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백과사전을 떠나보내던 날

기사입력 2017-12-18 10:18 기사수정 2017-12-18 10:18

▲세계대백과사전을 떠나보내던 날(박미령 동년기자)
▲세계대백과사전을 떠나보내던 날(박미령 동년기자)
이사할 때마다 무수히 책을 버렸건만 끝내 버리지 못한 책이 있다. 바로 30권짜리 세계대백과사전이다. 젊은 시절 직장 생활할 때 우연히 책 외판원을 하던 지인으로부터 장기할부로 산 책이다. 두꺼운 장정에다 몹시 무거워 한 번에 세 권 이상을 드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한 번 옮기려면 열 번은 왕복해야 하고 자주 펼쳐 보지도 않는 책인데 버리지 않고 끼고 다니는 것은 불가사의다.

물론 자신을 과시하는 듯이 중후한 외관 때문이기는 하다. 책장의 맨 아랫단에 일렬로 가지런히 세워 놓으면 품위도 있거니와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이 들어 그 무거운 녀석들을 막무가내로 끌고 다닌 혐의가 짙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이삿짐 옮기는 인부들의 눈총을 참아가며 보관을 고집한 것은 아닐 터이다. 어쩌면 거기에는 미처 생각지 못한 심오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와서 그리도 버리지 못한 이유가 어쩌면 그것이 내 몸의 일부 같은 느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비록 읽지는 못했으나 언제나 거기에 머리를 대신하는 무수한 지식이 놓여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 말이다. 마치 요즘 스마트폰이 없으면 잠시도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그런 심리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세계대백과사전은 아날로그 시대에 나의 신체 일부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미 시대가 달라져 지금은 손안의 작은 스마트폰 속에 그의 수십 배에 달하는 지식이 들어 있으니 방대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세계대백과사전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어느덧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한 시대를 대표하던 스승의 죽음 같다고나 할까.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눈칫밥을 먹고 있는 스승의 모습이 안쓰러워 마침내 장례를 치러 드리기로 결심했다.

장례의 결단은 내렸지만 치우기도 만만치 않아 일단 고물을 취급하는 곳을 검색했다. 혹시 약간의 금전을 받고 무거운 것을 처치하면 일거양득이란 얄팍한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화를 해 보니 옷가지면 몰라도 책은 가져가 봐야 돈이 되지 않고 무겁기만 해서 안 가져간단다. 어쩔 수 없이 재활용 처리장을 장례식 장소로 정했다. 책장에서 빼내 문 앞으로 옮기면서 문득 시신 기증이 떠올랐다.

언젠가 ‘죽으면 썩어질 몸! 태우는 데 돈을 쓰느니 자손들 편하게 시신 기증을 하면 어떨까.’ 하고 고민했던 적이 있다. 우리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면 아무 쓸모 없는 몸뚱이에 불과하듯 방대한 지식으로 가득 차 구텐베르크 이후 근대의 가장 찬란했던 성과물인 세계대백과사전도 어느덧 흘러가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듯 시신 기증을 하는 처지로 전락했구나 생각하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한 시대의 거인도 이젠 한낱 미용 티슈로 전락하겠구나 생각하며 마치 임종을 지키는 비장한 얼굴을 하고 남편과 낑낑대며 재활용 처리장으로 향했다. 늘 처리장을 지키며 분리수거를 담당하는 노인과 눈인사를 하고 종이 수집망 앞에 책을 놓았다. 순간 노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눈치챘다. 노인은 슬며시 책을 따로 챙겼다. 짐짓 모르는 체하고 “아, 책은 분리수거 대상이 아닌가요?” 하고 물었다.

노인은 멋쩍은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아니 이 책은 귀한 것 같아 손주 녀석들 공부하라고 주고 싶어서.” 아! 이런 걸 기사회생이라고 하는구나! 아직 구시대 스승을 존중하는 사람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정중히 시신을 인계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남편과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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