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파란만장했다

기사입력 2015-09-17 09:24 기사수정 2015-09-17 09:24

시인 유자효(柳子孝·68)의 아버지, 故 유육출(柳六出)

언론인 출신 시인 유자효의 시에는 부모님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추석’, ‘가족’ 등의 일상 시에 젖어 있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유독 눈에 띈다. 거기에는 고난의 시대에 비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아버지 유육출 씨와 어머니 김순금 씨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특히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가 어떤 역경이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그의 아버지 유육출 씨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다. <편집자 주>

▲KBS와 SBS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유자효씨. 사실 언론인이 되기 훨씬 전인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입선하며 시인으로 먼저 데뷔했다. 이태인 기자 teinny@
▲KBS와 SBS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유자효씨. 사실 언론인이 되기 훨씬 전인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입선하며 시인으로 먼저 데뷔했다. 이태인 기자 teinny@

“부위독급래”

대학교 4학년생 유자효에게 어느 날 전보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니 신속하게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내용. 상황을 살펴볼 틈도 없이 부랴부랴 짐을 꾸리던 찰나,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든다.

“모사망급래”

전보를 본 유자효의 가슴이 미어진다. 또 그 미어지는 가슴의 틈새로 피어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그 슬픔의 무게를 더 무겁게 했다. 46세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그의 어머니 김순금 씨. 그 나이에 돌아가신 것조차 오래 버텼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난의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는 어머니에게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숨어서 울 뿐이었다.

유자효는 어머니의 죽음을 대속(代贖)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일가친척이 모두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1층에서 아버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어머니가 2층에서 홀로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친척들은 야단이 났습니다. 당장 초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죠. 당시 아버지도 중태에 빠졌기 때문에 환자를 집에 둔 채 초상을 치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척들이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저에게 연락을 했던 겁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아버지가 입원을 하게 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뇌혈관이 터졌던 아버지는 조금만 늦었더라도 사망할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지만, 유자효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상에서 이미 어머니의 변고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감은 눈에서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봤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강인하고 담대한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아버지의 성공신화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당시 부산 지역에서 소득세 납부 2위를 했어요. 건축업을 시작으로 청과물 회사까지 승승장구했던 것이죠. 담대하고 남자다운 아버지는 타고난 사업가였습니다.”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 가문의 7대손이었던 아버지는 10대에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다. 양반의 집안이었지만, 7세 때 경남 삼천포로 이거한 후 곤궁했던 삶에 뾰족한 해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출을 한 후 유육출이 기회의 땅으로 삼은 장소는 바로 인천이었다. 거기에서 일본인 건설업자에게 일을 배우며 상당한 부를 축적해 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파릇파릇한 20대. 그렇게 건설업으로 승승장구를 할 때 찾아온 광복은 그의 사업에 날개를 달았다.

6·25전쟁도 그는 또 다른 기회로 삼아 청과물 회사를 차렸다. 경남 지역에서 오는 모든 청과물은 그 회사를 거쳐 부산 일대의 소비자들에게 공급됐다. 그렇게 청년 사업가 유육출은 어느새 부산의 소득세 납부 순위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성공해야 한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유육출은 그때 분명 미래가 장밋빛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첫 번째 시련이 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1. 아버지 故유육출씨와 초등학생 유자효  2. 아버지 故유육출씨. 그는 6월에 태어나 육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이태인 기자 teinny@
▲1. 아버지 故유육출씨와 초등학생 유자효 2. 아버지 故유육출씨. 그는 6월에 태어나 육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이태인 기자 teinny@

◇ 화마(火魔)가 일으킨 ‘재기’의 광기(狂氣)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청과물 사업장이 모두 잿더미가 됐습니다. 영주동에서 발화한 불은 남포동과 국제시장 일대를 휩쓸었고, 결국 중구 일대가 모두 폐허가 됐죠. 당시 보험 제도라는 게 없었던 터라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 부담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땅을 팔아 납품했던 화주들에게 보상했어요. 아버지 사업에 첫 제동이 걸린 순간이자, ‘재기’를 위한 광기에 사로잡힌 순간이었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유자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재기에 미친 사람’이었다. 광산업, 경마장, 극장, 간척사업 등 재기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결단에 있어서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브레이크는 없었다.

재기의 발판을 찾던 유육출이 경남 지역의 고령토 광산의 채굴권을 사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폭력배들의 기습과 협박에 결국 채굴권을 포기하고 만다. 그 고령토 광산의 소유는 결국 지역 연고가 있는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혼란의 시대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손을 댄 것은 경마장 사업. 그러나 이 역시 변변한 경주마가 아닌 조랑말로 운영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지역 최초의 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자랑스럽게 문을 열었지만, 구매한 영사기가 말썽이었다. 음향은 제대로 나오지 않고, 필름은 끊기기 일쑤. 첫 날부터 분노한 관객들의 환불 요구 소동에 휩싸이다 결국 얼마 못 가 문을 닫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업 실패는 다음 이야기를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타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덕도 간척사업이다. 분명 이 사업은 유육출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말이다.

그가 계획한 가덕도 간척 사업은 당시 국토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장면 정권의 국책과 맞는 일이었다. 제방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는 그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려놓았다.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에 가덕도 간척사업은 그저 조그마한 에피소드로 여겨졌고, 이것에 눈을 돌리는 정부인사는 전무했다. 그도 이 사업에 모든 것을 걸고, 공사를 진행해 왔던 터라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Go’할 것이냐 ‘Stop’을 할 것이냐는 기로에서 그는 과감히 ‘Go’를 선택했다. 자신의 모든 사재를 털어 가덕도에 투자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간척지는 메워지지 못했고, 재산은 모두 바닥이 났다.

“그렇게 빚더미에 앉게 됐죠. 소송이 빗발치고, 어머니는 빚쟁이들 앞에서 반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재기를 꿈꾸었어요. 이후에도 부산 산업전시회 개최를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니까요.”

▲KBS와 SBS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유자효씨. 사실 언론인이 되기 훨씬 전인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입선하며 시인으로 먼저 데뷔했다. 이태인 기자 teinny@
▲KBS와 SBS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유자효씨. 사실 언론인이 되기 훨씬 전인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입선하며 시인으로 먼저 데뷔했다. 이태인 기자 teinny@

◇ 나를 지탱해 주는 힘, 아버지

시인 유자효가 결혼을 하기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아버지를 두고 결혼을 하기엔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버지의 재혼. 마침 응암동 시장에서 교제를 하고 있던 사람이 있어 혼례를 치렀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이 하늘을 찔렀고, 불화가 가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자효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저분과 헤어져 주십시오!”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았다. 일어나거라. 네가 먼저 죽겠구나.”

다음 날 어찌된 영문이지 유자효의 새어머니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평소에 그렇게 사납던 사람이 조용하게 떠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버지도 얼마나 헤어지기 괴로웠겠어요. 그런데 몸과 정신이 부실했던 상황에서도 그렇게 결심하고 처리하는 것을 보니 젊은 저보다도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만큼 강인하고, 고통 속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했죠. 종교가 없는 제가 살아가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버지의 생애라는 저의 거울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를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죠.”

유자효는 아버지가 운명하는 날까지 자신을 배려해 돌아가셨다고 얘기한다. 장례를 치르기 좋은 1990년 맑은 가을에 하늘로 떠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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