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두 해 살다 보니, 어른들의 옛 말씀들이 하나도 틀림이 없다. 지나고 나서야 경험을 해보니 이제야 터득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마도 사람의 마음이 나약해지기 때문인가 보다. 젊은 날의 고집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나고 어느덧 세상의 이치를 실감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속에서 함께한다는 것은 복잡 미묘하다. 적어도 필자의 젊은 날에는 아주 심했다. 더구나 주변의 모든 것들이 거의 완벽해야만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숨을 쉬고 뒤돌아보니, ‘왜 그때는 그렇게도 몰랐을까?’ 라고 자신에게 반문한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에 연연해서 상처받고 아파하며 밤을 꼬박 지새운 날도 있었다. 그 상처가 너무 깊어 감당하지 못하고 눈물로 방황한 때도 있다. 사람이 살면서 조금은 아픈 과정 속에서 성숙되고, 또 그것을 감당해내며 넉넉해진다는 것을 그때는 차마 몰랐었다.
그렇게 곧 죽을 것만 같던 엄청난 일들도 시간이 지난 지금에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만 같다. 사람들과 뒤섞여 수없이 관계를 맺고,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던 고통의 시간들도 잠시 멈추어 한발 돌아보면, 굳이 화해하지 못할 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인간이고 사람 냄새이다.
사람이 태어나 쉽게 죽고 살기도 하는데, 죽음에 비하면 무언들 못하랴 싶기도 하다. 사실상 ‘용서’란 단어는 엄숙히 말하면 자기와의 싸움이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어느 누군가에 의해 상처를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화’라는 용광로의 불길 속에 자기를 던져놓으므로 해서 용서를 못하는 것만 같다.
아무리 활활 타오르던 불길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 꺼지기 마련이다. 결국 시간 속에 자신만이 재가되어 힘없이 벗어나오게 되고, 한때 시뻘겋게 타올랐던 자신을 스스로 부끄러워 하기도 한다. 적어도 본인의 양심은 그 사실을 안다. 치솟았던 ‘화’라는 것들도 언젠가는 열기가 식어 가슴에 흩어지고 만다. 남는 것은 후회의 마음뿐이다.
오히려 스스로가 자신의 화를 감당치 못해, 용서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이다. 결국 자기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결론의 자가 당착에 빠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어찌 화를 내지도 말고 살라는 말인가? 얼마든지 ‘화’라는 것은 자유롭게 끓어 날 수도 있고, 특별히 마음이 여린 사람은 깊은 아픔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하루빨리 그 불길에서 벗어 나는 일, 그 길이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반성하고 그리고 남에게도 넉넉한 마음을 베푸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못할 것도 없다. 단순하게 마음만 먹으면 아주 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까짓 것 마음먹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놈의 여유로운 마음먹기가 무척 힘이 드는 것뿐이다. 결국 자아 성숙이 덜 익은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모든 것들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위대한 사실이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식과의 관계도 남편 또는 이웃들의 친분도, 그 모든 것들도 다, 자신으로부터 온다. 모든것들은 그저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으로부터 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쉽게 가라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자신만은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힘겨운 이 세상을 살면서 애써서라도 주변을 향한 '용서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필자도 마음에 잔잔하게 용서의 꽃을 피워 평화로움을 만들어 내고 싶다. 그 꽃은 특별한 권리가 아닌 평범한 사랑의 꽃으로, 사람 냄새 훈훈하게 피어나는 예쁜 꽃이었으면 어떨까 싶다.
또 돌아보고 후회하는 사람의 꽃이라면, 이왕이면 가슴 따뜻한 ‘용서의 꽃’으로 피어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