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어머니는 평생 외로운 여자였어요”

기사입력 2015-01-02 15:45 기사수정 2015-01-02 15:45

박윤초 명장, 어머니 김소희의 삶을 말하다

‘총체적 예인.’

박윤초 명장을 칭하는 문화예술계의 표현이다. 세기의 명창이었던 만정 김소희 선생의 딸로,그녀의 예술적 기질을 모두 가진 듯한 박 명창은 판소리, 가야금 병창, 전통 춤 등 많은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TV 출연과 같은 요란한 활동과는 철저하게 담을 쌓은 채 자신의 예술 세계를 더욱 공고하게 다듬으면서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는 박 명창의 열정은 어머니를 향한 사무침을 시대의 소리꾼답게 불사르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것일까? 그녀가 말하는 어머니와 자신의 이야기.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김소희. 본명은 김순옥. 아호는 만정(晩汀). 지난 세기를 살았던 한국 사람이라면 그 이름 익숙할, 5척의 작은 몸에서 나오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소리를 가지고 있던 명창. 고창에서 태어나 6개월간의 배움으로 14살의 나이에 남원명창대회 1등을 거머쥔 김소희 씨는 일제 강점기에 이미 레코드 회사들 사이에서 섭외 1순위였다.

또한 판소리뿐만 아니라 춤, 악기 연주, 서예 등에서도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국악계의 대모로 불리웠고 1964년에는 인간문화재 5호로 지정된 김소희 씨는 세계 속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명창이었다. 1995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후학들의 존경은 그녀의 영향력이 격함을 알려준다.

만정 김소희 씨에겐 딸이 한 명 있다. 바로 박윤초 명창이다. 그녀는 마치 어머니처럼 자연스럽게 명창의 자리에 올라 국악계의 거목이 됐다.

“제 어머니는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닌 소리꾼입니다. 성음이 청미한 애원성으로 심금을 울렸죠. 여기에 삶과 예술에 대한 자기성찰과 노력이 더해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창이 됐습니다.”

고맙디 고마운 ‘어머니이자 스승’

1944년생인 박 명창은 20년 전부터 목이 더 좋아졌다고 말한다. 여전히 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걸 보면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어머니께서 1995년에 돌아가시면서 제게 미안하니까 목을 주고 가신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선몽을 자주 꿉니다.어머니가 온화하게 웃으시면서 나쁜 일을 암시해 주는 꿈을요. 어머니께서 곱게 화장하고 푸른색 한복을 입고 업어달라는 꿈을 꾸는 날에는 제가 다리가 아파서 일을 그르치게 된다거나 하는 일들이 생겨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일기를 써 왔다는 박 명창은 자신의 역사와도 같은 일기장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일기장을 보여줄 수 있겠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게 말이 됩니까”라는 말이 시크하게 돌아왔다.

“일기장에 어머니에 대한 글을 투덜투덜 썼었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그 글들이 시가 되어 있더군요.” 당연한 일이었지만, 만정 김소희는 박 명창의 어머니인 동시에 스승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 시절 뉴욕타임스에 보도되었듯이 마리아 칼라스를 능가하는 분이었어요. 어머니는 제게 판소리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발림(춤)을 잘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죠. 다행히 저는 발림의 중요성을 포인트로 하는 편이라 소리는 어머니보다 형편없지만 발림은 제가 더 잘했어요.”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된 어머니의 외로움

그러나 국악인이라는 쉽지 않은 삶. 그녀의 어머니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평범한 아낙으로 요조숙녀의 길을 가지, 가시밭길 같은 국악인의 길은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생전에 말했다고 한다. <서편제>와 같은 영화에서 봤던 치열하고 기구한 국악인들의 삶을 기억하는가.

그런 삶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박 명창이 기억하고 바라보는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에는 애증의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천상 여자였지만, 사랑을 받는 걸 못했어요. 제가 남편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아보니 알게 됐어요.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으셨던 어머니가 외로운 여자였다는 걸.”

박 명창의 아버지인 박석기는 거문고 산조의 달인으로 부잣집 둘째 아들에 동경제국대학교를 나온 재사였다. 그는 담양에 별당을 하나 만들어서 전국에서 똑똑하고 장래성 있는 사람들을 뽑아 모아서 국악을 가르치기로 했다. 국악을 지켜야만 문화적으로 일제에 지지 않을 수 있다는 뚜렷한 민족의식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거기에 뽑혀서오게 된 어머니 김소희를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 게 이 모든 인연의 시작이었다.

재회, 어머니와의 전쟁이 시작되다

그러나 지성과 남성적 매력을 갖춰 인기가 많아 ‘걸물’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애정을 많이 주지 않았다. 어머니 또한 그토록 여성스러웠음에도 정작 사랑받는 법은 몰랐다. 결국 아버지의 바람기에 분노한 어머니는 박 명창이 2~3살 되던 때 박 명창을 두고 서울로 올라 갔고 박 명창은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와 더 친할 수밖에 없었죠. 제가 요조숙녀로 예쁘게 크시길 바랐던 아버지였어요. 그분은 노래를 돈 받고 팔지 말라고 가르치셨죠. 하지만 아버지는 6·25 피난길에서 얻은 병으로 제가 열 살 때 돌아가셨어요.”

박 명창은 12살이 됐을 때, 다시 어머니를 만나게 됐다. 육당 최남선 선생의 막내 동생이고 박 명창을 잘 살펴 주던 큰어머니가 박 명창을 이끌어서 어머니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오매불망 저를 보고 싶었나 봐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를 보고 싶으면서도 함께 살고 싶진 않았어요. 나쁜 애였지(웃음). 그래서 만나긴 해도 서먹서먹했죠. 그때부터 어머니와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근본부터 완전히 달랐던 모녀

“저년은 사막에 내놔도 안 죽고 살 거다.”

어머니가 박 명창을 가리켜 했던 말이란다. 거친 표현이지만 그 정도로 박 명창을 믿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런 굳은 믿음이 있었음에도 만나면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건, 원래 서로의 성정부터가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색깔부터가 달라요. 저는 쥐색이라든지 어두운 색을 선호하는데 어머니는 주황색, 분홍색 같은 밝은 색들을 좋아했어요. 눈썹이 좋은데도 거기에 또 뭔가를 그리려고 하시고. 완전 달랐지. 저는 어머니 속에서 나왔지만 아버지 딸이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대로 박 명창을 키우려고 했다고 한다.

그 근저에는 어머니 나름의 걱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너는 세상에 의해 멍들 거라고 하시며 저를 길들이려고 하셨죠. 하지만 전 절대로 엄마 스타일로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어요.”

▲(사)국창 김소희 만정제 소리 보존회 발기인 총회 열던 날 제자들과 함께 만났다.(우측 아래 박윤초 명창)

완벽한 소리꾼으로 살아간다는 고독

그녀는 어머니가 한 말 중 ‘나는 슬퍼도 기뻐도 그리워도 외로워도 소리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있는 명창으로서의 무게만큼이나 말 그대로 예인으로서의 생활이 인생 그 자체였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제자들이 많았고, 그 제자들이 좀 성장했다 싶으면 어머니를 밟으려고 그러고. 저는 그게 보였어요. 하지만 제가 그걸 지적하며 어머니께 뭐라고 하면 제가 그들을 질투하는 거라고 화를 내시니….” 국가를 대표하는 명창의 딸이라는 입장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부딪치는 혈육이기에 기운이 빠져서, 어머니는 박 명창을 일대일로 못 가르쳐줬다. 그래서 박 명창은 몰래 어머니의 소리를 녹음기에 녹음해서 혼자 집에서 들으며 소리를 배웠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목소리의 키를 높일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게 소리를 높여서 부르곤 하셨습니다. 그거 사람 죽이는 일이에요. 그런데 어머니는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인지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고달팠던 건지도 몰라요. 그에 비하면 저는 소리를 즐기는 편이었죠. 그렇게 높이지 않아도 하늘에서 내린 목소리라는 평을 받던 분이셨는데.” 하고 말하는 박 명창의 목소리에선 늦은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한의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박 명창은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와의 갈등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고, 대신 그 정이 벌판의 풀처럼 부드럽고 강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뒤늦은 깨달음은 안타까움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멈추어만 준다면 죽음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어머니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지은 죄를 빌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승에서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굴곡 졌는지 알고 있는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안식을 바란다면 죽어도 품어서는 안 될 소망입니다.”

78세의 어머니를 보내면서 박 명창은 아무런 준비를 못했다고 자책했다. 할 수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긴 세월 동안 맺히고 맺힌 한의 매듭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될지를 몰라서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한마디로는 도저히 나타낼 수가 없지만, 사랑과 미움의 뒤엉킴이라고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평생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무슨 천형이라도 되는 양 남이 볼까봐 마음속 깊고 깊은 곳에 꽁꽁 숨겨놓고 거칠고 드센 미움으로 어머니를 대했습니다. 마음 밑바닥에 있던 내 삶의 불행의 근원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를 위한 후회 없는 20주년을 만들고 싶어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해독하기 어려운 상형문자라고 표현하는 박 명창은 자신의 부족했던 바를 늦게라도 채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김소희라는 거목을 둘러싼 주변의 잡음은 그녀를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다.

“같은 일을 하는 명창들과의 알력들도 있었죠. 어머니 추모 1주기 때 어머니에 대한 사무침이 워낙 강했어요. 그래서 후원을 받아서 넉넉하게 할 수 있었는데, 그때 그런 제 행동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허무했죠. 저는 딸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하는 것뿐인데.”

세월이 흘러 어느새 내년 2015년이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된다. 박 명창은 이번에는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모로 고민하던 차에 이명희 선생님, 김미숙 씨 등 진정으로 어머니를 사랑하는 분들로부터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시금석이 되어 내년의 20주년은 부끄러

움 없이 치르고, 그 이후로는 그분들이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알림. 가슴 한 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리움, 안타까움을 쏟아내고

싶을 때 기자를 부르세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두 스푼, 추억 세

스푼 담아 차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기꺼이 차 한 잔 마주하고서 부모님을 향한 마음을 온전히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불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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