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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글쓰기 강사 데뷔
- 사회연대은행에서 블로그 강의를 했다. 글쓰기 강사로 데뷔한 셈이다.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가 주관하는 50+교육센터 강좌 중 ‘블로그 개인브랜드 구축하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블로그는 나의 브랜드’, ‘이론과 실제’, ‘블로그 하는 법(PC, 스마트 폰)’, ‘블로그 스킨 만들기’, ‘사진으로 블로그하기’, ‘봉사 활동’, ‘여행’, ‘체험단 블로그’ 등 다양한 강의 과목으로 구성되었다. 필자가 맡은 강의는 ‘블로그 글 잘 쓰기’였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사실 기준이 애매하다. 수학이라면 점수로 환산이 가능하지만, 글쓰기는 점수로 환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문인협회 정회원이라는 것과 대한민국 100대 블로그로 선정된 경력으로 밀고 나갔다. 그렇다면 블로그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 생각해 봤다. 블로그 글은 시, 소설과 다르고 수필과도 다르다. 그러므로 독특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블로그는 ‘Web+Log’라는 뜻으로 ‘인터넷 일기’이다. 그러나 일기는 본인만 보지만, 블로그 글은 다른 사람들도 읽는다. 그 점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읽는 사람을 의식하고 배려해야 한다. 글자체를 시니어들이 읽기 좋게 12PT로 하고, 글의 양은 A4 한 장 내외로 한다. 칸 띄우기를 해서 가독성을 높인다. 사진을 붙여 인터넷 시대에 맞게 읽기 좋게 만든다. 블로그 글을 왜 써야 하는지 목적이 있어야 될 것 같다. 블로그 글은 소통, 자기 PR, 정리, 논리적 사고, 어휘력 유지, 힐링 등에서 목적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해두면 무형의 재산 목록이 되는 것이다. 글쓰기의 첫 번째는 요령은 쉽게 쓰는 것이다. 누가 읽어도 부담 없이 쉽게 쓰는 것이 첫째 요령이다. 한자어나 외래어는 가급적 배제한다. 전문용어 앞에는 간단한 설명을 붙여준다. 호흡이 길지 않게 단문으로 쓴다. 등이다. 요즘은 입말, 즉 구어체로 쓰는 것이 유행이다. 신문 기사도 그 전에는 5W1H 원칙으로 써나갔지만 요즘은 내레이션 기법을 자주 쓴다. 사진은 중요하다. 필수이다. 글과 연관되는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볼로그 글을 쓰는 기본 자세에 속한다. 그러므로 사진에 대해서도 공무도 해야 하고 부지런도 떨어야 한다.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옷감이 필요하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물감이 필요하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글감이 필요하다. 글감은 어디서 찾을까? 삼라만상에서 찾는다. 다만,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보고 내 글을 쓰는 것이 좋은 글이 된다. 그 외에 영화, 책, 공연, 여행, 신문, 뉴스 등에서 소재를 잡는다. 글감을 찾는 사람에게는 충격이라는 것이 올 때가 있다고 한다. 자다가도 충격이 오고, 걷다가도 충격이 올 때가 있다. 술자리에서 대화하다가도 글감이 튀어 나온다. 그것을 잊지 않고 메모해두는 것이 요령이다. 제목을 잘 잡아야 시선을 끈다. 고인의 회고록 집필을 하다 보니 추모사의 글이 60여 편 들어 왔다. 책으로 만들자니 제목이 모두 추모사였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각 추모 글을 읽고 내용 중에서 제목을 잡아냈다. 추모사를 쓴 사람은 다른 사람도 같은 제목으로 쓴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가 그간 한자 문화권에서 살다보니 제목을 무의식적으로 한자용어로 다는 경우가 많다. 늘 제목이란 그렇게 붙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블로그 글은 매일 쓰는 것이 좋고, 그러려면 장소도 안정적인 곳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 집에서 글을 쓰지만, 집은 TV, 군것질 등 유혹하는 요소가 많아 집중하기 어렵다. 나 같은 경우는 셰어 오피스를 이용한다. 첫 강의라 시간 배분에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남을 경우에 대비하여 스터디 교재를 갖고 갔다. 같이 읽고 토론하다 보면 시간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송파 수필가협회에서 공부했던 작가노트 몇 편을 들고 갔다. 정임표의 ‘나의 꽃, 나의 향기’, 곽흥렬의 ‘충격에서부터 옷 입히기까지’, 김우종의 ‘소재의 의미화와 주제의 철학성’, 김경남의 ‘철학을 수필적으로 풀어내기’가 글 공부에 좋은 참조가 된다. 추천 수필로 김미원의 ‘그 남자의 구두’, 송혜영의 ‘굴욕’을 소개했다. 카리스마 있게 강의를 잘 끌고 나갔다는 칭찬을 받았다. 블로그 글 4천여 개, 출간한 책 11권, 하루 방문객 1,500~2,000명에 누적 조회 수 330만 명이라는 수치가 분위기를 압도했을 것이다.
- 2016-11-1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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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연극 연출가 김정숙, 연극은 결국 사랑이다!
- 연극 연출가 김정숙(金貞淑·56)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녀를 존경해”, “멋있어”, “사랑해”. ‘김정숙’이란 이름이 거론되면 하나같이 천사를 만난 경험담(?)을 쏟아내곤 했다.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기회가 없었다. 새뮤얼 베케트의 연극 에서 끝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씨처럼. 만나보자. 예전 같으면 대한늬우스에 나올 만한 국위선양(?)도 하고 돌아왔다. 그럼 한번 소리 소문 좀 내볼까? 김정숙 연출가는 ‘극단 모시는 사람들’(이하 모들)의 대표로 28년째 장기집권(?) 중이다. 스물두 살에 극단 에저또에서 연극을 시작해 스물아홉에 극단 모들을 창단했다. “운명이죠. 고등학교 때 연극을 보고 나서 ‘저 무대에서 평생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극단에 들어간 첫날, 연습실 바닥을 붙잡고 ‘아! 이제 도착했다. 여기서 절대로 떠나지 않겠어’라고 서원처럼 의식을 치르듯 속으로 말했죠. 제자리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후 단 한 번의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연극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연극을 뺀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그녀는 24시간이 늘 아깝고 모자라다. 그런데도 인터뷰 날 자정 전에 책상에서 일어난 일을 제일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뿌듯해한다. “제가 몸 생각하지 않고 연극 생각만 하니까요. 어쩌다 12시가 넘어버리면 4시까지 잠을 못 자더라고요. 그런 날은 다음 날 스케줄에 무리가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진짜 그러지 말자 해요.” 그녀의 또 다른 이름 ‘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 연출가의 분신과도 같은 극단 모들은 창단 이후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관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연극을 굳이 몰라도 아이부터 어른까지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 , , 등이 모들의 대표작. 특히 은 토종 창작 뮤지컬 중 최고라는 호평을 들으며 각종 시상식을 휩쓸었다. 뮤지컬로 성공적인 삶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브로드웨이 식의 뮤지컬을 꿈꾼 건 아니었어요. 나는 음악의 비중이 크고 내용에 영향을 주는 소리극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나타나서 편리하게 이용했던 것뿐이죠. 그런데 마치 우리가 브로드웨이를 지향해서 가야 할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내가 원했던 소리극의 형태가 아니어서 음악에 대한 마음이 많이 닫혔어요.”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모들의 창작 뮤지컬을 보기 어렵다. 화려함 대신 소박한 사람 이야기, 고전 속 주변 인물들에 주목하는 연극이 주류를 이룬다. 행복한 연극을 아는 예쁜 사람 모들은 지난 2003년부터 과천시민회관 상주 공연단체로 입주해 있다. 시민극장을 열어 시민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고, 모들의 대표 연극인 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프로그램 ‘신나는예술여행’에 선정돼 전국 8개 교도소를 돌며 공연하고 있다. “저는 대학로나 대극장 공연에 연연해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시골학교나 교도소에 가서 평생 연극을 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행복해요. 얼마나 기쁜지 제 마음에서 사랑의 샘이 퐁퐁퐁 솟는 거 같아요. 진짜로요(웃음). 내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 내 보물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최근 2~3년 동안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우리 고향 초등학교에 연극 보여주기’ 이런 걸 하고 싶어 해요. 공연하는 데 300만원이 들면 출신 동창회에 도움을 청하고, 3만원씩 100명이 내주시면 고향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줄 수 있다고요. 화려하게 신문에 오르내리는 그런 일 말고 진짜 일을 하고 싶어요.” 에든버러를 넘어 케냐까지 한국 연극을 알리다 지난 8월, 김정숙 연출가는 모들 단원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이하 에든버러 프린지)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세계 공연예술 축제의 백미인 에든버러축제는 공연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 축제기간이 되면 전 세계에서 7000여 단체, 3만여 명의 공연자와 관객이 몰려와 도시를 가득 메운다. 에든버러 방문은 이번이 다섯 번째. 좋은 공연이건 나쁜 공연이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기회라 김정숙 연출가는 에든버러 프린지를 사랑한다. “2008년에 처음 에든버러 프린지에 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갔어요. 당시 단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연극을 해왔는데 뭐했지? 내가 명예를 얻었나, 물질을 얻었나? 나는 연극 안에서 얼마나 행복하지? 하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세계 연극 속에서 우리를 한번 비춰보자. 놓아보자’라는 심정으로 그곳을 가게 됐어요. 처음인데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좋아해줬어요. 매진에 객석 점유율 80%를 넘었고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더니 사람들이 티켓 박스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때 ‘아!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확인을 서로 하게 됐죠.” 올해 모들은 어린이극 과 그리고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를 가지고 에든버러를 다시 찾았다. 이번 에든버러 프린지 공연은 김정숙 연출가의 치밀한(?) 계산으로 진행됐다. “케냐에서 이 초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예술경영지원센터에 항공권을 지원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더니 두 곳은 가야 받을 수 있다더군요. 그래서 에든버러 프린지와 케냐 공연을 엮은 거죠. 그런데 공연만 가지고 가는 게 아까웠어요. 케냐는 처음이지만 에든버러는 벌써 세 번째였거든요. 그래서 후배가 연출한 과 를 에든버러에서 공연해보자 했습니다. 4월까지 필요한 서류를 내야 했는데 그때 는 정말 시놉시스와 사진 한 장밖에 없었어요.” 에든버러축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다. 전쟁이 끝나서 이런 페스티벌도 생겼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 바로 위안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사진 한 장과 시놉시스밖에 없었지만 에든버러 프린지 극장측은 흔쾌히 모들에게 공연장 문을 열어주었다. “이전 축제에 참가했을 때 작품으로도 인정을 받았지만 저희가 거리쇼라든지 홍보 면에서 기여를 많이 했어요. 극장에 우리가 바로 그 팀인데 를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줄 수 있냐고 물었죠. 바로 OK 하더군요. 그 한마디로 정말 에든버러에 가게 됐어요.” 딱 시놉시스 한 장이었다. 공연에 관한 정보가 적어 일반인 대상의 홍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관객이 를 찾아왔다. “가 위안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잖아요. 하와이와 뉴질랜드에서 이 공연을 보러 오신 분이 계시더라고요. 80 노구를 이끌고 2차 세계대전을 실제 겪으신 분들이 오신 거예요. 하와이에서 오신 분은 이곳에서 볼 첫 작품으로 를 선택했다고 했어요. 4월에 공연 예매를 미리 해놨다면서 수첩까지 꺼내 보여줬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김정숙 연출가는 다섯 번의 에든버러 페스티벌 참가 중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인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것이 소중했다고 말한다. 모들 단원과 김정숙 연출가는 낮에는 , 저녁에는 를 무대에 올리고, 밤에는 다른 팀의 공연을 보러 열심히 뛰어다녔다. 케냐에서 기립박수 받은 에든버러에서의 한 달 일정을 마치고 케냐 나이로비로 떠났다. NGO의 천국 케냐에는 NGO 활동가와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70년 된 국제 학교 로슬린 아카데미(Rosslyn Academy)가 있다. 이곳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700여 명의 학생이 관객이었는데 이런 공연을 자주 접하는 아이들이 아니었어요. 물론 영어로 공연을 했지만 ‘어떻게 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지?’라고 느낄 정도로 완벽한 시점에 쿵, 짝을 맞추는 겁니다. 공연을 완벽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관객을 케냐에서 만났어요.” 게다가 학생들의 자율적인 행동이 몹시 감동스러웠다. “교정 한 곳에서 쿠키를 팔고 있었어요. 먼 나라에서 공연 팀이 왔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요. 그런 기획을 어린이들이 했다는 말이죠.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전 세계 아이들이 모여 편견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학교였어요. 에든버러에서는 뛰어다니고 정신없었다면 케냐에서는 큰 위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관록이 묻어나는 시니어 배우들 모시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김정숙 연출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공연(11.25~26 과천시민회관 소공연장)을 준비 중이고 교정시설 공연도 다녀야 한다. 과천 시민과 함께하는 연극 준비에도 여념이 없다. 시민극장에 시니어 층이 많다는 얘기에 시니어의 연극 참여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시민극장에 60대 이상의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요. 배우 중에 저와 어렸을 때 같이 연극하던 선배가 오셨어요. 연극을 하다가 도중에 그만두신 분인데 은퇴하고 나서야 돌아오신 거죠. 오디션 때 너무 멋있었어요. 인생이라는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이제 진짜 배우가 될 거 같아요. 시니어들은 인생을 다 겪으신 분들이라 어떤 이야기든 무대에서 제대로 표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무대로 돌아온다면 100% 환영하고 지원할 겁니다. 잘하실 수 있도록 적극 도와드릴 거예요. 내년에 무대에 올릴 작품에는 등장인물과 같은 나이의 배우들을 참여시킬 계획입니다.” 시간이 흘러 연극 일을 안 하게 되면 무엇을 할 건지 물어봤다. 돌아온 답변이 누룽지를 눌러 파는 누룽지 할머니가 되고 싶단다. 누룽지 한 컵에 1000원, 한 평짜리 가게를 얻어서 누룽지를 팔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마냥 철없고(?) 청순한 소녀 같다. 미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들을수록 맛있고 찰지다. 영락없는 이야기꾼. 아직은 우리 연극을 위해 할 일이 많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연극이 뭐냐고 물었다. 거침없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딱 하나인 거 같아요. 어쨌든 작업 안에서 마지막 선택은 항상 사랑이었어요. 일을 하다 보면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될까를 고민하잖아요. 가끔은 흔들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랑을 선택했어요. 연극을 향한 사랑. ‘세상에 어떤 것도 사랑을 이기는 것은 없다’는 사실, 제가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든버러축제(Edinburgh Festival)란? 에든버러축제는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작된 공연 축제다.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의 정신을 치유하려고 만들어진 이 축제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와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Edinburgh fringe Festival)로 나뉜다. 인터내셔널의 경우 100여 개의 공연을 전 세계에서 엄선하기 때문에 초청되는 것 자체가 영광. 프린지는 1947년 채택되지 못한 공연 팀이 축제가 열리는 주변에서 공연한 것이 지금의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로 정착됐다. 올해 ‘극단 모시는 사람들’을 비롯해 한국의 14개 공연 팀이 참여했다. 2011년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에 극단 목화의 가 최초로 초청됐으며 ‘헤럴드 에인절스’ 상을 수상했다. 김정숙 극단 모시는 사람들 대표 1982년 극단 에저또 입단 1984년 연출 데뷔 1989년 5월 극단 모시는 사람들 창단 주요 수상경력 -뮤지컬 스포츠조선 뮤지컬 희곡부문 대상, 1996 서울연극제 현대소나타상, 1996 백상예술상 대상, 작품상, 희곡상. 1996 희곡작가협회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03 -연극 희곡협회 올해의 희곡작가상, 2003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연극상, 2011 대한민국 클린콘텐츠 국민운동본부 선정 클린콘텐츠상, 2015
- 2016-11-1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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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기하는 것도 용기다
- 필자는 1998년부터 기업체 모니터 활동, 서포터즈, 패널, 체험단, 주부사원 등 다양한 이름으로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요즘은 시니어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일도 종종 하고 있다. 그래서 시니어 작가, 시니어 리포터, 시니어 기자라는 단어가 가끔 내 앞에 붙는다. 지난 3개월 동안 모 기업 서포터즈로 최선을 다해 일했다. 활동 평가가 홈페이지에 올라온 날, 잠깐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시니어로서 마음을 많이 비웠다. 최고의 점수를 받으려고 비디오 영상 프로그램을 배워 사진과 글뿐 아니라 영상도 넣어 유튜브도 개설하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와 카페 등에 홍보하는 일을 열심히 했다. 지난 활동에서 우수상을 받았기에 이번에는 최우수상을 받겠다고 노력한 필자였다. 그러나 최우수상은커녕 이젠 우수상 명단에도 필자의 이름이나 연락처, 닉네임 등이 없었다. 물론 나이 들어 젊은이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애써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도 빨리 접어진다. 이 세상에는 소위 미친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대학과 대학원 졸업은 물론 박사학위와 몇 개 국어까지 하는 사람,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일과 사고 싶은 것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 근육이 단단하고 멀리서 봐도 옷 입은 모습이 멋지게 보이는 사람, 장동건보다 잘생기고 김태희보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사람, 우윳빛 피부가 눈에 확 띄는 사람 등등 잘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연예인이나 재벌이 아니어도 평생 경쟁상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많이 부족함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나이 들어서도 미모로 승부 보려는 분, 건강이 대단하다고 자랑하는 분들이 방송이나 잡지에 많이 나오는데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주눅이 들 필요는 없겠지만 자만심도 금물이다. 내가 최고라고 나야 나~ 이런 생각 속에 살아가거나 일을 처리할 경우 보기 흉할 수도 있다. 특히 아무 스펙 없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과 경쟁이라도 하게 될 경우 그 결과가 억울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부조리한 상황을 목격하게 되면 따지고 싶을 때도 있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과도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삶이라는 것은 실력만으로 매겨지는 순위가 다는 아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정말 힘들 경우에는 포기하는 것 또한 용기다. 어떤 일이든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해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아름답다. 후회할 필요는 절대 없다.
- 2016-11-0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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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기수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의 110세 프로젝트
- 17대 고려대 총장, 사립대총장협의회장, 대법원 양형위원회위원장, 중국연변과학기술대·러시아모스크바국립대·미국조지워싱턴대 등 국내외 유수 대학의 명예교수 및 석좌교수를 역임한 이기수(李基秀·71)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의 경력은 법학자로서 얻을 수 있는 화려한 성공 사례들의 목록이다. 그런 그가 법학이 아닌 예술계의, 예원실그림문화재단의 이사장이 된다고 했을 때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다소 돌출적인 행보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사장은 그 선택이야말로 확고한 기준을 갖고 이뤄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사장이 예술을 접하는 시니어로서의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도 평생 학자로 살면서 몸에 밴 버릇이자 의지일 것이다. 이기수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은 요즘도 새벽 세 시에 일어나 공부를 한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한 말,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를 신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유한합니다.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에서만 살잖아요. 그런데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체험하는 거니까 책을 읽는 만큼 내 삶이 더 윤택해진다는 의미가 될 수 있죠. 나는 법학을 공부했으니 법학에 대해선 조금 알지만, 그 밖의 경제와 인류, 문학과 예술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모든 것은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가져와서 내 삶에 녹여 삶을 좀 더 향상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예술의 후원자가 되다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이사장은 그동안의 삶을 법 연구로 세운 대표적인 법학자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예원실그림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게 됐는지 궁금했다. “이배영 이화여대 총장께서 가까이 지낸 사람들을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 초청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손인숙(예원실그림문화재단 관장) 작가가 만든 를 보고 ‘어떻게 저런 작품을 직접 만들 수가 있었을까. 저건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싶었죠. 그런 걸 오천 점 정도 만들었다니까, 신의 경지여야 할 수 있는 거로구나 하며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작품에 매료되어 있는데 손 작가가 재단을 만들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내가 갖고 있던 돈 삼십만원을 후원금으로 냈어요.” 이 이사장은 손 작가의 첫 후원자였다. 재단 통장에 첫 번째로 후원금을 넣은 첫 후원자로서 이 이사장은 손 작가의 요청으로 이사장까지 맡게 됐다. “한국의 예술이 파리를 침략했다” 올해는 한불수교 13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에서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 말까지 작품 전시와 공연이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1월부터 12월 말까지 130개의 작품을 전시 및 공연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파리에서 3개의 작품 전시 및 공연이 이뤄졌는데 각각 종묘제례, 공예 작품, 그리고 손 작가의 실그림 작품이다. 실그림 작품 전시는 우선 프랑스 국립박물관인 기메박물관에서 했고 이어서 니스 동양박물관에서 콜을 받아 진행하고 있다. 8월까지 3개월 동안 8만 명이 관람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르몽드 지는 ‘한국의 예술이 파리를 침략했다’라는 카피를 내놓으며 두 번이나 지면에 소개했다. 이 이사장은 예원실그림문화예술로 한국 예술의 위대함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흡족해했다. “지난 9월에는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장관과 만났어요. 이분이 여섯 살 때 프랑스로 입양을 가서 프랑스 부모님 밑에서 프랑스 사람으로 자랐거든요. 우리나라에서도 대대적으로 소개됐던 사실이죠. 그런데 손 작가의 작품을 만나면서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과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다는 걸 자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 와서 작품을 보고는 계속 감탄하시더군요. 전통과 모던의 조화라고요.” 이사장이 추구하는 ‘헌법에 입각한 예술론’ 이사장 역할까지 하면서 실그림을 알리는 데 열정적으로 뛰고 있는 이유는 그가 지향하는 가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는 할 수 없고, 예술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총장을 끝내고 난 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결론은 나머지 인생을 대한민국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바치겠다는 거였죠.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가치를 어떻게 높일까 또 고민하고 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만든 헌법 소책자가 눈에 띄었어요. 헌법을 지키는 게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그는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근거를 헌법에서 찾았고, 그 텍스트에 입각해 자신을 설명했다. “헌법에 따르면, 국가가 성립되려면 주권, 국민, 영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입니다. 이는 통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죠. 그리고 해야 할 게 9조입니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제 남은 인생을 대한민국 헌법 가치 제고와 통일, 문화가치 창달에 투신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니 예원의 작품들을 보고 내 나머지 인생을 위한 이사장직을 흔쾌히 수락할 수 있었던 거죠.” 실그림에 담긴 민족문화 창달 기자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이라는 빨간색 소형 책자. 그는 기자에게 헌법 제9조와 69조를 읽어보라고 했다. “9조에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69조는 대통령 취임 선서문인데, 여기에도 대통령으로서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다’라고 적혀 있지요.” 현재에 만족하는 삶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정리 중 이 이사장은 1945년생이다. 이제 70이 넘어가는 시니어로서 젊을 때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 있는지 물어봤다.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은 정년을 했기 때문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죠(웃음). 명예교수로서의 생활이 참 좋습니다. 시간을 내 마음대로 활용하는 게 가능하니까요. 시간이 있어 국선도를 배우기 시작해 건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주가였는데 이제는 반주 정도로 줄였어요,” 이 이사장은 최근 자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쓰면 손녀가 정리해주고 있다. 이 이사장으로서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이고, 손녀에게는 할아버지의 삶을 체험하는 독특한 경험일 것이다. “쓰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때가 이렇게 잘 기억이 나네’ 하고 마누라한테 얘기하니까 마누라가 ‘당신이 술을 안 먹으니 머리가 맑아져서 그런 거잖아’라고 하더라고(웃음).” 이 이사장의 경력은 대부분의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화려함을 자랑한다. 그런데 그 자신은 잘살아왔다고 생각할까?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둘 다 시집 장가 잘 갔어요. 친손녀가 대학 3학년, 친손자가 대학 1학년, 외손주 중에 가장 큰 녀석이 대학 1학년이고 둘째가 고3, 셋째가 중3이죠. 제 처가 오십 될 적에 가족들 전부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이번에 칠순잔치 때 다시 모여 사진을 찍었어요. 그렇게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마음으로 찍으니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에게는 즐거운 일이 또 있었다. 올해 3월 1일, 그의 제자들 중에서 마흔 번째 교수가 탄생한 것이다. “학문을 하는 학자 입장에서 제자가 마흔 명이나 4년제 대학 교수로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목적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그는 확실히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사실 총장 재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습니다. 그때 사진보다 지금 사진이(웃음) 다들 좋다고 그래요. 그때는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시간에 쫓겼고 저녁에도 두세 군데 들러 인사해야 하고 그랬으니까. 지금은 자유를 느껴요.” 열심히 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 이사장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 대답은 천생 학자다웠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로 돌아가고 싶죠. 공부할 때가 가장 좋았어요. 가장 행복했고. 논문만 쓰면 되니까(웃음).”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과 함께 진행하는 작업이 또 있다.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면서 그의 제자들 중 조교가 스물일곱 명, 교수가 마흔 명이 나왔다. 그 제자들이 그와의 인연을 원고로 만들고 있다. 이제 제자들과의 인연을 정리한 원고는 책이 되어 그의 삶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회고하는 증거로 남게 될 것이다. “2010년 12월 30일은 제가 만으로 예순다섯 살 되던 날이었어요. 정년퇴임 논문집을 만들어 롯데호텔에서 기증식을 가졌는데 그때 말했어요. 내 인생 20년은 준비기간이었고, 45년은 고대 법대, 독일 박사, 회사법·공정거래법·지식재산권법·국제거래법 갖고 먹고 살았는데 예순다섯 살부터 45년간은 다른 나라들에서의 인연과 대한민국의 가치를 제고하면서 살겠다고. 그럼 110세예요. 그런데 왜 하필 110세냐. 고려대가 1905년에 만들어졌는데 2055년이 고려대 150주년이에요. 그해가 마침 제가 110세 되는 해고. 그래서 고려대 150주년이 되는 5월 5일에 17대 고대 총장을 한 사람으로서 축사하는 게 마지막 내 꿈이에요.” 그는 호탕하고 섬세한 사람이다. 사실 이 이사장과의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가장 쓰고 싶어 안달이 났던 내용은 그의 섬세한 친화력에 관한 것이다. 인터뷰 당일 약속시간보다 좀 늦었다. 자식뻘 되는 기자인데 늦어도 괜찮다며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웃었다. 며느리에게도 이름을 불러주는 시아버지다.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110세까지 발굴에 나설 민족문화의 정수로서 마르지 않은 깊은 샘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깊은 연구와 후덕한 인품으로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내고 학계에서 우뚝 섰던 그가 요즘 부단히 자신에 관한 기록물을 만들면서 스스로 정한 가치에 열렬히 투신하고 있다. 이런 이사장은 과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그 대답은 단순했으나 여운이 길었다. “저는 전주 이씨 경남 하동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열심히 산 사람이다’라고 기억되고 싶어요.”
- 2016-11-0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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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책 버리기는 ‘삶의 숨 고르기’
- 1930년대에 명문장가로 이름 높던 이태준(李泰俊·1904~?)의 산문 중에 ‘책과 冊’이 있습니다. “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로 시작되는 글입니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冊답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글에서 읽고 보고 어루만지는 사물이며 존재인 冊은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제왕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대에는 대나무를 잘라 다듬어 글씨를 썼습니다. 불로 쪼여 수분을 빼고 푸른색을 없앤 대나무에 글씨를 쓴 다음 끈으로 꿰어 차례를 맞춘 것이 冊입니다. 하나씩 알맞게 묶음을 만드는 작업을 編(편), 그 묶음의 구분을 篇(편), 이를 말아서[捲] 보관하는 것을 卷(권)이라 했습니다. 책보다 冊이 좋다는 말은 책을 만드는 과정의 정성과, 책의 소중함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인간과 책의 관계. 책의 효용성과 가치를 일깨워주는 명언입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도 하지만, ‘이’가 ‘은’보다 말의 취지를 더 잘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거나 “책을 펼치면 이롭다”[開卷有益] “남자는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男兒須讀五車書] 등 독서를 권장하고 책을 소중히 여기라는 금언 격언은 수없이 많습니다. 독서를 통한 보상과 출세에 관한 말도 참 많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책에 대해 중국인들은 ‘세 가지 바보’[三痴]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책을 빌려달라는 것도 바보, 빌려주는 것도 바보, 빌린 책을 되돌려주는 것도 바보”라는 거지요. 고대 중국에서는 책을 빌리거나 되돌려줄 때 ‘쌍치’라는 가죽자루에 술을 담아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빌릴 때 한 번, 돌려줄 때 한 번, 그래서 ‘쌍’입니다. ‘세 바보’라는 말을 생각하면 책을 돌려받은 사람이 오히려 고맙다고 술을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격언에는 “돈은 빌려주지 않아도 되지만 책은 빌려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책을 빌려주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간의 문제보다는 지식의 공유, 사회 전체 공공의 이익을 더 중시해서 그런 거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소중한 책을 언제까지나 소유 보유할 수 없는 게 고민입니다. 개인이든 기관이든 더 이상 책을 둘 공간이 없는데 ‘이 책 다 어찌하나’ 하는 것이지요. 토머스 제퍼슨은 “책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방에 책이 없는 것은 몸에 영혼이 없는 것”이라고 했던 키케로는 “가진 걸 다 버려야 살 수 있다면 차라리 책더미 속에서 죽겠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퍼슨이나 키케로인들 책을 전혀 버리지 않고 살 수 있었겠습니까? 버린다는 말은 아예 재활용되지 않게 쓰레기로 만든다는 뜻도 있지만 남에게 주는 것도 버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는다는 희사(喜捨)라는 말에 버린다는 ‘捨’가 들어 있습니다. 捨는 舍라는 글자와 통용되고 서로 넘나드는데, 舍는 집이라는 뜻이 가장 먼저이므로 무엇을 버리는 것은 집에서 내보낸다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람은 일생을 사는 동안에 많은 책을 읽게 됩니다. 삶의 단계마다 읽어야 할 책이 있고, 해야 할 공부가 있습니다. 그 말은 단계별로 정리하고 익힌 다음 버려야 할 책이 있고, 졸업해야 할 공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나 그때 읽은 동화 만화는 추억의 자료이긴 하지만 책으로서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버려야 합니다. 그런 걸 용케 잘 보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닙니다. 학교교육이나 학령에 관계된 책은 그렇다 치고 다른 책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10대 시절에 만난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새롭고 그때의 그 책이 새로운 말을 들려주는데, 손때가 묻은 소중한 재산인데, 갈수록 새 책은 늘어나고 헌 책은 둘 곳이 없고... 그래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커지게 됩니다. 평생 책을 읽으며 책 속에서 살아온 교수들은 정년 무렵이 되면 책 때문에 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아무나 가져가라고 연구실 밖에 내놓아도 글자가 작고 세로짜기로 된 책은 인기가 없습니다. 낡은 책을 탐내는 학생들은 없습니다. 자식에게 물려주면 환영받지 못합니다. 공공기관에 기증하려고 전화를 하면 귀찮아하거나 차로 실어다 달라고 해 그것도 어렵습니다. 마지못해 받아준 곳도 나중에 가보니 책을 어떻게 처분했는지, 근으로 달아 폐지로 팔았는지 알 수 없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 작가 박경리의 유고시집 제목은 입니다. 그러나 버리는 일은 그리 홀가분하고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 정리하는 일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간략하게 디지털 공간에 저장하고 책을 버린다는 사람도 있고, 표지만 사진으로 찍어 보관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않겠지만 앞서 말한 이태준 식 사고로는 책이라는 사물을 그렇게 보존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책을 버리는 걸 ‘다시 채우기 위한 버리기’라고 말합니다. 낡은 책을 버리고 새 책을 들이기 위해 공간을 마련하는 작업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그것은 젊은 독서인들의 이야기이지 이제는 쌓고 더하기보다 덜어내고 헐어내야 하는 시니어들의 책 정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기준으로 책을 정리한다고 합니다.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1)내용이 좋은가 2)시대를 뛰어넘는가 3)다시 읽을 것인가 4)표지만 보고 있어도 좋은가, 이런 것입니다. 이 중 시대를 뛰어넘느냐의 문제는 그때도 옳았고 지금도 옳은 내용인가, 앞으로는 어떨까를 따져본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 네 가지를 세상살이와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남에게 1)좋은 사람인가 2)시기와 상황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사람인가 아닌가 3)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인가 4)직접 대화하지 않고 카톡이나 전화번호부의 이름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인가를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지요. 나는 바로 책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선택 대상이라는 점을 책 버리는 일을 계기로 생각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제일 골치 아픈 게 역시 책입니다. 진정한 장서가들과 비교하면 턱도 없이 적지만, 그래도 이사할 때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책의 분량과 무게입니다. 그래서 앞에 인용한 사람처럼 책마다 네 가지 기준을 들이대며 한창 일부러 꼬나보고 있는 중입니다. 책을 버리는 사람도 책을 빌려주거나 돌려주는 사람처럼 바보일까요? 버릴 책을 고르는 일은 삶과 숨을 가다듬는 ‘생각 고르기’와 마찬가지라고 믿고 싶습니다. 책 속에도 길이 있지만 책 밖에도 길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해묵은 손때’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 2016-09-2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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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하나로 완성하는 사진 편집
- 사진은 대중화하였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시니어도 예외가 아니다. 사진은 예술적 작품보다 영상언어로 활용된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원하는 모습으로 손쉽게 조정, 편집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로 찍은 사진을 다양하게 편집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그 사용방법이 어렵지 않아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원하는 크기로 자르고 밝기나 대비, 채도 등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사진에 들어 있는 잡티도 손가락 끝으로 만지면 없어진다. 색감도 쉽사리 변경할 수 있다. 선명도도 손가락을 화면에 터치하여 좌우로 움직이면 바뀐다. 주요 피사체를 중심에 두고 주변을 흐리게 할 수 있다. 사진 전문용어로 아웃포커싱이다. 또한, 사진 가장자리 부분을 어둡게 하거나 밝게도 가능하다. 손가락 하나로 화면을 터치함으로써 말이다. 컴퓨터에서 포토샵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긴 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포토샵을 순식간에 마칠 수 있다. 참 편한 세상이다. 사진과 관련한 애플리케이션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사진작가다. “RAW”라는 화질로 사진을 찍는다. 이 화질로 찍은 사진은 반드시 별도의 포토샵 프로그램에서 다시 작업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러한 작업을 손가락 하나로 손쉽게 그리고 순식간에 마칠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스냅시드(Snapseed)”라는 애플리케이션이다.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플레이스토어에서 검색하여 내려받을 수 있다. 용량도 크지 않다. 사진 작업방법은 정말 간단하다. 이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불러온 사진 위에 하고자 하는 편집 기능을 선택하여 화면 위에 손가락을 대고 좌우 또는 위아래로 움직이면 실시간으로 사진의 모습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작업 정도를 화면을 보면서 할 수 있다. 작업 편리를 위하여 띄워 놓은 사진을 크게 벌릴 수도 있다. 세밀한 작업을 위해서는 엄지와 검지를 화면에 대고 안에서 바깥쪽으로 움직여주면 사진이 커진다. 주요 기능을 살펴보면 정말 다양하다. 기본보정, 선명도, 자르기, 회전, 왜곡, 화이트밸런스, 브러시, 부분 보정, 잡티제거, 비네트, 텍스트, 아웃포커스, 화사한 그로우, 색조대비, HDR스케이프, 드라마, 그런지, 거친 필름, 빈티지, 흑백, 프레임, 얼굴 등이다. 물론 사진을 보정하는 많은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이들 중에서 스냅시드는 정말 그 기능이 놀랍다. 더 놀라운 것은 사진 작업을 마치고 저장하면 원본은 별도 지시가 없어도 그대로 보전되고 “스냅시드”라는 별도의 폴더가 생성되어 변경한 사진이 보관된다. 일반 포토샵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는 사진작가의 눈으로 보았을 때 사진을 수없이 찍고 소셜 미디어를 통하여 영상언어로 사용하는 우리에게 활용도가 높은 애플리케이션 중에 하나로 여겨진다. 잘못 이해하면 어느 특정 애플리케이션을 홍보하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전혀 관계가 없음을 밝혀둔다. 오로지 사용하다 보니 너무 편리하고 그 기능이 좋아서이다. 다시 말해 필자 혼자 알고 있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좋은 정보는 공유함이 바람직하다. 다양한 미디어를 이용하여 수많은 정보들이 오고 간다. 같은 정보를 생각 없이 퍼다 나르는 귀찮은 공유시도도 많지만, 꼭 필요한 정보의 공유는 서로를 유익하게 하지 싶다. 예의 애플리케이션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고 활용하는 시니어에게 도움이 되지 싶다.
- 2016-09-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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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취미가 직업이 된 사진작가 박찬원의 꿈, “내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것이 목표다”
- “팔다리는 물론 얼굴에까지 뜨듯한 오줌이 그대로 튀어요. 얼굴은 똥, 오줌 범벅이 돼도 ‘똥은 흙, 오줌은 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이때가 사진 찍기 가장 좋은 때거든요.” 7개월 동안 돼지의 생활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박찬원(朴贊元·72) 사진작가가 겪은 일이다. 그는 돼지만 사진을 찍어서 ‘사진작가는 미친놈이다, 아니면 내가 전생에 돼지였는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단다. 확실한 것은, 그가 사진에 미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제2 인생의 즐거움과 사진예술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들어본다. 글 사진 김영순 기자 kys0701@ 이제는 사진작가라고 불러야 한다. 과거에는 사장, 한때는 교수라고 불렸던 이다. 바로 박찬원 사진작가의 이야기다.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대표, 삼성그룹 부사장을 지내면서 전 세계로 뻗은 거대한 재벌 기업의 의사결정권자로 일했고, 코리아나화장품 사장을 끝으로 기업에서 은퇴한 후에는 성균관대 석좌교수로 교육자로서의 삶도 겪어 봤다. 그러나 40년을 직장인으로 산 그가 인생 후반전에 도착한 곳은 사진이라는 예술이었다. 그는 지난 6, 7월에 걸쳐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이포’와 은평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서 두 번의 ‘돼지’ 테마 전시회를 마친 뒤였다. 지난 8월에는 12일간 종로구 사진위주 류가헌에서 ‘숨 젖 잠’이라는 초대전도 열었다. “원래 초대전을 여는 걸 사진 배우기 시작한 10년째인 2018년에 계획했는데 기회가 일찍 왔어요. 문래동에 위치한 대안공간 이포가 원래 실험적인 젊은 작품들을 전시하는 곳인데 내 작품을 보고 좋다고 해서 열게 됐죠.” ‘예술은 돈이다’라고 이야기한 피카소의 말이 생각났다. 박 작가한테 전시 작품에 ‘빨간딱지’ 가 붙어 있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었다. “전문 사진가라면 작품이 판매되어야 하죠. 처음 판매되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2011년 코엑스 CEO 특별전으로 기성 작가들과 호주에서 사진전을 열었을 때에요.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구매한 그분께 정말 감사했고 부담도 느꼈어요. 아마추어는 전시만 하면 되지만 프로는 팔려야 하죠. 작가와의 친분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좋아야 사는 거잖아요. 나중에 누가 샀는지 알아보지 말 걸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작품이 팔리고 보니 진짜 작가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웃음)” 작가는 작품이 판매될 때 비로소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누드 사진을 계기로 사진예술에 눈 뜨다 박 작가와 사진과의 인연은 올해로 8년째다. 2008년에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강연을 듣다가 미술과 사진을 배우면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미술과 사진 둘 다 지금도 꾸준히 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본업’은 사진이다. “처음부터 사진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사진작가 조세현 선생이 가르쳤는데 하루에 인물, 풍경, 누드, 종합으로 테마 하나씩을 세 시간에 걸쳐 네 번 찍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세 번째 날인 누드 사진을 찍은 날, 내가 대상을 받았어요. 그때 썼던 카메라들이 모두 삼성 카메라였는데, 조세현 작가가 제 걸 보더니 ‘이건 카메라 광고로 써도 손색이 없겠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사진이 누드의 실루엣만 찍은 건데, 저는 마케팅 쪽을 했기 때문에 보는 눈은 좀 있다고 자부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곳에 가서 엎드려서 찍었는데 성공적이었던 거죠. 그때 ‘야, 이거 할 만하네’라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박 작가는 이때 때로는 초보도 프로 못지않은 명작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인생 자체가 작품 같은 박찬원 박 작가는 코리아나화장품에서 은퇴하고 성균관대에 석좌교수로 초빙되어 마케팅을 강의하게 됐다. 그런데 하다 보니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젊은 박사들은 경력을 위해서 강의를 맡는 게 중요한데 나는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 내가 할 자리가 아니구나’ 싶어서 한 3년 하고 나서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2010년에 상명대 예술디자인 대학원에 멋모르고 지원했죠. 그러면서 고생 엄청 했어요.” 사진을 배우러 들어갔는데, 정작 대학원에선 사진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기술은 이미 대학교에서 배웠다고 생각하고 예술가가 되는 훈련을 시켰기 때문이다. 여전히 초보였던 그로서는 많이 힘들었지만 그러한 훈련 덕분에 예술,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고 말한다. 인생 후반기의 보람을 느끼는 힘,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 쓰는 언어, 노는 물도 달라졌다. 그리고 그간 고생한 것이 아까워 졸업하자마자 라는 책도 썼다. 이제 박 작가의 목표는 영원한 현역이다. “사진작가를 업으로 가는 건 정해졌습니다. 제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게 목표예요.” 작품의 진정성을 추구하기 위한 100일 촬영 박 작가는 하나의 주제에 100일 촬영을 목표로 작업하는 순수 사진가로 ‘생명의 의미’를 담았다. 현재 작품 세계의 주요 테마는 ‘돼지’와 ‘염전’이다. 얼마 전에 쟁쟁한 기성 작가들과 함께 전시했던 테마도 ‘돼지’를 소재로 한 ‘꿀 젖 잠’이라는 제목이었다. 각각 ‘꿀’은 돼지가 내는 소리, ‘젖’은 돼지의 젖, ‘잠’은 돼지의 영혼을 사진으로 잡아내고자 한 시도다. ‘돼지’ 테마는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촬영할 수 있는 곳을 섭외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그것도 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겨우 섭외한 양돈장에서 지난해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매주 2박3일씩을 현장에서 먹고 자며 촬영했다. “똥 냄새 엄청나죠. 지금도 자동차 트렁크를 열면 그 냄새가 날 정도예요. 젖 사진을 찍을 때는 얼굴에 똥이 다 묻어요. 그리고 돼지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긴장해서 오줌을 싸고요. 그런데 돼지가 오줌을 싸면 움직이지 않아서,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있어요. 상황이 이런데 막상 사진을 찍을 때면 냄새가 안 납니다. 의식을 못하는 거죠.” 100일 촬영하기를 한다고 했을 때, 2주에 한 번 간다고 하면 2년이 걸리고 1주에 한 번 가면 1년이 걸리는 긴 시간이다. 당연히 사진 촬영 때문에 다른 모임은 일절 참석할 수 없게 된다. 얼마나 사진에 올인하여 새로운 즐거움을 갖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막상 셔터를 누르는 시간은 얼마 안 걸려요. 나머지는 다 생각하는 시간이죠. 그 시간이 주제가 구체화되는 지점입니다.” 3년 동안 염전 사진을 찍었다 소금밭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염전 안에는 삶과 죽음이 모두 담겨 있더라고요. 처음으로 빛을 느낀 곳이기도 합니다. 바닷물이 노구(老軀)를 끌고 찾아와 햇볕에 몸을 맡기면 육신은 소금으로 남아 생명의 물질이 되고, 영혼은 수증기가 돼 다른 세상으로 날아갑니다. 죽음과 탄생이 공존하는 공간이죠. 나비, 하루살이, 거미 등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어요. 눈을 뜨고 마음을 여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듯했어요.” 박 작가에게 염전은 성지와도 같다. 처음으로 사진다운 사진을 찍었고 많은 고민을, 많은 생각을 했던 곳이다. 날것 그대로, ‘생명’을 사진에 담는다 어디를 가나 그는 연장자다. 전문작가도 사진을 정리할 나이 65세에 사진을 시작했다. 아랫사람보다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나이가 많다고 대접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체력의 한계, 감각의 한계가 핸디캡이 될까 봐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지 않는다. 최근 사진들은 리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이다. 그런 기술적인 부분까지 직접 다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박 작가는 리터치(보정)를 잘 못하고,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어쩌면 그러니 제 작품을 어설프지만 인정해 주는 것일 수도 있어요. 리터치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보면 다 알거든요.” 가공이 거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사진. 그래서인지 박 작가의 사진에는 유난히 담백한 맛이 있다. 그것은 다큐로서의 시선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게 그냥 찍는 게 아니고 사람과 사귀어야 하고 동물하고도 사귀어야 하고 그런 것들을 해야만 개념도 잡히는 거죠.” 박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궁극적인 지점은 ‘생명’이다. 다음 테마는 비밀이지만 역시 그가 추구하는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미 결정됐다고 하며 10월 부터 착수한다. “작품 사진이 좋을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간결했다. “즐기면서 찍을 때 좋은 사진이 나오고, 힘을 빼고 작업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은 진리예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우리 집사람은 수채화를 그려요. 그러니 호흡이 딱 맞아요. 저도 처음에 대학원을 갈 적에 그림으로 가느냐 사진으로 가느냐 고민이 많았는데, 그림은 앉아서 하니까 건강에 도움이 안 될 것처럼 보였어요. 반면 사진은 움직이면서 찍으니까 활동적이어서 그쪽을 선택한 것도 있죠. 지금은 더 건강해진 느낌이에요.”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뭔가를 새롭게 하려고 해도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있다. 그래서 감히 못하는 경우 많다. 그러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의외로 나이든 예술가들이 자기 명성만 가지고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요. 반면 젊은 친구들은 장래가 두려워서 방향을 잘 못 잡고 몰입을 잘 못하죠. 난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됐고 다른 일이 없으니까 필요한 건 용기였죠.(웃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박 작가 혼자 히죽 웃는다. 제2 인생도 용감한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영원한 현역을 다짐하다 그는 나이를 먹어서 가져야 할 것은 용기를 내는 것이라는 걸 재차 강조했다. 자신도 주변에 추천은 많이 해줬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를 못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해야 하는데 취미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나이 들어 자기 자신의 역량이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관점도 거기에 있었다. “호기심, 그리고 노력인 거 같아요. 그림도 사진도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재능 없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제가 찍는 정도의 사진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시도를 안 하는 거라고 봅니다.” 다소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는 때가 언제인지 물어 봤다. 그의 대답은 즉각적이고, 예상한 그대로였다. “바로 지금이지! 즐거워!”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 박찬원 작가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2018년은 사진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해예요. 10년간 사진 공부를 하고, 10년간 사진가로 활동하겠다는 계획을 잡았어요. 우리 나이 65세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75세에 나만의 작품으로 데뷔전을 하고 85세에 마지막 사진전과 사진 책을 발간할 작정입니다.”
- 2016-09-08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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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변화가 된 이 한권의 책] 희망편지
- 아주 오래전 중학교 3학년 국어시간의 일이다. 국어선생님은 머리가 하얗고 이가 몇 개 빠진 할아버지였고 성함은 ‘김이홍’이었다. 당신 이름에 세 가지 성씨 즉, 김씨, 이씨, 홍씨가 들어있다고 자주 자랑하셔서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 내재되어 있던 작문 소질 그 날 국어시간에는 작문을 하라고 하셨다. 작문의 주제는 ‘국어 선생님’이었고 1등에게는 커다란 ‘배’ 하나를 상으로 주겠다고 하셨다. 그 당시 우리 중학교는 망우리 공동묘지 근처에 있었고 학교 주위에 배 밭이 많았다. 그 날 필자가 1등상을 차지했고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가서 큰 배 하나를 상으로 받았다. 글을 잘 썼다는 선생님의 칭찬도 아직 귀전에 남아있다. 그 당시 몸이 왜소하고 깡말라서 덩치 큰 녀석들로부터 늘 괴롭힘을 당했다. 성격도 지독하게 내성적이어서 거의 말도 하지 않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작문 1등이라는 사건은 우리 반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글 쓰는데 재미를 붙일 만도 하건만 그날 이후 수십 년간 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 ◇ 다시 찾아낸 글쓰기 소질 2008년에 우리나라에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그 십년 전인 IMF 때는 자살하거나 파산해서 삶의 고통에 빠진 사람들이 금융위기 때 보다 훨씬 더 넘쳐났었다. 그러나 IMF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힘들었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끼리 서로 돕기라도 했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는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조용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그 때 조선일보에서 금융위기와 관련하여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수기를 공모했다. 신문에 실리는 수기를 보면서 용기를 내어 응모했다. IMF 때 파산하고 공황장애도 앓았으나 가족의 사랑으로 재기하게 된 필자의 이야기였다. 채택이 되어서 신문에 개제되었고 몇 달 동안 개제된 수기를 모아서 ‘희망편지’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여러 사람의 수기를 모아서 출간된 책이었지만 필자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의미가 컸다.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 본격적인 글쓰기 그 때부터 블로그에 사진과 글을 써서 저장해 두는데 재미를 붙였다. 여기저기 신문사나 잡지에 글을 기고하였고 여러 번 채택되어 원고료도 받았다. 2012년에는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인연’ 수기공모에 입상했다. ‘내가 만난 추기경’이라는 책에 글이 실렸다. 글을 쓰는데 더 용기가 생겼다. 활동하고 있는 시니어 관련 포럼 회원들과 같이 책을 내자는 제안을 했다. 과거에는 잘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과 책을 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고를 모으고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어려움은 있었지만 ‘시니어 비즈니스 스쿨’, ‘무지개 공감’ 이라는 책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이렇게 해서 벌써 공저서가 네 권이라고 이력서에 넣게 되었다. 시니어 관련 강의를 할 때면 수강생들에게 이 책들을 선물한다. 올해는 여성 동화작가로부터 책 감수를 부탁 받았고 오늘 그 책이 출간되었다. 아주 오래 전 낡은 철재 책상 오른 쪽 맨 아래 칸 서랍에서 신문지로 뭉쳐놓은 큰 배를 꺼내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때 작문시간에 선생님께 썼던 편지가 씨앗이 되어 [희망편지]라는 책으로 남게 되었다.
- 2016-09-0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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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패셔니스트- 나만의 코디법] 펑퍼짐한 바지는 가라!
- 필자는 ‘펑퍼짐한 바지’는 거부한다. 바지통이 타이트해 몸에 짝 달라붙고 길이도 조금 짧아 구두 뒷굽을 가리지 않는 디자인을 입는다. 색깔 역시 노색이 아닌 밝은 계통을 선택한다. 윗도리도 붙는 형태의 것으로 입어 타이트한 바지와 궁합을 맞춘다. 예전엔 위아래 옷이 모두 헐렁한 것을 선호했다. 활동에 편함을 주어서였다. 나이가 들 대로 든 사람이 몸에 끼이는 옷을 입을 경우 보는 사람들이 점잖지 못하다고 여길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을 바꾸기 싫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스타일에서 벗어났다. 자주 옷을 사지는 않아도 한마디로 젊은 티가 푹푹 나는 옷을 즐겨 입는다. 규율적 교복, 직장인 양복에서 진정한 패션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혼사에 갈 때도 넥타이를 맨 정장을 고집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자주 청년 같다고 말한다. ◇점잖은 옷을 고집했던 인생일막 필자의 패션(패션이라는 말을 쓰기 뭣한 구석이 없진 않지만)은 젊을 때부터 ‘‘젊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선 옷이 우장 같이 커 펑퍼짐한 것을 입었다. 활동에 더 편한 옷을 선택한 결과다. 색감도 칙칙한 걸 좋아했다. 특히 검은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필자가 입은 꼬락서니를 보면서 사람들이 우울해 할 정도였다. 그런데 시니어가 되면서 젊고 멋스러운 옷에 자꾸 눈이 갔다. 아마 오래된 펑퍼짐함과 칙칙함에 대한 싫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시니어’라는 존재적 본질 때문에 스스로 이런저런 한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계속 노티 풀풀 나게 입고 다녔다. 그리고 그게 무엇보다 익숙하고 편했다. ◇의류업계에 취업한 아들에게 옷가지 선사 받고선… 큰아들이 부산에 본사를 둔 의류업체에 취업했다. 간혹 필자에게 옷가지를 선물이라며 주었는데 모두 그 회사의 최신 패션 브랜드였다. 받은 옷이니 버릴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꽉 끼고 색깔이 튀는 옷을 입게 되었다. 처음 입을 땐 엉덩이가 끼어 못 입겠더니 자꾸 입으니 생각보다 편했다. 필자는 사진작가여서 야외활동을 많이 하는데 이제는 야외에서 입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다. 색깔도 처음엔 다른 사람 보기에 민망했지만 이 역시 익숙해지니 괜찮았다. 옷도 술과 마찬가지로 중독이다. 아들 회사 브랜드를 자꾸 걸치니 이제는 종전의 스타일인 펑퍼짐하고 칙칙한 바지는 오히려 이상한 느낌이 든다. 신발도 예전의 직장인 티 풀풀 나는 스타일에서 신세대 형태로 바뀌었다. 양말 역시 목이 짧은 것을 신는다. 예전에는 양말과 구두를 옷장과 신발장 제일 위에 있는 거부터 신었는데 이젠 바지 색깔에 따라 변화를 주기도 한다. 더구나 반가운 것은 이런 차림으로 나서면 실제 나이(67세)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때로 10살 어리게 나이를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다른 사람 얘기 다 믿을 순 없지만. 남들의 시선도 시선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젊게 옷을 입다 보니 마음과 행동도 젊어진다는 것이다. 또 젊은 감각의 옷은 이웃에게 즐거움을 준다. 불교에서 무재칠시(無財七施ㆍ돈 없이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를 중요하게 여기듯 필자의 경쾌한 스타일이 이웃의 눈에 즐거움을 주면 그 자체로 공덕 아니겠는가.
- 2016-08-0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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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잘 자기 위한 나만의 비법] 졸리면 잔다
- “졸리면 자고 눈이 떠지면 일어난다.” 이것이 필자만의 잠 잘 자기 위한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잠자는 시간대를 따지지 않는다. 졸리지 않으면 새벽 2시여도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자다가도 눈이 떠지면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한다. 밤이기에 잠을 자야 한다는 고정 틀에서 벗어난다. 규칙적인 수면도 필요하겠지만, 잠이 오지 않는 상태에서 일부러 잠들기 위하여 안간힘을 쓸 경우 오히려 잠들기 힘든 경험을 대부분 하였지 싶다. 그래서 필자는 졸리면 잔다. 대부분 시니어들의 일상이 그러하듯 필자도 남는 게 자유밖에 없어서 그런 행동이 가능할지 모른다. 장수 노인으로 노익장을 과시했던 서구의 한 할머니는 건강비결을 묻는 기자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걸을 수 있을 때 뛰지 않는다. 앉아 있을 수 있을 때 서 있지 않는다. 누울 수 있을 때 앉아 있지 않는다.” 편하게 쉴 수 있을 때 쉰다는 얘기다. 하지만 모든 평범함엔 비범이 내재해 있는 것 아닌가. 아마 그 할머니에게 잠을 잘 자는 비법을 물었다면 이렇게 대답했지 않았을까? “졸리면 자고 눈이 떠지면 일어난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의 건강을 나타내는 기준점이 될 수 있다. 잠을 잘 자는 사람들은 대체로 건강하기 때문이다. 베개에 머리를 대면 잠드는 경우도 있고, 당체 숙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왜 생기는 걸까. 그건 바로 스트레스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고민거리와 스트레스는 건강을 가로막는 요인들이다. ◇잠자는 시간대 중요하지 않아 필자는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이다. 강의를 위한 강의 프레젠테이션 작성과 글쓰기가 그 대표적 작업이다.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컴퓨터 작업 중의 하나가 사진 보정 작업이다. 포토스토리텔러(사진으로 이야기를 쓰는 사람), 즉 사진작가이기에 사진도 남다르게 많이 촬영하지만, 사용하는 화질이 “RAW”여서 일일이 촬영한 사진을 별도의 후 보정 작업을 거쳐야 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 작업을 하다 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다.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하지만, 작업 중에 졸리면 곧 잠자리에 든다. 그러기 위하여 컴퓨터 옆에 침대를 설치했다. 의자를 돌리면 침대에 드러누울 수 있다. 잠을 자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그 순간 잠이 달아날 수 있다. 잠을 자다가도 눈이 떠지면 시간대에 상관하지 않고 일어난다. 간혹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을 때 오히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 경험이 많아서다. ◇잠자는 시간도 아깝다 필자는 현재 강사, 기자, 수필가, 사진작가, 방송, 자원봉사자 등 25시로 산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일분일초가 늘 아깝다. “시간 겹쳐 쓰기”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강의장을 가기 위하여 나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이동시간 내내 다른 일은 전혀 할 수 없다. 전철을 이용하게 되면 강의 교안을 살펴보는 일 등 시간을 겹쳐 쓸 수 있다. 이런 경우를 나는 “시간 겹쳐 쓰기”라 이른다. 잠자는 시간도 줄이려 애쓴다. 숙면을 통하여 그 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졸리면 잠자고 눈이 떠지면 일어난다. “졸리면 잠잔다.”가 나의 잠 잘 자기 위한 나만의 비법이다
- 2016-08-09 1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