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귀농정착 성공사례는 30년 직장 퇴직 후 고향마을로 돌아온 경북 봉화의 윤석은 씨에 대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농림축산식품부가 발간한 귀농·귀촌 수기모음집 ‘촌에 살고 촌에 웃고’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포스코 입사 31년 만에 퇴직하고 돌아온 고향마을. 300년 넘게 조상 대대로 살아온 봉화로 연어가 모천으로 찾아가듯 서둘러 돌아왔다. 집안의 종손으로 고향을 지키겠다는 부부가 선택한 것은 호두와 대추. 10년 전부터 묘목을 심고 준비해온 이들은 이제 자연이 그러하듯 자식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농사짓는다.
◇정년퇴직 10년 전부터 틈틈이 귀향 준비
2년 전 고향마을로 귀농했다. 군대 제대 후 2년가량 아버님 밑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1980년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에 입사해 2010년 정년퇴직했다. 연어가 태어난 모천으로 돌아오듯 나도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내 고향 봉화로 돌아왔다.
퇴직준비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시작했다. 다행히 고향에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약 5000평 가량의 논과 밭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간 날 때 농업기술센터에서 실시하는 농업교육도 열심히 받았다. 우리 내외는 무언중 종손으로서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휴가는 항상 고향에서 보냈다. 동네어른들 찾아뵙고 이것저것을 묻고 배워 가면서 농사 지식을 쌓아 나갔다. 하지만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봉화 지방에 맞는 과수종목 선택이 문제였다. 다양한 종류의 과수 묘목 중 마땅한 과수 종목을 선택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과수란 한번 심으면 최소 10년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고심과 고심을 거치고 여러 사람들의 자문을 받아 내린 결론은 호두와 대추였다. 먼저 2002년 포항산림조합에 가서 2년생 호두나무 묘목 200주를 사서 1500평 밭에 심었다 이듬해 또 200주를 사서 심었다.
그런데 어린 호두나무 묘목을 상부 약 20cm씩 자른 후 심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유는 단지 승용차 트렁크에 싣기 좋고 운반이 편리하다는 것이었는데 호두나무는 봄에 가지를 자르면 죽는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나무 전체가 말라죽는 이유를 알아보려 호두 집산지인 전라북도 무주와 충청북도 영동의 호두 농가를 찾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워가지고 돌아왔다.
호두나무가 다른 종류의 수목과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하절기를 제외하고 나뭇가지를 자르면 나무수액이 계속 흘러나와 말라죽는다는 것이다. 이것도 모르고 나무 상순을 이동이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가지를 자른 후 심어 놓고 직장이 있는 포항으로 내려간 것이다.
2003년 심은 호두나무 200주 모두가 말라 죽었다. 어쩔 수 없이 이듬해 다시 1주당 1만원씩 주고 200주를 다시 심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막대한 시간과 경비를 낭비했다.
◇최소 10년 내다보고 선택한 호두와 대추
같은 해 3월 하순경 대추나무 묘목 1주당 7000원씩 2년생 묘목 100주를 구입해 심었다. 그날 어린 대추나무를 정성스럽게 심어 놓고 포항으로 내려가서 모 라디오 방송에 2년간 나무에 얽힌 사연을 투고했더니 사연이 방송에 많은 지인들로부터 격려의 전화를 받았다. 이때 정년퇴직 후 고향 봉화로 귀농 한다고도 소개됐다.
직장생활 하면서 매달 한 두 번씩 휴일에 호두와 대추나무를 찾았다. 다행히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집이 비어있는 상태여서 밤이던 낮이던 찾아와 피곤한 몸을 고향의 품에 안길 수가 있었다.
지금은 약 4000여평의 밭에 호두나무 400주, 대추나무 100주와 겨울에 냉해를 입는 과수묘목을 제외하고 우리 가족이 사철 맛있게 먹을 수 있게 약 14종의 과실나무 100주도 함께 심었다. 제법 농장규모가 큰 편이다.
재래식 농기구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각종 기계식 농기구를 차례로 구입하고 포항과 봉화를 차로 몇 시간씩 달려와서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수입이 없는 농사를 짓다보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었다. 다행히 직장에서 월급이 나와 이런 생활이 가능했다.
논농사는 직접 경작할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밭농사인 호두와 대추 농사만 지었다. 세월은 무척 빨랐다. 정말 쏜살같이 흘러서 내가 고향 땅 언덕 위에 호두와 대추를 심은지 7년 만에 천년만년 다닐 줄 알았던 직장에서 나왔다. 입사 31년만에 푸른 근무복과 안전화를 벗어서 회사에 반납하고 우리 부부는 아무런 미련없이 새로운 인생 2막을 위해 2011년 봄 봉화로 돌아왔다.
하지만 농촌 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치 만은 않았다. 우선 경제적으로 전보다 어려워지고 몸이 아파도 차로 30분 넘게 읍내로 가야 병원에 갈 수 있었다. 대중교통도 아침저녁으로 하루 왕복 2회 다니는 시내버스뿐이었다. 읍내에 볼일이라도 생기면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직장에선 퇴직했지만 고향마을에선 아직 청춘
직장에선 정년퇴직했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젊은 측에 속한다. 그러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큰일이 생기면 먼저 앞에 나서야 한다, 동네 어르신 모두가 옛날부터 인연이 있던 분들이고 부모님 같은 분들이다. 따라서 마을 감투도 억지춘향식으로 벌써 몇 개 가지고 있다.
사소한 전구 하나 교환하는 것부터 수도꼭지 물 새는 일까지 소소한 일도 해야 한다. 그렇다보니 농사일 중간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귀농 첫해이던 2011년은 호두와 대추 등을 밭 5000여평에 농사지어 얻은 수익금이 2000만원이 채 안 됐다. 비료와 농약 등 기본 금액을 제외하고 나면 손에 직접 떨어지는 돈은 1000만원가량이다. 그래도 다른 귀농자보다는 훨씬 유리한 편에 속한다, 벌써 10년 전부터 미리 시작했으니 말이다,
고향 봉화에는 많은 귀농자들이 산다. 귀농해 성공한 분들도 많지만 반대로 실패해서 다시 유턴한 분들도 계신다. 나도 직장에서 받던 봉급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돈을 위해 부부가 함께 눈이오나 비가 오나 들판에서 일을 했다.
2년차인 지난해는 과수 묘목이 고사하거나 빈터에 여러 종류의 작물을 심은 뒤 2모작 즉 후작으로 양배추를 심기로 하고 모종을 예쁘게 포트에서 길러 7월 말경 200여평 본밭에 이식을 했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더워서 3일도 되지 않아서 말라 죽는 등 모두 세 차례나 옮겨 심어야 했다. 다행히 8월 14일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 광복절 하루 동안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우리 부부는 하루 온종일 비를 맞으면서 양배추 모종 이식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농사는 돈 보고 짓는 게 아니라 건강 보고 한다
2012년에는 음력 윤달이 있어 추석명절이 1개월 늦었다. 다행히 집 위치가 국도 36번 도로변에 있어 추석휴가차 집에 내려온 여식에게 멍석 깔고 앉게 하고 호두를 직접 판매하면서 짭짤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결산을 해보니 전년도 보다는 약 30% 정도 수익이 높았다. 뭐 높다고 해도 아직 순수익 2000만원에 턱걸이 하는 정도다,
그래도 돈만 보고 농사를 지으면 어렵다. 육체적으로는 힘들고 수익금도 얼마되지 않아서다. 건강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해야 한다. 수년전 직장 다닐 때는 회식자리가 빈번했는데 당시 소주 1병만 마셔도 다음날 아침 일어나기 어려웠다. 지금은 달라졌다. 소주 2병 가량 마셔도 다음날이면 이른 아침 끄떡없이 일어나 들로 나간다. 그만큼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 산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작년 농사도 예전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호두와 대추 농장 주변에 붉은 들깨와 참깨 농사를 했다는 정도다. 참깨는 약 100평, 붉은 들깨도 100평가량에 심었다. 참깨농사는 제법 잘 됐다. 5월 상순경 밭 두둑위에 멀칭 비닐을 한 후 전후좌우 12cm 간격으로 평균 6~7개 가량의 참깨종자를 심고 그 위에 채로 친 모래를 살짝 뿌렸더니 거짓말 같이 참께 종자가 90% 이상 발아했다.
사실 비료도 종자 뿌리기 전 흉내만 낼 정도로 약하게 살포했는데도 참깨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대풍이다. 참깨는 1.2kg 한 되에 2만5000원씩 약 60kg가량 팔았다.
붉은 들깨 농사도 조금 지었다. 붉은 들깨는 기초 한약 재료로 들어간다. 먼저 붉은 들깨를 이식할 밭 가까운 곳에 밀식으로 뿌린 후 약 1개월가량 지나면 10cm 가량 자란다. 비 오는 날 들깨모종을 솎아서 약 50cm 거리에 2포기씩 한곳에 심으면 된다.
이식 후 45일 가량 지나면 붉은 들깨 모종에도 빨간 꽃이 피기 시작하고 키도 약 70~80cm정도 자란다. 꽃이 피기 직전 수확해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건조기에 건조시키면 600g 1근에 3000원씩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집은 호두농사가 첫째다.
귀농을 결정했다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막연히 ‘어떻게 되겠지’라는 것은 없다. 그곳이 고향이어도 마찬가지다. 300년 넘게 봉화에서 조상대대로 살아와 텃새나 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인데도 항상 어른들에겐 고개 숙이고 잇다.
도시에서는 돈을 보고 일했다면 여기서는 다른 가치를 보고 일해야 한다. 미리 준비했고 집안에서 물려받은 전답이 있으니 자본도 연고도 없이 귀농한 사람과는 계산법부터가 다르지만 돈을 보고 농사짓는 게 아니라는 말에는 충분히 동감한다.
◇ 윤석은 씨의 귀농이야기
△귀농 전 거주 지역: 포항
△귀농 전 직업: 포스코
△귀농 결심동기: 정년퇴직 후 귀향
△귀농 선택작목: 호두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경주시 농업기술센터 귀농귀촌교육, 봉화 농업기술센터 귀농귀촌교육
△귀농연도: 2011년
△귀농시 나이: 만 57세(정년퇴직 이듬해)
△귀농지 선택사유: 고향
△귀농시 영농기반: 5000여평
△귀농 초기자금: 3억(집 건축비용 1억원, 농사초기비용 5000여만원 사용)
△현재 영농규모: 5000여평
△연간 수익: 2000만원
제2의 인생 멋지게 꾸며가는 전남 순천의 ‘월암공주’ 이인자씨
50대 중반의 나이에 자영업을 하는 남편의 불확실한 미래가 귀농귀촌을 결정하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마을 어른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면서 새로운 인생을 배워갔다. 농사와는 담을 쌓고 살려던 생각이 바뀌면서 귀농귀촌인들에게 희망의 꿈을 전하고 싶어졌다.
◇지긋지긋해 떠나려던 농촌으로 돌아오다 = 충청도 공주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시골 생활이 지긋지긋해 언제든 시골을 떠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로 상경해 직장생활을 했다. 농사와 관련된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던 계획은 성공했지만, 지금 내 직업은 농업인으로 바뀌었다. 아직 내 인생이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가늠이 잘 안 된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2008년까지 귀농귀촌은 나와 아무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저 평범한 주부로 살면서 남편의 큰 배려로 뒤늦게 대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순천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전원생활대학 과정을 한다며 같이 다니기를 권유했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생활이라며 거절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한두 명씩 귀농귀촌에 관심을 갖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나도 순천시 전원생활대학 과정을 접수하고 말았다.그것도 혼자가 아닌 남편까지 동행하고 말이다. 우리 부부는 전원생활대학 과정을 무사히 이수했다. 최종적으로 귀촌을 결심한 동기는 자영업을 하는 오십대 중반인 남편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앞으로 아이 둘을 출가시키고 더 나이가 들면 언젠가는 사업을 접어야 할 시점이 올 텐데, 그때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늘 고민이었다.
남편도 흔쾌히 허락해 어렵게 터 넓은 시골집을 구입했다. 손수 인부들과 집수리를 시작하면서 나의 귀촌생활은 시작됐다.한편으로 아이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은 “우리가 결혼해 나가고, 아빠 엄마가 더 나이 들어 시골에서 아프면 병원이 멀어 어쩌려고 하시냐”며 걱정했지만 지금은 제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줄 시골 외가집이 생겼다며 좋아 한다.
처음에는 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많았다. 포클레인이나 큰 차가 다니면 길이 망가지니 자제하라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됐다. 길을 만들 때 자신의 땅을 기부해 만든 길이니 자기의 길이라는 논리로 밀어부칠 때는 마음이 상해 잠시나마 귀촌생활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당 작업 과정에서 앞집 경운기 주차 공간을 만들어주고, 새로 지은 저온창고의 한쪽을 같이 사용하는 등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자 이웃은 그 누구보다 내게 큰 힘을 주는 든든한 지원자가 됐다.
지금도 마을 분들을 만나면 언제나 반갑게 인사한다. 대부분 어른들이 반겨주신다. 그러다가도 내가 뒤돌아서면 등 뒤에서 “이런 시골에 뭐 해먹을게 있다고 왔을꼬. 쯧쯧…” 하시며 흉을 보기도 한다. 이제 뒤통수 가려운 그런 말은 못들은 척 지나쳐 버리는 것이 일상이 됐다. 우리 집은 마을 한가운데여서 수시로 마을 어르신들이 들리시는데, 그럴 때마다 간식을 준비해드렸다. 그러다보니 어느 때부터인가 단감, 고구마, 무, 야콘 등을 가져다주시며 젊은 사람과 함께 살게 되어 너무 좋다고들 말씀하신다.
나 또한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마을 회관 어르신들까지 챙기는 습관이 생겨 이제는 제법 ‘큰 손’이 되어버렸다. 옆집 아주머니는 “집이를 뭐라 불러야 하는지 알려 줘봐” 하신다. “저는 충청도 공주가 친정이고, 공주 이씨이고, 현재도 앞으로도 공부를 해야 할 주부이기 때문에 공주라 불러주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아 그래, 공주 맞다. 이제부터 공주댁으로 부를 테니 그리 아셔” 하며 웃으신다.
◇산야초 장아찌와 건나물로 짭짤한 수익 = 수리한 집은 제조시설로 용도 변경해 준공하고, 아주 많은 고민 끝에 외서면 월암리에 ‘월암마실’이란 이름을 붙여 사업자등록까지 했다. 마을에서 땅을 임대하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집을 소개 해준 분께서 고맙게도 밭 700평을 무상으로 임대해주셨다.
2012년 봄, 처음으로 임대한 밭에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재배할 수 있는 호박, 가지, 토란을 심어 건 나물을 만드는 것으로 나의 농촌 생활이 시작됐다. 작년 봄부터는 시골에서 구할 수 있는 두릅, 가시오가피, 죽순, 엄나무순 등 봄나물을 이용해 산야초 장아찌를 열심히 만들어 나만의 제품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제품을 보관할 저온창고가 없어 고민하던 중 ‘우수창업농 지원사업’으로 저온창고와 조그마한 작업장을 건축할 수 있었다.
작년에는 저온창고가 없어 애써 만든 건 나물이 습기로 인해 망가지기도 하고 이웃집 저온창고 신세를 지면서 한해를 보냈는데 올해는 여러 가지 건나물, 장아찌 등을 저온창고에 맘껏 저장할 수 있어 얼마나 마음 편한지 모른다.
산지에서는 잘 거들떠보지도 않던 하품 농산물을 건조해 시장에 판매하면서 농가소득으로 짭짤한 소득을 올리는 내 귀촌 생활을 눈여겨보시던 이웃 한분은 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같이 하시자고 하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 50의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변한 것이 있다면, 뭔가를 배운다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지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스스로 가지게 됐다는 점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꽃차 3급’ 과정과 자격증을 취득해 귀촌생활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꽃들로 꽃차도 만들고, 다른 방법을 응용해 야생차를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고 고객들에게 전하기도 한다.
유난히도 더웠던 올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자투리 시간에 천연비누 제조법을 배워 단호박, 자소엽, 당귀 등 농산물을 이용해 천연비누를 만들기도 했다. 농가에서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많고 조금만 신경 쓰면 여러 가지 천연비누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직은 서툴지만 나의 귀촌생활은 이렇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배운 블로그, SNS를 통해 제품 판매경로도 조금씩 뚫었다. 무엇보다 즐겁고 행복한 것은 이 시대를 사는 한 사람으로써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나를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박한 시골 살이 이야기와 힘들었던 일, 즐거웠던 일을 나만의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어서 하루하루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그동안 관심을 가졌던 아동요리 공부를 이번 가을학기에 등록해 일주일에 한번씩 열심히 배우고 있다. 다른 교육생들은 봄 학기에 수강을 시작했고 나만 초보학생이지만 뒤처지지 않으려고 요리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렇게 공부를 계속하는 이유는 앞으로의 귀농생활에서 나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시골생활을 한다면 발전이 아닌 그대로 정체될 것 같다.
남편은 가끔 “공부는 언제까지 해야 끝나느냐” 묻기도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동안까지 공부는 계속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열정이 없었다면 난 그저 남편만 바라보는 평범한 주부로서의 인생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어떤 분들은 “시골 생활을 결심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느냐”,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묻지만 그 누군가가 아닌 내가 시골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다른 귀농귀촌인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하곤 한다. 세월이 더 흐른 뒤에 나이가 더 들어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마을 어른들과 함께라서 더 행복한 귀촌생활 = 초보 농사꾼이다 보니 마을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저 소꿉놀이 정도로 보이는지 텃밭의 작물을 보면서 그때그때 조언을 해 주신다. 혼자 힘들어 하는 일은 직접 농기계로 말끔히 해 주기도 한다. 만약 마을 분들이 아직도 나를 ‘뜨내기’로 생각한다면 이런 도움을 주셨을까?
이런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마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도울 수 있는 일에는 적극 동참하고 있다.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홍보는 물론 판매에도 열심이다. 마을 주민이 되었다며 텃밭에 밑 걸음까지 챙겨주는 고마운 이장님도 계시고, 밤늦도록 멸치젓을 담아 주는 어르신도 계신다. 고추장, 된장 간 봐 주신다고 두 팔 걷어 부치고 도와주시는 어르신과 보리 엿기름 기르는 것 알려 주시면서 딸처럼, 며느리처럼 하나하나 챙겨주시는 마을 분들이 너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순천시 외서면은 주암호 상류 지역이다. 이런 특성에 맞는 작물을 이용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할 계획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지대가 높기 때문에 배추, 무를 생산하는 농가가 많고 나 또한 무를 재배하기에 무를 이용한 맛있는 무장아찌와 한과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됐다.
농촌에서 젊은이는 찾아보기 힘들고 노인들뿐이라는 이야기는 생소한 게 아니다. 게다가 절반 정도는 독거노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농촌 실정을 늘 걱정하며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중, 무장아찌와 한과를 생각해 낸 것이다. 집집마다 무를 재배하고 있고, 한과 역시 농한기인 겨울에 만드는데 작업 환경이 좋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 건축한 작업장에서 좀 더 위생적이고 편리한 환경에서 한과를 만들어 판매해 보기로 했다. 큰 노동력이 아닌 단순 활동을 통해 노인들의 무료함을 해소하고, 노인 소득의 기쁨과 동시에 마을의 발전을 위한 일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마을 어른들과 함께 이런 일들을 하면서 마을사업으로 이끌어 가고픈 마음이다. 이런 작은 노력으로 마을 분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꼭 욕심내고 싶은 일이 있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장아찌 요리를 담는 나만의 책을 만들고 싶다. 올 추석에 장아찌를 선물로 받으셨던 분들께 서 짜지 않고 맛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줘 커다란 용기를 얻었다. 언젠가는 꼭 꿈을 이루도록 노력하겠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순천 시내
·귀농 전 직업: 주부
·귀농 결심동기: 미래에 대한 준비
·귀농 선택작목: 건나물류(고사리, 취나물, 죽순, 호박, 가지), 장아찌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순천시 농업기술센터 귀농귀촌교육
·귀농연도: 2011년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연간 수익: 2012년 1000만원
문화·예술 도시를 표방하는 서울시의 정책적 온기가 지방에까지 스며들고 있다.
지방 고유의 축제와 연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서울시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윈윈하며 시너지를 공유할 수 있도록 밑거름을 마다치 않고 있는 것. 과거 일부 지자체와의 갈등을 뒤로하고 새로운 문화·예술·축제 공연의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전남 완도군과 상생협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2014 완도 국제해조류박람회’ 성공 개최 등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양측은 국제해조류박람회 성공 개최 지원, 관광지(축제) 집중 홍보 및 서울시민 할인, 농수산물(전복·다시마 등) 직거래장터 운영, 농어촌 체험 및 귀농·귀촌 희망자 지원 협력, 서울·완도 도서관 프로그램 상호 교류에 힘쓰기로 했다.
서울시는 완도 국제해조류박람회 지원을 위해 서울시 홈페이지, 미디어보드, SNS 등 홍보매체를 활용해 적극 홍보하기로 했다. 또 단체 관람객 유치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이에 따라 완도군은 다음달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광화문광장, 보라매공원, 북서울 꿈의 숲에서 열리는 ‘농부의 시장’과 서울광장, 청계광장 등 ‘나눔 가득 서울장터’에 전복·김·미역 등 완도 농수산물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해 등축제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진주시와의 관계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립각은 온데간데없고, 상생협력의 기운이 싹트고 있는 것.
서울시와 진주시는 양 도시에서 열리는 등축제의 공동발전을 위해 협력관계 구축을 주요 내용으로 한 축제발전협력서를 작성했다. 특이한 점은 이 과정에서 서울시가 많은 양보를 했다는 것.
서울시는 우선 서울등축제의 명칭을 진주남강유등축제와 이미지가 겹치지 않도록 변경키로 했다. 또한 서울등축제의 주제와 내용 역시 진주남강유등축제와 구분되도록 했다.
아울러 그동안의 갈등을 봉합하고 화해와 협력의 미래를 제시하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서울시와 진주시는 협력서 발표를 계기로 각기 주최하는 등축제 발전을 위해 교류와 협력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로 했다. 또 원활한 협력을 위해 실무협의체를 구성, 운영키로 했다. 서울시의 이 같은 통 큰 결단이 녹아든 협력서의 효력은 올해 열리는 축제부터 적용된다.
‘내일’을 키우죠”
베이비부머 귀농의 정석 전북 고창의 송인보씨
목에 힘주고 자신감 넘치던 삶은 세월에 밀려 점점 작아져만 갔다. 도시생활을 툭툭 털어버리고 선택한 고창행. 우리 부부는 따뜻하게 맞아준 이곳에서 허리 꼿꼿이 펴고 농사짓는 포도와 복숭아를 선택했다. 몸은 힘들지만 강소농을 꿈꾸는 새 인생이 즐겁다.
◇귀농 3년차, 몸은 축나고 수입은 없지만…= 지금은 여름, 할 일이 무지하게 많다. 과수묘목을 키우는 농부는 2년차에 나무를 얼마만큼 키우는가 하는 게 향후 농사의 갈림길이다. 풀과 전쟁하고, 벌레와의 싸움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친환경을 고집할 경우에는 더더욱 힘든 싸움이 된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포도밭에서 일하다보면, 복숭아밭 주변 개암나무는 어느새 풀로 덮혀 있다. 회양목 잡초라도 뽑으려 하면, 포도넝쿨은 엄청 자라있기 일쑤다. 솔직히 너무 힘들다. 한낮에 잠깐 쉴라치면, 무슨 일이 또 생기는지 컴퓨터를 켜고 글을 올리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최근 들어 고창에 귀농 또는 귀촌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담바우농장에도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찾아온다. 아직 초보인 우리에게 귀농에 대한 자문을 듣겠다고 할 때면 아직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진다. 귀농해서 2년차에 바로 수입을 짭짤하게 올리는 사람도 무지 많은데, 햇수로 3년차에 접어들었지만 몸만 축내고 수입 한 푼 없는 놈에게 자문이라니….
하지만, 담바우의 내 자신이 귀농을 했고, 고창의 많은 귀농인들과 인연도 쌓으면서 느낀 점도 있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귀농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다 보니 귀농에 관한 내 개인적 소견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서울출신이고, 서울과 그 변두리지역(좋은 말로 수도권)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소위 ‘기역자를 보고 낫을 연상’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 그런 수준이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그렇듯 우리도 그 길을 따라 열심히 살아왔다.
젊어선 종합상사 입사를 목표로 공부했고, 결혼해서는 출근시간은 알아도 퇴근 개념이 없는 것을 당연시 했다. 내가 없으면 회사가 문 닫을 거란 자만에 빠져 살기도 했다. 그러다가 40대에는 성질난다고 회사 때려치우고, 사업한다고 은행에서 대출받고,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며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다시 일을 벌이기도 했다. 50대 초반을 넘기면서는 사업을 다시 하자니 겁이 나고, 취직을 하려해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 버티다보니 자연스럽게 벼룩시장 구직란도 기웃거리게 됐다. 이런 생활의 반복을 옆에서 지켜보다 우울증에 걸린 아내에게 겨우 한다는 말이 “여보, 우리 시골 내려가서 살래? 당신 생각은 어때”라면서 인터넷 검색어에 ‘귀농/귀촌’을 치고는 엔터키를 팍 눌렀다.
어디서 무슨 귀농박람회를 한다거나 또 어디서 도시민유치 설명회를 한다고 하면 찾아가고 귀농책자와 조그만 찹쌀떡봉지 하나 받고는 터덜터덜 나오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주 우연히 이곳 고창으로 오게 됐다.
◇따뜻하게 맞아 준 고창에서 발품 팔아가며 정착 = 남들에겐 “지도를 펴놓고 손바닥에 침을 탁 쳤더니, 침이 고창에 떨어져서 왔노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연히 들른 고창에서 귀농귀촌협의회와 기술센터의 도움이 없었으면 우리의 귀농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나가다 들린 부부에게 빈집을 소개해 준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데(그분들은 마침 빈집이 있어서 소개해 주었겠지만), 처음 보는 분들의 따뜻한 애정이 우리에게는 감동이었다. 대부분의 베이비부머들이 그렇듯 떠밀리듯, 흘러들듯 귀농(?)을 했다. 처음엔 귀농이라고 하자니 농사기술도 없고, 몸도 부실하고, 경작할 토지도 없었다. 그렇다고 귀촌이라 하자니 돈도 없는 주제에 염치도 없었다. 그래서 귀농을 했다고 할지, 귀촌을 했다고 할지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도 했다.
귀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거의 6개월을 우리 부부가 정착할 수 있을만한 지역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고창에 온지 6개월 후인 2011년 11월에 선운사 뒤편 담바우라는 산속마을에 3000평의 밭을 매입했다. 또 어떤 작물을 택할지를 결정하기위해 고창의 선진농업인들을 찾아 자문을 구했다.
많은 우여곡절과 고민 끝에 포도 한그루에 2000송이를 맺는 유기농포도의 장인이며, 대한민국 신지식인인 도덕현 선생님을 멘토로 친환경시설포도와 노지 복숭아를 재배하게 됐다.
◇‘왕년’은 중요하지 않다, ‘내일’을 보라 = 우리가 귀농 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하려고 한다. 특히 도시에서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왕년의 자기스펙에 자만하고 사업을 벌이려는 사람들이나 프랜차이즈의 유혹에 솔깃한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 경청하기를 바란다.
첫째, 귀농하고자 하는 지역을 먼저 확실히 정해야한다. 먼저 발품을 팔고, 그 지역의 기술센터나 귀농상담소를 찾아봐야한다. 정착지를 선택하는 것도, 향후 어떤 작물로 먹고사느냐 만큼 중요하다. 지원이 많은 지자체라면 많은 사람들이 귀농하지 않는 뭔가(?)가 있을 수 있고, 지원이 적은 지자체는 귀농해 봐야 찬밥일 뿐 먹고살기 힘들 수도 있다.
수도권 주변 땅은 거의가 서울의 있는 사람들의 소유이고, 기획부동산이 훑고 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목표가 정해져 있다면, 거기에 맞춰 지역을 찾아야 한다. 무화과를 심으려면, 장류를 제조하려면, 소를 키우려면 어디가 좋을까? 복분자를 짓고 싶다면 고창을 우선순위로 두듯이 말이다.
둘째, 집이나 땅을 먼저 사지 않는 게 좋다. 100여 평이 넘는 대지위에 그럴듯한 기와지붕의 농가주택이 3000만~4000만원이라면 도시인 개념에선 “우~와, 싸다”이겠지만 그 집을 중심으로 활동범위의 제약을 받게 된다. 집주변에서 땅이 없다면 다른 지역으로 출퇴근하며 농사를 짓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먼저 전세든 월세든 아님 공짜든 거주할 집을 구하는 게 첫 번째지만 사는 건 심각하게 고려해보고 결정해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은 귀농 후 발품을 팔며, 매입이든 임대든 땅을 먼저 알아보는 게 집을 매입하는 것보다는 우선일 것 같다.
셋째, 작물은 그 지역의 특산물이 가장 안전하다. 고창이라면 수박, 복분자, 고추 등 일단은 수매가 확실한 작물이 좋다. 남들이 안하는 것을 했다가 만약 수매가 안 되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수익성이 아무리 좋아도 10개를 생산해서 3개만 판
다면 문제다. 때문에 농사지을 땅의 날씨, 바람의 방향, 주변 환경, 땅의 성질, 멘토의 확보 등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
용인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고창에서 땀 흘려 가족농사를 짓는 성은주 목사님은 “농사에는 하층농사, 중층농사, 상층농사가 있다”고 우스개를 하곤 한다. 하층농사는 고추, 수박, 고구마, 양파 등 온갖 과채류를 지칭하는데 이 작물들은 바닥을 박박 기며 농사를 지어야한다는 것이다. 중층농사는 블루베리, 복분자, 버섯, 아로니아 등으로 이건 서서 허리를 약간 숙이고 농사를 짓는다. 상층농사는사과, 배, 복숭아, 감, 포도 등 온갖 과수류를 말하는데 허리를 꼿꼿이 펴고 농사를 짓는 것을 빗댄 얘기다. 우리의 경우는 상층농사를 선택했다.
그런데 귀농 3년차인데 아직도 수입이 없고, 돈만 나간다. 거품은 많이 줄었지만 농촌 살림도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생활비가 있다. 남들이 복분자를 몇 킬로그램 팔아 얼마를 벌었다고 말하면 괜스레 힘이 빠지고 주눅이 든다. 또 예측 못 할 기후조건에 한순간에 성목이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당장의 소득을 바라고 하층농사를 택하면, 30~40년은 기본인 기존 원주민의 발끝만 따라가야 한다. 몸 고생은 장난 아니게 힘들고, 항상 몸으로 때울 뿐 향후 미래소득이 지금보다 나아지진 못한다. 이렇게 힘들다 보면 집에 계신 사모님께서 보따리를 쌀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여기는 고추, 저기는 오디, 나머진 감나무 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더 힘들 수도 있다. 작물의 선택은 신중해야한다.
◇작지만 강한‘강소농’이 해답이다 = 넷째, 강소농을 꿈꿔야 한다. 땅의 크기는 상관없다. 재배 면적이 크면 수입이 배로 생기겠지만, 인건비도 배로 나가고 만약 잘 안될 때는 손해도 곱절로 볼 수 있다. 작지만 강한, 작지만 알찬, 작기에 덜 힘든 강소농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착 후 교육을 잘 받고 인적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귀농과 귀촌을 같이 생각하는 베이비부머 세대라면 더욱 그렇다. 기술센터를 활용한 각종교육과 멘토 확보에 공을 들이고, 진정한 강소농의 꿈을 실현하기 바란다. 누가 뭘 심어 얼마를 벌었더라는 풍문들은 무시해야 한다.
다섯째, 지원에 민감할 필요가 없다. 귀농하는 사람들 중에 “고창에 오면 뭘 주나요?” “돈은 얼마나 줘요?”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도시에서 시골 오는 게 다 자기 개인사정 때문이지, 시골에서 오라고 애걸하는 건 아니다.
지원을 목표로 사업을 하게 되면, 그래서 자신입장과 상관없이 지원 사업을 받게 되면 결국엔 자부담금액은 날아가고 융자부분은 빚으로 남게 된다. 열심히 하다보면 지원받을 기회도 온다. 지원이 목표가 되면 안 될 것이다.
·귀농 전 거주 지역: 경기도 수지
·귀농 전 직업: 기업 퇴직 후 자영업
·귀농 결심동기: 노후준비
·귀농 선택작목: 복숭아, 포도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귀농연도: 2011년
·귀농시 나이: 만 55세
·귀농지 선택사유: 농업특화도시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땅 3000여평(1억원), 집 건축비용 1억원
·현재 영농규모: 포도하우스 800평, 복숭아 1000평
·연간 수익: 아직 없음(내년 3000만원 예상)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결행해야만 했다. 고향 마을로 돌아왔지만 시내에 거처를 두고 출퇴근하는 우리는 어른들의 눈에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적응기를 거치고 복분자 농사를 지으며 어른들과 소통을 해갔다. 이젠 시골생활의 불편함도 즐길 수 있는 작은 여유가 생겼다.
◇3년의 준비, 2년의 시내생활로 연착륙 = 요즘 언론에서 귀농귀촌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노후대책 또는 새로운 사업으로 농업을 선택하는 등 귀농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는 도시의 삶이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요즘은 인터넷과 다양한 정보를 통해 농촌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편리한 도시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떠나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도 편리한 귀농을 결심했지만 많은 망설임과 걱정에 선뜻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귀농을 꿈꾸며 머릿속으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채의 집을 짓기도, 부수기도 했다.
어떤 농사를 지을 것 인지, 시골에서의 정착은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며 귀농교육을 하는 곳을 찾아 강의도 듣고, 자료도 찾아 읽으며 준비한 기간만 3년이었다. 나름 귀농공부를 하고 결정을 내린 시기는 2009년 2월. 큰아이가 고3, 작은아이는 중3이었다. 주변에서는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떻게 하려고 시골로 가려는지 모르겠다며 반대했고, 아이들도 크게 반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귀농을 하는 게 옳다는 생각에 고3인 큰아이만 외할머니께 남겨두고 고향인 정읍으로 내려왔다.
어린 시절 시골집을 떠나 도시에서 살면서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만 선물꾸러미를 들고 찾던 고향 작은 마을로의 귀농은 가족 모두에게 포근한 안식처 같은 느낌보다는 불편하고 어렵고 힘든 공간과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선은 정읍 시내에 작은 전셋집을 마련했다. 연착륙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우리 부부는 시골마을로 출퇴근을 하며 주변도 익히고, 농사일도 배우고, 농업기술센터에 다니며 교육도 열심히 받았다. 일년 동안 서툰 솜씨로 고추농사를 조금 지으며 얻은 수익은 도시에서의 한 달 월급도 되지 않은 적은 금액이었다. 그저 헛웃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현지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현실은 책으로 보고 교육센터에서 몇 시간씩 강의 듣는 것과는 다른 부분이 참 많았다. 관행으로 농사를 지어온 시골 어른들과의 소통은 참 어려운 문제였다. 아무리 좋은 농법이라 해도 어르신들의 경험과 관행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설명도 해 보았지만 교육으로 배운 다양한 농법과 관행농법의 차이점을 좁히는 것은 가장 큰 어려움 일 뿐만 아니라 넘기 힘든 벽과도 같았다.
시내에서 아이학교 보내고 8시쯤 시골마을로 들어오는 우리부부를 보며 “무슨 일을 해가 중천에 뜬 뒤”에 시작하느냐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저녁 무렵 퇴근하는 모습을 보며 “일을 하다가 말고 간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새벽녘 동틀 때 나와 논과 밭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하다 해가 지면 고단한 몸을 눕히는 시골 어른들이 보기에는 당연히 게으르기 이를 때 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수시로 교육이 있다며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도대체 뭘 한다는 것인지…”, “뭔 교육을 하루가 멀다 하고 받는다는 것인지…”라 여기는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저녁 무렵 마음에 맞는 분과 막걸리 한 잔 하는 것으로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조언을 듣고 방향을 조금씩 수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홍보·판로 걱정 없고 2차 가공 쉬운 복분자 선택 = 귀농을 계획하며 여러 가지 고려할 문제들이 많지만 어느 곳에서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1년 동안 교육과 견학을 반복하며 우리는 지역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작물인 오디와 복분자를 선택했다.
복분자라는 작물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지역의 특산물, 지역의 브랜드를 선택한 것이었다. 지역에서 홍보도 많이 해 주고, 판로를 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또한 재배방법이나 정보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과 2차 가공 상품으로도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것이었다.
시골생활을 하면 생활비가 적게 든다고 생각했다. 물론 도시보다는 적게 들어간다. 그래도 꼭 들어가야 하는 고정비용이 있는데 농사로만 그 비용을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농이나 귀촌, 전원생활을 하려면 무조건 꼭 필요한 것은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택도 있어야 하고, 농지도 있어야 하고, 농기계도 구입해야 하고, 농사 운영비도 있어야 하고 더군다나 꼭 필요한 생활비, 아이들 학비 등.
귀농 후 2년차. 교육에서 듣고 배운 대로 우선 가공공장을 짓기로 했다. 시골에서는 땅의 분류가 참 복잡하다는 것을 알았다. 눈으로 보기에는 논인데 토지대장에는 대지, 전, 답 등으로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는 경우가 많고, 실제 면적과 서류상의 면적이 크게 다를 뿐 아니라 대지가 아닌 경우 건물을 짓고자 할 때 형질변경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비용지출 등 가공공장 계획에서 착수까지 6개월이라는 시간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귀농자금? 세상엔 공짜가 없다 = 정부에서 귀농자금을 지원해 준다는 이야기가 있어 귀농자금을 문의해 보았다. 정부 귀농자금은 선착순이 아니라 평가제이므로 선정과정과 수급이 참 어려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조건도 너무나 까다로울 뿐 아니라 지원 자금 또한 저리로 해 주는 융자였다. 그것도 신용등급이 낮거나 담보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지원 자금을 받기 위해 준비한 서류만도 그야말로 한 보따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2010년 4월 드디어 가공공장을 짓기 위한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가공공장을 준비하는 중간 중간 오디밭, 복분자밭도 조성하고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린 시간이었다.
교육을 받고 가공공장을 짓고 여러 가지 정착을 위한 준비를 하는 동안 소소한 일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교육에서 배운 대로 블로그를 통해 기록해 나갔다. 우리를 알리기 위한 작은 소통으로 시작한 블로그는 시골에서 좌충우돌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달하며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분들을 알게 됐고 생활의 활력도 돼 주었을 뿐 아니라 직접 생산, 가공한 제품을 처음으로 출시했을 때 아낌없는 응원과 함께 구입을 해주는 소중한 고객이 돼 주었다.
도시에서 귀농하는 사람들에게 인터넷과 SNS는 꼭 배우기를 권한다. 농산물을 가공하고 또 직거래 하지 않으면 힘들게 농사 지어도 손에 쥐는 돈이 적다. 그래서 어떻게 파느냐가 중요하고 어려운 부분이다. 때문에 인터넷을 통한 홍보와 SNS는 반드시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귀농은 3년을 준비하고, 수입 없이 3년을 견딜 수 있어야 성공한다”’는 얘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귀농 후 1년은 교육으로, 2년째는 가공공장 짓는 일로, 3년째는 보금자리인 집을 완성한 것으로 완전한 귀농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가슴 뿌듯한 첫 제품도 출시됐다.
홈페이지를 오픈하고, 지마켓, 옥션 등 오픈마켓에 입점하면서 본격적으로 온라인 판매를 계획, 실행해 갔다. 다양한 교육과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정보를 배웠다. 기존 농민들은 그저 생산자로서 충실하면 되었지만 사회가 바뀌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1차 농산물 또한 단순 재배, 생산이 아니라 재배, 생산, 가공, 유통, 판매, 기획하고 책임까지 져야 하는 요즘 제품을 디자인 하는 경영 마인드가 없이는 농촌에서 살아남기는 힘들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느꼈다.
우리 부부도 블로그뿐 아니라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를 시작했다. 어쩌면 도시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는 직장인이나 주부들이 굳이 몰라도 되는 부분까지 늦은 밤에도 눈 비비고 앉아 배우고 챙겼다. 농사도 사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악착같이 공부했다. 매일같이 사진을 찍고 기록하며 끊임 없이 쏟아지는 정보를 스폰지처럼 받아들이며 실천해 나갔다. 10가지를 배우면 꼭 한 가지라도 실천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토론을 했다. 그러다 부부간에 큰 다툼도 있었지만.
◇정신없이 달려 온 4년, 이젠 막걸리 좋아하는 촌부 = 그렇지만 힘들어도 함께 이겨나가야 하는 과정을 거치며 살다보니 이제는 귀농을 생각하는 많은 분들이 농장을 찾아와 함께 공유하고 토론도 하게 됐다. 귀농 후 4년. 어느덧 즐겨하던 와인보다는 막걸리가 더 좋아졌다.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의 건물보다는 눈뜨면 마주하는 높은 산이 더 정겨워졌고 먼 길 찾아와
주시는 손님이 너무나 반갑다.
아이들 성화에도 절대 반대를 고수하며 키우지 못하게 했던 동물에게도 친구인 듯 다정히 말을 건네게 되었고 논으로, 밭으로 장화신고 뛰어 다니며 간섭도 하고 신기해하고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사하게 되었고 시골생활의 불편함도 즐길 수 있는 작은 여유가 생겼다.
앞으로 시골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뛰면 행복한 일이 가득할 것이라는 희망을 4년이란 시간이 선물해 줬다. 만약 귀농을 꿈꾼다면 절대 대단하고 거창한 성공 비결에 한눈팔지 말고 현재에서 조금 다르게, 지금보다 조금 낫게 그렇게 천천히 시골생활에 적응해 가다 보면 작지만 강한 농부가 될 수 있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인천
·귀농 전 직업: 출판업
·귀농 결심동기: 농업에 대한 비전
·귀농 선택작목: 복분자, 오디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귀농연도: 2009년
·귀농시 나이: 43
·귀농지 선택사유: 고향 마을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없음
·현재 영농규모: 없음
·연간 수익: 2012년 1억7000만 원 / 2013년 상반기 1억 5000만 원
5년 동안의 병상생활을 굳건히 지켜주던 아내마저 인공심장판막 이식술과 부정맥 확장 수술을 받았다. 몸을 추스르기 위해 찾아온 순창의 월곡마을. 농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지역 주민들과 더불어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건강도 일도 찾은 당당한 농사꾼이 됐다.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려고 온 월곡마을 = 내 고향은 전북 정읍이다. 어렸을 적 도시로 나가 인천에서 살다가 건강이 좋지않아 산 좋고, 물 좋은 청정지역인 이곳 순창으로 7년 전에 이사를 왔다. 그 때 당시에는 몸이 너무 아파 힘든 농사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저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이나 하려는 생각이었다. 마침 처갓집이 순창 팔덕면 월곡리이기에 이곳 월곡마을로 오게 됐다.
처음 이곳에 올 때, 땅 640평을 구입해 집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처음 집을 지으려 할 때부터 쉽지는 않았다. 마을에서는 이런 저런 말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집의 위치가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마을 상류에 살면서 축산업을 할까봐서 집을 못 짓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절대 축산업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 문제로 마을에서는 임시 총회가 열렸고 찬반 투표까지 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5대 5라고 전해 들었지만 그래도 집은 계속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과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던 그때 돌파구가 된 계기가 있었다. 당시에 월곡교회 목사님이 팔덕면 독거노인 70분에게 반찬도시락을 배달하고 계셨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나누어 드리는 일을 맡아서 하게 됐다. 집을 지으면서도 봉사활동 하는 날에는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참여했다. 그런 노력 때문이었는지 집을 짓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집 짓는 일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은 가을 추수 때가 다 되어서였다. 아스팔트 도로가에다 벼를 말릴 때였다. 오가다보니 다 말린 벼를 자루에 담는 일도 어른들에게는 힘든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 일이 보일 때마다 가서 도와 드리게 됐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그냥 기쁜 마음으로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의 인심이 얼마나 좋은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추수가 끝나고 나니 그분들이 제일 먼저 쌀가마니를 우리 집으로 가지고 오신 것이었다. 농사를 짓지 않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은총 같은 선물이었다. 40킬로그램의 쌀을 1포씩 가져다 주셨는데 집안에는 일곱 포대가 쌓였다. 그 쌀은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 가족이 1년 동안 충분히 먹을 식량이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했던 기억들이다.
◇주민들과 함께 살다보니 ‘성공한 귀농’= 이런 일이 있으면서 내가 가진 기술을 통해 보일러도 무상으로 고쳐드리고 차
량봉사도 시작했다. 말이 봉사지 그리 거창한 일도 아니었다. 순창에는 5일마다 장이 서는데 차가 없는 분들을 위해 장터까지 모셔다 드리고 장터에서 점심도 같이 사 먹었다. 그럴 때마다 잔잔한 정담들을 나누며 가까워 질 수 있었다.
또한 마을에 농악단이 있었는데 농악에 취미를 붙이면서 지역 주민들과 더욱 가까워지게 됐다. 행사가 있으면 함께 즐거워하면서 마음이 통하게 된 것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더욱 더 합심하려고 노력했다.
이듬해 마을 농가에서 수확한 오디와 복분자를 서울과 인천에 사는 지인들에게 직거래로 팔아드렸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나는 대부분의 농산물을 직거래로 판매해 드렸는데 고사리와 잡곡, 고추 등은 직거래 고객이 많이 늘어나 지금은 인기가 아주 좋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처럼 너무나 친숙한 마을 주민이 됐다. 이렇게 마을 분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우리 부부의 건강도 좋아졌고, 살림살이도 늘어나면서 이제 당당한 농사꾼이 됐다. 꾸지뽕 묘목을 재배해 많은 소득도 올렸고 3000평이 넘는 부지에 꾸지뽕 농장을 만들었으며 이제는 꾸지뽕나무를 분재와 관상용으로도 만들어 농가 부업으로 활용 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는 꾸지뽕 가공식품 개발에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할 계획이다. 더불어 우리 농장을 관광농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부부가 건강을 되찾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지금은 이곳에 이사 오길 참 잘 했다고 부부가 얘기한다. 농가소득도 늘어나 지금은 연간 6000만 원 정도 소득을 올릴 수 있어 행복한 귀농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던지 우리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귀농·귀촌을 꿈꾸고 있다. 그 중에 여섯 가정(17명)이 이곳 순창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 자녀들의 가정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가는데 자연스럽게 홈스테이를 하게 된 이유다.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머무는 동안 귀농 후의 삶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정말 반가운 일은 또 있다. 귀농인들과 함께 마을에 빈집들을 보러 갔을 때 마을 분들이 얼마나 친절을 베풀어 주시는지 모른다. 진심으로 예비 귀농인들을 환영해 주시는 탓에 감동하여 꼭 이 마을에 오고 싶다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살 집들을 현재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순창서 얻은 경험, 귀농인들에게 모두 전할 생각 = 장류의 고장 순창에 이사를 와서 제일 먼저 배우고 싶었던 것은 고추장, 된장, 청국장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마을 할머니들을 집으로 모셔다가 고추장 만드는 방법도 배우고, 장 담그는 방법을 배우면서 어르신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르신들에게 배운다는 자세로 다가서니 할머니들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모르는 부분은 일부러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 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알려 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전북대학교 식품공학과에서 실시하는 장류 만드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수료하게 됐고, 지금은 아주 맛있는 고추장, 된장, 청국장을 만들 수 있다. 이제는 내 나름의 비법을 레시피로 만들 수 있는 수준으로, 도시에 사는 형제들과 교회의 아는 사람들을 통해 상당한 양의 직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도시민들과의 직거래는 여러 가지 농산물을 다 팔수 있으므로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 된다. 정성을 들여 정직하게 거래를 하면 신뢰를 쌓게 되고, 그 신뢰가 소개로 이어져 거래처가 계속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이곳 순창으로 귀농·귀촌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고추장, 된장, 청국장 만드는 방법이나 여러 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고 함께 연구하여 순창의 장류사업 발전에 힘을 보태고 지역발전에 적극적으로 노력할 생각이다. 그리고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며 살 계획이다.
꾸지뽕 농사는 다른 작물에 비해 농가 소득이 많은 반면에 노동력은 적어서 아주 효율적이고 부가가치도 높다. 꾸지뽕나무를 접목하는 기술이나 재배 방법, 판매 방법 개발에 더욱 경주할 생각이다. 꾸지뽕을 첨가한 식품 개발 연구를 통해 부수적
인 농가 소득은 물론 순창 지역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 이를 위해 그동안 경험한 모든 기술은 순창이 좋아 귀농 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공개할 예정이다.
◇도시에서 살다 왔다고 더 잘 난 것은 없다 = 이런 생각들이 결실을 얻었는지 이번에 또 다른 두 가정이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귀농이나 귀촌을 하시는 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스스로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서라는 것이다. 농촌은 지역이 매우 좁아서인지, 아니면 낯설음에서 오는 편견 때문인지 외부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매우 심
하기도 하다. 우선 어떤 사람들인가 하고 지켜보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타지에서 이사 오는 사람들이 간혹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느끼는 것이 지역 주민들과 빠른 시일 내에 가까워져야 좀 더 편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며 정착이 빨라진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지역사회 봉사활동 한두 가지 정도는 같이 해야 할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에는 자율방재단에 가입해 봉사하면서 보람을 얻기도 한다.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지역 주민들에게 신뢰를 얻고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가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그들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마음이 통해야 그들과 친해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소통하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다. 그저 진심을 다해
도왔고, 진심으로 배우길 원했고, 진심으로 이 마을주민이 되고자 했기에 마을 사람들도 그 진심을 알아주게 되면서 마을 분들 역시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여 주신 것 같다.
진심은 이렇게 통한다. 도시에서 살다 왔다고 마을 주민들보다 더 잘 난 것은 없다. 도시에서 알던 지식이나 생활 방식들은 오히려 이곳에서 쓸모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도시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에게 더 낮은 자세로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을 먼저 존중해야 나도 존중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통하는 가장 기본인 것이다. 이런 기본에만 충실 하다보면 빠른 정착의 지름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인천
·귀농 전 직업: 생산직
·귀농 결심동기: 요양
·귀농 선택작목: 꾸지뽕
·귀농귀촌 교육이수: 없음
·귀농 연도: 2006년
·귀농시 나이: 55년생
·귀농지 선택사유: 처가 인근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1억
·연간 수익: 6000만원(꾸지뽕 3500만원 이상, 묘목·고사리 등 2500만원)
·향후 계획: 꾸지뽕 가공공장 건축
우리나라가 2017년 고령화 사회 진입을 앞두고 ‘계속 일하고 싶다’는 사회인식 정년도 함께 오르고 있다. 최근 취업포털 잡코리아의 설문조사에서 50대 이상 직장인들은 자신이 “‘평균 65세’까지 실제로 일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등 늘어난 수명만큼 일에 의욕을 보이며 노후 대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고령화 사회를 대비해 기업들의 역할도 무거워지고 있다. 이들은 노동유연성 확보 등 대책 마련의 필요성에 직면했다. 특히 지난 4월 국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한 ‘정년 60세 연장법’이 오는 2016년부터 시행된다. 우선 공기업, 공공기관, 3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2017년부터는 전 사업장에 적용될 예정이어서 중장년층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기업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몇몇 기업들은 이미 정년 연장을 시행하고 있거나 정부 정책에 맞춰 준비하고 있다. GS칼텍스, 현대중공업, LG디스플레이 등 많은 기업들이 이미 60세 정년 제도를 도입했다. 중장년층이 퇴직 이후에도 활기찬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곳도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 2007년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중장년층 임직원의 고용안정을 위해 임금피크제와 정년 연장을 실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년은 만 55세에서 58세로 연장했으며, 임금피크제는 만 53세부터 55세까지는 임금횡보, 만 56세부터 58세까지는 매년 10%씩 임금을 감액한다.
특히 지난 2011년 8월부터는 우수한 연구개발(R&D) 인력 및 공정·장비 엔지니어들에게 실질적 정년 연장을 가능케 하는 ‘정년 후 연장근무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역량과 성과가 우수한 인재들이 정년에 구애받지 않고 업무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R&D, 공정·장비 엔지니어들은 정년인 만 58세가 되는 시점에 해당 조직의 인재개발위원회 심사를 거쳐 연장근무제도의 혜택을 받게 된다.
삼성전자는 임직원의 체계적 인생 설계 지원을 위해 지난 2011년 ‘경력컨설팅센터’를 설립했다. 이를 통해 재무설계, 건강관리, 인간관계 등 성공적 노후를 준비하는 생애설계교육과 퇴직 후 창업 컨설팅 등 체계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퇴직 후 취업을 원하는 경우 구인 기업과 연계해 취업을 주선하고, 창업을 준비하는 경우에도 컨설팅과 실질적 행정 업무를 지원해 도움을 주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정년퇴직자 중 희망자를 모집해 4박5일 정도 연수를 진행한다. 주된 교육 과목은 퇴직금 재무관리, 재취업전략, 건강관리 등이며 주로 외부강사를 초빙해 실시한다. 해당 프로그램은 공장별로 시행되고 있으며 매년 정년퇴직자 중 희망자를 모집해 시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GS칼텍스의 경우 지난 2011년 노사 합의로 정년을 58세에서 60세로 2년 연장했다. GS칼텍스 관계자는 “정년 연장과 함께 임금피크제를 적용해 원래 임금의 80%를 적용하고 있다”며 “정년을 연장하면서 공장에서 숙련된 엔지니어들의 경험과 노하우 등이 생산성 효율을 가져다 준다”고 전했다. 한진해운은 정년연장 법 시행일에 맞춰 사례 조사를 비롯해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들은 은퇴를 앞둔 임직원을 대상으로 온라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오프라인 교육도 병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지난 5월 정년퇴직을 앞둔 직원 대상으로 ‘퇴직지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교육 프로그램은 1단계 집체교육, 2단계 진로상담, 3단계 그룹별 전문교육으로 이뤄졌다. 집체교육은 전문 강사진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흥미와 관심사를 분류하는 등 개인별 특성을 파악해 퇴직 후 제2의 인생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다. 진로상담에서는 개인별 맞춤형 상담으로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도록 점검하고 고민을 해결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전문교육 단계에서는 재취업과 창업, 귀농 등의 실무교육과 함께 부부가 같이 노후에 필요한 구체적 자산관리 계획을 세우도록 한다. 올해는 내년과 내후년 은퇴 예정인 1954년생과 1955년생 1800여명을 대상으로 18차례에 걸쳐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지난해 단체교섭을 통해 정년을 만 58세에서 만 60세로 2년 연장했다.
대한항공은 운항 승무원의 경우 사실상 정년 60세로 운영하고 있다. 이후 소정의 심사를 거쳐 계약직으로 최대 65세까지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정비사의 경우 정년 56세 이후에도 촉탁 등의 제도를 통해 경력업무를 할 수 있도록 재취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 퇴직 후 일정기간 동안 임직원을 대상으로 직원 할인 항공권을 지원하고 있어 여가생활을 위한 항공 여행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처럼 고령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비한 기업들이 많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정년연장을 시행 시기까지 미루고 있으며 은퇴 대비 프로그램도 운영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년 60세 연장 제도 역시 실제 시행까지 2년 넘게 남았고 정치권, 사회단체 등에서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어 정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기업들은 정년연장 도입에 따른 부담 완화를 위해 임금피크제 연계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지난 16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30인 이상 사업체 280곳을 대상으로 정년연장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77.8%는 임금피크제와 병행해 도입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답했다. 이들은 임금피크제 병행 도입을 위해서는 임금피크제 지원금 확대(40.4%), 법으로 의무화(39.1%)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건강 되찾고 자연에 빠져 사는 경북 영덕의 박혜균씨
귀촌을 염두에 두고 준비하다가 건강 이상으로 이른 귀촌을 했다. 남들과 달리 선택한 귀어(歸魚). 처음엔 힘들었지만 초보어부 남편은 이제 어촌계 대의원 등으로 자리를 잡았고 4시간씩 고생하던 혈액투석도 미뤄지고 있다. 맑은 환경이 주는 귀촌의 혜택을 누리면서 오늘도 우리 부부는 행복하다.
◇말기신부전으로 계획보다 10년 앞당겨 귀농 = 우리 부부는 둘 다 시골 태생이다. 그랬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귀촌에 대한 로망이 있었지만, 딸의 반대로 계속 도시에 살았다. 그러다가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게 되면서 귀촌에 대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의 귀촌 계획은 환갑쯤이었다. 그래서 시골에 헌집도 미리 사서 대충 수리를 해놓고 주말이면 그곳에 가서 지냈다. 마을 분들과의 유대관계도 맺고, 달라진 시골 생활에 미리 적응을 해야 할 필요성도 있어서였다.
물론 주말마다 시골집에 갈 때면 마을 분들께 드릴 작은 음료수도 빠트리지 않고 챙겼고, 그 덕분에 조금씩 마음이 통하게 되니 우리가 없는 주중에는 이웃집에서 우리 집을 가끔 들여다 봐주셨다. 텃밭에 심어놓은 고추에 벌레가 생기면 방제도 해주셨고, 겨울이면 수도의 동파도 예방해주셨다.
그렇게 주말마다 시골에서 생활한 덕분에 우리는 마을 분들과 친해질 수도 있었고, 그분들도 우리가 하루빨리 마을에 들어오길 원하셨다. 공기가 좋지 않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내가 병에 걸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 건강한 몸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늘 과로를 한다 싶을 정도의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 결과물이 바로 ‘말기신부전’이었다. 혈액투석을 받기 위해 손목에 동정맥루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이틀마다 병원에 가서 4시간씩이나 피를 걸러낼 생각을 하니 아찔하기까지 하면서 ‘왜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는 결국 배수진을 치기로 하고 우리가 사놓은 시골집을 수리만 한 다음에 이사를 해버렸다. 시골에는 혈액투석병원이 없어 기를 쓰고 투석을 미룰 만큼 건강관리를 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이사와 동시에 식이요법과 간단한 운동을 시작했다.
몸이 아파 이른 귀촌을 하게 된 탓에 마을 분들은 ‘우짜노?’를 연발하며 걱정 해주셨다. 우리는 시골에서 살 자금을 넉넉히 준비하지 못했기에 둘이서 직접 집을 수리하느라 한 달 동안을 정신없이 보냈다.
그러면서 의사 선생님께서 지정해주신 나의 첫 투석일이 다가왔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고 진료를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왜 그렇게 길던지. 검사결과에 따라 선생님께서 투석을 할 것인지를 판단한다고 하셔서 선생님을 뵙는 시간까지 줄곧 긴장을 하고 있어야 했다. 거기에다가 한 달 동안 시골의 맑은 공기 속에 살다가 도시의 병원에 가 있으니 답답하기도 했다. “수치가 조금 좋아졌습니다. 오늘은 투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보름 후에 봅시다.”
그 말은 ‘다 나았습니다!’라는 말처럼 들려, 지난 한 달간 힘들었던 것을 싹 잊게 해주며 ‘역시 시골의 맑은 환경이 보탬이 되는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됐다. 그때부터 남편과 나는 새로운 인생 3막의 시나리오를 다시 검토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인생은 절대로 계획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였다. 그것이 시골생활에서 내가 터득한 가장 중요한 삶의 지혜로움이었다.
◇좋은 집보다 좋은 이웃이 더 소중하다 = 며칠 전에는 우리보다 1년 늦게 귀촌을 했던 남편의 지인이 결국 도시로 돌아간
다면서 전화를 했다. 마을 사람들의 텃세와 도시에는 없는 해충을 더 이상 이겨내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시골 사람들이 그렇게 텃세를 하는가? 시골 사람들이 그렇게 이기적으로 변했는가? 꽤 괜찮은 귀촌을 했다고 자부하는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텃세나 이기적이었다기보다는 소통의 부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귀촌하기 3년 전까지 주말마다 마을에 와서 귀촌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했다. 그 덕분에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었고, 아픈 몸을 끌고 귀촌을 했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내 건강을 진심으로 염려해 주셨다. 또한 우리가 살 집을 새로 짓지 않은 것도 마을 사람들과의 융화에 많은 보탬이 됐다. 만약 우리 부부가 애초의 계획대로 거창한 목조 주택을 지어 귀촌을 했다면 어땠을까? 분명히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보이지 않은 괴리감을 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급작스런 귀촌을 하느라 집을 새로 지을 시간도 돈도 없어 기존의 농가주택을 수리만 한 것도 마을 사람들과 융화되는데 보탬이 됐다. 그래서 ‘좋은 집보다는 좋은 이웃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가 내 귀촌 제1항이 됐다. 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돈만 많으면 시골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 하고 귀촌을 할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고. 시골생활은 돈보다는 배려, 협동, 자조, 성실의 생활자세가 더 필요하다’고.
우리는 무조건 먼저 다가갔고, 지나가다가 일을 하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와드리면서 인사를 빠트리지 않고 했다. 마당에 출몰하는 뱀과 쥐 때문에 몇 번의 곤욕을 치르다가 백구 세 마리를 키우면서 이런 고통에서는 해방이 될 수 있었다. 시골에 살려면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하여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일을 할 수 있는 기술과 건강한 몸이 더 중요 = 남편은 시골로 들어와서 통발 허가가 딸린 어선 한 척을 구입해 초보어부로 첫발을 디뎠고, 그것이 우리의 생계수단이 되었다. 물론 아직은 나의 병원비까지 해결할 만큼의 어획고를 올리지 못하기 때문에 남편은 틈틈이 다른 일도 병행하고 있다.
시골로 귀촌을 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돈이 많아야 시골에서 살 수 있다’는 것에만 연연해 돈을 모으는 일에 올인 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막상 귀촌을 해보니 돈을 모으는 것보다는, 시골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는 기술과 건강한 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물론 시골생활인만큼 소규모로 농사를 짓고 있기도 하다. 처음에 우리는 집만 구입하고 토지를 구입하지 못한 탓에 농사를 짓는 일은 포기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마을의 한 어른이 묵히는 밭이라며 농토를 주셔서 밭농사를 조금 짓고 있다.
우리는 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조금이나마 드리기로 하고 그 밭을 받았는데 작년 농사는 대실패라 수확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올해는 마을 분들의 조언에 도움을 받아 도시에 있는 지인들과 채소를 나눠먹을 정도의 수확을 거둘 수 있어 재미있
는 농사를 지은 셈이다. 텃밭에서 물과 퇴비만으로 길러진 채소들이 밥상에 오르는 기쁨은, 어린 시절 밭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먹던 것보다 더 맛있었다.
귀촌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는 문화생활도 우리가 어릴 때와는 다르게 많이 바뀌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시골에서도 어느 정도의 문화생활도 누릴 수가 있고, 군청이나 관련 기관에서도 주민들을 위한 문화행사를 정기적으로 해주기에 병원에 가는 일 외에는 그리 큰 불편함은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집 앞의 하천둑을 매일 걷고 작으나마 밭을 경작하면서 혈액 투석도 계속 미뤄지고 있어, 갑작스럽고 이른 귀촌을 한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중이다. 남편은 지금 어촌계의 대의원과 청년회의 임원에 선주협회의 회장까지 맡아 마을 일에 아주 열심이다.
마을의 어르신들은 이런 남편에게 ‘마을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활기차고 깨끗하고. 차기에 군 의원을 시켜야겠다!’고 하실 정도로 신뢰를 보내주고 계신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과시보다 화합, 이기기보다 지는 연습 필요 = 우리의 귀촌은 이제 2년이 지나가고 있다. 우리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딸아이도 방학이나 휴가 때면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데, 이 아이들은 우리 집이 ‘천국 같다’는 말을 곧잘 한다.
마당에는 유실수가 있고, 도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커다란 백구 삼형제도 마당에서 뛰어노는 곳. 현관만 벗어나면 텃밭에서 거둔 채소로 한 끼 식사가 차려지는 집.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으로 싱싱한 물회를 맛볼 수 있는 집. 저녁이면 온 가족이 평상위에 누워서 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집. 집을 둘러싼 산에서 내려오는 솔바람을 여한 없이 만끽할 수 있는 집.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가끔 초치는 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가끔 마당에 출몰하는 징그러운 뱀 이야기, 여름이면 파리와 모기가 유난히 많다는 이야기, 한 시간에 한대만 다니는 불편한 버스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손사래를 친다. “아무리 그래도 저희는 이곳이 천국 같아요. 우리도 늙으면 꼭 귀촌할 거라고요. 그러려면 지금부터 뭘 준비해야 하나요?”
그렇다. 행복한 귀촌은 준비하는 자에게 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행복한 귀촌은 있을 수가 없다. 그대! 행복한 귀촌을 꿈꾸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이렇게 준비하면 될 것이다. 돈보다는 건강을, 과시보다는 화합을, 이기기보다는 지는 연습을, 말보다는 기술을 익히는 것을. 이렇게만 한다면 그대가 꿈꾸는 귀촌은 현실이 될 것이다.
· 귀농 전 거주 지역: 경기도 성남
·귀농 전 직업: SK네트웍스 스마트학생복 지점장
·귀농 결심동기: 원래 시골출신, 환갑 전에 돌아가고 싶었다
·귀농 선택작목: 옥수수, 어업(문어, 소라, 붕장어)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귀농 연도: 2011년
·귀농시 나이: 47세
·귀농지 선택사유: 남편 고향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땅 구입비용 1억원, 집수리비용 1000만원, 선박 구입비 5000만원
·연간 수익: 순수익 월 300만 원(어업), 농업은 없음
-황정임 농촌진흥청 농촌환경지원과 농업연구사-
김주성씨가 있는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하월천리에 거의 온 것 같은 느낌을 들 때였다. ‘새농어촌건설운동’사업지임을 알리는 커다란 나무 기둥이 마을 어귀 양 옆으로 우뚝 솟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솟대로 장식되어 있는 이 나무 기둥들은 하월천리 주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김주성씨가 마을 이장으로 있는 동안 나타난 변화들 중 하나다. 지금 김주성씨는 ‘도시로 나간 자녀들이 돌아오는 농촌 마을’을 만들고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 꿈은 화전민이 살던 터를 귀촌지로 매입해 자연휴양·치유의 장소로 살뜰히 가꾸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농촌으로 간 디자이너 =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도시에서 광고, 기획, 생활한복 등 다방면에서 사업을 하면서 갖은 흥망을 경험했다. 그가 귀촌을 결심한 이유는 도시 생활에서 느낀 고단함이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도시보다는 농촌이 미래사회의 대안이라는 생각이었다.
20년 후에는 농촌의 가치가 더욱 인정을 받게 될 것이라 전망하면서 속도와 경쟁에 지친 도시민들에게 활력소가 될 수 있는 자연치유 산림휴양마을을 만들고 싶은 꿈을 품게 됐다. 그가 구상한 것은 현재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단기성 농촌 체험이나 관광이 아닌 장기 농촌 체류 모델로 크게 두 가지 형태였다.
첫째는 명상이나 요가 등의 프로그램과 치유음식이 있는 장기 체류 휴양·치유마을을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원격업무가 가능한 회사나 산업을 마을로 유치해 도시에서 하던 일을 하면서 농촌에서 살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지인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이곳 양양의 깊은 산골로 자리를 정한 것이 2000년. 그로부터 4년 후인 2004년 10월 이사를 올 때까지 매주 금요일에 양양으로 내려와 월요일 새벽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생활을 이어갔다. 서울에서 술을 마시다가도
이곳이 그리워지면 택시를 불러서라도 내려오고야 마는 자신을 보면서 귀촌 생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이렇게 제2의 인생을 위한 보금자리를 다듬어 가면서 귀촌 후 사업 계획을 차근차근 구체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귀촌 1막, 깊은 산 중에 자리를 잡다 = 귀촌 후 3~4년 동안은 산 속 터전을 갈고 닦고, 장래 사업을 위해 준비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했다. 빈집 세 채를 수리하여 거처할 곳을 마련하고 돌탑을 쌓고, 연못·나무다리를 만드는 등의 일을 모두 손수 감당했다. 펜션 운영을 위한 건물 한 동도 직접 지어 올렸다.
또 주변에는 고사리 300평, 취 300평, 엄나무 450주 등을 심었다. 치유음식의 식자재로, 방문객들에게 주는 선물용으로 미리 준비하는 의미였다. 실제 이 재료들은 현재 마을 식당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데에 활용되고 있다.
농촌 현실에 대해 깨우치고 꿈을 정교하게 다지기 위해 부인과 함께 각종 교육을 받고 선진 사례들을 돌아보는 데에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승용차가 못 들어가고 유무선 전화, 인터넷 사용도 불가능한 깊은 산 중에 정갈하고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광랜을 설치하고, 버스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을 냈다. 이처럼 묵묵히 노력한 결과 주민들의 마음이 움직였고 그가 이장직을 맡을 수 있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됐다. 결국 2009년 12월, 김주성씨는 마을 총회에서 이장으로 선출됐다.
◇귀촌 2막, 이장이 되다 = 이장 권유를 받고 나서 그는 많은 고민을 했지만, 마을을 깨워 아침을 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이장이 되고 나서 먼저 주민들에게 마을기업 CEO로서의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마을에 필요한 사업들을 적극 유치해 하월천리를 잘사는 마을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동안 마을 행사나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 등에 참여도 했고, 사업정보를 알려주거나 사업계획서를 쓰는 데에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지만,한계를 느꼈던 터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동의가 전제되어야 했기에 의견을 물었고 주민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음으로 그는 마을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조직을 구성했다. 그 당시 마을 조직은 마을회, 노인회, 부녀회가 전부였다. 김주성씨는 마을을 위해 일할 젊은이들의 조직인 청년회와 마을 내 이견들을 조정할 원로회가 추가적으로 필요하
다고 판단했다. 청년 8명, 그리고 75세 이상 어르신들을 모아 각각 청년회, 원로회를 조직했다. 이장이 된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추진한 일이다.
이렇게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고 사업 추진을 위한 조직을 갖춘 후, 그가 가장 먼저 도전한 사업은 강원도 사업인‘새농어촌건설운동’사업이었다. 여기엔 상사업비 5억을 받게 되면 마을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종잣돈을 확보하게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의 주도에 따라 주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끝에 8개월 만에 우수마을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이같은 결과는 강원도에서 12년 새농어촌건설운동 사업을 실시한 역사상 최단기 간의 일이라 한다. 선정하는 측에서도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사업을 추진한 경력이 돼야 수상자 후보로 고려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2~3년은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주성씨가 목표한 대로 받게 된 상사업비로 부지와 건물을 매입하고, 거기에 농촌진흥청의 향토음식자원화사업을 유치해 탄생하게 된 것이‘농가맛집 달래촌’이다.
농촌진흥청이 지원하는 농가맛집은 전국적으로 64개, 강원도에 6개가 있지만, 달래촌의 가장 큰 차별성은 영농조합법인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마을 공동의 일자리를 만들어 소득 창출을 꾀하고자 하는 목적이 담겨 있다.
각종 산나물, 능이버섯, 송이버섯 등을 활용한 약산채 밥상으로 특화한 달래촌은 김주성씨의 아내를 중심으로 예약 현황에 따라 마을 주민들이 배치돼 운영된다.
노동에 대한 대가는 시급으로 지급되고 있다. 달래촌이 행정소재지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 꾸준히 손님이 있는 형태는 아니기 때문에 아직까지 예약제로만 운영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자연휴양·치유마을을 향한 구상 가운데 치유음식을 담당하는 곳으로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아내와 주민들은 전통음식, 산채, 떡 등 다양한 교육과정에 참여하면서 약산채 밥상에 걸맞은 음식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다음 사업 아이템은 달래길이었다. 사람들이 먼 곳까지 방문할 수 있는‘거리’가 마을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총 80km, 13코스를 계획하고 있는 중에 현재 32km가 조성된 상태인데, 길이 완성되는 대로 식생자원 체험, 숲 치유 등 프로그램 운영을 병행할 계획이다.
여기에 추가로 유치한 녹색농촌체험마을 사업을 통해 아토피 치유센터를 만들고, 저수지 수변 공간을 공원으로 정비하고, 귀촌마을을 조성하는 등 자연휴양·치유를 테마로 한 그의 마을에 대한 구상은 무궁무진하다.
이렇게 주민들을 설득해 함께 사업을 추진하기까지 가장 어려웠던 점은 주민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천(川)을 중심으로 마을이 분열되어 단결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소수 귀농·귀촌인들과 원주민들 간에도 갈등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김주성씨는 새농어촌건설운동을 계기로 사람들을 마을회관으로 자주 모이도록 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단순히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교육을 받도록 하기도 했다. 하루에 2~3개씩 교육이 진행되는 일도 있었다. 틈나는 대로 마을 사업에 대해 주민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설득하기도 했다. 자주 만나서 먹고 마시고 시간을 보내야 관계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그의 지론대로 실천한 것이다.
또한 원로회장님을 비롯한 어르신들이 생일을 맞으면 아내가 떡케익을 만들어 생일잔치를 해드리는 식으로, 기회가 될 때 감동을 주고자 했다. 이렇게 70~80년 사신 마을 어르신들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고자 했다.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용한 마을에서 공연한 일을 벌인다는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고비마다 눈에 보이는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지지해 주는 주민들이 늘어갔다.
◇대한민국의 농촌을 바꿔보자 = 하월천리의 브랜드 ‘달래’는 월천(月川)을 한글로 푼 것이기도 하지만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마을, 즉 치유하는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마을이 가지고 있는 대표 자원인 산림 자원을 이용해 자연휴양·치유마을을 조성함으로써 마을의 소득원을 창출해 궁극적으로 자녀들이 돌아오고,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전문인들이 들어오는 농촌마을 모델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꿈은 이렇게 마을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강원도, 대한민국 농촌으로 향해 있다. 이를 위해 30여명의 마을 리더들로 구성된‘비전 양양 21 핵심리더’모임에 참여하면서 선진사례를 꾸준히 학습·토론하고 있으며, SNS 매체인 카카오스토리를 이용하여 전국에 있는 여러 사람과 소통하면서 마을을 적극 알리고 있다. 아울러 마을의 미래를 위해 청년들과 일을 함께 해나가고, 마을에 필요한 외부의 인재들을 유치하는 데에도 힘을 쏟고 있다.
마을 사업에 뛰어든 이후로는 펜션 운영도 접고, 부부가 모두 마을 일을 돌보느라 집을 돌볼 겨를이 없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품었던 꿈을 마을 전체를 통해 실현시키는 일에 몰두에 있는 그에게서는 개인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에게 더 이상 귀촌인이란 지칭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가 도시에서 살았음을 인지하게 하는 것은 돋보이는 경영 감각과 다방면의 인적 네트워크 뿐, 그는 달래촌 하월천리에 열렬한 애정을 품은, 정신적인 토박이였다.
귀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김주성씨가 귀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조언으로 첫 번째 꼽은 것은, ‘자신을 낮춰야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어떤 화려한 생활을 했든 농촌에 오면 그 문화에 적응해서 같이 어울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농촌에 와 처음부터 서두르기보다는 최소 2~3년 마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고유 전통이 뭔지 보고, 느끼고, 많이 생각하다가 서서히 관계를 맺고 소통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했다. 처음 3년은 땅 사고 집 짓고 하면서 금세 세월을 보내지만, 이후 여유를 가지면서 오히려 갈등과 불화를 만들어 이웃과 벽을 세우거나 마을을 떠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두 번째로 그는 귀촌하기 전에 1년 정도 시골살이를 체험해볼 것을 권했다. 직접 부딪히면서 실제 살 수 있겠는지 저울질도 해보고 차근차근 준비해가면서, 어느 정도 자생력이 있다고 판단될 때 땅을 사고 집을 짓는 수순을 밟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귀촌지를 선택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것처럼 신중하게 고르고 정성스럽게 구애해야 한다고도 했다. 지자체의 지원 내용을 기준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는 조언일 터이다. 그가 발을 내딛은 그 길이 아직 끝을 알 수 없는 도정이지만, 손님과 같이 잠시 머물다가는 귀촌인이기보다, 농촌의 주인으로서 다른 귀농·귀촌인들이 와서 행복할 수 있는 농촌을 만드는 초석을 놓는 일에 뜻을 품은, 그런 귀촌인들이 농촌에 참 소중한 존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양평 세미원이나 시흥의 관곡지 등 수생식물을 이용한 공원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연차·연잎밥 등 연을 이용한 가공품도 이전보다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연은 여전히 특별하게 느껴지는 작목이다. 차기설 대표는 2004년 제부도 인근으로 귀농해 연꽃농장을 가꾸면서 연을 이용한 각종 가공품을 생산하고 있다.
◇귀농을 결심하다 = IMF 이후, 한창 사오정(사십오세가 정년)이니 오륙도(오십육세까지 직장에 있으면 도둑)니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들이 회자되는 분위기 속에서, 차 대표는 처음 귀농을 생각하게 됐다. 2004년 초 귀농을 결심하게 되면서 그는 먼저 블루베리, 포도 등을 놓고 무엇을 재배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들어갔다.
블루베리는 가공이 쉽지 않은데다가 수확까지 3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접근하기 조심스러웠다. 포도는 지역주민들이 선점하고 있는 작목인 만큼 재배하기는 수월할 지라도 주민들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결정적으로 연을 재배하게 된 것은 우연히 연꽃농장을 방문했다가 농장주의 연에 대한 자랑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작목을 결정할 때에 그가 염두에 둔 기준은 재배하기 쉬운 작목을 한 가지만 재배한다는 것이었다. 농사경험이 전혀 없었던 그이기에, 일반 농업인과 같아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농사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1차 생산보다는 2차 가공으로 승부수를 던질 수 있는작목을 선택하고자 했다.
이런 그에게 연은 환경에 민감하지 않아 관리가 쉽고, 병충해도 거의없는 작목이기에 매우 적합한 작목이었다. 처음에 용도에맞는 종자를 잘 선택해 받으면 종자 값을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또 전통적인 연잎차 가공방식이 다른 작물의 가공에 비해 간편하고 자본이 적게 소요되는 것도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본격적인 귀농 준비 = 2004년 가을, 차 대표는 지인이 추천한 지역에 터를 잡았다. 제부도 초입(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자리하고 있어 유동인구가 많은 것이 기회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연을 재배작목으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당시 연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중국판, 미국판 책자를 구해 독학으로 공부했다. 귀농교육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을 때이기도 했지만, 교육을 받을 생각조차 못하고 홀로 관련 서적들에 의지해 연구와 실험을 거듭했다.
이때 유동인구가 많다는 지리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연을 심고 가꾸면서 가공을 준비하는 동시에 자기 화분을 함께 판매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수련을 심은 화분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것이 귀농초기 수입이 안정적이지 못한 시기를 버티게 해준 중요한 수입원이 됐다. 연 가공·판매로 경영이 어느 정도 안정화된 지금에도 화분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 계속 구비해 판매하고 있다.
◇연 가공에 도전하다 = 그가 처음 도전한 가공품목은 연잎차였다. 연잎차를 가공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가 차를 마셔
보고 어깨 너머로 가공기술을 배웠다. 기술을 배우면 실험적으로 가공해보고, 그 차를 인사동 찻집에 가져가 시음을 청했다.
처음 찻집 주인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자신이 가공한 차를 차로서 인정해주지 않는 모습을 대하자, 그는‘원가, 수익등을 생각하지 말고 우선 마실 수 있는 차를 만들어보자’라고 결심하고 차를 만들어 시음을 청하기를 반복했다. 이러한 꾸준한 노력으로 찻집주인들이 오히려 조금씩 가공 방법을 알려줬고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얼마에 차를팔겠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감격적인 순간이었지만 그동안 판매 가격에 대해 특별히 고민해본적이 없었다. 별 계산 없이 입에서 나온 금액이 1만2000원이었다. 최초로 직접 가공한 연잎차를 판매하게 된 순간이었다.
연잎차를 만들고 나니, 자연스레 티백 가공으로 이어졌다. 다음으로는 연의 씨에 해당하는 연자를가공한 환을 만들었다. 연자가 몸에 좋은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7~8월 한시적으로만 생산이 되는데다가 딱딱해서 먹기가 어렵기 때문에 환으로 만들어 파는 것이 좋겠다는 아이디어에 착안했다.
최근에 개발한 상품은 연잎영양밥이다. 개발 기간만 3년이 소요됐는데, 맛·포장단위·포장방법 등을 개발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시식과 실험 과정을 거쳤다. 작년부터 판매하기 시작한 연잎영양밥은 연중 생산이 가능하며, 기호식품인 차에 비해 단번에 소비가 이루어지는 특성으로 인해 여러 가공품 가운데서도 효자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1차 생산물이 아닌 가공품 생산에 주력하고 있으며, 60~70%를 온라인으로 판매한다. 나머지는 오프라인 방문객, 신세계백화점과 각종행사장 납품을 통해 소비되고 있다. 연차는 현재까지는 단골 고객들 위주로 판매되고 있어 연차의 맛과 효능을 알리고 소비층을 확대해나가는 것은 과제로 남아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연구·개발에 대한 열정을 늦추지 않는 차 대표는 이젠 연근발효효소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논문 한 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도전한 이 아이템으로 그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한 제9회 벤처농업창업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수출을 위한 쉼없는 도전 = 차 대표는 귀농한 지 2년이 지난 2006년이 되어서야 처음 교육을 접했다. 친구의 소개로 시작하게 된 것이 화성시농업기술센터에서 주관한 화성시사이버농업인연구회 활동이었다. 이를 통해 교육이 농업 경영에 도움이 됨은 물론, 각기 다른 작목을 재배하는 동료 농업인들을 만나는 것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로도 각종 교육
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그는 150시간 과정의 aT농수산마케팅대학에 다니고 있다. 아직 막연한 단계이기는 하지만 수출을 준비하고 있다. 경기 화성 지역에서 연을상업화하여 생산·가공 및 판매하고 있는 유일한 농가로서 자리를 지켜온 저력을 더 멀리 확장시키기 위해 차근차근 길을 닦고 있다.
◇예비 귀농인에 대한 조언 = 차 대표는 현재의 자리에 오기까지 가장 힘들었던것이 농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고 한다. 주위에서는 자신을 농업인으로 바라보지만 스스로 농업인으로서 한없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농사 경험이 전무한 자신이 과연농업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도 차 대표를 힘들게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귀농 후 8년이지난 지금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연꽃농장‘연애(蓮愛)’는 불안과 자성 가운데서 그가 스스로 갈고닦은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그는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버릴 것,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할 것,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이웃을 많이 사귈 것 등을 주문했다. 농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성인이 되어 농사일을 시작해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하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아니기 때문에 농업, 농촌생활에 대한 환상을 먼저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그는 비록 귀농 초기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각종 관련 국내외 서적, 보고서, 논문 등을 있는 대로 찾아 읽으며 연구했다. 수입원이 확보되지 않은 귀농 초기 시절을 지탱할수 있는 전략도 세웠다. 가공기술을 체화하기 위해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기술도 갈고 닦았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하는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그가 먼저 보여준 셈이다.
특히 그는 이웃들이 오가며 그가 농사짓는 방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때 ‘그럼 좀 가르쳐주세요.’하며 겸손한 자세로 배웠다. 농사일에서는 초보일 수밖에없는 자신을 인정한 것이다. 시골 사람들의 간섭 아닌 간섭을 ‘친절’로 봐야 한다고도 했다. 간혹귀농인들이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며 주민들과융화하지 못하여 정착에 실패하였다는 사례들을접하곤 하는데, 이처럼 이웃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귀농 정착의 전제 조건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후배 귀농인들에게 당부한 것은귀농 이전에 가졌던 취미생활을 농업에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농사지으면서도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둘째, 그것이 농업과 결합하여 시너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홈페이지, 블로그, 트위터 등 각종 정보매체를 관리·활용하는 데에 열심이어서, 2011년 9월에는‘제3회경기도 농업인 정보화 경진대회’에서‘집나간 연-蓮’포스팅(http://blog.daum.net/inucom/12775950)으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제는 농업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오늘도 일보전진을 위해 쉼 없이 연구하고 도전하는 차 대표이기에, 그의 연애(蓮愛) 이야기가 향긋한 연잎 향기만큼이나 오래도록 지속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