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시절 필담을 나누던 벗에게…

기사입력 2018-09-25 07:55 기사수정 2018-09-25 07:55

[부치지 못한 편지]

50년 전쯤 편지를 주고받았던 짧은 인연에 기대어 그대에게 다시 편지를 씁니다. 그 사이 어떻게 지내셨나요?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 되어서 그대나 저나 서로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이가 되고 말았지만 밤잠을 설치며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편지를 이어가던 까까머리 시절의 기억은 아직 저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답니다.

그때의 청소년들은 참 답답한 오리무중의 한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요. 10대 중·후반을 지칭하던 ‘하이틴’이란 말은 붕붕 하늘을 향해 치솟던 꿈 많은 시절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온갖 금기와 규제를 짊어진 수행자의 시기라고 해야 할 정도로 힘겨웠지요.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중고생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해 걸어가는 것만으로 비행 청소년 취급을 받던 때이니까요. 설마 그럴 리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겠지만 정말 그랬답니다. 그러니 소년 소녀가 정답게 손을 잡고 걸어간다든지 분식집에 마주 앉아 김밥이라도 나누어 먹고 있다면 교외단속반 선생님에 의해 단속 대상이 되기 십상이었지요.

그렇다고 출구가 완전히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울며 겨자 먹기로, 달리 보면 낭만과 품위를 갖춘 방식으로, 우리 세대 소년 소녀들에게는 펜팔이라는 서신을 통한 교제가 있었으니까요. 아, 맞아! 하고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맞장구를 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대와 나도 그렇게 잠시 인연이 닿았던 것이겠지요. 1970년대 초입의 어느 시점, 그 즈음에는 학생들을 위한 각종 매체가 많았습니다. 잡지와 신문들, 저는 그 시절을 풍미하던 학생 잡지 뒷면에 실린 펜팔난에서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의 여학생이 올려놓은 주소를 발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쓸 마음을 먹었습니다. 취미는 사색, 음악감상, 낙서 등, 들뜬 마음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며 미지의 소녀에게 첫 편지를 씁니다. 우선 자신의 소개부터 해야 했지요. 사는 곳과 학교, 취미와 장기, 장래 희망 같은 것 등등. 그렇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편지지 절반쯤 써내려가다가 구겨버리고, 또 한 바닥 가까이 쓴 자기소개가 마뜩찮아 또 구겨버립니다. 이 주소로 편지를 쓸 또래 학생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 정도 편지로는 답장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될 게 뻔합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하이틴들은 사방 높게 둘러쳐진 담장 안의 어린 토끼들이어서 이렇게라도 뜀뛰기를 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편지로 소통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한 번으로 편지가 끝난 적도 있고 또 어떤 친구는 한참을 이어가며 소소한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편지로만 소통하는 것이니 과장과 허풍과 엄살도 심했을 테고 진도가 잘 나가면 가장 멋지게 나온 사진 한 장씩 교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왜 그런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저를 나무라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편지를 쓰는 저를 탓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늙어 자식들 알면 민망스럽다고 손을 내저으실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그렇긴 해요. 환갑을 넘긴 제가 까까머리 중학생 때 이야기를 하려니 부끄럽기는 해요. 그러나 온갖 망상으로 힘들긴 했지만 그 시절이 아름답게 추억되는 건 어쩔 수 없나봐요.

요즘은 손전화 문자 발송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지만 편지는 여간해서 써볼 엄두가 나지 않는 구습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건 초등학생만 되어도 갖게 되는 편리한 손전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소통해야 하는 오늘의 변화된 생활 방식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아이들의 경우 예전에야 집과 학교를 오가는 것이 정해진 동선이고 기껏해야 학교 운동장이나 마을 공터에서 잠시 뛰노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방과 후 몇 군데 과외 학원을 거치며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니 어른들 못지않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는 그런 교감이 이루어지는 기회가 흔치 않았어요. 그럴 만한 사회적 환경도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콩나물시루 같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학교 교실은 만원이었고 이렇다 할 문화생활도 누리지 못하던 때여서 여유로운 문화적 혜택이나 친교가 이루어질 기회가 적었던 시절이었어요. 텔레비전도 동네에서 잘사는 친구 집 마루에 엉거주춤 앉아 눈동냥하듯 봐야 했는데 그때마다 안방에서 비스듬히 누워 과자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또래와 너무나 먼 격차를 느끼기도 했지요.

그에 비하면 미지의 친구와 주고받던 필담은 참으로 낭만적인 교감이었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중학생 무렵부터 편지로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했어요. 이른바 펜팔이라는 것이었지요. 그 디딤돌을 마련해준 건 여러 형태로 발간되던 청소년 잡지와 신문의 펜팔난이었어요. 자신의 취미와 나이, 주소 같은 걸 밝히면 편지로 맺어지는 친구가 생기던 시절 이야기예요.

그 시절의 학생 잡지는 말미에 독자문예란을 마련해 시와 산문들을 실어주었는데 제 글도 가끔 거기에 올라갔고 그 바람에 전국에 있는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어요. 제 문장 수련은 그 시절 편지쓰기로 다 이루어진 것 같아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삶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요.

저의 열대여섯 살은 그렇게 편지를 쓰며 성장했어요. 편지란 긴한 용무가 있어 작정하고 쓰는 경우도 있지만 불현듯 낙서처럼 끼적인 것에 진심을 살짝 얹어 쓰는 경우도 있는 것이겠지요. 어른들은 그걸 편지질이라고 면박을 주곤 했는데, 아마 쓸데없는 해작질 정도로 여겼던 것 같아요. 해외 펜팔은 글로벌한 친구 사귀기와 영어 학습의 한 수단으로 장려되었지만 또래끼리의 이성 펜팔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아요. 하지만 편지로만 소통하는 그 방식이 또래끼리의 고민과 현실 저 너머의 꿈을 이야기하는 데 적절한 방식이었던 것도 같아요.

편지로 우정을 나누던 그리운 벗들, 이제 우리 나이가 예순을 넘기기는 했지만 그 시절의 낭만과 사랑을 담아 누군가에게 고운 꽃편지 한 통 띄워보내면 어떨까요.


최영철(崔泳喆) 시인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 ‘돌돌’, ‘금정산을 보냈다’, ‘찔러본다’, ‘호루라기’, ‘그림자 호수’ 등이 있고 육필시선집 ‘엉겅퀴’, 성장소설 ‘어중씨 이야기’, 산문집 ‘변방의 즐거움’이 있다. 백석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최계락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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