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선업의 국제경쟁력과 신의

기사입력 2017-08-24 09:48 기사수정 2017-08-24 09:48

한국의 조선업, 그러니까 대형 화물선을 만들어 수출도 하고 국내 해운회사에 판매하는 산업인 조선업은 1970년대 초에 시작돼 20여 년이 지난 1990년대에는 일본을 넘어 세계 1위 자리를 확보했었다. 그 전까지는 영국이 세계 1위였는데 일본이 영국을 넘어서 세계 1위의 지위를 누리다가 한국에 추월당한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조선소 10개 중에 한국이 7개나 점할 정도였다. 그만큼 한국의 조선업이 영업력, 기술력, 생산성과 관리력 등이 뛰어나 이른바 국제경쟁력이 세계 1위 수준에 올랐던 것이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이나 위기상황에서도 신의와 공정성을 유지했고 국제계약의 조건들을 이행하는 수준도 선진국에 비할 때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7년 말에 몰려온 IMF 한파로 필자가 근무하던 대형 조선소도 부도가 나고 법정관리 및 구조조정의 격랑에 휘말렸다. 크게 불안을 느낀 외국의 해운회사들은, 선박들이 한창 건조 중이었지만 끝까지 차질 없이 인도될 수 없다고 판단해 13척이나 선박 건조계약을 취소했다. 당시 싱가포르의 한 해운회사로 갈 선박은 건조가 거의 완료되어 마무리를 위한 잔 공사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사실은 부도사태로 조선소에 현금이 부족해, “1주일 먼저 몇백억원 상당의 인도분할금을 융통해줄 수 없겠는가?” 하고 의사를 타진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융통은커녕 선박 값을 몇십억원 깎아달라는 냉정한 요구였다. 결국 어려움을 참으며 1주일 후 선박을 인도해 인도분할금을 미화로 받아 원화로 환전하니 오히려 몇십억원 환차이익이 생겼다.

그다음 프랑스의 한 해운회사는 선박을 인도하기 몇 주 전에 기술 담당 수석부사장이 조선소에 와서 매일 현장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고는 기술적 하자 사항을 계속 들먹이며 조선소 관리자들을 자기 회사 부하처럼 부렸다. 정도가 심해 선박 건조계약서의 권리의무 이행관리를 총괄하던 필자가 따졌고 양해할 것들을 서로 합리적인 수준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조선소 사장실에 간 그 기술 담당 수석부사장은 유창한 영어로 조선소를 질타하듯 기술적인 하자 사항을 맹비난하며, 몇십억원을 조선소가 해외은행에 예치하는 조건으로 선박을 인수하겠다고 해댔다. 부도난 조선소로서는 몇백억원 인도분할금을 빨리 받아야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으므로 무리한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높은 직위의 고객인 외국 선주 대표라 해도 합의내용을 어기거나 거짓말하는 것은 용인하기 힘들었다. 결국 필자가 나섰다. “하키비안 부사장! 당신 어제 나하고 양해하고 합의한 것들을 왜 사장님 앞에서 번복하는 거요? 그리고 왜 거짓말을 합니까?” 그러고는 그날 저녁, 둘이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담판을 벌였다. 그른 내게 이렇게 말했다. “미스터 리! 아무리 그래도 당신 사장 앞에서 그렇게 면박을 주면 됩니까?”

1년 후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항에 있는 그 프랑스 해운회사를 방문했다. 예치금액을 상호 정산하고 하자보증문제를 종결하자며 그가 우리를 초청한 것이다. 깨끗한 마르세유 항구엔 상당히 큰 조선소도 있었는데 일감이 없어 정막이 흐르고 있었다. 부도난 우리 조선소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는 듯했다. 하키비안 부사장과 국제 계약서상의 권리의무를 잘 마무리 짓고 나서는데, “미스터 리! 마르세유 산 와인 16박스를 선물로 당신 조선소에 보내겠소. 우리 선박 만드느라 수고한 분들과 함께해주길 바라요.” 했다. 해외 출장을 마치고 통관절차를 거쳐 프랑스 산 포도주를 동료들과 마시면서 국제경제력과 공정함, 그리고 인간적 신의의 수준을 되짚어봤다.

2000년대로 들어서자 중국에서는 세계 1위 조선국을 목표로 우후죽순처럼 몇십 개의 대형 조선소들이 생겨났다. 신조선박의 수주량, 생산량, 인도량 등에서 한국을 위협하거나 추월해 1위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8년 미국 발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로 중국의 많은 조선소들이 문을 닫았다. 한국의 대형 조선소들도 불황을 겪었다. 신조선박의 건조 수요가 감소하자 해양구조물 생산에 주력해오다 이 또한 유가변동에 따라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몇 년간 대형 조선소들이 위치해 있는 거제도와 울산 지역에서 직장을 잃은 종업원들이 무척 많아 실업급여 받는 인원들 통계가 아직도 다른 지역보다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2017년 상반기부터 한국의 대형 조선소들의 선박 건조계약 실적이 세계 1위 자리를 다시 찾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조선업에 오래 봉직했던 동료와 후배들도 괜스레 기분이 좋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진다. 스페인 선주가 발주한 선박을 중국 조선소에서 건조하도록 국제 선박건조계약을 중개한 친구가 있다. 중개수수료 2할을 할인해줬는데도 3년째 6할의 중개수수료를 아직 못 받고 있다고 한다. 중국조선소 사장이 국제중개수수료계약을 고의로 회피하는 것이다. 친구가 몇 번 비행기 타고 받으러 갔는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거나 아예 피하고 있단다. 국제계약을 헌신짝처럼 무시하고 고의로 이행하지 않으려는 중국조선소 사장의 태도는 한국 조선업에 오래 근무한 경력자로서 용인하기 싫다. 그래서 친구가 상해 소재 변호사를 선임해 국제 수준의 법적 조치를 취하는 데 적극 지원했다. 중국 조선업의 국제적 수준 향상과 국제신인도 향상을 돕는 방편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탐대실하고 미몽에서 깨어나지 않는 중국 조선업의 수준에 안심도 되고 고소한 웃음이 나온다. ‘그래 너희는 아직 멀었어. 남의 돈 떼어먹고 국제무대에서 얼마나 생존하는지 보자.’ 기초와 구조가 국제적 수준으로 단단히 다져진 한국 조선업의 ‘조선입국(造船立國)’의 역할을 긍지를 갖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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