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 <히든 피겨스>

기사입력 2017-05-22 15:50 기사수정 2017-05-22 15:50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 <히든 피겨스>(박미령 동년기자)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 <히든 피겨스>(박미령 동년기자)
흑백 갈등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는 많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영화들을 보는 일은 불편하다. 마치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는 것처럼 백인들의 원죄의식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잔혹하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서서히 바뀌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오바마를 배출한 자부심 때문은 아닐까?

하긴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다. 아마도 이 소재를 1960년대 그 시절에 다뤘다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으리라. <히든 피겨스>는 그 시대의 흑백 문제를 21세기식 시각으로 바라보았기에 훨씬 관대하고 낙관적인 시각을 보여줬다. 이 영화는 오히려 페미니즘을 다룬 영화에 가깝다. 그래서 영화를 본 뒤에도 감정의 앙금이 없이 산뜻하다.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의 냉전시대에 벌어졌던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을 배경으로 한다. 케네디 대통령의 선언을 기폭제로 불붙은 이 경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NASA 프로젝트에 숨겨진 천재들의 실화가 골격이다. 타고난 천재성으로 백인 남성들의 천국인 NASA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세 여성의 이야기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바로 수학 천재 캐서린 존슨(타라지 헨슨),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엔지니어 메리 잭슨(자넬 모네)이 그들이다.

흑백 문제를 다룬 영화가 늘 그렇듯이 이 영화에도 현실과 편견이라는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 살아가는 세 흑인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첫 시퀀스부터 우리의 예상을 깨뜨린다. 세 여성이 출근길에 차가 고장 나 백인 경찰이 등장한다. 익숙한 장면을 예상하던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고 경찰은 그녀들을 에스코트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탓에 이야기는 지루하다. 극적인 장치 없이 자잘한 에피소드로 진행된다. 예컨대 당시 흑백분리 화장실 때문에 늘 800m나 뛰어가서 일을 봐야 했던 차별을 캐서린이 항의하자 잘생긴 상사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이 “NASA에서 모든 사람의 소변 색깔은 똑같아!” 같은 멋지고 속 시원한 대사로 상황을 수습한다. 화장실 가는 장면의 긴박감을 경쾌한 음악으로 승화(?)시킨 점은 데오도르 멜피 감독의 재치다.

물론 극적인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성 특히 흑인은 회의석상에 참석할 수 없다는 불문율을 깨고 천재를 알아본 알 해리슨은 캐서린을 회의에 참석시킨다. 그녀가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수학 공식을 사다리 타고 올라가 칠판 꼭대기부터 써내려가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그러나 전 퍼스트레디인 미셀 오바마의 “‘절대 포기하지 말고 자신을 믿어라.’ 이것이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라는 평이 이 영화의 존재 가치를 높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진보적인 메시지가 이 영화를 아카데미까지 끌어올리고 결국 NASA 최초 흑인 여성 책임자이며 프로그래머 역을 연기한 옥타비아 스펜서에게 여우조연상이 돌아가는 성과를 가져다줬다. 그러나 분명 감동적인 실화임에도 여전히 미국 지상주의적 메시지가 마음에 걸린다. 또한 “이론이 아닌 숫자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 수학은 항상 믿음직하죠”와 같은 대사는 아쉽다.

오히려 마지막 엔딩이 문득 마음에 걸린다. 이렇게 치열했던 그들의 삶은 정작 컴퓨터의 등장으로 수학 천재라는 빛이 가려지고 만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에서 칼을 휘두르며 덤비는 적에게 당황하는 척하며 총을 발사하는 해리슨 포드의 유머처럼, 시대가 바뀌면 모든 것이 허망해진다. 그래서 그들의 비극과 분투도 한바탕의 소극처럼 보인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실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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