07:00

실비아헬스 고명진 대표… 프린스턴대와 서울대 의대 거쳐 에이지테크 창업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이준호 기자)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이준호 기자)

도시락 배달 봉사를 나갔던 스무 살 무렵의 의대생은 좁은 단칸방에 들어서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방 안 가득 빈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알코올성 치매가 이미 깊게 진행돼 온전한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운 독거 어르신이었다. 따뜻한 도시락 하나를 건네는 일이 당장 오늘 하루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어쩌다 저토록 고독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마음이 무거웠다. ‘사후에 하루하루 생명을 연명하도록 돕는 일보다, 애초에 저런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일을 하고 싶다.’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가 노화와 뇌 건강이라는 화두를 붙잡게 된 출발점이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한 고 대표는 탄탄대로로 꼽히는 임상의의 길 대신 2020년 에이지테크 스타트업 실비아헬스를 창업했다. 진료실 안팎에서 마주한 치매 관리의 구조적 빈틈을 기술과 서비스로 메우기 위해서다. 지난 3일 서울에서 만난 고 대표는 “진료실에서 의사가 진단을 내리고 약을 처방해도 환자가 살아가는 대부분의 시간은 병원 밖 일상에 있다”며 “진료실과 진료실 사이의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건강하게 보내게 할 것인가가 실비아헬스가 풀고자 하는 핵심 과제”라고 말했다.

사비 털어 만든 전화 봉사단, 창업의 씨앗 돼

고 대표가 처음부터 사업을 구상했던 것은 아니다. 의대 재학 시절 모의환자 실습을 하면서 많은 동료 의대생들이 두 세대나 차이 나는 고령 환자와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조부모와 함께 자라며 어르신들과의 대화가 익숙했던 그는 독거 어르신에게는 정서적 교류와 인지 자극을 제공하고, 미래의 의사들에게는 고령 환자와의 소통 역량을 길러주는 비대면 전화 봉사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했다.

“일일이 어르신들을 찾아가다 보니 혼자 계시면서 청력이 떨어져 하루 종일 TV만 보시는 분들은 인지가 정말 빠르게 떨어지더라고요. 반면 누군가와 꾸준히 교류하는 분들은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게 보였습니다. 조금만 일찍 개입하면 치매를 막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그는 20대 초반 과외로 모은 사비를 털어 노인상담사와 임상심리사에게 교육 가이드라인 제작을 위탁했다. 종로구부터 서울 시내 구청에 일일이 전화를 돌린 끝에 성동구청과 손을 잡았고, 의대생 5명으로 시작한 봉사단은 입소문을 타며 의대생 60여 명과 어르신 200명이 참여하는 3기 플랫폼으로 커졌다. 목소리만 듣던 학생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직접 학생들의 영상을 촬영해 태블릿PC로 들고 찾아가 보여주기도 했다.

봉사단 운영비를 마련해 볼 요량으로 어르신 음성 분석 아이디어를 더해 나간 창업경진대회에서 덜컥 우승을 차지하면서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다. 풀타임으로 매달리지 않으면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본과 4학년 진학을 앞두고 휴학계를 냈다. 때마침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면서 대면 서비스가 멈춰 섰고, 전화 봉사 모델은 모바일 앱 서비스인 ‘실비아’로 빠르게 전환됐다.

할머니의 경도인지장애로 체감한 돌봄 공백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나침반이 된 것은 경도인지장애 판정을 받은 친할머니였다. ‘보호자’의 자리에 서자 공공 치매 관리 체계의 한계가 보였다.

“치매안심센터에 가보니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 많았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 계속 들을 수가 없었어요.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1년을 기다려야 했죠. 인지 저하는 수술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데, 센터 수업이 끝나면 보호자가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문제집을 사다 같이 푸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교수가 만들었다는 인지 학습지를 내드려도 할머니는 숙제를 잘 하지 않으셨다. 고 대표는 “어린아이는 부모가 시키면 하지만 어르신은 스스로 필요성을 느껴야 움직인다”며 “의학적 근거가 탄탄하면서도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고 재미까지 갖춘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2021년 정주영 창업경진대회 최우수상 수상 이후 코로나19로 센터 운영이 중단됐던 광주 서구 치매안심센터와 손잡고 첫 파일럿 및 조선대병원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과연 노인이 스마트폰 앱을 쓰겠느냐’는 주변의 회의적인 시선과 달리, 초반 1~5회 대면 사용안내 교육을 거치자 어르신 10명 중 9명이 이탈 없이 앱을 사용했다.

특히 그는 앱의 실질적 가치를 검증하기 위해 시중에 판매해도 손색없을 만큼 정교한 ‘종이 학습지’를 직접 제작해 앱과 비교 임상을 진행했다. 두 집단 모두 끝까지 과제를 수행했지만, 임상적 효과에서는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종이 학습지는 문제를 풀어도 즉각적인 반응이 오지 않지만, 디지털 앱은 화면을 누를 때마다 소리와 음악, 시각적 보상이 돌아오는 ‘피드백 루프’가 작동합니다. 상호작용이 가능한 몰입형 콘텐츠가 임상적 효과를 끌어올린다는 사실을 숫자로 확인할 수 있었죠.”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이준호 기자)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이준호 기자)

치매 치료제의 명암… 비약물적 개입 중요한 이유

창업 6년 차에 접어든 지금, 고 대표는 인지 건강 시장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거대언어모델(LLM) 인공지능의 등장과 함께 알츠하이머성 경도인지장애 및 초기 치매 치료제인 ‘레켐비(성분명 레카네맙)’ 등의 등장이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꿨기 때문이다. 과거 중기 이후 치매 돌봄에 머물던 관심이 ‘초기’, 나아가 ‘치매 전 단계’와 ‘고위험군 예방’으로 빠르게 앞당겨졌다.

하지만 임상 현장에서 바라보는 신약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 연간 3000만 원에 육박하는 높은 비용은 물론, 뇌부종이나 뇌출혈 같은 부작용 위험 때문에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았더라도 의학적으로 투약할 수 없는 환자가 적지 않다. 또한 뇌 속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 제거됐다고 해서 곧바로 환자의 인지 기능이 예전처럼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고 대표는 “의사 입장에서도 경제적 여력이 빠듯해 보이는 환자와 보호자 앞에서 완치제도 아닌 고가 약의 존재를 꺼내는 것 자체가 큰 윤리적 고민이 된다”며 “건강상의 이유로 치매 치료제를 맞을 수 없거나 비용 부담이 큰 분들, 혹은 약물 치료와 병행해 체계적인 관리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비약물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주목하는 또 하나의 임상적 지점은 ‘가성 치매’로 불리는 노인 우울증이다. 10대의 우울이 짜증이나 은둔으로, 20~30대의 우울이 무기력감으로 나타난다면 60~70대 노년기 우울증은 온몸의 통증이나 급격한 인지 기능 저하로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 기억력이 부쩍 떨어져 치매인 줄 알고 찾아왔지만 정밀 검사를 해보면 우울증인 사례다.

“인지 저하 어르신들을 보면 개입했을 때 나빠지는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군이 있고, 실제로 좋아질 수 있는 군이 있습니다. 특히 우울증이나 정서적 문제와 맞물린 초기 인지 저하는 조기에 개입하면 적은 시간과 에너지로도 눈에 띄게 회복됩니다. 방치할수록 회복 여력은 줄어들고 비용과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죠. 경도인지장애가 치매를 막는 마지막 골든타임인 이유입니다.”

실비아헬스가 핀란드의 세계적인 치매 예방 임상 연구인 ‘핑거(FINGER) 연구’를 토대로 단순 두뇌 게임이 아닌 운동·생활습관 통합 관리를 고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 대표는 “옆 사람과 대화하기가 약간 숨찰 정도의 유산소 운동과 저항 운동을 결합하면 뇌 신경세포의 연결망을 강화하는 뇌 신경영양인자가 생성된다”며 “인지 기능이 떨어지면 무엇부터 계획하고 실천해야 할지 판단하는 ‘실행 기능’도 함께 저하되는데, 복잡한 의학적 예방 원칙을 어르신들이 일상에서 아주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쪼개어 설계해 주는 것이 전문가와 기술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뇌 건강하면 떠오르는 기업으로 자리 잡고 싶어”

이러한 임상적 고민의 결실로 올해 7월 말 경기도 하남시에 문을 연 곳이 오프라인 브레인 헬스 센터인 ‘실비아 캠퍼스’다. 앱 사용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온라인 검색으로 유입된 이용자보다 오프라인 기관을 통해 온보딩 교육을 받고 유입된 이용자의 장기 지속성이 월등히 높다는 점에 착안해 구축한 ‘온·오프라인 하이브리드’ 실증 공간이다.

실비아 캠퍼스는 중증 어르신을 돌보는 주야간보호센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신체 기능 위주로 판정되는 장기요양등급을 받지 못했거나, 데이케어센터에 가기에는 기능이 양호한 경도인지장애·초기 인지저하 어르신들이 주 대상이다. 1층 의원과 연계해 임상심리사, 심리상담사, 작업치료사, 사회복지사 등 병원급 전문 인력이 정밀 평가를 진행하고 맞춤형 훈련을 제공한다.

“이름을 ‘캠퍼스’라고 지은 이유는 이곳이 평생 머무는 시설이 아니라 ‘졸업’을 시켜드리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효자·효녀라도 부모님을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모실 수밖에 없는 시점이 찾아오는 걸 숱하게 봤습니다. 그 시점이 오지 않도록 예방하고, 스스로 뇌 건강을 유지하는 습관을 익혀 일상과 사회로 복귀하도록 돕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오프라인에서 앱 교육과 지원을 하고 일상은 온라인 앱으로 관리하는 복합 모델이 정착되면, 기존 센터가 200명을 수용할 때 1000명까지 관리 범위를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시대하고 있어요.”

제품군도 고도화하고 있다. 은퇴 직후부터 중기 경도인지장애 환자를 겨냥한 디지털 치료기기(DTx) ‘실비아-Rx’는 개발을 마치고 GMP(제조 및 품질관리기준) 갱신을 거쳐 내년 식약처 품목허가 신청과 병·의원 처방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존 실비아 앱 역시 캠퍼스 입소부터 졸업 후 일상 관리까지 책임지는 지속 관리 플랫폼으로 전면 리뉴얼 중이며, 이달 중 누구나 쉽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뇌 건강 체크’ 서비스를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다. 어르신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할 수 있도록 남녀 성별과 연령대별 성향을 반영한 게이미피케이션(게임화) 설계와 AI 기술도 적극 접목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고 대표는 치매 조기 발견을 가로막는 사회적 인식과 의료 전달 체계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고 짚었다. 암은 국가검진을 통해 조기에 발견하면 내시경 시술만으로도 완치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지만, 치매는 여전히 ‘어차피 약도 없는데 알아서 뭐 하나’라며 덮어두거나 대학병원 대기 줄에만 매달리다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대학병원은 고위험 약물 투약이나 난치성 영역에 집중하고, 동네 의원과 전문 센터가 속한 로컬 생태계에서 조기 선별과 일상 관리를 촘촘하게 맡아준다면 10년, 20년 뒤 우리나라의 치매 유병률은 유의미하게 낮아질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갑자기 깜빡깜빡하거나 우울해 보일 때, 자식들이 설득하지 않아도 어르신 스스로 ‘거기 가면 내가 더 좋아져서 나온다’며 찾아오고 싶은 곳. ‘뇌 건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든든한 기업으로 자리 잡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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