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와 친한 지인이 30여 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를 했다. 마음씨 좋은 부인이 그간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고 고생했다면서 좋은 차 한 대 사서 여행을 다니자는 말을 꺼냈다. 기왕이면 우리도 BMW 한 대 사 가지고 신나게 다녀 보자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 녀석 왈, “아니, 아버지가 BMW 사서 뭐 하시게요? 그냥 작은 국산차 하나 사서 다니면 안 돼요?” “아니, 뭐라고라?~~~” 지인은 그때 생각만 하면 분이 풀리지 않는지 “참 내,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라면서 얼굴을 붉혔다.
요즘 자녀를 결혼시킨 부모들이 처음 겪는 갈등은 자녀들이 구입하고자 하는 차종이라고 한다. 그래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해줘야지 하면서 주택 구입이나 전세 자금은 물론 결혼 비용까지도 보태줬다. 당장에 가진 돈이 없어서 무리해서 대출까지 받은 부모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혼부부가 대뜸 외제차를 사겠다는 것이다. 결혼 전에 타고 다니던 차를 계속 타도 될 것 같은데 차부터 근사(?)하게 바꾸겠다는 것이다. 아니 왜 하필이면 비싼 외제차냐고 물을라치면 연비 등을 생각하면 국산차보다 비싸지 않다면서 비교표를 들이민단다.
결론 ① 저네들은 외제차 타면서 부모에게는 무슨 외제차 타령이냐고 들이대는 요즘의 젊은 것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면 내 일로 다가올 수 있다.
결론 ② 아~~~! 결국은 자식도 내 품을 떠나고 나면 남이구나. 남은 것은 내 아내, 내 남편, 우리 둘밖에 없구나. 이제 둘이서 오순도순 사는 게 인생 최고의 목표구나. 그럼 뭘 해야지?
결론 ③ 자식놈들이 뭐라 하든, 주위에서 뭐라 하든 내 살 길 내가 찾아야겠다. 그래, 차제에 BMW나 2대 마련하자. 아니 BMW를 1대도 아니고 2대씩이나?
첫 번째 BMW는 눈치 챘겠지만 바로 ‘버스, 지하철, 걷기(Bus, Metro, Walk)’이다. 사람은 직립인간이 된 이후 걸어 다녀야 뇌가 살아 있다는 신호를 받는다고 한다. 먼 곳으로 여러 날 여행을 가거나 생필품을 많이 살 때는 차를 이용해야겠지만 웬만하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걸어 다니는 게 건강에도 좋다. 근교의 산이나 유적지는 물론 연극 또는 영화 등을 보러 다닐 때도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다니면 그 재미도 쏠쏠하다. 가다가 아무데서나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구경도 하면서 다닐 수 있다. 특히 지하철에다 기차를 포함시키면 전국구가 되어 방방곡곡을 유람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대도시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니려면 사전에 고민을 꽤 많이 해야 한다. 버스 번호가 세 자리를 넘어 네 자리까지 있어서 예전처럼 행선지가 머릿속에 선뜻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두 번 갈아타려면 스마트폰의 대중교통 앱을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탈 경우 출구를 제대로 찾아 나오지 않으면 다시 내려가거나 길을 건너는 불편을 겪어야 한다. 나름 요령과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만큼 생각도 하고 나름 전략을 짜게 만들어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까지도 가져다 줄 것이다.
두 번째 BMW는 뭘까 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필자가 만든 신조어이기 때문인데 별 거 아니다. 다름 아니라 ‘맥주, 막걸리, 와인(Beer, Makgeolli, Wine)’이다. 술을 안 마시는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술을 좀 하는 사람은 적절한 음주만큼 인생을 즐겁게 하는 윤활유도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냥 술이면 술이지 왜 하필 BMW냐고 물을 수도 있다. 사실 위스키나 고량주, 소주처럼 도수가 높은 증류주, 도수가 낮은 맥주와 막걸리, 와인과 같은 양조주에다 칵테일까지 곁들이면 정말 다양하게 마실 수 있는 게 술이다. 그중에 BMW를 고른 이유는 나이 들수록 주량도 줄어들므로 도수가 약한 술을 조금씩 즐기면서 마시면 시간도 잘 가고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와인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점심에도 저녁에도 와인을 마신다. 하지만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으면서도 즐겁게들 식사를 한다. 술을 술술 마시면서 인생을 술술 풀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만약 BMW, 즉 맥주와 막걸리, 와인을 조금씩 맛보기로 한다면 마시는 순서는? 필자가 몇 년 전 유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맥주도 와인도 다 마셔 봐야겠다면서 무엇부터 먼저 마셔야 하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맥주부터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영어 알파벳 순(B → W)인 데다 도수가 약한 술부터 마시는 게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수가 약한 술부터 마셔야 순하게 취한다는 주당(酒黨)들의 주도(酒道)는 어디나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BMW를 마시는 순서도 영어 알파벳 순서로 보나 도수 순서로 보나 B → M → W가 된다. 도수 또한 맥주가 4~5도, 막걸리가 6도, 와인이 11~14도 아닌가. 지하철을 오르내리기 싫다면서 버스타기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에 맞춰 다니기에는 지하철이 최고라면서 지하철만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버스건 지하철이건 편한 대로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BMW 중에서도 맥주나 막걸리, 와인 어느 한 가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것저것 다양하게 마시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맥주와 막걸리, 와인도 메이커에 따라 조금씩 향과 맛이 다르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주머니 사정에 따라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즐긴다면, 또 가끔씩 순서를 바꿔 마시면 그보다 좋은 재미가 있으랴.
요즘 다양한 국내 여행 패키지가 나와 있다. 차를 가지고 가면 술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라도 패키지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출발 장소까지만 가면 그 다음엔 다 알아서 데리고 다닌다. 2박 3일이면 두어 번 정도는 자유 시간을 주면서 식사도 알아서 해결하도록 한다. 이때 그 지역의 막걸리 등 토속주를 맛볼 수 있다. BMW 2대를 가지면 더없이 자유롭고 행복한 이유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술잔 수를 세며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후에 ~~~ 차갑고 매서운 바람 불 때 그 누가 한 잔 먹자고 할 것인가? ~~~”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송강 정철 선생의 ‘장진주사(將進酒辭)’의 일부분이다. 아무리 약한 술이라고도 해도 한없이 마실 수야 없지만 ‘적중이지(適中而止)’, 즉 적당한 선에서 그칠 줄 아는 주당이라면 그 아니 즐거울소냐. 에헤야디야,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풍류-이스탄불, 풍류-베이징, 풍류-밀라노, 풍류-홍콩에 이어 풍류-서울 전시회(7월 13일~8월 9일)를 포스코미술관으로부터 초대받았다. 자랑스러운 조상 덕이었다. 그중 이탈리아 밀라노에서는 유럽을 대표해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유럽 예술과 패션의 중심지로 알려진 밀라노는 사진이 태동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도시가 2012년 9월 24일부터 말일까지를 ‘한국문화주일’로 선포했다. 우리 영화 등을 밀라노 상영관에서 개봉하고, 밀라노 광장에서 케이팝 공연과 한글을 소개하는 문화행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풍류-밀라노 사진전이 밀라노 사진학교(FORMA) 전시실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유럽 최초로 우리 문화주일을 선포하는 이탈리아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밀라노시의 공동 축제였다.
전시 관람객은 날이 거듭될수록 늘었고, 전시작품에 대한 진지한 질문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 부부는 행복했다. 특히 전시 마지막 날에는 한 관람객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 마감 시간이 임박한 저녁 7시경 관람객 무리에서 한 부인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부인은 작품 아래 붙여진 설명을 우리말로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어를 공부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설명서에 이탈리아어로 쓰여 있어 작품의 콘셉트는 이해했지만, 그 내용을 직접 한국 발음으로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관람객들이 둥그렇게 작품 앞에 모였다. 난 그들을 바라보며 작품 설명을 우리말로 천천히 읽어주었다.
“사진도 청각 예술의 소리처럼 증발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말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정서를 이해하려는 관람객들의 열정에 나는 놀랐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관람객이 감상을 전해주었다.
“당신의 말을 듣고 작품을 보니 한국은 참 아름답고 고상한 나라란 것을 알겠어요.”
그때 느낀 벅찬 감동은 아직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젊은 날 뜻도 모르고 겉멋에 흥얼거리던 칸초네 가락이 언뜻 떠올랐다.
풍류를 사랑했던 조상의 멋을 우린 사진기 뷰파인더 안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바람과 물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쉽게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다. 시간이라는 날줄과 공간이라는 씨줄이었다. 그렇게 그 바람과 물에 맞는 그물을 엮으면서도 그 간격의 밀도가 또한 관건이었다.
내 사진기는 수많은 조합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내가 볼 수 없었던 세상을 사진기는 열어 주었다. 또한 바람과 물은 나라와 민족을 넘어서는 공통의 언어였으며, 창조의 숨결, 흐르는 생명이었다. 이렇게 준비된 사진을 통해, 관객의 내면 깊이 침잠해 있던 낯설음과 낯익음이 되살아나 새로운 이야기 길이 열리길 바랐다. 전시회가 나의 독백이 아니라 관객이 전시회를 완성시키는 주체이길 원했다. 관객과 작가 사이의 바람직한 긴장감.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호숫가 살얼음판 위를 걸을 때 전해지는 얼음의 울림을 기대했다.
스틸에는 동영상처럼 프레임마다 이어지는 스토리가 없다. 그래서 전시 중에 우리의 잠재의식 깊이 숨어 있는 이야기가 열렸으면 했다. 더 나아가 우리 조상들이 유언으로 후손들에게 남기고자 유전인자에 새겨놓은 우리 어른들의 오랜 이야기 말이다. 그 새로운 지혜의 이야기 길을 빛으로 나누고 싶었다.
포스코미술관 전시 중에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방문이 있었다.
어른과 함께한 의젓한 아이들이었지만, 나는 당황했고 긴장했다. 아이들에게도 너무나 커다란 전시장이라 먼저 그 규모에 지루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먼저 전시장 안을 한껏 달려보게 했다. 여러 아이들의 달리기 소리에 당번 큐레이터가 질겁하여 뛰어 나왔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아름다움에 대한 얘기를 시작해야 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일하는 바람, 낮은 데로 흐르며 아낌없이 자신을 주는 물…. 그 나이 아이들이 듣기만 해도 웃음이 터지는 ‘똥’ 이 아름다울까? 등으로 족히 한 시간을 넘어, 어느 투어 못지않게 진지한 풍류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이번 포스코미술관 전시에서는 그동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연재하였던 18편을 가로 50cm로 디자인하여 작품 사이에 진열하였다. 그리고 다큐영상실에서는 예멘의 딸들(daughters of Yemen), 몽골의 색(color of Mongolia), 우리들…(about us…) 세 영상이 각각의 모니터로 상영되어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해 생겨나고 있는 난민들과 전쟁으로 파괴되어 이젠 사진으로만 남게 된 문화재들을 알리는 사진의 힘을 얘기했다.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 자동차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방비엥. 작은 시골 마을은 여행자들로 넘쳐났다. 커다란 배낭을 등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는 여행자들 사이로, 코끼리 그림이 그려진 바지에 쪼리를 신은 사람들이 여유롭게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골목골목마다 튜빙이나 카약 등 액티비티 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여행객들은 길거리 상점에서 산 샌드위치를 먹으며 다음날 즐길 거리를 예약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유럽의 배낭여행자들에게 인기있던 방비엥은 지난해 ‘꽃보다 청춘’ 방영 이후로 한국사람들에게도 인기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거리에 나가보니 ‘꽃보다청춘’이 다녀간 곳이라는 글이 여기저기 보였다. 한국 관광객은 물론, 한국어로 쓰여진 간판과 메뉴판 그리고 한국여행사 등 여기가 강원도 어디 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툭툭이를 타고 방비엥의 첫 번째 숙소인 ‘리버뷰 방갈로’로 가다 보니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 레스토랑들이 쏭강을 따라 길게 늘어서있었다. 굳이 리버뷰를 예약하지 않아도 어디서나 리버뷰를 즐길 수 있는 셈이다. 객실에 누우면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야호!’를 외쳤다. 여기가 낙원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돌아다니는 관광지지만 여유롭고 한적했다. 소박한 미소를 가진 라오스 사람들과 시원하게 흐르는 쏭강, 그 강 뒤의 석회암 산들을 바라보며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다. 새벽녘에는 물안개가 잔뜩 핀 강가를 바라보며 라오 커피를 마셨다. 커피의 진한 맛과 단맛이 동시에 느껴지는 라오 커피를 마시자 마치 내가 신선계 풍경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현실적인 느낌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아침 9시는 방비엥의 러시아워였다. 액티비티를 예약하면 툭툭이가 숙소까지 손님을 태우러 온다. 대부분 여행객들이 액티비티를 즐기러 가기 때문에, 거리에는 머리 위에 카약이나 튜브를 가득 싣고 님을 태우러 다니는 툭툭이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툭툭이마다 손님을 가득 싣고 떠났다. 필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방비엥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블루라군은 소리치고 뛰어들고 싶은, 방송에서 본 그대로였다. 비트있는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은 연신 나무 위에 올라 다이빙을 했다. 잘 하는 사람보다 못하는 사람에게 관심이 쏠렸다. 나무 아래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다이빙 하는 사람들을 응원했다. 무서워서 망설이던 사람들도 구경꾼들의 응원을 받아 푸른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놀이동산 가면 바이킹도 못타지만 충동적으로 나무 위에 올랐다. 막상 올라 가니 발이 바들바들 떨리고 물이 까마득히 아래도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중국인 여행객이 웃으며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내왔다.
‘에이 모르겠다’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말을 안들었다. 움찔 하며 주저앉았다. 웃음과 박수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코를 쥐었다. 그리고 한 발을 허공에 내딛었다. 이번엔 성공이었다.
블루라군에선 70세 할아버지도 다이빙을 하고 10살 꼬마도 문턱이 닳도록 나무 위를 오르내린다. 파란 하늘 아래 어린 아이도 어른들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싱그러운 청춘이 됐다.
“여기 하루 더 있으면 안돼요?”
블루라군에서 형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바로가 방송에서 한 말이다. 필자가 딱 그 심정이었다. 아름다운 강변 레스토랑이 눈길을 끈 호텔로 가서 1박을 더 예약했다. 해질 무렵 강가에 앉아 영화에서처럼 멋진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화이트 타이거: 최강 전차군단(White Tiger, Белый Тигр)
러시아의 카렌 샤흐나자로프 감독이 만든 전쟁 영화이다. 주연에 비탈리 키시쳰코, 알렉세이 베르트코프, 블라디미르 일린이라는 사람들이 나오지만 알려진 배우들은 아니다.
배경은 2차 세계 대전이다. 소련이 베를린을 향해 진군해 나가던 시기였다. 소련군은 탱크에서 온몸에 화상을 입은 군인 한명을 발견한다. 신체의 90% 화상을 입게 되면 대개 사망하는데 이 병사는 놀랍게도 빠른 회복을 보인다. 그래서 소위로 임관되어 다시 탱크에 타게 된다. 이 무렵 독일군은 ‘화이트 타이거’라는 탱크가 신출귀몰하며 소련군 탱크들을 박살 낸다. 일반적인 탱크는 갈 수 없는 늪지대도 다니고 숨어 있다가 기습 공격도 해와 소련군이 베를린 진격하는데 큰 장애물이었다.
화상에서 복귀한 소련군 탱크병은 장교가 되어 화이트 타이거를 잡을 임무를 부여 받는다. 탱크들은 사람처럼 생명이 있어 탱크 세계에도 신이 존재하며 자신에게 화이트 타이거를 제거할 임무를 줬다며 몰두한다. 직속상관은 이 장교가 특별한 영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작전을 맡긴다. 과연 화이트 타이거의 기습 작전을 미리 알고 대비하여 대승을 거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타이거는 또 다시 종적을 감춘다. 소련군들은 화이트 타이거가 늪에 빠져 가라앉았을 거라며 안심하지만,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화이트 타이거는 아직 살아있다며 집요하게 추적한다. 폐허가 된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탱크는 보이지 않았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결국 건물 속에 위장해서 숨어 있던 독일군 탱크들을 박살낸다.
그러는 와중에 독일군은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 전쟁은 끝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탱크 장교는 화이트 타이거에 대비해야 한다며 탱크를 다시 손질한다.
이 영화는 전쟁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반길만한 작품이다. 모든 것이 실감나게 찍었다. 탱크들도 그렇고 포 사격으로 부서지는 장면 등도 그럴 듯하다.
드물게도 러시아 영화하는데서 더 관심이 간다. 러시아 영화는 음습하고 우울해서 미장센이 그럴 듯하다. 특히 전쟁 영화가 그렇다.
90% 화상으로 죽게 된 병사가 다시 살아났을 때는 몸 바쳐 적을 무찌르겠다는 오기가 생길 것이다. 온몸이 화상이니 살아 있어 봐야 존재 가치도 못 느낀다. 오로지 적을 무찌르려는 생각만 있다 보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신통력도 셍길 수 있을지 모른다.
독일군들은 패전했으나 뒷얘기가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을 악마라고 욕하겠지만, 전쟁은 다윈의 진화론처럼 인류에게는 필요악이며 자기네들이 악역을 맡았을 뿐이라고 한다. 누구나 싫어하는 유대인들을 대신 학살해 줬다고도 말한다. 유럽 통일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시도는 해봤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패전국인 일본인들도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 우익 정치가들이 옛 제국주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야욕을 키워가고 있는 점은 눈여겨볼 일이다.
한국인들에게 마케도니아에 대해 물어봤을 때 가장 먼저 연상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알렉산더 대왕의 고향? 아니면 마더 테레사가 태어난 곳? 하지만 이 답변은 소수의 마니아급들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말일 게다. 많이 낯설어서 설레는 나라, 바로 마케도니아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흐리드 호수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여러 여행지 중에서도 유럽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이 오흐리드(Ohrid) 호수 마을이다. 오흐리드는 세계역사문화유산(1979년)과 세계자연문화유산(1980년)으로 지정된 도시다. 오흐리드는 호수를 사이에 두고 알바니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필자는 알바니아 국경에서 택시를 타고 30km를 달려 오흐리드에 도착해 동상이 많은 선착장 광장 근처부터 여행을 시작한다. 올드 타운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비잔틴 방식의 정교회 건물에 깜짝 놀라게 된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오흐리드에는 한때 365개나 되는 교회가 있었고 현재도 ‘마케도니아의 예루살렘’으로 불린다. 엇비슷한 형태의 작은 교회 몇 개를 지나치자 웅장한 성소피아(St. Sophia) 교회를 만난다. 오흐리드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고 빼어난 중세 건축물로 손꼽힌다. 이 교회는 음향 설계가 잘 되어 있어 매년 오흐리드 여름 축제를 주최한다.
교회와 골목을 벗어나 절벽 호수 길을 따라 걷는다. 벼랑 밑으로 펼쳐지는 호수 풍경은 마치 바다와 같다. 그도그럴 것이 500만 년 전, 바다 밑이 솟구쳐 올라 만들어진 호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유럽에서는 가장 깊고(290m) 1년 내내 얼지 않는다.
*오흐리드 호수를 정원 삼은 교회와 수도원
호수 길, 벼랑 끝에 카네오 성 요한 교회(Saint John at Kaneo Church)가 그림처럼 걸쳐 있다. 13세기에 요한복음의 저자, 성 요한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교회에서는 14세기의 프레스코화(1964년 복원)와 20세기의 나무 성화 등을 볼 수 있다. 그것보다 이 교회는 오흐리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치를 보여준다. 확 트인 언덕받이에 저 홀로 호수를 정원 삼고 있는 비잔틴 양식의 교회. 교회 밑, 호수 위로 기선과 유람선이 호수의 물살을 가르며 유유히 교차하며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영화 은 이 아름다운 교회를 배경으로 촬영했다.
교회를 비껴 언덕으로 올라서면 9세기 말(893년), 오흐리드의 수호성인인 성 클레멘트(St. Clement)가 세운 성 판텔레이몬(Saint Panteleimon) 수도원이 있다. 이 수도원 자리는 슬라브족 최초의 대학이었다. 수도원을 예배당으로, 그리고 제자들에게 ‘글라골 문자’(Glagolitic alphabet)를 가르치는 학교로 사용했다. 글라골 문자란 마케도니아의 토어를 기초로 해 만든 최초의 슬라브 문자. 당시 슬라브족은 언어는 있었지만 문자가 없어 라틴문자를 차용해 사용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 출신의 키릴로스(Kyrillos, 826∼869)가 그의 형 메토디오스(Methodios, 815∼885)와 함께 알파벳을 토대로 슬라브 언어를 만든 것이다.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시절의 유적, 사무엘 요새
오흐리드의 가장 높은 곳에 사무엘 요새(Samuil's Fortress, 2003년 복원)가 있다. 성내에는 부서진 유적들이 흩어져 있고 아직도 발굴 중이다.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오흐리드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사무일 요새는 1차 불가리아 제국 시절 사무엘(958~1014 재위 980~1025) 왕에 의해 만들어졌다. 사무일은 인근 프릴레프의 귀족집 아들로 태어나 우여곡절을 겪은 후 불가리아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980년, 소피아 근처에서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2세(Basilius II, 958~1025, 재위 976~1025)를 격파한 후 불가리아의 ‘차르(왕)’로 정식 즉위한다. 마케도니아를 통치하다가 독립국 세르비아를 정복하고 나아가 불가리아 북부, 알바니아, 그리스 북부까지 세력을 확장시키고 ‘오흐리다’(오흐리드)에 수도를 정한다. 그러나 비잔틴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014년, 결국 벨라시차 전투에서 바실리우스에게 완패하고 말았다. 사무일은 고향 프릴레프까지 도망을 갔고 바실리우스는 불가리아인 포로들(1만5000명에 달했다고 함)을 장님으로 만들어 돌려 보냈다. 사무엘은 그 충격으로 죽었다는 설이 전해온다. 이 사건으로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록토누스(Bulgaroktonos, 불가르족의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불가리아 제국은 비잔틴에 병합되면서 1차 불가리아 제국은 사라진다.
*발길에 채이고 채이는 문화유적지의 보고
사무엘 요새에서 멀지 않은 곳에 BC 200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원형극장(Ancient Theatre)이 있다. 마케도니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리스 시대의 극장으로 현재는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오흐리드 여름 축제 등 여러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원형극장에서 다시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성 보고로디차 페리블렙타(St. Bogorodica Perivlepta) 교회와 이콘 갤러리가 있다. 1295년, 성모 마리아를 위해 세워진 이 교회는 성 클레멘트의 유해를 안치하고 있어, 성 클레멘트 교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묵은 향 가득한 골목길마다 오랜 역사의 사연이 풍겨나는 곳. 발길에 채이고 채이는 문화유적지의 보고인 호반의 도시 오흐리드. 꼭 가봐야 할 여행지다.
*Travel Data
항공편오흐리드 사도 성 요한 국제공항이 있다.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 알리탈리아, 아드리아, 코렌던더치, 세르비아 항공 등 총 8개 항공사가 취항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위스 취리히와 바젤, 벨기에 브뤼셀, 영국 런던은 직항이다.
교통편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마케도니아는 기차보다 버스 여행이 편하다.
음식 정보올드타운 입구에 있는 안티코(Antiko) 레스토랑은 상호처럼 옛 건물을 그대로 이용해 만들었다. 인테리어도 돋보이고 음식 맛도 좋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식으로는 게미스타(Gemista)가 있다. 그리스식 음식으로 피망, 토마토 속에 밥과 고기를 넣고 찐 음식이다.
특산품오흐리드 호수의 물고기 비닐로 윤기를 낸 진주 제품이 있다.
주변 볼거리오흐리드에서 멀지 않은 도시가 스트루가(Struga, 8km)다. 알바니아(20km)와 국경인 이 소도시엔 치미 드림(Crni Drim)강이 흐르고 토요일이면 대형 시장이 선다. 또 해마다 8월 말이면 국제 시 축제(SPE, Struga Poetry Evenings)를 위해 이곳으로 시인들이 몰려온다. 우리나라의 고은 시인은 제53회(2014년) 스트루가 시 축제에서 최고의상인 '황금화관상'을 수상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2014년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불량공주 모모코 (下妻物語)'. 일f본 코미디 드라마 영화이다. 원제는 ‘가마가제 소녀’인데 가미가제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고려해서 ‘불량공주’로 바꾼 것 같다. 감독은 나카시마 테츠야, 주연은 모모코 역에 후카다 쿄코, 폭주족 이치코 역에 츠치야 안나가 나온다. 네티즌 평점이 8.3으로 꽤 높다.
이 영화를 보면 일본은 과연 만화 공화국이고 사람들도 만화에 취해 사는 것 같다. 사람 사는 것은 어디나 비슷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보고 성인들도 만화를 많이 보는 일본은 만화처럼 사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만화 같은 삶을 나쁘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코미디 물이므로 가볍게 보면 된다. 모모코의 아버지는 베르사체 짝퉁 의류를 만들어 팔면서 재미를 좀 보았으나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시모츠마라는 시골로 잠수 차 이사 간다. 이 동네 사람들은 촌이라 편한 추리닝을 선호하여 늘 추리닝 바람이다. 어지간한 옷도 동네에 유일한 마트인 자스코에서 사 입는다. 그러나 모모코는 다르다. 고등학교 2학년이다. 유럽 중세 로코코 풍의 드레스를 좋아해서 언제나 양산을 쓰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는다. 그런 옷을 사기 위해 아버지에게 거짓말도 해가며 용돈을 타내고 동경까지 가서 그런 옷을 구입해 입는다.
아버지가 짝퉁 판매하다가 재고로 남은 옷들을 모모코가 인터넷에 내 놓는다. 인터넷 광고를 보고 찾아 온 여인은 여자 스쿠터 폭주족의 일원인 이치코이다. 거친 말투와 외모까지 모모코와는 정 반대의 여자이다. 불량배들처럼 침을 칙칙 내 뱉고, 박치기 공격을 하지 않나, 자수를 곁들인 특공복 패션을 하고 다닌다.
이치코는 폭주족의 리더가 결혼한다며 송별폭주 행사에 참가하려는데 리더를 위해 특공복에 전설의 자수명인 자수를 놓겠다며 자수 명인을 찾아다닌다. 돈이 필요하니 빠찡코에 갔는데 엉뚱하게도 모모코가 대박을 터뜨린다. 주인이 속임수를 썼을 거라며 트집을 잡자 앞머리를 길게 한 이상한 모습의 남자가 나타나 모모코 편을 들어준다. 이치코는 이 남자를 첫사랑의 대상자로 찜한다.
모모코는 동경에 간 김에 수제 로코코 드레스 점에 자주 간다. 한번은 벌레 먹어 모자에 구멍이 여러 군데 생겨 손수 자수로 구멍을 활용했다. 그걸 본 점원이 사장에게 얘기하고 사장은 모모코의 재주를 알아본다. 그래서 샘플로 제작한 하얀 드레스에 장미 자수를 놓아달라고 부탁한다.
전설의 자수 명인을 찾아 다니던 모모코와 이치코는 전설의 명인은 가상 인물일 거라며 찾기를 포기한다. 그 대신 어릴 때부터 자수에 소질을 보인 모모코에게 특공복 자수를 부탁한다.
로코코 드레스의 장미 자수가 다 되어갈 무렵, 이치코에게 위기가 생겼다. 빠찡코에서 자기네들 편을 들어준 앞 머리 긴 남자가 폭주족 두목의 남자로 결혼한다고 발표하자 좌절하며 탈퇴를 선언한다. 동료 폭주족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려는 순간에 모모코가 스쿠터를 몰고 나타난다. 야구배트를 하나씩 든 집단 폭행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모모코는 자신이 전설의 자수 명인 딸로서 기법을 전수 받아 이치코의 특공복에 자수를 놓아준 것이라며 분위기를 장악한다. 그 덕분에 이치코와 모모코는 스쿠터로 그 현장을 빠져 나온다. 이치코는 그 후 모델로 성공하고 모모코는 로코코 드레스 회사와 손잡고 일한다.
모모코의 아버지는 짝퉁 옷을 만들어 팔다가 낭패를 본 사람이다. 술집 골목에서 좌절하여 신세타령을 할 때 술집에서 튀어나와 토하던 모모코의 어머니가 눈이 맞아 바로 결혼한다. 모모코를 임신하여 출산 후 얼마 안 가 가출하고 이혼장을 보낸다. 미모가 출중하여 미인대회에도 나간다. 모모코는 치매 초기의 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란다. 학교에서도 왕따이고 동네에서도 별난 드레스 때문에 손가락질 당한다.
이 영화는 만화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들이 보기에 유치하지 않고 재미가 있다. 일본의 정서를 읽는 것 같다. 폭주족 문화는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우리나라 폭주족들도 그런 인식에서 보면 이해할만 하다. 모모코는 별난 드레스 때문에 왕따이지만 자기 세계를 고집한다. 그런 점이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타는 자원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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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와 카페 운영과 각종 SNS 활동에 집중하는 평화사랑 성경애의 ‘‘미니 자서전’’을 적어본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건강 때문에 일찍 퇴직하면서 시작한 사업에 실패한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일찍 철이 들어 동네 아이들 과외선생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하게 됐고 대학 시절까지 모두 자신의 힘으로 학비를다 해결한 의지의 한국인이 필자다.
처음에 블로그 만들 때 블로그 이름이 ‘평화사랑 전 과목 블로그’’였다. 초중등학생 전 과목 과외 선생 노릇을 했던 것을 기억해 그렇게 지었다.
그 와중에도 노래는 좋아하여 숭의여고 시절 합창단 활동을 하였다. 아침에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일찍 가고 점심은 미리 알아서 먹고 점심시간 시작 5분안에 음악실로 모여서 연습했던 갓이 여고 시절 기억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다시 짓기 전 시민회관에서 공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합창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준 공연이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때는 얼마나 귀한 시간, 아름다운 시절인 것을 몰랐다는 것이 안타깝다.
졸업 후 학자금 모아서 숭의여전 보육과와 경기대행정학과를 나오고 나니 이미 나이가 들어서 결혼하게 되었다. 필자는 사실 서울예대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성삼문 집안에 딴따라가 웬 말이냐고 반대하여 포기했다. 난 연예인 끼가 있다. 그때 우기고 갈 것을 하는 맘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마추어 영화 전문가분들과 모이고 있고, 워낙 활동적인 성격이라 동네 통장 10년을 하고 아파트부녀회장도 지내는 등 주변을 돌아보는 봉사활동 열심히 하고 있다.
결혼 후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기업체 주부모니터를 하게 되었다. 기업체는 기혼 여성직원이 있지만 그들에게서 쉽게 알아낼 수 없는 의견도 있어 일반 전업주부를 대상으로 물건에 대한 의견을 모니터링 하는 데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미니 자서전을 쓰면서 확인해 보니 기업체에서 발대식하고 위촉장을 받은 것만 33개 정도 되었다. 임기가 1년에서 짧아도 참여한 세월이 있어 위촉장이 꽤 쌓인 것이다. 거기에다 활동우수상, 수상표창장까지 상당히 많아서 거실 가득히 깔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하는 맘이 든다.
필자는 열성적으로 살아왔다.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는 달에는 뭔가 무료교육을 받는 것 좋아하고 비용이 들어가도 발전적인 항목이 있으면 배우기를 즐긴다. 네이버 밴드와 네이버 카페, 각종 카톡방 활동과 오프라인 모임까지 이웃이나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분들과 소통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1 년 이상 네이버 자회사 시니어 기업인 에버영코리아라는 곳에서 밤 근무한 경험도 있다. 밤에 근무하던 어느 날 칸칸이 처진 내 모니터와 키보드와 마우스밖에 없는 그곳에서 필자는 빅뱅의 ‘루저’를 들으면서 눈물이 쭈르륵 흘렀다. 루저의 뜻은 loser와 user의 합성어. 무엇을 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 즉, 어찌할 바를 모르는 초보자 내지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루저’의 가사는 이렇다. ‘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솔직히 세상과 난/어울린 적 없어/홀로였던 내겐/사랑 따윈 벌써/잊혀진 지 오래/저 시간 속에/더 이상은 못 듣겠어/희망찬 사랑 노래/너나 나나/그저 길들여진 대로/각본 속에 놀아나는/슬픈 삐에로/난 멀리 와버렸어/I’M COMING HOME/이제 다시 돌아갈래/어릴 적 제자리로/언제부턴가 난/하늘보다 땅을/더 바라보게 돼/숨쉬기조차 힘겨워/손을 뻗지만/그 누구도/날 잡아 주질 않네 I’M A//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반복되는/여자들과의 내 실수/하룻밤을 사랑하고/해 뜨면 싫증/책임지지 못할/나의 이기적인 기쁨/하나 땜에 모든 것이/망가져 버린 지금/멈출 줄 모르던/나의 위험한 질주//이젠 아무런 감흥도/재미도 없는 기분/나 벼랑 끝에/혼자 있네/I’M GOING HOME/나 다시 돌아갈래/예전의 제자리로/언제부턴가 난/사람들의 시선을/두려워만 해/우는 것조차 지겨워/웃어보지만/그 아무도 날/알아주질 않네 /I’M A/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저 하늘을/원망하지 난/가끔 내려놓고 싶어져/WANT TO SAY GOOD BYE/이 길의 끝에/방황이 끝나면/부디 후회 없는 채로/두 눈 감을 수 있길/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LOSER/I’M A LOSER/I’M A LOSER/I’M A LOSER
다시 젊은 시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사실 없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다면 공부할 집안 형편이 아니어서 대충 포기한 공부를 열심히 해보고 싶다. 그래서 지금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지 모른다.
요즘은 동영상 프로그램을 인터넷에 접목하기 위해 배우러 다니고 있다. 노력하는 자세로 인생을 살는 필자는 자신도 궁금하고 기대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칠 때도 있다. 그러나 우울하게 다운되면 한도 없는 게 인생이다. 키도 작고 몸무게는 표준보다 많이 나가 여러 면에서 부족한 사람인데 루저가 안되려고 노력하다 여기까지 왔다.
자식이 낳아달라고 말한 적이 없다. 어떤 제츠추어로도 표한 적이 없는데 필자 부부 맘대로 낳았기에 그 아이들에게 힘이 못될망정 짐은 되기 싫다. 그래서 열심히 산다. 이유는 그거 하나로 충분하다.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오늘을 더 열성적으로 살아가려고 다시 마음을 다져 잡는다. 그러니 다가올 인생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플랜트커피에서 커핑수업
M.I커피: 라떼아트
2급바리스타: J클래스학원
1급바리스타: 훈스랩아카데미
커피지도사2급+홈카페마스타 (브루잉마스타2급) : CBS문화센터
커피지도사1급 : 서울바리스타학원
강사/커피지도사 워크숍 수료
그외 루소랩이나 어라운지, 커피미업 김동완씨에 수업받은 경력이 있고 계속 커피를 배우는 중이다. 언제가 장점을 따서 커피아카데미카페를 만들고 싶다.
한국커피협회 1,2급 커피지도사/바리스타1,2급 취득
유럽 바리스타
SCAE(Speciality Coffee Association of Europe)자격증
SCAE Foundation /SCAEIntermediate/SCAE Professional
아이로봇 룸바 서포터즈(로봇청소기),
CJ홈쇼핑심미안(생활팀 2회, 디지털팀1회, 뷰티팀 1회)
: 참고로 한 번 활동하기도 매우 어려운 전설의 모니터 활동
중앙일보 리포터 3번 연임 후 명예리포터 활동, 중앙일보 명예통신원 회장
AVING코리아 객원기자, 구로소식지 기자 , 구로구인터넷방송 명예기자
uasis웹진기고, 아줌마닷컴 1기 기자단장 및 기사제공이나 아이디어 제공
다양한 기업 및 관공서의 패널, 서포터즈, 모니터, 주부모니터와 리포터:한국전력 패널, 국민보건보험공단, 서울시 모니터, 서울시 블로거, 도시철도공사 등
대한민국영화대상 일반심사위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 파트너즈 시니어 리더 4기
은퇴 후 생산적인 인터넷활용 강사: 블로그와 SNS
네이버 자회사 에버영코리아 업무 경험, 2014 2015년 서울 카페쇼 홍보대사
LG 서포터즈, 삼성 카메라 WB5000 체험단, 삼성하우젠 제로에어컨 체험단
프레소 스마트로스터기 체험단, 가찌야클래식 커피머신 체험단,어라운지서포터즈
세일즈커피 서포터즈, 마일커피로스터스 온라인 서포터즈,
웰크론 온리빙 마케팅팀서 활동
이투데이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단
홈앤톤즈(삼화페인트 프리미엄급 페인트) 마케팅팀
프레소 서포터즈1기와 국민건강보험공단 모니터
애초에 엄두를 낼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올 여름 행선지는 ‘방콕’으로 정하고 서울에서 버틸 작정이었다. 그런데 딸애가 이미 자유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여행에 필자를 끼워준다니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다. 그런데 자유여행은 돈이 많이 든다는 고정관념으로 살짝 걱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리저리 절약할 구석을 찾아본다면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혼자는 이런 재주를 부릴 재간이 없다. 마침 검색과 계획의 달인인 둘째 딸이 있어 그 덕을 톡톡히 본다. 낳았을 때 ‘또 딸’이라 섭섭하고 슬프기까지 했던 그 딸 덕을 이렇게 볼 줄 그때는 미처 상상도 못 했다. 그 애는 하도 검색을 잘해서 우리 집에서는 ‘다이버’라 부른다. 네이버에 운율을 맞춘 별명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돈 쓰는 방법도 우리 때와 다르다. 몹시 아끼면서도 시간과 안락함을 돈으로 대신할 때에는 아낌없이 쓴다. 우리 세대가 2번 할 것을 1번 하더라도 제대로 즐기겠다는 심사다. 그래도 절약할 방법은 여기저기 잘도 찾아낸다. 그것은 검색과 마일리지 쌓기다. 마일리지 쌓기야 우리도 어렴풋이 따라 하겠지만, 검색은 도통 흉내 내기도 어려운 일이니 일찌감치 단념하는 것이 좋다.
간혹 컴퓨터와 씨름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자발적 도움을 줄 때도 있지만, 그것도 그들이 한가할 때 이야기지 코빼기도 볼 수 없이 바쁠 때는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처럼 동행일 때에는 가만히 있어도 알뜰살뜰한 딸의 여행계획에 감탄과 칭찬의 대가만 치르며 따라나서면 그만이다.
우선 우리는 동남아 중 물가가 싼 태국의 방콕으로 여행지를 잡았다. 태국의 하고많은 여행지 중 왜 고작 방콕이냐고 의아해하겠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패키지여행의 단골 메뉴인 코끼리 타기, 악어농장, 게이 쇼, 사원 탐방 등은 이미 다 해보았고 빳따야 푸껫은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우리나라 해변만 못하다. 그러니 편하고 좋은 곳은 우리나라도 서울이듯이 태국도 방콕이다. 약간의 문화적 혜택도 즐길 수 있고 맛있는 음식도 그곳에 있다. 어느 할아버지 말처럼 “해외여행 뭐 별거 있어. 유럽은 성당만 보러 다니고 동남아는 맨 절만 끌고 다니”는 패키지여행에는 이제 좀 신물이 나기도 했다.
비행기와 호텔 예약은 2달 전쯤 하면 거의 1/2 가격이면 된다. 물론 7월 15일부터는 성수기라서 비행기 요금이 오르니 휴가 기간은 그 전에 잡는 것이 좋다. 특히 태국 여행의 경우 팝콘 여행사나 몽키 트레블을 통해 사는 것이 싼 편이다.
여러 날 한 호텔에 묵을 경우 여러 가지 혜택도 끼워주는 프로모션도 까다롭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어떤 때는 값이 약간 비싸도 프로모션이 많아 더 이익인 경우도 있다. 두 달 후라서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으니 되도록 취소 가능한 것을 고르는 것이 좋다. 취소할 때 위약금이 있나 없는지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변화를 준다고 이 호텔 저 호텔 나눠서 이용하는 것보다 한 호텔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두 호텔을 사용하면 프로모션도 제대로 받을 수 없고 체크인 체크아웃으로 하루를 그냥 까먹기 십상이다. 그 외에도 호텔이나 비행사 결정은 먼저 이용한 사람들의 댓글이 큰 도움이 된다. 방콕에 가서도 검색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유심칩(USIM chip)을 사서 바꿔 끼면 지금 쓰는 휴대전화가 잠시 태국 전화가 되는 셈이다.
아! 이 그칠 길 없는 검색의 자유여행을 나는 다이버만 믿고 떠났다. 그 다이버가 말했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어요. 어릴 때 만화나 공상 영화에서 보던 것이 다 현실이 되었어요. 제가 늙으면 어떤 세상이 될까요?” “인공지능 로봇이 가이드가 되는 세상이 되면 여행이 더 즐거울까?”
시니어들의 ‘손주 사랑’은 세계 공용어다. 영화 의 할머니는
“이 나이에 기다리는 것은 손주와 죽음이다”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또 “난 죽으면 손주의 애완 고양이로 태어날 거야”라는 대사도 나온다.
이 영화 말고도 손주를 통해 ‘웬수’가 된 아들과 화해하는 장면은 부지기수다.
올 여름, 빈센트 반 고흐가 희망과 꿈을 갖고 떠난 ‘아를’로 손주와 함께 떠나보자.
손주와 ‘론’ 강변을 걸으며 ‘별 헤는 밤’의 그림 이야기를 꽃피우면서
그곳에 추억을 남겨놓자.
손주의 여행 경험은 향후 엄청난 학습효과를 갖게 될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가 사랑한 남부 프랑스
프랑스 남부지역의 프로방스는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이다. 특히 프로방스는 많은 시인, 화가, 영화 예술가가 사랑한 도시다. 프로방스의 매력에 빠진 예술가들은 평생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소설, 시, 그림 등으로 남겼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가 고향인 폴 세잔, 코트다쥐르의 생폴 드 방스(Saint-Paul de Vence)는 샤갈, 피카소도 좋아했고 6개월간 안티베(Antibes)에 머물기도 했다. 르누아르가 노년을 보냈던 르누아르의 집, 레 콜레트(Renoir’s House, Les Collettes)는 카뉴 쉬르 메르(Cagnes Sur Mer)에 있다. 모딜리아니는 니스를 무척 사랑했다.
또 주옥같이 아름다운 소설인 , 의 저자인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는 아를과 가까운 님(Nimes)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을 일찍 떠나 파리에 살면서도 프로방스에 대한 애정을 평생 안고 살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고향 프로방스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프랑스의 극작가 겸 영화제작자 겸 영화감독인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의 작품에도 어김없이 프로방스가 등장한다. , 등 영화 속에 프로방스가 담겨 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는 “가장 아름다운 곳은 프로방스였다. 당신도 언젠가 꼭 한번 그리로 가봐야 한다”라는 편지를 썼고 그는 마지막 거처를 프로방스에 마련할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죽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프로방스의 아를(Arles)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래서 아를은 ‘고흐의 마을’로 불린다. 많은 관광객이 아를로 몰려 드는 이유는 고흐를 만나기 위함이다.
로마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2000년 古都
아를은 테제베 고속열차가 멈추지 않는 작은 역이다. 역에서 1km 떨어져 있는 마을로 들어서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부서진 로마의 유적 때문이다. 고흐의 그림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은 이 생경한 문화 유적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때도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을 문화 유적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건축물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투우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을 뿐이다.
아를은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다. 그리스의 식민지였다가 시저(Julius Caesar)에 의해 로마령이 되었다. 긴 세월동안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반질거리고, 울퉁불퉁한 조약돌로 된 골목길과 부서진 성벽 등이 온 마을을 장식하고 있다. 마을 제일 높은 곳에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Arenes)와 기둥만 남아 있는 원형 극장이 있다. 아레나에서는 매년 투우 축제(4, 9월)가 열린다. 또 이 마을은 초기 기독교 시기의 중요한 거점도시였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의 길을 시작하는 곳 중 하나로 중세 건축물인 생 트로핌(Saint-Trophime) 대성당이 남아 있다. 11세기에 창건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에서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새겨 놓은 부조와 조각을 볼 수 있다. 구시가지 한가운데 자리한 리퍼블릭 광장에 삼색기가 휘날리는 아를시청사가 있다. 그 앞에는 아를에서 제일 높은 시계탑과 2000년 전 로마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솟아 있다. 이 도시의 로마 유적지는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를 골목에서 고흐의 작품 현장 찾아내기
오래된 가옥과 골목을 헤집다 보면 포룸 광장에서 ‘고흐 카페’를 만나게 된다. 고흐가 즐겨 썼던 노란색으로 칠한 카페는 ‘고흐’란 화가의 이름을 파는 상술을 펼치고 있다. 그가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The Night Cafe in Arles)’ 그림을 안내대처럼 세워 놓았다. 유독 그 카페만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카페 주변에는 피카소, 장 콕토 등이 자주 묵었던 낡은 호텔이 있다.
고흐는 이 카페 근처에 일명 ‘노란집’을 얻어 놓고 이곳을 매일 밤 찾았다. 카페에 앉아 늘 ‘녹색요정 압생트’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렸다. 고흐는 친구 고갱이 오길 기다리면서, ‘아를의 여인-지누부인’(1888년)을 그렸다. ‘아를의 여인’이라는 제목은 고흐 이전에 알퐁스 도데가 첫 단편집에 쓴 ‘아를의 여인(L' Arlesienne, 1872년 작)’이 있다. 이 작품을 다시 각색해 3막 5장의 희곡을 발표했는데 당대 잘 나가던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가 극장 상연에 쓰일 부수음악 27곡(관현악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같은 제목의 글, 그림, 음악이 만들어진 곳이 아를이다.
또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에는 ‘아를 병원의 정원’이라는 그림이 있다. 고흐가 1888년 12월, 자신의 귀를 자르는 발작 이후 머물기를 반복했던 병원으로 현재는 문화센터로 바뀌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엔 론 강으로 가서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보자. 고흐가 생레미 드프로방스의 한 요양원으로 옮겨진 후에 그린 그림으로, 아름다웠던 아를의 기억을 되살렸을 것이다. 지금 고흐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은 론강의 어둠 속 끝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난다. 그 외에도 ‘열두송이의 해바라기’와 ‘아를의 다리(도개교로 링클루아 다리)’ 등도 모두 아를에서 그렸다.
현재 아를에는 ‘반 고흐 파운데이션’이 있다. 하지만 기대는 말아야 한다. 고흐의 작품은 거의 볼 수가 없고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과 어릴 적 고흐와 동생 테오의 사진 등 몇 점만 볼 수 있다. 고흐의 고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 박물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예술촌을 꿈꾸던 화가는 고갱을 만나 미쳐 버리고
고흐는 1888년 2월, 아를에 예술촌을 만들겠다는 부푼 꿈을 꾸고 이곳에 방을 얻는다. 파리에서 뜻이 잘 통했던 고갱이 오기를 기다렸고 오기 전까지 방을 꾸미고 마음이 들뜬 채로 지냈다. 하지만 같이 살면서 극단적인 성격 차이로 싸우게 된다. 결정적으로 화를 돋구게 된 것은 고갱이 그린 자화상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서로 자화상을 그리기로 했는데 고갱이 그린 그림 속에는 고흐는 없고 고갱이 앉아 있었다. 그림 속 고갱의 콧수염은 고흐의 붉은 콧수염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크게 싸웠고 분에 겨운 고흐는 집으로 돌아가 한쪽 귀를 잘라 버린다. 자른 귀를 싸들고 술집 여자에게 갖다 주었고 그녀가 경찰에 신고를 해서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흐가 꿈꿨던 예술촌의 꿈은 그렇게 두 달 만에 끝났다. 고흐의 발작은 더 심해져 근처 생레미 정신병원(1889년 5월)에 입원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발작이 없을 때면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병원에서 약 15개월간 머물면서 187점에 이르는 그림을 남겼다. 분명히, 고흐가 아를을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아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라고 보냈다.
고흐는 1890년 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에서 자살한다. 고흐는 테오의 가족이 찾아온 이후 밀밭에 가서 총을 쏘고 집으로 겨우 기어 들어와 이틀 만에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테오가 형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 테오는 “조카도 생기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더는 형의 생활비를 대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동안 고흐는 그림들을 테오에게 보냈고 그 대신 생활비를 받았다. 살아생전 단 한 점밖에 못 판, 생활 능력 없는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을까? 사랑을 주고 싶지만 줄 사람도 없고 정신병을 앓고 있는, 희망없는 삶.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죽음’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고흐 나이 37세였다. 오베르에 머문 지 두 달 되던 때였다. 이후 동생 테오도 6개월 뒤 매독에 걸려 죽는다. 두 사람의 묘지는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 앞에 있다.
고흐의 삶은 그 어느 창작자가 일부러 만들어 내기도 어려울 만큼 드라마틱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고흐에 대한 영화나 책 등을 미리 보고 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열연한 영화 과 BBC 다큐인 폴 고갱의 이라는 작품을 추천한다. 아를에서의 고흐와 고갱의 생전의 삶을 알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2014년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