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 후 공허함이 들이칠 때 필요한 건 자극이 아닌 여백일지도 모른다. 그 여백을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한반도메밀순례단’은 특별한 제안을 건넨다. 박승흡 단장을 주축으로 10여 년 전부터 메밀 맛을 좇아 전국 방방곡곡을 걷고 있는 이들. 함께 걷는 맛의 순례를 풍류라고 말한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 ‘국수’ 中
일제강점기 시인 백석은 시를 통해 평양냉면을 이렇게 애틋하게 묘사했다. 오늘날 평양냉면을 표현하는 ‘슴슴하다’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메밀 음식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평양냉면과 막국수. 동치미에 말아 먹는 메밀국수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두 음식은 같은 뿌리를 지닌다. 동치미는 고려시대부터 기록이 확인되는 우리 김치의 근본이다.
박승흡 단장은 40년 전부터 매료된 메밀 음식을 ‘무미(無味)의 미(美)’가 살아 있는 음식이라 말한다. 맛이 없기에 맛있다는, 역설적인 미의식이 깃든 음식이라는 의미다.
“여백이 있다는 건 다른 것을 채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메밀국수는 특히 돼지고기와 궁합이 좋아요. 서로의 부족한 맛을 메워주며 균형을 이룹니다.”
맛없는 맛을 찾아서
무더운 여름 생각나는 시원한 평양냉면. 박승흡 단장은 “그 슴슴한 맛은 MZ세대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남북한 7000만 겨레가 ‘맛없는 맛’을 좇고 있다”라며 웃었다.
그는 “단맛은 혀를 지배하는 폭력성을 지녔다. 자극에 익숙해지면 감각은 무뎌진다”면서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사람들은 단맛이 아닌 무미의 맛을 통해 감각을 회복하려는 것 같다”고 짚었다.
그는 최근 저서 ‘박승흡의 메밀 순례기’를 펴냈다. 지금까지 방문한 식당이 500곳 넘는다는 그는 그중 24곳을 엄선해 책에 실었다. 그는 “메밀의 담백함, 여백을 되도록 훼손하지 않은 집을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식당을 다니며 여러 그릇을 비운 박승흡 단장. 그가 기억하는 최고의 한 그릇은 어디였을까. 그는 “나는 메밀 맛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미 면에서 봤을 때 강원도가 으뜸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강인한 곡물입니다. 예부터 화전민의 주식이었고, 낮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일으켜 세운 작물이죠. 이 정신은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사상과도 닿아 있습니다. 물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고, 결국은 넓은 바다가 되죠. 그런 점에서 강원도는 메밀이 가진 본질을 가장 온전히 간직한 땅입니다.”
박 단장은 “강원도에서는 무미의 미학을 체험할 수 있다. 맛이 없어서 놀라 자빠질 정도다”라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그는 강릉에 있는 ‘권오복분틀메밀국수’를 예로 들었다. 1970년대 분틀을 그대로 재현한 식당으로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메밀 본연의 풍미, 즉 여백의 미를 느끼면 미식의 경지에 다다르고 더 다양한 맛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박승흡 단장 역시 강원도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메밀을 자주 접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메밀을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본격적으로 순례를 하면서 그는 메밀에 관해 모르는 게 없는 전문가가 됐다. 메밀의 구조, 특징, 효능 등을 모두 꿰고 있다. 특히 그는 “메밀은 혈관에 좋은 루틴(비타민 P) 성분과 저열량으로 웰빙 음식으로 통한다”고 극찬을 늘어놓았다.

시니어에게 필요한 미식 여행
한반도메밀순례단에는 100명 넘는 사람이 속해 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참여하지만, 시니어 세대가 주축이다. 한 번의 순례에 10명 내외가 함께한다. 순례 장소와 여정은 박승흡 단장이 기획한다. 준비할 것이 많지만, 사람들과 함께 메밀 맛을 나누는 기쁨을 놓을 수 없다.
이들의 순례는 단순한 맛집 탐방이 아니다. 지역 고유의 음식과 음식을 둘러싼 문화·역사·사람을 경험하는 여행 형태인 컬리너리 투어리즘(Culinary Tourism)이라고 할 수 있다. 박 단장은 “메밀이라는 매개를 통해 지역을 알고,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여행”이라고 말했다.
“한반도메밀순례단 단원들을 보면 저처럼 메밀을 좋아하는 분이 대부분이지만, 좋아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솔직히 정말 맛없다고 평가하죠. 그 솔직한 반응을 함께 나누는 것도 여행의 묘미입니다. 관계가 단단해지고, 추억이 생기고, 감각이 살아납니다.” 박승흡 단장은 미식 여행을 ‘풍류’라고 표현한다. 맛 속에서 멋을, 멋 속에서 맛을 찾아내는 놀이를 풍류라고 생각한다. 그는 시간과 자본의 여유가 생긴 시니어에게 미식 여행은 더없이 좋다고 추천한다. 그동안 바쁜 삶을 살아왔기에 이제는 풍류의 시간을 가져본다면 더없이 좋을 터다.
“시니어일수록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거든요. 살아 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감각을 느껴야 되겠죠. 메밀이 아니더라도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두 발로 찾아가서 먹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수다를 떨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미식가가 될 수 없습니다.”
“50대 넘어서도 메밀을 접하지 않은 자는 인생이 참 슬프다”라는 말을 남긴 그는, 메밀 순례를 하며 어느새 삶의 태도까지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그는 앞으로 한반도의 DNA를 품은 메밀처럼 강인하게, 사람들을 보살피며 나아갈 계획이다.
“메밀에는 흙냄새가 있어요. 땅을 닮았죠. 밋밋하고 순하지만, 또 먹고 싶어지는 맛입니다. 메밀을 따라 걷다 보면 결국 사람을 만나게 되고, 나 자신도 다시 만나게 되죠. 순례가 특별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가는 것이죠. 허나 메밀은 한국인에게, 그리고 제게 참 특별한 음식입니다. 박승흡의 메밀 순례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