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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골미술관 '꿈을 다시, 봄' 개최… "부부·손주가 함께 그리는 꿈"
- 탑골미술관은 어르신들의 어릴 적 꿈을 작품으로 풀어낸 ‘꿈을 다시, 봄’ 기획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문화예술 생산자로서 어르신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그들이 잊고 있던 꿈들을 되새기고자 기획됐다. 박미라, 유기남, 이재영 등 작가 3인은 물감과 색연필을 소재로 그동안 가슴 속에 묻고 지냈던 어릴 적 꿈을 화폭에 펼쳤다. 박미라, 유기남 작가는 부부작가로 알려졌다. 이들은 퇴직 후 동창들과 부부동반 그림모임을 시작, 이후 유 작가 어머니의 추천을 통해 복지관 미술수업에 함께했다. 어머니인 이근숙 여사는 만 90세로, 20년째 서울노인복지센터 회원으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유 작가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림을 선물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덩달아 마음이 따스해진다”고 그림을 통한 행복감을 전했다. 박 작가는 “산에서 찍은 꽃과 풀 사진들을 그림에 옮겨 담고 있으면 꿈 많았던 나의 봄날이 떠올라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설렌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편 이재영 작가는 잠시 잊고 지냈던 화가라는 꿈을 손자와 함께 이루고자 한다. 신문 기자 출신인 이 작가는 막 태어난 손자에게 ‘서울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싶다’는 꿈을 갖고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이후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이 작가는 현재 5살이 된 손자와 함께 서울 곳곳을 다니며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는 “이젠 손자와 함께 전시를 여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이번 전시는 3월 22일부터 4월 12일까지 실버도슨트의 상시 해설과 함께 진행된다. 개최 당일에는 ‘오프닝 행사’로 작가와의 대화를 마련, 작품과 그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오는 4월 4일에는 ‘부부작가와 함께하는 아크릴화 체험 프로그램’을, 4월 11일에는 ‘이재영 작가와 함께하는 색연필로 서울 도심 그리기’ 등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전시의 의미를 더하고자 한다. 탑골미술관 관장 지웅스님은 “부부가 함께, 손자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60세를 훌쩍 넘어 새로운 꿈을 꾸는 작가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어르신들이 동기부여를 받아 새로운 취미 생활을 통해 활기찬 노후를 즐기길 바란다”고 밝혔다. 2013년에 개관한 탑골미술관은 지역주민들과 어르신들에게 미술과 문화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전시를 비롯한 연계 프로그램, 강연, 워크숍 등의 활동을 펼쳐왔다. 실버도슨트 해설을 비롯해 한뼘미술관을 통한 온라인으로 전시 관람도 가능하다.
- 2024-03-2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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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퀸 김소현 “마리 퀴리 집념과 열정 닮고파”
- ‘뮤지컬계 여왕’이 오랜만에 귀환했다. 세계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마리 퀴리의 삶을 다룬 뮤지컬 ‘마리 퀴리’로. ‘엘리자벳’, ‘명성황후’, ‘마리 앙투아네트’ 등을 통해 공주ㆍ황후 역할 전문 배우로 장기 집권하고 있는 김소현(49). 마리 퀴리는 그동안 맡아온 캐릭터와 결이 조금 달라 보인다. 전문적인 직업을 가졌고, 피ㆍ땀ㆍ눈물 어린 노력으로 성공을 이룬 주체적인 캐릭터다. “마리 퀴리는 평생 라듐(방사성 원소)을 찾고자 노력했어요. 모두에게 그 라듐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한테는 그게 ‘뮤지컬’일 테고요.” “공주 역할 전문 배우요? 하하. 다른 역할도 많이 했는데, 아무래도 주목받은 작품이 그랬던 것 같아요. ‘마리 퀴리’도 새롭죠. 사실 스케줄 때문에 출연을 몇 번 거절했어요. 캐릭터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도 많았고요. 그런데 연출진이 배우들 상견례 전날 밤 또 연락을 주신 거죠. 완전 변신할 수 있는 작품을 시도도 안 해보면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김준수(가수ㆍ뮤지컬 배우) 소속사 대표님에게도 의견을 물어봤죠. 그랬더니 고민하지 말고 바로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까스로 ‘마리 퀴리’를 하게 됐습니다.” 김소현은 2021년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이후 작품 활동이 없었다. 임신과 출산 때보다 더 길었던 2년의 작품 공백기. 배우 생활이 끝날까 봐 불안했고, 복귀작에 대한 고민도 컸다. 그렇게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정된 복귀작이 바로 ‘마리 퀴리’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 퀴리’는 왜 새로운 도전이었을까. 먼저 김소현은 과학 용어가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져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유튜브에서 과학 관련 정보를 샅샅이 찾아보면서 대사가 입에 붙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또한 ‘명성황후’같이 강단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그동안 써보지 않았던 목소리와 연기 톤을 써야 했다. 이에 따른 어려움과 부담감이 있었던 것. 그런데 연기를 할수록 마리의 인간적인 지점을 찾게 되었고, 그 매력에 매료된 상태다. “‘마리 퀴리’는 단순히 과학자 얘기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얘기예요. 나의 목표, 우정, 사랑 등 많은 것들이 뮤지컬 안에 녹아 있어요. 공연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관객들이 많은데, 저도 매번 울어요. 특히 친구 안느가 마리에게 마지막으로 ‘애썼어 마리, 참 충분한 삶이었어’라는 대사를 할 때 눈물 콧물 다 뺀답니다.(웃음) 연기를 할수록 라듐을 향한 마리의 집념과 포기를 모르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냉철하면서도 열정적인 면모를 닮고 싶어요.” 서울대 집안 엄친딸 “돌이켜보면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2001년 봄 김소현의 인생은 단 하루 만에 180도 바뀌었다. 당시 오페라 가수를 꿈꾸던 서울대 대학원생이었던 그는 친한 선배의 추천으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주인공 크리스틴 다에 역으로 오디션을 봤다. 사실 뮤지컬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 며칠 뒤에는 이탈리아 유학을 위한 출국이 예정되어 있었던 터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소현의 생각과 달리 ‘오페라의 유령’ 연출진은 그를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당시 소프라노 발성을 할 줄 아는 배우가 필요했는데, 거짓말처럼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소현은 ‘오페라의 유령’에 출연했고 이후 2009년 재연, 그리고 ‘팬텀’까지 무려 20년간 크리스틴 역을 연기하게 된다. ‘김크리’(김소현+크리스틴), ‘한국의 크리스틴’ 등의 수식어가 그의 존재감을 입증해준다. “‘오페라의 유령’은 저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작품이죠. 인생을 바꿔준 작품이기도 하고, 남편 손준호 씨를 만나기도 했으니까요. 만약 그날 오디션을 안 봤다면, 아마도 오페라 가수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실 그때도 가족들은 물론 주변에서는 제가 ‘오페라의 유령’만 하고 본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하고 있네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늘 행복합니다. 한 역할을 계속 연기해도 지겹지가 않아요. 매번 그 역할을 사랑하면서 연기하기 때문이죠.” 혜성처럼 등장한 김소현은 뮤지컬 업계의 판도를 바꾸었다. 정통 성악으로 노래를 불러 뮤지컬의 품격을 높였다는 평을 자아냈다. 여기에 가족 모두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엘리트’ 꼬리표가 더욱 선명하게 따라붙었다. 김소현은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지만, 방송이나 인터뷰에서 꼭 얘기가 나오니까 마치 내가 자랑하고 다니는 것같이 보일까봐 민망하기도 하다”고 털어놓았다. 김소현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서울대 성악과 출신이고, 아버지와 남동생은 서울대 의대 출신 의사다. 특히 아버지 김성권 씨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장내과 명예교수다. ‘싱겁게 먹기 실천 연구회’ 설립자이기도 하다. 김소현은 종종 아버지와 TV 프로그램에 동반 출연하며 서로의 행보를 응원하고 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건강하게 먹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집에 라면이 없었고, 과자도 잘 안 사주셨어요. 과장을 좀 보태서 말하자면, 결혼하고 먹은 라면이 평생 먹은 것보다 많았어요. 저는 세상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제일 존경합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키워보니 부모님이 어떤 마음으로 삼남매를 키우셨는지 알게 됐고, 감사한 마음이 더 커졌어요. 제가 부모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면, 남편이 섭섭하다고 할 정도예요.(웃음)” 같이 활동하는 유일무이 뮤지컬 부부 김소현은 남편 손준호를 ‘오페라의 유령’ 재연 때 만났다. 라울 역을 맡은 손준호는 극에서 크리스틴을 사랑하듯이 실제로 김소현에게 푹 빠져버렸다. 그러나 김소현은 여덟 살 연하 후배의 구애가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당시 준호 씨는 데뷔작이었고, 제가 첫 상대역이었어요. 극중 캐릭터를 사랑하는 건데, 저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 있잖아요.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다시 잘 생각해보라면서 마음을 거절했죠. 그런데도 계속 아니라고 하면서 다가오더라고요.” 두 사람은 결국 2011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 뒤로도 ‘팬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명성황후’ 등의 작품에서 함께 연기하며 유일무이 뮤지컬 부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김소현은 “‘명성황후’의 고종과 명성황후처럼 작품에서 부부 연기를 할 때가 있다. 공감도 잘되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부분도 많다”고 전했다. “배우로서 준호 씨를 높이 사는 부분은 흔들림 없는 단단한 사람이라는 점이에요. 그러니까 늘 노래나 연기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거죠. 준호 씨가 처음 데뷔하던 날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요. 제가 첫 공연 첫 상대역이었는데 하나도 떨지 않고 잘하는 거예요. 또 그 단단함에서 오는 여유가 있고 긍정적인 사람이라 친구도 많답니다.” 부부가 같은 직업을 가진 것의 최대 장점은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부분이 아닐까. 김소현은 아들 주안 군을 임신했을 때 남편에게 특히 고마움을 느꼈다. 배우로서 느끼는 불안함을 십분 이해한 손준호는 아내가 빨리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결혼을 하면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되고…. 역할이 되게 많아지잖아요. 진짜 나로서 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죠. 나의 시간과 일의 소중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임신했을 때 경력 단절이 되어 다시는 일을 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힘들었어요. 그때 준호 씨가 ‘내가 아이를 잘 키울 테니까 먼저 복귀해라’면서 배려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주안이를 낳고 1년도 안 돼서 무대로 돌아올 수 있었죠.” 그때 태어난 아이, 주안 군은 SBS ‘오! 마이 베이비’에서 사랑스럽고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여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벌써 열한 살로 폭풍 성장했는데 혹시 부모를 따라 뮤지컬 배우를 꿈꾸지는 않을까. 김소현은 “주안이가 ‘절대 싫다’고 한다. 그리고 비행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더불어 “공부 잘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면 물론 좋겠지만, 예의 바르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엄마의 마음을 전했다. 22년 넘은 커튼콜의 감동 김소현은 매년 12월 4일 팬들과 함께 데뷔일을 기념한다. 크리스틴으로 무대에 오르던 첫날, 그 역사적인 날이다. 최근에 22주년을 맞았다. 시간이 쌓이면서 호평도 늘어갔고 명성도 높아졌다. 그는 2008년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로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2016년에는 ‘명성황후’로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20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특별했던 날도 있지만, 김소현은 무대에 선 모든 순간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무대에서 특히 관객에게 인사하는 ‘커튼콜’ 때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사실 뮤지컬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는 것도 커튼콜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오페라의 유령’ 첫 공연 때 커튼콜을 처음 경험해봤는데, 너무 벅찬 감동을 느낀 거죠. 매번 커튼콜 때마다 감동이 새롭게 오는 것 같아요. 커튼콜은 관객분들의 답을 얻는 시간이잖아요. 꼭 환호성과 기립박수가 터지지 않더라도 관객분들과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마음이 전달된다고 느껴요.” 새해를 맞아 계획을 묻자 김소현은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지 않으려고 한다”고 답했다. 목표를 두면 너무 힘이 들어가고, 계획대로 잘 안 되면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생각에서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소현은 ‘내일이 없을 정도로’ 작품을 위해 노력하고 연습하기로 유명하다. 그렇게 변치 않는 노력을 기울이기에 커튼콜의 감동이 20년 넘게 지속됐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연기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연기에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족한 게 되게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관객분들의 공감을 얻고 마음을 얻으려면 최선을 다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특히 진심이 중요하죠. 진정성이 없으면 나는 그냥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노래하고 연기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그때는 스스로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일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무대에서 연기하고 싶습니다.”
- 2024-01-0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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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는 발견하는 것 보물찾기처럼!
- 감사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는 찾아내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찾지 않으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보물찾기와 같습니다. 저물어가는 계묘년을 감사로 마무리해보면 어떨까요. 초등학교 시절 소풍에서 백미는 보물찾기입니다. 장기자랑도 좋고, 김밥에 사이다 먹는 맛도 좋지만, 보물찾기만큼 간절히 기다리는 시간은 없을 것입니다. 그 시절 보물찾기는 학생 수만큼 보물이 적힌 쪽지가 넉넉하지 않고 찾기 힘든 곳에 감춰져 있는 게 아쉬운 점이라면, 감사 보물찾기는 보물 쪽지가 학생 수를 넘어설 만큼 충분할 뿐 아니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게 다른 점입니다. 심지어 남들은 불운이나 불행·불평·불만이라 생각하는 것을 감사로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보물 쪽지가 생겨난다는 점은 가장 특별합니다. 감사는 나에게 없는 것을 찾는 게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 남들 눈에 하찮아 보일지라도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감사는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불행을 은혜로 돌리는 마법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는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라 불리며 나쇼날, 파나소닉, JVC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든 마쓰시타(松下)전기 창업주입니다. 생전 인터뷰에서 그는 성공을 이룬 비결을 묻자, 하늘로부터 세 가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가난한 것, 병약(病弱)한 것, 못 배운 것이 그가 꼽은 세 가지 은혜라고 합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덕분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는 잘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네. 또 허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을 일찍 깨달았지.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썼기 때문에 아흔이 넘은 지금도 겨울에 냉수마찰을 한다네. 그리고 알다시피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야. 그 덕분에 항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고 배웠다네. 이런 불행한 환경이 나를 이만큼 성장시켜주었으니, 하늘이 준 은혜라고 생각하고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부모를 탓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불행 속에 자신을 가둘 것들이 그에게는 하늘이 준 축복이자 은혜였습니다. 고마운 게 없는 당신에게 “너는 그게 고맙지 않니?” “왜요? 저는 하나도 고마운 게 없는데요.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은진 씨는 아들 이야기를 듣자마자 뒤통수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팔십 넘은 아버지가 혼자 된 아들을 위해 좋아하는 육회거리 장을 봐오셨는데 한다는 말이 그 모양이라니요. 괘씸하고 서운해만 할 일은 아닙니다. 찬찬히 아들 마음을 들여다봐야 할 때입니다. 요즘 들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늘 성난 얼굴로 자기 방에만 처박혀 있기 일쑤에, 고마운 게 없다는 말은 자기 마음이 상처받고 병들어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무엇을 보아도 자기 기대와 욕심에 못 미치는 것들뿐이라 불평·불만이 꽉 찬 상태여서 고마운 맘이 들어갈 틈이 없을 테니까요. ‘때문에’ 안경을 벗을 때 2018년에 나온 영화 ‘레슬러’(Love+Sling)에서는 자신(유해진 분)의 뒤를 이어 레슬링 국가대표 선발전을 눈앞에 둔 아들(김민재 분)이 갑자기 결승전 문턱에서 사라지면서 숨겨왔던 갈등이 폭발합니다.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웃음을 잃은 아버지를 위로하고자 시작한 레슬링 놀이가 국가대표 선발전까지 이르자, 아들은 이게 자신의 꿈이 아니라고 호소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홀로 너를 키우며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들은 자신에게 꿈이 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아버지를 납득하지 못합니다. 자식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어주는 한풀이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힘든데, 내가 너희들 때문에 이혼하지 않는 거야, 이런 말은 자녀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줍니다. 부모의 불행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과 미안함은 무력감, 좌절, 분노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때문에’ 지옥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매사를 ‘때문에’ 안경으로 보면 불평·불만,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 차게 됩니다. 밥 한 그릇의 여정(旅程) ‘감사’(感謝)는 고맙게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감사입니다. 우리말 ‘고맙습니다’도 이전 글에서 필자가 풀어본 것처럼 당신은 ‘고마’(신을 뜻하는 옛말)와 같이 귀한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은 내 앞에 있는 존재를 하늘과 같이, 신과 같이 귀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로 ‘이타다키마스’(いただきます, 잘 먹겠습니다)와 ‘고치소사마’(ごちそうさま, 잘 먹었습니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타다키마스’는 ‘하늘과 땅의 은총을 젓가락을 높이 들어 받겠습니다’를 줄인 말로, 나에게 생명을 내준 식재료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밥 한 그릇만 봐도 씨 뿌리고 키운 농부의 정성, 비와 햇볕과 바람으로 함께한 하늘의 정성, 탈곡과 정미, 유통, 그리고 깨끗이 씻어 밥을 한 정성까지 긴 여정을 거쳐 상에 오릅니다. ‘고치소사마’는 일본식 한자로는 ‘ご馳走様’가 되는데 ‘馳走’는 둘 다 ‘달리다’는 뜻으로, 이 식재료가 내게 오기까지 분주히 뛰어다닌 모든 사람에게 감사드린다는 의미라고 합니다.(히스이 고타로, ‘하루 한 줄 행복’ 중에서) 감탄-감사-감동 삼위일체 몸도 마음도 지친 퇴근길, 라디오에서 나오는 사연이 버스에 탄 승객들을 위로하고 감사와 감탄, 감동의 물결을 이룹니다. “마을 경로당 어르신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수능을 앞둔 인근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한 명도 빠짐없이 돌아가도록 손수 초코과자를 만들어 전달했습니다. 선물을 받아 든 학생들이 고마워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감사에 주파수를 맞춘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 감사 파동이 일렁입니다. 감탄-감사-감동은 삼위일체처럼 움직입니다. 아, 감탄하는 한 사람에 머물지 않고,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고,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갑니다. 감사가 바꾸는 세상 : 덕분에 챌린지 #장면1 무인(無人) 카페의 문이 열립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두 아이가 들어오더니 목이 말랐는지 물을 마십니다. 갑자기 한 아이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을 향해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합니다. 가게 문을 닫고 나가면서도 두 아이 모두 고맙다며 인사를 합니다. #장면2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어른 손님들 속에 한 초등학생이 계산대 앞에서 한참 머뭇거리더니 동전을 기계 뒤편에 놓고 나서 CCTV를 쳐다보며 주인에게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아이스크림값 여기에 두고 간다고요. 최근 들어 무인 점포가 늘어나면서 주인이 지키지 않는다고 물건을 함부로 집어가거나 바닥에 용변을 보는 등 파렴치한 일이 간혹 뉴스에 등장하곤 합니다. 부끄러운 어른들 기사 속에 별처럼 아름다운 아이들 이야기가 가슴을 찌르르 울립니다. 학교폭력에 손가락질하고 버르장머리 없다고 요즘 아이들 욕하다가 정작 내 곁에 다가온 착하고 아름다운 천사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장면3 코로나19 시국이 길어지면서 우리 국민 모두 지쳐갈 즈음 2020년 보건복지부에서 ‘#덕분에챌린지’를 통해 의료진을 위한 릴레이 응원 이벤트를 펼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국민은 의료진에게 수어(手語)로 ‘존경합니다’라는 표현을 하고, 의료진은 국민에게 ‘감사합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라는 뜻을 담은 손동작을 공식 SNS에 올렸습니다. 숨 막히는 장비를 껴입은 채 밤낮없이 더위도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역과 치료에 매진했던 의료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글로 영상으로 나눴던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1. 어머니가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2. 아버지가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3. 아버지, 어머니를 존재하게 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합니다. 4. 어머니가 탈 없이 무사히 자라셔서 감사합니다. 5. 아버지도 건강하게 잘 자라주셔서 감사합니다. 6. 부모님이 잘 만나셔서 감사합니다. 7. 부모님이 결혼하셔서 감사합니다. 8. 저의 형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9. 저를 낳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10. 저와 형이 세상을 느낄 수 있도록 건강하게 낳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1. 제가 부모님을 볼 수 있는 건강한 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12.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 형 수능 끝나고 힘든 기간 잘 버텨주셔서 감사합니다. 21. 저 수능 끝나고 진짜 위험한 순간 잘 넘어가주셔서 감사합니다. 27. 늘 저를 믿어주시는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63. 제 사생활을 존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77. 우리 가족이 최고여서 감사합니다. 2015년 4월 어느 날 필자 작은아들이 신병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받은 후 부모 초청 행사에서 세족식(洗足式)을 하면서 읽어준 ‘100 감사’ 중 일부입니다. 올해 마지막 ‘마음 반창고’를 준비하면서 서랍에서 찾았네요. 당시 아들이 울면서 읽어 내려가느라 세세히 몰랐던 내용이 이제야 가슴에 들어옵니다. 독자님 덕분에 아들 마음을 다시 새겼으니 정말 감사합니다.
- 2023-12-2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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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능 출연에서 아빠 역할까지… 요즘 가장 바쁜 '옛날 사람' 김정민
- 미간에 힘을 주고, 목을 긁는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돋보이는 ‘원조 록스타’ 김정민(55)의 창법이다. 유머러스하게 따라 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 “가수로서 가창력이 뛰어나면 당연히 좋겠죠. 그런데 색깔 있는 사람도 오래 기억된다고 생각합니다. 독특함으로 오랜 시간 생존한 것 같아요.” “저 옛날 사람 맞는걸요. 하하하.” 어느덧 내년이면 데뷔 30주년을 맞이한다. 1995년 ‘슬픈 언약식’이라는 불후의 명곡을 남긴 김정민은 ‘옛날 사람’이라는 표현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2021년 MBC ‘놀면 뭐하니?’를 통해 결성된 프로젝트 그룹 ‘MSG워너비’ 활동 당시 그는 ‘옛날 사람’으로 불리는 동시에 많은 20·30의 MZ세대 팬을 얻었다. 김정민은 젊은 팬들이 자신을 촌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의 마음을 담아 바라본다고 느낀다. “제 노래가 요즘 스타일과는 다르니까 옛날 스타일일 수 있죠. 젊은 팬들이 클래식함, 독특함으로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또 과거 노래 가사는 지금과 달리 극단적인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당시 홍콩 누아르 영화를 봐도 마지막에 주인공은 상대를 구해놓고 죽는 경우가 많았죠. 개인적으로 저는 그 시절의 감성을 좋아하는데, 젊은 팬들도 그런 것 같아요.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한번 노래 들어보니까 좋다’면서 저의 다른 노래들도 찾아 들어주시더라고요.” 그렇다고 과거 감성에 취해 있고 고집한다는 뜻은 아니다. 요즘 스타일은 수용하면서 자신의 독특함을 지켜나가고 있다. 무엇이 됐든 오랜 세월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숨은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제가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는 아니에요. 그냥 음색이 독특한 가수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게 많아서 지금도 노래 연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 성대도 나이가 들면 늙고 목소리가 변화하기 때문에 매일 노래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운전할 때 차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합니다. 나만의 공간이니까 내가 뭘 하더라도 아무런 제약이 없죠. 지방에 일이 있어 두 시간 운전해야 한다고 하면, 두 시간 내내 MR을 틀어놓고 노래 연습을 하는 거죠.” 팬과 함께한 ‘영원’ 김정민은 11월 17일 고(故) 최진영의 ‘영원’(1999년)을 리메이크한 곡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원곡의 감성에 김정민의 색깔을 입혀 색다른 곡으로 재탄생했다. 사실 김정민과 ‘영원’은 인연이 깊다. 원래 이 곡은 김정민에게 갈 예정이었는데, 데모를 들은 최진영이 너무 마음에 들어해 그의 노래가 됐다. 그리고 ‘영원’은 리메이크되어 24년 만에 세상 밖에 다시 나왔다. “(최)진영 씨와 같은 사무실에 있었어요. 술도 자주 마셨고 여행도 다닐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어요. 진영 씨가 하늘나라로 간 뒤로는 그 충격에 ‘영원’을 못 부르겠더라고요. 한 10년이 지나니까 감정이 조금 무뎌졌는지 부를 수 있었죠. MSG워너비 하면서 블라인드 오디션 때도 ‘영원’을 불렀는데, 음원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용기 내서 진영 씨를 잊지 말자는 마음으로 리메이크곡을 내게 된 거예요. 원곡의 완성도가 워낙 높아서 어설플까 봐 고민이 깊었어요. 편곡도 10번 이상 갈아엎었고, 준비하는 데만 1년이 걸렸습니다.” ‘잘해도 본전’이라고 생각했지만 김정민이 ‘영원’ 발매를 용기 내 강행한 데는 이유가 있다. 팬들과 함께 작업했기 때문이다. 기념 영상의 감독, 촬영, 편집 모두 팬이 맡았다.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할 정도니, 김정민의 ‘팬 사랑’은 말 다 했다. 연예계에서도 익히 유명하다. 추억을 공유하며 나이를 먹어가는 동반자인 팬들에게 그는 감사한 마음뿐이다. “중·고등학생 팬들이 저를 보겠다고 방송국 앞에서 늦게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밥은 먹었나’, ‘집은 잘 들어갔나’ 걱정이 됐죠. 한번은 추운 겨울날에도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20명에게 짜장면을 사준 적이 있어요. 그랬던 친구들인데, 이제는 자녀들이 성인이 됐죠. 이제 팬들과 여동생, 남동생 같은 사이가 된 것 같아서 좋아요. 팬은 ‘또 다른 김정민’이라고 생각합니다. 팬들이 저를 만들어줬고 지켜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들이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기러기 아빠의 부성애 그는 최근 친구에게 “정민아,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생각하게 되기에 대화 도중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였다고 한다. 김정민은 ‘아직은 죽을 수 없다’는 답을 했다. 일본 아이돌 출신 타니 루미코와 2006년 결혼해, 슬하에 세 아들을 두고 있는 그는 아빠로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한테 그 질문을 듣고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막내가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에요. 막내가 성인이 되어 뭘 하는지는 보고 죽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막내가 결혼하는 모습까지 보고 싶지만, 그건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의 부성애는 실로 대단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세 아들에 관한 답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버킷리스트를 물었을 때도 “아이들이 운동을 계속해서 어느 팀의 선수가 된다면, 그 팀의 응원가를 헌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수 아빠로서 재능기부인 셈이다. 아이들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김정민은 최근 ‘기러기 아빠’가 됐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큰아들은 광주FC U18 소속으로 축구를 하고 있어서 광주에 있고요.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은 엄마와 함께 일본으로 갔습니다. 둘째는 축구를 하다가 쉬고 있고, 셋째는 일본에서 축구를 시작했어요. 기러기 아빠를 제 인생에서 그려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두 달밖에 안 됐는데도 쉽지 않다고 느껴요. 아내와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기러기 아빠가 된 후, 홀로 살고 계신 어머님을 더욱 자주 찾아뵙는다고 한다. 일주일에 2~3번은 방문한다는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주도 물론 보고 싶어 하지만, 사실 아들이나 딸을 보고 싶어 하는 거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께 이에 대해 여쭤보니 ‘네 아들은 삼 형제지만, 내 아들은 너잖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는데 되게 뭉클했고, 그 이후 자주 찾아뵈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했다. 자신감 충만한 중년의 내일 김정민의 인스타그램 사진을 보면 세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다. 반면 50대 중반의 그는 연예계 대표 동안 스타답게 방부제 미모를 과시한다. 이런 반응에 김정민은 “사실 주름도 늘어나고 많이 늙었다”면서도 “젊은 시절의 몸무게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관리 비결을 밝혔다. 그만의 철칙은 ‘플러스 마이너스 3kg 넘지 않기’다. “10kg 이상 갑자기 확 쪘다고 생각해보세요. 살을 빼도 피부가 늘어나니까 성형외과에 가야 할 테고, 돈이 더 들죠. 평소 ‘3kg 관리’를 습관화하면 돈도 안 들고 건강도 유지하고, 좋은 점이 많습니다. 저는 매일 운동을 병행해요. 오늘 아침에도 실내 자전거 40분 타고 왔습니다. 제가 하도 많이 타서 저희 집 실내 자전거는 한 다섯 번은 바꾼 것 같아요. 하하.” 이처럼 건강관리가 최고의 노후 준비라고 생각한다. 특히 막내가 대학교 갈 때까지 10년 정도 남았다면서 그때까지는 건강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자신이 건강해야 일하고 자산도 축적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노후에는 한 번쯤 일본 시골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밝혔다. “사실 제가 서울 마포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아이들이 제가 졸업한 학교에 다니기도 했고, 벌써 반백 년을 살았네요. 나중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거기가 시골이라서 공기도 좋은데, 없는 게 없더라고요. 아이들은 걸어서 학교를 다니고, 대형 쇼핑센터도 인근에 있어요. 나중에 누가 물어보면 거기서 지낼 거라고 해야지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 됐네요.” 김정민은 중년이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자신감을 찾았다고 말한다. 가창 실력이 늘어서도, 외모가 멋있어져서도 아니다. 스스로 마음이 충만해지고 내실을 갖췄다고 느낀다. 그가 지금껏 쏟아부은 노력과 부단한 채찍질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한다. “저는 나름 신조어 같은 것이 있어요. 바로 ‘오늘 하루도 나나 잘하자!’입니다. 톱니바퀴를 보면 한쪽이 돌아가면 반대쪽 바퀴도 돌아가잖아요. 그것처럼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않고 남 탓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일을 잘하면, 이 세상은 잘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뮤지컬 ‘맘마미아’를 공연했는데, 무대에 오르기 전에 매일 그 말을 다짐처럼 했죠. 그랬더니 다른 배우들도 공연할 때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연기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기억에 계속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나의 작은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2023-12-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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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윤, “중년이란 과도기 넘어, 악역 도전하고파”
-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활발한 활동을 펼친 최정윤(46). 청순한 미모와 출중한 연기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예뻤던 것 같다.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젊음이 예뻤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가 전성기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의 인기를 좋게 말해주는 분들도 많지만, 정작 나는 연기가 뭔지 하나도 몰랐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나만의 전성기는 아직 보지 못했다”는 최정윤의 행보가 주목된다. SBS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 등의 캐릭터 때문인지 최정윤은 새침데기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상 털털한 사람이다. 과거 뜨거운 관심을 받은 것에 대해 “시기를 잘 타고났다”라면서 “일찍 데뷔해서 천만다행이다. 요즘 같은 시기였다면, 어디 가서 배우라고 명함도 못 내밀었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배우로 데뷔한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재미 삼아 찍은 프로필 사진 덕에 공익 광고에 출연하게 된 그는 당시로서 큰돈인 50만 원을 벌었다. 재밌는 경험이었지만 배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광고와 사진을 본 소속사 관계자로부터 제의를 받아 배우의 삶을 살게 됐다. “저도 모르게 배우의 길로 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신인 시절 저는 겁이 좀 없었어요. 연기 욕심은커녕 연기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카메라 앞에서도 무서운 게 없었던 거죠.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래서 지금까지 배우를 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처음부터 너무 연기 욕심을 부리고, 배우로서의 인정이나 성공이 간절했다면 일을 즐기면서 하지 못했을 것 같거든요. 저는 모든 촬영 현장이 늘 재밌었고, 힘들어서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큰 욕심 없이 살았던 것이 제가 이 세계에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청춘스타에서 ‘아침드라마 퀸’으로 데뷔 작품은 1996년 SBS 드라마 ‘아름다운 그녀’로 기록된다. 27년 차 배우인 최정윤은 대표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잠시 고민에 빠졌던 그는 이내 “대표작은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얘기해주시는 작품”이라면서 MBC 드라마 ‘태릉선수촌’(2005), 영화 ‘라디오스타’(2006), SBS 드라마 ‘청담동 스캔들’(2014~2015)을 꼽았다. 최정윤은 “대중들이 ‘라디오스타’는 PD 역할로 잘 기억해준다. ‘청담동 스캔들’은 인지도가 높아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태릉선수촌’에 대해서는 연기의 매력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태릉선수촌’은 엘리트 체육인들의 운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다룬 8부작 드라마로, 최정윤은 양궁 선수 역을 소화했다. “연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가진 작품이에요. 그 전까지는 쫓기듯이 연기를 했다면, 그때는 본연의 나로서 진심을 다해 드라마를 찍었죠. 감독님부터 배우들, 현장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좋았어요. 만약 당일 예정된 분량대로 촬영이 진행되지 않으면, ‘술이나 한잔 하자’라면서 서로 위로하고 같이 고민하고 그랬죠. 배우들끼리 워낙 끈끈해서 이윤정 감독님의 차기작 ‘커피 프린스 1호점’ 촬영 때, 다 같이 현장에 놀러 가기도 했어요.” 최정윤은 ‘청담동 스캔들’에 이어 2021년 ‘아모르 파티-사랑하라, 지금’(이하 ‘아모르 파티’)에 출연하면서 ‘아침드라마 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러나 이제 그 수식어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아모르 파티’를 끝으로 방송 3사 KBS·SBS·MBC의 아침드라마가 폐지됐기 때문. 최정윤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아침드라마에 출연한 여주인공으로 남았고, 책임감을 통감했다. 더욱이 ‘아모르 파티’는 ‘청담동 스캔들’ 이후 오랜만의 드라마 작품으로 아쉬움을 더했다. 긴 공백 사이, 드라마 제작 현장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촬영 환경이 정말 좋아졌더라고요. 일정이 빠듯하지도 않고, 밤샐 일도 없어졌죠. 과거에는 밤새고 첫 신을 찍을 때도 많았어요. 지금은 상상도 안 되는 일이죠.” 중년 배우 과도기 잘 넘겨야 호전된 제작 환경은 배우로 오랜 시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배우로서 역할이 달라질 때도 세월이 체감된다. 청춘스타로 이름을 알린 최정윤은 2013년 방송된 MBC 단막극 ‘소년, 소녀를 다시 만나다’를 시작으로 엄마 연기를 하게 됐다. “그때 당시는 제가 실제로도 엄마가 아니었어요. 처음 제안이 들어왔을 때 걱정을 많이 했고, 그래서 출연을 거절했어요. 엄마 연기를 할 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니에요. 스스로 엄마 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됐던 거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연기 연습도 할 수 있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의사를 번복해 출연했는데, 엄마 연기가 생각보다 재밌었던 거죠. 이제는 엄마 역할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어요. 아역 배우들이 성인이 된 모습을 보면 신기할 뿐이에요.” 40대 중반의 최정윤은 현재 배우로서 과도기에 있다고 본다. 연기를 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찬 그는 “지금 이 시기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기로 스스로를 테스트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주로 착한 역할을 연기했는데, 해본 적 없는 제대로 된 악역을 통해 연기 변신을 하고 싶다. 연기가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연기든 소화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현재 중년 배우로서 시간을 잘 보내야 노년까지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최정윤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글을 읽고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때가 되면 선배 배우들에게서 보았던 연륜과 삶의 태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청담동 스캔들’에 출연한 배우들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주기적으로 자주 만나요. 반효정 선생님도 만나는데, 제가 선생님을 참 좋아합니다. 지금도 안주하지 않고 배우로서 고민을 계속하시는 모습이 정말 멋져 보여요. 반효정 선생님을 포함해 좋은 선배님들과 함께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은 배우로서 정말 큰 복이라고 느낍니다.” 딸 지우, 그리고 또 다른 가족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최정윤은 더욱 열심히 일하려고 한다. 그의 슬하에는 2016년 태어난 딸 지우가 있다. 엄마를 꼭 빼닮은 지우는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요즘 훈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는 최정윤은 자신을 ‘적당한 엄마’라고 표현했다. “좋거나 나쁜 엄마의 기준을 잘 모르겠지만, 엄마로서 저는 적당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지 않고, 아이가 스트레스받지 않게 하죠. 그런데 예의, 사회성 교육은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성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거든요. 또 잘못한 게 있으면 혼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섭섭함을 느껴 투정 부릴 때도 있지만, 저는 안 받아줘요. 나중에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 활동으로 바쁠 때는 어머니와 피아노 선생님이 지우를 돌봐줬다. 피아노 선생님과 최정윤의 관계는 참 특별하다. 여섯 살 때 피아노 선생님과 제자로 만난 두 사람은 40년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우리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나이 많은 친구, 조금 어린 친구. 선생님이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에 저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관계였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40년 우정의 피아노 선생님과 함께 연예계 절친으로 유명한 배우 박진희에 대해 최정윤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라고 표현했다.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과는 진짜 친구가 되기 어렵다고 하는데, 최정윤과 박진희는 벌써 2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최정윤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가고, 의리가 넘쳤다. “만약 내가 죽으면 지우는 어떻게 하지 걱정이 된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박)진희가 자기가 무조건 데려가서 키우겠다고 한 거예요. 진희는 정말 일하면서 얻은 보물이에요. 주변에 친구가 많아도, 이렇게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기는 힘들거든요. 진희, 피아노 선생님처럼 가족 이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해요. 가족이라는 게 꼭 혈연으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정윤에게는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크든 작든 어떤 일에도 스트레스받지 않는 성격 덕분일 것.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그의 앞날에는 당연히 꽃길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누군가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물어볼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저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답해요. 지금 삶도 좋은 점이 많은데 왜 과거로 돌아가서 힘들었던 순간을 반복하나요? 과거를 후회해봤자 시간만 아깝고 아무런 발전도 없어요. 우리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재밌게 살아요!”
- 2023-11-0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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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 숙인’ 옛 연인과의 재회, 우리 다시 사랑할까요?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요즘은 SNS 때문에 옛 연인도, 잊힌 애인도 따로 없는 세상이 된 것 같아. 물론 근황을 알 수 있을 뿐, 만날 수 없다는 점에선 여전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면 그게 더 잔인한 일일지도 몰라. 깨끗이 세월 속에 묻지 못하고 자꾸만 과거를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헤어진 지도 7년. 그 사이 당신은 애인을 두 번 바꿨더군. 역시 당신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사진을 보고 알았어. 더는 나와 관련 없는 사람이니 당신 옆의 여자가 두 명 아니라 스무 명이라 해도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참 쓰라린 일이었어. 그러게 누가 보라고 했냐하면 할 말은 없어. 맞아,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것뿐이니까. 난 요즘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가사를 자주 읊조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당신이 내게 그런 존재였는데, 그렇다면 또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될까. 그날도 나는 당신의 페이스북을 뒤지고 다녔어. 물론 당신이 그리워서였지. 나와 헤어진 후 두 여자가 당신을 스쳐갔고, 이후론 당신 옆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란 걸 알고 있어. 모르지, 공개를 안 했을 뿐 이미 새 여자가 생겼는지도. 울적한 마음, 보고 싶은 마음, 미련이 남은 마음으로 당신의 얼굴을 더듬고 있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거야! 7년 만에 받은 옛 연인의 온라인 편지 “잘 지내니, 현정?” 얼마나 놀랐는지 내 눈을 의심했지. 페이스북 대화창으로 당신의 메시지가 불쑥 올라왔으니. 무려 7년 만에, 그것도 내가 당신의 흔적을 더듬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마치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꼭 몰래 자위하다 들킨 기분 같았어. 마음으로 당신을 더듬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자위와 다름없지. 7년간 한 번도 소식이 없었던 당신이 마치 바로 옆에서 툭 튀어나온 듯했으니, 손가락이 오그라붙은 것처럼 꼼지락거리기만 할 뿐, 자판을 두드려 대꾸할 엄두를 못 내고 망설이고 있는데…. “너무 격조했구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미처 내가 답할 새도 없이 잠깐 짬을 두고 당신의 다음 글이 올라왔어. 그때부턴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것처럼 두근대기 시작했지. 어쩌면 당신은 내가 잠든 사이에, 그때가 새벽 두시였으니까, 당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대화창에 올려두고 다음 날 아침에 내가 깨어서 읽기를 바랐는지 몰라. 그런데 나는 눈앞에서 당신의 메시지가 올라오는 것을 빤히 보고 있으면서 답을 하지 않는 것에 미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지. “지금 나는 독일에 있어. 유럽 여행을 막 마친 터라 당분간은 독일에 머물 예정이야. 친구가 있거든. 나의 방랑벽이 너를 힘들게 했고 결국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되었지만, 지난 7년간 나의 진정한 연인은 너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어.” 나는 거의 실신할 지경으로 기분이 붕 떠올랐어. 그도 나를 잊지 못하고 있었어! 비록 다른 여자를 두 명이나 만났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나의 가치를 더 높이는 것 같잖아. 비교 우위를 차지한 결과였으니. 물론 순전히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때부터 나는 숨죽여(숨죽일 것까진 없었음에도, 어차피 온라인상이니)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하고 답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접었지. “현정아, 너도 어렴풋이 알고 있겠지만, 그래서 비밀이라고 하기엔 궁상스럽지만 내게는 성적인 장애가 있어. 우리가 40대에 만나 5년을 사귀면서 그 관계가 순조로웠을 때가 별로 없었잖아. 내가 너를 떠난 진짜 이유는 사실 그 때문이었어. 자유로운 영혼 운운하며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날 제발 잡지 말라고 했던 것도…. 남자로서 그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존재 자체를 초라하게 만드는 건지 여자인 너는 모를 거야. 네가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할수록 내 자존심은 더 엉망으로 상했지. 잠자리에서 너를 만족시키지 못해서 괴로운 게 아니라 나 자신이 한심해서, 그 사실이 더 괴로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어. 이 대목에서 너는 나를 뻔뻔한 놈이라고 욕할지 몰라. 그래놓고는 다른 여자를 둘씩이나 만난 건 또 뭐냐고. 그것도 안 되는 주제에 말이야. 나를 떠난 구실,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그건 말이야, 현정아. 너를 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믿어줄래? 현정이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는 알아. 너는 나의 시원찮은 성적 능력에도 불만이 없었고, 오히려 내 눈치를 보면서까지 나를 배려해주려고 했지. 그런 너를 내가 상처 주고 떠났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어. 그래서 다른 여자들을 만났던 거고.” 날 너무 사랑해서 다른 여자를 만났다니…. 여기까지 읽고 있는데 참 기분이 묘하네. 방망이질 치던 가슴이 어느새 가라앉고 싸한 냉기가 흘러드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나를 너무 사랑해서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니. 당신 말마따나 그것도 안 되는 주제에? 내 말에 바로 대답이라도 하듯 메세지가 이어졌어. “솔직히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지면 성적 능력이 되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반, 테스트 반 심정으로 만났던 건데, 역시 안 되더라고…. 그 여자들과 헤어진 이유도 역시 그거였어. 나는 완전히 성불구자가 되었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이젠. 그래서 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던 건데 그나마 젊어서 벌어놓은 돈이 있어서 지금까지 가능했던 건데 돈도 언젠가는 떨어지겠지.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연락을 하는 거냐고? 얼마 전에 어머니한테서 네 소식을 들었거든. 어느새 50 중반이 된 네가 여전히 독신으로 지내고 있고, 나에 대한 감정도 식지 않은 것 같다고 어머니가 그러시더군. 어머니는 너에게 부탁을 했다지? 제발 내 마음 좀 잡아달라고. 한 군데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어머니도 참 염치없는 분이야. 자기 자식 살리자고 남의 귀한 딸자식한테 그런 말을 하셨으니. 그런데 말이야, 현정아.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정말 네가 나를 좀 잡아주었으면 해. 그래서 오늘 이렇게 용기를 내어 너한테 편지를 쓰고 있는 거고. 현정아, 우리는 다른 연인들처럼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는 없을 거야. 남녀 관계에 플라토닉 러브란 건 다 헛소리인 것도 알아. 산전수전 겪으며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가 나이 들고 병들어 더는 잠자리를 할 수 없게 된 경우와는 또 다르다는 것도 알아, 우리 관계는. 그러니 내가 네 옆에 얼씬거리는 자체가 못나고 죄 짓는 거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야. 그런데도 말이야. 나는 이제 너무 지쳤어. 네 품으로 돌아가 네 품에서 쉬고 싶어.” 육체관계 없는 사랑을 택하다 여기까지 당신은 내게 말을 걸어왔지. 당신의 메시지를 받은 지 3일이 흘러가고 있어. ‘읽음’ 표시가 되어 있으니 안 읽은 것처럼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답신을 하지도 못하고 있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했는지) 그건 당신과 나, 심지어 당신 어머니까지 알고 계시지만, 지금 내 복잡한 마음의 정체가 뭔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야. 육체관계만을 두고 사랑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육체관계가 없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원론적인 물음을 비롯해서 마음이 말할 수 없이 복잡해. 당신의 성이 불구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야. 당신이 떠나고 그렇게 그리워했던 세월이 갑자기 퇴색되는 기분도 들고, 내가 사랑했던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아니었을까 하는 혼란도 느껴. 당신이 이렇게 나오니 우리 관계에서 내가 갑이 된 것 같은, 그래서 이제는 내가 주도권을 쥔 것 같은 치사한 승리감도 없지 않아 있어. 그러고 나니 갑자기 시시해지는 기분도 들고, 구태여 지금 와서 내가 왜 당신을 다시 만나야 하나 하는 현실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야. 내 나이가 50대 중반인 거 알지? 당신을 그리워하며 보낸 세월이 갑자기 억울해지기도 해. 결국 이렇게 돌아올 거면서 그냥 함께 있었더라면 7년 세월이나마 까먹지 않았을 거 아니야. 까놓고 말해서 어차피 잠자리는 신통치 않았더라도 마음이나마 서로 오순도순 의지하고 살았을 거 아니냔 말이야. 그래 바로 그거야, 복잡했던 내 마음의 정체가. 헤어져 가슴앓이하던 7년 세월이 아까워서라는 걸. 그러니 당신, 7년을 날 기다리게 한 벌을 받는 셈치고 7주 정도만 당신도 속앓이를 좀 해봐. 그때쯤에 내가 답을 할 테니까. 내 품으로 돌아오라는 답을. 알겠어? 이 바보 같은 남자야!
- 2023-10-2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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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을 그리다” 불모지 일궈 ‘꽃갈피’ 만든 디자이너
- 글자를 쓰는 게 아닌 그린다고 말하는 사람. 한글 디자이너 이용제(51)의 이야기다. 활자를 연구하고 그려온 지도 어언 30년. 절반인 15년은 계원예술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 그에게 활자는 생활이자 인생이며, 존재의 이유다. 50이 되던 해 탄생시킨 글꼴 ‘천명’처럼 한글을 그리고, 이를 알리는 일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며 자연인 이용제의 삶도 그려나가고 있다. 이용제 교수는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재학 시절부터 글꼴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한글 디자인 분야는 불모지와 같았다. 사람들은 별다른 인식 없이 문서 프로그램에 깔린 서체들을 사용했고, 폰트 파일을 자유롭게 주고받았다. 한글 디자인에 관한 교과서 같은 서적도 거의 없었고, 전문 정보도 찾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기생 중 한글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은 이 교수뿐이었다니, 개척자의 길을 택한 셈이다. 수십 년간 한눈팔지 않고 정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묻자 “둔해서인 것 같다. 좋아하는 걸 하면 주변을 잘 안 보는 편”이라고 답했다. 한편 주변은 꽤 달라졌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무료 폰트·나눔 글꼴의 등장으로 유료 폰트, 즉 돈을 내고 글꼴을 사용한다는 인식이 높아진 점이다. 그밖에 이 교수가 체감하는 변화는 무엇일까? “참 안 변한 것 같기도 한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꽤 많이 변했더라고요. 일단 글꼴 제작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개인도 폰트를 만들 수 있게 됐다는 거죠. 덕분에 완성도에 신경 쓴 개성 넘치는 폰트들이 다양하게 탄생한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는 저작권, 정확하게는 글꼴 사용료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예전엔 ‘폰트를 왜 돈 주고 쓰냐’라고들 했다면, 요즘엔 ‘폰트를 막 썼다간 법적 책임을 질 수도 있겠구나’ 여기는 것 같아요. 유통 측면에서 보면 전에는 패키지 형태 구매로 가격 부담이 있었지만, 요즘은 필요한 글꼴만 월 구독 형태로도 판매하죠. 그런 변화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공공재와 같은 활자, 그 본질은 ‘쓰임’ 이렇듯 기분 좋은 변화에 이 교수도 일조했을 테다. 한글 디자인에 대해서라면 대학 강단 이외에도 전국 팔도를 누비며 알리고자 했고, 관련 내용을 담은 단행본과 잡지 출판, 온라인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한 콘텐츠 공유까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모습에는 열정이라는 단어가 맞춤해 보이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에게 열정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듯해요. 어떤 강한 에너지를 발휘한다기보다는 그냥 좋아서 계속하고 있거든요. 물론 초반에는 재미있어서 좋아했는데, 이제는 이 일이 소중하고 중요해서 좋은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힘들고 괴로운 시기도 있었죠. 선배들이 ‘밥은 먹고사냐’고 인사치레할 정도로 열악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이유로, 내가 힘들다고 방치할 수는 없었어요. 좋아서 이어왔지만 계속 이 길을 걷다 보니 책임감이라는 게 생기더군요. 후배들이, 학생들이 ‘저 한글 디자이너 될래요’ 했을 때 그들이 먹고살 토대는 내가 마련해줘야죠.” 아직 그가 활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바람’체를 만들 당시 텀블벅 펀딩을 통해 글꼴 제작 과정을 공개하기도 했다. 대개 펀딩은 후원금을 목표로 하지만, 그보다는 한글 디자이너들의 노고와 처한 환경을 알리기 위함이 더 컸다. 실제 글꼴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적게는 6개월에서 1년이 걸리고, 이를 정교하게 다듬어가는 작업까지 포함하면 평생에 걸친 작업이 될 때도 있다. 게다가 영어의 경우 대소문자만 고려해 52자만 디자인하면 되지만,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지는 한글은 최소 2350자에서 많게는 1만 자 이상 그려야 한다. 때론 폰트 제작비로 큰 금액을 제시받기도 하지만, 완성도를 갖출 시간 확보가 어렵다면 고사할 수밖에 없다. 오랜 기간 공들이는 작업에서 그가 가장 염두에 두는 건 바로 활자의 쓰임이다. 그게 곧 활자의 본질과 같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글자와 활자는 좀 다르죠. 활자는 인쇄를 위한 거니까요. 그런 활자 디자인에서 쓰임을 빼면 만들 이유가 없어요. 활자를 통해 어떤 글을 인쇄한다는 건 그게 지식이든 정보든 다수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함이잖아요. 단순히 보관이나 기록의 용도라면 필사본이나 복사본을 제작하면 되죠. 활자의 본질은 필사의 한계를 넘어서 대량으로 인쇄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공공재라고 봐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 쓰임을 절대 배제할 수 없어요.” 좋은 글꼴, 가독성만 보지 말아야 쓰임을 고민하며 탄생시킨 글꼴들. 사용자 입장에서는 어떤 점을 고려해 선택해야 할까? 앞서 이 교수가 언급했듯 읽을거리를 염두에 둔 활자이기에 흔히 가독성을 따질 때가 많다. 가끔 가독성이 높아야 좋은 글꼴이라 평하기도 하는데, 이 교수는 다소 협소한 견해라는 입장을 드러냈다. “가독성처럼 활자의 기능적인 부분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보다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좋겠어요. 가령 어떤 매체나 대상에 적합한 가독성을 갖춘 글꼴만 논한다면, 대한민국에 폰트 50개 정도만 있으면 돼요. 그럼에도 우리는 왜 자꾸 새로운 폰트를 만드는 걸까요? 그건 한글 디자인도 문화이기 때문이죠. 오랜 역사 속에서 비슷한 서사의 소설이 계속 나오고 같은 장르의 노래가 계속 나오는 것처럼, 활자도 마찬가지예요. 가령 과거의 정서와 문화를 담은 옛 글자체가 있듯, 현재를 반영하는 새 글꼴도 필요한 거죠. 한글 디자인도 결국 창작인데, 문화의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면 창작은 존재할 수 없어요.” 또 한 가지 사용자들이 살펴볼 부분은 ‘활자의 인상’이라 말했다. 즉 특정 글꼴을 썼을 때 나타나는 분위기나 느낌이다. 같은 글자라도 어떤 글꼴을 쓰느냐에 따라 장르와 메시지가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다시 창작자의 입장으로 돌아오면, 이러한 활자의 인상을 감안해 글꼴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때론 창작자의 생각과 의식이 간접적으로 담기기도 한다. 이 교수가 만든 ‘생명’체도 그중 하나다. “창작자마다 다르긴 하지만, 저는 이름을 먼저 생각하고 글자를 그리는 편이에요. 그렇게 큰 틀과 방향을 마련해두고 인상을 신경 쓰며 작업합니다. ‘생명’ 같은 경우 사실 처음 떠올린 건 ‘맑은 물’이었어요. ‘그냥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 같은 글자체였으면 좋겠다. 물은 바닷물도 있고 강물도 있고 냇물도 있지만, 이건 계곡 상류에서 어떤 돌 위에 똑똑 떨어지는, 부드럽지만 단단한 느낌이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면서 만들었죠. 그러던 중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이후 ‘생명’이라 바꾸게 됐어요. 우리는 ‘생명’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도 너무 쉽게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죠.” 이용제를 한글 디자이너로 대중에 알린 건 ‘바람’체다. 가수 아이유의 ‘꽃갈피’ 앨범에 쓰이기도 했는데, 특유의 감성이 느껴지는 세로쓰기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세로쓰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일상에서는 주로 가로쓰기를 하고, 의뢰받는 작업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의심이 들더군요. 가로쓰기에 좋은 서체가 세로쓰기에도 좋을까? 가로쓰기 글꼴의 장점과 특징이 세로쓰기에도 적용될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탐구하고 알게 된 것들을 통해 확인해보기로 한 거죠. 이후로는 모든 작업을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로 구분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세분화에 세분화를 거쳐 진행했어요. 그러다 보니 공이 더 들 수밖에 없었죠. 누군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런데 제 눈에 달리 보이기 시작한 걸 외면하고 이전과 똑같이 작업할 순 없었어요. 창작자에게 그런 계기를 마련해준 ‘꽃길’체가 제 인생의 전환점과도 같습니다. 그게 세로쓰기 글꼴의 첫걸음이었으니까요.” ‘존재’의 탄생, 올해부터 다시 시작 ‘꽃길’체는 그 이름처럼 이 교수의 삶에 새로운 꽃길을 내어준 듯 보였다. 이름 붙이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는 그는 중년 이후 고민이나 깨달음 등을 글꼴명에 반영하게 됐단다. 그 시작은 ‘존재’였다. “예전엔 정말 작업 벌레였어요. 하루는 아내가 ‘당신 머릿속에 가족은 있냐’고 하는데, 그 말이 되게 마음 아프더라고요. 당시 어머니께서도 건강이 좋지 않으실 때였거든요. 그동안 교육자로, 창작자로 이용제는 그럭저럭 열심히 살았는데, 한 가정의 자연인 이용제는 빵점이었던 거죠. 그렇게 나를 되돌아보고 고민하며 ‘존재’를 작업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50세가 되던 해에 ‘천명’을 그렸어요. 흔히 쉰을 지천명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착안한 것이죠. 그 뒤에는 ‘해’(楷)를 작업했는데, 모범이라는 뜻의 한자예요. 쭉 엮어보면 ‘내 존재의 이유는 모범이 되는 활자체를 제시하는 것, 그것이 나의 천명’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더군요. 한글 디자이너로서의 목표를 묻는다면 그것이라 할 수 있겠어요.” 앞으로의 여생도 창작자의 길을 계속 걸어가겠다는 이 교수다. 그는 특별히 올해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아 ‘초(初)해’로 삼았다. 중년 이후 찾아온 고민들이 정리되고, 존재의 이유를 깨닫고 나니 뭔가 다시 출발점에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지금껏 해온 활동을 60세 정도까지는 이어가려고 해요. 그 이후로는 직업인이나 사회인으로서의 이용제는 조금 내려놓을 생각입니다. 물론 작업인, 창작자로서의 이용제는 계속될 거예요. 그건 죽을 때까지 남을 제 모습이라고 봐야죠. 계속 활자를 작업해보니 삶과 비슷한 부분이 많더군요. 활자가 존재하는 이유, 내가 존재하는 이유, 맥이 닿은 부분도 있고요. 완성된 활자를 고쳐가며 더 완벽해지게끔 노력하고, 그 쓰임과 시대에 따라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내듯 저 또한 그렇게 다듬어지고 변화해가며 성장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가오는 한글날. 한글 디자이너에게 명절과도 같은 날일 테다. 이미 빼곡한 스케줄로 쉴 틈 없는 10월이 예약된 이 교수다. 그는 한글날을 맞아 한 가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 한글날을 대하는 대중의 시각을 보면, 한글을 한국어와 혼동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글을 문자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음성 언어를 표기하는 하나의 도구처럼 여기는 거죠. 한글 디자이너로서 그 부분이 참 아쉽습니다. 한글은 굉장히 뛰어난 창작의 결과인데, 애초에 창작자인 세종대왕이 누가 언제 어떻게 쓸 것이냐, 즉 쓰임을 염두에 뒀기에 가능했다고 보거든요. 저 또한 그런 세종대왕의 마음과 정신을 새기려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창작자만 재미있고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의미가 없죠. 제가 만든 글꼴이 사용하는 사람, 우리 사회와 문화, 나아가 자연에도 도움이 됐으면 해요. 그게 바로 ‘좋은 글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2023-10-0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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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의료 현장에서 만난 노년기의 우울과 사회적 고립
- 70대 중반 여성이 딸과 함께 진료실로 들어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지럼증과 피로, 불면, 식욕부진을 호소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다고 딸이 대신 말을 했다. 환자인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다. 의자에 앉아 넋이 나간 듯 멀거니 진료실 바닥만 내려다보신다. 그에 비해 딸은 약간 격앙돼 있다. 이런 어머니의 상태에 걱정이 큰 것 같다. 나의 첫 질문은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있었냐는 것이었다. 딸은 올해 초 그러니 거의 9개월이 다 되어 가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이미 다른 병원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질문으로 어떤 병원을 방문했고, 또 어떤 검사들을 받았냐고 물었다. 역시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고 딸이 대신 답을 한다. 어지럼증 때문에 머리 MRI(자기공명영상) 촬영도 했고, 혹시 암일까 걱정돼 위내시경에 복부 CT(컴퓨터단층촬영) 검사도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특성상 병이 진단됐건, 그렇지 않건 병원을 방문해 불편감을 호소하는 분에게는 무조건 약 처방이 나간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 다음 질문은 어떤 약들을 먹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역시나 동네 신경정신과 의원에서 불면증과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이제 어머니는 왜 1년여 전부터 이런 우울감과 더불어 온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병을 겪게 되신 건지 천천히 파헤쳐야 한다. 고령화 사회에 들어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어머니는 현재 그럼 누구랑 함께 지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내내 높은 목소리로 답을 하던 딸이 잠시 침묵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혼자 지내신다고 했다. 작년 11월 남편과 사별한 후부터 쭉 혼자 지내오고 계신다고 말했다. 환자는 거의 20여 년간 뇌졸중으로 누워지내는 남편을 돌봐왔다. 작년 말 남편이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그의 역할 역시 사라져버렸다. 마치 20년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한 느낌이랄까. 아마도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심각한 것은 이제 자신의 숨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텅 빈 집이었다. 이제 환자의 목소리를 들을 차례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슨 일을 하시나요?” 환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혼자 지내면서 언제부턴가 식사를 차리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심지어 잠을 자는 것도 살기 위한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 버린 것이다. 조심스레 따님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살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딸은 당황해했다. 형제는 3남매지만 누구 하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기 어렵다고 했다. 급기야 딸이 말했다. “그냥 입원시켜 주시면 안 돼요?” 입원해서 MRI든 CT든 다시 모든 검사를 다 받더라도 반드시 원인을 찾고 싶다고 했다. 나는 구태여 불과 몇 달 전에 한 그 검사들을 다시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아마도 어머니의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인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아마 딸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수 개월간 여러 병원을 함께 다니면서 나와 같은 얘길 한 의사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나는 다시 환자에게 시선을 돌려 질문을 했다. “그래서 식사는 어떻게 드시나요? 목 안으로 넘어가는 음식은 있으신가요?” “혼자 있는데 뭘 차려 먹습니까. (딸을 가리키며) 가끔 이 애가 와서 같이 먹을 때나 밥술이 넘어가지...” 자녀들이 다 독립해서 집을 떠나고 단 둘만 남은 노부부 중 먼저 한 명이 떠나면 나머지 한 명의 삶은 참 고독할 것이다. 그렇다고 자녀들이 와서 다시 돌보기도 쉽지 않다. 딸도 알고 있다. 선택지는 결국 노인요양시설이라는 것을. 그러나 차마 그러고 싶지 않아서 대학병원 진료실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왔을 것이다. 누굴 비난할 수도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맞아야 할 미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거의 20여 년째 우리와 경제 수준이 비슷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자살률 특히, 노인 자살률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더불어 노인 빈곤율 또한 독보적인 1위다. 우리는 젊은 날 자식들의 사교육과 재테크를 위한 주식, 부동산에 온통 시간을 보내면서 결국 우리가 늙었을 때 어떻게 지낼 지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과 공부 그리고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 다들 막연히 은퇴 후에는 여행이나 다녀야지 하는 뻔한 말뿐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노년은 참으로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낮은 출산율만큼이나 노년기의 우울과 사회적 고립에 대한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병으로 치부하고 병원으로 달려오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 2023-10-0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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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글쓰기·책쓰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 얼핏 글쓰기는 문턱이 낮아 보인다. 고가의 장비가 필요하지도, 대단한 조건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막상 책상에 앉아보면 다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초보자일수록 더욱 그렇다. 노후를 바꾸는 글쓰기·책쓰기, 도대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안내자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두 명의 길라잡이를 만났다. 글쓰기 편 2011년 10월, 조부의 친일 사실을 고백한 글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일제강점기 고위 관료 경력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할아버지를 대신해 친손자는 “민족과 역사 앞에 사죄”했고, 곧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주인공 윤석윤 씨를 12년이 지나 마주했다. 가족의 치부를 드러내는 용기를 냈던 중년의 글쓰기 교실 수강생은 어느덧 시니어 글쓰기 강사가 되어 있었다. 윤석윤 강사는 12년 전 집을 나선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했다. “처음 수강한 글쓰기 교실에서 내준 첫 과제가 가족을 주제로 에세이 쓰기였습니다. 할아버지를 그제야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내 나이 쉰다섯에요. 그렇게 쓴 글이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 글쓰기가 막연하게 느껴지면, 저처럼 해보길 권합니다. 근처 도서관이나 문화센터에 가세요. 가서 글쓰기를 배우세요.” 그는 돈을 지불하고 배우는 길이 가장 빠르다고 말한다. 글 쓰고 받는 피드백 하나, 그리고 피드백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투자하면 달라집니다. ‘제대로 배우겠다’는 마음이 강해지죠. 결석하지도 않아요. 숙제도 다 제출합니다. 그게 돈을 지불하고 지불하지 않고의 차이예요.” 학교에는 교훈, 가정에는 가훈이 있듯, 윤석윤 강사의 강의에는 강훈이 있다. ‘숙제는 내는 것’이다. 그만큼 숙제를 강조하는 그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좋아집니다. 제아무리 글쓰기 책을 본들 한계가 있습니다. 요지는 거의 비슷하거든요. 문제는 저자가 우리 글을 봐주지 않는다는 거지요. 혼자 쓰면 잘 쓰고 있는지 아닌지 알기 어렵습니다.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내 글을 전문가에게 보이고 피드백을 받아봐야 합니다.” 윤석윤 강사는 이 과정을 2년여 거쳤다. 글쓰기 대학원에 다닌다는 생각으로 돈과 시간을 투자하며 한 번에 두세 과정을 듣기도 했다. 숙제는 악착같이 냈다. 피드백은 가장 매운 버전으로 받았다. 원고는 시뻘건 줄이 죽죽 그어져 돌아오기 일쑤였다. “저는 빨간 펜을 지나 고추밭을 넘어 피바다를 헤맸습니다.(웃음)” 혹독한 트레이닝 속 방황하고 성장하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윤석윤 수강생은 윤석윤 강사가 됐다. “저는 글쓰기 ‘입문’ 강사입니다. 여전히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수강생이었던 오랜 경험이 있지요. 좋은 글을 보는 눈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답 노트도 있고요.” 그는 입문 단계에서 좋은 글을 쓰려면 세 가지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쉬운 글, 재밌는 글, 짧은 글이다. 현학적이거나 추상적인 글을 지양하고, 독자의 흥미를 끝까지 끌고 가는 재밌는 글을 쓰라는 의미다. 이때 문장은 너무 길지 않게 단문 중심으로 쓰길 권했다. “글도 하나의 전달 수단입니다. 읽는 사람이 못 알아듣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에요. 어려운 내용을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내용을 쓰더라도, 그 내용을 쉽게 풀어 써야 한다는 것이죠. 글에도 밀고 당기는 ‘밀당’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기억하세요. 그래야 뒤 내용이 궁금한 재밌는 글이 됩니다. 문장은 짧게 쓰는 것이 좋습니다. 입문 단계에서는 주술 호응이 틀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듯이 쓰면 정리가 되지 않아요. 문장을 짧게 정돈하며 쓰면 훨씬 더 잘 읽힌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겁니다.” 윤석윤 강사는 입문자를 상대로 방법론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동기다. 그가 첫 수업마다 수강생을 향해 던지는 첫 질문도 ‘왜 글을 쓰려고 하느냐’다. “다들 글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으로 글쓰기 교실 문을 두드리지만, 실제 동력은 필요에서 옵니다. 끝까지 하는 힘은 구체적인 목표가 있을 때 배가됩니다. 욕망이 있는 사람과 필요가 있는 사람은 달라요.” 윤석윤 강사는 철저히 필요에 의해 움직였다. ‘책을 쓰겠다’는 버킷리스트가 그를 지치지 않게 했다. 저서가 필요했고, 그래서 글을 썼다. 조지 오웰이 ‘왜 나는 쓰는가’에서 말했듯, 순전한 이기심으로 시작한 일이다.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잘난 체하고 싶어서다. 기회가 오면 욕심을 부리고, 기회를 얻은 뒤엔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길 10여 년. 윤석윤 강사가 출간한 책은 벌써 공저 포함 다섯 권이 넘는다. 필요에 의해 시작된 글쓰기로 그는 화려한 노후 준비까지 마쳤다. 그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다고 말한다. “혼자 있어도 글이 있어 외롭지 않습니다. 글을 쓰며 놀면 되니까요.” 책쓰기 편 ‘순이 삼촌’부터 ‘소설 동의보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른, 잔치는 끝났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베스트셀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이다. 1982년 출판계에 입문한 그는 1983년 출판사 ‘창비’에 입사한 뒤 15년간 영업자로 일하며 ‘베스트셀러 제조기’로 불렸다. 1998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설립해 25년째 운영하고 있는 한 소장의 관심은 이제 더 이상 판매에 있지 않다. 책에 관한 담론을 담은 책을 펴내는 출판사 ‘북바이북’, 국내 최초 시니어 전문 출판사 ‘어른의시간’, 4090세대 여성을 위한 그림책을 펴내는 출판사 ‘백화만발’ 등 양질의 단행본 출간을 지향하는 출판 브랜드를 운영하며 신인 저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윤석윤 강사에게 출간 제의를 한 이도 다름 아닌 한 소장이었다. ‘출판계 전설’ 한기호 소장은 시니어 작가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독자들이 진정 원하는 건 삶을 살아낸 이들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이제 지식을 원하지 않아요. 지혜를 원하지요. 어떻게 살아왔는가, 또 살아냈는가가 중요합니다. 살아낸 이들이 편안하게 들려주는 삶의 지혜를 담은 책이 이미 일본 출판 시장을 휩쓸었습니다.” ‘한국 문학의 어머니’ 박완서 작가는 말했다. “창작을 하는 데 가장 큰 자산은 습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작가의 삶”이라고. 한 소장의 생각도 같다. 그는 고유한 삶의 지문을 가진 이를 발견할 때마다 따뜻한 말과 함께 손을 내민다. “책은 문장력으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축적된 삶으로 쓰는 것이지요. 책 써보지 않겠습니까?” 축적된 삶 중 어떤 부분을 보여줄지는 또 다른 문제다. 한기호 소장은 좋은 책을 쓰는 방법 중 단연 ‘트리밍’(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거나 격렬했던 순간을 몇 개 꼽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바로 트리밍입니다. 그 시기를 이야기하다 보면 앞뒤가 연결됩니다. 전후 맥락이 있을 테니까요. 그때 만난 사람, 겪은 일, 느낀 감정을 쓰다 보면 결국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정리가 중요해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는 팩트가 확실한 주관화도 강조한다.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달만 해서는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 느껴져야 해요. 어설프면 곤란하지만, 적당히 들어가야 합니다. 단, 팩트는 확실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팩트로 독자를 설득해야 하죠. 팩트는 사람, 사물, 사건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한 소장은 책을 쓰고자 한다면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편집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편집자적 글쓰기’를 하다 보면 글은 자연스럽게 나아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한 소장은 유홍준 교수를 예로 들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자세히 보세요. 문화재청장 하기 전과 후의 글이 또 다릅니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늘고 접하는 지식이 달라지면 글도 진화합니다.” 한기호 소장은 책쓰기 연습을 서평 쓰기부터 시작하라고 권한다. 한 사람의 인사이트가 응축된 책을 읽고 압축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한 책을 읽는 것도 추천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구체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소장이 권하는 좋은 책 쓰는 마지막 단계는 편집자와 같은 전문가를 만나 논의하는 과정이다. “책이 포트폴리오가 된다는 명분을 가지고 시쳇말로 ‘뜯어먹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글을 제대로 읽고, 가치가 있는지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전문가를 만나 피드백받는 게 가장 좋습니다.” 한 소장은 앞으로도 유명 저자를 섭외할 생각이 없다. 혹 출간 제안을 받으면 주저하지 말라고 말한다. “책을 내면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연결되고 또 연결되고 하는 거죠. 책이 팔리고 안 팔리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책을 쓰는 자체로 인생이 바뀝니다.”
- 2023-10-05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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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들의 영화제작 도전기, 가능성의 씨앗을 꽃피우다
-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때때로 그의 태도나 인식 변화가 엿보인다. 현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장르는 더 그러하다. 줄곧 정치·사회 이슈를 다뤄온 이마리오(52)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에게도 뚜렷한 변곡점이 포착됐다. 모노톤의 어둑했던 포스터들을 뒤로하고 형형색색 꽃이 만발한 포스터가 등장한 것. ‘갑자기 왜?’라는 의문을 풀러 이 감독이 있는 강원도 삼척으로 향했다. 이내 그곳과 한껏 어우러진 그의 모습에서 ‘저절로 자연스럽게’ 답을 찾았다. 이마리오 감독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더 블랙’ 등을 통해 사회문제를 날 선 시각으로 비춰왔다. 강원도 동해 출신인 이 감독은 대도시 서울에서의 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단다. 그중에는 외면하기 힘든 현실, 불편한 진실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직시한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다큐멘터리를 택했다. 작품을 이어가던 그에게 어느덧 수많은 ‘앎’이 삶의 피로로 다가왔다. 타인과 사회를 비추던 앵글이 스스로를 향하던 순간이었다. “서울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일손이 늘 모자라잖아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힘들어하는데 차마 ‘나 서울 못 살겠어’라며 도망치듯 떠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마침 강릉에서 미디어센터를 만드는데 함께 준비해달라는 제안이 온 거예요. 굉장히 그럴듯한 핑계가 생긴 덕분에 서울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죠. 막상 ‘그래도 가지 마라’ 붙잡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요.(웃음) 그렇게 마흔을 앞두고 강릉에 내려왔습니다.” 고향과 가깝고 인맥도 있는 강릉인지라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대도시에서 탈출(?)한 해방감과 자유는 만족감으로 다가왔다. 벌이나 씀씀이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상은 더욱더 풍요로워진 기분이었다. “대도시 삶과의 차이를 꼽자면 시간과 생활을 주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서울에서는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 속 하나의 부품처럼 무언가에 끌려가는 듯했고, 존재감도 작았죠. 그런데 지역에 살다 보니 내가 삶을 결정하고 컨트롤할 수 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데, 전에는 안 됐으니까요. 또 서울에서는 꼭 내가 아니더라도 그 일을 해낼 사람들이 있었다면, 여긴 인구도 적고 이 분야 전문가도 부족한 편이잖아요. 똑같은 역량을 가지고도 쓰임새가 훨씬 많아진 거죠. 나의 쓸모를 발휘하며 주도적으로 사니 자존감도 높아졌고 삶도 충만해졌어요.” 현실로부터 현실을 바꾸는 다큐멘터리의 힘 일상이 바뀌자 자연스레 시선도 변화했다. 한때는 사회 이슈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냉철하게 바라봤지만, 이제는 둥글둥글 온정 어린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다. 다정하고 따뜻한 것들을 자꾸 마주하다 보니 카메라에도 담아보고 싶어졌다. 그러던 차에 이 감독의 시선은 강릉의 구도심 명주동의 ‘작은정원’에 머무르게 된다. “명주동에 ‘작은정원’이라는 이웃 모임이 있는데요. 여기에 최소 40~50년 한 마을에 살았고 서로 30년 넘게 알고 지낸 주민들이 계시거든요. 이분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스마트폰 사진 촬영 프로그램을 서포트했는데, 그때부터 언니들과의 인연이 시작됐죠. 수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큐로 담아보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3년 정도 수업을 더 이어가다가 영화 제작을 결심했죠.” 그가 언니라 말하는 이들은 평균 나이 75세인, 영화 ‘작은정원’ 주인공들이다. 보통 우리 사회에서 여성 노인들에 대한 호칭은 할머니나 어머니 아니면 어르신, 선생님 정도일 것이다. 초반엔 이들도 그러한 호칭을 썼는데, 어쩐지 거리가 느껴졌고 언니들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그러다 누군가 우연히 ‘언니’라 불렀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그날부터 명주동 할머니들은 모두의 언니가 되었다. 이제는 촬영 스태프도, 동네 청년들도, 영화를 본 관객들도, 너나 할 거 없이 그들을 언니라 부른다. “저도 처음엔 어머니뻘이라 언니라는 말이 어색했는데, 막상 입에 붙고 나니 너무 좋더라고요. 관객평 중에 그런 말이 기억에 남아요. 강릉 명주동에 가면 그런 언니들이 있고, 그런 언니들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언니’라고 부를 것만 같다는. 저도 요즘은 관객들을 만나면 그 얘기에 보태 명주동을 한 번씩 들러주시고, 그곳에서 언니들을 보시면 꼭 ‘언니’ 하고 아는 체를 해달라고 권해요. 어떻게 보면 영화 속 이야기가 바로 현실로 접목될 수 있다는 점이 다큐멘터리의 힘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자가 “영화를 보고 난 뒤 어머니에게 카메라를 사드리고 싶었다”고 이야기하자, 이 감독은 재차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힘”이라 강조했다. 또 단순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이라는 등 감상에 그치지 않고 어떤 다짐이나 실천, 행동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고 덧붙였다. “다큐멘터리는 우리에게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주죠. 창작자 입장에서도 그런 과정을 경험하지만 관객에게도 비슷하게 작용한다고 봐요. 또 현실의 상황이나 인물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에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고요. 어떤 분은 영화를 보고 나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하셨대요. 사실 그 정도 반응을 이끈 것만으로도 성공한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해요. 우리 영화가 그렇게 누군가에게 어떤 계기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카메라에 담긴 ‘진짜 나’와 마주하다 다큐멘터리 창작자는 사건이나 인물에 한층 더 깊게 파고들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어떤 내막이나 내면이 드러나기도 하고, 진실을 발견하거나 해답을 얻기도 한다. 짜인 각본이 없기 때문에 결과를 두고 작업하기보다는, 결과에 다가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이 감독 또한 자신이 품었던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과정을 경험했다. “언니들이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삶을 살 수 있지? 나도 나중에 그들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이토록 깊은 관계를 어떻게 오래 이어왔을까? 그런 궁금증들이 있었는데 촬영을 진행하며 답을 다 얻은 것 같아요. 그리고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언니들이 변화하는 과정이었어요. 구체적인 모습을 그린 건 아니지만,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 같아요.” 이 감독은 이미 그 변화를 확인 바 있다. 당시 선생님 역할을 맡았던 최승철 감독이 수업 초반 언니들의 스마트폰 사진첩을 열었는데, 90% 이상이 꽃 사진이었단다. 그랬던 이들이 점차 자신과 서로의 얼굴을 담은 사진들로 채워나가고, 영상 촬영을 배우며 영화 제작까지 뛰어들게 됐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배워나가며 언니들은 단편 극영화 ‘우리동네 우체부’를 완성했다. 영화는 2020 서울노인영화제에서 시스프렌드상을 받는 기분 좋은 성과도 얻었다. 사실 이러한 대외 평가보다 더 의미 있었던 건 언니들 내면의 긍정적 변화였다. 이 감독이 당초 확신했던 변화가 이변 없이 일어난 것이다. “초반에는 주름진 얼굴과 굽은 등을 촬영하는 게 부담스럽다는 언니도 계셨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자연스러워지니, 나중엔 직접 배경이나 구도를 제안하기도 하시고, 대사하듯 일부러 이야기도 하시고요.(웃음) 점점 실력이 늘어가는 게 보였어요. 한번은 희자 언니가 밭일을 나갔다가 고춧대에 카메라를 고정해놓고 영상을 찍으셨는데 ‘대박!’ 저보다 낫더라고요. 한편으론 이 시대 젊은이로 태어났다면 더 굉장한 일들을 해내셨을 텐데 싶기도 했어요. 물론 언니들도 나이 듦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겠지만, 결국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해가셨죠. 영화에는 언니들의 셀프 영상이 많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영상으로 보면 자신의 외모나 목소리가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잖아요. 처음엔 힘들어하고 어려워하셨는데, 나중엔 그런 외적인 부분도 다 받아들이고 자신의 속내도 허심탄회하게 드러내시더라고요. 그렇게 나이 듦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픔이나 고민과 마주하며 오히려 긍정적으로 변화해가셨죠.” 흔들림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다 아직 언니들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앞서 ‘우리동네 우체부’에서 감독을 맡았던 춘희 언니는 벌써 다음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고. 이 감독에게도 차기작 계획이 있는지 묻자 “아직”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올해부터 삼척 도계읍에서 ‘폐광지역 통합 영상미디어센터’의 센터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당분간은 이 일에 집중할 생각이다. “2025년이 되면 도계읍도 마지막 폐광지역 중 하나가 됩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끝나가는 시점에, 이곳에서 터전을 이뤘던 이들에게 생기는 변화에 주목하려 해요. 이미 폐광지역의 지난 역사를 기록하는 건 다른 곳에서도 많이 하고 있고요. 그보다는 폐광이 되고 난 이후에 달라지는 주민들의 생활이나 내면의 변화를 그리는 작업을 생각 중이에요. 그런 것 외에도 읍 단위 미디어센터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요즘은 그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센터 일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깃거리를 찾아가겠다는 계획이다. 언니들을 만나 ‘작은정원’을 제작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런 고마운 순간이 언제 또 찾아올지는 알 수 없지만 불안하거나 막연하지는 않단다. 때론 흔들리더라도 그 흔들림을 즐기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겠다는 이 감독이다. “‘작은정원’ 작업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이거예요. 소위 개똥철학 같은 건데,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힌 삶을 살지 말자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거든요. 근데 작품에서도 언니들이 비슷한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그래도 내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싶더군요. 물론 아직은 흔들릴 때도 많지만, 언니들을 보면 나이 들었다고 해서 그런 흔들림이 사라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그 흔들림이 필요하다고 느껴졌어요. 인간은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 흔들림이 멈춘다면 생명력이 끝나는 단계라고 봐요. 그러니 나이에 상관없이 계속 그런 흔들림을 즐겨보셨으면 해요. 그렇게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이나 가능성의 씨앗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2023-09-25 0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